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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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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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헌공15세손 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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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雪齋書院建祠記


忠肅王 十七年庚午(1330) 六月에 忠宣王 寢廟에 文靖公 鄭可臣과 忠正公 洪子藩을 配享함.(京畿道 麻田縣 忠宣王廟에 公을 配享하니 지금도 있다.)


文靖公 神主祭盡에 不祧로 宗家廟에 奉安하고 지나간 肅宗 戊辰年(1688)에 여러 宗人이 合議하여 祠宇를 金鞍洞 溪北에 세우고 癸酉年(1693)에 祠宇가 完成되어 神主를 移安하고 公의 五代孫 景武公의 御賜畵像을 配享하였고 辛卯年(1711) 가을에 神主位板就正事로 後孫 道淵을 尼山尹酉峯에게 보내어 묻게 하니 酉峯이 文靖公의 後孫임을 聞知하고 喜顔으로 맞아드려 말하기를 우리 兩家는 先世交誼가 있는데 雪翁의 後孫이 어느 곳에 있는 줄을 알지 못했는데 지금 다행이 찾아주니 기쁘고 다행함을 이기지 못한다.

하고 책장위에서 한 冊子를 꺼내어 보이니 三賢堂 事實이 詳細히 記錄되었으며 또 말하기를 此世에 公論이 없어 이 지경이 되었으니 先生을 享祀하지 못한 것은 斯文의 不幸이 아니겠는가 하고 같이 헤아려 定하고 돌아와 그해 겨울에 洞議가 齊發하여 洞祠宇를 만들고 壬辰年(1712) 여름에 一鄕이 踵起하여 鄕祠宇를 만들고 癸卯年(1723)에 京中儒林이 院長으로 藥峯沈尙書 檀定을 請하고 京中의 有司 三十三人이 道內에 通文을 發送하여 書院을 永安村으로 移建하였다.

 

書院(서원)復設(복설)事實(사실)

高宗(고종)戊辰年(무진년)(1868) 大同毁撤(대동훼철)후 85年(년) 癸巳(계사)(1953)에 士論(사론)이 齊發(제발)하여 舊書院(구서원)을 復設(복설)하고 滄洲公(창주공) 慶源公(경원공) 竹友堂公(죽우당공) 三先生(3선생)을 從享(종향)하였음.

 

禮成祝文(예성축문)(九位)

恭惟先生山河間氣高明傑特正大剛毅漢晉人物鄒魯禮樂大揚皇庭謀猷密勿
                                                                                                       雪齋先生(설재선생)

[역문]예성축문
공경하옵건데 先生(선생)은 山河(산하)의 精氣(정기)를 타고 낳았도다. 高明(고명)하고 傑特(걸특)하며 剛毅(강의)하도다. 漢(한)나라 晉(진)나라 人物(인물)이요, 鄒(추)나라 魯(노)나라의 禮樂(예악)이로다. 크게 中國(중국)朝廷(조정)에 드나들며 일을 꾀하여 機密(기밀)에 參與(참여)하였도다.

[역문]
伏以(복이) 三不義軒先生(삼불의헌선생)은 魁傑(괴걸)의 資質(자질)로 剛直(강직)自守(자수)하고 早從師友(조종사우)하니 治老江叟(치노강수)라 見譽天陞(견예천승)하여 志專輔主(지전보주)라 廟堂(묘당)至理(지리)요 風俗(풍속)盡淳(진순)이리 才步超古(재보초고)하여 德洪照人(덕홍조인)이라 持衡藻鑑(지형조감)이요 聽履星斗(청이성두)라 北斗喉舌(북두후설)이요 東方縉紳(동방진신)이라 盛滿之戎(성만지융)에 謝退勇功(사퇴용공)이라 養性進道(양성진도)요 獎進學閥(장진학벌)이라 需世經綸(수세경윤)이요 超世自別(초세자별)이
                                                                                                                  三不義軒先生(삼불의헌선생)

[역문]
巖軒申公(암헌신공)은 高靈申氏(고령신씨)로다. 錦城(금성)에 머물러 살으시니 一葉(일엽)이 靑靑(청청)하도다.
異性三寸(이성삼촌)은 永慕亭(영모정)이로다. 하늘에서 거듭 기쁨나리니 代代(대대)로 蕃昌(번창)하리라. 

                                                                                                                    巖軒先生(암헌선생)

[역문]
錦城山(금성산)이 하늘까지 峻極(준극)하네. 크도다. 雪翁(설옹)이여 山神靈(산신령)이 나렸도다. 처음부터 빛이나 독실한 賢良(현량)을 낳았도다. 朝廷(조정)에 威嚴(위엄)을 세우니 임금이 임금으로써 만족하도다.

