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내량 싸움에서는 분전하여 왜적 수십 급을 베었고, 예교 싸움에서는 독전하여 적을
혼비백산하게 하였으며, 안골포 싸움에서는 적선 수십 척을 쳐부셨다. 이 전공으로
훈련원 주부에 올랐고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최전선의 편대를 지휘하다가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다시 상처를 싸매고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하시다. 이날 동생 홍과
재종질 진도 적탄에 맞아 순국하니 招魂(초혼)하여 충숭동 간좌에 장례하였다. 조진수
등 도내의 유림들이 상언하고 예조판서 서용보가 사실을 조사하는 등 절차를 밟아
1801년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893년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鰲山祠(오산사)에
五忠(오충)으로 배향되시다.
아내는 광산김씨 현감 인학의 따님인데, 1597년 9월(음력) 왜적이 월야면에 침입하자 시어머니 함평이씨(낙안교수 汝貞(여정)의 손녀), 홍의 아내 광산김씨, 진의 아내 옥천설씨와 함께 나산면 용두리 죽사동으로 피신하였는데 9월20일 적이 이곳까지 침입 하여 시어머니 함평이씨를 살해하고, 그들을 사로잡으려하자 살아서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옳다며 세 부녀가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죽사동의 3열부로 추앙받고 있다. [역문]애죽헌공장록(愛竹軒公狀錄) 공(公)의 휘(諱)는 응(鷹)이요 자(字)는 덕양(德揚)이며 호(號)는 애죽헌(愛竹軒)이니
설재선생(雪齋先生) 휘(諱)가신(可臣)의 십일세손(十日世孫)이요 장릉절신(莊陵節臣)인
기재공(棄齋公) 휘(諱) 훈(薰)의 오세손(五世孫)이며 경암공(敬庵公) 휘(諱) 이주(以周)의
손자(孫子)다. 명종(明宗) 임술년(壬戌年) 1562에 공(公)이 기성(箕城)(今咸平) 갈란방
(葛瀾坊)에서 출생(出生)하니 어려서부터 이질(異質)이 있어 좌미상(左眉上)에 충자(忠字)
문채가 있었으며 문장(文章)이 화담하고 지용(智勇)이 초매(超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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