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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溪亭의 社會ㆍ經濟的 機能에 試巧 - 5


 硏究委員長 (主筆 編輯) 鄭君燮   

 四. 쌍계정의 경제적 기능

1. 고마청계와 쌍계정

일반적으로 누정은 앞장에서 고찰해온 10가지의 문화적 및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내지 공간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간의 연구는 누정의 문화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온 것이 보편적이었다. 「누정은 교양인 지적 활동의 산실」이라는 규정이 바로 저간의 사정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누정이 마을사람들에 의하여 공동으로 건립. 관리되고 그 위치가 마을의 중앙, 혹은 인가 가까이 위치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고누거각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교양인들의 상경, 휴식, 강학의 장소에 머물지 않고, 동민들의 실생활과 밀접한 기능, 바꾸어 말하면 동민들의 사회. 경제생활에 보다 깊은 관련을 갖는 광장으로서 구실해 왔다고 믿고 있거니와, 앞장에서 쌍계정이 향약 시행처로서 어떻게 역할 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전자, 곧 쌍계정의 사회적 기능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밝혀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남은 과제, 곧 누정이 과연 동민들의 경제생활에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그러한 기능을 한 누정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답해줄 수 있는 사례는 그렇게 혼합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단순히 누정의 건립 및 유지비의 각출과 같은 측면에선 모든 누정이 동민의 경제생활과 관련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좀 더 밀접하고 보다 비중이 큰 경제적 구실을 수행해 온 누정은 그렇게 흔하지 않는 것 같다.

다행히 쌍계정은 (1)고마청계의 계소로서 마을 사람들의 부세의 공동부담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왔을 뿐만이 아니라, (2)대동계의 공동기금의 조성과 운영, 즉, 식리금융 및 보역을 통해 저변의 촌민들의 경제생활에 광범하게 영향을 끼쳐왔고 (3)오늘날에는 쌍계정답 및 임야라 불리는 토지의 매지수도를 통하여 많은 농민들의 경제생활에 지배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들을 직관할 때, 쌍계정이야말로 우리들의 숙제를 해명해 줄 수 있는 좋은 누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위에서 지적한 세 가지 문제들을 차례로 고찰해 보고자 하거니와, 만일 우리들의 입론이 사실로서 입증된다면 쌍계정은 금안동 공동체의 외형상의 심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촌락공동체란 토지나 임야와 같은 생산수단의 총유를 통하여 구성원에게 공제 및 사회보장적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요, 동시에 오래도록 납세의 공동부담조직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하 차례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하자.

먼저 쌍계정이 부세의 공동부담소로서 구실을 해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고찰해보자. 이를 설명해 주는 최초의 기록은 상기 ‘향약절부’이다. 그 (23)항에는 “불근조부도면 요 역자”는 “차벌”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 (50)항에는 “인호지역상하균일이신접인한일년물첩사”라 규정하고 있고, (57)항에는 “명재군역자급향리지불득면역자개이상한차역사”라 작고 있다.

왜 마을의 자치규정인 향약이 조부를 불근하거나 요역을 부당하게 면하고자 꾀하는 자에 대해서 최저 苔 20에 해당하는 차벌로서 다스린다고 하였을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부세는 백성된 자의 의무이니 부과와 납부는 族徵 또는 隣徵, 즉 촌락의 공동부담이 원칙이요, 촌락공동체는 그러한 공동부담의 주체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쪽이 우리들의 의문을 푸는데 오히려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부세가 마을 단위로 공동 부과되기 때문에 인호지역은 상하가 균일해야 하되 새로이 살림을 차려 자립기반이 나약한 친접인에 대해서는 1년간 부과하지 않는다는 자체적인 부과의 원칙이 제정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목하지 않으면 아니될 사실은 인호지역은 상하가 균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대단히 공평한 부담인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원칙이 얼마나 하층, 즉 계안에서 상한이라 부르고 있는 농민들에게 과중한 것이었나 하는 점은 모든 세는 부담하는 사람의 납세능력에 따라 부과할 때 비로소 공평하다는 조세원칙을 상기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농민들의 부담이 무거워지기 마련이라는 우리들의 추정은 위에 인용한 (57)항에서 곧바로 입증되고 만다. 즉 군역자나 향리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으로 간주되어 그들은 일반 백성이 부담하는 요역은 면제하도록 국가에서 규정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거니와 그 몫을 모두 상한들에게 차역시키고 있는 점을 보면 쉽게 입증 될 수 있는 것이다.

