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

 임진왜란 때 한 집안에서 다섯 분의 충신이 나와 200여년 전인 1801년(순조 1) 7월 20일에 조정에서 오충(忠)에게 추증의 은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전국의 유생들이 향원의 공의가 이루어져 마땅히 위패 봉안의식을 거행했어야 할 일이나 후손들의 여력이 미흡하여 미루어 오다가 1833년(순조 33)에 창건하고 문정공을 주벽으로 기재공(棄齋公) 이하 오충(忠)을 종배하여 위패 봉안의식을 가졌다.

 1868년(고종 5)전국에 서원 훼철령이 내려져 훼철되었다가 유론이 제발하여 80년 전인 1929년 봄에 복실하였다. 문정공 설재선생은 문장과 도덕으로 성리의 근원을 창명하였고, 처음 벼슬할 때부터 간정(報貞)하여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르게 하니 권간이 고슴도치처럼 위축되며 조정이 숙정되었다. 졸함에 충선묘(忠宣廟)에 배향(配享)하는 우악(優)함이 있었고, 아래로는 욕의(儀)의 성거(盛)가 있었다.

 문정공의 7세손 기재공은 휘가 훈(薰)이요 아름다운 자취를 이어 음직(蔭職)으로 벼슬이 감찰어사에 이르니 장광의 시기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는데, 정축에 단종을 모복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남해로 귀양 갔었고, 겨우 풀려남에 관악산중에 숨어 매양 단종의 기일을 당하면 금강정에서 통곡하고 돌아오니 그 정충고절은 가히 생육신 사육신과 함께 서로 백중하다 할 것이다.

山祠(오산사) 記享(배향) 七人
文靖公(문정공) 諱(휘) 可臣(가신) : 主壁(주벽)
棄公(기재공) 諱(휘) (훈)
壬亂忠臣(임난충신) 五忠臣(오충신)
愛竹軒公(애죽헌공) 諱(휘) (응) : 환梁海戰(노량해전)
愛松軒公(애송헌공) 諱(휘) (홍) : 梁海(노량해전)
公(고정공) 諱(휘) (진) : 梁海(노량해전)
松溪公(송계공) 諱(휘) (회) : 歸山 (금산전투)
月菴公(월암공) (휘) 民秀(민수) : 山 (금산전투)

함평의 故(고) 참봉 鄭民秀(정민수)와 그의 삼촌인 주부 (정응), 주부 (정홍)과 그의 삼종제인 학생 停會(정회), 첨정 塵(정진)의 한집안 다섯 충신에게 추증의 은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유생의 상언으로 인하여 예조에서 복계한 까닭이었다.

鄭民秀(정민수)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지극히 효도하였으므로 추천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를 않았는데 임진년 왜변에 삼종제 (정회)와 같이 趙憲(조헌)의 격분에 응하였다가 함께 錦山(금산)싸움에서 순절하였다.

鄭(정응)은 전 선전관으로 高敬命(고경명)이 거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동생 (정홍)과 같이 칼을 짚고 싸움에 다다랐다가 금산에서 패전하기에 명(정홍) 및 재종질 (정진)과 더불어 도원수 金命元(김명원) 의 진에 이르렀는데 金命元(김명원)이 우수사 李德斌(이억기)의 진중으로 보냈다.
전공이 있어서 鄭(정응)과 (정홍)에게는 모두 훈련원주부를 제수하고 (정진)에게는 훈련원첨정을 제수했는데 노량의 해전에서 세 사람이 동시에 순절하였다.
*위 원문 중의 삼종제라는 표현은 삼종형이 잘못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바 鄭民秀(정민수)는 1569년생이고 (정진)은 1551년생, (정회)는 1564년생이기 때문이다.

二. 다섯 분 忠信들의 사실

임란충신(壬亂忠臣) 애죽헌공(竹軒公) 휘 응(應)

임란충신 애죽헌공의 휘는 응(廳)이요 자는 덕양(德場)이며 기재공(棄齋公) 휘 훈(薰)의 6세손으로 경암공 (敬菴公) 휘 이주(以周)의 손자다. 배는 숙부인 광산정씨 현감 인학(光山鄭氏縣監學)의 따님이다. 1562년(명종 17)에 함평군 월야면 갈동방(洞坊)에서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이질이 있었으며 좌미상에 충(忠)자 문채가 있었으며, 문장이 화첨하였고, 지용이 초매(超)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무과에 올라 선전에 열천하였고, 1589년 조정 안에 당론이 바야흐로 확장하여 부정이 나타남을 보고 물러나 전여에 은거하였다.