溫宮(온궁)에 扈駕(호가)하여 博火服戎(박화복융)이로다. 임금을 업고 禍(화) 를 免(면)하니 수염이 다 타졌네. 임금께서 가상이 보시고 肖像畵(초상화)를 내리니 榮華(영화)로웠네.
                                                                                                                永慕亭先生(영모정선
생) 

[역문]

默齋先生(묵재선생)鄭公(정공)은 文靖(문정)과 景武(경무)의 鉅閥華裔(거벌화예)로 胚胎前光(배태전광)이라 其考思禮(기고사례)에 純孝根天(순효근천)이라 養親志軆(양친지체)요 孝于尤䔍(효우우마)이라 戒愛二弟(계애이제)요 聞風士類(문풍사류)라 稱其䔍行(칭기마행)하여 薦達天陞(천달천승)에 特蒙恩聽(특몽은청)이라 爲郡訓長(위군훈장)에 觀獎分明(관장분명)이라 今以吉辰(금이길진)에 虔奉禮成(건봉예성)이라 伏惟尊靈(복유존령)은 是憑是寧(시빙시녕)이라  
                                                                                                                   默齋先生(묵재선생)

[역문]
赫赫(혁혁)한 鄭氏(정씨)여 東邦(동방)에 의뜸이로다. 진실하도다.
文靖(문정)이여 꾀로서 皇帝(황제)를 도와 重用(중용)되도다. 景武(경무)여 王朝(왕조)의 羽翼(우익)이로다.
公(공)이 집에서 出生(출생)하니 짐을 맡되 틀림이 없었도다. 孝(효)를 옮겨 忠(충)을 하니 백성을 근심하고 나라를 근심하였도다.

                                                                                                                     逸軒先生(일헌선생)

[역문]
아름답다 滄翁(창옹)이여 河嶽(하악)의 精靈(정령)이로다. 文靖(문정)이 집을 짓고 景武(경무)가 丹靑(단청)했네.
公(공)께서 이어 받으니 法家(법가)의 拂士(불사)로다.
龍門(용문)에 奮袍(분포)하니 蜚英(비영)했네. 容儀(용의)가 端雅(단아)하니 임금 얼굴기뻐하네.
治民(치민)에 德(덕) 있으니 敎化(교화)가 州府(주부)에 넘쳤네. 

                                                                                                                   滄洲先生(창주선생)

[역문]
크도다 鄭公(정공)이여 錦城(금성)의 名家(명가)로다. 洪洪(홍홍)하고 碩碩(석석)하니 世德(세덕)이 매우 아름답도다.
文(문)은 韓愈(한유)와 柳宗元(유종원)을 따르고 武(무)는 孫武(손무)와 吳起(오기)를 이었네.
壬辰(임진)을 當(당)하여 친히 王命(왕명)을 받들었네. 

                                                                                                                   慶源先生(경원선생)

[역문]
높은 저 錦城(금성)이여 鄭公(정공)의 고향이네.
中葉一表(중엽일표)에 竹友(죽우)가 빼어났네. 秋水(추수)의 精神(정신)이요 春風(춘풍)의 和氣(화기)로다.

직분은 孝友(효우)에 근본하고 富貴(부귀)는 浮雲(부운)이네. 林樊(임번)에서 道理(도리)를 講(강)하고 後裔(후예)들을 啓牖(계유)했네.

畸翁門(기옹문)에 놀면서 道義契(도의계)가 되었네. 南漢(남한)의 소식 듣고 깃대 세워 義(의)를 걸었네.

                                                                                                      竹友堂先生(죽우당선생) 

[역문]
書院復設事實

高宗戊辰大同毁撤後八十五年癸巳士論齊發
復設舊院以滄洲公慶源公竹友堂公三先生從享焉

서원복설사실
고종무진대동훼철후팔십오년계사사론제발
복설구원이창주공경원공죽우당공삼선생종향언

 

[역문]
書院復設事實(서원복설사실)
高宗戊辰年(고종 무진년 1868) 大同毁撤(대동훼철)후 85年(년) 癸巳(계사1953)에 士論(사론)이 齊發(제발)하여 舊書院(구서원)을 復設(복설)하고 滄洲公(창주공) 慶源公(경원공) 竹友堂公(죽우당공) 三先生(삼선생)을 從享(종향)하였음.

 

[역문]雪齋(설재)祠宇(사우)碑銘(비명)
肅宗(숙종)十四年(십사년)戊辰(무진)(1688)에 士林(사림)이 文靖公(문정공) 雪齋(설재)鄭先生(정선생)祠宇(사우)를 貫鄕(관향)인 錦城(금성)에 建立(건립)하고 朝廷(조정)에서 雪齋(설재)란 扁額(편액)을 卞賜(변사)하였으며 그 후 六年(년)만인 癸酉(계유)年(년)(1693)에 文靖公(문정공) 五世孫(세손)인 景武公(경무공)을 從享(종향)하니 兩世(양세)의 俎豆(조두)가 불빛처럼 사람들 耳目(이목)에 환하니 鄕黨(향당)과 州閭(주려)에서 권장하며 법 받게 하니 父老(부노)와 어진이 들이 歎息(탄식)하여 말하기를 學問(학문)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學問(학문)은 또한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으리오. 가깝게는 事親(사친)하고 멀리는 事君(사군)하고 세우면 節義(절의)가 되고 뽑으면 事功(사공)이 되며 드리우면 遺風(유풍)이 되어 餘韻(여운)이 百世(백세)토록 사람들 興起(흥기) 시킨 것이 모두 이 물건이다.

