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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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昺璿)

 

    

                                                           茶泉遺稿 (文)

                                                                     다천(茶泉) 정우익(鄭遇益) 저     Go Back

  -  한국족보학연구소 편역 -

 

범례

 

* 작품에서의 간지가 실제 역사 사실과 상이한곳이 있으나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였음.

* 번역에 사용된 기호 용례

     : 각 왕조와 왕위의 교체

     ○    : 역사사실

     ◎    : 역사 사건에 대한 평가 및 작가의 평

     -    : 원문에 실린 주석

 

발간사

 

 

韓國族譜學硏究所 所長 朴鍾鉉

축  사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 지금 우리의 주변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표현되는 지식정보화 시대는 20세기의 자본과 노동력에 의한 사회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옛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선현의 유물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몫이며 사명입니다.

이번 정우익 선생께서 남기신 글의 발간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는 웃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계승시키고 후손을 위하여 여러 어르신들의 경륜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문명의 황폐화로 사회 도처에 상존하고 있는 병폐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진정 개개인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정보를 직접 전달해 주는 매체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게 현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만능 사상으로 인하여 물질의 풍요 속에 정신문화의 빈곤이라는 폐습이 거듭되고 있는 이때 실추된 도덕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미풍양속인 예절과 규범을 바로 잡아 건전한 사회풍토 조성에 일익을 담당하기 위하여 정우익 선생의 글은 우리에게 보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연구를 위해 열성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출간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성균관장 최창규

축  사

옛 것이 점차 사라져 가고, 설 자리가 없어지는 오늘날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런 無關心이 硏究者에게 있어서는 무척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傳統들이 길이길이 전해지고 保存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팀과 한국족보학연구소에서 조선시대 한 儒學者인 茶泉 정우익 선생이 쓰신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정리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천년의 歷史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 일제독재 하에서의 역사 자료 소멸과 빠른 경제 성장에 급급해 여러 옛 文獻과 유물을 소홀히 취급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간된 檀春野詞는 단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의 역사서입니다. 그 속에는 한 유학자의 눈을 통해서 본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상이 고루 담겨져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한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 근간이 되는 哲學입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것을 敎訓으로 삼아 미래로 정진할 수 있습니다.

또,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 기록이 아니라, 과거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석하여 재평가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그가 속한 시대적 제약을 받아 그 당시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즉, 역사를 보는 사람의 시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우익 선생의 檀春野詞는 역사와 그 歷史를 해석하는 관점에 있어 기존의 역사가들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우익 선생과 같은 초야의 학자들의 역사 서술에 대한 평가가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 분야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이때에 정우익 선생의 檀春野詞 발간은 학계에서나 정우익 선생의 가문으로서나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檀春野詞의 출간은 앞으로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더욱 적극적인 노력의 표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檀春野詞의 出刊을 위해 힘쓰신 여러 연구진들과 후원자 분들께 진심으로 祝辭를 전합니다.

 

成均館大 翰林院長 金忠浩

감사의 글

세상의 변화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고, 個人主義가 팽배하는 이 시대에 가문의 歷史를 탐구하고 그 遺物을 살피는 것이 별 의미 없는 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에도 있듯이 가정이 사회와 국가의 根本이요, 그 화목의 基礎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뿌리가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립니다. 지금 이 사회에 난무하는 여러 문제들을 볼 때마다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며, 그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할아버님의 유고집 發刊이 저희 가족에게는 가족화합과 단결을, 그리고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하나의 敎訓이 되어 세세에 남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훌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감동과 여운은 오래 남아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그 敎訓을 본받고 실천에 옮길 때 독서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한 권의 제대로 된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을 읽고도 그렇게 感動을 느낄 수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글을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조상의 恩德이요, 先賢의 깊은 뜻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그 어려운 시대를 거치시면서 겪으셨을 고초와 그 속에서의 깨달음을 알게 되고, 後孫에게 전하게 된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유고집을 번역하고 할아버님께서 남기신 그 尨大한 양의 글을 대하게 되니 그 깊은 학식과 학자로서의 부지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지금 아버님께서 서재에 앉아계신 모습으로 할아버지께서도 단아하게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으시고 글을 쓰셨겠지요. 저희도 언젠가는 저희 아들에게 그리고 그 손자에게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책으로 낼 수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팀과 여러 교수님들께 깊은 感謝를 드립니다.

 

                                            不肖孫 鄭炳圭

                           光勳  允坤  允五  允中  允邦  一成  允大

 

차  례

발간사  3

축  사  5

축  사  7

감사의 글   9

차  례  11

茶泉鄭遇益先生에 대하여 19

序  22

茶泉鄭遇益行略(다천정우익행략)  25

行狀 遺事(행장 유사)    29

  유사   正憲大夫兵曹判書景武公遺事 / 31

  행장   直方齋奉公行狀 / 42

  가장   謙山先生家狀 / 61

  가장   性堂公家狀 / 92

  행장   松圃公行狀 / 100

  행장   梅軒鄭公行狀 / 109

  행장   悔窩林公行狀 / 118

箴(잠)  131

  잠   妄贅視聽言動四勿箴戒諸益 / 133

  잠   以筆戒諭諸益 / 135

 

書(서)  137

  서   與道湖吳丈書 (二度) / 139

  서   與晩軒吳丈弼善 / 146

  서   與道湖吳丈東洙 / 149

  서   與栗溪鄭丈 / 159

  서   答朴晦山基敦 / 161

  서   答吳兄吉洙 (三度) / 163

  서   與朴潤亮康津 / 166

  서   答李雅士相瑚長興 / 168

  서   謙山遺稿編葺時敬告于近遠僚友及有文家 / 170

  서   答金雅基碩(二度) / 172

  서   與林雅士光奎 / 174

  서   寄姪兒康勉 / 176

  서   書與金麟庭泳濠 (二度) / 177

  서   與李松下承奎 / 183

  서   答尹兄滋文 / 186

  서   與士人金洛基 (二度) / 190

  서   松山精舍營建時與諸益書丙子 / 193

  서   與習齋丈羅秉集 / 195

  서   與止齋丈李敏璿 / 197

  서   與白癡尹忠夏海南白浦 / 199

  서   與松下 / 200

  서   與丁雅士敬悅魯壽 / 202

  서   答鄭士人京黙 / 204

  서   與林雅士漢庠 / 205

  서   與孫士人在平 / 206

  서   與吳碩儒克卿 高敞 / 207

  서   與士人庾熙泰 / 208

  서   與鄭雅士綺源 / 209

  서   與藥軒李彦敎 / 210

  서   答林雅士光奎 / 211

  서   與韓斯文禎履 / 213

  서   松山精舍護喪所答慰狀(辛巳七月日 喪禮時) / 215

  서   與麟庭金泳濠 (二度) / 217

  서   上習齋羅丈 / 219

  서   與李雅士彦敎 / 221

  서   與許士人永奎 / 222

  서   與金雅士正熙 / 223

  서   與朴南坡炯得 高興 / 225

  서   答朴雅士潤亮 / 226

  서   與道湖吳丈 (二度) / 227

  서   與梁丈炫 / 231

  서   答金大雅基碩 / 233

  서   答李斯文會升晩湖谷 / 236

  서   與族兄遇祚 / 238

  서   答崔雅士潤魯 / 239

  서   答吳大雅吉洙錦北詩社 / 241

  서   慰晩隱鄭琫采 / 243

  서   慰吳喪制吉洙 / 245

  서   與樵雲金基碩 / 247

  서   答同族人遇允(萬石里) / 249

  서   答奉卽弼碩 / 251

  서   答徐雅士正洙 / 252

  서   答春圃吳秉銓河東 / 253

  서   與吳兄永烈 / 254

  서   與李雅士敦圭 / 256

  서   寄家兒日勉 / 258

  서   答東萊吳翼洙求禮 / 259

  서   與吳大雅吉洙 / 260

  서   與李斯文雲衍 (二度) / 262

  서   與從姪正勉 / 266

  서   永慕齋以學問切要贈諸益書凡八條目 / 268

  서   與鶴圃余文燁 / 276

  서   與荷堂鄭兄 / 278

  서   答丁斯文奎炯 / 280

  서   與敏菴書 (己亥 二度) / 282

  서   與林雅士鍾炫 / 291

  서   答崔弘洛正卿書 (己亥) / 293

  서   答林斯文鍾炫書 (庚子) / 304

  서   答一聾鄭淳奎書 / 307

  서   與李君東憲書 / 309

  서   答一聾鄭淳奎書 / 310

  서   答自安洞僉章甫書 / 313

  서   與林君東觀書 / 317

辨(변)  319

茶牕演錄(잡저) / 321

  변   無極辨 / 321

  변   太極 / 322

  변   天 / 323

  변   地 / 324

  변   日 / 325

  변   月 / 326

  변   星辰 / 327

  변   風 / 328

  변   雨 / 329

  변   雲 / 330

  변   露 / 331

  변   潮汐 / 332

  변   無天辨 / 334

  변   陰陽 / 335

  변   心統性情 / 337

  변   人心道心 / 338

  변   情意 / 340

  변   理氣 / 341

  변   大易 / 343

  변   文爲道器 / 346

  변   經旨 / 349

  변   大學之道在明明德 / 350

  변   新民 / 352

  변   止於至善 / 353

  변   總結三節 / 354

  변   知止而後有定 / 355

  변   定而後能靜 / 356

  변   靜而後能安 / 357

  변   安而後能慮 / 358

  변   慮而後能得 / 359

  변   格物 / 360

  변   致知 / 362

  변   誠意 / 364

  변   正心 / 366

  변   修身 / 367

  변   齊家 / 368

  변   治國平天下 / 369

  변   絜矩 / 372

  변   中庸 / 373

  변   天命之謂性 / 375

  변   朱夫子釋氣以成形理亦賦焉 / 377

  변   率性之謂道 / 378

  변   修道之謂敎 / 379

  변   可離非道 / 380

  변   戒愼乎其所不睹 / 381

  변   莫見乎隱 / 382

  변   君子愼其獨 / 383

  변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 / 384

  변   中也者天下之大本也和也者天下之達道也 / 387

  변   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 / 388

  변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 389

  변   君子之中庸也君子而時中 / 390

  변   中庸其至矣乎民鮮能久矣 / 392

  변   知者過之愚者不及 / 393

  변   人莫不飮食也鮮能知味也 / 394

  변   君子之道費而隱 / 396

  변   君子語大天下莫能載焉 / 398

  변   引詩之鳶飛戾天魚躍于淵言其上下察也 / 400

  변   道不遠人人之爲道而遠人不可以爲道 / 403

  변   忠恕違道不遠 / 405

  변   君子之道四丘未能一焉 / 406

  변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上不怨天下不尤人 / 408

  변   子曰射有似乎君子失諸正鵠反求諸其身 / 410

  변   君子之道辟如行遠必自邇辟如登高必自卑 / 412

  변   子曰鬼神之德其盛矣乎 / 414

  변   夫微之顯誠之不可揜 如此夫 / 416

  변   大德者必受命 / 418

  변   君子不可以不修身思修身不可以不事親 / 421

  변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所以行之者一也 / 423

  변   及其成功一也 / 425

  변   凡爲天下國家有九經 / 427

  변   凡事 豫則立不豫則廢 / 429

  변   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 / 431

  변   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 / 433

  변   博學之審問之愼思之明辨之 篤行之 / 436

  변   人一能之己百之人十能之己千之 / 438

  변   果能此道矣雖愚必明雖柔必强 / 440

  변   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敎 / 442

  변   唯天下至誠爲能盡其性 / 444

  변   故至誠無息 / 446

  변   不息則久久則徵 / 448

  변   徵則悠遠悠遠則博厚博厚則高明 / 450

  변  其次致曲曲能有誠誠則形形則著著則明明則動動則變變則化唯天下至誠爲能化 / 453

  변   至誠如神 / 456

  변   誠者自成也而道自道也 / 458

  변   誠者物之終始不誠無物是故君子誠之爲貴 / 461

  변   誠者 非自成己而已也所以成物也成己仁也成物知也 / 463

圖(도)  465

  도   本宗五服圖 / 467

  도   妾服圖 / 470

  도   爲人後者爲本宗降服圖 / 472

  도   妻爲夫黨服之圖 / 474

  도   外黨妻黨服圖 / 476

  도   出嫁女爲本宗降服圖 / 478

 

狀(장)  481

     장   家狀(德勉撰) / 483

銘(명)  491

     명   墓碣銘(李玟秀撰) / 493

跋(발)  499

     발   跋(海勉識) / 501

     발   跋(泰勉識) / 503

跋文(발문)  507

     발문   跋文(鄭芝會) / 509

茶泉 鄭遇益 先生에 대하여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께서 금성산(錦城山)에서 도(道)를 강론하자 따르는 자가 한 고을을 기울게 할 정도였고 대부분 영준(英俊)한 선비들로 높은 지식과 두터운 행실로 사우(師友)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 중 우리 다천(茶泉) 정공(鄭公)께서 그 첫 번째였다.

공의 휘(諱)는 우익(遇益), 자(字)는 일문(一文). 나주 정씨이다. 고려 말의 설재선생(4대조)은 휘는 가신(可臣)이며, 조선에 들어서 휘가 식(軾)이고 9대조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시니 시호가 경무에 이르는 조상들과 설재사에서 나란히 유식하였다. 휘는 상(詳), 호는 창주(滄洲)이신 13대조께선 덕학이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셨으며 문정랑이라 하였다. 휘는 언복(彦復), 호는 치옹(痴翁)이신 18대조께선 문장이 세상에 알려져 사마(司馬)와 같다하였으니 그 명성이 공의 7대까지 이르렀다. 휘 국추(國樞)이신 고조와 휘 양호(養浩)이신 증조부께선 모두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덕행이 있으셨고 휘 주(柱), 호 성암(誠庵)이신 할아버지께선 유학을 행하여 이름이 나셨으며 휘 성회(星會)이신 아버지는 효로써 고, 증, 조, 부(돌아가신 아버지) 사세(四世)께 제수를 올리셨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오씨(吳氏)이며 미쁘고 착한 여자이시며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휘는 태회(台會)이시며 고성(固城) 이씨(李氏) 준석의 딸이시니 본처의 소생이셨다.

공께선 태어날 때부터 뛰어나고 총명하셨으며 배움에 나가갈 때는 문리(文理)가 날로 앞으로 나아가셨으므로 문중에 장로들께서 훌륭한 인재로 여기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장성하심에는 더욱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적을 깨달음에 힘을 쓰시어 그 명성과 인망(人望)이 멀리 떨치셨지만 스스로 겸산선생님께 배우기를 멈추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신을 위한 학문과 하늘의 정한 운명과 사람의 본성의 오묘한 이치와 말하고 침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에 힘써서 묵묵히 깨달아서 체득하심에 겸산선생께서 도를 물려주시다. 물러나서 선생께 들은 가르침을 강하시고 배우는 자의 재목을 따라 가르침을 베푸심에 일찍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바른 말을 배우고 귀중한 지식을 행함에 어찌 말하고 듣는 것에 머무르겠는가? 하시고 공께서 더욱 화이(華夷)의 방해를 경계하셨으며. 도이(島夷), 창씨의 변을 당하심에도 감히 그 어버이 섬김에 궁핍함이 없게 하시고 혼정신성과 좋은 음식으로 항상 편안하게 하시니 몸과 마음에 정성을 다하셨다. 어려움에 당도하여도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묘소를 삼년간 살피셨고 제사하는 날이 와서 정성을 드리심에 살아 계실 때와 같이 하셨다. 동지와 더불어 명승지에서 시구를 읊으심에는 수레에 나무를 괴어 움직이지 못한 것과 같이 거의 돌아가기를 잊으셨다. 그 선사(先師)를 위해 강사(講舍)를 세우고 유집(遺集)을 간행함에도 그 일에 한결 같이 정성을 다하셨다.

대개 그 온화하고 공경하며 겸허하심이 일찍이 말씀과 안색에 가득 차지 않음이 없으심에 사람들이 근후(謹厚)한 군자라 칭하지 않음도 없었다.

병오 11월 14일 그 생을 놓으시니 고종 을미 11월 13일 향년 72세로 생을 마치셨다. 본양면 월청동 선록에 장사지내 이 세상을 떠나심에 편하게 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세상 대대로 행하여졌다. 부인은 경주 이씨의 총애받는 큰 딸이시니 개사년에 태어나서 을묘년 8월 초 삼일날 돌아가시니 영안촌 후록에서 따로 장사지내고 저승에 편히 가게 하였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장남 일면(日勉), 안면(安勉), 덕면(德勉), 준면(俊勉)이 그 뒤를 이었고 딸은 하음(河陰) 봉필석(奉弼錫)과 함풍(咸豊) 이상범(李相範)에게 시집보냈다. 병주(昺周)는 장남네에서 낳았고 병규(昺圭), 윤오(允五), 윤방(允邦)은 2째네, 광훈(光勳), 윤곤(允坤), 윤중(允中), 윤대(允大)는 3째네에서, 일성(一成)과 훈(勳)은 막내네에서 낳았다.

오호라 선비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능히 세상에 공로를 높이 세우지 못하거든 곧 그 성품을 지켜서 닦고 가지런히 하여 더럽힘이 없게 할 따름이라. 이제에 공(公)의 학문은 자신부터 행하고 나아가 집과 사람들에게 이르게 하니 또한 가히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을 자식 덕면(德勉)이 밝게 이어 가장을 갖추고 명사를 청해옴에 부득이하게 그 뜻을 따라 글을 펴서 명에 말하길, 학이란 스승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받들어 세가에 효우(孝友)를 잇게 하고 매우 착한 성질과 덕을 베푸는 일을 심히 아름답게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화이(華夷)를 막으며 세상의 어지러움을 근심하고 또 무너짐을 근심하며 전전긍긍으로 그 배우는 마음의 주제를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수목이 울창한 산중을 깎고 다듬어서 유편(遺編)이 상자에 가득하게 하니 그 맥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오? 겸산선생의 양덕이로다.

 

光山 李玟秀 撰

羅州鄭德勉甫齎茶泉公諱遇益遺集五, 伴族之彦芝會 ․ 海勉 ․ 泰勉三君子踰嶺訪余于瀛洲山下, 徵以弁卷之文. 余嘗從士友間聞公之邃學篤行巋然, 爲吾林之靈光者久矣. 顧余僑寓多艱, 未遂識荊之願,徒切尋常之歎矣. 今讀其遺編, 得其七八兮之影嚮,益不禁曠世之興感, 安可以文拙靳一言也哉. 窃謂吾儒之學, 只以口腾天下之理,目涉天下之書, 謂善學則未也. 必其學也就正于有道行也.自本乎事親是爲學之貴, 而其所謂文詞之燁然者末也, 浮華耳, 其於道何有哉. 公温恭謙虛孜孜爲學. 定兮于謙山李先生之門, 獲聞天人性命之同異, 古今史流之邪正, 心悅而誠服以謂得終身依歸之所. 凡事親從兄出處語黙之節是效是則其正心循理之功, 以至居敬切己之要皆拜禀書質. 而析其精微, 驗其眞切, 推以及於鄕之子弟,無愧爲先生弟子也. 余讀之懷古編檀春野史,未嘗不再三嘆賞也. 嘗觀吾東編史之例,至檀聖之蹟,擧歸荒誕無稽太略而止. 今公則亟稱檀聖之盛德而有述,足以供編史之資,此非超類之識見耶. 如或以文祠之工不工議是集,則是非知德者也云爾.

 

  辛酉仲春節  光山  李玟秀 書

 

나주 정덕면(鄭德勉)이 다천공(茶泉公) 우익(遇益)선생의 유집 다섯 권을 가지고 일가친척 선비인 지회 ․ 해면 ․ 태면 세 분과 함께 재를 넘어 영주산(瀛洲山)아래 있는 나의 처소를 방문하여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일찍이 사우(士友)들에게서 공의 심오한 학문과 독행(篤行)의 우뚝함은 우리 사림의 신령한 빛임을 들은 지 오래 되었다. 객지를 떠돌며 다난했던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선비들을 사귀고자 한 바램을 이루지 못함에 늘 한탄만 했었다. 오늘 유고를 읽어보니 유고의 대부분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매우 커, 세상에 드문  흥감을 어찌 나의 서툰 글로 다할 수 있겠는가. 살펴 보건데 단지 입으로 천하의 이치를 논하며 눈으로 천하의 책들을 섭렵하는 것을 선학(善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학문이 아닌 것이다. 학문이란 자고로 도행이 바른 사람을 따라 자신을 바로 잡는 것이다. 부모를 섬김을 학문의 우선으로 삼아야 하며 문사의 화려함이란 쓸모없는 것이다. 도에 있어 문사의 부화(浮華)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은 온순하고 공손하며 겸허하셨으며 학문을 연구함에 부단히 노력하셨다. 겸산 이병수선생의 문하에서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역사에 대해 수하하시며 기뻐 하셨고 진심으로 선생을 따르며 내 평생을 몸담을 곳이라고 여기셨다.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셨으며 처세에 있어 정도를 지키심을 법칙으로 삼으셨고 바른 마음으로 순리를 따르심이 결실을 얻어 자신을 바른 마음과 품행으로 다스리셨으며 겸산 선생께 질정을 부탁하시기도 하셨다. 학문에 대해 세세하게 밝혀내고 분석하며 진실에 대해 증험함은 그 영향이 향리에 있는 자제들에게까지 미쳤으며 겸산 선생의 제자되심에 손색이 없으셨다. 오늘 단춘야사(檀春野史)의 회고편(懷古編)을 읽어보니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일찍이 역사서에서 단군왕검의 행적에 관해 읽은 적이 있으나 황당무계하고 간략할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공이 단군을 칭송하고 저술하신 것은 역사에 편사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되니 이것이 바로 남보다 뛰어난 식견이 아니겠는가. 만일 혹 문사(文詞)의 기교에 대해 논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지덕한 자가 아닐 것이다.

 

신유년 중춘(음력 2월)에 광산 이민수 씀.

茶泉鄭遇益行略

 

공이 생전에 이룬 호방(浩厖)한 문장(文章)과 정묘(精妙)한 학문(學問)을 필설(筆舌)로 어찌 다 묘사(描寫)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정밀하게 한다 하더라고 진수(眞膄), 미지(微旨)는 표현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그러므로 학문(學問), 사제(師弟)의 전심(傳心), 수의(守義),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배향사실(配享事實) 다섯 가지만 간추려 기록하는 바이다.

 

- 학문(學問)

공의 학문은 口耳의 學이 아니라 궁행심득(躬行心得)하여 이(理)의 진원(眞源)과 도(道)의 대본(大本)을 독계묘오(獨契妙悟)하였다 하겠다.

‘情, 意’의 해석(解釋)에 ‘出乎性而蘊諸心謂之情 由乎心而蓄諸中謂之意 (性에서 나와 마음에 쌓인 것을 情이라 이르고, 마음에서 우러나 가운데 쌓인 것을 意라 한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모방함이 없이 독창적으로 한 말인데 또한 성현(聖賢)의 말씀에 부합된다. 모습(模襲)하지 아니한 증거로는 도호(道湖) 오동수(吳東洙)에게 준 서신(書信)에 ‘今其猥舌 思索不理 雜引無可據(이제 그 외람되게 말하여 思索이 조리가 없고 雜引함이 근거가 없다.)’가 있다. 말의 겸손함이 또한 공경스럽다.

그러므로 유교(遺穚)가 구태(舊態)에서 탈피하여 생기가 솟구치고 창신력(創新力)이 발휘되어 구독(口讀)하면 감미로움이 그쳐지지 아니한다.

 

- 사제(師弟)의 전심(傳心)

공은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에게 종학(從學)하여 전인성명(全人性命)의 오(奧)와 무극태극(無極太極)의 묘(妙)를 묵회(黙會)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천리(踐履)가 더욱 독실하니 선생이 매양 칭찬하시기를 ‘可與適道(가히 같이 도에 나아갈 만 하다.)’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수수(授受)함에 선생의 진수(眞髓)가 公의 폐부(肺腑)에 들어왔다 해도 일언(溢言)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생의 임종일기(臨終日記), 가장(家狀), 뇌문(誄文), 만사(輓辭), 유교(遺穚)의 통문(通文), 발(跋), 교정(校正), 그리고 송산정사(松山精舍) 영건(營建)의 통문(通文), 상량문(上樑文) 등을 作하되 혈성(血誠)에서 우러나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이 堂高潤挹光風味 室暖滋霽月顔 (堂이 높아 光風의 맛을 넉넉히 담고, 방이 따뜻하여 霽月의 模顔을 훈훈히 간직하도다.)의 차운(次韻)은 수수(授受)의 진미(眞味)를 제대로 나타냈다고 하겠다.

 

- 수의(守義)

공의 수의준례(守義遵禮)하는 생애가 왜구의 간위(肝胃)를 거슬린데다가 상투는 그들 눈에 못이 되고, 창씨(創氏)를 강행하자 “차라리 피를 토하고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하겠느냐!”하며 거부함이 그들 살에 가시가 되어 협박이 심하므로 ‘生靈無罪生於罪 生若不生三十年( 生靈은 罪가 없고 사는 것이 罪로구나! 삶이 죽음만 같지 못함이 30년이로다.)’의 시(詩)를 읊고 악양(岳陽)으로 피거(避居)하였다. 또한 협박이 멈추지 않기로 그 자서문(自誓文)에 ‘偸生可愧 蹈東而圖生則東亦其土 陟西而生則西亦其天(구차히 살아감이 가히 부끄럽기만 하다. 魯仲連이 그랬듯이 東海를 밟으려하나 또한 그 땅이고, 이제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본받아 서산(西山)에 들어가려 해도 또한 그 하늘일세!)’라 하고, 또 ‘木石自依猶勝似 寧言矢死忍胡爲 (木石의 자유로움이 오히려 나보다 낫구나. 차라리 죽기를 작정하나니 차마 어찌하려!)’ 라는 시(詩)를 읊었다.

그리고 완용(完用) 책하기를 ‘苟爲忠犬則嚙其他人之臠而入於主人可也 嚙其主而饋於賊口非忠犬而狂犬 (忠犬은 고기 덩어리를 주인에게 물어다 주거늘 그 주인을 물어 남에게 주니 이는 狂犬이다.)’하고, 완적(完賊)이 ‘扶桑槿域何論態 兩地一家天下春(두 나라가 하나가 되어 봄날을 이루세)’의 詩를 지은 데 義憤을 이기지 못하고 반박하기를 ‘賣國榮身苟不人 春秋筆鉞滿腔新 槿區海島分夷華 天地純陰春不春(나라를 팔아 몸을 영화롭게 함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다. 春秋의 筆鉞로 죽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네. 朝鮮과 日本이 華夷가 분명하거늘 오늘날 천하가 純陰이 되어 봄이어도 봄 같지 않네.)라고 하였다.

-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공은 ‘단춘야사(檀春野詞)’ 7편 18장을 펴냈는데 그 ‘檀是嚮榮萬春無窮’의 句는 단제(檀帝)의 성덕(盛德)을 찬양하며 내세(來世)를 빛내려는 미지(微旨)가 담겨있다. ‘野逸流設’은 단제(檀帝)로부터 한말(韓末)까지 4277년의 역사를 편저(編著)하면서 사이에 논평을 써 의리를 밝혀 새로운 사관을 세우고, 국치(國恥)를 當하여 애통하기를 ‘余生末紀 痛歎窮廬 何益於社稷之存亡乎 但切黍稷之歎而已 (내가 末紀에 태어나 窮廬에서 통탄한들 사직의 존망에 무슨 도움이 되리요?  ‘黍稷’의 歎만 가득할 따름이다.)’ 하니 그 글을 읽음에 후생의 등뼈가 송연하나니 민족의 정기를 불러 일으킨다.

 

- 배향(配享)의 사실(事實)

그 깊은 도(道)와 두터운 덕(德)과 넓은 문장(文章)에 사림(士林)의 존앙(尊仰)하는 열(熱)이 날로 성하여 누년 의론(議論)이 비등(沸騰)하다가 덕면(德勉), 광훈(光勳) 부자(父子)의 효성으로 겸산선생(謙山先生)의 조두소(俎豆所)인 송산사(松山祠)를 치연(侈然)하게 개조하여 경진년(庚辰年) 위패(位牌)를 奉安(봉안)하고 향사(享祀)하니 사제(師弟)가 대좌(對坐)하여 은연중에 더욱 후학을 覺悟시키는 기풍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河陰 奉奇鍾 撰

行狀 遺事(행장 유사)

 

 

1. 正憲大夫 兵曹判書 景武公 遺事

 

天行有霽潦 君子以應變而制宜 乃時中之義也. 道是達於可而不窮 則行止底意 惡可執一以言乎. 苟曰一而執而不通 則是寒暖不一而四時一裘同其義耳. 竊惟公之遇天也. 老慈在不食土毛 無義食土毛而不赴王命 亦其邦憲何酌其時義則宜可謂達之於和也. 質諸先賢而無疑 揆諸來牖而終不愧也. 公諱軾 字憑甫 永慕亭號也. 鄭氏本貫麟山 厥後因其世居以羅州爲貫. 遠祖諱諧 高麗軍器監 三傳而有文靖公雪齊先生 諱可臣 起於麗季道學文章 允爲百世儒宗倡 明性理 撰金鏡錄一部. 盖明其明德而及於人 如金鏡明而照人也. 政學正論孰愈於此. 陪世子入中國禮遇心重 賜金帶申之以金鞍 至于今洞名以是也. 享麗忠宣王廟 我肅廟 建祠宥享之 寔公五世祖也. 曾祖諱文振 知寶城郡事 贈資憲大夫吏曹判書 祖諱有 以司僕卿出 知成川事兼安州兵馬團鍊使 贈嘉靖大夫兵曹參判 考諱自新 保功將軍雄武侍衛司大護軍歷守 陵城 光陽 仁川 利川 兼知春川都護府使 贈資憲大夫吏曹判書 盖三世贈典 以公之榮也. 妣貞夫人全州崔氏 漢城判尹諱士威女 永樂丁亥生公於羅州金鞍洞. 第性簡重寬弘 惟其孝友天性然矣. 以餘力慱涉經史益勵刻苦 微與先賢奧旨妙契 後先造詣愈精 盖涵泓德量人彛之欽服攸同而豁然大度 固非餘人所及知也. 世宗壬子 登第拜承文院著作郞 越六年重試 登第拜兵曹佐郞兼禮曺佐郞. 庚申丁外難歛握袞奉 一遵紫陽家禮廬于墓側 攀柏號哭柏爲之枯. 下諭將其孝服闋 拜吏曹正郞. 翌年陞秩爲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 秋以議政府舍人知製敎陞爲直寶文閣知製敎. 庚午除都體察使 出按咸吉平安兩道 先時奉大夫人於京第 便其溫淸 遞有疾 上特命斯速上來. 旣而親疾漸蘇 除司僕寺尹直寶文閣兼成均館司成直寶文閣莅官. 後凡五載先王俱賓天光廟 遞卽位 奉其老慈 歸于田里 克修子職 誓不肯出 盖有年矣. 竟以朝命至瞿然歎曰以吾不死無義祗 是偏養攸在終不捐軀而偸生則其於偸生之地 無可奈之義矣. 卽屈志赴命 古人所謂左右就養無方 亦以是義. 夫竊念所遭克難 非所以子職恩重 臣職義輕而然也. 恩義之際 苟欲兩全 雖有古之淸者 亦豈有他. 箇底道理乎. 出知寶城郡事 治積茂著 復爲承文院同副承旨經筵參贊官 寶文閣直提學知製敎兼知戶曹事 以寶文閣直提學知製敎兼修文殿提學知製敎春秋館編修官兼知禮曺事. 翌年陞爲兵曹參判兼修文殿提學知製敎春秋館編修官秋 除咸吉道觀察使 黜陟使兼提調刑獄兵馬公事 咸興府尹. 下諭曰委諸觀風之任 以專黜陟之權 卿其宣乃至公之之心 激濁揚淸 再諭曰松骨無如今年尤見卿用心之公也. 特賜綠牌兼宴衣一襲 時卽己卯九月日也. 老慈病欲上特命爾母得病速來相見. 承召而還遭難哀毁如前. 喪服闋陞秩資憲大夫. 拜司憲府大司憲兼知中樞院事. 壬午夏除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 冬拜中樞府同知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 翌年拜兵曹判書同知中樞院事. 嘗扈駕溫泉 行宮失火負玉扆而出命賜眞幀 陞秩正憲大夫兵曹判書中樞院同知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 時官府謹嚴關節之託 不入府門 自是淸名益著. 丙戌冬上箋乞骸不允. 翌年春病辭乞致仕 還鄕命賜舍寀三十里 因名賜牌地 至今傳世保之. 丁亥三月日卒 享年六十一. 訃聞朝廷震悼命以卿禮 葬于白龍山南麓 贈諡景武享雪齋祠. 配貞夫人驪興閔氏 考諱犀角判奉常寺事. 有一男承賢 司憲府監察 孫觀覩 覵靚 俱有官曾玄內外五十有餘 以文武顯. 十有二三自後簪組聯世苗裔 百千實由公之庇蔭也. 公屈志二十年三 加賞勳五降二降 璽書舍寀之封三十里 以是不足以爲榮眞像一本其方寸 宜可仰想耳. 蘶蘶乎 崇德本之於孝悌 以之於國而大業由出所以大業 未始其必然而然也.

1. 정헌대부 병조판서 경무공 유사

하늘의 운행에는 맑은 때와 장마질 때가 있으니, 군자는 그 형상을 보고서 변화에 대응하여 의리에 맞게 하니, 이것이 바로 시중(時中)의 의리(義理)이다. 도(道)란 행하기에 가능하여 막힘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려고 함이니, 행하고 행하지 않는 의리를 어찌 한가지만을 가지고 언급하겠는가. 진실로 한가지만을 고집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바로 추위와 더위에 대응하는 것이 맞지 않아서 4계절에 한결같이 가죽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의리이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공이 시대를 만난 것은 어머니께서 생존해 계셔서 벼슬을 하시지 않았으니, 의리에 맞지 않는 녹봉(祿俸)을 받으면서 왕명에 달려가지 않는 것이다. 나라의 법은 어떻게 하면 시대의 의리에 맞아서 조화로움에 통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점을 선현의 행적에 비추어 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고, 후배들에게 비추어 보아도 끝내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공의 휘는 식(軾)이요, 자(字)는 빙보(憑甫)이며, 영모정(永慕亭)은 그의 호이다. 정씨의 본관은 인산(麟山)으로 그 후에 대대로 나주에 살았기 때문에 나주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원조(遠祖)의 휘는 해(諧)니, 고려 군기감이었다. 삼대 째에 문정공 설재(雪齋)선생이 있으니 휘는 가신(可臣)이다. 고려 말에 몸을 일으켜 도학 문장이 진실로 백대 유가의 으뜸이 되었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금경록(金鏡錄) 한 부를 편찬하였으니, 대개 밝은 덕을 밝혀 남에게 미치는 것이 마치 밝은 금경(金鏡)이 사람을 비추는 것과 같다. 정치에 대한 학설과 바른 의론이 무엇이 이보다 더 낫겠는가.

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도 매우 중한 예우(禮遇)를 받아 금대(金帶)를 하사받고, 거듭 금안(金鞍)을 하사받았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이것으로 마을 이름을 삼고 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의 묘에 배향되었고 숙종 때에 사당을 지어 배향하였으니, 실로 이 분은 공의 오대 선조이시다. 증조의 휘는 문진(文振)이니, 보성(寶城) 군수를 지내셨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로 추증되셨다. 조(祖)의 휘는 유(有)이니, 사복경으로 계시다가 외방에 나아가 성천(成川)군수 겸 안주병마단련사(安州兵馬團鍊使)를 지내셨며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셨다. 고(考)의 휘는 자신(自新)이니, 보공장군웅무시위사호군(保功將軍雄武侍衛司大護軍)으로 능성(陵城)․광양(光陽)․인천(仁川)․이천(利川) 겸 지춘천도호부사(知春川都護府使)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자헌대부이조판서로 추증되셨다. 대체로 삼대동안 연속으로 선조께서 증전을 받은 것은 공의 영광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전주 최씨니, 한성판윤(漢城判尹) 휘 사위(士威)의 딸이다. 영락(永樂) 정해(丁亥)년에 공을 나주 금안동(金鞍洞) 집에서 낳으셨다. 성품은 대범하고 신중하면서도 너그럽고 국량이 넓었다. 오직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것이 타고난 성품인 듯 하였다. 힘써 효도 하였고 남은 시간에 경전과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여 더욱 각고의 노력을 하셨다. 은미한 부분까지 선현들이 품은 깊고 오묘한 깊이에 들어맞았으며, 훗날에는 선유들보다도 더욱 정밀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경사의 깊이에 도달함이 더욱 정밀하였다. 깊이 있는 덕량(德量)과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공경스럽게 가지고 있는 것은 한결같아 시원스러운 큰 도량은 진실로 다른 사람들로서는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세종(世宗) 임자(壬子,1432)년에 등과하여 승문원저작랑(承文院著作郞)에 배임되었다. 6년이 지난 뒤에 다시 과거에 등제하여 병조 좌랑 겸 예조 좌랑에 배임되었다. 경신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음에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서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잣나무를 안고 곡을 하니 잣나무가 시들었다. 이에 임금께서 영을 내려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배임되었다.

다음 해에 관직이 의정부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이 되었고 가을에 다시 의정부사인 지제교에서 직보문간지제교(直寶文閣知製敎)로 제수되었다. 경오(庚午)년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제수되어 외방에 나가서 평안(平安) 함길(咸吉) 두 도의 안찰사가 되었다. 이보다 먼저 대부인(大夫人)을 서울 집에서 봉양할 때에 곧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렸는데 갑작스런 병이 생기셨다. 상께서 특별히 빨리 올라오라고 명하셨다. 얼마 뒤에 어머님의 병이 조금 차도가 있자, 사복시 정[윤] 직보문각 겸 성균관 사성직보문각위관(直寶文閣兼成均館司成直寶文閣)을 제수하였다. 그 5년 후에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광종께서 뒤를 이어 즉위하시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전원(田園)으로 돌아오셨다. 진실로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며 결코 벼슬자리에 나아가려 하지 않으셨다. 한참이 지난 뒤에, 마침내 조정의 명이 이르니 두려워하며 탄식해 ‘나는 의롭지 않은 가운데에서 죽고자 하지 않으니, 곧 어머니만을 모시며 끝내 목숨을 연명하며 겨우 겨우 살기만을 구한다면 의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시고 곧바로 뜻을 굽히고 왕명에 나아가셨다. 옛 사람들이 이른바, ‘좌우를 다 봉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의리인 듯 하다.

생각해 보건대, 상(喪)을 만나 잘 치르는 것은 자식의 직분으로서 은혜는 막중하지만, 신하의 직분으로서 의리도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은혜와 의리의 사이에 있어서 진실로 두 가지를 다 온전하게 하고자 하지만 비록 옛날의 청렴을 지닌 자라도 또한 어찌 별다른 도리가 있었겠는가. 출사(出仕)하여 보성(寶城) 군수를 맡아 치적을 무성하게 드러내셨다. 다시 승문원 동부승지 경연참찬관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겸 지호조를 지내시다가 보문각직제학지제교 겸 수문전제학지제교 춘추관편수관 겸 지예조를 담당하셨다. 다음 해에 병조참판 겸 수문전제학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으로 제임되셨다.

가을에 함길도 관찰사출척사 겸 제조 형옥병마공으로 제수되어 함흥부윤을 맡기며, 상께서 하유(下諭) 하시기를, ‘모든 풍속을 관찰하는 임무를 맡기니, 출척의 권한에 제대로 함에 힘을 쏟아, 경은 그 지극히 공평무사(公平無私)한 마음을 펼칠지어다. 탁함을 물리치고 맑음을 드날리도록 하라.’ 하시고 거듭 하유(下諭)하시기를, ‘금년처럼 경의 몸이 야윈 때가 없었으니, 더더욱 그대가 마음 쓴 공적이 드러나는 도다. 특별히 녹패(祿牌)와 연의(宴衣) 한 벌을 내리노라.’하시니 때는 기묘(己卯)년 구월 어느 날이었다. 노친의 병이 더욱 심해지자, 상께서 특별히 명하시기를, ‘그대의 노모가 병이 깊으니, 속히 와서 뵙도록 하라’하셨다. 승지가 패초하여 돌아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니, 애달파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것이 전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았다. 상을 마친 다음에 자헌대부로 품계를 옮겼다. 사헌부대사헌 겸 지중추원사로 제수되었다. 임오년 여름에,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로 제수되었으며, 겨울에 중추부사 동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병조 판서 동지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성상을 온천(溫泉) 행궁으로 호종하여 갔을 때에, 불이 나서 임금을 모시고 나오자, 진정(眞幀:초상화)을 내리도록 하였다. 품계는 정헌대부 병조판서 중추원동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이때에 관부에서는 부지런하고 엄격하여 관청에 청탁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청렴하다는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병술(丙戌)년 겨울 상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전(箋)을 올렸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으셨다. 다음해 봄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오실 때에, 상께서 사채(舍寀) 삼십리를 내려 주시니, 이곳을 ‘사패지(賜牌地)’라고 부르는 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정해년 3월 어느 날에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셨다. 부음이 조정에 당도하자, 너무 놀라고 슬퍼하며 공경(公卿)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셨다. 백룡산(白龍山) 남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 추증되어 시호는 경무(暻武)요, 영제사에 흠향되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여흥 민씨(閔氏)이니, 서각(犀角) 판봉상시사의 따님이다. 유일한 아들 승현(承賢)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손자인 관도(觀覩)와 간정(覵靚)도 모두 관직을 지냈다. 증손과 현손 오십여 명 중에 문관과 무관으로 이름을 낸 이가 열 두세 명이었다. 이 뒤로도 관직에 나아간 자손이 대를 이어 나왔으니 실로 공께서 심으신 음덕(蔭德)이라 할만하다. 공께서 벼슬하신 지 이십여 년 동안 세 번이나 상훈(賞勳)이 더해졌고 다섯 번이나 임금께서 글을 내리셨다. 삼십리의 사채를 봉해주셨다. 이것으로 영광됨이 되기는 부족할 것이다. 초상화를 보면 그 분의 마음속에 담긴 기상을 우러러 상상이 될 듯하다. 우뚝하고 높으셨던 덕은 효성과 우애에 뿌리를 두고 그 마음을 나라에까지 펴서 위대한 업적이 그로부터 나왔으니 대업은 공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주군읍지.

