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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溪亭의 社會ㆍ經濟的 機能에 試巧 - 4


 硏究委員長 (主筆 編輯) 鄭君燮   
 3. 雙溪亭畓의 마련과 운영

1757년에 합동. 합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불행스럽게도 쌍계정의 부세의 공동납세소로서의 기능이 언제, 어떻게 끝을 고하게 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19세기 후반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고마청(민고)이 부담해야 할 잡역세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기반이 흔들리고 있으니 쌍계정의 관리유지가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노릇이다. 퇴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7년(정축) 6월 19일, 4성씨는 쌍계정에서 동회를 개최하고 만장일치로 쌍계정을 수리하여 고적을 보전하기로 하고, 그 비용의 염출방법과 일의 추진을 위하여 도유사(都有司) 4명(4성.각 1명), 성조유사(成造有司) 4명(4성 각 1명), 및 감동(監董) 겸 장재(掌財)에는 시흥김문(瑞興金門)의 김기우씨가 맡게 된다. 동시에 앞으로 쌍계정의 유지방침 등에 관해서는 동회를 개최하여 적의(適宜)처리키로 뜻을 모은다. 다음 해 무인 7월 13일에는 2차로 4성대표가 모여, (1)설제(雪齋), 사암(思庵), 어은(漁隱)의 정액을 옛날처럼 계판할 것, (2)4성 각문중에서 중수기문(重修記文)1板씩을 공히 계판하되, 그 비용은 동중합유인 임야를 팔아 충당할 것, (3) 각문중의 대표자는 위의 결의사항에 대하여 일후(日後)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은 물론, 자기 문중에서 의의가 있을지라도 대표들이 나서 위의 결의사항 이행에 절대로 책임질 것 등을 결의하게 된다. 여기에 모인 대표로는 풍산 홍씨 4명, 나주정씨 3명, 서흥김씨 3명, 하동정씨 3명 등 13명으로 그들은 위의 결의사항에 대하여 서명 날인한다. 이렇게 볼 때 18세기 초에 분동. 분계된 상처는 이때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때에 수리는 상당히 대규모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총비용 551원 70전을 쌀로 환산하면 당시 쌀값이 평균 1석에 16원 88전이었으니 32.7石, 租로 환산하면 63石에 해당된다.

그 중 큰 항목만을 들어보면 임목대금이 96원전으로 제일 많고, 다음은 인부대 60원, 기와대가 50원으로 세 번째로 큰 액수이다.

그러면 여기 소요된 경비는 어떻게 염출했을까? 모두 금성산 북쪽에 있는 동유임야, 즉 (평지등)에서 조달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자. (1) 평지등산 1정 4반 매도대금 2백원, (2)평지등송추방매 대금 161원 50전, (3) 평지중에 있는 국유림 2정 1반 8모를 매수하였다가 환매한 대금 189원 27전, (4) 기왕에 구입했다가 남은 재목의 처분에서 얻은 금액 1원, 계 551원77전으로 거의 수지를 균형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출총액 551원 70전 중에는 국유림 2정 1반 8묘의 매수대금 98원 10번이 포함되어 있으니 실제 쌍계정의 수리비는 453원 60전이 든 셈이다.

아무튼 금안동의 가장 큰 동유재산은 평지보등을 비롯한 임야이다. 계가 나눠져 쌍계정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을 때 그나마 뒷바라지 해 온 것은 임야와 그 산물이었다. 이제 1939년(기묘) 명신계(明新契)라는 명칭으로 금안동의 공동조직이 다시 출발한 때로부터 1952년(임진) 6.25의 전화가 어느 정도 가라 않은 때까지 이른 바 전란기 13년간 평지등의 임야가 쌍계정의 유지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해왔는지 명신계(明新契)의 강신록(講信錄)을 통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1937년 김기우씨를 중심으로 금안동의 4성씨가 다시 담합하여 5백만원의 거금을 투하해서 퇴락해가는 쌍계정을 중수할 때 그 비용이 전적으로 평지등의 임야의 처분으로 얻어진 것임은 이 언금한 바와 같거니와, 대역사를 끝내고 난 다음 1939년 4월 20일 4성은 명신계(明新契)라는 이름으로 금안동의 동조직을 다시 부활시킨다. 4월 20일에 발기된 명신계(明新契)는 11월 15일의 준비모임을 한차례 다시 거친 다음, 12월 16일 임시강신을 갖고 입계자와 입계금을 확정.수합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남은 돈과 똑같이 15원 90전 식 4성의 문중유사(門中有司)에게 출부(대출)해 준다. 다만 서흥 김씨만이 남은 6전을 합쳐 15원 96전을 맡게 된다. 다음 해(1940) 4월 20일 강신 때에는 5개월분 이자(이자율 연20%) 6원 37전을 합하여 70원 3전으로 늘어난다. 1941년에는 그간의 추입자 4명의 입계금 80전을 합하여 80원 11전, 1942년 강신 때에는 추입 자금 10원을 합하여 계금은 모두 106원 13전이 된다. 3년간의 추입금(追入金)과 이식을 합쳐 겨우 100원을 넘긴 셈이다. 그 해 6월 7일 마을에선 임시회의를 열어 계금증식을 논의하고 그 방안으로 평보등(平堡嶝) 시초 387부를 방매(放賣)키로 결의하고 4성 공히 다음과 같이 안배한다.

