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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과 경무공 정식선생의 좌천


    
 

서언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문일수록 훌륭한 조상을 모시게 되는 것이며 그 조상의 위업을 기리고 현창하는 것은 후손들로 하여금 귀감이 되게 하여 가문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인바, 만일 선조의 행적이 사실과 다르게 전해져 선조를 욕되게 한다면 이 이상 더큰 불효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조의 행적이 바르게 전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일 것이다.

경무공 정식선생은 조선조에 재상을 지내면서 여진족 침입을 물리치고 조선초기 군사제도 확립과 민생안정은 물론 서민계몽에 공헌하시어 서거 후에 경무란 시호를 받게 됨으로써 오정을 호남명가에 들게 한 위대한 분이신데 조선 세조조에서 재상을 지내고 신숙주와 내외종간에 한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하여 추측으로 수양대군의 비정한 왕위찬탈(계유정란) 음모에 가담하여 대관에 오른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후손이 혹 있을 까 두려워 사기의 근거를 들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이에 소개하는 바이다.


1. 계유정난(癸酉靖難)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이 병약하여 즉위한지 2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단종이 12살의 어린나이로 왕통을 이으니 자연히 왕권은 미약하고 신하들이 강성하여 정사를 보게 됨으로 종친 측에서 볼 때에는 왕권의 문제보다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모이므로 지략과 무예가 뛰어난 수양대군이 왕권탈취의 야심을 품고 준비하여 오다가 1453년 10월 10일 석양에 수양대군이 직접 신복무사 2명을 데리고 좌의정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대화 중에 불의의 습격으로 김종서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대궐로 들어가 어린 단종에게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수양대군의 친제)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으므로 사정이 절박하여 사전에 상주치 못하고 수괴 김종서를 죽이고 왔습니다”라고 보고 한 뒤 그날 밤 왕명을 빌려 영의정 황보인 등 반대파를 모조리 불러들여 궐문에서 척살해버리고 다음날 친제 안평대군 부자를 비롯하여 우의정 정분 등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역모죄를 씌워 귀양을 보내 버리고 자기를 따른자들을 앞세워 요직에 앉히고 자기가 스스로 의정부 영사 경연영사 겸 판이조사 판 병조사를 겸함으로써 정권 인사권 병권을 장악하여 사실상 왕위를 찬탈해버린 이 사건이 계유년에 일어났다하여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2. 계유정난 전 경무공 정식선생의 조정 지위

경무공은 1407년에 나주 금안동에서 탄생하시어 1432년(세종14년) 26세에 문과급제하시어 여러 벼슬을 거쳐 1445년(세종 27년) 1월에 조야가 경모하고 청환의 자리인 이조정랑 정 5품 직에 올랐으며 이 때 세종대왕의 妃 소헌왕후가 죽자 국장도감판관(國葬都監判官)에 발탁되어 능실제도를 잘 다스려 세종께서 가용지재라고 칭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정양 김길통 하위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중시에 합격하여 대관에 이를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1449년(세종31년) 의정부 사인 정 4품에 승진되어 정승의 지휘를 받아 의정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실무책임자가 되었으며 1453년(단종1년) 5월 4일 백관의 비행을 탄핵하고 임금의 잘못을 시정요구하는 사간원의 지사간원사 종 3품에 승진 되었는데 이 해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3. 경무공 정식선생의 좌천

