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慕齋重修記 영모재중수기
[역문]永慕齋重修記 영모재중수기
所在地:全羅南道 咸平郡 嚴多面 三亭里 소재지: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 삼정리
鄭氏(정씨)가
綿城(면성)에 살게 된 것이 海隱公(해은공)으로부터 시작되니 그 累代精菴(누대정암)으로 永慕(영모)라고 하였으니 永世(영세)토록 追慕(추모)한다는 뜻이다.
海隱公(해은공)은
본래 羅州(나주)의 望族(망족)으로 端宗(단종)때 節臣(절신) 棄齋公薰(기재공훈)의 曾孫(증손)이니 仁宗朝(인종조)때 固城縣監(고성현감)으로 任命(임명)되어 ①謝恩肅拜(사은숙배)한 다음날 仁宗(인종)이 昇遐(승하)하니 官(관)을 버리고 痛哭(통곡)하며 綿城(면성) 控壽山中(공수산중)으로
들어갔다.
詩(시)가
있으니 ⌞神仙(신선)되어 문득 하늘에 오르니 孤臣(고신)의 눈물 黃泉(황천)으로 通(통)하네 돌아온 限(한)없는 뜻은 夕陽(석양)이 山(산)머리를 비끼네⌝ (仙驅奄賓天孤臣淚徹泉 歸來無限意落日控山巓(선구엄빈천고신루철천 귀래무한의낙일공산전)하였다.
그후로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就任(취임)치 않았으며 卒(졸)함에 三井山(삼정산) 丁生原(정생원)에 葬 (장)하였고 再傳(재전)하여 月灘(월탄)과 月峰(월봉) 兄弟(형제)가 壬辰年(임진년)
倡義功臣(창의공신)으로 月川祠(월천사)에 配享(배향)되고 이어 月灘(월탄)은 海隱(해은)과 同原(동원)에 장사하니 옛날에 ②丙舍(병사)가
있었는데 오래되어 썩고 묻드러져 重修(중수)하니 그 追慕(추모)의 誠意(성의)가 깊고 간절하다.
내가 할말이 있으니 힘써 받들 것은 ③肯構肯堂(긍구긍당)이니 祖先(조선)의 墓(묘)를 버리지 아니함이 爲灘(위탄)이나 그러나 念祖(염조)하고 修德(수덕)함도 實(실)은 堂構(당구)의 墓礎(묘초)가 되니 어찌 다만 兩露(양로)와 霜雪(상설)을 때만 이 집에서 齊宿(제숙)할 뿐이리오 海隱(해은)의 棄官部在(기관부재)와 棄齋(기재)의 忠節(충절)과 月灘(월탄)과 月峰(월봉)의 倡義殉國(창의순국)은 곧 海隱(해은)의 心德(심덕)이다.
이제 歲月(세월)이
흘러 兄(형)이 忠臣(충신)이니 後裔(후예)로서 누가 惕然(척연)하여 起敬(기경)하지 않으리오.
鄭氏(정씨)의 諸彦(제언)은 반드시 熟講(숙강)하여 ④觀感(관감)의 마음이 항시 그 가운데 存(존)하리라.
漢孝(한효)와
遇普(우보)와 遇坪(우평)이 重修(중수)의 責任(책임)을 맡아 이제 내게 와서 記(기)를 써 달라 한분은 昺驥(병기)니 그 永慕(영모)한
二誠(이성)을 가히 알 것이다.
[附부] 지금으로부터 九十餘年前(구십여년전)에 祠宇(사우)가 撤廢(철폐)될 때 月川祠)월천사 遺材(유재)를 옮겨
海隱先祖(해은선조) 墓舍(묘사)를 세우고 懸板(현판)을 永慕齋(영모재)라 하였다.
<註> ①謝恩肅拜(사은숙배):任命狀을
받고 地方官으로 나갈 때 임금께 人事 드리는 것 ②丙舍(병사):조그만
집으로 옛날에는 墓側에 널을 두기위하여 南쪽에다 집을 지었음으로 丙舍리 하였음 ③肯構肯堂(긍구긍당):先祖들이
이룩해 놓은 業績을 子孫들이 이어감을 말함 ④觀感(관감):눈으로
보고 느낌
歲乙亥三月初二日 세을해삼월초이일 陽城
而炳壽 謹記 양성 이병수 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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