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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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진()(1551~1598)

호 高亭(고정)시조의 16세손.

동추 士賢의 아들, 일재 이항의 문하생이며 건재 김천일과 교의가 두터웠다. 
1588년 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첨정을 지내다가 1589년 기축옥사에 환멸을 느껴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高亭.이라 편액하다.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재종숙 응과 홍 형제와 창의하여 고경명과 합세하였고, 특히 곡성의 
청계 양대박과 학유 유팽로와 혈맹하였다. 7월 금산전에서 고경명과 유팽로 등이 전사하고 크게 
패전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1593년 재종숙, 그리고 해보의 정충량, 정득량 형제와 거의하여 6월에 
전라병사 서거이와 합세하여 가등청정이 지키고 있는 진주성을 탈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재종숙과 거의하여 김명원의 막하로 갔고, 우수사 이억기 진으로 
배속되어 재종숙은 좌우 보익장, 그는 유진장의 직책을 맡아 전선 10척을 이글고 한산, 온라, 
두 섬을 지켰는데 당항포 사움에서는 좌수사 이순신과 군진과 합세하여 왜장을 살해하는등 많은 
전과를 올렸고 이어 여러번 싸움에서 승전하니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훈련원 부정에 올랐고, 
안골포 싸움에서는 적선 26척을 격파하고 9월에 재종숙 월탄 정기수와 같이 전선을 이끌고 
벽파정에 싸워 크게 이겼고,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수군통제사 이순신, 재종숙 응. 
홍과 함께 순국하였으며, 노비 忠男충남 등이 초혼하여 월야면 양정리 음지촌 석화산 복록에 
장사하였다.    

1778년부터 오산사에서 배향하며, 가경(순조) 6년 1801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아내 광산김씨는 무자녀로 일찍이 사별하였고, 옥천설씨는 진사 응룡의 딸로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 20일 나산면 용두리 죽사동에서 피란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려하자 
응. 홍의 아내와 함께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결한 '죽사동의 3열부' 중 한 사람이다. 두 
분의 충열비가 함평군 월야면 용월리 내세마을 동구에 자리잡고 있어 자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열부설씨전(烈婦薜氏傳)

  씨(薜氏)의 본적(本籍)은 순창(淳昌)이니 진사응룡(進士應龍)의 딸이며 참판옥천군(參判玉川君) 훈(勳)의

현손녀(玄孫女)이다. 어려서부터 온인정정(溫仁貞靖)하여 부덕(婦德)이 숙취(夙就)하였으며 십구세(十九歲)에

僉正 정진(僉正 鄭縉)에게 시집오니 진縉(의) 본관(本貫)은 나주인(羅州人)이니 문정공 휘 가신(文靖公 諱 可臣)

의 후손(後孫)이오 가선(嘉善)인 휘(諱) 사현(士賢)의 아들이다.

 

비(妣)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참봉(參奉) 기서(奇瑞)의 딸이니 설씨(薜氏)가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되

능히 내칙(內則)을 따르니 종족(宗族)이 보고 칭찬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첨정공(僉正公)이 재종숙

(再從叔)인 이공(二公) 응鷹(과) 홍(鴻)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고충열공(高忠烈公) 막하(幕下)에 달려 간지 한

달 남짓하여 금산(錦山)의 패보(敗報)가 이르자 설씨(薜氏)가 말하기를 일진(一陣)이 패배(敗北)하니 부군(夫君)

께서도 또한 반드시 죽음을 면(免)치 못할 것이다 하고 자결(自決)코자 하였으나 집사람들이 힘써 말리니 그날

저녁에 가만히 후원(後園)에 들어가 또한 목을 메고자 하니 시어머님 김씨(金氏)가 뒷발 쫓아가서 구(救)하고

이르기를 너의 남편의 생사(生死)를 아직 알 수 없으니 그 정(定)한 곳을 안후에 죽어도 또한 늦지 않다고

하였다.

