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문]사강공(沙江公) 행록(行錄)

 

면주(綿州)의 서(西)쪽 사천(沙川)은 호남(湖南)의 거벌(巨閥)인 나주정씨(羅州鄭氏)의 세거지

(世居地)니 지금으로부터 사백년(四百年)인저 충효도학(忠孝道學)이 代代로 이어온 家門으로그

子孫들을 신칙하고 率先하여 몸소 實踐하였으니 號는 사강(沙江)으로 나주정공(羅州鄭公) 휘(諱)

주(湊)의 조상(祖上)이 은거(隱居)한 선향(先鄕)이다. 고려조(高麗朝) 때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

휘(諱) 해(諧)는 조조(肇祖)며 전(傳)하여 충렬왕조(忠烈王朝) 때 첨의중찬(僉議中贊)이신 문정공

(文靖公) 설재(雪齋) 휘(諱) 가신(可臣)이 현조(顯祖)니 문장훈업(文章勳業)이 당세(當世)에 휘영

(輝映)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칭(稱)하였다. 공(公)의 제칠자(第七子) 휘(諱) 엄(儼)은 관(官)이

대호군(大護軍)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고 이 분이 휘(諱) 경진(慶振)을 낳으니 감찰(監察)

이오, 이 분이 휘(諱) 복(福)을 낳으니 호조좌랑(戶曹佐郞)이오, 이 분이 휘(諱) 춘신(春新)을 낳으니

진사(進士)로 참봉(參奉)이며 이 분이 휘(諱) 보(輔)를 낳으니 중직대부(中直大夫) 금부도사

(禁府都事)로 단종(端宗) 선위(禪位)때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자호(自號)를 둔암(遯菴)이다 하였으며

이 분이 휘(諱) 승인(承仁)을 낳으니 중훈대부(中訓大夫) 행강능현감(行江陵縣監)이오, 이 분이

휘(諱) 적(覿)을 낳으니 통덕랑(通德郞)이오, 이 분이 휘(諱) 효상(孝常)을 낳으니 진사(進士)로

문장(文章)이 명세(鳴世)하였고 이 분이 휘(諱) 사우(思禹)를 낳고 이 분이 휘(諱) 세교(世僑)를

낳으니 사옹원(司饔院) 참봉(參奉)으로 증조(曾祖) 이상(以上) 상조(上祖)다. 휘(諱) 시(偲)의

자(字)는 언미(彦美)니 관(官)이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공(公)의

선고(先考)며 또 입향조(入鄕祖)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천녕최씨(川寧崔氏)로 구원(久原)의

여(女)니 규절(閨節)이 숙저(熟菹)하였다. 공(公)이 명종(明宗) 임술년(壬戌年 1562)에 몽탄면

(夢灘面) 사천리(沙川里) 집에서 출생(出生)하니 기안(氣岸)이 활달(豁達)하고 용모(容貌)가

괴위(魁偉)하고 심히 엄(嚴)하였으며 효우공검(孝友恭儉)이 천성(天性)에서 나와 어려서부터

이미 사친(事親)하는 예(禮)와 혼정신성(昏定晨省)할줄을 알았고 전후(前後) 부모상(父母喪)에

예제(禮制)를 극진(極盡)하니 향리(鄕里)에서 효자(孝子)라 칭(稱)했다.

인조(仁祖) 임신년(壬申年 1632)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칠십세(七十歲)였다. 배(配)는 광산

정씨(光山鄭氏)로 급(汲)의 딸이며 이남(二男)을 두었다. 배(配)는 인동장씨(仁同張氏)로 사인

(士人)의 딸이며 도원사(都元師) 기정(麒禎)의 후예(後裔)다. 장(長)은 의홍(義弘)이요 차(次)는

덕홍(德弘)이며 손증(孫曾) 이하(以下)는 번창(蕃昌0하여 다 기록(記錄)치 않는다. 차(嗟)롭다.

사친(事親)하되 계실때는 공경하고 봉양(奉養)할때는 즐겁게 하고 아프시면 근심하고 초상(初喪)

에는 슬퍼하고 제사(祭祀)에는 엄숙(嚴肅)하니 종신(終身)토록 사모(思慕)한 효자(孝子)다.

 

공(公)의 십사세손(十四世孫) 무봉(茂奉)이 우리 대동보(大同譜)를 수보(修譜)하는 쯤에 공(公)의

의행(懿行)이 오래되어민몰(泯沒)하여 전(傳)해지지 못할까 우려(憂慮)하여 글을 청(請)하니 내가

그 정(情)을 가상하게 여기고 또한 감동(感動)하여 이에 가장(家狀)을 촬기(撮記)하여 우(右)와

같이 서차(叙次)하니 공손히 입언군자(立言君子)가 붓을 적시어 채택(採擇)하기를 기다리노라.

                                                        歲重光協怡陬月上浣日

 

                                       <주(註)>중광협이취월(重光協怡陬月):辛未年 正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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