1592년 대가가 파천했다하여 는 소식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해 동생인 전 선전 홍(鴻)과 같이 전주부 정충량에게 글을 보내어 내가 몸을 나라에 맡겼는데 추로(醜)가 공치(孔織)하여 군부가 몽진한 위급한 이때 어찌 창을 베개하고 칼을 밟아 의를 잊으리요 하니 정충량 공이 분연히 내회하니 동생 홍(鴻)과 수백인의 장정을 모집하여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진으로 향하는 도중에 재종질 전 첨정 진()과 합류하여 김명원 진에 이르니 기특하게 여기고 우수영에 참좌(佐)할 인재가 없다고 하면서 우수사 이억기(李億) 진중으로 보내니 이공이 이미 공의 명성을 듣고 기접하여 말하기를 국사가의(國事議)요 전선가임(戰船可任)이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요 영우는 호남의 울타리니 힘을 합쳐 막은 후에야 국세가 온전할 것이요 적을 섬멸할 것 이라 하니 이공이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공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적을 토벌하여 난을 안정시키는 날을 기다릴 것이라 하였다.

공의 형제로 좌우보익장(左右補翼將)을, 재종질 전첨정 진(晉)은 유진장(留將)을 삼고 전선 10척을 영솔하고 좌수사 이순신을 당항포에서 만나게 하였는데 내량의 싸움을 보고 몸소 칼날을 무릅쓰고 먼저 적선에 올라가 왜병 수십 명의 목을 베었으며, 예교(史橋)의 싸움에 정신독전(挺身督戰)하여 동면에 투구를 쓴 적을 쓰니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서로 이어 밤내 도망하였고, 안골포의 싸움에 적선 10여 척을 당파破하니 좌수사 이순신이 포계하여 형제가 같이 훈련원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1598년 노량의 싸움에서 적의 탄환에 맞았으나 상처를 싸매고 용전분투하다 전사하니 동생 홍평과 재종질 진籍도 분개하여 분비역전奮臂力하다 같은 날 적탄에 맞아 순직하니 초혼招魂하여 함평군 나산면 승충동 간좌長坐에 장사하였다.
1801년(순조 1) 12월 8일에 통정대부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議에 증직되고 오산사煞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임란충신壬亂忠臣 애송헌공(愛松軒公)의 휘는 홍(鴻)

임란충신 애송헌공의 휘는 홍(鴻)이요 자는 덕점(德)이며 기재공 휘 훈(薰)의 6세손으로 경암공 휘 이주의 손자다. 배는 숙부인 광산김씨이다.
1565년(선조 21)에 형인 응과 같이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에 초배되었는데, 1589년 조정에서 당론이 바야흐로 벌어짐을 보고 전여(田)에 퇴거하였다.
1592년 임진에 임금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하여 피란한 사민 수백 인을 불러 모아 충의로써 깨우쳐 도원수 김명원 진에 다다르니 김공이 우수영에 참좌할 인재가 없다고 하면서 공 형제를 우수사 이억기 진으로 보내니 이공이 접견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좌우보익장을 삼고 전선 10척을 내주었다.
죄수사 이순신을 당항포에서 만나게 하였는데 내량의 싸움을 보고 적선에 올라가 왜병 수십 명의 목을 베었고, 안골포(安骨浦)의 싸움에서는 먼저 왜선에 올라가 분격하며 이기고 노획품이 많았으니 좌수사 이순신이 전공 사실을 조정에 올려 포상하기를 청하니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다.
1598년 노량의 전투에서 적탄에 맞자 상처를 싸매고 용전분투하다 형제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니 초혼 하여 승충동 간죄에 장사지냈다.