1452년 5월에 단종이 즉위하고 그 해 9월에 명나라 사신이 단종 즉위에 대한 승인으로 고명을 가지고 온데 대하여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그 해 10월에 수양대군이 사은사가 되어 신숙주 등 많은 종사관을 데리고 다녀왔는데 그 종사관 전원을 수고하였다 하여 벼슬을 한 품계 씩 올려주었다. 그리고 역대병요를 세종 때 이석형 등이 편찬한 것을 문종 때에 왕명으로 수양대군이 총괄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이 삭제 보충하여 1452년(문종2년)에 완성한 책인데 여기에 참가했던 성삼문 하위지등에게도 수양대군의 제의에 의하여 벼슬을 한 품계 씩 올려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1453년 4월 9일부터 얼론기관인 사헌부와 사간원 집현전이 발칵 뒤집혀 연일 반대상소가 올라왔다. 그 이유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종사관이나 병요편찬에 참여한 학사들의 공적이 벼슬을 올려줄 정도가 아니며 더군다나 임금의 뜻이 아니고 종친인 수양대군의 제의에 의한 것이므로 본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의정부의 재상들과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니 다시 고칠 수가 없다는 임금의 비답이 내려졌다. 그러므로 사헌부 집의 하위지 집현전 직제학 성삼문 등은 자기들이 직접 병요편찬 관계로 한품계를 올려받은 당사자 임에도 이번 결정이 임금의 뜻이 아니고 또 그런 공적이 없는데도 받게되면 타인의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속 장문의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위지는 들어주지 않는다면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사직서 첨부하여 3번이나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임금을 직접 뵙고 마음 속에 품은 것을 직접 말씀드리고 벼슬을 내놓던가 말던가를 결정하겠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승인하지 않았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게되니 심각한 기류가 흘렀다. 의정부 당상관들은 한 번 결정 시행된 사항을 번복하자니 여러 사람이 관련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의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수양대군 측에서는 자기가 제의하여 이루어진 사항인데 사태가 이렇게 되니 앞으로 자기 운신의 폭에 크게 도전을 받고 있는 문제로 비화되고 있으므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는 실정이 되고 있었다. 사실 이때에 수양대군은 왕위찬탈을 꿈꾸고 조정관리들에게 인심을 얻어 두자는 계획인데 이것을 강직하기로 이름난 하위지가 눈치채고 물고 늘어진 것으로 본다.

이 때 재상들은 지금 하위지가 벌써 집에 돌아가 지시를 기다리고 있으니 할데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아직은 임금을 만나보지 못하도록 하여야 옳다고 하고 임금에게는 만나주지 말도록 간하였다. 그리고 재상들은 무두 하위지가 강직하고 솔직하여 숨김없이 말할까 봐 두려워 만나보지 못하도록 간한 것이다. 이 일은 계유 4월 26일 노산군일기의 기록이다.

이런 와중에 사간원의 관리가 임명장에 승인수표를 잘못한 죄로 형조의 탄핵을 받고 4월 12일부터 일을 보지 않고 있다가 5월 4일 인사에서 사간원 관리들이 모두 교체되었다. 정양을 좌사간으로 김길통을 우사간 정식을 사간원지사 최효남을 좌헌납 이승윤을 우헌납 강미수를 좌정언 김영유를 우정언 그리고 이날 하위지를 사헌부 집의에서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 발령하였다. 그래도 하위지는 출근하지 않고 아예 고향집으로 아프다는 핑계로 돌아가 버렸다.

계유 5월 9일 사간원지사(종3품) 정식선생께서 사간원의 의견을 가지고 제의하였다(사간원 부임 후 첫 상소다)

“집의 하위지가 올려준 품계를 사임하여 말로도 글로도 거듭 제의하였으므로 할말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전하를 직접 만날 것을 청하는 것으로 보아 꼭 무슨 의도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앞서 전하께서는 만나 주겠다고 하여 놓고 만나주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만일 위지가 직접 만날 것을 간청해 놓고 만나서는 모두 전날에 한 말을 되풀이 한다면 그것은 무례한 행동으로써 처벌을 가해야 하겠지만 특별히 할 말을 한다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과 후세 사람들 가운데서 하위지는 어떤 문제를 말하려고 굳이 접견을 요구하였으며 임금도 무슨 일로 만나주지 않았던가라고 하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꼭 만나주기 바랍니다.”라고 상소를 올리니 상께서 정식에게 지시하기를 “너희들의 말을 참작해서 처리하겠다”하고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위지의 임금 접견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올려준 벼슬도 그대로 두었다.

계유 5월 19일 사간원지사 정식선생이 사간원의 의견을 가지고 또 제의하였다.

“병요를 편찬한 관리들에게 부당한 품계를 올려준데 대하여 신등이 이전부터 제의하고 싶었으나 전하께서 하위지를 직접 만나면 그가 반드시 부당한 이유를 극력 간하여 전하의 생각을 돌려 세울 줄 믿었는데 지금 언제 만나줄지 모르는 조건에서 신등은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문종은 세종이 완성해 놓은 책을 다만 삭제하고 보충하기만 하였기 때문에 의정부 재상들이 처음에 표창으로 벼슬을 올려주는 그 문제를 논의할 때 글씨 쓴 사람에게만 품계를 올려주게 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옳았습니다. 수양대군을 따라갔던 사람들과 안평대군의 낙마로 인한 상처를 치료해 준 조충손에게도 표창할 만한 공로가 없습니다. 모두 고치기 바랍니다“라고 상소하니 임금이 지시하기를 ”이미 재상들과 충분히 의논하고 결정한 것이므로 고칠 수 없다“고 하니 정식성샌이 다시 제의하였다.

