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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溪亭의 社會ㆍ經濟的 機能에 試巧 - 2


 硏究委員長 (主筆 編輯) 鄭君燮   

三. 쌍계정의 사회.문화적 기능

1.쌍계정의 문화적 기능

필자는 서두에서 쌍계정은 단순한 유흥상경이나 부시영월(賦詩詠月)하는 교양인의 지적활동의 공간만이 아니요, 그러한 역할도 수행하되 오히려 강학과 향약의 시행 및 부세의 공동부담소로서 금안동공동체의 합취의 장소요, 외적 심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앞으로 필자는 쌍계정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고 어떠한 기능을 수행해 왔는가를 고찰해 봄으로써의 위의 입론을 뒷받침해 보고자 하거니와 본절에서는 강학소와 향약시행처로서의 기능을 중심으로 사회.문화적 기능을 살펴보고 부세의 공동부담소로서의 기능, 즉 경제적 기능에 대해서 다음 장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누정의 용도 및 역할은 다음과 같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함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제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누정은 유흥상경의 기능을 가졌다. 여지승람이 “大抵樓亭之作 莫不以遊觀之樂(대저루정지작 막부이유관지락)”(여지승람 券30, 등심누 安魯生記)이라 표현한 바와 같이, 이 기능은 누정의 가장 일반적인 기능이라 생각되는 바 쌍계정도 비록 절승지는 아니나 금성산의 북록을 관망할 수 있는 천변에 위치하고 있으니 만큼 유관의 구실을 다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할 것이다.

둘째로 누정은 시단을 이루는 기능을 하였다. 이 또한 누정의 가장 보편적인 기능의 하나로서 거의 모든 누정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기능이라 할 것이다. 한 누정을 중심으로 그와 인연이 깊은 교양인들이 모여 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음은 광주의 삼우정이나 초여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담양의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등 성산 일대의 누정을 중심으로 하여 시단을 형성했던 정철, 송순, 김성원, 임억영, 백광훈, 기대승, 고경명, 김진주, 이안눌, 오 겸 등의 활동양상을 일컬어 호남가단이라 부르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쌍계정을 중심으로 이와 같은 시단이 형성되었는지는 자세치 않으나 적어도 많은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읊어 왔음은 쌍계정에 걸려있는 설재선생의 사향시 등의 많은 액자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현지 촌지들에 의하면 지금부터 30년 전까지마,S 해도 시회를 열곤 하였다고 한다.

셋째, 강학소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모든 누정이 공통적으로 수행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많은 정자들이 자신들의 자제나 혹은 향리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강학하는 장소로서 활용되었었다.

쌍계정이 강학소로 큰 구실을 하였음은 무인년에 김기우 등이 앞장서 쌍계정을 중수한 뒤 4성에서 각 한사람씩 중수기를 게판하고 있거니와 모두 한결같이 강학소로서 기능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제 정봉태의 記중 관련 부분만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쌍계정은 오늘날에도 여름에는 방학해서 향리에 돌아오는 중고생을 대상으로 서당을 열고 있으며, 방이 헐리기 전까지는 겨울에도 강학의 장소로서 활용되었다고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쌍계정에 붙어져 있는 사성강당이라는 큰 액자가 저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할 것이다.

넷째, 제실(齊室로)서의 기능이다. 정자의 구조에서 제실을 가지고 있는 곳은 거의 예외 없이 이 기능을 수행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정자가 정사(精舍)나 齊등의 명칭이 붙은 것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데서 연유한다고 보아진다. 따라서 제나 정사 등을 정자와 구분 짓는 것은 부적합하게 되는 것이다. 쌍계정이 제실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는지의 여부는 명료하지 않다. 다만 쌍계정은 어느 개인에 의해서 건립유지되었다기 보다는 4성을 중심으로하는 금안동민에 의하여 공동으로 관리되어 왔음을 감안할 때 개인의 학문연마의 장소로 쓰여졌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 별서로서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은둔이나 감농소로서 쓰인 경우를 합쳐 칭하는 것이다. 감농소의 기능은 주로 모정에서 보이는 것이요, 누정의 경우에는 별로 많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담양의 관가정이나 구암정, 광주의 농은정 등은 감농소로서 쓰여졌다고 보여진다.

이와는 달리 누정이 은둔소로서 쓰여진 것은 상당히 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유적한 곳에 자리잡은 누정은 대체로 은둔처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광주의 원농정(일명 농암정), 소해정, 담양의 독수정, 장성의 죽하정 등은 대표적인 은둔소로서의 기능을 다한 누정이라 하겠다.