이렇게 모아진 154원 80전 중 방매를 위해서 소요된 제반 경비 45원 88전을 공제하고 나머지 108원 92전을 계금으로 넣어 4성에게 고루 27원식 출부 증식케 한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간취(看取)할 수 있는 사실은 첫째로 시초방매(柴草放賣)로 얻은 109원은 창계(創契) 이후 3여년 간 510여 명의 계원들이 모으로 길은 계자(106원)보다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평보등의 임야가 금안등계 및 쌍계정에 대해서 얼마나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시초 1짐에 40전이다. 1인의 입계금이 20전 임에 비하여 결코 작은 값이 아니다. 일제의 2차대전 강행으로 인한 물자 부족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할 것이다.

셋째로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초의 벌초량은 배분에 있어서도 4성의 안배원칙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풍산 홍씨와 나주정씨는 계원의 수에 비하여 들고 남이 없지 않지만 다른 두 성씨의 경우에는 거의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다.

공동체의 제 1차적인 정책이 대내에 있어서의 평등이며 따라서 그것이 깨어졌을 때 갈등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당연한 조처라 할 것이다. 더욱 금안동 4성은 오래도록 갈등이 없지 않았고 이제 겨우 그것을 극복하고 재출발한 마당이니 만큼 당연한 배려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배려는 계자의 출부에 있어서는 완전균등의 원칙을 고수해 오고 있음을 볼 때 더욱 확연히 나타난다. 이와 같은 윤리는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쌍계정답의 경작자의 배분에도 적용되고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다시 얘기를 본제로 돌려 1942년 이후에 있어서의 평보등 임야의 수입을 살펴보자. 1946년(병술) 시초방매대금 50원이 입금된 것을 비롯하여 다음해 1947년에는 평리등에 새로이 논을 개간하여 도조(賭租) 백미 40升 대금으로 4백원이 수입된다. 당년 총계금이 444원 50전임을 감안할 대 계로서는 상당한 금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돈을 밑천으로 84원을 들여 쌍계정의 기와를 번와한다. 그 후 평보등의 신기답의 소작료는 6升으로 늘려 매년 강신 때의 주반미(酒飯米)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평지등의 임야가 금안동의 동계 및 쌍계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 것은 1982년 광주에 거주하는 하동 정씨에게 약 6만평을 처분하여 그 대금 59.025천원 중 44.048천여 원을 들여 답 22필지 8734평, 전 2필지 481평 도합 9.215평의 쌍계정답을 마련케 함으로써이다. 이리하여 지금까지 내려오던 700평의 동답과 합쳐 약 50두락에 이르는 이른바 쌍계정답, 즉 동답을 장만함으로써 쌍계정은 이제 경제적인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그러면 쌍계정은 누구에 의해서 경작되고 있는 것일까? 지금껏 내려오던 700평은 쌍계정을 관리하는 수호인이 경작하되 그의 소작료는 년 벼 300근으로 고정되어 있다. 다른 논의 경작자들에 비해 싼 셈이다. 쌍계정 수호에 대한 수고를 감안해서라 할 것이다.

