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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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실록단어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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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禮記)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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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先世碑文

 

 

 

獨立鬪士晩悟鄭公追慕碑文
(독립투사만오정공추모비문)

祖國(조국)이 없으면 나라와 後孫(후손)이 설땅이 없고 나와 後孫(후손)이 屈辱(굴욕)의 멍에를 쓰는것은 必然(필연)이다. 빼앗긴 祖國(조국)을 다시 찾기 爲(위)해서 피흘리시고 가신 수많은 先烈(선열)들 解放(해방)은 되었지만 外勢(외세)따라 두동강이 난 祖國(조국)이 光復(광복)의 첫章(장)이거늘 祖國分斷(조국분단)의 現世(현세)속에 平安(평안)히 잠드실 先烈(선열) 어디에 계시리요.  

그中(중) 한분의 先烈(선열)이 舞鶴(무학)의 매뿌리를 맴돌고 계시니 先生(선생)은 羅州鄭氏雪齋文靖公(나주정씨설재문정공)의 二十三世孫(23세손)인 德隱居士遇明公(덕은거사우명공)의 맏아들로 1867年(년) 四月(4월) 二十二日(22일) 當時(당시)의 羅州三道面良洞(나주삼도면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니 號(호)는 晩悟齋(만오재)요 又曰雪史(우왈설사)이며 諱(휘)는 東根(동근)이다.  

先生(선생)은 弱冠(약관)에 父親(부친)이 師友(사우)하신 不滅(불멸)의 獨立鬪士勉庵崔益鉉先生(독립투사면암최익현선생)의 門下(문하)에서 修學(수학)하시었다. 1880年(년)에 겹친 壬午軍亂(임오군란)과 甲申政變(갑신정변)으로 國運(국운)은 날로 衰退(쇄퇴)하여가고 淸日兩國(청일양국)등의 內政干涉(내정간섭)은 深化(심화)되니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先生(선생)은 韓末最後(한말최후)의 羅州牧使閔鍾烈公을(나주목사민종열공) 찾아가 祖國(조국)의 安危(안위)를 걱정하시고 그 對備策(대비책)을 論(논)하시며 先生(선생)의 파란 많은 救國運動(구국운동)은 始作(시작)되시었다.  

아니나 다를까 1905年乙巳條約(1905년을사조약)이 日本(일본)에 依(의)해 强制(강제)로 締結(체결)되고 勉庵先生(면암선생)은 그 이듬해 全羅道泰仁(전라도태인)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켜 六月(6월) 淳昌(순창)에서 抗戰(항전)하시다가 逮捕(체포)되시어 對馬島(대마도)로 流配(유배)되신 끝에 斷食(단식)으로 殉節(순절)하시어 온 겨레의 痛哭(통곡)속에 故國(고국)으로 돌아오시니 先生(선생)은 釜山浦(부산포)에 까지 나가시어 스승의 屍身(시신)을 손수 모시었다.  

1910年(년) 韓日合邦(한일합방)의 吊鍾(적종)이 울리니 先生(선생)은 救國隊列(구국대열)에 앞장서서 오늘은 抱川(포천)에서 내일은 高敞(고창)등 全國各地(전국각지)를 東奔西走(동분서주)하시던중 1915年(년) 救國鬪士朴尙鎭先生(구국투사박상진선생)과 더불어 光復團(광복단)을 結成(결성)하시고 高成厚(고성후) 梁在鴻(양재홍) 盧伯麟(노백린) 金佐鎭(김죄진) 申鉉大(신현대) 梁基重公(양기중공)등 同志(동지)들을 糾合(규합)하여 湖南地方光復團(호남지방광복단)을 組織(조직)하고 義兵(의병)에게 軍資金(군자금)과 軍糧米(군량미)를 供給(공급)하다. 1918年(년) 五月(오월) 被捷(피첩)되시니 大邱覆審院(대구복심원)은 先生(선생)의 抗日鬪爭(항일투쟁)이 너무나 組織的(조직적)이고 强烈(강열)하여 擴散(확산)될 것을 憂慮(우려)하여 十五年(15년)의 重刑(중형)으로 손과 팔을 묶어버리니 이 어찌 韓民族(한민족)의 受難(수난)이 아니리요 不過十個餘月(불과십개여월)뒤 二千萬同胞(이천만동포)의 피맺힌 絶叫(절규)와 嗚咽(오열)속에 터진 己未萬歲(기미만세)를 獄中(옥중)에서 들으시니 先生(선생)이야말로 응어리진 民族精氣(민족정기)에 불을 지핀 點火者(점화자)요 三.一運動(삼일운동)을 胎動(태동)시킨 先驅者(선구자)라 아니할수 없도다. 

