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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湍漫錄(장단만록) - 3


    

 27일 아침에 관청에 들려 관에게 어제 아침에 윤 피고를 투옥시킨 것은 파 가겠다는 날자가 지났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바이나 끝까지 파가지 않으니 이 사건으로 천리 밖에서 와 있는 우리들의 정성을 통촉하여 주십시요, 윤 피고를 계속 문책한 바, 그가 하는 말이 몇 달간 옥살이를 할망정  끝까지 파 가지 못하겠다 하니 이 사건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오직 우리들은 원님의 처분만 고대 할 뿐 이옵고, 또 형편에 따라 윤 피고들이 마음을 나쁘게 생각하여 우리들에게 앙갚음을 한다면 사건은 더욱 복잡해져 끝이 없을 것 같으니 다시 관령으로 파 가도록 독촉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관에서는 오래된 2~3총의 무덤은 쉽사리 파가지 않을 것 같음으로 매우 고심 중인데 어찌 그리 성급하게 재촉이 심하냐 하였다.

또다시 관에게 그들이 파 가겠다고 하면서 몇 달간을 끌으니 답답한 마음이 실로 헤아릴 수 없어서 말씀드리는 것이오니 도와주시려면 조속히 도와주시고 그렇지 않으시면 진퇴를 결정코저 하오니 양자 중 한 가지를 택하여 속히 결정하여 주십시요 라고 탄원하였다.

관은 갑자기 화를 내면서 수 십 년간 끌어오던 사건을 한결 같이 조속한 발굴만을 소원하는가, 하며 정 그렇다면 너희들 사사로운 힘으로 파 옮기라 하기에 우리들은 울분함을 참고 태연한 기색으로 관에는 공법이 있음으로,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하였다.

억울한 일을 생각하면 관령을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파내도록 처리 하겠습니다 마는 차마 그럴 수는 없고, 오로지 원님의 명쾌한 판결만을 기다리는데 어찌 스스로 파내도록 처리하라 말씀 하시며 우리들을 범죄에 빠뜨리려 하십니까. 오로지 원님의 처분만을 기다리겠습니다. 또 10일간을 연기한데 대하여도 원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엄벌은 하지 않고 오히려 범법자 들을 가련하게 생각하시는 혜택을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까지 연기되어 왔으니 우리들의 피나는 고생은 고사하고 원님의 어려운 처지도 많으실 줄 압니다만 하루빨리 파네도록 독촉하시여 우리들을 속히 돌아가게 해 주시고 법정도 번거롭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관이 이 말을 듣더니 잡아가둔 후에도 파가지 않으면 곤장을 처서라도 파가게 할 수 있고 또 전령을 시켜 파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지 않느냐 함으로 우리들이 대답하기를 이미 관에서의 명령으로 당연히 파옮기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사건이 늦어져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관이 말하기를 반듯이 파내도록 할 것이니 물러가서 기다리라 하기에 물러났다.  그 후 사건의 전말을 여러 가지로 검토 분석해본 결과 아무래도 의구심이 들며 막연한 것 같아 그날로 또 다시 소장을 제출 코저 두 사람을 상경시켰다.

28일 아침 우리들을 불러 다시 물어 보며 말하기를 피고 윤의 아우가 고소한 내용을 말하며 자기형을 석방해 주면 후환이 없도록 전부 파 가겠다고 하니 윤 피고를 돌려 보내고 너희들과 윤씨네와 같이 파내되, 만약에 파내지 못하게 된다면, 즉시 윤 피고를 잡아 오도록 하며 또 한편으로는 즉시 관에게 고하라 하였다.  우리들은 관에 대하여 전번에도 10일간의 여유를 줌으로써 파 옮기는데 지장이 되고 지연이 되었는데 또 다시 10일간의 기한을 연장해 주는 것은 불가 하다고 생각되며 또 불응시에 윤피고를 잡아 오라하시고 또 와서 관에 고하라 하시지만 지금 두 사람 중 한사람은 병 중 이어서 오직 저 한 사람뿐 입니다. 하였다.

