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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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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鬪士義齋將軍事蹟 義兵將 鄭錫冕(의병장 정석면)은 全南(전남) 咸平(함평) 出身(출신)으로 乙巳條約(을사조약) 義憤(의분)을 참지못해 義擧(의거)할 뜻을 세우던 중 1906年 五月(1906년오월) 長興(장흥)에 居住(거주)하던 金痴齋(김치재)가 찾아와 같이 倡義(창의)할 것을 謀議(모의)하여 1907年(년) 九月(구월) 羅州(나주) 聳珍山(용진산)에
모여 將兵(장병) 約(약) 300余名(여명)이 金痴齋(김치재)를 上將(상장)으로 公(공)은 參謀長(참모장) 中軍將(중군장)에는
柳宗汝(유종여)로 倡義(창의)의 旗幟(기치)를 높이 들었다. 同年(동년) 十一月(십일월) 二日(이일) 白羊寺(백양사)에서 敵軍(적군)의 攻擊(공격)을 받았을 때 作戰途中(작전도중) 中軍將(중군장) 柳宗汝(유종여)의 退去(퇴거)로 因(인)해 我軍(아군)의 被害(피해)가 많았다. 中軍將(중군장) 柳宗汝(유종여)의 責任(책임)을 물어 治罪(치죄)하자 柳宗汝(유종여)의 背信(배신)으로 上將(상장) 金痴齋(김치재)가 柳宗汝(유종여)에게 殺害(살해)되자 諸將兵(제장병)들의 推戴(추대)로 血誓(혈서)로서 上將(상장)의 職(직)을 引受(인수)하여 諸軍(제군)을 統率(통솔)하였다.
同年(동년) 十二月(십이월) 十八日(십팔일) 高敞郡(고창군) 羣律里(군율리)로 移陣(이진)하여 路邊(로변)에 精銳兵(정예병)을 埋伏(매복)시켜다가 敵兵(적병)의 行軍(행군)을 奇襲(기습)하여 十數名(십수명)을 射殺(사살)하고 武器(무기)를 捕獲(포획)하였으매 同年(동년) 十二月(십이월) 二十三日(이십삼일) 또다시 羣律里(군율리) 高地(고지)를 占領(점령)하고 要塞(요새) 適所(적소)에 精兵(정병)을 潛伏(잠복)시켜
두고
靈岩(영암) 憲兵隊(헌병대)를
誘引作戰(유인작전)으로서 大勝(대승)을 거두었다. 同年(동년) 十二月(십이월) 二十七日(이십칠일) 全海山(전해산) 金有聲(김유성) 兩部隊(양부대)와 같이 光州(광주) 大峙(대치)에서 三軍(삼군)이 合勢(합세)하여 攻擊(공격)해 오는 敵(적)을 發見(발견)하여 熾烈(치열)한 作戰(작전) 끝에 無數(무수)한 射殺者(사살자)와 武器(무기)를 捕獲(포획)하였다.
一九○八(1908)年에는 赫赫(혁혁)한 功(공)을 세우지 못한 체 흩어지는 散兵(산병)을 糾合(규합) 再整備(재정비)하여 드디어 一九○九(1909)年 二月八日(이월팔일) 光山郡(광산군) 魚登山(어등산)에서 또다시 土泉山(토천산)으로 移陣(이진)하다 敵(적)과 마주쳐 敵(적) 數名(수명)을 射殺(사살)하였으며 同年(동년) 三月(삼월) 二十六日(이십육일) 全北(전북) 淳昌.堰洞(순창.언동)에서 敵(적)과 마주쳐 敵(적)의
部隊長(부대장)
岡田(강전:おかた)를
生捕(생포)함으로서 一代(일대)의 長擧(장거)를 거두었다. 그 士氣衝天(사기충천)한 我軍(아군)의 餘勢(여세)는 逃走(도주)하는 殘兵(잔병)을 거의 全滅(전멸)시키는 大戰果(대전과)를 거두었다. 其後(기후) 四月(사월) 二十八日(이십팔일) 또다시 淳昌(순창) 堰洞(언동)에서 敵(적)과 交戰(교전) 끝에 若干(약간)의 敵兵(적병)을 射殺(사살)하였다. 다시 靈光(영광) 南山(남산)으로 陣(진)을 옮겨 別(별)로 戰果(전과)가 없자 또다시 同年(동년) 五月(오월) 四日(사일) 白羊山(백양산)으로 移陣(이진)함을 日軍(일군)이 우리 義兵陣(의병진)의 移動(이동)을 探知(탐지)하고 五月(오월) 五日(오일) 夜陰(야음)을 利用(이용)하여 來襲(내습)해온 敵(적)과 마주쳐 一大激戰(일대격전)을 치르다 不幸(불행)히도 敵彈(적탄)에 맞아 負傷(부상)을 當(당)하였다. 하는수 없이 先鋒長(선봉장) 朴大聲(박대성) 中軍將(중군장) 李鍾憲(이종헌) 後軍(후군) 金承鍊(김승련) 都砲(도포) 李逢來(이봉래) 趙錫基(조석기) 護軍(호군) 洪松巖(홍송암) 等(등) 諸將(제장)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끝내 敵 (적)의 滅亡(멸망)을 보지 못한 채 恨(한)많은 숨을 거두어 殉國하였음.
아래와 같이 계보 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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