살과 뼈는 찢기우고 부서지는 拷問(고문)의 獄(옥)살이 十一年(십일년) 三個月(삼개월)을 屈(굴)하심 없이 倍達(배달)의 矜持(긍지)와 선비의 品位(품위)로 이겨내시었으니 이 또한 民族精神(민족정신)의 指標(지표)로 後孫(후손)에 길이길이 빛나리라.  

刑期(형기)를 마치신 先生(선생)은 滿身瘡痍(만신창이)의 몸으로 故鄕(고향)에 돌아오시었으나 家族(가족)은 風塵(풍진)되어 찾을길 없으시어 외동따님이 사는 이곳 永安(영안)마을에 起居(기거)하시어 十六餘年間(십육여년간) 倭警(왜경)의 監視(감시)속에서도 오직 後世(후세)의 敎育(교육)에 專念(전념)하시다가 恨(한)맺힌 祖國光復(조국광복)을 目前(목전)에 두시고 波瀾(파란)많은 生(생)을 마치시었으니 때는 1945年 正月二十四日(1945년1월24일)이다.  

先生(선생)의 他界(타계)는 韓民族(한민족)의 悲痛(비통)이오나 人命有限(인명유한)에 부치고 筆舌(필설)로 다하지 못할 長久(장구)한 獄苦(옥고) 또한 접어두고라도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것은 先生(선생)이 執筆(집필)하신 千金(천금)같은 많은 文集(문집)과 遺稿(유고)마져 倭警(왜경)에 沒收(몰수)되고 다만 獨立鬪士(독립투사)들의 追慕記(추모기)와 北遊錄(북유록)만이 남았을 뿐이니 日帝(일제)의 殘忍無道(잔인무도)함과 先生(선생)의 기구한 運命(운명)을 可(가)히 證(증)하고도 남음이 있도다. 多幸(다행)이나마 1977年 日帝下(1977년 일제하)의 裁判記錄(재판기록)이 챙겨지고 政府(정부)로부터 建國褒章(건국포장)이 追敍(추서)되어 先生(선생)의 나라사랑하심과 民族(민족)사랑하심이 온겨레의 피와 魂(혼)으로 昇華(승화)되어 倍達(배달)의 숨결 속에 永遠(영원)히 타오르리라.  

이제 先生(선생)은 단한분의 血孫(혈손) 容先(용선)一名(일명) 斗坰(두경)에 依(의)하여 오가는이 한눈에 바라보이는곳 舞鶴山(무학산) 양지바른 곳에 옮기어 모시어져 밝은 日月이 恒時(항시) 先生(선생)의 靈前(영전)을 燦爛(찬란)히 비추오니 光復(광복)의 恨(한) 다 잊으시고 平安(평안)히 잠드시옵소서.  

祖國分斷四十年(조국분단40년) 期必(기필)코 成就(성취)해야할 至難(지난)한 統一課業(통일과업)의 길목에 서있는 우리들 先生(선생)이 가신 荆蕀(형극)의 길을 더듬고 後世(후세)에 傳(전)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生覺(생각)되어 고장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여기 追慕碑(추모비)를 세웁니다.  

西紀1985年五月十四日
文平中學校長 羅承元
獨立鬪士晩悟齋鄭東根先生追慕碑建立推進委員會一同

서기1985년5월14일
문평중학교장 나승원
독립투사만오재정동근선생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일동

 

 

아래와 같이 계보 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系  譜 : 5卷 826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崔勉庵益鉉과宋心石秉珣兩先生門人이다.讀性理書하고庚戌國耻後에有光復之意라가未果하고竟受大邱監獄十五年刑이나終是不屈하다此後杜門終老하며後學獎進하다學者이며獨立運動家였다1977年12月13日大韓民國建國褒章이授與되었다事見師友遺墨文獻錄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逸齋公諱以殷

  21世

諱亨升

고조(高祖)

諱偉之

증조(曾祖)

諱邦赫

조(祖)

諱浩鍊

고(考)

諱遇明

  

26世諱東根

贊國
 

晩悟齋又號雲史

 

 

高宗6己巳 1869年四月二十二日生

甲子 1954年十一月十五日卒

2014.6.3  한국고전번역원 김장경씨께서 계보문의 전화통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