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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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昺璿)

 

 

                          茶泉遺稿 (文)

                                   다천(茶泉) 정우익(鄭遇益) 저           Go Back

                              天

  -  한국족보학연구소 편역 -

 

1. 戒子

天生萬物 人爲萬物之上而謂之上者 非但衣之也 食之也 能言也 爲萬物之上而上之者也. 盖天地綱常天理之自然 倫彛人性之本然而性 卽天地所賦也. 天以綱常倫彛 賦於人而不于物 故天下未有無心之物祗是綱常倫彛 人所獨有也. 獨有其有而苟失其有則人物無分 可不懼哉. 日用當行底 率由天眞而已. 更無他求底 道理也. 庸陳十條詳示之. 事死如事生而事死. 惟大祭祀 所以奉先之大節也. 神惟享其誠 事親之節養志爲先. 苟親志不養子職厥矣. 誰晨昏定省孝云乎哉. 定省 由乎性而爲事親之禮 養志 由乎性而爲事親之道 失其子道而以禮則吾未知其孝也. 兄弟友愛而已 兄雖友之弟而不恭則非其愛也. 弟雖恭之爲兄而不友則非其友也. 一氣分而各有其身 視其兄 如一身之有體 視其弟如一身之有肢 惟恐失之則於友于之道 可庶幾矣. 相愛亦有道 見利相讓 見失相益 不拘家人之言. 夫婦主敬 苟不敬家法紊矣. 正家之本 始於夫婦 可不謹乎哉. 宗黨敦睦而已 切近親之則而汝之兄弟 子而又子孫而又孫則族親宗黨 分爲百千矣. 而汝之子孫 苟不和則而汝之心安之耶. 不睦 是忘先之義也. 誰在百代之遠親睦可也. 居家有三難齊家也. 敎子也 御㒒下也 此三者一於修身而不失其正則難 固不難矣. 然是皆齊家之事而二者 宜齊家之效爾. 戒爾勤愼誰有一能勿自矜 雖有一不善 亦勿自隱苟自矜則飽滿之氣 迸濫而吐洩 譬喩汚穢及人人 孰甘諸 不惟是己自棄日甚愼哉. 亦其人之病在乎自隱 自隱則竟不知改惡孼 日萌無所不至. 子思子曰莫見乎隱 是乃千古格訓也. 雖欲隱之 那可得乎. 苟曰隱而人不知是欺天也. 凡飮酒愼節. 飮此可以可飮 不可飮 享祀飮福之節 鄕飮宴酬之際 不可以無酒可飮者是也. 過則伐性 所以存心養性者 節之而不可過量也. 自古傾國敗家者. 類沈溺於酒而反其性者. 未之有也. 愼勿惡小爲之. 試看紙面一滴 漸濕全張無乾淨處. 愼勿取不義財. 財聚怨聚 凡爲善者 不謨其財. 矧惟宗財 是奉先之資 尤不可以不愼者 爾得罪於先 恐無所禱也.

1. 계자

하늘이 만물을 낳고, 그 가운데에서 사람이 만물(萬物)의 우두머리가 된다. 사람이 만물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은 다만 옷을 입고, 음식을 익혀서 먹으며, 말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만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대개 천지강상(天地綱常)은 천리자연(天理自然)의 이륜(彛倫)으로 인성(人性)의 본연(本然)이다. 그러므로 성(性)은 곧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하늘이 강상(綱常)과 이륜(彛倫)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해 주었으나, 다른 만물들에게는 부여해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하에 마음이 없는 만물들은 없으나, 단지 이 강상과 이륜은 유독 사람만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 강상과 이륜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사람과 사물들은 분별할 수 없으므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것들은 하늘의 참된 진리를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곧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는 도리는 없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에서 말하고 있는 십조(十條)의 내용들에서 자세히 살펴보아라.

○ 죽은 자를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듯 하라

그러나 죽은 자를 섬기는 것은 오직 대제사(大祭祀)에서 그러할 뿐이다. 그것은 조상들을 받드는 큰 절목이기 때문이다. 신들은 오직 자손들의 정성만을 흠향받을 뿐이다.

○ 어버이를 섬기는 절도(節度)는 양지(養志)를 우선으로 한다

만약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지 않는 것은 자식된 직분을 빠뜨리는 것이다. 비록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것을 효(孝)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본성으로부터 말미암아서 어버이를 섬기는 예(禮)를 실천하는 것이다. 양지는 성(性)에 말미암아서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된 도리를 잃어버리고 예(禮)라고 한다는 것은 나는 아직 그것이 효인지 알 수 없다.

○ 형제는 우애(友愛)해야 한다

형이 비록 아우를 우애하기만 하고 공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생을 우애하는 것이 아니다. 아우가 비록 형을 공경하기만 하고 우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형을 우애하는 것이 아니다. 형과 아우는 한 기운에서 나누어져 각각 그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형 보기를 마치 자신인 듯 하고, 자기 동생을 마치 자신의 사지(四肢)인 듯여겨

생각컨데 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형제 사이의 우애의 도(道)는 거의 가까워질 것이다.

형제간에 서로 우애함에도 도가 있다. 이익을 보면 서로 겸손히 양보하고, 과실을 보게 되면 서로 더욱 집안 사람들의 말에 잡히지 않도록 해라.

○ 부부간에는 공경함이 주가 되도록 하여라

만약 부부간에 공경하지 않으면 가법(家法)이 문란해지게 된다. 집안을 바르게 하는 근본은 본래 부부간에서 시작되므로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

○ 종당(宗黨)은 돈독하고 화목해야 한다

매우 가까이에서 그것을 보면, 네 형제의 자식들과 자손, 자손에 또 자손은 족친(族親)․종당(宗黨)으로 나누어져 매우 많아지게  된다. 너의 자손들이 화목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화목하지 않는 것은 선조들의 뜻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의 먼 차이가 있더라도 친목해야만 한다.

○ 집 안에 있어서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 둘째,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 셋째, 노비들을 통솔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몸을 닦는 것을 한결 같이 하여 그 바름을 잃지 않는다면 어려운 것도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게 된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모두 집안을 다스리는 일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마땅히 집안을 다스리는 효과일 뿐이다.

○ 언행을 삼가하고 주의할 것을 너희들에게 경계하노라

비록 자기에게 한 가지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스스로 자랑하지 말라. 비록 한 가지의 착하지 않음이 있더라도 스스로 숨기지 말라. 만약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마음에 만족한 기운이 솟아 넘쳐서 입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비유하건데 마치 더러운 오물이 사람들을 더럽히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누가 그 말을 좋아하겠는가! 또한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 날마다 심하게 되므로 삼가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사람의 병은 스스로를 숨기는 데 있다. 스스로 숨기게 되면 마침내 악(惡)을 고치는 것을 모르게 되어 재앙이 날마다 생겨나 되어 도래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자사(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은미함보다 밝게 드러남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바로 천고(千古)의 훈계이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의 착하지 않음을 숨기고자 하지만,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만약 숨기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 술을 마심에 있어서는 삼가하고 절도가 있게 하라

술을 마시는 것은 마실 수도 있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다. 제사를 지낼 때의 음복(飮福)의 절도(節度)와 향음연수(鄕飮宴酬) 때에는 술이 없을 수 없으므로, 마실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먹게 되면 본성을 상하게 하므로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는 것으로 절제하여 술 먹는 양이 지나치지 않게 한다. 예로부터 나라와 집안을 망하게 했던 자들이 술에 빠져 그 본성을 회복한 사람들은 아직 없었다.

○ 악이 작다고 하더라도 하지 말라

시험삼아 종이 위에 물 한방울을 떨어뜨리면 점점 모든 종이가 마른 곳이 없이 물로 차갑게 되는 것을 보아라.

○ 의롭지 않은 재물을 얻으려 하지 말라

재물이 모이면 원망도 모이게 된다. 무릇 선을 행하는 자도 재물을 얻으려 계획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종중의 재산은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는 밑천이니 삼가지 않아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선조에게 죄를 입게 되면 어느 곳에도 빌 곳이 없을까 걱정된다.

 

2. 松山精舍營建時通文

竊惟我謙山先生 吾省文席士林棟樑 學問純正 德望隆崇. 稽古牖來之功 允爲今日之所宗仰. 凡我同志之秉彛罔墜宜非先生警發之力 可得呼嗚呼 叔季以降儒風不作師道漸壞 人而不知師師友友之道 天理人彛幾乎息矣. 亦未有今日之甚吁可惜也. 幸玆斯門啓興 淵源井井 敎誨眷眷 講斯習斯 從遊者 莫不悅服 鳩若干財 作爲一契春講秋 如之凡二十年 所師可隆友 可親之道益倡明 然先生遯靖之方諸益講習之所 不暇及矣. 祗幸今春賴有僉議 詢同爰謨營築而玆庸敬告願僉尊竭 誠出力署名同編 俾我先生之學 以講不墜 此正今日第一義諦 若今三百之徒 莫不尊 吾先生之德 亦莫不尊吾先生之心 則服之尊之 亦皆彛性之同然也. 祗以平日尊慕之誠 庸效今日奮出之力 則營築與否. 在吾誠力如何耳. 惟冀商量勿泛視斯文幸甚.

2. 송산정사영건시통문

우리 겸산(謙山)선생님을 내가 간략하게 기록해보건대, 학문과 덕망이 높으시며, 사림의 동량(棟梁)이시며, 학문이 순수하고 올바르시고, 덕망이 크고 존경스러우시다. 옛일을 생각해보고 오는 공을 따져보건대 진실로 지금에서도 존경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생님을 우러러 우리 동지들의 상도를 굳게 잡아 떨어짐이 없이 계속 이어지게 할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경계하여 분발하게 하시는 힘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아! 슬프도다. 세상은 말세가 되어 유교의 학풍은 땅에 떨어져 다시 일어나지 않고, 스승의 도는 점점 무너져, 사람들은 스승이 스승답고 벗은 벗다운 도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리와 인간의 떳떳한 인륜은 거의 사라져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으므로 아! 애석하도다. 다행히 여기 송산정사(松山精舍)에서 계발하여 흥기시킴은 그 연원(淵源)이 깨끗하고 바르다.

가르침을 애타게 그리워하니 선생께서 강론하시고 이를 우리가 익히므로, 배우는 우리들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있는 힘을 다하여 약간의 재물을 모아 하나의 계(契)를 만들어 봄․가을로 한결같이 강론하심이 무릇 20년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생님께서 강론하시는 곳은 융성해질 수 있었다. 함께 공부를 배우는 벗들이 선생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도가 더욱 창성하고 밝아졌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는 방법들을 회피하시고 더욱 제자들에게 강론하고 이를 익히게 하므로, 선생님에게 말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이번 봄에 모두의 논의에 힘입어 송산정사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께 모두가 선생님을 높이 받들기를 원함을 공경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내어 서명하고 함께 엮어놓았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학문을 강론하는데 조금도 끊어짐이 없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금일의 첫 번째 의로운 요체(要諦)이다.

지금에 선생님을 따르는 삼백의 무리들은 우리 선생님의 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 선생님의 마음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생님을 복종하고 존경하니, 또한 우리 모두 떳떳한 본성의 동일함이다. 공경히 평일에 선생님을 공경하는 정성으로 今日의 분출하는 힘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정사(精舍)를 짓는 것의 여부는 우리 성실한 힘의 어떠한가에 따라 달려있을 뿐이다.

오직 바랄 것은 비교하고 헤아려 이 글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송산정사.

 

3. 景武公影幀奉安祝文

御賜眞幀 百世尊奉. 今將重摹 髭髮攸同 伏惟尊靈 舍舊從新.

 

3. 경무공영정봉안축문

임금께서 영정(影幀)을 내려 주시니

백세토록 높이 받드리.

지금 거듭 모사(摹寫)하여

모습을 똑같게 그렸으니

높으신 영령(英靈)께서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소서.

 

4. 扶風契發文 (一名綱一契)

竊惟天行有道 四時代焉 而元爲歲首. 人性本善 三綱立焉 而孝爲百原. 盖自生民以來 堯舜之道 永有盛於萬世而治天下也 始於孝悌. 今夫孝也者 天眞無僞而誠於中而已. 孝可離天乎. 可離 非孝也. 是以誠孝格天 天感神佑 速於影響 而天眼不可誣蔽 則孝子之心 亦其非通天一窺乎. 近古士人誠窩金公 瑞原古族 寒暄耳裔. 孝行著于一方 旣有鄕道薦而屋社已矣. 天褒未蒙 是吾心 儒者之所感. 且其詩稿遺旨 簡而奧 雖不工於彫琢 出於性情之正 而譬猶雪中孤松 未嘗有寒葩可玩 而本色之靑尤可愛者爾. 然感於物而發於性爲詩 感其誠而發於性爲孝 則詩與孝同. 是由性出而詩不及孝 抑何哉. 嗚呼 目今世降所貴乎道者 惟孝爲大 庸寓興慕之義 作爲一契 將欲扶風化於當世 而勸進後學 願僉尊齊聲同起之地 幸甚.

4. 부풍계발문 (일명강일계)

삼가 공손히 생각해 보건대, 하늘의 행함에는 도(道)가 있으니 사계절이 바뀌는데 원(元)이 한 해의 처음이 되며, 사람의 성품이 본래 선하여 삼강(三綱)이 서 있음에 효가 백 가지 행실의 근본이 된다. 무릇 사람들이 생겨난 이래로 요순(堯舜)의 도가 만세토록 영원히 흥성함이 있어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은 효제(孝悌)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저 효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거짓됨이 없어서 마음에 성실한 것일 뿐이다. 효가 천명(天命)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떠날 수 있다면 이는 효가 아니다. 이렇기 때문에 정성스러운 효는 하늘도 감격시키니, 하늘이 감동하고 신명(神明)의 보우함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르다. 또 하늘의 눈은 속이거나 가리울 수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효자의 마음은 또한 하늘이 한 번에 꿰뚫어보는 것과 통하지 아니하겠는가?

근래의 선비 성와(誠窩) 김공(金公)은 서원(瑞原)의 오래된 가문으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후손이다. 효행으로 한 지방에 이름이 알려져서 이미 유향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사묘에 그치고 말았다. 하늘의 표창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와 여러 유자(儒者)들이 유감스러워 하는 바이다. 또 그 시문집에 남겨놓은 뜻은 간략하면서도 심오하니, 비록 문장을 꾸미고 다듬는 데에는 힘을 쓰지 않았지만 모두가 성정(性情)의 바름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비유하자면 눈 속의 한 그루 소나무와 같다.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그것을 보고 완상(玩賞)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소나무 본래의 푸른색이 더더욱 사랑스러운 것이라 하겠다.

 

▶옥천서원:전남 순천시 옥천동 소재. 이 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고, 유림들에 의해 해마다 제사를 모시는 사액서원이다.

 

그러나 사물에 감동하여 성품으로 드러나는 것이 시(詩)가 되고, 그 정성을 느껴서 성품으로 드러나는 것이 효가 된다. 시와 효가 모두 같은 성(性)으로부터 나왔는데, 시가 효에 미치지 못하니 무엇 때문인가? 아아, 지금 풍속이 쇠퇴한 때에 도에서 귀하게 여기는 바는 오로지 효를 크게 여긴다. 이에 사모하는 뜻을 의탁하여 하나의 계(契)를 만들어서 장차 예의로 시대를 교화하는 것을 돕고자 하며, 후학들의 발전을 권장하고자 한다. 바라건대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여기에 참여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

 

5. 誡子文 (甲戌)

盖自太始以來 天降衷子下民 而民有秉彛 則有父有子 人人然矣. 吾知夫免於三千莫大 而爾等苟以泰生 而有絲豪之犯 銖錙之失 爾父之免 反爲不免矣 戒之哉.

5. 계자문 (갑술)

천지가 시작된 이래로 하늘이 백성을 낳아 주었고, 백성들에게 떳떳한 도가 있게 하였으니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사람은 모두 그러하다. 나는 불효를 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너희들은 살기 위하여 조그마한 불효라고 범하는 경우가 많구나. 너희 애비가 노력한 것을 너희들은 도리어 무너뜨리니 경계하라.

 

6. 倭政强制創氏自警文

戴天履地而偸生 寔天地可愧矣. 蹈東而圖生則東亦其土 陟西而苟生則西亦其天 痛哭幾絶而不絶 抑亦見棄於崔․閔․安․李諸忠義 而閻羅使斥之也歟. 痛迫自切於中 而題一絶詩 草木無知猶勝似 然詩足以盡五內丹積之痛乎. 誓死不受曰 寧吐血而死 革其血脈一貫之統而着襟裾乎.

6. 왜정강제창씨자경문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구차히 살아가려니 천지(天地)에 부끄럽도다. 동쪽으로 가서 삶을 도모하려 하니 동쪽 또한 그들의 땅이고 서쪽으로 올라가 삶을 구차히 하려 하니 서쪽 또한 그들의 하늘이다. 목숨이 거의 끊어졌다가 죽지 않음이 통곡할 만하니, 아니 또한 최․민․안․이(崔閔安李) 등 여러 충성스럽고 의로운 이들에게 버림을 받아 저승사자마저 나를 버린 것인가? 절박한 아픔이 절로 마음에 간절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음에, ‘무지(無知)한 초목이 나보다 오히려 나은 듯 하구나’라 하였으나 시(詩)로 내 안의 단심(丹心)에 쌓인 아픔을 다 할 수 있겠는가! 죽어도 창씨개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하기를 “차라리 피를 토하고 죽을지언정, 그 혈맥을 하나로 꿰는 법통(法統)을 바꾸고 사람 행세를 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창씨개명을 하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7. 登臨祠奉安祝文 (三位)

伏惟錦湖林先生 河嶽鍾靈 間氣而作. 純正至性 學源愈博. 文兼英豪 義氣勇躍. 錦江一節 立志淸濩. 事物攸格 均致.惟擴 黼黻王庭 條理詳略. 生平知己 陶山宿約 臨死不懼 俯仰不怍. 帛帛焜燿 百世如昨. 常祀禮典 忝稷淸酌. 松坡林公 道學淵源 泳月精神 胚胎.先烈 三賢近仁 公乃趾美 邦國縉紳 配宥常享 俎豆寔陳. 觀海林公 殉國大義 歿世不塵. 祗知有君 不知有身. 肚裏日星 人孰等倫 三綱一致 從享精禋.

7. 등림사봉안축문 (삼위)

삼가 생각건대

금호 임선생(錦湖林先生)이시여

하악(河嶽)의 정령이 모여 그 기운을 타고 나셨네.

순정하고 지극한 성품에

학문의 연원은 더욱 드넓었네.

문학과 영웅다운 호기를 겸비하여

의기담긴 용맹을 떨치셨네.

금강(錦江)처럼 한결같은 절개여

뜻을 세우심은 가히 없으셨도다.

사물마다 바로 잡아

형평을 이루심이 오직 넓으셨네.

관복을 입고 조정에 서심에

조리의 상세함과 간략함을 다 갖추셨네.

평생의 지기(知己)인 도산과

일찍이 약속을 지켰네.

죽음에 임하여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네.

승백(升帛)의 빛나심

어제와 같도다.  

항상 예전(禮典)에 제사 받아

곡식을 흠향하시네.

송파 임공(松坡林公)이시여

도학의 연원은

빙월처럼 맑은 정신을 지니셨네.

선인의 공열을 이어받아

삼현의 인에 가까우셨도다.

공께서는 이에 기린(麒麟)처럼

나라에 훌륭한 관리를 지내셨도다.

배향하여 항상 흠향받으니

제물들이 진열되는도다.

관해 임공(觀海林公)이시여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니

오래도록 남으리로다.

다만 나라만을 생각하여

일개 자신을 돌보지 않으셨네.

해와 달처럼 빛날 분이시니

누가 같이 될 수 있으리오

삼강이 일치하여

흠향을 받으심이 정성스럽네.

 

 

祭文(제문)

1. 祭先先生 (人日修契時)

恭惟先生 士林棟樑 斯文宗託 世不常生 間氣而作. 惟靈拔萃 天挺人日 稟氣純粹 主璋令賁. 不由師承 妙契前賢 覃思硏精 夕惕朝乾 造詣彌篤 實踐由躬. 金精玉蘊 段鍊積中 氷蟗秋月 天然有光 德用撝兼 日益成章 甲匪近邪 千古正論 矧惟丙義存攘 斯難迴者 天樂志邱園 擔任敷敎 德崇業宏 九耋遐享 肥遯益貞 敢擬無彊忍 胡至斯幾乎. 道喪痛不我私 泰山遞隳 天實爲之 嗚呼痛矣 嗟哉. 吾黨無依無託 安放安仰 麓彼松山 遺韻舍馨 儀型永層 若存英靈 仍寓羹墻 流水盈盈 摳衣日多 曷任淺誠 吾徒三百 痛迫愈新 敢以薄尊 秉曲倂陳 伏惟 尊靈嗚呼哉 尙饗.

1. 제선선생 (인일 수계시)

삼가 헤아려 보건대 선생께서는 사림의 대들보와 같으신 분이며, 문학의 대가이시다. 세상에 몸을 기탁하여 살아가심에 평범하지 않으시며, 간기(間氣)를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셨다. 헤아려 보건대 영(靈)께서는 남들보다 훨씬 빼어났으며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계시다. 인일(人日)에 품수(稟受) 받으신 기(氣)가 순수하시고 고귀하시어 밖으로 떨쳐 드러나는구나.

스승에게 학문을 전수받지 않으셨으나 신묘(神妙)하게도 앞선 현인들의 학문에 서로 맞아 떨어지셨다. 깊이 생각하고 학문의 묘리(妙理)를 정밀히 연구함에 하루 종일 부지런히 애쓰며 조심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 학문이 도달한 정도가 매우 두터우셨으며, 이를 몸소 실천하여 행하셨다. 그러므로 학문이 견고하고 정밀하며 옥과 같이 아름답게 쌓이고, 이를 단련시켜 몸 가운데 쌓으니 마치 빙대(氷臺)위에 떠있는 가을의 밝은 달과 같으시다.

타고나심에 크고 빛나는 덕(德)이 있으시고 겸손하게 행동하시므로 날로 더욱 문장을 이룸이 뛰어나시다. (선생의 문장은) 간사함을 밝게 살피며 오랜 세월의 올바른 논의가 아니라면 다만 오직 의(義)를 밝게 하고 찬란한 문화를 가진 왕조를 존경하고 오랑캐의 문화를 배척하는 것일 뿐이셨다. 이에 어려움이 있어 회피하려는 자는 천악지구원(天樂志丘園)을 맡아 자주 가르치어 덕을 높이고 일을 크게 하시었다. 90된 노인들에게 가서 잔치를 벌려 편히 살게 하시니 더욱 곧으시다. 감히 헤아려 보건대 그 한계가 없으니 차마 어찌 여기에 미칠 뿐이겠는가!

세상에 도(道)가 사라지는 아픔은 나 개인의 마음만은 아니다. 태산도 갑자기 무너지니, 하늘도 진실로 아파하심이라. 아! 슬프고 애통함이여! 우리들은 의지하고 의탁할 곳이 이제는 없게 되는구나! 그러니 어찌 무엇을 따라 본받고 무엇을 우러러 볼 것인가! 울창하게 우거진 저 송산(松山)의 남겨진 운치는 선생의 아름다운 향기를 머금고 있구나! 선생의 법도는 이제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치 우리 곁에 있는 것 같구나.

그러므로 영령(英靈)은 우리 곁에 계셔서 바로 담장과 국속에서 보이는 것 같구나. 흐르는 물이 냇물이 넘쳐흐르면 옷을 걷어 올려 냇가를 넘어 가르침을 배웠던 날들이 많았으나, 얕게 흐르는 냇물에 임하여 있으면서도 어찌 더 이상 선생의 가르침을 배울 수가 없는가! 진실로 우리 300인의 애통함은 더욱 급박해지고 더욱 새로워지는구나. 감히 하찮은 작은 술잔으로서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을 아울러 나타내며, 엎드려 존령(尊靈)을 생각합니다. 아! 슬프도다. 상향(尙饗)

 

2. 祭習齋羅公 (聖則氏)

嗚呼. 惟公翳今眞儒動靜云. 爲錙銖不踰 德器沖潤渾粹 儀容標幟吾黨 任大責重 晩而好學益加精 力造詣極微 潛玩無斁幾乎. 道閫妙契前賢. 享年彌邵 稟氣由天 敢擬無彊云 胡至斯. 斯文益喪 吾道漸襄 正路蓁蕪 孰有拓之. 長然末學 罔可賁疑 松山立設. 升堂有幾 授受妙法 人不及知. 先師遺集 訓箴在玆. 念昔編縻 公實有篤 其奈塵氣 刊役廷支 丈德殆盡 一倍痛思 今旣繡束 不滿一期 伊後重任 又誰擔負去百 在前來百 在後後前 一揆可傳 不朽嗚呼 哀哉尙饗.

2. 제습재나공 (성즉씨)

아! 헤아려 보건대 지금의 선비들이 행동과 태도는 공의 그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선생님의 덕행과 기량은 매우 깊고 순수하시며, 몸가짐의 모범은 우리들에게 큰 임무와 무거운 책임을 주셨도다. 연세가 많이 드셨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더욱 더 마음을 집중시켜 학문에 정진하셨으니, 그 학문의 도달한 정도가 매우 미묘하시다.

그리고 마음을 전념하고 거듭 익히셔 그 학문의 경계가 없을 정도이셨다. 도(道)의 심오함이 옛 현인들의 학문에 신묘하게 맞아 떨어지셨다. 또한 살아오신 년수(年數)가 크게 아름다우셨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기(氣)를 품수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히 헤아려 보건대 그 한계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 선생님의 덕망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 글들은 더욱 더 (선생님의 덕을) 잃게 할 뿐이다. 우리의 도(道)는 점점 쇠퇴해지고 올바른 길은 잡초로 무성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 이것들을 개척하여 넓힐 수 있겠는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며 헤매는 말학(末學)들은 이를 밝게 드러낼 수 없도다. 생각해보건대 송산에서 스승을 공경하여 독실하게 공부하여 학문이 약간 성취됨이 얼마는 있었으나, 진리를 전하고 받는 묘법은 많은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였다.

선사(先師)께서 남겨 모으신 훈계와 잠언(箴言)들은 여기에 있다. 이것들을 생각해보건대 옛 저작들을 묶어 놓으셨으니 진실로 그 까닭이 있으셨다. 그러므로 어찌 세상의 때 묻은 기운이 그 일들을 깎아버리고 길게 지탱된 어른의 덕을 없애버릴 수 있겠는가!

곱절의 애통한 생각들은 지금 그려서 묶어보지만 채워지지 않는구나. 일년 이후에 거듭 선임되었으니 또한 누가 지난 백년 전과 앞으로의 백년 후를 짊어지고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년 전후를 헤아려 본다면 전할 수 있게 되어 사라져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슬프도다. 상향(尙饗)

 

3. 弔安平君

惟天地綱常不能獨存兮. 竝立而不悖者彛倫. 三代授受惟一不二兮 法於帝典而恒萬法不淪. 昔成王之有周公兮 倫理立於天人. 余嘗聞西山有薇兮 爲其淸者採而長春. 奈恚其採而返採兮 竊恐穢靑首陽之名. 親受顧命而返命兮 蛇蟠蚓結而陰謀不貞. 矯旨濫而不軌兮 罔常推鳴而飜五更. 皇貞金忠之忠貞兮 罪貫于天天乎允成(姓洪). 哀我前王不忘兮 莊陵松柏也靑靑. 鳴呼上天之載無聲無臭兮 胡不獨弔安平君之靈. 寒濱之水鳴咽兮 流于北瀦而不返. 山哀谷鳴而含冤兮 神號鬼哭而鳴咺. 可以雪百世之績寃兮 宜享璿源之忠苑.

3. 조안평군

천지의 강상(綱常)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로다. 함께 나란히 하여 도리에 거스리지 않는 것이다. 요․순․우임금 삼대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 오직 유일한 것이다.

삼황(三皇) 오제(五帝)의 법을 본 받았기 때문에 만세(萬世)에 뻗치도록 쇠하지 않는도다.

옛날에 주(周)나라 성왕이 주공(周公)을 보우하니 윤리가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세워졌도다.

나는 일찍이 서산(수양산(首陽山))에 백일홍 나무가 있음을 들었다. 향기가 맑고 깨끗한 것을 캐어서 장춘화(長春花)라고 하는데, 어찌 그 나무를 캐어서 돌아온 것에 대해서 성을 내는 것이겠는가! 그 꽃나무를 캐는 것은 아마도 푸른 수양산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몸소 고명(顧命)을 받고 돌아와 그 명(命)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러나 뱀들이 서리를 틀고 있고, 지렁이들이 엉키어있으며, 음모가 바르고 곧지 않구나.

▶ 배롱나무:쌍떡잎식물 도금양목 부처꽃과의 낙엽 소교목.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서 백일홍나무라고 한다.

 

임금의 명을 사칭하는 거짓된 조지(詔旨)들이 넘쳐나서, 기준이 되는 법이 되지 않는구나.

사람을 속이는 법망(法網)은 항상 어리석은 이들을 울게 하고, 경험많은 장로들을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게 하니, 바르고 곧은 金忠의 충성스러움과 곧음이여! 그 죄는 하늘을 꿰뚫고 구성(久成)을 꿰뚫을 것이니, 슬프도다 우리의 전왕(前王)들께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큰 언덕에 소나무와 잣나무는 푸르고 푸르건만, 아 슬프도다! 저 높은 하늘의 실음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도다. 어찌 유독 안평군의 령을 조의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한수의 물가에 강물들이 목매여 우는구나!

북쪽 웅덩이에서 흘러 돌아오지 아니하고,

산들도 슬퍼 계곡마다 울부짖는구나!

원통함을 품으니 신들도 크게 울고, 귀신들도 곡을 한다.

그 울부짖는 탄식 소리의 위엄 있고 의젓함은 백세(百世)에 쌓인 원통함을 씻어버릴 수 있을 것이로다.

마땅히 선원(璿源)의 충원(忠源)에 진헌(進獻)해야 할 것이로다.

 

4. 祭心史辛公 (東旭氏)

崧彼蓮岱. 惟公拔萃稟氣 剛明賁兼 文備氣和 不露辭直. 惟婉行要淸介 學究至懇 孝友愈篤 誠實不貳. 凡厥典型 家訓有自 漁樵善供 克養親志 却金義聲. 有厥先公 一遵遺誠 責孝課忠 苗裔繩繩. 種福由天 生平志業 磨礱寸丹 誰經秦坑 獨存峨冠. 大明遺籍 小華逸民 林泉眞樂 可以頤天. 不憖遺胡 至此極追. 惟素履壽不稱德 祗此世溷 衆啾唵唵. 聖壽加一 於公何感 士友之痛. 吾黨之瘁 一呼長聲 淚澈泉閟. 松山之文藝 孰先遺集 編摩一旬 同肩厥後. 寢疾 積月連綿 孰料拜違. 終成千古 儀型永層 難得復覩. 蔚彼松巖 大冬蒼蒼矧玆箕穎. 山高水長 英靈在玆 久而彌彰. 雞絮差晩 悶悶不遑 敢陳秉曲. 嗚呼可忘 未罄痛心 祗篤瓣香 伏惟尊靈 庶幾不昧. 尙饗.

4. 제심사신공 (동욱씨)

우뚝 솟은 저 연대(蓮岱)여! 헤아려보건대 공께서는 남들보다 뛰어나시며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밝으시어 밖으로 떨치어 드러나셨으며, 아울러 문(文)도 겸비하셨다. 기운이 온화하시어 쉽게 밖으로 드러내시지 않으시고 말씀을 하실 때는 곧고 바르셨다. 생각컨대 행동이 완곡하시며 모름지기 성품이 맑고 곧으셨다. 학문의 연구는 지극히 정성스러우셨다. 효도와 우애는 더욱 독실하시고 성실하시어 조금도 순리에 어긋나지 않으셨다. 무릇 그 규범과 가훈에 고기잡이와 나무하는 일에서부터 부모의 뜻을 잘 받들고 봉양하셨다. 그리고 재물을 물리치심에 의로운 목소리를 내셨다. 그 선공(先公)께서 한결같이 따르시는 남겨진 훈계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효도를 바라며, 충성할 것을 부과하여 후손들이 계속 이어가게 하였다.

복이 베풀어짐은 하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평생에 뜻과 일을 갈고 연마하여 일편단심으로 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일들을 경험하여 홀로 남으셨다. 그리고 높은 관직과 크고 밝은 남겨진 문적(文籍)들은 작은 영화(榮華)를 입게 되어, 세상을 피해 수목이 울창하고 샘물이 흐르는 산중에 숨어 사는 사람들도 그 영화(榮華)에 영화를 입게 되어 진실로 기뻐하며, 그것을 가지고 정신수양까지도 할 수 있었다.

하늘은 애써 남겨두려 하시지 않으시거늘. 어찌 여기에 이르러 이렇게 급하게 빼앗아 가는가! 헤아려보건대 본래 나이를 먹는 것과 덕은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인가 보다. 다만 이 세상은 어지럽고 답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읊조리며 손을 움켜지고 우는구나! 임금의 나이(聖壽)도 공보다 조금 더 많을 뿐이니, 어찌 사우(士友)들만이 느끼는 애통함이겠는가! 한번 호흡할 때마다 길게 한숨쉬며, 눈물이 없어지고 눈물샘이 다 말라버렸다. 송산 문하에서의 문예(文藝)와 선생의 저작들을 열흘 만에 함께 책임지어 연마할 수 있겠는가!

▶ 분서갱유:중국의 기록화. 진(秦)나라는 법치 노선을 견지하지만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을 고수하여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그 후에 병으로 누우셔 한 달이 되도록 계속되시니 누가 삼가 헤아려 끝내 이루심을 원망하겠는가! 선생님께서 이루신 천고의 모범은 이제 우리와 멀리 떨어졌으니 다시 보기는 어렵구나. 울창한 저 소나무의 우뚝 솟음은 추운 겨울에도 푸르고도 푸르다. 하물며 기산(箕山)과 영수(穎水)는 여전히 산이 높고 물이 장구하게 흘러가는구나.

영령(英靈)께서 여기 계심이 오래되었으니 더욱 빛나게 드러나는구나. 삶은 닭과 술에 적신 솜을 조금 늦게 올리니,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 잠시도 한가롭지 못하다. 감히 마음 속 깊은 곳을 드러내어 말해보지만 슬픔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애통하는 마음을 모두 써 버리지 못하여 단지 한조각의 향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존영(尊靈)을 거의 잊을 수 없음이라. 재물을 흠향(歆饗)하소서. 상향(尙饗)

 

5. 祭先伯省齋公文

云云舍弟遇錫 謹以菲尊 再拜哭 告于先伯省齋公.象生之靈筵 嗚呼痛哉. 賦命有數 胡爲乎有豊嗇之分 受稟剛正 率性由天 意享無疆之壽 遽今日胡至此極 體宇惟健 動容有儀 可以爲鄕黨之模楷 言忠信 行篤敬 義利明辨 亦可以爲一門之標目 孰料五旬未而逝乎. 痛湥割半 莫知此身之存否. 魂骨俱驚 亦莫知雙足之履地 抑救之不誠歟. 委諸庸醫歟 天命止斯歟 連氣同生 四十年友愛之篤 長於我而嘗以我尙多 是誠友于之道也. 天乎假之以幾年則私門之幸爲大而遽當此地 濟壽無方 痛迫何言. 舍弟陽界着亦未知幾許 踽凉下懷何以堪抑. 伏惟 尊靈嗚哀哉 尙饗.

5. 제선백성재공문

사제(舍弟) 우석(愚錫)은 삼가 보잘 것 없는 제물로 재배(再拜)하고 곡하며 선백(先伯) 성재공(省齋公) 중생의 영전에 고합니다. 아, 애통하도다. 부여받은 수명은 한정되어 있으나 어찌 많고 적음의 나누어짐이 있단 말입니까. 품성이 강직하고 올곧아 끝없는 장수를 누리리라 생각하였더니 갑자기 오늘 이런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체가 건강하고 행동거지가 위엄이 있어 고향에서 모범이 될 만하였으며, 말은 충실하고 미더우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며, 의리와 이익을 분명하게 변별하여 또한 한 집안의 표준이 될 만하였으니 누군들 오십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애통함이 심하여 이 몸의 절반이 베어져 나간 듯하니 이 몸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겠고, 혼백이 모두 놀라니 두 발이 땅을 밟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간병이 정성스럽지 못하였습니까? 아니면 용렬(庸劣)한 의원에게 맡긴 것입니까? 아니면 천명이 이것뿐입니까?

기운을 함께 받아 태어나 40년 동안 우애가 돈독하여 나보다 연장이었으나 일찍이 나에게 오히려 많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우애의 도입니다.

하늘이 목숨을 몇 년 연장해 주었다면 개인적으로는 우리 집안의 행운이 클 것인데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르러 목숨을 연장할 방법이 없으니 애통하고 절박함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제(舍弟)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음도 또한 얼마나 될지 알지 못하니 친근한 사람이 없는 외로운 회포(懷抱)를 어찌 억누를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영령이여, 아아, 애석합니다. 재물을 흠향하소서. 상향(尙饗)

 

碑(비)

1. 雪齋先生遺墟立碑通文

竊惟我文靖公雪齋先生 道學文章 允爲百世儒宗 嘗撰進金鏡錄 以明天人一理 以寶文閣學士 陪世子 入中國 陲資金紫光祿大夫 帝禮遇甚重 賜以金鞍及金帶 旣還名洞以金鞍. 自後氏麗蕃衍 居羅咸務. 其他列郡 文顯武著而以羅州爲本者 實由金鞍有洞而洞 卽文靖公所創也. 抵今口碑 惟豊行路指點 言錦城山下 桃柳舊巷 乃雪齋先生杖屢之所云爾. 然竊恐世遠口碑泯焉 故自過冬爰謀伐石 顯刻先生遺墟遺蹟而顧事巨力綿宜 非鞍洞之所獨爲也. 今地有遠 邇然慕先之誠 固無遠邇 相間願僉宗 無日地遠地邇 各其另力 表誠以竣 是功幸甚.

1. 설재선생유허입비통문

헤아려보건대 우리 선조 문정공 설재선생께서는 도학과 문장이 오래도록 백세의 으뜸이시다. 금경록(金鏡錄)을 지어 올려서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치로 이뤄짐을 밝혀 보배스러운 글이 되었다. 각학사(閣學士)로 세자를 보좌하여 중국에 들어갈 때 금자광록대부로 중국의 제(帝)를 만나는데 매우 신중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황제는 금안(金鞍)과 금대(金帶)를 내려주었다. 이윽고 다시 돌아와 자기의 동네를 금안이라고 명칭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씨족들은 매우 아름답게 번창했으며, 나주(羅州)에 머물러 있으면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셨다. 그러므로 그 밖의 여러 군들에도 문무(文武)가 밝게 드러났다. 그래서 나주를 본(本)으로 하였다. 진실로 금안에서 비롯되어 동네가 있었으니, 금안이라는 동네는 바로 문정공께서 창안하신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구비(口碑)는 헤아려 보건대 다니는 길이 잡초로 무성하다. 그러므로 그 지점이 금성산 아래 도류(桃柳)의 옛 마을로, 그곳은 바로 설재 선생께서 지팡이 집고 한가롭게 거닐던 곳이라고 말하여진다. 그러나 세상과 멀리 떨어져 구비(口碑)가 어지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난 겨울부터 의논하여 돌을 캐어 선생의 유허와 유적을 새겨서, 옛일들은 돌아보게 하여 그 거대한 세력은 면면히 이어지게 함이 마땅하다. 이것은 금안이라는 동네의 명칭만이 유독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땅은 멀고 가까움이 있다. 그러나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진실로 멀고 가까움과 서로의 간격이 없다.

▶설재서원 :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문화재자료 제93호.

 

원하건대 우리의 모든 조상들은 말씀이 없으시다. 땅이 멀고 가까움은 각각 별도의 힘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성을 나타내어 이 공(功)을 기다린다. 행심(幸甚)

 

2. 烈婦旌閭事實碑

迬在 高宗乙巳 褒而旌於宅閭之外 遞星霜累度 閭旣墟 雖在里巷 婦孺指點 言難諶者 天也. 天其必報 則閭宜不墟 而閭其墟也云 烈婦鄭氏 籍羅州 文正郞 號滄洲 諱詳 九世孫 憲女 自幼閏儀特著 年甫十七 適慶州 鄭公炯錫 事舅姑 勖夫子 善執婦道 內閨凡百 宜可良能 而隣里婦女 化之者 亦多矣. 不幸 夫家遘厲 老舅疾病 夫危欲 晝宵心禱湯劑無方 而竟以天年 終 晝哭 幾至滅性 但老舅調病 難闕其職 故忍痛强抑 僅以送終 不幾 老舅奄棄 喪葬如制 自是心矢下從 而家人不知矣. 嘗戎一女日 而父血塊 只是汝一 而汝爲男 則吾三從 有所不幸爲女 奈吾三從何 輒泣下 奄忽終祥誓自決 而先舅終祥在邇安行祥事 昧爽被衾自縊 渾券驚惶 急以高眞救劑 頃而復甦 坦然昨日 體膚 受之父母 迸命 非道也. 令家人將欲不置疑慮焉. 不敷日 安享宣祖舅忌祭 從容自決. 嗚呼 忠孝烈是天理人事 脗合爲一 而民生日用彛倫之一大綱 斯須不可無者 然 今倫彛斁綱常頹 莫此甚焉 而忠孝烈之名 百倍多於休治之世多 是靡不爲善事 愚意則未也. 休治之化 譬喩木之培根而達 而苟不被培養之木 未必能盡爲棟樑之材 幾能如榿楚者 多矣. 噫 役今人或不爲榿楚人者 有幾乎何其多也. 嗟哉 烈婦道薦有聞 天褒有典 嗟哉. 烈婦誰與之儔.

2. 열부정려사실비

지난 고종 을사(乙巳)년에 포상을 받아 택려(宅閭)의 밖에 정려(旌閭)하였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정려가 이미 폐허가 되었다. 비록 마을 안에 있지만 부녀들이 가리키며 안타까워서, ‘하늘이여, 하늘이 반드시 보답함이 있다면 정려가 폐허가 되지 않았어야 하는데 폐허가 되었구나’고 한다.

열부 정씨(鄭氏)는 본적은 나주(羅州)였다. 문과 정랑(正郞)으로 호가 창주(滄洲)인 정상(鄭詳)의 9세손 정헌(鄭憲)의 여식이었다. 어려서부터 규방의 법도를 특히 드러났었다. 나이 열일곱 즈음에 경주 정공(鄭公) 형석(炯錫)에게 시집을 갔다. 시부모를 잘 섬기고 남편을 도와 아내의 도(道)를 잘 실행하였다. 집안의 모든 일을 매우 잘해서 이웃 부인들도 교화된 사람들이 많았다. 불행히도, 집안에 역병이 닥쳐 나이든 시아버지가 병이 든데다 남편이 위태롭게 되자, 밤낮으로 마음으로 기도하고 탕약을 다려드려도 방법이 없어 남편은 마침내 일생을 마쳤다. 밤낮으로 곡을 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듯한 정도까지 이르렀다. 다만 연세 든 시아버지 병을 간호해야 하므로 그 며느리로서의 책임을 안 할 수 없어 고통을 참고 견디며 겨우 겨우 상을 마치었다. 얼마 안 있어 연세든 시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시자, 법도대로 상을 치렀다.

이로부터 마음으로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리라 맹세하였으나 집안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일찍이 딸에게 경계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너 하나만이 남았으니 네가 남자였다면 내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르겠지만 불행하게도 네가 딸이니 내가 어떻게 삼종지도를 따르겠는가.’하였고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홀연히 상을 마치고 자결하기를 맹세하니 시아버지의 상을 마칠 시기가 가까워 오자 제사 일을 그전대로 잘 마쳤다. 새벽녘에 이불을 덮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온 식솔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급히 고진구제(膏眞救劑)를 먹였더니, 얼마 있다가 깨어나서 탄식하며, ‘신체는 부모에게 받았으니, 천명을 어기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이제 집안 사람들에게 의심스러운 생각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선조의 기제사를 잘 치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아, 충효를 지극히 하는 것은 천리와 인사가 합쳐 하나가 된 것이요,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해 나가면서 지켜야 할 떳떳한 의리 중 큰 벼리이니, 잠시라도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떳떳한 윤리가 무너지고 강상이 무너짐이 지금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었다. 충효를 정성스럽게 한다는 이름이 태평성대보다 백배나 더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선한 일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나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세대의 정치적 교화는 비유하자면 나무가 뿌리를 키움에 나무를 배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반드시 모두 동량(棟樑)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의 아마도 나무가 키만 크거나 가시덤불이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 지금 사람 중에 더러 키 큰 나무나 가시덤불 정도도 되지 못하는 경우가 어찌 그리 많다는 말인가.  

아, 열부를 도에서 천거하여 내용을 아뢰 나라에서 내리는 상전이 있었으니, 열부 중 누가 이와 짝할 수 있단 말인가.

 

3. 烈婦河東鄭氏紀蹟碑文 (子兪洪植)

彛倫之大原 出於天極 天罔墜而立爲人紀之大綱 乃忠孝烈矣. 烈居于三 而以人職言 則男女雖殊 作爲天地之大經 一也. 盖夫人之職 三從爲大 故地上未有所從之地 則夫死下從 是爲烈 然地上有所從之義 則以亡夫心爲心 終身貞守之烈 是婦職中第一義諦也. 烈婦鄭氏本河東華閥士人在海女 景烈公地后 自幼及笄 操守貞淑 年十八適爲杞溪兪碩濬妻  贈參議鎭華子郡守元器后 自于歸 事舅姑 能竭其誠 不以艱寠爲窘 志體俱養 及舅姑沒 克修婦職 奉君子誠敬 不違閨儀 出於夫爲婦綱之中 鄕黨稱善. 夫遽遇奇疾 晝則藥 夜則禱 天感其誠 則庶可勿藥見效 而命各有分 天不回顧 竟至不救而逝 惜乎. 泣血痛 迫矢以下從 幡然自悟曰 亡夫血塊 依誰養育 育之則是吾所從也. 强飮粥糜 送終一節 艱辛成禮 俾無遺憾 然糊口無資 不得已 朝傭暮杵 當食則一器飯餕貯于下裳 一幅卷縮於腰帶 抵巢哺兒 寒廚炊咽三四日一出矣. 未嘗以寒暖 不屈其節操 春蠶秋績 以爲養育之資 孤及長 家道稍饒 亦知善養不食之報 苟如是爾. 孤曰洪植 娶于商山金容燮女 有孫男四五 嘗抱兒而遺訓戒語 汝曺之養而父 恒如而父之養老母 則天報不誣 必竟兪門昌大 庶可期望矣. 遽沈病數月無何 病郤顧謂洪植曰 今日吾知夫汝之誠孝根天矣. 病臥今數個朔 百方救之如一日 而少不懈 吾地上三從 或有愈於地下從一之義也耶. 誰然以未亡人自處 乃心符也 溘然而逝 其日卽己亥正月一日也. 嗚呼. 致命於崩迫 是一時難忍 含痛之烈 固非餘人所難 然若有一孤而下從 則其於三從何 婦職當如夫人然後 謂之烈 可也爾 余故贊夫人之烈行曰 日星照臨兮 烈婦之貞操昭昭. 松柏經雪兮 烈婦之貞節潔潔.

3. 열부하동정씨기적비문 (아들 유홍식)

인륜의 큰 근원은 천극(天極)에서 나왔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아 인륜의 큰 기강을 세웠으니 충효열(忠孝烈)이 이것이다. 열(烈)이 이 셋 중에 속하니 사람의 직분으로 말하자면 남녀(男女)가 비록 다르나 천지의 대경(大經)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대개 부인의 직분은 삼종이 중요한 까닭으로 이 세상에 따를 사람이 없다면 남편이 죽음에 따라 죽는 것이 열녀(烈女)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따라야할 의미가 있다면 미망인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종신토록 수절하는 정렬(貞烈)이 부인의 직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열부 정씨는 본디 하동 문벌인 선비 재해(在海)의 따님으로 경렬공(景烈公)의 후손이니, 어려서부터 결혼하기까지 정조를 지키고 정숙하였다. 나이 18에 기계(杞溪) 유석준(兪碩濬)의 아내가 되었으니 참의에 증직된 진화의 자(子)인 군수공 원기(元器)의 후손이다. 시집간 날부터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가난함 때문에 군색하지 않고 시부모의 몸과 마음을 모두 봉양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부인의 직분을 잘 닦아 남편을 정성으로 모시며, 여성의 법도를 어기지 않았으니 부위부강의 법도에서 나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남편이 갑자기 기이한 병에 걸려 낮으로 약을 쓰고 밤으로 기도하였으니 하늘이 그 정성에 감동하였다면 약을 쓰지 않더라도 병에 효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명(天命)은 각각 정해진 분수(分數)가 있어 하늘도 돌아보지 않아 마침내 구원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애석하도다.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다가 따라 죽기를 맹세하더니 문득 스스로 깨닫고 말하기를, “죽은 남편의 핏덩이 아이들은 누구에게 맡겨 기르게 할 것인가! 아이를 기르는 것이 나가 따를 바이다.”라고 하고 억지로 죽을 먹으며 남편 장례를 치름에 상례를 정성스럽게 하여 한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먹고 생활을 할 자신이 없어 부득이 아침에는 남의 집 품팔이를 하고 저녁에는 방아를 찧었는데, 먹을 때가 되면 한 그릇의 반도 먹지 않고 남은 음식을 치마에 싸서 넣어 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먹였다. 밥을 해 먹지 못하여 밥하는 연기가 3-4일에 겨우 한 번 날 뿐이었으나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그 정조를 굽히지 않았다. 봄에는 누에를 기르고 가을에는 베를 짜서 자식을 기르는 자금을 마련하였다. 자식이 자라서 가도(家道)가 점점 넉넉해졌으니, 또한 가난하면서도 시부모를 잘 봉양한 보답이 진실로 이와 같음을 알겠도다.

아들의 이름은 홍식(洪植)이니 상산 김용섭의 딸을 아내로 맞아 손자 여러 명을 두게 되었다. 일찍이 손자를 안고 훈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을 기를 때 항상 너희 애비가 너희의 늙은 어미를 봉양하듯이 한다면 하늘의 보답은 속임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유씨(兪氏) 집안이 창대해질 것임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병이 들어 몇 개월 동안 어쩔 방법이 없더니 병이 심해지자 홍식(洪植)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 나는 너의 효성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임을 알겠다. 병들이 침석에 누운 지 몇 개월이 되었으나, 온갖 방법으로 치료하고자 한 것이 하루 같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니, 내가 이 세상에서 너를 기른 것이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의리보다 나은 점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비록 그러나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한 것이 내 마음이었다.”라고 하고 갑자기 죽으니 그 날은 기해(己亥)년 정월 1일이었다.

아아,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한 때의 어려운 일이고, 애통함을 머금고 살아가는 정렬(貞烈)은 남들도 어렵게 여기는 것이 아니지만, 어린 아들 하나만 남겨두고 남편을 따라 죽는다면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다했다고 하겠는가! 부인의 직분은 마땅히 부인과 같이한 뒤에라야 열녀(烈女)라고 하는 것이 옳다. 내가 이런 까닭으로 부인의 열행(烈行)을 찬송하여 다음과 같이 짓는다.

해와 달이 밝게 비춰주니 열부의 정조(情操)처럼 빛나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추위를 견디니 열부의 정절처럼 고결하네.

 

銘(명)

 

1. 通政大夫鄭公墓碣銘

公諱炯錫 字燦淑 鄭氏 本慶州人 遠祖 智伯虎 降于慶州花山 始爲部長與五部長 同詢立赫居世爲王 以功封爲樂浪後 世遠未攻 至諱年始辨 系世歷羅至麗爵 諡勳 號史不絶書 二十世諱玄英 修文殿大提學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 諡 文獻 四世諱 知年 號老松堂 文歷典三司贈議政府左贊成 配宥德巖書院 又四世諱 承復 明宗己未 立功 贈經筵參贊官 享玉溪祠 寔 公十一世祖 曾祖 諱 賢臣 祖諱 煥龍 俱隱德不仕 考諱 一安 贈通政大夫 妣淑人 瑞興金氏 載運女. 高宗丁卯十一月日生 公於今鞍東第 性寬厚 事親孝處 兄弟友于愈篤 好善如嗜欲 不以非義 獵人之財 不幸夭逝 貽親西河洄泬難諶者 天也. 年僅三十五 辛丑十二月三日卒 墓金鞍面伏龍案算午坐 原贈通政大夫中樞院議官 配羅州鄭氏 考諱櫶古女士也. 以烈行鄕道 累遷命旌閭 育一女 以姪子永喆爲后 姑無育女 適豊山洪承烈 子輝植光植. 嗚呼 天道不報 非天理也. 天道苟有報 則月城之門 庶其復昌乎. 永喆與其姊兄洪承烈 神其狀 謁余爲銘 顧寡謏辭 不獲銘曰 系出月城三韓望族 文獻出後顯顯世德 今雖百代不斬 遺澤惟公友于湛洽且樂 貽親西河奈其罔極 恩注眷隆 三品贈職. 嗚呼. 貞烈有寡妻 天褒崇典徵來百. 嗚呼 封城六尺 崇通政淑人同幽宅. 嗚呼. 敷牲 今差晩烈魂 自此永是託.

1. 통정대부정공묘갈명

공의 휘는 형석(炯錫)이요, 자는 찬숙(燦淑)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원조(遠祖)인 지백호(智伯虎)가 경주 화산(化山)에 내려와 처음으로 부장이 되었다. 오부장(五部長)과 함께 상의하여 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세웠다. 그 공(功)으로 낙랑후(樂浪侯)로 봉해졌으나 세대가 너무 멀어 고찰할 수가 없다.

휘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분변이 가능해졌다. 신라를 거쳐 고려까지 작위를 지내니 시호와  훈호(勳號)는 역사에 전하게 않아 적지 않는다. 이십대 휘는 현영(玄英)이니, 수문전 대제학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修文殿大提學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셨다. 4대 휘는 지년(知年)이요, 호는 노송당(老松堂)으로 문력전 삼사(文歷典三司)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되었고, 덕암서원(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또한 4대 휘는 승복(承復)이니, 명종 기미년에 공을 세워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고,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으니, 실로 공의 십일대조시다. 증조의 휘는 현신(賢臣)이요, 조의 휘는 환룡(煥龍)이니 모두 은일하여 출사하지 않으셨다. 고의 휘는 일안(一安)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숙인(淑人) 서흥 김씨는 재운(載運)의 여식으로 고종 정묘(丁卯) 십일월 일에 공(公)을 금안동 집에서 낳으셨다.

성품이 관후하며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 하였으며, 형제와 우애있게 지내는데, 더욱 돈독하였다. 선을 좋아하기를 마치 자신이 즐기는 일을 찾듯이 하여 의에 맞지 않으면 남의 물건을 취하지 않으셨다. 불행하게도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니, 아버지 서하(西河)에게 심려를 끼친 것은 참으로 말로 다하기 어려우나 천명이었다. 겨우 나이 25살인 신축(辛丑) 12월 2월 3일 졸하였다. 묘는 금안면 복룡산 오좌(午座)에 위치하였다. 통정대부 중추원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으로 추증되었다. 아내인 나주 정씨는 고휘(考諱) 헌(櫶)의 고사녀(古士女)이다. 열행으로 향도에서 천거받아 정려문(旌閭門)을 받았고 딸이 하나뿐이어서 조카인 영철(永喆)을 후계자로 삼으니 여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풍산(豊山) 홍승렬에게 시집가서 휘식, 광식을 낳았다.

 

▶경주이씨 정려.

아, 천도가 보답이 없다면 천리가 아닌 것이다. 천도가 갚음이 있다면 월성(月城)의 문벌이 거의 다시 창대할 것이다. 영철과 이형(姨兄) 홍승렬이 그 상황을 적어 나를 찾아와 명(銘)을 써 주기를 부탁하였지만 덧붙일 말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부득이하여  명을 쓴다.

 

월성(月城) 가문의 세계(世系)는

삼한의 훌륭한 가문에서 나왔네

문헌이 나온 후에

세상에 훌륭한 덕이 드러났다네.

지금 백대가 지났으나

남기신 은택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공이 형제와 우애하여

집안은 화합하고 즐거웠도다.

아버지 서하(西河)에게 슬픔을 남긴 것은

어찌 그리 망극한가.

임금의 높으신 은혜를 받아

삼품(三品)에 증직되었네.

아, 정렬(貞烈)한 아내는

나라에서 훌륭한 상을 내리시어

백세토록 증험하는도다.

아, 두 분 묘지를 조성함이여.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숙인(淑人)으로 높여 한 자리에 모시니

아, 희생을 올려 정렬한 혼백을

오래도록 기리나니

이로부터 영원히 전하리로다.

 

2. 居士李公墓碣銘

公諱壽喆 字華俊 本鐵城人. 麗朝封鐵嶺君 諱璜 其遠祖. 厥後 聯世贈諡文僖 文貞 文敬 俱爲高麗名臣人. 本朝至諱原相 太宗贈諡襄憲 二傳至諱節文大司諫 端廟遜位以罔僕義南遯于錦城之草洞 五傳有諱宗善 號碧梧亭 累徵不起 寔公五世祖也. 祖諱漢馝 考諱昌成 俱隱德不仕 妣驪興閔氏考諱春成 妣濟州梁氏 生公於草洞. 第公忠孝世家 早襲庭訓 不煩師提 能知力學孝友愈篤 盖天性然也. 不事功令 隱居行篤 御家有法度 於書無不盡讀而益玩 詳於四子先聖 所格訓欽服不已. 生事葬祭 無不總合於古人規矩. 平日嘗曰 言不爲家訓 行不爲家法則烏可曰讀書人乎. 此公之槩略也. 裔昆至今 傳誦乃成日家之典型 不亦善乎. 所著遺文散迭而事行見諸州誌 卒年未攷 墓咸平葛洞面 五水山書堂洞午坐原 配竹山安氏 從公葬擧. 二男長晳 次昭 二女全州李光台 永川李亨燁孫曾以下蕃不錄 其後孫斗煥 以公事行求爲顯刻 徵余爲銘乃戚好也. 不敢辭爲之銘曰

以公孝友 兼公學問 餘力用力 慱涉多聞 隱居行篤 不知不慍 玩棠四子 欽服聖訓 仍爲家法 繩繩裔昆 天道不食 有報必蕃 居士攸藏 五水之原 錄辭不泐 永世不諼

2. 거사이공묘갈명

공(公)의 휘(諱)는 수철(壽喆)이요, 자(字)는 화준(華俊)이니, 본관(本貫)은 철성(鐵城)이다. 여조(麗朝)에 철령군(鐵領君)에 봉(封)해진 휘 황(璜)은 그의 원조(遠祖)이다. 그 뒤 대(代)를 이어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였는데, 문희(文僖)․문정(文貞)․문경(文敬)은 모두 고려(高麗)의 명신(名臣)이었다. 본조(本朝:조선)에 들어와 휘 원상은 태종(太宗)이 양헌(襄憲)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했고, 2대를 내려와 휘 절문(節文)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내다가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서 물러나자 망복(罔僕)의 절의(節義)를 지켜 남쪽으로 내려와 금성(錦城)의 초동(草洞)으로 은둔(隱遁)하였다.

5세를 내려와 휘 종선(宗善)의 호(號)는 벽오정(碧梧亭)인데, 조정(朝廷)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니, 이분이 공의 5세조이다. 조부의 휘는 한필(漢馝)이고, 선고(先考)의 휘는 창성(昌成)이니, 모두 은거(隱居)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선비(先妣)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공은 대대로 충(忠)과 효(孝)를 전한 가문(家門)에 태어나 일찍이 집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스승이 번거롭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알았고, 힘써 공부하였으며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더욱 도타웠으니, 천성(天性)이 그러한 것이라 하겠다. 공명(功名)을 일삼지 않고 은거(隱居)하여 행실(行實)을 닦았는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法度)가 있었고 읽지 않은 서적(書籍)이 없을 정도였는데, 특히 사자(四子:四書)를 상세하게 완미(玩味)하여 선성(先聖)의 격언(格言)과 훈계(訓戒)를 공경스럽게 가슴에 새겨 마지않았다.

생사(生死)와 장제(葬祭) 의식(儀式)에도 고인(古人)의 법도에 합치(合致)하지 않음이 없었고, 평소에 “말이 가훈(家訓)이 되지 못하고, 행실이 가법(家法)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글 읽은 사람이라 하겠는가?” 한 적이 있는데, 이는 공의 뜻을 개략(槪略)한 말이라 하겠다.

후손(後孫)들이 지금도 전하며 외워서 드디어 일가(一家)의 전형(典型)이 되었으니, 아름답지 않은가. 저술(著述)한 글이 흩어졌지만 사적(事蹟)이 주지(州誌:咸平邑誌)에 보이는데, 돌아가신 연대는 고증(考證)할 수가 없고, 묘(墓)는 함평(咸平) 갈동면(葛洞面) 오수산(五水山) 서당동(書堂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있다.

배위(配位)는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니 공을 따라 장례(葬禮)지냈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석(晳)이고, 차남은 소(昭)이며, 2녀는 전주(全州) 이광태(李光台)․영천(永川) 이형엽(李亨燁)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曾孫) 이하는 번거로워 적지 않는다.

그 후손 두환(斗煥)이 공의 사적(事蹟)과 행장(行狀)을 가지고 비석(碑石)을 세우려고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하니, 나는 좋은 인척(姻戚)이라 감히 사양(辭讓)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하였다.

공의 효성(孝誠)과 우애(友愛)로

공은 학문(學問)을 겸하였네.

남은 힘을 공부에 쏟아

널리 섭렵(涉獵)하여 견문(見聞)이 넓었네.

은거(隱居)하여 행실(行實)을 도탑게 하여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았네.

사서(四書)를 완색(玩索)하여

공경히 성현(聖賢)의 훈계를 가슴에 새겼네.

그대로 가법(家法)이 되어

후손들이 이어가네.

천도(天道)는 거짓을 하지 않으니

보답(報答)이 있어서 반드시 자손이 번성하리…

거사(居士)가 은거(隱居)한 곳은

오수(五水)의 언덕이라네.