임란충신 고정공(高亨公) 휘 진

임란층신 고정공의 휘는 진(精)이요 자는 자의(儀)이며 기재공 휘 훈(薰)의 7세손이고 일재공 휘 이은 (逸齋公諱以殷)의 증손자이며 양성재공(養性齋公) 휘 순경(舜)의 아드님이다. 배는 숙부인 옥천 설씨 진사 응룡(淑夫人玉川薛氏進士應龍)의 따님이다. 1551년(명종 6) 3월 3일에 함평군 월야면 양정리 음지촌 에서 출생하였으며 용의가 투매하고 기개와 용력이 절륜하였다. 일찍이 일재(齋) 이항(李恒) 선생을 스승 으로 모시고 충의에 힘썼으며 건재(建) 김천일(金千) 선생을 좇아 세한의 고절되기를 결탁했다.

1586년에 무병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에 이르렀으나 1589년 기축에 당론이 방장하여 조정이 부정함을 예감하고 전사에 퇴거하여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며 호를 고정(高亭)이라 편액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의병을 일으켜 김억추( 秋)와 더불어 대동강을 방수하였고, 귀로에 재종숙 응)과 홍(鴻) 두 분과 같이 한강을 지키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만나 대화를 나누니 김공이 대기함을 알아보고 우수사 이억기(李德斌) 진으로 인도하였다.

공의 일행이 이수사 진에 이르자 이공이 일어나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제 삼공(三公) 을 얻었으니 토벌정란의 날이 멀지 않았다 하며 주부 형제를 좌우 보익장을 삼고 공은 유진장( 將)으로 삼아 병선 십척을 주고 한산과 온라 이도(二島)를 지켜 왜군을 막게 했다.

6월 5일 고성 당항포에 왜선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받고 즉시 출격하여 격전 끝에 왜장을 사살하고 병선 26척을 격파했다. 7월8일에 또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공은 이순신과 같이 견내량에 있는 왜선을 한산도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술로 왜선 66척을 격침하고 수군 10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온라도(溫羅島)로 진을 옮기고 여러 차례 싸워서 승리하였고, 안골포(安骨浦) 싸움에서 왜선 수십 척을 당파하고 검 40자루와 화살 70개를 탈취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좌수사 이순신이 포계(啓)하여 훈련원 부정에 승진되고 정충보국(貞忠補國)의 사자를 쓴 옥패를 명사(命賜) 받았다.
1593년 2월에 전라감사 권률은 의병 30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을 점거하고 공은 전라병사 선거이 (居)와 합세하여 왜군의 배후를 위협하고 공격하여 각지에서 싸워 이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공은 어머니께 울면서 결별하며 말씀하기를 오늘의 사세가 급박합니다.
의는 군신에 중하고 은혜는 모자에 경하다 하시고 다음날 의병 100여 명을 모아 통제사 이순신에 합세하시고 8월에 어란포( 浦)에 나타난 왜선을 격파하고 9월에 왜선이 또다시 어란포로 돌아온다는 첩보를 받고 재종숙 월탄공 기수(月遺公壽)와 함께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으로 벽파진(碧波津)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고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다가 다음 날 16일 새벽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조수를 타고 명량으로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하여 왜장 마다시를 사살하고 때마침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순간을 이용하여 왜선 31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니 빼앗겼던 제해권을 회복하였고, 왜군의 서진을 막았다.

1598년 8월에 일본의 풍신수길이 병사하여 왜군이 철수하자 공은 11월에 애죽 애송 두 분과 의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군량을 모아 노량에 들어가 이순신에게 합세하고 이공의 좌우에서 전략을 획책하며 철수하는 왜선 500여 척을 추격하여 순식간에 50여 척을 격파하고 왜군 2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갑자기 왜군이 반격해 오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명나라 제독 진린(陳隣)이 인솔하는 수군과 합세하여 왜선 400여 척을 격침하였다.

이에 왜군이 전의를 잃고 남해 방면으로 도주하자 퇴로를 막고 추격하다가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았으나 자기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고 싸우라 유언하고 전사하니 공은 더욱더 적개심이 가득차 전일에 입었던 상처를 싸매고 앞장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독전하시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니 향년 48세로 때는 1598년 11월 19일이다.
가동(家) 충남(忠男) 등이 초혼하여 돌아와 석화산 북록 증조묘 아래 병좌에 고장(葬)하여 삼합조(三合) 하고 묘비를 세웠다.

