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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헌 . 창주공 형제분의 급제와 귀거래 ( 歸去來 )


 대종회발전연구위원 정우걸   

1. 서언

 일헌(逸軒).창주공(滄洲公) 형제분의 행장을 공부하다가 형제가 같이 문과에 급제하시고 중앙 정치.행정에 함께 참여하여 정의롭고 청렴하게 국리 민복을 위하여 노력 하시다가 당시 동서(東西)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제가 같이 당쟁을 싫어하여 벼슬을 초개같이 던져버리고 시기는 다르나 형제가 같이 귀거래사를 짓고 강호로 돌아와 경치좋은 곳에 같이 정자를 지어 장진후학(長進後學)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형은 83세 동생은 82세로 유복하게 일생을 마친 조선 제일의 선비임을 알게되어 두 분의 귀거래와 당쟁관계를 알고자 종보.국사사전.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선조실록 등을 참조하여 연구 해본 바를 공의 많은 후손들이 알게 하고자 하는 충정에서 서투른 글로 감히 종보에 게재하는 것이니 다른 문헌에 의하여 오류가 있더라도 이해하시고 지적, 지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탄생과 과거급제

일헌.창주공 형제분은 문정공 설재 선생 휘 가신의 9대손이며 고조는 경무공 병조판서 휘에 식(軾)이고 증조는 사헌부감찰 승현(承賢)이며 조는 계공랑 사섬시 직장 휘에관이고 선무랑 사섬시 주부 염조(念祖)의 둘째와 셋째 아들로 1520년과 1533년에 호남제일 터 나주 금안동에서 탄생하셨다.

일헌공의 휘는 심(諶)이요 자는 중실(仲實)이며 일헌은 그 호이다.

창조공의 휘는 상(詳)이요 자는 중신(仲愼)이며 호는 창주시다.

일헌공께서는 1552년(명종 임자)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8년(선조 무진)에 문과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호조정랑(戶曹正郞:지금의 재정경제원의 국장)에 승진되어 근무하시다가 부모님의 혼정신성(昏定晨省:조석문안)을 위하여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그 해 가을에 다시 만인이 우러러 보며 백관의 선망의 대상인 이조정랑(吏曹正郞:지금의 총무처 인사 담당국장)에 임명되어 부친의 뜻을 받들어 부임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아우 창주공께서 문과 장원급제로 조정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노친의 봉양은 누가 할 것인가 아우는 관에 있어 직책을 다하고 나는 돌아가 노친을 받드는 것이 옳치 아니한가하고 드디어 귀거래사(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며 지은 글)를 다음과 같이 짓고,


『중류에서 노를 잃었으니 남과 북 중 어느 곳을 먼저할꼬(中流失棹 南北誰先)

곡구에 나귀를 채찍하니 옛 길만 의연하구나(谷口鞭驢 故逕依然)』


호연이 남으로 내려와 수석과 송죽이 교취하는 곳에 자그마한 정자를 지어 일헌이라 현판을 걸고 그 찬에 이르기를, 일옹이 금성에 숨었으나 뜻만은 저 높은 곳에 있네(錦隱逸翁 志在雲鴻)

공도 반드시 세우지 않고 이름도 드러낼 것을 생각지 않네(功不必建 名不思隆)라고 하고, 또 어버이를 기쁘게 할 여가에 오직 후학을 장진할 것을 낙으로 삼으리라(悅親之家 惟以獎進後學 爲樂矣)하였다.

당시 조정은 동서로 분당되어 권력에 아부하고 반목과 질시를 일 삼던 이때에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청렴하지 않으면 임용되지 못하는 이조정랑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하였으니 조선 제일의 선비중 한 분이시다. 설재서원에 배향되다.

창주공께서는 1574년(선조 7년갑술)문과장원 급제하시고 여러벼슬을 거처 호조정랑을 지내시다가 외직으로 서천, 남평, 창평, 현감을 거처 철원부사를 지내고 무주부사 재임 중 1589년(선조 22년 기축)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의 박해가 시작된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 호남출신 5신의 신원(원통하게 뒤집어 쓴 죄를 풀어줌)을 위하여 1590년(선조 23경인) 두 차례나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렸으나 봉당의 저지로 윤허가 되지 않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와 지금 나주 다시면 사동탄 위에 한 정자를 짓고 솔진회를 설립 당시 제현들과 경의를 강토하고 후학을 장진함을 낙으로 삼으니 당시 명류가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능양학사(綾陽學士) 정공께서 글을 보내기를 “벼슬 던져 버리기를 헌신짝 같이 하였으며 사방 선비가 공을 우러러 보기를 태산과 북두같이 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공께서는 벼슬에만 연연하지 않고 불의를 보고 항거하다가 관철되지 않을 때 벼슬을 과감하게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신 조선 제일 선비 중의 한 분이시다.