  씨(薜氏)가 따르기로 하고 수일(數日)을 지내는데 첨정공(僉正公)이 과연 오니 대개 전패시(戰敗時)에 마침

일로 밖에 있어 죽지 못하였다. 정유년(丁酉年) 재난(再亂)에 첨정공(僉正公)이 김억추(金億秋) 제공(諸公)과 같이

의병(義兵)을 복기(復起)하여 대동강(大同江)을 방수(防守)하니 이때 설씨(薜氏)가 노고(老姑)를 받들고 재종숙

모(再從叔母) 정씨(鄭氏) 김씨(金氏)와 같이 산협간(山峽間)에 피난 할 세 가비(家婢) 몽란(夢蘭)이 따라갔는데

하루는 적(賊) 이 갑자기 옴을 보고 허둥지둥 달아났는데 적賊(이) 먼저 그 시어머님을 害치고 또 설씨(薜氏)를

향(向)하여 와서 장차 협박(脅迫)할 상태(狀態)여서 설씨(薜氏)가 위암(危巖)을 기대고앉아 큰소리로 꾸짖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지(無知)한 것이 견양(犬羊)같으나 어찌 조선(朝鮮)의 예의풍속(禮義風俗)을 모르느냐 하고

디디어 암하(巖下)로 떨어져 죽었으며 정씨(鄭氏) 김씨(金氏)도 같이 가까운 곁에 있다가 또 따라서 몸을 던져

죽으니 몽란(夢蘭)이 시체를 모두고 통곡(痛哭)하며 돌에 부딪혀 죽으니 그때 첨정공(僉正公)은 서북로(西北路)

로부터 이리저리 싸우면서 남(南)으로 내려와 이충무공(李忠武公) 진영(陣營)에 달려가 노량(露梁) 싸움에서

재종숙(再從叔) 이공(二公)과 동시(同時)에 순절(殉節)하니 첨정공(僉正公)은 일재선생(一齋先生)의 문인(門人)

이다. 

외사(外史)에 이르기를 천보(天寶)의 난리에 義士는 오직 안노공(顔魯公) 한사람이요 오계(五季)의 쇠잔한 때에

정녀(貞女)는 오직 왕응(王凝)의 처(妻) 한사람이라 하였으니 이는 충(忠)과 열(烈)의 어려움이 자고(自古)로 그런

것인데 이제 鄭氏一門에 충신(忠臣)과 열부(烈婦)라 뇌락상망(磊落相望)하여 그 굉강대절(宏綱大節)과 유풍여운

(遺風餘韻)이 병연(炳然)하여 사람의 이목(耳目)을 비치니 아! 가히 공경할 것이로다.

 

다만 구중궁궐(九重宮闕)이 깊고 멀어 정포(旌褒)가 요요(寥寥)하여 비록 유감(遺憾)인 듯 하나 그러나 功이 萬古

의 강상(綱常)에 있으니 마땅히 만고강상(萬古綱常)으로 더불어 그 시종(始終)을 같이 할것이니 어찌 한때 현회

(顯晦)로서 능히 날았다 높았다 하리오 드디어 그 전래(傳來)한 문헌(文獻)에 의하여 약간 산윤(刪潤)을 더하여

그 후손(後孫) 근태(謹兌)에게 보내노라  

                                                                                         光山 鄭義林 謹識   

                                                                     <註>上章奄茂(상장엄무):庚戌年   1卷667

 

 

三節婦碑文

吾邑羅州鄭氏家節婦有三夫寔五忠中人在宣祖丁酉亂諱鷹妻光山鄭氏挈家眷避兵竹寺洞遇賊抗節不屈死奴忠甲負四歲兒繼匿林藪得全弟鴻妻光山金氏再從姪縉妻玉川薛氏死節與鄭婦亦同金奴忠男薛奴義甲救主亦同從夫職並淑夫人鳴呼節婦皆忠臣妻易乎一猶難三皆出一室內易乎奴皆抵死救主至於活主家血屬易乎皆可謂卓絶矣諸孫伐石遣遇龍遇植汝冕請余文勒三節別爲石刻三奴石置側壯哉壯哉竹峽海前其百世歟