글을 새겨 부서지지 않아

길이 세상에 잊혀지지 않으리…

 

3. 麟庭金公墓碣銘

公諱泳濠 字聖初 麟庭號也. 貽始夢麟以鋤號之 産時果鋤痕印背成文 公之號以是爾. 貫金海 初祖諱首露. 新羅駕洛王 至諱庾信統三國爲一 是爲興武王 享西嶽院 麗有諱琢號愼庵 友圃牧有罔僕之義 遯于羅州侍郞洞 諡文敬. 入本朝有諱千海 文科 是生諱壽延 號龍崗 判中樞 歷七閫 於是贊袞御製陣法 參選東國兵鑑 文廟以杜稷臣稱許 命本州治伏龍山下築百間屋 寵賜之. 莊光之際 絶粒 生諱好仁 號秋潭 文參判 生諱世禎 號物庵 受業于金先生佔畢齋 文參議 奄遭趙文正公禍 棄官卽歸 生諱料良 郡守 執挈于河西金先生 有酬唱詩 生諱崇希 號錦溪 兵議 生諱弘 佐郞 壬燹扈駕立節 父子錄勳 贈參判. 生諱斗仁 號壽巖 師事金愼獨齊金淸陰兩先生 丙子見羞後 誓不仕 終老廣石亭 生諱應筌 義憤極痛 仰諗 孝廟大志 咸悅愈激 生諱汝河 進士 生兌旻 號虞齋 生以燮 號復齊 生聖瞻 號魯齋 生龍湫 是聖算居士 蔭與贈可謂世不絶書 盛矣. 夫寔公高祖以上也. 魯祖景漢 號雲谷 隱居 祖致魯 遊學於宋剛齋穉圭門 考諱遠鎭 家學有由來 配利川徐氏 繼配棠岳金氏 繼配全州李氏. 甲申月日 生公於聖山里第 李氏出也. 因夢瑞初名 麟麒 氣宇卓犖 穎而悟 年未八歲 出就外傳 惟日所課 一不放過 是宜餘事 自灑掃至于進退靡不合度 塾師稱全塾珍味麒麟兒盡喫之矣. 甫成童奄貫四書 不幾年詩書易學而習之 經旨多少該洽 而有難疑處一問輒解 不惑於自錖 及其微奧探㶊先儒氏註釋 切已近思毁旣冠 質于我先師松山之門 就正而十賁九可 先師甚奇愛之 自是勢一歲二而立門盖有年矣. 家貧親老旨體甚艱俱養 而爲其體養徒費居諸 體養則優矣. 學優難矣. 嘗金海氏之大譜也. 膺校勘之任 上而始於羅 下而至于今 明昭穆 辨系世 天彛人倫未嘗集線而竝行不悖 是宜學力所及也. 不爾則亦其無敗常冒襲之蔽乎. 閹茂變後感湥風泉逍 遙吟哦之情 由性出者多矣. 嘗過太白山 有吟太白山中人 太古羞吾塵旧 汨淪徒之句 斯可以念念不越徙可認矣. 曉暮旋尋舊熅 終老於林泉 卒于正寢. 甲申十二月日也. 壽六十一 葬于校洞中嶝癸坐原 配江華崔氏 生男六女一 男昌模舜模奭模亮模漢模鴻模女柳 文化人 熙采長房出 熙駿熙璟熙瓘熙垘熙甲二房出 熙琁熙遵三房出 熙敎四房出 熙昌五房出 熙周六房出 外內曾玄二十餘 蕃不錄. 嗚呼. 公生亞先 加我十有一歲 而學問上用工公先我獲不惟十一 遞爾先逝 難堪斯文之痛 而今彦遺稿編旣我敍 其後又將竪石 其肖胤舜模甫要爲銘. 余辭日 惟公善行 自孝悌始 而其擴也. 詳審 而至於操心 行餘卽學 克念孶孶 念在厥中 而著於文 文行宜一家準測 今厥子厥孫 祗以公之學儒式爲家學 以公之行儒遵爲家行 銘諸心 服諸晉 固善矣. 又何銘諸石人之面 招其 苔滋之患也耶. 顧念 心銘石刻 雙全不朽 宜永世壽傳之妙策也. 墓道儀物 亦其非孝子終身慕效之一節也歟. 凡厥先德 羅而麗麗而今 世遠美盡載 公之學力 甚微 而難驚. 銘曰 金海氏之閥閱方 駕洛王之苗裔 中有興武王之崇武方 一統三國而威濟勝末 文敬之忠貞方 可與圃牧而義同 南遯于錦城而採採方 欽厥沒世罔僕之忠 龍崗之歷七閫方 立本朝而黼黻濈 特蒙 文廟之寵賜方 際於 莊光而節粒 嗚呼 惟公夢麟胎始 楨祥不誣 印背果是 誠極雙親 孝是天官 學以成性 神定心安 立雪松山 植山猶翠 百草風萎 一坊標幟 珍藏不沽 玉蘊櫝完 矧惟尊周 獨著儒冠 終守東崗 感極風泉 胸腑日星 遍照心天 壽止六十 公則怡然 裔昆繩承 天報綿連 葬斯吉岡 校洞之阡 墓道盛儀 慕效孰賢 石銘不朽 幾何永年

3. 인정김공묘갈명

공의 휘(諱)는 영호(泳濠)요 자는 성초(聖初)이며 인정(麟庭)은 호이다. 처음 임신 했을 때에 호미로 기린을 잡는 꿈을 꾸었는데 낳았을 때 과연 호미 자국이 등에 찍혀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공의 호가 인정(麟庭)인 것은 이 때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처음 시조는 수로(首露)인데 신라 가락왕(駕洛王)이다. 휘 유신(庾信)에 이르러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였는데 이가 흥무왕(興武王)이며, 현재 서악원(西嶽院)에서 향사한다. 고려시대 때에 휘는 탁(琢)이요 호가 신암(愼菴)인 분은 포은(圃隱), 목은(牧隱)과 사귀어 망복(罔僕)의 의리가 있었으며 나주(羅州) 시랑동(侍郞洞)에 숨어 지냈는데 시호가 문경(文敬)이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천해(千海)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분은 휘가 수연(壽延)이요 호는 용강(龍崗)인 분을 낳았는데 판중추(判中樞)를 지내고 칠곤(七閫)을 지냈다. 이때에《어제진법(御製陣法)》의 저술을 도왔고《동국병감(東國兵鑑)》을 선집(選集)하는데 참여하였다. 문종 때 사직신(社稷臣)으로 찬양 받았으며, 본주의 소재지 복룡산(伏龍山) 아래에 백간의 집을 짓도록 명하여 하사해 주시는 총애를 받았다. 장광(莊光) 때에 양식이 떨어졌다. 이분은 휘 호인(好仁)을 낳았는데 호가 추담(秋潭)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다. 이분은 휘 세정(世禎)을 낳았는데 호가 물암(勿庵)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내다가 갑자기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분은 휘 효량(孝良)을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으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에게 집지(執摯)하였으며 주고받은 시가 있다. 이분은 휘 숭희(崇希)를 낳았는데 호가 금계(錦溪)이며 병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은 휘 홍(弘)을 낳았는데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어가(御駕)를 호송하여 절의를 세웠다. 부자(父子)가 모두 공훈록에 기록되었으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이분이 휘 두인(斗仁)을 낳았는데 호가 수암(壽巖)이며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양 선생을 사사(師事)하였다. 병자년에 국치(國恥)를 당한 뒤에는 다시 벼슬을 않겠다고 맹세하고 광석정(廣石亭)에서 노년을 보냈다. 이분이 휘 응전(應荃)을 낳았는데 병자년에 의분을 못이겨 지극히 통석해 하였고 효종의 큰 뜻을 우러러 살피고는 더욱 몹시 감개하였다. 이분이 휘 여하(汝河)를 낳았는데 진사를 지냈다. 이분이 태민(兌旻)을 낳았는데 호가 우재(虞齋)이다. 이분이 이섭(以爕)을 낳았는데 호가 복재(復齋)이다. 이분이 성첨(聖瞻)을 낳았는데 호가 노재(魯齋)이다. 이분이 용추(龍湫)를 낳았는데 성산거사(聖山居士)이다. 음직(蔭職)과 증직(贈職)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성대하도다. 대체로 이것이 공의 고조 이상에 관한 것이다.

▶김해김씨 열녀문 :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332번지(향토유적 제 29호).

증조는 경한(景漢)인데 호는 운곡(雲谷)이며 은거하였다. 조부는 치로(致魯)인데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고(考)는 휘가 원진(遠鎭)인데 가학(家學)이 유래가 있었다. 배(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이고 계배(繼配)는 당악 김씨(棠岳金氏)이고 계배(繼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갑신년 월 일에 성산리(聖山里) 집에서 공을 낳았는데 이씨 소생이다. 상서로운 꿈으로 인하여 처음 이름이 인기(麟麒)이다. 기개가 탁월하고 뛰어나게 총명하여 나이 8세가 되기 전에 외부에 있는 스승을 찾아갔다. 매일의 과제를 한번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쇄소(灑掃)로부터 진퇴(進退)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서당 스승이 칭찬하기를,

“온 서당의 진미(珍味)는 기린아(麒麟兒)가 다 먹는구나.”

하였다. 겨우 소년이었을 때 문득 사서(四書)에 형통하였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시경, 서경, 역경을 배우고 익혀서 경전의 뜻에 상당히 해박하였다. 그리고 어렵거나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한번만 물어보고도 바로 이해하였으며 스스로 정리한 부분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은미(隱微)하고 심오한 부분에 있어서는 선유(先儒)들의 주석을 탐구하여 절기(切己) 근사(近思)하였다. 성년이 되어서는 우리 선사(先師) 송산(松山)의 문하에 나아가서 질정하였는데 열 개를 질정하면 아홉 개가 맞아 선사(先師)가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이로부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지나가서 문하에서 우뚝 두각을 나타낸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서 뜻과 몸을 모두 봉양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몸을 봉양하는데 세월을 보냈으므로, 몸을 봉양하는 것은 넉넉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기는 어려웠다.

일찍이 김해씨의 대보(大譜)를 교감하는 임무를 맡았다. 위로는 신라에서 시작하여 아래로는 오늘에 이르렀는데, 소(昭)와 목(穆)을 밝히고 세계(世系)를 분별하여 천이(天彛)와 인륜(人倫)이 잘못된 적이 없이 모두 행하여져 어긋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마땅히 학문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한 상도(常道)를 어그러뜨리고 전통을 함부로 하는 폐단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엄무(閹茂)가 변한 후에 자연에 대한 감응이 깊었으니 소요(逍遙)하고 읊조리는 정서가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많았다. 일찍이 태백산을 지나가다가 태백산중에 사는 사람을 두고 시를 읊은 것이 있었는데 태고수오진(太古羞吾塵) 구구골륜도(舊臼汨淪徒)라는 시이다. 이것을 보면 생각하고 생각하되 지나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만년에는 옛 정을 찾아 자연 속에서 노년을 보내다가 정침(正寢)에서 죽었는데 갑신년 12월 모일이다. 연수는 61세이며 교동(校洞) 중등(中嶝) 계좌 원(癸坐原)에 장사지냈다. 배(配)는 강화 최씨(江華崔氏)인데 6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창모(昌模), 순모(舜模), 석모(奭模), 양모(亮模), 한모(漢模), 홍모(鴻模)이고, 딸은 문화(文化) 유○○(柳○○)에게 시집갔다. 희채(熙采)는 장자 소생이고, 희준(熙駿), 희경(熙璟), 희관(熙瓘), 희복(熙垘), 희갑(熙甲)은 둘째 아들 소생이고, 희수(熙璲), 희준(熙遵)은 셋째 아들 소생이고, 희교(熙敎)는 넷째 아들 소생이고, 희창(熙昌)은 다섯째 아들 소생이고, 희주(熙周)는 여섯째 아들 소생이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이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11살이 더 많지만 학문에 힘을 써서 얻은 것은 나보다 11년만 앞선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먼저 돌아가시니 사문(斯文)에 있어서의 비통함을 감내하기 어렵다. 지금 유고(遺稿)에 내가 서문을 썼는데 그 후에 또 비를 세우려고 그 아들 순모가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김수로왕 능 : 경남 김해시 서상동. 김수로는 김해김씨의 시조이며 가락국의 시조.

 

내가 사양하기를,

“오직 공은 선행(善行)을 효제(孝悌)로부터 시작하여 넓혀가기를 제대로 하였고,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는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학문하였으며, 생각하기를 부지런히 하였고 생각이 항상 그 속에 있어서 글에 드러났으며 글과 행실이 마땅히 한 집안의 준칙이 될 만하였다. 지금 그 아들과 그 손자들이 공손히 공이 유가의 법도를 배운 것으로써 가학(家學)을 삼고, 공이 유가의 준칙을 행한 것으로써 가행(家行)을 삼아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 간직한다면 참으로 좋을 것인데, 또 어찌하여 돌에 새겨 이끼가 불어나는 근심을 초래하는가. 그러나 돌이켜 생각건대, 마음에도 새기고 돌에도 새겨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이 참으로 영원히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는 묘책이다. 묘도문(墓道文)과 의물(儀物) 또한 효자가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대저 그 선조의 덕은 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지금까지 세대가 멀어서 다 실어 기록할 수 없고 공의 학력은 매우 은미하여 묘사하기 어렵다.

명왈(銘曰)

김해씨의 벌열(閥閱)이여 가락왕(駕洛王)의 후예로다.

중간에 흥무왕(興武王)의 위대한 무업(武業)이 있었음이여

삼국을 통일하여 위엄 떨치었도다.

문경공(文敬公)의 충정(忠貞)이여

포은(圃隱), 목은(牧隱)과 의리를 같이 했도다.

남쪽으로 금성(錦城)에 숨어 나물을 캠이여

죽도록 망복(罔僕)한 충정을 흠모하노라.

용강(龍岡)이 칠곤(七閫)을 지냈음이여

본조에서 보불(黼黻)처럼 빛났도다.

특별히 문묘(文廟)에 향사됨이여

장광(莊光) 때에 양식이 떨어졌도다.

오호라 공은 기린을 태몽으로 하여 태어났으니

상서로운 조짐은 어김이 없어 등에 흔적이 과연 있었도다.

양친께 정성을 다하였으니

효성을 타고났도다.

배워서 성(性)을 이루었으니

심신이 안정되었도다.

송산(松山) 문하에서 독실하게 배웠음이여

식산(植山)이 오히려 푸르도다.

모든 풀이 바람에 시들었지만

공은 한 지방의 표식이 되었도다.

보배가 감추어져 팔리지 않으니

옥은 간직되어 있고 함은 온전하도다.

하물며 주(周)나라를 존숭하여

홀로 유관(儒冠)을 착용함에랴.

끝까지 동강(東崗)을 지켰으니

자연에 대한 감회가 지극하도다.

마음은 해와 별처럼

심천(心天)만을 비추도다.

연수가 60에 그쳤으나

공은 흡족해 하였도다.

후손이 계속 이어졌으니

하늘의 보답이 계속된 것이로다.

이 길한 언덕에 장사하였으니

교동(校洞)의 언덕이로다.

묘도문(墓道文)과 의물(儀物)이 성대하니

누가 이보다 더 사모함을 바칠 수 있을 것인가.

돌에 새긴 묘갈명은 썩지 않으니

길이 남을 것이로다.  

 

4. 咸平李公墓碣銘

公姓李系咸平 諱敏璿 字衡七 止薺號也. 始於咸豊府院君 諱彦 麗朝統領軍部 厥後勳號系世入本朝 諱兢文吏曹判書 策國勳君 封箕城 德盛惠民 世稱名臣. 諱佰源 文科正言 外職監茂長縣. 四傳諱夢龜 號松塢 可宰監正. 壬辰留鎭左水營 計倭有功. 丁酉興忠武李公 累畫方略 凡其方略中由出 乃盛功也. 竟爲敵失流中 殞身於閑山之役 於公寔九世高祖 諱翊祚 曾祖諱顯培 祖諱儒瀚 考諱廣緖 俱隱不任. 妣錦城羅氏 考諱相守 古女士閨範貞淑. 高宗癸酉正月十一日 生公於道淸里 第公凡四昆季居二而最白眉 彝性剛正 器局寬豁 自幼警悟超凡 甫學語敎之 以天字輿地字等語則語學與字學一如知長 其先考甚重愛之 七歲出就外塾課 日所受一聞輒解 未嘗旋失灑掃與進退及周旋 尺寸不差 塾師稱詡 甫弱冠不煩課程 能自解文意 每書字不要是字好而心正 故自然極楷耳. 以是筆翰如流 鄕隣長老 莫不稱嘆 質干謙山先師 益其所見 傳其所識 但辨義利 明邪正之辦 先師讓一頭地. 誠孝根天 雖析箸定省告面 少不懈體 養之節靡或專任於伯氏 凡有一美味善養之誠 油然自發 必先於庭進 後於自奉至伯仲季湛 且雍睦一家之政 若治朝焉. 於是 鄕黨推重 嘗嗜酒而不及過量 晩益節飮 戒姪子曰酒所以伐性也 愼度則可矣. 然過則舍眞入狂莫有若是 可以人而爲酒之所誇而入狂也耶. 以故姪子飮少而不及亂. 遽靑馬東匪之餘 五百年禮樂文物 漸爲讎寇所侵奪而僅存存羊爾. 繼而矯令剃髮 滿朝冠晩 一時文身前王黼黻盡 是越章甫 但冠章甫 着存平儒者身上而苟非先王法服 不敢同列於儒班鄕綱之大禁也. 時公責本校 適有鄕會議及維持之策而不知何許人等 服異色異羣聚入校 語甚悖戾曰學孔子之學 是爲儒而從尙其文武班平舊文武班之後裔 世稱儒者 尸位於校班可發一笑也. 生等同天地而生必不有舊文武班 然同立儒班而學孔子之道 則一是校儒之從也. 今日 何日獸蹄鳥跡 交侵犯禁而禁撻己圯 矧惟校綱之禁平 唇舌太甚不恭公 正色痛叱曰夫子之道正名也. 非其犯分亂常之學耳. 今其悖戾之喧豗 若達于 聖殿則恐有鳴攻之討 汝等 聖殿之罪人也. 苟不退藏 必有天罰 從速退藏責甚寬厚 彼等不敢更奮 感服自退 世敎漸降 益含久屈之冤 然惟公久執鄕綱恐 敢不犯而亂常公 可謂一線維持之功 宜存平言拒楊墨之右也. 奧校薺東西 恐有獸跡之侵 故募鄕秀材聘謙山後石二先生 作爲師導 其左右誘掖之力 公實多矣. 閹茂變極天含痛而雙親在堂 莫知所措 致鄕事於不期 祇杜門自靖筮 遯于玉山下石亭里 以吟哦自遣 勸進後人 爲己任. 丁外內艱哀與禮曲盡天性而由出 鄕里服其孝. 乙酉倭寇屛跡 西潮東溢 人獸衿裾同着 况魑魅作魁山近尤甚 搬移于文平坊竹谷里 時年八耋. 涉世不難古明哲之所難也. 以庚子正月二十八日卒 享年八十八 葬于伽倻山先塋下 壬坐之原 配陽城李氏銀九女 有女士風 先公歿墓 投珠洞乾坐原擧二男 三女男基憲 商憲女鄭遇榮 羅州人 金陽洙 光山人洪暢憙 豊山人基憲 生啓賢 啓文 啓東 啓宣 商憲 生啓洪. 外內曾玄蕃不錄. 嗚呼 躬執鄕綱四十餘年一言而黜 一言而陟 一黜一陟 微合權度之重輕耳. 是以 島夷之風飜 黑肚裏春秋之春 不作偃草而表以章之者 惟其大明法服 亦其大明法冠 矧惟 聖殿之華融融焉. 葆得曲阜春光乎. 衛 聖之功公 孰讓之一自筮遯釋尊之率 由舊章十 僅一存爲之痛惜爾. 在世日容儀瞭然若在乎雙目之中而其言也. 由乎中矣 不矢一徑及其行也. 不錯一矩而近於法步 今以公之剛正 幸以遇黼黻王庭則易地 或然而生平 心役於本校扶綱之役而然耳. 心如是爲役而學猶未及然綱常之役 是可謂君子之役孰不役爲乎哉. 其門生李君東憲鄭君福圭袖其家狀屬 余碣銘將欲爲墓道竪石之資也. 懇懇至三不獲辭 謹据而銘曰 有(惟)公生平 令名在躬. 惟公百世 令名無窮. 籍始高麗 國勳融融. 立德惠民 寵加咸豊. 文武華閥 入我益隆. 黼黻聯世 吏判有公. 矧惟箕城 策光勳功. 挺生松塢 壬燹殉節. 忠武同盟 敢論優劣. 累畫方略 密謀不泄. 死生鴻毛 其何烈烈. 德蔭攸曁 公生南服. 盛門有光 曷云所獨. 文藝夙就 儀型肅肅. 富潤以何 詩書滿腹. 立雪摳衣 松山郁郁. 先我窺獲 幾多蘊蓄. 國步漸艱 鄕綱恐縮. 生平元符 一線微復. 扶綱正論 蘊諸心幅. 一言落地 陰金畏伏. 剛毅攸激 校典式穀. 一自筮遯 舊章未淑. 嗚呼世降 如公有孰. 遯靖林泉 筮吉天山. 樂在瓢飮 百艱不艱. 頭戴春秋 大明衣冠. 勸獎後進 悅極體胖. 來求求我 塾舍不容. 敎誨譴眷 遠邇信從. 木稼遽灾 八耋亭年. 苗裔繩承兮可尙 餘慶之綿綿. 天地悠然明目在 如公遺蔭孰能肩. 崇封六尺藏風水 竹谷深深是吉阡. 墓隧軒軒銘刻石 深山春色照天然.

4. 함평이공묘갈명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관향은 함평(咸平)이며 이름은 민선(敏璿)이고 자는 형칠(衡七)이며 호는 지재(止齋)이다.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 이언(李彦)이 시조인데, 고려조(高麗朝) 때 군부(軍部)를 관장하였고 그 뒤로 공신(功臣)이 대대로 나왔다. 조선조(朝鮮朝)로 들어와 이긍문(李兢文)은 문과 출신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공신에 기록되어 기성(箕城)에 봉해졌는데, 공덕이 융성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혀 세상에서 일컫는 명신(名臣)이 되었다. 이백원(李伯源)은 문과 출신 정언(正言)으로 무장 현감(茂長 縣監)을 지냈다. 그 뒤 4대에 이르러 송오(松塢) 이몽귀(李夢龜)는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 임진년(壬辰年)에 좌수영(左水營)에서 왜적을 토벌하여 공로를 세웠고 정유년(丁酉年)에 이충무공(李忠武公)과 같이 누차 전략(戰略)을 짰고 전략을 짤 때마다 성공하였으나 결국 한산(韓山)의 전투에서 적병의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는데, 이분이 공의 9세조이다. 고조는 이익조(李翊祚)이고 증조는 이현배(李顯培)이고 할아버지는 이유한(李儒瀚)이고 아버지는 이광서(李廣緖)인데,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 금성 나씨(錦城羅氏)는 나상(羅相)의 딸인데, 고풍(古風)을 지킨 여사로서 가정의 법도가 정숙하였는데, 고종(高宗) 계유년(癸酉年) 1월 11일에 청도리(淸道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4형제 중 둘째 아들이었는데 가장 훌륭하였다. 성품이 강정(剛正)하고 기국이 관대(寬大)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겨우 말을 배울 적에 천(天) 자와 지(地) 자 등의 말을 가르치자 어학(語學)과 자학(字學)이 똑같이 진취되었으므로 그의 선고(先考)가 매우 사랑하였다. 7세에 서당(書堂)에 나가 날마다 과정에 따라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곧바로 깨달았고 돌아서서 잊은 적이 없었는가 하면 쇄소(灑掃), 진퇴(進退), 주선(周旋)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스승이 칭찬하였다.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스승이 과정을 정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글 뜻을 이해하였고 글씨를 쓸 적에 글자를 좋게 쓰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썼기 때문에 자연히 해서(楷書)를 잘 썼고 따라서 붓을 잡으면 물이 흐르듯이 써 내려갔으므로 고장의 어른들이 너나없이 감탄하였다. 우리 겸산(謙山) 선생에게 나아가 질정(質正)을 받아 보는 바가 향상되고 아는 바가 넓어졌으나 다만 의리(義理)를 분간하고 사정(邪正)을 가름하는 데 있어서는 선생이 한 발자국 양보하였다. 효성을 하늘에서 타고나 비록 분가(分家)한 뒤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렸는가 하면 봉양하는 것을 큰 형에게 일임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봉양의 정성이 저절로 우러나와 반드시 먼저 어버이에게 올린 뒤에 먹었다. 형제들과 화목하게 지내어 한 가문이 마치 잘 다스려진 조정과도 같았으므로 향리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술을 즐겨 마셨으나 지나치지 않았고 만년에는 더욱 더 절제하면서 조카에게 경계하기를 “술은 성품을 해친다. 신중히 마시면 괜찮지만 지나치면 이보다 더 본성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는 것은 없다. 사람으로서 술에 미혹되어 미치광이가 되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조카가 적게 마시어 취하지 않았다.

▶향토면 전적지.

갑오년(甲午年)에 동학란(東學亂)을 겪은 나머지 5백 년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점차로 왜적(倭賊)에게 침해를 받아 겨우 명맥만 남은 데다가 이어 체발령(剃髮令)까지 내려 온 조정의 백관(百官)이 일시에 머리를 깎아버렸고 선왕(先王)의 예복이 모두 양복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중에 다만 선비만 의관(衣冠) 차림을 하였는데, 선왕의 법복(法服)을 입지 않으면 선비의 반열에 끼지 못하도록 향교(鄕校)의 기강(紀綱)에 크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때 공이 본 고을의 향교 책임을 맡았을 때 마침 회의가 열려 향교를 유지하는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색의 옷을 입고 떼로 몰려와 매우 거친 말투로 말하기를 “공자(孔子)의 학문을 배우면 바로 선비인데 쓸데없이 문반(文班), 무반(武班)을 숭상한단 말인가? 옛날 문반, 무반의 후손들은 세상에서 일컫는 선비로서 향교에서 밥만 축내고 있으니, 일소(一笑)에 부칠 만하다. 저희들은 천지와 같이 살아가므로 옛날의 문반, 무반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도 같이 선비의 반열에 서서 공자의 도리를 배운다면 똑같은 향교의 선비들이다. 이때가 어떤 때인가? 짐승의 발굽과 새의 발자국이 번갈아 침범하여 왕궁(王宮)의 법도도 이미 붕괴되었는데 더구나 향교의 강령 금지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등 말투가 매우 불순하였다. 공이 정색(正色)하고 매우 꾸짖기를 “공자의 도리는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지, 분수를 범하고 윤리를 어지럽히는 학문이 아니다. 지금 그대들의 어긋난 말을 성전(聖殿)에다 고한다면 아마도 북을 치며 성토(聲討)하라고 할 것이다. 너희들은 성전의 죄인(罪人)이므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니, 빨리 물러가도록 하라.” 하고 너그럽게 책망하니, 그들이 감히 다시 나서지 못하고 감복되어 스스로 물러갔다.

▶ 나주향교:조선시대에는 전국의 각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학을 가르치고 성현을 제향하도록 하였다.

 

세상의 교화가 점점 낮아질수록 오래도록 굽히었다는 원한을 더욱 더 품게 되었으나 오직 공이 오래도록 향교의 기강을 잡고 있는 바람에 그들이 감히 침범하여 윤리를 어지럽히지 못하였으니, 공이 한 가닥 명맥을 유지한 그 공로야말로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학술을 변론하여 배척한 공로보다 더 낫다고 할 만하다. 향교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짐승들의 발굽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고을의 수재(秀才)들을 모집해 놓고 겸산(謙山), 후석(後石) 두 선생을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았는데, 좌우로 이끌어준 데에 실로 공의 힘이 많았다. 나라의 참변을 당하여 하늘에 사무치는 통한을 품었으나 집에 부모가 계시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향교의 일을 그만두고 옥산(玉山) 아래 석정리(石亭里)로 가 두문불출(杜門不出) 은거하면서 시를 을퍼 자신을 달래고 후진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였을 때 슬픔과 예절이 천성에서 우러나왔으므로 향리의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을유년(乙酉年)에 왜적이 자취를 감추자 서양의 물결이 밀고 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이 똑같이 옷을 입었고 더구나 근래에 들어 괴산(魁山)에서 도깨비들의 출몰이 심해지자 문평방(文平坊) 죽곡리(竹谷里)로 이주하였는데, 그때의 나이 8순이었다. 공이 세상을 어렵지 않게 살아왔으니, 옛날 명철(明哲)들도 하기 어려운 바였다. 공이 경자년(庚子年) 1월 28일에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나 가야산(伽倻山) 선영(先塋) 아래 임좌(壬坐)에 묻히었다.

부인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은구(李銀九)의 딸로서 여사의 기풍이 있었고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투주동(投珠洞) 건좌(乾坐)에 묻히었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기헌(李基憲), 이상헌(李商憲)이고 딸은 나주(羅州) 정우영(鄭遇榮), 광산(光山) 김양수(金陽洙), 풍산(豊山) 홍창희(洪暢憙)에게 시집갔다. 이기헌은 이계현(李啓賢), 이계문(李啓文), 이계동(李啓東), 이계선(李啓宣)을 낳고 이상헌은 이계홍(李啓洪)을 낳았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40여 년간 향교의 기강을 잡으면서 한 마디 말로 배척하고 한 마디 말로 포상하였는데, 한 번 배척하고 한 번 포상할 때마다 권도(權道)에 은밀히 들어맞았다. 이로 인해 섬오랑캐의 바람이 시커멓게 불어왔으나 마음속에 춘추대의(春秋大義)의 봄이 풀처럼 쓰러지지 않았는데, 그중 특별히 표출해 드러난 것은 명(明) 나라의 법복(法服)과 법관(法冠)이었다. 더구나 성전(聖殿)의 문화가 유행하여 곡부(曲阜)의 춘색이 보존되었으니, 성인(聖人)을 호위한 공을 그 누구에게 사양하겠는가. 그런데 공이 한 번 은둔(隱遁)한 뒤로 옛날의 제도에 따랐던 석전(釋奠)이 겨우 명맥만 남아 있으니, 매우 애석할 따름이다. 공이 살아있을 때 모습이 두 눈에 선하는데, 그 말씀이 중심에서 우러나와 하나도 경위를 잃지 않았고 실천에 옮겼을 경우에는 한 치도 틀리지 않아 법도에 근접하였다. 지금 공의 강직과 정대한 기풍으로 다행히 임금을 만나 보필하였더라면 혹시 처지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평생 동안 향교의 기강 부축에 마음을 쏟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마음을 이렇게 쏟느라 학문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강상(綱常)을 부축하는 일이야말로 군자(君子)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무엇이 이 일보다 낫겠는가? 공의 제자 이동헌(李東憲) 군과 정복규(鄭福圭) 군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墓碣銘)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장차 묘소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재삼 간곡하게 요청하여 사양할 수 없기에 삼가 가장을 근거로 삼아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惟公生平    오직 공은 한 평생 동안

    令名在躬    명예를 지니고 있었도다.

    惟公百世    오직 공은 백세가 되어도

    令名無窮    명예가 끝없이 전해지도다.

    籍始高麗    관향이 고려 때 시작되니

    國勳融融    나라에 공훈이 융성했도다.

    立德惠民    선덕을 백성에게 입히니

    寵加咸豊    함풍에 봉하여 총애했도다.

    文武華閥    문무 겸한 화려한 문벌이

    入我益隆    조선에서 더 융성했도다.

    黼黻聯世  대대로 고관대작(高官大爵) 나오니

    吏判有公    이판을 지낸 분이 있도다.

    矧惟箕城 더구나 기성에 봉하였으니

    策光勳功    광국의 공신에 기록했도다.

    挺生松塢    송오공이 우뚝 태어나서

    壬燹殉節 임진왜란에 순절했도다.

    忠武同盟    충무공과 동맹을 했으니

    敢論優劣    감히 우열을 논하겠는가.

    累畫方略 여러 번 전략을 기획했으나

    密謀不泄    치밀하여 누설되지 않았도다.

    死生鴻毛    사생을 털끝처럼 여겼으니

    其何烈烈    그 얼마나 열렬하였는가.

    德蔭攸曁 쌓은 음덕이 멀리 미치니

    公生南服    공이 남쪽에서 탄생했도다.

    盛門有光    성문에 찬란하게 빛나니

    曷云所獨    어찌 혼자만 누리었겠나.

    文藝夙就    문예를 일찍이 성취하니

    儀型肅肅    모습이 매우 엄숙했도다.

    富潤以何    무엇으로 윤택하게 하였는가

    詩書滿腹    시서가 뱃속에 가득 찼도다.

▶서경:보물 제906호. 김성일(金誠一)의 시호를 문충으로 개정하는 데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문서.

 

    立雪摳衣 눈속에 선생을 찾아가니

    松山郁郁    송산이 찬란히 빛났도다.

    先我窺獲    나보다 먼저 배웠으니

    幾多蘊蓄    얼마나 많이 축적했는가.

    國步漸艱    국운이 점점 어려워지자

    鄕綱恐縮    향교의 기강을 염려했도다.

    生平元符    한평생 제일로 삼은 과제는

    一線微復    한 가닥 양맥의 복구였도다.

    扶綱正論    강상을 부축하려는 정론이

    蘊諸心幅    마음속에 쌓여 있었도다.

    一言落地    한 마디 말씀이 떨어지면

    陰金畏伏    간특히 무서워 숨었도다.

    剛毅攸激    강직으로 추진해 나가니

    校典式穀    향교의 법도가 개선됐도다.

    一自筮遯    공이 한 번 은둔한 뒤로

    舊章未淑    옛날 법도가 무너졌도다.

    嗚呼世降    아 세상의 척도 낮아지니

    如公有孰    그 누가 공같이 하겠는가.

    遯靖林泉    임천을 찾아가 은둔하니

    筮吉天山    천산에 길지를 잡았도다.

    樂在瓢飮    빈한을 즐기며 살아가니

    百艱不艱    온갖 어려움도 괜찮았도다.

    頭戴春秋    춘추의 대의를 숭상하니

    大明衣冠    명나라 의관을 입었도다.

    勸獎後進 후진을 권장하여 가르치니

    悅極體胖 기꺼이 따라 성취되었도다.

    來求求我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니

    塾舍不容    서당에 수용하지 못했도다.

    敎誨譴眷    정성을 기울여 가르치니

    遠邇信從    원근에서 믿고 따랐도다.

    木稼遽灾 갑자기 철인이 죽으니

    八耋享年 나이 팔순을 누리었도다.

    苗裔繩承兮可尙  가상스럽게 후손이 계승하니

    餘慶之綿綿  남은 경사 면면히 이어지도다.

    天地悠然明目在  유유한 천지에 밝은 눈이 있으니

    如公遺蔭孰能肩  공 같은 음덕을 그 누가 견주겠나.

    崇封六尺藏風水  여섯 자 높은 봉분 풍수가 내장되니

    竹谷深深是吉阡  깊디깊은 죽곡이 바로 그게 길지라네.

    墓隧軒軒銘刻石  툭 트인 묘역에다 묘비명을 세우니

    深山春色照天然  깊은 산 춘색이 천연으로 비추었네.

 

5. 紫山書院遺墟壇享碑銘 (倂序)

綿城淹潭之輪巖 卽困齋先生醊享之所. 顯宗己未賜額紫山書院 厥後額之撤之 一再至三 盖聖朝崇典 豈亦有豊於前而嗇於後也耶.所以朋比熾而然耳. 先生諱介淸 字義伯 困齊號也. 鄭本鐵城人. 先生天資純粹 學問淵邃道學文章 允爲百世師來. 嘗讀書講硏益精 信道愈篤 隱居瀛州山中 十有餘年 四子與心經等書 硏極精微參究太極中二氣之妙 苟有瀅益潛心玩詳慮而能得. 以是顯廟致祭文略曰 潛心義理 能自得師 斯可以盡先生矣. 亦在大安學舍 與門弟子行鄕飮禮 柳公夢鼎 適莅是郡 觀習禮歎曰 三代之禮復覩於此 薦爲訓導. 先生一遵藍田氏之規約以施敎 翌年柳候遞先生 亦謝而歸. 宣祖聞其賢 累徵不就 後拜典牲主簿 疏陳治平之本 上嘉之曰 今乃得見至論 將欲召用之 先生以親老 謝卽除 谷城縣監 從其便於養也. 凡莅郡八朔 治積茂著 旣歸磨崖頌德曰 爲召爲杜 去後益思 是年秋 上疏言道德立本之說 以啓陳天聰. 旣而島夷將欲有變 上憂之問兵事 誰可任. 領議政朴公淳對曰 鄭介淸. 旣而儒學成名 然文兼干城 惟一人而已. 朴相公 素畜書籍甚多 嘗從遊水觀書. 朴公心賢之時 南方以任俠尙氣相爲高 士. 習日益頹靡 先生憂之 著東漢郞義晉宋 淸談說以警俗焉. 及己丑獄起 西人方用事 以是搆誣而鞠問 俱無實. 上意始解 於是更以排節義 啓上 乃庚寅士禍也. 盖東漢節義 固非君子之所尙 則所著節義論 是固千古不易之正論 原於程朱之義 本未有排字 而加排字誣搆成罪案惜乎 上令照律 配渭源又改配于慶源之極北. 到阿山堡 月餘先生卒 享年六十二 嗚呼 東方儒學朋論之前 好善惡惡 亶出於秉彛之攸 同奈朋黨以後 以賢嫉賢 以善惡善亦各喜方惡圓 北後學之所當湥惜者也. 可謂其猶病諸者是也歟. 先生所著 乃心學中出來而入於搜括中 得達上覽之曰 多讀古人書者也. 下縣邱而還給 顯廟特命愚得錄騰進覽後 歎美之贈執義 又賜額建院二度致祭 其文略曰 而德之粹 而學之正 是天鑑孔昭明 察當日之誣而昭雪枉寃耳. 先生同母弟寬齊公諱大淸 宣廟以學行 除參奉 厥後鄕人配宥於紫山 同享俎豆之禮. 未幾命撤 竊伏念額之賜 亦天額之撤 亦天天孰敢尤. 但其蔽天日之昭昭者多矣. 自後享壇羊禮 僅存而今將竪石圖 所以永遵勿替 不亦善乎. 其後孫某某要爲銘 顧末學 安敢安踰 但仰想久矣. 不敢固辭 略据爲銘曰 伏惟先生 道德之粹 篤信好古 稟資純修 學貫濂洛 道源洙泗 湥斥老莊 惟一不貳 太極之妙 明辯理氣 累徵不起 以道自貴 恩許便養 位不滿德 治績茂著 豊碑奚泐 累度疏陳 道德立本 聖鑑孔昭 嘉乃徵悃 節義確論 百世不誣 妙契程朱 見義益乎 孰眞孰僞 排字有無 邦朋煽禍 委官在班 玉石俱焚 哀彼崑山 枉寃至痛 極北慶源 先生平錄 心學攸存 讀古之諭 恩眷莫尊 聖朝褒崇 蒙允昭雪 建祠賜額 伯仲同醊 二度致奠 寶墨煌煌 一經毁撤 魯無靈光 設壇宥享 豈孝萬一 羊禮猶存 庶其芬苾 玆庸鐫石 貞珉不泐 香火勿替 永世矜式

5. 자산서원유허단향비명 (서문 첨부)

명성(綿城) 엄택(淹潭)의 윤암(輪巖)은 바로 곤제(困齋)선생을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현종(顯宗) 기미년(己未年:/)에 「자산서원(紫山書院)」이라 사액(賜額)했으나 그 뒤 사액이 철회(撤回)된 것은 세 번이나 되었으니, 성조(聖朝)의 융숭(隆崇)한 은전(恩典)이 어찌 또한 전에는 풍성(豊盛)했다가 뒤에 가서 인색(吝嗇)함이 있겠는가. 이는 다만 붕비(朋比:朋黨)가 치성(熾盛)해서 그랬던 것일 뿐이다.

선생의 휘(諱)는 개청(介淸)이요, 자(字)는 의백(義伯)이요, 곤제(困齊)는 호(號)이이, 본관(本貫)은 철성(鐵城)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資稟)이 순수하고 학문의 심오(深奧)하며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진실로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일찍이 책을 읽어 강구(講究)하고 연마(硏磨)함이 더욱 정밀하고 도(道)를 믿음이 한층 돈독하였다. 영주(瀛州:濟州道)의 산 속에 10여년 동안 은거하며 사자(四子:四書)와 심경(心經) 등에 관한 글을 정미(精微)한데 까지 연구했고, 태극(太極) 가운데 이기(二氣)의 오묘(奧妙)한 부분을 궁구(窮究)하여 참으로 맑고 깨끗함이 있었다. 더욱 마음을 가라앉히고 완미(玩味)하여 자세히 생각하여 이치를 터득하였다. 이로써 현묘(顯廟:顯宗)이 치제문(致祭文)에서 대략 말하기를, “의리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 터득함을 스승으로 삼았다〔潛心義理 能自得師〕” 하였으니, 이 말은 선생의 면모(面貌)를 다 했다고 하겠다.

또한 대안학사(大安學舍)에서 문하(門下)의 제자들과 함께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할 때, 유몽정(柳夢鼎)공이 마침 이 군(郡)에 부임(赴任)하여 예(禮)를 익히는 것을 보고 감탄하기를, “삼대(三代:중국 고대의 夏․殷․周 세 나라)의 예를 다시 여기에서 보겠다.” 하고, 훈도(訓導)에 천거(薦擧)하였다. 이에 선생은 한결같이 남전여씨(藍田呂氏)의 규약(規約)을 준수하여 가르침을 베풀었다. 다음 해 유후(柳候)가 체직(遞職)되자, 선생도 그만두고 돌아왔다. 선조(宣祖)가 그의 어짊을 듣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전성서(典牲署) 주부(主簿)에 배수(拜授)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治平之本〕」에 관한 상소(上疏)를 올리니, 주상(主上)께서 가상(嘉尙)하게 여겨 말하기를, “지금에야 지론(至論)을 알겠다” 하고 불러서 등용(登用)하려 했으나, 선생은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곧바로 곡성현감(谷城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니 이는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편리함을 따른 것이다. 군에 부임한지 8개월 동안 다스린 공적(功績)이 무성(茂盛)하게 드러났다. 그만두고 돌아갈 무렵 마애(磨崖)가 그 은덕(恩德)을 칭송(稱頌)하기를, “소공(召公)의 아가위나무는 떠난 뒤에 더욱 생각나리…〔爲召爲杜 去後益思〕.” 하였다.

이 해 가을에 「도덕으로 근본을 세워야 한다〔道德立本〕」는 설(說)로 상소(上疏)를 올려 천총(天聰)이 계발(啓發)하려고 하였다. 이윽고 섬 오랑캐 일본사람이 장차 변란(變亂)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상께서 근심하며 묻기를, “병사(兵事)는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하자, 영의정(領議政) 박순(朴淳)이 대답하기를, “정개청(鄭介淸)입니다.” 하였다. 얼마 지나 유학(儒學)으로 명성(名聲)이 났으나 문장과 간성(干城)을 다 갖춘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박상공(朴相公)이 본래 서적(書籍)을 매우 많이 쌓아 두었는데, 일찍이 따라 놀면서 글을 구하여 보았다. 박상공(朴相公)이 마음속으로 어질게 여겼다.

당시 남방(南方)에는 협사(俠士)에게 맡겨 기운(氣運)을 숭상(崇尙)함을 고아(高雅)하게 여겨 선비들의 풍습이 날로 더 무너지고 사치스럽게 변하자, 선생은 이를 걱정하여 동한(東漢)의 절의(節義)와 진(晉)․송(宋)의 청담(淸談)에 관한 설(說)을 지어 세속(世俗)을 경각(警覺)시켰다.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자 서인(西人)이 바야흐로 권력(權力)을 휘두르니, 이 때문에 무고(誣告)에 얽혀 국문(鞫問)을 당했으나 모두 실상(實狀)이 없자, 주상의 마음이 비로소 풀렸다. 이에 다시 「절의(節義)를 배격(排擊)한다〔排節義〕」는 계(啓)를 올렸으니, 이것이 바로 경인사화(庚寅士禍)이다.

대체로 동한(東漢)의 절의(節義)는 진실로 군자들이 숭상할 바가 아니니, 곧 절의에 관하여 저술한 논의는 참으로 영원토록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으로 정주(程朱)의 의리(義理)에 근원하여 본래 ‘排(배)’자가 없었으나, 배(排)자를 더하여 무고(誣告)로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애석(哀惜)하도다.

주상께서 법률에 따라 위원(渭源)으로 정배(定配)하고, 또 고쳐서 경원(慶源)의 극북(極北)에 이배(移配)하였다. 아산보(阿山堡)에 도착한 지 달포만에 선생이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예순 둘이었다.

아, 동방(東方) 유학(儒學)의 붕론(朋論)이 전에는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싫어함〔好善惡惡〕이 오로지 병이(秉彛:人倫) 이 같은 바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붕당(朋黨) 이후에는 어짐으로 어짐을 질투(嫉妬)하고 선(善)함으로 선을 미워하니〔以賢嫉賢 以善惡善〕, 또한 각각 모남을 기뻐하고 둥금을 싫어하는가?〔喜方惡圓〕 이는 후학(後學)이 마땅히 깊이 안타까워하는 바이니, 오히려 병통(病痛)으로 삼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선생이 지은 글은 바로 심학(心學) 가운데로부터 나와서 수괄(搜括)하는 가운데로 들어가 도달한 것이다. 주상이 보고 말하기를, “고인(古人)의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다.” 하고, 현저(縣邸)에 내려주어 돌려주도록 했다.

현묘(顯廟:현종)가 특별히 명하여 「우득록(愚得錄)」을 등사(騰寫)해서 올리니 살펴본 뒤에 탄식하고 집의(執義)에 추증(追賜)했다. 또 편액(扁額)을 내려 서원(書院)을 세우라 하고 두 차례 치제(致祭)했는데, 그 제문(祭文)에 대략 말하기를, “그대의 덕은 순수하고 그대의 학문은 바르네〔而德之粹 而學之正〕” 했으니, 이는 하늘이 살핌이 너무 밝아 당일(當日)의 무고(誣告)를 훤히 살펴서 잘못된 원한(怨恨)을 설욕(雪辱)한 것이라 하겠다.

선생의 동모제(同母弟) 관재공(寬齊公)의 휘는 대청(大淸)이니, 선묘(宣廟:선조)가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제수(除授)했다. 그 뒤 고을 사람들이 자산(紫山)에 배향(配享)하여 같이 제향(祭享)하는 예를 행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훼철(毁撤)하라는 명이 내렸으니, 가만히 생각건대, 사액(賜額)하는 것도 하늘이고 훼철하는 것도 하늘이니, 하늘을 누가 감히 탓하겠는가? 다만 밝은 하늘의 해를 가리는 소인(小人)들이 많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뒤로 제단(祭壇)에 양(羊)을 바치는 예(禮)가 겨우 보존(保存)되었는데, 지금은 장차 비석을 세워 길이 준수(遵守)하여 쇠하지 않게 할 것을 도모(圖謀)하려 하니 또한 착하지 않은가? 그 후손 아무 아무가 명을 지어달라고 하니, 하찮은 학식(學識)을 돌아보면 어찌 감히 함부로 분수를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러러 생각한지가 오래되었기에 외람(猥濫)되게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문헌에 근거하여 비명(碑銘)을 지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伏惟先生

도덕이 순수하셨네                   道德之粹

돈독하게 믿고 옛것을 좋아하여           篤信好古

자품을 순전하게 갖추었네                稟資純修

학문은 염락(濂洛)을 꿰뚫었고            學貫濂洛

도덕은 수사(洙泗)에 근원했네.       道源洙泗

깊이 노장(老莊)을 배척하여              深斥老莊

오직 전일(專一)하여 둘이 아니었네           惟一不貳

태극(太極)의 묘함을                     太極之妙

이기(理氣)로 분명하게 변론했네          明辯理氣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累徵不起

도(道)로써 스스로 귀하게 여겼네             以道自貴

은택으로 허여(許與)하여 편하게 길렀지만     恩許便養

지위가 덕(德)에 만족스럽지는 못했네             位不滿德

치적(治績)이 무성하게 드러나니          治績茂著

풍비(豊碑)가 어떻게 부서지겠는가        豊碑奚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累度疏陳

도덕(道德)으로 근본을 세우려 했네           道德立本

성상(聖上)의 살피심에 매우 밝아             聖鑑孔昭

미미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겼네               嘉乃微悃

절의(節義)를 확고하게 논했으니          節義確論

백세(百世:百代)토록 속이지 못하리           百世不誣

묘하게 정주(程朱)에 계합(契合)하여      妙契程朱

의리를 봄이 더욱 미더웠네               見義益孚

누가 참이고 누가 거짓인가               孰眞孰僞

‘排(배)’자가 있고 없음에 달렸다네             排字有無

나라에 붕당(朋黨)이 재앙을 선동(煽動)하여   邦朋煽禍

벼슬을 맡음이 반열(班列)에 있네             委官在班

옥석구분(玉石俱焚)하니              玉石俱焚

애닳다, 저 곤륜산(崑崙山)이여               哀彼崑山

잘못된 원한이 지극히 애통하여               枉寃至痛

극북(極北)의 경원(慶源)으로 정배(定配)되었네    極北慶源

선생이 평소 지은 것은                   先生平錄

심학(心學)이 있는 바이네                    心學攸存

예전의 유지(諭旨)를 읽으니              讀古之諭

은혜롭게 돌보심이 이보다 높을 수 없네       恩眷莫尊

성스러운 조정(朝廷)이 포양(褒揚)하고 높여   聖朝褒崇

윤허(允許)를 입어 환하게 설욕(雪辱)했네         蒙允昭雪

사우(祠宇:祠堂)를 세우고 편액(扁額)을 내려  建祠賜額

형과 아우가 함께 철향(醊享)되었네            伯仲同醊

두 차례 제관(祭官)을 보내 제향하니          二度致奠

보배로운 먹이 빛나네                    寶墨煌煌

한 번 훼철(毁撤)을 격으니               一經毁撤

노(魯)나라에 신령한 빛이 없네.              魯無靈光

단(壇)을 베풀어 제향하나                    設壇宥享

어찌 만에 하나라도 본받으리.                豈效萬一

양(羊)을 바치는 예는 오히려 남았으니        羊禮猶存

제향(祭享)은 유지될 것이네.                 庶其芬苾

이에 미련한 돌에 새기니                     玆庸鐫石

정결한 옥돌은 부서지지 않으리.              貞珉不泐

향화(香火:祭享)가 쇠하지 않으리니           香火勿替

길이 공경을 표하리.                         永世矜式

▶자산서원 전경 : 전남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6. 茶泉鄭公景慕碑銘 (幷序)

帝韓之末 島夷竊柄 林下學問之士落拓 不遇彷徨泉澤 以敍胸鬱隱居行 誼苦吟黍禾之詩 以儒衣儒冠 固守其義者 若茶泉鄭公亦其也. 按公諱遇益 字文一 又號正齋 羅州人 麗末諱可臣 謚文靖 以道學文章世稱 雪齋先生爲遠祖. 李朝諱軾 官兵判 諡景武 配食雪齋祠. 四傳 諱祥 號滄洲 以正郞德業文望 爲士林推重. 諱國樞 諱養浩 諱柱 號誠菴 有儒行 諱星會有孝行 高曾祖若考也. 妣 羅州吳氏 允善女无育諱台會 妣 固城李氏俊奭女 本生考妣也. 以高宗乙未生 公天資穎敏才智出倫 及上學句讀音義 不煩敎督而自解. 弱冠受業於謙山李翁之門 潛心力學 薰陶服膺尤用力於爲己之學 天人性命之奧 陰陽消長之理黙會而心得藝聞 日就及其退講所居之室 學者坌集塾舍 不能容. 夏課於松壇 講論於秋燈 隨才授敎 各充其量 成就者多. 日政苛酷 終至創氏 以義拒之 與二三同志 周觀域內名勝 北涉乎楓嶽 西遊乎開城 觸景玩賞 許多詩文載在遺稿 調格淸新 遺後固自如. 爲先師而搆講堂刊遺集 彈

其事一之誠. 前後居憂易戚 備至三年居盧 不脫巾絰 逐日上基不避風雪 生庭亦如之. 衛先事靡不殫誠 樹碣先阡心身參而訖役 對人接物 溫和之氣 充溢於面 邪正之辨 辭氣嚴肅 有不可犯之像 謹取與而愼交際 敎行於家而宗族雍睦 德乎于人而隣里悅服 雖未有殿布 所蘊其惠及人多矣. 今慈孫盡述先之誠 門人慕賢師之德 樹碣於洞門路左 以爲永遠追慕. 鄭斯文芝會 月波鄭福圭 鄭永勉 車千里過余聞喜獘廬 請顯刻之文 感其誠而不辭 系爲之銘曰

  生雪爺之世 遊謙翁之門

  嗟島夷之竊柄 吟黍禾於林樊.

  設家塾而育英 迺村秀之雲集

  若爐薰而春茁 睹群髦之成立.

  緬遺躅而興感 顧頹俗而長吁

  殫事一之其誠 書諸石而寓慕.

 

檀紀 四千三百三十年 丁丑 正月 下澣 謹竪

眞城 李源榮 謹撰

全州 崔泳煥 謹書

門生代表 : 鄭源甲 李鉉範 曺秉皓 李紀賢 鄭洚勉

嗣孫 : 甲衍, 孫 : 光勳

董役 : 鄭昺南, 鄭濟勉

 

6. 다천정공 경모비명 (병서)

구한말 왜놈들이 국권을 도적질을 하자 촌에서 학문하는 선비들이 좌절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고 천택(泉澤)에서 방황을 하며 답답한 마음을 품고 괴로워하였다. 나라가 망한 슬픔을 시(詩)로 읊고 선비의 의관(衣冠)으로 의(義)를 굳게 지킨 사람은 바로 다천(茶泉) 정공(鄭公) 한 분이셨다.

살펴보니 공(公)의 휘(諱)는 우익(遇益)이오, 자(字)는 문일(文一)이며 또 다른 호는 정재(正齋)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고려말, 휘가 가신(可臣), 호(號)가 문정공(文靖公)으로 도학문장(道學文章)이신 설재선생(雪齋先生)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신 분이셨는데 이분을 원조(遠祖)로 삼고, 조선시대 휘가 식(軾)이고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면서 시호(諡號)가 경무공(景武公)이신 분을 설재공(雪齋公)의 사당에 배향을 하였다. 사대(四代)를 전해 내려와 휘가 상(詳), 호(號)가 창주(滄洲)이며 정랑(正郞)의 벼슬을 하신 분으로 그의 덕업(德業)과 문망(文望)에 선비들은 높이 받들었다. 휘 국추(國樞), 양호(養浩), 주(柱)는 호(號)가 성암(誠菴)이니 선비의 행의(行儀)가 있고 휘 성회(星會)는 효행(孝行)이 있었으니 고조(考祖), 증조(曾祖), 조(祖), 부(父)이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오씨(吳氏)이신 윤선(允善)의 따님인데 후손이 없었다. 휘 태회(台會)와 어머니는 고성(固城) 이씨(李氏)로 준석(俊奭)의 따님인데 생가(生家)의 부모이시다.

고종(高宗) 을미(乙未)년에 공(公)을 낳으니 공은 나면서부터 영민(穎敏)하고 재주와 지혜가 남달랐으며 배움에 들어가서는 구두(句讀)와 음의(音義)는 번거로운 가르침이 없이도 스스로 깨우쳐 알았고, 스무살에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할 때 학문에 젖어들고 힘써 교화(敎化)에 응하여 나를 위한 학문에 힘쓰고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깊은 뜻과 음양소장(陰陽消長)의 이치를 묵묵히 마음속으로 터득하여 공부가 날로 진전하였다. 거기서 물러나와 거처하는 집에서 학문을 강의할 때 학생들이 모여드니 자리가 좁아 서로 몸을 들이기가 어려웠다. 여름에는 송단(松壇)에서 일과(日課)를 하고 가을에는 등불 앞에서 강론하여 각각 재주에 맞게 배울만한 정도로 가르쳐서 성공하는 자가 많았다. 왜정이 혹독하여 마침내 창씨개명(創氏改名)하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의(義)로써 거절하였다. 두 세 동지들과 함께 나라 안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풍악(楓嶽)산, 서쪽으로는 개성(開城)의 좋은 경치를 만날 때면 시문(詩文)을 지어 유고(遺稿)에 다 실었으니 격식이 맑고도 새로워 남기신 뒤에도 진실로 태연하였다. 선생을 위하여 강당을 짓고 유고를 발간하여 한결같이 섬긴 정성을 다 하였고 부모께서 돌아가시자 삼년동안 시묘(侍墓)를 하면서 두건과 상복을 벗지 않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피하지 않고 매일 성묘하였다. 생가의 부모에게도 한결같이 하였고 선조를 섬기는 일 또한 정성을 다하여 선산(先山)에 비석을 새울 때도 몸소 참여하여 일을 마쳤다. 사람이나 물건을 대할 때도 온화한 기운이 얼굴에 넘쳐흐르고 그릇되고 바른 것의 분별이나 말할 때의 기운이 엄숙하여 누구라도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으며 조심스럽게 주고받으며 삼가히 교제 하였다. 가르침을 집에서 행하니 종족(宗族)이 화목하고 덕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었으니 이웃 마을까지 기쁘게 감복하였다. 비록 마음에 쌓인 뜻은 다 펼치지 못하였지만 남에게 미친 은혜는 많았다. 지금 어여쁜 자손들이 조상을 섬기는 정성과 문인들이 어진 이를 사모하는 덕(德)을 다하여 마을입구 길 좌측에 비석을 세워 영원히 공경하고 사모하도록 하였다. 정사문(鄭斯文) 지회(芝會), 월파(月波) 정복규(鄭福圭), 정영면(鄭永勉)이 천리길을 달려 나의 허술한 집에 찾아와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내가 그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명(銘)을 지어 이르기를

설재선생(雪齋先生)의 후손으로 태어나

겸산옹(謙山翁)의 문하에서 학문을 했도다.

왜놈들이 나라를 훔친 것을 슬퍼하여

나라 망한 서러움을 임번(林樊)에서 시를 읊었도다.

집안에 서당을 세우고 영재(英才)를 기르니

마음 수재들 구름처럼 모였도다.

큰 화로 운기에 봄싹이 피어나듯

여러 선비들의 성공을 보았도다.

남긴 행적을 생각하면 느낌이 일고

퇴폐한 풍속 돌아보며 길이 탄식하네.

한결같이 섬기는 정성

비석에 새겨 공경하고 사모하네.

정축년 정월 하순

진성(眞城) 이원영(李源榮)은 삼가 찬(撰)하고,

전주(全州) 최영환(崔泳煥)은 삼가 쓰노라.

 

문생대표 : 정원갑(鄭源甲), 이현범(李鉉範), 조병호(曺秉皓),

           이기현(李紀賢), 정홍면(鄭洚勉)

사손 : 갑연(甲衍)

손 : 광훈(光勳)

동역: 정병남(鄭昺南), 정제면(鄭濟勉)

 

7. 遠宗退陶先生銘

東方有土 大成先師. 道成德立 萬邦攸知. 伏惟遠宗 小心耿耿. 朝聞以可 夕死高景.

▶이황 영정.

 

7. 원종퇴도선생 명

동방(東方)에 선비가 있으니

크게 이루신 선사(先師)라네

도(道)를 이루고 덕(德)을 세움은

온 나라가 다 아는 바라네

멀리서나마 종주(宗主)로 삼고

조심스럽게 그리워하네

아침에 높은 도덕(道德)을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으리

 

8. 奉審崧陽書院 (善竹銘)

心貫日月 氣通天地. 善竹千古 丹瀉大義. 尙今不渝 神護英備.

▶ 숭양서원: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

 

8. 봉심숭양서원 (선죽명)

마음은 해와 달을 꿰뚫고

기운은 하늘과 땅에 통하네

오랜 세월을 지낸 선죽교에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이 대의(大義)로 쏟았네

지금까지 변하지 않음은

신(神)이 위호(衛護)하여 영령(英靈)이 계심일세.

▶선죽교:고려시대에는 석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9. 心戒銘

心惟五精 主宰一身. 放游操存 誑失聖眞. 惟玆恐懼 夕惕至晨.

 

9. 심계명

마음은 오정(五精)의 하나로

온 몸을 주재(主宰)하네

놓으면 나가고 잡으면 보존되니

속이는 사람은 잃고 성인은 참되다네

오직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저녁부터 새벽까지 두려워하네

 

10. 胸佩銘

所佩云何 渾然無爲. 祗是鑑空 姸媸相隨. 物苟間隙 竊恐難治. 迺玆警省 造次不遺. 求道懇懇 焦心惕惕. 玆庸銘佩 寔爲準的.

10. 흉패명

차는 것은 무엇인가

혼연(渾然)히 함이 없다네

다만 거울이 텅 빈 것과 같아

아름답고 못남이 서로 따른다네

외물(外物)이 만일 사이에 끼어들면

다스리기 어렵다네

이에 경계하고 살펴

위급한 순간에도 잃지 말아야 하네

도(道) 구하기를 간절히 하고

마음을 태우며 두려워 해야 하네

이에 흉패명(胸佩銘)을 지으니

이를 준칙(準則)으로 삼아야 하리

 

11. 筆銘 (倂小序)

筆正心之要 雖在毫忽間可不謹乎. 每運毫必先保存是心 心正則一毫不悖而筆正 心苟不正 萬毫相悖 筆亦不正. 子程子所謂 非要是字好是也. 盖筆之性 本無不善 故其運用之妙 亦無窮而苟一毫有差 便是難爲筆矣. 人之性亦類 是學者 潛玩會萬爲一之理 則可庶幾爾.

記千古兮 由乎而管 鑑千古兮 自我心管. 安得以心管出不朽 傳賴而管.

11. 필명 (짧은 서문도 함께 지음)

붓글씨를 쓰는 것은 마음을 바로잡는 요체(要諦)이다. 비록 털끝의 하찮은 사이에 있지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번 붓을 들 때는 반드시 먼저 이런 마음을 보존(保存)해야 한다. 마음이 바르면 한 털끝도 어긋나지 않아 붓이 바르지만, 만일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모든 털끝이 서로 어긋나 붓도 바르지 않는다.

정자(程子)가 이른바 “글자를 잘 쓰려고 하는 것만이 아니다〔非要是字好〕”라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대개 붓의 성질은 본래 좋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운용(運用)하는 묘(妙)가 끝이 없지만 만일 한 털끝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곧 붓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의 성품(性稟)도 이와 같으니, 학자(學者)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만 가지가 모여 하나기 되는 이치를 완미(玩味)한다면 근사(近似)하다 할 것이다.

▶붓.

 

오랜 세월을 기록함은

네 붓대롱으로 말미암고

오랜 세월을 귀감(龜鑑)으로 삼음은

내 마음이라는 기관일세

어떻게 심관(心管)에서 섞지 않음이 나가서

불후(不朽)의 문장이 붓대롱에 의뢰하여 전해지나

 

12. 墨銘

磨以觀德 厥德惟新. 以畵名以書名 通今古有幾人.賴而潤澤之力 以卷藏萬古春.

12. 묵명

먹을 갈아 덕(德)을 보니

그 덕이 새롭네

그림으로 이름나고 글씨로 이름나

고금(古今)의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한 사람이 몇 인가

네가 윤택(潤澤)하게 하는 힘에 의뢰(依賴)하여

만고(萬古)의 봄을 거두어 감추네

▶먹.

 

13. 生壙銘

稟得有自 人孰無天. 存養不精 鮮或能全. 恐陷此窠 操執鞏堅 祗夕乾乾. 日星確然 知天修命. 孰後孰先 遠宗退陶. 未獲口傳 緖餘欲窺. 治絲織前 不誠胡獲. 縷縷心鐫 重責孰任. 力擔不肩 泰山若攀. 那庸舊拳 外求何求. 以是終年 齒髮敢棄 壙斯吉阡.

13. 생광명

품부받아 얻은 것 스스로에게 있으니

어느 사람에게 천성이 없겠는가

존양(存養)이 정밀하지 못하면

능히 보전함이 드물다네

이 굴이 막혀버릴까 두려우니  

조심스럽게 붙잡아 굳게 묶어서

다만 종일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리

해와 별이 확연하니

천명을 알아서 닦아야 하네

무엇을 뒤로하고 무엇을 앞으로 할 것인가

▶이황선생 동상.

 

멀리 퇴도(退陶)선생을 본받으나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네

실마리를 잘 살펴서

베를 짜기 전에 실을 다듬어야 하니

성실하지 못하면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하나 하나 마음에 새겨서

중책을 누구에게 맡기랴

힘껏 지고 남에게 맡기지 않으면

태산도 오를 수 있으리라

어찌 주먹을 불끈 쥐고

밖에서 무엇을 구하랴

이로써 남은 생애 보내리니

이빨과 머리칼 빠지면

여기 좋은 언덕에 광(壙)을 파리

 

14. 齒髮塘銘 (辛丑九月二十八日)

父母生我 恩重如天 不惟劬勞 一氣微連 恩洽骨髓 心性俱全 外部綱常 皮膚孰肩 不敢自毁 衰耗公然 齒髮痛惜 不忍死前 所重在何 壙斯吉阡 壽山不朽 庶可萬年 神佑永賴 輔相孰賢

14. 치발당명 (신축 9월 28일)

어버이께서 나를 낳으시니

은혜는 하늘처럼 무겁네.