설재서원과 보산사에 배향되다.


3. 이조정랑과 동서분당

본란은 일헌공께서 당시 조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셨는가를 알기 위해 쓰는 것이다.

관원의 등용은 이조에 속해 있었는데 이조의 권력이 너무 커질 것을 참작하여 당시 가장 중시된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임명은 이조정랑이 좌우했다. 그리고 전형(시험)사무를 관장하였으므로 전랑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정랑의 실권이 방대하여 이 자리에는 삼사 중에서 명망이 높고 청렴한 관원이 뽑혀 임명되었다. 정랑의 임명은 이조판서도 관여하지 못했고 정랑이 후임을 직접 추천토록 되어 있어 이것을 전랑법 또는 전랑천대법이라고 하였다. 이조정랑을 거치면 큰 과실이 없는 한 대개는 재상까지 될 수 있는 요직이었다.

선조 8년(1575)동서분당을 초래한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도 이 이조정랑직을 둘러싸고 일어났으니 김효원과 심의겸의 질시 반목이었는데 그것은 이조정랑 벼슬자리를 둘러싼 쟁탈전이었다.

김효원은 김종직 학파에 속하는 수재로서 문명을 떨쳤고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심의겸은 명종왕비 인순왕후의 친제로 사류중 선배의 지지를 받았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물망에 오르자 선비로서 권문 세가에 출입한 청렴하지 못한 사람을 정랑과 같은 청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심의겸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후 6.7년이 지나 1574년 8월 1일에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임명되어 올바른 정사를 행하여 연소 사류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575년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조정랑의 물망에 오르게 되자 김효원은 임금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추천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되자 심의겸은 자기에 대한 보복이라 생각하여 심.김양인 간에는 반목이 노골화되었으며 이때 김효원은 서울의 동쪽 낙산 밑에 살았으므로 이 일파를 동인이라하였고 심의겸은 서쪽인 정동에 집이 있었으므로 서인이라 하였던 것이다. 동인에는 호당 허 엽이 영수 였고 서인에는 사암 박순이 영수가 되었다.


4. 일헌공의 귀거래에 대한 소고

일헌공께서는 만인이 우러러 보며 만조 백관의 환영 속에 출세가 보장된 이조정랑에 취임하셨다.

그리고 취임하신지 불과 수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남귀하셨다.

남귀한 이유를 공의 글에서는 80 노친의 봉양을 위하고 임천을 사랑하여 온것이지 피세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런 이유로 벼슬을 버리기에는 이유가 좀 미흡함으로 당시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이조정랑 임용과 사임 년대

공의 이조정랑 임용과 사임 년대가 다른 문헌에서는 명백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고 공의 행장에 “이조정랑에 임명되어 부임하게 된 것은 부친의 명에 따른 것이며 「그때 동생 창주공이 뒤를 이어 과거에 오르니 공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조정에 함께 있으면」편친을 어찌 할 것인가 그대는 관에 있어 직책을 다하고 나는 돌아가 노친을 받드는 것이 옳치 아니하랴 하고 부임한지 수일 만에 귀거래사를 짓고 호연히 남으로 내려왔다”라고 하는 구절에서 볼 때 창주공께서 등과하신 해가 1574년(선조7년)이므로 이해가 바로 공의 이조정랑 임용과 사임년대이다.


나. 이조정랑 추대와 사임에 대한 정치적 배경

1574년 당시는 서인으로 지목되는 좌의정 사암 박순, 대사간 고봉 기대승, 좌승지 송강 정철, 대사헌 손암 심의겸 등이 전라도 분들임으로 이 분들이 ‘조정공론을 일으켜 권귀에 아부하지 않고 당파에 초연하며 이미 호조정랑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계수에 세심하고 정화에 열목(溪水洗心 汀花悅目)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공을 욕심내어 청환의 자리인 이조정랑을 추대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1574년 당시는 앞의 당쟁관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서분당이 폭발하기 1년 전으로 동서간의 질시와 반목이 극도로 팽창되어 있는 때이므로 일헌공께서 부임하여 조정 분위기를 살펴 본 바 더 이상 공직에 머물러 있다가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헤어나기 어려울 것을 느끼시고 과감하게 사임하신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공의 귀거래사에서도 벼슬을 그만두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당시 공의 심정으로 돌아가 해석해 보기로 한다.

中流失棹:(해석)「한 배를 타고 가야하는 물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중강에서 저어갈 노를 잃어 버렸구나」하였으니 그 배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더  나아갈 수도 없거니와 급류를 만나게 되면 한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꾸어 해석하면 조정의 공론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동서로 양분되어 갑론 을박만하고 있으므로 배에 노가 없는 것처럼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워 나라가 위태롭다는 뜻으로 당시 조정 실정을 표현한 시구로 사료되며,

南北誰先:(해석) 「남북 중 어느 곳을 먼저할고」를 달리 해석해 보면 당시 공의 어지럽고 착잡한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사료된다.