                                                                               上之三年己酉功仲春

                                                                                                  金勳撰

 

[역문]삼절부비문(三節婦碑文)

우리고을 나주정씨(羅州鄭氏) 가문(家門)에 절부(節婦) 삼인(三人)이 있으니 대저(大抵) 이분들이 오충중(五忠中)

의 사람이다. 선조(宣祖) 정유난(丁酉亂)때 휘(諱) 응(鷹)의 처(妻) 광산정씨(光山鄭氏)는 가권(家眷)을 이끌고 병

란(兵亂)을 피(避)해 죽사동(竹寺洞)에 피(避)했는데 적(賊)을 만나 절(節)을 지켜 굴복(屈服)치 않고 죽으니 노

(奴) 충갑(忠甲)이 사세아(四歲兒) 계(繼)를 업고 수풀속에 숨어서 살아났으며 동생 홍(鴻)의 처(妻) 광산김씨(光

山金氏)와재종질(再從姪) 진(縉)의 처(妻) 옥천설씨(玉川薛氏)가 절(節)을 지켜 죽으니 정부인(鄭婦人)과 똑 같다.

김씨(金氏)의 종 충남(忠男)과 설씨(薛氏)의 종 의갑(義甲)이 주인(主人)을 구(救)함이 또한 같다. 부직(夫職)을

따라 모두숙부인(淑夫人)이다. 아 ! 절부(節婦)가 모두 충신(忠臣)의 처(妻)니 쉬우랴. 일인(一人)도 오히려 어렵

거늘 삼인(三人)이 모두 한 실내(室內)에서 나오니 쉬우랴 노(奴) 모두 죽음에 이르러 주인(主人)을 구(救)하여 살

려내니 주인(主人)집의 혈통(血統)을 이으니 쉬우랴 모두 탁절(卓絶)하다 할 것이다. 제손(諸孫)이 비(碑)를세우

고자 우룡(遇龍)과 여면(汝冕)을 보내어 내게 글을 청(請)하여 삼절(三節)을 새기고 별도(別途)로 돌을 만들어 삼

노(三奴)의 이름을 새겨 곁에 두니 장(壯)하고 장(壯)하도다. 죽협(竹峽) 해동(海東)이 백세(百世)토록 하리라

                                                                                                                                                                1卷662

 

玉川(옥천)薛氏(설씨)烈行錄(열행록)

氏(설씨)는 本貫(본관)이 玉川(옥천)이니 아버지는 進士(진사) 應龍(응룡)이오 參判(참판)玉川君(옥천군) 勳(훈)은 그의 高祖(고조)다. 薛氏(설씨)가 어려서부터 異凡(이범)하여 壺範(호범)이 夙就(숙취)하니 進士公(진사공)이 칭찬하기를 네가 만일 男子(남자)가 되었다면 거의 우리집이 바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十(십)九(구)세에 僉正公(첨정공) 縉(진)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孝養(효양)하고 남편에게 承順(승순)하여 家庭(가정)凡節(범절)을 지키니 宗族(종족)과 隣里(인리)에게 賢夫人(현부인)이라고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아! 壬辰(임진)倭亂(왜란)에 僉正公(첨정공)이 再從叔(재종숙) 鷹(응)과 鴻(홍)兄弟(형제)와 같이 義旅(의려)를 일으켜 高霽峰(고제봉) 敬命(경명)의 陣中(진중)에 달려갔는데
하루는 薛氏(설씨)가 錦山(금산)敗報(패보)를 듣고 大驚(대경)痛哭(통곡)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남편이 반드시 免(면)치 못한 것 같다하고 인하여 自裁(자재)코자 하니 家人(가인)이 굳이 만류하니 밤을 타서 後園(후원)으로 들어가니
시어머님인 金夫人(김부인)이 뒤를 따라가 求解(구해)하고 말하기를 너의 남편의 生死(생사)가 아직 확실치 못하니 안뒤에 죽어도 늦지 않다고 하니 薛氏(설씨)가 억지로 참고 며칠을 지냈는데 僉正公(첨정공)이 果然(과연) 이르렀다.