수고로웠을 뿐만 아니라

한 기운으로 미묘함으로 이어 주셨네.

은혜가 골수에까지 두루 미쳐

심성이 완전함을 갖추었네.

외부의 강상(綱常) 중에

어떤 것을 이 몸에 비길 수 있으랴.

감히 상하게 하지 않아

늙고 쇠하여도 의당 굳세어야 하리.

치아와 머리카락은 매우 아까우니

죽기 전에는 차마 버릴 수 없네.

소중한 것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무덤이 바로 길한 곳일세.

수산은 썩지 않으니

만년토록 이어지리라.

신의 도움을 영원히 힘입으니

광대뼈와 비교해서 어느 것이 나은가?

 

上樑文(상량문)

 

1. 茅山祠上樑文

義可王事盡忠蔚爲一邦矜式 德必常祀有典久宜百世芬芳 卽因詢議僉同. 玆庸建祠有食 竊惟慕孝齊鄭公 河東華閥錦嶽鍾靈. 移孝事君益驗篤學之效 昫經味道曷嘗徒善之規 存養底工揭八字而作自家符契 誠正之學日三省而爲終身佩銘. 仰欽聖朝之風 孰科已所之禍. 抗章排闥伸辨靜庵之誣 扶正斥邪宜恪聖鑑之聰 封萬戶於鹿島材具干城 立奇功於釜山躬兼智勇 化及年陽治民之日 禮崇王家致奠之時 仁廟朝褒闡之㫌特蒙 聖主之恩春 竹樹院追享之擧曾有士林之正論 耳溪洪太史銘墓文 盛績奚泐. 高峯奇先生讚孝行信筆可徵 宜有後承負荷 可尙遺馨攸在. 寔遵典型踵作忠莊之克賢 不墜家聲繼有霞谷之趾美 配從享忠節院庶可欽百代之英靈 累贈至兵判書奚足慰當日之衷義. 宣恩額於雙忠祠 殉節碑于歿雲臺 迺玆聯享祖孫寔寓羹墻之慕 祇惟倂建祠宇莫若胚胎之鄕. 盖自祖先聯十世桑梓之里 爰及子姓累百年孝悌之風 迺七耋泣血之廬 寔平日講道之所 萃一門而殫力乃淇奉益釆之周詳 諧兩邑而詢謀其忠鉉淳圭之勤墾 宜與張老之善頌助擧百尺止攸樑 抛樑東 竹峰山色正融融 四時一貫春常在 濟濟趍蹌和氣中. 抛樑西 掛榜虎山可以躋 簣簣成功將欲做 眼前九仞作天梯. 抛樑南 德津演漾百川含 晝宵不息今如許 但願溯流宜泳涵. 抛樑北 屹屹熊峰聳翠色 仍作天基流水長 淸風百世宜型式. 抛樑上奎星洞照靈臺狀 包容一理渾無爲 迢遞玉京頻入望.抛樑下 山水鍾靈支大厦 多士趨奔將事勤 黃金橋上耒車馬 伏願上樑之後 泉石鍾精雲林增彩 享祀勿替恭 坤奠於儼若之靈籩豆靜嘉祗薦裸於仰欽之地.

1. 모산사 상량문

의로움은 왕의 일을 다할 수 있고, 충성스러움의 성대함은 한 나라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다.

덕은 반드시 상사(常祀)에 법도가 있어 오래도록 마땅하니 백세의 향기와 같도다.

이에 곧 의논을 하여 모두의 동의를 얻었으며, 이에 사(祀)를 지어 음식 들기를 권한다.

헤아려 효제 정공을 그리워하건대 하동의 화벌이며, 금악의 종령이시다.

효를 이행하시고 임금을 섬김은 독실한 학문의 효과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경전을 감싸 안고 도를 맛보니 어찌 한갓 선한 법도가 아니겠는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일을 여덟 자로 만들어 걸어 스스로 집안의 부절(符節)로 삼으셨다.

정성스럽고 바른 학문을 하며, 날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을 세 번 하는 것을 종신토록 패(佩)에 새기어 차고 다니며 성왕들 시대의 기풍을 우러러 흠모하였다.

누가 기묘년의 화(禍)를 헤아리겠는가!

임금에게 항소문을 올리고 급히 문을 밀어 젖혀, 힘껏 정암(靜庵)의 무고함을 변론하셨다.

그리고 정도(正道)를 잡고 간사함을 배척하여 임금의 안목을 밝게 하여 마땅히 바르게 하셨다.  

녹도(鹿島)의 만호(萬戶)를 봉지(封地)로 받아서 재주 있는 인물들을 구하여 성(城)을 구하였으며,

부산에서 특별한 공을 세우심에 몸소 지혜와 용기를 겸하셨다.

그러므로 교화가 미쳐서 백성을 크고 따뜻하게 다스리는 날들이 되게 하셨다.

예를 숭상하고 왕가(王家)를 지극히 존경하던 때에

인묘(仁廟) 조정의 넓고 큰 성주의 은혜와 보살핌을 특별히 입게 되었다.

죽수원에서 추향(追享)을 제사지내는 것은 일찍이 사림(士林)의 정론(正論)이었다.

이계(耳溪) 홍태사(洪太史)가 묘문(墓文)을 기록함에 있어서 성대한 업적을 모두 기록할 수 있겠는가!

기고봉(奇高峰)선생께서 효행을 칭찬하심에 신뢰할 만하게 쓰시니 이를 잘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후손들이 이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

숭상할만한  아름다운 명성이 있어, 이에 그 규범을 따르고 충성스럽고 엄숙함을 뒤따라 행하므로, 집안의 명성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아득한 골짜기에 아름다운 자취를 남는구나.

충절원(忠節院)을 배향(配享)하니 거의 백대의 영령을 우러러 볼 수 있음이라.

여러 번 벼슬을 추증하여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니, 어찌 당시의 곡절한 의로움을 위로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쌍충사(雙忠祠)에 은혜로운 편액을 베풀고, 몰운대(歿雲臺)에 순절비(殉節碑)를 세우셨다.

이를 옮겨 이어서 조상에게 향사지내니, 자손들도 이에 국과 담장에 조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붙어있다.

헤아려 보건대 처음으로 사우(祠宇)를 세우나, 어머니 뱃속의 옛 고향만 같지 못하다.

대개 조상으로부터 계속 10世를 이루다.

이에 자손들에게 수 백년 동안 효도와 공경의 氣風이 미침이라.

70된 노인들이 피 눈물 흘리는 이 여막은 평일에 선생님께서 강론하셨던 곳이다.

동쪽으로 들보를 던지도다. 죽봉(竹峰)의 산빛은 뒤섞여 네계절 일관되게 항상 봄이로다. 무리지어 화기(和氣)속으로 내달리도다.

서쪽으로 들보를 던지도다. 방(榜)걸린 호산(虎山)을 올라도다. 많은 성공을 거두고자 눈 앞 아홉길이나 되는 하늘 사다리를 만들도다.

남쪽으로 들보를 던지도다. 덕진(德津)의 넘실대는 온갖 시내 머금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오늘 허여하는 듯 하네. 단지 원하는 것은 거슬러 흐르는 물도 의당 머금었으면.

북쪽으로 들보를 던지도다. 우뚝한 웅봉(熊峰) 푸른 빛에 솟아있고 하늘의 바탕이 되어 흐르는 물처럼 오래되었도다. 맑은 바람을 영원토록 법도가 되기에 마땅하네.

위로 들보를 던지도다. 규성(奎星)이 밝게 영대(靈臺)의 모습을 비추고 한가지 이치 뒤섞여 무위(無爲)의 이치를 머금었네. 옥경(玉京)을 뛰어넘어 하늘을 바라보도다.

아래로 들보를 던지도다. 산수(山水)의 모인 령(靈)들은 대하(大廈)를 지탱하고 훌륭한 선비들 부지런히 쫒아 다니며 일을 하는데 황금 다리위로는 마차들이 오가네.

엎드려 원하건데 상량식(上梁式)을 한 뒤 자연의 령(靈)들 모이고 구름 긴 숲에는 채색이 더하는데 제사를 변함없이 엄약(儼若)한 령(靈)들에게 제사를 드리기를 빌며 변두(籩豆)를 정갈히하여 공경하는 이곳에 흠향하기를 바라네.

 

2. 景武公影堂上樑文

天褒必有典 益享腏食之儀 地雷微復 陽宜有線長之漸. 念厥基礎之刱始 敢無棟梁之重修. 竊伏念景武公永 慕亭先生 錦嶽鍾靈 麟山華閥 奮忠禦敵 立寄功於北藩 蹈火救危 負玉扆於行在 除授咸鏡觀察 祇非榮公 位至兵曹判書 宜不滿德 賁兼文 文兼武 誠以孝以忠 貽後寶藏甲冑 四百年遵守 恩先采地賜牌 三十里分封 下敎汝登對章 聖恩非一非二 批諭王若曰字 璽書室再至三 德被生靈 名垂竹帛 公論建祠宥食 益見士林之降崇 御賜肖像尊奉 特豪朝家之盛遇 遺澤尙不斬 乃文靖之肖孫 崇德 宜相齊與巖軒而同璧 奈玆世道寢降之日 遽爾院宇 毁撤之時 舊宇僅支 已廢俎豆之盛禮 眞幀尊閣 復覩雲仍之薦誠 靈光獨存 宜非徒名之鐵步 羊禮可愛 祇薦重陽之牲儀 竊惟先生胚胎之鄕 矧玆後昆桑梓之里 桃柳植根 春常在於舊園 公靈在堂栢可加尋於錦舘 忠義備在史牒 遺韻尙欽 兵甲若布胸心 靈臺可狀 奈何歲月滋久 竊恐棟樑幾頹 重葺是營 幸賴諄謀快吉 經費惟大 難堪 門力凋殘 懇懇竣攻之誠 木猶斷於縄鉅 念念維持義 蠹不食於戶樞 玆惟曰就月狀 祇是事半功倍 緇衣蔽造 孰敢曰壯多於前功 肯堂維新 宜可謂無廢于後觀 四壁從三面 而堊畵乃飛鳳飛龍之形 千甍分兩儀而 參差包一陰一陽之像 棟宇依舊 帲幪如新 推往想來 只切羹墻之寓慕 以今咸古 特書崇禎之紀年 堂貌翼然 恭惟關千劫而不泐 公像儼若 竊念屢百世而永傳 因興鼓咎敲之勸聲 助擧兒郞之脩樑 抛樑 東 瑞石長春 萬物豊 山斗遙膽 心興會 晴朝日出 玩天功 抛樑 西 錦嶽梯天 一色齋 以今尙絧 日章章 勸進後人路不迷 南亭古太平 春常含山色悠然 山色悠然宜舊步仰欽文靖遣風淡 北石柱千年 名不泐 如祠蹟 銘於斯行路 悠然宜矜式 上奎璧星光 頻入望 那時復見吊吾東一念 在玆難可恩 下源泉湧湧 錦溪瀉 最新淸 熟醴齊 宜永享千秋 可奠斝 伏願上樑浚 克趾先美 踵作忠賢 籩豆靜嘉 孝不匱於百載 栥盛豊潔 祀不替於萬霜.

2. 경무공영당상량문

하늘의 넓고 큼에도 반드시 법칙이 있으므로 더욱 철식(腏食)에는 법도를 가지고 제사를 올려야한다. 주역(周易)에서 땅과 우레로 이루어진 지뢰복(地雷復) 괘(卦)는 초효(初爻)만이 양효(陽爻)로서 작은 양(陽)이지만 마땅히 실처럼 가늘고 길게 점점 자라남이 있다.

영당(影堂)의 기초를 처음 만들기 시작할 때를 생각해보면 감히 동량(棟梁)을 다시 수리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만히 엎드려 경무공(景武公)을 생각하면서 정자(亭子)와 선생님을 영원히 흠모해 보건대, 선생님께서는 금악(錦嶽)의 종령(鐘靈)이시며, 린산(麟山)의 화벌(華閥)과 같으신 분이시다.

충성심을 떨쳐 드러내어 적들을 막으시어 북번(北藩)에서 특별한 공을 세우셨으며, 위험과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시고 불로 뛰어들어 행재소(行在所)에서 임금의 옷을 등에 짊어지고 위급함을 구하시었다. 그러므로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除授)받으셨으나, 단지 그것만으로 경무공의 공을 영광되게 하지 못한다고 하여, 관직을 병조판서(兵曹 判書)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나, 마땅히 경무공의 공덕(功德)을 채울 만 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경무공께서는 타고난 본 바탕에 문(文)을 겸비하시었고, 문과 무(武)를 겸비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정성스러움을 가지고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효도를 바탕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한 것이다.

후손에게 물려주신 보배와 갑주(甲冑)는 400년 동안 따르고 지키어 왔으며, 은혜로운 선조가 물려주신 채지(采地)와 내려주신 위패(位牌)는 30리에 나누어 봉작(封作)하게 하였다.

임금께서 교지(敎旨)를 내리시어 경무공을 조정에 올라오게 하여 어떠한 문장(文章)에 대해서 마주하여 대답하게 하는 성스러운 은혜는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경무공의 상소문에 임금께서 답하는 글에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글자의 임금의 조서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러므로 경무공의 덕(德)은 모든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공의 명성은 역사책에 오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경무공의 사당(祠堂)을 짓고, 유식(侑食)할 것을 논의하므로, 더욱 사림(士林)의 높이 숭상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임금께서도 초상(肖像)을 하사하시어 높이 받드시므로, 특히 국가의 성대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남은 혜택은 오히려 끊어지지 않고, 문정공(文靖公)의 먼 후손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며, 경무공의 높은 덕은 마땅히 높으신 헌원(軒猿)황제의 덕과 서로 같으시며, 그 덕은 상서로운 옥과 같으시다.

그러나 어찌 이에 세상의 도가 그치고 떨어지는 날이 되었으며,  또한 갑자기 이와 같이 사당(祠堂)이 허물어지고 철거되어야만 하는 때가 되었는가!

옛 사당으로 겨우 지탱하고 제기(祭器)를 갖추어 행하던 성대한 예는 이미 무너져 버렸으므로, 경무공의 초상 족자와 사당을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은 후손들이 올리는 정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경무공의 영(靈)의 빛이 유독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마땅히 다만 公의 꿋꿋하셨던 행적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서로운 예로 공을 그리워하니, 공경히 중양(重陽) 날의 좋은 제물을 바침니다.

가만히 선생님의 고향을 헤아려 보건대, 이는 후손들의 고향이시다. 그곳에 복숭아나무 버드나무가 뿌리를 두므로, 봄에 항상 옛 동산에서 복숭아나무 버드나무가 있게 된다. 공의 영(靈)이 사당과 측백나무에 깃들어있으므로, 공의 영을 아름다운 그 사당에서 찾을 수 있음이라.

공의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이 사첩(史牒)에 갖추어 있으므로, 공의 남겨진 운치를 여전히 흠모할 수 있으며, 병갑(兵甲)을 만약 가슴속에 펼쳐 본다면, 공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음이라.

어찌 세월이 더욱 오래되었는가!

가만히 동량(棟樑)이 거의 무너지게 됨이 두려웠다. 그러나 거듭 수리함을 이제 시행함에 있어서 다행히도 논의가 서로 일치하는 길(吉)함이 있게 되었다.

사당을 다시 수리하는데 사용되는 돈이 매우 많이 필요하였지만, 돈을 준비하는 것이 힘들고 가문의 힘도 빈궁하고 모자랐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서 사당을 짓는 정성스러움에 나무가 오히려 먹줄과 곡척 만으로도 잘라졌다. 그리고 공의 덕(德)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유지하려는 뜻은 좀벌레조차 문지도리를 갉아먹지 않게 되었다.

이에 오직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으나, 단지 일은 절반이었으나, 그 공(功)은 두 배가 됨이라.

검은 옷감으로 새로 만든 사당을 가리우므로, 누가 감히 장차 앞선 공(功)보다 많다고 하겠는가!

집을 새롭게 수리하여 고쳤으므로, 마땅히 뒤에 후손들이 볼지라도 조금도 폐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면의 벽은 삼면이 흰 흙으로 희게 칠하여져 있고, 그 위에 하늘을 날고 있는 봉황새와 용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많은 기와들이 두 갈래의 형식으로 나누어져서 하나는 음(陰)이고 하나는 양(陽)이 되는 형상을 지닌 채 가지런하게 하고 있다.

사당의 마룻대와 추녀는 비록 옛 것을 바탕으로 버티고 있으나, 이를 다시 거듭 수리하여 감싸고 둘러싸서 마치 새로운 사당과 같게 되었다.

지난 일을 헤아려보고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생각해 보건대, 국과 담장에 깃들어 있는 공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도 옛 일들을 느낄 수 있도록 특별히 높고 상서로운 연대를 씀이라.

사당의 모양은 마치 새의 날개의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공손히 헤아려 보건대, 많은 재앙에 관여될 지라도 조금도 쪼개 뜨릴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공의 모습이 위엄이 있으시므로,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수백년 동안 영원히 공의 덕을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고(鼛鼓)로 소리를 내게 하여 일을 흥겹게 하여, 아랑(兒郞)이 대들보를 만드는데 돕도록 한다.

동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동쪽에는 상서로운 바위가 있고, 긴 봄에 만물이 풍성하며, 산 가파른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깨닫고 이해하게 되니, 맑은 아침에 해가 나올 때 하늘의 공덕(功德)을 즐기게 됨이라.

서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서쪽에는 금악(錦嶽)으로 하늘에 오를 수 있고, 하나의 색으로 가지런하다. 지금에도 오히려 서로 잇닿아 있어 날마다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러므로 앞으로 후손들이 길을 걸어가는데 미혹되지 않기를 바라노라.

남(南) 정자가 오래되고 태평(太平)하며, 봄에는 더구나 산색(山色)이 아득하게 멀고 오래됨을 품고 있다. 마땅히 옛 자취에서 문정공(文靖公)의 남겨진 풍취(風趣)가 맑고 깨끗함을 우러러 흠모함이라.

북(北) 돌기둥에는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이름도 새겨지지 않았으나. 이와 같이 사당의 자취를 이 길에 새겨놓았다. 그래서 자연히 후손들이 존중하여 본보기로 삼음이 마땅하다.

위 규벽(奎璧)의 별 빛이 빛나므로 자주 들어가 바라보게 되어, 이 때에 다시 우리 선생님을 뵙고 조문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선생님을 생각하므로 선생님을 잊기 어려움이 있게 됨이라.

아래 물의 원천(源泉)에서 물이 솟아올라 금계(錦溪)에 흘러간다. 가장 새롭고 맑은 물로 단술을 빚어서, 마땅히 오랫동안 술잔을 올려 제사지낼 수 있음이라.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上樑) 후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행적의 발자취를 따르고, 선생님의 충성스러움과 어짐을 따라서 행하며, 제물을 정결히 하고 깨끗이 하여 올리니, 효행은 백년에 이르도록 무너짐이 없도록 하며, 곡식을 풍성히 하고 정결하게 하여 올리니, 제사가 만년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3. 天君靈臺重修上樑文

衆理具於微妙 實際允矣 綱常棟樑 太極建於大化 源頭欽哉 倫彛基礎 天地本吾一軆推極十二 會於陽關 日星與我同明 券臧萬八春於廣厦 理賦成像像性 氣化有形臟心 誠關之宏敞方 未知萬千間之重疊 惺屋之洞豁也 均是億兆民之率由 恁他底妙秉室堂 實着其地 元不是空中樓閣 有得乎天 養白於惟一之中 守玄於太虛之上 卓彼先覺 安其宅 而內斬靜專 奈此後人失其所 而外馳躁安 愼勿頃刻放置 遽見一主宰之沈荒 苟以髭髮有差 便是全屋子之汚穢 寔遵伐柯之則 庸透覺關之誠 橫竪不可以混一 途過不吝改 軆用元來底無二致 乃其復初 局量宏深 潛玩天經地之繩墨 規模廣大 詳察日往月來之準矩 競競乎入德之門 念念底存誠之室 尺尋不枉 個是諸動靜無違 錙銖未差 自然乎表裏修正 門庭之除穢三復 成湯沐浴之盤銘 旁橽之滌塵 新着魯點風咏之春服 孰知閑存之力 都是克復之功 灌洙泗源 流鑿池 於防意城下 訪廉溪花柳 玩春於建陽門前 光風淸嘯丹府中貯 見萬物之方亨 霽月明透仁宅上 想認百會之攸存 戒汝勿錙涅於物私 愼亦無岐貳於正路 傭韶儀遠矣 軒淸舜之乾坤 康衢謠聞乎門 湥堯之日月 聊頌木德之化 特用上載之樑 東 陽線添長一理 同萬像包容無物我 粹然天地不論功 西 錬孰精金 妙化齊二澤 惟湥臨履底 巖師忽在若提撕 南 陽德方成 薰氣舍陰孽也 生宜戒愼不聞不睹 是難堪 北 萬物歸臧 皆有則 雷底千門 從此開未知丹府幾千幅 上 神明主宰俱無恙 應物無刑渾有 爲尺寸難栽幾 何量 下 善地種仁 宜有暇事 物來時莫渝 眞具象應萬總微化 祗願 上樑後 萬善田宅 百邪窒門惟日 而積眞 人慾凈盡 隨處而充天理流行.

3. 천군영대중수상량문

모든 이치는 은미하고 신묘한 실제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강상(綱常)의 동량(棟樑)은 진실됨이라. 태극은 큰 변화의 근본에서 세워지므로, 이륜(彛倫)의 기초를 흠모함이라.

천지는 본래 나와 한 몸이 된다. 그러므로 12지를 극진히 미뤄본다면 양관(陽關)에서 만나게 되며, 해와 달은 나와 함께 밝으므로, 큰 집 아래서 만팔천(萬八千)의 봄을 거두어 감추게 된다.

이치가 만물에 부여되어 형상을 이루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다.

진실로 천지의 이치가 관여함이 크고 넓기 때문에 그 이치가 매우 많이 쌓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지의 집이 깊고 넓음을 깨닫고 많은 백성들이 천지의 이치를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 신묘함이 속에 깃들어 있는 집은 실제로 땅에 붙어 있는 것으로, 결코 공중의 세워져 있는 누각이 아니며, 이것은 하늘로부터 얻음이 있는 것이다.

오직 마음이 한결같음에서 밝음을 기르고, 크게 텅빈 것 위에서 현묘함을 지키게 된다.

탁월하신 저 선각자들은 집안을 편안히 하시고, 안에서는 고요하시고 전일하게 지내셨다. 그러므로 어찌 후세 사람들이 그 집터를 상실하고 밖으로 달려나가 조급하고 헛되게 지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삼가하여 잠시도 마음을 방치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만약 갑자기 한번 주재신(主宰神)의 깊고 넓음을 보게 된다면 진실로 콧수염과 머리털이 어긋나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이것은 바로 온 가문을 더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벌가지칙(伐柯之則)을 따르고, 천지의 이치를 두루 맑게 통하여 깨달아 세상 일에 관여함에 정성스럽게 해야 할 것이다.

가로, 세로는 합쳐져서 하나로 될 수 없고, 길을 가다가 잘못 가게 되면 그것을 고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체(體)와 용(用)은 본래 두 가지로 나누어져 이르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처음의 본래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국량(局量)이 크고 깊으므로 마음 속으로 깊이 잠기어 하늘의 경도와 땅의 위도의 법칙을 완미해야 하며, 또한 규모가 넓고 크므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법칙을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서로 다투며, 성(誠)을 보존하는 집에서 끊임없이 생각하여라.

자[尺]를 가지고 굽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은 움직이고 고요한 가운데에서 결코 어긋남이 없을 것이며,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안과 밖이 바르기 때문이다.

문정(門庭)에서 먼지를 닦아내는 것을 세 번 하는 것은 성탕(成湯)임금께서 목욕할 때 목욕 그릇에 새겨 놓으신 것과 같이 자기 몸과 마음을 항상 가지런히 하고 깨끗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곁방의 물을 버리는 곳에서 또한 먼지를 제거하고, 일찍 살펴 놓았던 풍영(風咏)의 봄옷을 새롭게 갈아입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 한가롭게 지내고 있을 때의 힘을 알겠는가! 모두 자기 자신을 극복한 공(功)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수(灌水)와 수수(洙水), 사수(泗水)의 근원은 농지(鏧池)에 흘러가고, 사욕(私慾)이 싹트는 것을 막기 위해 성(城) 아래 맑은 시냇물과 꽃피고 버드나무 있는 곳을 찾아 건양(建陽)의 문 앞에서 봄을 즐기도다.

광풍(光風)이 맑게 불어 단부(丹府) 가운데 쌓이므로, 만물이 크게 형통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밝은 달이 어진 집 위에서 밝고 투명하게 비추니, 마치 머리의 백회(百會)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게 한다.

너희들은 물욕(物慾)과 사욕(私慾)에 검게 물들지 않기를 경계하노라. 그리고 또한 바른 길에서 벗어나 두 갈래의 길로 가지 않도록 신중히 하여라.

순임금의 소의(韶儀)를 퉁소로 연주하는 소리가 지금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높고 맑으신 순임금은 하늘과 땅이 되시고, 강구요(康衢謠)의 노래가 문에서 들려오니, 깊으신 요임금은 해와 달이 되심이여.

조화롭게 목덕(木德)의 변화를 기리는 노래를 특히 동량(棟樑)의 위에 실어 올려보세.

동(東) 따뜻함이 점점 커지고, 하나의 이치가 같아서 만물의 모습을 포용한다. 그러므로 만물과 나는 서로 간격이 없이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천지는 공(功)을 논하지 않는다.

서(西) 단련하고 익숙히 하며, 정밀히 하고 견고하게 하여 신묘한 변화가 두 연못에 가지런하다. 그러므로 깊은 곳에 임하여 있더라도 낮은 곳을 밟고 있는 것과 같으시다. 위엄있으신 선생님께서 홀연히 있으셔서 이와 같이 우리 후진들을 가르쳐 인도하시는 것 같으시다.

남(南) 밝은 양덕(陽德)이 이제 막 이루어졌으나, 훈훈한 기운은 가리워진 재앙을 머금고 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마땅히 다른 사람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때에 어려움을 경계하고 삼가며 행동해야 한다.

북(北) 만물이 돌아가서 감추는 것은 모두 법칙이 있다. 우레 아래 천개의 문은 여기에서부터 열리지만 단부(丹府)가운데에는 몇 천 폭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위 신명(神明)스러운 주재신(主宰神)은 모두 근심이 없으시고, 만물을 대함에도 형체가 없으시고, 혼일하게 되어있으시므로 신의 모습을 길이로 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어찌 신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래 기름지고 좋은 땅에 인(仁)의 씨앗을 심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한가할 일이 있겠는가! 모든 만물이 도래하는 때를 변하게 할 수 없으나, 진실로 모든 사람들은 만물이 모두 오묘한 변화를 응용하여 활용하게 된다.

공경히 원하건대 상량이 끝난 후에 모든 선(善)이 이 집으로부터 비롯되고, 온 나라의 집과 문에 오직 날마다 참된 것이 쌓이며, 사람의 욕심은 완전히 없어지고, 가는 곳마다 천리(天理)의 변화의 이치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4. 咸平李氏永受齋上樑文

人生覆載 而居乎萬物之上 靡懈念先之心 道始孝悌而 原於百行之中 聿遂報本之義 禮順乎天理之攸正 宜奉祀也 惟豊誠 出乎人性之所同 祗繼事者爲善 厥惟先隴陟降之地 可無後孫齊宿之方 竊惟咸平李氏 詩禮古家 簪纓盛閥 奧自草洞分派之後 聯十世 業文尙儒迺玆 斗南愛居 以來萃一門 睦親惇族 旣有圖纖經籍等閒 車業之程 獨葆 好水佳山 不換公候之樂 睠彼介耶盤旋萃氣 允爲高曾木履攸藏 是天定之吉阡 自然風水融結 宜地秘之名壙妙 若星宿照臨 明薦之誠追咸於 繁蘋薄採之日瞻掃之禮 益勤於而露霑濡之時 愛謀丙舍始營 第念辛楚擔役 奠基礎於纂放之際 幾不日而經成 起棟宇於殫誠之中 殆未而而營度 地用斗南而定位獨葆 槿區烟霞歲惟戊子而建陽 特書檀紀曆數 良匹畢集衆功咸勤 素行乎敦本 尙儉式遵析薪之良典 苟完矣 去奢中度 不匱肯堂之遣謨 宜無物不誠 形諸外而輪奐 惟峻宇非義 戒勿過而適中 像四維而棟楹舖排 從兩儀而門戶開闔 扁以永受想認獲福無疆之基 懿致如存貯 見積慶錫類之蔭 階戺房列儼升降 而越蹌莞簟攸躋 適寢處而定靜 秩秩馬有序 僾僾然如聞 足以徵信於百禩 祗欽纂道之顯刻 今夫受蔭於四世 可尙光第之誠秉 將事惟勤 祗薦奠獻禮於每歲 英靈儼若 庶歆芬苾儀於千秋 兒卽抛樑 張老欽頌 東 虎山春色正融融 晴總坐決四時 景雲物生新變態中 西 齊飛山色近簷齊勤工衆後 今將訖燕賀其音下上低 南 月出山明瑞氣舍聊把澄光心 與會黃昏 漸却不同參 北錦城不燮千眷色 乃知君子德 惟新尙聚不徒文與節 上 槿區日月遙相望 天神微佑此山 心淸標獨特宜可尙 下 淸泉甘冽 宜湧瀉 祗惟洞酌薦誠 宜濟濟雲昆將事者 祗願 上樑後 天福鼎臻 地靈咸護 遵豆庶品 戒數百裔昆 而誠存享祀 節文臧千萬間架而實畜.

4. 함평이씨영수재상량문

사람이 천지에 태어나 만물의 우두머리로 살면서,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도(道)는 효(孝)와 제(悌)에서 시작되고, 그 효와 제는 모든 행동 가운데 근본이 되어서, 사람의 근본을 보답하는 뜻을 따르게 된다.

예(禮)는 천리(天理)의 올바른 것을 따르는 것이므로, 마땅히 선조에게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헤아려 보건대 풍부한 정성은 인성(人性)의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며, 공경히 선조에게 제사를 받드는 일을 잘 이어하는 것이 선(善)이다.

조상의 묘소를 올라가고 내려가는 곳을 헤아려 보건대 후손들이 제사지내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방법이 없겠는가!

가만히 헤아려 보건대 함평 이씨의 시례(詩禮)와 고가(古家)는 현귀하고 성대한 문벌의 집안이었다.

그리고 그윽히 초동(草洞)으로부터 분파한 후에 10세를 이어서 문(文)을 업(業)으로 삼고 유학의 도를 숭상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 하나의 문하에서 모이게 하여 친족(親族)들을 화목하고 돈독하게 하였다.  

일찍이 도참(圖讖)의 책들이 있었으나, 이러한 책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으며, 수레를 만들고 끄는 일들을 유독 귀중하게 여기시었다. 그리고 물을 좋아하시고 산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공후(公侯)의 즐거움과도 바꾸지 않으셨다.

굳세고 행동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우시며, 높고 큰 기운은 진실로 고조와 증조의 옷과 신발에 깃들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 하늘이 정해놓은 길(吉)한 길은 자연의 바람과 물이 융합하여 맺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땅의 오묘한 이름은 넓고 신묘하여 마치 성숙(星宿)이 밝게 비추어 임하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을 맑게 하여 제사를 올리는 정성에는 네가래와 다북떡쑥의 제수품을 생각하게 하였으나, 제사에 쓰일 제수품을 조금밖에 못 캐는 날에 사당에 가서 살피고 청소하는 예(禮)는 비와 이슬로 옷을 적시는 가운데 더욱 부지런히 해야만 했다.

이에 논의하여 병사(丙舍)를 비로서 지으려 할 때, 차례로 괴롭고 가슴 아프도록 맡아서 해야 할 역할들을 염두해 두었다.

기초를 크게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기초를 세우는데, 조상을 흠모하고 본받으려는 마음으로 거의 하루도 걸리지 않아서 이루어 내었고. 마룻대와 추녀를 세움에는 온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거의 이틀이 걸리지 않고 시행하여 전체의 모습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땅의 자리는 두남(斗南)성이 있는 남쪽 방향으로 하여 위치를 정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산수의 경치를 귀중하게 여기었다. 해로는 무자년(戊子年)이며 건양(建陽)으로 특별히 단기역수(檀紀曆數)를 썼다.

그리고 좋은 배필들이 모두 모였으므로, 모든 공(功)들은 모두의 부지런히 힘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소의 행동에 있어서 근본을 돈독히 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며, 장작을 패는 사람들의 좋은 모범조차도 본받고 따랐으니 진실로 완전하다고 할 만하다.

또한 사치스러움을 물리치고 법도에 맞게 행동하여 기꺼이 집안에 남아있는 계책들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땅히 어떠한 사물에 대함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형체의 외부는 크고 성대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헤아려 보건대 우뚝 솟은 사당은 의로움이 아니면 지나치게 나아가지 말 것이며, 중도(中道)로 나아갈 것을 경계하노라.

네 모퉁이를 본뜨고 나서 마룻대와 기둥을 배치하고, 두 갈래의 형식으로 문과 외짝문를 만들어 열고 닫게 하였다.

편액을 영수(永受)라고 정하였으니, 복을 얻음이 끊임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하며, 정성이 지극하여 만약 쌓이게 된다면 경사로운 일이 쌓이고 선(善)을 여러 사람에게 베푸는 음사(蔭仕)를 입게 될 것이다.

계단과 문지방과 방의 배열됨이 아주 엄격함이 있기 때문에 그 계단과 방을 오르고 내림에 있어서는 걸음걸이가 절도가 있게 되고, 대나무로 만든 자리를 깔아 그 위에 오르게 하여 잠자는 방에 들어갈 때는 고요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질서 정연함이 있어 순서가 있게 되며, 어렴풋하게 선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도다. 그러므로 충분히 모든 제사에 믿음을 드러낼 수 있어, 공경히 선조를 흠모하여 그것을 비문에 밝게 드러내어 새겨 말하였다.

지금 사세(四世)에 이르도록 음사(蔭仕)를 받았으므로, 형제의 진실한 마음을 숭상할 수 있다.

따라서 장차 일을 함에 있어서 오직 근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경히 매년 술잔을 올리고 예(禮)를 갖춰 받들어 모시니, 영령(英靈)께서는 위엄이 있는 듯 하시어 오랜 세월동안 향기로운 제물로 갖추어 행하는 제사 의식들을 흠향받으실 수 있음이라.

아랑(兒郞)아! 대들보를 던지세! 그리고 노인들에게는 흠모하는 노래를 베풀어보세.

동(東) 호산(虎山)의 봄 색깔은 정말로 여러 가지 색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맑은 창문을 통하여 사계절의 경치가 머물다가 꿰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많은 만물들이 새롭게 변화하는 상태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서(西) 제비산의 색이 처마에 가깝게 가지런하게 걸려 있으며, 부지런한 장인들 무리의 도움을 받아서 이제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새 건물을 축하하는 노래 소리가 아래, 위로 이르게 되었다.

남(南) 월출산(月出山)의 밝고 상서로운 기운은 조화로움을 품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빛을 가지고 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질 때를 마음으로 깨닫고 이해하여 점차로 같지 않고 섞인 것들을 물리쳐 버린다.

북(北) 금성(錦城)은 오랜 세월동안 봄의 색깔이 변함이 없으므로, 곧 군자의 덕(德)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새롭게 됨을 생각하고, 홑옷 입는 것을 숭상하므로, 한갖 꾸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 우리나라 위에서 해와 달이 멀리서 서로 바라보며, 천신(天神)께서 이 산천(山川)들을 은미하게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마음을 맑게 하고, 모범이 될만할 것을 유독 잡고서 마땅히 숭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 맑은 샘물이 달고 차갑기 때문에, 마땅히 솟아올라 새어 흘러 나간다. 그러므로 공경히 제사에 쓰일 술만을 생각하게 된다.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올리는 것은 마땅히 가지러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후손들이 장차 힘써 자기들의 일로 삼아야할 것들이다.

공경히 원하건대 상량(上樑) 후에 천복(天福)이 솥에 이르게 하시고, 땅의 신령들이 우리 모두를 보호하시며, 제사가 모두 가지런히 이뤄지길 수백의 후손들에게 훈계하며, 정성을 가지고 제사를 봉향하며, 예(禮)가 수많은 형식과 구조의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안으로 충실하게 쌓이게 됨을 바랍니다.

 

5. 錦川影堂上樑文

豐功能敷於大塊 惟是澤及下民 令德不容於小邦 祗幸名溢中夏宜額於玉洞. 儼若丞相祠堂擖處於坡湖 厚蒙朝家典禮. 德惟一而疊設 邦有典而不禁. 竊惟厖村黃先生 大東元老我邦宗臣 夙抱廊廟經綸之方 杜門何事旣鍾河嶽 淸淑之氣濟世合宜 妙受感通之精龍瀑斷於十朔 昭融上下之義魚水託於三朝. 金玉其相 瑚璉其哭掌樂制禮 五百年文明之休 治典法憲章三千疆昇平之謨 該是可謂紫泉光闢元首明 股肱良孰不曰靑邱命新. 君子長小人消 祗合宜而行藏恐無害於忠義 贊鬼神應像數不累 灑灑之淸名亮天地變陰. 揚宜有休休之曠度 朝廷合扶鼎之契蜜 勿矢謨社稷 措鞏革磐之安從容縝撫. 惟新國朝之文敎 丕變麗季之俗流 懋篤明德之工行於家而施於國 力鋤左道之惑斥其邪而衛其正杖屢之所 雖遠莫非德祋之原 宗支之分 亦明宜是源一之泒. 寔摹商山舊幀之影 克備錦用新擖之儀 性宇淵淵 儼若乎春風氣像 靈臺浩浩 可尙其冰月 精神助擧脩樑茲綴頌. 東桂林掛月夜山紅 無幽不燭人皆秉 履底常常一路通. 西 錦嶽連天天返低 萬物能容高不極 淸名可與此山齊. 南 繞村琴谷水成潭 惟春新服成乎否 點也瑟聲微意舍. 北 洞湥五柳夫誰植 山人耒訪陶潛門 松菊猶存千古色. 上 錦城日月復明朗 儼然氣像坐春風 一片靈臺眞莫狀. 下 大地三千陶又冶 東土今稱黃相公 休治猶稽唐虞夏. 㐲願上樑後 政敎更新文風丕化德業 巍然俾圖 一邦之矜式 眞幀儼若誠奉 千秋之精靈.

5. 금천영당상량문

많은 공적이 능히 대지에 펼쳐지시니 오직 이 혜택이 하민에 닿으며 아름다우신 덕이 작은 나라에 머물지 아니하고 다만 중하(中夏)에 가득하길 바라며 옥동에 금액을 드린다.

공근하심이 승상(丞相)과 같으시고 사당은 호수가 보이는 언덕에 만드시니 조정의 전례에 힙있었다. 덕이 한결같으심에 온 나라에 선생의 집필이 퍼지어도 금하질 않았다.

가만히 방촌 황희선생을 생각해 보건데 대동에 원로이시며 우리나라의 종신이시니 일찍이 조정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재목을 가지고 계셨음으로 문을 나가지 아니 하셔도 사람들이 모였다. 넓고 크며 맑은 기운으로 세상을 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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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영정:고려말․조선 초의 문신.

 

오묘히 느낌을 받아 통철하는 정신이 마치 용이 열 달을 용솟은 듯 하고 밝게 상하의 뜻을 통하심이 고기가 세 번 물을 옮겨산 듯 하였다.

그 용모가 금옥 같으시고 그 기운이 호연(瑚璉)하시여 악(樂)을 맡고 예(禮)를 만드심에 5백년의 문명의 아름다움이 있게 하시고 모든 법을 다스리심에 삼천의 나라가 태평을 법을 갖추었으니 이에 가히 좋은 일이 샘솟고 앞날을 밝게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임금의 아끼는 신하가 되시니 누가 감히 동방의 새로운 스승이라 하지 않겠는가?

군자의 도는 자라나 소인의 도는 사라지니 공경히 예에 맞추어 행하심이 충의에 해함이 없으셨다.

귀신의 죽이고 살리는 것을 거울삼아 이치에 더럽힘이 없으시고 사물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청명하였으며 천지의 변화하는 음양의 이치를 거울삼아 아름다움을 넓히셨다.

조정의 정사를 맡으심에 세밀히 하여 법이 퍼지지 않음이 없고 사직을 두텁고 편안하게 하여 민심을 편안히 진정시키셨다. 새로운 조정의 문교와 크게 변한 고려 말의 평범한 무리들에게 양심을 돈독히 하는 일을 집에서부터 행하여 나라에 베풀기를 힘쓰게 하시고 옳지 않는 도의 의혹을 없애시고 그간 사람을 물리치서 그 바른 것을 지키게 함에 힘쓰셨다.

실천하는 바 비록 멀지만 덕과 공경으로 근본삼지 않음이 없으셨고 종파와 지파를 나누심에도 또한 밝음이 한 물줄기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이에 상산(尙山)에서 옛 족자를 본떠서 금천에서 새로이 모습을 갖추었으니 성품이 조용하고 깊으시며 공근하심이 춘풍의 기상과 같으셨으며 마음의 넓으심이 가히 그 깨끗한 달과 같으셨다. 공경히 들보를 들어 이에 기리노라.

동 아름다운 숲에 달이 걸치니 밤중에 보이는 산도 환하여 어두운 곳이 없으니 등불을 들지 않아도 사람이 다 다닐 수 있으니 언제나 한길로 통하노라.

서 금악(金嶽)은 푸른 하늘과 이어져 있으니 마치 하늘이 더 낮은 듯 하고 만물을 다 받아들이니 높음이 다함이 없으며 깨끗한 명성이 마치 이 산과 같으셨다.

남 마을을 두른 수려한 계곡의 물은 못을 만들고 봄에 새로이 옷을 입으니 잘 되지 않았던 것이 풀려 이루어 졌으며 멀리서 들리는 거문고 소리 집에 머무른다.

북 괄괄 흐르는 시냇가에 오색 버드나무는 누가 심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산인이 내방하여보니 도잠의 문에 소나무와 국화가 천고의 빛을 가지고 있는 듯 하더라.

위 금성의 해와 달이 다시 밝으며 근엄한 기상이 춘풍인 듯 하여 조그만 마음에는 감이 형용하지 못하네.

아래 대지삼천은 잘 다스려진 땅이요 동토는 이제 황상공의 땅이라 아름다운 정치를 살펴 보건데 요순 때와 비슷하구나. 삼가 엎드려 상량하노라.

정교의 새로운 문화가 크게 변화하여 덕업이 싹트니 한 나라에 삼가 본보기로 삼고자 하노라. 족자의 모습이 참으로 근엄하시니 진실로 천년의 정령으로 받드노라.

 

6. 朴氏三忠祠上樑文

臨難而策戰 亦莫大決死之功 禦敵而奮忠夫 孰愈捐軀之義 猶有公議之不泯 何幸鉤玄而闡幽 况又頹俗之漸靡 可謂扶風而正紀 盖建祠而宥食 協詢謀而市營. 竊惟承旨朴公密城古家 黙齋華冑 聞道以謂莫重趙文烈之契交 莅民惟寬甚盛 禮安縣之治蹟 孝是人子之當職百行 原於斯由於斯. 忠宜國家之幹楨 千秋欽如是仰如是 彼奸閼之讐敵 奈構禍於我邦 家宰重臣 但舍策而莫剖 至尊聖主惟肝食而懍憂 偉歟運餉士之協謀 宜人一而當百 卓乎忠武公之主策想我寡而敵衆 父有子而同盟兄又弟而誓死 敲震聲於玉浦之月免氣登登 旗蔽空於嗚梁之天 義肝烈烈 妖孼作梗環三面而敵矢如流 斬獲甚衆 俾一方而與民共濟戰謀 不洩而密邇 敵魁難容而自踈 彌一朔而若心可尙立節之奇蹟 聯三宿而殫力 只欽貢忠之赤誠 奏揵報於殿門狀啓 綴節義二字 輿民頌於巷曲 口碑豐壬辰三忠 祀典雖欠於當時 士論猶待於今日 宜有休憩之所 不勞風水而孔良 迺胥妥靈之原邦 煩龜筮而協吉 刀鉅模楷 宜不讓於離婁之規 尺尋準矩 亦何賞公輸之巧 迨未雨而綢繆 是不日而營成 將看多士之駿奔 東可榮西可坫 可期明禋之常薦 左宜豆右宜助擧偉樑賡和張頌 東熊峰呈瑞日輪 紅窓外遲遲春夢 覺豁然透得一惺翁. 西薇山採路暮雲 低有生彔彔因求飽. 緬想千春夷與齊. 南參天月嶽繞睛嵐 絶諸金剛猶云小 只有德津宜泳涵. 北白鶴山靑渺一色 縻其好爵在陰誰 千里同聲人不識. 上碧穹迢遞幾千丈 燦然星日照分明 理數耒耒知旣往. 下百川一呇溶溶瀉 包含萬像亦能容 澈底鑑明知者寡. 祗願上樑後 地靈秘慳神休永賴二丁 常享克奠牲幣而如儀三位尊奉 寔陳俎豆而罔愆.

6. 박씨삼충사상량문

난이 일어나자 전술을 도모하심에 죽음을 각오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하시고 적을 막으시고 충심을 떨치시니 대개 어느 누가 일신을 버리고 나라를 구함에 공보다 나을 자 있겠는가 하지만 공께선 오히려 여론에 다하지 못함이 있을까 근심하시고 잘 알려지지 않음을 밝히고 드러나지 않는 이치를 밝히셨는데 하물며 또한 풍속의 퇴폐함이 있겠는가?

가히 풍속을 도와 법도를 바르게 하셨다 할 수 있다.

대개 사당을 세우고 유식(侑食)하고 서로 협력하여 계획을 묻고 경영함에 그윽히 박공의 뜻을 받들어 조용한 곳의 고가에서 묵묵히 화주(華冑)가르침에 도를 들려주고 써 강(講)함에 조문렬의 두터이 맺은 우정을 중요시하며 백성을 대함에는 진실하고 성한 예로 고을의 치적을 편하게 하였다.

효도란 사람의 자식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모든 일이 이것을 근본하며 이것을 말미암고 충이란 국가의 근본이니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여도 공경함이 변함이 없으며 우러러봄도 변함이 없는 것이니 저 간악하고 답답한 수적(讐敵)들이 어찌 우리나라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으리오 총제와 중신(重臣)들께서 모두 계책을 내 놓았으나 어느 것으로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덕이 높으신 어진 임금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걱정하시다가 뛰어난 운향사(運餉士)의 도움으로 한 사람이 백을 당할 수 있었다.

뛰어나다 충무공의 책모여 우리의 수는 적고 적의 수가 많음에 아버지와 자식은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형과 아우 또한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니 북 울리는 소리가 저 멀리 달에 닿았으며 용기가 등등하였고 깃발이 푸른 하늘을 다 가렸으며 의로운 마음이 뜨거웠다.

드디어 재앙이 일어나 적이 삼면을 포위하고 쏘는 활이 흐르는 물과 같았으나 우리의 많은 의사들이 한쪽을 참획(斬獲)하여 백성과 함께 싸움에 전략이 밖으로 세지 않고 적과 가까이 접근함에 적의 우두머리가 우리를 보고 놀라서 스스로 도망갔다.

거의 한달 동안 마음을 괴롭히고 걱정하시니 가히 한 평생절개를 고치지 아니한 기적이시고연 삼일을 힘을 다하심에 오직 공경히 충성과 참된 정성을 다하셨다.

후군에서 승전보가 전해옴에 절의(節義) 2자로 장계(狀啓)를 이으셨다. 뭇 백성들이 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대대로 임진 삼충을 기리었다.

제사의 의식은 비록 당시에는 흡족하지 못하였으나 선비들의 공론은 오히려 금일을 기다려서 쉬는 곳을 만들어 바람과 비에 수고로움이 없게 하였으니 매우 아름다웠다.

이에 돌아가신 영혼을 편히 모시고 또 번민함은 거북점으로 길함을 도왔다.

자르고 끊음에 법도로써 하여 조금도 법규에 어긋남이 없고 척심에 법도로 하여 또한 일찍이 공을 위한 모책으로 하니 이틀이 되지 않아 집을 만들고 하루가 되지 않아 경영할 수 있었다.

장차 많은 무사의 재빠름이 동쪽에서 일을 마치고 서쪽에서 축배를 들며 또 매년 하늘에 제사 지냄에 항상 왼쪽에는 나무 제기로 하고 오른쪽에는 대나무 제기를 썼다.

들보를 높이 들어 올리고 화한 기운으로 그 업적을 기리노라.

동 웅봉(熊峰)에는 상서로운 해가 크게 돌아 창밖에 오래 머무르며 봄에 잠자던 만물이 깨어나 생기가 돌 듯 환히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

서 미산(薇山)에서 저녁노을을 캐고 삶의 뿌리를 두어 그것으로 배부름을 구하며 오래 전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생각해 본다.

남 덕이 하늘에 참여한 월악(月嶽)에 청풍이 두르니 금강산도 이만 못 할 것이다. 조그만 덕이 가득 차 그 은덕에서 자손들이 놀게 하노라.

북 백학산(白鶴山) 푸른빛이 아득히 한색으로 빛나니 좋은 벼슬이 그 그늘에서 묶이고 아주 멀리 있어도 같은 소리로 사람을 부르니 알지 못 하는 사람이 없다.

위 푸른 하늘에 멀리 닿음이 길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듯이 환하게 빛나고 이치를 환히 꿰뚫어 오는 것을 앎이 이미 지난 일과 같으며 모든 물이 아래로 흘러 한데로 모이듯 만상을 머금음에 포용하지 못함이 없도다.

공경히 빌어 상량한다.

땅에 신령을 귀히 여기고 신의 아름다움을 길이길이 믿고 의뢰하여 항상 희생을 드려서 법하고 삼위를 받들어 모셔서 정성으로 제사를 진설하여 잊지 않게 하노라.

 

7. 河南書堂上樑文

占基於河東而軆舍一邊謂之河南書堂 又名洞曰仁田 上天之惟廣大乎. 光臨星宿而應氣 敷土之攸慱厚也秘藏雲物而畜精 今爲苟全而相宜庸宏玆謀而拹吉. 祗惟仁田之河南書堂 岳陽別界河東勝區 元理攸藏灒玩形氣之微妙 眞機多積可見精彩之增光. 地軸高而如登苟不爲物累之所屈 民俗厚而依舊亦可以文風之惟新 奈去百世之等閒 宜耒萬年之繁昌 神之微佑宜私於種福之田 天之降祥惟公於積慶之地 千秋之長在 亦可謂富有靑山二水之合流 是所以別樣眞境 點其登坪之要處 揭夫仁田之美名 天定風水之靜嘉 那煩方外橫竪之說 地擧峰巒之縹渺 宜協畵前卦衆之圖 奠基礎於吉月良辰 玆用夏朔之正 輪木石於遐坊異土營始陽復之初 爰用裕後之謀永圖 無疆之策 天人合應之際 理具玄微 山水整齊之時 神護密邇 地靈百代長 點錦城人之世居 運吉千  禩永受方壺山之精萃 龜子大而協吉仙臺仡而呈祥 山逕多於水程方 不遠其遠而長點 心殫尤於脚惱矣. 經玆營玆而苟全 廳事已寬讀書不絶而忠孝子聯世室奧安靜榮先有光而摹效聲繼家 玆庸古人伐柯之詩賡和 兒郞載樑之頌. 抛樑東 天梯聳出七星峰 嵒如台鼎三齊拱 百職休修民庶同. 抛樑西 會講山靑道不迷 庸學幾何論孟又 訓辭不越若提撕. 抛樑南蟾江春水碧如籃 憑淸高景先賢躅 敢問孤再幾廣覃. 抛樑北 蓮花洞僻春將餙 愛無今古古猶今 千載濂溪惟薰德. 祗願上樑後 乾道建陽地雷添線 百物誘化愼勿玩好於奢華之中 萬事由眞 亦莫游心於彛倫之外.

7. 하남서당상량문

높은 하늘은 넓고 크도다. 별들이 또한 하늘에 와서 기운이 따르게 된다. 넓은 땅은 크고 넓으며 두터워 오묘하게 운기(運氣)의 길흉(吉凶)를 감추고 있으면서 정기(精氣)를 쌓아두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진실로 완전하게 되어있으면서 하늘과 땅이 서로 마땅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크고 넓은 하늘과 땅을 가지고 의논하여 모두의 의논을 합하여 길한 날과 장소를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공경히 인전(仁田) 마을에 있는 하남(河南) 서당(書堂)을 헤아려 보건대, 악양(岳陽)과는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하동(河東)에서 아주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큰 이치가 감추어져 있어서 마음을 깊이 가라앉혀 형체와 기운의 미묘하고 신묘함을 감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곳은 아주 진실한 기미들이 많이 쌓여 아주 발라할 기운이 빛을 더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지축(地軸)이 높아서 마치 산이 올라온 듯 하여 진실로 만물이 쌓여 다 없어지게 할 수 없는 듯하다.

이 마을은 사람들의 풍속이 두터워 옛 아름다운 풍속을 의지하며 살고 있고, 또한 학문의 풍토가 오직 날로 새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오랜 세월동안 대수롭지 않게 둘 수가 있을 것인가! 마땅히 만년(萬年)의 번창함이 도래할 것이다.

신(神)의 은미한 도움은 마땅히 복을 심는 밭에 사사로울 수 있으나,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움은 오직 경사로움을 쌓은 땅에 공평할 것이다.

이곳은 오랜 세월동안 있어 왔으므로, 부유한 청산(靑山)이라고 할 수 있으며, 흐르는 두 물이 합하여 흘러가는 것은 특별한 모양을 가진 진실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들판의 중요한 곳에 올라 세밀하게 조사하여 점찍어 놓고, 인전(仁田)의 아름다운 이름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늘이 정한 바람과 물이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므로, 어찌 세속 사람들의 복잡한 말들에 대해서 마음이 번잡하겠는가!

땅은 산봉우리를 아득하게 솟아오르게 하였으니, 마땅히 조화롭게 주역의 괘상(卦象)의 그림을 앞에 그려놓은 것 같도다.

길월(吉月)의 좋은 진일(辰日) 기초를 높이 받들어 세웠으니, 그 해 첫 여름날의 초하룻날에 기호를 세웠다.

그리고 먼 지방에서 나무와 돌을 실어오고, 다른 새로운 흙으로 집을 처음 지을 때에 처음의 흙으로 하여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손들이 부유하게 되기를 도모하고, 끝없는 계책을 영원히 도모하였다.

하늘과 인간이 서로 합하여 마주 대하는 때에 이치는 현묘하고 은미하게 갖춰져 있으며, 산수(山水)가 바르고 가지런한 때에 신(神)들의 돌봄이 가까이 있도다.

땅의 신령(神靈)이 백대(百代)에 걸쳐 오랫동안 점찍어 놓았으므로, 금성(錦城)은 사람들이 대대로 살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운(運)이 길(吉)한 날에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으므로 방아산의 정기가 모인것을 영원히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거북처럼 귀한 자식들이 크게 일어나, 모두 화합하고 길(吉)하게 되며, 선대(仙臺)는 우뚝 솟아 있으면서, 상서로운 기운을 나타낸다.

이 곳은 산에 난 길들이 물길보다 많으므로, 거리가 멂을 멀다고 하지 않는 곳으로, 오랫동안 점찍어 놓은 곳이다.

마음을 다하는 것이 더욱 다리로 움직이는 것보다 괴롭게 되므로, 이 서당을 만드는데 진실로 완전하게 되는도다.

서당의 대청이 매우 넓어서 학생들이 책을 읽는 것이 끊어지지 않아서,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자식들이 대대로 이어져 생기는 도다. 또한 방은 더욱 편안하고 고요하여 영광스러운 조상의 빛이 있어서 흠모하고 본받는 소리가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 구나.

중용(中庸)에 나오는 옛 사람들의 벌가지시(伐柯之詩)를 가지고, 사내아이들이 대들보를 실어 올릴 때의 부르는 노래소리에 이어서 불러 조화를 이루게 함이라.

동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하늘에 올라갈만한 사다리가 칠성봉(七星峯)에 높이 솟아나왔고, 바위는 마치 삼공(三公)의 모습과 같아서 세 정승이 나란히 모든 일들을 잡고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게 닦는 것과 같도다.

서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모두 모여 강론을 하는데, 산은 푸르므로 도(道)는 미혹되지 않는구나!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얼마간 강론하다가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훈계하는 말들을 넘어서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이처럼 후학들을 가르쳐 인도하는구나.

남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섬강(蟾江)의 봄의 물은 푸르기가 마치 쪽색과 같아 맑고 푸르며, 높은 빛을 가진 선현들의 자취를 감히 물으니, 거의 널리 퍼져 있음이라.

북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연꽃이 마을 한쪽에 치우쳐 피어있으니, 봄에 연꽃을 가지고 꾸미고 사랑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옛날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할 것이다. 천년의 염계(濂溪)는 오직 훈훈한 향기를 가진 덕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공경히 원하건대 상량이 끝난 후에 하늘의 도(道)가 양기(陽氣)를 세우고, 지뢰복(地雷復)괘에서 땅과 우레는 초양(初陽)이 점점 실처럼 가늘게 자라나서 모든 만물을 천지자연의 변화에 인도하고, 사치와 영화의 가운데서 지내는 것을 즐기지 말 것이며, 모든 일들이 진실된  곳에서부터 비롯됨으로 또한 인간의 떳떳한 인륜(人倫)을 벗어난 곳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8. 登臨祠上樑文

天生駿賢於東邦 幾希唐虞盛遇 仰欽一朝之遽然 命授士禍於乙巳 猶未魚水相歡 慟惜千秋之不幸. 竊伏惟錦湖林先生 邦國楨幹 錦江之水淸兮 行止果於回鞭之日 始仕馬侍士林棟樑 漢城之運敷矣. 眷遇勤於擢科之時 累遷至司講院設書 沽哉櫝蘊之美玉. 專任當世文化之治 退陶與之相好 不揆地邇避 憲府掌令 儘乎陶沙之精金 第登一代駿髦之士 何西愛之非常 寔由德猶如而道同 弘文修換惟新朝野之美風 除有靑邱至治之會 中廟昇遐製而氣合 藩境撫摩 期圖鄒魯之善俗 時宜黃河一淸之期 天使奉詔次進謚冊之義 素乎愛國之忠 不越於三生一事 繼仁廟賓天 痛甚時事 爲相檳之官 浩然好德之像 特立於四大五常 奈慈殿制政 戎以國步一變酷禍驟臻 慕義樂善之士 安置授危 玆有先生之成仁 春秋漸微善類網打 仇賢逞禍之徒 秉機盜柄 彌㘦後學之高景 士林祀典 宜在於聖明之朝 秉彝極天罔墜人 孰不仰慕悠同 迺玆子姓閥閱之所地面孔 公論差晩於夷降之世常祀曠世闕歆 今當爲宥食斯速 適因登臨泉石之靈 天時協陽風耶 水耶莫說列階戺而積誠宜 可謂好賢之築 可尙揖讓昇降之儀 引規鉅而協頌吉蓍也龜也勿煩 立棟字而寓慕亦其非尙德之基 吁敬拜興進退之節 執繩墨而擧樑.

8. 등림사상량문

하늘이 우리나라에 매우 높고 현명한 사람을 낳았으니, 요임금․순임금 시대의 태평성대의 시대에도 거의 만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하늘의 명(命)은 을사년(乙巳年)의 사화(士禍)를 그 사람에게 주셨으니,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났으나 기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음이라.

그러므로 하루, 아침에 갑자기 세상에 태어나심을 우러러 흠모해보지만, 오랜 세월에도 잊지 못할 불행(不幸)을 만나게 됨을 매우 가슴이 아프도다.

가만히 엎드려 금호(錦湖) 임선생(林先生)님을 헤아려 보건대,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의 근본이 되시는 인물이시며, 사림(士林)의 동량(棟梁)과 같으신 분이시다.

금강(錦江)의 물이 맑으니, 기거 동작은 얼굴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날에 있어서 과단성이 있으셨고, 한성(漢城)의 운수는 과거에 인재를 발탁할 때에 근면한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시었다.

처음에 벼슬은 시강원(侍講院)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심에 조금 거침이 있었으나, 마치 함에 쌓여 있는 아름다운 옥과 같으시었다. 그리고 여러 번 벼슬에 오르셔 사헌부(司憲府)에까지 이르게 되셨는데, 임금의 명령을 맡아 행함에 있어서 온 정성을 다하셨다. 그러므로 마치 질그릇 속의 모래에 아주 정밀한 금(金)이 들어있는 것과 같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은 오로지 당대(當代)의 문화(文化)를 다스리는 일을 오로지 맡아 행하셨고, 차례로 당대(當代)의 높은 벼슬에 오르시게 되었다.

퇴계(退溪)선생께서도 선생님과 함께 하시면서 선생님을 좋아하시어 서로 살고 있는 거리가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지 아니하셨으니, 퇴계선생과 도(道)가 같으셨다.

하서(河西)선생께서도 선생님을 사랑하심이 매우 특별하시고, 두분의 덕(德)의 비롯됨이 같으시니, 두 분의 기운이 합해지셨다.

문(文)을 크게 높이시고 닦고 편찬하여 조정과 민간의 아름다운 풍속을 오직 새롭게 하셨으며, 국경 가까이에 있는 민족들을 어루만지시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아름다운 풍속을 도모하고 바라셨다.

그 당시 우리 나라는 나라의 다스림이 매우 잘 이루어지는 시기였으며, 또한 그 시대에는 중국도 한결같이 맑게 평안했던 시대였었다.

그러나 그 당시 중종(中宗)께서 돌아가시어 상복(喪服)을 지어서 입고 시책(諡冊)의 뜻을 나아가서 행하셨고, 칙사로서 임금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상빈(相檳)의 관직의 일을 행하셨다.

평소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심은 삼생(三生)에 한 번도 넘지 않으셨으며,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마음과 덕을 좋아하시는 모습은 특히 사대(四代)의 오상(五常)을 세우셨다.

그리고 이어서 인종(仁宗)께서 돌아가시니, 어찌 나라를 사랑하시어 정사(政事)를 바로 잡지 않으셨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마음이 아프던 시기에 하나의 변화가 이루어져 혹독한 화(禍)가 갑자기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의 운명이 점점 쇠미해짐을 경계하여 좋은 행실들이 이루어지도록 세상을 다스리고 부정한 것들을 두드리셨다.

그러므로 의로움을 흠모하시고 선(善)을 즐기는 선비는 어찌 이를 가만히 앉아서 위급함을 받고만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원수로 대하고 화(禍)를 초래하는 무리들은 마치 기미(幾微)를 잡고서 권세를 도둑질 하였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인(仁)함을 이루셨으며, 더욱 간절히 후학(後學)들의 높고 밝은 빛과 같으신 분이 되셨다.

봄, 가을로 제사를 하는 법도에는 마땅히 천자의 고명한 덕이 있는 조정의 법도를 따라 행하시었고, 사림(士林)의 공론(公論)들은 오랑캐 나라의 떨어진 문화를 논의하는데 저물어 갔다.

떳떳한 인륜들을 잡고 하늘의 이치를 미루어 헤아림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어졌으므로, 어느 누가 우러러 우러러 흠모함이 같지 않겠는가! 또한 떳떳한 제사로 세상을 발게 하고, 묘문을 흠모하니, 마땅히 유식(宥食)를 신속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자손들의 공적이 모이는 곳이며, 따라서 등림(登臨)의 산수 경치에 영(靈)이 나아가게 된다.