鄭氏(정씨) 兩公(양공)의 事實(사실)을 보건데 文靖公(문정공)은 文章(문장)과 德行(덕행)으로서 高麗(고려)時代(시대)에 나타나니 처음 벼슬하여 朝廷(조정)에 나가니 이미 臣儒(신유)의 指目(지목)이 있었고 이어 벼슬을 이루고 이름을 세웠으되 오히려 손수 金鏡錄(금경록)을 저술하여 性理(성리)의 學(학)을 倡明(창명)하였으며 公(공)이 退闕(퇴궐)한 틈에는 金文肅(김문숙) 周鼎(주정)과 尹文顯(윤문현) 珤(보)로 講論(강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이것이 그분의 入朝(입조)時(시)의 本末(본말)이니 韙然(위연)하여 가히 볼만하다.

奸人(간인)인 李汾禧(이분희)가 忠良(충량)을 讒斥(참척)하니 義理上(의리상) 같이 있을 수 없다하여 上疏(상소)하여 돌아가기를 빌었으며 詠雲詩(영운시)를 지어서 諷刺(풍자)하기를 『장마비는 群稿(군고)를 소생시킨다고 하였는데 속절없이 中天(중천)에서 日月(일월) 밝은 것을 가전구나』하였으니 詞義(사의)가 凜然(늠연)하며 承旨(승지)가 되어 諸道(제도)의 按廉使(안염사)를 論(논) 하니 백성들에게 거두어 權貴(권귀)를 섬기니 自己(자기) 自身(자신)이 不心(불심)하고 어찌 능히 사람을 올바르게 할 것인가 하고 모두 그 죄를 公正(공정)하게 밝힐 것을 請(청)하였으며 日本(일본)이 邊墳(변분)을 犯(범) 함에 尹秀吉(윤수길)이 선비도 隊伍(대오) 編成(편성)할 것을 議論(의론)하니 公(공)이 反駁(반박)하여 말하길 道袍(도포)입은 선비를 갑옷을 입히고 兵器(병기)를 잡게 할 것을 先王(선왕)의 선비를 높이고 道(도)를 重(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라 하고 임금께 아뢰어 罷(파)하게 하였으며 當時(당시) 天變(천변)이 있어 伍允孚(오윤부)가 設醺消災(설훈소재)하기를 請(청) 하니 公(공)이 峻嚴(준엄)하게 물리쳐 말하기를 天變(천변)을 어찌 佛道(불도)로서 능히 除去(제거)하리오. 어찌 修德(수덕)하기를 請(청)하지 아니한가 하였으며 密直學士(밀직학사)로 世子(세자)를 모시고 元(원)에 가니 元帝(원제)가 甚重(심중)하게 여기고 볼 때 문득 일어나 冠(관)을 썼으며 西域(서역)에서 大鳥(대조)의 알을 받침에 公(공)이 御命(어명)에 應(응)하여 賦詩(부시)하기를 『알 크기가 독같으니 가운데 不老春(불노춘)을 감추었네 願(원) 컨데 千歲壽(천세수)를 누리어 훈훈한 기운 海東人(해동인)에 미치소서』하니 帝(제)가 大悅(대열)하여 御羹(어갱)을 거두어 下賜(하사)하였고 帝(제)가 일찍 遼東(요동) 水程圖(수정도)를 보시고 水驛(수역)을 設置(설치)하여 本國(본국)의 쌀과 布(포)를 실어오고자 하여 公(공)에게 물으니 對答(대답)하기를 高麗(고려)의 山川(산천)과 林藪(임수)가 土地(토지)의 十分(십분)의 七(칠)을 차지하여 농사짓고 紡織(방직)하는 고로 겨우 口體(구체)의 奉養(봉양)만을 지탱하고 항차 사람들이 海道(해도)에 익숙치 못하니 臣(신)의 소견으로서는 혹시 불편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帝(제)가 그 것이라 여기고 주춤하였다. 戊戌(무술)年(년) 歸國(귀국)할 때 임금께서 친히 金鞍(금안)을 내리시고 寵愛(총애)하였으니 只今(지금)까지 금안동이란 이름이 있다. 벼슬이 人臣(인신)의 最高(최고)에 달했으나 處身(처신)은 普通(보통)사람과 같이하니 朝野(조야)가 想望(상망)하였으며 輕重(경중)을 点(점)쳤다. 卒(졸)함에 忠宣(충선) 廟廷(묘정)에 配享(배향)되었음.