2. 直方齋 奉公 行狀

公諱良模 字正範 直方齋號也. 奉氏先系河陰 遠祖諱佑 高麗左僕射河陰伯 至諱天佑判都僉議政丞 河陰府院君 諡文謙 是爲中顯祖 入本朝 諱由禮號松蹊吏曹判書 肅廟建祠于萬谷 享春秋 諱克謙府使大護軍 莊陵遽遜位棄官 南下于靈光 遯迹而爲苟全計 子孫仍世居焉. 諱澍生員 癸未卞栗谷牛溪之誣 諱景綸號壺隱進士 丙子倡率義旅 聞城下盟 遯靖自守 諱瑞玉號南湖. 嘗從遊於文忠公金文谷 以爲道義交 諱天濡進士號述齋. 立於農巖金公門 當時交遊 皆名碩 書簡往復帖成一杏 諱秀學號詩隱 陶庵門人 嘗著訓蒙等書 蔚乎其文冠諸南州 諱鼎煥號栗亭 甫勝冠 就學于金公渼湖 潛玩性理 造詣惟精 以獎進後學爲己任 寔公高祖以上也. 曾祖諱基榮號尼和堂 祖諱光錫 俱隱德不仕 考諱潤和號聽愚堂 器宇卓犖 大度豁如 不拘名利 惟義是從 鄕隣欽服其善 妣金寧金氏宗說女 只育一男. 妣光山金氏 考元瑞 性溫惠 有婦德 多有內助. 高宗乙丑十月二十八日 生公於高敞栗溪里第 誠孝根天 稟氣超凡 甫學語 不喜與凡兒戱嘻 體執用莊 眼精晨星 聲巨雷雄 里中丈老咸稱詡曰 奉門有異常兒云. 才藝夙就 七歲能誦小學內外篇 字義未嘗泛過 厥考聽愚堂公甚鍾愛之 八歲遭艱 哀毁幾至滅性 數日食飮絶口 隣里駭異之曰 固非小學童所能也. 奈家政漸艱 苟不食力 未獲供奉親旨 故耕餘樵 樵餘讀書 不暇博涉經史 然論孟庸學中 修新齊家正心修己之道 惟篤行 於心得之餘 是爲孝悌家心學之工優爾. 高宗壬午 遽軍擾後 國步漸艱 政弊日甚. 翌年癸未 公年十九 慨然有及於社稷之憂 仍上京訪沈判書相學 修孔李之好 沈公乃詩隱公舊交也. 初筵如舊 獲被容接 欣慰如一室 歷訪國內 某某巨室之家咸一慤懃致意. 惟大提學韓公章錫 最是情眷 獎詡曰 斯人也. 器局可以立武班 而逸草野 是立朝人所共恥 旣而將欲薦聞. 公曰 菲材之薦 亦其非立朝人之恥乎. 固辭 又過訪鄭相洛溶家 入門人 皆是干祿人 或以苞苴 或以嬌言 惟恐不得 而惕惕然 此等人不可與言也. 鄒夫子嘗謂 求乞飽啜之良人 其妻妾所知 今其與良人之飽啜 孰愈 孰不愈乎哉. 卽還庭 事親盡禮 本倅以禮饋存問 讚其孝 自是欽服晉處士不折腰之義 有時讀歸去來辭 更無仕進之意 自筮靖遯 己亥遭外艱 痛號罔極 糜粥支延 未嘗有哀餘禮之不足 而尤庸感極 於前喪之日 幼而未能執喪耳. 每歲諱辰 自前一日 齊沐致誠 儼然乎. 如見如在 而齊過之日 皇皇乎如有趨而不及之意 年至九耋 而不衰 公可謂終身慕父母者也歟. 嚴立家法 族戚有患難 必先救恤 窮交貧族賑給不計多小 而所厚所薄 不踰情實 厥惟叔父沒汨債臼 總數夥多 而累數債帳 擔負淸了 有人曰 是人之所難也. 公之心必曰 天倫重不可以輕 錢財輕不可以重 而然耳 伯氏性嗜酒 馳意中行之外 不事産業 於是諸品經費 惟日供給 凡五十年所 眷下或有不慍. 戒曰 兄弟一氣之連 同是父母遺體 而有豊嗇之分 可也耶. 妹婿貧窶 分田土 以保全活 厥先進士公墓近邱 壟不爲不多 而氣脉隱微 玄竅合法 堪輿稱風水孔嘉 必有天定之坐穴云 山下鄭富將有欺奪造物之慾 直以厚賂 誘引之 自近宗家貧乏 幾乎見欺. 公聞輒大叱曰 富家子宜貧可侮矣. 吾氏族不可侮矣. 吾氏族可侮 不可以侮吾先塋矣. 卽辦金往之 鄭富回避不家 自後知其財不可以犯義 代人請謝 因出金送之 曩歲重刊世譜 一遵先世譜法 辨系世 明昭穆 厥先遺蹟 雖片紙尺辭 葺之以爲傳世寶藏 累數世墳墓立碑表誌 以修墓道 分置義庄 以圖春秋永享之計 蓋天性猶如是爾. 路人有甘姓者 過入門 遽浸疾 延至九年而渾家未嘗有厭倦之意 是宜家齊之效也. 嘗夜半有號訢聲聞外 令人視之 行乞人白髮冒霜而坐 召入廊寢 滿座人皆不肯 招至公之寢所 更着新濯 同一宿 公之謹厚 類多如此 凡賑貸斗量厚於糶 薄於糴 隣里稱頌曰 公其有後 奉氏之門必然綽綽乎. 果未幾孫曾滿庭 祗是福善之驗也. 南方好巫痘疫入于閭里 民俗建旗設床 以竹爲馬 曾有迎送之例 而痘疫入室 戒家人曰 尼祝巫禱 令不入門 乃先世家訓也. 絶拒俗弊 然而嬰駭無頉 亦可爲近佛瀆神者之一戒也. 閹茂屋社 歛跡守舊 頓絶世味 倭製奇巧之物 及外好不接於心目 令姪子輩愼勿爲新學鴂舌之巧 有時吟嘯自適. 乙丑十月二十八日 初度辰也. 痛讀蓼莪詩 至哀哀父母生我劬勞 三復涕泣曰 父母全而生之 一髮不毁獨 葆大明衣冠 今四十餘年矣. 餘日不多 庶乎全而歸之 奈彼黍之痛何 是日卽父母劬勞之日也. 不敢以燕樂自慰 命略設酒饌 與鄕黨族親舊 要酬酌小話. 嘗曰 敬以直內 義以方外 晦庵夫子格訓也. 仍書座右 顔其齊而直方 參判李明翔 吾先師謙山先生 記其實 贊其事 道峰孔學源 六峯李鍾宅 松川高禮鎭 是晩暮游從之好也. 命孫兒遊學于名碩之門 戒其勤篤課程 設塾 延師以訓迪後進 因爲暮年心樂 乙酉遽然歎曰 島夷遁藏 快覩天日 然狼視左右 嗟我民生 何果 數年不爲狼嚙 則入于虎口 全者幾希矣 但公數十眷率葆得苟全 亦可謂明哲矣. 壬辰八月六日 考終于寢 享年八十八 鄕隣悼歎曰 哲人逝矣. 因時氣祲 渴葬于先祖妣墓下子坐 時執紼數十 臨壙者一百有餘 敬庵金魯洙誄曰 溫良眞君子 魁偉出凡常 玄谷柳永善輓曰 力田孝友故家風 配鳳山李氏貴根女 性婉順柔惠 貞立閨範 未嘗以介婦闕其婦職 養尊舅 竭力盡誠敬 於君子禮以事之 御婢僕嚴而惠 至今有一婦女展拜於墓下 宜不忘前日恩洽之惠也. 壬戌十二月六日生 己巳二月二日卒. 墓高敞治北星斗里溫洞上辛坐原. 二男一女 長炳台出爲伯父后 次炳國 女適江陵劉載九 炳國配淸道金豊容女 生四男三女 長弼周 次弼聖 次弼碩 次弼明 長女長興高顯柱 二女慶州金永穆 其次適錦城羅基玉 劉載九出二男 洪鍾泰鍾 弼周齊陽城李昌衍女 生奇鍾老鐘安鍾寅鍾 弼聖齊晉州姜天秀女 永鍾熙鍾其所出也. 弼碩余嘉其趣嚮 以女室之 不幸早夭 娶于利川徐致寅女 生亨鍾在鍾萬鍾羽鍾錘 弼明齊錦城羅鍾煥女 生錤 孫曾內外二十有餘人. 嗚呼 惟公在在世日 拜謁軒屛 仰挹淸儀 至于今彷佛乎如在心目 謹按家狀草記 懇而益勤 平日所履 篤敬忠信 宜瀉照其萬一 然未嘗有一辭濫情 在世行治 款款然如復覩耳. 竊惟積功累蔭 未必是見報於後日 但天其厚報理也. 非私也 如其私也. 亦何嘗厚於公之後裔 今其裔昆鄕閭罕比 想積累攸曁也. 不惟是已. 輕財厚倫 溫惠寬恕等數件事 可以與古人敦行君子竝立 不讓 而只幸後之立言君子採裁如何爾.

2. 직방재 봉공 행장

공의 휘는 양모(良模)요, 자는 정범(正範)이니 직방재(直方齋)는 그의 호이다. 봉씨의 선조는 하음(河陰)이고, 원조(遠祖) 우(佑)는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천우(天祐)에 이르러 판도첨의정승(判都僉議政丞) 하음부원군(河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문겸(文謙)이니 이가 중현조가 된다.

조선 시대로 들어와 휘 유례(由禮)는 호가 송혜(松蹊)이니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숙종 때 사당(祠堂)을 만곡에 건립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휘 극겸(克謙)은 부사대호군(府使大護軍)으로 장릉(莊陵:단종)이 갑자기 왕위를 양보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광으로 남하하여 은둔하며 생명을 보전할 계획으로 삼으니 자손들이 대대로 그곳에 살았다. 휘 주(澍)는 생원이니 계미(癸未:1853)년에 율곡(栗谷) 이이(李珥:1539~1584)와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의 무고(誣告)를 변명하였다. 휘 경륜은 호가 호은(壺隱)이니 진사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을 일으켰으나 남한산성에서 항복 맹서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은둔하여 생활하였다.

휘 서옥(瑞玉)은 호가 남호이니 일찍이 문충공 김문곡과 교유하며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휘 천유는 진사이며 호는 술재(述齋)이니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당시 교유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름난 석학들로 편지 왕래한 것이 한 꾸러미였다.

▷남한산성:병자호란 때 인조가 45일간 농성했던 곳이다.

 

휘 수학은 호가 시은(詩隱)이니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의 문인으로 일찍이 훈몽 등의 책을 지었으며, 성대한 그 문장은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 되었다. 휘 정환은 호가 율정(栗亭)이니 겨우 약관의 나이에 김미호(金渼湖) 공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고요히 성리설(性理說)을 탐구하여 조예가 정밀하였다. 후학을 장려하여 인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이것이 공의 고조(高祖) 이상의 세보이다.

▷도암 이재 묘.

 

증조의 휘는 기영(基榮)이요, 호는 이화당(尼和堂)이니 조(祖) 휘 광석(光錫)과 함께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 휘 윤화(潤和)는 호가 청우당(聽愚堂)이니 기량이 우뚝하고 도량이 트여 명예와 이익에 구속되지 않고 오직 의리만을 좇으니 이웃 사람들이 그 선함에 감복하였다. 비(妣)는 김녕(金寧) 김씨 종설의 따님으로 다만 아들 한 명만 키웠다. 비(妣) 광산 김씨는 아버지가 원서(元瑞)이니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부덕(婦德)이 있어 내조함이 많았으며, 고종(高宗) 을축(乙丑:1865) 10월 28일 고창 율계리 집에서 공을 낳았다. 효성스럽고 천품이 빼어나 겨우 말을 배울 무렵 여러 아이들과 장난치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가짐은 엄중하고 눈은 새벽별처럼 밝았으며 목소리는 큰 우레 소리 같았으니 마을의 노인들이 모두 칭찬하여 말하기를, “봉씨 문중에 범상치 않은 아이가 있도다.”라고 하였다. 재주와 기예가 일찍이 이루어져 7살에 소학(小學) 내외편(內外篇)을 배우면서 글자의 의미를 범범히 지나친 적이 없었으니 그 아버지 청우당이 매우 사랑하였다. 8살에 부모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상심하여 거의 절명(絶命)할 지경에 이르러 서도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하니 이웃 사람들이 놀라고 기특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소학만 배운 동자(童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소학독본.

 

가정이 점점 쇠퇴하여 진실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어버이에게 음식을 받들어 봉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사짓는 여가에 나무를 하고, 나무하는 여가에 글을 읽어 경전과 역사를 널리 섭렵할 겨를이 없었으나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서 수신(修身), 제가(齊家) 정심(正心) 수기(修己)의 도는 오직 독실하게 행하여 마음에 얻은 것이 넉넉하였으니 이것은 효도하고 공손한 집안에서 심학(心學)의 공이 넉넉하였기 때문이다.

고종 임오(壬午:1882)년 갑자기 군사들이 난을 일으킨 뒤에 국가의 운수가 점점 어려워져 정치적 폐단이 날로 심해졌다. 이듬해 계미(癸未:1883)년에 공이 나이 19살로 개연히 국가 사직(社稷)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 서울로 올라와 판서(判書) 심상학(沈相學:1845~?)을 방문하여 공리(孔李)의 우호를 닦으니, 심공(沈公)은 바로 시은공(詩隱公)의 옛 친구이다. 처음 만남에 마치 오랜 친구같이 가까이 사귀게 되었으니 기쁘고 위로되는 것이 한 집안 식구 같았다.

국내를 두루 방문하였는데, 명망 있는 집안들이 모두 공경스럽고 간절하게 정성을 다하였는데, 특히 대제학(大提學) 한장석(韓章錫) 공이 가장 다정하게 돌보아 주었고, 장려하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기량(器量)이 무반(武班)에 설 만한데, 초야에 묻혀 있으니 조정의 인사들이 모두 부끄러워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천거하고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박학비재(薄學菲材)를 천거하는 것도 또한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고 굳게 사양하였다. 또 재상(宰相) 정낙용(鄭洛鎔)의 집을 방문하니 집안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모두 벼슬을 구하는 사람들로 어떤 이는 뇌물을 가져오고 어떤 이는 아첨을 하며 오직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심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함께 대화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맹자(孟子)가 일찍이 ‘구걸하여 배불리 먹고 마시는 양인(良人)은 그 처첩들도 알면 부끄러워하는바 라고 하였으니 지금 저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는 양인과 비교하면 누가 낫고, 누가 못하겠는가! 곧 집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섬김에 예의 근본을 다하니 고을 수령이 예물로 안부를 묻고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진처사(晉處士:도연명)가 허리를 굽히지 않은 의기를 흠모하여 때때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으며 다시는 벼슬하려는 뜻을 가지지 않고 스스로 길흉을 점치고 고요히 은둔하였다.

기해(己亥:1899)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프게 울부짖기를 마지않고 죽으로 연명하였으니 슬픔과 예법에 부족함이 없었고 감정이 전날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보다 지극하였으니 어려서 집상(執喪)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매년 제삿날이 되면 하루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마치 직접 보는 듯, 살아계시는 듯하였고, 제과(齊過)의 날에는 허둥지둥하여 달려가도 따라가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듯하였다. 이런 일을 아흔이 되도록 그만 두지 않았으니 공은 ‘종신(終身)토록 어버이를 그리워한 사람이라고 말할 만 하도다.

가법(家法)을 엄격히 세워 족척(族戚) 중에 병들거나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구휼하였고, 궁핍한 벗이나 가난한 친족에게 구휼하여 공급함에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않았으나 가까운 이나 소활한 이에게 정실(情實)을 넘지는 않았다. 그 숙부가 부채가 많았는데 여러 번 부채를 청산해 주니, “이런 일은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공의 마음은 반드시, “천륜(天倫)은 중하니 가벼이 할 수 없고, 돈은 가벼우니 중하게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백씨(伯氏)는 성품이 술을 즐겨 중용의 바른 행실 밖으로 마음을 치달려 생산 활동에 힘쓰지 않으니 이에 여러 가지 물품의 비용을 날마다 공급한 것이 대개 50년 쯤 되었다. 집안 식구 중 혹 성내는 이가 있으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형제는 일기(一氣)가 이어지고 함께 부모의 유체(遺體)이니 부유하고 가난함의 차별이 있는 것이 옳겠느냐!”라고 하였다. 매서(妹婿)가 가난하고 곤궁하니 토지를 나누어 주어 안정된 삶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 선조 진사공(進士公)의 묘 근처에 구릉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기맥이 은미하고 현규(玄竅)가 법에 맞았다. 감여(堪輿:풍수가(風水家))가 말하기를, “풍수가 매우 아름다우니 반드시 하늘이 정한 좌혈(坐穴)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산 아래 정(鄭) 부자(富者)가 조물(造物)을 속여 빼앗고자 하는 욕심이 있어 곧장 많은 뇌물로 유혹하니 인근의 종가가 가난하고 궁핍하여 거의 속게 되었다. 공이 소식을 듣자마다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부자들은 마땅히 가난한 이를 업신여길 수는 있으나 우리 집안은 업신여길 수 없으며, 우리 집안은 업신여길 수 있더라도 우리 선영을 업신여길 수는 없다.”라고 하고 곧 돈을 마련하여 정 부자에게 갔으나 외출 중이라는 핑계로 회피하였다. 이후 그는 재물로 의로움을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대신 보내어 사과하니 이에 돈을 내어 보내주었다.

지난해 세보(世譜)를 중간(重刊)함에 한결같이 이전의 세보의 법도를 따라 계통을 분별하여 분명히 하고 사당에 위패(位牌)의 순서를 명확히 하였다. 선조의 남긴 자취는 비록 한 조각의 편지나 한 줄의 글이라도 모아서 대대로 전한 보배로 삼고 여러 세대의 분묘에 비석을 세우고 묘지(墓誌)를 표시하여 묘도(墓道)를 닦았으며, 의장(義莊)을 나누어 설치하여 봄․가을로 영원히 향유하는 계책을 도모하였다.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나그네 중 감(甘)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여행 중 집에 들렀는데, 문득 병이 들어 9년을 끌었으나 온 집안 식구들이 일찍이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마땅히 집안이 잘 다스려진 효과이다. 일찍이 한밤중에 부르짖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백발이 된 걸인이 서리를 맞고 앉아 있었다. 불러들여 사랑채에 묵게 하니 방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함께 자려 하지 않아 공의 침소로 불러 다시 새로 세탁한 이불을 덮어주고 함께 잤다. 공의 삼가고 후덕함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무릇 구휼하여 빌려줌에 되질하기를, 빌려줄 때는 후하게 하고 돌려받을 때는 가볍게 하였다. 이웃 마을에서 칭송하며 말하기를, “공은 아마 후손이 많이 있어 봉씨 집안이 반드시 성대해지리라.”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되지 않아 손자와 증손이 집안에 가득하였으니 이것은 선한 일을 한 것에 복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남방의 호무 두역(痘疫:천연두)이 마을에 들어오면, 민속에는 기를 세우고 상을 설치하여 대나무로 말을 만들어 맞이하고 전송하는 예가 있었다. 천연두가 집안에 들어옴에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축문을 외는 중이나 굿을 하는 무당을 우리 집에 들이지 않는 것은 선대부터의 가훈이다.”라고 하고 세속의 폐단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이 아무 탈이 없었으니 또한 불교를 가까이 하여 정신을 더럽히는 자들의 경계가 될만하다. 옥사(屋社)를 덮어 가려 자취를 감추고 옛것을 지키며 세상의 재미는 완전히 끊어버렸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기이한 물건과 마음을 유학하는 것들은 마음이나 눈에 보거나 생각지 않았으며 조카와 아들들에게도 삼가 신학문과 외국의 기술을 익히지 못하게 하고, 때때로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을축(乙丑:1925) 10월 28일 회갑에 시경의 「육아(蓼莪)」편을 슬프게 읽더니 “슬프고 슬프도다, 부모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수고롭고 수고로우셨다.[哀哀父母, 生我劬勞]”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두어번 반복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부모님께서 온전히 낳아주시어 머리털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이 세상에 산 것이 지금 40여 년이 되었도다. 살 날이 많지 않으니 완전한 몸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피서(彼黍)의 애통함을 어찌할꼬!”라고 하였다. 이 날이 바로 부모님이 낳느라 수고하신 날이기 때문에 감히 잔치와 음악으로 스스로 위로하지 않고 술과 안주를 간단히 준비하도록 명하여 마을의 친족, 친구들과 술을 주고받으며 간단히 대화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경(敬)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義)로 외면을 바르게 한다라는 말은 회암(晦庵) 주희(朱熹:1130∼1200) 선생의 가르침이다.”라고 하고 좌우명으로 삼아 그 재실(齋室)의 이름을 ‘직방(直方)’이라 하였다.

참판(參判) 이명상(李明翔)과 스승이신 겸산(謙山) 김주익(金周益)선생께서 그 사실을 기록하고 그 일을 찬미하였다. 도봉(道峯) 공학원, 육봉 이종택, 송천 고예진 등은 만년에 사귀던 벗이었는데, 손자에게 명하여 이름난 석학의 집안에 유학하게 함에 과정(課程)을 근독(謹篤)하게 하도록 경계하고 서당을 세우고 스승을 모셔 후진들을 교육하게 하니 이로써 만년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을유(乙酉:1945)년에 갑자기 탄식하며 말하기를, “섬나라 오랑캐가 물러나 흔쾌히 하늘의 해를 보겠도다. 그러나 이리가 좌우로 엿보니 아, 우리 백성들은 어찌될 것인가! 만약 몇 년 이내에 이리에게 먹히지 않는다면 호랑이 입으로 들어갈 것이니 목숨을 보전하는 이가 거의 드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다만 공의 수십명 가족들은 온전히 살아날 수 있었으니 또한 명철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임진(壬辰:1952)년 8월 6일 침석(寢席)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8세였다. 이웃 사람들이 슬퍼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서거하셨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요사한 분위기 [분침(氛祲):6.25 전쟁을 말하는 듯]로 인하여 돌아가신 조모의 무덤아래 자좌(子坐)에 급하게 장례지냈다. 당시 상여줄을 잡은 이는 수십 명이었고, 장지까지 간 사람은 100여 명이었다. 경암(敬庵) 김노수(金魯洙)가 뇌문(誄文)을 지어, “온화하고 어진 참군자, 우뚝이 남들보다 뛰어났네.”라고 하였고,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이 만사(輓詞)를 지어, “힘써 효도와 우애를 닦은 것은 고가의 유풍일세.”라고 하였다.

부인은 봉산(鳳山) 이씨 귀근(貴根)의 따님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여성의 모범을 곧게 세웠으며, 일찍이 착한 부인으로 부인의 직분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시부모를 봉양하고 받듦에 힘을 다하고 정성을 지극히 하였고, 남편을 공경하여 예로써 섬겼으며, 종들을 다스림에 엄격하면서도 은혜로웠는데, 지금까지도 묘 아래에서 절하는 부인이 있으니 마땅히 전일의 깊은 은혜를 잊지 못해서 이리라. 임술(壬戌:1862)년에 태어나서 기사(己巳:1929)년에 돌아가셨으며, 묘는 고창 북쪽 성두리 온동 위 신좌(辛坐) 언덕에 있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병태(炳台)인데 백부의 후손으로 양자갔고, 차남은 병국(炳國)이며, 딸은 강릉 유재구(劉載九)에게 출가하였다.

병국(炳國)은 부인이 청도 김풍용의 따님으로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필주(弼周), 차남은 필성(弼聖), 3남은 필석(弼碩), 4남은 필명(弼明)이다. 장녀는 장흥 고현주에게, 2녀는 경주 김영목에게, 3녀는 금성 나기옥에게 출가하였다. 유재구(劉載九)는 2남을 낳았으니 홍종, 태종이다.

필주(弼周)는 양성 이창연의 따님을 맞아 기종, 노종, 안종, 인종을 낳았고, 필성(弼聖)은 진주 강천수의 따님을 맞아 영종, 희종을 낳았다. 필석(弼碩)은 내가 그 취향(趣向)을 아름답게 여겨 딸을 아내로 주었으나 불행히 일찍 죽고 이천 서치인의 따님을 맞아 형종, 재종, 만종, 우종, 수를 낳았으며, 필명(弼明)은 금성 나종환의 따님을 맞아 기를 낳았으니 손자와 증손이 내외로 20여 명이었다.

아아, 공이 살아 계실 때 직접 찾아뵙고 맑은 거동을 우러러 흠모하던 것이 지금까지 마음과 눈앞에 있는 듯 합니다.

 

3. 謙山先生家狀

先生諱炳壽 字福一 石田自號 晩而謙山爲號. 李氏其先 陽城人. 遠祖諱秀匡 金吾衛上將軍柱國公 高麗三重大匡輔國 封陽城君 歷世官顯 至諱守邦 奉使上朝賜名那海吾 東男稱思那海. 自此始入本朝有諱伯良 判書補慶尙監司 以淸白著 退去咸陽 特賜廩祿 郡人名其洞曰貢稅洞. 至諱蘅參軍 始居羅州. 至諱光翼 忠孝雙全 號愛日堂 壬燹召從弟別座公光宙及甥姪金千鎰 涕泣曰吾當效義 勤王年己七十矣 老奈何. 汝當倡義快 遂吾奮忠之意 追至公州而卒. 至諱侃生員 昏朝西宮之變 遯于錦城大安洞. 曾祖諱潝 以學行著世. 祖諱愚三 考諱洪九 俱不仕 妣洪州宋氏本生考諱興九 妣長澤高氏 諱時學女. 哲宗乙卯先生 生於羅州 治竹山里第. 呑山胞胎 山名竹山. 巖巖有難攀之像而其像相近不免乳抱 魁偉如絶巖高蹲 甫二三歲 能言言出則巨鍾 自鳴如而韻韾遠聞 聞之者 至若里巷孺婦咸稱曰某宅之子氣像若是 韻韾若是 及長必爲大人也. 所居枕山踞野山則籔林野則稼穡指山曰何如彼高 又指野曰何如是低 慈愛難辨而不答先生曰想必民食土利而生 故爲其民生而作也. 如非山之樵吾焉能火食 亦非野田之穡 吾焉能食粟 慈愛加愛之曰陽李之先有諱那海 人皆思慕之 故今男子之稱 以是也. 汝或及之也耶. 至四齡 知其愛親敬兄之道 是天賦之能事 不學而自悟一日 乍晴乍陰 仰而觀天曰天一日一(行)而天晴則日眀 天不晴則日不眀 雲蔽而然 是亦天之所以而奈之何天不欲無雲乎. 家嚴曰天而不雲亦無雨下之日 民何以而生. 對曰小子言其不雨空蔽之雲 不言其雨下之雲 盖童卞時天性由出類多如此日後亂逆之蔽天或可推知也歟. 翌年正月立春日 見門右揭立春大吉 問其字音倂索音曰春無形像 何以立之. 家君曰順天理而立於天理之中者也 那可强立之耶. 對曰立於天理之中 行于地上 故先以永釋凍解乎. 自是家君深知腦神伶俐 內心自喜對人言曰氣宇如健而質鈍也云. 六歲就學于四從叔龍石之門 不滿一朔解蒙等書讀盡而入于千字(問)曰學語編首云天蒼是云天玄其蒼與玄同其意乎. 龍石公曰蒼以其形像言玄 以其微妙言蒼 與玄那可同意耶. 不學何以能(知)對曰文之爲文如是難乎. 時五月大雨暴下漲溢遍野 龍石公曰以是爲題而作詩耶. 直(問)以廻抱之意 書其文字則某字可乎. 曰有繞字可也. 直呼大水繞大野之句 龍石公稱詡曰六歲童子之口出如是佳作耶. 微有成大之望 極可極佳興讚. 至三曰族下無狀 亦非鈍質十歲前未如此一句 七歲八歲驚人句 間間由出然恐 或兒時才名過擅則自矜底怠慢生意 故欲抑之 未嘗不掛一於他眼 不數年讀了略史與資治通鑑 九歲入小學(曰)品質之不及有如是也耶. 於是 耻不及古人 因自激勵懋讀四(子)與三經等書 年成童而卒編學樂誦詩隸堦草書 次苐於力學之暇複習羲易. 適嚴冬雪風寒威四壁觸冷茶器儲水在室中 器面永結矣. 試咳于壁 遽未一時刻而凝氷 卽呤咳唾成珠玉之句曰心上眞工果如是速成 吾何嘗入海覓珠. 此年在於成童旣也. 興龍洞與石峴里 族親世居一二 往返而往路誦論語七卷 返路誦書經十卷 經由本邑華麗之物 雖多一不放念而念一而己. 甫弱冠泛觀外史文名大振益篤 操履學有强力造次 必是而先儒氏方策(熟)貫 詳複推究一理 摘要鉤玄 當寢忘寢 當食忘食遠究 程朱之心學 近接陶山之心緖 將欲會統於方寸之間矣. 至若新正朔朝鷄(鳴)晨起盥洗新着省親後 誦心經一編 叅末於謁廟新省拜以餠湯飮福. 乙亥二十一 遽遭生庭外艱主喪伯氏在矣. 哀痛切己極號幾絶之痛. 養庭外內旣沒後 立承故奉祀殫誠竭孝. 年踰三十無書不讀 暫不離書 一日所閱覽夜則不燭而輒誦之 鄕人士咸稱某也. 所讀之書 以肩背則不能負而以心力盡 載於腹中其心力之强 猶勝於全體氣力之强也云. 胎時夢 呑厥山而山多巖石 自號石田 吟一絶詩曰如到爲山地 一拳可積成 于時也. 國步漸艱變 生於禁闥 闕門之內. 高宗二十一年 間耳媚賊五七輩 國權自專而執柄弄錘變怪日滋. 彛斁倫喪之漸. 不惟啻一点滴之落在紙面 爲其臣民憂國不辰之痛 未有甚於此時. 學優而不仕 無義故累擧而不中天也. 矧又士趍奔競 反以染指於厥門者 十居八九國祚難 可以匹夫力支奈何更不赴擧. 遽東學大熾 先是嶺南妖怪有崔福述者 妄造謊誕之說誑惑 雖氓拈以符呪其流延至靑馬禍 機罔(側)湖南五十三郡 祇是完城惟一羅州. 閔公種烈適守是郡命授招討 使討平之閔公 招聘先生迎之座右 同協禦匪之策 至于匪類盡殲 連八箇朔矣. 手撰錦城正義錄 甲乙編昭載滋筆之中討平後 同唱志喜詩 詩曰山河久遠德爲基 又曰明明行道格神知. 丙申正月日 注書李公鶴相 以勤王之意 封疏陳達 且列州倅宗洙之罪惡十條同陳于疏 先生製疏略曰忠謂逆 逆謂忠 忠逆難分而逆則非但爲殿下之逆臣 實天下萬世之所共誅也. 又曰彼宗洙 肆然縱惡王章不暇而衆仇先發此 則先是國母被害 今又宗洙矯制勒削之時耳 是歲 與松沙奇公 同倡湖南義擧 天不祚深痛迫含忍杜門. 自靖自後益(痛)斯文之墜地 克複誠正之學 鍊金極精 磨玉至美以獎進後學爲己 任宜可謂天相斯文 委任於先生一身心上者明矣. 嗚呼 其日何日擧世絶廢文字 不知性命之在 與不在徒尙世華 侮沒前聖曰今之化(缺)一晝夜周廻 天地詳察天地之根邸 周覽星月之國界云. 其術可尙爾 然吾學中所謂(缺)邇人遐者是也. 先生之學 自誠正修齊 至于治平 自明明德 至于格物致知 其所學簡易而至精密邇而達 遠格乎六合之中而未嘗有一錙銖之錯矣. 以何擧 皆盲於吾學馳務於蟹籒而謂之新化 心儒之沈溺 有甚於洪水之爲禍. 惟先生 痛奮心力支一線於窮陰閉塞之中 其功反有賢於君子道 長之日也. 閹茂社變北望痛哭三日 穀粒不口 幾絶未絶矣. 肖胤諫曰不癈食飮 調攝氣體 快賭納賊輩之王章 伏誅寇讎之正名討罪之曰宜不肖之所願也. 先生神而姑不收拾 含憤痛極曰寧死不忍共戴. 立門諸生號天痛告曰殷有三仁 吾夫子贊美而未嘗以死生軒輊 其人則生於義而固守罔僕 亦不惟而死之爲愈乎. 又二仁被殺而殺身成仁 非其自絶而絶命爲仁則竊伏念自絶近於迫隘矣 又算聖不陳洪範九疇而死於二仁同死之曰則後之學者 焉能知算子之爲聖人乎. 先生强起而作曰吾夫子杖其老而不死曰賊矧惟此地而不死 則夫子之陰譴之有乎. 先生曰多言不中爲老而不死則爲不幸多也 而幸何有之對曰伏願先生道體 更爲葆寧 强忍百世含冤之痛則實爲千秋斯文之大幸也. 先生曰君等休之哉. 余更思之三千彊內 遽未有尺寸王土 生則生於何土 死則死於何土 顧死生一也. 啜飮小許僅支命縷一線 每對涕淚滿眶 喟然歎曰今啜食之粟粒 去歲王土所作(洶)底不塞而呑化 然祇今七月也. 不久粮乏讐國之土毛 不愧于那可忍耶. 誡諸家人曰舊穀雖經萬死糜身後 奈此至仁浹髓深. 末句曰彷徨長夜推常理 朝日分明朝復臨 系以著採薇吟 擧目山河異 傷心人物非 願從孤竹子 薄採首岑薇 奉讀數首詩黍離含痛中春秋大義 天性由發而十分中 五分載於先生心上五分著於詩句之末矣. 戊午大行王賓天築壇 痛哭早朝淚㾗霑地數尺 日中不乾 益切痛迫難忍而痛發則號泣曰天不吊東胡至斯極. 五百年王春微脉 僅存大行王御座而遽爾昇遐痛乎. 如是過數箇星霜遯跡于箕山東松嚴山中 戶外書箕穎山水薇蕨春秋八字 有人語到倭政則洗耳不聽 眼精與神精倂注於經傳 消遣痛念覽至於湯誓及武成編則痛念 更作含淚曰那時有如湯武聖君 濟吾蒼生 俾無蒼生曷喪之痛 祇以花葉驗時 春晩則率立門諸生風浴而歸習禮講義 種菊于庭間 以種竹示諭諸生曰竹之有心 猶人之有心矣. 外直剛毅 故其中雖虛塵累不染 霜雪不屈 塵累在人物欲也. 霜雪在人變亂也. 爲變亂所屈則非人也. 竹爲霜雪所屈則非竹耳. 君子之所愛以是也. 奧壬申錦城人士爲惜文不在玆儒習野矣. 懇懇言出山居于錦城山下琴谷里 來學甚衆室堂不能容. 自丙子春經始而至秋 竣功 命名松山精舍 在於松亭之陽 仍爲先生藏修之所講道於斯 門下儒碩可以爲標幟于吾林者 有之矣. 訓子無所私厚過庭之學而己然品質穎悟以儒雅名. 諸我鄕先生年 踰八耋神思 益精學力至奧 恒言微有警發底義 誡其諸益曰老年衰耗古人心緖 將欲窺獲微妙愈邈 心力俱殫奈之何 君等以余昏耗未及爲警則幾乎近思矣. 與小子論文 卽在其時文所以道器也. 那可以文詞之長短 獲聞心緖之奧旨乎. 小子等質鈍難化窺牆者 未不有幾人時乎. 辛巳六月日道體不寧倦于敎誨之譴近數旬頃 恐有樑折之痛糜藥供進 竟不見效 天胡不淑. 七月七日顧謂左右曰吾知夫命之窮矣 何恨有之. 愼勿濫禮厚葬 銘旌 祇書小華逸民陽城李君之柩 號子及姪曰奉先與處家友于之道 一如吾在時則庶乎 忝先無咎矣. 卽號一絶詩二度命題 窮年萬物竟凋傷 枯木何能復向榮 從古人生皆有死 樂夫天命任吾行 恬然而逝考終于正寢 享年八旬有七越十五日渴葬于馬蹄村案山負庚原 配光山金氏 諱容晛 女戶曹叅判文河曾孫. 有一男一女 男承奎 女晉州姜天秀 承奎娶羅州羅氏燾潤 女嘯浦諱德明后 有一男二女 男熙錫 娶文化柳 在鳳女 二女平澤林漢明 文化柳昌羲 姜天秀 男大星 曾玄內外幼不錄. 鳴呼 先生生於陶山數百載之下 不由師承以續夫前賢心緖講明吾學 立門吾徒獲以 遂聞可之願啓來之功 如是剝喪之際 可以爲斯文棟樑. 先生下世 抵今二十有餘載韻韾 猶存立於松山講道之所 松風梧月 猶含光霽氣像 矧惟嚴若設壇歲一誠享 英靈如在陟降乎. 在世日心學之效 昭著於遺文 雖在百世之下 後世末學 覿得於心而可想像其於在世日薰德善行 固非當日親提者之所記 不能盡傳於世 故小子忘僣僮記其梗槩 懼夫忘失愈多遺稿 竊因世路蒼黃恐 或散迭就刊騰榟閱三霜而竣功非吾先生本志也. 利成日門生等 告辭曰因文立德吾道一貫云云.

3. 겸산선생 가장

선생의 휘는 병수(炳壽)이고 자는 복일(福一)이며 석전(石田)은 자호(自號)이고 만년에는 겸산(謙山)으로 불렀다. 성은 이씨(李氏)이고 관향은 양성(陽城)인데, 윗대 선조 금오위(金吾衛) 상장군(上將軍) 주국공(柱國公) 이수광(李秀匡)이 고려조(高麗朝)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이수방(李守邦)에 이르러 중국(中國)에 사신으로 가 나해(那海)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이로 인해 이때부터 우리 나라에서 남자를 사나해(思那海)로 일컬었다. 조선조(朝鮮朝)로 들어와 이백량(李伯良)은 판서(判書)로 있다가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나가 청백리(淸白吏)로 칭송되었는가 하면 벼슬에서 물러나 함양(咸陽)에서 살자, 특별히 관록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마을을 납세동(納稅洞)으로 불렀고 그의 아들 참군(參軍) 이형(李蘅)이 비로소 나주(羅州)에서 살았다. 그 뒤 이광익(李光翼)에 이르러 충효(忠孝)를 아울러 갖추었는데,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별좌공(別坐公) 이광주(李光宙)와 생질(甥姪) 김천일(金千鎰)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마땅히 의리를 본받아 국란(國亂)의 구제에 나서야겠으나 나이 이미 70이 되어 늙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너희들은 마땅히 의병(義兵)을 일으켜 나의 충심(忠心)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하고 공주(公州)까지 뒤따라갔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이간(李侃)은 생원(生員)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는 변이 일어나자, 금성(錦城) 대안동(大安洞)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였다. 선생의 증조 이흡(李潝)은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에 저명(著名)하였고 할아버지 이우삼(李愚三), 아버지 이홍구(李洪九)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홍주 송씨(洪州宋氏)이다. 생가(生家)의 아버지는 이흥구(李興九)이고 어머니 장택 고씨(長澤高氏)는 고시학(高時學)의 딸이다.

▷정렬사비:전남 나주시 대호동 소재.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천일 선생을 추모하여, 그의 서거 34년 후인 인조 4년(1626) 나주 유림들이 그의 사우 “정렬사”에 세운 것이다.

 

철종(哲宗) 을묘년(乙卯年)에 선생이 나주(羅州) 죽산리(竹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이보다 앞서 산을 삼키는 꿈을 꾸고 선생을 잉태(孕胎)하였는데, 그 산 이름은 죽산(竹山)이었다. 그 산세가 우뚝 솟아 올라갈 수 없는 기상이 있었는데, 선생의 기상이 그와 비슷하여 어머니의 품안에 있을 때부터 깎아 지르는 바위가 높이 웅거한 것 같았다. 나이 겨우 두서너 살에 말을 잘하였고 말을 하면 마치 큰 종이 울릴 때 여운(餘韻)이 멀리 들리는 것과 같았으므로 심지어 마을의 부인들까지도 그 말소리를 듣고 칭찬하기를 “아무 댁의 아들은 기상이 그와 같고 말소리가 그와 같으니, 장성하면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사는 집이 산자락에 자리 잡아 앞에 들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산에서는 땔나무를 하고 들판에서는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선생이 산을 가리키며 ‘왜 저렇게도 높습니까?’라고 하더니, 또 들판을 가리키며 ‘왜 저렇게 낮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설명하기 어려워서 대답을 하지 않자, 선생이 말하기를 “필시 사람들이 토리(土利)를 이용해 살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산에서 땔나무를 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화식(火食)을 할 수 있겠으며 또 들판의 곡식이 아니면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어머니가 더욱더 사랑하며 말하기를 “양성 이씨(陽城李氏) 조상 중에 나해(那海)라는 분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사모하였기 때문에 지금 남자를 사나해(思那海)로 부른 것이다. 네가 그 조상처럼 될는지 모르겠구나.”라고 하였다.

나이 4세에 이르자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는데, 이는 천부적(天賦的)인 능사(能事)로써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았다. 어느 날 날씨가 잠시 맑았다가 잠시 흐려지자 하늘을 쳐다보고 말하기를 “하늘이 하루에 한 바퀴를 돌아간다. 하늘이 맑으면 해가 밝고 하늘이 맑지 않으면 해가 밝지 않는데, 이는 구름이 가리어 그런 것이다. 이것 또한 하늘의 이치기는 하나 어찌하여 하늘에 구름이 끼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하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하늘에 구름이 끼지 않으면 또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인데 사람들이 어떻게 살지 모르겠구나.”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소자(小子)는 비를 내리지 않고 공연히 끼어 있는 구름을 말한 것이지, 비를 내리는 구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대체로 선생이 어렸을 때 천성(天性)에서 발로된 바가 대부분 이와 같았으니, 후일 난리가 일어나 하늘을 가리운 것을 혹시 미루어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듬해 정월 입춘(立春)에 선생이 문 위에 붙여진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보고 글자와 뜻을 물어보면서 말하기를 “봄은 형상이 없는데 어떻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천리(天理)를 따라 천리(天理)의 속에 세운 것이다. 어찌 억지로 세운

▷입춘대길:입춘 때 문지방이나 대문 등에 써 붙이는 입춘방의 한 가지.

 것이겠는가.”라고 하자, 말하기를 “봄이 천리의 속에 서서 지상(地上)에서 유행하기 때문에 먼저 얼음이 풀려 해동(解凍)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선생의 머리가 영리한 것을 알고 내심 기뻐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기개는 강건하면서 바탕은 둔하다.”고 하였다.

나이 6세에 사종숙(四從叔) 용석(龍石)의 문하에 가 글을 배웠는데, 한 달이 채 안되어 어린이들이 배우는 글을 모두 다 읽고 ≪천자문(千字文)≫으로 들어가 묻기를 “학어편(學語編) 첫머리에는 ‘하늘은 푸르다(天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하늘은 검다(天玄)’고 하였습니다. 창(蒼) 자와 현(玄) 자의 뜻이 같습니까?”라고 하니, 용석공(龍石公)이 말하기를 “창(蒼) 자는 하늘의 형상을 말한 것이고 현(玄) 자는 하늘의 미묘한 것을 말한 것이다. 창(蒼) 자와 현(玄) 자의 뜻이 어찌 같겠는가.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말하기를 “글의 뜻이 이처럼 어렵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그 때 5월에 폭우(暴雨)가 쏟아져 온 들판에 물이 넘쳤다. 용석공이 말하기를 “이것을 제목으로 삼아 시를 지어 보겠느냐?” 하니, 선생이 곧바로 묻기를 “회포(廻抱)한다는 뜻으로 글을 쓰려고 할 경우 어느 글자를 써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용석공이 말하기를 “요(繞) 자를 쓰면 된다.”고 하자, 선생이 곧바로 ‘큰물이 큰 들판을 에워쌓다(大水繞大野)’라고 시를 지었다. 용석공이 ‘6세된 어린아이의 입에서 이런 가작(佳作)이 나왔단 말인가? 대성(大成)의 희망이 있으니, 매우 좋다. 매우 좋다.’고 세 번 칭찬하고 나서 말하기를 “내 역시 노둔한 재주는 아니었으나 10세 전에 이러한 구절을 지어보지 못하였고 7, 8세 때 사람을 놀라게 한 구절이 이따금 나왔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 너무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할 경우에는 자긍심(自矜心)을 가지고 게을러지기 때문에 억제하려고 그 구절을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몇 년이 안 되어 ≪사략(史略)≫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모두 다 읽고 9세에 ≪소학(小學)≫으로 들어가 말하기를 “품질(品質)을 이처럼 따라갈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고인(古人)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스스로 분발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부지런히 읽어 나이 15세에 끝마치고 나서 악(樂)을 배우고 시(詩)를 외었다. 그리고 학문하는 여가에 예서(隸書), 해서(楷書), 초서(草書)를 익히고 ≪주역(周易)≫을 복습하였다. 그때 마침 엄동설한(嚴冬雪寒)을 만나 사방의 벽에

▷주역언해:주역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

냉기(冷氣)가 감돌아 방안에 둔 물그릇에 얼음이 얼었다. 선생이 시험삼아 벽에다 침을 뱉어 놓았는데 한 시각이 채 안 되어 얼어붙자 곧바로 ‘침을 뱉으면 주옥이 된다(咳唾成珠玉)’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말하기를 “마음속에 진짜로 공부를 하면 이처럼 속히 이룰 수 있는데, 내가 뭐하러 바다로 들어가 구슬을 찾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해에 나이 15세였다. 흥룡동(興龍洞)과 석현리(石峴里)에는 일가붙이들이 대대로 살았으므로 그곳을 한두번 왕래하였는데, 갈 때는 ≪논어(論語)≫ 7권을 외우고 올 때는 ≪서경(書經)≫ 10권을 외웠다. 중간에 읍내(邑內)를 경유하면서 화려한 물건이 많았으나 한 번도 방심(放心)하지 않고 생각이 전일하였다. 약관(弱冠)에 여러 글을 두루 보아 문명(文名)이 크게 났으나 행실을 더욱더 독실히 하고 학문에 힘을 기울여 잠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선유(先儒)들의 글을 숙독하고 꿰뚫어 일리(一理)를 추구하고 요점과 미묘한 것을 찾느라 침식(寢食)을 잊기도 하였다. 멀리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심학(心學)을 궁구하고 가까이는 도산(陶山:퇴계(退溪))의 심서(心緖)를 찾아 마음속에 기준을 잡으려고 하였다. 새해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 새 옷으로 갈아입고 어버이를 뵈인 뒤에 ≪심경(心經)≫ 한 편을 외우고 나서 사당(祠堂)에 제물을 차려 놓고 참배하였다.

▷심경.

 

을해년(乙亥年) 21세에 갑자기 생가(生家)의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상사(喪事)를 주관하는 형님이 있었으나 매우 애통해 하다가 기절하기도 하였다. 양가(養家)의 부모가 모두 죽은 뒤에 후사(後嗣)로 들어가 효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다. 나이 30이 넘자 읽지 않은 글이 없었고 잠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하루 동안 열람한 글을 밤에 불을 켜지 않고 외웠으므로 향리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아무개는 자신이 읽은 책을 힘으로 짊어질 수 없을 것인데 심력(心力)으로 모두 뱃속에 싣고 있으니, 그 심력이 체력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다. 선생을 잉태할 때 산을 삼킨 꿈을 꾸었는데, 그 산이 암석(巖石)이 많았으므로 스스로 호(號)를 석전(石田)으로 짓고

如到爲山地      만일 산을 만들 만한 곳에 이르면

一拳可積成      한 손으로 쌓아 만들 수 있겠노라.

라고 시를 지었다. 그때 나라가 점차 어려워져 대궐 안에서 변고가 발생하였는데, 고종(高宗) 21년 사이였다. 아첨하는 역적 대여섯 무리들이 국권(國權)을 잡고 농간을 부리었으므로 변괴가 날마다 발생하였다. 윤리(倫理)가 실추될 조짐이 종이에 물 한방울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심하였으니, 신민(臣民)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통한이 이때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 넉넉히 배우고도 벼슬하지 않으면 의리가 없기 때문에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천명(天命)이었다. 더구나 선비들이 출세하기에 바빠 80, 90%나 저들에게 물들어 필부(匹夫)의 힘으로 나라를 부지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금 과거를 보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동학(東學)이 매우 치성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남

▷전봉준 동상: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嶺南)의 요괴(妖怪) 최복술(崔福述)이란 자가 허탄한 말을 지어내어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여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웠는데, 그 여파가 갑오년(甲午年)에 이르자 화란(禍亂)이 헤아릴 수 없이 커져 호남(湖南) 53개 군 중에 나주(羅州)만 온전하였다. 그때 마침 민종렬(閔種烈) 공이 나주를 맡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하여 그들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민종렬 공이 선생을 초빙하여 상석(上席)에 앉히고 같이 비적(匪賊)을 방어할 대책을 논의하여 8개월에 걸쳐 그 무리를 모두 섬멸(殲滅)하였다. 선생이 손수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갑을편(甲乙編)을 편찬하였는데, 그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비적을 평정한 뒤에 민종렬 공과 같이 기쁨을 기록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山河久遠德爲基  오랜 산하 덕으로 기반을 삼았네.