1785년(정조 9) 을사에 선무원종훈이등(宣武原從勳二等)에 녹권되고 1801년(순조 1) 12월 8일에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議)에 증직되었으며 오산사(染山洞)에 배향되었다.

임란충신 송계공(松溪公)의 휘는 회(繪)

임란충신 송계공의 휘는 회(繪)요 자는 가후(可後)이며 기재공 휘 훈(薰)의 7세손이고 모헌공(素軒公) 휘 이상 (以商)의 증손자이며 선무랑군기시봉사(宣武軍器寺奉事) 휘 학령(鶴)의 아드님이다. 배는 숙부인 여산송씨 익조(山宋氏 )의 따님이다. 1564년에 갈동방에서 출생하니 지효하고 기국이 초예(超)하 였고, 음직으로 충의위에 올랐다.

임금이 서순했다는 말을 듣고 분격하여 삼종인 민수(民秀)가 서쪽 행재소에 가고자 하니 공이 말해 주기를 주나라를 침범한 오랑캐가 심히 치열하니 촉(蜀)으로 피란 가서 바야흐로 궁색하였다. 아동(我東)의 신민된자 눈물을 뿌리지 않은 자가 없으니 팔을 걷어 올리고 임금께 충성할 정성을 본받을 것이다. 회(繪) 비록 재주 없으나 의리상 가히 뒷서지 않을 것이라 하고 드디어 같이 의병 500인을 취모하여 전주에 행도하니 본현 출신 김헌(金)을 만나 같이 죽기를 맹세하고 중봉 조헌(重峯趙憲) 선생 진에 동부(同)하니 선생께서 그 장모(狀貌)를 기특하게 여겨 편장(將)에 임명하였다.

청주의 싸움에 방략을 세워 주둔한 왜군을 축출하고 8월 17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인 연곤평(延坪)에 도착하여 아군은 그날 저녁때까지 권율이 이끄는 군대를 기다렸으나 도착하지 않자 조헌의 군대는 다음날 단독으로 공격할 결심을 하고 금산성에서 북쪽으로 5리쯤 떨어진 벗들의 경양산에 진을 쳤다.
밤을 세워 공격준비를 한 조헌(趙憲) 군은 18일 아침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전날 밤 금산성에 있던 왜군은 조현 선생이 이끄는 병력이 많지 않음을 알고 야음을 틈타 아군의 배후에 일부 병력을 투입시켜 놓고 있었다.

조현 선생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권율이 이끄는 후원군이 오지 않자 아군의 수효가 왜군에 비하여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백성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이때 어찌 오늘의 삶과 권세를 유지하며 목숨을 아까워 하리요.” 하며 싸울 것을 결심하고 조헌(趙憲) 선생은 북쪽에서, 승장 영규(靈圭)는 서쪽에서 일시에 금산성을 향해 공격을 가하니 왜군도 성에서 나와 응전을 하는 동시에 전날 밤 아군의 배후에 투입해 두었던 왜군이 아군의 배후를 공격해 왔다.

이렇게 하여 적에 의해 포위상태에 빠진 아군은 화력과 군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4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며 싸우다가 공은 조광윤(趙光倫), 임정식(任式), 이러(李), 곽자방(郭自防) 등 700 의사와 함께 연곤평 벌판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초혼하여 월야면 고정촌 앞산 을좌에 고장(葬)하였다.

1595년(정조 9)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권되고 1801년 12월 8일에 조봉대부호조좌랑(朝奉大夫 曹佐郞)에 증직되었으며 오산사(繁山祠)에 배향되었다.

