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문]竹友堂公行錄

 

공(公)의 휘(諱)는 란(瀾)이요 자(字)는 양언(揚彦)이며 죽우당(竹友堂)은 그 호(號)다.

우리 정씨(鄭氏)는 본관(本貫)이 나주(羅州)로 고려(高麗) 말(末)에 휘(諱) 가신(可臣)

이 있었으니 관(官)은 사공(司空)에 이르고 세칭(世稱) 설재선생(雪齋先生)이라 하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니 이분이 원조(遠祖)이시다.

 

휘(諱) 길(佶)을 낳으니 문(文)으로 소윤(少尹)이며 이판(吏判)에 증직(贈職)되었고, 휘

(諱) 문진(文振)을 낳으니 군수(郡守)며 이판(吏判)에 증직(贈職)되었고, 휘(諱) 유(有)

를 낳으니 군수(郡守)로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휘(諱) 자신(自新)을 낳으니

대호군(大護軍)으로 이판(吏判)에 증직(贈職)되었으니 이 모두 경무공(景武公)으로서 추

훈(推勳)되었다.

 

휘(諱)軾을 낳으니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시호(諡號)는 경무(景武)요 호(號)는 영모정

(永慕亭)이며,휘(諱) 승현(承賢)을 낳으니 주부(主簿)요, 휘(諱)을 낳으니 직장(直長)으

로 고조(高祖)이상(以上)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염조(念祖)이니 관(官)은 주부(主

簿)며 호(號)는 사례당(思禮堂)이니 효직(孝直)로 세상(世上)에 이름이 났었고, 조(祖)

의 휘(諱)는 심(諶)이니 이조정랑(吏曹正郞)이며 문장(文章)으로 소문이 나서 학자(學

者)들이 일헌(逸軒) 선생(先生)이라고 하였다. 자(者)의 휘(諱)는 여한(如漢)이니 장사

랑(將仕郞)이오, 비(妣)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참봉(參奉) 호의(好義)의 딸이다.

 

이남(二男)을 두었으니 홍(泓)과 미(渼)로 호(號)는 덕천(德泉)이며 진사(進士)에 합격

(合格)하였고 계비(繼妣) 여양진씨(驪陽陳氏)로 부사직(副司直) 돈후(敦厚)의 딸이다.

이남(二男)을 낳으니 란(瀾)과 윤(潤)이다.

 

선조(宣祖) 계미년(癸未年 1583)에 공(公)이 나주(羅州) 금안동(金鞍洞) 집에서 출생

(出生)하니 의용(儀容)이 단정(端正)하고 재기(才器)와 괴걸(魁傑)하여 일찍이 가정교훈

(家庭敎訓)을 이어받아 과정(課程)을 독립(督立)하여 문예(文藝)라 풍성(風成)하니 조부

(祖父) 일헌공(逸軒公)이 심히 기애(奇愛)하였으며 어른이 되어 문호토(門戶討)로 과거

(科擧)에 종사(從事)하여 여러번 응시(應試)하였으나 합격(合格)하지 못하니 이로부터

사진(仕進)할 뜻이 없어 사관(事觀)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부모(父母)뜻을 편안케 하였

으며 백씨(伯氏) 덕천공(德泉公)을 섬기되 엄부(嚴父) 섬기듯 하니 백씨(伯氏) 또한 좋

아하여 제매(弟妹)를 심히 무애(撫愛) 하였다.

 

의식(衣食)을 같이 하되 척두(尺斗)로 반드시 나누니 사람들의 이간시키는 말이 없고 종

당(宗黨)에 추급(推及)되어 일문(一門)이 옹목(雍睦)하였다.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읍혈(泣血)하기를 게을리 않았으며 정문(情文)이 비지(備至)하였고 조년(早年)에 송강

(松江) 정선생(鄭先生) 문하(門下)에 수업(受業)하여 기흡홍명(畸翕弘溟)라는 도의교(道

義交)가 되었으며 무릇 성명리기(性命理氣)의 온오(蘊奧)를 격치(格致)하였고 성정(誠

正)의 규모(規模)를 강구(講究)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항상 술을 마신뒤에는 강개(慷

慨)하여 충신열사전(忠臣烈士傳)을 큰소리로 읽어 날이 저물줄도 몰랐다.