지면(地面)은 매우 밝고 따뜻하므로 바람과 물을 말하지 말며, 하늘의 사계절의 변화는 모두 조화를 이루어 길하게 되므로, 시초점과 거북점으로 번잡하게 점을 치는 번잡한 일들을 하지 말라. 가지런히 나열된 계단과 문지방에 정성이 쌓여 있으므로 마땅히 어진 이를 좋아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집을 세움에 있어서 흠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으므로, 덕(德)을 숭상하는 기틀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읍(揖)하고 겸손하게 오르고 내리는 의식을 높이 숭상하고, 공경히 절하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도에 탄식하게 된다.

규구(規矩)를 가지고 모두 화합하여 노래를 부르며, 승묵(繩墨)을 집고서 대들보를 들어보세!

동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상서로운 바위는 상서로운 기운을 나타내고. 아침에 해는 붉게 떠오름이라. 그러므로 어찌 천만년의 부상(扶桑)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마도 크게 화합된 곳에 통하여 어렴풋이 같을 것이다.

서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황룡강(黃龍江) 위에 뱃사공의 노래가 깔려 있고, 외로운 이가 다시 천(川)앞의 경치를 가득 싣는구나. 그러므로 꽃 피고 버드나무 있는 봄의 빛을 마땅히 돌아볼 수 있겠구나!

남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물고기가 산에 올라가니 푸르고 맑은 산에 바람이 휘감아 도는 구나. 모름지기 속마음을 서로 이해하고, 고요하게 음미하며 가만히 비녀를 덮는 것 같구나.

북쪽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산이 높이 솟아 올라있고, 흰 소를 누가 몰고 밭을 갈아 밥을 먹는가! 남쪽에 태양이 따뜻하게 비추고 있고, 봄은 용이 누워있는 밭에 있구나. 그러므로 큰 복을 사람들은 진실로 알지 못하는구나.

위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해와 별이 모두 비추고 있으니 오직 밝고 밝음을 생각하게 하는 구나. 마음을 편안히 하니, 하늘과 서로 환하게 통하는 구나. 그러므로 한결 같은 마음을 마땅히 밖으로 드러낼 수 있겠구나.

아래에 대들보를 던지도다.

곤(坤)의 덕(德)은 자연스러워 큰 집을 높이 받들고 있으므로, 어찌 땅이 큰 집을 싣고 있는 이치가 다르겠는가! 냇물이 흘러 학문의 바다에 들어가서 크게 물이 솟아 흘러나올 것이도다.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上樑)이 끝난 후에 바다와 큰 산에서 정밀함을 내리시고, 숲과 구덩이의 아름다움을 덧칠하니, 영령(英靈)께서는 마치 위엄이 있으시면서 맑은 날의 달과 같이 투명하고 새로우시며, 향기로운 덕은 마치 따뜻한 향기와 비슷하니, 광풍(光風)은 따뜻한 바람을 부는도다. 항상 문(文)을 흠향하고, 도(道)는 넓히고 덕(德)을 숭상하며, 백세(百世)가 되어서도 스승이 될 수 있으며,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교훈의 무거운 책임을 맡아 정성을 다하여 제사지내는 것이 마땅할 것이로다.

 

序(서)

 

1. 琴下遺稿序

文道器也. 聖以之經天緯地 賢以之立德立言 而之於士則存心養性 作爲訓家準矩矣 擴未擴在我 而擴之則一 然 苟有等務 烏可以道器云乎. 日族姪熙勉 神其先人遺稿 要余曰 吾先君平日詞章 不尙彫琢 宜與大方手筆 未可同輿 然 晩暮收拾 之是一部 而惟其精力攸在 不忍棄諸 則姑舍是工拙 今將就梓圖 所以壽其傳 願讐校之 余曰 孝哉言也 厥父之析薪不工 則厥子負之 厥父之析薪不工 則蹶子不負之也歟. 其先人之所咳唾 雖尺辭葺之 存諸不朽之域 乃孝子之情也. 且夫文記實而己 實外無文 那可以徒餙甚工爲文乎哉. 言旣固辭不獲 而字訛正之字 蝕補地合簡成編摠 若干頁 然 苟失其本志 公之陰譴 如在乎宜之中者 以是爲恐爾. 竊念 性度包荒 厚於宥人 宜免乎否. 至若詩文記序 但風泉思切 而往往有觸物感傷而發之者 多矣 銘與訓戒之辭 由乎性情之正發於心 而爲傳家心法 固非浮尙迂儒之所可及耳. 矧惟家法 有由來者乎. 文靖公以來 景武公之蘶勳 逸軒滄洲之德業文章 慶源公及竹友堂偉烈 蔚爲一邦矜式 而世襲至精之模楷 把作傳家之法 其家法之妙 分在萬孫 惟公十有五分得矣. 然則 公之文 遞不可以道器稱 宜爲孝悌之器憂爾.

1. 금하유고서

문(文)은 도(道)를 담는 그릇이다. 성인(聖人)께서는 문을 가지고서 하늘을 씨줄로 땅을 날줄로 삼아 다스리시고 현인(賢人)은 문으로 덕을 확립하고 말씀을 확립하였고 선비는 문으로써 마음속에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집안을 가르치는 법규를 만들었다. 확충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나한테 달려 있을 뿐이다. 확충한다면 도와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어찌 도(道)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전에 족질(族姪) 희면(熙勉)이 그 선친(先親)의 유고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요구하기를, ‘우리 선군께서 평소에 지으신 사장(詞章)을 일찍이 출판하지 않으셨고, 대강 종이에 손수 써놓으신 것도 모아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만년에 수습한 일부만이 오직 정력을 쏟으신 것입니다. 차마 버릴 수 없어 우선은 이렇게 힘을 들여 인쇄하고자 합니다. 오래도록 전하고 싶으니, 한번 교정을 봐 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나는 대답하기를, ‘참으로 말한 것이 효성스럽다. 그 아버지께서 땔나무를 잘 쪼개 놓으면 자식은 등에 지을 줄 알아야 하고, 그 아버지께서 장작을 쪼개놓은 것이 좋지 않다고 해서 자식이 등에 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대께서 남기신 짧은 글이 비록 분량이 적다하더라도 편집하여 영원히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도하는 자식의 심정이다. 또한 문은 실질(實質)을 기록할 뿐이다. 실제적인 것이 벗어나면 제대로 된 문이 아니다. 어찌 다만 꾸미고 잘 다듬는 것만으로 문을 삼을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잘못된 오자를 바로잡고 좀 먹은 글자는 보완하여 약간의 항을 모아 편을 이루었다. 그러나 진실로 공께서 은밀하게 남기신 뜻이 그 본래의 뜻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가운데 있는 듯하니 이것을 염려할 따름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품은 도량이 넓으시고 사람을 포용함에 후덕하셨으니, 면할 만도 할 것 같다. 시문(詩文), 기서(記序)의 경우는 자연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여 가끔 사물을 대하고 감흥이 일어 쓴 것이 많은 편이다. 명(銘)과 훈계(訓戒)의 말씀은 성정의 바름이 마음에서 일어나 집안에 전해지는 심법(心法)이 될 만하니, 진실로 쓸데없는 것을 숭상하는 수준 낮은 선비가 도달할 바가 아니었다. 하물며 가법이 원래 유래가 있음에는 어떠하겠는가. 문정공(文靖公) 이래로 경무공(景武公)의 뛰어난 업적, 일헌(逸憲), 창주(滄洲)의 덕업과 문장, 경원공(慶源公)과 죽우당(竹友堂)의 위대한 공렬(功烈)은 우뚝하게 한 나라의 본보기가 되고, 대대로 내려온 지극히 정밀한 모범과 집안 대대로 전하는 법도를 가지고 있으니, 그 집안에 전하는 묘법(妙法)이 많은 자손들에게 나누어 있으나 공은 십오분 나누어 가지고 계시다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공의 문장은 갑작스럽게 도의 그릇이 된 것이 아니고 효제(孝悌)의 그릇이 흘러 넘쳐 자연스럽게 된 것이다.

 

2. 隆親契序

紫陽夫子 葺纂小學 以隆師親友 次於愛親敬長者 所以明父父子子師師友友之道也. 今夫道隆於上 敎行於下 人能皆有以知其性之所存焉 則雖無契 亦可矣. 人各知其所隆而隆之 亦各知其所親而親之 故三代之隆 契之名 無聞焉. 今馬執其秉彛之本然者 鮮矣 而契之作 以是爾. 與之人我同心無或以各心其心 而以講其信 則古之以講 卽今之以契也歟. 過昔名碩 有錦浦鄭公 本河東人 諱某 孝行特箸 與李氏錦隱公 俱有雙孝之薦 公學問湥邃 信道愈篤 以獎勵後進爲己任 南中碩甫嘗從遊 難疑質諸 契交湥重 由是鄕黨姪子遠邇來學 之者 以孝悌亦爲始下底工夫 罔或有獵等之患 故揖讓昇降進退之儀 正心修己治人之道 因其材而導之 其獎進之力 靡不有多矣. 於是 從遊及門徒鳩若干財 署名同帖 作爲一契 命名曰 隆親契. 今其案中僉員 宜皆南中誰某氏也. 嗚呼 今之所謂學鴂舌蟹籒而已. 柢幸斯契也. 以明師友之道 使人欲知其隆親之義 庶乎地雷底消息也.

2. 융친계서

자양부자(紫陽夫子)께서 편집하신 소학(小學)에서 스승을 높이고  벗에게 친하게 함을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 다음으로 놓은 이유는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스승은 스승답고 벗은 벗다운 도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제 도를 위에서 높이고 교화를 아래에서 행해지는 것이 사람들이 모두 그 본성 속에 있는 것인 줄 안다면 비록 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사람들 누구나가 그 마땅히 높여야 할 대상을 알아서 높이고 또한, 각각 친하게 대해야 할 대상을 친하게 대한다면 진실로 삼대의 융성한 가르침이니, 계(契)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제 본래의 떳떳한 덕을 지닌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계를 만들기를 이것으로 함께 하려고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과 같은 마음이어서 행여 각자의 마음을 각자의 마음으로만 삼지 않고 그 신의에 대하여 강론한다면 옛날의 강론이 바로 오늘날의 계(契)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명석(名碩)하신 금포(錦浦) 정공(鄭公)은 본래 하동(河東) 분이시다. 휘는 모(某)요, 효성스러운 행동이 특별히 드러나서 계씨인 금은공(錦隱公)과 함께 모두 쌍효(雙孝)로서 천거를 받았다.

공의 학문은 깊이가 있고 도를 믿는 것이 매우 돈독하여 후진들을 장려하고 권면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으셨다. 남중(南中), 석보(碩甫)는 일찍이 함께 모여서 풀기 어렵거나 의심난 점을 질정(質正)하였으니, 교분이 매우 두터워졌다. 원근에 있는 마을의 조카뻘 되는 사람들이 배우러 왔으니, 배우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것으로서 공부의 시작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부로 등급을 뛰어넘는 근심은 없었다.

읍양(揖讓)하고 진퇴(進退)하는 예의(禮儀)와 정심(正心)․수기(修己)․치인(治人)의 도를 그 자질을 따라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권면하고 이끌어가는 공부가 많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문도들이 얼마간의 재물을 내어 동첩(同帖)에 이름을  적어 계 하나를 만들어 ‘융친계(隆親契)’라고 불렀다. 이제 문안의 인원을 헤아려보니 모두 남중(南中) 문중의 여러분이다.

아, 오늘날 이른바 학문한다는 것은 말로 외울 따름이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계가 있어 스승이나 벗에 대한 도리를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융친(隆親)의 의리를 알게 하니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라고 할만 하도다.

 

3. 錦川世稿序

心學之要 莫切於誠正修齊 而文 固學之餘 然 心之所著 文不斯心 心內也 文外也 外內照應 猶影響 人能於孝悌 苟不文可乎. 門內有故 士人錦涯公 以錦川公肖胤 俱隱德 家學克正 眞實底工夫 固非餘人所知也. 聯世所著詩文 摠若干 而慕堂熙勉 編葺之彙 爲一丹目 以錦川世稿善乎. 日 錦涯公之胤源弘 訪余于月淸山中 屬以弁卷之文辭 不獲略敍顚末 宜畵足於蛇也. 嗚呼 公有餘 篤學而學力未能盡 著於詩句之末 今以句語論 亦末矣. 然而 不知者 詩不過茶飯云 苟有茶飯味 則茶飯可容易得乎. 魯論中 學而時習之 是吾夫子之格訓 而其實聖人茶飯語 亦以簞食瓢飮 贊亞聖之所樂 則簞食亦茶飯之飯也. 大抵學問上用工 在乎邇而不遠 則日用平常之言 述之而爲文 則那可以甚工者爲文乎. 是編也. 簡而易 韻音調格 雖不及古人 哀詳慶問 感於心而詩法之妙 往往有得於性情之正 而宜賢於俗 尙遠矣 漢城吟有曰 義肝膨脹生如死 忠血同歸 漢水中之句 是彼黍之歎 油然於中而感發之義 溢於辭表者也. 祗幸以公之裔昆 嘖其詩汁之微奧 仍爲家學之規程 則讀書種子 幾乎不絶矣.

3. 금천세고서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는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 제가(齊家) 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 문(文)은 진실로 학문의 여가(餘暇)에 마음을 드러낸 것이지만 문에는 마음을 속임이 없어야 한다. 심(心)은 내부적인 것이요, 문(文)은 외부적인 것으로 안과 밖이 서도 대응하여 비추는 것이 그림자와 같다. 사람이 효제(孝悌)를 제대로 한다면 굳이 문을 짓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문중에 선비 금애공(錦涯公)은 금천공(錦川公)의 첫째 아들로 은덕을 갖추었고 가학(家學)은 바르고 진실한 공부를 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대를 이어 지은 시문 약간을 모아 모당(慕堂) 희면(熙勉)이 편집하여 하나의 책목으로 만들어 ‘금천세고(錦川世稿)’라고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일전에 금애공(錦涯公)의 첫째 아들 원홍(源弘)이 월청산(月淸山)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책 머리에 글을 써주기를 부탁하여 본말(本末)을 잘 모르니 마치 뱀에다가 다리를 그려 넣는 격이라 하여 사양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 공의 덕이 흘러넘치고 학문은 철저하게 하여 학문으로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은 시구(詩句)의 말미에 드러내셨다. 이제 몇 구절의 말로 논하는 것도 지엽적인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시(詩)가 차 마시고 밥 먹는 사이에 지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詩)가 차 마시고 밥 먹는 사이에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것인가. 논어(論語) 안에,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고 하였으니, 우리 부자의 가르침으로서 그 실제는 성인(聖人)께서 차 마시고 밥 먹는 사이에 하신 말씀이다. 또한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아성께서 즐기는 점을 찬미하셨다. 그러니 단사(簞食)라는 것도 차 마시고 밥먹는 사이의 일이다.

대개 학문상의 공부란 가까운 곳에 있지 먼 곳에 있지 않으니, 일상 생활에서 평상시 하는 말들을 기술하여 글을 짓는데 어찌 매우 잘 다듬는 것만을 문이라고 하겠는가.

이 책은 간략하면서도 쉽고 음운(音韻)은 격식에 맞추었으니, 옛 사람들에게 미치지는 않으나 애도문(哀悼文)이나 경문(慶文)은 마음에 감동을 주고 시법(詩法)의 묘미는 간혹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어 일반적인 시문보다 현명함이 훨씬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한성음(漢城吟)에, ‘의로운 마음 흘러 넘침은 사나 죽으나 같아 충성스러운 유혼은 한강 속으로 함께 돌아가누나〔義肝澎漲生如死 忠血同歸漢水中〕.’의 구절은 바로 저 세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탄식한 것이니, 저절로 마음속에 감동함이 일어나는 의리가 말의 겉에 흘러넘친다. 다행스럽게도 공의 후예가 그 시집을 엮은 은미한 뜻이 곧 가문의 규범이 되어 공부하는 자손들이 끊기지는 않는 데에 가까울 것이다.

 

4. 羅州鄭氏世譜序 (壬寅)

喬嶽云高矣而祖宗本通元脉 則不能成泰山之名 黃河云淸矣 而派源不續一氣 則不能居溝瀆之上 矧惟人乎. 族之有譜 所以辨系世也. 惟我鄭始於軍監公爰及吾身昭穆井井猶河嶽之有源有脉而可證者譜也譜可證視乎.奧自肅廟 辛亥凡六七作而世級愈降 尤不可以不修者 以其時也. 於是乎憂其憂而另力者 幾乎六七星霜矣. 但咸務之族左圭右角 竟未能大同可慨也. 已然而尙書公派 一部葺單合編 亦可謂大同也. 於是 譜例一遵舊規而至若宗法恩義 不可俱全時乎. 罪我者誰流於和而苟合於時時也. 奈何 盖六楨幹橫列而一幹書 一世子生孫 孫生子而系世則明矣. 彷佛乎六合中 天理生生之理也歟. 今又一幹生千枝 千枝生萬葉 宜春和方暢 同根花木 向陽敷榮矣. 以今觀之則族而苟不譜 如異根之木 異源之水 然非其分根而異源者也. 分合有時 亦其無會萬爲一之日乎. 伏惟 世德該載于譜面 不敢更聲.

4. 나주정씨세보서 (임인년 : 1902년)

교악(喬嶽)이 높다고 하나 조종(祖宗)이 원줄기에 통해 있지 않다면 태산(泰山)이란 이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요, 황하(黃河)가 맑다고 하나 지류와 원류가 하나의 기(氣)로 이어져 있지 않다면 수로(水路)중 제일 이름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

씨족마다 기록이 있는 것은 세계를 분별하려는 것이다. 우리 정씨는 군기감공(軍器監公)에서 시작하여 이 몸에 이르기까지 소목(昭穆)이 정정하여 황하에 근원이 있고 태산에 맥이 있는 것과 같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족보(族譜)이다. 그러니 족보를 등한시 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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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보.

 

숙종 신해(辛亥)년으로부터 모두 여섯 일곱의 세대가 생겨 세대의 등급이 더욱 내려오니 더더욱 족보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그것은 더욱 시기적으로 그러한 것이었다. 이에 그 근심스러워할 만한 점을 근심하여 별도로 나누어 정리하려고 힘쓴 지 육칠 년이나 지났다.

다만 함무(咸務)의 친족들은 계파가 분분하여 끝내 대동보(大同譜)를 만들 수 없어 너무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상서공파(尙書公派) 일부분은 원고를 모아 편을 이루었으니 대동보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리하여 족보 만드는 예(例)를 한결같이 과거의 규칙에 따랐으나 종법의 은택과 의리에 대해서는 모든 시대를 망라하여 갖출 수 없었으니 나를 죄줄 자가 그 누구인가. 조화로움에 맞추어 시대에 부합하고자 함이니, 전 시대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여섯 갈래의 계파에 한 갈래마다 한 세대를 기록하였으니 자식은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자식을 낳은 것이 체계상 분명하니 이래야 온 천지만물에 담긴 천리가 낳고 낳는 이치에 들어맞지 않겠는가. 이제 또 한 줄기가 천 개의 가지를 만들고 천 개의 가지가 만 개의 잎을 만든다. 봄날 바야흐로 화창하면 같은 뿌리에 달린 나무와 꽃들이 햇빛을 향하여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씨족에 진실로 족보가 없다면 뿌리가 다른 나무나 원류가 다른 물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가 나뉘어지고 원류가 달라지는 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뉜 것이 합쳐지는 때가 있으니, 또한 만 가지의 갈래가 만나 한 가지로 합쳐지는 때가 없겠는가.

삼가 생각해 보면 각 세대의 덕(德)이 족보에 실려 있으니 함부로 다시 덧붙이려 하지 않는다.

 

5. 羅州鄭氏誌狀錄序

 

代伯兄作

世有淸德偉業之表表可尙者 載在國乘 焜耀竹帛. 其遺風餘韻可仰想 然其嘉言善行 不得盡傳於世也 故狀而述其行 銘而示不朽 使後之學者 欲知先生諱某 德業若是嵬嵬. 先生諱某 忠節若是卓卓 顧是編之大節目也. 惟我鄭氏 自麗季文靖公以後 有若義軒․永慕亭․思禮堂․黙軒․逸軒․滄洲之盛德偉績 及慶源公․愛竹軒公之忠義 聯世煊爀 見於國史與野史 吁其盛矣乎. 厥後若忠若孝若節若義 趾美而作多乎多乎. 曰誌曰銘曰陰記 是皆墓道文字 而在世行治之照載者也. 曰狀錄與實記立言 君子財擇之規矩則一也. 於是乎舊牒所編狀碣 及新撰狀碣彙爲二 沓輯於大譜之次. 只幸後之來裔 觀感於斯 則不惟慕先之誠浹洽而已. 又安知後日踵先武 趾先美者 繼有之乎. 嗚呼 德業文章忠孝節義之見於此編 猶畵工之模寫眞本 而眞本則丹心靈坮莫可狀矣. 惟此編則祖先心德宜可仰想矣. 何者 德業心之推也 文章心之著也 忠孝心之本也 節義心之所立也 生乎今日 景慕昔日祖先之心 舍是編將何以哉.

5. 나주정씨지장록서

큰 형님을 대신하여 씀.

세상에는 맑은 덕과 훌륭한 업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숭상할 만한 사람이 있어, 한 나라의 역사책에 실려 있거나 여러 책들에서 빛을 발하니, 그분들이 남겨놓은 풍모와 다함없는 운치는 가히 우러러 사모할 만하다. 그러나 그분들의 훌륭한 말씀과 선한 행실이 온전하게 다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행장(行狀)을 써서 그분의 행실을 서술하고, 비명(碑銘)을 새겨서 불후의 업적을 보여줌으로써, 후대에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선생의 휘가 무엇이고 덕행과 업적이 이와 같이 우뚝하구나’, ‘선생의 휘(諱)는 무엇인데 충성스러움과 절조가 이와 같이 빼어나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함이니,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큰 절목(節目)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정씨는 고려말엽 문정공 이후로 위헌(義軒) ․영모정(永慕亭)․사례당(思禮堂)․묵헌(黙軒)․일헌(逸軒)․창주(滄洲) 공과 같은 큰 덕과 훌륭한 업적, 또 경원공(慶源公)과 애죽헌공(愛竹軒公)의 충의로움이 있어서, 널리 세상에까지 빛을 드러내며 국사(國史)와 야사(野史)에도 드러난다. 아아, 이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그 이후에도 충과 효, 절개와 의에 대해 선조들의 아름다움을 따라 행하여 세상에 드러난 분들이 많도다, 많도다!

▶설재서원 :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649(문화재자료 제93호).

 

지(誌)나 명(銘), 그리고 음기(陰記)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죽은 다음에 쓰는 문장들인데 세상에 살아 있을 때의 행실과 치적(治積)을 반영하여 싣는 것들이다. 장록(狀錄)과 실기(實記) 그리고 입언(立言)이라고 하는 것도 군자가 재량하여 채택하는 규칙이라는 점에서는 한가지이다. 이에 옛 판본에 편집되었던 행장(行狀)과 비갈(碑碣)들 및 새로이 편찬된 행장과 비갈들을 모두 모아서 두 권으로 만들어서 대보(大譜)의 다음에 합쳐 편집하였다.

후대의 후손들이 이것을 보고 느끼면 다만 선조들을 사모하는 정성스러움에만 젖어들 뿐만이 아닐 것이다. 또한 후일에 선조들의 무훈(武勳)을 따르고 선조들의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이 있어 계승해 나갈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아! 덕업(德業)과 문장(文章), 충효와 절의가 이 책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진본(眞本)을 그대로 베끼는 것과 같은데, 그 진본이란 바로 진실된 마음이므로 가히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책이라야 선조들의 마음과 덕을 우러러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덕업은 마음을 미루어 나간 것이고, 문장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며, 충효는 마음의 근본이요 절의는 마음이 서는 바이니, 오늘날에 살면서 옛날 선조들의 마음을 우러러 사모하는데, 이 책을 버리고서 장차 무엇으로써 할 수 있겠는가?

 

6. 琴下翁日卒 宴序

天生干而六推 地生支而五合 先後相去六旬有一 而日有是日 盖天地之策一也. 竊念斯世不辰之悲有生所同 然生而壽福兼康寧者有幾. 今翁 苟不能壽而康寧 必無是日. 無時日 亦無是宴 而是日也 遂成大會 亦豈無獻壽之禮. 彩衣一班 令棣一班 婿與姪一班 肖孫一班 姻親宗黨一班 次苐成列 各以誠獻 今其獻壽之盃 未知幾許巡 假使一巡加之以一年之壽 益享百壽無疆 宜矣. 遇益祇以族弟 立宗黨之末 敢獻壽盃.

略陳窘辭 伏以頌之曰

錦嶽崢嶸 有水洋洋. 齊貌翼然 琴聲在床.

聽者爲誰 惟翁自彊. 修福由天 天不能違.

積祥不一 本無貳岐. 吉慶兼全 亦無殊爲.

棣園眞樂 惟塤與篪. 瑟豈無絃 三生可期.

苗裔振振 十百螽斯. 種德爲基 福祿日滋.

林泉肥遯 孰毁櫝玉. 宜濟康寧 味道益篤.

聖訓多辱 於公何辱. 願言百壽 年壽自足.

6. 금하옹수연서

하늘은 10간(干)을 만들어 여섯 번 미루고, 땅은 12지(支)를 내어 다섯 번 합하여 앞뒤 서로의 거리가 61이면 날도 다시 그 날이 돌아오게 되니, 이는 모두 천지가 계획한 것 중의 하나이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이 세상에서 환갑을 맞이하지 못하는 슬픔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다 같이 느끼는 바인데, 장수하면서 또 근심 걱정이 없는 것까지 겸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지금 옹께서 진실로 오래도록 건강하지 못하였다면 반드시 이러한 날이 없었을 것이며, 이러한 날이 없었다면 또한 이러한 잔치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큰 모임을 열게 되었으니 어찌 술잔을 올려 장수를 비는 예의가 없을 수 있겠는가? 효성스러운 자식들이 줄지어 있고, 우애로운 형제들이 줄지어 있으며, 사위와 조카들이 줄지어 있고, 손자들도 줄지어 있으며, 인척들과 가문의 어른들도 있는데, 차례대로 줄을 지어서 각각 정성으로 술잔을 올린다. 이제 그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이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지만, 가령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일년을 더하도록 한다면 백 살을 넘겨 만수무강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같은 가문의 아우로써 집안 어른들의 끝자리에 서 있다가, 공경하는 마음을 더하여 감히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리면서 궁색한 말로 짧게 하였으니, 삼가 엎드려 송축하며 말씀드리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금악산 우뚝한데 넘실넘실 물 있다네.

단정하게 좌우로 서있는데, 거문고 소리 단상에 있네.

듣는 사람 누구인가, 건강하신 옹(翁)이로다.

복(福)을 닦음은 천명을 따라야 하니 천명은 어길 수 없는 것.

복(福)을 쌓음이 한결 같지 않지만 본래 두 갈래가 아니라네.

길함과 경사 모두 갖추어 더 이상 할 것이 없구나.

체원(棣園)의 참된 즐거움, 오직 나팔과 젓대소리 울리네.

비파(琵琶)에 어찌 현(絃)이 없을 손가, 삼생(三生)을 기약하리라.

후손들 많고 많으니 열로 백으로 번성하겠도다.

덕을 심음이 기틀 되어 복록(福祿) 날로 불어난다.

자연 속에 은거하니 누구라서 흠잡을까.

아름답고도 편안하시니 도(道)의 맛이 도타워지네.

성현의 가르침도 때로 욕을 받지만 공에게는 무슨 욕이 있겠는가. 백수(百壽)하시라 말씀드리고자 하니 연수(年壽)에 만족하시리.

 

7. 鶴亭日卒 辰韻帖序

鶴亭月城人. 日訪余于茶泉弊廬 袖示一冊子 乃自家晬辰韻帖也. 請識之 余曰 “甚矣. 子之不善謀也. 豈以五采之有文 欲辦於瞽者耶. 余或有文 是固不敢當. 況以不文 安可以遽爲哉.” 申請之辭不獲. 己起敬之讀了 自不覺心目之怳然也. 首題原韻 其劬勞之感 允洽於心 油然自發 而微見於咨嗟詠歎之餘者 是矣. 省內諸賢酬唱詩 慰其主翁所感 而丁寧特賀之意 溢於律句 可是皆出於性情之正 而各言志者也. 吁 其盛矣乎. 若夫音律多小 余所不嫺 安敢貫諸 惟其平淡和易覃神凝思之工 宜以擬諸唐宋律體 而俗尙音律之詩 未可與同日語爾. 嗚呼! 古詩三百 靡不宜洽 惟「蓼莪」獨得孝子至誠之意 而不忘劬勞. 故今原詩得之 而賡和數十項 深感其至誠之意 慰賀滿萬而各得詩體 固詩人之情也. 孰有以甲乙評其微義乎. 余亦興感于玆 因以爲序系詩.

7. 학정수진운첩서

학정(鶴亭)은 월성 사람으로 하루는 다천(茶泉)의 누추한 오두막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보여주니, 바로 학정의 집안에서 환갑 잔치 때 주고받은 시첩(詩帖)이었다.

그 책을 한 번 보고 판별해 줄 것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심하도다, 그대의 계획이 좋지 못함이여! 어찌 빼어나게 광채가 나는 문장을 가지고 눈먼 소경에게 보아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내가 문장에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문장에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갑자기 이 책을 보고 판별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거듭되는 부탁의 말에 사양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공경스럽게 다 읽어보니, 이로 인해 마음과 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멍해졌다.

책의 첫 머리에 써있는 원운시(原韻詩)는 그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수고로운 느낌이 마음에 젖어들어 자연스럽게 넘쳐나니, 탄식하고 감탄하는 나머지에 희미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책 안에 있는 뭇 현인(賢人)들이 주고받은 시를 살펴보면, 그 주인 옹의 감상을 위로한 것으로 간곡하면서도 특별히 축하하는 뜻이 시 구절 속에서 넘쳐나니, 이는 모두 성정(性情)의 바름에서 나온 것으로 각자의 뜻을 말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아, 성대하도다! 대저 다소간의 음율(音律) 같은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익숙하게 아는 바가 아니니 어찌 감히 모두 꿰뚫어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그 평담(平淡)하고 온화함, 그리고 깊이 있는 생각에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율시(律詩)에 비견함이 마땅하니, 세속의 음율만 맞추는 시들과는 같은 날 함께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아, '시경(詩經)' 300편의 시들이 마음에 젖어들지 않는 것이 없지만, 오직 「요아(蓼莪)」만이 홀로 효자의 지성스러운 뜻을 얻어 부모님께서 수고로이 길러주신 은혜를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원래의 시를 얻어서 수십 편의 시로 창화(唱和)하였으니 그 지성스러운 뜻을 깊이 느껴 위로함과 축하함이 넘쳐나 각각의 시체(詩體)를 얻었으니, 이는 진실로 시인의 정(情)이다.

어떤 누가 있어서 잘하고 못했다는 것으로써 그 시들의 은미한 뜻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이 첩(帖)을 보고 감흥이 일어나니 이로 인해 서문(序文)을 써서 시의 뒤에 붙인다.

 

8. 錦涯翁日卒宴序

翁素以錦城古家 世于玆土 忠孝家法 淵淵不墜 至于翁 苗裔甚蕃 竊惟不食之報 天理固不誣矣. 壬午八月五日卽翁之初度日也. 今日之時 固非他年比者矣. 亢旱太甚 農夫幾乎無秋 而自月初雨 枯者潤 渴者澤 田野更期有秋 于時也翁之晬宴適大開. 苟或今而不雨 則宴之有無 難可必也. 然則翁之晬宴 乃天賜之也. 天今賜之 翁獨受之何. 庭實生華 彩衣班舞 獻壽之禮也. 宴實有光 峨冠敷帶 飮酬之儀也. 那可以宴羞之高下 稱道今日之勝事乎

8. 금애옹수연서

옹(翁)은 평소 금성(錦城)의 오래된 집안으로 이 땅에서 대대로 이어온 것은 충효를 가법(家法)으로 삼아 끊이지 않고 이어왔기 때문이라 여겼다. 옹의 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매우 번성하였으니, 저으기 생각하건대 이는 조상들의 음덕에 힘입은 것으로 하늘의 이치는 진실로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임오(壬午)년 8월 5일은 바로 옹이 처음 태어난 날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 때는 진실로 다른 해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극에 달한 가뭄이 너무도 심하여 농부들은 거의 수확을 기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월초부터 비가 내려 마른 곡식에 윤기가 돌고 메마른 땅에 물을 대니, 논과 밭이 다시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때에 옹의 환갑잔치가 크게 열리게 된 것이다. 실로 혹시 지금도 비가 오지 않았다면 잔치를 열었을지 열지 않았을지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공의 환갑잔치는 바로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하늘이 이제 내려준 것을 옹이 홀로 받음이 어째서이겠는가?

마당 가득 꽃이 피어 효성스러운 자녀들이 색동옷을 입고 줄지어 춤을 추니, 이는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술잔을 올리는 예이다. 잔치에 실로 빛이 나며 높은 관과 띠를 둘렀으니 수창(酬唱)하며 술을 마시는 의례이다. 어찌 잔치에 차린 음식들의 좋고 나쁨으로써 오늘의 이 훌륭한 일을 칭찬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9. 贈鶴圃隱居別業序

洞以靑鶴名 古矣. 人今地古 遇如朝暮. 今古相間 抑未知幾千載. 幾千載之間 地不遇人而藏在塵表 祇是空山棄物而已. 今而後幸有余山人而仍作隱居別業. 異哉! 人地相待亦明矣. 然雲林泉石 天地間公物 以公物把作自家別業 顧不迂歟. 嗚呼 今日何日 身苟隱矣 莫若隱其名 而翁今名姓益著播在人間 只怕尊名字浼於俗累. 願翁更收拾之 留於松風蘿月之間. 是亦苟全之一策耳 顧盛算 豈不及之.

9. 증학포은거별업서

고을이 청학(靑鶴)으로 이름 붙여진 지가 오래 되었다. 사람은 지금 사람이고 땅은 옛 땅으로 아침․저녁으로 마주하지만, 지금과 옛날이 서로 떨어진 것이 또 몇 천년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몇 천년 동안에 땅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세속의 바깥에 감추어져 있다면, 다만 이것은 빈 산이요 버려진 물건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후로 다행히 이러한 산사람이 있어 여기에 은거하기 위한 별장을 지었으니 기이하도다, 사람과 땅이 서로 기다린 것이 또한 분명하구나! 그러나 구름과 숲과 샘물과 바위들은 이 천지 사이의 공물(公物)인데, 이 공물(公物)을 가지고 자신의 별장으로 만들었으니 생각해보면 어리석지 아니한가?

아아! 오늘이 어떠한 날이던가? 구차스럽게 몸을 숨김은 그 이름을 숨기는 것만 못하거늘 옹은 이제 이름이 세상에 더욱 파다하게 드러나 알려졌으니, 다만 두려운 것은 존귀한 이름이 세속의 일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이다. 원컨대 옹께서 다시 이를 수습하여 소나무에 부는 바람과 덩굴 사이로 뜨는 달이 있는 자연 속에 머문다면, 이 또한 몸을 보전하는 하나의 방책이 될 것이다. 가만 생각하면 어찌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10. 陽川許氏家乘譜序

 

代許氏作

泰山喬嶽 苟無脈絡一統 祗恐不久而有崩圮之患. 江淮河漢 苟無派脉之本源 亦恐以時有枯渴之歎. 矧惟居乎萬物之上而爲人者 繼其先脉是已.

嗚呼. 陽川之族 居于京鄕 其分派之宗 世代不甚遠. 厥後文武官顯 彼多此寡 子姓亦有閥閱之不同. 但以厥先視之 則兄弟連氣而同 是大小宅耳. 惟我十二世從叔祖諱某 自乘桴以來 顯顯章甫 未克敵耦於伯仲. 然孝悌之方 世襲典型 述爲傳家之妙法. 吁 其盛矣乎.

余觀夫湖右古家名族 孰有不由孝悌爲始 而厥門成立者歟. 惟松軒公後昆某某 因襲傳世乘牒 自往春奮發葺譜之議 積誠一歲有餘而越明年春單事畢 葺事貴速耳. 京族適有修撰之議 以合編之意 勤眷告諭 竟未能合之者 單有遲速故耳. 於是僉宗講好於敦敍之中 屬余以讐校之役 辭不獲 妄僣攷校. 彌數月之久 而編旣次就諸繡束 束而歇功 目之曰松軒公派家乘譜 乃一家史乘優矣. 輒開卷 不惟敦睦之誼 油然感發於中 譬猶一根之木 開花敷葉 芳春向榮者也. 日後大譜合編之日 愼勿以眉山之晩合觀之則幸耳.

10. 양천허씨가승보서

허씨(許氏)를 대신하여 씀.

태산과 높은 산들은 진실로 하나로 합쳐지는 산의 줄기들이 없다면, 다만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붕괴되는 근심이 있게 될까 두려워 할 것이며, 양자강과 회수, 황하와 한수도 진실로 모여드는 지류(支流)들의 본원(本源)이 없다면, 또한 말라붙게 되는 한탄이 있게 될까 두려워한다. 하물며 만물의 위에 거하여 사람이 된 자로서 그 선조들의 맥을 계승함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황하:중국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중국 제2의 강.

 

아! 양천(陽川)의 종족들이 경향(京鄕)에 살고 있는데, 종족에서 분파(分派)되어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이후 문관․무관으로 드러난 사람들이 저기는 많고 여기는 적으며 자손들도 또한 벌열(閥閱)이 된 집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집안도 있어 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선조를 보자면 형제로써 기를 타고남이 같으니, 이는 큰 집, 작은 집일 뿐이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12대 종숙조(從叔祖)인 모(某)께서 분파하여 이곳으로 물러 나오신 이래로 빛나게 이름을 떨친 후손들이 능히 큰집, 둘째 집에 미칠 만큼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효제(孝悌)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대대로 세습하여 집안에 전해지는 묘법(妙法)으로 삼았으니, 아아, 성대하도다! 내가 보기에 호우(湖右) 지방의 오래되고 이름난 가문 중에, 어느 가문이 효제로부터 말미암아 시작으로 하여 문호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겠는가?

송헌공(松軒公)의 후손되는 사람들이 대대로 전해지는 승첩(乘牒)을 그대로 따랐었는데, 지난 봄부터 분발하여 족보를 고쳐 편집하고자 의논을 하였다. 1년여의 시간이 걸려서 한 해를 넘겨 다음 해 봄에 그 일을 마쳤으니, 고치는 일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서울에 있는 종족들도 마침 족보를 고쳐 편찬하려는 의논이 있어서, 책을 합하자는 뜻을 조심스럽게 알려왔지만 끝내 합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단지 그 일이 더디게 되고 빨리 되었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따름이다. 이에 모든 가문의 사람들이 친목과 우애를 도모하던 중에 나에게 책을 대조하여 교정하는 일을 부탁하니, 사양하고자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여 망령되이 살펴 교정을 보게 되었다.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 책을 이미 수를 놓아 엮도록 부탁하여 빨리 그 일을 마치고는 제목을 달기를 송헌공파가승보(松軒公派家乘譜)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한 집안의 역사로는 충분한 것이다. 문득 책을 펼쳐보면 돈독하고 화목한 뜻이 마음속에서 유연히 일어날 뿐만이 아니니, 비유하자면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가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하여 꽃다운 봄철에 아름답게 되는 것과 같다. 훗날 대동보(大同譜)를 합편(合編)하는 날에 신중히 하여 미산(眉山)이 늦지 않게 함으로써, 대동보(大同譜)에 합해지는 것을 본다면 다행이겠다.

 

11. 餞敏菴兄敍 (慶南固城九萬面華林里崔弘洛)

戴天履地而譯天地之不言 言行動作可以經天地而立綱倫 着冠裾者 惟人是已 而如吾無狀 生同覆載 克己而不能復孝悌之性 學問不能於今古事物之情 只是息食 生平一憂不可解則老農不免是也. 人之不文莫我若而以余謂之文 文其容易者哉. 其擴也 天地萬物同吾一體 而其所著也. 如日月星宿之見乎天 而昭昭焉者爲文 故天無不文之天 聖無不文之聖 而苟不文 天只是理 聖只是性 書契以前 亦其無胜者之聖乎. 盖堯舜周公孔子之道 未有盛於先後天地 而昭示諸天下萬世者 非文而何 然則 冠衿恐德容之文也. 人而無冠衿草木不如 而尊駕之枉臨也. 不靧不楖而待之 且古之君子樂不去身 而今知己相酬亦無鼓瑟而疇之 顧草木之不如固非一二也. 春則花而葉其文也. 風則籟而簧其樂也. 早年熟讀聖人之文以爲切己之學 則不如之歎亦其我事乎. 惟吾兄勿以損友謂之見損 而益戒勵萬千 則所益多於益友矣. 行之哉. 時惟淸和 君子有行適在干是 是道長之日也. 只希行邁勿慥慥 敘遲安詳 則眼前摠是眞境 而伏地垢陰必不容 於所履底 爾不爾 則陽極太亢 而亢則招損天理之所難免 一步底戒懼之 二步底戒懼之 步步猶是 則碩果復生不遠其日 而春和方暢 都是自家胸中物 仰想盛度優矣. 德量伏伏必先我之 而損德之言何足掛耳. 但恐錦不辭細針之刺黼黻f成章 然故致煩申申.

11. 전민암형서 (경남 고성 구만면 화림리 최홍락)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면서 천지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언행과 동작이 천지를 경륜(經綸)하고 강륜(綱倫)을 세울만 하며, 의관(衣冠)을 착용하는 것은 오직 사람일 뿐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극기(克己) 공부를 하면서도 효제(孝悌)의 성품을 회복하지 못하고, 학문을 하면서도 고금사물(古今事物)의 실정에 밝지 못하며, 다만 숨이나 쉬고 밥이나 축내고 있을 뿐이니, 평생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 근심은 늙은 농부로 일생을 마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문(文)에 능하지 못한 사람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문(文)에 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文)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겠습니까?

넓은 의미로는 천지 만물을 내 한 몸과 같이 여기고, 그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나타난 것처럼 환한 것이 문(文)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면서 문(文)하지 않은 하늘은 없고, 성(聖)이면서 문(文)하지 않은 성(聖)은 없습니다. 만약 문(文)하지 않다면 하늘은 다만 이(理)일 뿐이고 성(聖)은 다만 성(性)일 뿐입니다.

서계(書契) 이전에도 문(文)이 결여된 성자(性者)로서의 성인은 없지 않았습니까?

요순(堯舜),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도가 선후 천지(先後天地)보다 성한 적이 없었는데 천하 만세에 환하게 보여준 것이 문(文)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관과 옷을 착용하는 것은 덕용(德容)의 문(文)입니다.

사람으로서 관과 옷이 없으면 초목(草木)보다 못한데 당신이 왕림하였을 때 세수하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고서 대접하였으며, 또 옛 군자는 음악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기(知己)간에 고슬(鼓瑟)이 없이 수작(酬酌)하였으니, 돌이켜 보건대 초목만 못한 것이 참으로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봄으로 말하자면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것이 그 문(文)이요, 바람으로 말하자면 뢰(籟)가 울리고 황(簧)이 울리는 것이 그 음악입니다.

일찍부터 성인의 문(文)을 숙독(熟讀)하여 나에게 절실한 학문으로 삼았더라면 남만 못해서 탄식을 하는 것이 어찌 나의 일이겠습니까? 오직 형께서는 손우(損友)라고 하여 손해를 본다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 천만배로 경계하고 근면하시면 도움되는 것이 익우(益友)에게서 보다 많을 것입니다.

잘 가십시오.

때는 4월인데 군자가 길을 떠나는 것이 마침 이때 있으니 먼 길 가기 좋은 날입니다.

다만 바라기는 먼 길을 너무 열심히 가지 말고 천천히 여유있게 가면 눈앞이 모두 진경(眞境)이어서 반드시 복지구음(伏地垢陰)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는 곳 마다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陽)이 지극해져 크게 넘치게 됩니다. 넘치면 손해를 초래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한 걸음을 걸을 때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두 걸음을 걸을 때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걸음걸음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큰 성과가 다시 생기는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한창 화창한 봄날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당신께서는 잘 지내시겠지요. 당신의 도량이 넓고 넓어 필시 나보다 먼저 생각하고 계실테니 부족한 제 말에 귀를 귀울일 필요가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비단은 가는 바늘이 찌르는 것을 마다 않기 때문에 화려한 보불(黼黻)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번거롭게 거듭 거듭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2. 追敍 (餞敏菴)

日月之逝也. 日復日 而昨今恒如其日 故人不知其此日不復日 此辰不復辰 至于四十五十而無聞焉. 莫知其顧惜 老益怠惰不己 吾兩地別離異乎是. 日去知日去 月來知月來 夜寢寤寐夙興悵悵不忘在心 今焉三朔 而三月以違 尊君子輔仁之仁 其於胸塞之歎亦何以哉. 余嘗讀論孟以來自謂之 並聖三月不違仁 或可學之 則可學云 於今始覺妄想之踰 而悚然日退 祗恐如是不已 則與鄕人同歸 亦一戒 昻想仙園眞境迢乎野人所居 園松籬菊梅月梧竹 宜皆先先生玩心之物也. 一自吾兄離鄕之日 必也朝則風鳴 夜則月宿 舍情待歸 則嚮日臨分 余之心雖曰紆 鬱貴中梅竹與松菊之怡顔恰如雨露新霑 而門庭無塵 是松風之爲也. 室堂如掃 梧月之照也 想主翁之愛無所間然 故物之所以輸情益厚者爾 矧惟雲林泉石天賜之公物 而自厥先因作傳受之物 聯二十世 而百物益章 寔由厥先至善至德攸致也. 那可以眞箇嘉境苟要其外物好者也歟. 惟冀心守之善德如之 則庶乎不棄基於來百者宜矣. 戒之哉. 吾將引領而願言.

12. 추서 (민암을 전별하며)

날과 달은 가는데, 날이 다시 반복되어 어제와 오늘이 항상 그 날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날이 다시 이날이 아니고 이때가 다시 이때가 아닌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십 살, 오십 살이 되도록 도(道)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으면서도 시간을 아까워할 줄 모르고 늙을수록 더욱 게을러질 뿐입니다.

나와 당신이 이별한 것은 이와 달라서 날이 가면 날이 가는 것을 알고, 달이 오면 달이 오는 것을 알며, 밤에는 자다 깨다 하다가 일찍 일어나게 되고. 슬퍼하며 마음에 잊지를 못한지가 지금 석 달이 되었습니다. 삼 개월이나 떨어져 있으니 덕이 높은 당신의 보인지인(輔仁之仁)이, 나의 가슴이 막혀서 하는 탄식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일찍이 논어와 맹자를 읽은 이래 아성(亞聖)의 삼월불위인(三月不違仁)의 경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비로소 망령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 날마다 움츠려듭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시골 사람과 같이 될 것 같아 두려울 뿐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의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선원 진경(仙園眞境)은 야인(野人)들이 사는 곳보다 훌륭하겠지요. 동산의 소나무와 울타리의 국화, 매화, 달, 오동나무, 대나무는 선생보다 먼저 마음으로 아끼는 물건입니다.

한번 형이 고향을 떠난 날로부터 반드시 아침에는 바람이 울고, 밤에는 달이 와서 자며 정을 머금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니, 저번에 떠날 때 내 마음이 비록 우울했지만 당신의 매죽(梅竹)과 송국(松菊)이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흡사 우로(雨露)가 새로 적셔준 듯 하여 문과 뜰에 먼지가 없으니, 이것은 솔바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방과 마루는 빗자루로 쓴 듯하니 오동나무에 걸린 달이 비춰준 것입니다.

생각건대, 주인옹(主人翁)의 사랑이 간섭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사물이 정을 보내는 것이 더욱 후한 것입니다.

하물며 운림천석(雲林泉石)은 하늘이 내린 공물이며 그 선조가 물려준 것으로, 이십 대에 걸쳐 내려왔는데도 백물(百物)이 더욱 화려하니 이것은 그 선대의 지선지덕(至善至德)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참으로 하나의 가경(嘉境)을 놔두고서 구차하게 외물(外物)의 좋은 것을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직 마음을 지키는 선한 덕을 종전과 같이 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앞으로 백세 동안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계하십시오.

목을 늘어뜨리고 당신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13. 孝烈夫人吳氏柳氏贊頌契序

嗚呼. 三綱之原 出於天 脗合日星 彌綸河嶽 寔爲天下萬世立人紀之大綱. 故天下萬世國風與民風之正不正 實由閭巷閨婦職不職如何爾. 泛觀則比諸男職 猶歇后 然尤有難之者存焉 二綱倂行 不悖然後 婦職盡矣. 夫人姓吳 親籍羅州 考諱貞圭 翰林諱以翼后. 年甫踰笄 適于羅州鄭公悳. 會公前配海南尹氏諱英柱女 生一男 喪前配 繼而行醮 未幾而沒. 舅老矣 子幼矣 闋三年而又三期 舅亦下世. 前子養育無異親生 年未弱冠 娶于高興柳公弘錫女. 纔一男而遽夭 乳又不免懷而折 一家之變可謂玄黃飜覆矣. 鄕里咸驚怛之曰 天道無心 使二孝烈 無子無孫. 晝哭聲澈天 天亦不吊乎. 姑與婦相顧相依而歎曰 先舅姑以下祀事 奈何係於吾與爾. 立心如何 則各自決志下從以順其天 可乎. 百慮一蔽 篤志扶門 不至祀事永絶 是吾當職. 以族親衆子之最賢者 亦爲輔宗相奉祀一節. 躬兼外內官 今五十年. 所先舅之曾孫甲勉子炳玉立爲嗣孫 而幼未能孰事. 每忌日戒之曰 奉先凡百苟用 今日之誠則而受多福 庶乎鄭門更昌矣. 姑年今八耋有五 婦年七耋有四 老益不懈 誠敬一如 可謂終身慕效不忘之孝烈也. 余恐死於烈一瞬 生於烈百年 孰敢以一瞬之烈 濫加於百年之烈乎. 目今世降孝烈 密比文飾. 造孝金銷鑄烈誣蔽天眼 天其見誣而眼蔽也歟. 今夫二孝烈之貞心 與天一通 專一之行 行於一家 隣里閨婦之效 捷於影響 其有輔於民風小乎哉. 嗚呼 悲夫. 今年春鄕隣欽服其行 竭誠出力署名一帖 而命名曰孝烈婦贊頌契也云.

13. 효열부인오씨유씨찬송계서

아아! 삼강(三綱)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으로 해와 별에 꼭 들어맞으며 널리 강과 산들도 두루 다스리니, 이는 천하에 만세토록 사람 된 도리를 세우는 큰 강령(綱領)이다. 때문에 천하만세에 나라의 풍속과 백성들의 풍속이 바르고 바르지 않음은 실로 여항(閭巷)이나 규방(閨房)의 부녀자들이 직분으로 삼고 직분으로 삼지 않음이 어떠한가에 말미암을 뿐이다. 데면데면 보면 남자들의 직분에 비해서 오히려 적은 듯하지만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이 있으니, 삼강 중의 두 가지를 함께 행하여 어그러지지 않은 뒤에라야 부녀자의 직분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강행실도:조선 세종 때 엮어진 도덕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 등 3강(綱)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한 책이다.

 

부인의 성은 오씨이고 친가의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의 휘는 정규(貞圭)이고, 한림(翰林)인 휘 이익(以益)의 후손이다. 나이가 겨우 관례를 치르자마자 나주 정공(鄭公) 덕(悳)에게 시집을 왔다. 이때 정공은 첫번째 아내 해남 윤씨 휘 영주(英柱)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었는데,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이어서 결혼을 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시아버지는 늙고 아들은 어렸는데,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삼년이 지나자 시아버지 역시 세상을 떠났다. 오씨는 전부인의 아들을 자신이 직접 낳은 아들과 다름없이 양육하였고, 아들이 약관(弱冠)의 나이가 채 되기도 전에 고흥(高興) 유공 홍석의 딸과 결혼을 시켰는데, 겨우 하나있는 아들이 갑자기 요절(夭折)하여, 젖먹이가 품을 벗어나기도 전에 죽은 것과 같으니, 한 집안의 변고가 가히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 했다고 할 만하다.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하늘도 무심하시지. 두 효부 열녀에게 자식도 없고 손자도 없게 하시는구나. 낮에도 곡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는데 하늘도 또한 위로하지 않는가?” 하였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서로 돌아보고 서로 의지하면서 한탄하여 말하기를 “돌아가신 시부모님 이하의 제사들이 어찌 나와 너에게 관계가 되겠는가? 마음을 어찌 먹어야 하느냐하면, 각자가 결심하고 남편을 따라 죽어 하늘의 도리에 순히 하는 것도 옳을 것이다.

그러나 온갖 생각들이 하나로 인해 가려지니, 가문을 부지하는데 뜻을 두터이 하여 제사를 받드는 일이 영영 끊어지는데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감당하여야 할 일이다. 친척들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현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종족을 돕게하며 제사를 받드는 것 일절을 돕게 하리라.” 하고, 몸소 안팎의 일을 아울러 관리한 지가 이제 오십 년이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증손이 되는 갑면(甲勉)의 아들 병옥(炳玉)을 대를 잇는 자손으로 삼았는데, 어려서 모든 일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매번 기일(忌日)이 되면 병옥에게 경계하도록 하여 말하기를 “조상을 받드는 데에는 모든 일들을 갖추어 써야 한다. 오늘 정성을 들인다면 너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니, 정씨 가문은 또다시 창성(昌盛)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어머니는 지금 나이가 여든하고도 다섯이고 며느리는 나이가 일흔 넷인데, 나이가 들어가도 더욱 게을리 하지 않아 정성과 공경스러움이 한결같으니, 가히 종신토록 효성과 정렬(貞烈)을 잊지 않고 본받은 것이라 할 만하다.

내 생각에는 죽어서 정렬을 지키는 것은 한 순간이요, 살아서 정렬을 지키는 것은 백년이나 걸리는 것이니, 어느 누가 감히 한순간의 정렬로 외람되이 백년의 정렬에 덧붙일 수 있겠는가! 지금 풍속이 쇠퇴한 이 시대에 효열(孝烈)을 보자 하니, 저으기 겉을 꾸미는 것에 비견된다.

효를 만드는데 쇠를 녹여 열(烈)이라는 틀에 들이붓는 듯하여 하늘의 눈을 속이고 가리려 하니, 하늘이 어찌 속임을 당하고 눈이 가리워지겠는가? 지금 저 두 효부(孝婦), 열부(烈婦)의 올곧은 마음이 하늘과 하나로 통하고 한결같은 그 행실이 한 집안에 행해지며, 한 마을 부녀자들이 그들을 본받음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르니, 어찌 백성들의 풍속에 보탬이 되는 것이 적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올해 봄 고을에서 그들의 행실에 감복하여 정성을 다하고 힘을 내어 한 첩자(帖子)를 만들고는 제목을 붙이기를 효부․열부를 기리는 계(孝烈婦贊頌契)라고 하였다.

 

14. 滄洲公位土葆存契序 (庚子)

盖自生民以來 先王制禮 未有盛於三代 而三代之制奉先之禮 自天子達於庶人 禮別尊卑. 奉先之誠 自天子達於庶人 誠無貴賤 誠所以禮之實也. 然無物 祭禮不備 而誠無所施矣. 由來名家世族 孰不有享先位土乎. 我十六世祖景武公 禮葬之阡 在於羅州. 治白龍山而厥後聯葬世定 至于思禮堂及滄洲公墓 四五代享祀位土 曾有定制. 滄洲以下二三世墓 亦有私門土略一石種落 至于今二百有餘祀矣. 苟非先世積誠攸曁 烏能及此乎. 余恐誠極則禮備 禮備則物豊 享先 儀禮之本然也. 子百孫千 誠一不貳而和如一室祗 以先世之誠心爲心則厥先之誠心 聯爲千百子孫心上之誠 亦以先世之享禮行禮則厥先之享禮 傳爲千百子孫心上之行禮矣. 土部多寡 何有間然乎哉.

14. 창주공위토보존계서 (경자)

무릇 사람들이 생겨난 이래로 선왕들께서 예법을 만드심에 삼대보다 더 성대했던 적은 있지 않으며, 삼대의 시대에 제정한 선조들을 받드는 예법을 보면 위로는 천자(天子)로부터 아래로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예법으로써 존귀하고 비천함을 구분하였으나, 선조들을 받드는 정성에 있어서만큼은 위로는 천자부터 아래로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귀천이 없었으니, 정성스러움이 예의 실질이 된 이유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이 없다면 제사를 지내는 예법이 갖추어질 수가 없으니 정성 또한 베풀어질 바가 없다.

유래 깊은 명문가와 오래된 가문들 중에 어느 누가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논과 밭을 가지고 있지 않으리오? 우리 십육대 선조이신 경무공(景武公)을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른 장지(葬地)는 나주에 있는데 백룡산의 터를 닦아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연이어 장사를 지내어 대대로 장지를 정하였으니, 사례당(思禮堂) 및 창주공(滄洲公)의 묘에 이르기까지 4대, 5대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논과 밭은 이미 정해진 제도가 있었다. 창주공 이하로 2대, 3대 선조들의 묘에 대해서도 또한 한 섬 정도가 나오는 가문의 토지가 있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여년 동안 제사를 치러왔다.

진실로 조상들께서 앞 시대에 정성을 쌓아 닦아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러한 정도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정성이 지극하면 예의가 갖추어지고, 예의가 갖추어지면 물산이 풍부해지니, 선조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은 의례의 자연스러운 것이다. 많고 많은 자손들이 정성스러운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나뉘지 않아서 한 집안인 것처럼 화목하게 되고, 선조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삼는다면, 그 선조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천명 백명 많은 자손들 마음속의 정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 선조들이 제사를 지내던 예로써 예를 실행한다면, 그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던 예가 천 명 백 명 많은 자손들의 마음에 예를 행하는 것으로 전해질 것이다. 땅의 많고 적음이 어떻게 선조들과 후손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수 있겠는가!

 

15. 羅州鄭氏庚子花樹會序

 

代作

乾坤定位 萬化生焉 而物各類分 是天理中一氣不雜之義. 是以杏仁種之 杏而不桃 桃仁種之 桃而不杏. 物之有類苟如是 矧惟人而不如乎. 我鄭氏雪齋以上三世 始有得姓而曷嘗以徒花爲榮乎. 幹枝茂著 恰宜松子生於松而四時春光者 今七百有餘祀矣. 和暖方暢之意 不敢擬諸喬木之榮 亦可有光于槿春 而傍樹亦皆生色 外內睦婣之風 尙今遺傳 葆葆得乎裔昆心上之香 烏可與凡常花心之香比諭乎. 窃伏念丁壬盛會 恰是春和方暢 向陽花木 自然春自然花 況又詩話 宜香韻流動 暖日佳景 畵寫得眞 若而至今 銘服不已. 雖云未刊銘服之銘 其於紙面繡棗 顧何如哉! 今日之會 慕堂熙勉述事之力也. 距今先後相間百有餘年 會心敍倫 毫髮無違 而但禮酬齒高爲德. 只恐先規紊例 將何以得中. 曾子曰 “和而中節謂之中” 是亦時中之義也歟. 嗚呼 禮讓以設席 含杯悅話 恰然乎含露花心 朝日含露之像 琴鼓恊音 詩以言志 恰然乎花風微動 蝶舞挹香之格. 然花貴其實 莫將徒花而稱美焉. 然則那物爲花 花物之榮華 形外而易得之 但實在那中花心結子是也. 今以會事言之筆之 而書其實以爲裕後計 是宜會之實也. 余聞澆花者 必先灌其根願. 諸宗必先懋其實 則槿域回春之日 孰知其三十六宮 亦爲我一樹春光乎. 勉乎哉.

15. 나주정씨경자화수회서

대신하여 씀.

하늘(乾)과 땅(坤)의 위치가 정해지고 만물이 생겨났다. 만물은 제각기 분류되어 있는데 이는 하늘의 이치가 하나의 기로 이루어져 있고 잡다하지 않음이다. 살구의 씨를 심으면 복숭아가 나지 않고, 복숭아씨를 심으면 살구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만물도 그 종류에 따라 분류되어 있거늘, 하물며 사람이 사물보다 못 하겠는가?

우리 정씨는 설재공(雪齋公)의 3대 위로부터 비로소 성씨를 갖게 되었는데, 어찌 일찍이 다만 아름다운 것만을 영화로움으로 삼고자 하였겠는가? 줄기와 가지가 무성하게 드러남이 마치 솔방울과 같으니, 소나무에서 태어나 사계절 모두 봄빛을 띤 지가 이제 칠백 여 년에 이르렀다. 따뜻함 속에 바야흐로 펼쳐지려는 뜻을 감히 교목의 영화로움에 갖다 댈 수는 없으나, 또 봄날에 빛이 있으며 곁가지들도 또한 모두 생기를 내니, 친척과 외척들 사이의 화목한 풍습이 지금까지도 전해져 후손들의 마음의 향기로 무럭무럭 피어나게 되었으니, 어찌 평범한 꽃향기와 비유할 수 있겠는가?

공손하게 생각해 보건대 정임(丁壬)의 성대했던 모임은 마치 봄날 따뜻함이 베풀어짐에, 해를 마주하는 꽃나무들이 자연히 봄빛을 띠고 꽃을 피우는 것과 같았다. 하물며 시화(詩話)에는 향기로운 운치가 흘러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고, 따뜻한 날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림 속에 참을 얻은 듯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마음에 새겨두어 잘 지켜서 잊어버리지 않음에 있어서랴! 비록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 그 문장을 책으로 펴내어 간행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종이에 쓰여 책으로 묶여 있으니, 돌아보면 어떠하겠는가? 오늘의 모임은 모당(慕堂) 희면(熙勉)씨가 선조들의 사업을 계속하고자 노력한 덕분이다. 지금과 그 때가 앞뒤로 서로 떨어진 것이 백여 년이나 되는데, 마음을 모으고 차례를 정하는 데에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다. 다만 예법에는 술잔을 올리는 데 나이가 많은 것을 덕으로 삼으니, 그저 걱정스러운 것은 앞서 전례에 어긋난 것을 장차 어떻게 하여야 중용의 도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증자께서 “조화를 이루어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中이라 한다.”고 하셨으니, 이 또한 ‘그 때의 사정에 가장 적합하다(時中)’는 뜻일 것이다.

▶중용언해: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중용》에 한글로 토를 달고 풀이한 책.

 

아아, 예의에 맞게 사양함으로써 자리를 베풀고 가득한 술잔으로 기쁨의 말을 하니 이는 꽃술이 이슬에 흠뻑 젖어 아침 햇살에 이슬을 머금고 있는 것과 꼭 같으며, 거문고와 북으로 음을 맞추고 시로써 뜻을 말하니 이는 마치 바람에 꽃이 살짝 움직여 나비가 향기를 품고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격조이다. 그러나 꽃은 그 열매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다만 꽃만을 가지고 아름답다고 칭찬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즉 저 꽃이라는 사물에서 꽃이 사물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이는 외형적이며 얻기 쉬운 것이고, 다만 그 실질은 꽃 안의 꽃술에서 열매를 맺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이제 모두가 모였던 일을 말하는데 글로 써서 기록을 하니 사실은 후대를 위한 계획으로 삼고자 하는 것으로써, 이것이 의당 이 모임의 실제 뜻인 것이다. 내가 듣기에 꽃에 물을 뿌려 주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뿌리에 물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여러 집안들이 반드시 먼저 그 실질적인 것에 힘을 쓴다면, 우리나라 무궁화 강산에 봄이 돌아오는 날, 우리나라의 조정에 또 우리 정씨가문 한 나무의 봄빛이 드리워지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힘쓸지어다!

