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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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실록단어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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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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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月峯公事實
(월봉공사실)

[역문]공(公)의 휘(諱)는 황수(凰壽)요 자(字)는 영유(靈臾)며 호(號)는 월봉(月峯)이니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 휘(諱) 가신(可臣)의 십일세(十一世) 孫 이며 해은공(海隱公) 휘(諱) 이하(以夏)의 손자(孫子)다.

명종(明宗) 임술년(壬戌年 1562) 십이월 24일에 공이 면성 월천리 자택(自宅)에서 출생(出生)하니 효우(孝友)가 순지(純至)하며 지절이 강개(慷慨)하고 문장(文章)이 세상(世上)의 추중(推重)한바가 되었다.

여러번 향시(鄕試)에 합격(合格)하였으며 형(兄) 기수(麒壽)와 같이 우계(牛溪) 성선생(成先生)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여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지결(旨訣)을 받었고 강수은(姜睡隱) 항(沆)과 송해광(宋海狂) 제민(濟民)으로 도의교(道義交)가 되었으며

선조(宣祖) 계미년(癸未年 1583)에 대사간(大司諫) 송응개(宋應漑)와 전한 (典翰) 허봉(許封)등이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양선생(兩先生)을 탄핵(彈劾)하여 더러운 비방을 다하니 공(公)이 서태수(徐台壽)등 240인(二百四十人)과 같이 대궐(大闕)을 지키면서 원통함을 변명(辨明)하니 상(上)께서 특별히 비답(批答)하였고

신묘년(辛卯年)에 왜장(倭將) 의지(義智)와 현소(玄蘇)등이 조선(朝鮮)에 사신(使臣)으로 성언(聲言)하되 중국(中國)을 범(犯)하고자 길 빌리기를 협박(脅迫)하니 공(公)이 번연히 붓을 던지고 말하기를 남아(男兒)가 세상(世上)에 처(處)하여 진실로 무(武)로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함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낮이면 말을 달리고 칼을 시험하며 밤이면 돌아와 병법(兵法)을 참구(參究)하고 권(勸)함으로 무과(武科)에 올라 선전(宣傳)에 예천(例遷)되었고

임진년(壬辰年) 삼월(三月)밤에 금중(禁中)에서 숙직(宿直)하는데 꿈에 친후(親候)가 순조롭지 못함을 거듭 알리고 달려 돌아오다 공산역루(公山驛楼)에 시(詩)를 쓰기를 모자(母子)의 은정(恩情)이 중(重)하고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엄(嚴)하구나]하였다.

남귀(南歸)하여 시질(侍疾)을 하고 도망하여 나라 근심을 겸(兼)하더니 사월(四月)에 나라에 대란(大亂)이 있어 적(敵)이 과연(果然) 병대(兵隊)를 보내 침노하니 삼남(三南)이 실수(失守)하고 대가(大駕)가 서수(西狩)하니 공(公)은 집에 있으면서 변(變)을 듣고 부르짖어 통곡하면서 자주 기절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 억만(億萬) 백성(百姓)이 우리 성주(聖主)가 우로(雨露)에 젖지 않는 것이 없거늘 무릇 혈기(血氣)의 종류(種類)에 있어 종사(宗社)의 위망(危亡)을 앉아서만 볼것인가 하고 드디어 형(兄)인 기수(麒壽)와 동생 웅수(熊壽)와 종제(從弟) 곤수(鵾壽) 그리고 동지(同志) 김예수(金禮秀) 정현보(鄭賢輔) 배(裵) 명(蓂) 이경필(李景苾) 박언상(朴彦相) 들과 같이 인읍(隣邑)에 격문(檄文)을 전(傳)하고 의병(義兵)을 소모(召募)하여 수백인(數百人)을 얻어 오월(五月) 이십일(二十日)에 삽혈동맹(血同盟)하고 분의군(奮義軍)이라 부르고 형(兄) 기수(麒壽)는 병(病)으로 가지 못하고 고향에 있으면서 군량(軍糧)을 조달(調達)하였고

공(公)은 군사(軍士)를 영솔(領率)하고 본도감사(本道監祠) 이광(李洸)을 따라 서근(西勤)하는데 광(洸)이 순천(巡遷)하여 싸우지 않고 의병(義兵)을 저요(沮撓)케 하니 공(公)이 의(義)에 근거(根據)하여 다투니 광(洸)이 괴사(愧謝)하였으나 뉘우치지 않았으며

칠월(七月)에 군(軍)이 수원(水原)에 이르자 필패(必敗)할 것을 알고 용인(龍仁)으로 가지 않고 홀로 독성(禿城)을 지켰는데 삼도(三道)의 군사가 분귀(奔潰)하자 흩어진 군졸(軍卒) 오백여인(五百餘人)을 수습(收拾)하고 죽기를 맹서하고 굳게 지켜 남하(南下)의 세(勢)를 막고 있는데 전부사(前府使) 고경명(高敬命)이 금산적(錦山敵)을 토벌(討伐)함을 듣고 회군(回軍)하여 달려 조지(兆至)함에 고공(高公)이 이미 패설(敗說)함으로 전부사(前府使) 최경회(崔慶會)를 추거(推擧)하여 장사(將師)를 삼고 자신(自身)은 부관(副官)에 자처(自處)하여 남원게골(南原揭鶻)을 목표(目標)로 동부(同赴)하여 장수(長水)로 진병(進兵)하고 최홍기(崔弘器) 권극년(權克年)등으로 좌우(左右)로 협찬(協贊)케 하여 금산(錦山) 무주(茂朱)의 적(敵)을 격파(擊破)하였고