景武公(경무공)은 世祖(세조)때에 文學(문학)하는 집안으로 進取(진취)에 얽메이지 않고 經史(경사)를 探頣(탐신)하였으며 처음 벼슬길에 나갔으나 親老(친로)하고 兄弟(형제)가 없음으로 벼슬을 즐겨하지 않고 父母(부모)에게 겨울에는 다숩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틈에 講論(강론)을 專意(전의)하였으며 前喪(전상)에 侍墓(시묘)살이를 하는데 墓(묘)곁에 雙柿樹(쌍시수)가 있는데 항상 朝夕(조석)으로 절을 하고 나무를 부여잡고 哀痛(애통)하니 鄕人(향인)들이 그 나무를 永慕亭(영모정)이라 하였다.

大夫人(대부인)께서 힘써 出仕(출사)하자 命(명) 하시니 舍人(사인)으로서 都體察使從事官(도체찰사종사관)이 되어 道(도)에 있는데 大夫人(대부인)께서 病(병)이 들어 임금이 손수 쓰시기를 너의 母親(모친)이 病(병)을 얻었으니 올라와 相見(상견)하라 하고 司僕寺尹直寶文閣(사복시윤직보문각)으로 부르니 御筆(어필)이 煒煌(위황)하고 恩寵(은총)이 더없이 컸다. 寶城郡守(보성군수)로 나가니 郡(군) 이 바닷가이라 風俗(풍속)이 어리석어 學問(학문)을 숭상하지 아니하니 公(공)께서 郡內子弟(군내자제)를 뽑아 매달 초에 會講(회강)하고 至誠(지성)으로 課目(과목)을 勸獎(권장)하니 四年(사년)만에 儒化(유화)가 크게 일어나 方伯(방백)이 연다라 襃啓(포계)를 올리면서 文翁卓茂(문옹탁무)의 敎化(교화)에 비교하였다.

關東伯(관동백)으로 나갈 때 특별히 잔치를 베풀고 옷 한 벌을 나리셨으며 岳判(악판)으로 溫泉(온천)에 扈行(호행)하였는데 行在所(행재소)의 宮人(궁인)이 失火(실화)하여 百官(백관)이 물밀 듯이 달아나는데 宋(송)이 혼자 軍服(군복)으로 불을 끄고 임금을 업으니 上(상)께서 가상이 여겨 특별히 肖像畵(초상화)를 下賜(하사)하였으며 벼슬이 높을수록 明哲(명철)하였으며 특별히 돌보아 수작하기를 夙夜(숙야)로써 하여 進退(진퇴)가 大雅(대아)의 道理(도리)에 合(합)하니 盛(성)하도다.

五世(오세)사이에 宿德偉望(숙덕위망)이 나라와 고을에 廟宇(묘우)가 儼然(엄연)하고 恩侑(은유)가 便蕃(편번)하니 이것이 모두 學問(학문)의 效力(효력)이다. 碑(비)를 새겨 無窮(무궁)토록 하고자 하여 그 後孫(후손)인 志浩(지호)가 내게 글을 쓰라하니 내 감히 사양치 못하고 글을 지어 말하기를 이러하도다. 聖人(성인)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 孔子(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魯(노)나라에 君子(군자)가 없으면 이 어찌 이를 取(취)했으리오 하였으니 取(취)한다는 것은 學問(학문)을 말한 것이다. 錦城(금성)에 先輩(선배)君子(군자)가 많으니 鄭氏(정씨)의 앞에 계셨든 분은 鄭氏(정씨)가 取(취)했을 것이요.

鄭氏(정씨)의 뒤에 계셨던 분은 鄭氏(정씨)에게 取(취)했을 것이다. 한가지 善言(선언)을 들으면 그 말을 새기고 한 가지 善行(선행)을 보면 그 行實(행실)을 본받으니 배운 것이 아니랴 錦城(금성)에 鄭氏(정씨)의 어짐이 없었다면 이 어찌 이를 取(취)했으리오. 내가 듣건데 文靖公(문정공)의 九世孫(세손)에 默軒公(묵헌공)이 있는데 諱(휘)는 訥(눌)이니 䔍孝純至(마효순지)하고 逸軒公(일헌공)의 諱(휘)는 諶(심)인데 忠義(충의)를 激勵(격려)하고 滄洲公(창주공)의 諱(휘)는 詳(상)인데 文章(문장)이 魁偉(괴위)하다.

