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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간의 호남출신 8정승의 행적


 대종회 발전연구위원 정우걸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수는 무려 369명에 이르고 있으나 그 중 호남출신은 8명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 8도에 인재등용을 골고루 하였다면 호남에서도 50여 명은 기용되었어야 할 것인데 8명의 정승만을 기용하게 된 원인은 호남은 반역향이라 호남 사람이 벼슬이 높이 오르게 되면 반역자로 변하기 쉽다는 속설이 있어 조선 개국초부터 정승의 반열에 임명하는 것을 꺼려해 오다가 1589년(선조22) 전주 출신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호남은 완전히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 건국의 해 1392년부터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난 1589년까지 197년 간에 6명의 정승이 기용되었으나 그 이후 조선왕조가 패망한 1910년까지 321년 간에 단 2명의 정승이 기용되었을 뿐이니 지역차별치고는 너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남 50여 주에서 다른 고을에서는 단 한 명의 정승도 배출하지 못하고 오직 나주목에서 8명 모두 배출되었다. 보학의 대가 장성출신 산암 변시연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나주가 정승 8명 배출로 1위이고, 경상도 하동고을에서 정승 5명이 배출되어 그 다음이라고 한다.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의 자리가 반향이라고 하는 나주에서 많이 배출된 그 원인은 앞으로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주 시민과 나주를 관향으로 가진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며 8정승에 대한 간략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박은(朴訔) 1370년(공민왕19)~1422년(세종4)

나주목 마산면 현재 나주시 왕곡면 출생, 본관은 반남, 고려 조선초기 문신.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 1385년(우왕11)문과급제하여 개성소윤이 되고 조선 개국 후 좌보궐 사헌시사 등을 역임하고 방석의 난과 박포의 변 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워 좌명공신이 되었다.

1416년(태종16) 우의정 겸 수문관대제학에 이어 좌의정 겸 판이조사를 지낸 뒤 금천부원군에 피봉되었고, 시호는 평도공이다.


신숙주1417(태종17)~1475(성종6)

나주목 금안면 금안동. 현재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출생. 본관은 고령(高靈). 조선 세종 성종 때의 학자 정치가.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閒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공조참판 신장의 아들, 1439년(세종21)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으며 1443년(세종25)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가서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했고 그 후 집현전의 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귀양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랴오뚱에 13번이나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듣고 와서 세종을 도와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1447년(세종29) 중시에 합격하여 집현전 응교에 특진되었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였고 이듬해 부승지에 올랐으며 1453년(단종1) 계유정란에 참여하여 정란공신이 되었고 1454년(단종2)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예문관 대제학이 되고 고령군에 봉해졌고 이어 병조판서 우찬성 겸 병조사 대사성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1460년(세조6)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로서 모련위 야인을 정벌하고 1462(세조8) 영의정에 올랐다.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이 되었고 남이를 숙청한 공으로 보사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경국대전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 일본과 여진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동국통감 국조오례의를 왕명에 의해 편찬하였으며 시호는 문충공이다. 해동제국기 보한재집 북정록 사성통고 등의 저서가 잇다.


박숭질(朴崇質)~1507(중종2)

나주목 반남면, 현재 나주시 반남면 출생. 조선 연산군 때 문신. 본관은 반남. 자는 중소(仲素, 1456년(세조2)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거쳐 1490년(성종21) 대사헌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3년(성종24) 형조판서로 정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02(연산8) 삼도입거도순찰사, 1504년(연산10)우의정을 거쳐 1506(연산12) 좌의정이 되었으나 연산군 폭정 아래서 벼슬이 싫어 일부러 낙마, 100여 일 동안 등청하지 않아 추국을 받은 뒤 면직 되었으며 1507(중종2)영중추부사로 있다가 타계하니 시호는 공순공 이다.


한효원(韓效元) 1468년(세조14)~1534년(중종29)

나주목 전왕면 장사, 현재 나주시 왕곡면 장사리, 장사출생, 본관은 청주 자는 원지(元之)

호는 오계(梧溪), 조선 중종 때 문신. 1489년(성종20)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수찬, 장령 등을 거쳐 1508년(연산3) 함경도 진휼경차관으로 기민을 구제했고 1520(중종15) 대사헌으로 주청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후 경상도 함경도 관찰사, 공조판서, 대사헌,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528년(중종28) 성절사(중국황제 생일축하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와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성공이다.


오겸(吳謙) 1496(연산2)~1582년(선조15)

나주목 도림면, 현재 광주시 광산구 본량면 명도리 출생, 본관은 나주, 자는 경부 호는 지족암 혹은 금양이며 명종 선조 때 문신이다.