라고 하였고, 또

明明行道格神知  명백하게 행도하니 신명이 알았도다.

라고 하였다.

병신년(丙申年) 정월에 주서(注書) 이학상(李鶴相) 공이, 선생이 국난(國難)에 힘썼다는 뜻으로 상소를 올릴 때 고을 수령 종수(宗洙)가 저지른 10개의 죄악(罪惡)을 나열하여 개진하였다. 선생이 그 상소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충신(忠臣)을 역신(逆臣)이라

▷명성황후 조난비.

 

하고 역신을 충신이라 하므로 충신과 역신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만 역신은 전하(殿下)의 역신일 뿐만 아니므로 천하의 사람들이 다 같이 죽여야 할 것입니다.’하고 또 ‘저 종수가 거침없이 악행(惡行)을 저지르자 국법(國法)을 시행할 겨를도 없이 대중이 먼저 분노하였습니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보다 앞서 국모(國母) 민비(閔妃)가 살해되고 지금 또 종수가 임금의 명을 마음대로 변경하였기 때문이다. 이해에 기송사(奇松沙) 공과 같이 호남(湖南)의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나 하늘이 돕지 않은 바람에 통분을 삼키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이때부터 유학(儒學)이 실추된 것을 더욱 더 통한한 나머지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정금(精金)처럼 연마하고 미옥(美玉)처럼 가다듬으면서 후학(後學)의 양성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하늘이 우리 유학을 도와 선생의 일신(一身)에 책임을 맡긴 것이 분명하다. 아! 어느 날 온 세상이 글을 폐기하여 성명(性命)이 있는지 조차 모른 채 화려한 것만 숭상하고 성인(聖人)을 경시하면서 말하기를 “지금의 조화는 일주야(一晝夜)에 천지를 한 바퀴 돌면서 천지(天地)의 근본을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별나라와 달나라를 두루 유람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기술이 가상하기는 하나 우리 학문에서 말하는 ‘가까운 사람이 멀다’고 한 것이라고 하겠다.

선생의 학문은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로부터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렀고 명명덕(明明德)으로부터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도달하였다. 그 배운 바가 간단하면서도 매우 정밀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먼곳에 까지 천지 사방에 도달하였으나 한 치도 착오된 바가 없었다. 온 세상이 모두 우리 유학을 모르고 서양의 학문에 치달리면서 신화(新化)로 일컫고 있으니, 인심의 빠진 바가 홍수(洪水)의 화보다도 더 심하였다. 오직 선생이 심력(心力)을 분발하여 음(陰)이 치성하여 폐색된 속에서 한 줄기 양맥(陽脈)을 부지하였으니, 그 공로가 군자(君子)의 도리가 잘 시행될 때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하겠다. 나라가 망하자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이 끊어질 뻔하였다. 선생의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간하기를 “식음을 거르지 않고 기체(氣體)를 봉양하여 역적들이 국법에 의해 처벌되고 원수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을 날을 보셨으면 하는 것이 불초(不肖)소자의 소원입니다.”고 하니, 선생이 정신을 수습하지 않고 매우 통한하며 말하기를 “차라리 죽고 말지, 저들과 한 하늘 밑에 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문하의 생도들이 통곡하며 고하기를 “은(殷) 나라의 삼인(三仁)을 공자(孔子)께서 찬미하면서 사생(死生)을 가지고 우열을 매기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의리를 지키면서 굴복하지 않은 것이 또한 죽은 것보다 더 낫지 않겠습니까? 또 이인(二仁)은 피살(被殺)되어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으나 절명(絶命)이 인(仁)이 되었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도량이 좁다고 생각됩니다. 또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개진하지 않고 이인(二仁)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더라면 후세의 학자들이 기자가 성인(聖人)이었다는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억지로 일어나 말하기를 “공자께서 지팡이로 늙은이를 두드리며 ‘늙어서 죽지 않으니, 적(賊)이다.’고 말씀하셨는데, 더구나 이러한 처지에서 죽지 않는다면 공자께서 반드시 수천 년까지 소연(昭然)한 가운데서 꾸짖을 것이다.”고 하였다. 내가 엎드려 감히 고하기를 “그것은 공자께서 늙은이가 공순(恭順)하지 않은 것을 책망한 것이니, 이 처지가 아닙니다. 무슨 견책(譴責)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맞지 않았다. 늙어서 죽지 않으면 불행이 많지, 무슨 다행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선생께서는 몸을 다시 보호하여 백세(百世)의 통한을 인내하신다면 실로 오래토록 우리 유학의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그만 쉬도록 하라. 내 다시 생각해 보건대, 삼천리(三千里) 강토에 한 치의 땅도 남지 않고 왜적(倭賊)에게 넘어가 버렸으니, 산다고 해도 어느 곳에서 살겠으며 죽는다고 해도 어느 곳에서 죽는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조금 미음을 마시고 실날 같은 목숨을 겨우 지탱하였다. 번번이 밥상을 대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탄식하기를 “지금 먹는 곡식은 지난해에 우리 임금님 땅에서 나온 것이므로 가슴에 체하지 않고 소화가 된다. 그러나 지금은 7월이므로 오래지 않아 그 곡식이 떨어질 것이다. 원수 나라의 땅에서 나온 곡식을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차마 먹을 수 있겠는가.”하고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옛날 곡식은 비록 한 톨이라도 주옥(珠玉)처럼 아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느 날 주서 이학상 공과 같이 심선시(心鮮詩)를 읊었는데, 그 대략에

雖經萬死糜身後   만 번 죽어 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奈此至仁浹髓深  지인이 뼈속 깊이 젖었는데 어찌하랴   

하였고, 끝 구절에는

彷徨長夜推常理  긴긴 밤에 방황하며 상리로 추측하니

朝日分明朝復臨  아침에는 분명히 태양이 다시 뜨리  

라고 하였다. 이어 지은 채미음(採薇吟)에

擧目山河異      눈 앞에 산하들은 옛날과 다른 데다

傷心人物非      인물까지 변하여 상심이 되었다네.

願從孤竹子      소망은 고죽군의 아들을 따라가서

薄採首岑薇      수양산 고사리나 캐면서 사는 거지.

라고 하였다. 이 몇 수의 시를 읽어보면 망국(亡國)의 통한 속에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천성에서 발로되었는데, 이중 절반은 선생의 마음속에 있었고 그 나머지는 시에서 드러났다.

▷춘추.

 

무오년(戊午年)에 고종(高宗)이 승하하자 제단(祭壇)을 쌓아 놓고 통곡하였는데, 아침에 흘린 눈물에 젖은 몇 자의 땅이 낮이 되도록 마르지 않았다. 뼈에 사무치는 통한을 참다가 폭발하여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왜 이 지경에 이르도록 동방을 도와주지 않았단 말인가? 5백 년 왕통(王統)의 실날같은 명맥이 대행왕(大行王)의 어좌(御座)에 겨우 붙어 있었는데, 갑자기 승하하니, 매우 통한스럽다.”고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기산(箕山)의 동쪽 송암산(松巖山) 속으로 들어가 살면서 창문 밖에다 ‘기영산수 미궐춘추(箕穎山水薇蕨春秋)’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붙였다. 혹시 어떤 사람이 왜정(倭政)에 대해 이야기하면 듣지 않고 눈과 정신을 오로지 경전(經傳)에 쏟으면서 통한을 삭히다가 ≪서경(書經)≫의 탕서(湯書)나 무성편(武成編)에 이르면 통한이 다시 발작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를 “이런 때에 탕왕(湯王)과 무왕(武王) 같은 성군(聖君)이 우리 창생(蒼生)을 구제해 주어 망국의 통한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다만 화초(花草)를 보고 절기를 가늠하다가 늦은 봄이 되면 문하생(門下生)들과 같이 바람을

▷서경(書經).

 

쏘이고 돌아와 예절을 익히고 의리를 강론하였다. 정원에다 국화와 대나무를 심어 놓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대나무에 마음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것과 같다. 외형이 곧고 강하기 때문에 속이 비었어도 티끌에 물들지 않고 눈서리에 굽히지 않는다. 티끌은 인간의 물욕과 같고 서리와 눈은 인간의 변란과 같으니, 사람이 변란에 굽히면 사람이 아니고 대나무가 상설에 굽히면 대나무가 아니다. 군자가 대나무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고 하였다.

임신년(壬申年)에 금성(錦城)의 인사들이 ‘애석하게 선생이 이곳에 계시지 않아 선비의 습관이 거칠어진다.’고 간곡하게 말하자, 산중에서 나와 금성산(錦城山) 아래 금곡리(琴谷里)에서 살았는데, 찾아와 배운 사람이 매우 많아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병자년(丙子年) 봄에 서재(書齋)의 건립에 착수하여 가을에 준공하고 송산정사(松山精舍)로 이름을 붙였다. 송산정사가 송정(松亭)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아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문하생 중에 우리 유림(儒林)의 대표가 될 만한 사람이 나왔다. 선생이 아들을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 시중드는 사이에 배우는 것뿐이었으나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여 우리 고을에 단아한 선비로 이름이 났다. 선생이 춘추(春秋) 팔순이 지났으나 정신이 더욱 더 영명하고 학문의 힘이 매우 깊었는데, 보통 하시는 말씀 속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뜻이 있었다. 제자들에게 경계하기를 “노년(老年)에 들어 고인(古人)의 마음을 엿보고 싶지만 미묘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마음과 힘이 모두 고갈되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그대들은 내가 늙어서 도달하지 못한 것을 경계로 삼는다면 거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때에 소자(小子)와 같이 문장을 논하였는데, 문장은 도(道)를 실은 그릇이니, 어떻게 문장의 장단(長短)을 가지고 마음속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소자들의 바탕이 노둔한 바람에 교화가 잘 되지 않아 선생의 학문에 접근한 사람이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신사년(辛巳年) 6월에 선생의 건강이 좋지 않아 20여 일이 되도록 제자들을 가르치지 못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미음과 약을 올렸으나 결국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7월 7일에 주위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운명이 다한 줄을 알고 있으니, 무슨 한이 있겠는가. 절대로 예절에 지나치게 장사를 치르지 말고 명정(銘旌)에 ‘소화일민 양성이군지구(小華逸民陽城李君之柩)’라고만 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들과 조카에게 말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한결같이 선영(先塋)을 받들고 집안을 다스리고 형제간에 우애한다면 조상에게 욕되지 않을 것이다.”하고 곧바로 시 한 수를 불러 주면서 쓰라고 하였는데, 그 시에

窮年萬物竟凋傷  한 해되면 만물이 시들어서 죽는데

枯木何能復向榮  고목이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으랴.

從古人生皆有死  예로부터 인생은 모두 다 죽었으니

樂夫天命任吾行  천명을 즐기면서 내 갈대로 가노라.

하고 조용히 안방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87세였다. 그 뒤 15일에 마제촌(馬蹄村) 앞 산 경좌(庚坐)에다 장례를 치렀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용현(金容晛)의 딸이자 호조 참판(戶曹參判) 김문하(金文河)의 증손(曾孫)이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승규(李承奎)이고 딸은 진주(晋州) 강천수(姜天秀)에게 시집갔다. 이승규는 나주 나씨(羅州羅氏) 나도윤(羅燾潤)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소포(嘯浦) 나덕명(羅德明)의 후손이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이희석(李熙錫)은 문화(文化) 유재봉(柳在鳳)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딸은 평택(平澤) 임한명(林漢明), 문화(文化) 유창희(柳昌羲)에게 시집갔다. 강천수는 1남 강대성(姜大星)을 두었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선생이 도산(陶山)의 수백 년 뒤에 태어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선현(先賢)의 마음을 계승하여 유학(儒學)을 강논하여 밝힘으로써 우리들이 ‘아침에 도(道)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된다는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후학을 계도(啓導)하는 공로가 이와 같았으니, 양(陽)이 다 없어진 이때에 우리 유학의 대들보가 될 만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20여 년이 되었으나 그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어 도(道)를 강론하였던 송산(松山)의 서재에 서 있으면 솔바람과 오동달이 선생의 해맑은 기상을 머금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엄숙한 제단(祭壇)에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낼 적에 선생의 영령이 좌우에 오르내리는 듯 하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생이 세상에 계실 때 심학(心學)의 효과가 유고(遺稿)에 소상하게 나타나 있어 비록 백세(百世)의 뒤라도 학자들이 마음속에 느끼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세상에 계실 때 덕(德)에 감화된 선행(善行)에 있어서는 그 당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기록하지 않으면 세상에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소자가 감히 외람됨을 잊고 개략적인 것만 기록하였으나 잊어버린 것이 많지나 않을까 두렵다. 선생의 고는 세상이 어수선하여 혹시라도 유실될까 염려한 끝에 판각(板刻)한 지 3년 만에 완간(完刊)되었는데, 이는 우리 선생의 뜻이 아니었다. 유고가 완간된 날 문하생들이 고한 글에 “글로 인해서 덕행을 수립하니, 우리 도학을 하나로 꿰뚫었습니다…….”고 하였다.

 

4. 性堂公家狀

不肖從孫遇益 嘗讀鄒經 至于聖省者也之訓辭 未能盡究 其性之所蘊 及其奉覽公之題堂然後 欽服公之性行 亦或無不善矣. 欽服之至 侍于宗黨之側 承聞公之遺訓 與作家法程 公卽天性耳. 謹按 公諱櫶 字景植 性堂 其自號 鄭氏本貫 羅州 厥始有諱該 軍監公 歷三世 文靖公雪齋先生 諱可臣倡明道學 名顯東邦 德溢中華 手撰金鏡錄一郡. 八本朝 有諱軾 重試中文科 陞兵曹判書 諡景武 四傳有諱 詳 號滄洲 文歷舒川等邑 陲至正郞 謝歸 設率眞會 講討經義 亦以獎進後學爲己任 寔公九世祖也. 高祖諱峎 孝行著世 曾祖諱 時喆 學行宜爲一家準則 祖諱 國泰 文學著世 爲當世推重 考諱 允浩 隱德不仕 妣 幸州奇氏 九皐處士 諱士鶴女. 生公于哲宗乙未十二月三十日本第 郞金鞍洞永安里也. 公凡四昆季 季則惟公 而伯仲皆以文學名世 但孝悌篤敬之誠 公惟最於伯仲矣. 人咸以謂羅州氏之家聲 惟公四昆季極備也云. 公性純篤孝友 植天事親以誠 友于愈篤 是宜家法中攸化 而嚴訓益篤然也. 自齠齔至于成童 以前過庭之學 在於餘力 故特無超凡之行 然而不外乎孝悌之道 所行盡是孝悌中攸發 而及於他爾. 甫弱冠 就學于門內文德習靜之門 探索微旨 微則益究其義 深則益硏其精 或有疑義 問不其一而輒解 然後乃止. 先生稱詡曰 凡其篤信好學 猶如此然後 庶可立脚實地 今其立門之徒 孰有其人 益受而益勉之 是皆勸獎之道也. 立門四五載 四書熟讀詳玩 至于三經 詩書讀盡而易則未周矣. 冠旣折著 雖不能就學 志則在焉爾. 家道克艱 一於讀而不耕 則所做不實 一於耕而不讀 供廚郞空處地 尤難耳. 不得已勤於耕食 當時人士 莫不歎惜 而愛莫助之 然公之心 以謂天性率由而行之 則是天然之學爾. 耕餘讀 行餘學 一念在玆 則前日所獲 期胡不忘孝友中度了 亦其非天賦之初程乎. 去大宅稍有間 晨夕不闕伯氏 或有闕供甘旨 則以時供之 備其預養之資 伯仲 亦皆稱羨 而極其誠孝 及遭艱 哀毁罔極 而一遵禮制 不離喪次三年 如一日 鄕黨欽服其行 前後喪亦如之 固非人人所及也. 服闋 益自勉强讀羲經 而玩詳卦爻 釋其程傳與本義 窺獲一理字 曰在天則理 在人則性 而性理之所賦也. 得於天而秉彛所同 然則那可造次忘置乎哉. 把作心上佩符 以性字題堂 公之率性 由眞可想像 於百世之下矣. 有詩稿一丹 遞爲六丁所收 但尺簡片櫝 藏在巾笥 惜乎以高宗戊子四月二十日卒子正寢 墓敦睦洞外袈峙西枕亥原 配昌寧曺氏 諱錫龍女 先公沒 墓與公同封. 有一男二女 男英會 配商山金氏 相繼女 二女 珍原朴景柱 慶州鄭河錫 遇達 英會 出娶平澤林氏麟鎬女 生義勉昌勉 義勉娶濟州梁氏 亨黙女 生光烈光南 昌勉 娶南原楊氏 碩順女 生光瑞 餘不錄. 嗚呼 公沒距今 七十有五載 惟公在世行治 不能盡傳 而獲聞先德者 其大槩也. 孝行也 學行也 謹愼也 可以爲鄕坊矜式者 多矣 而所以未能盡述其萬一 惶恐無地 竊伏念 從叔祖之英靈 庶其不昧明鑑 不肖之生 在於百年載之下則伏幸 而不肖亦知不敢矣. 生於半百載之下 半百載以上 先德之遺馨 安敢摠管之不遺乎. 叔祖之肖孫遇達之草記 與天下肖平日耳之而獲於心者 略草備誌 日後或有立言秉筆者 必裁擇焉.

4. 성당공 가장

불초한 종손 우익(愚益)이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성인(聖人)은 본성대로 한 것이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그 본성에 담긴 뜻을 다 연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공께서 지은 당호를 본 뒤에야 공께서 본성대로 행하셨음에 탄복하였고 전혀 불선함이 없었음을 알았다. 탄복하고 공경함에 마지않아 종당의 곁에서 모시고 공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받들어 집안의 가르침이 되었으니 공께서는 본성대로 하신 것이시다.

삼가 생각하건대, 공의 휘는 헌(櫶)이요 자는 경식(景植)이며 성당(性堂)은 자호이다. 정씨의 본관은 나주이고 그 시조의 휘는 해(諧)이며 군기감(軍器監)이다. 삼대 뒤에 문정공(文靖公) 설재선생(雪齋先生)이 있었으니, 휘는 가신(可臣)으로 도학을 세상에 드러내 밝혀 명성이 우리 나라에 드러났었다. 덕은 중화(中華)에까지 알려졌고, 금경록(金鏡錄) 한 부를 편찬하셨다. 본조에 들어서는 휘는 식(軾)으로 과거를 보아 두 번이나 문과에 합격하셔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셨으니, 시호는 경무(景武)이시다. 4대 뒤에 휘는 상(詳)이요, 호는 창주(滄洲)로 문관으로 서천(舒川) 등의 읍을 다스리셨다. 품계는 정랑에까지 이르셨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솔진회(率眞會)를 만들어 경문의 뜻을 강론하셨으니 이 또한 후학들을 권면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은 것이었으니 실로 공의 9대 할아버지시다.

고조의 휘는 곤(峎)이니 효행으로 세상에 드러났었다. 증조의 휘는 시철(時喆)로 학행이 집안의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조부의 휘는 국태(國泰)로 문학으로 세상에 드러나 그 시대에 높이고 중요하게 여겼다. 고(考)의 휘는 윤호(允浩)이니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 행주 기씨(奇氏)는 구고(九皐) 처사 휘 사학(士鶴)의 여식으로 공을 철종(哲宗) 을미 12월 30일 금안동(金鞍洞) 영안리(永安里) 집에서 낳으셨다. 공에게는 네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오직 공을 따랐으며 동생들은 모두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사이에 공경하여 경을 돈독하게 한 정성스러움이 공이 동생들보다 훌륭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주 정씨의 명성을 칭찬하였는데, 공의 네 아우에게는 그러한 점이 더욱 갖추어져 있었다. 공의 성품은 순후하고 돈독하며 천성적으로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더욱 독실하게 우애하였다. 이 점이 바로 가법이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엄격한 가르침이 더욱 돈독하게 된 이유였다. 일곱 여덟살 때로부터 큰 아이가 될 때까지 가정에서 배워 학문에 힘을 쏟았다. 그러므로 평범한 데에서 벗어난 행동이 있었으나 효제(孝悌)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행한 일들은 효제의 입장에서 드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겨우 스무살에 문중의 뛰어난 어르신인 습정(習靜)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배워 경문의 은미한 뜻을 찾았으며 의미의 깊이를 더욱 연구하여 그 정밀함을 더하였다. 간혹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묻는 것이 그 한 가지가 아니어서 다 풀린 뒤에야 그만 두었다. 선생께서는 후(詡)를 일컬어, “진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은 뒤에야 거의 제대로 입각할 수 있으리니 이제 그 문하의 사람 중에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하고 더욱 그를 아끼고 권면하셨다. 이는 모두 학인들을 권장하는 도리였다. 문하에 들어간 지 사 오년 만에 사서를 익숙하게 읽고 상세하게 음미하였고 삼경(三經)에 대해서는 시서(詩書)는 다 읽었고 주역은 아직 다 읽지 못한 상태였다. 관직에 들어가지도 대학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나 마음은 늘 그 곳에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독서만을 한결같이 하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공부가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농사만을 한결같이 짓고 독서를 하지 않는다면 땅을 놀리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농사일을 부지런하게 하자 당시의 선비들이 모두 감탄에 마지않아 아끼는 마음에 도와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공의 마음은 말하자면, ‘천성을 따라서 행한 것’이니 이는 타고난 학문이었다.

농사를 짓고 난 여가에 독서를 하고 행동을 돈독하게 난 연후에 학문을 하여 한결같이 여기에 마음을 두었다. 전일에 배웠던 것을 잊지 않기를 기약하였으니, 효우(孝友) 가운데 있는 것이었다. 또한 아마 하늘에서 타고난 품성이 아니었겠는가.

큰 집을 떠나 잠깐 틈이 있을 때에 아침, 저녁으로 백씨에 대한 문안을 빠뜨리지 않았고 간혹 맛있는 음식을 드리지 못하면 수시로 해 드렸으니, 그 준비하여 봉양하는 대비를 형제들도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성실하고 효성스러움을 지극히 하였다. 상을 당함에 슬퍼하고 상심함이 끝이 없었다. 한결같이 예절에 맞는 도리를 따라 삼년 동안 무덤 곁을 떠나지 않기를 하루처럼 하니 마을에서 그의 행적을 경외하였다. 상을 끝낸 전후로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진실로 다른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을 마치고 난 후 더욱 스스로 주역(周易)을 익혀 괘효를 완미하고 그 속에서 정전(程傳), 주자본의(朱子本義)를 해석하였다. 그 중에 ‘리(理)’의 의미를 파악하여, ‘천도의 입장에서는 이치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성이니, 성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천도에서 부여받아 같이 되었다. 어찌 잠깐이라도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겠는가.’하셨다. 마음속에 잡아 성(性)자를 부절처럼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당호로 삼으셨다. 공께서 본성을 따라 행하신 것을 참으로 백세의 뒤라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고(詩稿)한 책(冊)은 육정(六丁)이 수습하였고 다만 편지는 건사(巾笥)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 애석하도다. 고종(高宗) 무자(戊子) 4월 24일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돈목동(敦睦洞) 외가치(外袈峙) 서침(西枕) 해원(亥原)에 묻히셨다. 배(配:아내)는 창령(昌寧) 조씨이니 휘 석룡(碩龍)의 딸이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셔서 공과 함께 봉분하였다. 자식은 1남 2녀를 두셨다. 아들은 영회(英會), 그의 배(配)는 상산 김씨로 상계(相繼)의 딸이다. 두 딸은 진원 박경주(朴景柱), 경주 정하석(鄭河錫)에게 시집을 갔다.

우달(遇達)은 영회(英會)가 평택 임씨 인호(麟鎬)의 딸에게 장가들어 낳았고 우달은 의면과 창면을 낳았다. 의면은 제주 양씨 형묵(亨黙)의 딸에게 장가들어 광열과 광남을 낳았다. 창면(昌勉)은 남원 양씨 석순의 딸에게 장가들어 광서를 낳았다. 그 외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75년이 지났으나 공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행하신 것을 다 전하여지지 않았고, 훌륭하신 덕을 얼핏 들은 것이 있다. 그 대강은 효행, 학행, 근신(謹愼)으로 고을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그 만분의 일도 다 기록하지 못하니 차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삼가 생각하건대, 종죽조의 영령(英靈)은 아마도 하늘에서 보고 계실 것이니, 불초한 내가 백년의 뒤에 태어나서, 나 같은 불초함으로 감히 글을 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오십 년 뒤에 태어나서 오십 년 앞 선현의 훌륭한 덕을 어찌 감히 빠뜨리지 않고 담아낼 수 있겠는가.

숙조의 장손인 우달(遇達)이 초록한 것과 평소에 내가 들어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을 대강 써서 기록을 하나니, 뒷날 행여 입언(立言)하여 붓을 잡는 분이 있다면 가려서 실어주기를 바란다.

 

5. 松圃公行狀

余在童蒙 執灑掃於軒屛 承聞簡諒. 而提撕特蒙 異於凡他孩童. 余亦事之以先生 請隸詞章 而稍支其文程糟粕矣. 至于今 篤敬志學 亦皆解夢善導之力也. 歿後 未嘗稱叔 而以先生稱者 族誼非不重矣. 然師道益重故也. 謹按 先生諱 珍會 初諱辰會表德南圭 松圃 其號也. 貫羅州爲姓 而始於高麗軍器監. 公歷三世而文靖公雪齋先生 倡明道學 寔爲東邦儒宗. 嘗撰金鏡錄一部. 五世有諱 軾 中試中文科 兵曹判書 諡景武. 四世有諱詳. 號滄洲 文正郞 諱. 如龜 參奉. 諱 瀯 漢城庶尹. 諱寅佑 號別有堂 儒行特著 鄕黨欽服. 諱 璉 號會龍齊 寔先生七世以工也. 曾祖 諱 國燦 祖諱. 時浩 號忍和堂 俱不仕隱德 考諱 柈 性況潛寡黙 不事工車 以訓姪子爲己任. 妣耽津崔氏 考諱 洛靈 高宗戊寅七月二十四日 生先生于金鞍洞永安里第. 性純然自備 簡而不煩. 年甫六歲七歲言 可以黙 則黙寡則寡 鄕黨父老在座 而問則對 不問則緘金. 危坐小學節次 文雖不解 應待進退之節 錙銖不差. 鄕老稱詡曰 古人傳言敎子難 人人是生子如此 則何難之有. 咸以遠大 期之. 翌年 延師說塾 初授解蒙編 字音倂素 敎導不煩 而一則輒解. 入小學 亦如之. 讀至有嘉言善行 特節異行 則質問再三而反覆詳解 不幾年 稍知爲學之方. 家學于忍和堂 忍和乃祖考也. 學大學書問首編 疊書明明字 其下有德 字上明字 是何義 下明宇 是何義 德之本體旣明 則一明字近義 而以何疊書乎. 忍和堂公曰 下明字 本體之明 上明字 益其明之義也. 此大學書 曾夫子傳道統之文 汝當潛心玩索. 是皆成童以前 年將十五 詳審玩旨 索得經義. 其所得 人不及知幾何 惟忍和堂知之 特加嚴訓曰 世世文獻 及于汝曺 庶幾有不墜寄兆朕 忍和堂 遞爾下世 家道漸艱 一於漁樵 共於養親之道 非疏節也. 夜歸而讀 奈朝益何. 廢一於難 廢耕食而供甘旨 孝子之大節也. 昏必定 晨必省 志體俱養 四十年 承順無違 處兄弟友于愈篤 一家之政 若治朝焉 奄遭內艱 克盡禮制 哀益有餘. 未幾. 屋社變北望痛哭幾絶未絶 親老在而然也. 溫淸之暇 訓姪子敎之 以孝悌之方 余童蒙時. 特蒙嘉惠. 卽其時也. 嚴庭以老患 一周年 委在床褥 湯劑及調攝凡百. 親任之 尿糞與褻衣 手自浣滌 一不委諸家人. 遭艱哭誦. 攀號痛不勝 罔極而哀毁愈 制猶賢乎 禮有餘也. 葬虞一遵家禮. 旣葬. 日三厥靈筵之側. 雖寒暑省掃不懈 皇皇如不及. 服闋 寓懷林泉 以時吟哦 與知己. 吐情記懷. 亦以獎進後人. 終老於林泉 嘗質疑於松山門 講論時義語言 合乎正經者有之. 先師尤庸稱歎 有託後之信任. 以故 先師遺稿就刊 或無錯簡誤字 以是也歟. 壬辰二月十三日卒. 于正寢. 享年七十五 葬于永安案山功德峙枕未原. 配光山金氏 考諱 鼎鉉 癸酉六月十九日卒 墓永安後東山下午坐原 擧二男一女 長遇瓘 娶慶州李氏 殷雨女 無育 以從子潤勉 立后. 遇璘 娶驢陽陳氏 邦夏女 生二男三女 長潤勉 出后伯父. 濟勉幼女 邊羅州羅相殷 濟州梁重錫 黃州邊錫淵 餘幼不錄號. 嗚呼 天生蒸民 必授其職 以若先生之資品 不授學問之爲職 兼以耕讀 授職克未能接家世文獻之一統難諶者. 天地. 凡其學問用工惟一. 然後 可以立脚實地. 今先生之貳職 亦皆止善. 天必授職. 何其重也 其肖胤遇璘草其家狀一通 泣請曰. 知吾先君 莫吾茶泉若也 辭不獲 畧記家狀所草 及吾所見聞之萬一以 竢日後立言君子 滋筆也云.

5. 송포공행장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선생에게 쇄소(灑掃) 응대(應待)하는 절도를 배울 적에 받들어 들은 것이 대범하고 진실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가르침과 달리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다. 나도 선생님으로 모시고 문장 짓는 배움을 청하여 점차로 문장의 깊이를 대충 터득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경을 독실하게 하고 학문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 잘 인도해 주신 선생님의 힘이라고 할 만하다. 돌아가신 후에도 한 번도 삼촌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은 족질(族姪)의 의리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선생님으로서 도리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는 진회(珍會)요, 초기의 휘는 진회(辰會), 표덕(表德), 남규(南圭) 였고, 송포(松圃)는 호이다. 관향은 나주로 고려 군기감공이 시조이다. 삼대를 지난 뒤에 문정공(文靖公) 설재선생(雪齋先生)께서는 도학을 창명(彰明)하셨으니, 진실로 우리나라 유가의 종주로 일찍이 금경록(金鏡錄)를 편찬하셨다. 오대의 휘는 식(軾)이니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였다.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그 사대 뒤에 휘는 상(詳), 호는 창주(滄洲)였고 문과를 거쳐 정랑을 지내셨다. 휘 여귀(如龜)는 참봉(參奉)을 지냈다. 휘 영(瀯)께서는 한성서윤(漢城庶尹)을 지냈다. 휘 인우(寅佑)이고 호 별유당(別有堂)께서는 선비다운 행동으로 특별히 세상에 드러나서 향당에서 경외(敬畏)하였다. 휘는 연(璉), 호는 회룡재(會龍齋)이셨으니 이 분들은 선생의 칠대 선조들이시다.

증조의 휘는 국찬(國燦)이요, 조의 휘는 시호(時浩)로 호는 인화당(忍和堂)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고 덕을 숨겼다. 공의 휘는 반(柈)으로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寡默)하여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조카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어머니는 탐진 최씨이며 고(考)의 휘 낙령(洛靈)의 따님으로 공을 고종(高宗) 무인(戊寅) 7월 20일 금안동 영안리 집에서 낳으셨다. 성품이 순수하게 스스로 갖추어져 대범하면서도 번거롭게 많지 않았다. 여섯 일곱 살에 말을 할 줄 알았지만 조용히 해야 할 때는 조용히 하고 말을 적게 해야 할 때는 적게 하였다. 마을의 어르신들이 자리에 앉아서 물으시면 대답하고 묻지 않으시면 쇠나 돌처럼 입을 굳건히 다물고 계셨다.

엄숙한 자세로 앉아 소학(小學)을 배울 때에, 문장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응대하고 진퇴하는 절도가 똑바르게 되어 조금도 어긋나지 않으니 마을의 어른들이 후(詡)를 일컬어, “옛 사람들이, ‘자식을 가르치는 어렵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이런 자식을 낳는다면 가르치는 게 뭐 어렵겠는가.”하였다. 모두 크게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다음 해에 스승을 맞이하여 사숙(私塾)을 만들어서 처음으로 동몽편 풀이를 배웠는데, 글자나 음을 모두 찾을 줄 알았다. 가르치기가 수월하여 한 번이면 되었고, 소학(小學)에 들어가서 배우는 것도 이와 같았다. 가언(嘉言)․선행(善行)의 내용인 특별한 절행을 읽을 때에는 질문을 두 세 번 한 뒤에 반복하여 자세히 풀이하였다. 일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점차로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인화당은 가학(家學)을 잇는 곳이었다. 인화(忍和)는 곧 할아버지의 호(號)였다.

대학을 배우면서 1편에 의문점이 있어, ‘명명(明明)’이란 자를 여러 번 써서 덕(德)자 위에 명(明)자는 무슨 뜻이며 아래에 있는 명(明)자는 이게 무슨 뜻인가 하였다. 덕의 본체를 밝힌다면 하나의 명(明)자의 의미에 닿는다면 무엇 때문에 거듭해서 쓸 필요가 있겠는가. 인화당공이, “아래의 명자는 본체의 명이고 위에 있는 명자는 그 밝음을 더욱 밝힌다는 의미이니, 이것이 대학의 내용 중, 증부자(曾夫子)께서 전하신 도통(道通)의 문장(文章)이니, 너는 이 문장을 마음에 담고 뜻을 탐구하여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모두 큰 아이가 되기 이전의 일이다.

나이 열 다섯 즈음에, 완미(完美)한 뜻을 상세하게 보고 경전의 의미를 탐색하니 그 얻은 경지는 사람으로서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는가. 오직 인화당(忍和堂)만이 알고 계실 뿐이다. 특별히 엄훈(嚴訓)을 더하여, “대대로 훌륭한 가학이 너희들에 이르러 거의 추락하지 않을 기미가 있구나.” 하시고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나셨다. 집안의 도가 점점 어려워져 한동안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면서도 그 어버이 섬기는 도리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밤에 돌아와서 책을 읽다가 다음날 아침 더욱 부모님께 잘하였으니 어떠하겠는가. 어려움 속에서도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드렸으니 효자의 큰 도리였다.

어두워지면 부모님의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새벽이면 문안을 드려 마음과 몸을 다 공양하여 사십년 동안 부모님의 뜻을 순종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형제 사이에 우애함도 더욱 돈독하게 하여 한 집안의 다스림을 마치 조정에서 하듯 하였다. 갑작스레 어머니의 상을 만나 예절에 맞는 법도를 극진히 하였고, 슬픔을 감당하지 못함이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집에 사당을 짓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연로하셨지만 생존해 계셨던 때문이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는 가르침을 조카들에게 효제(孝悌)하는 방법으로 가르치셨다.

내가 어렸을 때에 특별히 많은 은혜를 입은 때가 바로 그 시절이었다. 아버지께서 노환으로 일년 정도 침상에 누워 계시자, 탕제(湯劑)를 달여 드리고 간호하는 모든 일을 하였고 심지어 아버지의 오줌과 변을 받아내는 일까지 하였다. 더러워진 옷도 손수 빨아 집안의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발을 굴러 통곡하고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여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법도대로 하여 예(禮)를 충분히 지킴이 있었으니 오히려 현명하지 아니한가.

장례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고 상을 지낸 뒤에도 하루에 세 번씩 묘를 찾아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묘를 살피고 봉분(封墳)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경스러움을 미치지 못할 듯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 산수에 은거하여 수시로 자신의 심정을 시로 표현하고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와 생각을 표현하여 기록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것도 역시 뒷사람들을 권면(勸勉)하여 진보시키는 것이었다. 임천(林泉)에서 노년을 보내며 일찍이 송산 문하에서 질정하며 강론할 때에 정경(正經)에 합당한 점이 있으면 선생님께서 더욱 칭찬해 주셨고 훗날을 기대하는 점이 있으셨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원고를 간행하였는데 간혹 착간(錯簡)이나 오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임진(壬辰) 2월 13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享年) 75세셨다. 영안(永安) 안산 (案山) 공덕치(功德峙) 침미원(枕未原)에 장례를 지냈다. 배(配)는 김씨이니 정현(鼎鉉)의 따님이다. 계유년 6월 19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영안 뒷 동산 아래 오좌원에 있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우관(遇瓘)은 경주 이씨 은우(殷雨)의 여식에게 장가들었다. 자식이 없어 조카 윤면(潤勉)을 후계자로 삼았다. 둘째 우린(遇璘)은 여양(驢陽) 진씨(陳氏) 방하(邦夏)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첫째 윤면(潤勉)은 형의 양자로 갔고, 세 딸은 나주 나상은(羅相殷), 제주 양중석(梁重錫), 황주 변석연(邊錫淵)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너무 어려 기록하지 않았다.

아, 하늘이 이 백성을 낳음에 반드시 그 역할을 주었으니 만약 선생의 자품이 학문의 직분을 받지 않고 아울러 농사짓고 독서하는 직분을 받지 않았다면 집안에 전해오는 문헌의 맥을 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천명이다. 그가 학문함이 한결같은 뒤에야 실질적인 지위를 세울 수 있었다. 이제 선생께서 두 가지 직분을 담당한 것도 모두 지극한 선이었으니, 하늘에서 직분을 받은 것이 어찌 그리도 중하였는가. 첫째 아들 우린(遇璘)이 가장(家狀) 한 편을 정리하여 가지고 와서 울면서 청하기를, “우리 선친(先親)을 아는 분이 당신만한 분이 없습니다.” 하니 차마 사양하지 못하여 초록된 가장과 내가 들었던 일부분을 대략 기록하여 뒷날 입언(立言)할 군자를 기다리며 이 내용을 쓴다.

 

6. 梅軒鄭公行狀

公諱永會. 字行之 梅軒 其自號也. 鄭氏 本貫 羅州始譜之祖 軍器監公 諧 三傳而有諱 可臣 號雪齋 在麗系 倡明道學 斥邪衛正 陪世子人中國 帝賜座 問本國風土. 對曰 東邦 雖在海隅 檀箕日月 尙今昭昭 風土惟厚. 又以大學論孟之道 昭釋明辯 帝待之隆崇. 及還 賜金鞍金帶. 嘗著千秋金鏡錄 八本朝 有諱 軾 號 永慕亭 重試中文 科陲兵曹判書 嘗扈駕溫泉行宮 失大 負玉袞而出. 上命肖模眞 像諡景武 生諱承賢 監察 是生諱觀 覲覩覵靚 凡五昆季 長直長雪 昆居于鞍洞 次參奉允爲公之鼻祖 五傳而有諱克信 孝除參奉 陲資通政大夫 曰諱鑌 文章鳴世 累中鄕解 曰諱鳳三 學問著世 律身有法度 以之獎進後學 遠邇就學甚衆. 曰諱 思周 贈通政大夫 司僕寺正. 曰諱 玹 贈通政院左承旨 寔公曾祖也. 祖諱 城壽 資通政大夫. 考諱 鎭畿 通德郞 配益源女 利川徐氏 生公於羅州治鳳洞里第 哲宗乙卯六月四日也. 公 稟氣卓犖 天然之性有得. 而其所得 不昧 雖在齠齔 以之於父母則孝. 以之於兄弟則悌 以之於鄕黨則篤敬 是 皆天性之發也 不待勉强爲也. 及出就外傳 灑掃應待之節敎訓 未及而一切中規 塾師訓導之方 比諸他兒 力未半而功效益著 塾師稱此兒 非凡常兒之所及也. 小學凡節 自然心得 而天然行之 是率性而無僞矣. 苟不失本性而然 然爲. 則來頭必也儒可以期待 賢可以期希 而在於天性 失不失 如何耳. 以故 字冠以天然行之 作心符以行之爲宇 及長 家道克艱 未克遠邇 就學所學. 但庭詩庭禮 詩與禮 是皆古昔聖人 天性由發而著於文 則以天性之本然. 學其天性所發之文矣 那可以有彼我之間乎哉. 孝悌 宜天職爾 行餘所幹 不讀則耕 不耕則讀. 而公凡四昆季 惟季也. 故雙親供奉之職 伯氏雖責 養志與定省 與伯仲毫無次第. 苟有親劑 則侍湯凡百 少不懈與 伯仲共之. 及遭艱 罔極之痛 前後一如 而喪虞葬禫之制 一遵伯仲. 而不愈禮 是可謂哀過不傷 孝也. 服闋 未幾 國步漸艱 遽有東擾時 靑馬也大則陷其郡邑 小則塗炭閭巷. 民幾魚矣. 不惟是己誦呪 而家諭惑誣 以侍天主 以爲愚氓 嘯聚之目 禍甚於洪水猛獸. 而獨錦城砥柱屹立 是閔招討 與鄭將軍之力也. 時公與林公炳翰 募民兵直入城 而贊助討匪 公之力靡不多矣討. 平後 匪徒餘類 陰謨類聚 禍及公家. 姑未及 而謨洩. 公直召正責曰. 上天 亦其無昭昭之鑑乎 日星照臨 鬼神黙佑. 而匪類 安敢作孼. 匪徒畏服 更不敢陰作蠢動 自後 彼亦安堵公家 庸遵家法 以訓姪子曰 吾家雖不及爲大家名族 孝悌家法 宜不後人. 而至于今 泯泯不振 當以老父爲戒 遵守先訓 是汝之重責 晩以梅軒爲號 吟哦於泉聲嶽色之間 逍遙度了. 壬申十月十二日卒 于正寢 壽七十八 葬于星山南麓枕子原 配光山金氏 龜鉉女 繼配海州吳氏 時天女 男長遇鶴 生昌勉 次遇政 生淸勉 次遇都 生德勉正勉淇勉公勉. 二女羅州林律圭 豊山洪華植 曾玄不錄. 嗚呼 公純篤之資 孝友根天 以之鄕黨 則其行也篤敬故 鄕里服其行 以之於討匪 則吏民賴之. 故匪類畏 服苟或以之立朝 則亂臣賊子 未嘗有開門納賊再亂之日 而上天 胡不黙佑 使公之才之德 嗇於命數也欺. 終老於東崗 惜乎 更思之於公幸耳. 厥先靑氈典型 如今降世 一絲不差. 以爲永世遵式之規程 吁可尙矣乎. 治朝亦其非齊家然後事也歟. 其族弟南會氏. 略草其狀文. 要余曰. 惟公行治 相知莫若 則願檃枯之 不至泯泯之地 懇懇言到 故惇誼惟厚 不敢固辭 忘僭略爲之剛潤 日後立言君子之筆 引領而竢之.

6. 매헌정공행장

공의 휘는 영회(永會)요, 자는 행지(行之)이며 매헌(梅軒)은 그의 자호이다. 정씨의 본관은 나주이며, 족보에 기록된 시조는 군기감공 해(諧)이다. 삼대 째에 휘는 가신(可臣), 호는 설재(雪齋)로 고려 말에 태어나 도학을 창명하여 그릇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보호하였다. 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들어갔을 때, 황제가 자리를 같이하여 우리나라의 풍토를 물으니,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바닷가 한쪽에 위치하지만 단군과 기자께서 남기신 은덕이 해와 달처럼 오늘날까지 빛나 풍토가 후덕합니다.” 라고 하고 또한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도리로 분명하고 조리 있게 해석하니, 황제의 대접이 융숭하였다. 돌아올 때에 금안과 금대를 하사하셨다. 일찍이 금경록(金鏡錄)에 길이 전해진다.

본조에 들어서는 휘는 식(軾), 호는 영모정은 문과에 두 번이나 합격하셨다. 병조 판서를 지냈는데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온천 행궁(行宮)에 갔을 때에, 불이 나자 왕을 모시고 나오자 상이 초상화 하나를 내리도록 명하셨다. 시호는 경무(景武)이고 휘 승현(承賢)을 낳았고 감찰을 지냈으며 이 분은 휘 관(觀),근(覲),도(覩), 간(覵),정(靚)를 낳았다. 모두 다섯 형제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직장으로 안동에 살았다. 차남은 참봉으로 진실로 공의 비조(鼻祖)가 된다. 오대 뒤에 휘 극신(克信)이 있으시니, 효도로 참봉(參奉)을 제수(除授) 받았으며 품계(品階)는 통정대부에까지 이르셨다. 휘 빈(鑌)께서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휘 봉삼(鳳三)께서는 학문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몸을 다루는 데 법도가 있었다. 후학을 권면하여 길렀으므로 원근의 제자들이 와서 배우는 이가 매우 많았다.

휘는 사주(思周)께서는 통정대부 사복시(司僕寺) 정에 증직되었다.  휘 현(玹)께서는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曾祖)이시다. 조(祖)의 휘는 성수(城壽)니 통정대부를 품자받았다. 고(考)의 휘 진기(鎭畿)께서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셨다. 배(配)는 익원의 딸로 이천 서씨로 공을 나주 봉동리의 집에서 철종(哲宗) 을묘 6월 4일에 낳으셨다.

