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문]종모재공묘지(終慕齋公墓誌)

 

나주(羅州)의 곡강(曲江 지금의 동강면) 정시동(鄭侍洞) 북록(北麓) 을좌(乙坐)의 묘(墓)는 종모재

(終慕齋) 정공(鄭公) 휘(諱) 이상(履常)의 의이소장(衣履所藏)이다. 옛날에 기록(記錄)이 없어 세대

(世代)가 멀어져 그 장사(葬事)한 군대(軍代)를 잃어버려 배(坏)가 안연(晏然)하여 자손(子孫)이 보

호(保護)하니 이에 가히 그 덕후(德厚)한 사람은 그 덕택(德澤)이 오래임을 볼 것이다.

 

공(公)의 자(字)는 척지(惕之)니 나주인(羅州人)이다. 비조(鼻祖)의 휘(諱)는 해(諧)은 그후 고려(高

麗)때 휘(諱) 가신(可臣)이 있으니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으로 충선왕묘정(忠宣王廟庭)에 배식

(配食)하니 세칭(世稱) 설재선생(雪齋先生)이라 한다. 이조(李朝)에 향인(鄕人)이 선생(先生)을 위

(爲)하여 사우(祠宇)를 세우니 진실로 공(公)의 구세조(九世祖)다.

 

이분이 휘(諱) 길(佶)을 낳으니 문(文)으로 소윤(少尹)이요 이분이 휘(諱) 문진(文振)을 낳으니

문(文)으로 군수(郡守)은 이판(吏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이분이 유(有)를 낳으니 병참(兵參)에

증직(贈職)되였고 이분이 휘(諱) 자신(自身)을 낳으니 대호군(大護軍)으로 이판(吏判)에 증직

(贈職)되었으며 이분이 휘(諱) 軾(식)을 낳으니 세조조(世祖朝)에 등제(登第)하여 병조판서(兵曹判

書)은 시호(諡號)는 경무(景武)며 호(號)는 영모정(永慕亭)이니 설재사우(雪齋祠宇)에 배향(配享)되

었고 이분이 휘(諱) 승현(承賢)을 낳으니 감찰(監察)이오 이분이 휘(諱) 근(覲)을 낳으니 참봉(參奉)

이오 이분이 휘(諱) 균(均)을 낳으니 생원(生員)으로 바로 공(公)의 아버지라 비(妣)는 나주정씨

(羅州丁氏)로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에 공(公)이 본주(本州) 곡강(曲江) 봉동(鳳洞)에서

출생(出生)하니 공(公)이 자질(資質)이 이범(異凡)하여 말 배울 때부터 이미 문자(文字)를 가르쳐

주고 출원공(出員公)이 심(甚)히 기애(奇愛)하였으며 겨우 칠(七) , 팔세(八歲)에 능히 사친(事親)

하는 도리(道理)를 알아 시물(時物)의 새로운 맛있는 것 있으면 먼저 먹지않고 품에 품어라.

부모(父母)에게 먼저 드렸으며 그 지업(志業)이 장진(將進)함에 엄연(儼然)함이 성인(成人)같아

장자(長者)의 기망(期望)이 또한 깊었다. 부모(父母)가 일찍 병으로 음식(飮食)을 들이지 못하니

공(公) 또한 먹지 않고 몸소 약이(藥餌)를 잡아 타인(他人)에게 맡기지 아니하며 매양 하늘에 빌어

몸이 대신(代身)하기를 비니 향리(鄕里)에서 탄상(歎賞)하고 모두 효자(孝子)라고 하더라.

 

어른이 되어 소학(小學)을 애독(愛讀)하고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법(法)을 삼고 이기(異技)와

잡희(雜戱)같은 것은 마음속에 접(接)하지 않고 다만 문사(文辭)로써 과업(課業)을 하여 명종

(明宗) 을묘년(乙卯年 155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였으며 공(公)이 양친(兩親)을 섬기되

그 성경(誠敬)을 다하여 온청(溫淸)의 절차(節次)와 감지(甘旨)의 봉양(奉養)을 고생스러워도

부지런히 마련하여 봉양(奉養)치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계자(戒子)하기를 비록 궁지(窮之)하나 정성을 다하여 구(求)하면 지성(至誠)으로 이루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다.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그 사는 마을 서록(西麓)에 장사하고 묘(墓)