壬辰(임진)年(년)에 二公(이공)이 倡義使(창의사) 金健齋(김건재)와 高霽峯(고제봉)과 李忠武公(이충무공)으로 더불어 慷慷擊倭(강강격왜)하여 忠義(충의)가 動人(동인)하였고 十世孫(세손) 慶源公(경원공) 如麟(여린)은 李爾瞻(이이첨)의 부름에 나가지 않고 손수 그 글을 찢고 바른 소리로 世上(세상)에 올리였으니 이는 家庭(가정)의 배움에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祠宇(사우)에 올라 享祀(향사)하니 公(공)의 아래 족히 부끄러움이 없다.

이로 말미암아 錦城(금성)의 人士(인사)가 소문을 듣고 奮起(분기)하며 行蹟(행적)을 상고하고 欽企(흠기)하여 집집마다 鄭氏(정씨)의 忠孝(충효)를 본받고 사람마다 鄭氏(정씨)의 名德(명덕)에 感服(감복)한 즉 他日(타일)에 錦城(금성)에 들어온 자 장차 鄕社(향사)에 崇拜(숭배)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磊落相望(뢰락상망)하니 이 어찌 兩公(양공)이 啓發(계발)한 嘉惠(가혜)가 아니며 賢父老(현부노)들의 一言(일언)의 功(공) 이 어찌 보탬이 적다 하리오 성하도다. 이 鄭氏(정씨)諸公(제공)이며 實蹟(실적)이 이미 國史(국사)에 실렸으며 또한 家狀(가장)에 있으니 내 돌아보건데 무엇을 덧부치리오. 略序(약서)하고 이어 銘(명) 하노니,

顯允(현윤)한 鄭氏(정씨)이여 錦城(금성)처럼 울어서 보도다. 錦城(금성)이 州望(주망)됨이여 地靈(지령)이 한 군데로 모임이로다. 偉人(위인)이 이에 태어나니 實(실)로 雪齋(설재)先生(선생)이로다. 間世(간세)의 상서도 이여 華國(화국)의 재주로다. 즐거운 듯 望望(망망)함이여 惡(악) 을 미워하고 剛(강) 함을 품었도다. 貪官汚吏(탐관오리)를 탄핵하였으며 天變(천변)을 항거하여 물리쳤네.

經書(경서)를 끼고 子孫(자손)을 가르치고 가을 열매 너무 아름답네. 燕京(연경)에서 世子(세자)의 羽翼(우익)되어 받들어 補合(보합)함이 實(실)로 많았네. 西篚漫永(서비만영) 動不忘本(동불망본) 海運驛(해운역) 沒置(몰치)에 利(이)로운 通商(통상)과 偉大(위대)한 생각을 말하였네. 天子(천자)가 기쁘게 여겨 자주 물건을 下賜(하사)하고 특별히 表彰(표창)했네.一部(일부)의 金鏡錄(금경록)은 萬(만)까지 이치가 빛나고 밝았네. 늙도록 부지런 하니 저들 몽매한 이들이 깨달았네. 살아서는 榮華(영화)롭고 죽어서는 哀悼(애도)하니 온화하여 遺風(유풍)이 있네.

憲憲(헌헌)한 景武公(경무공)이여 五世(세)에 번창했네. 어두운 밤에 공부하고 시묘 옆 감나무를 사랑하고 어질구나. 科目(과목)의 몸이요. 徵士(징사)의 이름이네. 옆줄 글씨 큰 길을 비쳤네. 南州(남주)의 고을살이 지경에 글 읽는 소리 넘치네. 關東地方(관동지방) 風俗(풍속)을 살핌에 甘棠(감당)의 노래 실었네. 衣服(의복)과 벼슬에 褒賞(포상)이 잇달았네. 이미 三輔에 나아가 遂壯中權(수장중권)이라 불이 나서 경황 중에 公(공)이 아니면 누가 호위하랴 한 폭의 그림 오래도록 傳(전)해오네. 나라에 榮光(영광)이요. 고을에 본이 되네.

士林(사림)이 誠意(성의)를 다하여 바로잡아 가르침이 많았도다. 金鞍(금안) 옛 고을에 祠宇(사우) 모습 尊嚴(존엄)하네. 四時(시)에 祭(제)지내니 一堂(일당)이 祖孫(조손)이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진이를 보고 齊戒(제계)함을 생각하네. 이 두 분 어진이는 옛 사람을 공부했네. 아침에는 萬卷堂(만권당)을 열고 저녁에는 외로운 등불 밝혓네. 두텁게 쌓임이 없으면 어떻게 興(흥)하리오. 바로 崇奉(숭봉)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본보기네. 龜頭(구두)가 문지러지지 않했으니 이를 보고 표준을 삼으리라.

[역문]雪齋書院(설재서원)廟庭碑(묘정비)

雪齋書院(설재서원)은 卽(즉) 雪齋(설재)鄭先生(정선생) 妥靈(타령)의 場所(장소)로 三不義軒(삼불의헌)鄭公(정공)과 巖軒(암헌)申公(신공)과 永慕亭(영모정)鄭公(정공)과 黙齋(묵재)鄭公(정공)과 逸軒(일헌)鄭公(정공)과 滄洲(창주)鄭公(정공)과 慶源府使(경원부사)鄭公(정공)과 竹友堂(죽우당)鄭公(정공) 八賢(팔현)이 配享(배향)되었다.