谷口鞭驢 故逕依然:(곡구는 공의 정자로 곡구정사 귀래정을 말함) (해석) 「고향 가는 길에 나귀에 채찍질하니 옛길만 변하지 않았구나」를 다시 해석해보면 조정 관리의 무거웠던 짐을 훨훨 벗어버리고 돌아가는 고향길이 마냥 후련하구나로 표현한 심정으로 사료된다.(조상의 글을 함부로 해석해서 죄송하오나 연구하는 과정이니 이해 바랍니다.)


5. 창주공의 귀거래에 대한 소고

창주공께서는 1589년(선조 22기 축) 정여립 역모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기축옥사에서 죽음을 당한 호남출신 오신의 신원을 위하여 무주부사 재임 중 목숨을 걸고 두 번씩이나 상소를 올렸으나 관철되지 않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숨었으니 그 5신은 어떠한 분들이며 공께서 벼슬까지 버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가. 창주공께서 신원을 위하여 상소를 올린 5신의 약력

㉠ 李 潑(이 발)

본관은 광주, 호는 동암(東菴) 민순의 문인. 1573년 문과에 알성장원 급제 이조정랑으로 발탁되고 부제학 대사간 동인의 거두로 정철의 처벌 문제에 강경파를 동원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되었고 정여립 모반사건에 같은 동인이며 친했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대사간을 사퇴 대죄하던 중 체포되어 장살되었다가 1624년(인조 갑자) 이원익의 상소로 신원됨.

㉡ 이 길(李 洁)

본관은 광주, 호는 남계(南溪) 25세에 문과급제 의정부 사인 응교등을 지냄. 이발의 동생, 정여립 역모사건에 같은 동인으로 친했다하여 연루되어 장살됨. 형인 이 발과 같이 신원됨.

㉢ 조대중(曹大中)

본관 창령, 호는 정곡(鼎谷) 퇴계 이황의 문인 1582년 문과급제 전라도사로 지방을 순시하다가 보성에 이르러 부안에서 데려온 관기와 헤어지면서 석별의 눈물을 흘렸는데 남원 양만경이 때마침 반란을 꾀하다 죽은 정여립의 추형을 슬퍼한 것이라 무고하여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국문을 받다가 장살됨. 1624년 이원익의 상소로 신원됨.

㉣ 류몽정(柳夢井)

본관 문화, 호는 청계(淸溪) 사간 남원부사 나주 목사를 지냄.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며 편지 왕래를 하였다하여 정여립 일파로 몰려 국문을 받다가 장살됨. 아들 류 호(柳 滸)가 임진왜란대 전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주까지 가게되어 군자감 참봉이되고 1604년(선조 37년) 유호가 상소를 올려 신원됨.

㉤ 정개청(鄭介淸)

본관 고성, 고성 정씨 시조 호, 곤재(困齋) 연은전 참봉 곡성현감 호남의 큰 선비로 학문이 해박하고 예문에 밝아 제자가 구름같이 모였음. 개청의 7세조 정몽송이 고려말에 죄를 짓고 나주에 귀양갔다가 나주 아전이 되었다 그의 후손이 아전의 역을 면하고 무안으로 이주하여 심의겸의 농장을 지키고, 살아갔다 심의겸의 소개로 사암 박 순을 찾아가 가정교사가 되고 개청도 사암에게서 배우게 되고 사암은 친자제같이 사랑하였다. 장차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대장을 누구로하면 될까하고 임금이 물으니 영상 박 순이 대답하기를 8도도원수로 정개청이 적임자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개청이 정철을 위선자라고 비난했다는 소문을 들은 정철은 개청은 스승을 배반한 사람으로 몰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주 목사 유몽정이 소를 올려 나주 훈도를 임명했는데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동한절의(東漢節義)중에서 가려내어 한편의 책을 저술했는데 여기에 뜻이 애매한 곳이 있는 것을 지적하여 역적으로 몰고 정여립과 편지가 오갔다하여 역모사건에 관련 시켜 경원에 유배되어 가는 도중 죽었다.

인조반정 후 신원되고 사우(祠宇)를 무안으로 세웠다. 효종 8년(1657년) 송준길의 상소로 사우를 헐었고 숙종 3년(1677) 우의정 허목(許穆)의 상소로 복구를 하고 이듬해 자산서원으로 사액하였다. 숙종 6년(1680) 또 헐고 숙중 17년 다시 복구하고 숙종 28년(1702)이만성의 상소로 다시 훼철되고 그 후 다시 자산서원은 복고되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효종 9년(1658 무술)에 공조참의 고산 윤선도가 동 서원을 훼철하여서는 안된다는 만언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붕당 정치가 얼마나 무서웠는가를 짐작케 한다.