쌍계정은 그 위치로 보아 은둔소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반면 후술하게 되는 바와 같이 쌍계정을 그 본거로 하는 금안동 향약의 절목 중 “전야초부여리 절유수비사물이양간호사 (田野草賦閭里 竊愉雖非巳物一樣看護事”라는 일절이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근래에 와서는 여름철에 농부들이 자주 이용하고 있고 따라서 농사일의 의논이나 농사일꾼의 편성 등을 상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감농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할 것이다.


2. 쌍계정의 사회적 기능-향약계소로서의 쌍계정

위에서 우리는 쌍계정읭 문화와 교육적 기능을 살펴 보아 왔다. 그리고 다른 누정에서는 이러한 기능이야 말로 보편적 기능이다. 그러나 쌍계정의 경우는 다르다. 쌍계정은 향약계를 중심으로 하는 향약시행처로서의 기능과 고마청계를 중심으로 하는 공부의 공동부담소로서의 기능을 주기능으로 해 온 것이라는 데 오히려 쌍계정의 존립의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게 필자의 졸견이다. 존절에서는 전자, 즉 향약시행처로서의 쌍계정을 중심으로 그 사회적 기능을 살펴보고자 하거니와 그에 앞서 양노.교화소로서의 기능, 사장(射場)으로서의 기능, 및 종회, 계회소로서의 기능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여섯째, 누정은 양노. 교화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함평의 고광일 등에 의하여 건립된 남극루, 광주의 임병용에 의해서 건립된 대관정 등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 대표적인 누정이라 할 수 있다.

쌍계정의 경우는 어떠할까. 쌍계정이 향약시행처로서의 구실을 어느 누정에 못지않게 잘 수행해 왔음은 뒤에 자세히 언급하게 되겠거니와 향약이 교화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만큼 쌍계정도 교화소로 기능했음은 물론이요, 오래도록 방을 가지고 있었고 곁에 누정지기가 붙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양노의 구실도 했었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하겠다. 더욱 이와같은 우리들의 입록을 밑받침해주는 사실은 쌍계정이 방을 없애고 마루청으로 바꿔진뒤, 이 마을에선 겨울철 촌노들의 회집. 월담의 장소로서 1983년 마을 입구쪽에 “금안노인당”을 건립하여 쌍계답의 수입의 일부로써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안노인당은 재정적으로는 쌍계정의 일부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볼 때 쌍계정이 예나 지금이나 양노의 구실을 다하고 있다 하겠다.

일곱째, 사장(射場)으로서의 기능, 오늘날 각 골에 존재하는 사장의 이름은 거의 한결같이 **정으로 호칭되고 있다. 누정이 사장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쌍계정은 어떠 했을까. 아마 이 구실은 수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쌍계정에서 불과 400m(북쪽)지점에서 사장등(구릉)이 따로 있어 해방직전가지 유지들이 이곳에서 활을 쏘았었고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덟째, 종회소.계회소로서의 기능, 누정이 어느 한 문중에 의해서 건립.유지.관리되는 경우에는 화수회나 종친회 등 종회소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쌍계정의 경우는 건립주체가 4성임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따라서 어느한 씨족의 종회소로서 쓰여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금안동4성은 제마다 별도의 정략을 가지고 종회 등의 문중 모임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주정씨는 귀래정과 수우정, 하동정씨는 척서정, 풍산홍씨는 서륜당, 서흥김씨는 만향정 등을 혹은 일문이, 혹은 개인이 건립하여 일족이 함께 활용하고 있는 중이다.

이와는 달리 쌍계정은 계회소, 즉 금안동 대동계의 회휘소라 불리우리만큼, 계회소로서의 기능을 가장 큰 기능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쌍계정에 남아 있는 서흥 김종변의 쌍계정중수기에 의하면, “亭之於雙溪 古也未詳何代建築 然以閣中所儲 洞案參 攷則亭之爲洞閣 赤巳五六百 矣 盖玆金安一洞作亭於金城山下(중략) 每春秋講會 各姓氏 之長咸集 儼然有鄕父老賓弟子之禮式獻酬甫畢 或暴昭洞案 以資觀賢 或談說洞規(하략)”라 하여 쌍계정은 본래 금안동 일촌민이 동각으로 지었고 그리하여 거기에 모여 혹은 동안을 폭소하고 혹은 동규를 담설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앞에서 전문을 인용한 바 있는 쌍계답래에도 “근세에는 설재공 어은공 죽오당공 반환공 4현의 후손이 상여결합하야 명왈대동계라 하니(하략)”운운하여 쌍계정이 대동계의 소유요, 그 계회소임을 뚜렷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쌍계정입구에 세워져 있는 쌍계정안내도 대동계명의로 세워져 있는 사실 등을 감안해 볼 때 쌍계정의 기능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안동대동계의 집회소요 그 상징이라고 하는 점이다.