생각건대 雪齋(설재)先生(선생)의 諱(휘)는 可臣(가신)이니 羅州人(나주인)이다. 高麗(고려) 忠烈王(충렬왕) 丁丑(정축)年(년)(1277)에 寶文閣待制(보문각대제)에 任命(임명)되었고 錦城(금성)山神(산신)이 巫堂(무당)에게 나타남에 先生(선생)이 上奏(상주)하여 定寧公(정녕공)을 錦城(금성)山神(산신)에 封(봉)하였고 諸道(제도)別監(별감)이 모두 上供(상공)을 憑藉(빙자)하여 百姓(백성)에게 楮皮幣脯果夕表紙(저피폐포과석표지) 같은 物件(물건)을 거두어 先生(선생)께서 모두 罪(죄)로 다스릴 것을 請(청)하였고 庚寅年(경인년)(1290)에 日本(일본)이 侵犯(침범)하니 王(왕)이 討伐(토벌)을 命(명)하고 儒士(유사)를 從軍(종군)케 하니 先生(선생)께서 上國(상국)의 法(법)을 들어 罷(파)하게 하였고 당시 天變(천변)이 있어 道塲(도장)을 設置(설치)하여 빌기를 請(청)한 者(자)가 있었는데 先生(선생)께서 非理(비리)를 極言(극언)하여 그치게 하였으며 經筳(경정)에 매양 涅槃經(열반경)을 請(청)하다가 先生(선생)이 들어오면 王(왕)이 거두게 하였으며 先生(선생)께서 箕子廟(기자묘)를 西京(서경)에 建立(건립)하여 正學(정학)의 淵源(연원)을 열게 하였으며 甲申年(갑신년)(1284)에 世子(세자)가 元(원)나라에 감에 先生(선생)이 世子(세자)의 스승으로 從行(종행)하여 元帝(원제)를 보게 되자 先生(선생)의 辯論(변론)이 極(극)히 明暢(명창)하니 元帝(원제)가 火悅(화열)하여 翰林學士(한림학사)를 除授(제수)하였고 元帝摩訶本國(원제마가본국)에서 바친 駱駝鳥(낙타조)의 알을 보고 先生(선생)께 賦詩(부시)하기를 命(명)하니 詩(시)에 이르기를 알 크기가 큰 독 같은데 가운데 不老春(불로춘)을 감추었네. 願(원)컨데 千歲壽(천세수)를 잡아 醺醺(훈훈)함에 海東人(해동인)에 미치소서 하였으니 元帝(원제)가 歎賞(탄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元帝(원제)가 일찍이 遼東(요동)이 水程圖(수정도)를 보고 水驛(수역)을 두자고 함에 先生(선생)께서 그 不便(불편)을 말하니 元帝(원제)가 그렇다고 하였다. 先生(선생)의 思鄕詩(사향시)가 있으니 이르기를 「海東(해동) 南(남) 쪽에 錦城山(금성산)이 있으니 山下(산하)에 나의 집 草家(초가)數間(수간)이네. 巷柳(항유)와 園桃(원도)를 친히 손수 심었는데 봄이 오면 응당 主人(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르리」하였으니 元帝(원제)가 그 뜻을 알고 金鞍(금안)과 白馬(백마)와 金帶(금대)를 下賜(하사)하여 보냈으며 돌아와서는 崔伸紹(최신소)가 世子(세자)의 命令(명령)으로 公主(공주)의 큰 집을 지음에 때가 바야흐로 크게 추운데 일을 독촉함이 몹시 急(급)하여 백성이 많이 괴로워한지라 先生(선생)께서 世子(세자)에게 말하여 머물게 하였다.

先生(선생)이 政堂(정당)에 있으면서 가만이 典故(전고)를 읽혀 千秋金鏡錄(천추금경록)을 撰述(찬술)하였다. 先生(선생)이 金文肅公(김문숙공) 周鼎(주정)과 우리 先祖(선조) 文顯公(문현공)珤(보) 로 더불어 一代(일대)의 三賢(삼현)이 되어 한 堂(당)에 모여 道義(도의)를 講(강)하니 時人(시인)이 三賢堂(삼현당)이라 일컬었다.

