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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溪亭의 社會ㆍ經濟的 機能에 試巧 - 3


 硏究委員長 (主筆 編輯) 鄭君燮   
 2. 대동계와 쌍계정

17세기말(1696년)에 향약계를 이어받아 金鞍洞의 범부락적(汎部落的)인 공동조직으로서 기능하던 고마청계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동계에 그 구실을 승계하게 됨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왜 승계치 않으면 아니되었던가에 관해서는 본고(本稿)와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별고(別稿)로 할애 하고자 하거니와, 여기에서는 먼저 과연 승계했는지의 여부에 관해서 살펴 보고자한다.

금안동에서 대동계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712년(壬辰 숙종 28년)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동중구좌목(洞中舊座目 1601 선조24), 동중약규(洞中約規 1635 인조13) 및 동중좌목(洞中座目), 그를 이은 향약상계안(鄕約上契案 1681 숙종7). 그리고 앞절에서 고찰해 온 고마청상하계안(雇馬廳上下契案 1696년)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을의 자조자치조직(自助自治組織)은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대동계라는 명칭의 자치조직이 처음 보이는 것이 이 시기라는 뜻이다.

대동계가 고마청계를 이어 받았다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첫 번째 자료는 대동계설립의 취지를 설명하는 대동계입의(大洞契立議)가 이미 지적한대로 고마청계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며 다만 고마청 3자가 대동계로 바꿔진 것뿐이라는 점이다. 이하 전문(전문)을 인용하여 앞 절에서 인용한 고마청계입의와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40개 항으로 되어 있다. 기묘년의 고마청계의 규정 21개 항보다 배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고마청계 규정은 기묘년의 입규(立規)이래 4차례나 첨입(添入)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배가(倍加)되었다고만 할 수 없다. 설령 규정의 수가 늘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내용에 있어서는 고마청계 규정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굳이 지적한다면 (1)동상례(東床禮)에 관한 규정 2항, (2)차일(遮日)의 사용에 관한 규정 3항, (3)금송(禁松) 및 종송(種松)에 관한 사항 4항 등이 첨가되어 있는 정도이다.

요컨대 대동계의 규정은 동중약규 이나 향약절목과는 달리 상규적인 성격의 것이 되기보다는 기금의 출연과 운영 등 상구적인 성격, 곧 보역의 성격이 강하다. 다시말하면 적어도 임진년에 중수된 대동계 규정은 고마청계의 그것과 같이 존본취리(存本取利)하여 보역(補役)하거나 서력(紓力)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금안동민의 부담, 즉 출연곡(出捐穀)은 어떠헥 달라지고 있을까? 이 점에 있어서도 달라진 점이 없다. 즉 계원의 子가 들어오는 경우는 租 1斗의 계원의 弟가 들어오는 경우는 租 5斗, 他官에서 이거해온 者의 경우는 租 10斗 로서 고마청계의 경우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으며, 또한 死亡 등으로 출계하는 경우도 매 한가지이다.

다음에는 이와 같은 규정에 의해서 얼마만큼의 租를 걷우고 그것을 어떻게 운영하였을까? 다행스럽게도 그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 까닭은 자세치 않으나 대동계립의 후 부로가 2년만에 금안동의 동계는 2개로 분계된데에 그 一因이 있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대동계가 고마청계를 계승한 것이니만큼 적어도 4필지 이상의 동답(洞畓)과 基, 그리고 상당량의 기금(곡)은 그대로 운영했을 것이며, 따라서 그 일부는 보역에 충용했으리라는 사실에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대동계시절에 있어서도 쌍계정은 금안동민의 보역지소로서 부세의 공동부담소의 기능을 했으리라는 사실은 추단하기에 어렵지않다 하겠다.

1714년(갑오 숙종40)에 분계된 금안동의 통계는 1757년(정축, 영조33)에야 비로소 합동.합계가 되는데 거기에서도 통계설립의 뜻은 첫째로 이정풍속(이정풍속)이고, 둘째로 이보인역(이보인역)이라 적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대동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쌍계정의 기능 속에 부세의 공동부담소의 기능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