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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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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靖公遺墟實記
[역문]公(공)의 諱(휘)는 可臣(가신)이니 初諱(초휘)는 興(흥)이요, 字(자)는 獻之(헌지)며 鄭氏(정씨)니 學者(학자)들이 雪齋先生(설재선생)이라 稱(칭)하고 本貫(본관)은 羅州(나주)다. 德業文章(덕업문장)과 爵諡勳號(작시훈호)가 後世(후세)까지 빛나니 高麗史列傳(고려사열전)과 州誌(주지)에 실려있다. 지난 高宗戊辰年(고종무진년1868) 大同毁撤(대동보훼철)에 있어 ①靈光(영광)이 능히 獨存(독존)하지 못하니 우리 모두가 欽仰(흠앙)함이 같은바 누군들 慨歎(개탄)치 않으리오. 일찍 寶文閣(보문각) 學士(학사)로서 世子(세자)를 모시고 元(원)에 갔는데 皇帝(황제)가 師儒(사유)로서 待接(대접)하고 禮遇(예우)가 甚重(심중)하여 ②御羹(어갱)을 下賜(하사)하고 乘馬(승마)와 金鞍(금안)및 金帶(금대)와 龍硯(용연)을 下賜(하사)하였다. 中國(중국)에 있을 때 읊은 詩(시)에 『海東(해동)의 南(남)쪽에 錦城山(금성산)이 있으니 山(산)아래 우리집 草家(초가) 數間(수간)이네. 巷柳(항유)와 園桃(원도)를 親(친)히 심었으니 봄이옴에 응당 主人(주인) 돌아오길 기다르니』하였다. 金(금)안장의 말을 타고 遠近(원근)을 出入(출입)함에 鄕人(향인)이 영화롭게 여겨 그 洞(동)을 金鞍洞(금안동)이라 하였고 石面(석면)까지도 또한 金鞍面(금안면)이라 稱(칭)하였다. 公(공)의 德業(덕업)을 다 記錄(기록)하지 못하고 한두 가지를 大畧(대략) 말한다면 錦城山神(금성산신)을 議論(의논)하여 封(봉)하되 定寧公(정녕공)이라 하였고 高麗王(고려왕)이 儒軍(유군)으로 兵丁(병정)을 補充(보충)코자 하니 公(공)께서 中止(중지)하기를 諫(간)하되 이는 선비를 높이고 文學(문학)을 숭상한 道理(도리)가 아니라 하였고 ③醮祭廳(초제청)을 設置(설치)하여 天災(천재)를 물리치고자 함에 다시 諫(간)하기를 또한 佛道(불도)로서 마땅히 除去(제거)될 바가 아니니 어찌 德(덕)을 닦기를 請(청)하지 아니합니까 하였으니 대대 衛正斥(위정척) 하는 種類(종류)가 이와 같이 많았다. 公(공)이 退闕(퇴궐)한 여가에 金文肅公(김문숙공)과 尹文顯公(윤문현공) 諸賢(제현)으로 古今(고금)을 ④商確(상확)하고 道義(도의)로 交遊(교유)하였으며 金鏡錄(금경록) 一部(일부)를 撰(찬)하여 性理(성리)의 學文(학문)을 倡明(창명)하였다. 아! 지금까지 累百年(누백년)이로되 樵牧(초목)들의 指點(지점)한 바요. 行路人(행로인)이 矜式(긍식)하니 비록 이 碑(비)가 없을지라도 가히 오래됨을 考徵(고징)할 수 있거늘 오직 後學(후학)의 高景(고경)한 뜻을 능히 그만두지 못하여 이 글로 遺碑(유비)를 만드니 只今(지금) 立碑(입비)의 일을 監督(감독)한자는 그 後孫(후손)인 遇錫(우석)과 熙勉(희면)이라 한다. [註] ①靈光(영광):은혜로운 빛 또는 임금의 恩惠 ②御羹(어갱):임금이 자시는 국 ③醮祭(초제):星辰에게 지내는 祭祀 ④商確(상확):헤아려 決定함. 魏書禮志에 前賢徃喆 商確有異라 함
高宗甲子後 七十七 年辛巳三月日嘉善大夫弘文館副提學原任奎章閣待敎侍講院說書藏文館翰林經筵官春秋館記事官知製誥完山李範錫 撰
아래와 같이 계보 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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