본 연구는 쌍계정과 그 존립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금안동대동계와의 관련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따라서 이에 관한 산론은 다음 장으로 미루고자 한다.

아홉째, 누정은 위에 든 기능 외에도 전쟁때의 지휘본부, 스님들의 유휴처, 측추 등의 용도로도 활용되고 있었음은 여지승람 권46에 실려 있는 서거정의 학명누기 중의 다음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서거정은 “夫樓觀之作非 爲觀美也 所以尊王人 接賓客 占時候察農作 以萬與民同樂之意(부루관지작비 위관미야 소이존왕인 접빈객 점시후찰농작 이만여민동락지의)” 라 하여 누정을 세우는 목적을 비단 관미에 그치지 dskg고 존왕인, 접빈객과 함께 점시후나 잘농작에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쌍계정이 스님의 유휴처나 측후의 목적으로 쓰여졌는지는 미상이다. 감농소의 구실에 관해서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 남은 기능은 전쟁시의 지휘본부의 구실여부인데 이에 관해서 구실도 뚜렷이 말한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마을이나 전야의 초적을 감시하는 구실을 했었으리라는 사실은  다음 기록에서 추찰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즉 뒤에서 인용할 향약절목의 53에는 “田野草賊閭里愉雖非巳物一樣看護事(전야초적여리유수비사물일양간호사)”라 규정하고 있는 바, 바로 이와 같은 향약규정이 시행되는 것이 쌍계정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쌍계정은 도적의 침해로부터 지키는 구실의 일역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열 번째 누정은 향약시행처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다. 우리 주변에서 대표적인 향약시행처로서의 누정을 든다면 광산군 대촌면의 양고동정, 동 칠석리의 부용정, 담양의 남희정, 영암군 신북면의 영팔정, 동 구림의 회사정 등은 향약을 시행하는 일종의 향청과 같은 구실을 해 오고ㅗ 있었거니와 우리들의 표본인 쌍계정도 향약시행처로서 구실을 크게 해 온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 쌍계정의 누정으로서의 한 특징이 있다고 믿어진다. 다음 사실들이 그를 입증해 주고 있다.

라 적고 있는데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금안동에서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것은 1635년의 일로 보여진다. 그 해 9월 25일에 41명의 동원들이 모여 16개항에 걸친 동중약규와 9개조에 이르는 약문을 정하여 서로 여행할 것을 결정하고 있으며 춘추 2회(봄 3월3일, 가을 9월9일)에 걸쳐 강신을 갖고 회취하고 있는데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동약은 아직 본격적인 향약으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상구와 상규 그리고 회취를 주 내용으로 하는 동계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향약의 4대목표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덕업상근이나 예속상교에 관한 조항이 잘 보이지 않으며 또한 향약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상류사회 중심의 자치의 구현이라는 색채가 찾아보기 어려우며 또한 위약자에 대한 규제가 태형이나 축출과 같은 중형이 아니고 상벌이라고 하더라도 “酒一盆肴三味(주일분효삼미)”로서 함께 마시고 즐기는데 소요되는 음식물을 부담하는 식으로 느슨하고 호혜적이며 신분의 차별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좀 더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금안동에서 향약이 본격화된 것은 그보다 36년 뒤인 1681년부터라 믿어진다. 그 해 3월에 향약상계안을 작성하여 57개 항목에 걸친 향약절목을 확정하여 161각의 주민들이 서명날인하고 도정 1인과 부정 2인, 직원 4인, 장의 2각, 유사 4인의 임원을 선출하고 있는데 도정에는 홍명기, 부정에는 이유의와 김성주가 맡고 있다.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도정을 비롯하여 유사에 이르기까지 13명의 임원 중에 부정인 이유의 외에 직월에 나두엽, 당의에 이명신, 나두엽 등 3명의 타 성씨가 보인다고 하는 점이다.