상한들의 부담이 무겁다고 하는 사실은 후술하는 고마조의 수합내용을 보면 숫자가 일목요연하게 말해주고 있거니와 이에 관한 의론은 뒤로 미루고 이와 같은 상하균일을 원칙으로 하는 부세의 공동부담은 쌍계정에서 논의. 부과되는 수합되었으라는 사실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할 것이다. 아니 수합에 그치지 않고 보관도 쌍계정에서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쌍계정의 경내에는 오래도록 창고가 있었음을 촌노들이 증언하고 있으며 금안동의 고마청계 및 그를 계승한 대동계의 강신록을 훑어보면 고사의 조성. 수리 등에 관한 비용이 지출된 사례가 자주 보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그러나 필자가 쌍계정이 부세의 공동부담소로서 기능했다고 주장하는 전거는 결코 향약절목 3항에 그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금안동에는 17세기 후반 상하가 함께 고마청상하계를 구성하고 있었고 고마조를 실제로 수합, 운영한 사료가 전해오고 있는데 우리의 주장은 거기에서 뚜렷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금안동의 고마청계에 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잠깐 고마청, 혹은 고마고란 어떠한 성격의 기구였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후기에 있어서 농민들이 부담하던 법제상의 부세는 전정, 군정, 환곡으로 불리우는 삼정의 세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농민들의 부담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른바 잡역으로 통칭되는 각종 세를 부담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데 잡역의 부과 운영은 다른 세정과 마찬가지로 지방행정기구인 육방의 조직을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민고”혹은 “보민고”, “보민청”, “고마고”, “고마청”을 설치하여 이를 통해서 운영되기도 하였다. 민고는 법제상의 제도로서가 아니라 각 지방 읍사례로서 설치되고 있었지만 그 기능으로 보아서는 법제상의 제도 못지않게 중요하였고 농민의 부담이라는 면에서도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기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민고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법제상의 기구가 아니고 각 지방의 읍사례에 의해서 설치 운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명칭도 다양하고 거기에서 걷어 들이는 잡역의 내용 또한 다양했었다.

우선 명칭을 보자. 민고나 보민고가 가장 흔히 쓰이는 명칭이나. 지방에 따라서는 로세청, 방역청, 대동고 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고마고, 고마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고는 모든 잡역을 통합해서 설치하는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 고마고와 같이 잡역의 일부를 중심으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양한 명칭은 정조에 이르면 민고로 점차 통합되기에 이른다.

민고를 설치하는 목적은 그때그때 여러 가지로 부과 징수해 가던 잡역세를 일괄해서 취급케 함으로써 사무적으로 편리하게 함과 동시에 한꺼번에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고통을 덜기 위해서 사전에 자금을 모아 이 자금을 존본취리(存本取利)하여 이 금리로써 각종 세를 납부토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와 같이 민고는 “존본취리 이보민역” 혹은 “존본취리 이서민력”함으로써 관의 잡역부과에 대한 민의 대응조치로서 마련된 기구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무렵의 민고에서 부담하는 중요한 세역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에 관해서 다산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민고에서 부담하는 중요한 세역은 ①경각서의 구청 ②진상첨가 ③하사치장 ④칙사지지 ⑤감사.수령의 영송비 ⑥감사복정 ⑦경영주인역가 ⑧서원구청 ⑨기타 등이다.