 

문득 병자년(丙子年)을 당하여 남한(南漢)이 피위(피(被)위(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뿌리며 일어나 종숙(從叔) 부사공(府使公) 여린(如麟)에게 청(請)하기를 적로(賊

虜)가 창궐(猖獗)하여 국세(國勢)가 창황(蒼黃)하니 이는 바로 신자(臣子)로써 효사(效

死)의 때니 어찌 참아 앉아서 종사(宗社)의 위급(危急)을 보겠습니까 ? 하니

 

부사공(府使公)이 충의(忠義)에 힘쓰라 하고 갑주(甲冑)를 주니 바로 들어가 주췌사오죽

남(主倅事吳竹南) 준(竣)을 보고 ①개장(鎧杖)을 청(請)해서 얻어 드디어 기(旗)를 사람

다니는 거리에다 세우고 북을 치며 소병(召兵)하기를 임금이 욕(辱)을 당함에 신하(臣

下)가 죽는 것은 의리상(義理上) 당연한 것이다. 감히 종령(從令)치 않는 사람이 있으면

참(斬)하리라 하니 원근(遠近)의 민사(民士)들이 公의 의성(義聲)을 듣고 래부(來附)한

자가 백수(百數)라 금건서족(金巾西族) 홍도사(洪道士) 남주(南柱) 나해봉(羅海鳳) 및

친족(親族) 등 제의사(諸義士)로 방략(方略)을 상의(商議)하여 청주(淸州)까지 행도(行

到)하여 정기흡(鄭畸翕) 진중(陣中)으로 달려가니 기흡(畸翕)이 심희(甚喜)하더니 문득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통곡(北向痛哭)하고 돌아와 종신(終身)토록

자청(自請)하니 사실(事實)이 창의록(倡義錄)에 실려 있다.

 

그가 사변(事變)을 만남에 이해(利害)에 있어 능히 의리(義利)로서 재단(裁斷)하여 일호

(一毫)도 구차스런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경복(敬服)치 않은이가 없었다. 일즉 일실(一

室)을 정처(靜處)에 지어 모년(暮年) 장수(藏修)의 장소로 삼고 형창제화(兄唱弟和)하며

논도강서(論道講書)하여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사는곳에 거죽(巨竹) 십정(十挺)

이 특립(特立)하여 변(變)치 않고 흔흔(欣欣)한 듯 하여 황고(怳苦)히 유정군자(有情君

子) 같음을 생각하여 명행(名行)을 부지런히 힘쓴고로 죽우당(竹友堂)이라 자호(自號)하

니 이에 공(公)의 쌓인바를 상상(想像)할 수 있다. 병신(丙申年년) 유월육일(六月六日)

에 침실(寢室)에서 졸(卒)하니 돈목동(敦睦洞) 남록을좌(南麓乙坐)의 언덕에 장(葬)하였

다.

 

배(配)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종길(宗吉)의 딸이며 직장(直長) 정손(禎孫)의 증손(曾

孫)이니 공(公)보다 사년(四年) 먼저 졸(卒)하니 묘(墓)는 쌍영(雙塋)이라. 사남이녀(四

男二女)를 출생(出生)하니 장남(長男)은 진서(震瑞)로 병참(兵參)에 증직(贈職)되였고,

차남(次男)은 하서(河瑞)며, 삼남(三男)은 봉서(奉瑞)니 초휘(初諱)는 곤서(昆瑞)요, 사

남(四男)은 위서(渭瑞)다. 장녀(長女)는 오현표(吳顯標) 차녀(次女)는 진사(進士) 나위

(羅褘)며 손증(孫曾)은 번창(蕃昌)하여 다 랑록(郞錄)하지 않는다.

 

아 ! 공(公)이 명가(名家)에서 태어나 견식(見識)이 정명(精明)하고 기국(器局)이 준정

(峻正)하여 장차 함이 있을 것 같아쓴데 때를 만나지 못하여 쌓인 포부(抱負)를 펴지 못

하고 임하(林下)에서 종로(終老)하니 사림(士林)이 그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여 일

즉 설재서원(雪齋書院)에 추배(追配)할 것을 의논(議論)하여 도내(道內)에 통문(通文)을

발(發)하였는데 자손(子孫)이 영체(零替)하여 마침내 조두(俎豆)의 존(尊)을 얻지 못하

고 또한 장덕(狀德)의 글도 없어 그 저술(著述)한바가 산질(散迭)하여 거의가 없어졌으

니 잠광은덕(潛光隱德)을 어느곳에서 상고 할것인가 불초(不肖) 이를 두려워 하여 삼가

옛날 간행(刊行)한 유문(遺文)을 따르고 옛날부터 들려온 말을 참작하여 약간 연윤(演

潤)을 더하고 장체(狀體)를 조성(祖成)하니 이것이 어찌 천백(千百)에 십일(十一)이나

되리오 바라건데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재택(裁擇)있기를 기다리노라.

 

                                                       時乙亥仲春之望

                                                                                      十世孫 遇善 謹撰


竹友堂公 諱瀾墓 乙坐 雙兆 ⑩ 촬영/2012.11.23 일헌공15세손 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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