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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湍漫錄(장단만록) - 2


    

 피 고소인인 윤씨(尹氏)들이 줄을 지어 큰나무를 미리 재치고 산 골짝이를 가로막아 실지로는 4~5보밖에 안되는 것을 그림으로 속여 10~20보라고 허위 조작하였다는 사실을 굽어 살펴 주십시요, 라고 하였더니 관에서 말하기를 관작(官爵:높은 벼슬(1품 묘소라 하지만 100보 안은 법전에도 관계가 없다 하였는데 어찌 10~20보 정도의 가감(加減)을 가지고 말썽을 부리느냐 하였다.

우리들은 관에 대하여 백성들이 알기로는 법전에 있기 때문에 고소(告訴)하는 바라고 하며, 실지 거리의 길고 짧음은 실지로 조사 하시어 판단하지 않으시고 어찌 윤피고의 진술만 믿고 참작 하십니까, 도 우리가 서명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형리의 부당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렇게 된 것인즉 전에 윤 피고가 자기들의 조모 무덤이라 하는 것이 공판정에서 밟혀 졌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6대조 무덤 이라하니 이는 묘적을 옛날부터 있었든 것처럼 꾸미려는 간계 이옵기 우리들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관이 윤 피고를 책망하며 묻되 전에 조모 산소라 말 하였기에 당시 법정에서 조부 산소가 아래에 있고 아비 산소가 위에 있다는 불미한 처사를 어찌 할 수 있는가 하며 당시 도장(倒葬)조상의 묘소 윗자리에 자손의 묘를 쓰는 것)의 이유를 들어 문책한 바가 있는데, 이제 또다시 6대 조묘라 하니 6대는 고사하고 수 십대라 할지라도 상하 구별에 선후의 법이 엄연하게 있는데 대수(代數)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폐 일언 하고 가장 가까운 세 무덤을 며칠 안으로 즉각 파 가라고 하고, 나머지 무덤에 대하여는 파가란 말을 하지 않기에 우리들은 다시 고 하여 말하기를 세개의 무덤에 대하여 파가라고 하신 것은 감사하오나, 그러나 나머지 무덤들도 앉아서 보면 똑같은 100보 안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가까운 거리의 것은 윤흥복의 조묘라 하나 형리가 살펴 보니까 봉분이 없으므로 그림대로 측량을 하지 않은데 대한 것도 잘못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고 그 안에 있는 두개의 무덤만은 불과 30~40보 이내이니 지척이나 다름없으니 동시에 파가게 하시고, 바라옵 건데 해괘 망측한 불미한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관은 세 개의 분묘는 파낼 것이며 그 밖의 무덤도 차차 파가게 하겠다고 하고 다시 관 에서는 성낸 말투로 윤피고를 질책하며 가장 가까운 세 개의 무덤을 곧 바로 파가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윤피고는 자기의 아버지묘는 파가겠다고 하고, 6대 조묘라 사칭하는 무덤은 파가지 못 하겠다 함으로 관이 윤 피고에게 대하여 정씨 묘소 바로 근처에 있는 무덤은 파가지 않고 먼 곳에 있는 무덤을 먼저 파 가겠다고 하니 네가 만약 파가는 것을 완강히 거절 한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관령(官令)으로 바로 파내도록 처리 하겠다고 하며, 즉시 파 내도록 준비하고 윤피고를 잡아 가둠으로써 우리들은 그 모양을 보고 물러 나왔다.

그리하여 16일 날 아침 사건에 대한 진척 상황도 살필 겸 또 묘를 파내는 일이 만약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이를 재촉 하려고 법정에 들어갈 때 피고 윤국빈의 아우도 마침 법정에 들어 왔었다.

그는 관에게 빌며 자기 형을 석방해 주고 파 옮기는 기간을 10일 간만 연기해 주면 전부 파가겠다고 말하였다.

우리들은 이 말을 듣고 관(官)에게 10일간의 기한을 주면 파가겠다 하지만 이는 부당한 말일뿐 아니라, 천리 밖에서 와 있는 우리들에게 불안감 을 줄 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복잡한 환경아래 있으니 속히 파 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관에서는 선대를 공경하는 자손 이라면 비록 천리 만리길 이라 할지라도 어찌 멀다 할 수 있으며 1년간 연장된다 할지라도 너무 염려 할 바가 아닌 즉 몇  십년이나 해결하지 못한 미제의 사건을 어찌 10일간의 연장도 못 보아 주겠느냐, 하며 그 사람의 조상을 용서하여 10일간의 여유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바란다면 더 이상 논의 하지 말라. 피고 윤에 대하여도 10일간의 여유를 주었는데도 그 사이 파 가지 않으면 그 때는 관령(官令)으로 파 헤쳐 조치하여도 윤피고는 감히 문제 삼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어 우리들 에게 건네주었다.