향약계를 조직할 당시 금안동의 성씨별 구성은 표1과 같거니와 이른바 금안동 4성 이외의 타성은 40호로써 24.8%를 점하고 있는 바, 이는 임원 가운데 타성이 차지하는 비중 23%와 거의 비슷한 비중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성씨의 구성을 고려한 안배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흥미로운 숫자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그러면 향약계에 입계한 161호는 마을의 전주민인가 아니면 일부에 부로가한 것인가, 필자의 단견으로는 奴를 제외한 거의 모든 가구가 망라된 것으로 생각된다. 향약수계후 15년 뒤인 병자 10월에 마을에서 수합한 고마조수합기에 의하면 고마조를 내고 있는 252호 중 奴 91호를 제외한 161호와 완전히 일치하며 23년 뒤에 사묘년에 결성된 고마청계 안에 등재된 239호 중 奴 91호를 제외한 148호와도 크게 차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금안동 동민이 거촌적으로 향약을 약정했고 쌍계정은 바로 그 본거의 구실을 했으리라는 사실은 추단하기에 어렵지 않다 할 것이다.

고려말에 들어 왔으나 조선조 중종이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향약은 일반적으로 (1)덕업상근 (2) 과실상규 (3)예속상교 (4)환란상혈 의 4가지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거니와 위에 지적한 금안동의 57항에 달하는 향약절목은 어떠할까. 내용을 욽어보면 상기 4가지 기본정신의 달성을 목표로 그 실천방안을 자세히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면관계로 57개항의 향약절목 전문을 인용하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나 그 주 내용만을 간추려 보면 1)부모불순자로부터 7)자시양반침어하호자에 이르는 7가지 위약자에 대해서는 극벌하되 그 정상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어 벌하고 8)친위불목자로부터 38)근접증인유연누일자에 이르는 30항의 위약자는 차벌하되 그 정상에 따라 다시 상중하로 나눠 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39) 공회 만도자에서 42)공좌퇴편자에 이르는 4개항의 위약자는 좌중에서 면책하는 식의 비교적 가벼이 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43)원악향리 44)인리민간작폐자 45)공물사람징가물자 46)용간서원 47)람상호수 48)서인릉열사족자 등은 직접 벌하지 않고 관에 고하여 과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잘못을 뉘우치고 천신하는 자에 대해서는 정상에 따라 치죄하고 관에 고하지는 아니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49)혼상부조사에서 57)명재군 역자급향리지불득면역자개이상한차역사에 이르는 나머지 8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벌하기보다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권장하거나 금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하 특기할 만하다고 짐작되는 몇 가지 절목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우선 반상간에 신분적인 차별을 보이는 규정이 여러군데 보이고 있다. 즉 젊은이가 어른에게 불경하거나 천인이 구인을 능명할 경우에는 극벌하도록 규정한 것을 비롯하여 26)상민으로서 의관을 참람하고 비단옷을 입거나 28)촌중기마하는 경우는 차벌하고 있으며 34)상민의 아들이 결혼시에 사모를 착용하거나 35)딸이 신행시 가마를 타는 것을 금하고 있다. 또한 상민이 함부로 사당을 짓는 것을 금하고 이를 어긴 자에 대해선느 역시 차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분적인 차별을 이에 그치지 않는다 51)같은 과실을 저질러 매를 맞게 되는 경우에도 양반은 자기 奴나 중서인으로 하여금 대신 맞게 하되 매맞는 자리에 입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음은 신분사회인 당시로서는 능히 있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조정방안으로 7)양반을 빙자하여 하호자를 참탈하거나 12)스스로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침탈하여 기쟁하는 자에 대해서는 양반일지라도 금벌하거나 차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금안동이 비록 반상의 구별이 확연한 신분사회이지만 향약의 기본정신인 상규, 상휼을 실현하기 위해서 양반층의 부당한 침탈을 억제하는 걸목을 설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얼마나 제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위에서 금안동에서 향약이 본격화된 시기를 1635년 동중약규가 만들어진 때로 보지 dskg고 1681년 향약상계안이나 예속상교에 관한 규정이 보이지 않고 (2)향약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상류층 중심의 자치라는 색채가 잘 보이지 않으며 (3)위약자에 대한 규제가 태형이나 삭적과 같은 중형이 아니고 가장 무거운 벌이라고 하더라고 “酒一盆肴三味(주일불효삼미)”로서 함께 마시고 즐기는데 소요되는 음식물을 부담하는 식으로 느슨하고 호혜적이며 신분의 차를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제 이에 관하여 잠깐 살펴 보기로 하자. 