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 辛未譜 |
|
|||||||||||||||||||||||||||||||||||||
跋文(발문)(辛未譜 신미보 1991年) 무릇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姓氏(성씨)가 있으면 宗族(종족)이 있고 宗族(종족)이 있으면 族譜(족보)가 있는 法(법)이다. 譜(보)는 補(보)의 뜻이니 겨레(族 족)를 列記(열기)하고 빠진 部分(부분)을 補充(보충)하며 아버지는 昭(소)가 되고 아들은 穆(목)이 되어 百世(백세)가 한눈에 들어옴으로써 孝悌(효제)의 마음이 油然(유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羅州鄭氏(나주정씨)는 東方(동방)의 士族(사족)으로 高麗(고려) 忠烈王(충렬왕)때 僉議中贊(첨의중찬)을 지내시고 當世(당세)의 儒宗(유종)으로 道學文章(도학문장)이 特著(특저)하야 世稱 海東夫子(세칭 해동부자)라고 까지 推仰(추앙)을 받았던 雪齋文靖公(설재문정공)의 種德(종덕)하신 餘慶(여경)으로 上下千年(상하천년) 한 뿌리의 나무가 千枝萬葉(천지만엽)으로 퍼지듯이 子孫(자손)이 繁昌(번창)하여 名門巨族(명문거족)으로 傳統(전통)을 綿綿(면면)히 이어 오고 있으며 麗朝(려조)때에는 十 五大姓家(十 오대성가)의 하나로 燦爛(찬란)했던 家門(가문)이었고 李朝(이조)에 와서도 大科(대과)는 작았으나 忠孝節義(충효절의)와 文章(문장)과 賢士(현사)가 끊이지 않았다. 또 黙齋公派一部(묵재공파일부)와 直長公三子諱諺祖派(직장공삼자휘언조파)와 直長公三弟諱覵派(직장공삼제휘한파) 一部(일부)가 不入譜(불입보)하여 참다운 大同譜(대동보)가 되지 못함을 恒常有憾(항상유감)으로 여겨 왔다. 丁巳譜(정사보)가 刊行(간행)된지 十四年(십사년)만에 서울 및 光州宗親會(광주종친회)와 大多數(대다수) 宗人(종인)들의 熱火(열화)와 같은 要請(요청)으로 一九九○年九月(一九九○년구월)에 大宗會(대종회)의 決議(결의)로 大同譜編纂委員會(대동보편찬위원회)가 組織(조직)되었고 同年十月一日(동년십월일일)부터 擧族的(거족적)인 大事業(대사업)의 編輯業務(편집업무)가 着手(착수)되어 一年六個月(일년육개월)의 短時日(단시일)에 無事(무사)히 辛未大同譜(신미대동보)의 續刊(속간)을 보게 되니 기쁜 마음 금할 수 없다. 첫째, 各派別(각파별) 世系表(세계표)를 子孫錄前面(자손록전면)에 附着(부착)하여 各自(각자)의 派系(파계)가 一目瞭然(일목료연)하게 하였고 둘째, 男女平等思潮(남녀평등사조)에 副應(부응)하는 뜻에서 女息(여식)들도 子(자)와 同一(동일)하게 收單(수단)을 했으며 過去(과거)에는 出稼(출가)한 딸만 그 사위만을 登載(등재)하였으나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羅州鄭氏族譜(나주정씨족보)라는 觀點(관점)에서 딸을 主格(주격)으로 하고 사위는 딸의 夫(부)로 하여 登載(등재)하였으며 셋째, 體裁(체재)에 있어서는 凡例(범례)에서도 言及(언급)하였지만 四六倍版洋裝本(사육배판양장본)으로 하고 子孫錄(자손록)의 字體(자체) 또한 筆寫體(필사체)에 가까운 新楷體(신해체)를 採擇(채택)하여 譜書本來(보서본래)의 感覺(감각)을 살리면서 現代美(현대미)와 調和(조화)를이루게 하였고 또 近來(근래)의 族譜(족보)에 많이 使用(사용)하고 있는 白上紙(백상지)는 부피나 重量面(중량면)에서 卷當千(권당천)쪽이 넘는 族譜(족보)에는 適合(적합)치 않아 特殊簿葉紙(특수부엽지)를 使用(사용)하였으며 이 用紙(용지)는 알카리性(성) 이어서 半永久的(반영구적)이며 保存(보존)하는데 適合(적합)하다. 本譜(본보)가 어디에나 내놓아도 遜色(손색)이 없는 族譜(족보)를 만들려고 우리 編輯陣(편집진)은 勞力(노력)하였습니다 마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 만에 하나라도 誤字(오자)와 脫字(탈자)등의 失字(실자)가 있지 않을까 念慮(염려)하면서 當事者(당사자)들의 너그러운 諒解(양해)를 바라면서 삼가 跋文(발문)으로 代(대)하나이다. 光復後四十八年壬申正月下浣日 棄齋公十八世孫 編輯委員 炳淥 謹跋 광복후사십팔년임신정월하완일
아래와 같이 계보 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