 

16. 麟庭遺稿序

天賦一也 學之則本善復矣 而可爲士可爲儒. 苟不學則宜崑出之玉 美則美矣 琢磨不及而器惟不成爾. 然其學也 苟不切己 徒文尙華 則文雖工矣 猶器空自鳴 孰有以尙其韻馨乎哉. 是以 君子之學 不尙文華 而文亦在中 恰如身着錦繡 外襲之以褧 其文自然之著也. 文可泛視乎. 我松山之門 究得徵蘊而篤實之士 靡不多矣 惟習齋羅丈 吾先君升軒公之好學也 止齊李公辛公心 史之能知言也 而皮其文辭 只麟庭得矣. 噫 今先輩丈德旣沒 公亦追而逝 痛乎! 痛非我私 爲其松山之文 而痛益迫切矣. 今其肖㣧聖模甫 蒐葺片尺之文於巾笥之中 謁于松下翁 泣請編葺之 固不辭擔是役 而弁卷之文 老耄神昏 屬余爲之 不獲辭. 覽其遺文 辭旨簡雅 表裏黙符 微合松山奧旨者 多矣. 生平用工心力盡著於此 庶其人亡而心不亡乎! 彷彿乎陽着七分面對耳. 略陳在世日 以講萬一之誼爲之序.

16. 인정유고서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은 한결같아서, 배우면 본래의 타고난 선한 성품을 회복하여서 벼슬도 할 수 있고 유자(儒者)가 될 수도 있다. 진실로 배우지 않는다면, 곤륜산에서 나온 옥돌이 아름답기는 아름답지만 갈고 다듬는 데에 미치지 못하여 그릇으로 완성되지 못한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배움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 아니라 한갓 문장에서의 화려함만을 숭상한다면, 또한 비록 문에는 공을 들였으나 도리어 그릇이 비어 절로 소리가 울리는 것과 같으니, 누가 있어서 그 소리와 향기를 숭상하겠는가? 이런 이유로 군자의 학문은 문장이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아서 문장 또한 내 마음 속에 있으니, 이는 흡사 몸에 비단 옷을 입고 겉에 홑옷을 입어 비단옷을 가렸다 해도 무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문장을 범범하게만 볼 수 있겠는가? 우리 송산(松山)의 문호에 연구하여 터득하고 심오한 것을 밝혀 돈독하게 실천하는 선비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오직 습재(習齋) 나공만은 돌아가신 내 아버지 승헌(升軒) 공께서 호학(好學)이라 하신 분이셨고, 지재(止齋) 이공은 신공 심사께서 남의 말을 잘 알아듣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문사(文辭)에 있어서는 단지 인정(麟庭)만이 얻을 수 있었다. 아아, 지금 선배 어른들의 덕이 사라져 버렸는데, 공 또한 그 뒤를 쫓아 떠나가 버리니, 애통하구나! 애통해 하는 것은 나만의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요, 송산의 문장 때문에 애통함이 더욱 절박한 것이다.

이제 그 후손인 성모라는 분께서 상자 속에서 조각난 글들을 모아서 송하(松下)옹을 뵙고 눈물을 흘리며 편집해 줄 것을 청하니 진실로 사양치 못하고 이 일을 맡았으나, 책의 서문은 늙어 정신이 혼미하다하여 나에게 부탁하여 쓰도록 하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남겨둔 글들을 살펴보니 말의 뜻이 담박하고도 우아하며 겉과 속이 묵연(黙然)히 부합되어 송산의 심오한 뜻에 은미하게 합치되는 것이 많았다. 살아있는 동안 공을 들이고 마음을 쓴 것이 모두 여기에 드러나 있으니, 이는 ‘그 사람은 없으나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같아서, 마치 초상화를 마주 대하는 것과 꼭 같다. 세상에 계시던 날 만분지일(萬分之一)의 떳떳함을 강하시던 것을 간략히 서술함으로써 서문을 삼고자 한다.

 

17. 講益契序

契交之際 甘密在中而甘受益 則損輒遂後 捷於影響 宜君子之所戒也. 但虛心受益 責善及於吾則吾當受之 忠告及於友則友當受之 各自直諒 而以已之善 不獨如己之善 斯契之重任也. 以講之日 以講聖訓謙受益之辭 擴而大則善之漸竟地中有山矣. 凡厥一撮土之積其中 未可窺 矧惟地中有積乎. 嗚呼 天下之物 不善則損 理之常也. 今以善之見利 自作私有 則善之所蘊 顧不淺淺也. 斯及於鄕黨則可謂一鄕之所同益也. 及於邦國則可謂一國之所同益也. 勉矣哉. 苟分刻纔差 自滿乘謙 則不惟招損 心中地山 必壞亦當 以戒愼恐悃 誓作克終之善 固所願言耳. 余蔑識 祗要求益 契末署名 亦妄矣. 古人謙虛 實若虛之 虛非其全虛也. 而今吾所有 無實本虛 不惟自發於相益之道 與簣簣受土 江漢塡流 無異矣. 然春講秋會 五益之益 一想不難耳.

17. 강익계서

계(契)를 맺어 교제하는 사이에 꿀처럼 감미로운 것이 존재한다. 달게 이로운 것만 받는다면 손해가 문득 뒤를 따라 생겨나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를 것이니 마땅히 군자가 경계해야할 것이다. 다만 마음을 비우고 이로움을 받아들여야 하니 착한 일을 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나에게 미치면 나는 마땅히 그 권고를 받아들이고, 충고의 말이 친구에게 미치면 친구는 마땅히 그 충고를 받아들여 각각 스스로 곧고 진실하여 자기와 같은 선함만 바라지 아니하니 이것이 계(契)의 중대한 임무이다.

선함을 깨우쳐 주는 날에 마음으로 성인의 가르침인 "겸손함은 이로움을 받는다."라는 말씀을 배워 확충하여 크게 한다면 선함이 점점 변하여 마침내 겸손함[지중유산(地中有山)]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무릇 한 움큼의 흙을 쌓는 것도 그 속은 엿볼 수 없는데 하물며 오직 땅 속에 쌓인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아, 천하의 만물이 선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이치의 일반적인 것이다. 지금 선함이 이롭다는 것을 스스로 체득한다면 선함이 축적되는 바가 얕지 않을 것이다. 살고 있는 지역에 적용시킨다면 “한 지역이 함께하는 동일한 이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에 적용시킨다면 “한 나라가 함께하는 이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니 힘써 노력할지니라.

진실로 선함이 나누어져 조금이라도 어긋나고 스스로 자만하여 겸손함을 업신여기게 된다면 다만 손해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겸손함도 반드시 무너질 것이니, 또한 마땅히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선함을 실천할 수 있기를 맹서하니, 이것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내가 지식도 없으면서 다만 이로움만을 구하고자 하여 계(契)의 끝자락에 서명하는 것도 또한 망령되도다. 옛 사람들은 겸허(謙虛)하여 내실이 있으면서도 마치 텅 빈 것[虛] 같이 하니, 빈 것[虛]이 완전히 빈 것[虛]이 아니거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실은 없이 빈 것[虛]에 근본하고 있으니 다만 스스로 서로 이롭게 하는 도리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삼태기로 흙을 담아 강물을 메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도다. 그러나 봄에 강학(講學)하고 가을에 회합하는 오익(五益)의 선함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18. 興感止齋遺稿敍

古人之學 尙其德 其爲文也不尙 徒華而華則乃性之華也. 及其章也 不徒文章 而章則乃德之章也是以性之所著 文以華之 德之所發 文以章之 至若千語萬言 不費其心而自警自戒 訓戒及人之辭矣. 噫 今世衰道降 文弊日謬 作家手筆 但文華勝之 未嘗有眞實際語 辭迂義蔽 或者馳務愈遠 而礎雲基霞 作室於太虛之中者有之 甚矣章句之弊 至於如此乎. 惟公之文 得於躬行之餘 文不及古人 然文則文矣. 而在世行治 七分模寫爾. 然則三分那處在 確立天彛之中 未著於筆泚之下乎. 抑蒐葺未之盡也歟 其所著也. 文不甚工 詩不甚琢 宜自然於性情之中 而辭蘊意切 不露踈迂之氣 斯可以見本德行而末文藝耳. 不知者以謂長於詩 我則未也. 句句恊音 文以章之 文與詩宜非不同輪 凡一鼎烹羔 一邊味善調 一邊味不善調 未之有也. 昔紫陽夫子贊杜工部曰 詩聖杜工夫之文 不如杜工夫之詩 而然乎哉. 後之覽者欽其文義 服其心於百世之下可也爾.

18. 흥감지재유고서

고인의 학문은 덕(德)을 숭상하고 문장은 숭상하지 않는다. 문장을 지음에 다만 화려함만 숭상하지는 않으나 화려한 것은 곧 성품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장(章)이란 것은 다만 문장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장(章)은 바로 덕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품이 드러난 문장은 화려하게 되고, 덕이 드러난 문장은 빛나게 된다. 아무리 많은 말도 그 마음을 허비하지 않고 스스로 경계한다면, 이 말이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는 말일 것이다.

아, 지금 세도가 쇠퇴하여 문장의 폐단이 날로 심해져, 작자의 글쓰기는 다만 문장이 화려함만 숭상하니 진실된 말이 없어져 말이 현실과 떨어지고 의리는 가려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더욱 요원한 곳으로 치달려 기초가 구름과 노을처럼 아득하여 텅 빈 곳에 집을 짓는 것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니 심하도다, 문장 짓는 것의 폐단이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오직 공의 문장은 몸소 실천한 넉넉함에서 얻었으니 문장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문장은 역시 뛰어난 문장이다. 세상에 남은 것은 70% 정도 모사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30%는 어디에 있는가? 천도를 확실히 세우는 가운데 아직 저술하지 못하였는가, 아니면 모두 다 수습하지 못하였는가? 그의 저술은 문장이 매우 공교롭지 못하고, 시는 매우 정밀하지 못하니 성정(性情)에서 자연스럽게 발하였기 때문에 말은 함축적이고 뜻은 절실하며, 소원(疏遠)한 기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덕행을 근본으로 하고 문예를 말단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모르는 사람은 시를 잘하였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시는 구절구절 협운(協韻)하였으며 문장은 화려하게 하였으니 문장과 시를 동일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한 솥의 고기국은 한 숟가락만으로 그 국이 맛있는지 맛없는지를 알 수 있다.

옛날 자양부자(紫陽夫子:주희)가 두보(杜甫)를 칭찬하며 말하기를, “시성(詩聖) 두보의 문장은 두보의 시보다 못하다라고 하는데 과연 그렇겠는가!”라고 하였다. 후대에 보는 사람들이 그 문장의 의리에 감복하고 그 마음에 감복하니 백세(百世)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 同庚契序

天而無干 地而無支 天地不立矣 是故 天始於子 地開於丑 而人之始也. 亞於子丑而生於寅 抑天地陰陽五行之氣 化成於寅而胎化也歟 天道之玩亨利貞 卽人性之仁義禮智矣. 作爲人紀 極天罔墜而日用常行 倫彛之正路也. 契交講信 亦其非講倫之一路也哉. 矧惟同庚之生 宜天定之交也. 雖不契情尤於人 而契而結交 益可愛爾. 今夫同庚九人 生於癸丑 舊干昭陽 舊支赤奮若爾. 幸戴一天而生 幸而同一干支 幸而又同鄕井 宜可謂天倫之契交也. 亦將有一說告之者 丑宜太古地闢之丑 而仍作同庚之丑 第念古之丑 亦今之丑 然九人人始之兄弟 而今又同庚而作契 契員統是九人矣. 宜非太古之九人明確 而九則九耳. 不惟今日之契交 而傳爲世交 則幸也云.

19. 동경계서

하늘에 천간(天干)이 없고, 땅에 지지(地支)가 없다면 천지는 존립(存立)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은 자(子)에서 시작되고, 땅은 축(丑)에서 열렸으며, 사람의 시작은 자(子)축(丑)보다 뒤늦은 인(寅)에서 생기게 되었다. 천지 음양(陰陽) 오행(五行)의 기운이 인(寅)에서 완성되어 배태된 것이리라. 천도의 원형리정(元亨利貞)은 인성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인류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영원히 추락하지 않아 날마다 떳떳하게 사용하는 것이니, 인륜의 바른 길이다. 계(契)를 맺어 사귀고 믿음을 일깨워 주는 것 역시 인류 깨우치는 한 가지 길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같은 해에 태어난 것은 하늘이 정해준 교분(交分)이니 비록 사람들과 정분이 맞지 않더라도 계를 맺어 사귀는 것은 더욱 아름답도다.

이제 동갑 9인이 계축년에 태어났으니, 고갑자로 천간은 소양(昭陽)이요 고갑자로 지지는 적분약(赤奮若)이다. 다행히 한 하늘이 이고 태어났고 다행히 동일한 간지에 태어났으며, 다행히 또 한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천륜(天倫)의 계교(契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설(說)을 말하는 사람이 '축(丑)은 태고에 땅이 열리는 축(丑)'이라 하였는데, 함께 태어난 지지(地支)도 축(丑)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옛날의 축(丑)이 지금의 축(丑)이지만 아홉 사람은 시초에 형제였으나 지금 또 같은 해에 태어나 계(契)를 지으니 계원은 모두 아홉 사람이지만 태고의 아홉 사람이 아닌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아홉은 아홉이다. 다만 오늘의 계교(契交)일뿐만 아니라 세교(世交)를 맺으면 다행이겠다.

 

20. 乙酉譜序

天覆地載 靈於物而爲天地之實者 乃萬姓也. 盖人自有姓 尊世系辨昭穆 周官小史氏始而至于唐宋 譜法昉于世譜 家世之寶鑑譜其徒然哉. 鄭氏舊貫麟山 今珈倻山在榮山 世于羅州 以羅州爲貫 亦久矣. 軍監公諱諧始 于麗季三世而有文靖 三世有戶判 文靖五世有景武 景武四世有思禮堂 繼而黙軒逸軒滄洲趾美而作 逸軒滄洲兩先生德業文章 宜可百世推服 而仍爲分派之中顯矣. 自後嫡嫡相承 或以文武顯 或以忠勳著 豊功偉績 史不絶書 是不惟之盛閥 雪齋先生名 顯上國 至今 華人亦知其有麟山氏 吁 其盛矣. 夫上自祖宗 倫源一統 流于百世 萬千 裔昆 同受其氣 而亦各有身 竊念此身攸在 皮裏百骸 莫非軍監公一元氣之流也 使後昆欲知其以一會萬 不譜而何 惟大譜自肅廟辛亥 至于純廟甲戌 續編續葺 凡六七而甲刊遽被秦毒 僅存壁書而已. 於是 族祖榕氏族姪熙 勉行勉爰謀修述 己有年矣 但秦焚日甚 前轍證鑑 不遠在目 故猶未果矣. 快乎嬴秦忽望 自是日門議詢 同不幾月而合單就刊 比諸大譜 似太簡矣 是命家乘譜 而若夫譜體 一遵舊譜例 然舊譜一張尊六世以象天理六盡七來復之義 今也尊四世以象 天地有四正 萬物各得其所 而生生不已之義也. 惟不已 故子能述其父 孫亦述其祖 貫百千世而記不忘 是倫理之本然 譜體之自然也. 苟或爲人後 而未知其某之孫某之後 則人其人乎. 嗚呼 時睽路滯 遠居諸族 猶未廣蒐 擎手開卷 慊然若失 而分合以天 則合編亦無其日乎 恰然目睹 固所願言耳. 專恩冒義 挽近譜家之通 患浴譏 今雖不免 惟恕我者時也. 固執其義而不通於時 則惟罪我者 亦其非時中乎. 盖家譜貫世之器 父父子子兄兄弟弟之道 盛貯該載而已.

20. 을유보서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줌에 사물 중에 신령스러워 천지의 실체가 되는 것이 바로 온갖 성씨(姓氏)이다. 대개 사람에게 성(姓)이 있음으로부터 계보를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별하게 되었다. 주관(周官) 소사씨(小史氏)로부터 당송에 이르기까지 보법(譜法)은 세보를 모범으로 하니 집안에 전해지는 보감(寶鑑)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정씨의 옛 관향은 인산(麟山)인데, 대대로 나주에 살았기 때문에 나주로 관향을 삼은 것이 오래되었다. 고려 말 군감(軍監)공 휘 해(諧)에서 시작된다. 3세를 지나 문정공(文靖公)이 있고, 3세 뒤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있으며, 문정공의 5세손에 경무공(景武公 鄭軾:1407~1467)이 있고 경무(景武)의 4세손에 사례당(思禮堂)이 있다. 이어 묵헌(黙軒)․일헌(逸軒 鄭諶:1520~1602)․창주(滄州 鄭詳:1533~1609)가 태어났으니, 일헌(逸軒) 창주(滄洲) 두 선생의 덕업과 문장은 백세토록 추존하여 지금도 여전히 분파의 중현조(中顯祖)가 된다. 이 뒤로 적장자(嫡長子)들이 계속 이어져 어떤 이는 문무(文武)로 이름을 떨치고 어떤 이는 충성으로 드러나니 높고 위대한 공적(功績)은 역사에 끊이지 않았다. 이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성대한 문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설재선생(雪齋先生)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또한 인산씨(麟山氏)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아, 성대하도다.

위로 조종(祖宗)으로부터 원류가 통일되어 백세(百世)에 이르렀으니 많은 후손들이 함께 그 기운을 받았으나 또한 각각 몸이 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 몸이 있는 곳은 피부 속 뼈이지만 군감공(軍監公)의 한 원기(元氣)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없도다. 후손들에게 원기(元氣)를 알게 하고자 한다면, 족보가 아니면 무엇으로 할 것인가!

대보(大譜)는 숙종(肅宗) 신해(辛亥)부터 순조(純祖) 갑술(甲戌:1814)까지 편집하고 모은 것은 무릇 60-70%였으며, 첫 번째 간행한 것이 갑자기 화재를 당하여 겨우 감추어 두었던 것만 겨우 남았을 뿐이었다. 이에 족조(族祖) 용씨(榕氏)와 족질(族姪) 희(熙)가 힘써 노력하여 편집할 것을 도모한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다. 다만 일제의 검열이 더욱 심하여 전날의 불행이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쁘게도 일본이 갑자기 망하니, 이 날부터 문중에서 의논하여 몇 달 사이에 단권(單券)으로 합하여 간행하니 대보(大譜)에 비하여 너무 간략한 듯하였다. 이에 집안마다 족보를 정리하게 하고, 족보의 체제는 한결같이 옛날 족보를 따랐으나 옛 족보는 한 장에 육세(六世)를 배열하여 천리(天理)를 본떴는데, 6이 다하면 7이 오는 것은 회복하는 의미이다. 지금은 사세(四世)를 배열하여 천지에 사시가 있음을 본떴는데 만물이 각각 그 마땅한 바를 얻어 끊임없이 자손이 이어지는 의미이다. 오직 어쩔 수 없어 자식이 그 아버지를 기록하고, 손자가 또한 그 조부를 기록하니 백천세(百千世)를 관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윤리의 근본이며 족보의 자연스러움이다. 만약 혹 후손이 되어 누구의 손자인지 누구의 후예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아, 시대는 어지럽고 거리는 멀어 멀리 사는 여러 친족들은 아직 널리 수집하지 못하였으니, 족보를 펼침에 부족하여 빠진 듯하나 빠진 것을 합치고 모은다면 합편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흡족한 마음으로 보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이다.

지금 비록 면하지 못할 것이나 오직 나를 용서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일 것이다. 진실로 그 의리만 지키고 시대에 유통되지 못한다면 오직 나를 죄주는 것도 또한 시중(時中)이 아닐 것이다.

대개 가보는 세대를 꿰뚫는 그릇이니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며,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다운 도가 모두 이곳에 성대히 실려 있기 때문이다.

 

21. 乙未世譜序

譜家史也 秋春作而亂臣賊子 懼而不容於天下萬世 譜法立而誣先冒襲 懼而不與於嫡正一統 譜法其嚴乎. 竊惟吾鄭之先系 始於麗季軍監公諱諧公 以前文獻 莫可證 至三世文靖公諱可臣雪齋先生 倡明道學 蔚爲東邦儒宗. 自後文武官 顯趾美而作 黼黻王庭 靖難錄功 寵賜恩眷 聯世不乏 滄溪林公艶稱錦城之大樑者 是稱爾 閥閱宜可爲冠諸南州 奈自叔季以降 門祚漸薄 冠冕立朝 掌學議政 猶不如 然德蔭攸曁 氏葉菜矣. 若務若咸各省諸郡之宗 今以文靖視之 則脉絡一氣之連 宜同簡合編 而道途相殊 未及詢議 世譜續葺 猶如是難矣. 夫幸玆迬春各郡僉宗 齊會于永慕齋 議旣洽 自至月蒐葺之讐校之. 翌年乙未春正月晦朔之交 付諸剞劂之不幾月而繡棗竣工 事貴速耳. 嗚呼 綱一擧而萬目張 領一擧而百縫隨 是事理之自然也. 譜亦猶是 循其事理之自然 而以盡人紀之本原 則筆其不誣而庶乎免矣. 客年春編成逸軒世譜 又今春葺成是譜 宜子夜底千門開消息也. 祗幸後之來裔 覽是譜而求其本 則孝悌之心 油然感發 咸一萬千心而同歸於惇親之域 勉之哉. 忘僭系以詩

黃河千載淵淵水 濁不溷淸元脉來 分派以源流不息 萬頃波面月圓開.

21. 을미세보서

족보는 한 집안의 역사이다. 춘추가 지어지자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며 천하 만세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보법(譜法)이 세워지자 선대를 속여 편입하고자 하는 이들이 두려워하며 적통(嫡統)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보법은 엄하도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정(鄭)씨의 선조는 고려 말 구감공(軍監公) 휘(諱) 해공(諧公)에서 시작된다. 공 이전은 문헌을 고증할 수 없다. 3세 문정공(文靖公) 휘 가신(可臣) 설재(雪齋) 선생에 이르러 도학을 창도하고 밝혀 우뚝히 동방 유학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그 뒤 문무 벼슬로 현달한 이들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 왕실을 보위하고 난을 평정하여 공신으로 기록되어 임금의 총애와 은혜가 누대 동안 그치지 않았으니, 창계(滄溪) 임영(林泳)이 칭찬한 ‘금성(錦城)의 큰 대들보’라는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다.

▶나주정씨 족보.

 

벌열(閥閱)은 당연히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 되나 말세 이래로 가문의 복이 점점 쇠퇴하여 벼슬길에 나가 조정에 서서 학문을 관장하고 정치를 의논함은 오히려 전과 같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상의 음덕이 미치는 곳에는 자손이 매우 번성하였다.

무안(務安), 함평(咸平) 등 각 지역 여러 군의 종실(宗室)은 문정공을 기준으로 보면 맥락 일기(一氣)가 연결되었으니 마땅히 함께 모아 합편(合編)해야 하나 지역이 서로 달라 묻고 의논함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세보(世譜)를 엮고 편집하는 것이 이와 같이 어렵도다.

다행히 지난 봄 각 군의 여러 종친들이 모두 영모재(永慕齋)에 모여 의논한 것이 이미 흡족해져 동짓달부터 수집하고 교정하여 이듬해 을미(1895) 정월 그믐과 초하루 사이에 판각하도록 준 것이 몇 달도 되지 않아 아름답게 일을 마치게 되었는데 일은 빨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영모재:충북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충북유형문화재 제176호.

 

아, 그물의 벼리를 한 번 들면 모든 그물눈이 펼쳐지고, 옷깃을 한 번 들면 옷 전체가 딸려 오니 이것이 사리의 자연스러움이다. 세보 역시 이와 같으니 사리의 자연스러움을 따라 인륜 기강의 근본을 다한다면 필설(筆舌)을 속일 수 없어 거의 실수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봄에 일헌세보(逸軒世譜)를 편성하였고, 또 올해 봄에 이 세보를 편집하였으니 마땅히 자정(子正)에 모든 관문이 열리는 소식이라 할 것이다.

다만 다행히 뒤의 후손들이 이 세보를 보고 그 근원을 구한다면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뭉개 뭉개 구름처럼 생겨나 천만 가지로 나누어진 마음을 모아 한결같이 종친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경지로 들어갈 것이니 노력할지니라.

참람(僭濫)됨을 잊고 시를 덧붙인다.

황하의 천년 동안 깊고 고요히 흐르는 물이여

흐린 물이 맑은 물에 섞이지 않는 것은 원맥이 오기 때문일세.

분파는 근원이 있음으로써 그치지 않으니

만경(萬頃)의 넓은 물결 위에 달이 둥글게 비치네.

 

22. 贈別李雅士國信序

君東遊 作錦城之行 同吾遊三朔 錦城風物 庶可爲吾君錦囊物矣. 想錦文日章 內而不出 知者鮮矣. 然素履儒雅 多讀古人書記 覽南州山水之勝 得於心者多矣. 前頭進就 孰可量乎. 以時對晤 吾君有所長 則益於我 我有所長 則益於君 所益難可權衡 然受人之量偏隘 君之所與不能盡受 況衰耗之所長 多乎哉. 今爲臨別 悵何可言 錦城風物 好則好矣. 而槿藩不花 五百年文物 倂悴而盡 錦城亦無顔 徒以雲林泉石之可玩 孰可曰好云乎哉. 想惟故園風景 山是太古 水亦如之 松也竹也. 歲寒相守 雪梅霜菊秋香 﨟葩不屈於東西風擾 四時春光一如舊國物態 則還鄕日 卽可玩賞 以靑氈舊業 把作自家傳守心法 亦以古人書籍 一作經几畵屛 寧孰不若形役玩物之爲愈乎. 今以璿源派流 以時涵泳乎前王遺澤 日誦湯盤日新句 亦可爾. 幸副吾願否 臨別底懷 雖云悵矣 心相照矣. 何患乎別離 只以七絶五絶贈言 門軒如待天然立 籬菊庭梅舊蘊湥 百里靑山雖遠隔 心淸無礙契吾心 靑山無物我 明鏡異形多 心本山如靜 動時佩鏡何

22. 증별이아사국신서

그대가 동쪽으로 떠남에 금성으로 간다하니, 우리가 함께 노닐었던 3개월 동안 금성의 풍물은 아마 좋은 그대의 금낭(錦囊)의 물건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건대, 그대의 아름다운 문장이 날로 빛을 발하나 감추어두고 드러내지 아니하니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그러나 평소 행실이 고아하고 옛사람의 글을 많이 읽었으며, 남주(南州)의 빼어난 산수를 보고 마음에 얻은 것이 많을 것이니, 학문이 진보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때때로 마주하여 대화함에 그대에게 장점이 있으면 나에게 이익이 되고 아에게 장점이 있으면 그대에게 이익이 되었으니, 서로 이익이 되는 바는 저울질하기 어렵도다. 그러나 남에게 받는 양은 적으나 그대가 주는 바는 다 받을 수가 없거늘 하물며 노쇠한 나에게 장점이 많겠는가! 지금 이별함에 섭섭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금성의 풍물이 좋기는 좋으나 무궁화 울타리에 꽃이 피지 않고 오백년 문물이 모두 피폐하게 되었으니 금성도 또한 볼품이 없도다. 다만 운림(雲林) 천석(泉石)의 아름다운 경치도 누가 좋다고 말하겠는가! 고원(故園)의 풍경을 생각건대, 산은 태고 적부터 있었고 물도 또한 그러하다. 소나무는 날씨가 추워져도 푸르름을 지키고, 눈맞은 매화나 서리맞은 국화는 가을에도 향기나며 파초는 동서(東西)로 부는 바람에도 굽히지 아니하니 사시의 봄빛이 모두 옛나라의 물색(物色)과 같다면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청전(靑氈) 구업(舊業)을 자신이 지키는 심법으로 삼고 또한 고인의 서적을 책상받침이나 화병으로 삼는다면 수고롭게 공부하는 것이 더 나음만 못할 것이다. 지금 왕족의 후손으로 선왕의 남긴 은택에 젖어 날마다 탕(湯)의 반명에 새겨진 ‘날마다 새로워진다’라는 구절을 외운다면 또한 가할 것이니, 혹 나의 바램을 들어줄런지.

이별에 임하는 마음이 비록 섭섭하나 마음이 서로 맞으니 이별에 대하여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다만 칠언절구와 오언절구를 지어 주노라.

우뚝한 집이 주인을 기다리듯 서있으니

울타리의 국화와 뜰의 매화는 예부터 쌓은 것이 깊도다.

백리 청산에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이 맑아 막힌 것이 없으니 마음으로 맺었기 때문일세.

청산은 물아일체가 되었으나

명경은 형체가 다를 때가 많다네.

마음은 본래 산과 같이 고요하니

움직일 때는 거울을 찬들 무엇하리.

 

23. 以正齋自敍

洞以日晴名古也. 四面皆山 別有一局於天地間塵表 亦可謂仙鄕矣. 然而朝炊夕餐 烟出數三家山 卽我先塋 累世封築之阡 雲仙下降 東有聳珍山 筆揷於雲霄 月明谷拱西碧磵淸流 同一沓而大川灣廻 南天別界 大明日月共熙 是可養神畜精之所 玆庸今春移建精舍數棟 錫名以正齋 是室堂之名 妄敢取諸子曾子欲修先正之義也. 余自早年 極力實下底工夫 熟讀古人八世書 與四子書 有誠正修齊窮 理之微奧處 未嘗不潛玩佩服 及夫東方諸先正嘉言善行之可遵則者 亦如之 而大東先師陶山夫子之訓箴 渾然耳提親襲若矣. 然而愚不移化其稟氣之天壤 心檢自得爾. 庶幾萬一之效 在乎若無之中 心求則得之 而終欲躬行之則百不居一矣. 人以文辭置於章句之末 亦過實也. 文可容易得乎. 老益勉勵 去其塵念 捿于碧山 樂乎其山水之自然動自然靜 竊念自然非自然 乃天理乾乾不息也 天下之靜 莫有若山而以何 有息突起伏 天下之動 莫有若水而以何 有湥靜淺動之分 顧余懇懇止於止而不就 異乎山水之動靜也. 期於死而死於吾道之中 故不死之前 黙會古人緖餘 克爲自修之正路 然强壯已過 氣衰質費 則小心不惰 自顧一身之所恃.

23. 이정재자서

마을 이름을 ‘월정’이라 지은 것은 오래되었다. 사면이 모두 산이요, 별도로 천지 사이에 한 지역이 있으니 ‘선향(仙鄕)’이라 이를만 하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밥 짓는 연기나 서너 집에서 올라오니, 이 산이 바로 우리 선영(先塋)이다. 여러 세대 동안 쌓은 무덤길에 구름과 신선이 내려온다.

동쪽에 종진산은 붓처럼 뾰족하게 구름 하늘에 닿아 있고, 월명 골짜기는 서쪽의 푸른 시내 맑은 물을 감싸고 흘러 큰 시내에서 돌아 흐르고, 남쪽의 별천지(別天地)에는 밝은 해와 달이 함께 비춰주니 이곳은 정신을 수양할만한 곳이다. 이런 이유로 올 봄에 정사 여러 동을 옮기고 ‘이정재(以正齋)’라고 이름하니 이 실당(室堂)의 이름은 증자(曾子)가 ‘몸을 수양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뜻에서 망령되이 취한 것이다.

나는 젊어서부터 실천하는 공부에 지극히 힘써 옛 사람들이 여덟 살이면 읽는 소학과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의 책에서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등 궁리(窮理)의 심오한 곳이 있으면 깊이 생각하여 실천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울러 동방 여러 선현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 중에서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도 또한 이렇게 하였으며, 대동(大東) 선사(先師) 도산(陶山 李滉:1501~1570) 선생의 훈잠(訓箴)은 혼연히 귀를 잡아 당겨 친히 가르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부여받은 품성과 기질이 낮은 것을 변화시키고 마음으로 검속하여 자득하는 경지에는 옮아가지 못하였다. 만 가지 중 한 가지 효과라도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내 마음 속에 존재하기를 바라니 마음으로 구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나 다만 직접 실천하고자 한다면 백가지 중 하나도 행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문사(文辭)를 장구(章句)의 말단으로 치부하는 것도 또한 실상에 지나친 것이다. 문장을 쉽게 잘 쓸 수 있겠는가! 늙어서도 더욱 힘써 묵은 생각을 버리고 푸른 산에 살면서 산수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안정되는 것을 좋아해야 할 것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자연은 단순히 자연이 아니라 바로 천리(天理)가 굳세고 굳세어서 쉼이 없는 것이다. 천하의 고요함은 산과 같은 것이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평온하면서도 우뚝하며,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움직임은 물과 같은 것이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깊으면 고요하며, 얕으면 움직이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간절히 그쳐야할 곳에 그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은 산수의 동정(動靜)과 다른 것이다. 죽음을 기약함에 우리 도를 위하여 죽고자 하니, 때문에 죽기 전에 옛 사람들의 서여(緖餘)를 묵묵히 이해하여 스스로 수양하는 바른 길을 잘 실천할 수 있을 것이나 젊고 씩씩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 기력은 쇠퇴하니 소심한 마음으로 게으르지 않고 스스로 이 한 몸이 믿는 바를 돌아보노라.

 

24. 王子還國感傷懷古而自敍

嗚呼 黍離之歎 前王不忘 難忍堪之痛 矧惟 王子强摯于讐敵之手乎. 五十餘年强戴不共之天 强踏不共之地 鬢髮蕭條於島夷星霜 想惟難忍之痛 切骨而腐心者久矣. 奈槿春不華 只有空山明月 連海一隔 杜字啼血之聲 如訟如怨 而曲曲哀號 乃不如歸之號也. 必也一呼則一聞而痛加一 必也再呼則再聞而痛加二 聞輒加痛 故國之思 曲盡於杜宇聲聲頭耳. 寃恨結心 不號則已 號之則讐域山川 統爲血化 而扶桑春色 都是吾王子血染之紅也. 所謂李慱稱復國而宗廟不享 享典永絶 社稷變屋 屋社久墟 彼亦何心纂其國脉 拒王子而不納 罪浮於拒父 祗是復國之名可惜爾. 蔽其先民耳目 徒耽利勢 於心不愧耶. 今以何面目 仰瞻先王之靈乎. 先王之靈 愧不可以仰瞻 則上天之靈 亦將何以哉. 且起鵬見弑而厥子雖云自殺 然罪不容於天地 綱常大變之中 是亦檀史五千年 不有一之穢靑怪史也. 痛乎 上蒼難欺矣. 李慱自竄而王子還國 是宜上臨天鑑昭格而然也. 無知草木悅如風動鼓舞 況乎五百年王化遺澤之民乎. 衆皆歡極而號泣 號非眞號 乃悅極之號 泣非全泣 乃感極之泣也. 前王之靈 如在乎陟降 則其必曰 今以後余有後哉. 前王威儀 今雖不覩 庶可國脈之萬一 復覩也 系以詩.

王孫不作蜀魂春 春初年年怨恨人 讐域風霜經髮白 槿區日月刻心眞 鶴鳴塵樂天宜格 稗害良田地所因 動息若知猶振作 矧惟黎百感傷新

24. 왕자환국감상회고이자서

아아, 나라가 망한 한탄스러움과 전왕(前王)을 잊지 못하는 것도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거늘 더욱이 왕자가 원수의 손에 강제로 붙들려 가 50여년 동안 강제로 원수의 하늘을 함께 이고, 강제로 원수의 땅을 밟으며 섬나라 오랑캐 땅에서 늙어 머릿결이 빠진 긴 세월은 생각건대, 오직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뼈 속 깊이 아파하고 마음을 졸인 것이 오래 되었다.

어찌 무궁화가 봄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고 다만 공산에 밝은 달만 있는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우(杜宇)가 피를 토하며 우는 소리가 하소연하는 듯 원망하는 듯하니, 구구절절 슬픈 소리는 바로 불여귀(不如歸)의 소리이다. 반드시 한 번 울면 한 번 듣고 애통함이 한 번 더 가중되고, 반드시 두 번 울면 두 번 듣고 애통함이 두 번 더 가중되어, 듣기만 하면 애통함이 가중될 것이니 고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두우(杜宇)의 울음소리에서 더욱 간절하기 때문이다. 원한이 마음에 맺혔으니 울지 않으면 그만이나 운다면 반드시 원수 나라의 산천이 온통 피로 변할 것이고 부상(扶桑)의 봄빛도 모두 우리 왕자의 피로 붉게 물들 것이다.

이른바 이단(李慱)이 말한 복국(復國)이란 종묘에 제사지내는 일이 영원히 끊어지고 사직이 변하여 가정집이 되거나 폐허가 되었으니, 저가 무슨 마음으로 나라를 찬탈하고 왕자를 인질로 잡아 돌려보내지 않는가? 그 죄는 아버지의 환국을 막는 것보다 심하니 다만 복국(復國)의 명분은 애석할 따름이다.

백성들의 눈과 귀를 막고 다만 이익과 권세를 탐하니 마음속으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지금 무슨 면목으로 선왕의 영령을 뵙겠는가? 선왕의 영령을 부끄러워 뵙지 못한다면 상천(上天)의 영령을 또한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또 이기붕(李起鵬)이 살해 되고 그 아들이 비록 자살하였다고 하나 죄는 천지에 용서되지 못할 것이니 강상(綱常)이 크게 변하는 가운데 이 또한 단국 역사 5000년에 한번도 없었던 더럽고 부끄러운 역사이다. 아아, 푸른 하늘은 속이기 어렵도다. 이단이 스스로 도망치고 왕자는 환국(還國)하니 이것은 마땅히 하늘이 도와 그렇게 된 것이다. 무지한 초목(草木)들도 오히려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데 하물며 오백년 동안 임금의 교화와 은택을 입은 백성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부르며 울부짖으니, 부르는 것은 슬퍼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지극하여 환호하는 것이며, 울부짖는 것은 슬퍼 우는 것이 아니라 감격이 지극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전왕의 영령이 만약 맴돌고 있다면 반드시 말하기를, “이제서야 나에게 후손이 있게 되었구나.”라고 할 것이다. 전왕의 위의(威儀)를 지금 비록 볼 수 없으나 국운의 만분의 일은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를 덧붙인다.

왕손이 촉나라의 혼이 되지 못하니

봄풀은 해마다 원한이 쌓이네.

원수의 나라에서 세월이 흘러 늙으니

우리나라의 해와 달은 마음을 아프게 하네.

학이 티끌 세상에서 욺은 하늘이 바루기 때문이고,

잡초가 좋은 밭을 해침은 토지 때문일세.

행동거지에 진작함이 있어야 할 듯하니

백성들의 슬픔이 심해짐이랴!

 

25. 永陽契序

茶泉鄭公 養眞於永陽精舍而賦萬川共照懷中月 一室長靑肚裏春 肚裏春諭吾之仁 懷中月諭吾之明德也. 明德與萬像共照 仁與四時長春之旨也. 此非累仁明德之餘韻歟. 德蘊于中而文闇然日章者也. 聞風而雲集者衆 其敎化猶仁風渾渾滿室而薰香襲人 摠是和氣中 授業講道矣. 聞道而悅 薰德而醉 隆師之誠與日益深 遂創契命 以永陽盖取精舍之名也. 舍名亦因所居永平里陽而實寓永續一線陽之義也. 扶陽一心萬㤼益透 不以師之存歿 少有間焉. 講幾十祀于玆矣. 其揖讓 趨蹌 周旋 節宣 可有觀感吁其敬也. 此不已則可以振敎風而吾道 殆復興爾. 余自小少 往往承誨於門屛 歎其悟道之奧矣. 至今 公仙化 余皓首 懷古傷今而已. 雲齋鄭丈芝會命余以弁文 鄭丈家君若齋公之莫逆也. 豈敢辭諸遂爲之序.

25. 영양계서

다천(茶泉) 정공(鄭公)은 영양정사(永陽精舍)에서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을 기르면서

모든 시내 함께 밝음은 가슴속의 달빛 때문이고

한 방이 오래 푸른 것은 뱃속의 봄 때문이네.

라고 부(賦)를 지었다.

두리춘(肚裏春)은 나의 인(仁)을 깨우치고, 회중월(懷中月)은 나의 명덕(明德)을 깨우친 것이다. 명덕은 온갖 사물의 모습들과 함께 비치고 인(仁)은 사시(四時)와 함께 오랜 봄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쌓인 인(仁)과 명덕의 남은 여운이 아니겠는가.

덕이 가슴 속에 쌓여야 문장이 암연(闇然)히 날로 드러나는 것이다.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많았지만 그의 교화(敎化)는 여전히 봄바람처럼 훈훈히 온 방을 가득 채우고 아름다운 향기 사람들을 감싸니 모두 온화한 기운 속에서 수업을 하고 도(道)를 강학(講學)하였다. 도(道)를 듣고서 기뻐하고 덕(德)에 훈도되어 취하였으니 훌륭하신 스승의 정성이 날로 더욱 깊어져 드디어 계(契)를 만들 것을 명하셨다. 정사(精舍)의 이름 또한 영평리(永平里)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지었으니 실제로 영원히 최일선(最一線)의 남쪽에 살겠다는 뜻이다. 양(陽)을 돕는 한결같은 마음은 영원토록 더욱 투영이 되어 스승께서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상관없이 조금도 이러한 마음 벌어짐이 없었다. 이곳에서 강의한지 거의 10년이 되니, 읍양(揖讓)하고 추창(趨蹌)하며 주선(周旋)하고 절도에 맞게 베풀던 것들을 보고 느껴 공경하는 마음 일어났다. 이러함이 끝나지 않는다면 교화가 일어나 우리 유학(儒學)이 거의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아 오도(吾道)의 깊은 뜻에 감탄하였다. 지금 공(公)께서는 돌아가시고 나는 흰 머리 늙은이가 되어 옛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을 상심할 뿐이다. 운재(雲齋) 정지회(鄭芝會)가 나에게 서문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정지회(鄭芝會)께서는 가군(家君) 약재공(若齋公)과 막역(莫逆)한 사이라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그래서 드디어 서문을 쓰노라.

신사(辛巳)년 중추(仲秋) 그믐날

하음(河陰) 후손 봉기종(奉奇鍾)은 서(序)하노라.

 

跋(발)

 

1. 竹軒公遺稿跋

嗚呼 先府君所著詩文 雖不爲多 旣爲本草中散佚 而存者僅十居一二. 於是舍伯懼夫愈久而愈泯 命收拾巾衍以成篇. 不肖烏敢當是役! 但風樹之感油然於心 因號泣而輯成一冊 摠若干項. 謹按辭義 簡而奧 略而不煩. 彫琢之工 雖不及大方家作者手筆. 然使一家來裔亦足以觀感於斯 則爲學之方 庶幾有萬一之效爾. 心鮮與題隆熙年曆句 生平素志積於中 而發於辭表者也. 至若數編文 使吾不肖輩 當職其職 而欲免於禽獸之域耳. 今雖不能奉行遺訓 終身銘佩 豈有敢忘之日乎. 嗚呼. 先君在世之日 先君學業備在先君心上. 先君下世之日 先君篤學之效載在先君遺稿中 可傳者止此而已. 將欲付諸剞劂氏 公於世而壽其傳. 惟非先君本志也 於不肖等重其不孝也夫. 嗚呼 通哉. 壬申十月日出后子遇益泣血謹識.

1. 죽헌공유고발

아아!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지으신 시문(詩文)들이 비록 많은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다 이미 원고가 흩어지고 없어져 버렸으니, 남아있는 것은 겨우 열에 하나 둘 밖에 되지 않는다. 이에 형님께서는 시간이 오래 지나가면 오래 지나갈수록 더욱 많이 없어지게 되어 버릴까 두려워하시어, 상자 속에 담겨있는 글들을 거두어 모아 책을 만들도록 하셨다. 어리석은 이 몸으로 어찌 이러한 커다란 역사(役事)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마음에서 흘러넘쳐, 이로 인해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책 한 권을 완성하였는데 모두 합쳐도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이었다. 삼가 문장의 의미를 살펴보니 간결하면서도 심오하고, 간략하여 번거롭지 않았다. 문장을 꾸민 공력은 비록 큰 나라 문장가의 빼어난 글 솜씨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한 집안의 후예들이 또한 이 책에서 보고 느끼기에는 넉넉하니, 학문을 하는 방법은 거의 만분의 일이라도 효험이 있을 것이다. 심선(心鮮)과 융희년력(隆熙年曆)이라고 제목을 한 시 구절 같은 것은 살아계신 동안 마음에 쌓아두었던 평소의 뜻이 글로써 드러난 것이다. 몇 편의 문장에 이르러서는 우리 불초한 무리들로 하여금 그 올바른 직분을 일삼도록 하시어 금수의 지경을 면하게 하고자 하신 것일 뿐이다. 지금 비록 남겨주신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마음에 새겨 지니고 다닐 것이니, 어찌 감히 가르침을 잊어버리는 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아! 아버님께서 세상에 계시던 때에는 아버님의 학업이 아버님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었고,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는 아버님께서 돈독하게 학문을 하신 효과가 아버님의 유고 중에 실려 있는데, 전할 만한 것이 겨우 이 정도에 그칠 뿐이다. 장차 책을 만드는 이에게 부탁을 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하여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데, 오직 아버님의 본래 뜻이 아니어서 불초한 우리들이 거듭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이다. 아아, 슬프도다!

임신년 시월 양자로 나간 아들 우익이 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2. 滄洲集跋

天苟不欲以我東爲休明之治 先生必不應期而生. 今先生生於穆陵盛世 亦可謂天欲有爲耳. 其時也遇其道也正 而其立朝也 位不稱德 抑何哉. 嗚呼. 邦朋沸起 東賢西疑 西賢東疑 進賢之路 不及於古而然歟. 先生卽我十二世祖也. 之德之忠 宜爲百世推服 而但遺文佚於兵燹 所傳者 若干而已. 囊昔先生後孫振浩氏 蒐集聯世遺績 彙爲五冊 目以錦城聯稿. 五冊中苐四冊 卽滄洲遺集也. 幸玆今春 詢議僉同 逸軒․滄洲兩先生遺集 各爲一部刊行於世 宜可謂子夜一雷底千開門消息也. 噫. 先生之文 粹然備旨 簡奧精深 嗟吾末學之所難窺測也. 然編簡多錯 恐有闕文誤字 而不敢妄遂己意者. 正其字誤 而得其先生本旨則幸矣. 苟且改誤而未獲先生之本旨 則罪益浮矣. 後之覽是集者 恕其不敢妄踰之意只冀.

2. 창주집발

하늘은 진실로 우리 동방으로 하여금 훌륭하고 밝은 다스림을 이룩하게 하고자 하지 않으셨다면, 선생께서는 분명 올바른 시대에 응하여 태어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제 선생께서 목릉성세(穆陵盛世)에 태어나셨으니, 이는 또한 하늘이 훌륭한 사업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훌륭한 시대에 훌륭한 도를 만남은 바른 것인데, 조정에 나아감에 지위가 선생의 덕에 걸맞지 않게 낮았음은 또한 어찌된 일인가? 아아! 당파가 물이 끓듯 일어나서 동인(東人)의 현명한 사람을 서인(西人)들이 의심하고, 서인의 현명한 사람들은 동인들이 의심을 하니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는 길이 옛날의 방법보다 못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선생은 바로 나의 12대 선조이시다. 그분의 덕성과 충성스러움은 오래도록 높이 받드는 것이 마땅하거늘, 그러나 남겨두신 문장들을 전쟁의 병화 속에서 잃어버렸으니 전해지는 것은 약간일 뿐이다. 지난번에 선생의 후손인 진호씨가 세상에 남아 있는 글들을 거두어 모아서 모두 다섯 권의 책으로 만들고 금성연고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그 중의 네 번째 책이 바로 창주유집이었다. 다행히도 올 봄에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논의하여 모두가 동의함으로써, 일헌(逸軒)과 창주(滄洲) 두 분 선생의 유집들이 각각 한 부로 만들어져서 세상에 간행되었으니, 이는 마땅히 ‘한밤중에 치는 한번의 우레에 천개의 집에서 문을 열고 소리를 듣는다.’ 라고 일컬을 만하다. 아! 선생의 문장은 순수하고 뜻이 두루 갖추어져 있어, 간략하면서도 심오하고 정밀하면서도 의미가 깊으니, 아아! 우리 말학(末學)들이 쉽사리 살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장이 짧고 잘못된 곳이 많은데 아마도 문장이 빠지거나 글자가 잘못된 것인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지만, 감히 망령되이 내 뜻을 따라 고칠 수는 없었다. 그 글자가 잘못된 것을 고쳐서 선생의 본래 뜻을 얻는다면 다행이겠으나, 구차스럽게 잘못된 것을 고쳐서 선생의 본래 뜻을 얻지 못한다면 그 죄가 더욱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이 유집을 보는 사람은 내가 감히 망령되이 뛰어넘지 않은 뜻에 대해 용서해 주기만을 다만 바랄 뿐이다.

 

3. 敍心堂鄭君遺稿跋

嗚呼. 君與余 年差甲餘 雖不得以齡友我 君之德可友者余也 君之心可知者余也 余之心亦知而許之者 惟君一人而已. 詎料君先棄余而長逝乎. 噫嘻 悲夫. 君今地下修文殆近十年 容儀難得復面. 然開其遺編 如對七分貌. 吁 其可尙也. 至若經學院應選日 答以朝聞夕 可爲魯論七編中最要云 是篤於聞道者也. 又曰 道者 本乎仁 由乎義 而日用平常當行底云. 是誠於體道者也. 且其在泮日 有人辱孔子者 泮中諸生 試作討檄文 惟公所製得矣. 略曰 尊崇聖人 斯道之大方 聲討亂罪 先王之正經 宜其一部春秋 明於肚裏 而與筆法相資者 有矣. 若詩若文 俱是做課中所著 平深簡易 雖無組繡之工 求學之誠 存心之效 自有掩不得者 存焉爾. 幸而加年則擴而充之 其前進不可量也 奈之何遽至不祿 貽親西河. 難諶者 理也 顔淵之夭逝 明道之不壽 千古以來 學者之所憾. 然那可以夭與不壽 爲歛於聖賢地位乎. 若夫四十五十而無聞焉 生而無益於世敎 死而與木石同歸者 徒壽何爲. 嗚呼 心堂鄭君 生焉而篤於古人之學 沒焉而爲裔昆之準則 吁嗟乎盛矣夫. 苟以來裔觀感於斯 因是稿而肯其堂 因是堂而玩其心 則是編也 足以爲傳家之寶藏宜矣. 因書此付諸卷端云爾.

3. 서심당정군유고발

아아, 정군과 나는 나이가 60여년이나 차이가 나 비록 나이로는 나와 벗이 될 수 없으나, 정군의 덕에 벗해 줄 만한 사람은 나였고, 정군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이도 나였으며, 또한 나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허여해준 사람은 오로지 정군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는데, 뜻밖에도 정군이 먼저 나를 버리고 영영 가버리고 말았도다. 아아, 애통하도다! 이제 정군이 세상을 떠나 땅 속으로 들어간 지 십년이 다 되어가니 그의 모습은 다시 보기 어렵구나. 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책을 펴보면 마치 그의 초상화를 마주하는 것과 같으니, 아아! 높이 숭상할 만 하도다.

경학원(經學院)의 선발시험에 응시하던 날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는 것이 논어(論語)의 제 7편 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적인 곳’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도를 듣는데 독실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도라는 것은 인을 근본으로 하고, 의를 말미암아서, 평상시에 날마다 쓰는 데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도를 체득함이 정성스러운 것이다. 또 그가 성균관(成均館)에 있었을 때에 공자에 대해 욕을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성균관의 모든 유생들이 시험 삼아 그 사람을 성토(聲討)하는 격문(檄文)을 지었는데, 오직 정군이 지은 글이 분명하고 적합하였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성인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은 유학의 근본된 법칙이며, 혼란을 일으킨 죄를 성토하는 것은 선왕의 바른 다스림’이라는 것이니, 한 부의 춘추(春秋)로 마음을 밝혀 춘추의 필법과 서로 바탕이 되는 것이 있었다.

▶영모재:충북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충북유형문화재 제176호.

시나 문장 같은 것은 모두 시험을 치를 때 지은 것인데, 평이하고 심오하며 간략하고 쉬워서 비록 자수를 아로새기는 것과 같은 공력은 없으나, 학문을 구하는 정성스러움과 마음을 보존하는 효과는 자연스레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는 것이 있게 되었다. 요행히 그에게 시간을 보태주어 더 살도록 하였다면 더욱 넓히고 보충하였을 것이니, 그가 발전하여 나아가는 정도는 헤아릴 수도 없었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갑자기 녹(祿)을 버리는데 이르러 부모님에게 자식을 잃는 슬픔을 끼쳤단 말인가!

말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치이니, 안연(顔淵)이 젊어서 요절한 것과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오래도록 살지 못한 것은 옛날부터 학자들이 유감스러워 하던 바이다. 그러나 저렇게 요절하고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이 어찌 성현의 지위에 흠이 될 수 있으리오? 대저 40이나 50살이 되어서 까지도 세상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살아도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는 데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죽어서도 나무나 돌처럼 그렇게 돌아가 버리는, 그러한 사람이라면 헛되이 오래 살기만 해봐야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아, 심당(心堂) 정군은 살아있을 때에는 옛 선인들의 학문을 독실히 익히고, 죽은 다음에도 뒷날의 후학들에게 준칙이 되어주니, 아아, 성대하도다! 진실로 후손들이 여기에서 보고 느껴 이 책으로 인해 선조의 사업을 이어 성취하고, 선조의 사업을 성취하여 이룸으로써 그 마음을 깊이 이해한다면, 이 책은 당연히 집안에 전해지는 보배로운 물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로써 책의 끝에 덧붙이고자 할 뿐이다.

 

4. 跋文

近古謙山李先生之門 多行義志節之士 如茶泉鄭公亦其一也. 余與公同居一閈 受誨懇懇 朝暮承接 其彝倫持行之常 篤學問爽之索奧詳悉 莫吾若而學文則余之師表也. 族世則卄年上姪也 豈可以荒辭拙言畵葫阿私於其間乎. 公以挺特之姿俊英之材 早歲求道好學 如飢渴於飮食之欲 雖世道搶攘 島夷侵陵九有懷襄之時 不少撓奪其志 探頣於經子之奧 諭掖於後進之歸依 以蓄其德於混和自然之中 謹於操餙 嚴於邪正泊如也 則勢利樂如也 則聖訓也. 每侍燕臯比之席 謙翁常稱詡 以文學之贍博 詞章之爽朗而文名大振 蔚然爲省內碩儒. 公性不喜逑文字而但發諸口者 頓無奇巧隱僻而無華不流 率多傷時憂道之辭. 間著者往往有風泉思切而見於檀誌之沿革也. 嗚呼公之德之學之謦咳遺論 固宜廣于世而但因緣時騷 未遑滾滾 因循于玆二十年來矣. 今其肖㣧德勉甫忘其財艱 裒收於兵燹餘 將登繡榟以圖. 公世何其偉哉. 實爲斯文之盛事 亦不尠世敎之裨補也. 若余膚淺 安敢論鴻匠之高下 摩挲遺編 只切感慕之湥而少道如右.

歲辛酉春三月族從芝會謹書

4. 발문

근고 이겸산(李謙山) 선생의 문하에 의리를 실행하고 지조를 지킨 선비들이 많았는데, 정다천(鄭茶泉) 공도 그중의 한분이다. 내가 공과 같이 한 마을에 살았으므로 자상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조석(朝夕)으로 접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공의 윤리에 따라 실행한 독실함과 학문에 정진한 심오함을 나처럼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공은 학문으로 보면 나의 스승이었고 일가붙이로 치면 20년 연상인 족질(族姪)이다. 어떻게 졸렬(拙劣)한 말로 부풀려 아부할 수 있겠는가.

공은 뛰어난 인품과 영민한 재질로 일찍부터 도(道)를 찾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마치 기갈(饑渴)에 허덕인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였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섬 오랑캐가 침략하여 온 천하가 뒤숭숭할 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심오한 뜻을 탐색하고 후배를 가르쳐 귀의(歸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혼합(混合)의 자연 속에서 덕을 축적하였다.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사정(邪正)의 분간에 엄격하였으며 세력과 이 뜻은 담담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즐거워하였다. 강석(講席)에 나갈 때마다 겸산선생이 공에 대해 문학이 풍부하고 문장이 명쾌하다고 칭찬하였는데,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어 도내(道內)의 큰 선비가 되었다.

공의 성품이 저술(著述)을 좋아하지 않았고 입에서 토출된 바도 기교스러운 것이나 괴벽(怪癖)한 것이 전혀 없어 화려하지도 않고 유동하지도 않았으며 대부분 시사(時事)를 상심하고 세도(世道)를 우려하는 말씀이었다. 가끔 저술한 것에 왕왕 부모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는데, 이는 단지(檀誌)의 연혁(沿革)에 나타나 있다.

아! 공의 덕행과 학문에서 발로된 언론을 마땅히 세상에 널리 반포해야 할 터인데 시대가 혼란한 바람에 그러할 겨를이 없어 그럭저럭 20년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지금 공의 아들 정덕면(鄭德勉) 씨가 어려운 형편을 잊고 전란(戰亂) 속에서 유고(遺稿)를 거두어 출간하여 세상에 반포하려고 하니, 그 얼마나 위대한가. 실로 우리 유학(儒學)의 성대한 일이고 또한 세상의 교화에도 보탬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이 얕은 학식으로 어떻게 감히 거장(巨匠)의 높낮이를 평론할 수 있겠는가. 공의 유고(遺稿)를 읽고 나니, 사모의 마음만 매우 간절할 뿐이므로 위에처럼 조금 소회를 쓴 바이다.

신유년(辛酉年) 3월에 족종(族從) 정지회(鄭芝會)는 삼가 쓴다.

 

辨(변)

 

1. 鄭義齋生節義辨

昔 張南軒先生 嘗有言曰 古人志慮深遠 故以節義爲重 後人志慮淺狹 故以死生爲重 尙矣哉. 言乎.夫惟有生 之生鴻毛其軀 金石其義然 身者 心之所宅 而節義之所由立爾 苟以滅生爲節義之目 則志慮不其淺淺也歟. 鄭義齋 名錫冕 子命 其字也. 與余同爲文靖公 雪齋先生之裔 而分系稍遠 子命 胎始 膺夢虎之禎祥 生有異質 甫弱冠 知其讐冠 不共載之義 倡募義旅 與痴齋金 余觀協謀運籌 殲厥巨魁 斬獲甚衆. 時卽 高宗四十三年丙午月日 赴義三載 山營水陣 冒風閱霜 甲兵盡耗 敵勢益猖獗 宋祚難廻 天也奈何 越戊申金公沒 代而登將 壇與士卒誓死同盟 累戰累捷 可謂有功 而處白羊之敗 敵丸流中 幾死不死. 嘻噫. 悲夫幸而死於義 是義也. 幸而不死於義亦義也. 彼敵之丸 雖中於將軍之身 不能中將軍之心 而况將軍之節義乎. 惟不死而生於千秋者 乃節義矣 不亡而存乎千秋者 乃名姓也. 盖天地間一氣 在天日星昭著 在地河嶽磅礡 在人綱常凜凜 而絶義 是綱常中做出來 而立於人者爾. 人而罔或變其軌而生於可生之地 則生節義 宜不猶愈於死節義也歟.

1. 정의재생절의변

옛날에 장남헌(張南軒) 선생께서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옛 분들은 지려(志慮)가 깊고 원대하였기 때문에 절의(節義)를 중요시 여겼고, 뒷 사람들은 지려(志慮)가 얕고 협소하기 때문에 생사(生死)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이셨다. 오직 생명을 가지고 살아감에 그 몸을 깃털처럼 여기고 그 의리를 금석(金石)처럼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서 의리가 그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곳이다.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을 가지고 절의(節義)의 입장과 같이 본다면 어찌 그 지려가 얕지 않겠는가. 의재(義齋) 정(鄭) 선생의 이름은 석면(錫冕)이요, 자명(子命)은 그의 자(字)이다. 나와 더불어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 선생의 후예로서 친척 관계가 조금 멀다. 자명(子命)을 임신한 초기에 꿈에 호랑이를 안는 상서로움이 있었고,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 겨우 스무 살에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의리를 알아 의병대와 돈을 모았다. 내가 보니, 그들이 함께 일을 도모하고 운영하였는데, 거괴(巨魁)를 죽이고 참획한 것들이 참으로 많았다. 때는 고종(高宗) 43년 병오(丙午) 월 일이었다. 의로운 일에 참여한 지 삼년 만에 산수에 진(陳)을 치고 지내면서 바람과 추위를 무릅썼다. 군사들과 병기는 다 소진되고 적의 기세는 날로 창궐하였다.

한 나라의 운명을 돌리기는 어려우니, 천명을 어찌하겠는가. 그 뒤 갑술년에 김공(金公)께서 돌아가시자, 그를 대신하여 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사졸(士卒)들과 죽기를 맹세하여 동맹하였다. 여러 번 싸워 적에게 얻은 노획물(鹵獲物)도 많아 큰 공이 있다고 할 만하였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백양(白羊)의 패함이 있었으니, 적의 탄환을 가슴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셨다.

아, 애닮도다. 불행히 의리에 죽었다면 이것도 의리요 다행스럽게 의리에 죽지 않았더라도 의리에 맞는 것이다. 저 적군의 탄환이 장군의 몸에 맞았지만 심장을 맞추지는 못했으니, 하물며 장군의 절의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오직 죽지 않고 역사에 살아남은 것도 곧 절의이다. 없어지지 않고 천추(千秋)에 보존되는 것은 곧 성명(姓名)이다. 천지는 한 기운이니, 하늘에는 해와 달이 밝게 빛나고 땅에 강하와 산이 가득 차있고 사람에게는 삼강 오륜이 있다. 늠름하게 절도 있는 의리는 삼강오륜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확립된 것이다. 사람으로서 법도를 어기지 않고서 살아야 할 경우에 살아난다면 살아난 절의가 절의에 죽는 것 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記(기)

 

1. 先先生謙山遺稿印刊實記 (倂後敍)

奧壬午春伏以 先生遺稿編葺刊行事. 習齋羅秉集 止齋李敏璿 心史幸東旭 諸丈廣詢遠邇 議旣協 再從凡錦沙遇琳氏 述窩金基禹 麟庭金泳濠等 相其役 夏而至秋 纔成編而刊未就矣. 旣而 錦翁心翁習翁損世 麟庭繼而作古 但吾林益孤爲恨爾. 幸玆今春 以講之日 圖所以出板印刊 而力惟不及也. 減契土一部之半 以濟其用 賴諸士友之力 補不足 而士勤工殫 年週而竣功 吾道之幸也. 斯文不隊七 從可仰想 然 訛謬相襲 惟未簡精 惶恐失其本旨之微奧者多矣. 只幸諸君子 奉覽至錯誤處 宜潛玩本義之攸在 恕其相役之失責 則以余免矣. 夫系以後敘 竊惟 日月以前 天道未嘗不具 而妙化不著 文字以前 聖人未嘗不作 而心法不著 天人之際 苟曰道而不文 宜天人永鬲矣 盖其道之所存 人文悉備 故其人存則道在心上 其人亡則道在遺文 文心之著也. 文不亡則道其不亡乎. 惟謙山李先 生挺生南服 不由師承 而以續夫往哲傳承之緖 其學也. 程朱心法 其文也. 韓歐謨該 而斯文之重輕存焉耳. 平日所著 記辭若箴戒論說 含畜微奧 宜無精粗表裏之殊 然 精中有精 裏中有裏之妙 固非末學 所可窺則也. 嗚呼. 非文 難以貫道 非道 宜文不過空器了 此所謂文爲貫道器 而辭義猶器中之味 苟不能咀之嚼之 焉得眞滋 後之覽者 幸勿以文 視文潛心玩繹 熟詳微旨 則於爲學之方 幾有小補云爾.