동중약규에서는 16가지의 약규 중 14번째에 “約內違會者隨所氾上下定罰事(약내위회자수소범상하정벌사)”라 하고 이어서 다음 조항에 상하벌의 벌량을 정하여 “約內上罰則酒一盆肴三味 中罰則酒二곤肴二味 下罰則酒**鷄一首事(약내상벌칙주일분효삼미 중벌칙주이곤효이미 하벌칙주**계일수사)”이라 규정함으로써 가장 무거운 상벌의 경우에도 술 일분(동이), 안주 3가지로 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향약절목에서는 각종 위약자에 대하여 우선 극벌, 차벌 및 하벌로 3대별하고 다시 극벌을 상벌, 하벌로 세분하여 상벌은 고관과벌하고 중벌은 鄕約中結笞不通水火로 다스리며 하벌은 삭적불치향리하되 개과칙해벌토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차벌”의 겨우도 상중하로 나누되 상벌은 불통수화하고 중벌은 결태삼십하며, 불벌은 결태이십하도록 정하고 있으며 끝으로 하벌은 좌중면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향약절목에서는 위약자에 대한 벌칙이 위약사항 및 정상에 따라 세분되고 있을 뿐 아니라 벌의 양도 훨씬 강화되어 고관과죄케 하거나 태형, 삭적, 혹은 불통수화라는 견디기 어려운 규제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같은 위약자라도 양반의 경우에는 奴나 중서가 대신 벌받도록 함으로써 결국 각종 규제는 상민이나 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동계가 공동체적 호혜성이 강했다면 향약계는 신분사회의 차별성이 강하게 보이는데 이는 본래 향약이 사류들에 의하여 주창.추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17세기 후반 금안동은 사성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을 정점으로 하고 奴를 저변으로 하되 그 중간에 중서상민이 끼여있는 계층적 신분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쌍계Wjd은 바로 그러한 신분사회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끝으로 금안동의 향약절목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조항은 승려를 불러 여러날 집에 머물게한 자는 승려와 함께 차벌, 곧 비교적 무거운 벌을 받고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38)近接僧人留連累日者 僧與主人幷論(근접승인유연누일자 승여주인병론). 금안동이 거유를 배출한 명촌이요 향약이 본래 사류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당연할 일이라 하겠지만 당시의 익불하는 종교정책이 향촌에 까지 잘 뼏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금성산은 나주의 주봉으로서 인근에서는 대산이요 특히 금안동이 자리하고 있는 북록, 광곡골짜기는 거찰이 들어 설만한 지형인데도 불구하고 명찰이 없는 것은 이러한 데 일인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위에서 우리는 동중약정과 향약상계안을 중심으로 17세기 말에 있어서 금안동의 모습과 향약시행처로서의 쌍계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오늘날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오늘날의 우리 향촌에 향약계는 물론 향약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없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다. 근대화와 더불어 향약의 기능의 대부분은 각종 법제적 기구가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에 따라서는 대동계 혹은 동계라는 형태로 유품과 기능이 잔명을 이어가고 있는 곳도 없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쌍계정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쌍계정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금안동 대동계의 계소요 회취의 장소이다. 계는 본래 마을안의 자치와 상휼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만큼 쌍계정이 향약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겠거니와 필자가 여기에 특히 쌍계정이 오늘날에도 향약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까닭은 딴데 있다. 매년(음)4월 20일, 속칭 금안동 열두골에 살고 있는 대동계원들이 이 정자에 모여 강신후 회음하면서 하루를 즐기고 있는데 이때 이루어지는 중요한 행사의 하나가 마을 안의 선행자에 대한 표창이다. 이 제도는 중간에 중단되었다가 1983년부터 다시 부활되어 한 해에 2명씩 시상하되 주로 4성씨 안에서 선발해 시상해 오다가 1987년부터는 1명을 추가하여 3명으로 늘려 시상하면서 대상자도 굳이 4성에 한하지 않고 대동계원이면 누구나 성행에 따라 상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

그간의 수상자 명단과 선행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렇듯 쌍계정은 덕업상권하는 향약의 정신을 구현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바, 이 기능이야말로 후술하는 쌍계정답을 동민에게 저율의 소작료로 경작케 하여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하고 있는 사실과 함께 적어도 현시적에선 쌍계정이 마을사람들에게 가장 광범하게 기여하는 측면이라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