또 우리들과 윤 피고와의 떨어진 거리는 70리 인데 누가 尹을 잡아오며 누가 관에 고 하겠습니까. 윤피고를 압송 하시려거든 모든 사례를 예측하시고 장교를 따라 보내 주십시오 하였다.

관이 한참동안 생각 끝에 장교(將校)에게 명령하여 윤 피고와 같이 가서 세 개의 무덤을 3일 동안에 하루에 한 무덤씩 파내라 하고 만약에 이에 불응하면, 尹을 다시 잡아오라 하며 장교인 한진석 에게 명령하였다.

한진석이 명령을 받고 출발함으로 우리들 두 사람도 뒤를 따라 윤 피고의 태도를 살펴본바 여러 윤씨패들의 동정은 무덤을 파낼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고 숨어서 안 파낼 궁리만 모의 하고 있었으며, 또한 떼를 써가며 하는 말이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옮기지 못 하겠다 하며 설령 관령으로 옮긴다 하여도 자기네들이 응하지 않으면 파 옮기지 못할 것이라는 태도였다.

또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관령으로 파 옮긴다 할지라도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와 힘을 합쳐 우리들과 대결하여 위협을 한다면 감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등 위협을 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적대하기가 어렵기에 1주야를 상의 하였으나 묘책이 없어서 우리들 몇 사람과 장교 1명으로는 파 옮기는 일을 착수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옷을 갈아입고 읍으로 가서 장교 한진석 에게 윤피고들의 음모 사실과 자세한 행동 상태를 알려주어 모든 책임을 일임하였다.

장교는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 즉시 윤 피고를 잡아끌고 읍으로 들어가 말일 날 아침에 관가에 바로 고하며 소인(장교)의 힘과 정씨네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적대하기가 곤란하니 특별한 사또의 분부로 사건을 처리하여 주십시오 하고 고하였다.

관에서 이 말을 들으니 노기가 충천하여 윤 피고를 잡아들이라 하며 당장 관령으로 파 옮기겠다 하며 곧바로 전령을 건강하고 씩씩한 장교에게 책임지우고 그 동네 담당관 에게 까지 책임지도록 하여 윤 피고를 압송해 보냈다.  그러나 10여리도 못갈 무렵 장교 1명이 돌아와서 고하며 하는 말이 가다가 중도에서 행패를 부리므로 도저히 끌고 갈 수가 없다고 하니까 관이 크게 노하여 팔을 걷어 올리고 창문을 밀치고 윤 피고를 즉각 잡아들이라고 추상같은 호령을 하였다.

때마침 날이 저물어 초롱불이 휘황 찬란하고 나졸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윤피고를 큰소리로 심문하여 관령을 어기며 네가 어찌 감히 거만한 행동을 하는가 하며, 너의 행동으로 보면 당장 곤장을 쳐서 옥에 가두고 무덤을 파가도록 독촉할 것이나 관으로서 용서를 하며 장교와 동행해 보낸 것은 네가 스스로 파내서 백골 만이라도 이장케 하라는 뜻이었는데 중도에 행패를 하니 이 무슨 행패냐고 크게 꾸짖었다.

윤 피고가 대답하기를 만 번 죽더라도 파낼 수 없고 하늘이 무너져도 못파가겠다 하였다.

관이 말하기를 법이 엄연히 있는데 관이 너의 죽엄을 알바 아니로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하여도 반드시 파 옮기겠다 하며 이렇게 여러 번 엄하게 다스렸는데도 완강히 거절함으로 관이 윤 피고를 단상에 불러 세우고 여러모로 자세한 설명을 하며 파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법대로 말하여도, 대신의 묘소 근처에 가히 그럴 수 없을 것이며 또 사실대로 말하여도 막중한 분부가 따로 있기 때문에 파내가야 할 것이라 하였다. 또 서울에서 온 편지 5~6장을 내보이며 사람을 시켜 대독하게 하였다.