1. 선선생겸산유고인간실기 (병후서)

임오(壬午)년 봄에 이르러서야 삼가 선생께서 남기신 원고를 편집하여 간행하는 일을 하였다. 습재(習齋) 나병집(羅秉集) 지재(止齋) 이민예(李敏璿) 심사(心史) 신동욱(辛東旭) 멀고 가까운 여러분들과 상의하여 재종 범금(凡錦) 사우(沙遇) 림씨(琳氏) 술와(述窩) 김기우(金基禹) 인정(麟庭) 김영호(金泳濠) 등이 협력하여 일을 도와주었다. 여름에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편집이 완성되었고 간행은 아직 완수하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금옹(錦翁), 심옹(心翁) 습옹(習翁)이 세상을 떠나셨고, 인정(麟庭)도 그 뒤를 이어 작고하였다. 다만 우리들이 더욱 고독하게 되어가는 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이었다. 다행히 이번 봄에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출판하고 인쇄하려는 것을 도모하였으나, 힘은 오히려 미칠 수가 없었다. 계토(契土)의 한 부분의 반을 덜어내어 그 비용을 충당하고 여러 사우들의 힘을 빌어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사우들은 작업에 힘을 다하여 일년이 다할 때쯤 공업을 다한 것은 우리 도(道)의 다행스러움이었다. 우리의 학통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것을 통하여 우러러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해 내려온 부분 중 잘못된 것을 오직 정밀하게 뽑아내지  못하고 본래 가진 은미한 뜻을 잃은 점이 많을까 염려된다. 다만 여러 군자들이 보시고 잘못된 곳에 대해서는 본의에 담긴 뜻을 잠심하고 완미하여 실책한 것을 용서해 주신다면 내가 잘못을 면할 수 있을 듯하다. 이어서 후서(後敘)를 붙인다.

삼가 생각하건대, 해와 달이 있기 전에도 천도(天道)는 일찍이 갖추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신묘한 작용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에도 성인이 일찍이 나오시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심법(心法)은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천도(天道)와 인리(人理)의 사이에 진실로 도가 있으나 표현하지 않았다면 천도와 인리는 닿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도가 보존된 곳에는 인문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있으면 도가 마음속에 있고, 그 사람이 없으면 도가 문에 남게 되는 것이다. 문(文)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문이 없어지지 않으면 도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겸산(謙山) 이선생은 남쪽 지방에서 태어나신 걸출하신 분으로 스승이 전해주신 것만을 따르지 않고 과거의 철인과 전승의 실마리를 이으셨다. 그의 학문은 정자 주자의 심법(心法)이었고, 그의 문학은 한유(韓愈), 구양수(毆陽修)의 법도를 두루 갖추어서 사문(斯文)의 경중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평소에 지으셨던 기(記), 사(辭)나 잠(箴), 계(戒), 논(論), 설(說)은 은미한 뜻을 내포하고 있어 정밀하고 거침, 겉과 속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정밀한 속에 더욱 정밀함이 있었고 표면 속에 표면이 있는 묘미가 있으니 진실로 하잘 것 없는 나의 수준으로는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문이 아니면 도(道)를 싣기 어렵고 도가 담겨 있지 않다면 문은 텅빈 그릇에 불과할 뿐이니, 이것이 이른바, ‘문은 도를 담는 그릇이다.’는 것이니, 말과 의미는 그릇 속에 담긴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이다. 만약에 씹을 수 없다면 어찌 참 맛을 볼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훗날 보는 사람들이 문장을 문장으로만 보지 말고 잠심하여 이치를 완상하고 은미한 뜻을 익숙하고 자세히 한다면 학문을 하는 방법에 있어 얼마간의 도움이 될 것이다.

▶겸산유고.

 

2. 守愚齋記

天之降衷 亦豈有分別底道理乎. 但自棄底 不自棄底 賢愚判焉. 以故人有是身 不惰其心 戒愼恐懼 如臨深履薄而苟無絲毫之失 更不貳之 是固賢者之事也. 惟公所守 近於是則知而不愚亦明矣. 凡今智愚 不能倂存於一身 猶薰 猶不同器而祗是行藏之際其行之也. 以智其藏之也 以愚也歟. 竊念是齋之扁 宜退託僞謙底義然愚義中 抑有人不及知之妙乎哉. 不爾則厭然 掩之患人知而必不自居矣 且夫居之 則宜安宅而有常常不移之憂 何以則可得聞乎. 吾知夫公之生平用力 則其所用力 可幾及也. 其知不可及也 其愚尤不可及耳. 平日欲學公之愚而多年用工 猶未能者 我將如愚而人不信其愚 是難堪矣. 嗚呼公之學本於孝悌 推而及於百行 抑以孝悌謂之愚歟. 公之自守一以謹愼 推而及於事物 仰以自修謂之愚歟. 嘗得一恭字於難窩吳公終身服膺 宜恭字中愚義包含抵爾尙矣哉. 公之恭也 凡恭之義 過則非禮 中則有序而以時如愚愚 是恭字之效也. 然而恭之用有 若無愚之用無 若有公之恭與 愚不可量耳 何者愚者之愚人 皆惡之賢者之愚人 皆好之好惡底可見 是齋之工用矣. 那可與固執守愚同日語哉. 祗是賢而如愚宜時中之愚也. 時可以智則智時 可以愚則愚 故寧子之愚 夫子稱美之而美其時中 不但稱美其愚 苟徒愚而不通於時惡可有稱美之及也. 今以守愚之愚 幸而親炙於夫子之門 則或未知有稱美之及也. 噫 公諱鍾會 字君中 吾族叔也. 公沒今十有餘年而齋卽公之咳唾 遺馨所存焉者 故有所興感而略記如右.

2. 수우재기

하늘이 사람에게 중정(中正)한 덕을 내리심이 또한 어찌 분별하는 도리가 있었겠는가. 단지 스스로 인덕을 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현명함과 어리석음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몸이 있은 뒤에는, 그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며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마치 깊은 연못이나 엷은 얼음 위를 지나듯이 하여 만약 털끝만큼의 잘못도 없어 거듭 한결같다면 이는 진실로 현자의 일이다.

오직 공께서 지키시던 것이 이에 가까우셨으니 지혜롭고 어리석지 않으셨음이 또한 분명하도다. 이제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한 몸에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마치 향기 나는 풀과 악취 나는 풀이 하나의 그릇에 담길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만 행장(行藏)의 즈음에 그 행동을 할 때는 지혜로움으로 해야 하고 은거할 때는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한다.

생각해 보건대, 이 재(齋)의 편액(扁額)은 물러나 의탁하여 겸손히 한다는 의미이니 또한 어리석다는 의미 속에는 보통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묘함이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어리석은 듯 한다면 다른 사람이 알까 겁내어 싫어하고 숨겨 반드시 스스로 자처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자처한다면 집처럼  평안히 여겨 옮기지 못하는 근심스러움이 있다면 무엇으로써 그 어리석음의 내용을 들을 수 있겠는가.

나는 공께서 평생토록 힘쓰신 바를 알며, 학문에 힘쓰신 것이 거의 도(道)에 닿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지혜로움에 미칠 수도 없지만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더더욱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평소에 공의 어리석음을 배우고자 하여 많은 세월 공부를 하였으나 오히려 제대로 하지 못하니 만약 내가 어리석은 듯이 하려해도 사람들이 그 어리석음을 믿지 않을 것이니, 이 점이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도다.

아, 공의 학문은 효제에 근본을 두어 미루어서 백행(百行)에 미쳤으니, 또한 효제를 어리석음처럼 여기신 것이 아니겠는가. 공께서 스스로 한결같이 근신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고 미루어 사물에 도달하였으니, 또한 스스로를 닦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여기신 것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난와(難窩) 오공(吳公)에게 공(恭)자 한 자를 얻어서 평생토록 마음속에 담고 있었으니, 공(恭)자 속에 어리석다는 의미가 내포된 지가 오래되었도다.

공의 공손함은 모든 것에 공(恭)하다는 의미이다. 지나치면 예에 들어맞지 않고 들어맞으면 순서가 있어서 때에 맞는 것을 어리석은 듯이 하셨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이란 바로 공(恭)자의 효과인 것이다. 그렇지만 공이 우(愚)를 씀은 어리석지 않은 쓰임이 있었을 듯하고 공이 공(恭)과 우(愚)를 헤아리지 못함은 없었을 듯하다.  

왜 그러한가.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것은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지만 현자가 어리석은 듯이 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속에서 재(齋)의 효용을 알 수 있다. 어찌 고집스럽게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과 같은 수준에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현명하면서 어리석은 듯 하는 것은 시의(時宜)의 어리석음이다. 시대가 지혜로움을 쓸만하면 지혜로움을 쓰고 어리석음을 쓸 만하면 어리석음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무자(甯武子)의 어리석음을 공자께서 훌륭하다고 칭찬한 것은 그 시중을 칭찬하신 것이요, 그의 어리석음만을 훌륭하다고 칭찬한 것은 아니니, 진실로 어리석기만하여 시대에 통달하지 못한다면 어찌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데까지 이르렀겠는가. 이제 어리석음을 지키는 어리석음으로 어쩌다가 공자의 문하에서 몸소 배웠다면 아마도 그 도달함에 대하여 칭찬했을 지모를 일이다.

아, 공의 휘는 종회(種會)요, 자(字)는 군중이니 우리 족숙(族叔)이다. 공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십여년이 흘렀고, 재(齋)는 곧 공께서 남기신 말씀을 보존하는 곳이니, 거기에 대해 느낀 바가 있어 대략 이렇게 적었다.

 

3. 洞庭湖記

湖 在河東治 岳陽界古天然池 天然之爲洞庭 其在那時歟. 凡今江淮河漢 名之之前 形旣具而形之 則隨其形而名之 故所而形者 名之實而名異今古 抑何哉. 洞有岳陽 故因爲之名也歟. 余觀夫中國誌 有湖在於巴陵者 是謂洞庭 洞庭之名 冠諸溝瀆之上 故 苟引而名之耶. 相天地之妙化 不特專美於中華 宜東邦幾有可適者爾 是湖也 與凡他江湖 天壤高懸 瀟湘在山 斑升生焉 鍾聲己古寒山近矣 而姑蘇城鳳凰臺 乃湖之左右也. 多少勝槩 亞於中華 而至若壯觀云爾 則物熊變幻 雖有今古頭流萬疊白雲千嶂 千里相首 中有大江 源于蓼川 至于押綠 而派流益壯 不百里而爲蟾津 明沙白礫 月與俱明 漁歌再楫 互爲下上 是亦一蠹 先生孤再又下之處也歟. 大抵 湖之所儲 未知幾何量 然 澹澹焉無一點査滓 萊裏攸同 微有洞靜之機 動之時 可見天理流行之妙 靜之時 潛認天理會統之幾 湖之心 於斯可玩爾 烟霞雲物 不必家論也. 洞門深鎖上有七星高起 行至數里 或岑焉 而聳出巒焉 而更作天梯龜子 高而與蛾眉相齊山之足 平緩可坐者 是岳陽樓也. 巍然 臨湖萬千勝狀 半分在湖 半分在樓 孰有高 下但樓起於後 樓爲弟 湖爲兄也云.

3. 동정호기

호(湖)는 하동 지역(경상남도)과 악양(岳陽)의 경계에 있는 천연의 연못이다. 천연적으로 동정이 된 것이 그 어느 때인가. 이제 강회하한(江淮河漢) 명칭 이전에 이미 형태는 갖추고 있었지만 형태는 그 모양을 따라서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는 이름의 실제인데 이름이 예와 지금이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동에는 악양(岳陽)이 있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이름을 지은 것일까.

▶동정호:약양면 평사리 소재.

 

내가 중국의 지리지(地理志)를 보니, 호는 파릉(巴陵)에 있는데 이것을 동정이라고 부른다. 동정이란 이름은 모든 호수 중에 제일가는 이름이라서 굳이 인용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건대, 천지의 묘화(妙化)가 특별히 중국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그만한 것이 있으니, 호(湖)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강호와는 다르게  천지에 우뚝 솟아 소수(瀟水), 상수(湘水)도 산 사이에 있다가 더불어 융기(隆起)하여 생긴 것이다. 종성(鍾聲)도 예로부터 한산(寒山) 근처였다. 고소성(姑蘇城), 봉황대(鳳凰臺)는 곧 호(湖)의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승지가 중국에 다음 가고 장관도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物)의 모양이 변화하여 예나 이제나 두류산(豆流山) 만봉(萬峰)에 흰 구름이 낀 수많은 봉우리가 천리에 걸쳐 마주보고 있으며, 중국 요천(蓼川)에서 흘러내린 큰 강이 압록강을 흘러 지류가 더욱 장대하게 흐르다가 백리 남짓하여 섬진강이 있다. 맑은 모래와 흰 자갈들이 달빛과 어우러져 밝게 빛나는데, 어부가 노래를 부르며 노를 저으니 달과 서로 상하(上下)가 된다. 이 또한 하나의 멋진 경치니 선생께서 홀로 배를 타고 다니시던 곳일 것이다.

대체로 호(湖) 안에 들어있는 물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맑고 맑아 한점 탁함이 없이 겉과 속이 다 보이는 중에 은미하게 동정(動靜)의 변화가 있다. 움직일 때에는 천리가 유행(流行)하는 묘함을 볼 수 있고, 고요할 때에는 잠잠히 천리가 회통(會通)하는 기틀을 볼 수 있다. 호의 마음을 이에 제대로 완미할 수 있을 것이다. 물안개 피어오르고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풍경은 굳이 다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문(洞門)은 깊이 잠겨 있어 위로는 칠성산이 일어나 몇 리를 가면 더러는 산봉우리가 있다. 우뚝 솟아 만이 되기도 하고 다시 아득한 절벽이 되기도 하고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높아 아미산(蛾眉山)과 비슷하다. 산자락은 평탄하고 완만하여 앉아 있을 만하니 이곳은 바로 악양루(岳陽樓)이다. 우뚝하게 솟아 호에 임하여 수만 가지의 멋있는 모양을 지니고 있어 반은 호에 있고 반은 루(樓)에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다만 루(樓)는 뒤에 세워졌으니, 루는 아우이고 호는 형이라고 한다.

 

4. 白石灘記

白石灘 仁田村前 鶴坪口也. 鶴坪 今之坪村 而仁田 登坪中 新治村名也 有兩水 一自靑鶴來 一自胎峯來 派源不甚遠 而合流 枕白石而爲灘 廣可以旋龍爾. 灘底盤盤焉有石 石面澹澹焉 有水而石面水面 同是鑑面也 天將誰爲而作 余瞢然乎觀水之術裏面 至精之妙 難可透到 然 儘覺天之於衆形匪物 物刻而彫之也 苟以人工彫琢云爲 則拘於不公 未也. 亦爲自家之沐浴盤云 則屈於物私 亦未也 陽春向暖 與童子五六人 涵之泳之 精耽其源 則庶其不違灘之性也夫.

4. 백석탄기

백석탄은 인전(仁田)촌 앞 학평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학평(鶴坪)은 지금의 평촌(坪村)으로 인전과 등평 사이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 이름이다. 흘러가는 물줄기는 둘인데, 하나는 청학봉(靑鶴峯)에서 내려오고 하나는 태봉(胎峰)으로부터 내려온다. 원류가 그리 깊고 원대하지 않아서 흐름이 합쳐지는 곳에 흰 돌이 자리잡고 있어 여울이 진다. 넓이는 용(龍)이 노닐만한 정도이다. 여울에는 평평한 돌이 있고 평평한 돌 위로 물이 살랑살랑 부딪혀 흘러 돌의 표면과 수면이 모두 거울처럼 깨끗하다. 하늘이 장차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만드셨을까. 내가 물끄러미 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겉과 속의 지극히 정밀한 묘(妙) 보자 하니, 투명하게 흘려내려 가는 것이 어려울 듯하나 하늘이 모든 물건에 대하여 물건마다 각각 그 모양을 가지도록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석탄 계곡.

 

진실로 인공으로 조각하였다면 공평하지 못한 점에 얽매여서 그렇게 천연스럽지 않을 것이요, 또한 자기를 위하여 목욕하는 반석이 만들었다면 사사로운 물욕에 매어서 그렇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봄날 한창 따뜻한 날에 어린 아이 대 여섯을 데리고 물장난하고 수영도 하면서 그 근원을 정밀하게 탐구해 나간다면 탄(灘)의 성품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5. 德山瀑布記

方丈一脈 透迤磅礡 動則起 靜則伏 起處伏 總是形氣之化矣. 萬千奇怪 春則如彩筆畵出 秋則如墨圖畵瀉 莫可盡狀其十一 然 只以瀑布言之 則特異 異凡所貴乎物者 天地造花之妙也. 磵流倒下其底 卽石面所以流下 連敷千尺中 窩恰如筧像 而雖旱天 小流不渴 及夫潦霽之日 彷彿乎玉屑飛下 是 德山瀑布也. 噫 天下之至平 莫若水面 而今有橫斜之分者 宜非水性之本然也. 想天工設諸異常地頭 反其性而導之 以示其造物奇異之妙者也歟. 其初落 卽德山口平面也與 龍門下流 會合至于白石灘 而漸至大川 又南而下 會于蟾津云.

5. 덕산폭포기

방장산(方丈山)의 한 줄기가 뻗어 내리고 합쳐져서 움직이면 융기하고 멈추면 엎드린 모양이 되니, 일어나고 엎드린 곳이 모두 모양도 기세도 조화를 이루어 온갖 오묘함을 자아내니 봄에는 붓을 가지고 색깔별로 그림을 그려낸 듯, 가을에는 묵화를 그려낸 듯하여 그 십분의 일도 뭐라 다 형용해 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폭포(瀑布)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보통 폭포보다 특별한 점이 있으니,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천지조화의 오묘함 때문이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이 아래로 내려가니 곧 석면이 통해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 수천 척(尺)에 이어져서 오목한 것이 대나무 홈통이 이어진 것과 같도다. 아무리 가물 때라도 물이 마르는 때가 없고, 비가 많이 내린 뒤에 그치는 날이면 옥설(玉屑)이 날아 내리는 것을 방불케 한다. 이곳이 바로 덕산 폭포이다.

아, 천하의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물만한 것이 없는데, 이제 비스듬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물의 성질상 본연적인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건대, 천공(天工)께서 특이한 곳에 설치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인도하는 것 같으니, 그것이 조물주의 기이한 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처음 떨어지는 곳은 덕산구(德山口) 평면과 용문(龍門) 하류이고 백석탄(白石灘)에서 합쳐서 점차로 대천에 이르렀다가 또 남쪽으로 섬진강에 합류한다.

 

6. 仁田洞記

仁田 今岳陽後天 靑鶴洞口也. 名洞以前 卽登坪 而土人拓之勤稼穡而耕食之. 故 以之名坪 久矣 余東遊十年遠邇 是拾眞積力久 便得地宜所以宜者 民俗淳厚也. 淳與純 相近而仁亦 猶之 故 以仁田名其洞 盖仁者 人所同有而有得於天者也. 奚可以獨得其妙 而名其洞云爲哉. 今夫洞之爲洞也. 天地覆載. 日星照臨 宜可以苟全 而顧千百載之間 只作等閒物 是 宜子夜前雷潛底義也. 孰知其將有千門開之日乎. 這間 雲林泉石烟雲花鳥 是造物之自然 而其所珍畜之妙 心自點檢 而自得之而已. 奈之何 有人謾說堪輿 煩致山水之役 而春暖秋晴 俗履無閒日 故 山人傳言靑鶴洞也云. 全洞謂之岳陽 而亦未知岳陽之名 昉於那時 古云. 沙尼而洞史 無明徵可巧.

6. 인전동기

인전(仁田)은 지금 악양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청학동구(靑鶴洞口)이다. 동(洞)으로 이름짓기 전에는 곧 등평(登坪)이었다. 그러다 토착민들이 채소를 가꾸고 식량을 경작하기 시작하면서 평으로 이름 지은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동쪽으로 십년동안 돌아다니다가 가까운 곳에 집을 지으려고 힘을 쏟아 곧 터를 얻게 되었다. 살기에도 적당한 곳이 될 듯 한데 민속이 순후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순후함과 순수(純粹)함은 서로 비슷한데 인(仁)도 그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인전(仁田)으로 마을 이름을 삼았다.

인(仁)은 사람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천성적으로 얻은 것이다. 어찌 혼자만 그 묘함을 지니고 마을 이름을 지었겠는가. 이제 인전동(仁田洞)이 인전동이 된 것은 하늘이 만물을 덮어주고 땅이 만물을 실으며 해와 별이 비추고 있는데 구차히 보전하여 천백년 사이만을 돌아본다면 쓸데없는 물건이 되니, 이는 바로 자정이 되기 전에 우뢰가 숨어 있다는 의미이니, 누가 장차 천개의 문을 여는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저 사이에 있는 운림(雲林), 천석(泉石), 연운(烟雲), 화조(花鳥)는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으로 보배가 들어있는 묘함이 마음속에 저절로 닿을 뿐이다. 어찌 별다른 형용이 필요하겠는가.

사람이 천지에 대하여 지나치게 설명함은 산수의 일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봄에는 따뜻하고 가을에는 날이 맑아 속인의 흔적이 한가로운 날이 없으므로 산사람들은 청학동(淸鶴洞)이라고 전한다. 전체동(洞)을 악양이라고 부르는데 악양이라는 이름이 어느 때에 붙여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옛날에 스님이 붙였다고 하나 동사(洞史)에서 고찰할 만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7. 自安洞記

玉蘊于山 寶其玉 不寶其山 然 採玉者 必先問其山而採其玉 故 玉出之山 其名益著矣. 人地待對 亦猶是富春桐江龍崗之名 徒其以地而名於後世者乎. 潘南山中 有自安洞 洞卽 隱士鄭淳奎甫所創也. 大抵洞之名 古則無而始於今者 地不遇人而共山度了 遠矣. 隱士號錦雲 素以孝悌 亦能儒雅 名聲遠邇有聞 晩暮 筮遯于玆土 仍爲自靖之方 凡今出處行藏 適於古人時可之義 則乃君子之道也 不亦善乎. 只有一說可復者 誠能取舍 益加警省 可爾 安其自分 而樂而悅之 則心廣體胖於安分境界 苟安於自暴而放恣日肆 則怠情愈甚於安肆地頭 故 君子安於莊敬 小人安於放曠 在洞亦不可不深戒者也. 祗願 隱士惟日用力於安 而能定底工夫 則後日採玉者 宜寶其山而訪鄭隱士於谷口矣.

7. 자안동기

옥이 산에 보존되어 있으면 그 옥을 보배 삼지 그 산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옥을 캐러온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산에 대하여 물은 뒤에 옥을 캐러 가기 때문에 옥이 나오는 산은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는 것이다. 사람과 땅도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다. 부춘동(富春桐)이니 강룡강(江龍崗)이라는 이름은 다만 그 땅으로서 훗날 이름을 지은 것인가.

반남산(潘南山) 안에 자안동(自安洞)이라는 곳이 있으니, 이 마을은 바로 은사(隱士) 정순규(鄭淳奎)가 처음 만든 곳이다. 대체로 동의 이름이 옛날에는 없었는데 오늘날 생긴 것이다. 땅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빈 산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은사의 호는 금운(錦雲)이니, 평소에 효제(孝悌)로 선비의 아름다운 이름이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까지 알려졌다. 노년에 이곳에서 은둔하며 살았으니, 곧 스스로를 바르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제 세상에 나가고 은거하는 것이 옛 분들이 했던 의에 맞게 하였으니, 시대가 가능하면 벼슬하는 의리는 곧 군자의 도리이니, 또한 훌륭하지 아니한가.

단지 말할 만한 한 가지 설이 있다면 진실로 취사(取舍)에 대하여 더욱 경계하고 스스로를 살피는 것을 더욱 힘쓰라는 것일 뿐이다.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즐거워 마음속으로 기뻐한다면 분수를 편안히 여기는 경지에서 마음은 넓어지고 몸은 편안해 질 것이다. 진실로 스스로를 포기하고 멋대로 하여 날이 갈수록 함부로 하면 게으른 마음이 멋대로 함을 편안히 여기는 경지에서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장엄함과 공경을 편안히 여기고 소인은 멋대로 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다. 동(洞)에 있어서도 깊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바라건대, 은사가 날로 자신의 안분하는 데에 힘쓰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를 하셨으니, 뒷날 옥을 캐는 사람들은 산을 보배로 여겨 곡(谷)의 입구에서 정은사(鄭隱士)를 찾아본다면 좋을 것이다.

 

8. 沁石記

沁 都河陰古也 海河精靈 凝氣化胎 受稟於無爲之際 王庸嘉 乃錫姓者 是河陰氏之始 自後間世 立朝作爲文武班一呇 至今 閥閱視古 猶不勝似然 孝友家聲 有自來矣. 高敞 原居奉兄鎭業甫 素以河陰古族 操飾謹雅 猶有儒者味 中歲占基於錦城琴谷之坊 佳山好水 固不尋常 而至于今 數千百載之所等閒者 抑天秘而與之也耶. 晩以沁石爲號 宜非等澣取趣底義 第念 沁 姓本也. 本不敢忘倫彛中人紀之一統 寧其玄飜黃覆日融月晦 人而可以忘本乎是扁也. 宜警混俗無倫者流爾 況今嚴侍六十年 近而旣遭艱哀毁愈 極痛切於追養 靡徒乃孝子之情也. 曩在搶攘晝魑夜魅 彼出此沒 咻咻弄世 率戰相食 而多食者 首善于時也. 親老在堂 混庇略數十眷儀 而苟得葆全家齊 若治朝焉 宜孝感所召也歟. 且夫沁之字義 釋水心也 至淸莫若 而已包含萬像 晝底天日 夜底星月 如虛如實而逝 如斯爾 萬頃波面 浩浩稽天 潛沱焉 其心 本乎一勺之源 盖取諸是義也. 嗚呼 沁之本遠 而遠則易忘 亦其非恒人之情乎. 易曰 介于石 宜久不渝之義 祗以久不渝遠不忘底義 寓諸心而鏤肝銘肺者 油然而爲心 確然而爲石 想其五內六腑 只是追慕之誠外 更無他一點査滓也 宜矣. 知者 有幾松下翁而已.

8. 심석기

심(沁)은 하음(河陰)의 옛 도시이다. 해하(海河)의 정령이 기를 응축하고 태를 변화시켜 무위의 사이에서 품부를 받은 것이다. 왕용가(王庸嘉)는 사성이니 이것이 바로 하음씨의 시초이다. 이후로 대대로 조정에서 문무반을 지냈는데, 지금 문벌을 보니 오히려 옛날보다 못한 듯 하다. 효우(孝友)있는 집안에서 알려진 것은 스스로 유래가 있는 것이다. 고창(高敞)은 원래 형 진췌보(鎭萃甫)가 살았던 곳이다.

평소 하음(河陰)의 고족(古族)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엄격하고 고상하여 오히려 선비가 중도를 맛보는 듯한 점이 있었다. 중세에 금성(錦城)과 금곡(琴谷)에다 터를 잡아 아름다운 산과 좋은 물을 찾지 않고 지금에 이르도록 천백년동안 한가롭게 지냈으니 하늘이 몰래 그에게 준 것인가. 만년에 심석(沁石)으로 호를 삼았으니, 한가롭게 노닌다는 의미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생각하건대, 심은 성(姓)의 근본이다. 이 근본은 인륜(人倫) 중 인기(人紀)의 한 가지 계통으로 잊어버릴 수 없으니 차라리 하늘과 땅, 해와 달이라면 몰라도 사람으로서 근본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지은 것은 풍속이 혼탁하여 어지러이 흘러가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일 뿐이다. 하물며 이제 아버님을 모신 지 60년에 근래에 아버님을 여의었으니 그 분을 추모하는 마음이 너무나 애닯을 것이니 곧 효자의 마음은 그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근래에 풍속이 어지러워 밤낮으로 도깨비처럼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저쪽에서 나오면 이쪽에서 사라져 시끄럽게 세상을 가지고 노는 듯 하여 모두 싸워서 서로를 먹어서 많이 먹는 자가 그 시대에 가장 잘하는 자인 듯 하다. 어른께서 당에 계시며 집안을 감싸주고 수십년 동안 의칙을 돌아보아 집안을 다스려 보존하신 것이 마치 조정을 다스리시듯이 하였으니 효성스러운 마음을 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또 심자의 뜻은 수심(水心)을 해석한 것이다. 매우 맑은 것이 이렇게 생긴 것이 없고 만상을 포함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 없다. 낮에는 하늘의 해가 비치고 밤에는 별과 달들이 비쳐서 비어있는 듯 하기도 하고 가득찬 것 같기도 하여 이처럼 흘러간다. 드넓은 만경의 물도 천지를 담을 듯한 넓은 곳도 그 본심은 한 잔의 원류에서 시작된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의미를 취한 것이다.

아, 심이 본원이 요원하다면 요원하여서 쉽게 잊어버리는 것도 항상 있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주역(周易)』 예(豫) 육이(六二)에, ‘절의가 돌처럼 견고하다.’ 한 것은 오래되어도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잊지 않는다는 의미를 마음속에 취하여 폐간(肺肝)에 새겨 그것이 흘러 넘쳐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단단하게 돌처럼 된다면 상상해보건대, 그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추모하는 정성 외에 다른 한 점의 찌꺼기도 없으리니, 당연히 지혜로운 자는 송하옹(松下翁)에 가까워 질 것이다.

 

9. 晩悔堂記

堂以晩悔 盖日新之義 昔顔淵以亞聖之資 過不吝改蘧伯玉 五十知四十九年之非悔 宜知過然後 工夫改之則百善立至何悔之有 長城治南面方 有近古士人金在文表德寬瑞 素以光山世族家閥有由來矣. 自妙年襲訓於庭業文服儒 凡百行治未嘗有髭髮之差 而遽以晩悔扁其堂 想曾經行修心自檢照 苟有不滿底意悔及之也歟. 人非堯舜 未必盡善而苟有過則悔 悔則知改 改之不吝則昨之非今焉 是昨之過 今焉 善矣. 宜不必晩悔而至老悔之 第念悔義攸在 似有不及者耳. 特加勵力更新 苟不至徒悔而止 亦豈非日新之路也歟. 故湯之盤銘曰日新又日新盤 盖去舊日新之盤也. 是爲萬世師表之盤 苟非日新之銘 宜與茶飯之盤 孰有高下哉. 堂亦猶是苟不顧名而無實復 孰與騷客 玩物之亭差殊觀也. 嗚呼公沒旣二十年 所今其肖胤趾厥先美 亦以儒雅聞然 知其悔之爲貴而止 故忘加益新一說聞命乎否. 祗幸公之來裔永遵是義 以爲家法則是扁也 亦可以爲遷善之門 宜矣. 懇屬至三辭不獲略記.

9. 만회당기

당(堂) 이름을 ‘만회(晩悔)’라고 한 것은 대개 날마다 새로워지려 한다는 뜻이다. 옛날 안연(顔淵)은 아성(亞聖)의 자질로도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거백옥(蘧伯玉)은 쉰 살에도 마흔 아홉 살까지의 잘못을 알았다.

후회는 마땅히 잘못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뒤에 공부하여 고치게 되면 온갖 선함이 즉시 이르니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장성(長城) 치남면(治南面)에 근고(近古)의 선비 김재문(金在文) 자(字)는 관서(寬瑞)가 있으니 본디 광산(光山) 세족으로 문벌의 유래가 있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가르침을 익혀 문장을 익히고 유학에 힘썼다. 무릇 온갖 행실에 일찍이 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었는데 문득 ‘만회(晩悔)’로 그 집을 편액(扁額)하니 생각건대, 행실의 수행을 거쳐 마음으로 스스로 엄중히 단속하고 비추어 보아 진실로 불만스러운 뜻이 있어 뉘우치려는 것이리라.

사람이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아니면 반드시 선을 다할 수는 없다. 진실로 허물이 있으면 뉘우치고, 뉘우치면 고칠 것을 알아 고치기를 인색하게 하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그릇됨이 오늘은 올바르게 되고 지난날의 잘못이 오늘은 선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만회(晩悔)’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늙음에 이르러서 후회하며 다만 생각컨대, 뉘우치는 뜻이 있는 곳에 고치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다만 더욱 힘써 다시 새롭게 하여 진실로 한갓 뉘우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날마다 새로워지는 길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탕(湯)의 세수 대야에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라고 하였으니 반(盤)은 대개 오래된 것을 제거하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숫대야이며, 이것은 만세의 모범이 되는 그릇이다. 진실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명(銘)이 적힌 것이 아니라면 차반(茶飯)의 그릇과 어찌 고하를 따질 수 있겠는가!

당도 또한 이와 같으니 진실로 명칭에 부응하지 않고 실상이 없다면 다시 어찌 소인들이 사물을 즐겨 구경하는 정자와 조금이라도 관점이 다르겠는가!

아, 공이 돌아가신지 이미 20년 쯤 되었는데, 이제 그 아들이 그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 또한 유아(儒雅)로 소문이 났으나 그 뉘우치는 것이 귀함을 아는 수준에서 그치는 까닭으로 망령되이 더욱 새로워진다는 한 말을 덧붙이니 내 말을 들어줄런지.

다만 다행히 공의 후손들이 이 뜻을 영원히 지켜 가법으로 삼는다면 이 편액 또한 선으로 옮겨가는 문이 될 것은 확실하다. 간절한 부탁에 세 번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아 간략히 기록하노라.

 

10. 錦沙記

錦固是鄭氏原居之鄕. 麗季文靖公雪齋先生 始于此洞 道學文章 久爲百世儒宗. 厥後景武公若逸軒 滄洲兩先生 趾美而作焉. 滄溪林公所稱錦城之大樑者 是爾. 再從兄表德文淑氏 世于玆土 扁其所居曰 錦沙. 盖錦爲山 沙宜水 是山與水也. 孔夫子嘗曰 仁者樂山 智者樂水 人而苟不能兼山水之性 其所樂亦各不同 而有難乎山水之樂兼之者矣. 翁之寓意 兼有二者乎. 今夫錦 於山爲羅之雄鎭 而有如喬嶽之崇 於衣宜尙褧 而有君子之用德. 先師嘗稱詡以錦中之錦者 亦其濫獎也歟. 沙惟猶是汰之則以爲陶金之沙 列之則宜爲晦翁玩八卦之沙. 彼染泥之沙 烏得以間之. 苟或簣蕢成功 勤懇不已 則九仞亦不讓此沙 宜矣. 奚惟是徒沙而止. 竊惟往古月沙白沙 皆我東儒賢也. 無乃以希賢之心 把作自家元符常目寓之者乎. 盖自早年 奉先以孝 事親以禮 接賓常寬 如行餘卽以學文 可謂一鄕之善士. 以一鄕之善士 希一國之善士 孰敢曰濫乎哉 御家之法度 訓子之程式 固有自來遠矣 惟錦嶠公․錦隱公及翠隱公 家訓至謹至嚴者乎. 今綱倫頹 人彛斁 莫此甚焉. 願公老益勉强 幸勿墜傳家心法 卑後之來裔 永遵是義 則樑之不朽 其在斯歟.

10. 금사기

‘금(錦)’은 실로 정(鄭)씨들이 세거(世居)하던 고을이다. 고려 말에 문정공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 선생이 이 고을에 살기 시작하여 도학과 문장으로 오래도록 유자(儒者)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 후에 경무공(景武公) 정식(鄭軾)과 일헌(逸軒)․창주(滄洲) 두 선생이 선조를 계승하여 일어났으니 창계(滄溪) 임공(林公;이름은 영(泳), 1649~1696)이 ‘금성(錦城)의 대들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분들이다.

육촌형 문숙(文淑)씨가 이 땅에 대대로 살면서 자신의 거처에 ‘금사(錦沙)’라고 현판을 걸었다. 아마도 ‘금(錦)’은 산이 되고, ‘사(沙)’는 물에 해당하리니 이는 산과 물을 말한 것이다. 공자께서 일찍이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인자요수(仁者樂水), 지자요산(智者樂山)〕”라고 하셨는데, 사람은 산수의 본성을 겸할 수 없는데다 좋아하는 것도 각자 달라서 산수를 겸하여 좋아하기가 어려운데 옹께서 이름 붙인 것은 이 두 가지를 겸하고자 해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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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재서원: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소재. 설재서원은 문정공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 노안면 금안동에 최초로 창건되어 현재는 9위를 향사하고 있다.

 

지금 저 ‘금(錦)’은 산으로서는 나주의 웅진(雄鎭)으로 태산의 숭고함과 같아 비단옷으로 치자면 홑옷을 숭상하는데 적합하니 군자가 덕을 행함이 있는 것이다. 선사께서 ‘금 중의 금’이라 자랑하셨으니 또한 얼마나 큰 칭찬인가?

‘사(沙)’는 오히려 일어내면 사금을 가려낸다는 모래가 되고, 벌여놓으면 응당 회옹(晦翁)이 팔괘(八卦)를 감상하던 모래가 될 것이다. 저 더러운 진흙 속의 모래가 어찌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삼태기마다 공을 들여 정성이 그치지 않는다면 아홉 길도 사양하지 않을 터이니 이것이 ‘사’의 마땅함이다. 어찌 한갓 모래에서 그칠 뿐이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옛날 월사․백사 선생은 모두 우리나라의 어진 선비로서 현인을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아 항상 눈에서 떼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젊어서부터 효성으로 선조를 받들고 예의로써 부모를 모시며 항상 관대하게 손님을 접대하고 만약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문장을 배우는데 힘썼으니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라 할 만하다.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로서,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를 바라는 것을 누가 감히 지나치다 하겠는가?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와 자식을 가르치는 격식이 실로 내력이 오래되었건만 오직 금교공(錦嶠公)․금은공(錦隱公) 및 취은공(翠隱公:이덕유(李德游))은 가훈이 매우 삼가고 엄격했다. 지금은 기강이 무너지고 사람의 도리가 사라져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바라건대 공은 늙을수록 더욱 힘써 가문에 전해 온 심법을 실추시키지 말아 후손들이 길이 이 뜻을 따르게 한다면 이 때문에 대들보가 썩지 않을 것이다.

 

11. 松圃記

金鞍古名村也. 林壑深邃 泉石明麗 固非尋常村落比耳. 魁偉傑特 忠賢節義 鐘氣而作 可以黼黻王庭 亦可修明正學 扶風敎正人紀 惠及生靈多矣. 奈自降世 生焉而不遇 處焉而不售 林下窮老 獨善其身而止 是乃時爾 曷嘗悶爲哉. 吾門碩德有辰會氏 乃族叔也. 表德南奎 早襲家訓 志于學久矣. 篤於孝友 親在庸極怡愉. 親沒旣葬 祈寒盛暑 不廢省掃 至老不懈 鄕里服其行. 今行年六十 隱居自靖以敎授門姪子爲己任 因自號曰松圃. 松百木之長也 大則棟樑可矣 再楫可矣 幾乎有心契乎. 今日何日. 苟或以松栢之心爲心 則晦跡深山 以終天年 宜時可之義也. 亦何嘗彔彔爲於匠工之手也歟. 雖然之材之美 莫松若則人孰舍諸. 只不若待時 而終不受變 是晩翠之節操矣. 然則翁之圃 乃心田之圃 而松宜心田之松也. 卷藏萬古春於胸中 與之歲寒相守 則苟物我何有間然. 噫. 巷柳園桃 乃遠祖雪齋先生遺蹟也. 訪松翁於谷口者 入洞必曰 桃柳舊巷 蒼松猶存云爾.

11. 송포기

금안(金鞍)은 예로부터 이름난 마을이다. 숲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시내와 계곡이 밝고 아름다우니 실로 평범한 마을에 비할 수 없다. 빼어난 인물과 절의를 지닌 충성스럽고 어진 인물들이 기운을 받고 태어나 왕실을 빛나게 할 수 있었다. 또한 정학(正學)을 닦고 밝히며, 풍속과 교화를 지탱하고 인륜을 바로 세워 백성에게 미친 은혜가 많았다. 어찌하여 뒷시대에 살아서는 때를 만나지 못하고, 세상에 처하여서는 쓰이지 못하거나 벼슬하지 않은 채 늙어 홀로 자신을 도야하는데 그쳤는가? 이는 시대의 탓일 뿐이니 어찌 근심하리오? 우리 가문에 덕이 높은 신회(辰會)라는 분은 나의 숙부이시다. 호는 남규(南奎)로 일찍부터 가훈을 익히고 학문에 뜻을 둔지 오래였다. 매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어버이께서 살아 계셨을 때는 매우 기쁘게 해드렸고,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지내고 춥거나 덥더라도 성묘(省墓)를 그만두지 않고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향리에서 그의 행실에 감복하였다. 지금 나이 예순으로 은거해 조용히 지내면서 집안 자질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 스스로의 호를 ‘송포(松圃)’라고 붙였다. 소나무는 뭇나무의 으뜸으로, 큰 것은 들보나 재즙(再楫)으로도 쓸 만하니 마음으로 부합함이 있었던 듯하다. 오늘이 어떤 날인가? 진실로 소나무와 잣나무의 성품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면 깊은 산에 자취를 감추고 천수를 마치더라도 시의(時宜)에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어찌 일찍이 녹록하게 목수들의 솜씨를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저 재목의 아름다움은 소나무만한 것이 없으니, 어떤 사람이 버리겠는가? 단지 때를 기다리며 끝내 변하지 않는다면 이는 늦도록 푸른 절조일 것이다. 그렇다면 옹께서 ‘포(圃)’라고 한 것은 마음의 밭이요, ‘송(松)’이라고 한 것은 의당 마음 밭의 소나무일 것이다. 가슴 속에 만고의 봄을 간직해 두고 한겨울의 추위에도 절조를 지킨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 마을의 버들과 뜨락의 복숭아나무는 바로 선조이신 설재(雪齋) 선생께서 남기신 자취이다. 골짜기 입구에서 송옹(松翁)을 방문하는 자가 동네에 들어가면 반드시 “복숭아와 버들, 오래된 동네에 푸른 소나무 여전히 남아 있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오래된 푸른 소나무가 풍기는 절조.

 

12. 蠢庵記

庵何嘗蠢 盖庵屋子 此屋便是荒屋 則蠢也知也不足道. 苟非荒屋 則信乎一日不可無主人 庭除房橽 尤不可一日荒穢矣. 矧惟室堂乎. 室堂苟不荒 屋子與主宰惺惺然 而以蠢名諸 則庵其不謝諸. 長城治 森溪西 有富城里 里中居士崔潤馨 水原華閥 甫弱冠受學于松沙奇公門 嘗以文藝有令名. 中歲以蠢庵爲號 異哉. 蠢其不美諸 號則宜不自題 而奚取其蠢爲哉 蠢所以知之反也 以若翁之才藝 博涉經史 長於文詞 善楷書 明爽多記 覽而遽以謂蠢 則人孰然之 且夫爲學階梯 要在進就 苟無嚮上底意 則難進易退. 吾士也希賢 吾賢也希聖 是固的確用工地頭 奈退託自蠢 顧如是耶. 抑蠢上有一種 進步底道理乎. 余嘗聞‘大德不矜 上知如愚. 愚與蠢一也. 蠢其蠢乎哉. 今以一轉語奉告 凡在幼少 或爲物私所蔽 明者昏 知者蠢. 及夫强壯 勤懇做爲 孶孶向道 則年邁益新 昏者明 蠢者知. 翁今反是而謂之蠢 則人其與之也歟. 於戱 噫嘻. 人以翁謂之不蠢者有之 以翁謂之蠢者亦有之. 蠢與不蠢 倂行而不相悖耶. 屋子一 則屋主宜亦有一 而以一主宰 那時爲不蠢那時爲蠢 知而不蠢 所謂邦有道時也 知而如蠢 所謂邦無道之時也. 苟非時中之義 其蠢孰能及之. 余嘗區區願聞 而未知翁意分其有而與之否. 第念蠢非翁之所私 何嗇之有.

12. 준암기

어찌 암자를 어리석다고 한 것이겠는가? 대개 암자는 집을 말하는 것인데 이 집이 퇴락했다면 ‘어리석다’ 또는 ‘지혜롭다’라고 말할 것도 없으리라. 만약, 퇴락한 집이 아니라면 반드시 하루라도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뜰과 방은 더욱이 하루라도 퇴락하고 더러울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방과 마루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방과 마루가 퇴락하지 않았다면 집은 주인과 함께 조용할 것인데 ‘어리석다’고 이름을 지었으니 암자가 그 이름을 사양치 않겠는가? 장성(長城) 고을 삼계(森溪) 서쪽에 부성리(富城里)가 있는데, 그곳에 사는 거사(居士) 최윤형(崔潤馨)은 수원(水原)의 문벌로 겨우 약관에 송사(松沙) 기공(奇公:기우만)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일찍이 문예로 이름이 높았다. 중년에 준암(蠢庵)을 호로 삼았으니 기이하도다. ‘준(蠢)’이라는 글자는 아름답지 못한 것이기에, 호를 짓는다면 자신의 호로 삼기에 적합한 것이 아닌데도 어찌하여 ‘준(蠢)’자를 취했는가? ‘어리석다’는 안다는 것의 반대이다. 최윤형처럼 재주 있고 경사에 박학하며, 글 짓는데 뛰어나고 해서(楷書)를 잘 쓰며, 명석하여 많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한다면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또 학문하는 순서는 진취함에 있는 것인데, 실로 나아지려는 뜻이 없다면 나아가기는 어려워도 물러나기는 쉬울 것이다.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희망하고, 현인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희망하니 이것이야말로 힘을 기울어야 할 곳이니, 어찌 물러나 어리석다고 자처하며 돌아보기를 이처럼 하는가? 아니면 어리석음 위에 한 종류가 있어 진보하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일찍이 ‘덕이 큰 사람은 자랑하지 않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우매한 듯 보인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우매함은 어리석음과 한가지이다. ‘어리석다’는 것이 진정 ‘어리석다’는 말이겠는가? 지금 한 번 바꾸어 말해 보면, 무릇 어려서 사물의 사욕에 가려지면, 현명한 자도 아둔해지고 지혜로운 자도 어리석어진다. 그러나 성장함에 힘써 노력하고 부지런히 도를 향해 나아가면 해가 갈수록 더욱 새로워져 아둔한 자도 현명해지고 어리석은 자도 지혜로워진다. 최옹은 지금 이와 반대로 하여 ‘어리석다’고 하였으니 누가 인정하겠는가! 아아, 슬프다. 사람들은 최옹이 어리석지 않다고도 어리석다고도 하는데, 어리석음과 어리석지 않음이 병행한다면 서로 어그러지지 않겠는가? 집이 한 채면 주인도 한 사람일 터인데, 한 명의 집 주인이 어느 때는 어리석지 않으며, 어느 때는 어리석단 말인가? 지혜롭고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의 일컬음이요, 지혜로우나 어리석은 듯하다는 것은 나라에 도가 없을 때의 일컬음이다. 만약, 시의적절하지 않다면 그 어리석음에 누가 미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구구하게 듣고 싶었는데, 최옹은 그 남은 어리석음을 나누어 줄 뜻이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어리석다는 것은 최옹의 사유물이 아닐 것이니, 어찌 인색함이 있으리오!

▶운수암:조선시대인 1750년(영조 26)에 장씨 부인이 창건.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이 시주하여 중건되었고 운수암이라고 쓴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다.

 

13. 聽琴齋記

琴禁人邪心者也. 是以聖人製樂 不可須臾去身 非要是聽聲 好要在乎正心 聽之者 亦皆聖人之徒. 盖自伏羲 神農 黃帝 堯 舜氏 至于文 武 周公 孔子 莫不有是琴 其所聽一矣 而其所以製 亦各竊附己意. 抑是齋之琴 堯 舜氏之琴也歟 周公․孔子之琴也歟? 吾族兄有行淑氏 琴下號也. 卜居于錦之陽仁川里 扁其堂曰聽琴齋 齋豈聽琴. 聽者 翁也 性簡重 言寡行敦以愼黙 要爲生平修養底工夫 苟非軆道者 惡能及此. 若夫邪說之紛惑 聽若風過 宜耳邊不入 而及夫聽琴 曲盡其義 不有一絲放過 其日新工夫 亦莫不有是齋之效也. 絃底洋洋乎 洽然由右耳而入心 怡然由左耳而入心 彷彿乎堯舜文武孔子之琴. 如在左右而聽之不惓 則遠邪窒慾 孰有愈之. 嗚呼. 叔季以降 王者之迹熄矣. 大小雅頌 得聞無路 里巷歌謠 但鄭衛之聲而已 抑以是琴 本之于雅以正其音 體之于風以協其韻 則其悶時病俗之意 勸善懲惡之戒 溢於絃外幾乎. 里俗盡美 至於巷曲孺婦 亦知其有是齋矣. 其他蔡邕之焦尾․伯牙之水仙懷陵琴 雖工矣 於是齋亦何有哉! 惟翁所抱彈於無絃也. 彈之者 誰翁矣 聽之者 誰翁矣. 傍聽之人 亦有化之者乎.

13. 청금재기

거문고는 사람의 사악한 마음을 막아준다. 이 때문에 성인이 음악을 만들어 잠시라도 멀리하지 않았으니, 이는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듣는 자도 모두 성인의 무리였다.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요(堯)․순(舜)시대부터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에

▶ 삼황오제:부부신상(夫婦神像)으로 표현된 복희와 여와. 중국 아스티나 출토.

 이르기까지 거문고가 없었던 적이 없으니 소리를 듣는 것은 한결같다. 그러나 음악을 짓는 까닭은 또한 각각 자기의 뜻을 붙인 것이니, 이 청금재(聽琴齋)의 거문고는 요․순의 거문고인가, 주공․공자의 거문고인가? 나의 족형 행숙(行淑)씨는 호가 금하(琴下)이다. 금(錦)의 남쪽 인천리(仁川里)에 사는데 그 당에다 ‘청금재’라고 편액을 하였으니 어찌하여 청금이라 했을까? 소리를 듣는 그는 성품이 간엄하고 중후하며, 말은 적고 행실은 돈독해 삼가고 조용했다. 평생을 수양하는 공부에 힘썼으니, 도를 체득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저 사악한 말이 시끄럽고 미혹스럽더라도, 바람이 지나가는 듯이 들어 넘겨 분명 귓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거문고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뜻을 다하여 한 줄이라도 멋대로 하지 않았으니,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가 또한 이 ‘청금재’의 효능이었을 것이다. 줄을 튕기는 소리가 양양(洋洋)하여 흡연(洽然)히 오른쪽 귀로 마음에 들어가고, 이연(怡然)히 왼쪽 귀로 마음에 들어가니, 요․순․문․무․공자의 거문고와 흡사하다. 만약, 좌우에 두고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사악함이 멀어지고 욕심을 막을 터이니 무엇이 이보다 낫겠는가?

아아! 말세에는 왕도(王道)의 자취가 끊어져, 대아(大雅)․소아(小雅)․송(頌)을 들을 길이 없으며, 마을의 가요도 다만 정(鄭)․위(衛)나라의 노래처럼 타락했을 뿐이다. 이 거문고를 가지고 아(雅)에 근본하여 그 음을 바로잡고, 풍(風)을 본받아 그 운을 고르게 한다면, 시속을 근심하는 뜻과 권선징악의 훈계가 거문고 줄의 밖으로 넘쳐나지 않겠는가? 마을의 풍속이 모두 아름다워질 것이니, 여염집의 젖먹이나 부인네들 또한 이 ‘청금재’가 있었음을 알 것이다. 나머지 채옹(蔡邕)의 초미금(焦尾琴)이나 백아(伯牙)의 수선회릉금(水仙懷陵琴)은 비록 공교하지만 이 ‘청금재’에 대해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옹이 끌어안고 무현금(無絃琴)을 탈 때 거문고를 타는 이는 누구이며, 듣는 이는 누구인가? 곁에서 듣는 자도 동화되는구나!

 

14. 聖德齋記

湖之南有月嶽 嶽卽靈之鎭也. 烟雲泉石 絶巖層臺 宜可以擬諸金剛. 然凡多小奇觀在乎都湖爾 源諸德津而來. 津下十里許 有聖德里. 溪山秀美 林壑岑蔚 美風善俗 遍諸一省 猶有不謙者存焉耳. 但近古無聞 地隅故也. 未知里名昉於何時 名之所存 實亦相符 今東方之國 有聖人作興歟. 不爾則吾夫子嘗欲居九夷 九夷是我東檀木前所稱 夫子之欲居 苟或以是里也歟. 想其時 南省必爲湖潛地 是亦迂矣. 曲阜大聖之所居 陋巷亞聖之所樂 嘗未有聖府聖巷之稱 此何聖德爲哉. 今年春 居人詢謀 僉同搆屋子數棟 覆以茅 因里名而扁其齋. 齋古塾也 俾鄕黨子弟 誦詩習禮 以春以秋 圖所以不令絶讀書種子 民俗之淳古 顧如是爾. 噫. 叔季以降 庠序之風不盡 閭里黌塾之習 隨而壞了 童蒙未有率初之方 可慨也. 已今所謂新習 蟹籒之課 擧世爲草風 草風不偃者有幾 獨於聖德里見之矣. 幾乎武城後千載 魯絃復聞於小金剛之下云.

14. 성덕재기

호(湖)의 남쪽에는 월악산(月嶽山)이 있으니 월악은 신령한 진산(鎭山)이다. 안개 구름 낀 산수와 깎아지른 암벽의 층층 누대가 금강산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다소간의 기이한 경관이 모두 호에만 있을 뿐인데, 그 줄기가 덕진(德津)에서부터 시작해 덕진 아래로 십 리 쯤 되는 곳에 성덕리(聖德里)가 있다. 산수가 수려하고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풍속이 선하고 아름다워 주변마을을 두루 살펴보아도 이 고을에 버금가는 곳은 없다. 다만, 근래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은 깊숙한 곳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이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름 지어진 것은 분명 부합하는 것이 있어서일 것이니 지금 우리나라에 성인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월악산:충북 제천시 한수면(寒水面)과 덕산면(德山面)의 경계에 있는 국립공원.

 

그렇지 않다면 공자께서 일찍이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하셨고, 구이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단군 이전에 부르던 이름이니 공자께서 살고자 한 곳이 혹시 이 마을이었던가? 그때를 생각해보면 남성(南省)은 필시 호수에 잠긴 땅이었으니 이 또한 옳지 않은 것이다. 곡부(曲阜)는 큰 성인이 거처하던 곳이고, 누항(陋巷)은 아성(亞聖)인 안연(顔淵)이 즐거워한 곳이나, 일찍이 성부(聖府)․성항(聖巷)이라는 칭호는 없었으니, 이곳은 무엇 때문에 성덕(聖德)이라 불린 것인가? 올 봄에 마을 사람들이 논의하여 함께 가옥 몇 채를 짓고 띠풀로 지붕을 이고는 마을 이름을 따서 성덕재(聖德齋)라고 편액하였다. 재(齋)라 하는 것은 옛 서당으로 향당(鄕黨)의 자제들로 하여금 시를 읊고 예를 익혀 봄․가을로 글 읽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 살펴보건대, 풍속의 순후하고 옛스러움이 이와 같다. 아! 말세 이래 상서(庠序)의 유풍이 다하지 못했고, 마을 글방의 습속도 따라서 무너져, 아이들에게 시작을 이끌어 줄 방도가 없으니 개탄스럽도다. 요즘의 신습(新習)이라 불리는 서양말 공부[蟹籒之課]에 온 세상이 바람결의 풀이 되어, 풀 위에 부는 바람따라 넘어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마는 유독 성덕리에서는 볼 수 있으리라. 자유(子游) 이후로 거의 천년이 지나 노나라의 교화가 다시 소금강(小金剛)의 아래에서 들린다고 한다.

 

15. 晦亭記

晦本一月之終也. 覆載間 明顯可取之物甚多 而奚取乎是爲哉. 我知矣. 晦之爲義 沈潛鞱光 雖不見精彩之妙 天道之乾乾不息一也. 君子以遯靖自守 晦豈徒然哉. 昔新安朱夫子之以晦庵 盖是義也. 迺玆錦洞林斯文仁圭 表德亨道 操守簡雅 以行誼聞久矣. 嘗松山之經始 與錦沙翁 幹旋 用功惟多 而益自晦 不顯其勞. 今行年七十 固執所守 不見知而無悶. 竟以晦亭扁之 晦而復朔 天度循旋中 不可無者也. 晦豈有長晦不朔之理乎. 晦適於翁之時 則亭卽翁之身也. 此身苟非空具 必有主宰 而寶鑑澄月在吾方寸矣. 心上月 安得與天上月 同其晦也耶. 嗚呼. 曆數已盡 正朔不中 奈聖訓吾從夏何. 況今風而長夜 晦冥否塞 倀倀然而已. 果懷瑾之士有幾. 是皆隱淪 屛居深山 遯跡雲林 益鞱晦而止. 已矣已矣. 擧世坐在黑窣窣地 舍正路而入 昏衢曰謂之明 其實晦冥也. 與亭之晦相反覆 亭云明亭 可耳. 因書爲之記.

15. 회정기

그믐은 본래 한 달의 끝이다. 천지간에 밝게 드러나 취할 만한 물건이 매우 많은데 어찌 이것을 취했을까? 나는 알겠다. 그믐의 뜻은 빛을 깊이 감추어 밖에 드러내지 않아 비록 정채의 묘함을 드러내지 않지만 천도(天度)가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음은 한결같다. 군자는 물러나 고요히 지냄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니, 그믐이라고 한 것이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옛날 신안(新安) 땅에 살던 주자가 ‘회암(晦庵)’으로 호를 지은 것 역시 이러한 뜻이었다. 이에 금동(錦洞)에 사는 자가 형도(亨道)인 임인규(林仁圭)는 지조를 지키며 간엄․고아하여 행실이 바른 것으로 이름난 지 오래이다. 일찍이 송산에서 일을 도모함에 금사옹(錦沙翁)과 함께 일을 관장하면서 공력을 기울임이 많았으나 더욱 스스로를 감추어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나이가 칠십인데 자신이 지키는 바를 굳게 지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회정(晦亭)’이라고 편액하였는데, 그믐이 다시 초하루가 되는 것은 천도의 순환 중에 없어서는 안되는 일이니 그믐이라고 했으나 어찌 길이 그믐으로 남아 초하루가 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믐은 임옹(林翁)이 처한 시대이니 정자는 곧 임옹의 몸이다. 그 몸이 진실로 빈 그릇이 아니라면 반드시 주재자가 있어 밝고 맑은 달이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요, 마음속의 달이 어찌 하늘의 달과 같은 그믐이라고 하겠는가? 아아! 역수(曆數)가 이미 다하여 정월 초하루가 맞지 않으니 성인의 가르침대로 내가 하(夏)나라의 역법을 따른들 어찌 하리오? 하물며 지금은 바람이 부는 긴 밤으로 어둡고 막혀있어 길을 잃은 듯 헤맬 따름이다. 과연 훌륭함을 간직한 선비가 얼마나 될까? 이들이 모두 은사가 되어 깊은 산 속에 몸을 숨기고 구름 가린 숲에 자취를 감추어 더욱 드러내지 않는다. 그만 둘지어다, 그만 둘지어다. 온 세상이 어둡고 쓸쓸한 곳에 앉아 바른 길을 버리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서는 밝은 곳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두운 곳이다. 정자의 그믐과는 상반된 것이니 정자를 ‘명정(明亭)’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로써 기문(記文)을 적는다.

▶건계정:경남 거창군 거창읍. 거창 장씨들이 선조들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16. 晩隱記

不遇而隱 是固士之常 亦時之不幸. 幸而遇聖明之世 則亦何嘗苟隱乎哉. 然隱之時 義不一 有治世之隱 有亂世之隱. 苟曰亂而隱 可尙也. 治而隱 非直曰君子時中之義也. 是以許․巢之名 不載於經傳 而至若晉處士陶潛 紫陽先生大書特書 是天下萬世果忘之戒 明著乎書義中者也. 隱其容易言乎. 鞍洞之水閣 有鄭斯文琫采 本河東人 以庭訓文藝夙就 昫經益篤 而苟志於就進 晩以林泉爲終老計 因自號曰晩隱 是可尙耳. 大凡生而有異質 苟非忘世者 素心樂其隱而隱者 未之有也. 治世則可以羽儀王庭 展布所蘊 世亂贊畵方略 濟民塗炭 宜矣. 囊昔 島夷侵略 誣被刑戮 有甚於龍蛇之禍 而斯文善解譯 坊民得免 全活甚衆 其濟生之力 有何於獨全姓名也歟. 嗚呼. 黑風一飜 草上雖恥 義則松栢 鴂舌聒耳 異音雖譯 心則鐵石爾. 大抵近黑而不涅 染泥而不汚 除非高人一着 那可得乎. 以若之才之美 苟或枉道屈志 則利祿可圖 而家貧親老 終不苟求 漁樵供旨 晩之時可也耳. 彼貪祿之輩 聞晩隱子之風 則寧不羞汗乎. 余亦與世不苟合 願從吾子遊而隱. 無或以太早 而不謝也耶.

16. 만은기

때를 만나지 못하여 은거하는 것은 참으로 선비에게는 일반적인 일이며 시대의 불행이다. 다행히 현명한 군주가 다스리는 시대를 만난다면 어찌 구차히 은거하겠는가? 그러나 은거하는 때라 해도 의가 한결같지는 않으니, 태평성세 때의 은거와 난세(亂世) 때의 은거가 있다. 세상이 어지러워 숨었다면 가상하다고 하겠지만, 태평성세에 은거하는 것은 군자의 시의적절한 의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이름은 경전에 실리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처사(處士)인 도잠(陶潛)의 경우에는 자양선생(紫陽先生:주자(朱子)를 말함)이 대서특필하였으니 이는 세상에서 만세토록 잊어버린 훈계이면서 글의 뜻 속에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은거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안동(鞍洞)의 수각(水閣)에는 정봉채(鄭琫采)가 사는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집안의 가르침으로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었으며, 경전을 익히기를 더욱 열심히 해 참으로 학문을 성취해 나감에 뜻을 두었으나 만년에 자연에서 노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는 ‘만은(晩隱)’이라고 자호(自號)하니 가상할 따름이다. 아마도 태어나서 남보다 다른 자질이 있으면서 진실로 세상을 잊은 사람이 아니라면 본심으로 은거를 즐겨하여 은거하는 사람은 없다. 태평성세에는 당당하게 조정에서 벼슬하며 자신이 연마한 학식을 이야기하고, 난세에는 계획을 세워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지난번 일본이 침략하여 죄도 없이 무참히 형벌을 가한 것이 임진왜란의 처참함보다 심했건만 정봉채는 일본어를 잘하여 그 지역의 백성들이 화를 면하여 목숨을 보존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니 백성을 살려낸 힘이 어찌 다만 이름을 보전한 것에 그치겠는가? 아아! 해를 가릴 만큼 거센 바람이 몰아쳐 풀을 쓰러트림은 비록 부끄럽지만 의리는 송백(松柏)과 같았으며, 때까치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하듯 일본어로 통역을 했으나 마음만은 철석(鐵石)과 같았다. 대체로 검은 것을 가까이 하고도 물들지 않고, 진흙에 적셔도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고결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한 재질의 아름다움으로 도리를 어기고 자신의 뜻을 굽힌다면 이록(利祿)을 도모할 수 있겠지만 가난한 살림에 나이 드신 부모님에게 결코 구차하게 구하지 않더라도 고기잡고 나무하여 맛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은 만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정봉채의 풍모에 대해 듣는다면 부끄러워 식은 땀을 흘리지 않겠는가? 나 역시 세상과 구차히 타협하지 않으니 그대를 따라 노닐며 은거하려 한다. 태조(太早)로서 시들지 않을까 한다.

▶도연명:중국 동진(東晋)․송대(宋代)의 시인.