나. 기축옥사와 송강 정철

정여립은 당초 서인으로 율곡 이이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제자였으나 집권중인 동인에 아부하여 스승을 배반하고 비난하므로 왕의 미움을 사자 고향 전주로 돌아가 역모사건을 일으키니 연루자를 색출한다는 미명아래 동인 전체가 역모사건을 꾸민 것처럼 만들어 동인을 철저하게 살인 또는 추방해 버린 사건이 기축옥사이다. 처음에는 동 사건 위관(수사총책임자)이 동인이며 우의정 정언신이었는데 정여립과 일가간이고 위관 자신이 동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상소가 있어 서인인 정철을 우의정으로 전격 승진시키고 위관을 교체 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강 정철은 어찌하여 혐의가 들어나지 않은 많은 동인들을 죄를 얽어씌워 철저하게 추방하였을까?

정철은 두 번씩이나 동인의 영수 이발 일파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고 초야로 돌아가 살 수 밖에 없었으며 당시는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는 때이므로 3정승과 대관 2명 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이 동인이었으므로 정철은 와신 상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특히 이발과는 동향(이발은 남평, 정철은 창평)인이므로 그 감정이 더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발은 이 사건으로 삼형제와 두 아들이 죽고 노모가 압살을 당했는데 이 때 옥졸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정철도 그 후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강계로 귀양되어 위리안치 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좌의정에 오르고 체찰사가 되었다가 또 동인의 공격으로 삭탈관직되어 강화 송정촌에서 여생을 보냈다.

동인 이발과 서인 정철은 전생에 어떠한 인연이 였기에 인조반정(1623) 이듬해 이원익의 소에 의하여 한 날 한시에 신원되었을까?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4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혼인을 금하고 벗을 주지 않고 있다. 송강 정철은 강원, 전라,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와 관동별곡, 훈민가를 짓고 창평에 머무를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겨 가사 문학의 대가를 이루지만 정치인으로 행정인으로는 추앙을 받지 못한다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다.


다. 창주공의 선비정신

기축 5신의 신원을 위하여 상소를 하였으나 윤허가 없자 벼슬을 던져 버린 창주공께서는 과연 동인의 한 사람으로 재 집권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불의를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조선 선비정신의 발로였을까? 후손으로서 밝혀보지 않을 수 없게한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동인들의 재집권을 위해서였다면 상소문 내용에 죄를 뒤집어 씌운 사람들을 반드시 공격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공의 상소내용은 신원만을 요구한 것이지 탄핵하는 내용이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쟁을 일삼은 무리는 소를 올려 윤허가 없더라도 스스로 벼슬까지 버린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병자호란에 공의 손자 집 과 발(潑) 종손 난께서 의병을 모아 백마진을 지킬때 정철의 아들 기옹 정홍명이 극찬을 하며 지원을 하였다고 하는 공의 아들 호금공 여린의 행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당색이 다를 때에는 상종을 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라도 출신 5신만 신원을 요구한 것은 공과 같은 고향임으로 누명을 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소를 올린 것이며 공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선조조로부터 인조조까지 5명 전원이 누명을 벗고 신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공의 목숨을 건 상소는 당인으로서가 아니라 조선의 선비로서 불의에 항거하여 정의를 세워 국가 기강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거였음을 자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당인으로서 상소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참고로 공의 상소문 중 서두 일절과 말미 일절만 소개하고자 한다.

신변오신원소(伸辯五臣寃疏)

엎드려 삼가 아룁니다.

공논(公論)이란 만고의 대들보요 이 대들보가 꺾인 즉 시비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천리가 없어 질 것이며 지극히 원통함이 극단에 이르면 국가의 법령이 화함을 잃어 백성이 지켜야 할 인륜(人倫)의 도가 문란해 질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비된자 시비를 구분하여 공논을 밝히나니 위험이 다가오고 화를 입게 되어도 후회함이 없이 오직 공논만을 돕게 되는 것이며 인군은 지극히 원통한 정을 살펴 의혹을 변별하여 깨우치고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용서하셔야 물의가 바르게 정해지고 인심이 순해지며 인심이 순해져야 정치의 도가 바르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하중략) (말미일정) 신이 일전에 올린 상소문이 관찰사를 통하여 왕께 전달되었겠으나 혹 전하께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 천리길에 옷이 다 헤어진 채 궐하에 엎드려 죽음을 무릅쓰고 간절히 호소하오니 드리 살펴 주시기 천만 바라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