1982년에 구입한 이른바, 쌍계정답은 4성이 고루 나누어 경작한다. 나주정씨가 8두락을 2명, 풍산 홍씨가 16두락을 4명, 하동 정씨가 12두락을 2명, 서흥 김씨가 10두락을 3명이 각각 나누어 경작하고 있는바, 각 성씨 중에서 누구로 하여금 경작케 할 것인가는 각 문중에 맡겨 선정하되 가급적 빈곤한 사람 중에서 고르도록 하고 있다. 금안동 1.2.3.구의 호당경지면적이 <표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논 1.24ha(약 3.5두락), 밭 0.53ha(약 8두락)임을 감안할 때 경작자로 선정된 사람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토지라 할 수 있다. 더욱 경작료가 비교적 헐하다. 상토에서는 두락당 벼 200근, 중토에서는 180근, 하토에서는 160근을 부담하고 있는바, 오늘날 금안리의 평균 소작료가 대체로 200평당 300근임을 감안할 때 상당한 혜택을 베풀고 있는 셈이다. 쌍계정의 새로운 경제적 기능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호혜(互惠)와 상휼(上恤)을 기본으로 하는 공동체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며 필자가 쌍계정은 금안동 공동체의 심볼이라고 주장하는 소이가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이다.

<표5> 금안동의 가구와 평균경지면적

그러면 여기에서 수입되는 돈(벼)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 것일까? 1986년 추수 후에 수합된 도조(賭租) 8.450근, 즉42섬이었다. 그것을 전량 수매하여 받은 돈은 2,604,506원, 그 사용은 (1) 음 4월 20일에 년 1회 개최하는 대동계 총회 경비, (2) 당일 표창하는 선행상금, (3) 노인당 운영경비보조 (4) 쌍계정의 유지 관리비, (5) 기타로 쓰여진다.

여기에서 1980년 이래 쌍계정의 보수.관리 등으로 쓰여진 중요 비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난 8년간에 쌍계정의 유지.관리를 위해서 지불된 비용은 총 26,556,9천원, 그 중 마을 자체에서 염출한 돈은 18,556,9천원이었다. 이를 8년으로 나누면 연평균 2,319,9천원이 된다. 이처럼 많이 든 것은 그간에 1981년의 대중수와 1987년의 보수 및 노인정의 신축이라는 3대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연평균 230여 만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이 돈의 염출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지금껏 잠자고 있던 동유임야를 1982년에 처분하여 50두락의 수익성있는 논으로 바꿔 놓은 것이 결정적인 구실을 해 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의 수입은 연간 250여 만원으로 산술적으로는 위의 평균소요액을 겨우 커버한다. 그런데도 현재 금안동 대동계(정확히는 명신계)에는 434만 여원의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어디에서 이와 같은 수수께끼가 이루어 진 것일까? 열쇠는 1981년 대중수에 소요된 1,126만원은 4성 문중 80만원 조씨문중 129만 8천원, 정진기(당시 매일경제 신문사장) 110만원을 비롯하여 마을 연고자로부터 희사 받은 682여 만원과 정부의 보조비 800만원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는데 그 주인이 있다.

여기에서 언급해 두어야 할 사실은 옥천 조씨 문중에서 1981년의 대중수 때 130만원 큰 돈을 내 놓고 있는 점이다. 이 돈은 단순한 희사가 아니고 평보등 동유림 내에 자리하고 있던 옥천 조씨의 문소일원의 산지를 처분한 대금이다. 말하자면 지금껏 불명료하던 소유관계를 확연하게 옥천 조씨에게 이양해주고 그 대금을 청산해서 받은 것이다.

아무튼 쌍계정은 17세기부터 19세기말에 이르는 기간, 혹은 고마청상하계 혹은 대동계의 센터로서 농민들의 부세의 공동납세소로서의 경제적 기능을 다해 왔었다. 그러나 일제 침략기에 이은 국란기에는 향촌사회의 불안정 등으로 이렇다할 경제적 구실을 수행하지 못하고 침잔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자에는 적지 않은 쌍계정답의 매지수도와 자산의 융통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기능을 다시 수행하고 있는 바, 누정으로서는 대단히 특이한 케이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맺음말