이현(梨峴)에 둔(屯)친 적(敵)이 남하(南下)하여 노략질 한다는 말을 듣고 공(公)이 최공(崔公)에게 청(請)하기를 노모(老母)가 계시는데 형제(兄弟)가 종군(從軍)하여 봉양(奉養)할 사람이 없고 적(敵)은 또 지경에 들어오니 원컨대 돌아가 장차 천륜(天倫)을 온전케 하겠다고 하니 최공(崔公)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유격장겸모량차사(遊擊將兼募糧差使)를 삼으니 연해열읍(沿海列邑)을 추적(追敵)하여 본현(本縣)에 환귀(還歸)하니

그때 고을 원님이 죽어 공(公)께서 드디어 임시로 현사(縣事)를 관섭(管攝)하여 모부인(母夫人)을 받들고 입성(入城)하여 의병청(義兵廳)을 설서(設署)하고 병기(兵器)를 완전(完全)히 수매(修埋)하였는데 포적(浦賊) 이초(李超)가 함평(咸平)으로부터 현계(顯界)에 들어오니 공(公)이 백포(白布)에다 충의(忠義) 이자(二字)를 써서 걸어 놓고 군졸(軍卒)에게 하령(下令)하여 풍악을 평상시(平常時)와 같이 울리게 하니 적(敵)이 의심(疑心)하여 밤에 도망(悼亡)하니 공(公)께서 동생 웅수(熊壽)와 종제(從弟) 곤수(鵾壽) 그리고 정현보(鄭賢輔) 박언상(朴彦祥)) 등으로 기병(奇兵)을 철령요해처(鐵嶺要害處)에 내보내 추습(追襲)하여 파적(破賊)하니 연읍(沿邑)이 힘입어 편안하였고

계사년(癸巳年) 이월(二月)에 초유사(招諭使) 나덕원(羅德元)이 의청(義廳)에 래숙(來宿)하였는데 공(公)에게 증시(贈詩)하기를 「논회(論懷)에 우과사(于戈事)를 말하지 말라 이야기가 우과사(于戈事)를 이르면 분(憤)한 눈물 비게네」하니 공(公)이 즉화(卽和)하기를 「고신(孤臣)이 서근(西勤))의 뜻을 이루지 못하니 날마다 용만(龍灣)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비게네」하였다.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이 포계(褒啓개)하여 임치(臨淄)를 지키게 하니 이초일복(李超一復)이 포도(浦島)에서 연변(沿邊)에 출설(出設)하니 공(公)이 정현보(鄭賢輔) 박의선(朴義善)과 같이 다경진(多慶鎭) 후곡(後谷)에다 군사(軍士)를 매복(埋伏)시켜 병(兵)을 맞이하여 엄격대획(掩擊大獲)하고 목포(木浦)까지 추지(追至)하여 이초(李超)를 사살(射殺)하니 남은 무리가 사방(四方)으로 흩어지고 부획군량(俘獲軍糧)을 우의진중(右義陳中)으로 보내고 봉친(奉親)에 성경(誠敬)을 극진히 하되 비록 창양중(搶攘中)에 있더라도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다하고 정성(定省)의 틈에 동지(同志)들과 군무(軍務)를 의론(議論)하였다.

정유년(丁酉年)에 서생포(西生浦)에 출진(出鎭)하니 적관(賊冠)가 재령(再逞)하여 한산(閑山)이 함락(陷落)되고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이 죽으니 공(公)이 박언상(朴彦祥)과 같이 군기(軍騎)로써 절영도(絶影島)에 매복(埋伏)하고 적(敵)이 후원(後援)을 만나 분격대파(奮擊大破)하여 그 군량(軍糧)을 불살랐다.

조정(朝廷)에 알려져 군기사정(軍器寺定)에 임명(任命)되었고 적장(賊將) 가정좌마조(家政左馬助) 서해(西海)를 경유(經由)하여 무안(務安)을 진격함락(進擊陷落)하니 체찰사(體察使) 본원익(本元翼)이 공(公)을 임시(臨時)로 차출(差出)하여 도수(都守)에다 조방장(助防將)을 겸(兼)하게 하고 본현(本縣)으로 돌아가 수획(守獲)케 하니 공(公)이 곧바로 휘하(麾下)의 죽을수 있는 군졸(軍卒) 백오십삼인(百五十三人)을 일으켜 밤을 이용 서치(西馳)하니 가독(家督)은 조금 완전(完全)하되 읍리(邑里)가 분탕(焚蕩)되어 남음이 없다.