문신인 부사 오세훈의 아들로 유우(柳藕)의 문인이다. 1522년(중종17) 진사에 합격하였고 1532년(중종27)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 장령 집의 남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2)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550년(명종5) 금양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경주부윤 한성부윤을 거쳐 1557년(명종12) 호조참판 1559년 예조참판을 역임한 뒤에 이조 병조 호조판서 대사헌 지경연사를 지냈다.

1564년(명종19) 좌찬성이 되고 이듬해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궤장을 하사 받았으며 관의금부사를 거쳐 1571년(선조4) 좌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승진되었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박순(朴淳) 1523년(중종18)~1589년(선조22)

나주목 마산면 귀업, 현재 나주시 왕곡면 신포리 출생. 본관은 충주. 조선 선조 때 문신.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553년(명종8)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전적, 수찬, 교리,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명종10) 사가독서를 했으며 한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1564년(명종1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고 1565년 이조참의로서 훈련원장이 되었다. 대사간이 되어 국기를 문란케 하는 윤원형을 치죄할 결심을 하고 대사헌 이탁을 찾아가 논의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사례를 들어 설명하니 마침내 이탁이 승낙하므로 공이 집으로 돌아와 계주문을 밤을 새워 작성하여 날이 새기 전에 입궐, 상께 바치니 윤허하지 않다가 월여 동안 윤허를 재청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았다.

윤원형 일당을 축출하니 백관과 장안 백성들이 기뻐하였으며 죄 없이 죽은 자들의 원혼을 풀어주고 관진을 복원시켜 주어 태평한 생활을 영위토록 했다. 대사헌과 대제학을 겸하였고 1572년(선조5)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579년(선조19)에 영의정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며 시문에 심취하였는데 동서 붕당이 갈라져 공을 매도하므로 영평 백운산에 은둔하여 살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가 명필이었으며 1589년(선조22) 졸하니 시호는 문충공이며 문집으로 사암집 6권이 전하고 선조조의 명신으로 추앙받았다.


류상운(柳尙運) 1636년(인조14)~1707년(숙종33)

나주목 비음면 모산촌, 현재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출생. 본관은 문화(文化), 조선 숙중 때 문신. 자는 유구(悠久), 호는 약재(約齋), 누실(陋室)이며 1660년(현종1) 진사가 되고 1666년(현종7)에 문과 급제하여 교리를 지낸 뒤 1679년(숙종5)에 문신정시에 합격하여 대사간에 특진되었다.

1683년(숙종11)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판서를 지냈으며 1694년(숙종20) 장희빈에게 보낸 서신 중 인현왕후 민씨에 대한 불온한 구절이 있어 투옥당한 장희재를 처형하면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도 화를 입게 된다 하여 제주에 유배 정도로 사건을 수습하였으나 노론의 반대로 사직당했다.

우참찬을 거쳐 우.좌의정에 승진되고 1696년(숙종22) 영의정이 되었으나 1698년 노론의 배척을 받은 소론의 영수 최석정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판중추부사에 전임되고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당쟁을 일삼는 노론의 탄핵으로 판중추부사로 다시 전직 당했다.

1704년(숙종27)무고의 옥사가 일어나 확대되어 장희빈까지 연좌되자 세자의 생모를 사사할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파직, 직산으로 귀양갔다. 글씨에 능하고 나주 죽봉사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류봉휘(柳鳳輝) 1659년(효종10)~1727년(영조3)

나주목 비읍면 모산촌, 현재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출생, 본관은 문화(文化), 조선 숙종 영조 때 문신. 자는 계창(季昌), 호는 만암(晩菴)이다. 영의정 류상운의 아들로 부자가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1684년(숙종10) 진사가 되고 1699년(숙종25) 문과에 급제하여 사직으로 노론이 세제.영조책봉을 주장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했으나 실패했고, 이어 세제(영조) 대리청정이 실현되자 소론의 영수로서 왕이 병을 앓지 않는데 대리청정케 함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여 이를 철회케 하고 노론을 실각시켰다. 1723년(경종23) 이조판서가 되고 1725년 영조가 즉위한 후 왕의 탕평책으로 노론 소론의 연립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이 되고 이어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에 올랐으나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라는 노론의 공격을 받고 면직되었다.

1726년(영조2) 이봉익 민진원 등의 논척으로 경흥에 안치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1755년(영조31) 다시 반역죄로 추형당했다.


참고문헌 : 한국사대사전, 내고향 나주 제 11집(나주시문화원 발행, 향토사가 이재흥 기고문)보학자 장성 변시연 선생 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