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五世자 응(( (1562~1598 )

자 德揚(덕양), 호 愛竹軒(애죽헌)으로 시조의 15세손. 충좌위 사정 元柱(원주)의 아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으로 재직하다가 1589년 기축옥사를 보고 환멸을 느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鴻(홍)과 같이 고경명의 휘하로 달려가 금산전에 참전하였으나 패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동생 홍과 재종질 縉(진), 그리고 해보면의 정충량과 함께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도원수 김명원의 막하로 갔고, 김명원이 우수사 이억기의 진중으로 보내니 우수사가 그들 형제를 좌우 보익장을 삼고, 전선 10여척을 이끌고 당항포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였다.
견내량 싸움에서는 분전하여 왜적 수십 급을 베었고, 예교 싸움에서는 독전하여 적을 
혼비백산하게 하였으며, 안골포 싸움에서는 적선 수십 척을 쳐부셨다. 이 전공으로 
훈련원 주부에 올랐고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최전선의 편대를 지휘하다가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다시 상처를 싸매고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하시다. 이날 동생 홍과 
재종질 진도 적탄에 맞아 순국하니 招魂(초혼)하여 충숭동 간좌에 장례하였다. 조진수 
등 도내의 유림들이 상언하고 예조판서 서용보가 사실을 조사하는 등 절차를 밟아 
1801년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893년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鰲山祠(오산사)에 
五忠(오충)으로 배향되시다. 
 
 아내는 광산김씨 현감 인학의 따님인데, 1597년 9월(음력) 왜적이 월야면에 침입하자 
시어머니 함평이씨(낙안교수 汝貞(여정)의 손녀), 홍의 아내 광산김씨, 진의 아내 
옥천설씨와 함께 나산면 용두리 죽사동으로 피신하였는데 9월20일 적이 이곳까지 침입
하여 시어머니 함평이씨를 살해하고, 그들을 사로잡으려하자 살아서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옳다며 세 부녀가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죽사동의 
3열부로 추앙받고 있다.



[역문]애죽헌공장록(愛竹軒公狀錄)
공(公)의 휘(諱)는 응(鷹)이요 자(字)는 덕양(德揚)이며 호(號)는 애죽헌(愛竹軒)이니 
설재선생(雪齋先生) 휘(諱)가신(可臣)의 십일세손(十日世孫)이요 장릉절신(莊陵節臣)인 
기재공(棄齋公) 휘(諱) 훈(薰)의 오세손(五世孫)이며 경암공(敬庵公) 휘(諱) 이주(以周)의 
손자(孫子)다. 명종(明宗) 임술년(壬戌年) 1562에 공(公)이 기성(箕城)(今咸平) 갈란방
(葛瀾坊)에서 출생(出生)하니 어려서부터 이질(異質)이 있어 좌미상(左眉上)에 충자(忠字) 
문채가 있었으며 문장(文章)이 화담하고 지용(智勇)이 초매(超邁)하였다.
            
선조(宣祖) 무자년(戊子年) 1588에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올라 선전(宣傳)에 
예천(例遷)하였고 기축년(己丑年)1589에 바야흐로 확장(擴張)하여 조정(朝廷)에 부정
(不靖)이 나타남을 보고 물러나 전려(田廬)에 은거(隱居)하였는데 임진년(壬辰年) 
1593에 대가(大駕)가 파월(播越)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憤)하여 스스로 이기들 못하더니 
제봉(霽峯) 고경명(霽峯 高敬命)이 거의(擧義)한 격문(檄文)을 보고 드디어 동생 전선전
(前宣傳) 홍(鴻)과 같이 칼을 짚고 달려가 방략(方略)을 지획(指畫)하더니 금산(錦山)의 
패환(敗還)에 본현(本縣)으로 돌아와 전주부(前主簿) 정충량(鄭忠良)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길 돌아 보건데 내가 몸을 나라에 허(許)하였는데 추로(醜虜)가 공치(孔熾)하여 
군부(君父)가 몽진(蒙塵)한 이 위란(危亂)한 때에 어찌 창을 베게하고 칼을 밟은 
의(義)를 잊으리오 하니 정공(鄭公)이 분연(奮然)히 래회(來會)하여 이에 동생과 
재종질(再從姪) 전첨정(前僉正) 진(縉)으로 수백인의 장정(壯丁)을 모집(募集)하여 
같이 도원사(都元師) 김공명원(金公命元) 막하(幕下)에 달려가서 김공(金公)에게 말하니 
기특(奇特)하게 여기고 허락(許諾)하여 말하길 이제야 보기를 어찌 늦게 하였는고 하고 
우수사(右水使) 이공억기(李公億祺) 진중(陣中)으로 보내니 이공(李公)이 이미 공(公)의
명성(名聲)을 듣고 보자 기접(起接)하여 말하길 국사가의(國事可議)요 전선가임(戰船可任)
이라 하니 공(公)이 말하길 호남(湖南)은 즉(卽)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이요 영우(嶺右)
는 즉(卽) 호남(湖南)의 울타리니 힘을 합쳐 막은 후에야 국세(國勢)가 온전할 것이요 
흉적(凶賊)을 섬멸할 것이라 하니 이공(李公)이 손을 붙잡고 말하길 덕장(德場)이 이 
같으니 적(賊)을 토벌(討伐)하여 난(亂)을 안정(安定)시키기는 진실로 날을 가르켜 기다릴 
것이라 하고 이에 공(公)의 형제(兄弟)로서 좌우보익장(左右輔翼將)을 삼고 전선십척
(戰船十隻)을 영솔(領率)하고 좌수사(左水使) 이공순신(李公舜臣)을 당항포(唐項浦)에서 
만나게 하였는데 내량(乃梁)의 싸움을 보고 몸소 칼날을 무릅쓰고 먼저 올라가 분격
(奮擊)하여 왜수십급(倭數十級)을 베었고 예교(曳橋)의 싸움에 정신독전(挺身督戰)하여 
동면(銅面)에 투구를 쓴 적(賊)을 쏘니 바람에 풀 쓰러지듯 서로이어 밤에 도망하였고 
안골포(安骨浦)의 싸움에 적선(賊船) 십여척(十餘隻)을 당파(撞破)하니 이공(李公)이 
포계(褒啓)하여 형제(兄弟)가 같이 훈련주부(訓練主簿)에 임명(任命)되었고 무술년(戊戌年) 
노량(露梁)의 싸움에 적(賊)의 탄환(彈丸)에 맞았으나 상처를 싸고 다시 싸워 죽었고 동생 
홍(鴻)과 재종질(再從姪) 진(縉)도 분하여 돌보지 않고 분비역전(奮臂力戰)하여 같은날 
탄환(彈丸)에 맞아 죽으니 혼(魂)을 불러 현동(縣東)인 나산면(羅山面) 숭충동(崇忠洞) 
간좌(艮坐)에 장사하였다.
            