공의 기질이 뛰어나 타고난 성품을 얻었고 그 터득한 바도 어둡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한 기질을 가지고 부모에게는 효도를 형제에게는 우애를 다하였고 마을에 있어서는 돈독하고 공경스럽게 하였다. 이것은 모두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억지로 힘써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집 밖에서 따로 선생님을 모시고 쇄소(灑掃)․응대(應待)의 절도를 익힘에 이르러서는 공부에 도달하지 못할 듯이 하여 모든 것이 선생님께서 가르치고 이끄는 방향에 들어맞았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힘은 반도 들이지 않았는데 공효는 더욱 컸었다. 서당 선생님께서, “이 아이는 보통아이와는 다르다.”고 하셨다. 소학(小學)의 범절을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터득하여 타고난 듯이 행하였다. 이는 바로 성품을 잘 다스려서 거짓이 없었던 것이다. 진실로 본성을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하였고 그렇다면 앞으로 반드시 선비로서 기대할 수 있고, 현명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천성을 잃느냐 잃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관례를 한 뒤 자(字)도 행지(行之)라 하고 마음속에 부적처럼 자(字)에 맞도록 행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매우 어려워 주변에 스승을 찾아가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고 다만 아버지에게 시와 예를 배웠지만 시와 예는 모두 과거의 성인들께서 천성으로 말미암아 문을 드러낸 것이므로 본연적인 천성으로 그 천성을 드러낸 문을 배운 것이니 어찌 사물과 나 사이에 틈이 있었겠는가.

효제는 천직(天職)일 뿐이다. 효제를 행하고 남은 시간에 독서를 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독서를 하였으니 공의 네 동생들이 모두 효성스러웠다. 그리고 어버이를 모시는 직분을 잘하였다. 비록 장남이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책임을 맡았지만 장남과 그 동생들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부모님께 약을 달여 들일 때도 곁에서 모든 일을 시중들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공양하였다.

상을 당함에 너무나 슬퍼하며 시종 한결같이 상을 지냈고 장사와 삼우제(三虞祭) 기제사(忌祭祀)를 행하는 데 있어서도 형제들이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바로 슬퍼하기는 하지만 신심을 상하지는 않은 제대로 된 효도이다. 상(喪)을 지낸 뒤에 나라의 운세는 점차 어려워져 마침내 동쪽에 소란이 있을 때에 비적(匪賊)들이 크게는 그 군읍이 도탄에 빠지고 작게는 마을이 도탄에 빠져서 백성들이 갈 길을 잃어 축문(祝文)을 외울 뿐만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도리가 점점 어지러워져 천주(天主)를 모시는 것을 우매한 백성들을 끌어 모으는 명목으로 삼았으니, 홍수나 사나운 짐승보다 더 문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금성(錦城)만은 견고한 지주처럼 우뚝하였다. 이는 문벌에서 토벌을 도와주는 것과 정(鄭)장군의 힘이었다. 이 때에 공과 임병한(林炳翰)이 민병을 모집하여 곧바로 성에 들어가서 적을 토벌하기에 힘을 쏟았으니 공이 도와줌이 많았다.

난을 평정한 후에 남은 무리들이 음모를 꾸며서 무리지어 모여 재앙이 공의 집에 미치려 하였으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계획이 누설되었다. 공이 불러서 꾸짖기를, “떳떳한 하늘이 보고 있지 않는가. 해와 별이 임하고 귀신이 묵묵하게 보우(保佑)하거늘 비적(匪賊)들이 어찌 재앙을 일으킨단 말인가.” 하니 비적들이 감탄하여 복종하였다. 다시는 감히 음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로 저들도 편안해졌다. 공의 집에서는 떳떳한 가법을 따라 조카들을 훈계하기를, “우리 집안이 비록 대가의 훌륭한 족속이 되지는 못하나 효제의 가법이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이 법도를 제대로 떨치지 못하니 마땅히 어른들께서 말씀하신 것을 경계삼아 선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너희들의 중요한 책무이다.”하셨다. 만년에 매헌(梅軒)으로 호를 삼으시고, 시냇물 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산빛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 일로 소요하며 사셨다. 임신년 10월 12일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셨다. 성산 남쪽 기슭 자원에 장사를 지냈다. 배(配)는 광산 김씨이니 귀현(龜鉉)의 따님이다. 후처인 해주 오씨로 시천(時天)의 따님이다. 장남 우학(遇鶴)은 창면(昌勉)을 낳았고, 둘째 우정(遇政)은 청면(淸勉)을 낳았고, 셋째 우도(遇都)는 덕면(德勉), 정면(正勉), 기면(淇勉), 공면(公勉)을 낳았다. 두 딸은 나주 임율규(林律圭), 풍산 홍화식(洪華植)에게 시집을 갔는데 증손과 현손은 굳이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순수하고 돈독한 자질과 효우(孝友)가 천성에 근본하여 그것을 향당에 쓰면 행동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웠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그 행동에 탄복하였다. 그러한 마음을 비적(匪賊)을 토벌하는 데 써서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 가령 조정에 섰더라면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일찍이 문을 열어 적을 끌어들여 어지럽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늘이여 어찌 공과 같은 재능과 덕을 가지고서도 운명을 저렇게 제한하셨단 말인가.

동쪽 언덕에서 노년을 보내셨으니 안타깝도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공을 위해서 다행인 점도 있으니, 그 선조께서 남기신 전형이 한 세대가 지나도록 한 가닥도 어긋나지 않으니 길이 따를 수 있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 숭고하시도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도 제가(齊家)한 뒤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족제인 남회씨(南會氏)가 그 가장의 내용을 대충 적어 나에게 찾아 와서, “공의 행적을 아는 것이 선생님만한 분이 없습니다. 한 번 교열을 봐 주셔서 책으로 만들어 없어지지 않도록 하게 해 주십시오.” 하니 간곡히 말하고 진실한 의리가 후덕하였기 때문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외람됨을 잊고 대충 기록하여 책을 만드니 뒤에 입언(立言)한 군자의 가필을 입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할 뿐이다.

 

7. 悔窩林公行狀

竊惟. 林貫羅州 寔南省名閥 簪祖聯世 文獻趾美 祿勳賞爵 居羅爲最. 而會津與回龍 是也 至于今 家法淳厚 式遵先世舊典 不惟是吾鄕善俗 都在一家 宜可謂嚮風新進之所效則者 多矣. 觀於此可知 其不後於省納古班之列耳. 謹安 公諱 衡黙 字權仲 悔窩號也. 祖諱庇 麗朝統理軍事 爲大將軍. 有諱卓宿 知麗朝不于常 而際我 聖朝踐怍之日 棄官歸來 遯靖自守義重罔僕. 諱有巢 花山都正. 諱尙杞 自號石峰 逸執義. 諱峻 號楓湖 進士遊學于金先生佔畢之門 官止縣監. 諱崇碩 令正. 諱世番 號晦窩 登可馬 已而遞禍 晦跡林泉. 諱柏 號湖隱 文正字 壬亂倡義 奇功多出於妙畵中. 諱守春 號澹澹齊 心學湥邃 薦授參奉 竟不就 後 贈禮判. 諱俊弘 號逃庵 就學于門內百花亭門 心得家學之正. 諱愃 終老隱德 仕不苟求. 諱 儀達 特立武班 義勇可衛 寔公八世以上也. 高祖諱再茂 號敬菴 以孝義著. 曾祖諱得鎭. 祖諱祉漢 以李有鄕薦 贈參議. 考諱 啓相 左郞. 妣 令人寶城宣氏 考龍周 儀範貞淑 有古女士風 以純廟政月一日 生公于老安坊回用里第. 自齠齔 卓犖之氣 與凡兒有分. 甫學語不經之言 一不出口言 出則黙念 心思若而言寡由中 凡百行止 儼若成童 佐郞公 甚鍾受之 年終古人人學之年 出就外傳 小學灑掃等節 不煩課篤. 而文義一聞輒解一見輒悟 苟得於心. 則必欲躬行之者索 或無一點錯誤. 故所學之效 輒於影響 知共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 是終竟修己之正路也. 粵五六載 就于堂內大德晩悟公之門 心受四子心近等書 講磨切磋 深硏率性之爲道. 而質疑于尊師曰 率性義那在. 爲道逆義那在 尊師曰 中庸之書 子思子言 其天人一理之書也. 凡爲學之方 有次第 汝之問似乎獵等矣 詳諗外內本末 去其疾足急走之意則. 庶幾無遠獵躦跲之患矣. 鄒夫子垂訓 聖性者也之義 推究心得 則厥思幾乎近矣 庸有那底疑而質之 時有從兄心菴公同門 摳衣輒對曰 不肖則年過 而猶未能渠焉能之. 公對曰 近乎知 故有疑 有疑故質之 盖疑思問 亦其非爲學之方乎與. 心菴公同牕劬經. 晝則相資 夜則忘寢 相長不小 而人不及知其心學之有緖也. 冠後有年 以親命 副業于公車 屢擧不利 命也. 以故 擧業置于度外 專庸經學 而明明德之 功學功效不及於新民 修己之學 功效 不及於治人 則時之不遇 孰敢尤諸生平生樂在乎林泉 柢以心樂善養親志 所樂在何. 公嘗謂曰 吾之學 自孝悌始 今其孝於雙親 悌于兄弟公之心樂 孰愈於此. 觀志五十餘年素守 則自專 而其事物上 日用行爲 稟諸堂上 無違親旨. 故鄕坊奮可論議之端質於公 而公亦資稟於佐郞公 承其可否然後 賁而辦焉 鄕人心悅誠服 不敢以委曲些小之事 賁疑於公曰 佐郞公之子 有晦窩 比諸古人正獻公之子 有呂榮公也云. 嘗遊京師 雖縉紳章甫 咸稱詡曰 南州人士威儀 動人有如是者乎. 還庭 以悅親志 供其子職 有一弟友于兪篤 每寢食衾卓 同之 湛恰之樂 宜可謂後春津也歟. 推而及於鄕黨六親 遽爾. 犬辰丁內艱 壬午 荐遭佐郞公憂 前後一如 而哀毁天 性然也. 喪葬禫虞 一遵朱文公家禮 僅支老衰之力 而不至於哀愈禮 雖祈寒盛暑 不廢墓堦 省掃 每値喪餘 宿齊三日 誠極如在 而祭尊惟豊惟潔 親莅之檢滌 尤篤於奉先 祭田與石儀 極力自擔. 進在丙戌 大荒 滿目流丏 矜慘可惜 傾家儲而周賑. 故鄕里貪窮 亦得以全活. 至于今 頌其惠 靑馬東匪愚氓 瀑溱邪辭說 居世滔滔. 而公獨以峻論 誡門姪子曰. 邪說 宜斥正道可衛 而邪不浸耳 則心之正氣 自然可衛 可不愼哉. 以是 一不染汚於邪說之門矣. 一言之衛正斥邪 苟如是. 夫親年近八耋而下世. 風樹之悔 自然於天性之中. 故 以悔窩 自號. 是終身慕效之誠也 暮境 壽資嘉善. 己酉十二月十七日 考終于正寢 享年八十七. 訃聞遠邇 咸悼葬于老安坊雲峙艮坐原. 配貞夫人金海金氏 先公歿 墓桂洞堂山嶝坤坐. 擧三男二女 再配竹山安氏 先公 辛未墓堂山嶝艮坐 育一男 長彩圭 娶漢陽趙 尙振女. 生鍾拹鍾仁鍾實. 次孟圭 娶光山金 仁學女 生鍾律. 次奉圭 主事 娶海州崔時華女 生鍾碩. 再娶淸州韓在杓女 生鍾軾鐘基鍾壽鍾岳鍾乙. 次完圭 參奉 娶金海金崇培女. 生鍾旭鍾甲鍾坤. 河東鄭奎鉉 商山金基寬二女 婿曾玄外內五十餘人 不錄. 嗚呼 公生於孝悌之門長 亦以之而老於孝悌之中 公可謂其人也. 余嘗聞邦有道求其人於孝子之門. 盖凡懷瑾之士隱逸而不擧 則國步漸艱 從可認矣. 而公之不見用於世 世道汚下之證也. 竊爲世道可痛惜不已 於公 何慊之有. 在世行治 其賢孫家狀草記 槪略載焉 不敢妄贅. 而穢佛求我剛潤 公之曾孫光澤. 與余講誼攸在知其不敢 而難堪固辭. 略檃枯之 以俟後君子之滋筆. 甲辰.

7. 회와 임공행장

삼가 살펴보건대, 임씨의 본관은 나주인데 이는 남성(南省)의 이름난 가문으로 벼슬하여 문헌의 훌륭한 집안이다. 녹훈(錄勳)과 상작을 받음이 나주에서는 최고에 해당한다. 회진(會津)과 회룡(會龍)이 바로 이분들이다. 지금까지 가법이 순후하여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법을 본보기로 따르니, 우리 당에서 좋은 풍속이 될 뿐이 아니라, 모든 집안의 향풍을 새롭게 이끄는 사람 중에 본받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점을 살펴본다면 성 안에서 훌륭한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형묵(衡黙)이요 자는 권중(權仲)이며, 회와(悔窩)는 호이다. 조의 휘는 비(庇)로 고려 때에 통리군사로 대장군을 지냈다. 휘 탁숙(卓宿)은 고려조가 오래 못가리라는 것을 알고 태조께서 등극하실 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 오셨다. 은둔하여 스스로의 의리를 지켜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휘 유소(有巢)는 화산군정을 지내셨다. 휘 상사(尙祀)는 자호는 석봉(石峰)이니 은일하여 의리를 지켰다. 휘 준(峻)은 호는 풍호(楓湖)이니, 점필재(佔畢齋) 김선생께 유학하였고 관직은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휘 숭석(崇碩)은 첨정(僉正)을 지내셨다. 휘 세번(世番)은 호는 회와(晦窩)로 사마시(司馬試)에 등과하였다. 기묘년에 갑작스레 화를 당하여 임천에 은일하였다. 휘 백(柏)은 호는 은정이고 문정은 그의 자이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아 묘한 계책으로 공을 많이 세웠다. 휘 수춘(守春)은 호가 담담재(澹澹齋)로 심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 참봉으로 천거(薦擧)를 받았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뒤에 예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휘 준홍(俊弘)은 호가 도암(逃庵)으로 백화정(百花亭)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마음으로 가학의 바름을 얻었다. 휘 선(愃)은 노년에 은거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아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않았다. 휘 의달(儀達)은 특별히 우뚝 선 무반이었으니 용맹이 나라를 호위할 만 하였다. 이상이 공의 8대까지이다. 고조의 휘(諱)는 재무요 호는 경암(敬庵)이니, 효도와 의리로 세상에 드러났었다. 증조의 휘는 득진(得鎭)이다. 조휘는 지한으로 효도로 고을에서 추천되었다. 참의로 증직되었다. 고(考)의 휘(諱)는 계상(啓相)으로 좌랑(佐郞)을 지냈다.

 

어머니는 영인(令人) 보성(寶城) 선씨(宣氏)로, 용주(龍周)의 따님이니, 정숙한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예스러운 여자의 기풍이 있었다. 순종(純宗) 정월 1일 노안방 회룡리 집에서 공을 낳으셨다. 이빨이 나기 시작할 나이부터 보통아이들과는 다른 풍도가 있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한 마디도 입에서 나오지 않고 침묵하였으며 생각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고 말수는 적어 중도(中道)로부터 나왔다.

▷부산진순절도:부산진(釜山鎭)에서 있었던 왜병과의 공방전을 그린 임진왜란 전쟁화.

 

 모든 행동을 엄숙하게 하여 다 큰 아이가 되어서는 좌랑공으로부터 매우 사랑을 받았다. 겨우 옛날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선생님께 나아가 소학(小學)의 쇄소(灑掃) 등의 예절을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글의 의미도 한 번 들으면 바로 풀고 한 번 보면 바로 알았다. 진실로 마음에 터득하여 몸소 행하는 실제를 찾아 한 점 잘못됨도 없었다. 학문한 효과가 바로 드러났으니, 그 분이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하게 대할 줄 아는 도를 알았다. 이것이 끝내 자신을 닦는 바른 길이었다.

5,6년이 지난 뒤에 당내에 뛰어난 덕을 지닌 만오공(晩悟公)의 문하에 나아가서 마음으로 사서, 심경, 근사록 등을 서적을 전수받아 강마하고 절차하여 성품을 잘 다스리는 도를 깊이 연구하여 스승께 질문하기를, “성품을 거느린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이며, 도의가 된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니 스승께서, “중용이란 책은 자사자(子思子)께서 천리와 인도는 하나라는 이치를 담고 있다는 책이니 학문을 하는 순서가 들어있다. 지금 너의 질문이 단계를 뛰어 넘은 듯하다. 상세하게 내외본말(內外本末)을 생각하여 그 빨리 도달하려는 마음을 없앤다면 단계를 뛰어넘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맹자께서 가르쳐 주신, ‘성인은 성품대로 한다.’는 가르침이 있으니 그 의미를 추구해 나간다면 그 생각하신 바에 거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하셨다. 평소에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형 심암공(心庵公)과 동문으로 예의를 갖추어 대답하기를, “제가 나이가 좀 되었는데도 아직 그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하니 공께서, “아는 데에 가까워져야 의문이 생기고 의문이 생겨야 질문하는 것이다. 의심하면 반드시 묻기를 생각하는 것이 또한 학문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하니 심암공(心庵公)과 함께 경전을 탐구하여 낮에는 서로 토론하고 밤에는 잠자는 것을 잊어 서로 성장시킨 것이 적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심학(心學)에 요체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십세 이후에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점차 해 나가서 여러 번 응시되었으나 등과하지 못했으니 천명이었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관심이 없고 전적으로 경학을 탐구하고 명명덕(明明德)의 학문을 배워 공효가 백성을 새롭게 하고 자기를 수양하는 학문의 공효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데 도달하지 못하면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이니, 누가 함부로 평생토록 마음을 평정하여 산천에서 즐기는 것을 탓하겠는가. 마음으로 선을 즐기고 어버이의 뜻을 봉양하는 것만한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 공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내가 학문을 배운 것이 효제로부터 시작하여 이제 어버이께 효도를 하고 형제에게 우애한다”하였으니 공께서 마음으로 즐기심보다 무엇이 더 낫겠는가.

아버지께서 생존해 계신 오십여 년 동안 절도를 평소에 지키고 스스로를 온전히 하여 사물에 대하여 일상 행동을 아버지께 여쭈어서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을에서 의논할 만한 단서를 가지고 공에게 질문하면 공도 좌랑공(佐郞公)에게 여쭈어서 그 가부를 물은 뒤에야 질문한 것이 분명히 마을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복종하여 감히 사소한 일도 공에게 질문하지 않은 일이 없어, “좌랑공에게 회와(悔窩)가 있는 것은 옛날 정헌공에게 여영공(呂榮公)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갔을 때에, 비록 관대를 두르고 장보관(章甫冠)을 쓴 관리들이 모두 후(詡)를 칭송하여, “남쪽 지방 선비들이 지닌 엄격한 위의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구나.”하였다. 조정에서 돌아와서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를 좋아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한결같이 형제에게 우애하기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매번 형제들과 침식(寢食)을 함께 하니 후춘진(後春津)이라고 할만하였다. 그러한 마음을 미루어서 향당의 육친(六親)에게 도달했을 뿐이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임오(壬午)년에 거듭 좌랑공의 상을 만났는데, 전후로 한결같이 하여 슬퍼하는 마음이 천성적으로 그런 듯 하였다. 상 지내고 장사 지내고 담제(禫祭)를 지냄에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랐다. 노쇠한 근력으로 슬퍼함이 법도를 넘지 않았다. 매번 상을 지낼 때 재에서 묵는 삼일동안 조상이 앞에 보이는 둣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었다. 손수 청소하며 더욱 돈독하게 선제를 받들었고, 제전(祭田)과 석의(石儀)에 대해서 힘을 다하여 스스로 담당하였다.

과거 병술(丙戌)년에 큰 가뭄이 들어 온통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들어 집안의 재산을 털어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마을에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제대로 살아날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 은혜를 칭송한다. 청마 동쪽의 비적과 어리석은 백성들이 사악한 설을 드러내어 온 세상에 그 쪽으로 흘러가거늘 공만은 준론(峻論)으로 문하의 조카들에게, “사설은 물리쳐야 하고 바른 도리는 보호하여 사설에 들어오지 않게 하면 마음의 바른 기운이 자연스럽게 보호될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이로 인해 한 가지도 사설(邪說)에 물들지 않았고 한 마디의 말로 바로잡아 사악한 것들을 물리친 것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어버이의 연세가 팔십에 이르러 세상을 버리시니, 효도를 하고자 하자 어버이가 계시지 않은 후회가 자연스레 천성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회와(悔窩)로 스스로의 호를 삼은 것이다. 이는 평생토록 사모하고 본받는 정성스러움이 있었다. 노년에 원로로 나라에서 가선을 품자받았다.

기유(己酉)년 12월 7월 어느 날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7세였다. 원근에서 부음을 듣고 모두 애도하였다. 노안방(老安坊) 운치(雲峙) 간좌원(艮坐原)에 장사를 지냈다. 배(配) 정부인 김해 김씨는 공보다 먼저 돌아가셔서 계동(桂洞) 당산등(堂山嶝) 곤좌(坤坐)에 묘를 섰다. 3남 2녀를 두었다. 후처인 죽산 안씨는 공보다 먼저 신미년에 죽었는데 당산 등 간좌에 묘를 썼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채규(采圭)로 한양 조상진(趙尙振)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협(鍾悏), 종인(鍾仁), 종실(鍾實)을 낳았다. 차남 맹규(孟圭)는 광산 김인학(金仁學)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률(鍾律)을 낳았다. 셋째 봉규(奉圭)는 해주 최시화(崔時華)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석(鍾碩)을 낳았고 후처 한재표(韓在杓)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종식(鍾軾), 종기(鍾基), 종수(鍾壽), 종악(鍾岳), 종을(鍾乙)을 낳았다. 넷째 완규(完圭)는 참봉 김해 김숭배(金崇培)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욱(鍾旭), 종곤(鍾坤)을 낳았다. 하동 정규현(鄭圭鉉), 상산 김기관(金基寬)의 두 딸과 증현손을 포함한 50여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효제를 제대로 행하는 문하에서 우뚝하게 태어나 그것으로 나이 들어서도 효제에 맞게 하였으니 공은 진실로 덕행을 행한 분이라고 할만하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나라에 도가 있으면 효자의 가문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하였으니 효제를 품고 부지런히 하는 선비가 은일하여 등용되지 않으면 나라의 운세가 점점 어려워질 것을 이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께서 세상에 등용되지 않은 것은 세도가 어지럽혀진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세도에 대하여 애통해할 뿐만이 아니니, 공에게 있어 어찌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세상에서 행한 자취는 그 현명한 자손이 대강 가장(家狀)을 적었다. 함부로 덧붙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거듭 교정해 주기를 부탁하고 공의 증손 광택(光澤)이 책을 빛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여 내가 감당하지 못함을 알기에 자세하게 말하였으나 거듭 사양하기 어려워 글을 다듬었으니, 훗날 군자의 가필을 기다린다. 갑진(甲辰)일에

 

(잠)

1. 妄贅視聽言動四勿箴戒諸益

心竅一符天品綱目 姸媸攸照影響 惟速非禮勿視 是乃克復豪末不越萬善來. 服父訓師提八心 由耳聰管睿智敢不愼 只況今喧豗其奈誕爾 非禮勿聽聖訓 有以入聖迢凡切近在邇. 舌惟心譯言出 由口順是榮門 悖則辱臼. 矧玆頷㶊作孼之府祸福攸胎. 惟口是毋非法不道 程訓孔阜. 善器在心自喫珍味敢爲物誘動則易費.

1. 망췌시청언동사물잠계제익

마음은 천지에 있는 모든 사물과 강목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받아들이는 통로이며, 즉 모든 사물의 상(象)과 빛 그리고 소리를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러므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그 일이 비록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보지 말아야하며, 모든 정신을 집중하며 부모님과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귀는 총명과 지혜를 통괄하므로, 사물을 들음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논쟁에 빠지게 되어 성현들의 말씀들을 들을 수 없게 되며, 말을 들음에 신중을 기한다면 요원(遥远)한 성현들의 말씀에 한 층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혀는 사람의 마음을 말로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바른 말은 가문을 빛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가문에 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래턱과 보조개는 집안의 화복(禍福)을 가져온다 하였으며, 유독 말은 그것이 정도(正道)에 어긋나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일찍이 공자의 스승께서 공자께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공자 영정.

 

2. 以筆戒諭諸益

每操筆必先正心筆乃正. 故余嘗曰 造筆者其知道乎. 會萬爲一而亦無一毫之惡. 苟有一惡毫筆乎哉. 人性之全善無惡亦猶是矣. 今其寫字時密察毫末之理會 而詳看則庶胡知其人. 性之善而宜無過不及之差耳. 且夫筆至公不屈於萬事者也. 天地間萬物不容一毫斯罔 而盡輸其情於毫末. 故用之以力則勇矣. 用之以正則義矣. 義勇當處無敵於天下. 昔吾夫子之獲麟. 紫陽之特書 天下萬世亂臣賊子之所懼也. 大矣哉 筆乎.

2. 이필계유제익

글(문장)을 쓸 때에는, 반드시 바른 마음을 가져야지만 바른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이에 대해 예전에 말한 일이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마음을 바로 가져야 한다. 또한 만에 하나라도 글에 악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찌 글을 씀에 있어 조금이라도 악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고 악의가 없음과 같은 이치이다. 글을 쓸 때는 하찮은 이치라도 세세히 관찰해야 하며 자세히 살핌에 있어서는 그 사람을 마치 잘 아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본성의 착함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하며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씀에 있어서 매사에 굽힘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은 조금의 꾸밈도 없듯이 글을 쓸 때는 그 감정을 조금도 남김없이 표현해야 할 것이다. 글을 힘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는 용감한 것이고 글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자는 의로운 것이다. 의리와 용기는 천하에 대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옛날 우리 선생[孔子]께서 기린을 잡은 것과 자양(紫陽)의 특서를 천하의 간신들은 이를 무척이나 두려워했었다. 아! 글이란 이렇듯 대단한 것인 것이로다.

▷붓.

 

(서)

 

1. 與道湖吳丈書 (二度)

◎前年十二月七日伏 承十四日 下惠書 倂永陽記 千鏤百篆 祗以一心難容. 然稱道濫獎 宜有所不敢當者 存焉尤庸悚仄. 所謂自己 伏惟鑑裁而寫呈 竟未蒙斤敎柰何旋. 伏念 全石之泐 不可更磨而磨之則隱泐益露出 故良匠棄之 苟或以泐石 固請加磨則良匠 必不許宜矣. 吾所以不敢固請者是也. 亦惟不可不自反而加鍊 故減略補欠 乃至數三處今而後 或無礙眼否祗增悶然. 自客冬以來 役役撓此前路迷 惑竟至蹭蹬 握毫無暇 迄未修謝負負益多. 謹未審春殷 方亨道體肥 遯益貞. 自不任景仰之至. 遇益窮約 自持幸免他虞 但流聞風色 益艱他時 宜當安土食 力修人待天 是固分底事 奈姪輩築屋子 俾欲寢處 得安揆時酌 宜太濫分矣. 玆庸屛縮於方丈之間 欲與猿鶴爲隣 然顧疏迂之蹤 亦近太露 未免時人之譏悶歎 如之何. 就悚繾眷所諭 實獲鄙心不能已. 大抵內金剛 外金剛天 地間一奇物 勿論某國人一見之 願果是不無而如益 生斯長斯 生平所眷眷者而願莫之遂 伏承昨春 作金剛之行 閱盡內外剛之諭 自不勝仰艶. 凡天下之物 未不有外內而外之內 有其內則內之內 又有其內 亦明矣. 伏想外內與內內 詳審玩 繹載在行錄 伊後拜床之日 獲聞詳細 欲作金剛之遊於軒屛之下 奚獨千有餘程形役之爲愈也. 惠賜亭記 屋子之重輕攸在 不敢贊一辭 將欲侈顔而未遑矣. 只恐煩瀆衷蘊 未能盡達謹拜上狀.

 

◎何幸有便 槩探震艮 惟濟康寧 伏慰滿. 萬厥後有日風兼雪作 雷迅不時 竊念上天以非常之變 度外警告者也. 甚可畏 雖然陽線不遠復更 未審道體候益崇衛. 伏想心上之妙 愈確愈篤 人不及知而所樂 果何樂聞可之 願自切于中景仰不啻山斗. 生過春幾至大病而姑不死艱辛 作陽界 人眼翳耳昏視聽 俱不得其正. 伏念病宜在心 今雖自珍百方難瘳奈何 盖心一身之主宰視聽言動 在於在不在而旣爲形氣所役 故似有此病. 不然何以至次惠以藥諭大望耳. 所謂精舍之築 姪輩不聞家令 安擧至此 訓之不明類 如此原記與詩敢請敲椎而寫呈 幸賜斤敎更湏泚筆 申望望 伏惟鑑亮.

1. 여도호오장서 (두 편)

◎지난 해 12월 17일, 14일에 써서 내려 주신 편지와 영양기(永陽記)를 감수(監修)해 주신 것을 받잡고, 저의 작은 마음으로는 감사함을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오나 칭찬하시고 지나치게 장려해주심에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이른바 자신이 쓴 글에 대하여 삼가 살펴주시기를 바라서 베껴 올렸는데, 끝내 지적하여 고쳐주지 않으시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되돌아 생각해 보면, 돌덩이의 갈라진 곳은 다시 갈 수가 없으니, 갈면 갈수록 갈라진 속이 더 드러나게 되지요. 그러므로 훌륭한 장인이라면 그것을 버리지만, 구차하게 누가 갈라진 돌을 굳이 더 갈아달라고 한다면 훌륭한 장인은 반드시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제가 감히 굳게 청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또한 스스로 돌이켜 보고 더욱 단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뺄 것은 빼고 보탤 것은 보태고 한 곳이 여러 곳인데, 그런 다음에도 눈에 거슬리는 곳이 없는지 더욱 고민입니다.

지난겨울 이래로 이런저런 일로 분주하여 앞으로 갈 길이 아득하였고, 끝내 이리저리 방황하느라 붓을 잡을 겨를이 없어 지금까지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마음의 빚이 더욱 많습니다.

삼가 봄이 한창인 이때에, 유유히 산림에 묻혀 지내시는 기체(氣體)가 더욱 정정(貞靜)하시겠지요. 우러르는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저 우익(遇益)은 가난을 벗하여 지내다 보니 다행히 다른 걱정은 면하고 삽니다만, 소문을 들으니 풍색(風色)이 다른 때보다 더 어렵다고 함에, 이 땅에 편안히 살면서 먹고 사는 일에나 힘쓰며 수인사 대천명(修人事 待天命)하는 것이 분수에 맞는 일인데, 어찌하다 조카 녀석들이 집을 지어 저로 하여금 잠자리를 편하게 하려 하니, 시절을 돌아보고 마땅한가를 헤아려 보건대 너무 분에 넘치는 일입니다. 이에 방장산(方丈山) 골짜기에 틀어박혀 원숭이와 학을 이웃삼아 지냈으면 합니다만, 저의 어설픈 행적을 돌아보면 그 또한 너무 드러나기 쉬워 사람들의 조롱을 면할 수 없을 듯하니, 고민스런 탄식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송구하옵게도 잊지 않고 간곡히 깨우쳐 주신 바는 실로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만 둘 수 없을 뿐입니다.

대저 내금강(內金剛)과 외금강(外金剛)은 천지간에 한 기물(奇物)이니, 어느 나라 사람을 막론하고 한번 가보고 싶은 소원이 과연 없지 않겠으나, 저 같이 이 땅에 태어나 자란 사람은 평생을 간절히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작년 봄에 금강산 산행을 가셔서 내외금강(內外金剛)을 두루 살펴보셨다는 소식을 삼가 받잡고, 절로 우러러 부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무릇 천하의 사물이란 안과 밖이 없는 것이 없지마는, 밖의 안에 그 안이 있다면 안의 안에 또 그 안이 있다는 것도 자명한 일입니다. 삼가 바라옵기는, 밖의 안과 안의 안을 상세히 살펴보시고 감상하신 것을 여행록(旅行錄)에 풀어 기록해 두셨다가, 다음에 찾아뵙는 날 상세히 들려주시어 헌병(軒屛) 아래서 금강산 유람을 하려 하오니, 그렇게 된다면 어찌 천여리(千餘里) 여정에 수고하는 것보다 낫다 뿐이겠습니까?

▷금강산 : 행정구역상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그리고 통천군에 걸쳐있다.

 

내려주신 정자(亭子)의 기문(記文)은 집의 경중(輕重)이 달려있으므로 감히 찬사(讚辭) 한마디 못하고, 한번 찾아 뵈오려 하였으나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귀찮게 어지럽히기만 할까 두려워 속에 쌓인 것을 다 아뢰지 못하옵고, 삼가 절하여 편지를 올립니다.

 

◎다행스럽게도 인편이 있어서 강녕(康寧)하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삼가 위로되는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뒤에 며칠 바람과 겹쳐 눈이 내리고 때도 없이 번개까지 치는 고르지 못한 날씨를 보고, 하늘이 비상(非常)한 변고(變故)로 예상할 수 없는 일을 경고하시는 것으로 매우 두려워 할만한 일이라고 삼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봄기운이 머지않아 다시 일어날 터이지요.

그간 도체후(道體候) 더욱 높아지셨겠지요? 마음의 공부도 더욱 굳고 갈수록 독실(篤實)해져서, 남들이 미쳐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셨으리라고 삼가 생각합니다만, 요즘 즐기시는 것은 어떤 것인지 가르침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옵고,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 태산(泰山)과 북두(北斗)보다도 큽니다.

저는 지난봄에 중병(重病)에 걸려 죽을 뻔하였다가 우선 죽지 않고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눈은 침침하고 귀는 어두워져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병은 마땅히 마음에 있음이니, 지금 비록 스스로 여러 가지 처방으로 백방(百方)으로 노력해도 낫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대개 마음은 몸을 맡아 다스리는 주재자(主宰者)로서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는데, 기왕(旣往)에 형기(形氣)에 부림을 당하여 이 병이 생긴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약이 될만한 깨우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른바 정사(精舍)를 짓는다는 것은 조카들이 집안의 영(令)을 듣지 않고 함부로 일을 일으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가르침이 밝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원래의 기문과 시에 대해 감히 퇴고(推敲)해 주시기를 바라오며 등사(謄寫)하여 올리오니, 손질하시어 가르침을 주시길 바라옵니다. 부디 다시 붓을 잡으시어 가르침을 주시길 거듭 거듭 바랍니다.

삼가 밝게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2. 與晩軒吳丈弼善

 

日前 細洞便 伏承下惠手東倂精舍韻 感荷沒量. 自顧不揆鄙滯妄敢輕請 何幸不置盛眷 至此乎. 奉讀再三泚筆 五十六字中韻義 至精至密 其難易淺湥未可曉得 然稱譽太過當耳. 盖稱人過譽 宜非情地間 勸進勵篤之義 而只以蔑識馴馳於有實之域. 自不任兢仄 何以則切近 更思期於將來而俾吾丈之韻語不至過 當而造乎其域也. 妄想至此 尤庸勉强探候一滋 更未審靜體養 眞益衛仰禱不已. 傳聞 令胤 暫爲時困訛 眞與否. 雖未的然 時之爲時也 吾人之受困一矣. 願無憂而樂伏祝. 生艱窘所到十餘眷口不能自率 故今將各㸑於方丈之下 道途甚不易 多小運搬太艱 只增爲悶. 凡善爲家政者 政不出門外而惟種德爲貴 今其德不于家 徒欲於好山 好水柰妄念至此甚乎. 自發一笑. 數日來心神益茫然未克盡究 畧陳鄙抱. 伏惟鑑亮.

2. 여만헌오장필선

며칠 전에 세동(細洞)이 편에 보내주신 편지와 정사(精舍)의 운(韻)을 받고 감사하기 한이 없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형편없는 저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감히 부탁드렸는데, 행여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시어 살펴 주셨습니까? 두 번 세 번 받자와 읽음에 붓을 대신 56자(字)중 운의(韻意)가 지극히 정밀하여 그 난이(難易)와 천심(淺深)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마는 칭찬해 주신 것은 너무 지나쳐서 당치않습니다.

대체로 남을 칭찬함에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것은 친한 사이에 독실하게 전진하라고 권려(勸勵)하는 의미는 응당 아닐 것이요, 다만 멸학천식(蔑學淺識)을 독실한 수준으로 길들이는 것일지니, 스스로 두려워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어찌하면 그 수준에 가까워 질 수 있겠습니까? 다시 생각해보건대, 앞으로 기필코 그렇게 된다면 어른의 운어(韻語)가 지나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그런 영역에 나아 간 것이겠지요. 망상(妄想)이 여기에 이르니 더욱 힘쓰겠습니다.

문안드린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정양(靜養)하시는 기체(氣體)는 더욱 좋으시겠지요? 우러러 빌어 마지않습니다.

아드님이 잠시 시대에 따른 곤액(困厄)을 겪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여부는 바로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때가 때인지라 저희들이 곤액을 당하는 것도 매 한가지입니다. 우환 없이 즐거운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어렵고 군색(窘塞)한 지경이 되어 10여 식구들을 제 힘으로 거느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방장산(方丈山) 밑에서 각각 살림을 하려고 하는데 길이 매우 험해서 조금 옮기려고 해도 매우 어려우니 속이 탈 지경입니다.

무릇 집안 살림을 맡아 잘 다스리는 사람의 다스림이란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다만 종덕(種德)을 귀하게 여기는 법인데, 지금 저는 그 덕을 집안에다 쓰지 않고 거저 산수(山水)를 좋아하기만 하려 하니, 어찌 망념(妄念)이 이리도 심하게 되었는지요? 절로 웃음이 납니다. 며칠 전부터 심신(心神)이 더욱 아득하여 다 아뢰지 못하고 간략히 저희 포부를 밝혔습니다. 삼가 밝히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與道湖吳丈東洙

去月初 謹以鄙先塋祀事之故 行程作仙境將擬起拜軒屛伏問葆攝如何繼而仰敍積蘊訃矣. 竟困杯勺所困 致有及難臨時困境 暮夜無知 苟以無知謂之幸會而隱其恥則是誠自欺也. 然前瞻後顧 尤庸罔措於無顔之地. 未獲遂意戞過門屛草草行色 自不任逋慢而已. 盖人洞必先丈老後於知要 是人事之當然. 今反是而後先相錯 以故造物 甚恚 暫以麥芽孼 與之以困者也. 但收拾之不暇未明 發程路中無他底餘憊所恭想惟眷念之惠闇然照及耳. 還路意欲更趨面達而怱迫未果悚仄 謹未審微復衛道中動止益無攝損露心伏祝而不敢 也. 便轉北波宅 預婚制宜 凡百遽爲時色所拘云 聞甚駭佐 復聞後無他艱萬幸今之爲時也. 惟食是犯 惟衣是犯 而日惟作之作之則益犯. 嗟吾食土民生人 孰有不犯者乎. 環視 祗增慨然耳. 生自去冬 心神惘然 若自失 未遑尋數 但爲時累所撓奪 復欲旋尋之不得悶切奈何. 近雪作暫得無事 境界頗有意於熅理舊業 然左右無相長之益恨恨. 天使吾道 期有將行之日乎. 以今視今塗途盡人於荊蕀中鮮 或有由而行之者 誠可歎也. 願吾丈 繾眷指論 使時輩 知其所以人之行也. 不離其道則庶其吾道 將行之日 孰不曰吾丈之力 有在乎仰恃者 是爾就惟妄以無稽之說 略抒己意  碎橫豎 祗恐煩掛人眼 然惟爲鑑裁 別紙路程 幸須垂廣恕 指示曲折. 伏望頫償栗谷年譜二冊 頻頻有便而便遽未得 今纔伏呈 自悶餘. 伏冀道體以皆康寧.

◎竊恐道之爲道 自邇而遠 宜是達天下而不窮 然統之在心 不越乎吾心上一路通耳. 此心 初無人我分別底道理. 故同稟天地之氣而爲人一人之形同 是千萬人之形同稟天地之理而爲性 故一人之性 同是千萬人之性而未化之前 祗是一理氣而已. 以故形化攸同天下之人 同是口 同是足而其所言也. 以何不同譯其所行也. 以何不同道 敢問爲之慨然者一也. 恐人生形化之初 五氣之精 始於眸子而天理賦焉. 故受之而爲性 盖心之統性其爲像也. 如眸靈畜精其爲氣也. 如鑑空載明蓄精 故衆理具焉. 載明 故明德存焉 明德者 存天理而指其當行之路者也. 勿論 動植心性物 各有之明德人之所獨有也. 人皆有明德之 故心是恐內靈之鑑 眸是恐外靈之鑑 然則目之所眎其所以然者心也而卽心之所照也. 若人苟非眸子 雖曰心惟明鑑攸在譬 猶明鑑藏在匣中 自明其明而物不得來照矣. 目前當行之路 烏可以辨得其可而行之乎. 以是天下之人 同是心 同是目而硏媸造物 又乃如之則莫所七情感發以 何有善惡之分 敢問爲之悚然者一也. 凡物之種子 有仁必有其目而有其目 故能生芽 苟或徒仁而無其目 雖欲發仁竟不能芽矣. 今夫萬物 各具一太極則恐或太極 亦其有目乎. 太極恐萬物之一源也. 祗是理氣所具 故其所未發也. 謂之太極其所旣發也 謂之理氣 苟無理氣太極無名 苟無太極不惟是理氣不具 乃已陰陽無所萬物未化 盖萬物形化以前只是太極之名爾. 苟以形化源頭處言之則物之種子 是乃物之太極也. 那可以別祿 有其目於太極乎. 然則太極以前 那這爲始恐惟太極 可謂陰陽所朕也. 前天地而立天地之理者 是太極也. 後天地而立天地之道者 是太極也. 極其有始乎 敢問爲之邈然者是也. 今其猥古思索不理 雜引無可據僣踰負罪萬無所逃子 朱子譏佛子觀心曰以口齕口 以目示目 竊伏惟以吾爲大恐也. 惟願特垂鑑恕痛加眷戒 使遇益竟不至迷惑 一轍同歸之地伏望而.

3. 여도호오장동수

지난 달 초에 저의 선영(先塋)에 제사 일 때문에 길을 나섰다가 계시는 곳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안부를 여쭙고 아울러 그 동안 쌓인 회포를 풀 계획이었었는데, 그만 술 때문에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곤경은 저녁 내내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만, 굳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하고 그 부끄러움을 숨긴다면 이는 참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뒤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부끄러움에 낯을 둘 곳이 없습니다. 당초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선생의 문 앞을 지나 왔으니, 초초(草草)한 행색(行色)이 포만(逋慢)하였다는 생각을 이길 수 없을 뿐입니다.

대개 동네에 들어가면 먼저 어른을 찾아뵙고 뒤에 아는 사람이나 볼 일 있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인사(人事)의 당연함이거늘, 지금 이와 반대로 하여 선후가 뒤바뀌었으니 조물주가 심히 화가 나서 술로 잠시 곤경에 처하도록 한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수습하기에 바빠 날이 밝기도 전에 나섰으나 도중에 다른 나른한 피곤도 없었으니, 돌보아 주신 은혜가 은연중에 미쳤던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속으로 다시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 하였는데 어느덧 시간이 흐르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간 아직 돌아오시는 도중의 기후(氣候)가 별고 없으시기를 간절히 축원(祝願)하고 축원하옵니다. 인편에 전해 듣기론, 북파댁(北波宅)에 혼례를 준비하는 제도와 범백(凡百)에 갑자기 시색(時色)에 구애되는 바가 되었다고 하여, 듣고 매우 놀랍고 괴이하게 여겼는데, 뒤에 들으니 다른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니 크게 다행입니다.

지금 때가 밥을 먹어도 범하게 되고 옷 입는 것도 범하게 되어, 매일 하는 일이 하면 할수록 더욱 범하게 되니, 아 이 땅에서 먹고사는 사람 중에 어느 누가 범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돌아보아도 다만 개탄(慨歎)만 더 할뿐입니다.

저는 지난 겨울부터 정신이 멍한 것이 실성한 사람 같아서 시(詩) 한 수 지어 볼 겨를을 갖지 못하고, 다만 여러 가지 일에 얽매여 다시 돌리려 해도 할 수 없으니 이 고민을 어찌해야 할까요?

요즈음 눈이 와서 잠시 아무 할 일이 없고, 이 근방에 구업(舊業)을 원만히 지켜 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마는, 좌우에서 서로 이끌어주는 유익이 없으니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늘이 오도(吾道:유학(儒學))가 기필코 행해질 날이 있도록 하겠습니까?

요즘 행해지는 세상을 보면 진흙길이 모두 가시밭으로 들어가, 혹시라도 그 길을 따라 행하는 자가 드무니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어르신께서는 잊지 마시고 간곡히 가르침을 베푸시어, 이 시대를 사는 무리들이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를 알게 하십시오. 그 도(道)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면 오도가 장차 행해질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신다면 우리 선생이 힘을 쓰셨다고 누가 말하지 않겠습니까? 우러러 믿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함부로 황당한 이야기로 저의 뜻을 간략히 적었습니다. 횡설수설 부스러기 같은 이야기로 눈을 어지럽히지나 않았을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잘 살펴 주십시오.

별지(別紙)로 올린 것에 대하여 널리 용서하시고 잘잘못을 지적해 주시기를 삼가 우러러 바랍니다.

율곡(栗谷)선생 연보(年譜) 2책을 자주 인편이 있었으나 왔다가 금방 가는 바람에 미쳐 올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올리오니 스스로 민망합니다.

삼가 늘 강녕하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길(道)이 길이 됨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데로 미쳐 마땅히 온 천하에 끝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들여 마음에 대입한다면, 내 마음에 있는 한 길고 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음은 처음에는 남과 나를 분별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의 기(氣)를 같이 받아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의 형체(形體)는 천만인의 형체와 같아서 천지의 이(理)를 같이 받아 성(性)이 되었다. 한 사람의 성은 천만인의 성과 같은데, 형화(形化)하기 전엔 다만 한 이기(理氣)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화(形化)가 같은 바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입이 있고 발이 있다. 그런데 그 말하는 바는 어째서 같이 풀어내지 않으며, 그 가는 바가 어째서 같은 길이 아닌가?’