 

17. 琴下記

琴之爲物 方圓像天地 大小絃合 君臣義. 是以聲之發也 高低淸濁 和而不紊 激人心 而斥邪遠慾 君子以之爲正心之要者是爾. 族兄有表德行淑氏 居于金鞍之琴谷 中歲擇仁 而處仁川里 自號曰琴下. 仁川乃琴之上也 今因所居而寓意 則謂之琴上可矣. 不爾則以仁下亦近矣 而奚是爲哉. 竊念以上自居則滿矣 恐有招損 以仁則近於迂 翁豈爲之也. 盖謙讓自下 受益之道也. 詩曰: “下上其音” 下在上上 而文義猶然 矧惟易經卦爻“以下達上 而一居下位” 下云下乎哉! 且夫琴之性雅確 無物微含春和融融之氣 固非軆道者 鮮能知其妙矣. 是以孔夫子之琴以三操 曾子以一操 至若陋巷琴 乃亞聖所有也. 今主翁之琴 敢論高下 但聽法 或有萬一之微奧 則其遺韻餘響 可得而知也. 嗚呼! 世降俗渝 所謂音律亂聲淫樂而已. 自家之正音雅聲 孰有以解知者乎. 志于山 錦山峨峨 志于水 仁川洋洋乎如流水矣. 世無子期 可奈何.

17. 금하기

거문고의 모양은 네모나면서도 둥글어 천지를 본떴으며, 크고 작은 줄이 모인 것은 군신(君臣)간의 의리와 닮았다. 이 때문에 소리가 울림에 그 고저(高低)와 청탁(淸濁)이 조화를 이루어 어지럽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켜 사악함을 물리치고 욕심을 멀리하게 되니, 군자는 거문고로써 마음을 바로잡는 요체로 삼는 것이다. 육촌형인 행숙씨(行淑氏)는 금안(金鞍) 땅 금곡(琴谷)에 살았는데, 중년에 풍속이 인후한 곳을 골라 인천리(仁川里)에 거처를 정하고는 자신을 ‘금하(琴下)’라고 칭하였다. 인천(仁川)은 금곡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 사는 곳을 따라 뜻을 붙였다면 ‘금상(琴上)’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하(仁下)’라고 해도 될 것인데 어째서 금하(琴下)라고 하였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위(上)’라고 자처한다면 교만한 것이니 손실을 부르게 될 듯하고, ‘어질다’고 한다면 우활한 것이니 공께서 어찌 그렇게 했겠는가? 아마도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춰 도움을 받는 법이리라. 시경(詩經)에 “오르내리는 그 소리로다[하상기음(下上其音)]”라고 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고 말한 것이니 글의 뜻이 오히려 그러하며, 하물며 역경(易經) 괘효(卦爻)의 ‘이하달상(以下達上)하여 일거하위(一居下位)’이라 하니 ‘아래(下)’라는 것이 진정 아래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또한 거문고의 성질은 고아하면서도 강하며, 사물마다 봄의 온화하고 평안한 기운을 품고 있으니 실로 도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오묘함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의 거문고는 삼조(三操)로써 했고, 증자의 거문고는 일조(一操)로써 했으며, 누항(陋巷)의 거문고는 바로 안연(顔淵)이 소유한 것이었다. 지금 주인이 가진 거문고의 품평을 한다면 다만 듣는 법이 만에 하나라도 깊은 뜻이 있다면 남은 여운을 알 수 있으리라. 아아! 말세의 시속이 점점 변하여 음률이 어지럽고 음탕한 음악이 되어 갈 뿐이다. 자신의 바르고 고아한 소리를 누가 알아주겠는가? 산에 뜻을 두니 금산(錦山)은 높고 높으며, 물에 뜻을 두니 인천은 넘실거려 흐르는 물과 같구나. 세상에 종자기(鍾子期)가 없으니 어찌하리오?

▶거문고:국악기 중 사부(絲部)에 속하는 현악기.

 

18. 南崗記

永之南有山曰德龍 德龍崗一脈 逶迤自南 磅礡之氣 鍾萃焉 如芙蓉含露 屈曲焉 如龍蛇微動. 其止也 若巨人舒遲 是利川氏之古舍也. 盖自勝國 嫡傳嫡承 凡二十五世 而基礎尙今惟新. 吁 其盛矣乎. 文武趾美 忠賢踵作 宜與隣邑名閥 難可比立. 然肯堂之良法 久爲南省拇指耳. 居士徐斯文鳳烈 其宗嫡某同母弟 嘗折箸于崗之南 扁其所居曰南崗. 大抵北而下者 謂之南 山之小者 謂之崗 其於北嶽之嶠嶠 難爲山矣 奚取是而自好哉. 古河南出兩程夫子 龍崗昔者臥龍先生居焉 孰敢以南崗小云乎. 嗚呼. 天下滔滔 南北陸沈 民幾魚矣. 惟一小崗屹然 若頹波中獨立 抑吾道在南是也歟 眼前無可倚杖者 心歎不已 纔見一崗南立 小慰我懷 崗其善葆哉. 且夫周南正家之始 而冠諸詩 又有陟彼高崗之句 南之正 崗之高 不下於泰山․喬嶽矣. 今翁之崗 未知幾許尺 然高於平地 則高矣 冠諸天下之山 然後謂之高乎哉.

18. 남강기

영(永)의 남쪽에 덕룡산(德龍山)이 있다. 덕룡강(德龍崗) 일맥이 구비구비 남쪽에서 가득한 기운이 모여 연꽃이 이슬을 머금은 듯, 구비치는 것은 용과 뱀이 미동하는 듯 하다. 그것이 멈춘 곳은 거인이 점잖은 태도로 있는 듯한데 이곳이 이천씨(利川氏)의 옛집이다. 대략 고려(高麗)에서 장손들에게 이어져 온 것이 25대인데도, 주춧돌은 아직까지도 새로 놓은 듯하다. 아, 성대하도다! 문관과 무관이 계속해 나오고, 충신과 현인들이 연이어 태어나 이웃 고을의 명문 집안도 어깨를 겨루기 어려우며, 대대로 계승된 가법 또한 오래도록 남성(南省)의 으뜸이다. 거사 서봉렬(徐鳳烈)은 그 가문의 종손인 아무개의 동복(同腹) 아우로, 일찍이 덕룡강의 남쪽에 거처를 만들고 ‘남강(南崗)’이라고 편액하였다. 무릇 북쪽 이하를 ‘남(南)’이라 하고, 산중에서 작은 것을 ‘강(崗)’이라 하는데, 북악(北嶽)이 높디 높은 것에 비해서는 산이라 하기 어려우니 어찌 이것을 취해 스스로 좋아하는가? 그러나 옛적 하남(河南) 땅에 정호선생과 정이선생이 나왔고, 용강(龍崗) 땅은 예전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제갈공명: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

 

살았던 곳이니, 누가 감히 남강을 작다고 하겠는가? 아아! 천하에 큰물이 넘쳐 남북의 육지가 잠겨 백성들은 거의 물고기처럼 되었다. 오직 작은 언덕 하나만이 우뚝하여 무너져 내리는 파도 속에 홀로 서있으니, 아니 우리 유학(儒學)의 도가 남쪽에 남아 있는 것이 이 남강인가? 눈앞에 의지할만한 것이 없어 마음으로 탄식을 그칠 수가 없었는데 겨우 하나의 언덕이 남쪽에 선 것을 보고서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니, 언덕에 풀이 더부룩한 것을 생각한다. 또한 시경(詩經)의 「주남(周南)」편은 집안을 바로잡는 시작으로 여러 시의 앞머리에 놓여있으며, ‘저 높은 언덕에 오른다[척피고강(陟彼高崗)]’는 구절이 있어 남(南)은 바르고 강(崗)은 높다고 하였으니 태산(泰山)․교악(喬嶽)보다 낮은 것이 아니다. 지금 옹의 언덕이 몇 척이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평지보다 높다면 높다고 할 것이니 천하 모든 산의 으뜸이 된 후에야 높다고 하겠는가!

 

19. 小松記

松之於凡木 猶賢人之衆庶也. 然人有異質者 學而能成立 貞忠大義 卓乎庶民. 但松之生也 猶有大冬特守之節. 雨露焉 不以爲榮 霜雪焉 不以爲悴 特秀高操 不學而能焉. 則論其美資 小長何有間然哉. 界平古縣也 在乎羅州治而今大道里. 古奄谷士人羅翁鼎煥與余同立松山門 盖有年矣. 年德長我 嘗尊執待之 同門諸益序齒而事長之. 今以小松爲號 其偉大之狀 小於松山之松而然歟. 宜小於大廈棟樑之局 然凡天下之物 以小而漸大 理之常也. 以若泰山之高 其初不過一拳土 河海之大 其源不過一勺水. 以是觀之 今小後大 從可知矣. 祗是心學日新 工夫未及於此 則自以夸大負 近則易之 小則忽之. 吁! 其通患也. 嗚呼. 目今黑風一飜 無草不偃 無木不摧. 而終不改柯易葉於其中者 惟玆松爾 物之小大 特其外矣乎.

19. 소송기

모든 나무에 있어 소나무는 현인과 일반 백성들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질이 남다른 사람은 학문을 통해 자신을 세워 절개 있고 충성스러운 대의(大義)가 백성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소나무는 나면서부터 혹독한 겨울에도 오롯이 지켜내는 절개가 있다. 비와 이슬이 내리는 것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고, 서리와 눈이 내려도 근심하지 않으니, 빼어난 높은 지조를 배우지 않고도 능히 간직할 수 있다. 소나무의 아름다운 자질을 논함에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계평(界平) 땅은 오래된 고을로 나주 지금의 대도리(大道里)에 있다. 예전에 엄곡사인(奄谷士人) 나정환(羅鼎煥)씨가 나와 송산 문하에 들어가 몇 년간 함께 있었다. 나이로나 인덕으로나 나보다 뛰어나 일찍이 존경하며 그를 대우하였고, 동문의 여러 벗들도 나이가 많은 것으로 어른으로 모셨다. 지금 호를 ‘소송(小松)’이라 하였는데 그의 위대한 외모가 송산의 소나무보다 작아서 그렇게 이름한 것인가? 분명 큰집의 대들보가 될 국량보다는 작겠지만 천하 만물은 작은데서 점점 커지는 것이 이치의 상도이다. 태산의 높음도 처음에는 불과 한 줌의 흙에 지나지 않았으며, 하해(河海)와 같은 거대함도 그 수원(水源)은 한 국자의 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보건대, 지금은 작지만 후에는 크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심학(心學)은 날로 새로워져도 공부가 이에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 과장하고 자부하여 가까운 것은 쉽게 여기고, 작은 것은 소홀히 한다.

아, 보통 사람들이 가진 병이로다! 오호라! 지금 해를 가릴 만큼 거센 바람이 몰아치매 넘어지거나 꺾이지 않는 풀과 나무가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끝내 가지와 잎을 바꾸지 않는 것은 오직 이 소나무일 뿐이니 사물이 작거나 크다고 도외시할 수 있겠는가!

▶한겨울의 소나무.

 

20. 羅孝子廬墓實記

凡爲人子者 及親喪 侍于墓 於禮似或無矣. 然余嘗以甚好禮而疏於哀者 未可稱孝也. 今羅孝子明善甫自幼誠孝根天 能知事親之禮. 及長 躬執樵㸑 供進甘旨 父母有悅已者 必極力致之 冬夏溫淸 未不用誠. 厥父有疾 延醫湯劑 齊浴禱天 累見神效. 竟以天年終 摧痛過哀 幾至滅性. 執喪如禮 服闋 繼而母夫人病 欲醫劑祈祝 一如前時. 斫指灌血 僅得回血甦 而三日乃終 尤極號痛 哀毁逾制. 旣獎 自語於心曰: ‘晨夕拜哭于靈筵禮也 禮何敢違. 但老母體骸歸在窀穸 吾將寢息堪安乎.’ 卽日蘆于墓側 泣血三年 草爲之枯. 喪禫旣除 每値忌日 卽如担括日 不御酒肉 器皿親自滌 檢庶品務極潔淨 宜可謂事死如事生 終始無憾者也. 奈天聽無路斯人也 不得闡揚 是可惜耳. 其從第鍾玉要以記 實辭不獲 略記其槪.

20. 나효자여묘실기

무릇 자식된 자가 부모님의 상을 당해 시묘살이하는 것은 예법에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항상 예법을 좋아하면서도 슬퍼함에 소홀한 것은 효도라고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지금 효자 나명선(羅明善)씨는 어려서부터 효성을 타고나 어버이를 섬기는 예법을 알았다. 성장해서는 직접 나무하고 밥을 지어 맛난 음식을 상에 올려 부모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해 구해드리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정성을 다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자 의원을 불러 탕약을 짓고, 목욕재계로 하늘에 기도하니 여러 차례 신통한 효험을 보았다. 끝내 부친이 천수를 다하자 너무나 애통해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장례를 예법을 갖춰 치르고, 복을 벗자마자 모친이 병에 드니 의원을 불러 약을 짓고 기도하기를 부친께 하던 것과 한결같았다. 또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겨우 핏기를 돌려 소생시켰으나, 삼일 만에 돌아가시자 더욱 애통해 울부짖으며 슬퍼함이 정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아침․저녁으로 영전에 절하며 곡하는 것이 예법이니, 예법을 어떻게 감히 어기겠는가? 노모의 유해가 광중(壙中)에 놓였으니, 내 침식(寢息)을 편히 할 수 있으랴?’라고 마음먹었다. 그날로 묘 곁에 여막(廬幕)을 세우고 피눈물로 삼 년을 보내니 그의 효성에 풀이 시들 정도였다. 상례와 담제(禫祭)를 마치고도 기일(忌日)이 되면 단괄일(担括日)과 같이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제기(祭器)는 자신이 직접 씻었으며 제수(祭需)도 가려서 매우 정결한 것을 준비하니 돌아가신 분 받들기를 산 사람 받들 듯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서운한 것 없게 하였다. 어찌 하늘이 이 사람을 모르겠냐마는 널리 드러내지 못함이 애석할 뿐이다. 그 사촌 아우인 종옥(鍾玉)이 글을 부탁하여 사실대로 다 기록하지 못하고 간략히 그 대강만을 기록하였다.

▶한약방:한약방 천정에 매달아 놓은 한약.

 

21. 雙溪亭重修記 (代舍伯)

歷選湖右諸州之勝 錦城爲最 金鞍洞又於錦城最是名村. 而洞有雙溪亭 不但爲山水之絶勝 卽先賢講學之所 迄今維持已半千祀矣. 盖自吾祖文靖公 始廬于此洞 儒敎丕興 道學文章․忠節名宦與夫生進蔭仕連世輩出 諸姓氏芳隣相接 便成鄒魯之鄕. 以言乎名碩多出 則天若有私於吾洞 亦以觀於諸姓俱發 則天實無私焉. 國朝以來 各家先祖某官某諱 備在洞案 尊閣于亭上 猗歟盛矣. 亭其遊賞之樂而已哉! 每春秋講會 羣賢畢集 有似乎蘭亭修契 鄕隣同井 德業相勸 無愧於藍田規約 往古文物之殷盛 不啻若杞宋之可徵也耳. 昔我七世祖進士公 嘗著六偉之文 重修上樑矣. 奈星霜累改 雨洗風磨 甍摧瓦泐 幾不免大過棟撓之患. 徂歲丁丑秋 洞議協一 爰謀嗣葺 四姓氏各定之有司實蕫. 是役改瓦易椽 關幾箇朔而訖功 此亦一洞之幸會也. 第惟左右翼廊 舊有房舍 今果財力綿弱 撤去兩房 只留正廳 後之視今 宜不若今之視昔也. 然潛雷已動 則又安知萬戶千門次第復開也耶. 嗚呼. 亭榭今日重修 匪必曰‘能事已了’ 惟冀洞案後裔 各念賢祖之懿行 顧名思義 毋忝所生 則亭之不朽 其在斯歟. 勉旃.

21. 쌍계정중수기 (큰 아버지를 대신하여)

호우(湖右) 여러 고을의 명승을 두루 가려보건대 금성(錦城)이 으뜸이오, 금안동(金鞍洞)은 금성에서도 가장 이름난 마을이다. 이 마을에 쌍계정(雙溪亭)이 있으니 산수가 빼어날 뿐 아니라 선현들이 강학(講學)하던 곳으로 지금까지 500년 동안 유지해 왔다. 나의 조상이신 문정공(文靖公)께서 이 마을에 터를 잡으신 뒤로 유교가 크게 흥성했으며, 도학가․문장가․충절지사․명신(名臣) 및 생원 ․진사, 음직(蔭職)으로 진출한 이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어 여러 성씨들이 가까이 이웃해 지내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고을과 같이 되었다. 이름난 석학들이 많이 나온 것으로 말하자면 하늘이 마치 우리 마을에 사사로운 정을 베푼 듯하지만, 여러 성씨들이 모두 잘 된 것을 보면 하늘은 실로 사심이 없는 것이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각 집안 선조들의 관직과 함자(銜字)를 동안(洞案)에 갖추어 정자 위에 존각(尊閣)을 만들었다. 아름답고도 성대하도다. 정자가 노닐며 감상하는 즐거움에 그치겠는가! 매년 봄․가을에 강학회(講學會)에는 어진 이들이 모두 모여 마치 난정(蘭亭)의 계회(契會)와 같고, 고을 이웃들이 덕업상권(德業相勸)하는 것이 남전(藍田)의 규약(規約)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옛날 문물의 성대함이 기송(杞松)을 징험할 정도 뿐만이 아니다. 옛날 나의 7대조 진사공(進士公)께서 일찍이 육위(六偉)의 글을 짓고 중수(重修)하여 상량(上樑)하셨었다. 몇 해가 지나면서 비와 바람에 씻기고 마모되어, 용마루와 지붕의 기와가 부서지고 갈라져 거의 들보가 꺾이게까지 되었다. 지난 정축(丁丑)년 가을에는 마을에서 협력해 지붕을 새로 고치기로 결의하고 네 집안이 각자 담당자와 실질적인 감독관을 정하였다. 이 사업에서 기와를 바꾸고 서까래를 갈아 거의 한 달이 걸려 공사를 마쳤으니, 이 또한 마을의 다행스런 모임이었다. 단지 좌우의 익랑(翼廊)에 옛날에는 방사(房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자금이 적어 두 개의 방은 철거하고 정청(正廳)만을 남겨두니, 훗날 지금 이루어 놓은 것을 본다면 우리가 옛날의 것을 보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잠긴 우레가 이미 움직였으니 어찌 만호천문(萬戶千門)이 다음 차례에 다시 열릴 지 어찌 알겠는가? 아아! 누정이 이제 중수(重修)되었으나 ‘일을 잘 마쳤다’고 할 수는 없다. 오직 동안(洞案)에 기재된 분들의 후예들이 각각 현명한 조상들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억하고 명예와 의리를 생각하여 선조에게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누정이 썩지 않음이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를 힘쓰도록 하라!

▶쌍계정:고려 충렬왕 6년에 문정공 정가신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금성산에서 내려온 계곡이 양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쌍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251 - 시도유형문화재   34호).

 

22. 芝庭記

錦城雄府 冠諸南省 而錦之尤著者 北道林坊是也. 羅州氏 世于玆土 自襄平公爵諡勳號․豐功偉烈之趾美 凡三百有餘祀. 翁以襄平之遠裔 早襲庭訓 誼行有聞. 晩築一茅於所居之南 以芝庭顔之 異哉! 翁之寓意也. 花卉林木 可愛者多 而奚以芝爲哉? 芝神草也 芝果神矣 將誰爲在. 今疾風大威 瓊茅盡爲蕭艾 而草無不霜矣. 抑亦心上田地 有煌煌者芝 而日益秀美也歟. 果爾則他花有無不足道爾. 今夫芝之爲物 與蘭同臭 不以無人不芳 是亦草中君子. 盖君子自修底工亦類是 苟爲人宜非學耳. 其謹愼自持․踐履懋篤 除非高人一着愛物之情 烏能及此. 無人自芳 盖取諸愼獨工夫 日益秀美 盖取諸日新工夫 則庶幾確乎. 愛而我不自我爾 物與我又何間然. 昔紫陽先生 以若有宋之大賢 美其三秀 題於篔簹壁. 竊伏念希聖之心 益懇然耳 亦何嘗芝異今古. 大抵不進則易退 在乎學之懋篤與否. 願翁老當益懇 期至於紫陽之所愛 亦吾所希.

22. 지정기

금성(錦城)은 큰 고을로 남쪽 지방에서 으뜸인데, 금성에서 더욱 유명한 곳은 북도(北道)의 임방(林坊)이다. 나주 임씨는 이 땅에서 대를 이어와 양평공(襄平公)의 작훈(爵勳)․시호(諡號), 위대한 공렬(功烈)을 계승한 이래로 무릇 삼 백여 년이 흘렀다. 임옹은 양평공의 먼 후손으로 일찍이 가정의 규범을 익혀 올바른 행실로 이름이 났다. 만년에 거처의 남쪽에 집 한 채를 짓고 ‘지정(芝庭)’이라고 편액하니, 옹이 뜻을 붙인 것이 기이하도다. 화훼와 수목 중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많은데 어찌하여 지초(芝草)를 택했던가? 지초는 신초(神草)로, 지초가 과연 신령하다면 장차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 지금 질풍이 대단한 위세를 떨쳐 아름다운 풀들도 모두 쑥이 되고, 풀은 서리를 맞지 않은 것이 없다. 아니면 마음의 밭에 아름다운 지초가 날로 빼어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인가? 과연 그렇다면 다른 꽃들에 대해서도 말 못할 것이 없다. 지금 저 지초라는 것은 난(蘭)과 향취를 같이하여 사람들이 향기롭다고 하지 않더라도 이는 풀 가운데 군자이다. 아마도 군자가 스스로를 수신(修身)하는 정성도 이와 같아 진실로 남을 위해 학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삼가 신중하게 자신을 지키고 실천에 매우 힘쓰는 것은 고결한 사람이 한결같이 만물을 아끼는 마음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향기로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공부[신독공부(愼獨工夫)]에서 얻을 것이요, 날로 빼어나고 아름다워짐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일신공부(日新工夫)]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끼면서도 내 자신을 스스로 나답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과 내가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옛날에 주자는 송나라에 큰 현인이 있는 것처럼 지초를 아름답게 여겨 운당(簣簹)이라는 계곡의 절벽에 글을 썼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인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을 따름이니 지초가 고금의 차이가 있어서 이겠는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기 쉽다는 것은 학문에 힘쓰고 독실함의 여부에 달려있다. 임옹은 늙을수록 더욱 노력하여 주자가 아끼던 지초가 되기를 기대하며, 나 또한 희망하는 것이다.

▶영지:담자균류 민주름목 구멍장이버섯.

 

23. 錦涯記

錦翁是閭里篤敬之士 操飭雅確 立志堅固. 本儒行而尙儉素 不以奢華 玩其所好 亦不以玩好喪志. 而今也扁其堂無 或太侈過分乎曰無 祗吾所居 適錦東仁川之濱 故有是也 余起敬曰: 居是者 盡是乎爲錦由心 豈由山乎哉 宜其存諸心 而非外役也. 必先成錦於胸中 則那可曰 有此山然後扁之也歟. 錦之爲物 必蚕焉繅焉 而縷縷成章 外縷雖一絲 不容於其間. 而直經像天 橫緯像地 其文也 如日月星宿之麗于天 其章也 如草木禽獸之動植于地. 燦然之文 蘊諸中而見於外 苟非繪事後素之資 惡能及此也哉 然人徒知華美爲貴 而不知眞積力久勤苦成功. 吁 可慨也爾. 且其以山則是錦也 爲羅州之雄鎭 以水則是涯也 爲仁川之勝區. 仁川是金鞍之最右耳 文獻聯世官顯踵作 是乃山水之萃靈而然也. 奈之何 今則不然. 往往狂狷之士 寓意林泉 終不見用於世 時也奈若爲. 不惟是已絹造匪帛之類 似是以亂眞着乎. 儒者身上如非不緇之質. 孰能葆其素守乎. 錦宜君子之所尙也 思聖以衣錦尙褧 諭君子之德 眞格訓也. 惟錦翁欽服斯訓 老益勉强可耳. 翁於余乃族叔祖也 焉能記爲. 但惇誼惟厚 命且珍重 辭不獲 因書爲記 賦詩曰 “冽彼錦川 源于雙溪. 平淡有涯 潔潔如洗.”

23. 금애기

금옹(錦翁)은 여항의 행실을 삼가하고 공손한 태도를 지닌 선비여서 조심하고 삼가며 마음이 단아하고도 확고하며 뜻을 세움이 견고하였다. 유자(儒者)로서의 행실을 갖추고 검소하게 지내 사치하거나 화려하게 하지 않았으며,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도 지나치게 빠져 본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당(堂) 현판에 ‘무(無)’라고 하였으니 행여라도 지나치게 사치하거나 분수를 넘을까 ‘무(無)’라고 한 것인가? 내가 살던 곳이 마침 금성(錦城) 동쪽 인천(仁川) 근처에 있었기에 이 당(堂)이 있음에 나는 공경의 마음을 일으켜 “이곳에 사는 이들은 모두 비단같이 되는 것이 마음에서 그리 된 것이지, 어찌 산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분명 마음에 있었던 것이지 외물(外物)에 구애된 것이 아니다. 반드시 먼저 가슴속에 비단을 이루었다면 어찌 ‘이 산이 있어 현판을 걸었다’고 하겠는가? 비단이라는 것은 반드시 누에를 키워 고치를 켜서 올올이 무늬를 이룬 것이니, 다른 실오라기는 한 가닥이라도 그 사이에 용납하지 않는다. 날줄은 하늘을 본뜨고 씨줄은 땅을 본떴으니, 그 무늬는 해와 달, 뭇별이 하늘에 깔린 듯 하고 문장은 초목과 금수가 땅에서 자라고 움직이는 것 같다. 찬연한 무늬가 그 안에 쌓여 있다가 겉으로 드러나니 참으로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자질이 아니라면 어찌 이에까지 미치겠는가? 그러나 사람은 한갓 화려하고 보기 좋은 것만 귀한 것으로 알고 실로 공력을 오래 쌓아 부지런히 애써야 성공한다는 것은 모른다. 아! 슬프다. 산으로 보면 금(錦)은 나주의 웅진(雄鎭)이 되고, 물로 보자면 애(涯)는 인천의 승경지가 된다. 인천은 금안(金鞍)에서 가장 으뜸되는 곳으로, 문헌에는 대대로 높은 관리들이 뒤를 이어 나왔다고 하니 이는 산수에 영험한 기운이 모여서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은 그렇지 않은가? 종종 세속과는 달리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가 산수에 뜻을 두어 끝내 세상에 쓰여지지 않으니 시대가 어찌 그렇게 했는가? 이미 비단으로 폐백상자를 만드는 것일 뿐 아니라, 진실하고 확고한 것을 어지럽힘과 같다. 유자(儒者)의 신상에 검지 않은 바탕이 아님과 같다. 누가 자신이 평소 지키던 것을 키워갈 수 있겠는가? 비단은 군자가 높이는 것이지만 성인께서 비단옷을 입을 때는 겉옷을 숭상한다는 것으로 군자의 덕을 깨우쳐 주셨음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훌륭한 교훈이라고 하겠다. 바라건대 금옹(錦翁)께선 이러한 가르침을 흠복(欽服)하여 나이들수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금옹은 내게 족숙조(族叔祖)이시니 내가 어찌 기문(記文)을 쓸 수 있으랴마는 다만 돈독하고 후덕하시며, 수(壽)를 누리시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에 기문을 지었다. 다음과 같이 시를 읊는다. “차가운 저 금천(錦川), 쌍계(雙溪)에서 근원하도다. 고요하고 맑은 물가여, 깨끗하여 씻을만 하도다[열피금천(冽彼錦川), 원우쌍계(源于雙溪). 평담유애(平淡有涯), 결결여세(潔潔如洗)]”

▶광대곡:정선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휴일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린다.

 

24. 樵山記

昔玄眞之賢 聞于江湖 朝廷亦聞之 賜其一樵靑 以供朝夕之艱 是可曰樵. 雖樵矣 宜非躬之樵也. 必躬行之蔬食焉 八珍方丈 莫奪吾素志 萬鍾利祿 不易吾素志 然後可以爲樵耳 樵其易爲乎哉. 珍原南有紫雲里 居人金鍾運 本金海古族 惟夫世德 雖之杞․宋亦可徵 而但不能屈指於吾省者 中葉未有顯達而然也. 翁性勤儉 治家有規訓. 姪子一遵先規而勤戒之 隣里艶其誼行. 晩以樵山題其軒 尙矣哉. 翁之所好也山 本仁者之樂 而翁果仁乎. 如其仁也 亦何嘗爲樵而止. 嗚呼. 今日何日. 西山遠矣 春蕨不可以復採 則今之登山者 舍其樵而何之. 翁今七旬有七 樵之漁之 不知老而樂 其樂所樂幾何. 想其心樂耳. 惟以至誠至篤 稍留心於書 懇懇吾學 則苟無質勝之疑 而終老於斯 竊爲翁可惜耳. 然吾徒之尙文華者 莫知敦本懋實 則以斯翁爲準矩 不亦宜乎.

24. 초산기

옛적 당(唐)나라 시대에 현진자(玄眞子)의 어짊이 강호(江湖)에 이름을 떨치고 조정에도 알려져 초청(樵靑)이라는 여인을 하사하여 아침․저녁으로 음식 시중을 들게 하였으니 이를 초(樵)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초(樵)라고는 했지만 몸소 나무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몸소 나물 반찬의 간소한 식사를 하며, 한 자나 되는 큰상에 팔진미(八珍味)로도 나의 본뜻을 빼앗기지 않고, 후한 녹봉이라도 내 본뜻을 바꾸지 않은 다음에야 초(樵)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초(樵)라는 것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진원(珍原) 남쪽 자운리(紫雲里)에 사는 김종운(金鍾運)은 본래 김해(金海)의 고족(古族)으로 대대로 전해온 집안의 덕(德)은 기(杞)나라나 송(宋)나라에 가더라도 징험할 수 있는데 우리 마을에서 손꼽히지 못하는 것은 가문의 중엽에 현달한 분들이 없어 그러한 것이다. 김옹(金翁)은 성품이 근검(勤儉)하여 집안을 다스림에 규범이 있었다. 자질들이 모두 규범을 따라 삼가고 조심하니, 이웃 고을에서 그 바른 행실을 부러워하였다. 만년에 자신의 행랑에 ‘초산(樵山)’이라 이름 지으니 훌륭하도다. 김옹이 좋아하는 것은 산인데 본래 어진 이가 좋아하는 것이니 옹이 과연 어질단 말인가? 어질다면 또 어찌 나무하는데[초(樵)] 그치겠는가? 아아, 오늘이 어떤 날인가? 서산은 멀고, 봄 고사리는 다시 캘 수 없는데 지금 산에 오르는 이가 땔나무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김옹의 나이 77세로 나무하고 고기 잡으며 늙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하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그 마음의 즐거움을 상상해 볼 뿐이다. 오직 지성(至誠)과 돈독함으로 점점 글에 마음을 두어 유학(儒學)에 힘쓴다면 진실로 촌스럽다는 의심은 없을 것인데 끝내 여기에서 늙을 것이니 김옹을 위해 애석해할 뿐이다. 그러나 문장의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자로서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무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 김옹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25. 永陽精舍記

錦下永之陽 桃柳舊巷 乃世土. 余因名所居曰茶泉. 今其茅廬數棟 可以庇風雨 亦可以容膝足矣. 是歲春姪輩腓動 圖築於茶泉之東 是茶園也. 余問 告曰  竊爲暮年藏修而築之. 余曰 止 盖人之情欲 雖無窮 分各止其所而後 人得而爲人. 但越分知足 寧孰無咎. 徒築於分外 吾所未知也. 姪輩累告百懇 而族親宗黨咸助其力 不週年而竣功 揆分濫矣. 嗚呼! 主宰不稱 屋便是虛殼子. 只以容身爲義 則廣廳大廈宜乎無用. 然苟有近遠有自 而四要知舊 以時相長 則屋能容之 是固主宰之能事了. 客有問於余曰 與其藏修爲要 莫若隱山 而今其近俗何哉. 是莫我知也. 但山要須靜 須靜有心 則山與俗 何有於我乎哉. 自有心山 是眞箇矣. 於是乎 命名曰 永陽精舍 因以爲養眞之方.

25. 영양정사기

금(錦)의 남쪽 영(永)의 북쪽 땅은 복숭아와 버들이 있는 오래된 마을로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나는 이 땅이름으로 거처를 ‘다천(茶泉)’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초가 몇 채는 비바람을 막을 만하며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정도이다. 올해 봄에 조카들이 움직여서 다천의 동쪽에 새로 집을 짓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다원(茶園)’이다. 내가 무엇하는 것이냐고 묻자, 조카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만년에 이곳에서 학문에 힘쓰기 위해 짓는 것입니다”

“그만 두거라. 대개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지만 분수가 각각 마땅한 곳에서 그친 후에야 사람이 사람답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분수를 넘고 만족함을 아는 것에 대해 누군들 허물이 없다 하겠는가? 한갓 분수 밖의 건물을 짓는 일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조카들이 누차 부탁하고 애원하고, 친척과 집안에서 모두 그들을 도와 한 해도 지나기 전에 준공을 하니 분수를 헤아려 보건대 너무나 지나친 일이다. 아아! 주인이 마땅한 사람이 아니니 집은 한갓 헛된 껍질일 뿐이다. 다만 내 몸 하나 붙어사는 것으로 의의를 삼는다면 넓고 큰 집이 분명 쓸데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원근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고 두루 친구들을 불러 때때로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집도 용납될 수 있으니, 이는 진정 주인이 하기 나름인 것이다. 객이 내게 “학문에 힘쓰는 것을 요체로 삼는 것은 산에 은거함만 못한데 지금 세속을 가까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이는 나를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산은 요컨대 조용해야 하는데, 조용함에 마음이 있다면 산과 세속이 어찌 나에게 다르겠는가? 스스로 산에 마음을 두었으니 이는 진개(眞箇)이다. 이에 명명하기를 ‘영양정사(永陽精舍)’라 하였으니, 이를 인하여 진(眞)을 기르는 방도로 삼는다.

▶초가집:초라하지만 소박하고 검소한 진리가 머무르도록 했던 선비들의 집.

 

26. 竹軒公家狀草記

本生考 諱台會 字益三 竹軒 號也. 本麟山 世于羅州 因貫羅州 麗季文靖公雪齋先生諱可臣 道學文章 允爲百世儒宗. 入本朝 有諱軾 號永慕亭 兵曺判書 謚景武公 配享雪齋祠. 四傳 諱某 號滄洲 文正 卽德業文章 蔚爲士林宗仰 至諱彦復 號癡翁 昇上庠 以文章名世 寔先君六世祖也. 曾祖諱國樞 祖諱養浩 俱隱德不仕 考諱柱號誠菴 學業尤著 以儒行聞 妣居昌愼氏諱在哲女 內行貞淑 古女士也. 高宗戊辰十一月八日 生公於金鞍洞永安村第 四昆季 卽季也. 性簡重 自幼氣稟稍異 每動止周旋 合乎規矩 及就學于習靜門 先生嘗稱以遠大期之. 未幾 先生沒 祇以過庭之訓 學詩禮 篤於孝友 始折著 家道甚艱 猶以蔬食菜粥 不以爲憂 朝出夜歸 以鋤與書爲眞樂 其自家所樂 人所不及知也. 事父母 能竭其誠 去大宅稍間 晨昏小不懈 鄕里服其行 遭考妣喪 哀毁愈制 服闋 每置喪 餘如袒括日 不御酒肉 尤增哀慕 時伯氏沒 長姪姑未成就 偕仲氏 保宗事 扶門戶 未幾年 姪亦長成 以儒雅聞. 旣而仲氏連沒 痛歎曰 人皆有之 我何獨無 伯其德矣. 仲其善矣 而奈之何嗇於命 難諶者天也. 乃潛心劬經 當食忘食 當寢忘寢 不知老之將至 而獨覺其妙 自閹茂 頓絶世味 不櫛不靧 只着冠了. 戊午  高宗昇遐 北望痛哭 尤不堪黍離之歎 題數句詩 平居淡然於紛華以耳聾處於自謙之地是只恐邪說之或人耳也 嘗眷眷於文學 有鄕黨子弟 自行束脩而來者 誨亦不倦 游從者 莫不說服 老而尤好學 遊於謙山門 硏義該洽 謙山先生 每稱與之. 丁卯十一月八日卒 享年僅六十. 病革戒姪子曰 全而生之 全而歸之 宜無憾然 靑山不遺一杯(坏) 我安適歸 恬然而逝 先生倩工祝致祭文 有曰 天不憖遺 胡奪之亟耶. 何其豐於賦而嗇於命也. 此深惜未加之以年耳. 有遺稿一冊 詩文記序 皆出於性情之正 而固非餘人可及也. 墓月淸洞書堂谷負庚原 配固城李氏諱俊奭女 壬申九月六日卒 墓月淸洞內南山丙坐 擧二男 長遇權 次遇益 出爲叔父錦天公後 遇權娶于慶州李氏圭虎女 生一男三女 男康勉 林謹黙洪起碩李憲婿也. 出後子遇益 娶慶州李氏鍾泰女 生四男二女 男日勉道勉德勉俊勉 女奉弼碩李商範 內外曾玄 蕃不錄. 嗚呼 惟公在世行治 祇恐踈漏之有 安敢妄溢爲哉. 竊伏念知吾本生考 終始莫若先生 則幸須泚筆 使後之君子 宜有裁擇之地 只吾小子痛迫之願 戊辰十月日 出后子 遇益泣血謹識.

26. 죽헌공가장초기

본래 낳아준 선고(先考)의 휘(諱)는 태회(台會)요, 자(字)는 익삼(益三)이니, 죽헌(竹軒)은 호(號)이다. 본관(本貫)은 인산(麟山)이지만 대대로 나주(羅州)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거(世居)함으로 인하여 나주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말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 선생의 휘는 가신(可臣)이니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진실로 백세(百世)토록 유림(儒林)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휘 식(軾)이 있으니,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 병조판서(兵曺判書)를 지냈고, 시호(諡號)는 경무공(景武公)으로 설재사(雪齋祠)에 배향(配享)되었다. 4대를 내려와 휘 모(某)는 호가 창주(滄洲)이니, 문정(文正)은 덕업(德業)과 문장이 뛰어나 사림(士林)에서 숭앙(崇仰)하였다. 휘 언복(彦復)은 호가 응옹(癡翁)이니, 상상(上庠:國子監)에 올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분이 바로 선군(先君)의 6세조(世祖)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국추(國樞)요, 조(祖)의 휘는 양호(養浩)이니,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고(考)의 휘는 주(柱)요, 호는 성암(誠菴)이니, 학업이 더욱 드러나 유림에 알려졌다. 비(妣)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니 휘 재철(在哲)의 따님이다. 내면의 행실이 정숙(貞淑)했으니 옛날의 여사(女士)라 하겠다.

고종(高宗) 무진(戊辰:1748) 11월 8일에 금안동(金鞍洞) 영안(永安) 촌집에서 공을 나았으니, 네 형제 가운데 막내이다. 천성(天性)이 간소(簡素)하면서도 엄중(嚴重)하여 어릴 때부터 기질(氣質)과 성품이 조금 남달랐고, 행동거지와 주선(周旋)하는 것이 법도(法度)에 맞았다.

습정(習靜) 선생의 문하(門下)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는데, 선생께서 일찍이 원대(遠大)한 그릇으로 기약하였으나 얼마 후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다만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아 시례(詩禮)를 배워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였다. 처음 분가(分家)하여 집안 형편이 무척 가난했으나 오히려 소식(蔬食)과 나물죽을 먹는데 대해서 근심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침에는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책을 보는 것으로 참된 즐거움을 삼았으니, 남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섬겨 큰댁과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저녁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새벽에 문안 여쭙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 행동에 탄복(歎服)하였다. 고비(考妣:돌아가신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복제(服制)보다 더 슬퍼하여 몸을 상하였고, 복제(服制)가 끝이 났어도 매번 상(喪)을 당한 나머지 왼쪽 어깨를 벗고 머리를 묶어 상사(喪事)에 조의(弔意)를 표하는 날과 같이 하여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으며, 더욱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이 때 백씨(伯氏)가 세상을 떠났는데 큰 조카가 아직 성인(成人)이 되지 않아 모든 중씨(仲氏)가 종사(宗事)를 맡아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해 나갔다. 얼마 후에 조카가 장성(長成)하여 선비로 단아(端雅)한 소문이 났다. 이윽고 중씨마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통탄(痛歎)해 하면서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있는데, 어떻게 나만 홀로 없는가? 백씨는 덕스럽고 중씨는 선했는데, 어떻게 수명이 인색한지 믿기 어려운 것은 하늘이다.” 하였다.

이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전(經傳)에 힘을 쏟아 밥을 먹어야 하는데도 밥먹는 것을 잊고 잠을 자야 하는데도 잠자는 것도 있은 채 늙음이 장차 닥치는 줄도 모르고 홀로 그 묘(妙)함을 깨달았다. 경술년(庚戌年:1910)부터는 세상살이의 맛은 완전히 끊어버리고 머리 빗거나 얼굴도 씻지 않고 다만 관(冠)만 썼다. 무오년에 고종(高宗)이 승하(昇遐)하니 북쪽을 바라보고 더욱 통곡(痛哭)하며 서리(黍離)의 탄식을 견디지 못하고 시 몇 구절을 지었다.

평소 거처할 때에도 어지럽고 화려한 것에는 담담하여 귀머거리처럼 스스로 겸손하게 처신(處身)하였으니, 이는 간사(奸邪)한 말이 사람들의 귀를 의혹(疑惑)스럽게 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늘 문학(文學)에 마음을 두어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속수(束脩)의 예를 행하고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게으르지 않고 가르쳐주니 따라서 배우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감복(感服)하지 않음이 없었다. 늙어서도 더욱 배움을 좋아하여 겸산(謙山)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는데 의리(義理)를 연구할 때 해박(該博)하고 넓어서 겸산 선생이 매번 칭찬하며 허여(許與)하였다.

정묘(丁卯:1927) 11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겨우 예순이었다. 질병이 위독(危篤)해지자 조카와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온전히 낳아주셨으므로 온전히 돌아가니, 마땅히 유감(遺憾)은 없다. 청산(靑山)에 잔 하나 남겨 두지 않았는데 내가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고 편안히 돌아갔다.

선생을 추모(追慕)하는 제문(祭文)에 “하늘이 노성(老成)한 사람을 남겨두지 않아 어찌 빨리 빼앗아 가는가? 어떻게 재주는 넉넉하게 주어 놓고 수명은 인색한가?” 하니, 이는 몇 년 더 살지 못함을 깊이 안타까워 한 것이라 하겠다.《유고(遺稿)》1책이 있는데, 시문(詩文)과 기(記)․서(序)는 모두 성정(性情)의 바름에서 나온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 묘는 월청동(月淸洞) 서당골(書堂谷) 경좌(庚坐)의 언덕에 있다.

배위(配位)는 고성이씨(固城李氏) 휘(諱) 준석(俊奭)의 따님이니, 임신(壬申) 9월 6일에 돌아가셨는데, 묘는 월청동(月淸洞) 내남산(內南山) 병좌(丙坐)에 있다. 2남(二男)을 낳았으니 장남은 우권(遇權)이고 차남은 우익(遇益)인데 출계(出系)하여 숙부(叔父) 금천공(錦天公)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우권은 경주이씨(慶州李氏) 규호(圭虎)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강면(康勉)이고, 임근묵(林謹黙)․홍기석(洪起碩)․이헌(李憲)은 사위들이다. 숙부의 후사로 출계한 우익(遇益)은 경주이씨 종태(鍾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일면(日勉)․도면(道勉)․덕면(德勉)․준면(俊勉)이고, 딸은 봉필석(奉弼碩)․이상범(李商範)에게 시집갔다. 그밖에 내외(內外)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너무 많아 다 적지 않는다.

아, 공(公)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에 행한 치적(治積)이 엉성하고 빠진 것이 있을까 염려되지만 어떻게 감히 함부로 너무 넘치게 하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나를 낳아주신 본래 아버님의 종시(終始)가 선생(先生)과 같지 않다면, 모쪼록 붓에 먹물을 먹여 이렇게 적어 뒷날의 군자(君子)들이 재량(裁量)하여 채택(採擇)할 바가 있도록 하는 것이 다만 소자(小子)의 애통(哀痛)하고 절박(切迫)한 소원일 따름이다.

무진(戊辰) 10월 어느 날 출후자(出后子) 우익(遇益)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지음

 

27. 誠庵公墓碣陰記

公諱柱 字而庸 誠菴 號也. 鄭氏貫羅州 文靖公雪齋先生 諱可臣 仕中國 有金鞍之賜. 以是名其洞 曰金鞍 因世居. 簪組己蟬爀 五世祖諱彦復 登司馬 以文章嗚世 四傳至諱養浩 隱德不仕 於公爲皇考也. 妣平澤林氏 諱繼遠女生 考諱允浩 妣幸州奇氏 以純廟丙戌 生公于永安村第 天稟端粹 卓然有異質 至弱冠 聲譽藹蔚. 公平生持身簡潔 篤學惇行 好德不已 未嘗以窘艱易其操 亦無枉道求譽 盖其淸藻 類多如此. 不幸中歲遭慽以後 又見世道益降 堅志自守 讀書不出門 九十有餘年 沈潛硏義 以至誠無息四字 銘諸心符 因自號曰 誠菴 誠之不可掩 今觀其遺文 宜可仰想矣. 謙山先生 狀其行 享壽六十三 高宗戊子卒. 墓虎牙洞酉坐原 配巨昌愼氏 諱在哲女 後公沒 墓同封 四男奎會善會星會台會 餘蕃不錄. 嗚呼. 距公沒 殆近六紀 至今鄕人士 每稱道其嘉言善行 宜俟百不諼而更何碣爲 但世降俗渝 懼夫愈久而或泯焉. 故玆庸顯刻于石 以示久遠.

27. 성암공묘갈음기

공(公)의 휘(諱)는 주(柱)이고, 자(字)는 이용(而庸)이니, 성암(誠菴)은 호(號)이다. 정씨(鄭氏)로 관향(貫鄕)은 나주(羅州)이다.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 선생 휘 가신(可臣)이 중국에 벼슬하여 금안(金鞍)을 하사(下賜)받았다. 이 때문에 그 동네를 금안(金鞍)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대대로 살았다.

벼슬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 5세조(世祖) 휘 언복(彦復)은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문장(文章)으로 세상을 울렸다. 4대를 전하여 휘 양호(養浩)에 이르러 덕(德)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공에게 황고(皇考:조부(祖父))이시다. 비(妣)는 평택임씨(平澤林氏) 휘 계원(繼遠)의 따님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윤호(允浩)이고, 비(妣)는 행주기씨(幸州奇氏)이니, 순묘(純廟:純祖) 병술년(1826)에 영안(永安) 촌집에서 공을 낳았다.

천품(天稟)이 단아(端雅)하고 순수(純粹)하여 우뚝이 남다른 자질(資質)이 있었으니, 약관(弱冠)에 이르러 명성(名聲)이 사방에 알려져 대단하였다.

공(公)은 평생 몸가짐이 간결(簡潔)하고 학문(學問)을 돈독(敦篤)하게 연마(硏磨)하고 행실을 닦아 덕(德)있는 사람을 좋아해 마지않았으며, 일찍이 군색(窘塞)하고 어렵기 때문에 지조(志操)를 바꾼 적이 없었고, 또한 도(道)를 굽혀 명예(名譽)를 구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맑고 조촐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불행하게도 중년(中年)에 슬픔을 당한 뒤로 또 세도(世道)가 더욱 떨어지는 것을 보고 뜻을 굳게 하여 스스로 지켜 글을 읽으며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90여 년간 침잠(沈潛)하여 의리(義理)를 연찬(硏鑽)하여 ‘지성무식(至誠無息)’ 네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인하여 자호(自號)를 성암(誠菴)이라 했으니, 성(誠)을 가릴 수 없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지금 남긴 글을 읽어보면 마땅히 우러러 상상할 수 있다. 겸산(謙山) 선생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향년(享年) 63세로 고종(高宗) 무자년(戊子年:1888)에 돌아가셨는데, 묘(墓)는 호아동(虎牙洞)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 배위(配位)는 거창신씨(巨昌愼氏) 휘 재철(在哲)의 따님으로 공보다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묘는 동봉(同封)이다. 4남(男)을 두었으니 규회(奎會)․선회(善會) ․성회(星會)․태회(台會)이고, 나머지는 많아 적지 않는다.

▶고종영정: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아, 공이 돌아가신지 거의 육기(六紀:72년, 1기는 12년)가 가까운데도 지금 고을 사람들이 매양 그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말하니, 마땅히 백년을 기다려도 잊지 못할 것인데 다시 무엇하러 비갈(碑碣)을 세우겠는가? 다만 세대(世代)가 내려가고 풍속(風俗)이 변하여 너무 오래되면 혹시 사라질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이에 비석(碑石)에 새겨서 오래도록 보여주고자 한다.

 

28. 錦天公墓碣陰記

公諱星會 字舜卿 錦天號也 鄭氏貫羅州 文靖公諱可臣 嘗著金鏡錄 道學文章 名諸東方 厥後簪組連世 允爲名閥 祖諱養浩 考諱柱 號誠菴 世襲儒行 妣居昌愼氏 考諱在哲 公天性至孝 事親竭誠 昆季友于愈篤 推至宗黨 疎遠不遺 御家及訓姪子 儀型謹嚴 盖家學有自矣 旣遭艱 前後六年 哭泣盡哀 幾至滅性 自後求學益篤 人惟賢其行 迬在高宗庚子 以門議 重創講堂 以永慕揭額 越乙巳 因以爲講習之所 不肖立後之日 卽其年也 更不屑意於筮仕 隱居行誼 終守東崗而沒命耳 公生於高宗乙丑 沒于純宗己酉 享年僅四十五 墓永安後舞鳳嶝庚坐原 配羅州吳氏 考諱允善 有女士風 後公沒 別封于月淸洞佛堂谷卯坐 祇有一女 適幸州奇世權 不肖遇益 立後娶慶州李氏鍾泰女 有四男二女 長日勉 次道勉 次德勉 次俊勉 女奉弼碩河陰人 李商範咸平人 奇世權無嗣 以從姪立後 名有碩 日勉室利川徐氏正洙女 生炳周 遽早夭 道勉室羅州吳吉洙女 生炳奎炳賢 德勉室羅州吳永烈女 生炳準炳坤炳心 俊勉室瑞興金基柱女 有二女幼 餘蕃不錄 嗚呼 惟公家訓及嘉言善行 不惟是止 而未能盡述 略鐫于碑陰 以爲來裔之準則

28. 금천공묘갈음기

공(公)의 휘(諱)는 성회(星會)요, 자(字)는 순경(舜卿)이니, 금천(錦天)은 호(號)이다. 정씨(鄭氏)인데 관향(貫鄕)은 나주(羅州)이다.

문정공(文靖公) 휘 가신(可臣)이 일찍이 금경록(金鏡錄)을 저술했는데,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동방(東方)이 이름이 났다. 그 뒤로 벼슬아치가 대를 이었으니 참으로 유명한 문벌(門閥)이 되었다. 조부(祖父)의 휘는 양호(養浩)이고, 선고(先考)의 휘는 주(柱)이니, 호(號)는 성암(誠菴)인데, 유가(儒家)의 덕행(德行)을 대대로 익혔다. 선비(先妣)는 거창신씨(居昌愼氏)이니 선고(先考)의 휘는 재철(在哲)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더욱 돈독(敦篤)하였다. 이 마음을 종족(宗族)과 고을에도 미루어 소원(疎遠)한 사람을 버려두지 않았고, 집안을 다스리거나 조카를 훈계할 때에도 근엄(謹嚴)하여 법도(法度)가 있었으니, 대개 가학(家學)으로 이어온 것이라 하겠다.

이미 부모상(父母喪)을 당하고 전후(前後) 6년(年) 동안 통곡(慟哭)하며 슬픈 마음을 다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더욱 독실하게 학문을 구하니,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어질게 여겼다. 지난 고종(高宗) 경자(庚子:1900)에 문중(門中)의 의논으로 강당(講堂)을 중창(重創)하고 ‘영모(永慕)’라 편액(扁額)하였는데, 을사(乙巳:1905)에 이르기까지 강습(講習)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불초(不肖)한 내가 후사(後嗣)로 들어온 날이 바로 그 해이다. 다시는 벼슬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隱居)하여 의리를 행하며 마침내 동강(東崗)을 지키다가 운명(運命)하였다.

공(公)은 고종(高宗) 을축(乙丑:1865)에 태어나 순종(純宗) 기유(己酉“1909)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겨우 45세이다. 묘(墓)는 영안(永安) 뒤 무봉등(舞鳳嶝) 경좌(庚坐) 언덕이다.

배위(配位)는 나주오씨(羅州吳氏)이니, 선고(先考)의 휘 윤선(允善)으로 여자 선비다운 풍도(風度)가 있었다. 공(公)보다 뒤에 돌아가셨는데, 따로 월청동(月淸洞) 불당곡(佛堂谷) 묘좌(卯坐)에 봉하였다. 다만 딸 하나를 두었는데, 행주(幸州) 기세권(奇世權)에게 시집갔다. 불초(不肖) 우익(遇益)이 후사로 들어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종태(鍾泰)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男) 2녀(女)를 두었다.

장남은 일면(日勉)이고, 차남은 도면(道勉)이고, 다음은 덕면(德勉), 다음은 준면(俊勉)이다. 딸은 봉필석(奉弼碩)에게 시집갔는데 하음인(河陰人)이고, 또 이상범(李商範)에게 시집갔는데 함평인(咸平人)이다. 기세권(奇世權)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종질(從姪)을 후사로 세웠으니, 이름은 유석(有碩)이다.

일면(日勉)은 이천서씨(利川徐氏) 정수(正洙)의 딸에게 장가들어 병주(炳周)를 낳았는데 일찍이 죽었다. 도면(道勉)은 나주(羅州) 오길수(吳吉洙)의 딸에게 장가들어 병규(炳奎)와 병현(炳賢)을 낳았다. 덕면(德勉)은 나주 오영렬(吳永烈)의 딸에게 장가들어 병준(炳準)과 병곤(炳坤), 병심(炳心)을 낳았다. 준면(俊勉)은 서흥(瑞興) 김기주(金基柱)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나머지는 번거로워 적지 않는다.

아, 공의 가훈(家訓)과 가언(嘉言) 선행(善行)은 다만 여기에 그치지 않지만 다 기술(記述)하지 못하고, 대략 비석의 음기(陰記)로 새겨 후손들의 준칙(準則)으로 삼게 하고자 한다.

 

29. 竹軒公墓碣陰記

公諱台會 字益三 竹軒 號也. 鄭氏籍羅州 麗朝名臣 諱可臣 謚文靖 學者稱雪齋先生 名溢中華 本朝景武公 諱軾 文科 位至兵曺判書 滄洲公 諱詳 文正卽德業文望 嵬若山斗 癡翁公 諱彦復 登上庠 以文章名世 寔公六世以上也. 祖諱養浩 考諱柱 號誠菴 俱以儒行聞 妣居昌愼氏 諱在哲女 古女士 高宗戊辰生公于永安村第 生平 言寡行敦 重禮俗 尤好學 見善必躬行 事父母處兄弟及居喪一節 懋盡誠敬 是皆誠菴公之家訓而亦天性然也. 未嘗以貧窶累其心 惟恐儒業之墜緖 夙夜戰兢 至老不倦 閹茂屋社以後 不櫛不靧 遯靖自守 勸勵後進 所著有遺稿一冊 若春秋契序與學校文 微有扶持之功 固非餘人所能及也. 謙山先生狀行曰 是有功於名敎 亦其信筆可尙耳. 享壽僅六十 丁卯十一月十八日卒 墓月淸洞書堂谷庚坐原 配孺人李氏 籍固城 諱駿奭女 閨範賢淑 後公沒 墓月淸洞內南山丙坐原. 擧二男 長遇權次遇益 出爲錦天公後 遇權娶于慶州李氏圭虎女 生一男三女 男康勉 女平澤林謹黙豐山洪起碩咸平李康勉 有三男炳善炳國炳烈 女幼 公以文學世家 生丁不辰 視利祿如草芥 安於嘉遯 不見知而無憫 然惟公在世行治 人所共知也. 玆庸鐫石 示諸不泐 辛巳二月 日 出後子 遇益謹識.

29. 죽헌공묘갈음기

공(公)의 휘(諱)는 태회(台會)이고, 자(字)는 익삼(益三)이니, 죽헌(竹軒)은 호(號)이다. 정씨(鄭氏)로 관향(貫鄕)은 나주(羅州)이다. 고려조(高麗朝)의 명신(名臣)인 휘 가신(可臣), 시호(諡號) 문정(文靖)은 학자(學者)들이 설재(雪齋) 선생이라 부르는데, 명성(名聲)이 중국에까지 넘칠 정도였다.

본조(本朝:조선(朝鮮))에 들어와 경무공(景武公) 휘 식(軾)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이르렀고, 창주공(滄洲公) 휘 상(詳), 시호(諡號) 문정공(文正公)은 도덕(道德) 사업(事業), 문장(文章)과 명망(名望)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뚝하였다. 치옹공(癡翁公)의 휘는 언복(彦復)이니 상상(上庠:성균관(成均館))에 올라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이분들이 공의 6세 이상 선조(先祖)이다. 조부(祖父)의 휘는 양호(養浩)이고, 선고(先考)의 휘는 주(柱)이니, 호(號)는 성암(誠菴)인데, 모두 선비다운 행실(行實)로 소문이 났다. 비(妣)는 거창신씨(居昌愼氏) 휘 재철(在哲)의 따님이니, 예전의 여사(女士)로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영안(永安) 촌집에서 공을 낳았다.

평생 말은 적고 행실은 돈독(敦篤)하여 예속(禮俗)을 두텁게 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였다. 선(善)을 보면 반드시 몸소 행하였고,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友愛)하며, 상(喪)을 치르는 범절(凡節)에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이는 모두 성암공(誠菴公)의 가훈(家訓)이고 또한 천성(天性)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가난하고 구차하다는 이유로 그 마음에 누를 끼친 적이 없이 오직 유가의 학업이 추락(墜落)될까 두려워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자며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여 늙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합방)를 당한 뒤로 머리도 빗지 않고 밥도 변변찮게 먹고 은둔(隱遁)하여 스스로 지조(志操)를 지키며 후진(後進)을 권장(勸獎)하고 면려(勉勵)하였다. 저술(著述)한 유고(遺稿) 1책과〈춘추계서(春秋契序)〉와〈학교문미(學校文微)〉는 부지(扶持)한 공이 있으니, 진실로 다른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 하겠다.

겸산(謙山) 선생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말하기를, “이 분은 인륜 도덕의 교화에 공로(功勞)가 있었다.” 했으니, 또한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붓 가는 대로 쓴 것이므로 숭상할 만하다 하겠다. 향년(享年) 겨우 예순으로 정묘년(1927) 11월 18일에 돌아가셨는데, 묘(墓)는 월청동(月淸洞) 서당곡(書堂谷) 경좌(庚坐) 언덕에 있다. 배위(配位) 유인이씨(孺人李氏)의 관향(貫鄕)은 고성(固城)이니, 휘 준석(駿奭)의 따님으로 규범(閨範)이 현숙(賢淑)하였고, 공보다 뒤에 돌아가셨는데, 묘는 월청동 내남산(內南山) 병좌(丙坐) 언덕에 있다. 2남(男)을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우권(遇權)이고 차남은 우익(遇益)인데, 출계(出系)하여 금천공(錦天公)의 후사(後嗣) 가 되었다. 우권(遇權)은 경주이씨(慶州李氏) 규호(圭虎)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강면(康勉)이고 딸은 평택(平澤) 임근묵(林謹黙)․풍산(豐山) 홍기석(洪起碩)․함평(咸平) 이모(李某)에게 시집갔다. 강면(康勉)은 3남을 두었는데, 병선(炳善)․병국(炳國)․병렬(炳烈)이고, 딸은 어리다.

공은 문학(文學)하는 세가(世家)로 때를 만나지 못하여 명리(名利)와 봉록(俸祿)을 띠끌처럼 보고 편안히 은둔(隱遁)하여 알려지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이 살아 계실 때의 행적(行績)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다. 이에 비석에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

     신사년 2월 어느 날 출후자(出後子) 우익(遇益) 삼가 지음.

 

30. 十世祖庶尹公墓碣陰記

公諱瀅 字巨源 鄭氏本羅州人. 麗季文靖公雪齋先生 諱可臣 十一世孫也. 本朝諱有 贈吏曺判書 諱軾 重試登第位至兵曺判書 寔六世祖也. 祖諱詳 文正節學者 稱滄洲先生考諱如龜叅奉 妣豐山洪氏 叅判諱琛女 以萬曆甲辰生公. 性端粹篤志 力學隱德不起 凡四十餘年 竟彼累薦以學行 除漢城庶尹 歎曰 天恩誤加 不就無義. 卽赴任未幾旋尋初服退藏林樊老而尤好學. 享年七十三丙辰三月日卒 墓白龍山上麓 壬坐原 配長澤高氏進士 以厚女. 墓同封四男 寅伯寅佑寅俶寅佖 靈光金命圭 陽城李柱 扶安金世卨婿也. 孫男十五 球琦琥長房出 璉璿瑜璛珷璘琮二房出 璡三房出 琬璭瓚瓛四房出 曾玄內外生進文武一十有六. 嗚呼 顯刻先世所撰 年久之 故今將改刻而舊刻苔滋未克更襲 謹据乘牒. 妄敢撰次庸鐫于碑陰.

30. 십세조서윤공묘갈음기

공(公)의 휘(諱)는 영(瀯)이요, 자(字)는 거원(巨源)이다. 정씨(鄭氏)로 나주(羅州)가 관향(貫鄕)인데, 여말(麗末)에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선생, 휘 가신(可臣)의 11세손이다. 본조(本朝:朝鮮)에 들어와 휘 유(有)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휘 식(軾)은 거듭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으니, 이 두 분은 6, 7세조이다. 조부(祖父)의 휘는 상문(詳文)은 정랑(正郞)이니, 학자들이 창주(滄洲)선생이라 불렀고, 선고(先考)의 휘는 여귀(如龜)이니 참봉(參奉)을 지냈다. 선비(先妣:돌아가신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이니 참판(參判) 휘 심(琛)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갑진(甲辰)에 공을 낳았다.

성품이 단정하고 순수하여 뜻을 돈독히 하여 학문에 힘쓰고 숨어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은지 40여 년만에 마침내 여러 차례 학행(學行)으로 천거(薦居)되어 한성서윤(漢城庶尹)에 제수(除授)되었다. 이에 탄식하기를, “임금의 은택(恩澤)이 잘못 내려졌지만, 나가지 않으면 의리(義理)가 없는 것이다.” 하고, 즉시 부임(赴任)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처음 먹었던 마음을 찾아 물러나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하여 늙어도 더욱 학문을 좋아하였다.

향년(享年) 73세로 병진년(/) 3월  일에 세상을 떠나니, 묘(墓)는 백룡산(白龍山) 상록(上麓) 임좌(壬坐)의 언덕에 있다.

배위(配位)는 장택고씨(長澤高氏) 진사(進士) 이후(以厚)의 따님으로 묘는 동봉(同封)이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인백(寅伯)․인우(寅佑)․인숙(寅俶)․인필(寅佖)이고, 영광(靈光) 김명규(金命圭)․양성(陽城) 이주(李柱)․부안(扶安) 김세설(金世卨)은 사위이다.