배(配)는 광산정씨(光山鄭氏)로 현감인학(縣監仁學)의 딸이니 정유년(丁酉年)에 
가족(家族)을 이끌고 죽사동(竹寺洞)에 피병(避兵)하였는데 적(賊)을 만나 절(節)을 
지켜 욕(辱)되지 않고 난봉(亂鋒)에 죽었으며 일자(一子) 계(繼)는 나이 겨우 사세(四歲)
로 종 충갑(忠甲)이 업고 수풀 속에 숨어 살아났다. 방증손(傍曾孫) 진사세윤(進士世胤)이 
행장(行狀)을 기술(記述)하고 정조(正祖) 기미년(己未年) 1799에 도내(道內)의 장보(章甫) 
조진(趙鎭) 수(修)등이 가전(駕前)에서 말을 올리고 예조판서(禮曹判書) 서용보(徐龍輔)가 
본도(本道)에 조사(調査)하였고 현감신숙(縣監申淑)이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였고 
도백(道伯) 조종현(趙宗鉉)이 조정(朝廷)에 글을 올렸고 이참(吏參) 윤광보(尹光普)가 
회답(回答)하였으며 순조(純祖) 신유년(辛酉年)1801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
(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고종(高宗) 계사년(癸巳年) 1893에 참판(參判) 증직
(贈職)되었으며(事載湖南義錄海東忠義錄三綱錄) 鰲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註]
①대가(大駕):임금의 행차
②파월(播越):임금이 도성(都城)을 떠나 딴 곳으로 피난감.
③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만나 피신하는 일

 

三節婦碑文

吾邑羅州鄭氏家節婦有三夫寔五忠中人在宣祖丁酉亂諱鷹妻光山鄭氏挈家眷避兵竹寺洞遇賊抗節不

屈死奴忠甲負四歲兒繼匿林藪得全弟鴻妻光山金氏再從姪縉妻玉川薛氏死節與鄭婦亦同金奴忠男薛

奴義甲救主亦同從夫職並淑夫人鳴呼節婦皆忠臣妻易乎一猶難三皆出一室內易乎奴皆抵死救主至於

活主家血屬易乎皆可謂卓絶矣諸孫伐石遣遇龍遇植汝冕請余文勒三節別爲石刻三奴石置側壯哉壯哉

竹峽海前其百世歟

                                                              上之三年己酉功仲春

                                                                                                   金勳撰

 

[역문]삼절부비문(三節婦碑文)

우리고을 나주정씨(羅州鄭氏) 가문(家門)에 절부(節婦) 삼인(三人)이 있으니 대저(大抵) 이분들이

오충중(五忠中)의 사람이다. 선조(宣祖) 정유난(丁酉亂)때 휘(諱) 응(鷹)의 처(妻) 광산정씨(光山

鄭氏)는 가권(家眷)을 이끌고 병란(兵亂)을 피(避)해 죽사동(竹寺洞)에 피(避)했는데 적(賊)을 만나

절(節)을 지켜 굴복(屈服)치 않고 죽으니 노(奴) 충갑(忠甲)이 사세아(四歲兒) 계(繼)를 업고 수풀

속에 숨어서 살아났으며 동생 홍(鴻)의 처(妻) 광산김씨(光山金氏)와 재종질(再從姪) 진(縉)의 처

(妻) 옥천설씨(玉川薛氏)가 절(節)을 지켜 죽으니 정부인(鄭婦人)과 똑 같다. 김씨(金氏)의 종 충남

(忠男)과 설씨(薛氏)의 종 의갑(義甲)이 주인(主人)을 구(救)함이 또한 같다. 부직(夫職)을 따라 모두

숙부인(淑夫人)이다. 아 ! 절부(節婦)가 모두 충신(忠臣)의 처(妻)니 쉬우랴. 일인(一人)도 오히려

어렵거늘 삼인(三人)이 모두 한 실내(室內)에서 나오니 쉬우랴 노(奴) 모두 죽음에 이르러 주인

(主人)을 구(救)하여 살려내니 주인(主人)집의 혈통(血統)을 이으니 쉬우랴 모두 탁절(卓絶)하다 할

것이다. 제손(諸孫)이 비(碑)를 세우고자 우룡(遇龍)과 여면(汝冕)을 보내어 내게 글을 청(請)하여

삼절(三節)을 새기고 별도(別途)로 돌을 만들어 삼노(三奴)의 이름을 새겨 곁에 두니 장(壯)하고

장(壯)하도다. 죽협(竹峽) 해동(海東)이 백세(百世)토록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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