감히 물으면서, 그 의문이 탄식하는 한 이유입니다.

‘아마도 사람이 생겨서 형상으로 변화할 처음에는, 오기(五氣)의 정(精)이 눈동자에서 비롯하여 천리(天理)가 품부(稟賦)된 듯하다. 그러므로 그걸 받아서 성(性)이 되니, 마음이 성(性)을 통솔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를테면 눈동자의 신령함(眸靈)이 정(精)을 축적하여 그것이 기(氣)로 됨이 마치 거울이 비었으나 밝음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정(精)을 축적하였음으로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밝음을 지니고 있음으로 명덕(明德)이 존재한다. 명덕이란 것은 천리(天理)를 가지고 있으면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식물을 말할 것도 없이, 심성(心性)은 모든 사물이 제각기 다 가지고 있지마는 명덕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명덕이 있으므로 마음이란 속의 영(內靈)의 거울이요 눈동자는 밖의 영[外靈]의 거울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눈으로 본다는 것의 그 소이연(所以然)은 마음이니, 곧 마음이 비추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진실로 눈동자가 없다면, 비록 마음이 밝은 거울이 있는 곳이라 해도, 비유하자면 밝은 거울이 상자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스스로는 그 밝음을 밝히지만 사물이 다가와서 비출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눈앞에 마땅히 가야할 길을 어떻게 구별하여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마음이 있고 이런 눈이 있어서 아름답고 추함을 알고 사물을 비추기도 하는데, 또 그렇다면 그 칠정(七情)을 느끼고 나타내는 바에 무엇 때문에 선악의 구분이 있는가?’

감히 묻는다면, 이것은 송연(悚然)해지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모든 사물의 종자(種子)에는 인(仁)이 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그 눈이 있다. 눈이 있음으로 싹을 틔울 수 있다. 어쩌다 인만 있고 눈이 없다면 비록 싹을 내려고 눈을 틔울 수가 없다.

지금 저 만물이 각각 한 태극(太極)을 갖추고 있는데, 혹시 그 태극도 또한 눈이 있는가? 태극은 만물의 한 가지 근원으로 이기(理氣)를 갖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나타나기(發)전의 상태를 이기(理氣)라고 한다. 진실로 이와 기가 없다면 태극도 이름이 없을 것이며, 진실로 태극이 없다면 이와 기가 갖추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양도 있을 곳이 없고 만물도 형화(形化)하지 못할 것이니, 만물이 형화하기 이전은 다만 태극이라는 이름뿐이다. 진실로 형화가 시작된 곳으로 말하자면 사물의 종자가 바로 사물의 태극일지니, 어찌 별도로 태극 속에 그 눈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태극 이전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태극을 음양의 조짐(兆朕)이라고 생각한다면, 천지보다 먼저 천지의 이치를 세운 것이 이 태극이요, 천지보다 나중에 천지의 도(道)를 세운 것도 이 태극일 것이니, 태극도 그 비롯함이 있는가?’

▷태극.

 

감히 물으며, 이것이 아득한 까닭입니다.

지금 갑자기 옛날에 생각했던 것을 정리도 아니하고 근거도 없는 것을 마구 끌어들여, 분수에 맞지 않게 주제넘는 죄를 지으니 어디 하나 어디 몸둘 바가 없습니다.

주자(朱子)께서 불자(佛子)가 마음을 본다는 것을 기롱(譏弄)하여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입을 깨물고 눈으로 눈을 본다.”고 하셨지요. 삼가 생각컨대 이런 꼴인가 하여 크게 두렵습니다. 바라옵기는, 특별히 살피시어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경계(警戒)를 내리시어 저 우익(遇益)이 마침내 미혹(迷惑)함에 이르지 않고 함께 올바른 경지로 이르도록 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4. 與栗溪鄭丈

遇益素忱 本非不有一曝之願 但冗務之不暇 殆未及 遂頃行路 適因胤賢與之獲拜 德儀大荷眷接珍感 何斗然而亦恐士見禮之有失也. 至今慊然于中伏 未審道體候養眞益衛 竊念 剝喪未有如今日之甚. 所謂冠儒之違條礙格一也. 幸惟先生 肩擔斯文之重任 慱帶峨冠 宜其獎勵後進而還視當今秦坑 猶歇後 奈何何. 願維持一線不知老將至而樂其樂 發眞詮而以詔後人則雖云 垂於時亦可謂與天通宜矣. 伏祝衛道益葆重 益僑寓未幾 離索恐有戞戞之難 未知將何以過許多時日. 於今方覺若心涉世處也. 餘謹不備伏惟上狀.

4. 여율계정장

저 우익의 평소 생각에는 한번 뵙고 싶은 바램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잡다한 일에 바빠 거의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습니다만, 지난번 나선 길엔 마침 아드님으로 인해 함께 직접 뵙게 되었습니다. 큰 은혜와 진정으로 보살펴 주심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요. 그러나 또한 사견례(士見禮)에 실수가 있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삼가 공부하시는 기후가 더욱 좋으신지요? 삼가 생각건대 박상(剝喪)이 요즘처럼 심한 적이 없는데, 이른바 갓 쓴 선비라고 하는 자들이 예법을 어기는 것도 격식(格式)에 장애가 되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다행히 오직 선생께서 사문(斯文)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셨으니, 아관(峨冠)쓰시고 후진을 장려하심이 마땅합니다. 오늘날의 시세를 돌아보면, 진(秦)나라의 갱유(坑儒)가 오히려 대수롭잖게 여겨질 지경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한 길만 잘 지키시어 늙음이 이르는 것도 모르고 그 즐거움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진전(眞詮)을 밝혀내시어 후진들을 가르치신다면 비록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한 천도(天道)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를 지키시는 옥체를 더욱 보중(保重)하시기를 삼가 비옵니다.

저는 더부살이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곳을 떠나 살 곳을 찾는 것은 맞지 않는 어려움이 있는 듯하여 장차 어떻게 허다한 시일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에서야 고심(苦心)하며 세상을 사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5. 答朴晦山基敦

 

適因金兄 仰聞高風 恒切一着之願 今途遠莫致. 際玆特蒙惠墨 感切彌高. 鄙先雪齊碑文 永慕齊額筆力 不惟輝煌 其雄健處 雲龍養精 其周詳處鐵索鍛鍊 與古人法筆 不讓高下. 後之學 筆法者 或可玩索於運筆之妙 則可庶幾耳. 每下筆時其所止處 尤可玩而玩之者 有幾鐫于碑面揭于齊額 惟冀來百不朽. 謹承審經牀體候康寧 實協遠禱益自近百事敗意 但究得古人緖餘庶乎. 得其所未得小可自慰 謹不備謝狀.

5. 답박회산기돈

마침 김형(金兄)을 통해서 선생 말씀을 듣고 늘 한번 뵙고 싶었는데, 길이 멀어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때 특별히 보내주신 글을 받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저의 설재(雪齋)선조의 비문과 영모재(永慕齋) 편액(扁額)은 필력(筆力)이 휘황할 뿐만 아니라 웅건(雄建)한 곳에는 구름 속에서 용이 힘차게 꿈틀거리는 것 같고 주상(周詳)한 곳에는 쇠줄이 감긴 듯 하여 옛 명필의 필법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니, 필법을 배우려는 후학들이 운필(運筆)의 묘를 완색(玩索)한다 해도 훌륭한 공부가 될 것입니다. 붓을 놓을 때마다 그 멈추는 곳은 더욱 볼만하여, 보는 사람이 거의 비면(碑面)에 새겨 놓고 재액(齋額)에 걸어 둔 것 같이 있습니다. 오직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 동안 기체후(氣體侯) 강녕(康寧)하시다니 실로 멀리서 바라던 저의 마음과 같습니다. 저 우익은 요즘 온갖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다만 고인(古人)들의 나머지를 궁구(窮究)하여 조금 미진한 점을 거의 터득한 것이 조금이나마 자위(自慰)할 만 합니다.

이만 줄이면서 답장을 드립니다.

 

6. 答吳兄吉洙 (三度)

◎頃者 光臨惠 我猶多況 又一幅情書繼而委至感荷可言承審殘臘侍體 益敷福覃 亦增吉 慰賀滿 萬益病尤學淺纔經句望便增一齒齒 亦甚愧. 近以鱗介之資 幸人於探驪珠之手 還爲魯質之幸 烏可曰云乎哉. 餘蘊難以赫蹄盡道.

◎日貴族某訪余 言趨造仙屛在於昨昨 云聞來昻慰幽懷. 兼以神示惠翰圭復屢廻 朋錫尤多承審侍體 萬福覃儀均吉仰賀. 水注益窮蟄得過不啻寒呼而已. 些小憂虞無日不纏身 那可以作無虞境界 兄須爲余指示則幸耳.

◎拜晉仙庄想一旬 猶未而悵仰之懷 惟日深切矧惟前頭拜握 亦未知那時在其間 何以自慰信傳續候 亦是相好間黙會底道理也. 有便冀賜德音如何.

 

6. 답오형길수 (세 편)

◎지난번에 찾아주시어 저에게 은혜를 내리신 것도 많은데, 게다가 다시 한 폭의 정이 담긴 글까지 이어 보내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에 부모님 모시고 잘 계시고 가족들도 더욱 좋으시다니 위로되고 축하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저 우익은 병든 몸에 학문도 얕으면서 한 보름 있으면 문득 다시 한 살을 더 먹게 되니 나이도 심히 부끄럽습니다.

근래 어패류(魚貝類)와 같은 자질로써 다행히 이주(驪珠)를 찾는 사람 손에 들어갔으니 도리어 노둔(魯鈍)한 사람의 다행이지만 이것이 어찌 다행이라고 하겠습니까?

나머지 속에 쌓인 말은 편지로 다 하지 못합니다.

 

◎오늘 그대의 일족(一族)인 아무개(某)가 나에게 와서, 어제 그대에게 갔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가슴깊이 우러러 위로되었습니다. 아울러 보내주신 글을 받아 여러 번 읽어보니 베풀어주시는 것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잘 계시고 가족들도 고루 잘 계시다니 우러러 축하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저 익(益)은 궁하게 틀어박혀 추위에 손만 호호 불 뿐만 아니라 사소한 걱정거리가 어느 하루 떠날 날이 없으니, 어찌하면 걱정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겠는지, 형께서 부디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계신 곳에 찾아 뵌 것이 열흘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쉬움에 우러르는 마음 날로 더욱 간절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일지도 모르는데, 그간에 어찌 스스로 달래야 할까요? 편지를 주고받는 것 또한 서로 좋은 사이에 말없이도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니, 인편이 있거든 좋은 소식 전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7. 與朴潤亮康津

向者惠臨 因二竪子所魔 未罄所蘊 竟至霎別 如夢如眞 昂懷切於平昔. 幸玆惠翰忽墜 復之再三 珍感于中 審悉 返駕無撓 於今始覺 非夢耳. 所屬文字 病撓中 未副盛意 愧何可言. 今纔擡頭而起 蕪搆送呈 考覽如何 書後有日 更不審侍體康護 仰溯不已. 益宿祟未完 將何以刷治了 作蘇完界 時以古人書 灌注通脈 眞上藥耳 餘只恐煩浼.

7. 여박윤량경진

전 번에 오셨을 때에 두 아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가슴 속의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고 잠시 후에 작별을 했으니, 꿈같기도 하고 생시(生時) 같기도 합니다. 간절한 회포(懷抱)가 평소보다도 더 심한데, 때마침 다행하게도 편지를 보내주시어 두 번 세 번 읽어보니 마음속으로 감사한 생각뿐입니다. 편지를 읽고 무사(無事)히 잘 돌아가셨음을 알았으니 이제야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부탁하신 글은 병중(病中)이어서 아직껏 짓지 못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만, 이제야 겨우 머리를 들고 일어나 부족한 글 솜씨로 지어 보내니, 받아서 살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편지를 받은 지도 여러 날이 되었으니 그 사이도 어른 모시고 건강하신 지 염려됩니다.

저는 전에 병이 다 낫지 않아서 앞으로 어떻게든 치료하여 완치해야겠지만, 때로는 옛 사람의 글을 읽어 의미를 통하니 이것이 가장 좋은 약(藥)인 듯합니다. 나머지는 이만 합니다. 번거로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8. 答李雅士相瑚長興

古者諱名 不諱字 以是子思子 直書仲尼而不諱 今則不然 諱字 如古之諱名 然 自家生存時 字豈可豫諱而不書乎. 矧惟先生生次韻中 自新二字 雖與執事之表德 字義尙存 或無害於字義 而先生手澤 安敢一字存拔乎. 但以執事之後昆 觀之則 似有不安處 故自新之 自字 以日字書之 僭踰負負 尤難逃罪 惠助金 尤賀 尊衛之誠 本文攷認還呈 領存如何.

8. 답이아사상호장흥

옛날에 부모나 선생의 이름자는 휘(諱)를 하지만 자(字)로 쓰는 글자는 휘(諱)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자사자(子思子)가 공자(孔子)의 자(字)인 중니(仲尼)를 휘(諱)를 하지 않고 바로 중니라고 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자를 휘하는 것이 옛날 사람이 이름을 휘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계실 때에 자를 미리부터 휘(諱)할 수야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생신을 축하하는 시구(詩句) 가운데 ‘自新(자신)’이란 두 글자가 그대의 자와 글자의 뜻이 서로 보존되니 자의(字義)에 별로 해로울 것이 없지만, 선생님의 글씨를 한글자인들 빼거나 더 보탤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대의 후손들이 본다면 미안한 생각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自新(자신)’이란 ‘自(자)’자를 ‘日(일)’자로 고쳐서 썼으니 참람(僭濫)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부조금(扶助金)은 매우 감사합니다. 존위(尊衛)의 성금(誠金)은 본문(本文)을 참조하여 알아서 돌려보내 들이니 받아 두심이 어떻겠습니까?

 

9.謙山遺稿編輯時敬告于近遠僚友及有文家

先生遺稿 自今月 編之葺之 方在正本中 而編旣卽圖繡束束 但所慊經紀如何耳. 願僉尊一旬內枉臨于松山 對本文相照 仍爲攷證 俾無錯謬之歎 若何 顧末學 猥擔重任 所以惶恐者 竊伏惟失其本旨矣. 不敢妄加一毫 亦不敢妄佚一字 而至於字訛處 切近而僅得之如是 而正本 祗恐得罪於先先生矣. 玆庸本文相照 然後印刊爲料 只希商量.

9. 겸산유고편집시경고우근원료우급유문가

선생의 유고(遺稿)를 이번 달부터 편집하기 시작하여 지금 정본(正本)을 쓰는 중입니다. 이미 편집(編輯)이 끝난 것은 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추진(推進)해야 할지가 문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10일내로 송산(松山)에 오셔서 본문(本文)과 대조(對照)하시고 잘못된 곳이 없도록 고증(考證)하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저가 외람(猥濫)되게 소중한 이 책임을 맡아서 본 뜻에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서 감히 한 글자라도 보태거나 빠트리지 않았으나, 잘못된 글자가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혹시나 선생님께 누가 될까 염려되어 이렇게 본문과 대조한 후에 인쇄할 생각입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0. 答金雅基碩 (二度)

別後夢想 每每馳往於貴覊旅之中 古人所謂 中心藏之 寤寐不忘者是也. 憑審僑體萬重 昻賀益 自近稍無事 然亦怱怱度日 未知那時作淸閒境界 只怕終如是也. 賴有一助而免焉則 幸耳. 白紙一束 郵呈 攷領如何 夏季秋初 枉臨云 益感益荷.

 

拜握今已數三朔 未知那時更有盍簪之日 前書中惠臨之期 或不我期也耶. 第其平日之光陰 只惜隙駒矣. 今當會晤期待之日 還切時日之遲遲 而其間扐月 尤可慊耳. 兩地間情好 或爲造物者所恚 而故延一朔也歟. 益 祗是夜歸 別無他好况 只希面晤.

10. 답김아기석 (두 편)

 작별 후에도 꿈속에 그리워 항상 그대가 있는 객지(客地)로 달려가곤 합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속에 감추고 있으면 잠자면서도 잊을 수 없다.”고 했으니,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봅니다. 객지에서도 편안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요사이 일이 좀 줄기는 했으나 역시 바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조용하고 한가로운 날이 있을지? 아니면 이렇게 끝마칠 가 두렵습니다.

그대의 도움을 받아서 이 골몰을 면할 수 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백지(白紙) 한 묶음을 우편으로 보내 드리니 받아주십시오.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오신다고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헤어진 지가 이제 이미 두 세 달이 되었으니, 언제 또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 알 수 없군요. 앞서 보낸 편지에 오신다고 하셨으니 나를 속이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평소에 세월이 빨리 지나간 것이 애석했는데, 오늘날 만나려는 날을 기다려 보니 오히려 더디기만 합니다. 그 사이에 윤달(閏月)이 낀 것이 혐의(嫌疑)스럽습니다. 서로 간에 좋은 정의(情誼)가 혹시나 조물주(造物主)가 심술을 놀아서 이렇게 한 달이 더 늦어지는군요.

저는 그날 밤에 돌아와서 특별히 즐거운 것도 없고, 단지 한번 만날 날만 기다립니다.

 

11. 與林雅士光奎

詩山 平沙之風月 吾平日嘗眷眷於肚裡者 而一汨沒塵窠 未果者 固有年矣. 頃者吾鄕知舊 與之偕造 庸接德儀 娓娓有淳朴 味古家典型 儘覺攸在 曁先好熟講 百世姻戚之誼 輒油然於中 珍感沒量. 矧惟錦沙亭 尊先考暮年藏修之所據了 平沙之勝雲林泉石 天然增彩者乎. 經籍書籤 尙遺几案 卽以後人高景不已 霎時奉玩 豈足以償宿昔之願. 只今暸然於心目 而惟日在在 未審經體益重 閤儀均慶 仰祝仰祝. 益抵巢有日 塵况 尤難堪遣 尊先狀錄與記序 是先先生手滋 而完了登梓頫諒若何.

11. 여임아사광규

시를 쓰든 평사(平沙)의 풍월(風月)은 내가 평일에도 마음속에 잊을 수 없든 곳이지만, 이렇게 세속의 생활에 골몰(汨沒)하여 가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보지 못한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됐습니다.

전에 고향 친구들과 함께 갔을 때에 접대해 주신 법도(法度)가 아주 순박(淳朴)하시어서 옛 가풍(家風)의 범절(凡節)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선대(先代) 때부터 학문을 강론(講論)하시든 곳이고, 게다가 인척(姻戚)의 정의가 흐뭇하여 감사함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금사정(錦沙亭)은 당신의 선고(先考)께서 학문과 수양을 하시던 곳이니, 그 좋은 경치와 산수는 천연스럽게 더욱 광채가 나고, 그때의 서적(書籍)과 책상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후인들이 추모할 뿐입니다.

잠시 동안 구경한 것이 어찌 평소의 소망에 만족할 수야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눈에 어른하게 남아있습니다. 그간 경서(經書)를 읽으시는 몸이 건강하시고 댁내 편안하시기를 비옵니다.

저는 집에 온지 며칠 됐지만 세상일에 골몰하여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대의 선대(先代) 글들은 행장(行狀)이나 기문(記文), 서문(序文) 등 모두가 다 선생이 쓰신 글이기에 모두 등재(登梓)되었으니 살펴주십시오.

 

12. 寄姪兒康勉

近作方丈之行 經旬抵巢 手滋留案 慰沃何異見面 倫理攸在 天涯地角 遠邇不相間 而萬里如咫尺 無日不懸念 尤於見書之前 卽認旅况 一如書來時否. 祗以篤志勵行 不日歸寧 而俾而慈堂 無貽遠憂幸耳 止此不具.

12. 기질아강면

근래 지리산(智異山) 여행을 갔다가 십일이 지나 집에 돌아오니 너의 편지가 책상 위에 있으니, 기쁜 마음 얼굴을 대한 듯 하구나.

숙질(叔姪)의 정의(情誼)로 하늘 가 땅 끝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멀고 가까운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나? 만리(萬里)가 지척(咫尺) 같아 잊을 날이 없었다. 그간이라도 객지생활이 편지하기 전과 같은지 궁금하구나. 단지 마음과 행동을 착실히 하여 속히 돌아와서 어머님 걱정하시지 않게 하기 바란다. 이만 그친다.

 

13. 書與金麟庭泳濠 (二度)

◎天豈有私 潤澤枯渴 宜無豊嗇之分 然第念君子所居 天必厚之 宜矣. 旱之危害 或不太甚乎. 今者 火田水田 一如燥燥 甚惜農夫之無秋 歎歎何及 謹不審經體上 味道愈篤 昻禱不已 益眷口全活 只在耕食 今我禾無食 我黍亦無食 自料天旱 獨厚於我 憫然曷已 然憂其憂而度了則 恐有害安分上道理也. 以是自慰 先生遺稿承認 次更爲正本 頫燭如何 自近奉覽 栗谷全書 至天地有數節目問義處別紙書呈 覽後 幸賜德音 以警發之千萬.

 

◎先生 對理氣問 有曰 陽叙之時 露以潤物者 雲之澤也. 又曰 雨露皆出於雲 而澤之盛者爲雨 澤之微者爲露 竊惟 先生蘊奧之旨 安敢以文辭强求其義 今夫二氣相感之深者 爲雨而不雲 則乃不雨 是固沛澤所施者 凝而爲雲故也. 先生之言卽 無餘蘊然 今其露恐非沛澤之所施也. 陰與陽 互爲交感 二氣凝而爲露 故 雲之則不濡風之則不沾者 所以氣其蔽其氣 渙散而然也. 秖恐鑿謬愈甚 負負益多. 伏念栗谷翁之說理氣也. 雖片言尺辭 索其微妙以明天地之自然 則或無毫髮之間然 而其末學之容易言乎哉 願執事 明晳曉諭 如何. 詩曰 白雲爲露 恐非雨施之雲也. 尊執事 崇聽與否. 惟不揆 敢以寸楮 累累仰瀆 是見棄而祗欲不自棄也. 南土儒雅 執事文望獨蔚然 而自顧有依 其爲高景 亦復如何 陽復一旬餘 靜體以時道長 箇中眞滋味 不可與向人道 知者有幾嚮仰 尤於餘人 益窮蟄尙滯 渴交絶遊 世與我無關 踽踽尤難狀 就惟栗谷先生天地策 有曰 今夫天之蒼蒼 氣之積也. 非正色也. 顧末學 不敢以摘句而妄鑿 然竊因積字義而看之則 恐或有成形底義. 今其天氣凝於上而成像 其爲像也. 恐至淸而已 但人之目力所及 見其蒼蒼 則彼蒼蒼者 所以高遠而然也. 宜非本色也 譬猶水色 本至淸而惟深也. 故 或者蒼或者綠 亦非本色也. 然安敢挾其自見而自是乎. 盖人有生質之美 則不待矯揉而捨岐入正 否則必有師訓友責而後 亦無岐貳之鑿 願執事 幸賜頂針如何 顧猪猶未得食 况又妄談龍肉乎. 只自僭踰 竊恐難逃.

13. 서여김인정영호 (두 편)

◎하늘이 어쩌면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마땅히 가뭄이나 장마로 인한 흉년과 풍년은 더하고 덜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군자(君子)가 사는 곳에는 하늘도 은총을 내릴 것이니, 혹 한재(旱災)가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논이나 밭이나 똑 같이 타들어 가고 있으니 농부들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매우 한탄한들 어찌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삼가 경서(經書)를 읽으시는 몸이 건강하시고 도학(道學)에 더욱 독실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저는 온 식구가 농사로 살아가는데 지금 내 벼도 먹을 것이 없고 내 밭곡식도 먹을 것이 없으니, 내 생각에는 하늘이 나에게만 한재를 주는 같으니 괴롭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걱정을 하면서 걱정으로만 산다면 분수와 도리에 해로울 뿐일 것 같아서 자신을 위로할 뿐입니다.

선생님의 유고(遺稿)를 다시 정리하고 있으니 다시 고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근간에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읽었는데, 「천지책(天地策)」에 몇 가지 절목(節目) 가운데 의심나는 부분을 별지(別紙)와 같이 적어 올리니, 읽어보시고 회답(回答)을 주셔서 깨우쳐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선생이 이(理)와 기(氣)에 대한 질문에 답하시기를, “봄이 시작 될 때에 이슬이 내려 식물들이 자라나는 것은 구름의 덕택이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비와 이슬은 다 구름에서 나온 것이지만, 구름의 덕이 많으면 비가 되고 적으면 이슬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율곡전서.

내 생각에 선생의 깊은 말뜻을 억지로 문자로만 해석할 수는 없지만 지금 천지의 기운이 서로 깊이 있게 합치되면 비가 된다고 하는데, 구름이 생기지 않았다면 비가 내릴 수 없으니 비가 내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구름 때문인 것입니다. 선생은 이치를 다 말씀하셨지만 아마도 이슬은 비가 내릴 조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교감(交感)이 되어 두 가지 기운으로 이슬이 생겼기 때문에, 구름이 끼어도 이슬이 생기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이슬이 생기지 않은 것은 구름기운이 덮여서 이슬기운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으니, 아마도 잘못된 학설인 것 같습니다. 매우 죄송스럽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율곡 선생의 이기설은 간단한 한 말씀일지라도 미묘한 천지의 이치를 밟혀서 혹시라도 털끝만치라도 잘못됨이 없다면, 제가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분명하게 밝혀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시경(詩經)에는 “흰 구름(白雲)이 이슬이 된다.”고 했으니, 아마도 구름이 비를 내리는 구름은 아닌 듯 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감히 짧은 편지로 여러 차례 누를 끼쳐 드린 것은,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버림받지 않으려고 글을 올린 것입니다. 남쪽 선비들 가운데 당신의 학문과 명성이 장하시어 그 장하신 학덕(學德)을 우러러 배우려한 것일 뿐이니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동지(冬至)를 지난 지 십일이 됐습니다. 그간 조용히 학문을 하시면서 학문 속에 참된 맛을 남들에 말하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더욱더 우러러 사모할 것입니다. 저는 궁벽(窮僻)한 곳에 칩거(蟄居)하면서 침체(沈滯)되어 남들과 교류를 끊고 지내니 세상과 상관없이 더욱 외로운 형세입니다.

율곡(栗谷) 선생의 천지책(天地策)에 말씀하시기를, “지금 하늘이 푸른 것은 하늘 기운이 쌓인 까닭이고 하늘의 본색은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저는 감히 글자만 따지면서 망령되게 말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늘 기운이 쌓였다는 의미는 아마 형체를 이루었다는 의미 같으나, 지금 하늘의 기운이 엉키어서 하늘에 형체를 이루었지만, 그 형체는 아마 지극히 맑을 뿐이지만, 단 사람의 시력(視力)이 닫은 데까지 푸르게 보일 것이고 그 푸르다는 것은 높고 먼 때문이니 하늘의 본색(本色)이 푸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을 비유해 말한다면, 물의 빛깔이 본색은 맑을 뿐이지만 물이 깊어지면 푸르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물의 본색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감히 자신의 견해만 갖고 자신만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은 정직한 기질을 타고나면 누구의 지도를 받지 않고도 갈림길을 버리고 바른 길로 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필시 스승의 교훈이나 친우의 충고를 받아야 정도로 갈 수 있으니, 당신께서는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돼지고기도 못 먹어본 처지에 망령되게 용(龍)고기를 달라는 말이니, 다만 자신이 분수를 모르는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14. 與李松下承奎

近聞燕京陷云 島夷亂華 至此甚乎. 自稱皇帝 敢謂出師遠征 以膺懲爲託 僭竊之罪 痛忍可言 駭怪莫甚 切迫尤難狀耳. 宜其夷狄之有文 不如諸夏之無 而奈書籍入于島海 使獸類 苟識字 可憎可憎 自念祚宋不遠 其日 未聞何以苟全乎. 因從姪兒 謹審侍中氣體候萬重 曁先生靜養氣體候衛道康寧高景之地 昻賀萬千 遇益庇下無警外 無足道 但頭風 是素症 而自近尤甚 數三腫處 瘳此則作彼 瘳彼則此更作 濕疹無乾 日夜不就寢者 果一望耳 僅得小差 完蘇無期 奈何 頭所而陽明之俯 臟腑之總領而 恒時癬疹不瘳 腦神不確 從可知矣. 舊忘新昧 此非一驗歟. 那間拜謁軒展 得頂針之賜 精舍單草 別紙錄呈 太似疎略 或不礙眼否 祗幸斤正入單 伏望 餘因 病縮不備禮.

14. 여이송하승규

요사이 소문에 연경(燕京:北京)이 함락(陷落)되었다고 하니, 섬나라 일본 놈이 중국을 어지럽힘이 이렇게도 심할 수 있습니까? 자칭 황제(皇帝)가 감히 먼 전쟁터에까지 나와서 일본 놈을 응징(膺懲)한다고 하니, 일본 놈의 죄상(罪狀)을 차마 말로 다할 수 없고, 해괴막심(駭怪莫甚)하고 절박(切迫)한 일은 형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랑캐에 글이 있다 해도 중국에 글이 없는 것만도 못하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일본 땅에 서적이 전해져서 짐승 같은 놈들에게 구차하게 글을 알도록 했으니, 참으로 가증(可憎)스럽고 가증스럽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송(宋)나라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 어떻게 구차하게 보전하겠습니까?

종질(從姪) 편에 삼가 어버이 모신 가운데 몸이 편안하시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조용히 마음을 수양하시어 건강하시다니 높이 우러를 뿐입니다.

요즘 저는 온 식구가 별일 없으니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으나 단지 머리에 풍증(風症)은 평소 앓던 오래된 병이지만 근간에 더욱 심해저서 몇 군대 종기(腫氣)가 났는데, 이것이 나으면 저쪽에 새로 생기고 저쪽이 나으면 이쪽에 새로 생겨서 습진이 마를 여가가 없고, 밤낮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보름정도 되어서 조금 차도는 있으나 완쾌는 기약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머리는 양명(陽明)의 장부(臟府)로서 전신(全身)을 총괄하는 곳이기에 항시 가려움증이 낫지 않으니, 정신이 흔들림을 알 수 있습니다. 알던 것도 잊고 새로 들어도 잊으니 이것도 한 경험인 듯 합니다.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을지 뵙게 되면 깨우쳐 주십시오. 정사(精舍)의 단초(單草)를 별지(別紙)에 적어 올립니다. 너무 간단해서 혹시 눈에 장애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잘못된 곳이 있으면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병으로 이만 줄이고 편지의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15. 答尹兄滋文

拜晤多年 幾乎忘面 料襮惠翰飛到 何其盛眷 若是至勤. 承審比辰 經體增重 棣樂湛翕 昻慰且頌 弟新年所得 添齒而已 大塊上寄在 猶太倉一粒粟之 不若而所以貴於物者 年益新知 我獨年邁益昧 奈何 舍伯尙今沈吟 未有顯效 二竪之亂治 顧如是也. 示諭 曩者伏巖之行 未得晉拜 有客故也 想戞過例語也. 苟欲枉臨 客又何關 自是只怕棄我耳 大抵伏巖 古道銑 所謂黃龍也 有無未可的知 然龍脈相護衛自騎 自乘屈曲焉 如潛龍 盤旋聳碧焉 如芙蓉半開 挹長江呑大野 宜士夫可葬者 是爾 客亦知通脈十條否. 堪輿風水之說 余素不嫺 何敢妄道 但脈因氣而動 氣乘脈而靜者 爲眞此人子之所不得不知也. 昔者 睡隱先生 嘗著無山策 愚意則山豈無之 惡其世俗之逆求者言爾 惟吾兄 行有餘 勉之哉 都閣不備.

15. 답윤형자문

여러 해 동안 뵙지 못해서 얼굴을 잊을 정도인데, 뜻밖에 편지가 날아드니 어찌 이렇게도 돌보아 주십니까?

편지를 읽고 근간에 경서(經書)를 보시는 몸이 편안하시고 형제분들도 다 즐거이 지내신다고 하니 위로되고 하례(賀禮)드립니다.

저는 신년에 얻은 것은 나이뿐이니, 땅덩이에 덧붙어 사는 꼴이 창고에 곡식 한 알 만도 못한 존재로서 인간이 귀중하다는 것은 해마다 새로워져야 하는데, 저는 홀로 세월이 흘러 갈수록 흐리멍텅해 지는 듯합니다. 형은 해마다 학문이 진취되겠지만 저는 해마다 알든 것도 잊어집니다. 그러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의 백씨(伯氏)께서 아직까지 병환으로 계시는데도 특별한 약이 없으니 치료가 참 어렵습니다.

말씀하신 일은 저번에 복암(復巖)에 행차하실 때에 저의 집을 찾아오지 않은 것은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니, 그런 말씀은 보통으로 할 수 있는 말씀이지만, 굳이 저를 만나 줄 생각을 갖으셨다면 손님이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뒤로는 저는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두렵습니다.

대체로 복암이란 곳은 옛날 도선(道銑)이 황룡혈(黃龍穴)이라고 했으니, 그런 혈이 있고 없는 것은 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산맥이 서로 호위(護衛)해서 자연적으로 타는 듯이 굴곡(屈曲)을 이룸은 물 속에 잠긴 용이 웅크리고 있다가 솟구치는 듯하고, 연꽃이 반쯤 핀 것 같기도 하면서 큰 강을 끼고 큰 들을 안은 듯하니, 사대부의 묘지(墓地)로 적합하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당신 역시 통맥(通脈) 십조(十條)를 알고 있습니까?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은 저는 잘 알지 못하니 감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맥(脈)은 기에 따라 움직이고 기는 맥을 따라 고요한 곳이 참된 곳이니, 이는 자식의 입장에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옛 날에 수은(睡隱) 선생은 무산책(無山策)이란 글을 지었는데, 저의 생각에는 산에 어떻게 그런 이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세상 사람들이 분수에 맞지 않은 묘터를 구하려하기 때문에 쓴 글일 것입니다. 형은 학덕(學德)이 있는 분이시니 노력하십시오. 모두 그만하고 갖추지 못합니다.

 

16. 與士人金洛基 (二度)

◎聞聲名 祗切一見之願願 未及隨書以替問 近於逋慢而 其實非逋慢也. 能容否 卽詢玆者 靖體萬護 遠祝無已 生依劣分幸 就惟松山精舍 經營日久 倉卒未遑矣. 幸玆今春士論齊起 各自隨力出義 今纔竣工 然經費浩大 債帳未消 且悶且歎 想尊執事 崇儒尙德之義 不在人後 則興慕之誠 宜不尋常而 自鄙邊發論時 未及通告 厥後亦有時日 而工役所麽 悤悤度了 非不留意而未果 悚悶悚悶 惟冀惠賜光顧指示方針 謹不備.

◎月前下惠書 至今爲之在案 實細讀再三 意寄珍重 感多感多 祗因細故鱗疊 今纔修復 愧恧曷已 祗是盛度包荒 幸不我棄則 嚮仰之意 益勤平昔而 自不欲見棄於君子 原恕如何 更未審經體益衛萬重 益松山之役 旣竣工 別無大何 於分幸矣. 自近從事於東西阡陌 以灌漑 作田家業 只愧將來爲庸人而已. 那時旋尋舊熅 與一二同志 究得古人緖餘 又有餘 以高山流水 占得優閒境界 吟哦於林泉而自適 然 眼前無如君子之可同氣者 寧不歎歎 精舍之刱 實賴僉尊奮出之誠 只自監董而左右 以我謂之賢勞云. 旋切愧悶 惠助依數感領 益賀崇衛之誠 逈出尋常萬萬 不備禮.

16. 여사인김락기 (두 편)

명성을 듣고 한번 뵈려고 했으나 뵙지 못하고 인사 대신 글을 올리니 법도를 모르고 태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로 그런 것은 아니니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인사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존체(尊體) 편안하시기를 멀리서 빌어 마지 않습니다.

저는 용렬하게 살고 있습니다만 저의 분수에 비하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말씀드리는 송산정사(松山精舍)의 일은 경영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만은 갑자기 시작할 수도 없었는데, 다행히 금년 봄에 사림(士林)이 일제히 의논을 제기하여 각자 형편에 맞게 의연금(義捐金)을 내서 이제야 겨우 준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경비가 많이 나서 빚이 있으니 걱정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존집사(尊執事)께서는 유림(儒林)을 높이고 학덕을 숭상하는 의리는 남만 못지않고 사모하는 성의도 보통이 아니지만, 저번에 저희들이 의논할 때에 알려드리지 못했고 그 뒤에도 시일이 많이 지났으면서도 공사(工事) 시일에 시달려서 바쁘게 나날을 보내다 보니 생각은 있었으나 지금까지 알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한번 들려주시어서 방법을 지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달포 전에 보내주신 편지는 지금까지 책상 위에 두고 두 번, 세 번 자세히 읽어보니 진중(珍重)한 의미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단지 사소한 일로 지금까지 답장을 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넓으신 도량(度量)으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신다면 평소보다 더욱더 존경하겠습니다. 스스로 군자(君子)에 버림받지 않으려는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 편안하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송산정사(松山精舍)의 일을 이미 끝내고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으니 저의 분수에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요사이는 동서로 흩어져 있는 농지에 농사일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염려입니다. 언제나 옛 날에 배웠든 학문을 익힐 수 있을지 모르나 뜻 맞은 한 두 사람과 같이 고인의 글을 연구해보고, 또 시간이 있으면 경치 좋은 산수를 찾아서 산 속에서 시를 읊으면서 즐기고 싶으나 저의 주위에는 당신 같이 훌륭하고 뜻이 맞는 사람이 없으니 탄식할 뿐입니다.

송산정사를 창건한 것은 참으로 여러분의 성력(誠力)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저는 단지 감독했을 뿐인데 주위에서 저 혼자 수고했다고 말씀하시니, 도리어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찬조금(贊助金)은 보내주신 대로 잘 받았습니다. 특별한 성의에 더욱더 감사할 뿐입니다. 예를 갖추지 못하고 이만 올립니다.

 

17. 松山精舍營建時與諸益書 丙子

自近霖潦 無一日晴 客年恒旱之餘 足可慰矣. 然恒雨亦甚苦 謹詢尊體益益衛重 玆庸區區願聞 精舍之刱 祗幸僉尊誠力 所及如圖立筭 鐫感良深 浩大重役那可以速途爲貴 但太緩則 汗漫無期 故卜地于松亭之東 今二十六日 新開基 來六日丙子 安礎 願僉賢 卽須枉臨如何. 炎潦中 固請似或非禮 其於松山之事 同是無分然耳 都閣 謹不備.

17. 송산정사영건시여제익서

요사이 장마로 인해서 하루도 맑은 날이 없으니 작년에 계속해서 가물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하겠지만, 비가 계속해서 내리니 그 역시 심히 괴롭습니다. 삼가 인사말씀 올리겠습니다. 그간 존체 강녕(康寧)하신지 구구(區區)한 저로서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송산정사 창건(創建)하는 일은 다행히 여러분의 성력(誠力)을 입어서 계획을 세워 추진하기로 했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방대한 큰일을 빨리 하는 것만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단지 너무 더디면 지연(遲延)되어 기약(期約)이 없기 때문에 이 달 26일에 송산 동쪽에 터를 잡아 터를 다지고, 내달 초6일(병자)에 주춧돌을 놓으려 하니 여러분께서 왕림(枉臨)해주시기 바랍니다.

더위와 장마 중에 굳이 오시라는 것은 혹 실 예가 될 수 있으나, 송산의 일에 있어서는 모두가 같은 처지입니다. 이만 주리고 삼가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송산정사.

 

18. 與習齋丈羅秉集

積年阻候 景仰冞篤 謹未審靜養體候康寧 閤儀鱗吉 區區遠慕之至 生尋數不暇 沒於董役 憫憫 就惟精舍 曾爲經始而 一自工役後 雨日 尙多 晴日常小 僅以日小而工役雖勤 奈多日雨何 不惟是已. 凡事豫則不窘艱而完成 然算豫則 無過不及之虞者鮮矣. 凡今諸君子 義捐條 豫爲算定 而今冗費雖無 然算不及數 來頭工費 大有不給之慮 只增悶歎 見今渴澤盡漁 網雖設矣 魚不滿尺則 未可也. 釣雖垂矣 非渭竿則 未可也. 心目傖然 未知末梢之將如何爾 惟尊丈 特加商量萬萬.

18. 여습재장나병집

여러 해 동안 뵙지 못해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합니다. 삼가 문안드립니다. 존체 강녕(康寧)하시며 집안이 두루 편안하신지요. 멀리서 매우 염려됩니다.

저는 책 읽을 시간은 없고 감독하는 일에 바빠서 민망할 뿐입니다. 말씀드릴 송산정사 일은 이미 시작을 했으나 공사를 시작한 후부터 비오는 날이 많고 개인 날이 적어서 겨우 며칠 동안 일을 했으나 여러 날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은 미리 준비를 했으면 어려움 없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먼저 준비를 하게 되면 부족하거나 남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의연금(義捐金) 조로 예산을 정해서 다른 비용이 더 생긴 것은 아니지만 예산세운 돈이 부족하니, 앞으로 공사비(工事費)가 많이 부족 할 염려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또 걱정되는 것은 지금 의연금을 낼 사람은 힘대로 다 냈는데, 또 더 내라고 해도 큰돈이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지금 어망(魚網)을 쳤는데, 고기가 한 자 가량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비록 낚시를 드리웠지만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던 강태공(姜太公)의 낚싯대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캄캄하여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 존장(尊丈)께서 특별히 지도해 주시가 바랍니다.

 

19. 與止齋丈李敏璿

長夏庚炎 霖潦中 度了一曝之願 益切于中 謹未審 靜養艮震 以時葆寧 仰慕之至 冞切願聞 遇益 精舍董役中 一味慥慥 更無他 箇底好況 那時將見訖工之日乎. 日前開基時 立向之論 不一 悶切悶切 形家之說 吾所不聞 然必有天定之基 亦必有天定之向 則乘氣而坐 逆水而向 是堪輿取水之所同然也. 只今各執高見 坐癸坐壬之說 携式相持 嘗未一 奈何. 來六日 上樑豫定日 而今爲霖雨所滯 工役未及故 因爲安礎 枉駕如何.

19. 여지재장이민선

긴 여름 삼복(三伏)더위와 장마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마음속으로 맑은 날이 그리워집니다.

삼가 문안 올립니다. 존체 강녕하시고 계절에 따라 편안하신 지 우러러 사모(思慕)되어 더욱더 안후(安候)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요즘 저는 정사(精舍) 감독 일로 한결 같이 조심스럽고 즐거운 정황을 모르고 지냅니다. 언제쯤 공사를 마칠 날이 오려는지요?

일전에 터를 닦을 때에 방향에 대한 논의가 서로 일치하지 못해서 매우 민망합니다. 풍수(風水)의 말은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정한 터에는 반드시 하늘이 정한 방향이 있을 것이니, 지형(地形)에 따라 물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집을 짓은 것이 풍수들의 터 잡은 법과 같으나, 지금 각자 자기의 의견을 고집해서 계좌(癸坐)니 임좌(壬坐)니 하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다가오는 초육일은 상량(上梁) 예정일지만 지금까지 장마로 일이 늦어 져서 진척이 되지 않았으니, 주춧돌 놓을 때에 왕림(枉臨)해 주시기 바랍니다.

 

20. 與白癡尹忠夏海南白浦

聞聲名久矣. 只增瞻仰 猶未能獲拜德儀 先以替書問候 愧與悚 倂恕諒否 炎潦未霽 經體候衛道 重 竊惟精舍之營 曩者輪告 想審悉而 自後三日雨則 僅得一晴而延十日 僅三晴則幸耳. 役事窘艱 延支至此 徒悶曷已. 今十七日 期爲上樑 祗幸潦收 先臨之如何 辭縮謹不備禮.

20. 여백치윤충하해남백포

명성(名聲)을 들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단지 존경하는 마음만 갖고 한번 얼굴을 뵙지 못해서 먼저 문안 편지를 올리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위와 장마 중에 존체 강녕(康寧)하십니까?

저의 생각에는 정사(精舍)를 짓는 일을 저번에 두루 알려 드렸으니 잘 아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뒤로 3일 동안 비가 내리고 겨우 하루 개이니, 10일 동안에 3일 개인 것도 다행으로 생각됩니다. 일이 이렇게 지체되고 어렵게 되니 민망스러울 뿐입니다. 이 달 17일은 상량(上梁) 예정일이니, 혹시 비가 개이면 먼저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주리고 삼가 예를 갖추지 못하고 이만 올립니다.

 

21. 與松下

正朝拜 例也. 厥後卽擬晉拜 以討餘蘊而 今猶未獲 亦非心不存焉 但身爲物役 與心相背而然矣.惟前者惠然 未罄衷情 遽爾旋別 尤增悵仰耳. 伏問先生氣體候 恒多損攝 私悶衷情 人所不及知 而心禱衛道康寧之地 區區不已 曁侍體湯劑 萬衛祗祝 遇益自近益汨沒度了. 伏擬趨拜床下詳審 先生愼候如何 欲聞緖餘 又以今之惟未推類則 伏想數日間 果未果 亦未必爾. 竊恐先生之常念我不忘也. 酒一壺謹呈 先生頤養之道 庶其小輔乎. 以此誠意供之如何 只希亮會.

21. 여송하

정초(正初)에 세배드리는 것은 예로부터 하든 일이고, 그 뒤에 가서 뵙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일이 바빠서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번에 오셨을 때에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갑자기 헤어지게 됐으니 더욱더 서운합니다.

엎드려 문안 올립니다. 선생님 기체(氣體) 항시 불편하실 때가 많으니, 저의 민망스런 심정을 남들은 몰라도 마음속으로 건강하시를 비는 마음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웃어른 분도 복약(服藥) 중에 건강하시기 빕니다. 저는 요즘 일이 더 바쁘게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가 댁에 가서 인사드리려고 합니다. 선생님 우환(憂患)은 어떠하신지 소식이 궁금합니다.