손자가 열 다섯인데 구(球)․기(琦)․호(琥)는 장남이 낳았고, 연(璉)․선(璿)․숙(王+肅)․무(珷)․린(璘)․종(琮)은 둘째가 낳았고, 진(璡)은 셋째가 낳았고, 완(琬)․운(璭)․찬(瓚)․헌(瓛)은 넷째가 낳았다. 이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 내외손(內外孫)으로 생원(生員)․진사(進士)와 문과(文科)․무과(武科)에 급제한 사람이 16명이다.

아, 묘갈(墓碣)은 선세(先世)가 지은 것인데 해가 오래된 까닭으로 지금 장차 고쳐서 새겨야 했다. 그러나 예전에 새긴 것은 이끼가 불어나 그대로 쓸 수가 없어서 삼가 가승(家乘)과 보첩(譜牒)에 근거(根據)하여 감히 엮어서 비갈(碑碣)의 음기(陰記)에 새긴다.

 

31. 愚齋公墓碣陰記

公諱鍾會 字君中 愚齋 號也 鄭氏貫羅州 文靖公雪齋先生 諱可臣 始顯於麗季 而厥後簪組炳爀 凡六百餘年 祖諱致赫 考諱源益 號錦溪 聯世尙文學 妣羅州羅氏受采女 閨範賢淑 以高宗丁卯 生公于金鞍洞第 公早年勤苦力學 博涉經史 愈篤於孝友 盖家訓也 嘗遊學於吳難窩先生 究得恭字義 銘爲自修之本 公之生平操守 推可仰想矣 遽東撓 禍機甚迫 惟恭謹自持 輕其錢財 急於奉先 背負神龕而出 匪賊不敢犯 且廝畜與穀物之所奪 經亂後 的知其所 而不忍還推 惟其主恩而推恕 類多如此 人益賢之 咸服其行 庚戌以後 杜門自靖 以勤勵後進爲己任 晩暮亦以藏修之計 卜築於仁川之陽 揭號曰錦陽齋 因以爲講習之所 至今行路指點言 愚齋公別業云 所著遺稿 有一冊 其旨簡奧 往往有憫時病俗之憂 溢於辭表 吁可敬也 享壽六十七 癸酉九月日卒 墓月淸洞寅坐 配羅州吳氏致善女 先公沒 別封德林後巳坐原 男遇善遇榮 女光山金珍洙 孫曾內外二十餘人 嗚呼 公之有善 雖不可盡述 今其後承 詵詵儒業 繼而漸大 天道必福善 宜有報也爾

31. 우재공묘갈음기

공(公)의 휘(諱)는 종회(鍾會)요, 자(字)는 군중(君中)이니, 우재(愚齋)는 호(號)인데, 정씨(鄭氏)로관향(貫鄕)은 나주(羅州)이다. 문정공(文靖公) 설재(雪齋)선생 휘 가신(可臣)이 처음으로 여말(麗末)에 드러나고, 그 뒤 벼슬한 사람이 6백년 동안이나 빛나게 쏟아졌다. 조부의 휘는 치혁(致赫)이고, 선고(先考)의 휘는 원익(源益)이니, 호는 금계(錦溪)인데, 대대로 문학(文學)을 숭상하였다. 선비(先妣)는 나주나씨(羅州羅氏) 수채(受采)의 따님으로 규방(閨房)의 범절(凡節)이 현숙(賢淑)하였다. 고종(高宗) 정묘년(1867)에 금안동(金鞍洞)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린 나이에 부지런히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經傳과 歷史書)를 널리 섭렵(涉獵)하고, 효도(孝道)와 우애(孝誠)에 더욱 돈독(敦篤)하였으니, 모두 가훈(家訓)에 따른 것이다. 일찍이 오난와(吳難窩)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할 때, 공(恭)자의 뜻으로 명(銘)을 지어 스스로 수양(修養)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이로써 공이 평생 잡아 지킨 바를 미루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흔들리는 재앙(일본과 乙巳條約이 체결됨)이 매우 절박(切迫)하였으나 오직 공손하고 삼가며 스스로 지켜 재물(財物)을 천하게 여기고, 선조를 받드는 일을 급하게 여겨 등에 신감(神龕)을 지고 나아가니, 비적(匪賊)들도 감히 간범(干犯)하지 못하였다. 또 가축(家畜)과 곡물(穀物)을 약탈(掠奪)당한 곳은 난리(亂離)를 겪은 뒤에 그 소재(所在)를 적확(的確)하게 알아도 차마 되돌려 주려 하지 않았으나, 오직 은정(恩情)을 주장하여 용서(容恕)하였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어질게 여겨 더욱 그의 행동에 감복(感服)하였다.

경술년(1910) 이후에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며 후진(後進)을 격려(激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만년(晩年)에도 은거(隱居)할 계획으로 인천(仁川)의 남쪽에 집을 짓고 「금양재(錦陽齋)」이라 편액(扁額)을 걸었다. 인하여 강습(講習)하는 장소로 삼으니 지금도 길가는 사람들이 가리키며 우재(愚齋)선생의 별업(別業)이라 한다.

저술한 유고(遺稿)가 1책 있는데 그 뜻이 간결(簡潔)하면서도 심오(深奧)하여 시류(時流)를 걱정하고 풍속(風俗)을 질타(叱咤)하는 근심스러운 마음이 글에 나타나니, 아 공경할만하다 하겠다.

향년(享年) 67세인 계유년(1933) 9월 일에 돌아가시니, 묘는 월청동(月淸洞) 인좌(寅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나주오씨(羅州吳氏) 치선(致善)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돌아가서 따로 덕림(德林) 뒤 사좌(巳坐)의 언덕에 장례(葬禮)지냈다.

아들은 우선(遇善)과 우영(遇榮)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진수(金珍洙)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은 내외 20여명이다.

아, 공의 선행(善行)을 비록 모두 다 기술(記述)할 수 없지만 그 후손들이 많아 유가(儒家)의 사업(事業)을 계승하여 점차 확대되어 가니 천도(天道)가 반드시 선(善)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법이니, 마땅히 보답이 있을 것이다.

 

32. 歸來亭記

竊惟亭名 一是晋處士 然以亭實 則時之相去千百載 有間矣. 嗚呼 時異而義同則一是其人 那可以靖節同時之人人 皆謂晋處士也歟. 先生官止吏正 致仕歸來而亭之作 在於穆陵盛世 其於晋處義 近而時異 亭名歸來是爾 其爲亭也. 在乎雙溪下仁川上 錦嶽鍾靈 瑞石呈瑞 銘與瑞石 皆泰山也. 先生震艮怳若喬喬巖巖 而亭能容之 室堂之宏大 孰可量乎.靜養春風和氣於谷口淸風之中 蒐拾故園多少景致 因作自家器物 盡載於斯亭 巨厦光景 盖如是也 矧惟薰德及人者乎. 先生亦以逸軒自號 盖晋處士名潛之義也. 竊伏念靖節千載前晋處士 逸軒千載後晋處士 五柳之宅 尙今遺傳乎. 亭之存否似或不關於重輕耳. 然今其後昆不忍亭其墟 誠極一門之力而斯亭依舊更新 先生之風 可謂錦嶽鬱鬱仁川洋洋乎.

32. 귀래정기

가만히 생각건대, 정자의 이름은 진처사(晉處士: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이나 정자의 실상은 천년이란 시대적 간격이 있다. 아아, 시대는 다르지만 뜻이 같으면, 곧 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정절(靖節:도연명)과 동시대 사람들만 모두 ‘진처사(晉處士)’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벼슬이 이조정랑(吏曹正郞)에 그쳤는데,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지었으니 바로 목릉성세(穆陵盛世:선조(宣祖))였다. 진처사(晉處士)와 그 의미는 비슷하나 시대는 다르니 정자의 이름을 ‘귀래(歸來)’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이다. 정자는 쌍계사 아래 인천 위에 지었는데, 금악(錦嶽)이 신령함을 모으고 서석(瑞石)은 상서로움을 드러내니 명(銘)과 서석은 모두 태산이다.

선생의 모습은 높은 산이나 우뚝한 바위같아 정자를 포용할 만하니, 실당(室堂)의 광대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고요히 춘풍 화기(和氣)를 골짜기 입구의 맑은 바람 사이에서 고요히 기르며, 옛 동산의 여러 가지 경치를 포괄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아 이 정자에 갖추어 놓았으니 큰 건물의 광경도 대개 이와 같거늘 하물며 공훈과 덕망이 백성들에게 미친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귀래정

 

선생이 또한 스스로 ‘일헌(逸軒)’이라 호를 지으니 대개 진처사(晉處士)가 ‘잠(潛)’이라고 이름한 뜻과 같다. 가만히 생각건대, 정절(靖節)은 천년전의 진처사(晉處士)요, 일헌(逸軒)은 천년 뒤의 진처사(晉處士)로다. 살던 집 터[五柳之宅]가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정자의 존재 여부는 경중에 관계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그 후손이 정자가 폐허가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한 집안의 힘을 정성스럽게 모아 이 정자가 옛 법도에 의해 새롭게 지어졌으니 선생의 유풍은 ‘금악이 울창하고 인천(仁川)이 넘실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3. 滄洲亭記(一)

先生竊因自號以名亭 公與亭毫無間然矣. 以先生謂之滄洲 則是滄洲先生 以亭謂之滄洲 則是 <原文缺> 滄洲亭. 當時學者稱先生 則亭亦爲先生可也. 滄洲字義 外史云 讀書劬經之義在焉爾. 亭何嘗讀書劬經 是乃讀書劬經之亭也 於公無間然者 明矣. 先生素以文獻世家 生於穆陵盛世. 學優登仕 官止正郞 亦可謂止於可也. 加之以德業文章 藏修於斯 而以獎進後學爲己任 任是莫重若矣. 然亭因有公而名諸百世可矣 公因有亭而重其德未也. 於公宜無損益 而但今遺墟荒廢 是雲仍之所不忍也. 着在乎千百裔昆心上奮出誠力 且其同鄕井異姓士友 亦各出力 不日成之 彷彿乎陟降如在而室堂有光爾. 亭貌舊新 那可與論高下哉. 願後之來裔 幸勿以斯亭之復作爲幸了 竊以先生德業 永遵是式 把作千百裔昆之心法 戶欽家慕而以寓羹墻於斯亭 則厥後想無棟摧樑折之患矣. 勉乎哉. 門命爲記 忘僣畧記.

33. 창주정기

선생께서 당신의 자호를 따서 정자의 이름을 붙이셨으니, 공(公)과 정자는 털끝만큼도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을 창주라고 일컬으니 이는 창주선생이요, 정자를 창주라고 이르니 이는 창주정(滄洲亭)이다. 당시의 학자들이 선생을 일컬었으니 정자 역시 선생이 된다 하여도 가하다. 창주라는 글자의 뜻에 대해 외사(外史)에서 이르기를 ‘책을 읽고 경서에 힘을 쓴다’는 뜻이 있다고 하였다. 정자가 어떻게 일찍이 책을 읽고 경서에 힘을 쓰겠는가? 이는 바로 책을 읽고 경서에 힘을 쓰는 정자인 것이니, 공에 대해 잘못된 것이 없음이 분명하다.

선생은 본디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목릉성세에 태어났다. 학문이 빼어나 벼슬길에 올라 관직이 정랑(正郞)에 그쳤는데, 또한 적당한 지위에 이르러 그친 것이라고 말할 만하다. 덕업과 문장을 보태어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며, 후학들의 학문을 진보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비할 바 없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나 정자는 공이 있음으로 인하여 백세에 이르도록 이름을 드리운다고 할 수 있지만, 공께서는 정자가 있다고 해서 그 덕이 두텁게 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공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손해도 보탬도 없는 것이지만, 지금 남아있는 자리가 황폐해졌으니 먼 후손들이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바였다. 많은 후손들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힘을 쏟아 일을 시작하고, 또 같은 고향의 다른 성씨를 가진 선비와 벗들도 또한 각각 힘을 보태어 며칠되지도 않아 정자가 완성되었으니, 이는 마치 신명이 오르고 내려 계신 듯 함에 집과 당(堂)에 빛이 나는 듯한다는 것과 같다. 정자의 모습이 오래되었다던가 새롭다던가 하는 것으로 어찌 높고 낮음을 논할 수 있겠는가?

원하노니 훗날의 자손들은 이 정자를 다시 짓게 된 것을 행운으로만 여기지 말라. 적이 선생의 덕업을 길이 따르고 본받고, 그것으로써 수많은 자손들이 심법(心法)으로 삼으며, 집집마다 흠모하고 가문에서 사모하여 이 정자에 머물며 선생을 앙모한다면, 그 후에 용마루가 부러지고 기둥이 갈라지는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힘쓸지어다! 가문의 명을 받아 이 글을 쓰게 되니 망녕되고 참람(僭濫)되지만 간략히 기록한다.

 

34. 滄洲亭記(二)

亭卽我先祖滄洲先生 講學之所 先生生於明宣之際 可謂遇矣. 行可於時 止可於時 而晩尋初服與諸賢論道講義 藏修於斯 凡他江湖烟景泉石佳麗 固非斯亭之重輕也. 但榮江一帶 源遠而未嘗有明沙白礫 然縈廻于錦城 雪齋先生手植桃柳 尙今惟新 以春則泛紅浮白 與漢水同流合下 照心於斯亭 又夜月則浩浩乎澹泊焉. 鑑面澄淸 與天一光 而天心水心一輪明 憶昔先生在世日 德業文章詩禮典型久矣. 斯亭之可觀 非特墻高門豁而亭名著于州縣 則亭旣墟 其裔昆孰不憾恨乎. 憾恨之心 是宜斯亭不棄基之心也. 亭雖遺墟 不棄基也. 故厥心著在乎千百心上 奮發心誠 而出力 凡今誠則優矣 力旣縮矣. 營度盖有年 而幸玆今春草洞益另力 鞍洞倂力 不日竣工 怳乎七分舊貌若 而翼然於寶山之陽也. 嗚呼. 亭之今不如古容 或無感者在於在爾 裔昆千百之誠力之所到 軒牕宏闊 先生咳唾之聲 僾然如在 裔昆千百之誠心所著 先生書冊琴瑟 彷佛若存. 子思子所謂誠之不可掩 苟如是也. 亭之今古 孰可諗乎. 戒之哉. 後之來裔不心他心 祗以今日之誠心爲心 永遵是式 而先生遺風餘韻 不墮在地 寔斯亭之大幸也. 門命不肖爲記 忘僭謹述 而但記事不詳 惶恐無已.

34. 창주정기

정자는 우리 선조 창주(滄州 鄭詳 :1533~1609) 선생의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선생은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에 태어났으니 좋은 시대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벼슬하는 것도 시대에 옳은 일이었으며, 은둔하는 것도 시대에 옳은 일이었으니 만년에 처음 벼슬할 때의 마음으로 여러 현명한 사람들과 도를 논하고 의리를 강습하며 이 정자에서 수양하였다. 무릇 다른 강호(江湖)의 풍경이나 천석(泉石)의 아름다운 경치도 진실로 이 정자에 비길 것이 못된다. 다만 영강(榮江) 일대는 강의 근원이 멀어 맑은 모래와 흰 자갈이 없으나 금성(錦城)으로 돌아 흐른다. 설재(雪齋 鄭可臣:1224~1298) 선생이 직접 심은 복숭아와 버드나무가 지금까지도 새로우니 봄이 되면 푸른 잎과 흰 꽃이 물에 떠 한강의 물길과 합쳐져 이 정자에 비춰지고, 또 밤의 달빛이 아득하고 담박하여 거울같이 맑은 수면에 비치어 하늘과 같은 색이 되니 천심(天心)과 수심(水心)이 모두 달처럼 희고 밝도다.

옛날 선생이 살아 계시던 날을 생각하니 덕업(德業)과 문장(文章), 시례(詩禮)와 전형(典型)의 전통이 오래 되었도다. 이 정자의 경치는 다만 높은 담과 확 트인 대문뿐만이 아니라 정자의 이름이 주현(州縣)에 알려진 것이다. 정자는 이미 폐허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이 누군들 한스러움이 없겠는가! 한스러운 마음은 이 정자의 유허지(遺墟址)를 방치할 수 없는 마음 때문이다. 정자가 비록 유허지가 되었으나 이 장소를 방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결집되어 마음과 정성을 발하여 힘써 돕게 되었다. 지금 정성은 넉넉하나 힘이 부족하여 재건을 계획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다행히 올 봄에 초동에서 따로 힘을 보태주니 빠른 시일내에 준공할 수 있었다. 대강 70% 정도의 옛모습을 회복하여 보산(寶山)의 남쪽에 우뚝히 세우게 되었다.

아아, 정자가 지금 옛 모습만 못하지만 혹 유감이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즉 수많은 후손들의 정성스런 힘이 모여 정자가 웅대하게 재건되었으니 선생의 기침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하며, 수많은 후손들의 정성스런 마음이 모여 선생의 서책과 거문고가 마치 존재하는 듯하도다. 자사(子思)가 이른바 ‘정성스러움은 감출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진실로 이와 같도다. 정자가 이렇게 새롭게 변할 것을 누가 숨길 수 있겠는가!

경계하라. 뒷날 후손들이 다른 마음을 가지지 않고 다만 오늘의 정성어린 마음으로 후손의 마음을 삼아 영원히 이 규범을 지킨다면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의 이 정자의 큰 다행이다.

집안에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짓도록 명하니 참람(僭濫)함을 잊고 삼가 지으나 다만 기록한 일이 상세하지 않아 두려움을 감출 수 없도다.

 

35. 錦北堂記 (壬寅)

錦固是君子之所尙耳. 以製則可於黼黻 以着則適於寒溫 錦之用益精而非其外物同肩也. 是以君子比德而贊其美. 然苟不以褧尙之 則其文太著 只慊外累矣. 然則公之以錦題堂 恐或其文太露矣. 今距公沒殆近百年 在世行治 但耳之而目未所睹. 然其孝悌之誠 著於愛親敬長之道 是孝悌之文也. 學問用工 著於誠意正心之表 是學問上用工之文也. 且其心德之發 猶薰香及人而滿室 淸風啓乎堂及於軒屛 則竊想全屋子摠是和氣中而德之章章孰愈於此乎 以何錦文添於德之上也歟. 敢云百世之下 可想認於百世之上者 有之矣. 公生於錦城之北 錦宜吾鄭世居之鄕. 上自文靖公簪組聯世 可以黼黻王庭而裁錦之者有幾. 見用於裁錦之手者有幾. 伏惟生於叔季 未得試於裁錦之日 以心德之文自裁而用於自家之室堂者明矣. 然則心上之德所蘊 未知幾千重 心上之錦所蘊 未知幾千尺. 伏以淺臆念及則心包未過方寸 而千重德千幅錦 那可得以包容乎. 蘊蓄之則密邇於方寸之中 包張之則彌及乎錦城之高․錦水之濱 其中所蘊 孰可量乎. 中之所蘊 發於外 仍自號 是天性之發也 不尙徒華而然也.

35. 금북당기 (임인년)

비단(錦)이라는 것은 진실로 군자들이 숭상하는 바이다. 마름질을 하면 보불(黼黻)로도 사용할 수 있고, 몸에 걸치면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니, 비단의 쓰임새가 더욱 정밀하여 다른 물건과 함께 비견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들은 비단을 덕에 비유하여 그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그러나 진실로 삼베 홑옷을 비단옷의 위에 걸치지 않으면 그 화려한 무늬가 너무 드러나게 되니 (홑옷을 덧입는 것은) 단지 외물 때문에 번거롭게 되는 것이 싫어서이다. 그러한즉 공께서 비단으로 당의 이름을 지은 것은 혹시 그 화려한 무늬가 너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적이 의아하였다.

이제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거의 백년이 되어가니, 세상에 계실 때의 행적과 치적은 다만 귀로 듣기만 했을 뿐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효제(孝悌)의 정성스러움이 어버이를 사모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도(道)에 드러나니, 이는 효성과 공경스러움이 드러나는 무늬이다. 학문을 하는데 공을 들여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겉에 드러나니, 이는 학문에 공을 들이는 무늬이다. 또 그 마음의 덕이 드러남이 마치 향기가 사람에게 미쳐서 방에 가득 차고, 맑은 바람이 당을 채우고 집을 둘러싸는 것과 같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온 집안이 모두 온화한 기운 속에 있으니 덕(德)의 빛남이 누가 이보다 더하겠는가? 어떠한 비단의 무늬로써 덕의 위에 갔다 붙일 수 있을 것인가? 일백 대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일백 세대의 앞을 생각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한다.

공께서는 금성의 북쪽에서 태어나셨는데, 금성은 우리 정씨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이다. 위로 문정공께서 관(冠)과 대(帶)를 두르시고 벼슬에 나아가신 뒤로부터 대대로 왕조에 무늬를 수놓아 고을을 다스린 사람이 몇이었으며, 다스리는 사람에 의해 등용되어 쓰임을 받은 사람이 몇이었던가? 삼가 생각해보건대, 뒤늦은 시대에 태어나 벼슬에 쓰여 보지 못한 그 날들에, 너그럽고 선한 마음의 무늬를 스스로 재단하여 자신의 집안에 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음에 덕이 쌓인 것이 몇 천 겹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마음에 비단이 쌓인 것이 몇 천 척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리석은 내가 천근한 억측으로 미루어 생각해보자니 마음은 사방 한 치에 지나지 않는데, 천 겹의 덕과 천 폭의 비단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들이 쌓이고 겹치면 마음속에서 점차 세밀해지게 되고, 펼쳐서 베풀어 놓으면 금성(錦城)의 높음과 금수(錦水)의 물가에까지 널리 미치게 되니, 그 안에 쌓여있는 바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 쌓인 것이 바깥으로 드러나 이로 인해 자호(自號)한 것이니, 이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 헛된 화려함만을 숭상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36. 晩悟齋記 (鄭南會齋號)

悟所以刷舊從新之味在焉爾. 昨非今悟 則昨舊今新 而今日之非明日悟之 則今舊明新 從可認矣. 昨今相資 今明相續 來來不已 則悟 悟亦如之 亦何嘗待其晩而悟乎. 翁黙然答曰 余自幼少志于書 多讀經書 念玆孶孶 至老不已 則可爲士可爲儒 而今以後悔 及於野人同歸 奈衰耗何. 雖欲勉强 那可得乎. 齋之扁 以是也夫. 余整襟危坐曰 今以程夫子之格訓 將有一說 老而好學益可愛者 是也 何者. 旣知不及而晩悟之 則不知老之將至 日夕乾乾. 早年所不學 今日悟之 昨旦所不悟 今日悟之 則所以悟一也. 願以悟 把作心符 惓惓於此而不已 則體力雖耗 心力益壯 氣力雖衰 學力益强 此君子之所以自强不息也. 昔呂東萊年將四十 晩悟三十九年之放過 篤志就學而名諸千古. 盖凡學問用工 必無暮早矣. 更以程子之訓復之曰 至老好學 至死不已 則有如程夫子之夫子者 不在於當時則已 如在則益可愛之 贊辭無乎哉 亦有一言 只以悟字爲善事而止. 悟與不悟 一輪同歸 勉乎勉乎.

36. 만오재기 (정남회재호)

깨달음이라는 것은 옛 것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좇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어제의 잘못된 것을 오늘 깨달으면 곧 어제는 옛 것이고 오늘은 새 것이며, 오늘의 잘못된 것을 내일 깨달으면 오늘은 옛 것이고 내일은 새 것이니 이로부터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이 서로 의지하며,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져 오고 또 와서 끊임이 없으면 깨닫는 것이고, 깨달음 역시 이와 같다. 어찌 늦게 깨닫기를 기다리겠는가?

공이 묵묵히 있다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책에 뜻을 두었다. 경서(經書)를 많이 읽어 생각을 부지런히 하였으며 늙은 다음에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선비가 될 수도 있고 유자(儒者)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후에야 후회가 되니, 돌아가 촌사람들과 똑같이 되고자 하여도 노쇠하고 약해진 것은 어찌하겠는가? 비록 힘을 내어 노력하고자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재(齋)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로다.”

내가 옷깃을 바로 여미고 무릎을 꿇고서 말하였다. “이제 정(程)선생님의 교훈을 가지고 한마디 말을 하고자 한다. ‘늙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더욱 사랑스럽다.’는 것이 이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이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뒤늦게라도 깨닫는다면 장차 늙음이 이르

▶경서의오강해:국립중앙도서관. 1694년 간행. 경서에 보이는 오자․낙자․상사․전도된 곳을 바로잡은 책. 1694년 간행.

 

는 것도 알지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그침 없이 노력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에 배우지 못한 것을 오늘에 깨닫고, 어제 아침에 깨닫지 못한 것을 오늘 깨닫는다면, 깨닫는 이유는 한가지이다. 원컨대 깨달음으로써 마음의 부절(符節)을 삼아, 여기에 부지런히 그치지 않고 노력한다면, 체력은 비록 소모될지라도 심력은 더욱 장성해질 것이며, 기력은 비록 쇠한다 할지라도 학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것이 군자가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치지 않는 이유이다. 옛날에 동래 여조겸은 나이가 장차 40이 될 때에서야 뒤늦게 39년 세월의 잘못을 깨달아, 뜻을 돈독히 세우고 학문에 나아감으로써 이름이 천고에 드리워지게 되었다. 무릇 학문에 힘을 쓰는 데에는 분명 늦고 빠름이 없다.

또 정자(程子)의 가르침으로써 반복하여 말하였다. “늙음에 이르러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죽음에 이르러도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 정선생과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 당시에 (그러한 사람이) 있지 않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더욱 그를 사랑할 것이니, 칭찬하는 말이 어찌 없겠는가? 또 한마디 말이 있으니, 다만 깨닫는다는 글자를 좋은 일로 여기는데 그친다면,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의 바퀴처럼 똑같은 곳으로 귀결될 것이니,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37. 永陽精舍移建實記

永安是錦城名村 雲林泉石 別開勝區 名宦淸職百年而一作 忠賢節義聯四三世而一出 是洞之華洞之實也. 華與實俱矣. 而傳傳于六七百祀 人以吾鄭稱錦城大樑 宜非過實之語也. 仍作世居 磵松水竹 鬱密成林 又錦城之茶 同作四時春光 尤可爰者 恒飯助味也. 余生平用工 究經玩味 亦如之 故名其所居曰茶泉 茶之所出 卽吾園也. 求我諸益謀築數棟於茶園 余曰 凡至誠者 只要心好 不求外好 外好是放逸所召 吾何爲之 又懇告曰 屋子猶身 屋主猶心 身苟不修 心之正否 孰能知之. 以是禁不得 而棟旣成 命名永陽精舍 陽是永安之陽也. 今窮陰剝地 陽可求於那處 寒呼不已 地雷底消息 竟究於子夜 恐或有添線乎否. 移建于月晴之陽 地雖異矣 陽則一矣. 仍庸舊號 祗是微陽更添一線吾所願言爾 系以一絶詩.

無事自然忙 老衰勉益强 那將陽一線 滿室載春光.

37. 영양정사이건실기

영안(永安)은 금성의 이름난 마을이다. 구름과 숲, 물과 암석이 아름답고, 별도의 경치가 좋은 구역이 있다. 이름난 벼슬아치와 청렴한 관리들이 100년에 한 번씩 태어나고, 충신 현사(賢士)와 절의 있는 선비가 삼사대에 연이어 배출되니 이것은 이 마을의 정화(精華)요, 마을의 결실(結實)이다. 정화(精華)와 결실(結實)이 모두 갖추어져 6~700년을 전해져 내려오니 남들이 우리 정씨를 ‘금성의 큰 대들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인하여 대대로 이곳에 살게 되었으니 산골의 소나무 물가의 대나무가 울창하여 숲을 이루었고, 또 금성의 차(茶)는 사시(四時)의 푸른 빛을 간직하고 있으나 더욱 사랑스러운 것은 항상 밥먹을 때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공부하여 끝내 진정한 맛을 음미하는 것도 또한 이 차와 같다. 때문에 사는 집의 이름을 ‘다천(茶泉)’이라 하였다. 차(茶)가 생산되는 것은 우리 동산이다. 여러 벗들이 다원(茶園)에 여러 동을 세울 것을 계획하니, 내가 말하기를, “지극히 좋아하는 것은 다만 마음으로 좋아할 뿐 외부에서 좋아함을 구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좋아함을 구하는 것은 마음이 방일함에서 오는 것이니 내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는가!”라 하였다. 그들이 또 간절하게 말하기를, “집이란 것은 몸과 같으니 집 주인은 마음과 같다. 몸이 만약 수양되지 않았다면 마음이 바른지 아닌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 때문에 금지할 수 없어 몇 동을 완성하고 ‘영양정사(永陽精舍)’라고 이름하였다. 양(陽)은 영안(永安)의 남쪽이다. 지금 궁음(窮陰)이 천지에 가득하니 양(陽)은 어느 곳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 회복[地雷:복괘(復卦)]의 소식은 한 밤 중 자정에서 시작되니 혹 한 줄기 남은 유학을 되살릴 수 있겠는가?

월정의 남쪽으로 정사를 옮겨 세우니 위치는 비록 다르지만 양(陽)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옛 정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은미한 양(陽)이 점점 확장되기를 내가 바라는 뜻이다.

오언절구를 덧붙인다.

일이 없어도 자연히 바쁘니

늙어 쇠할수록 더욱 강해져야 하네.

어찌 하면 한 줄기 양(陽)의 도를 일으켜

집안 가득 봄빛으로 채울까?

 

38. 著存齋記

齋以著存名 凡厥裔昆千百 一致誠敬 歲一恭修祀事 宿齊于玆 而僾然如見之節目也歟. 然則誠內也 著存外也 外內相符 一絲無違 此所以誠是主宰 著存是功用也. 功用愈精庸錫齋號瞻彼齋顔可尙其誠以實中矣. 是齋也 據魚登山腰 而作把百里長江而通一呇 乃黃龍江流潛沱灣廻之中也. 雲水之勝槩 泉石之佳麗 固非世間塵區之所同轍 而山靑太古 造工不勞而屛帳四圍 其眞與畵 孰可辨矣乎. 然此非斯齋之重輕也.

38. 저존재기

재(齋)에다 저존(著存)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저 수많은 후손들 모두가 한결같이 정성껏 공경하여 한 해에 한번 제사를 공손히 치르는데, 여기에서 재계를 하니 완연히 마치 눈으로 세세한 절목들을 보는 것과 같도다. 그렇다면 정성은 내적인 것이고 드러나 보존되는 것은 외적인 것이다. 밖과 안이 서로 부합하여 한오라기의 실 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것이 정성이 주재(主宰)하는 것이 되고 저존(著存)은 그 쓰임이 되는 까닭이다.

이 재(齋)는 어등산(魚登山)의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리 장강을 끼고서 일계(一呇)로 통하니 바로 황룡강(黃龍江)의 물결이 속으로 흘러들며 구비지는 중간이다. 구름과 물의 빼어남과 산수경치의 아름다움이 진실로 세간의 누추한 곳들과 나란히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하늘님이 힘도 들이지 않고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놓으니 그 참된 모습을 누가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 때문에 이 재(齋)가 중요시되고 중요시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39. 松山精舍記

是歲春 余自琴谷僑居于松亭里. 數椽茅屋 僅足以庇風雨 心自安分 固無願乎渠廈廣廳. 從遊諸益 以我爲老 且拙謀於我別搆捿息之所從 便而近占其基 取品而遠輶木石 自七月中 始役招集群工 鋸者鋸 斷者斷椳闑枮楔 各中其制 次第操鏝者 覆瓦者 成勤厥職 至九月 初旬首尾不盈六十日而屋角突兀 軒窓敞豁 可以冬可以夏所謂主人翁 若他人旁觀而及其公役告訖 爰居爰處 豈於心安乎. 盖其僉論發於暮春 修契之日而使遠近知舊 協議損助者 鄭君遇琳之勤勞也. 終始 董役區畫整理者 金君基禹之力 爲多至若損金諸人其勤念也. 亦不讓於金鄭兩君而難於盡載 別具一冊 列書氏名 藏之几閣以備 異日山中故事焉. 噫 屛居窮山 甕牖土窟 合乎本色而瓦屋三四楹揆分己濫 此吾所以瞿瞿也. 飮落而酒至半酣 余指其東曰 是宜名藏春 塢其西曰. 是宜名含翠軒 左右曰 焉有虛中而只名其兩扁乎. 余曰惟此屋便若空中樓閣而我非邵堯夫 固不敢當. 精舍 亦似過分然 因所居稱以松山精舍云 係之以詩.

39. 송산정사기

올해 봄에 내가 금곡(琴谷)에서 송정리(松亭里)로 거처를 옮겼다. 조그만 초가(草家)가 겨우 비바람이나 가릴 정도였으나 나의 분수에 편안하였으므로 고대광실(高臺廣室)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추종하는 여러 분들이 ‘내가 늙고 무능하다’고 여기어 나에게 상의하지 않고 대중의 의논을 모아 별도로 서식(棲息)할 장소를 마련하였다. 왕래하기에 편리하도록 나의 집 근처에다 집터를 잡고 좋은 자재를 쓰기 위해 먼 곳에서 나무와 돌을 실어다가 7월 중순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장인(匠人)들을 불러 모아 기둥과 창문의 규격에 맞추어 켤 것은 켜고 자를 것은 잘라서 건물을 세우고 나서 차례차례 벽을 바르고 기와를 덮었다. 일을 시작한 지 60일이 채 안 되어 9월 초순에 이르자 처마가 우뚝 솟고 난간이 툭 트여 겨울을 날 수 있고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른바 주인옹(主人翁)은 타인처럼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다가 공사가 끝나자 거처하려고 하니,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대체로 정사(精舍)의 건립에 대한 중론(衆論)이 3월에 수계(修契)할 때 제기되었는데, 원근의 친구들로 하여금 협의하여 돈을 출연하여 돕도록 한 데는 정우림(鄭遇琳) 군이 수고하였고 시종 공사를 감독하면서 기획하고 정리하는 데는 김기우(金基禹) 군의 힘이 많았다. 그리고 돈을 출연한 여러 사람들의 염려도 김군과 정군에 못지 않았으나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별도로 책자 하나를 만들어 성명을 죽 써서 상자 속에 보관해 두었다가 후일 산중(山中)의 고사(故事)로 삼도록 하였다.

아! 외딴 산중에 사는 나에게는 움막이 분수에 적합하지, 3, 4칸의 기와집은 너무나 지나치므로 황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낙성식(落成式)의 자리에서 술이 반감(半酣)에 이르렀을 때 내가 동쪽을 가리키며 장춘오(藏春塢)로 명명하고 서쪽을 가리키며 함취헌(含翠軒)으로 명명하자, 주위에서 ‘어찌 가운데는 비워두고 양쪽만 이름을 붙이느냐?’고 말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집은 공중의 누각(樓閣)과 같은데, 나는 소요부(邵堯夫)와 같은 사람이 아니므로 감당할 수 없다. 정사 역시 과분한 것 같으나 소재지의 이름을 근거로 송산정사(松山精舍)로 부르겠다.”고 하였다.

 

40. 先生臨終日記

嗚呼 痛哉. 道之大原(源) 出于天 立乎人而不墜則人之存亡 無乃道之存亡也歟. 歲辛巳 先生年德彌邵 享八旬有七 乾乾惟若 樂天而不競 不知年數 發眞詮而誨人 不倦吾道之幸也. 新正人日惟嶽降之辰而感吟一絶詩曰逐貧非達士 樂道是眞儒. 君看守錢者 儲有也無之. 句示諸門人 蓋眞樂不改底意 小子敢賡 有誰同樂者 懇懇學眞儒. 曠土惟人在 千秋道不無. 因伏祝無疆之壽 苟而斯文之重欲爲委任 宜享康寧之壽矣. 自是月不幸嬰疾委在床褥 凡六七朔 床褥中所著 皆出於性命之正 其所闡明羽翼 先儒氏之緖餘也. 辨道心曰 亦將與天地之心合而爲一性嗜酒而戒曰 古人云 酒之禍甚於洪水信乎. 一勺之水爲禍 何其酷也與. 小子論文 亦在其時而小子終身服 雖未能造其微 其爲文之糟粕 庶可得聞爾. 文其容易言乎嗚呼 (似缺)苟非天賦純篤學 不明學術 多有穿鑿經籍 雖存讀之而不能盡究其義 倀倀然莫知趨嚮者 滔滔然耳. 幸今吾徒數百諸彦 俱儒雅標幟乎. 一方而二三子 益踐履懋篤 志于學而近於道 勉之哉. 因號七絶二道命書之曰 生無事業脫然歸 九十光陰一夢依. 二絶末句曰 從古人生皆有死 樂夫天命任吾行. 小無達(怛)化底意也. 三十日壬寅命筮之曰 閏月之鬼 是可耻免之否. 兄子昌衍筮得謙卦 以君子有終之辭 復之先生曰 謙吾平生 把作底物而地中有山 是爲謙則此身 卽山也. 未久宜在地中 閏其免矣. 夫七月一日癸卯 令勿供藥餌父病湯劑 人子之當職 然只竢天命可矣. 昨日筮辭豈徒然哉. 蓋樂天而不競程夫子解易謙之辭 吾將樂天而終命. 二日甲辰命諸生曰 壽藏宜不用風水之說 目今三千疆土 無一片乾淨地 我安適歸. 姑葬于先瑩之左 銘旌只寫小華逸民陽城李君之柩. 仍著壙誌銘戒楷寫焉. 三日 乙巳令招敦匠治壽棺 因遺誡曰 送死可以當大事 然俓情直行葬而踰禮 禮之僭也. 愼節約 令勿易之過也. 四日丙午 先生族姪雲衍 敢問製主之制 詳示趺 方四寸象四時丈十二寸 象十二月之類. 嘆曰 世級汚下 禮俗解弛用主之家鮮 或有之而俗尙眞本卷諸篋笥中 宜非奉先之道也. 一髭髮之間 戒其別人則其髭髮之至微 可得眞歟. 余嘗著眞戒宜非言耄祭用神主該於禮爾. 五日丁未 喟然自悼曰 生平含冤之痛 尙可忍乎. 輒涕淚滿眶左右亦莫不流涕. 六日戊申孫熹錫 供進糜飮令止曰 水穀不適於口脾 亦何嘗汲汲. 爲七日己酉因招羅秉集 李敏濬 鄭遇琳 金基禹曰 余平日所著在於亂草中 但蒐葺編校切勿刊行 其可不可承認於寇讎之手則是可忍爲耶. 正午戒內外安整 乃整席于正寢 亥時命加新衣恬然而逝. 嗚呼 痛哉棟樑摧折 吾道無託 晩學孰依 卽日通訃于遠近親戚及僚友 訃車所至咸痛嘆曰 吾道己矣. 匍匐來吊越三日辛亥 小歛 壬子 大歛 癸丑 成服 因時氛祲 末(未)能遵禮而渴葬痛乎. 十五日丁巳 權奉襄禮 加麻執紼者 三百有餘 護衛送轝車者略數千人 發靷至本州治 馬堂山負庚原開壙 從先兆也. 未時正刻 安棺痛哭奉安于靈座. 嗚呼 痛哉. 小子摳衣三十年 蒙恩如天地父母而遽至斯極. 吾將安放. 嗚呼 痛哉.

40. 선생임종일기

아, 슬프다!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시작되어 사람에 의해 수립되어 실추되지 않는 것이고 보면 사람의 존망(存亡)에 따라서 도(道)도 존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사년(辛巳年)에 선생의 연덕(年德)이 더욱 더 높아 87세를 누리었으나 쉴새 없이 자신을 가다듬었고 천명을 즐기며 남과 경쟁하지 않았으며 나이를 모르고 진전(眞詮)을 제시하여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우리 유학(儒學)의 다행이었다. 선생이 탄생한 새해 인일(人日:7일)에 감회를 을퍼 문인(門人)들에게 보였는데, 그 시에

    逐貧非達士     가난에 쫓긴다면 달사가 아니고

    樂道是眞儒     도 즐겨야 진유라고 말할 수 있지.

    君看守錢者     그대는 돈 지키는 사람을 보게나

    儲書有也無     쌓아 놓은 서책이 있는지 말일세.

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짜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소자(小子)가 감히 그 시에 화답한 시를 지어 무강의 수를 축원하였는데, 그 시에

    有誰同樂者     그 누가 같이 도를 즐기면서

    懇懇學眞儒     정성 다해 진유를 배우겠나.

    曠土惟人在     넓은 대지에 사람이 있으니

    千秋道不無     천추토록 도가 사라지지 않으리.

라고 하였다. 하늘이 정말로 우리 유학의 중책을 위임하려고 하였다면 선생으로 하여금 강녕(康寧)의 수를 누리게 하였을 터인데, 이달부터 불행하게도 병환이 나 6, 7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다. 병상에 누워계시면서 저술한 바는 모두 올바른 성명(性命)에서 발로된 것으로서, 천명한 바가 선유(先儒)의 심서(心緖)를 설명한 것이었는데, 도심(道心)을 변론하기를 “또한 천지(天地)의 마음과 합해져 하나가 된 것이다.”고 하였다. 선생이 술을 즐기면서도 경계하기를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술의 화가 홍수(洪水)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는데, 정말로 한 잔의 화가 왜 그처럼 혹독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때에 소자와 같이 글을 논하였는데, 소자가 비록 종신토록 노력해도 그 은미한 곳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그 문장의 조박(糟粕)은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문장을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말하기를 “아! 정말로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학문을 밝히지 않으면 학술(學術)이 착오된 바가 많기 마련이다. 경전(經傳)이 있더라도 읽으면서 그 뜻을 다 궁구하지 못하여 갈팡질팡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자가 허다하다. 다행히 지금 우리 무리 수백 명이 유안(儒雅)를 갖추어 한 방면에 표상이 되었고 그 중 두서너 명이 더욱 더 실천에 힘써 도(道)에 근접하고 있으니, 힘쓰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어 칠언(七言) 절운시(絶韻詩) 두 수를 지어 쓰라고 명하였는데, 그 시에

    生無事業脫然歸     살아서 한일 없어 거침없이 돌아가니

    九十光陰一夢依     구십년 그 세월이 한바탕 꿈같구나.

하였고 두 번째 수 끝 구절에,

    從古人生皆有死     예로부터 인생은 모두 다 죽었으니

    樂夫天命任吾行     천명을 즐기면서 내 갈대로 가노라.

라고 하였는데, 죽는 것을 슬퍼하는 뜻이 조금도 없었다. 30일 임인(壬寅)에 점괘(占卦)를 뽑아보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윤달에 죽은 귀신이 되기는 부끄럽다.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형의 아들 창연(昌衍)이 겸괘(謙卦)를 뽑아 ‘군자(君子)가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뜻으로 말씀드리자 선생이 말하기를 “겸손은 내가 평생 지켜온 것이다. 땅 속에 산이 있는 것이 겸괘이니, 이 몸은 바로 산이므로 미구에 땅 속으로 들어가겠으나 윤달의 귀신은 면하겠다.”고 하였다. 7월 1일이 되자, 선생이 약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아비의 병환에 약을 드리는 것은 자식의 도리이나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어제 점괘의 말이 어찌 부질없는 것이겠는가. 정자(程子)가 겸괘를 풀이하기를 ‘천명을 즐기며 경쟁하지 않는 것이 겸(謙)이다.’고 하였으니, 내 장차 천명을 즐기며 죽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2일 갑진(甲辰)에 제자들에게 명하기를 “나의 장사를 치를 때 풍수설(風水說)에 따르지 말도록 하라. 현재 삼천리 강토가 깨끗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서둘러 선영(先塋)의 왼쪽에다 묻되, 명정(銘旌)에는 ‘소화일민 양성이군지구(小華逸民陽城李君之柩)’라고만 쓰도록 하라.” 하고 이어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해서(楷書)로 쓰도록 경계하였다. 3일 을사(乙巳)에 목수를 불러 널을 짜도록 하고 이어 유언(遺言)하기를 “죽음을 보내는 것이 큰 일이기는 하나 마음대로 행하거나 장사를 예절에 지나치게 치르면 예절에 벗어난 것이다. 절대 절약하여 과도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하였다. 4일 병오(丙午)에 선생의 족질(族侄) 이운연(李雲衍)이 신주(神主)의 제도에 대해 묻자 선생이 자세히 말하기를 “받침을 사방 네 치로 정한 것은 사시(四時)를 상징한 것이고 길이를 열두 치로 정한 것은 십이시(十二時)를 상징한 것이다.” 하고 탄식하기를 “세상의 척도가 낮아지고 예절이 해이해져 신주를 사용하는 가문이 드물다. 그런데 풍속이 영정을 숭상하여 상자 속에 넣어두고 있으니, 조상을 받드는 도리가 아니다. 수염 하나, 머리털 하나만 틀려도 다른 사람이라고 경계하였으니, 지극히 미미한 수염과 머리털을 실물대로 그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영정에 대한 경계의 글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노망한 말이 아니다. 제사에 신주를 사용하는 것이 예절에 맞다.”고 하였다. 5일 정미(丁未)에 생이 스스로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평생 원한을 품은 통한을 어찌 차마 참을 수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글성거리니, 주위의 사람들도 너나없이 눈물을 흘렸다. 6일 무신(戊申)에 선생의 손자 이희석(李熹錫)이 미음을 올리자 선생이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미움은 비위에 맞지 않다. 또한 뭐하러 급급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7일 기유(己酉)에 나병집(羅秉集), 이민준(李敏濬), 정우림(鄭遇琳), 김기우(金基禹)를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가 평소 저술한 것이 난초(亂草)로 되어 있으니, 수집하여 편집과 교정은 하되, 절대로 간행하지 말라. 차마 원수들에게 간행의 가부를 승인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오가 되자 선생이 안팎을 안정하라 경계하고 나서 안방에다 자리를 깔고 해시(亥時)에 새옷으로 갈아입히도록 한 뒤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송산사 전경.

 

아, 슬프다! 동량이 부러져 우리 유학이 의탁할 곳이 없으니, 만학(晩學)이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그날로 원근의 친척과 벗들에게 부음(訃音)을 전하였다. 부음을 받고 모두 통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유학은 이제 끝났다.” 하고 달려와 조문을 하였다. 그 뒤 3일 신해(辛亥)에 소렴(小斂)을 하고 임자(壬子)에 대렴(大斂)을 하고 계축(癸丑)에 상복(喪服)을 입었다. 당시 세상이 어지러워 예절에 따르지 못하고 급히 장사를 치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15일 정사(丁巳)에 권도(權道)로 장례(葬禮)를 거행하자, 상건(喪巾)을 쓰고 상여줄을 잡은 사람이 3백여 명이었고 상여를 호송하는 사람이 대략 수천 명이었다. 상여가 나주(羅州) 마당산(馬堂山) 경좌(庚坐)에 이르러 뫼구덩이를 팠는데, 선영(先塋)의 아래였다. 미시(未時) 정각(正刻)에 뫼구덩이에다 널을 내리고 신주를 모시었다. 아, 슬프다! 소자가 30년 동안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 슬프다!

 

41. 後松記

松凡木中有節操之可尙 而固非爲物之後者爾. 吾夫子贊其後凋之資 然嘗未有物後之稱 而以後加於松 則松其受諸. 月城東有月溪里 里中居士表德元日 光山古族金氏. 家法以孝悌爲政 名閥聞于鄕里. 中歲拈一松字扁之 第念翁之心 卽以與松升之心 先後不差 而後云者宜有蘊蓄底微義也. 厥祖有松石公 敦本尙儉 嚴立治家規程 訓諸姪子. 今其孫曾分居里閈十數戶遵行遺訓 家家其法 公之先靈 必曰 余有後哉. 故襲用後義 可謂善繼矣. 卓乎哉. 松之爲松也. 大冬寒威 終不改柯易葉 特守高操 是木之君子也. 苟以是心爲心 而無或爲時物者所奪 則亦豈非人中之松乎. 如其物我有間 而尙志操心 或有一髮 不如松 則還爲片時桃李所笑 而早發爛熳之不若矣. 若夫巨川之再楫․大廈之棟樑 宜非松之本心也. 良工鉅之斫之繩之墨之 屈其持操 然後則可以見用 則松其肯受之歟. 立于喬嶽 歲寒相守 而卷藏萬古春 乃松之大節也 翁亦知矣夫.

41. 후송기

소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 숭상할 만한 절조가 있는 것이니 참으로 다른 나무들의 뒤에 놓일 것이 아니다. 공자(孔子)께서 소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품성을 칭찬하셨지만 ‘다른 나무들의 뒤에 놓인다’라고 불린 적은 없었으니 ‘뒤에 놓인다’라는 말을 소나무에 쓴다면 소나무가 받아들이겠는가? 월성(月城) 동쪽에 월계리(月溪里)가 있는데, 그 마을에 호를 원일(元日)이라하는 거사가 사는데 대대로 자손이 번성한 광산(光山) 김씨 가문 사람이다. 집안 법도는 효도와 우애로 다스렸기에 명문으로 향리에 유명하였다. 중년에 ‘송(松)’한 글자를 골라 편액을 하였으니 옹의 마음이 소나무와 같이 번성하려는 마음이 앞뒤로 어긋나지 않으려 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뒤에 놓인다’라고 한 것은 분명 마음에 간직한 미묘한 뜻이 있을 것이다. 그의 선조인 송석공(松石公)은 근본에 힘쓰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규정을 엄격하게 세워 자질(子姪)들을 가르쳤다. 지금 그 자손들이 마을 십 여 가구에 나누어 살면서 유훈(遺訓)을 준수하여 집집마다 그 가법을 지켜가니 송석공의 영혼이 반드시 ‘나에게 참으로 후손이 있구나.’ 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뒤에 놓인다.’라는 뜻을 이어 쓴 것이 잘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뛰어 나도다, 소나무의 소나무됨이여! 엄동의 추위에도 결코 가지와 잎을 바꾸지 않고 오롯이 높은 지조를 지키니 이는 나무의 군자이다. 진실로 이런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혹여라도 한때 빼어난 사물에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니 또한 어찌 사람 중의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만약, 저와 나에게 간극이 있어 뜻을 높이고 마음을 잡는데 터럭 하나라도 소나무와 다르다면 도리어 한때의 복숭아와 오얏의 비웃음을 살 것이니 일찍 꽃 피워 화려한 것만도 못할 것이다. 저 큰 내를 가르는 노와 큰 집의 대들보가 되는 것이 분명 소나무의 본심은 아닐 것이다. 좋은 목수가 톱질하고 쪼개며 먹줄을 치고 먹물로 그려서 소나무의 지조를 굽힌 후에 쓰일 수 있다면 소나무가 즐겨 받아들이려 하겠는가? 높은 산에 우뚝 서서 추운 날씨에도 견디어 만고의 봄을 간직한 것이 바로 소나무의 절개이리니, 옹 또한 알고 있으리라!

 

論(논)

 

1. 物種有仁論

余觀夫萬物之生也 生必有種 而種子之心 謂之仁 乃知天地萬物 本吾一體 盖天地於萬物生生之仁 苟無瞬息 之息故雖霜雪之中 菊生香 梅生葩 使之能全其天 而陰陽五氣之流行物各受之而爲心 則以物種之心 謂之仁 最善名狀 程夫子嘗曰 萬物各具一太極 太極 物之始也. 物之所具 無適不然 則奚獨物之心有不仁之理乎. 苟物種而去仁 天地生物之仁蔑也已. 竊恐念 天下未有無心之物 心者仁之全體也. 盖無私心然後 可於仁 則飛潛動息之物 亦皆無私心乎. 物之有耳目口鼻者 拘於充腹之氣 而貪慾蔽之 故 擧多不仁 但草木之類花而葉 葉而復花 雨則澤之 露則潤之 宜不爲物欲所屈 故 又其霜雪 則木藏心於幹枝草藏心於根土 雖在九野寒威 其心則不能奪 而仁惟自若矣. 是以 種子之心 恒具復生之仁 而生生不已. 凡其狀仁之體 莫切於物種之有仁 後之學者 宜潛玩而推 得於物生之始 可也.

1. 물종유인론

내가 만물이 생기는 것을 보니, 생기는 것은 반드시 씨앗이 있고, 씨앗에는 핵을 있는데 이것을 ‘인(仁)’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천지만물과 내가 본래 하나의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지가 만물에 대하여 끊임없이 낳고 낳는 인(仁)을 진실로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서리와 눈발이 날려도 국화는 향기를 내고 매화는 꽃을 피워 그들로 하여금 천리를 온전히 하고 음양 오기가 유행하여 물종(物種)이 각각 하늘의 기운을 받아서 마음에 담게 하니, 만물의 씨핵을 인(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 형용한 말이다.

정부자(程夫子)는 일찍이, ‘만물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니, 태극은 만물의 시작이어서 만물이 갖추고 있어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아니함이 없으니, 어찌 유독 물질의 심에만 불인(不仁)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물종에서 인을 없애면 천지가 물건을 생생하는 어진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생각해 보건대, 지금 세상에는 마음이 없는 물건은 없다. 심은 인의 전체인 것이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마음이 없는 다음에야 인에 행하는 것이 가능하니, 하늘이나 물 속에 사는 동식물들도 모두 사심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물질에 대하여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가운데, 배를 채우는 싶은 기운에 구애되어 탐욕에 의해 인(仁)이 가려진다. 그리하여 거동하는 것이 대부분 부인(不仁)한 것이다. 다만 초목의 류만 살펴보아도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잎이 지면 다시 꽃이 피니, 비를 맞으면 윤기가 흐르고 이슬이 맞으면 촉촉이 적셔지니 물욕에 굽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서리나 눈이 내리면 나무는 마음을 줄기나 가지 속에 보관하고 풀은 뿌리나 흙 속에 심을 보관하여 비록 온 들판에 추위가 기성을 부리더라도 빼앗아 갈 수 없으니, 인(仁)은 오직 태연자약할 뿐이다. 이 때문에 종자의 마음은 항상 다시 생기는 인을 품고 있어서 낳고 낳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인의 본체를 형용한 것이 물종에 인이 있는 것보다 더 적적할  경우가 없다. 학자들은 마음으로 깊이 닿고 연구하여 물종이 생기는 시초에 대하여 터득함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2. 天地萬物槪論

萬物之生也. 宜不爲天地而生地 而苟非天地 宜萬物無以賴生焉. 天地之高厚也 亦不爲萬物而高厚也 而苟非萬物 宜天地不過了空殼子爾. 盖天地於萬物生生之妙 渾然一理 而物各受命于天氣 而成形 形者一理氣之表也. 是故 形以前者謂之理 形以後者謂之器 所以物之有萬 卽一理散殊處言也. 故日月星辰 得以爲日月星辰 山澤流峙 得以爲山澤流峙 動植飛潛 得以爲動植飛潛 而自然得其所於妙化之中者矣. 非所以日月使之强然明 山嶽使之强然高耳. 由是焉 物其形也. 各隨其形 而姸媸不尤循其天然之態 大哉. 天地妙用也. 四時有寒暖 日月有盈虛 草木有榮悴 魚鳶有飛躍之不同 而其本一理爲也. 然則理不虛賦於物以爲天地之實者 其惟天地乎. 惟人也 受稟於天地剛正之中氣 以仁義禮智信 本於天性 而立剛常倫彛乎天地之中 故曰 參三才而不武.

2. 천지만물개론

만물이 생겨나는 것은 천지를 위하여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로 천지가 아니면 만물이 힘입어 생겨날 바탕이 없는 것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운 것도 만물을 위하여 높고 두터운 것은 아니지만 진실로 만물이 아니면 천지는 빈 껍질에 불과한 것이다. 천지는 만물이 낳고 낳는 오묘함에 있어 완벽한 하나의 이치로서 물건들마다 각각 천기(天氣)의 명을 받아서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형태는 하나의 이기(理氣)를 표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 이전을 ‘리(理)’라 하고 형태를 지닌 뒤에는 ‘기(器)’라 하니, 이것은 물질이 만 가지가 존재하지만 하나의 이치가 흩어지고 다르게 적용되어진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해와 달, 별들이 될 수 있고 산택유치(山澤流峙)가 산택유치가 될 수 있고, 동식물과 조류, 어류가 동식물과 조류, 어류가 되는 것이니, 이는 자연스럽게  묘한 변화의 중도를 얻은 것이다.  해와 달을 억지로 밝도록 한 것이 아니요 산악(山嶽)을 억지로 높게 한 것도 아니다. 이렇기 때문에 물질은 그 형태가 각각 그 형태를 따라서 잘나고 못난 것이니, 그  타고난 모양이 더더욱 천리를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위대하도다, 천지의 묘용이여. 사계절에는 추위와 따뜻함이 있고, 해와 달은 차고 이지러짐이 있고, 초목에는 꽃피고 시들 때가 있으며 어류와 솔개에게는 하늘을 날고 물위로 뛰는 것이 있어 각기 다르지만 그 하나의 이치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치는 헛되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고 물건에게 부여되어 천지의 실질적인 것이다.

그 천지가 존재함이여. 오직 인간만이 천지의 강정(剛正)한 중기(中氣)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천성에 근본하여 천지 사이에 강상(剛常)한 떳떳한 윤리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재(三才)에 다 참여하여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3. 妄以勸善懲惡論戒諸益 (永慕齋)

善者 本乎天地之自然 而形於人事者也. 人事不外乎天理 天理之自然 卽人事之當然 故 循其天而言 則人性未有不善 而天理亦然矣. 奈之何 失其本然而不能自克 每事不于善 其所不當爲者爲之 而與本心相悖 至此甚焉. 人皆曰 爲善難 爲惡易 吾未知是義也. 以若堯舜之善 始於孝悌 人而孝於親悌於兄 不甚難事也. 以之孝 以之悌 惟日不已 則百行可謂盡善盡美矣. 諸君勉之哉. 且夫勸善 亦有一路 知其不善而爲之 則是自棄底 不足道也. 不知其不善而爲之 則必有知而改之 而將有遷善之日 只在乎心之操存與否爾. 太甲曰 顧寔天之明命 明命 卽天之所賦也. 日三顧寔是命而省察焉 則可庶幾乎. 盖凡好善而惡惡. 天下之同情 然 今之所謂好惡 宜皆反之也. 雖云好之而好之之心 失其正 雖云惡之而惡之之心 失其正 但爲之可惜爾 今其爲善爲惡 必自好惡 而好惡不得其正 則是宜天理人事之一反賊也. 大抵 元善元惡 人皆得以易知 近是而非者 人難易曉 其爲害 尤甚焉 譬喩農夫之養禾也. 稗之爲害 莫甚焉而竟未能盡除者 近似故也. 嗚呼 天地卽以人一理故 天理賦於人而爲性 性者仁與善之全體也. 爲善莫有愈於以禮率初也.

3. 망이권선징악론계제익 (영모재)

선(善)이란 것은 본래 천지의 자연스러운 것에서 근본하여 인사(人事)에 드러나는 것이다. 인사는 천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천리의 자연스러움은 바로 인사의 자연스러운 것이다. 천리를 따르는 것으로 말한다면 인성(人性)이 선하지 아니한 것이 있지 않으니 천리 또한 그러하다. 어찌하여 그 근본을 잊어버리고 능히 스스로 일마다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매일마다 선에 대하여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을 하지 않으니 본심과 서로 어긋남이 이같이 심하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을 하는 것은 어렵고 악을 하는 것은 쉽다.”고 하니 나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저 요순(堯舜)의 선(善)함은 효제(孝悌)에서부터 시작이 되니 사람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은 아니다.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을 날마다 그만두지 않는다면 모든 행동들이 다 선하고 다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니 제군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선을 권함에 한 길이 있으니 그 불선함을 알고서도 그것을 한다면 우선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니 족히 말할 것이 없다. 그 불선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한다면 반드시 알고 그것을 고쳐서 선으로 옮겨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다만 마음을 잡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태갑(太甲)에 말하기를 “진실로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 하였으니 밝은 덕은 바로 하늘이 준 것이다. 날마다 ‘세 번씩 진실로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는 행동을 돌아보고 살핀다면 거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에 가까울 것이다. 대개 선(善)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다 함께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지금 이른바 ‘악(惡)을 좋아한다’고 하니 이것은 마땅히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 바름을 잃어버리고 비록 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바름을 잃어버린다면 다만 애석할 뿐이다. 지금 선을 하고 악을 함에 반드시 자신은 악을 좋아하니 악을 좋아하는 것은 그 바른 법칙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의당 천리(天理)와 인사(人事)를 해치는 것이다. 대저 원선(元善)과 원악(元惡)에 대하여 사람들은 모두 쉽게 옳고 그른 것의 가까움을 알지만 사람들은 쉽게 그 해악을 알지 못함이 심하다. 비유하건대 농부가 벼를 기를 때와 같으니 피가 벼에 해를 입히는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가 마침내는 능히 다 없앨 수 없는 것이 이와 비슷하다. 아! 천지는 바로 사람의 이치와 같기 때문에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부여한 것은 본성(本性)이다. 본성(本性)이라는 것은 인(仁) 선(善)의 혼연일체(渾然一體)이니 선(善)을 함에 예(禮)로서 솔선수범(率先垂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4. 禮有體用論  

禮 天理人事中 所當有而不可無者也. 苟以人而無禮 雖云百行盡善 其所行也不實 而務馳乎虛遠 故聖人節之以禮 合於人事之當然者 所以順天理而已 所謂天序(敍)天秩 禮之大體 而體無不具合於日用之宜 故用無不周 事理明盡然後 一疵不存於萬善之間 而最貴乎中節爾. 嗚呼 天下之物 有正有不正 卽乎人心之正而正其不正者 禮之正體也. 故 其爲體也 正而不偏 其爲用也 中而不惑. 竊恐 正而不偏者 節文與儀則 已具於天理人心之中 而得其正者也. 中而不惑者 節文與儀則 已著於天理人事之正 而得其中者也. 然 人之於禮 苟物我有間 而亦有牽强底意 則難矣夫. 程夫子嘗曰 性中只有仁義禮智四字 蓋禮在乎人性之綱 則人性之外 又有天理人事別箇底道理乎. 必先明諸心 其所當爲者爲之 而知其務實焉 則自然無苟合之義 而禮之體用兼備矣.

4. 예유체용론

예(禮)는 천리(天理)와 인사(人事) 가운데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으로서 예가 없다면 비록 모든 행동에 선(善)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행한 것은 실질적이지 못하여 허망하고 요원한 곳으로만 치달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인께서 예로써 조절하여 인사(人事)의 당연함에 맞게 한 것은 천리(天理)를 따른 것이었다.

▶효제문자도:해서로 예(禮)자를 쓰고 그 안에 그림을 그렸다

 

이른바 ‘천서(天敍)’니, ‘천질(天秩)’이니 하는 것은 예의 커다란 본체로서, 본체는 모두 일상생활에서 행해야 할 마땅함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고, 씀에 두루 다 적용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사리(事理)에 대해 분명하게 다 안 뒤에야  모든 선(善)을 행하는 사이에  조금의 잘못도 없으리니, 예는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아아, 천하의 사물에는 바른 것도 있고 바르지 않은 것도 있다. 인심(人心)의 바른 데에 나아가서 그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예의바른 본체이다. 그러므로 그 본체는 바르고 치우치지 않으며  일상생활에 씀에 중도(中道)에 들어맞아 의혹됨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생각하건대, 바르면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절도있는 꾸밈과  이치에 맞는 행동이 이미 천리(天理)와 인심(人心) 속에 갖추어져 바름을 얻은 것이요, 중도에 맞아 의혹됨이 없다는 것은 이미 천리와 인사(人事)의 바름을 드러내어 중도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예를 행하는 경우에 만일 상대와 나 사이에 틈이 있어 억지로 끌어당겨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중도에 맞춰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정부자(程夫子)께서 일찍이, ‘성(性) 가운데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넉자가 있을 뿐이다.’고 하셨으니, 이를테면, 예는 인성(人性)의 벼리이니 인성의 밖에 또한 별도로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의 도리가 있겠는가. 반드시 먼저 마음속의 예(禮)를  분명히 알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행하고, 실질적인 곳에 힘을 쏟을 줄 안다면  구차하게 의리에 맞추려 함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예의 본체와 씀씀이를 다 갖출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