민고는 민으로부터 징수한다. 그러면 그 세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전결과 구호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호렴(戶斂)이 주가 된 곳도 있었다고 한다.  남부지방은 결렴(結斂)을 주로 하였던 것 같다. 전결에의 부과는 정규 전세 이외에 이를 더 징수하는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세 그 자체를 민고용으로 돌리기도 하고 진전을 기간한 후에 거기에서 징수한 세를 민고 재원으로 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각 호구에의 부과는 일반적으로 양반을 포함한 전호구가 균등하게 하는 곳도 있고 혹은 약간의 신분적 차등을 두기도 하였으며 또한 지방에 따라서는 민역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양반을 제외한 민호나 당호 및 궁천한 소민만이 부담할 수도 있었다고 하거니와 이렇게 볼 때 금안동의 경우는 뒤에 상론하는 바와 같이 양반호와 상민 및 천민이 외형상으로 거의 균등하되 실제로는 상천민호가 오히려 더 큰 부담을 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고는 그 재산으로 민고전을 매치(買置)하여 그 수입으로 보역하는 수도 있고 고마워 민고우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고마는 신구관의 영송시에 쓰기 위해서이며 민고우는 농민들에게 빌려주어 수도하기 위해서였다. 금안동의 경우는 민고전과 민고우는 보이나 고마는 보이지 않는다.

왜 이와같은 민고가 당시의 우리 향촌사회에서 쉽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이에 관해 김용섭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시기의 향촌사회에 있어서는 혹은 군현단위 혹은 향촌단위로 향약이나 계가 조직되고 그것들은 그 자신의 재산으로서 기금을 모아 식리를 하거나 매지수도함으로써 관으로부터의 각종 부세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농촌 관행은 “存本取利  以庶民力”을 의도하는 민고를 자연스럽게 성립시킬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마을에 따라 향약이나 대동계를 이어 받아오고 거꾸로 대동계에 물려주는 사례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남원지방 민고답의 전신이 향약답이었고 동부지방의 송계답이 민고답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그러한 사실을 반증해 준다 하겠다.

끝으로 고마고란 민고와 어떻게 다른가? 넓게 말하면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민고와 마찬가지로 잡역세 전반에 대비하는 기구를 뜻한다. 그러나 좁게 말하면 조선시대 농민들의 부담 가운데 하나인 관리들의 이취임시의 영송비인 쇄마가 혹은 구마군가의 부담에 관한 기구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금안동의 고마청계와 쌍계정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금안동에서 고마청계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696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해에는 계안이나 약문 및 계원명부 등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병자십원일동중 고마조수합기’라는 제목의 문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고문서의 표지에는 (**** 규약‘이라 하여 5개항의 규정이 들어 있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당연히 병자년에 고마청계가 형성되었으리라 추단되며 따라서 그 고문서의 표제의 결자들은 “고마청 상”의 4자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아마도 고마청립의, 규정, 계원명단 등은 3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고관의 잘못으로 일실(逸失)되고 고마조수합기만 남은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3년 후에 다듬어진 고마청상하계안과 일치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금안동의 고마청계의 제 모습을 완전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1699년에 마련된 고마청상하계안 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금안동의 고마청계가 본래 소빈하고 심잔한 동민연역지출로 말미암아 넘어지는 것을 色하기 위하여 상하가 힘에 따라 곡을 걸어 존본취리하여 보역하고 서력하고자 결성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어서 (기묘삼원이십칠일입규)라는 일자를 밝힌 뒤에 이른바 16개 조항의 부역 지규를 규정과 비교 고찰하기 위해서 다소 긴 느낌은 없지 않으나 전문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이상 21개 조항의 내용을 대별해 보면 첫째로 입계자의 자격과 그 입계조에 관한 사항, 둘째 원출자 및 삭출자에 대한 사항, 셋째 계곡을 빌려 쓴 사람 및 보증인의 의무 벌칙에 관한 사항, 넷째 계칙을 준수치 않는 자에 대한 벌칙과 처벌의 불복자에 대한 출계에 관한 사항, 다섯째 춘추강신 때에 소요되는 주효(酒肴)에 관한 비용의 지출에 관한 사항, 여섯째 동중의 대소사는 삼동자와 7집강의 논의 하에 결정된 사항은 비록 이론이 있더라도 추진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규정에 이어서 234명의 입계자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다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명단의 앞에 붙기 마련인 “좌목이란 두 자가 보이지 않는다. 과실에 의한 탈락이 아니고 일부러 뺀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만호와 상호 및 奴까지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열을 정해 나열하는 명단의 뜻을 지닌 좌목이란 용어를 쓰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234명 중 奴가 91호나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술한 금안동 향약의 부정을 비롯한 임원 12명 중 7명의 이름이 함께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마고에는 반상이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머지 5명의 임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의로 참여하지 않은 것일까? 그 보다는 향약과 고마청계사이의 18년간에 본인은 타계하고 그 후손이 승계했을 것이나 그 이름을 현재로서는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다만 확인되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奴이외의 참여자의 수가 143호로서 향약의 그것이 156호인 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서 입증할 수 있다. 둘째로 이른바 금안동 4성이 103호로서 奴를 제외한 143호의 72%를 정하여 <표1>의 향약의 구성에서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금안동의 지배적 다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금안동에서는 동민=4성씨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점이다.