곁에 여막(廬幕)을 치고 전후(前後) 육년간(六年間)을 곡읍(哭泣)하며 슬퍼하여 한결 단괄(担括)

같이 하여 조금도 타용(惰容)이 없으니 초목(樵牧)들도 자차(咨嗟)하였다. 복(服)을 다 지난

후에도 여막(廬幕)은 오히려 두고 성소(省掃)를 폐(廢)하지 않으며 시(詩)가 있으니 이르기를

“끝이 없는 구모(劬募)하신 은혜 만(萬)에 하나라도 갚기 어렵네”라고 하고 또 그 집에다 편액

(扁額)하기를 종모(終慕) 이자(二字)로서 하니 종신(終身)토록 사모한다는 뜻을 부치니 시인(時人)

이 그 산(山)을 이름하되 정시동(鄭侍洞)이라 하였다. 공(公)이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자손(子

孫)들에게 남기니 그 조목(條目)이 삼십(三十)가지니 군신(君臣)과 사전(師傳)과 부모(父母)와

형제(兄弟)와 실가(室家)와 자손(子孫)과 종족(宗族)과 친인(親姻)과 붕우(朋友)와 비복(婢僕)과

호저(戶邸)와 거린(居隣)과 향당(鄕黨)과 주읍(州邑)과 인경(鄰境)과 도내(道內)와 국중(國中)과

상제(喪祭)와 분묘(墳墓)와 거처(居處)와 집사(執事)와 례업(隷業)과 희로(喜怒)와 애악(愛惡)와 치

욕(恥辱)과 공책(功責)과 개과(改過)와 수분(守分)과 기황(飢荒) 적덕(積德)이다. 매편(每編)에 모두

스스로 글을 썼으니 가히 가언지론(嘉言至論)이라 할것이니 지금은 십일편(十一編)만이 남아

있고 거린이하(居隣以下) 십구편(十九編)은 잃어버려 전(傳)하지 아니하니 애석하다.

 

배(配)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진사(進士) 훤(暄)의 딸이니 시부모를 섬기되 능히 부도(婦道)를

잡았으니 또한 가히 가법(家法)의 바름을 볼 것이다. 일남(一男)은 붕남(鵬南)이오 이녀(二女)는

봉사(奉事) 김창(金漲)과 이춘방(李春芳)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붕남(鵬南)이 광산김씨(光山金氏)

내금위(內禁衛) 정좌(廷佐)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一男)을 낳으니 선경(善卿 )으로 주부(主簿)

다. 함평(咸平) 노몽린(魯夢麟)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一男)을 출생(出生)하니 극신(克信)으로

참봉(參奉)이다. 희(噫)와 공(公)의 소자문자(所著文字)가 다 병란(兵亂)에 잃어버려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민설(泯設)하여 가고(可考)할바가 없고 오직 이 공(公)이 자위(自爲)한 가훈(家訓)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해우(海隅)에 벽처(僻處)하였으나 본래부터 예의(禮義)의

나라되고 칭(稱)하여 문헌(文獻)의 이름과 도맥(道脈)이 불추(不墜)하여 이나라에 태어난 것이

또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마다 다르고 해마다 변(變)하여 염치(廉恥)

는 더러지고 예의(禮義)는 버려져 침침(駸駸)한 듯 무례(無禮)하고 무아(無我)한데 극(極)하니

이를 크게 두려워 하여 가훈(家訓)을 만든 까닭이라 하였다. 지금 수백년(數百年)의 아래서 가히

공(公)을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음이로다. 자손(子孫)이 능체(凌替)하여 유지(幽誌)를 아직도

만들지 못하여 일이 장차 고증할 수 있을까 하여 여러 後孫들이 後世에 傳하고자 하여 公의

칠세손(七世孫) 박보(璞甫)께서 내게 지(誌)를 청(請)하고 사실(事實)의 기록(記錄)을 보임으로

내가 고사(固辭)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윤색(潤色)하여 기록하기를 우(右)같이 하노라.

 

                                       崇禎紀元後三回乙丑夏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

                                                                                  蔚山 金壽祖 謹撰

 


촬영 逸軒公15世孫 병선 2012.10.31

문집 등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bro05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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