그 내용인즉 서울 도동(都洞) 이판서(李判書) 대감 승보(承輔), 교동 김판서(校洞 金判書) 대감 정동(貞洞)의 여러 대감들의 편지라 하며, 이분들이 당초에는 너희들의 편의를 돌봐 주라는 부탁 이었으나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안 후에는 윤 피고를 인간적으로는 동정하나 그 내용을 심사숙고한 결과 돌보아 줄 수 없는 처지라 하며 편지를 보내왔다 하였다.

관이 윤 피고에 대하여 중신들의 체면을 보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처지이니 네가 아무리 어리석을 지라도 이번 일의 처리를 잘하여 자진해서 파가도록 하라고 하며 천리밖에 사는 정씨네 들에 대하여 관으로서 어찌 사사롭게 처리해 줄 수 있겠느냐, 너로 말하면 바로 내 관내에 있는 백성인바 담당관으로서 어찌 동정이 안 가겠느냐.

그러나 사건이 이와 같이 엄정하게 되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네가 만약 파가는데 대하여 한결 같이 거부 한다면 곤장을 쳐서 옥에 가두고 영문에 보고하여 유배 시키고 관에서 직접 가서 파 옮길 터이니 사건의 끝마무리를 그렇게 대처할 줄 알라 하고 포도청에 가두었다. 5월 1일 다시 장교하고 집사들에게 명령하여 포졸, 기수 6~7명으로 하여금 윤 피고를 압송해 보낸 후 서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차 2일날 서울에 갔었던 두 사람이 도착하여 서신을 전하게 되었다. 그 서신에 영예 올렸던 소장에 대한 결정 안을 방금 가지고 왔었다.

다시 전하는 말이 4~5일간을 기다렸다가 그 때 까지도 파가지 않으면 즉시 사건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신고하면 곧 서울로부터 따로 명령을 내려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3일날 서울에 있던 두 사람이 영(營)의 결정안을 받아 가지고 와서 즉시 그 결정 안을 원님께 올리려고 할 때 뜻밖에 윤국빈(尹國彬)이라며 간청하여 말하기를 단아래 한 무덤은 어저께 이미 파갔으며 나머지 두 무덤을 이달 말일내로 파 옮기겠다 하며 말일까지 연기해 달라고 하기에 그 간청을 완강하게 거절하여 윤 피고의 팔을 붙잡아 끌며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서 결재된 결의안을 원님께 올려 신속히 처리 하고저 하던차라 하며 끌고 가려 하자 윤피고는 겁을 먹으며 즉시 물러가 파가겠다고 함으로 못 이긴 채 하며 석방시켰다.

그날 저녁에 장교의 현장 보고서가 도착하여 살피니 그 내용이 1일 날 장교가 저녁때 기곡리에 당도해보니 윤피고가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동네 담당관에게 알렸는지 동네 담당관은 도피하고 없어서 윤씨 무리들에게 알려주어 어제 단아래 한 무덤만 겨우 파내고 그 나머지 두 무덤은 파내지 않고 윤씨네들은 산에 모여 서성대기만 하고 사역할 일꾼조차 모여 있지 않음으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파내기가 불가능 하오니 관가의 특별한 처분을 하는 것만이 효과적 이라 생각 됩니다. 라고 하였다.

관이 이 말을 듣더니 즉시 결정 안을 내려 4일 아침 일찍이 결정된 사항을 보낼 때 모든 것을 감시하고 소식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5일날 밤에 장교들이 와서 보고 하는 말이 세 개의 무덤마저 파 옮기고 왔다하니 이때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처지 이었다.