드디어 입성(入城)하여 초유(招諭)하고 문(門)을 나누어 거수(拒守)하니 좌마조(左馬助)가 임치(臨淄)로부터 돌아서 성하(城下)에 핍박하니 공(公)이 성루(城楼)에서 자리를 펴고 군용(軍容)을 정재(整齋)하니 적(敵)이 자주 주위(周圍)를 환시(環視)하다가 가니 진격(進擊)하여 파적(破賊)하였고

무술년(戊戌年) 십일월(十一月)에 백씨(伯氏)께서 이충무공(李忠武公)을 뒤따라 노량(露梁)에서 순절(殉節)하니 모부인(母夫人)이 소식을 듣고 기절(氣絶)하여 돌아가시니 공(公)이 호통(號慟)하여 거의 기절(氣絶)하여 이르기를 나의 한마음 충효(忠孝)가 여기에 이르러 다하였다고 하였다. 이미 장례(葬禮)를 마치고 묘하(墓下)에 살면서 삼년을 읍혈(泣血)하였다.

무신년(戊申年)에 해랑(海浪)의 적(敵)이 연변(沿邊)에 창궐(猖獗)하니 병조판서(兵曹判書) 약봉(薬峰) 서소연(徐消筵)이 공(公)의 충효(忠孝)를 가히 쓸만하다 하여 천거(薦擧)하니 충청도방어사(忠靑道防御使)에 임명(任命)하였으며 수사(水使) 이간(李侃)과 첨사(僉使) 이경필(李景苾)과 별장(別將) 박신오(朴信吾) 고봉(高鳳)등으로 안흥(安興)에 유진(留陣)하게하다.

이날 밤에 풍도(風濤)가 크게 일어나 적선(敵船)이 갑자기 빔박하니 공(公)이 을채(乙寨)에 있다가 먼저 올라 분격(奮擊)하여 적장(敵將)을 사살(射殺)하니 갑채(甲寨)에서도 이어서 이십여쌍(二十餘雙)을 당파(撞破)하니 승재도기(勝哉圖記)를 만들어 이어서 찬(贊)하기를 충(忠)이 허국(許國)에 길었고 성(誠)은 신명(神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첩보(捷報)가 이름에 상(上)께서 벽(壁)에다 써붙이고 칭미(稱美)하였으며 가선(嘉善)에 특승(特陞)시켰다. 이해에 광해(光海)가 사위(嗣位)하여 정령(政令)이 많은 문(門)에서 나오니 공(公)이 이 끈을 던지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세사(世事)를 일고 화석(花石 )과 자오(自娛)하더니

무오년(戊午年)에 이이첨(李爾瞻)이 폐모(廢母)의 논의(論議)를 불러 일으켜 그 무리 이해(李楷)등을 시켜 열읍(列邑)에 편행(遍行)하여 유림(儒林)들의 상소(上疏)를 올리고자 현교(縣校)에 래회(來會)하였는데 그때 공(公)은 병(病)에 잠겨 이자(二子)인 위(緯)와 기(紀)를 시켜 동지(同志) 배명(裵蓂) 박정개(朴廷開)로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수복(守僕)에게 령(令)을 내려 북을 울려 다스리니 해(楷)등이 부끄러움을 안고 도망하니 참판(參判)인 추탄(抽灘) 김선생권(金先生權)이 헌의획죄(獻議獲罪)하여 본현(本縣)에 편배(偏配)하니 공(公)이 동문우(同門友)로 왕래(往來)하면서 성(誠)과 경(敬)의 오지(奧旨)를 강론(講論)하여 자질(子姪)들에게 자업(諮業)케 하였다.

계해년(癸亥年) 인조(仁祖) 개옥(改玉)에 무재동지(武宰同知)에 가질(加秩)되었으나 병(病)을 빙자하여 취임(就任)하지 않았고 인조(仁祖) 무진년(戊辰年) 사월(四月) 십칠일(十七日)에 집에서 마치니 향년(享年)이 육십칠세(六十七歲)였다.

숙종(肅宗) 무자년(戊子年1708)에 향인(鄕人)이 월천사(月川祠)를 세우고 형제(兄弟)가 같이 배향(配享)되었고 도내(道內) 유림(儒林)의 공의(公議)가 재발(齋發)하여 금산대첩사(錦山大捷祠)에 배행(配行)되었으며 세고(世稿)와 유집(遺集)이 있어 세상(世上)에 행(行)하니 사실(事實)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 삼강록(三綱錄) 동사록(同事錄) 조선사략(朝鮮史略)과 금곡지(金谷誌) 철산지(鐵山誌) 임내지하평지무안지(臨淄誌咸平誌務安誌) 호남지(湖南誌)등에 실려있다.

아래와 같이 계보 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系 譜  : 5卷301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諱薰

 파계(派系)

  海隱公諱以夏派

  

  

고조(高祖)

諱之雅

증조(曾祖)

諱益宗

조(祖)

諱以夏

고(考)

諱砥柱

  

15世諱 凰壽(황수)

靈臾

 

月峯

明宗17壬戌 1562年 12月24日

仁祖6戊辰 1628年 4月17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