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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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실록단어해설
한자 어조사

예기(禮記)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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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五編 孝烈錄
旌閭

 

 

 

 

三孝旌閭記
(삼효정려기)

[역문]今上(금상) 癸酉年(계유년)에 故孝子(고효자) 鄭亨蓍(정형시)에 淨侶(정려)를 命(명)하였고 그 뒤 十二年(12년) 乙酉(을유)에 또 亨蓍(형시)의 玄孫(현손)인 洙英(수영)과 洙賢(수현)의 兄弟(형제)를 命旌(명정)하였고 監察(감찰)을 아울러 貤贈(이증)하였다. 四世三旌(4세삼정)이 어찌 쉽게 있으리오.

亨蓍(형시)가 兄(형) 亨升(형승)과 같이 父母(부모)를 섬기되 志物(지물)을 다했으며 물러나 서로 글에 힘썼고 뒤에 數里(수리)밖에 分家(분가)하여 凌晨冒夜(능신모야)하여 定省(정성)을 前(전)과 같이하니 樵童牧堅(초동목견)가 그 나막신이 穿斷(천단)함을 딱하게 여겨 곧바로 풀을 베어 만들어 줬으며

父親(부친) 病患(병환)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혹독한 추위에도 藥(약)을 다리되 帖(첩)마다 반드시 沐浴(목욕)하여 정성을 쏟으며 藥(약)을 다리되 반드시 엎드리고 水穀(수곡)을 맛보아 어버이가 먹고 마시는 것을 보아 자주 바꾸고 날마다 飢餲(기애)를 같이하며 손가락을 쪼개 七日(7일)동안을 延命(연명)했으며

葬禮(장례)하고 蔬食(소식)으로 三年(삼년)을 마쳤으며 母親(모친) 病患四朔(병환사삭)에 炎節(염절)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울면서 粥(죽) 마시기를 勸(권)했으며 大小便(대소변)의 汚穢(오예)를 반드시 몸소 빨고 妻(처)나 弟嫂(제수)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地龍汁(지용즙)을 쓰되 먼저 맛본 뒤에 드렸으며 숨이 끊어지자 進血(진혈)하려 하니 그때 나이 五十八歲(58세)라

家人(가인)이 칼을 뺐으니 호미로 碎指(쇄지)하니 두어 식경을 살아났으며 殯所(빈소)에 짚자리를 깔고 糜陰(미음)으로 겨우 지탱했으며 장사하고 墓下(여막)에다 土幕(토막)을 짓고 號擗(호벽)을 한결같이 喪事(상사)때와 같아 슬퍼서 문득 哭(곡)하기를 깊은 밤도 헤아리지 아니하니 樹林(수림)과 巖穴(암혈)이 호랑이와 相護(상호)하며 脫服(탈복)하고도 科擧(과거)공부를 閉止(폐지)하고 날마다 二墓(두묘)를 往省(왕성)하며 宗家(종가)의 祠廟(사묘)가 十里(십리)남짓되는데 춥고 더웁다고 하여 掇拜(철배)하지 않았으며

國喪(국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父母喪(부모상)같이 하여 五蓋個月(오개개월)을 채소에다 밥만 먹었으며 일찍이 文名(문명)이 있어 都會(도회)에 올라 九回(9회)나 鄕試(향시)에 首席(수석)으로 合格(합격)하니 한결같이 漢陽(한양)의 스승에게 從遊(종유)하라는 勸誘(권유)가 있었으나 父母(부모)가 늙다는 핑계로 辭讓(사양)하고 李陶庵(이도암)을 師事(사사)하였으며 安龍谷(안룡곡)과 友善(우선)하였는데 湖南(호남)과 洛陽(낙양)이 分黨(분당)되자 左右(좌우)에도 끼지 않고 義(의)를 引用(인용)하여 自靖(자정)하니 事實(사실)이 邑誌(읍지)와 海東三綱錄(해동삼강록)에 실려 있다.

洙英(수영)과 洙賢(수현)은 孝友(효우)가 하늘에서 타고나와 母病(모병)에 밤낮으로 侍湯(시탕)하여 몸이 代身(대신)할 것을 願(원)했으며 絰帶(질대)를 벗지 않고 酒肉(주육)을 가까이 안했으며 장사 후에 동생과 같이 靈几(령궤)를 지키고 손수 先塋(선영)에 廬幕(여막)을 치고 朝夕(조석)으로 樊號(번호)하니 문득 두 마리 白兎(백토)가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면서 吊慰(적위)한 듯한 刑像(형상)이었으며 짝으로 살면서 새끼를 낳아 家蓄(가축)과 다름이 없었고 父病(부병)에 서로 斫指(작지)하기를 다투었고 喪葬(상장)을 한결같이 母喪(모상)과 같았으며 喪(상)을 당하여 미리 坐向(좌향)을 잡으려고 한데 二兎(이토)가 또 와서 구덩이에 엎드려 東(동)쪽을 가리키고 머리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卯(묘)로 向(향)하였다.

家事(가사)를 잡아 동생에게 부치고 시묘 살이를 하니 二兎(이토)가 또와서 살면서 廬幕(여막)을 헐어도 즐겨 가지 않았다. 鄭(정)은 羅州(나주)가 그 本貫(본관)이며 遠祖(원조)는 雪齋 諱 可臣(설재 휘 가신)이오 丁酉亂(정유란)에 殉節(순절)하여 參議(참의)에 贈職(증직)된 縉(진)은 亨蓍(형시)의 五世祖(5세조)가 되며 이어 洙英(수영)과 洙賢(수현)이 亨蓍(형시)의 아름다움을 이으니 愼黙齋(신묵재)와 愛梅軒(애매헌)과 師竹軒(사죽헌)은 그의 號(호)라고 한다.

嗚呼(오호)라 斫指者(작지자)도 世上(세상)에 일찍 사람이 있지 않았으며 居廬者(거려자)도 또한 일찍 사람이 없지 않았다.

六十(육십)에 사모함은 옛날에도 일찍 들어보지 못했다. 황차 二兎(이토)가 만일 하늘이 안 것이 아니라면 祥瑞(상서)로움을 낳고 祥瑞(상서)로움을 내리기를 時期(시기)가 없으며 月宮(월궁)의 神物(신물)을 누가 시켜 세 번이나 보냈으리오.

行(행)한 사람도 行(행)하기를 어려운바며 능한 사람도 능히 하지 못할 바니 多士(다사)의 글이 實地(실지)로 阿好(아호)한 것이 아니다. 洙英(수영)의 男(남) 鎔兌(용태)가 그 자체가 혹시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勳(훈)으로 하여금 紀文(기문)을 쓰게 하니 이와 같다.

                                                               歲在庚子秋縣人 光山 金 勳 謹書

아래와 같이 계보 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系  譜 :   5卷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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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逸齋公諱以殷派

  21世

諱亨蓍

고조(高祖)

諱舜卿

亨蓍

증조(曾祖)

諱有三

碩之

조(祖)

諱東啓

邦郁

고(考)

諱泰

致鍊

  諱

21世諱亨蓍

25世諱洙英

25世諱洙賢

賢瞻又字聖瞻

乃燦

國一

愼默齋

愛梅軒

師竹軒

肅宗46庚子 1720年2月8

憲宗9癸卯1843年9月28

哲宗7丙辰1856年2月20

正祖12戊申 1788年8月2

高宗20癸未 1883年12月15

高宗庚戌 1910年1月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