“표창으로 벼슬을 주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입니다. 더욱이 지금 전하는 새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므로 전하의 움직임과 명령에 대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다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지금 병요의 편찬에 참가하여 품계를 올려 받은 사람들까지도 스스로 사양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의 임금은 입던 옷도 오히려 궤속에 넣어두고 아꼈는데 더구나 표창으로 벼슬을 주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전하는 지시하기를 이미 재상들과 의논하였기 때문에 고칠 수 없다고 하는데 신등의 생각에는 간관의 말이 옳으면 옳다고 하고 그르면 그르다고 해야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말씀하지 않고 그저 재상들과 의논하였다고만하니 신등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상소하니 임금의 지시는 ”병요 편찬 문제는 내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라고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언론 삼사의 극력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계유년(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란이 일어나고 10월 11일과 15일자 인사에서 사간원 관리 중 좌정언 강미수만 남고 전원이 낮은 벼슬자리로 옮겨졌다. 어찌하여 언론 삼사중 사간원의 관리들만 좌천되었을까! 이것은 하위지가 병요편찬 문제로 사직 상소를 세 번이나 올린 뒤 비답이 없자 임금을 직접 만나 할 말이 있다하여 임금 면담 요청을 하였으나 의정부 재상들과 수양대군 측의 방해로 면담이 성사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기관은 제의하지 않았으나 유독 사간원지사 정식선생께서 사간원을 대표하여 하위지를 만나 줄 것을 강력 제의하고 나섰으므로 이점이 수양대군의 정곡을 찌른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강직하고 바른 말 하기를 좋아하는 하위지가 임금을 직접 만나게 되면 자기 벼슬 올려 받은 문제만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의 야심을 눈치 채고 만일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언질을 어떤 식으로든 주게 된다면 자기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소지가 있게 때문이다. 그리고 사간원 지사 정식선생과 우사간 김길통이 영의정 황보인 사람이라는 노산군 일기 사관의 기록이 보인다.

계유년 7월 1일자 기록이다. 허허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정랑 김통이 무슨 일로 파면당했다. 허허는 당하관 정신석을 시켜 김통이 거짓 자백을 한데 대하여 해명하게 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하여 문종은 사헌부에 내려보내어 다시 신문하게 하였는데 정신석 등이 마침내 사실과 다르게 거짓말로 글을 올린 죄를 받았다. 그럼에도 허허는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하여 모두 다 빨리 추천하여 등용하게 하고는 이전에 지평으로 있었던 것을 특별히 정랑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에 사헌부에서는 규탄 했으나 사간원에서는 당장에 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사간 김길통과 사간원지사 정식이 모두 황보인의 종사관이었기 때문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경무공 정식선생은 1450년(세종 32년) 8월에 평안 함길도 체찰사 황보인의 종사관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런 것으로 보아 황보인 사람으로 분류된 것으로 사료된다. 그래서 경무공 정식선생은 계유정란이 일어난지 5일만인 10월 15일에 종 3품직에 계시다가 정 4품직으로 한직인 전농시윤으로 궁중의 제사에 쓸 농산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좌천되고 두 달 후 12월 3일에 종 4품 직인 지보성군사(보성군수)로 거듭 좌천되었다. 이 때에 좌천되었다는 사실기록을 소개한다.

계유 10월 17일자 기록이다. 좌정언 강미수가 제의하기를 좌사간 정양 우사간 김길통 사간원지사 정식이 모두 낮은 벼슬자리로 떨어져 나갔으니 어찌 나라의 공론이 없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臣 도 그들의 동료로써 뻔뻔스럽게 벼슬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쉬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경무공 정식선생은 보성군지사로 쫓겨나 2년 10개월을 근무하는 동안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비롯하여 사육신 사건 단종 영월 유배사건이 다 마무리 된 세조3년 8월 14일 동부승지 당상하여 다시 내직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형조참판(종2품) 함길도 관찰사(종2품) 사헌부 대사헌 판한성부사(정2품) 경상좌도 도절제사 도총부 도총관(정 2품) 병조판서(정2품)를 역임하시다가 1467년 (세조13년) 61세를 일기로 서거하시니 시호(諡號)는 경무(景武)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