임란충신 월암공 휘 민수(民秀)

임란층신 월암공의 휘는 민수(民秀)요. 자는 자준(俊)이며 기재공 휘 훈(黨)의 7세손으로 경암공 휘 이주(周)의 증손자이며 도남공(圖南公) 휘곤의 아드님이다. 배는 통례원인의 언필(人光山金氏通禮 院引義)의 따님이다. 1569년에 출생하였으며 부모를 봉양하되 성효가 비지(至)하였으며 문장이 세상 의 추앙한 바가 되어 해광 송제민(海王濟民)과 교유하였으며 행의로 도천에 들어 1590년(선조 23) 경인에 효릉참봉(陵 奉)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김포에서 뵙고 선생과 말을 함에 기특하게 여기고 왕가에 장차 동고 (東顧)의 근심이 있을 것인데 군의 재기를 보니 반드시 수세의 쓰임이 될 것이니 충의에 힘쓰라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공은 모친상 중에 있다가 겨우 상복을 벗었는데 대가가 서순했다는 말을 듣고 북망 통곡하였으며 이에 삼종 회(繪)와 같이 의병 500을 창모하여 장차 의주로 달려가려고 하였는데 중봉(重峯) 조선생이 기고를 전주에 세우고 의병을 징소한다는 말을 듣고 가묘에 결별을 고하고 추로가 날뛰며 열군이 풍미하니 임금의 옷을 입고 임금의 밥을 먹으면서 어찌 차마 앉아서 보리요 하며 편성된 군수(帥)를 인솔하고 천리를 부원하여 전주에 행도하니 본현 출신 김헌(金)을 만나 동사할 것을 말하고 의막에 치부하였다.

조선생께서 반갑게 맞아주시고 공에게 군무를 위촉하고 격문을 보내고 군량을 운반하며 토복의 계획을 세우고 청주의 싸움에 방략을 협찬하며 주둔한 왜군을 수출하였고 8월 18일에 진을 금산성 밖으로 옮겨 도원수 권율(權냈) 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적은 아군의 뒤에 구원군이 없음을 염탐하고 아직 포진하지 못함을 틈타서 쳐들어오니 선생이 영을 내려 금일에 다만 일사가 있을 것이니 사생과 진퇴에 마땅히 의(義)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하니 공이 응성(應聲)하고 역전양구(戰良久)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아군의 열세와 시진역(盡力)하여 마침내 적이 난입하니 조헌 선생이 막중에 앉아 움직이지 아니하고 북을 울리며 싸움을 독촉하니 공은 조광윤(趙光倫), 임정식, 이려(李), 김헌(金) 등과 서로 말하기를 패전망신하였으나 분수에는 족하다 하고 맨주먹으로 치니 700 의사가 한 사람도 대오를 이탈한 자가 없었다. 공은 삼종 회(繪)와 같이 선생의 시체 곁에서 함께 전사하니 의갑이 초혼하여 함평현 갈동방 승충동 산 간좌에 고장(軍葬)하였다.

1595년 을미에 금산 싸움터에 입비하였고 1785년(정조 9)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권되고 1801년 (순조 1) 통훈대부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증직되었으며 오산사(山祠)에 배향되었다.

일실조두에 조손(祖)이 병제하여 동서분향하니 도덕겸충이 울연(然)하여 가덕이 이에 아름다우며 한관위의(漢記或義)를 가히 지금에 다시 보도다. 의하고도 성(盛)하도다. 오충(忠)의 위대한 업적이 국사와 야사에 소재(四載)되었으니 사람들이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의로움을 의롭게 한즉 어찌 우리 가문의 광영만이 되리요. 금세의 일이 금일을 위함이 아니며 경부회의 시기가 장차 여기에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이충무공 동의록, 호남절의록, 막좌문생동일순절록, 임진왜란과 금산전투, 함평군지.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 석지
1988년에 대호군공(大護軍公) 정전(全)의 子(자손)들이 合(합심 전력하여 創建(창건)하였다.
(오정)의 始祖(시조) 高麗軍器監判事公 (고려군기감판사공 정해)를 主壁(주벽)으로 禮賓卿公産 (예빈경공 정종산), 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공 정송수), 金紫光祿大夫 文靖公 鄭可臣 (금자광록대부 문정공 설재 정가신), 大護軍公 (대호군공 정전), 大匡輔國都僉議公 (대광보국도첨의공 정홍진), 資憲大夫禮曹判書 評公 鄭(자헌대부예조판서 빙헌공 정국) 七(칠위) 를 奉安(봉안)하고 있다.

祭享日(제향일)은 每年(매년) 陰曆(음력) 2月 250 完(완정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