또 지금 가서 뵈려 하지만 저의 생각에 수일 내로는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히 결정할 수가 없고, 선생님께서 저를 항시 염려하시기에 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술 한 병을 삼가 올리니 선생님 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합니다. 이것은 성의로 드리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2. 與丁雅士敬悅魯壽

南土之望 有丁雅士敬悅在此 先生之嘗稱者也 至今言猶在耳. 聞其聲名久矣. 適玆先生遺稿編葺之日 奉覽 至答丁敬悅書二度 未嘗不玩繹而亦可以償 先生深與之義耳. 苟非南土儒碩 曷嘗以方正學 與天通之意 曉諭及此乎. 若夫胤賢在洩之厄 依敎正誤 然 先生在世日 宜當正誤 而深憾差晩之歎也. 尊先閣記 旣爲正本而與原本相照 如眞寫之一髮無謬 良幸良幸 惠捐金何其 念過度耶 旋切未安 本文 不必久留 還呈 天涯懸懸 那可以遂宿昔之願  免沈責 未間 萬千默會.

22. 여정아사경열노수

남쪽을 바라보면 정아사 경열씨 같은 이가 있기 때문에 선생께서 칭찬하시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명성을 들은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저번에 선생님 문집(文集)을 편집할 때에 문집 내에 ‘정경열씨에 보낸 답장 두 통’을 보고서 몇 번 되새겨 읽어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인정하신 의미는 남쪽의 석학(碩學)이란 이유뿐이 아니고, 방정(方正)한 학문이 하늘의 뜻을 통했다고 비유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아드님이 누락(漏落)했으면 잘못된 부분을 다시 교정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선생님 계실 때에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니 매우 늦은 감은 있습니다. 존장(尊丈)의 선대(先代) 누각(樓閣) 기문(記文)은 이미 정본(正本)을 원본(原本)과 대조해서 털끝만치도 틀린 곳이 없이 분명하게 썼으니 다행입니다.

의연금(義捐金)은 과도(過度)할 정도로 많이 도와주시어서 도리어 미안합니다. 본문을 굳이 오래 둘 필요가 없어서 돌려보내 드립니다. 하늘 끝 먼먼 곳에 언제나 찾아뵙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해서 책망(責望)을 면할 수 있을지 천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3. 答鄭士人京黙

前月疊書之致 愧愧. 義捐名錄 兩人士 各持一卷 輪廻列邑 奈尊緘疊錄于名錄中 一再致煩於執事之尊眼 悶悚何諭 義捐惠送金 依感領 多賀多賀 苟非奮出之誠 何以及此. 秋潦已霽 新凉如蘇 承審尊體益旺 慰溸滿萬 益一如前日外 何盡道 只希嵬照.

23. 답정사인경묵

달포 전에 편지를 받고, 또 받으니 부끄럽습니다. 의연금(義捐金)을 낸 사람의 명단(名單)을 기록한 책을 두 사람이 각자 한 권씩 갖고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보여 드렸는데, 어쩌다가 당신의 편지가 그 책에 두 번 실려서 지적을 해주시니 죄송스런 마음 어디에 비할 데가 없습니다. 보내주신 의연금은 잘 받았습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참으로 분연(奮然)히 솟아나오는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까지 내실 수 있겠습니까?

가을장마도 이미 끝이 났으니 서늘한 기운에 생기(生氣)가 돕니다. 그간 존체 편안하시다니 매우 위로됩니다. 저는 전과 같이 생활하고 있으니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24. 與林雅士漢庠

數月積源 左右聲息 逈然阻邈臨楮悵 望益切停雲之懷. 謹問尊體萬衛 今惟精舍之役事事益艱 凡百一不稱意矧玆滯雨延拕 諸盤經費過於定算 宜非擔任之不明天使之然也. 今將孰尤源霽光顧如何 都閣不備禮.

24. 여임아사한상

몇 달 동안 계속된 장마로 사방의 소식이 모두 끊겨 편지를 쓰려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어서 그리는 우정(友情)이 더욱 간절합니다.

삼가 문안드립니다. 존체 편안하십니까? 지금 정사일은 일일이 더욱 어려워 저서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장마로 인해 지연되고 있으니 제반 경비만 더 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가 분명치 못한 탓이며 하늘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장마가 끝나면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이고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25. 與孫士人在平

支離霖潦 彌月不霽 稼穡之家 敢云其苦 但以工役言之 則苦苦莫甚 未審尊體何以衛護 精舍之刱 益賴僉賢奮出之誠. 如圖完成 感幸何斗潦收 一番惠然否. 未前默會爲好.

25. 여손사인재평

오래된 장마가 한 달이 되도록 그치지 않으니 농사하는 이를 보고 감히 괴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집일로 말하면 더할 수 없이 괴롭습니다. 요사이 어떻게 지내십니까? 송산정사(松山精舍)를 창건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성념을 힘입어서 하는 일이니 매우 감사합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면 한번 왕림하시기 바랍니다.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6. 與吳碩儒克卿高敞

只今幸賴僉尊衛賢之誠 精舍數棟 如圖營成 感慰滿萬 然當事不明 余平日所當深戒者也. 而遽當是役 經費頗極浩穰 儘出於定數之外 心身俱駭 亦未知將何以了役耳. 鄙再從錦沙翁 尤庸殫誠 余莫知其所以 而瞿瞿然自戒 同是慥慥不已. 汗漫心緖 楮毫莫旣 謹不備.

 

26. 여오석유극경 고창

다행하게도 이제야 여러분의 정성에 힘입어 정사(精舍) 몇 칸을 계획대로 짓고 있으니 매우 감사하고 위로됩니다. 하지만 일을 분명히 하지 못하는 것은 저가 평소에 경계하든 일이지만 갑자기 이 일을 당하고 보니 비용이 생각 외로 많이 들어서 마음속으로 놀랍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서 일을 끝낼 수 있을지 말입니다.

저의 재종(再從) 금사옹(錦沙翁)이 성력(誠力)을 다하고 있으니, 저는 그 까닭은 모르지만 놀라운 마음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또 같이 노력할 뿐입니다. 마음이 산만해서 이만 줄입니다. 삼가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27. 與士人庾熙泰

長霖積潦 咫尺猶如是阻隔 况宿舂之地乎. 不審玆者 體事萬重 區區至祝 如水東注 益看書無暇 只繼[日+咎]而已. 今精舍之役 彼窘此艱 萬無一稱而 天亦雨之 工多間日 祗是憫憫. 今月十七日 乃樑擧日也. 想跋涉甚艱則 枉臨固難矣 不敢固請 卽爲迴諭如何 都閣不備狀.

27. 여사인유희태

긴 장마 계속되는 비속에서 가까운 곳도 서로 만날 수 없는데, 하물며 먼 곳이야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염려되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책을 읽을 시간은 없고 단지 밤낮으로 정사(精舍)를 짓는 일에 매달렸으나, 모든 것이 어려움에 처하여 만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 역시 장마가 지게 하니 일을 할 수 없는 날이 많아서 매우 고민일 뿐입니다. 이 달 17일은 상량(上樑)하는 날입니다. 제 생각에 오시기 힘들 것이니, 굳이 오시라고 청하기는 미안하니 회답이라도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이고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28. 與鄭雅士綺源

此地窘艱 想尊意推及事 力不贍姑舍 滯雨延拖 土木運輸 尤難而諸般工役 假一月 則執役之日 僅一旬而已. 苟以凉生 宜有見晴之日耶. 那可以得不雨之時 亦無遲滯之患 炎潦中兄體增吉 尤庸努禱 益自近喫暑 微痛衝腹 時加時愈 心亦艱難 望須一番惠然 以助我役撓之窘如何 只冀片心相照.

28. 여정아사기원

이곳이 어려움에 처해있으니 그대 역시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힘이 부족한 것은 고사하고 장마로 토목 운반이 지연(遲延)되어 제반 공사에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 달 동안에 일한 날자는 겨우 십일 밖에 안 됩니다. 아마 날씨가 서늘해지면 날이 개이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비가 그치고 일이 잘 진척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더위와 장마 속에 형은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근간에 더위를 먹어서 속이 불편한데 때때로 더 심해지니 마음이 괴롭습니다. 혹이나 한번 오시어서 저의 어려움을 도와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저 마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9. 與藥軒李彦敎

積潦彌月不霽 今纔數日 不任淸爽味 况又木石盡輸 執勤者 各勤其役 匠事過半 自念畢役之如見其日矣. 玆者侍體聯棣湛洽 不任勤祝 益暑症猶不完 悶切耳. 第待凉生 與貴中諸益 同時惠枉 祗企 餘情緖悠悠 難以盡究.

29. 여약헌이언교

오래된 장마 한 달이 되도록 개이지 않다가 이제 겨우 며칠 동안 맑은 날이 이어지니, 기분만 상쾌할 뿐 아니라 나무와 돌도 다 운반하고 일꾼들도 각자 자기 일을 해서 공사가 반은 넘게 일이 됐으니, 아마도 멀지 않아 일을 마칠 것 같습니다. 요즘 부모님 모시고 형제분 다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더위 병이 완치(完治)되지 않아서 매우 절박합니다. 날씨가 서늘해지면 그 곳에 여러 친우(親友)들이 함께 오시기 바랍니다. 이만 정신이 복잡해서 심정을 다 전하지 못합니다.

 

30. 答林雅士光奎

懸想之際 獲拜惠函 鐫感何斗 謹承審秋色漸高 侍體候聯棣萬腴 仰賀且頌 益暑喫餘祟 今惟未全奈何 竊惟謙山 乃先生更號也. 前日 惠諭中 謙山不知爲某 而鄙等 致煩之意 還以爲訝愧悶耳. 先生曩歲 居于琴谷 今春 搬移于松亭 卽隣比相接之地 精舍建築 寔出於門徒之誠協 而亦賴僉益之優助 今至盖瓦 然各樣工費 與財瓦價 至于巨額 債券 已過累百 未知如何以就緖 是庸憫憫 訖工之日 似當專奇 惟冀尊駕光臨 左右商量 餘留不備禮.

30. 답임아사광규

그리워하든 참에 보내준 편지를  받으니 매우 감사합니다. 삼가 읽으니 가을은 깊어져 가는데, 어른 모시고 형제분들 다 편안하시다니 우러러 하례(賀禮)드립니다.

저는 더위 병이 아직까지 완치되지 못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겸산(謙山)은 우리 선생님의 두 번째 지은 호(號)입니다. 일전에 편지 속에 겸산이 누구인지 모르신다고 하시기에 저희들이 번거롭게 말씀드린 것이 도리어 의심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이 전에 금곡(琴谷)에 사시다가 금년 봄에 송정(松亭)으로 이사하여 인접해서 계시기에 정사(精舍)를 건축할 때에 제자(弟子)로서 협조하시었고, 또 여러분의 협조를 받아서 이제 기와까지 이게 됐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공비와 목재 값과 기와 값이 거액(巨額)이어서 빚이 이미 몇 백 냥이 되니 어떻게 주선해야 할지 이것이 고민입니다. 공사를 마칠 무렵 사람을 보내 연락드릴 것이니, 왕림(枉臨)하시어 여러 가지로 의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이고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31. 與韓斯文禎履

前者枉駕爲懇 其先人文字 拜謁先生時 眷眷情話 灑余胸襟 感佩尤多餘蘊 藏在肚裡 至今耿耿 不審迓新後 體事增吉 努祝不已. 益新年來 神昏愈甚 將無刷治之計 自憐奈何 竊惟先生 自客冬 寢處恒在不寧 悶切尤難狀耳. 顧 不文 焉能詩爲 但所囑珍重 不副盛意 宜逋慢近矣. 玆庸蕪搆草呈 露拙是愧 可恕覽否. 書不盡意 姑留不備.

31. 여한사문정리

저번에 오시라고 간청한 것은 그의 선대(先代) 문자(文字) 일로 선생님을 뵈었을 때에, 자세히 말씀해 주신 것이 나의 흉금(胸襟)을 씻어주어서 잊을 수 없는 감회(感懷)가 많은데 마음속에 남은 회포는 지금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새해가 되면서 강녕(康寧)하신 지 알 수 없어서 빌 뿐입니다. 저는 새해가 되어 정신이 더욱 혼미(昏迷)해지고 앞으로도 고칠 수 없으니 자신이 가련(可憐)할 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겨울부터 처소(處所)가 항시 불편하시어서 민망스럽고 절박한 형편입니다. 저의 글이 훌륭한 시(詩)라고 말 할 수 없으나 부탁을 받고 거절하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서투른 글을 적어서 올리지만 옹졸한 글 솜씨가 부끄럽습니다. 용서하여 봐 주십시오. 사연을 다 쓰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32. 松山精舍護喪所答慰狀 (辛巳七月日 喪禮時)

痛乎 斯文不幸 先生 奄忽棄世 樑折之痛 益深且切 奈晩學何. 今其尊慈 乃先賜慰狀 兼以厚賻多感多荷 尤不勝摧煎之至 主哀自護喪 勸數啜粥 無至傷孝 良幸良幸 送死可以當大事 而今旣渴葬痛乎. 禮不能違法奈何.

32. 송산정사호상소답위장 (신사칠월일 상례시)

슬프다, 사문(斯文)의 불행이여! 선생님이 홀연히 세상을 뜨시니 선생을 잃은 슬픔 더욱 간절하구나.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지금 존장(尊丈)들께서 위장(慰狀)을 보내 주시고 또 많은 부의(賻儀)를 주시니, 매우 감사하고 더욱 슬픔을 이길 수 없습니다.

상주(喪主)는 호상(護喪)의 권유로 죽을 자주 드시어 몸을 지탱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초상 장사는 큰일입니다. 이제 이미 장사(葬事)의 슬픔을 다했으나 예에 따라 법도(法度)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33. 與麟庭金泳濠 (二度)

◎自昨秋詢同 而十月之會 關雨延拖 議宿而猶未就 第念客冬 風雪比前無前故耳. 玆庸更詢 今二月十日會于松山 編葺秩序及經費多小 爛議商確 是固事豫不跲 底道理也. 幸須光臨 與之肩擔是役 如何 辭縮不盡意 猶希新年 味道益新.

◎遺稿印刊二月會議 旣詢協矣. 竊伏念姑勿刊 先生遺戒中訓辭也. 孰敢不服膺 但事機推薦 昨今相懸 後日之日 亦未必也. 盖凡剝喪 底陽線 果復則 曙天將有其日 然又安知天之未曙 幾許漫漫乎. 所以汲汲爲於不時者爾. 令胤來承審愼候 在於肘腕之暫厄不仁 尙今復仁否. 自後衛道益重 孶孶向道 祗祝不已 况今吾黨漸孤 專恃專恃 益猥擔重役 僭踰尤難狀 命駕亦在那間 只冀不遐.

33. 여인정김영호 두 편

지난겨울부터 10월에 모이기로 의논이 됐으나 날씨 때문에 오래된 의논이 성사(成事)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지난 겨울 눈과 바람이 예년보다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번 2월 10일에 송산(松山)에서 모이기로 의논이 됐으니, 책의 편집(編輯)과 경비의 다소에 대해 심도(深度)있게 의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은 원래 준비를 잘 해서 실수가 없어야 도리이니, 왕림하시어 이일을 같이 의논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줄이고 사연을 다 쓰지 못합니다. 새해에 도학(道學)에 정진(精進)하시기 바랍니다.

이월 모임에서 문집(文集) 출판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협의가 됐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선생님이 유고(遺稿)를 간행하지 말라는 유훈(遺訓)이야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단 일의 처지가 그때와 지금이 달라졌고, 또 후일에 더욱이 간행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세상이 교화(敎化)가 무너지고 있으나 도덕이 살아난다면, 앞으로 좋은 세상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세상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얼마나 늦어지겠습니까?

이렇게 불시(不時)에 서두르는 것은 선생님의 아드님이 몸이 불편하시어 팔을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팔을 쓰지 못하니 후일에 회복되시어 더욱 학문하시기를 빌 뿐입니다. 하물며 지금 어려운 처지에 전적으로 존장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외람되게 중임(重任)을 맡아서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언제쯤 오실 수 있겠습니까? 가까운 시일 내로 오시기 바랍니다.

 

34. 上習齋羅丈

一自叔季 世級漸汚 晩學 只賴先生 生而有依歸 今玆吾黨益孤 痛切痛切 遺稿編刊之議 恐或太早 然吾林中 誰某今旣老宿 無復能肩是役者 奈何 且惟文卽 先生心學也. 但能慕效而不能壽其傳 則是坐談好龍 而未免不食之譏 玆以修契日 似有公議 願尊丈 枉駕萬千 矧惟先生鄭重之託 擔任有誰 時菊露濃滴 不審靜養體候 向道益摯 老而不倦 區區仰禱 生自近百邪攻侵 况若菑田之不藝 只恐如是做去 難免荒屋了 安放之痛 去益深切 伏惟鑑亮.

34. 상습재나장

순후(淳厚)한 세상이 점점 각박(刻薄)해 졌으나, 저는 단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나면서부터 의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 유교(儒敎)가 쇠퇴하고 있으니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일은 너무 이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림(士林) 가운데 누가 지금의 원로(元老)이십니까? 다른 사람은 이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또 이 글들은 선생님의 마음을 전수(傳受)하는 학문입니다. 단지 사모(思慕)하고 본받은 것만으로는 오래도록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앉아서 이야기로만 전한다는 것은 남들의 비방(誹謗)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계(修契)하는 날에 공적(公的)인 의논이 있을 것 같으니, 어른께서는 기필코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직 선생님의 정중한 부탁을 누가 책임질 사람이 있겠습니까?

국화에 이슬이 맺히는 요즘 건강하시고 도학(道學)에 지극하시며, 늙으실수록 부지런하시기를 빌어 바지 않습니다. 저는 근간에 사심(邪心)이 점점 싹트기 시작하여서 도덕적인 정신이 해이(解弛)해저서 이대로 가다가는 도학의 정신을 다 잃을 것 같으니, 애석한 마음이 갈수록 더 간절합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라옵니다.

 

35. 與李雅士彦敎

頃者惠顧 奈何參商所營 探問其槩耳之如面討 未審稅駕穩謐 懸仰滿萬 益猥擔重役 遽作木居士之標榜 焦悶如之何. 自近麟庭 枉存 庶得一肩之休 貴中有文家氏名 別紙錄呈 望須賢勞企企 那間 更惠德音耶.

35. 여이아사언교

저번에 오셨을 때에 만나지 못해서 탐문(探問)만 해보아도 얼굴을 만난 듯 합니다. 무사히 잘 가셨는지 매우 걱정됩니다.

저는 외람(猥濫)되게 중요하고 어려운 소임(所任)을 맡았으나 갑자기 목조(木造) 인간 같은 존재가 됐으니 애태운들 어찌 하겠습니까? 요즈음 인정(麟庭)씨가 와서 저의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곳에 학자(學者) 가문(家門)이 있거든 별지(別紙)에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언제쯤 답장을 주시겠습니까?

 

36. 與許士人永奎

先生遺稿 今旣編摩 苟非左右之力 烏能及此 然而 蒐葺之倉卒 簡宜多錯 亦有闕文誤字 祗恐襲謬失其本文奧旨 尤庸悚仄 何以得免來君子之厚誚 尊先狀碣 幸無錯謬. 但祗孫錄 多有字佚而空圈而已 一番惠然 正寫之如何.

36. 여허사인영규

선생님 유고(遺稿)를 이제 책을 만들고 있는데, 여러분의 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하지만 창졸(倉卒)간에 책을 만드느라 잘못된 부분이 많고, 또 오자(誤字)나 빠진 글이 있어서 문장의 본뜻이 와전(訛傳)될 까 염려되니 더욱 죄송합니다. 어찌 후인들의 책망(責望)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존장(尊丈)의 선대(先代) 행장(行狀)이나 묘비명(墓碑銘)은 다행하게도 틀린 곳이 없으나, 단지 자손의 이름자를 잘 몰라서 비워둔 칸이 많으니, 한번 오시어서 바로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7. 與金雅士正熙

賢亦名下人 一事義詳知否 盖生一 事三而如一 彛性之同然也. 更無別樣底意 况幽明人鬼判焉 而先生在世之日 貴祖父 永爲終天客 那間 有摳衣之日乎. 泰山可摩 吾道不可以强摩 三軍可襲 淵源不可以强襲 奈之何驀入於東國淵源圖 襲之以松山嫡傳之承耶 從速改印 竟不掩後人之眼 好耳.

37. 여김아사정희

그대 역시 명성을 갖은 사람인지라 섬긴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대개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똑 같은 것은 사람의 양심과 도덕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니,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죽고 산 사람에는 귀신과 사람이 판가름 난 것이 아닌가?

선생님이 생존(生存)해 계실 때에 그대의 조부(祖父)가 별세(別世)하셨으니, 선생님에 예의를 다하여 인사할 때가 그때가 아닌가? 태산(泰山)은 오를 수 있지만 도리는 억지로 무시할 수는 없고, 삼군(三軍)은 습격(襲擊)을 할 수 있어도 학문의 연원(淵源)은 억지로 빼앗을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동국연원도(東國淵源圖)를 들여다보면 송산(松山)의 학통(學統)을 이은 분이 아니신가? 그러하니 속히 그 내용을 바로 잡아 주기바라네. 후인들의 이목(耳目)을 속일 수는 없으니,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걸세.

 

38. 與朴南坡炯得高興

涯角相懸 懸仰不已 際承德儀 感深益慰 未審返駕無艱貢祝尤多第其尊先狀碣及枉復書凡十四度 正本謄寫 幸無簡錯 尊亦諒悉否. 經費甚浩穰 來頭淸帳無涯 奈何. 債帳 有司事 然同任是役 那可以越置等視乎 只冀加商量.

38. 여박남파형득고흥

서로 먼 곳에 떨어져 있으니 그리움을 잊을 수 없든 참에 뵙게 되어 매우 감사하고 위로가 됐습니다. 가시는 길 별 어려움이나 없으셨는지요. 무사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대의 선대(先代) 행장(行狀)과 비문(碑文), 주고받은 편지들이 모두 14건(件)인데, 정서(正書)를 마쳤으니 다행하게도 틀린 곳은 없지만, 그대 역시 읽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경비가 너무 많이 나서 앞으로 빚을 청산할 일이 막연하니 어쩌겠습니까? 빚은 유사(有司)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같이 일을 맡아서 하는 입장이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 의논해 주시기 바랍니다.

 

39. 答朴雅士潤亮

獻舊發新 適玆惠函. 忽墜 怳若春來消息 書中 多有絜眷味 益感益荷. 所草章本 吟病餘 神思未完 尤難遽以掩拙 愧愧可言 壇所發起人員 俱有師弟之義 則以其師稱公 似乎輕歇太甚 宜以先生稱 合於事 一之道矣 正本時 隨意書之如何.

 

39. 답박아사윤량

새해가 되면서 보내주신 편지를 받으니 봄소식을 받은 듯 합니다. 편지 내용에 은근한 저의(底意)가 담겨있으니 매우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초고(草稿)만 해 둔 글은 병중(病中)에 정신이 혼미(昏迷)해서 완성을 못했으니, 더욱더 옹졸해서 부끄러움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단소(壇所)에 대한 발기(發起) 위원은 모두가 사제(師弟)의 인연이 있는 분들인데, 스승을 공(公)이라 말하면 지나치게 경멸(輕蔑)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한다면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당연하니, 정서(正書)할 때에 의논해서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40. 與道湖吳丈 (二度)

◎疇曩拜謁 誠不以他 祗以一曝而暫言承誨 鄙吝自消 遽以辭退 餘孼旋萌 百邪攻侵 伊今始知難移道途 甚易則種種承聆 以新將來 是固此生大願 而每以搖漾 未暇容易得 只增仰悵 况今無前風浪 東倒西頹 苟不堅泊絜着者 滔滔失(悼)棹 莫知所向 視諸左右 堅泊有幾 絜着有幾. 惟翁 矻矻砥柱頹波中 特立 後輩將依歸有地 生之高景 非餘他人比也. 峨冠敷帶 以時發眞詮 以嘉惠後人 是翁之任 亦惟翁之責(宜)矣. 任責重大 日益衛道葆寧乎. 生 糜惰日甚 自棄孰甚焉. 頃者 湧珍壁奉覽 敬吉怠凶 四字箴 銘珮而還 至今潛玩而已. 竊伏惟魯論註釋及四棟聯珠 晦菴夫子之手澤 尙今惟新 彷佛湧珍之陽 七分紫陽優耳. 矧惟後石先生講道之所 眞像猶存 後學之高景 百世曷嘗已. 栗谷全書中 疏箚二卷 奉讀 尙未了文義 泛應曲當 閫奧重重 顧末學 不敢妄加理會 然祗欲强求辭義 竊恐以辭害義看也. 餘伏冀道體益重.

◎微陽添線 拜床之願 日絜而寒呼 僅過困縮 自近彌深 素忱未果 祗增內頌 謹問道體萬衛 自樂之餘 益眷眷不知年老 而以警發之非吾丈丈 而爲誰嚮仰日勤 生數年來 不揆質魯 敢欲尋數 而志業日頹 就緖無路 奈淟認何 只恐如是 竟不免庸人而已. 不敢陳情.

40. 여도호오장 (두 편)

◎전 번에 뵈올 때에 전과같이 정성으로 인사드리지 못하고, 단지 잠시 동안 가르치시는 말씀만 듣고 나도 사심이 사라졌으나, 작별 후 다시 잡념이 생겨서 온갖 사심이 생기니 이제야 정의(正義)를 따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까운 거리면 종종 뵙고 가르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지만 매일 분주히 살다보니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아서 단지 그리움만 더해집니다. 하물며 지금은 어지러운 세태여서 정의(正義)가 무너지는 세상이니, 특별히 지조(志操)있는 자가 아니면 양심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두리번거리는 세상이니, 양심(良心) 갖은 사람이 몇이나 되며 정의를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직 어르신만이 어지러운 세태(世態) 속에 꿋꿋이 서서 후배들을 지켜주시니, 저들이 우러러 존경하는 분이 어르신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시고 진정한 정도(正道)로 후인을 인도하심은 어른의 소임이요, 책임이기도 합니다. 중대한 책임을 갖으셨으니 존체(尊體) 잘 보전하십시오.

저는 게으름이 날로 심해져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용진벽(湧珍壁)을 구경하니 ‘경길태흉(敬吉怠凶:공경하면 길하고 게으르면 흉하다)’이라는 네 글자에 감명을 받고 돌아와서 지금까지 음미(吟味)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논어(論語) 주석(註釋)과 네 기둥의 주련(柱聯)에 회암(晦菴) 주부자(朱夫子) 글이 아직까지 완연(宛然)히 남아있어서 용진(湧珍)의 글과 비슷하지만, 자양(紫陽)의 것이 보다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곳은 후석(後石) 선생이 학문을 가르치시든 곳이고 진상(眞像:肖像)이 있는 곳이니 후학들의 존경심이 백세(百世)가 지나간들 그칠 수 있겠습니까? 율곡전서(栗谷全書) 가운데 소(疏)와 차(箚) 두 권을 읽어 보았는데, 오묘(奧妙)하고 곡진(曲盡)한 글 뜻을 잘 알지 못하면서 저 같은 자가 감히 그 내용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지만, 단지 글자의 뜻만 해석하려 한다면 아마 전체 의미에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만 줄이고 존체(尊體) 건승(健勝)하시기 바랍니다.

◎동지(冬至) 후에 날씨 따뜻해지니 가서 뵙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 추운 날씨여서 움츠리고 어렵게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 뵙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만, 뵙지 못하고 있으니 저절로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삼가 문안드립니다. 존체 건강하시고 즐거이 지내시면서 학문에 심취하여 세월 가는 줄 모르고 계시다니, 저들이 경계하는 마음을 존장(尊丈)이 아니시면 누구에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수년동안 자신의 우둔(愚鈍)함은 생각지도 않고 공부를 하려 하지만, 날로 뜻이 해이(解弛)해져서 뜻을 접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단지 두려운 것은 이대로 간다면 범인(凡人)의 범주(範疇)를 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말씀을 다 드리지 못합니다.

 

41. 與梁丈炫

十載前拜謁 怳如昨日 豈其光陰欺我哉 近因族姪 憑審道經體候葆重 賢胤 亦得璋慶 昻賀昻賀 生近來喪禍荐酷 前年 遭先伯喪 又(明)去年 哭從先伯 門祚不幸 至此甚也. 只是庸拙 寄在陽界 備得許多辛楚 尤難盡狀 頃者 以門命 爲懇其碑陰 顯刻之筆滋 拜造軒展 只幸頫賜容接 不孤一舍强跰足之誠意 感荷益甚 鄙先累代石物 營之未遑者 久矣. 今纔伐石 用衛墓道 抑有待於吾丈之健筆而然歟. 幸得以侈碣陰則 尤賀泚筆之盛意 就惟陰記四通 面刻五度 專介伏呈 烏可曰 爲先之道乎. 禮當躬進 而自近汨沒 比前益多 或可原恕否 祗冀以時衛重 俯戀及我.

41. 여양장현

10년 전에 인사드린 것이 어제 같은데, 세월이 어찌 이렇게도 빠릅니까? 근간(近間)에 조카 편에 존체 건강하시고 손자도 보셨다는 말을 들으니 하례(賀禮)드리겠습니다.

저는 근년(近年)에 거듭된 상화(喪禍)를 당했습니다. 작년에는 백씨(伯氏)께서 별세(別世)하시고, 그 전년에는 종백씨(從伯氏)께서 별세하시니, 문중(門中)의 운수가 이렇게도 불행할 수 있습니까? 단지 못난 저만 살아서 여러 가지 고역(苦役)을 담당하고 있으니 더욱 어려운 처지입니다.

저번에 문중의 명의로 비문(碑文)을 부탁드리려고 뵈러 가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저에게 몇 십리 달려간 성의를 거절하지 않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선대 여러 대의 석물(石物)을 세우려고 경영한지 오래 됐으나 아직까지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돌을 다듬어 준비하고 있으니 존장의 훌륭한 글을 받아서 비석에 새기려하니, 수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 비(碑)에 새기려는 글은 뒷면의 기문(記文)이 네 건(件)이고, 전면(前面)에 새길 글이 다섯 건인데, 사람을 시켜 보내 드리는 것이 조상을 위한 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제가 가서 말씀드려야하지만, 근간에 복잡한 일들이 전보다 많아서입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만 건강하시고 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42. 答金大雅基碩

惠書不遠 其遠而來 滿紙情緖 字字顔面 且感且慰 憑審僑中體事益護 秋冬間 作西北之遊 極覩宇宙之無窮 登首陽山 謁夷齊廟云 尤爲瓢係之所艶賀 益自數年來 比前益怱撓耳. 鄙先景武公及滄洲公墓 立碑事 晝宵焦悶而已 自顧劣狀 董監是役 只怕竣工無日 所諭岳陽樓記 四菩薩閣記 (騰)謄草付呈 荒筆亂畫 或不滿盛意耶. 更懇朴晦山之筆 如何. 荐承惠諭 如獲朋錫 珍感何斗 况晦山之筆 不惟鳴諸當世 可傳百歲 而筆名之不朽宜矣. 余之所以 幸得此筆 以榮碑面 實賴君子之用力也. 永慕齋額 還鄕時 携帶云. 感荷益多 但碑面不書姓而 祗書雪齋先生 是仰懇時本草之所佚也. 悶且愧悚 竊想不書姓 宜無可恥之義 故以是顯刻餘 面晤不遠其日 姑留不備.

42. 답김대아기석

먼길을 멀리 여기지 않고 편지를 보내셨는데, 종이에 가득한 정서(情緖)는 한자 한자가 얼굴을 대한 듯하니 감사하고 위로가 됩니다. 요즘 객지 생활에 건강하신지요?

가을이나 겨울 사이에 서쪽 행차(行次)를 하시어서 세상 넓은 것도 구경하시고 수양산(首陽山)에 올라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사당(祠堂)을 참배(參拜)하려 하신 다니, 고주박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저로서는 부럽고 하례들일 뿐입니다.

저는 몇 년 사이에 더욱 바빠졌습니다. 저의 선조(先祖) 경무공(景武公)과 창주공(滄洲公) 묘소에 비(碑)를 세우려고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 일을 맡아서 감독하니 일이 늦어질 가 두려울 뿐입니다. 말씀하신 「악양루기(岳陽樓記)」와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를 써서 보내드리니, 글씨가 옳지 못해서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회산(朴晦山)에게 새로 써 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거듭된 글을 받으니 보물을 얻은 것 같아서 무어라 감사들일 말이 없습니다. 하물며 회산(晦山)의 글씨는 당대(當代)에 명성 있는 글씨고, 백대에 이름이 전해질 것이니, 저가 이분의 글씨로 비명을 새긴 것은 참으로 존장께서 말씀해 주신 덕분입니다.

영모재(永慕齋) 편액(扁額)은 고향으로 오실 때에 갖고 오신 다니 더욱 감사할 뿐입니다. 단지 비에 성(姓)은 쓰지 않고 설재(雪齋) 선생이라고 만 썼는데, 이것은 아마 부탁드릴 때에 성자(姓字)가 빠진 초본(草本)을 적어드린 것 같아서 민망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저 생각에는 성자(姓字)가 없다고 해도 수치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새겼습니다. 머지않아 뵈올 것이니, 이만 줄이고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43. 答李斯文會升晩湖谷

余嘗固陋 與世絶交 亦無緣於域內碩德矣. 幸玆尊駕聯璧 枉臨以講世好 儘是夢寐之間 芥琥相資 况一幅惠書 又出料外 感佩卽多 愧恧之中 圭復至三 繾綣情緖 如是摯勤 將何以仰謝 更未審書後有日 侍體湛洽聯棣 以是勞禱 益憒憒度了 儘無好況 惠書中扶正斥邪之諭 宜是相愛間例語 然揆分覽矣. 顧寡聞 猶未敢於解蒙啓昏 矧惟斥扶之任 可當乎. 悚憫來倂 不能究其餘蘊.

43. 답이사문회죽만호곡  

나는 원래 고집스럽고 어리석어서 세상을 등지고, 또 역내(域內)의 석학(碩學)과도 인연이 없습니다. 다행하게도 사문(斯文) 형제분께서 왕림하시어 세의(世誼)를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꿈이듯 싶습니다. 부족한 저를 상대해 주시고 또 편지를 보내주시니 참으로 뜻밖의 일이 여서 감사하고 부끄러우면서, 보내주신 글 두 번 서번 다시 읽어보니 은근한 인정이 서렸으니 무엇이라고 사례할 말이 없습니다. 편지하신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부모님 모시고 여러 형제분들 편안하신지요. 마음으로 빌어마지 않습니다.

저는 무료하게 나날을 보내면서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 내용에 “정도(正道)를 부지(扶持)하고 사도(邪道)를 배척(排斥)한다[扶正斥邪〕”는 말씀은 서로 아껴주는 사이에 보통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원래 아는 것이 없으니 남들을 깨우쳐주고 지도할 위인이 못되니, 어찌 그를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죄송스럽고 민망할 뿐입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44. 與族兄遇祚

頃者枉駕 繾綣辭意 至勤至微 以講百代之惇誼 珍感尤多 尙今耿結於肚裡 宿昔愈絜 不審返旆後 靜體增重 覃儀均吉 區區願聞 族弟 一如前狀 分幸何諭 金氏齋記 將爲揭板 則請於燕軒高手宜矣. 何必求野鶩乎. 所託珍重 不孤盛誨 蕪搆郵呈 然竟爲不敢用矣 餘辭縮不知裁.

44. 여족형우조

저번에 오셨을 때에 다정한 말씀이 아주 은근하고 온당하시어서 백대를 이어가도 믿음직 한 족친(族親)의 정의(情誼)를 말씀해 주시니, 많은 감화를 받아서 지금까지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돌아가신 후로 존체 강녕(康寧)하시며 온 집안이 편안하신 지 궁금합니다.

족제(族弟)는 전과 같이 지내고 있으니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김씨(金氏) 제사(齋舍) 기문(記文)은 현판(懸板)으로 만들어 걸려고 하다면, 당연히 연헌(燕軒) 같이 훌륭한 솜씨를 두고 하필이면 부족한 저에게 부탁을 하십니까? 부탁 말씀을 거절할 수 가 없어서 부족한 글 솜씨로 지어서 우편(郵便)으로 부쳤습니다. 하지만 쓸 만한 글이 못됩니다. 이만 말을 줄이고 무어라 할 말이 없습니다.

 

45. 答崔雅士潤魯

月前 以寶山修契事 俯賜輪牒 感幸良深 卽當晉謁 以慰僉尊之誠 表其微誠之爲萬一 而奈心與物違 尙多拘礙耶. 握毫無暇 今纔修復 悚憫不已 更審漢臘將窮 經幌體事 聯護萬衛 仰賀無斁 益但今臘際 一般辛楚 尤於茶飯 平素日悶迫 何可言 况今苟全無策 同是處堂燕 又復何求 只兼耕讀 朝出暮歸 寤寐古人緖餘 是吾眷眷者 而今猶未獲 可慨也已 餘只希迓新增吉.

45. 답최아사윤노

달포 전에 보산(寶山)에서 수계(修契)할 때에 통문(通文)을 보여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당연히 즉시 찾아뵙고 여러분의 성의에 위로를 들이고 만 분의 일이라고 정성을 표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구애(拘碍)되는 일이 많아서 편지를 쓸 겨를도 없다가, 이제야 겨우 답장을 쓰게 되니 송구할 뿐입니다. 금년도 다가가는데 학문하시면서 건강하시다니 하례(賀禮)드릴 뿐입니다.

저는 금년 12월은 일반적으로 괴로운 처지지만, 더구나 양식 부족으로 고통이 평소보다 심해서 민망스러움을 말로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전연 계책이 없고 모두가 어려움을 같이 당하고 있으니, 또 누구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단지 농사지으며 글 읽으며 아침에 일 하러 나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옛 사람의 정서가 자나 깨나 나의 소원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러하지 못하니 개탄(慨歎)스러울 뿐입니다. 이만 줄이고 새해에 더욱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46. 答吳大雅吉洙錦北詩社

蘭亭已古 香山遠矣. 厥後千載社之名 幾乎熄矣. 玆者 承惠諭 貴中有錦北詩社 而社員 近三十人 仰艶無已 蘭社名諸唐 而能詩者僅三十一人而已 惟盛社之欠一人 欠其欠矣. 不可遽謂之欠也 烏可以社員之多 稱其多乎哉. 苟如右軍者 果幾人 與蘭社相高下 亦無疑 承審省體萬相 社中僉賢 輔仁以講 亦各言志 而論討情話 慰賀滿萬 益踽踽中 所履百不稱一 歎歎何及 近以墓宇修葺事 留于月淸 汲汲於董役 未副盛誨 只增悶悶 可原恕否 因役撓 略陳謝狀.

46. 답오대아길수금북시사

난정(蘭亭) 모임도 옛 일이 되었고 향산시사(香山詩社)도 오래 된 일입니다. 그 후 천 년이 지나면서 시사(詩社)가 생겨나고 없어졌습니까?

이제 편지를 받으니 귀하(貴下)의 향중(鄕中)에 금북시사(錦北詩社)를 만들었는데 참여하는 회원이 근 40명이라 하니 우러러 부러울 뿐입니다. 난정시사는 당(唐)나라 때 유명했지만 시를 잘 짓은 사람은 겨우 31명이였는데, 지금 금북시사는 난정시사에 비해 한 사람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것이 흠이라면 흠일 수도 있지만 어찌 흠이라고 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시사 회원이 많은 것으로만이 따질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왕희지(王羲之) 같은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난정시사와 자웅(雌雄)을 겨룬다고 해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편지를 읽으니 시하(侍下) 모든 안부가 두루 편안하시고, 시인(詩人) 여러분들이 서로 도우며 학문을 강론하고 시를 쓰면서 정담(情談)을 주고받는다니, 매우 위로되고 하례드립니다.

저는 외롭게 지내는 중에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한탄뿐입니다. 근간에는 묘우(廟宇)를 짓은 일로 월청(月淸)에 있으면서 감독하는 일이 바빠 부탁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니, 단지 민망스러울 뿐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일이 바빠서 대강 말씀드립니다.

 

47. 慰晩隱鄭琫采

省禮言 凡爲人父而哭其子 覆載間難堪之慘 復夫何言 况乎胤君 比諸人子尤特 而胡至此極 今其晩隱之心 以謂人皆無之 我何獨有 而泛觀今古 非所獨有也. 萬千坦懷之如何 然積乎胸中 而難忘者 倫情然也. 强坦之而無可奈爲 則但當不爲嬰情 無至於心疾 亦不害於倫理耳. 徒言豈可慰 僅以麯味數盞 專介送呈 幸須恕領 飮輒寬慰 如何 不備疏狀.

47. 위만은정봉채

예의를 생략(省略)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당한 것은 세상에 가장 참기 어려운 슬픔이니, 무어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하물며 윤군(胤君)은 남들보다 특수한 인물인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지금 당신의 심정은 남들은 다 안 그런데 나만이 왜 이런 참변을 당하느냐고 생각하시겠지만, 고금(古今)을 두루 살펴보면 혼자만 당하는 일은 아닙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십시오. 하지만 가슴에 쌓인 근심 잊을 수 없는 것은 천륜(天倫)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너그러이 가지려 해도 잘 되지 않으니, 단지 인정을 버리면 마음에 병이 되지 않고 윤리에도 해(害)가 되지 않습니다. 빈말로만 위안을 도려도 위안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사람을 시켜 술을 몇 잔 보내드리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술을 마시면 위안이 되지 않겠습니까? 갖추지 못하고 소장(疏狀)을 올립니다.

 

48. 慰吳喪制吉洙 (父在而內艱終喪日)

省式 喪三年而終 萬古不易之正經 難容一髮置私於其間 但親嚴在而 遭艱 則降殺朞年 亦今古通義. 竊惟孝心純至 以日月不居 痛迫益切 然孝子痛切之心 不惟喪 而後止終身孺慕 是孝子之大節 則惟冀以禮寬 抑無至以孝傷孝之地 疏祝不已. 益朞服中踽踽度了 殆無好況 情地攸在 宜當匍匐問慰 而家兒替送 悚憫來倂略 不備疏狀.

48. 위오상제길수 (부재이내간종상일)

예의를 생략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치는 것은 만고(萬古)에 바꿀 수 없는 법이니, 사심(私心)으로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덜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고 어머님 상을 당해서 1년으로 강복(降服)하는 것도 역시 예로부터 전해오는 일입니다. 내 생각에 상주(喪主)는 지극한 효심으로 나달을 보내면서 더욱 애통해 하겠지만, 효자의 애통해 하는 마음은 삼년상뿐이 아니고, 평생토록 어린이가 엄마생각 하듯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효자의 법도이니, 예로 너그러이 생각하시고 집상(執喪)하다가 건강을 해치지 마시기 바라면서 위장(慰狀)을 올릴 뿐입니다.

나는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쓸쓸히 지나면서 즐거움도 모르겠습니다. 인정으로 봐서 당연히 가서 위로를 드려야 하지만, 대신 아들을 보내게 되니 죄스럽고 민망합니다. 모든 것 생략하고 예를 갖추지 못하고 위장을 올립니다.

 

49. 與樵雲金基碩

益只幸與之同庚人 竝生玆土 緊眷情契 比諸茶飯 知舊尤庸切偲 而奈十數年 參與商左 隔一二歲 而一着 僅不至忘面 歎歎莫及 孰料吾兩地之契交 如是疎濶耶. 然千里相照 雖有重疊之山澤 不得以間之 可小慰耳. 不審炎潦 覊中體候 益衛萬護 勞祝不已. 益係瓢心事 猶未靜定度了 近喜雨滂沲 西疇之樂 甚甚慰 樵雲本宅渾儀 均洽 只是慰賀 鄭君 吟病數日 遽作古人 慘怛尤難狀 永慕齋 是雪齋祠講堂 而舊有額號 字畫不明 故願得健筆 而侈楣顔 而第待議詢 更圖之 只希黙會.

49. 여초운김기석

저는 다행하게도 나이도 동갑이고 같은 곳에 살면서 끈질긴 교계(交契)로. 서로 생활을 도우면서 친구의 정성이 간절했는데 어쩌다 십 수년 동안이나 헤어져서 몇 해 만에 한번씩 만나게 되어 겨우 얼굴 잊지 않을 정도이니 탄식스럽습니다. 우리의 우정이 이렇게도 소활(疎闊)해 질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천리 거리에 떨어져 살면서 산과 물이 겹겹이 가려져 있지만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위로를 하면서 위로를 보내고 있습니다. 더위와 장마 속에 객지 생활을 하면서 건강하기를 빌 뿐입니다.

나는 표주박처럼 한곳을 떠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불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근간에는 흡족한 비가 내려 농사하는 심정이 매우 위로됩니다. 초운(樵雲)은 본댁의 온 식구가 다 편안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정군(鄭君)은 며칠 알 타가 갑자기 고인(故人)이 되니, 참혹(慘酷)한 정상(情狀)은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영모재(永慕齋)는 설재사(雪齋祠)의 강당(講堂)인데, 옛날 현판(懸板)이 있으나 글자가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글씨를 구해서 새로 현판을 만들어 걸고 싶은데,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해서 할 것이니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50. 答同族人遇允 (萬石里)

省式 往年哭舍伯 今年哭從伯 奈喪禍荐酷 至此甚耶 焦悶不已. 承審體韻敷腴 棣儀均洽 慰萬慰萬 益功服中憂虞層生 此事難爲他人道 只幸眷庇無警耳. 年前贈惠詩 至今感佩 益荷百代親親之誼 有時披玩 二十八字 都是情實際語 苟非作家手筆 烏能及此 欽艶無已. 今纔蕪搆和呈 以報銘感之萬一 而辭益露拙 未協韻 愧恧奈何 每握毫 只增早年不讀書之歎 餘敦誼 從此益厚 不備疏禮.