6일 날 아침 장교와 관속들이 차례로 찾아와서 10여 년 동안 싸워오던 설제 문정공의 묘소에 욕되었던 오점을 오늘날 깨끗이 처리되었음을 축하하며 그 동안 밀렸던 식사대며 관청에 납부할 여러 가지 경비가 제시되었다.

이 때 우선 우리들이 조상의 일로 한 달이 넘도록 관청에 자주 출입하며 묘를 파 옮기는데 대한 많은 일로 너무나 소란을 피웠음을 사과하고 여비나 경비 등을 지불코져 하였으나 지불할 돈이 떨어져 지불치도 못하고 천리타향 생면 부지한 처지에 상의할 곳도 없는 처지 이라 심정이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부득이 주인집에 머물면서 한 사람은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상경 하게 되었는데 다시 관에 들려 원님이 힘써주신 덕택으로 욕되었던 과거를 청산해 주신데 대하여 치하 하고 또 기지(基地)의 송추(松楸)건에 대하여도 윤씨 측에서는 나무를 베어가지 못하도록 관에 진정하여 결제를 받고 물러났다.

미결사항을 마치고 관과 작별할 때 관이 두로 치하 하며 고맙다는 말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7일 서울에 도착하여 제반 소용된 경비를 갚기 위하여 비싼 이자 돈을 얻어 가지고 두 사람이 하인과 함께 같이 산소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풍문에 들리는 말에 윤씨네들이 보복을 하고저 한다는 소식이 있어 대항할 수 없어서 파낸 곳에 대한 다짐도 자세하게 보지 못하였다.

8일에 체격이 건장한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9일에 산 에 가서 윤 피고들에 대하여 공법이 위선된 다는 것을 설명하고 또 송추의 벌목도 관에 사실을 진정하여 결정 안을 받았다는 것을 윤 피고 들이며 묘지기와 주민들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설득 하였다. 10일 날 이미 파간 흔적을 살펴보고 있으니까 사방에서 서로 오고가는 말들이 문정공의 신명의 남은 여음이 오래되어도 계속되어 다시 하늘의 밝은 빛을 보게 되었으며 그 자손 에게는 반드시 큰 기쁨이 있으리라고 칭송 하더라는 것이었다.

11일 고향에 돌아가려고 할 때 마침 비가 내리기에 우비를 갖추고 서울을 향하여 가는데 비는 폭우로 변하여 점점 세차게 쏟아져서 겨우 장포 파주(坡州)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12일에도 전날과 다름없이 비가 내려 갈 길이 막혀 나갈 수 없었으나 천리의 낯선 객지에서 노자마저 떨어져 더 이상 유숙할 수가 없음으로 온종일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장단까지의 거리는 120리 이며 장단에서 묘소까지가 60리니 묘소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180리~200리나 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4주가 지나도록 헤매였다. 그런데 작년에 경기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백미 1말에 2량 을 호가 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에 소용되는 비용이며 여비 등을 합치면 엄청난 경비가 들었다. 더욱이 그 동안의 괴로움은 말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생을 하였으며 자세한 것은 필설로 다 나타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몇 백 년간이나 미진하였던 사건이고 천리의 도정과 고관대작에 호족의 권세를 과시하던 세력자인 윤 씨네들을 오직 5~6인의 힘으로 고생하기 3개월 만에 더운 여름 날씨와 폭풍우 에도 불구하고 대적하여 마침내 승리하여 선령(先靈)에 대한 치욕과 우리 가문의 수치를 말끔히 씻게 되었다. 옛글에 이르기를 뜻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이룩하고 오래 굽어 있으면 펴 질 때가 있다하였기 반드시 천리 원칙에는 강자(强者)도 굴하게 마련이다. 이 어찌 사람의 힘만으로 되리오. 선령들의 영혼이 도와 주셨기에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옛것을 살펴보고 거울삼아야 할 것으로 미루며 우리들 집안의 역사의 발자국으로 간직하여 널리 종친간이 보고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니 이 기록을 장단만록이라 명명하여 후세에 남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