이 서류를 가지고 아래 동네에 내려가 기다리고 있다가 만약에 약정된 기일이 지나도 파가지 않을 때 너희들이 이 사건을 다시 문제 삼는다 하면 관에서 파 내겠다 며 피고 윤국빈 을 다시 문책하여 말하고 만약에 파가지 않으면 관령으로 파서 옮길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너희들이 스스로 파가도록 하라고 부탁하며 석방시키기에 우리들도 같이 물러나왔다.

그러나 사건의 해결은 늦어 가고만 있었다. 안면이 생소한 객지에서 사건해결을 여러 가지로 검토한 결과 적절한 묘안이 서지 않아 막막한 것만 같아 두 사람을 즉시 서울에 보내고 네 사람은 묘지가 있는 동네로 가던 길에 두현 마을에 사는 친척 윤경과 연천에 사는 종친 형옥 등을 만나 사건의 전말을 상의하며 30여리를 걸어가니 해도 지고 몸도 지쳐 삼미장 장터에서 유숙하였다.

17일 아침에 묘가 있는 동네로 같이 가서 윤 피고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관의 지시는 무시하고 그들의 모의 하고 있음을 탐문한바, 전혀 파 갈 의사는 없고 경향 각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이장(移葬)에 대항할 여러 가지 대책을 준비하기 위한 관계 고위층 과의 접선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본부의 앞, 뒷집 집사는 윤학관과 관계되는 아산(牙山)고을 행정관과 친밀한 교분이 있는 관계자와 줄을 대고, 또 한편으로는 서울에 사는 고관(高官)대작 인 친척간의 관속을 연계하여 사건을 무마 코져 면밀한 공작을 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도 여러모로 간계(奸計)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건의 추이가 뜻 밖에 돌변함을 깨닫고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 이에 대비코저 즉시 행동에 옮겨 세 사람은 묘소 근처에 유숙하고 두 사람은 160여리의 먼 거리를 걸어서 서울에 당도하여 피고들의 모의책과 행동을 탐지하여 아는 대로 송동(松洞)에 자세하게 보고하고 여러 방면으로 사람을 보내서 그들의 모의 통로를 중단토록 하였다.

20일 서울을 떠나 장단으로 가다가 겨우 파주군 세류 촌에 이르자 때마침 내린 비로 계속 4일간을 머물다가 근처의 경치와 풍경을 보니 흐르는 물과 같이 세월이 흘러 녹음은 우거지고 익어가는 보리 싹은 점점 자라서 황금빛을 이루고 있어 자연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함에 대한 회포가 한층 더하며 영농기에 하늘이 내리는 절기의 변함없음에 다시 한 번 감회가 무량하였다.

유유히 흐르는 구름을 쳐다보고 생각하며 우울한 심정을 달래고저 술잔을 들어 이번의 사건을 생각하니 막막한 심정뿐이었다. 그만 두 자니 선령(先靈)의 영혼이 두렵고 빨리 처리하고 저 하나 뜻대로 되지는 않고 이 얽히고설킨 사건의 매듭을 짓기가 실로 난감할 지경이었다.

24일이 되어 장단부(長端府)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자고 25일 근처에서 유숙하던 종친이 왔길래 먼저 피고들의 동태를 물어보니 묘를 파갈 의사는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약정된 날 26일이 지났어도 파가지 않음으로 그 사유를 적어 다시 고발하였다. 관이 우리들을 불러 단상에 세우고, 윤피고의 의송장(議送狀)을 내보이며 상부의 결정안이 이러하니 200여년이나 된 묘를 가히 쉽게 파가지 않을 것 같으니 우리들에게 다시 고소장을 작성하여 제출하면 그 소장을 자세하게 조사 검토하여 엄격하고 공정하게 처리하겠다고 확언 하였다. 그런데 윤 피고의 소장 내용을 보니 1862년 정종덕(鄭鍾德)으로부터 산소를 같이 쓰자는 약정서를 받았으니 시비 논쟁이 안 될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정씨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소송을 제기하니 관이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파 옮기라는 독촉을 하니 자기네로서는 정씨 네들과 관에서 파가도록 주장을 한다면 소장(訴狀)으로 이를 대응할 것이라 하므로 우리들은 정중한 태도로 관에게 피고 윤씨들의 기만적인 사실을 일일이 설명하며 이 소장이 터무니없는 기만된 소장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이때까지 자기네! 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파 가겠다는 서약까지 하고, 이제 와서 우리들과 같이 공동 산소한다는 약정서가 그들에게 있다하나 어찌 공동산소를 한다는 표(標)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 사실 무근한 날조이며 또 앞서도 말한 대로 당시 자기네의 할아버지 묘라 하던 묘가 이제 와서 6대 조묘로 둔갑을 하니 이 또한 모순 된 사실이며 또 담당 관리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실 입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그때 담당 관리들도 웃고 있었다) 이는 터무니없는 근거를 조작하여 올린 소장(訴狀)입니다. 또 친장(親葬) 한지가 10여년 뒤에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그 밖에 날조된 소장 등으로 미루어 보아도 尹씨들의 그릇된 소행을 아실 수 있겠습니다.

