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世  기매(耆梅)

[역문]林川羅州鄭公墓碣
公의 휘(諱)는 기매(耆梅)요 자는 덕선(德善)이며 호는 일정(逸亭)이니 나주(羅州)에서 

계출(系出)되었다. 고려(高麗)때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전리문한서사

(判典理文翰署事) 세자사(世子師)며 임금이 가신(可臣)이란 이름을 내리었고 號는 

설재(雪齋)요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이니 장단(長湍)에 예장(禮葬)하였고 

충선묘정(忠宣廟庭)에 향사(享祀)하였다.고(考)의 휘(諱)는 인부(仁富)니 덕(德)을 감

추어 빛나지 않았으며 妣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목은(牧隱) 색(穡)의 후예(後裔)다. 

公이 중종(中宗) 丁卯年()(1507)四月五日에 出生하니 부모를 섬기되 효도(孝道)로 
하였으며 깊이 이의(理義)를 연구(硏究)하였으며 시례(詩禮)의 門에 종유(從遊)하여 문달

(聞達)을 求하지 아니하니 일세(一世)의 첨앙(瞻仰)한바가 되었다. 
 
수(壽)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가자(加資)되었으며 壬申年 

九月十四日에 정침(正寢)에서 考終하니 부여군임천면(扶餘郡林川面) 발산리(鉢山里) 전록(前麓) 

응봉하(鷹峯下) 갑좌(甲坐)에 장사하였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로 父는 자훈(自訓)이며 문익공(文翼公) 광필

(光弼)의 후예(後裔)다. 연산(燕山) 癸亥年(1503) 二月六日에 출생(出生)하여 경신년(庚申年) 

八月五日에 卒하니 묘(墓)는 합영(合塋)이다. 
 
三男()을 낳으니 장남(長男)은 순수(淳守)요 차남(次男)은 순언(淳彦)이요 삼남

(三男)은 淳이다. 순수(淳守)의 男은 희욱(希郁)이오 순언(淳彦)의 男은 신원(信元)이오 

순(淳)의 男은 개신(价臣)이며 희욱(希郁)의 男은 종립(宗立)과 흥립(興立)과 효립(孝立)

이요 신원(信元)의 남(男)은 득신(得慎)이요 후신(後臣)의 男은 일장(日章)과 일갑(日甲)

이요 증현이하(曾玄以下)는 능히 다 기록(記錄)하지 아니한다. 아 ! 公이 고가(古家)

에서 생장(生長)하여 도의(道義)를 강구(講究)하니 그 고풍아운(古風雅韻) 이 마땅이 

후손(後孫)들의 긍식(矜式)함이 많을 것이로되 돌아보건데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고증할 수가 없으니 후손들의 섭섭함을 말하지 못함이 있으리라. 이에 구첩(舊牒)에 실려 

있는 것과 가전(家傳)한 유문(遺聞)을 략촬(畧撮) 하여 비(碑)  후면(後面)에 刻하여 감히 

치사(侈奢)와 일언(溢言)으로 무선(誣先)하는 죄를 자범(自犯)하지 아니하니 後來子孫()은 

마땅이 선열(先烈)을 추감(追感)하고 보본(報本)할바를 생각하여 비록 백세(百世)가 되더라도 

바꾸지 말고 전(前)의 빛을 당겨 후손(後孫)에게 넉넉히 끼처준다면 면면(綿綿)하여 

여록(餘祿)이 그 끝이 없을 것이다.
                                  檀紀四二八二年 己丑 九月 日

2011.12.07 묘소참배후 사진촬영 문정공24세손 병선

한식날에 祭享

 

충남 부여군 충화면 현미리 237  041-833-1229 / 010-7200-7078 / cju8115@hanmail.net

①. 林川公 十二世孫 國俊(2011.04.13 )

②. 2011. 04 대종회 정기총회 참석, 醉巖先生詩集 外 1 보내주시다.

③. 2011, 10. 8 토 대종회 임원회의 참석(호남종친회 사무실) 14:50 열차로 귀가(광주역)

                                                         기록 : 문정공24세손 병선(昺璿) 010-3605-9354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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