戰敗(전패)時(시)에 마침 軍務(군무)로 밖에 나가 죽지 않했었다.
丁酉在亂(정유재난)에 僉正公(첨정공)이 金億秋(김억추) 諸公(제공)과 같이 義兵(의병)을 다시 일으켜 大同江(대동강)을 防守(방수)할 때 賊(적)이 湖南(호남)에 들어가 있는곳마다 屠戮(도륙)하니

薛氏(설씨)가 늙은 시어머님과 再從叔(재종숙)母(모) 鄭氏(정씨)와 金氏(김씨)를 받들고 家婢(가비) 夢蘭(몽란)과 本面(본면) 竹寺洞(죽사동)에 避亂(피란)하였는데 하루는 賊(적)이 갑자기 이르러 먼저 그 시어머님을 害(해)하고 또 薛氏(설씨)를 向(향)하니 薛氏(설씨)가 危巖(위암)에 의지하여 大叱(대질)하기를 네가 비록 無知(무지)한 犬羊(견양)이로되 어찌 朝鮮(조선) 禮義(예의)의 風俗(풍속)을 알지 못하리오 하고 바위아래 몸을 던져 죽으니 鄭(정)과 金(김) 二氏(이씨)도 따라 投死(투사)하니 夢蘭(몽란)이 屍體(시체)를 붙들고 痛哭(통곡)하다.

돌에 부딪혀 죽으니 그때 僉正公(첨정공)은 西北路(서북로)로부터 轉戰(전전)하면서 南下(남하)하여 李忠武(이충무) 舜臣(순신)의 陣幕(진막)에 달려가 露梁(노량)의 싸움에 再從叔(재종숙) 兄弟(형제)와 같이 같은 날 殉節(순절)하니 노복 忠南(충남)이 招魂(초혼)하여 돌아와 장차 薛氏(설씨)와 같이 石花山(석화산) 曾祖(증조)墓(묘)아래에 合葬(합장)하니 薛氏(설씨)의 顔色(안색)이 살았을 때와 같았으며 장사한 다음날에 風雪(풍설)이 몰아치고 채색 무지개가 하늘을 날으니 그때 사람들이 모두 鄭忠臣(정충신)과 薛烈婦(설열부)의 靈氣(령기)의 느낀 바라 하였다.

아! 지아비는 지어미의 벼루 줄이 되고 임금은 臣下(신하)의 벼루 줄이 되고 아비는 子息(자식)의 벼루 줄이 되니 진실로 三綱(삼강)이다. 宇宙(우주)에 棟樑(동량)이 되고 古今(고금)에 標準(표준)이 되니 이 의로움이 하루라도 밝지 못하면 人類(인류)가 禽獸(금수)를 免(면)하지 못한다.

이런탓에 綱常(강상)을 扶(부지)하고 名敎(명교)를 培養(배양)한자 天下(천하)後世(후세)에 功(공)이 있으리니 어떻다고 말하리오.

(事實(사실)이 咸平誌(함평지) 全南誌(전남지) 海東(해동)三綱錄(삼강록) 文獻錄(문헌록)에 실려 있다.)

                                                                                                                                                                                        1卷664

 

烈婦(열부) 贈(증)淑夫人(숙부인)殉節(순절)碑銘(비명) 並序(병서)

天地間(천지간)에 純綱至正(순강지정)의 기운이 사람에게 모아서 忠臣(충신)이 되고 烈婦(열부)가 되니 지나간 문서를 상고할 것 같으면 顯忠(현충)貞烈(정열)이 板蕩(판탕)한 세상에 기필하니 우리나라 壬辰(임진)난리 같은 것은 또한 忠臣(충신)과 烈婦(열부)가 절개를 세워 목숨을 버릴 때다.

當時(당시) 士大夫(사대부)집에 忠烈(충렬)이 炳炳(병병)하여 앞서거니 뒷 서거니 서로 이어져 바라보니 羅州鄭氏(나주정씨)도 또한 그 하나다. 五忠(오충)과 三烈(삼열)이 한집에 모였으니 어떻게 그렇게 盛(성)할것인가 삼가 烈婦(열부) 薛氏傳(설씨전)을 살펴보건데 薛氏(설씨)는 바로 僉正(첨정) 鄭縉(정진)의 妻(처)다.