관에서 말하기를 그들이 혹시 양자(養子)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기에 우리들이 대답하기를 그들은 본시 양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층 아래로 내려가 관에 대하여 관법(官法)에 의거 결정한 바, 그들은 자기네의 행실이 옳지 못함을 인정하고 파 가겠다는 서약서 까지 썼으며 또 10일간의 기한을 연장해 준 것만 해도 원님(元任)께서 尹씨네들을 가련히 여겨 연장해 주신 덕택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법령에 따라 파 가겠다는 서약을 그들 스스로 하고도 이제 “또 관령을 어기며 터무니 없는 소장을 당국에 올려 한 장의 날조된 소장으로 원님의 밝으신 행정에 반역적인 행동을 하니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니 오리까. 폐 일언 하고 기한된 날이 이미 지났으니 관에서 파내라는 영을 내려 오늘 안으로 관령으로 파 가도록 독촉하여 처리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官이 尹피고를 불러들여 엄중히 문책하며 기일이 지났는데도 너는 어찌 파 가지 않느냐고 물으니 尹피고는 도 꾸며대면서 하는 말이 비록 鄭氏네 산소라 하지만 그 자손이 아님으로 못 파가겠다 하였다.

관이 네가 무덤을 파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자손에 대한 말로 그 자손이 아니라 하니 네가 그에 대하여 아는바가 있으며 또 믿을 만한 증거라도 있느냐고 따져 물으니 피고 尹은 전자에 문서로 된 증거가 있었는데 근자에 소실되었다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관이 정씨 자손이 아니라는 문서 증거가 어찌 너의 집에 있으며 또 산소를 같이 쓰자는 증표만이 소손되지 않고 남아 있느냐, 또한 정씨가 비록 근처에 살지 않는다 하여도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면 그에 구애되지 않고 천리 밖에 살면서도 대대로 이어받아 세세년년 성묘를 올릴 수 있겠는가. 너의 소행은 매우 당치 않은 불미한 행동 이라며 윤 피고를 다시 문책하여 즉시 파 가도록 명령하였다.

윤 피고가 대답하기를 오래된 무덤이므로 파가지 못 하겠다 하니 관이 오래 되었다면 그렇겠다. 그러나 너의 아비 무덤을 우선 파 가라고 누누이 문책을 하니 윤 피고는 또한 그도 못 파가겠다고 하므로 당시의 현상으로 보아 당장에 윤피고를 투옥시키고 관령으로 파 내라고 할 것 같았으나 돌연히 관의 태도가 바꾸어 지더니 마지못해 투옥 시키고 또 가만히 살펴보니 그 자리에서 관령으로 파 낼 것을 독려시킬 것 같았으나 뜻 밖에 사태가 이상 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상하관료 등이 연결되어 심상치 않은 양상이 전개된 것을 감지하였다.

그 내용을 알아보니 고관대작과 권세 있는 집안이 경향각지에 거미줄 같이 얽혀 고차원적인 대책을 세워서 무마 시키고저 함을 알아 우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하여 원통스러움을 참다못해 기왕에 적을 향하여 쏘려던 화살만 잃어버린 격이 되어 사건이 종국적인 해결을 보지 못할 것만 같은 처지가 되었다.  실로 이런 때를 진퇴유곡이라 생각이 들어 사건을 소홀하게 대해서는 안 되겠다고 정신을 가다듬어 고소장을 다시 면밀하게 만들어 대처코저 한편으로는 문서작성에 골몰하고 또 한편으로는 행장을 꾸려 두 사람은 서울에 가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저 상경시키고 네 사람은 관의 밝은 처단만 기대하고 있었다.

이 때 두현에 사는 종친 윤경과 연천에 사는 종친 형옥과 명숙 등 여러 사람이 도착하여 하루 저녁을 같이 자며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검토. 상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