50. 답동족인우윤(만석리)

예의를 생략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작년에 백형(伯兄)이 별세(別世)하시고 금년에 종백씨(從伯氏)가 또 별세하시니, 상화(喪禍)가 이렇게도 혹심(酷甚)할 수 있겠습니까? 애타는 심정뿐입니다. 그간 건강하시고 형제분들 다 편안하시다니 위로가 됩니다.

저는 기년복(朞年服)을 입은 중에 우환과 걱정이 첩첩이 생겨서 남들에게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온 식구가 별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작년에 보내주신 시(詩)는 감사한데, 백대(百代)가 지나도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정의(情誼)를 더욱 입는 듯합니다. 때로 읽어보니 스물여덟 글자 모두가 인정이 담긴 글이니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매우 부러울 뿐입니다.

이제야 겨우 답장 시를 올려서 만분의 일이라도 감사한 뜻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글이 너무 졸작(拙作)이여서 화답(和答)하는 시로 부족하니 부끄럽습니다. 언제나 붓을 잡을 때마다 어려서 부지런히 공부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이만 줄이고 돈독(敦篤)한 족친(族親)의 정의가 더욱 돈독하기 바라면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소략(疏略)하게 올립니다.

 

51. 答奉卽弼碩

滿幅手滋 甚爲幽懷 宿舂雖遠 今若縮地相對 因知重侍棣况平迪 欣幸何量 但所望做履日新 鄒經讀了否 隨問隨答 仍爲章綴 然只是此義看則未也. 嘗不言易而 合於時中之義 亦其引詩曉諭者 多而賦興之味 包在其中 讀者不知此義 而徒能讀 雖曰 讀云 何益之有 家兒 亦有書不多及.

51. 답봉즉필석

한 폭(幅) 가득한 편지를 받으니 감회가 깊습니다. 서로 먼 곳에 살면서 이제 축지(縮地)나 한 듯이 서로 만나게 되는 듯합니다. 따라서 형제분들이 다 편안하시다는 소문을 들으니, 다행함을 무어라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날마다 새롭게 공부를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맹자(孟子)』는 다 읽었습니까? 물음에 따라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문장을 쓸 수 있어야 하지만, 이런 것이 뜻도 맞지 않고 말도 쉽지 않으나 시중(時中)의 뜻에 합당하면, 역시 시의 의미를 잘 인용한 것이고 부(賦)와 흥(興)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의미를 모르고 읽기만 한다면 아무리 읽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집의 아이 역시 글을 읽어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52. 答徐雅士正洙

昨今令胤 風雪訪余 一宿旋別 別後雅度 殆難忘情 所囑齋韻 蕪搆 已宿 而今纔起送 覽後斤校敎否 仍審迓新後 侍體益淸穆 閤儀平吉 實協至禱. 益新年來 頓絶世味 但所益 齒一而已外 何盡道 都閣不備.

52. 답서아사정수

어제 형의 자제가 눈이 내리는 날씨에 나를 찾아와서 한밤만 자고 떠나가니, 보낸 후에 마음속에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탁하신 재사(齋舍)에 대한 시는 졸작(拙作)이지만 지어서 어제서야 부쳐드립니다. 보시고 고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새해에 어른 모시고 편안하시며 온 집안이 두루 행복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신년 들어서 세상사는 재미를 모르고 단지 나이만 더 먹었을 뿐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만 줄이고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53. 答春圃吳秉銓河東

自秋至冬 便濶 自擬探問貴中消息 而祗是瞻翹不已. 適玆惠翰忽墜 珍感沒量 矧又盛諭 翼如翼如 想艱辛 得幸會 而圖成則 益之所感珮 尤難形諭 其中所艱 道途三百程 甚不容易 而率眷何以跋涉 數十世安土之餘 倉卒搬移 人情所難也 吾將見幾圖之 諒照如何.

53. 답춘포오병전하동

가을부터 겨울까지 소식이 끊겨 멀리 바라보며 소식을 탐문중이었는데, 이제 홀연 편지를 받으니 감사한 마음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하신 말씀이 도움이 됩니다.

어렵겠지만 다행히 만나뵐 수 있으면 저의 감회는 더욱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길이 3백리나 되니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수십 대(代)를 살던 곳을 어떻게 온 식구가 쉽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창졸(倉卒)간에 떠난다는 것은 인정상 어려운 일이니 제가 앞으로 한번 뵐까 합니다.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54. 與吳兄永烈

頃者仰瀆 未承頫諭 繼而修問崇聽否 尤庸愧愧 不審漢臘不遠 侍體百福 令伯損節復和 閤儀均慶 倂頌禱 益未幾添齒 齒痛添劇 先失一齒 凡他做爲得不稱失 矧惟髮膚不敢毁 先聖格訓也 今其齒不獲全 只增悶痛 第惟兄慈候在堂 康寧濟壽 是宜吾兄善養之力乎. 口體之養 只爲孝子之疏節 然次於養志 此果品 以供一時之養 如何 只冀情照.

54. 여오형영렬

저번에 편지를 올리고 답장을 받지 못하고 다시 문안편지를 올렸는데 받으셨습니까? 더욱 부끄럽습니다.

궁금합니다. 금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른 모시고 편하시고 백씨의 우환도 많이 좋아지시고, 집안이 편안하시기 빌 뿐입니다.

저는 얼마 안 있어서 나이만 더 먹을 것이지만 치통(齒痛)이 심해서 먼저 이 한 대가 빠졌으니, 다른 하는 일은 별 탈이 없으나 생각하니 부모님께 받은 몸을 상하지 않게 살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훈계(訓戒)인데 이제 이도 온전히 보전하지 못했으니 더욱 민망할 뿐입니다.

형은 어머님이 계셔서 강녕(康寧)하게 오래 사시니, 그 것은 형이 잘 봉양(奉養)하신 덕분입니다. 편안하게 모시는 것도 효하는 법도이지만 그 다음은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하니, 이 과일로 한번 대접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지 정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55. 與李雅士敦圭

客冬松山之別 如夢如眞 日後 祗欲因便探候 但涯角相懸 信音亦阻 益切停雲之懷 不審侍體萬重 棣樂湛洽 倂爲黙禱 益近以齒痛 每呑物囓 不知味 苦悶 第其爲親而作亭 囑余爲記 亦爲親也. 深感孝思之摯 勤不獲辭 蕪搆已有日 而露拙益愧 藏之久矣. 旋念恥其掩拙而 未副盛意 則負過益多 玆庸付呈 覽後覆甁如何.

55. 여이아사돈규

지난 겨울 송산(松山)에서 작별한 것이 꿈같기도 하고 생시(生時)같기도 합니다. 그 후로 인편에 소식을 들으려 했으나 먼 곳이어서 소식조차 끊겼으니 저는 더욱 우정이 간절합니다.

궁금합니다. 부모님 편안하시고 형제분들도 즐겁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저는 근간에 치통으로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니 고민입니다. 형은 요즘 아버님을 위해서 정자(亭子)를 지으시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시니, 역시 부모를 위한 일인지라 지극한 효성에 감회가 깊고 부탁 말씀 거절할 수 없어서, 글을 지은 지 며칠 됐으나 졸작(拙作)이어서 오랫동안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졸작이 부끄러워 부탁을 거절하면 과오(過誤)가 더욱 클 것 같아서 부쳐드립니다. 보시고 병마개나 하시면 어떠하겠습니까?

 

56. 寄家兒日勉

而知夫遠遊之義乎否. 父母在 不遠遊 是固前聖所戒也. 凡事不求 則 元無果落入口之理 然求於分外而不止則 狼狽立至 而災禍響應 汝則當旋尋失棹溯流 而無有忘返之歎 可矣 他不暇及.

56. 기가아일면

너는 멀리 여행하는 도리를 아느냐? 부모가 있는 사람은 멀리 놀러 가지 않은 법이라는 것은 원래 성인의 말씀이시다. 모든 일은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저절로 과일이 떨어져서 입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분수(分數) 밖의 것을 욕심낸다면 낭패만 보고 재앙(災殃)만 따르는 법이니, 너는 당연히 도리를 지키고 허황된 행동을 하다가 후회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다른 말은 않겠다.

 

57. 答東萊吳翼洙求禮

宜我先於兄 而兄先我 其先施之惠 尤庸鐫感 憑審昫經體候 求道愈篤 深慰深慰 於山 見方丈 於水 見晉江 獨於兄峩冠見之 悅服不已. 弟客月念間 偶遭痢症 跨朔沉吟 艱辛得免鬼關人 顧閻羅使之恕緩 奉呵奉呵 今世何世 與其生而戴不共 孰若死而不戴其天乎 病餘神昏  情緖 難得盡諭.

57. 답동래오익수구례

내가 먼저 형에게 편지를 드려야 하는데, 형이 먼저 나에게 편지를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편지를 읽어보니 학문하시면서 건강하시고 도학(道學)에 독실하시다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산은 지리산을 보았고, 물은 진강(晉江)을 보았고, 인물로는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한 형을 보았으니, 기꺼이 감복(感服)할 뿐입니다.

저는 지난 달 20일 경에 우연히 이증(痢症:설사 증세)이 생겨서 한 달이 넘도록 고생을 하면서 다행히 죽기는 면했습니다. 아마도 저승사자가 용서해 준 것 같습니다. 웃자는 말입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같은 하늘아래 살지 않는다면 죽어서는 누가 같은 하늘아래 있겠습니까? 병으로 정신이 혼미(昏迷)해서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58. 與吳大雅吉洙

大望餘 幸得一枝叢 欣慰萬萬 慶是私門之慶 而受苦則 兄渾儀同之 深感且賀 况又克愛撫育 無異親孫 是吾所不能也. 卽此一事 賢愚可驗 不審侍體淸福 允君勤課否 仰禱 益齒風間作 每喫物 不任咀嚼 憫憫 第念橫豎之說 固無根據 而轉轉及此 市虎何足信之 但三傳故也. 大抵感生於情 無情之地 感不由生 然情與感 不可倂立 則舊情猶存 何傷之有 以此統亮 是冀是冀.

58. 여오대아길수

매우 애타게 기다리든 중에 편지를 받으니 기쁘기 한량(限量)없습니다. 경사(慶事)는 저의 집 경사인데 수고는 형의 온 식구가 같이 하셨으니, 매우 감사하고 하례드립니다. 하물며 지극한 사랑으로 친손과 다름없이 길러 주시니 저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번 일 한 가지만 보더라도 훌륭하고 훌륭하지 못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그간 어른 모시고 편안하시고 윤군(允君)도 공부 잘 하는지요? 우러러 빌 뿐입니다. 저는 치통(齒痛)으로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고민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횡설수설(橫說竪說)한 말들은 원래 근거가 없는 말이 잘못 전해졌습니다.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세 번 거듭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대저 인정(人情)은 느낌에서 나는 것인데, 정이 없는 곳에 느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과 느낌을 다 간직할 수는 없지만 옛 정이 그대로 있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59. 與李斯文雲衍 (二度)

◎頃者松山一宿 未罄諸蘊 翌又稠人中間說話 祗茶飯而已. 未得從容 是爲自慊 然茶飯受益不少 可救飢 而言旋臨別 幄手相贈 情眷勤摯 苟非深知之地 烏能及此 抵巢堆臥 甚是無聊 何以自慰 只增懸仰 未審利涉否 貢祝不已. 第惟夜歸 古人所難 況今孰有其人 看書着味 箇中眞味 日日益滋乎. 貢慮者是已 益生質 傝亻瀣 只惟乖於時 而息交絶遊 愧愧了 曩以新臘韻 要余和之 看來味益切近 今當酬應 而汨於塵窠 神思俱昏 只怕感發者 不由其情 未果焉 勿咎若何.

◎相與之而有知以來 非賢 莫我知 非我 莫知賢 而賢與我之所知心也. 非他也 苟非他人所知 而自顧五十年間 做爲亦何事 竟至無聞 奈聖訓何 賢聰明高我 强壯過我 勵志則前進 亦非晩矣. 益衰耗先於毛髮 齒稀毛斑 撫躬呵呵 只是白髮人間 公道 賢與我亦同庚 而賢猶靑髮 如在我則鬢髮斑白 以賢較我 公道之不公 猶如是 矧其人間事乎. 卽憑審侍體益護 棣樂湛重 深慰 近日亦自劬經玩索否. 益祗是叢冗  兼以搖漾 莫知所嚮 惠翰還旋 開曉感深沒量 大抵新臘之新 以惟新之義看則 甚是不該 今擧詩而詳細引晳 苟非愛我 烏能及此. 書曰 舊念汚俗 咸與維新 但以惟新言之則 與葩經所謂 維新 其義大相懸矣. 今其新字 有舊處便有之故 卽有舊臘新臘之分 而新是舊字之對也 特以維新看 未也. 商量如何.

59. 여이사문운연(두 편)

◎저번에 송산(松山)에서 하루 밤을 자면서도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다음날 또 여러 사람들 중에 말을 나누면서 음식만 같이 먹었을 뿐입니다.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혐의스럽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음식을 주시어서 요기(療飢)를 하고, 작별을 할 때에 손을 잡고 은근히 인정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깊은 정의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집에 돌아온 후에 쓰러지듯 누워있으니 매우 무료하고 쓸쓸해서 더욱 그리워집니다. 잘 가셨는지 궁금하여 마음속으로 빌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밤에 가는 것은 옛 사람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지금 세상에 누가 그럴 사람이 있겠습니까? 글을 읽으면서 재미를 붙이시면 그 기쁨이 날마다 더해지겠지요? 염려됩니다.

저는 우둔(愚鈍)한 자질(資質)로 세속에 적응이 안 되어서 남들과 교류(交流)를 끊고 있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번에 신납(新臘) 시제(詩題)로 저에게 화답(和答)을 요구하셨는데, 볼수록 내용이 간절한 시여서 이제야 화운(和韻)을 해드립니다. 골몰(汨沒)스런 생활에 정신이 혼미해서 감회는 있으나,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서 좋은 작품이 못되니 이해하십시오.

◎서로 알고 지낸 후로 형이 아니면 저를 이해해 주는 이가 없고, 제가 아니면 형을 이해할 사람이 없으니, 형과 저는 남다르게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을 남들은 알지 못합니다. 저 자신을 돌이켜보면 50년 동안 해놓은 일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니, 성인(聖人)의 교훈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형은 총명도 저보다 뛰어나고 강단도 저보다 뛰어나고 생각도 저보다 앞섰으니, 지금도 늦지 않으나 저는 늙어서 이도 빠지고 머리까지 반백(斑白)이 되어서 자신이 웃음이 나옵니다.

인간이 백발(白髮)이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형과 제가 동갑(同甲)이면서 형은 아직 검은머리를 가졌는데 저는 반백이 됐으니, 형과 저를 비교하면 자연의 섭리(攝理)도 이러게 불공평하니 하물며 인간의 일이겠습니까?

편지 내용에 어른 모시고 편안하시고 형제분들 즐거이 지내신다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근간에도 학문에 심력(心力)을 쓰시고 계십니까?

저는 사소한 일에 얽매여서 정신없이 지내다가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보니 깨우쳐주신 감회가 깊습니다. 대저 납일(臘日)을 갖고 새롭다는 의미로 보는 것은 심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그 시를 자세히 분석해보니 저를 사랑하는 심정이 아니라면 이런 시를 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오래 묶은 생각이나 나쁜 풍속을 모두 새롭게 한다.” 라고 했으니, 단지 유신(維新)이란 말은 『시경(詩經)』에 말하는 유신(維新)과는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지금 그 ‘新(신)’자는 ‘舊(구)’자에 대한 새 것을 말하는 신(新)자니, 구납(舊臘)과 신납(新臘)의 분별(分別)이고, 신(新)은 구(舊)의 상대입니다. 특히 새 것이란 의미이지, 새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60. 與從姪正勉

數月來 末由會面 常戀繆懸懸 臘際 覊做善否. 今擧爲風潮失棹 嶒嶝不知所趨 所謂課程鴂舌 蟹籒而已. 姪子 亦沒於此窠 不知自返 而旋其棹 天運如此 奈何. 汝當以是爲戒 際其淟㲽以新 將來則 於汝幸耳. 然凡讀聖賢書 無實踐 徒何益 今挾冊從師 以某門弟子稱 而夷考其行則無矣. 余亦同俗人 早年志于學 中途遲滯 枉過半平生 自近欲窺古人緖餘 然年且漸强 腦神不全 得不稱失 悔莫追之 苟以余之所不及 愼爲戒懼之資則 可庶幾矣 留止此.

60. 여종질정면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그리움이 간절하구나. 지금 섣달에 객지에서 잘 지내고 있는가? 요즈음 세상 풍조(風潮)가 방향을 잃어서 갈 곳을 모르는 처지고, 소위 배운다는 과정이 영어뿐이니, 종질(從姪)도 역시 영어공부에 열중하면서 한문(漢文)을 배우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천운(天運)이 아니겠는가?

너도 당연히 이것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방향으로 간다면 너의 장래에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문을 읽으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느냐 지금 스승에 책을 끼고 다니면서 누구의 제자라고 말하면서 행동에는 특별함이 없구나.

나 역시 같은 세속에 살면서 어려서 배우다가 중년에 포기하고 반평생을 허송세월로 지내고, 이제 와서 고인(古人)의 글을 읽으려 하지만 나이도 늙어가고 정신도 쇠퇴해서 배우려 해도 아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많으니, 후회해보아도 소용이 없네. 참으로 내가 하지 못한 것을 거울삼아 경계한다면 학문을 성취하지 않겠는가? 이만 그치네.

 

61. 永慕齋以學問切要贈諸益書凡八條目

學問之要 祗以聖賢千言萬語 切己近思則久而誠矣. 更有別樣底道理乎. 學而時習之 吾夫子之樂其所以悅 而樂之所化悅 及於三千 而其中得其妙者 顔子曾子與子思也. 及夫再傳而有鄒夫子 傳之又傳 而兩程夫子出焉. 繼而有晦菴夫子 夫子之學 入於吾東 有若退陶先生之學  蔚爲吾道之宗 東邦儒學 益闡明 儒賢輩出 亞於中夏 至于今吾道之可傳者 是皆浹洽於聖賢千言萬語之微奧 以之切己近思 而學習之功效也. 盖人而不學 難可入道 學而不習 難可尋繹 苟不尋繹 恐有不切不近之患也. 愼勉焉.

仁 卽天也. 天賦五常於人 仁爲五常之眞宰 而統領四常 故 亦未不有以仁 而各得其所宜者也 至若天道之常 亦猶是春元一氣 亦其有間斷之息乎. 窮陰雖閉 惠霈霑物之仁 一也. 草木盡脫 碩果復生之仁 猶有在爾 若夫天人合化之仁 惟聖能之.

道 天修之正路 天下萬世 人人所共由者也. 人各由之則 雖至徹上徹下 而行天之所覆 一矣. 經天緯地而行日星所照 一矣. 今之所謂 高明達道者 求得乎無天之域 而反入於暗昧之中 曰 道云可乎. 固所願行者 堯舜之道一而已.

文 道之精華 以若堯舜之道 書無典謨 三代授受之妙 那處可稽乎. 聖聖相承 文之所貴乎道者 猶若是爾. 惟吾所尙之文 因之而究其精也已.

天地中虛 惟人實之 人是天地之實 戴天履地 頂踵毛髮 同是人而 以何有聖狂之分 率眞如何 間卽可判焉 苟不率而遽曰 我人 祗是兩間食粟之蠹 粟其不愧諸 凡今率性 是爲學之大要 戒之戒之 吾道與天一通 吾人心上 自有豁然貫通 路由之則治 不由之則塞矣. 惟日由之 假令一日 一步之進則 十日有十步之得 百日有百步之得 而眷眷不已則 其所得幾何 擧世疾足者 莫不曰 途塗難. 余 卽曰 惟心上一路 未嘗有甚處難云.

天賦無爲正眞一着 是固有得於天者也. 其行也. 由眞則 能率初而心 是自然正矣. 苟一瞬有忒 萬善乃崩 愼乎哉. 盖人 越眞入僞易 由僞入眞難 一毫惟謹 一絲惟愼 常目顧是 而戰戰兢兢 則習與性成 同歸于一.

今以初學 容易得之語 示之 雖在言語文字之中 亦可以觀其心 梅月花竹之間 亦可以玩其天 凡天下之物 亦其有無天之物乎. 學者 必先務爲於心學 只要心學 宜見物而得之於心 心自理會 亦無一物放過則 爲學之要 孰大於是 然此亦孝悌然後事 苟不孝 天地萬物 與我相悖 故 余嘗謂孝悌 是初學入德之門也云.

人有形氣 惟靈之表 心卽統領形氣 而爲一身之靈者也. 耳目尤不可以不愼 目是視物之靈管 耳是聽物之靈管 管通于心 視之聽之 卽是心 心視心聽者也. 譬猶一身之最切近 莫若手足 而凡做履動止 皆一身之爲也 是故 耳目之戒 先謹乎其心 手足之戒 先愼乎其身 心與身 一於正則 豈惟是我獨而已哉.

61. 영모재이학문절요증제익서 범팔조목

학문의 요점은 단지 성현(聖賢)의 많은 말씀들을 오래도록 정성으로 몸으로 익히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고, 다른 특별한 방법이 없다.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것은 공자(孔子)는 기뻐하는 바를 즐거워한 것이고, 그 즐거워한 교화를 받아 감화(感化)된 3천명의 제자 가운데 그 학문을 터득한 사람은 안자(顔子)․증자(曾子)와 자사(子思)였고, 그 학문이 다시 맹자(孟子)에게 전수(傳受)되었다. 다시 전해저서 두 정부자(程夫子)가 탄생하시었고, 또 회암 부자(晦菴夫子:朱子)에 이어지니, 주자의 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퇴도 선생(退陶先生:李晃) 같은 분의 학문이 우리 유교(儒敎)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우리나라에 유학이 더욱 발전되어 여러 현사(賢士)가 배출되어 중국의 다음으로 지금까지 학통이 전해진 것이다. 이분들은 다 성현의 많은 말씀의 오묘(奧妙)한 뜻을 습득하여 몸으로 익히고 마음에 간직하여 배우고 익혔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깨닫지 못하고, 배워도 익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우니, 이해를 못한다면 아마도 몸으로 실천하고 마음에 간직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힘쓸지어다.

인(仁)이란 곧 하늘이다. 인간에 오륜(五倫)을 부여(賦與)했으니, 인은 오륜의 주인이고 사상(四常:仁義禮智)을 통제하기 때문에 인이 아니면 무엇 한 가지도 제자리를 찾을 수 없다. 하늘의 자연변화도 봄이란 원기(元氣)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간단(間斷)이 있는가, 겨울이 되어서 폐색(閉塞)이 되어도 만물을 소생(蘇生)시키는 인은 한 가지뿐이다. 초목이 낙엽이 졌다가 다시 열매가 달리는 것도 인이 있기 때문이니, 하늘과 사람이 인으로 합치하는 것은 성인이라야 할 수 있다.

도(道)라 하는 것은 하늘이 내놓은 바른 길이다. 이 세상 만대가 흘러도 사람마다 이 길을 따르는 것이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이 행해 가는 같은 길이다. 천지의 운행과 해와 달고 별들도 다 같은 이치이다. 지금 말하는 고명(高明)하고 통달(通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도를 벗어나면,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인데 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의 소원은 요순(堯舜)의 도(道) 한가지뿐이다.

문(文)이란 것은 도(道)의 꽃이다. 만약 요순(堯舜)의 도가 있다할지라도 글이 없었다면, 전(典)과 모(謨)와 삼대(三代) 전수(傳受)의 묘법(妙法)을 어떻게 상고(詳考)할 수 있겠는가? 성인이 어지면서 글을 도(道)보다 소중히 여긴 것은 이러하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숭상하는 것은 그 정미(精微)한 부분까지 연구해 보려는 것이다.

천지 사이에 비워진 부분을 사고 땅이 받쳐주고 있으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부와 모발이 다 사람인데, 어째서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으로 나누어져서 이렇게 품성(稟性)을 따른 것일까? 갈려진 품성이 판이(判異)하니 진실로 그 품성을 따르지 않은 자가 나도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천지간에서 곡식만 먹는 좀벌레일뿐이니 그것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지금 본성(本性)을 따른다는 것이니 이것이 배움의 요점이다. 경계하고 경계하여라. 인간의 도와 하늘의 이치는 같으니 사람의 마음이 확연히 도를 깨닫고 따르면, 자신이 성취되고 따르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니, 오직 날마다 학문의 도를 따르라.

가령 하루에 한 걸음씩 도를 따라 진보(進步)하면 10일이면 10보를 진보할 것이고, 100일이면 100보를 진보할 것이니,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그 소득이 얼마나 크겠는가? 온 세상에 능력 있다는 자들이 모두가 그 길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나는 마음으로 작심(作心)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늘이 부여한 천성은 다 정직하고 진실하니, 그 정직과 진실을 한결같이 따르면, 이것은 하늘의 이치를 터득한 것이다. 그의 행동이 진실을 따르면 타고난 본심을 따르는 것이니, 마음이 자연 정직해지고, 잠시라도 사특(邪慝)한 마음을 가지면, 만 가지 양심이 다 무너질 것이니 조심할지어다.

대개 사람은 착한 길에서 악한 길로 가는 것은 쉽고 악한 길에서 착한 길로 가는 것은 어려우니, 털끝만한 일에도 주의하고 실끝 같은 일에도 조심하여라. 하늘이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조심 하여라. 그것이 몸에 익어지면 성인과 같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은 말로 듣기는 쉽고 말과 글로 보여준 것이지만, 거기에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매화나 달과 꽃과 대나무 사이로 하늘의 이치를 음미할 수 있다. 세상에 어느 물건이 하늘의 이치가 담기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학문하는 자는 반드시 마음가짐에 힘써야 하고 마음가짐의 요점은 물건의 이치에서 마음을 터득하는 것이니, 마음으로 터득한다면 한 가지 물건도 지나쳐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학문의 요점이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또 효도와 공경을 한 뒤에 할 일이다. 진실로 효도를 하지 못한다면 천지만물이 다 나에게 위배(違背)되기 때문에 나는 일직부터 효도와 공경은 학문을 시작하는 자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사람에게는 형(形)과 기(氣)라는 것이 있는데, 형과 기는 드러난 것이고 마음은 형과 기를 통제할 뿐만 아니라 몸의 영(靈)이니, 귀와 눈을 조심해야 한다. 눈은 물건을 보는 기관이고 귀는 물건을 듣는 기관이다. 이 기관이 마음을 통해서 불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니 이 것은 곧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비유한다면 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손과 발이지만, 무슨 동작을 취할 때에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와 눈을 경계할 때에 먼저 마음을 조심해야 하고, 손과 발을 경계할 때에 먼저 몸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한결같이 정직하면 이것이 어찌 내 몸에만 국한(局限)되겠는가?

 

62. 與鶴圃余文燁

兄之吾所以心符相合也. 臨分各佩一部 則雖有重嶺疊 巘不得以間之然 且其會晤有日 則必先相合宜矣. 還山無聊 仰懷益勤而佩符 自玩差可慰耳. 謹未審靜體肥遯益貞心禱不已. 弟賤齒鱗疊 坐在五十地頭昨非 猶未覺奈今非何 今月旬頃率眷 移寓大願遂矣. 然飢食渴飮 是人生大政 寄寓之初 瓢事正空 未知仙境山菜多芽否 全活之託以是耳. 汗漫心緖楮毫莫旣只冀諒會.

62. 여학포여문엽

형(兄)이 저를 알아주시는 까닭으로 마음이 서로 부절(符節)처럼 합치(合致)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헤어질 때 각기 한 부씩 찬다면 비록 고개 마루가 중첩(重疊)되더라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여 이야기하는 날에는 반드시 먼저 서로 합의(合議)해야 할 것입니다. 산으로 돌아오니 무료(無聊)하여 우러러 그리는 마음은 더욱 심한데, 부절을 차고 스스로 완미(玩味)하며 위로할 따름입니다. 삼가 조용히 계시는 몸이 은둔(隱遁)하니 더욱 정결(貞潔)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마지않습니다.

아우는 나이가 거듭 더하여 50세가 되었지만 어제의 그릇됨을 오히려 깨닫지 못하니 지금의 잘못을 어찌하겠습니까? 달포가 지나면 가솔(家率:가족)을 이끌고 옮겨 살려고 하니, 평소 크게 원하던 바를 이루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이 인생이 처음으로 깃들어 살려는데 표주박이 비었으니 선경(仙境:상대가 사는 지역)에 산채(山菜)는 싹이 많이 돋았습니까? 생활을 온전히 의탁하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지러운 마음은 종이와 붓으로 다하지 못합니다. 다만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63. 與荷堂鄭兄

拜承淸儀 自靑鶴始而厥後路右電別 便成嶺湖之屬 寤寐無日 不懸仰於方丈雲月之間. 謹未審陽亨僑中體候 益衛想惟離省日多晨昏 雖久關心之定省 不可須更離也. 孝子事親之方心外 更無他箇底道理 願益懋是心如何仰禱禱益這冬以來 撓奪日甚 只是役役於此 未得更加收拾撫窮呵呵所爲 尋數與心相背 不啻若千百程之遠 未知終竟如何耳. 惟幸鶴圃與吾兄及梅下 乃三益友 亦豈無指針之力於余有益 多多然諸形之有損 想不少苟以余謂之不如而無友則亦將柰何 言不知弑餘蘊未罄 尤庸眷眷于中 惟冀諒照.

63. 여하당정형

절하고 맑은 편지를 받으니 청학(靑鶴)에서 시작하여 그 뒤로 길에서 번개처럼 헤어진 것이 문득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으로 격리되니, 자나 깨나 지리산과 운월산(雲月山) 사이를 우러러 그리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삼가 양형(陽亨)에 사는 가운데 체후(體候)가 더욱 무고하신지요. 생각컨대, 어버이 곁을 떠난 지가 오래되어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오랫동안 빠뜨렸으니, 잠시라도 곁을 떠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효자(孝子)가 어버이를 섬기는 방도(方途)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이외에 달리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더욱 이러한 마음에 힘을 쓰시기를 우러러 바랍니다.

저는 지난 겨울부터 시끄러운 일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날로 심하여 다만 이런 일에 부림을 당하여 다시 수습(收拾)하지도 못한 채, 몸을 어루만지니 우습고 우습습니다. 이른바 글을 읽는 것이 마음과 서로 어긋날 뿐만 아니라, 천리 먼 길에 마침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학포(學圃:金文燁)와 우리 형 및 매하(梅下)는 바로 세 분의 유익한 벗이니, 어찌 방향을 가르쳐 주는 힘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저에게 유익함이 더욱 많습니다만 여러 형의 포부(抱負)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저는 그만도 못한데도 벗으로 삼아 주니 장차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다하지 못하니 더욱 마음으로 그리며 다만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64. 答丁斯文奎炯

聞名多日奈無一着以 故每遇尊卿士友問尊慈平安與否. 今乃辱垂惠書書面無間 謙山遺集印可事次第頫示譴眷及此 多感多慰 憑審靜體益衛有相就 惟先先生遺集正本已有日以出板認許事 納附於圖書課 亦爲一年半而此延彼滯 尙未承認時日若待 自不勝心蔚之地 曁尊門惠損 感其致意而考領 至今銘佩不已尊先碣銘本文 對照後述時郵付 或有浮沈而未達歟. 只增悶然玆庸騰本郵呈領留如何.

64. 답정사문규형

이름을 들은 것이 여러 날이 되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매번 당신 고을 선비나 벗을 만날 때마다 평안한지 물어 보았습니다. 지금 욕되게 편지를 보내주시니 편지와 얼굴에 간격이 없는 듯 합니다. 겸산유집(謙山遺集)을 인쇄하는 일에 차례로 관심을 보여주시니 다감(多感)하고 위로가 됩니다.

체후(體候) 더욱 편안하시고 선(先) 선생(先生)의 유집(遺集)은 정본(正本)이 있어서 이미 출판(出版)을 인허(認許)해 달라는 일로 도서과(圖書課)에 드린 지가 1년 반이나 됩니다. 이런저런 일로 연기되어 아직도 승인(承認)받지 못하여 시일을 고대(苦待)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지경입니다.

당신 문중(門中)에서 보내준 연금(捐金)은 지극한 성의에 매우 감사드리며 받고 지금도 가슴에 새겨 마지않습니다. 선대(先代) 묘갈명(墓碣銘)은 본문(本文)을 대조(對照)한 뒤에 가까운 시일에 우편으로 보냈는데, 혹시 중간에 잘못되어 전달되지 않았는지 몰라 답답한 심정입니다. 이에 등사(謄寫)한 것을 우송(郵送)하니 받아 두시기 바랍니다.

 

65. 與敏菴書 (乙亥 二度)

同是妙末聲氣相通 以今計之 幾五十年 所尊君子之聲名踰嶺溢湖欽艶不已. 內心 自謂之古 呂正獻之肖子 有滎公之賢矣 今健齊崔先生有如滎公之賢胤也歟. 囊昔 先師果嶺行後 甲戌之曰君等學而立德當 以健翁期待 又盛呈之曰嶺士林淵藪碩德巨儒. 尙今猶存家家絃誦人人服儒而獨以文獻世家稱道者 惟雀健翁之門 竟發我欲居之歎矣. 今先師下世後四要知 舊無可倚仗者 痛切度了料爆尊駕之 枉臨適玄生平一 曝之願頃刻水解. 先慰自心之忡忡而兄之所辱慰之不暇 只作金佛之坐是. 如敬而非敬如黙而黙之失也. 凡契交之除 言多飾外則傷於蜜 交遏於黙而酬酌不通則難以致慇懃之義. 今以愼黙而求益是失. 當之. 愼黙也余恐主人無禮賢賓不久處易遲一分則有一分之損遲二分則有二分之損遽爾返駕也哉. 悵然 反求不得柰何六十餘年讀書之效果如是耶. 自今世降以來 所謂學者冠裾不同 着其言也鴂舌 其行也 貳岐而舍正入岐曰我行也 是革新正路外無他正路. 彼固窮人以何頑拓舊路斨殳旣鴂而部止云聞 不勝痛然. 自堯舜周公公子以來吾 道一通天下人之達路而達則無蓁蕪之蔽人 是自蓁自蕪爾. 是故 秦之焚坑 雖甚不及於伏生之心心 是 通天下之一路猶極天罔墜 矧其蓁蕪乎. 且夫冠裾 本不以人道之規矩 然 於人之禮 不可廢者而斷髮文身曰我人則亦其非人之罪人乎. 鳳凰之於飛 鳥同是 羽類而鳳有絳冠. 故 鷄亦有之 麒麟之於走戰 同是 毛類而麟有圓蹄. 故 馬亦如之 矧惟人是人類而無人之容儀者乎. 所謂貴乎儒者 身上莫若是冠衣而服先王之法服者 有幾五百年文物 都在吾兄身上 德器厚重 怳若泰山之喬喬其中 不可鑽而取其美焉耳. 弟亦與世絶交實通之友 一而二多不過三而若 兄不敢友而可師也. 竊惟返旆後 靜養經體益珍益重. 賢抱如常重侍安安否 渾儀相吉慶攸致綽綽有裕矣. 仰祝區區不已 弟自不禁仰悵內顧而不盡道神昏謹不備. 臨分贈言不過數語 感佩切已 比諸茶飯. 友數十言 可謂一言而蔽之 何以更承德音獲聞一言之惠乎. 尙今紆鬱想一般而兄則慰之者多矣怡之者 亦多矣. 直嚮鄕山所過嶺湖風物 搜入懷中 抱作自家胸中器物則物之悅己而慰之者是也. 且其鄕園山水已缺數月之頑則數月已缺之懷 更有好顔面而慰之者是也. 還鄕之日朋黨僚友日夕遊從 惟先儒之格言 先正之法訓 稽攷討訂以時發眞詮而樂其樂 則近千程 見損之友 奚暇悵懷之及乎. 在吾則所以求我者祗是童蒙而我求無聊柰何. 但兄思懇懇而求之未獲仰悵顧何如哉. 祗惟月三改謹未審道經. 體後候時萬衛賢抱眩症快復否更願綴其先世格訓遺辭節節作課程而見其鳥數之效則其心樂宜有有朋來遠方之十分爲愈矣. 仰祝仰祝 弟狀不能盡諭而孫兒輩皆爲新蟹籒而不知古道韓子所謂天運正如此者是爾  吾無可爲之方. 餘謹下備禮.

65. 여민암서 을해 (두 편)

이렇듯 잘 나타나지 않은 소리와 기운이 서로 통하여 이제 가르친 것도 아마 50년은 되었을 것이다. 존경받는 군자의 좋은 평판이 고개를 넘고 호수에 넘쳐서 아름다운 말들이 그칠 줄 몰랐으나. 내심 스스로 이르기를 옛날에 여정헌(呂正獻)의 초자가 영공(榮公)의 어짊이 있었는데 이제 건제(健齊) 崔선생께서 영공의 현철(賢徹)함이 있으셨다.

옛날에 선생님께서 용기 있게 결정하시어 산길을 다녀오신 뒤에 경계를 퍼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은 배워서 덕을 세워서 마땅히 건옹(健翁)에게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게 할 것이라”하시고 또 소리 높여 말씀하시길 “사림(士林)의  덕이 높은 사람들과 큰 학자들이 연수(淵藪)할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지금까지 오히려 집집마다 현악(絃樂)을 타고 낭송을 하며 사람마다 유도를 수행하지만 홀로 문헌(文獻) 세가(世家)의 도를 일컫는 자는 오직 최건옹(崔健翁)의 문하에서 마침내 일어나니 나는 같이 살고자하는 탄식마저 생겼다.

이제에 선사께서 돌아가신 후에 네 가지를 중요시 여기니 옛 것을 알아서 가히 의지하고 믿지 아니한 자는 비통함이 지나치니 헤아려 생각해 보건대 출세를 중요시 여기는 잘못을 드러냄이니 이는 평생 한번 빛에 쪼여 잠시 얼음이 녹는 것과 같다. 먼저 스스로의 마음의 대단히 근심스러움을 위로하고 친구의 욕본 바를 위로하다 여유치 않으면 다만 금불상으로 지어 이에 공경한 듯 하나 공경치 않고 묵묵한 듯 하나 묵묵하면 잃은 것이라.

대개 친구를 사귈 때에 말이 밖으로 꾸임이 많은 즉 친근히 사귐을 상하게 하고 조용함이 지나쳐서 서로 술먹는 친분이 통하지 않은 즉 간절한 의에 이르기 어렵다.

이제에 삼가 잠잠히 있어서 이로움을 구한다면 이는 잠잠히 있음으로 마땅함을 잃은 것이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아 나에게 돌이켜 구함에도 얻지 못한다면 어찌 하리오. 60여년동안 독서함의 효과가 이와 같을 뿐이라.

이제 후대로 내려와서는 이른바 학자들이 관과 옷을 입는 것도 같지 않아서 그 말은 결설(駃舌)이요. 행동은 두 갈래여서 바른 것을 버리고 갈림길에 들어서 말하길 “우리가 가는 것은 이에 새롭게 바뀐 정로이니 이밖에 다른 정로는 없다.”하니 저 고궁(固窮)한 사람이 어찌 완고하게 구로(舊路)에서 주었던 것을 이미 빠뜨리고 말함을 멈추지 않으니 참으로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요순(堯舜)・주공(周公)・孔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도가 한결같이 모든 사람들의 잘 뚫린 길로 통하니 잘 뚫렸다 함은 곧 숲이나 무성한 풀에 가림이 없는 것이라.

 사람이 이에 스스로 숲에 가리고 무성한 풀에 가려지는 것이니 이런 이유로 진나라 시황제가 분서갱유(焚書坑儒)함이 비록 심했지만 복생(伏生)의 마음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마음이란 천하를 통하는 한 길이라. 오히려 하늘에 다하도록 떨어지지 않았는데 하물며 막힘이 있겠는가? 또한 대개 관과 옷이란 것은 인도(人道)의 규구(規矩)가 아니나 그러나 사람의 예도에 있어 가히 폐할 수 없는 것이로되 머리를 깎고 문신한 이를 일러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또한 그것이 죄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 봉황의 하늘을 나는 것이 새의 우류(羽類)와 같지만 봉황은 진홍의 벼슬이 있음이라. 고로 닭 또한 벼슬이 있고 기린의 달리는 것이 짐승의 모류(毛類)와 같지만은 기린은 둥근 발굽이 있는 고로 말 또한 같은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 인류(人類)로 사람의 용의(容儀)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귀한 선비는 신상에 관과 옷을 입음에 선왕의 법복을 입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아는 것이 아마도 500년의 문물(文物)이로되 아름다운 내 친구의 신상에 있어서는 덕을 베푸는 마음을 아주 중하게 여기니 어슴푸레 태산의 높은 것에 그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와 같아서 가히 닳지 않은 아름다움을 취했을 뿐이라.

나 또한 세상과 더불어 절교하고 진실로 통하는 친구는 하나에서 둘보다 많지만 셋을 넘지 않았으되 존형(尊兄)과 같음은 감히 친구가 아니고 가히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진득하게 생각하고 기를 돌려보낸 후에 정양(靜養)하여 경험하는 것이 더욱 보배롭고 더욱 귀중함을 깨달았다. 어진 이를 지킴에 항상 귀한 분을 모시는 것과 같이 편하게 하고 혼천의(渾天儀)로 길경을 생각하고 작작(綽綽)히 넉넉함에 이르는 것이라.

구구(區區)는 우러러 축하함을 그치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내고(內顧)를 금하지 않았으되 도를 다하지는 못하였다. 아둔한 나는 삼가 불비(不備)하노라.

대화를 나눈 것이 여러 말에 지나지 않지만 감패(感佩)의 간절함이 차와 밥에 비할 만하다. 벗과 나눈 수십의 대화를 한 말로 정한다면 어떤 말로 이보다 훌륭한 말 한마디 얻어듣는 은혜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울하게 일반의 일을 생각해보니 형(兄)은 곧 위로한 자 많고 화한 자 또한 많음이라.

지난번 고향 산의 고개와 호수를 지나다 그 경치를 보니 어지러이 가슴속에 들어와 나의 가슴이 움켜쥐게 하니 나를 기쁘게 하여 위로함이 이것이라.

그 고향의 산수(山水)와 사람을 이미 수개월 보지 못하였으니 곧 수개월 생각하지 못하였다가  다시 좋은 얼굴을 보게 되어서 위로가 된 것이 이것이라.

마을에 돌아 온 날에 마을 사람과 친구들이 해가 저물도록 놀았으나 선유(先儒)의 바른 말과 선정(先正)의 바른 가르침을 쫓아서 때 맞추어 그 깨달음이 발하여 그 즐거움을 더욱 즐겁게 하니 곧 멀리 있어 잊은 친구라도 가깝게 되니 어찌 근심할 틈이 있으리오.

나를 구하는 바는 다만 동몽이로되 내가 구하는 바는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형(兄)은 간절히 생각하여 구하다 얻지 못하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그 이유를 돌아볼 것이라. 다만 한달에 세 번 고쳐 생각했으나 삼가 도경(道經)을 깨달지 못하였다. 체후(體候)에 뜻을 따라 모두 지킴을 묻고 어진 이를 지킴에 아찔한 증세가 다시는 고치지 않을 만큼 상쾌해짐을 말하였다. 원컨대 그 선세(先世)의 바른 가르침과 남겨주신 말씀의 절절(節節)함을 과정을 짓노라면 그 새가 날갯짓으로 나는 것을 연습하여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가는 효험을 보게 될 것이니 그런즉 그 마음이 즐거워서 먼 곳에서 친구가 와서 훨씬 더 나을 것이라.

우러러 빌고 또 비나니 내가 능히 다 깨닫지 못하여 손아(孫兒)의 무리가 다 새로이 문자를 만들어 고도를 알지 못한다면 한자의 이른바 천운(天運)일 것이라. 이는 너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일 것이라. 나머진 삼가 불비례(不備禮)하노라.

 

66. 與林雅士鍾炫

契交十數年 幾乎忘面乃去月之辱 臨適我不家還切未安. 余更思之利則金 臭則蘭 利臭之誼 存諸心 著於外則面可. 忘乎以是 自慰瞿瞿然度了. 適玆貴從弟 責其松塢公遺稿分帙之任枉訪于弊廬 惠以一帙及之何感如之. 盥手奉讀 非徒文詞取義 全編奧旨彷佛乎珍味之. 蘊諸器中而薰香及人 矧惟弁卷之文當世多讀書之水筆 苟不能多讀其記事敍事若是絜且切乎. 余聞食桑之蚕 惟多食故 吐絲有條理繭而繅而錦焉 成章恐類是爾. 曁講誼修契來敎珍重而自去去月 二竪侵劇 縱得緩期而着在陽界 然 完蘇無日歎歎如之. 何家兒替送原恕否餘謹不備.

66. 여임아사종현

십 수년을 사귀었는데 어찌 얼굴을 잊을 수 있으리오. 이내 지난달에 욕으로 마침내 집에 돌아오지 못하여 참으로 미안하였네. 내 다시 생각하니 예리한 것은 쇠요, 향기로는 것은 난초일 것이네. 예리함과 향기가 마음에 있다면 밖으로 나타날 것이니 얼굴을 어찌 가히 잊겠는가? 이로써 스스로 위로하고 구구연(瞿瞿然)히 지나갔네.