쌍계정은 고려 말 정가신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도 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른바 금안동 4성으로 대표되는 금안동민으로 구성된 동계=공동조직에 의해서 관리.유지.이용되어 왔다. 바꿔 말하면 쌍계정은 금안동의 동계를 바탕으로 존립되어 왔다고 하는데 그 첫 번째 특징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쌍계정의 바탕이 되는 동계=공동조직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쌍계정의 외양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뀌어 진다. 1635년 동중약규로 표현되는 동약으로부터 시작하여 향약절목으로 집약되는 향약상계(1681년)을 거쳐 1696년에는 고마청상하계로 바꿔진다. 동약이나 향약에는 이른바 금안동 4성을 비롯한 반호(班戶)들이 주가 된데 반하여 고마청계에 이르면 반호와 중서 및 노(하층)까지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 계의 조목적이 반상이 함께 부담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잡역세의 공동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계란 본래 구성원이 모두 동등하고 호혜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반호와 상호가 하나의 계로서 모인 다는 것은 당시처럼 신분의 차별이 엄연한 사회에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편법으로 반호들을 상계로 상호들은 하계로 조직하되,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의 계로 편성. 운영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단된다. 고마청상하계안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항상 상하계가 함께 붙여 쓰이고 있고, 또 명부가 함께 나열되고 있는 것으로도 쉽게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금안동의 동계는 1712년 대동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명칭만 대동계로 바꿔졌을 뿐, 실제에 있어서는 고마청계와 별다른 차를 찾아 볼 수 없고 제일차적인 목적은 여전히 보역과 서력, 즉 농민들의 부세의 공동납세를 위한 기금의 마련이었다. 이렇게 17세기말 이후 쌍계정의 기능은 농민들의 공동부세의 수합. 보관 등 농민의 경제생활과 밀접 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한다. 즉 쌍계정은 유흥상경(遊興賞景)이나 시회소와 같은 문화적 활동공간에 머물지 않고 향약 시행처로서 상규. 상훈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훌륭히 수행함과 동시에 고마청계와 대동계의 회취소로서 농민들의 부세의 공동납세처라는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데 두 번째 특징이 있으며, 이점이 누정으로서의 쌍계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라 할 것이다.

금안동의 대동계는 불과 2년 만에 분동.분계된다. 나주정씨를 제외한 성씨들은 분계안을 신수하고(1714년 숙종40), 나주정씨들은 금안동송금동약(1715년 숙종41)을 만들어 이에 대항한다. 두 계가 겨우 합쳐지게 된 것은 1757년(영조33)의 일이니, 분계된지 43년만의 일이라 하겠다. 합계는 되지만 한 번 벌어진 균열은 좀처럼 아물지 않아 금안동의 동계, 즉 공동조직을 바탕으로 서 있는 쌍계정 또한 퇴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50년간에 걸친 긴 기간의 쌍계정을 위요한 금안동의 향촌사회가 어떻게 운영되어왔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전무하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다만 대동계는 명맥을 유지했을 것이나. 씨족간의 갈등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쌍계정의 소유권을 위요한 분쟁은 개운하게 해소되지 않은 채 일제침략기를 맞게 된다.

금안동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4성씨가 다시 쌍계정에 모여 쌍계정은 4성합유임을 재확인한 것은 1937년(정축) 6월 18일의 일이었다. 이 결과 1939년(기묘) 4월 20일에는 명신계라는 이른바 4성계가 탄생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명신계가 옛 대동계를 승계하여 동답 및 임야 등의 동유재산의 소유. 관리주체가 된다. 그 2년 후인 1941년(신사) 4월 20일에는 안동대동계가 타성 씨까지를 포함해서 재생되나 4성계에 묻힌 채, 실질적인 금안동, 특히 쌍계정의 주체는 명신계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연히 금안동의 명신계와 대동계와의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치 않을 수 없다. 다소 이율배반적인 표현이 되겠지만 그것은 둘이되 하나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두 계는 엄연히 별개의 명칭과 계원(태반이 중복된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계를 치룬다. 금년(1987년)부터 명신계원이 아닌 대동계원에게 부담시키던 참가비 1천원도 없었을 뿐 아니라, 총회시 가장 중요행사의 하나인 선행상의 표창도 함께 하고 있다. 단순한 합동일까? 아니면 합병일까? 합병되었거나, 적어도 합병되어가고 있는 중이라는게 필자의 판단이다. 아니 어쩌면 본래 하나인 것을 1939년 이래 외형상 나누었다가 실질적으로 다시 일체화시켜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이 이러한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고 믿는다. 첫째로 1937년 6월 오랫동안 갈등 속에 살아오던 4성씨가 모여 4성씨 합유에 계한 쌍계정을 수리하여 고적을 보존키로 결의하면서도 쌍계정의 장래 유지방침 및 기타 사고가 유한 시는 동회를 개최하고 적당한 처리를 결의하고 있다. 왜 계의 총회를 열지 않고 동회를 열어 논의하자는 것일까? 그 까닭은 명신계가 예로부터 마을과 쌍계정의 주체이던 대동계를 이어받은 범부락적인 조직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둘째로 필자가 지난 8월부터 이번 조사연구를 위해 수차 금안동을 드나들면서 면담한 촌노들은 거의 모두 4성씨를 대표할만한 유지들이었다. 그런데 그들과의 대화 중에서 명신계라 해야 할 때도 늘 대동계로 표현하고 있고 4월 20일 총회도 대동계 강신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완전히 명신계와 대동계를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쌍계정의 연혁 안내판을 대동계 명의로 게시하고 있는 바 그 경비는 명신계에서 1983년 10만원, 그 이듬해 보수비로 48,200원 도합 148,200을 지불하고 있음을 명신계 강신부가 뚜렷이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대동계 명의로 내걸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명신계=대동계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외의 이유를 찾을 길이 없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적어도 올해부터는 두 계원이 한날, 한 장소에서 별 차별 없이 계를 치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고마청계 시절(17세기말~18세기초)에 형식적으로는 상계(반호)와 하계(상호)로 나누되, 실제에 있어서는 상하계가 완전히 하나로 운영되던 것과 마찬가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금안동의 명신계와 대동계는 둘이되 하나로부터 완전한 하나로 점차 옮아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반상의식이 어떻게 해소되어 가느냐 하는 것과 속도를 같이 하리라 믿어진다.