셋째로 91명의 奴가 함께 들어 있음은 이미 얘기한 바와 같거니와 234호 중 91호라면 40%에 상당한다. 너무 큰 비중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솔거노비일까? 아니면 외거노비일가? 솔거노비가 독립된 호를 이루고 부세의 담당주체가 되었으리라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외고조비라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상당수가 금안동 열두 동네 안에서 거주하는 경우에도 떨어진 마을들에서 살고 있었으며 비교적 변두리에서 살고 있음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러면 금안동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기금을 갹출했고 또한 그것들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을까? 다행히 이 물음에 부족한대로 어느 정도 해답해 줄 수 있는 사료가 이번 조사연구를 통해서 발견되었다. ‘수합기’는 ‘병자십월일’이라 적혀 있지만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병자십월에 수합한 것만이 아니고 그 뒤 10여 간의 입출계 상황과 그에 따른 추가수입 및 출 출납상황을 함께 적고 있다. 수합기에 등재되어 있는 이름은 奴를 포함하여 총 250명으로 <표2>에서 본 바 있는 기묘년의 고마청계안에 등재되어 있는 호수보다 11호가 더 많다. 그 까닭은 기묘년 이후에 출입한 후고와 그 간에 사망 등으로 출계한 호가 정리되지 않은 채 함께 기입되어 이중 등재된 자와 금안동 밖에서 사는 외거노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볼 때 금안동의 고마청계에 입계한 호구는 평균 240호 정도로 추산된다. 오늘날 금안리 1.2.3구의 총 호수가 216호이니 그에 비하면 적지 않다 하겠다.

평균 호당 각출액은 얼마나 되었을까? <표3>에서 보듯이 참여자의 64.4%에 해당하는 161호가 1斗, 17.6%에 상당하는 44호가 1.5斗를 내고 있다. 이 두 계층을 합하면 82%에 이른다. 아마도 기본출손량은 1斗 내지 1.5斗였던 모양이다.