壬辰(임진)난리에 僉正公(첨정공)이 再從叔(재종숙) 鷹(응)과 鴻(홍) 二公(이공)으로 義兵(의병)을 일으켜 高忠烈公(고충열공) 軍中(군중)에 달려갔는데 錦山(금산)의 敗報(패보)가 이르자

薛氏(설씨) 말하기를 남편이 반드시 살 리가 없다하고 바로 自處(자처)코자 하니 시어머님 金氏(김씨)가 懇切(간절)히 타일러 목을 풀어 救(구)하고 말하기를 너의 남편의 生死(생사)가 아직 확실이 알지 못하니 안후에 죽어도 늦지않다 하였다.

數日(수일)을 사는데 僉正公(첨정공)이 果然(과연) 이르니 戰敗(전패)時(시) 에 마침 軍務(군무)로 밖에 있었으니 구차스럽게 免(면)한 것이 아니다. 丁酉年(정유년)에 다시 시끄럽자 僉正公(첨정공)이 金億秋(김억추) 諸賢(제현)과 같이 다시 起義(기의)하여 大同江(대동강) 防守(방수)時(시)에 賊(적)이 湖南(호남)에 侵犯(침범)하여 있는 곳 마다 屠戮(도륙)하니

薜氏(벽씨)가 늙은 시어머님과 再從叔母(재종숙모) 鄭氏(정씨) 金氏(김씨)를 모시고 종 夢蘭(몽란)과 竹寺洞(죽사동)으로 避亂(피란)하였는데 賊(적)이 갑자기 들어 닥쳐 禍(화)가 시어머님에게 미치니

薛氏(설씨)가 免(면)치 못할 것을 알고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으니 鄭(정)과 金(김) 二氏(이씨)h 따라서 投死(투사)하니 夢蘭(몽란)이도 屍體(시체)를 붙들고 죽으니 그때 僉正公(첨정공)은 여기저기서 싸우다가 南(남)쪽으로 내려와 李忠武公(이충무공) 陣營(진영)으로 달려가 露梁(노량)의 싸움에서 二叔(이숙)과 더불어 殉節(순절)하였다.

事實(사실)이 朝廷(조정)에 알려져 兵曹參議(병조참의)에 追贈(추증)되고 薛氏(설씨)도 叔夫人(숙부인)에 追贈(추증)되었다. 僉正公(첨정공)은 招魂(초혼)하여 돌아와서 夫人(부인)과 같이 合窆(합폄)하였는데 장사한 이틑날 風雪(풍설)이 일어나고 彩虹(채홍)이 하늘을 날으니 이것이 어찌 忠臣(충신)烈婦(열부)의 精靈(정령)의 氣(기)가 울적해서 흩어지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니랴.

鄭氏(정씨)는 文靖公(문정공) 諱(휘) 可臣(가신)이 그의 顯祖(현조)요 薛氏(설씨)의 貫(관)은 玉川(옥천)이니 參判(참판) 勳(훈)의 玄孫(현손)이니 그 鍾美世分(종미세분)이 따름이 있다.

鄭氏(정씨)의 後裔(후예)가 장차 碑(비)를 세워 永久(영구)히 保存(보존)코자 謹兌(근태)와 炳琳(병림)이 와서 글을 請(청)하니 희미한 사람이 감히 당하지 못하되 私心(사심)에 興感(흥감)함이 오늘날에 있어 더욱 깊으니 또한 어찌 참이 끝까지 사양하리오 銘(명)하노니,

夫(부)의 忠誠(충성)과 婦(부)의 烈行(열행)은 죽어도 밝은 빛이 있도다. 꽃다운 바람과 상쾌한 기운은 죽었어도 더욱 기네.

                                                                     己未年(기미년) 十月(시월)

<註(주)>板蕩(판탕):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림 1卷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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