茂戌年(무술년)(1298)에 壁上三韓三重大匡(벽상삼한삼중대광) 修文殿太學士(수문전태학사) 監修國史(감수국사) 參知光政院事(참지광정원사) 陞進(승진)되었으며 文靖(문정)이다 贈諡(증시)하였고 忠宣廟(충선묘)에 配享(배향)되었고 三不義軒公(삼불의헌공)은 諱(휘)가 初(초)니 雪齋(설재)先生(선생) 曾孫(증손)이니 원님이 되었을 때 山神(산신)이 밤에 와서 公(공)의 器量(기량)의 큼을 試驗(시험)하였으며 특별히 薦擧(천거)되어 濟州牧使(제주목사)가 되니 큰 들을 墾拓(간척)하였으며 大泉(대천)을 빌어 얻으니 이른바 鄭坪(정평)과 鄭泉(정천)이 이것이다.

戶曹(호조)判書(판서)에 陞進(승진)되었고 얼마 안 되어 田廬(전려)에 물러나 義理(의리)를 講論(강론)하고 後學(후학)을 獎進(장진)하였으며 巖軒公(암헌공)의 諱(휘)는 檣(장)이니 高靈人(고령인)이다. 文章(문장)에 能(능)하고 筆法(필법)이 善(선)하여 淸要(청요)로 널리 알려졌으며 오래도록 文衡(문형)을 맡았으며 世宗(세종)께서 公(공)에게 箕子碑文(기자비문)을 쓰라. 命(명)하였고 임금이 卞季良(변계량)에게 묻기를 卿(경)이 이어 文衡(문형)을 맡을 者(자) 누군고 하니 季良(계량)이 公(공)이라고 對答(대답)하였다.公(공)이 工曹參判(공조참판)으로 王命(왕명)에 依(의)하여 南山曲(남산곡)을 지어 바쳤고 또 文武樂章(문무악장)을 지어 太祖(태조)의 功德(공덕)을 歌詠(가영)하였다. 永慕亭(영모정)公(공)의 諱(휘)는 軾(식)이니 雪齋(설재)先生(선생)의 五世孫(세손)이다.

經史(경사)를 博涉(박섭)하여 義理(의리)를 深頣(심신)하였으며 二親(친)에게 極孝(극효)하였고 喪(상)을 만나 墓(묘)에 廬墓(여묘)를 쳤으며 寶城郡守(보성군수) 四年(년)에 儒風(유풍)이 大作(대작)하였고 또 大司憲(대사헌) 判漢城尹兵曹判書(판한성윤병조판서)로서 條法(조법)을 嚴守(엄수)하여 宿弊(숙폐)를 革去(혁거)하니 朝廷(조정)에서 長德偉人(장덕위인)으로 稱(칭)하였으며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溫泉(온천)에 갔을 때 行宮(행궁)에 불이나니 公(공)이 임금을 업고나옴에 수염이 다 타버렸는데 임금이 畵工(화공)에게 命(명)하여 불을 무릅쓴 肖像(초상)을 그리게 하여 永世不朽(영세불후)의 功蹟(공적)을 表(표)하였고 景武(경무)라고 贈諡(증시)하였다. 黙齋(묵재)公(공)의 諱(휘)는 訥(눌)이니 永慕亭(영모정)公(공)의 玄孫(현손)이다.

孝悌篤實(효제독실)하고 學文(학문)이 淹博(엄박)하여 오랫동안 羅州(나주)訓長(훈장)을 하여 많은 英才(영재)를 育成(육성)하였고 그 父親(부친)이 孝道(효도)로 世上(세상)을 울리고 公(공)이 이어 받으니 이 애비의 이 아들이 있다고 稱(칭)하였으며 또한 그 두 동생과 같이 世上(세상)에 이름을 가지런히 하니 難兄難弟(난형난제)의 名譽(명예)가 있다.

逸軒(일헌)公(공)의 諱(휘)는 諶(심)이니 黙齋(묵재)公(공)의 동생이다. 文科(문과)로 戶曹吏曹兩曹正郞(호조이조양조정랑)에 任命(임명)되었고 錦江(금강)上(상)에 一亭(일정)을 얽어 날마다 經義(경의)를 講(강)하여 後進(후진)을 獎勵(장려)하였으며 壬辰亂(임진난)에 朴懷齋(박회재) 倡義檄文(창의격문)을 보고 근심하고 담담함에 慷慨(강개)하여 곧 金文烈公(김문열공)幕下(막하)로 달려가 피를 마시고 하늘에 맹서하였으며 滄洲(창주)公(공) 의 諱(휘) 는 詳(상)이니 逸軒(일헌)公(공)의 동생이다.

文科(문과)로 戶曹正郞(호조정랑)과 여러 고을 縣監(현감)을 歷任(역임)하여 治積(치적)이 있었으며 庚寅年(경인년)에 抗訴(항소)하여 五賢(현)의 거짓을 辨(변)하엿으며 드디어 江湖(강호)에 자취를 감추어 後學(후학)을 獎勵(장려)하는 것을 나의 任務(임무)로 삼았으며 壬辰亂(임진난)에 병을 이끌고 李忠武(이충무) 崔兵便(최병편) 幕下(막하)에 周旋(주선)하여 方略(방략)을 贊畵(찬화)하였고 또 梁大撲(양대박)과 檄文(격문) 發(발)할 것을 圖謀(도모)하였으나 병이 심하여 아들 如麟(여린)을 命(명)하여 忠武(충무)의 幕下(막하)에 달려가게 하였다.