한편 반호라 할 수 있는 4성은 1~1.5斗 부담자가 76.9%, 상호라 할 수 있는 기타성도 76.2%로서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奴는 92.1%가 1~1.5斗를 출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奴의 태반은 기본출손량을 부담하고 있음에 반하여 반호 및 상호의 경우는 2斗 이상 부담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결코 奴의 부담이 가벼웠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부담능력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기본출손량을 1~1.5斗로 본다면 2斗  이상 부담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다음 두 경우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외지에서 이거하여 부담능력이 큰 사람의 경우요, 다른 하나는 출가입계한 자라 생각된다. 추입자임을 볼 때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이할 많나 사실은 출손곡 대신에 대전으로 납부한 사례가 보인다고 하는 점이다. 신묘년 봄에 정종서는 조 10斗 대전으로 전부 1량을 납부하고 있음은 그 예라 할 것이다. 이 무렵에 이르면 향촌사회까지 화폐의 유통이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다음에는 고마조의 운영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수합기’에 의하면 병자년 10월에 수합된 본조는 10석 15두 5증이었으나, 다시 개두량한 즉, 12두가 줄어들어 실제로는 9석 18두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말질이 얼마나 어수룩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벼를 인안(노), 득선(노), 암철(노)에게 각각 2석씩 만수(노), 변음금(노)에게 각각 1석, 금금(노)에게 나머지 1석 18두를 전거해 준다. 이 해의 이율은 이상하나 계미의 강신록에 “秋每石 5斗 式出制捧入則”이란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25% 정도라 추측된다. 여기에서 증식한 이식과 추입자로부터 걷은 본조를 합하여 만 1년 뒤인 무인 3월에는 도합 50석을 새 유사에게 인계한다. 구유사는 나두연 외 2명, 신유사는 정치 외 3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 유사, 즉 병자년에 최초로 고마청계를 조직, 기금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 羅斗燁(나두엽)은 15년 전 향약상계를 구성했을 대 거기에서도 유일하게 직월과 장의를 겸임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후 갑신년에는 계의 우두머리인 공사원으로 피선된다. 그의 인품과 일의 추진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야 어찌됐던 50석의 본조에서 쇄철가(4두), 고판자가(4두), 고자장식철가(6두) 등을 지불하고 또한 소 3마리를 10석 10두를 들여 구입한다. 이른바 “민고우”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소는 이듬해 3월 강신 때에는 송아지가 한 마리 불어 함께 팔아 24석 5두의 조를 거두게 되니 한 해에 배장사를 넘긴 셈이다. 남은 벼는 누구에겐가 전거해 주었으리라 추단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없어 유감스럽다. 이리하여 기묘년 봄 강신 때에는 물경 201석 9두로 증식된다. 물론 추입자분도 포함되었을 것이지만 증식률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비로소 고마청계의 본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구마군가” 18석을 지급하고 잔여분 183석 9두에 추입조 15두를 합하여 도합 184석 4두를 다음 유동에게 전장하고 있다.

다음에는 일반적으로 민고가 감당하는 잡세들의 부담을 금안동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강신록의 지출상황을 살펴보자.

우선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구마군가이다. 구마군가는 쇄마가를 이르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고마창계의 주목적이라 할 수 있는 잡역세이다. 무인년에는 18석을 지급한 뒤 4년 만에 구마군관우미로 24석 15두을 지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 때의 지출은 경상비적인 구마군가가 아니라 구마군관우미이므로 기금내지 자본적인 성격이 짙은 지출인 듯이 보여진다.

다음에는 “주인가”의 지불이 몇 차례 보인다. 아마 여기 말하는 주인은 경주인이 아니고 영주인이거나 읍주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사년에 구주인에게 1석10두, 주인에게 1석 4두가 지급된 것을 비롯하여 임오년에는 주인가평1석, 주인가평8석 등의 지급예가 보인다. 경진년에는 ‘면유사’ 조 15두의 지급이 보이는데, 아마 이것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밖에 큰 항목으론 민고답(동답)과 민고우매입이다. 최초로 답가의 지출이 보이는 것은 기묘년 강신 때이다. 지적(地積)은 불명하나 구 30석을 답가로 지급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서 경진년 강신록에도 진목전답 7두락 구입대금으로 37석이 지출되고 있다. 같은 해에는 “基” 價로서 4석이 지급되고 있는 바 아마도 쌍계정 경내나 그 부근에 터를 넓혀 다음 해 고사를 지을 준비를 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이상의 민고답을 경작하기 위해서 매년 종자미 12내지 13두가 지급되고 있다.

토지의 구입을 위한 지출은 4건, 즉 답 2건과 기 2건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뒤 인계되는 계문서에는 ‘매답명문4도’ 외에 ‘신매답명문2도’ 가 따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 후에도 답의 매입은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한편 민고우의 구입도 여러 차례 보인다. 아마도 소는 오래두지 않고 사서 기른 다음, 다시 팔고 새로 사들이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민고답과 민고우가 다음으로 큰 비용의 지출은 고사의 마련과 그 유지비라 하겠다. 매년 각종 비목의 고사 유지비가 지급되고 있는데 아마 항복수로는 으뜸이 아닌가 짐작될 정도이다.