아무튼 오늘날 대동계원의 수는 명신계의 그것보다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자금은 겨우 331천 여원(1987. 4. 20 현재) 밖에 되지 않고 그리하여 총회경비도 명신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 반하여, 대동계의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4,339천 여원의 현금과 함께 쌍계정답(전) 50두락을 보유하고 있다.

쌍계정답은 이미 본론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1982년에 평지등 임야 약 6만평의 처분대금 59백여 만원으로 매입한 답 22필지 8,734평, 전 2필지 481평과 예로부터 내려 오던 동답 700평을 합한 약 1만평이다. 이들 토지는 4성대표들의 총유로 등기되어 있다(등기번호 나주등기소 제 2532호 외) 년수(年收) 300만원 이상의 수입을 갖는 토지를 확보한 쌍계정의 경제적 기반은 이제 튼튼해진  셈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쌍계정답이 금안동 농민들의 경제생활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셈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24필지(논22필지, 밭은 4성에게 고루 나누어 경작케 하자 각 성씨 중에서 누구에게 경작케 할 것인가는 각 문중으로 하여금 선발케 한다.) 다만 가능한 한 빈곤한 사람을 고르도록 권장ㅇ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는 11명의 농민들이 최고 8두락에서 최저 0.9두락까지 각각 나누어 벌고 있다. 호혜와 상휼을 기본으로 하는 계(契)내지 공동체 정신의 발현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은 경작농민이 내놓은 경작료가 다른 논에 비하여 현저하게 싸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즉 금안동의 상답이면 일반적으로 200평당 300근의 소작료가 일반적인데 반하여 쌍계정답은 200평(상답) 당 200근으로서 그 66.6%에 부로가하다. 금안동처럼 토지가 부족한 농촌으로서 쌍계정답의 경작농민에게는 상당히 커다란 도움이 아닐 수 없다. 인근의 누정 중 이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이 있는지, 파문의 탓으로 듣지 못했다. 쌍계정답(동답)의 경작을 통한 농민생활에의 기여는 쌍계정이 기능하고 있는 독특한 경제적 기능으로서 필자가 쌍계정을 금안동공동체의 심볼이요 동민의 결합의 유대라 표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쌍계정으로 하여금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히 교양인들의 지적활동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금안동이라는 향촌사회에서 상규와 상구라는 사회.경제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한 기본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하나는 쌍계정이 애초부터 어느 한 개인이나 문중에 의해서가 아니고, 이른바 금안동 4성으로 대표되는 마을의 공동조직에 의하여 건립.소유.관리.이용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쌍계정은 자고로부터 금안동동계(공동체)의 회취소(會聚所)요, 센터였다는 점에 연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요인은 쌍계정의 위치가 비록 계천가라고는 하나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여 농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전자가 기본적 요인이라면 후자는 부차적 요인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쌍계정은 11가지에 달하는 다원적인 기능을 수행해 오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띠는 것은 향약 시행처로서의 사회적 기능과 고마청으로서의 경제적기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마청은 없어지고 따라서 부세의 공동부세소로서의 기능은 없어졌다. 그러나 쌍계정답(동답)의 경영을 통해 쌍계정의 경제적 기능은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쌍계정은 순수한 누정과 모정(茅亭)의 성격을 구유(俱有)하고 있는 농민들의 생활공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