慶源府使(경원부사)公(공)의 諱(휘)는 如麟(여린)이니 滄洲(창주)公(공)의 아들이라 壬辰倭亂(임진왜란)에 父親(부친)의 命令(명령)으로 郭再祐(곽재우) 紅衣將軍(홍의장군)을 따라 鼎津(정진)에서 功(공)을 세웠고 李忠武(이충무)를 따라 閑山(한산)싸움에 得捷(득첩)하였고 丁酉在亂(정유재난)에 火旺城(화왕성)을 지키면서 섶을 쌓아 불을 놓고 죽음으로 여러 사람과 맹서하였으며 茂戌年(무술년)에 體察使(체찰사) 張晩(장만)과 같이 釜山(부산)의 功(공)을 이루었으며 昏朝奸臣(혼조간신)인 大君(대군)을 請誅(청주)함에 公(공)이 上疏(상소)하여 大義(대의)를 붇 들었으며 甲子年(갑자년)의 李适亂(이괄난)에 임금의 命(명)을 받들어 漢江(한강)을 지켰으며 乙丑(을축)의 變(변)에 글을 보내 毛文龍(모문룡)을 承出(승출)하였으며 丁卯(정묘)의 亂(난)에 군사를 거느리고 擊破(격파)하였으며 丙子年(병자년)에는 年老(년로)하여 아들 濈(즙)과 潑(발)을 命(명)하여 家儲(가저)를 기울려 軍糧(군량)을 도왔고 竹友堂(죽우당)公(공)의 諱(휘)는 灡(난)이니 逸軒(일헌)公(공)의 孫子(손자)다.

鄭松江(정송강)에게 배워 性理學(성리학)에 밝았으며 丙子年(병자년)에 南漢山城(남한산성)이 抱園(포원)되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눈물을 뿌리고 일어나니 從叔府使公(종숙부사공)이 忠義(충의)로서 힘쓰게 하고 甲冑(갑주)를 주니 그날로 軍士(군사) 數百名(수백명)을 引率(인솔)하고 淸州(청주)에 行到(행도)하니 和議(화의)가 成立(성립)함을 듣고 痛哭(통곡)하여 돌아왔다. 이는 모두 先生(선생)과 八賢(팔현)의 行蹟(행적)이니 글이 國史(국사)와 家乘(가승)에 실려 있다.

肅宗(숙종) 癸酉年(계유년)(1693)에 書院(서원)을 金鞍洞(금안동)에 建立(건립)하고 雪齋(설재)先生(선생)을 主享(주향)으로 하고 永慕亭公(영모정공)을 配享(배향)하여 校理(교리)沈錫英(심석영)이 祠宇(사우)碑銘(비명)을 贊(찬)한바 있으며 그 후에 書院(서원)을 永安村(영안촌)에 移建(이건)하였고 또 차례로 七賢(현) 을 追配(추배)하였으니 碑(비)또한 글을 고침이 마땅하다. 바야흐로 廟庭碑(묘정비)를 꾀하는데 滄洲(창주)公(공) 後孫(후손) 遇焱(우염)이 巨金(거금)을 獨擔(독담)하고 또한 不佞(불녕)에게 徵文(징문)케 하니 義理上(의리상) 辭讓(사양)하기 어려움이 있어 참랑함을 잊고 이글을 쓰며 이어서 銘(명)하노니 猗(의)하도다.

先生(선생)이여 麗朝(여조)의 賢哲(현철)로 氣像(기상)이 壁立(벽립)하며 精神(정신)이 玉潔(옥결)하고 文辭(문사)가 浩瀚(호한)하고 學識(학식)이 淹博(엄박)이라 일찍이 政丞(정승)에 올라 임금의 총애 극진했네. 忠誠(충성)을 다하고 知慧(지혜)를 다해 黼(보)가 되며 黻(불)이 되었네. 世子(세자)를 侍從(시종)하여 元國(원국)에 어느 날에 들어갔든고 辯論(변론)을 물 흐르듯 하니 元帝(원제)가 크게 기뻐했네. 德澤(덕택)을 東方(동방)에 입혔고 名聲(명성)은 中國(중국)에 넘쳤네.

누가 사모하지 않으리오. 羅州(나주)사람 더욱 독실했네. 一院(일원)이 重建(중건)되니 溪山(계산)이 빛을 더했네. 先生(선생)은 主享(주향)이요 八賢(팔현)은 곁에 나란히 했네. 여기에 章甫(장보)가 오고 黍稷(서직)이 향기롭네. 千百年(천백년)이 되도록 風韻(풍운)을 가히 움켜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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