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보

21호 종보에 잘 못 쓴 글자를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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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4-14 09:06 조회1,3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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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창주유고서 원문과 택문, 유작 목록 소개 / 글쓴이 : 정병선
페이지 : 57 본문 아래서 위로 3줄
잘 못 씌여진 글 : 정인재 鄭齋(개청 介淸) →  정곤재 鄭齋(개청 介淸)로 바로 잡으며 固城鄭氏 종문에 철자 오류로 누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참고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자 의백(義伯). 호 곤재(困齋). 본래 지방호족 출신으로 어려서 중이 되어 풍수설(風水說)을 배우고 역학(易學)·율려(律呂)에도 정통하였다. 1564년(명종 19) 천거로 임관, 1585년(선조 18) 교정청(校正廳)의 낭관(郞官)을 거쳐 영릉(英陵)참봉에 이어 6품에 올랐으며, 스승 박순(朴淳)이 서인(西人)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동인(東人)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과 친교를 맺고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곡성(谷城)현감이 되었으나 스승을 배반했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1589년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였으나 정철(鄭澈) 등 많은 학자들로부터 배절의논(排節義論)이라는 비난을 받던 중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죽었다. 문집에 《곤재우득록(困齋愚得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