3백석 이상 되는 곡식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창고의 보수.유지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쌍계정에 관계되는 비용은 계미년에 개호장인의 주채와 향미 4두를 비롯하여 목수의 주미.향미 7두, 그리고 도야수가 10두가 지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건비만 지출된 것이 아니다. 재료비에 해당하는 판문재원산목가 10두, 철정가 12두 5승의 지급 등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쌍계정의 유지보수는 적어도 이 기간에는 고마청계가 맡았던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쌍계정의 공세의 공동부담소로서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차일에 관계되는 비목이다. 임오년에 차일포 25필 구입비로 35석 15두 2승을 지급한 것을 비롯하여 차일수장우피대 1석, 차일을 떠받는 주목대 2석11두5승, 청장포 4필, 양수가 1석 8두 등 ,40석 14두 7승이 지급되고 있는 바, 이는 답 7두락 매입가를 웃도는 값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은 당시 차일을 만들 만 한 포의 값이 얼마나 고가였는지 하는 사실과 동시에 그와 같이 고가를 지불하고서도 차일을 만들지 아니하면 안 되었던 것은 차일이 농촌에서 그만큼 진중시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전 근대 향촌사회에서 가장 긴요한 동유재산을 들자면 혼구와 상구라 할 수 있는데 애경사에 공유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그 중요성은 으뜸간다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금안동의 고마청계는 단순한 잡역세의 공동부담이라는 기능에 그치지 않고 적어도 병자년에서 임진년에 이르는 16년간은 보다 포관적인 기능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단되는 것이다.


五. 맺는말

끝으로 이와 같은 우리의 입론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사실을 적시해 보자.

첫째로 고마청계가 애경사에 상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춘추 2회의 강신 시에는 대대적인 회취를 열고 있다. 예컨대 계미년 가을 강신 때에는 잔치용 소를 잡는데 수고한 도우한의 수고료가 조 1석 10두, 그의 술값과 밥값으로 7승이 지급되고 있으며, 금아 2명에게 1석 10두, 취적공 1명에게 10두가 지급되고 있다.

이는 회취가 단순한 계의 모임이 아닌 거동적인 것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더욱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잠간 언급한 바 있는 고마청계에서 매입한 토지를 “고마청계” 나 “민고답”이라고 하지 않고 “동답”으로 호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임진2월에 금안동에 처음으로 대동계입의가 보인다는 점은 이미 지적했거니와, 뒤에 자세히 살펴보게 되는 바와 같이 그 입의문, 즉 대동계설립취지문이 고마청계의 입의와 완전히 일치하고, 다만 “고마청” 3자가 “대동계”로 바꿔진 것 뿐이며, 입규 또한 고마계의 규정을 거의 그대로 싣고, 다만 東床禮未行者의 참가금지에 관한 사항 정도의 첨가에 그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대동계가 고마청계를 계승한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하겠다.

김용섭교수는 단지 마을에 따라 향약이나 대동계가 민고로 되기도 하고 혹은 그 역이 되는 수도 있음을 지적한 바 있거니와 금안동의 경우에는 향약→고마청계→대동계 로 이어져간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고마청계가 향약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고마청계의 매년 인계 문서 중 구좌목 3권, 구약규책 1권, 금송안 1권, 향약안 1권, 동중완의 1권, 유생안 1권, 근학안 1권, 서계안 1권, 고마상하계안 1권, 신구궤 2좌, 전장책 1권, 매답명문2도 와 매기명문2도를 동봉한 문서와 함께 도함되고 있는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사실로 미루어 보아 고마청계는 그에 앞선 향약계를 이어 받아 금안동을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범부락적인 공동조직으로 기능하다가 후에 대동계로 그 역할을 승계한 것으로 보아진다. 따라서 쌍계정은 금안동민의 회집소요, 공동부세소요, 동시에 심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