마침 이에 귀하신 사촌아우가 그 송오공(松塢公)의 남겨주신 초고를 순서를 나누는 책임을 맡았으되 잘못 헤진 오두막을 찾아가서 고생했으나 조상의 은혜로 한권의 책이 이르니 어떤 이유인고? 손을 씻고 받들어 읽으니 한갓 문사의 뜻을 취한 것이 아니라 전편의 깊은 뜻이 진미를 방불케 하였네. 마음에 쌓이면 향기가 사람에게 미치거늘 하물며 나누어진 글이 당세에 많이 읽은 수필이 되었으니 진실로 능이 많이 읽지 않을지라도 그 기사(記事)와 서사(敍事)가 이렇듯 고결하고 또한 간절할 수 있는가?

내가 들으니 뽕잎을 먹는 벌레는 많이 먹는 고로 실을 토함에 조리가 있어서 고치를 만들어서 거기서 실을 뽑아서 비단이 되니 글을 만드는 것도 아마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배운 것을 익히고 닦아서 와서 진중(珍重)을 가르치되 지지난 달로부터 두 번 나의 보잘 것 없는 글을 나타내려 하였으나 잠시 놓아두고 기일을 늦추었다가 이제야 세상에 나타내었네. 그러나 온전한 초본이 없음을 날마다 한탄한들 무엇하리오. 가아(家兒)가 잘못 바꾸어 보낸 것을 거듭 용서를 빌었으나 용서하지 않았네. 남은 것은 삼가 불비(不備)하노라.

 

67. 答崔弘洛正卿書 (己亥)

遇益 拜謝覆生倂一世天惟同戴. 是天何天 山河是舊王土. 日月是舊乾坤. 但物態變幻匪今匪古春. 霜夏雪 霜雪何事. 苟非松柏之資 那可以堅持相守乎. 亦有一可佐霜雴 不及於桃李而雨露反霑 則吾生變其所守而雨露冒霑可乎. 與其冒霑而桃李爭榮 不若老于邱壑 待其再楫棟樑而各株守之爲好耳. 見今民政 雖曰維新變夏 入夷夷 苟又變則所入未知將何境界耳. 悲夫亢陽旱天 此天不雨 彼天雨容或有之 此霜雪彼雨露難可諶也. 漆室克念 恐有尊君子 直諒之誡旋 竊思之知命 守分 是吾能事朝出野歸 放聱大讀古人書 未終卷將就寢 翌朝又讀童子告 以郵夫來輒起敬跪承辱贈序與辱謝書 半未讀 丁寧規誡之意瞭然 視. 輒洽心生平讀古人書萬千爲愈矣. 余恐天未有不雲之天人未有無病之人則仰想尊兄 亦其無少疵然.要不侫以克治之諭未知其所以矣. 余平生喜聞病聞輒卽治而姑未及於治人之術則只行自治如何. 且別紙所諭强其採樵者而問理釣之絲無異矣. 是以語到斧斤而難稱繩墨規矩矣. 惟希鑑哉. 示諭朱夫子 答南軒書曰人自有未發時 此處 便合存養. 恐子思于所謂未發謂之中 其義相近. 又曰伊川先生所謂却於己發之際 觀之者正謂尊養. 恐子思子 所謂發而中節同義看宜近矣. 何者未發時存養於中. 故 偏合存養發而中節故已發之際 方有可觀 是無時不養之義也 無時不養則動靜在乎其中矣.

中庸首章 輯註 朱夫子釋 存養 靜工夫 省察 動工夫 分釋之也. 恐分釋之則非一事也. 退陶先生天命圖說曰 敬以存養於靜 惶恐伏惟大哉. 加一敬字於存養之上乎. 敬之所到至善 無不着焉. 靜恐至善攸止也. 不動心莫若是極矣. 如吾末學之所敢窺則者乎. 魯夫子嘗曰 定而後 能靜余恐至善以能定 至善以能定 以存養於心之能安處 則魯子之於退陶前後一揆矣. 秋巒舊圖曰置存養於未發之圈恐 圈心圈也. 恐已發之時 統率心圈而全發乎. 已發之時 亦置存養於心圈而可觀者 存養之效也. 故伊川先生曰 已發之際 觀之者 正謂存養 朱夫子答或問 存養多用靜否 又問靜中常用存養之說曰 公子却都就動處敎人 做工夫 竊恐使人心 或不妄動而言行動作 皆心之動處 故曰却都就苟不動而靜那處知其善否而敎之乎. 且其灑掃應對 進退之節 敬以執之則亦其非存養之事乎. 恐存養於內 故敬以執之存養於內者 靜也. 敬以執之者 動也. 東方諸先達 亦有以兼動靜言之 恐未有餘蘊矣. 存養於已發時則存養於動也. 存養於未發時則存養於靜也. 愼獨而不愧屋漏 似乎靜而動在其中愼 獨用工於靜不愧屋漏積中動外而方有可觀 故屋漏對照而不愧也. 是存養於動矣 且其誠意正心存養於靜 格物致知存養於動 然誠意正心中 亦有存養於動 恐思出來爲意 則誠於出來 是存養於動苟以心之動靜言之則靜時不存之而自存動時止於至善而行之是存之之道也. 嗚呼 存養之工 那處在可畏者耳. 目可戒者 言行一毫之差 放於千里之外 一瞬之揆武於六合之表 是故 程夫子嘗曰 知誘物化 又曰視爲之 則又曰 發禁躁妄 是皆存養訓戒之語 然則可畏者 亦其非耳目與言行乎.然人而無耳目非人也. 噫 彼木石無耳目 故不爲物誘之蔽然 木是木石是石而已. 竊恐心宜動 動則惟危 故靜之以精一恐存心之要也. 性宜靜則惟微 故動之以精一恐養性之要也. 人性之靜 如水之澹澹然 淵淵然 舍畜萬像天日 則日天月 則月與天光 宜性之靜而但止於靜則渴矣. 腐矣. 故湧湧源出之水動而養之然後 水之性 不腐矣. 至若心之動 亦猶源泉混混 前去者流 後來者 續少無間然息 故決西西流決 北北流流 其匪流則止而靜之擴充其淵 怳若制其人心之妄動而戰兢 自持存之於靜. 鄒夫子所以觀水有術是也. 亦恐以字義看 則存是葆存底義舍靜意 養是養築底義 舍動意然 則收其放定而能靜以存其心 是未發也. 及其已發則女水蓄積而濁者 自消滓者 自潔而後 澹然流不息存於中而發於外 是存養於動也. 妄鑿至此原恕而明晰警諭如何 程夫子嘗曰 心包性情 余恐心性無二體如日之包陽而有暈是日光明 是陽然苟有雲蔽則日暈可蔽光明不能盡掩 雖雲雨于天日出 則小明之氣 無幽不燭不至玄黃暗昧之域 人心則不然 一爲物私所奪則視聽言動 全失其正 敢問天人一理而相懸不啻若千里何也. 惟冀明辨曉諭 以針頂之萬.

67. 답최홍락정경서

우익께 절하고 사례하니 다시 태어나 한 세상에서 하늘을 같이 이고 살고자 하노라. 이 하늘은 어떤 하늘인고? 산하는 이에 옛날의 왕토이며 일월은 이에 옛날의 하늘과 땅이로되 다만 인물의 모양만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춘상하설(春霜夏雪)에 상설(霜雪)이 어떤 것인고? 진실로 송백(松柏)의 자질이 아니면 어찌 가히 굳게 지녀서 지킬 수 있겠는가? 또한 가히 서리와 눈을 겁낸다면 도리(桃李)에 미치지 못하여 우로(雨露)에  젖음을 배반하는 것이니 그런즉 내가 사는 동안 지키는 바를 바꾸어 우로에 거짓으로 젖음이 가한가? 그 거짓으로 젖어서 도리(桃李)가 영화를 다툼으로 더불 바에는 외진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는 운수를 기다리고 주수(株守)함을 좋아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오늘날 민정(民政)을 보건데 비록 말하길 유신(維新)하나 하나가 변하여 오랑캐가 되니 오랑캐가 또 변하면 사람이 장차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 하게 될 것이라.

슬프도다! 대개 항양(亢陽)한천(旱天)에 이 하늘에는 비 아니 오고 저 하늘에 비오는 것은 혹 있을 수 있으나 이곳에 상설이 내리고 저곳에 우로가 내린다 함은 믿기 어려움이라. 많은 후손들이 능히 생각하여 아마도 높으신 군자가 나서 정직하고 성실히 경계를 펴서 가만히 혼자 생각하여 천명을 알고 분수를 지키는 자가 있으면 이에 나는 능히 아침에 들에 나가 일하고 학교에 돌아와서 큰 소리로 옛 사람의 글을 읽다가 채 다 읽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또한 동자에게 읽게 하고서 우부(郵夫)가 오거든 문득 공경이 꿇어앉아 그 욕봄을 받들고 그 증서(贈序)줌에 다시 한번 그 욕봄을 사례하고 글을 반도 채 읽지 않더라도 정령 법도와 경계함이 밝게 나타나서 문득 마음에 두루 퍼지는 것이 평생 동안 고인의 글을 천만번 읽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나는 아마도 하늘에 구름없는 하늘이 있지 않고 사람도 병이 없는 사람은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尊兄을 우러러 생각하건대 조금도 흠이 없도다. 그러나 나는 사특함으로써 능히 다스림을 깨우치지 못하였기에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나 평생 동안에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듣고 문득 다스렸으나 아직은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면 곧 다만 스스로 다스림을 다행스럽게 여김이 어떠할 것인고. 또 별지에 억지로 그 나무꾼에게 고기를 낚는 법을 물어 보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깨우쳐 주었다. 이로써 말이 도끼처럼 무서움에 이르더라도 승묵규구(繩墨規矩)라 칭하기는 어려운 것이라. 바라건대  거울삼아 다스릴 것이라.

주부자(朱夫子)의 답하신 남헌서(南軒書)를 보면 이르길 “사람은 스스로 감정이 발하지 않았을 때에 이곳이 문득 존양(存養)에 합한다”하였고 자사(子思)의 이른바 발하지 않음을 중(中)이라하셨으니 그 뜻이 서로 가까움이라. 또 말하길 이천(伊川)선생의 이른바 이미 발한 것을 물리쳐 바르게 나타내는 것이 바로 존양이라. 자사의 이른바 발하여 중에 맞게 한다는 뜻과 같이 보면 비슷할 것이라. 어떤 이유로 발하지 않을 때를 마음에 존양이라 한 고로 문득 존양이 발하여 중에 맞음이 있음이라 고로 이미 발했을 때에 바야흐로 가히 나타남이 때로 기르지 아니한 뜻이 없음이요 때로 기르지 않음이 없는 즉 동정이 그 가운데 있음이라.

중용(中庸)수장의 집주에 보면 존양을 정(靜)으로 공부하면 성찰할 것이요 동(動)으로 공부하면 분석이라 하였으니 분석인 즉 한 일이 아닐 것이라.

퇴도선생 천명도설에 말하길 공경으로 존양하면 정에 황공(惶恐)함이 커질 것이라 하니 경(敬) 한 글자를 존양의 위에 더함이라. 공경의 이르는 바는 지극히 착한 것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음이요 정이란 아마도 지선에 머무르는 것이니 부동심이 이보다 지극함이 없을 것이라. 나의 보잘 것 없는 학문으로 감히 엿본 바이다. 증자님의 말씀에 정(定)한 뒤에 능히 정(靜)이라 하셨으니 나는 아마도 지선으로 능히 정(定)하고 지선(至善)으로 능히 정(靜)함에 마음의 능히 편안한 곳에 존양한다면 곧 증자님과 퇴도선생이 전후가 하나의 법규로다.

추밀구도에 말하길 발하지 않은 권(圈)을 존양한다하니 아마도 권(圈)은 심권(心圈)일 것이라. 이미 발했을 때에 심권을 다스려서 온전히 발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발했을 때에 또한 심권에 존양을 두고 가히 나타내는 것이 존양의 효험인 고로 이천선생이 말씀하신 이미 발하여 나타남에 바른 것이 존양이라 한 것과 주자의 답 혹문에는 존양을 말함에 많이 정(靜)・부(否)를 쓰고 또 물음에 정(靜)중에는 항상 존양을 쓰며 말하길 공자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사람을 가르치는 것으로 공부를 삼으시니 가만히 생각컨대 아마도 인심으로 하여금 혹 망녕되이 언행을 움직이지 않게 하신 것이라. 언행동작은 다 마음에서 움직이는 고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동하지 않으면 정이라 이런 것으로 그 선부를 가려서 가르치신 것이다.

또 그 물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로 공경이 그 마음을 잡은 즉 또한 그도 존양의 일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존양이란 안에 있는 고로 공경으로 마음 안에서 존양을 잡는 것은 정(靜)이요 공경으로 잡는 것은 동이라.

동방 제선달 또한 동정을 겸하여 말하니 아마도 충분함이 있지 않음이라. 존양이 이미 발하면 동이 되고 존양이 발하지 아니하면 정이 되니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하여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정(靜)하여 동이 그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홀로 있음을 삼가하는 것은 정의 공부를 써서 보지 않음에도 부끄러움이 없음이 마음에 쌓여서 그 공이 밖으로 나타나는 고로 보이지 않은 곳을 비추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니 이는 동에 존양한 것이라. 또 그 성의정심으로 정에 존양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동에 존양하다 보면 어느듯 성의정심의 가운데에서 또한 동에 존양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마음으로 말미암아서 뜻이 나온즉 밖으로 성(誠)이 나타날 것이니 이것이 동에 존양일 것이라. 진실로써 마음의 동정으로써 말한다면 정시란 있으되 스스로 있게 하는 것이요 동시란 지선에 머물러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존양의 도라.

오호라 존양의 공부는 어디에 있는고? 가히 두려워할 것은 귀와 눈이요 가히 경계할 것은 말과 행동이라 터럭 끝의 어긋짐도 나중에는 천리를 벗어나는 것이니 한 순간의 법이라도 천지우주의 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고로 정부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물화의 유인하여 꾐을 알아서 경계하고 또 말씀하시길 봄에도 법도로 할 것이며 또 이르길 발함에 조급하고 망령됨을 금하라 하시니 이것이 다 존양훈계의 말씀이라. 그런즉 가히 두려워 할 것이 이목과 언행이 아닐 수 없는 것이라. 그러나 사람이 이목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

슬프구나! 저 목석(木石)은 이목이 없는 고로 물의 꾐의 폐단이 없음이라. 그러나 나무는 이에 나무요 돌은 이에 돌일 따름이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마도 마음이 동하여 움직인즉 위태로운 고로 정(靜)으로 써 다른 것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마도 존심의 중요한 것일 것이라. 성품은 고요하여서 아름다운 고로 동함에 순수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성품을 기르는데 중요한 것일 것이라. 사람의 성품의 고요함이 물과 같이 담담하고 깊어서 모든 것을 함축한 것이니 하늘의 해인 즉 해요 하늘의 달인 즉 달이라 하늘과 더불어 함께 빛나는 것이라. 성풍의 정함이 다만 정에 머무른 즉 마르고 썩는 고로 샘솟는 물 근원에서 물이 나오는 것과 같아서 동하여 기른 연후에 물의 성질이 썩지 않는 것이라.

마음의 동에 이르러 서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 원천의 물이 많이 솟아 흐르면 앞에 가서 흐르는 것이 뒤에 흐르는 것과 이어져서 조금도 사이가 없는 고로 서쪽에서 터진 물을 서쪽으로 흘러가고 북에서 터진 물을 북으로 흐르는 것이니 흘러가다 그 흐르지 않은 것은 곧 머물러서 고요히 그 연못을 넓히는 것이니 문득 만약 그 인심의 망동을 다스려서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스스로 잡아서 고요히 존양하면 공자님이 물을 보는 법이 있다고 하신 것이 이것일 것이라. 또한 글자의 뜻으로 본즉 존이란 보존의 뜻이니 정의 뜻이 있고 양이란 양축의 양이니 움직이는 뜻이 있음이라 그런즉 그 놓았던 마음을 거두어 정하여 고요히 하면서 그 마음을 두는 것이니 이것이 미발이요 그 이미 발함에 미친다면 물이 모여서 흐려지는 것과 흐린 것은 스스로 없어지고 때가 낀 것도 스스로 깨끗해진 후에 담연(澹然)히 흘러서 쉬지 않음과 같아서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이는 동에 존양하는 것이라.

망령되이 글을 늘어놓았음을 거듭 용서를 빌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 경계하여 깨우쳐 주심이 어떨까 한다. 정자님께서 말씀하시길 마음은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다 하였으니 나는 생각컨대 아마도 심성은 이체가 없는 지라. 해의 양을 포함한 것과 같아서 햇빛이 있으니 이 해에 빛이 있고 양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그러나 진실로 구름에 가림이 있으면 햇빛이 가려지나 빛이 능히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구름이 하늘을 덮는다해도 해가 나오면 조금 밝은 기운이 어둠을 밝히지 아니함이 없음으로 검고 어두움에 이르지 않은 것이라. 사람의 마음인즉 그렇지 못하여 한번 물사에 그 마을을 빼앗긴 즉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임에 모두 바른 것을 잃게 되니 감히 묻습니다. 천인이 한 이치로되 서로 동떨어질 뿐만아니라 아주 다른 듯한 것은 왜입니까?

오직 밝은 논리와 밝은 가르침으로 따끔하게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68. 答林斯文鍾炫書 (庚子)

芝有根 醴有源 物理之本然而苟根枯則不葉 源渴則不流物之反常也人與物 今雖不可同諭余恐孰有以物我不同包者乎. 但世降之而不培醴而不養根枯源渴者 滔滔仰想林兄素以桂林叢枝 熟講孔李之好廣 諭於我一通之惠珍感沒量客年 因微崇餘症今 又親睦鄙門有會適 於是日芥琥無緣之歎 自强于中 抑又思之孔李鬱林 宜不借鷦鷯一枝也歟. 謹承審經體候老而好學味道益懇. 程夫子所謂尤可受者 伊今爲 雖弟之所以仰艶於平常之日而今日之講 尤加敬耳. 苟有一着則薰聞盈耳 可以消積累之吝而奈講好之地. 獨有所魔餘衷曲難盡謹不備謝禮.

68. 답임사문종현서 경자

영지에도 뿌리가 있고 단술에도 물의 근원이 있다. 물리의 본연함이 진실로 뿌리가 마른 즉 입이 없고 물의 근원이 마른 즉 흐르지 못하는 것은 물의 상도에 어긋나는 일이 것이다.

사람과 물이 이제 비록 같지는 않으나 나는 생각컨대 아마도 어찌 물과 내가 같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 다만 세상이 내려 갈수록 풍속이 어지러워져서 영지로되 뿌리를 북돋지 아니하고 단술이로되 기르지 아니하여 뿌리가 마르고 물 근원이 마르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도다. 우러러 생각건대 많은 형(兄)들 중에 본래 출중한 사람들이 공자님의 학문과 이백의 글을 강(講)하여 나에게 한 가지를 통하는 은혜를 주니 그 귀한 느낌이 뭐라 헤아릴 수 없다.

지난 해에 조그만 귀신이 내린 재앙으로 병증이 남았는데 이제에 서로 친하여 화목한 이들이 천한 우리 집에 모임이 있으니 마침 이날에 조금 무연(無緣)함을 한탄하게 되었다. 스스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공자와 이백을 생각하며 달래었다. 울창한 숲에 뱁새가 집을 짓는 데는 나뭇가지 하나일 것이라. 삼가 경전을 받들어 살피고 체후(體候)하고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도를 맛봄에 더욱 간절하니 정자가 이른바 가히 아끼는 것이 이것이라. 이제 누구를 위함인고?

내가 바라는 바는 평상시에 부드럽고 아름답게 행동하여 이제 강(講)함에 더욱 공경하는 것뿐이라. 진실로 한결같이 나타냄이 있으면 향기가 퍼져서 세상에 가득할 뿐이니 가히 덕업을 쌓음에 인색함이 없을 것이니 어찌 배움을 익히는 좋은 곳에서 홀로 근심함이 있으리오.

간절한 마음을 붓과 종이로 다 표현하기 어렵도다. 삼가 불비(不備)사례하노라.

 

69. 答一聾鄭淳奎書

不面十數載 情緖蘊畜 與歲月同結 經一歲 則一歲之情緖尤積 經二歲 則二歲之情緖俱積 積十有數歲而情緖之積 莫知幾何矣. 幸玆惠書跪讀 將知吾兄情緖亦如之 而筆以盡著 小慰幽懷之眞積 然顧無狀深積多年情緖 如蠶絲積腹而未吐絃 不成繭而自黃自老矣. 以是臨楮仰敘 益縮其辭 而兼以筆塞 徒悶甚積了 承審經體候至老益篤 其所得尤於前日用工 仰賀無己. 弟自今春 深捿于月晴山中 至于今塵况姑未整頓 未知那時獲免塵頓 而自得吾之所好也 餘竢面晤 謹不備 謝狀.

69. 답일농정순규서

10여 년 동안 보지 못하니 그리운 정이 쌓여 세월과 함께 맺힙니다. 1년이 지나면 1년의 그리운 정이 더욱 쌓이고 2년이 지나면 2년의 그리운 정이 모두 쌓이고 십 수년이 지나매 십 수년의 그리운 정이 쌓였으니 그리움이 얼마나 쌓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행히 은혜로운 편지를 받고 꿇어 앉아 읽으니 그대의 마음도 또한 나와 같음을 알 수 있었는데, 필설(筆舌)로 자세하게 모두 적었으니 그윽한 회포가 쌓인 것에 조금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못난 나를 돌아보니 깊이 쌓인 여러 해 동안의 정서(情緖)가 마치 누에가 실을 배에 쌓아두기만 하고 실로 토해내지 못하고, 고치가 되지 못하고 늙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종이를 마주하고 쓰고자 하나 더욱 그 표현이 위축되고 아울러 붓마저 막히니 민망함이 매우 심합니다.

편지를 받고 공부하는 건강이 늙도록 더욱 독실하고, 성취한 바가 이전에 공부한 것보다 더욱 많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러러 축하해마지 않습니다. 다만 올 봄부터 월정산에 깊이 은둔하며 지냈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세상의 일을 정리하지 못하였으니 언제나 세속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만 줄입니다.

 

70. 與李君東憲書

日前鄙族姪 先世遺蹟印刊事 謁文於余而來訪 煩笻至三 而何幸一番酬酌 探聞貴中僉候 益感老懷. 凡今貴之於鄙族 以白悅白好 好然 兩白相照落地之影 必黑 是亦老人之一戒也.

70. 여이군동헌서

전날 나의 족질(族姪)이 선세(先世)의 유적(遺蹟)을 간행하는 일로 나에게 문장을 부탁하려고 방문함이 번거롭게도 서너 번이나 되었으니 죄송함을 어찌해야겠습니까! 다행히 한 번 만나 술을 주고받으며 그대의 안부를 물어 알게 되었으니 늘그막의 회포에 더욱 위로가 됩니다. 지금 그대가 나의 족질(族姪)에 대하여 늙은 것으로 서로 기뻐하고 좋아하니, 좋기는 좋으나 두 늙은이가 서로 처음 태어날 때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면 반드시 어리석어질 것이니 이것이 또한 늙은이의 한 가지 경계할 일입니다.

 

71. 答一聾鄭淳奎書

書不如面 面頻親還疎 皆古語也. 二言必中 彼勝此勝互爲甲乙然而情書覽後 留作案實 徑朔而覽之 則渴懷可慰 經歲而覽之 渴情如蘇 雖徑十數年 覽之則如更新 賜慰諸岑寂之懷 只是面宜別離之根原也. 面而一宿 則一宿之面而已. 別後情思俱渴 故妄謂之面不如書矣. 今一聾兄先施一惠 俯慰情懷 猶云感幸. 矧惟二惠乎. 一字一句蘊包久鬱 而至若語助字 猶含情眷餘蘊矣. 何以則中心所發 如是該著於毫末楮面 錦文成章若也耶. 擎手跪讀惠簡 重幅中萬端情言 譬猶一幅畵蘭 一幅蓮畵 又有梅竹松菊兼山水圖 物各殊形 而會統以一耳. 塵目瞭然 快消胸累 何感如之 弟則情思積中優於兄 而筆以形言 猶未及者 不啻三十里 幸須恕覽 則文雖拙矣. 能文者解之 辭雖縮矣. 善辭者認之 今夫兄之涵泓情恕 其於歡迎王子詩與序 稱譽過度 從可仰諗矣. 謹承審重陽旣兄尊體候老益至健 究經玩味 味道益新 仰賀仰想 不勝區區老懷 弟昨之所究 今亦未究 惟日愈昧 未爽過了 只怕餘日著在眼前多 謹不備 謝狀.

71. 답일농정순규서

‘편지는 직접 만나는 것만 못하다’는 말과 ‘너무 자주 만나면 친한 이도 도리어 멀어진다’는 말은 모두 옛부터 있던 말입니다. 두 말이 반드시 맞는 말일 것이나 저것이 낫다, 이것이 낫다 하며 서로 우열을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다운 편지를 보고 난 뒤에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한 달이 지난 뒤 다시 보게 되면,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할 만하고, 한 해가 지난 뒤 다시 보게 되면,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십 수년이 지나더라도 보면 마치 다시 새롭게 보는 것 같아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회포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니, 직접 만나는 것은 마땅히 이별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접 만나 하룻밤 같이 자면 하룻밤 같이 자는 동안만 만나는 것일 뿐이니, 이별한 뒤의 마음은 모두 메말라 버리는 까닭으로 망령되이 ‘직접 만나는 것은 편지만 못하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일농 형께서 먼저 은혜로운 편지를 보내주시어 그리워하던 내 마음이 위로가 된 것만도 오히려 감사하고 다행스럽다고 할 것인데, 두 번씩이나 은혜로운 편지를 주신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 글자, 한 구절에도 오랜 정이 녹아 있으며, 어조자(語助字)도 또한 다정스러운 마음과 넉넉한 정을 머금고 있군요. 어찌하면 마음속의 감정이 드러난 것이 이와 같이 적절하게 붓끝과 종이에 옮겨져 화려한 문장으로 지어질 수 있는지요! 손을 씻고 꿇어앉아 은혜로운 편지를 읽으니 여러 폭의 편지에 담긴 온갖 다정스러운 표현들이 마치 한 폭의 난초그림, 한 폭의 연꽃 그림과 같으며, 또한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가 산수를 겸하고 있는 그림과 같으니, 사물의 형상은 각각 다르나 뜻은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속세에 젖은 눈을 맑게 하여 가슴 속의 쌓인 찌꺼기를 깨끗하게 씻어주니 어떤 감사함이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리워하는 정이 형보다 많으나 붓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형보다 못합니다. 다행히 너그럽게 봐주신다면, 문장은 비록 졸렬(拙劣)하나 문장에 능한 형께서는 이해하실 것이며, 표현은 비록 미숙하나 표현에 능한 형께서는 알아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형의 크고 넓은 마음으로 왕자를 환영하는 시와 서에 대하여 도에 넘치게 칭찬하여 주셨으니 우러러 감사드립니다.

삼가 편지를 받고 중양(重陽)에 형의 건강이 늙을수록 더욱 건강하며, 연구하고 음미함에 도를 음미함이 더욱 새로워졌음을 알았으니 우러러 축하하며 우러러 생각함에 구구한 이 정성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어제 연구한 바를 오늘 또한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날마다 더욱 어리석어져 명확하지 못하게 세월을 보내니 살 날이 앞으로 많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전부 적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72. 答自安洞僉章甫書

縷縷情書出於料礻暴 益感老懷之眷眷 積歲不面 何有間於心丹相照之地乎. 承審僉賢賢勞之誠 逈出尋常 曁尊軆老益康寧 黙賀不勝 區區幽懷益齒益添 而喫物不能先乎經旨 不任咀嚼 但日三哺啜 自顧食粟之蠹 只愧餘日或多矣. 嘆嘆奈何 第惟錦雲居士六吉事 樹石協謀云 誠則可尙耳. 凡人吉字義詳知否 普天之下 莫非曠土 而土有口則字釋吉矣. 萬化植物 土由口而出 則天地生物之仁 捨其吉字義而何 居士生平履歷 慶福中用力而吉 慶纏身則亦何嘗六吉而已哉. 今其比在乎十月 則十月卽小春也. 自安洞一部 葆得小春 光景不煩花石 而草則蘭蕙 花則梅菊 而松與竹恁他得地 相與歲寒守心 故竹心虛而物慾不累 松根靈而神化爲茯 盖物我無間 類如是爾. 宜其小春 雖曰窮陰 陽必不遠復 則君子道長之時也. 時中之吉 添在六吉之上 後日來來之吉 孰可量乎. 姑竢之而合萬爲一 庸鐫石面而圖其不朽 似合乎隆師之禮典矣 商量如何.

 

72. 답자안동첨장보서

간절한 정이 담긴 편지를 뜻하지 않게 받으니 늘그막의 회포가 정성스러움에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여러 해동안 만나지 못하였으나 어찌 변함없는 마음을 서로 교통하는 곳에 틈이 있겠습니까! 편지를 받고 여러 현사(賢士)들의 수고하는 정성이 평범하지 않고 여러 분들의 건강이 늙을수록 더욱 건강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묵묵히 축하드립니다.

구구한 내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쇠하여 음식을 먹어도 먼저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씹을 수조차 없어 다만 하루에 세 번씩 미음만 마시니 스스로 밥만 축내는 내 신세를 돌아보건대, 앞으로 살날이 많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탄식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오직 생각컨대, 금운거사의 여섯 가지 길(吉)한 일에 대하여 비석을 세우자고 함께 의논하였다고 하니 정성은 숭상할 만합니다. 무릇 지금 길(吉)자의 뜻을 자세히 알고 있는지요? 넓은 하늘 아래가 광토(曠土)가 아님이 없으니 흙에 입이 있으면 글자의 뜻이 길(吉)입니다. 만물이 변화하고 식물이 자라는데 흙은 입을 말미암아 싹을 틔우게 하니 천지 생물의 씨앗이 그 길(吉)의 의미를 버려두고 어찌하겠습니까!

거사의 평생 이력(履歷)은 경복(慶福) 중에 힘을 써서 길하게 되었으니, 경사(慶事)가 온 몸을 두르고 있다면 또한 어찌 여섯 가지 길함 뿐이겠습니까! 지금 그 일은 10월에 비유할 수 있으니, 10월은 바로 소춘(小春)입니다.

자안동 한 지역이 소춘(小春)을 지키고 있으니 경치는 꽃과 돌을 싫어하지 않아 풀은 난(蘭)과 혜(蕙)가 있고, 꽃은 매화(梅花)와 국화(菊花)가 있으며, 송죽(松竹)이 자유로이 흩어져 계절이 추워져도 본 마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나무는 속이 비어 물욕이 쌓이지 않으며, 소나무는 뿌리가 신령하여 복령(茯笭)으로 변하니 대개 사물과 내가 혼연히 일체가 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복령:구멍장이버섯과.

의당 소춘(小春)은 비록 ‘궁음(窮陰)’이라 할 수 있으나 양(陽)이 반드시 머지않아 회복될 것이니 바로 군자의 도가 장성(長成)할 때입니다. 시대에 적합하게 하는 길(吉)함이 여섯 가지 길(吉)함보다 위에 있으니, 훗날 오게 될 길(吉)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잠시 기다린다면 만물이 합쳐져 하나가 될 것이니 어찌 비석에 새겨 사라지지 않을 것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스승을 높이는 예의에 합당할 것 같으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73. 與林君東觀書

臨別難別 情緖也 悵望離程. 靑山猶是含情. 矧惟難別之誼乎. 耿結在心 至今不忘 記與文所屬 珍重 不敢固辭 忘僭 謹呈. 專恃鼓椎文 所以記其事也 猶畵士模眞. 故山水之畵 以其流峙松竹之畵 但其蒼翠 而山水之難畵者 動靜也. 松竹之難畵者 節操也. 今所謂文亦如之 愧而心之心 自然於胸底 不任不讀書之歎. 謹問椿府愼候 以近快復否. 仰想老境宿患 難可倉卒治祗. 是誠心救療 亦孝子之道也. 區區心祝益 自近心力 倂瘁所做難復振作. 况又塵撓未刷乎 餘謹不備.

73. 여임군동관서

헤어질 때가 되면 헤어지기 어려운 것이 정서인데, 이별할 때의 길이 눈앞에 선합니다. 청산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인데 하물며 이별하기 어려운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환하게 마음에 남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탁하신 기문(記文)은 진중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망령됨을 잊고 보내드립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 고추문(鼓椎文) 일을 기록한 것인데 화공이 풍경을 그리는 일과 같습니다. 산수화로 물이 흐르고 언덕이 있고 우뚝한 산봉우리를 그린 것은 참으로 푸르고 아름다운데 산수에서 그리기 어려운 것은 동정(動靜)이며 우뚝 솟은 소나무에서 그리기 어려운 것은 절조입니다. 이제 말씀하신 ‘문(文)’은 부끄러운 마음이 자연스레 일어 차마 책을 읽었다는 말을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삼가 묻건대, 춘부장께서는 병은 조금 나아지셨는지요. 삼가 바라오니, 노년의 오래된 병은 갑자기 쾌차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심으로 약을 드리는 것이 또한 효자의 도리일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근래 몸과 마음이 병들어서 다시 떨쳐 일어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물며 저의 허물을 씻어내지 못함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이만 줄입니다.

辨(변)

茶牕演錄(雜著)

1. 無極辨

沖漠無朕 陰不胞陽而理氣未具

1. 무극변

공허(空虛)하고 광막(廣漠)하여 아무 조짐(兆朕)도 없으니, 음(陰)은 양(陽)을 포태(胞胎)하지 않아 이(理)와 기(氣)가 구비(具備)되지 않았다.

 

2. 太極

胞兩儀而未判 胎萬物而未形.

2. 태극

양의(兩儀)를 싸고 있으면서 나뉘지 않고 만물을 싸고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3. 天

天所以覆萬物之大盖也. 無一物不包 大哉天乎. 理之所載 無聲無臭 氣之所載 無形無爲 大虛成像而已.

3. 천(天:하늘)

하늘은 만물을 덮어주는 큰 일산(日傘)과 같아 한 가지 물건도 포함하지 않음이 없으니, 크도다! 하늘이여. 이(理)가 실려 있어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기(氣)가 실린 곳은 모양도 없고 작위(作爲)함도 없으니, 태허(太虛)로 모양을 이룰 따름이다.

 

4. 地

上天之載 惟一不貳 故重濁之氣下而成形 博而厚而能配天者也. 土德之無量 孰可量乎. 凡在地皇位十一萬八千八白載也云.

4. 지(地:땅)

하늘의 일은 오직 하나이니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겁고 혼탁한 기운이 내려와 모양을 이루어 넓고 두터워 하늘에 배합(配合)하는 것이다. 토덕(土德)이 무량함을 누가 헤아리겠는가? 무릇 지황씨(地皇氏)가 왕위(王位)에 있었던 시기는 1만 8천 8백년이라고 한다.

 

5. 日

太陽之精 天地之明德也. 天以明德 明於天下 雖陰崖寒谷明無不照盛矣. 陽德之明也. 往之來之分刻不失乃天地之度也. 天地度惟聖能之.

5. 일(日:해)

태양(太陽)의 정(精)은 천지(天地)의 명덕(明德)이다. 하늘이 명덕을 천하에 밝혔으니, 비록 그늘진 벼랑이나 추운 골짜기라도 비추지 않음이 없다. 성대(盛大)하도다, 양덕(陽德)의 밝음이여! 왔다 가며 일분의 시각도 잃지 않음이 바로 하늘의 도수(度數)이다. 하늘의 도수는 오직 성인만이 능(能)하다.

 

6. 月

月太陰之精 凡天地之度 有消長. 故盈虛有時而朔而望 望而晦 晦而復朔 乃天定之曆像也. 聖人則之 始制曆.

6. 월(月:달)

달은 태음(太陰)의 정(精)이니, 모든 천지의 도수(度數)에는 소장(消長)이 있다. 그러므로 찼다가 비는 때가 있고 초하루에서 보름으로, 보름에서 그믐으로, 그믐에서 다시 초하루가 되는 것은 바로 하늘이 정한 역상(曆像)이다. 성인(聖人)이 이를 법(法)삼아 처음으로 역법(曆法)을 만들었다.

 

7. 星辰

天理元無形體 故太虛中微妙之精 凝氣而爲星宿 此所以理化爲文者也. 像數不外乎天 纏次不離于天萬化之幾 著顯明現而示於人 故天雖不變 像數之妙以時有通 變理雖不窮 纏次之微 以時有錯綜 是乃觀天之圖也. 天理之妙 觀其像而可見矣.

7. 성신(星辰:별)

천리(天理)는 원래 형체(形體)가 없다. 그러므로 태허(太虛) 가운데 미묘(微妙)한 정기(精氣)가 엉켜서 별이 되니, 이는 이(理)가 화(化)하여 문(文)이 된 것이다. 상수(像數)는 하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차(躔次)는 하늘에서 이탈(離脫)하지 못한다. 모든 변화의 기들이 분명하게 드러나 사람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늘은 비록 변하지 않지만 상수의 묘함은 때로 변통(變通)이 있고, 이치는 비록 다하지 않지만 전차는 때로 착종(錯綜:여러 가지를 섞어 모음)이 있으니, 이는 바로 하늘을 관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천리(天理)의 묘함은 그 상(像)을 보면 알 수 있다.

 

8. 風

天地之機 盈於兩間 周旋而以成風 盖陰陽合均之妙也. 止處起處 亦其陰陽消長而已.

8. 풍(風:바람)

천지의 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하여 돌아서 바람을 이루니, 대개 음양이 고르게 모여서 묘한 작용을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치는 곳과 일어나는 곳은 또한 음양이 소장(消長)할 따름이다.

 

9. 雨

雨 天地惠化之幾也. 萬物之潤 譬猶人之湯飮 苟不雨 那可以化生萬物乎.

9. 우(雨:비)

비는 천지가 은혜롭게 조화를 부리는 기틀이다. 만물을 윤택하게 함은 비유컨대, 사람이 목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만일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물을 화생(化生)할 수 있겠는가?

 

10. 雲

易繫曰 雲行雨施 雲所以雨施之資. 不雨而空弊天日 非陽道也. 故君子恥之.

10. 운(雲:구름)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이르기를, “구름이 흘러가 비를 뿌린다〔雲行雨施〕.” 하니, 구름은 비를 뿌리는 바탕이다. 비도 내리지 않으면서 공연히 하늘의 해를 가리는 것은 양(陽)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11. 露

陰陽二氣凝而爲露 潤萬物之惠也. 凡天地 是萬物父母而猶人之. 子母乳之厥子得以漸長 故萬物長 長於新潤惠化之中.

11. 로(露:이슬)

음양(陰陽) 두 기운이 엉켜서 이슬이 되어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은혜를 베푼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니, 이는 사람의 아들에게 어머니가 젖을 먹이는 것과 같다. 그 아들이 점차 자라는 까닭으로 만물이 새롭게 윤택하게 하는 은혜로운 조화 가운데 성장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12. 潮汐

盖自河出圖 洛出書 陰陽進退 盈虛消長之理奇偶闔闢對待之妙 聖該析其義 以開示後人. 至於潮汐  余未嘗聞其奧然 竊恐不外乎進退消長 闔闢對待之妙也. 凡今學者所當深玩者其進也. 有時其退也 亦有時是乃天地之信也. 天地之有信 宜潛熟其義則難者 竟至不難而豁然透到矣 大抵西海平洋一右旋而流一左旋而流譬 猶人身中血脉 有左右旋之分 堪輿之玄竅四海之尾閭 祗是消水而已.

12. 조석(潮汐)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온 뒤로 음양(陰陽)과 진퇴(進退 : 나가고 물러남), 영허(盈虛)와 소장(消長)의 이치와 기우(奇偶 : 홀수와 짝수), 합벽(闔闢 : 열리고 닫힘), 대대(對待)의 미묘(微妙)함은 전대(前代)의 성인(聖人)이 모두 그 뜻을 분석하여 뒷사람에게 열어 보였다. 그러나 조석(潮汐)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오묘한 이치를 설명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컨대, 진퇴․소장․합벽․대대의 미묘함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여긴다.

지금의 모든 학자들이 깊이 완미하는 것은 그 나아감도 때가 있고 그 물러감도 때가 있으니, 이는 바로 천지의 믿음이다. 천지가 믿음이 있으니 마땅히 그 뜻을 익숙하게 생각해보면, 어려운 것은 마침내 어렵지 않은 데에 이르게 되어 툭 트여 도달하게 된다.

대저 서해(西海)의 평평한 바다는 한번은 오른편으로 돌아 흐르다가 한번은 왼편으로 돌아 흐른다. 비유하면 사람의 몸 가운데 혈맥(血脈)이 왼편과 오른편의 구분이 있는 것과 같다. 감여(堪輿:풍수지리)의 현규(玄竅)와 사해(四海)의 미려(尾閭)는 다만 소수(消水)일 뿐이다.

 

13. 無天辨

天 卽理也 苟曰以形求之 雖終身求之未可矣. 一理融會 輕淸之氣 凝於上而成像 盖上之所載莫非天也. 嗚呼 人之寡居難生其子 地之徒陰難生其物 苟謂之無天則一理渾融 無朕大塊不成矣. 安敢以形氣求於一理之外乎. 此學者之所當深戒者也.

13. 무천변

하늘은 곧 이치이다. 만약 “모양으로 구한다”고 한다면, 비록 몸을 마칠 때까지 구한다고 해도 옳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이치가 융화(融和)되어 모여 가볍고 맑은 기운이 위에 엉켜서 모양을 이루었으니, 대개 위의 일은 하늘이 아님이 없다. 아, 사람이 홀로 살면 그 아들을 낳기 어려움과 땅이 너무 추우면 물건을 낳기 어렵다. 만일 하늘이 없다고 한다면 한 가지 이치가 혼연(渾然)히 융화되어 조짐(兆朕)이 없이 지구(地球)는 생성(生成)되지 않았을 것이니, 어떻게 형기(形氣)로 한 가지 이치의 밖에서 구하겠는가? 이것은 학자들이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14. 陰陽

陰陽 萬物之始 萬物之生 負陰包陽 莫不有生生不已之妙 故極其動以定天下之像 極其靜以定天下之器 器者陰陽之形也. 凡天下之物形像 雖不同 奇偶所同陰陽互爲變通 體用一源備矣. 其體至隱而無不包其用 至神而無不化 動靜之間 四時代序 寒暑相推 與鬼神合其微妙而造化定矣. 是故 以靜而求陰則窒而不通 非其道也. 以動而求陽則拘於無變 非其道也. 學者宜當玩索於易之卦劃則幾乎.

14. 음양

음양은 만물의 시작이다. 만물이 날 때는 음(陰)을 등에 지고 양(陽)을 앞에 안아서 낳고 낳는 묘함을 지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 움직임을 지극히 하여 천하의 상(像)을 정하고, 그 고요함을 지극히 하여 천하의 기(器)를 정하는 것은 음양에서 비롯된 형(形)이다.

모든 천하의 물건은 형상(形像)은 비록 다르지만 기우(奇偶)는 같다. 음양이 서로 변통(變通)하지만 체용(體用)이 한 가지 근원에 구비되어 있다. 그 체(體)는 지극히 은미(隱微)하여도 포함하지 않음이 없고 그 용(用)은 지극히 신령(神靈)하여 화생(化生)하지 않음이 없다. 움직이고 고요한 사이에 사시(四時 : 사철)가 교대(交代)하고 한서(寒暑:춥고 더움)가 서로 밀어 귀신과 그 미묘함을 합하여 조화가 정해진다.

이런 까닭으로 고요한 곳에서 음(陰)을 구하면 막혀서 통하지 않으니 그 도(道)가 아니고, 움직이는 곳에서 양(陽)을 구하면 변화가 없는 것에 구애(拘碍)되니 그 도가 아니다.

학자들은 마땅히 역(易)의 괘(卦)를 그은 것을 완색(玩索)한다면, 거의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15. 心統性情

子程子 嘗曰吾心上有太極 白中之白是心也. 余恐竊謂之吾心上有太極 丹中之丹是性也. 性者 主理而氣無不包心者 主氣而理無不包盖心與性其爲像也. 如眸靈蓄瞳而眸如不在瞳 不能存觀其眸之有瞳 其心統性情可知矣.

15. 심통성정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 마음 위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흰 가운데 흰 것이 바로 마음이다.”하였다. 나는 가만히 이렇게 말해본다. “내 마음 위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단(丹) 가운데 단(丹)은 바로 성(性)이다.”

성(性)은 이(理)를 위주(爲主)로 하지만 기(氣)를 포함하지 않음이 없고, 심(心)은 기(氣)를 위주로 하지만 이(理)를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대개 심(心)과 성(性)은 그 모양이 눈동자 ‘眸’가 눈동자 ‘瞳’를 신령하게 축적(蓄積)한 것과 같다. 눈동자가 만일 눈동자가 없다면 보존될 수 없을 것이니, 그 눈동자에 눈동자가 있다는 것을 본다면, 마음이 성정(性情)을 통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6. 人心道心

本無二致而曰人心曰 道心 盖人有爲之時 道無之時 但虛靈不昧 渾然無爲而未發底 謂之道心 應萬事而飢 湯食飮寒暖葛裘而旣發底謂之人心 然則惟微太虛中 至玄至妙而渾然一理 無現著之像 故易爲氣稟所拘 惟危應萬事之際 日用事爲易爲物私所屈 學者 當以吾心戒愼乎. 未發旣 發則微者 精危者安.

16. 인심도심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없는데도 ‘인심(人心)’이라 하고 ‘도심(道心)’이라 하는 것은 대개 인심은 작위(作爲)함이 있을 때이고, 도심은 작위함이 없을 때를 말한다. 다만 텅 비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아 혼연히 작위함이 없이 발(發)하지 않는 것을 도심(道心)이라 하고, 모든 일에 대응(對應)하여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며 추우면 갖옷을 입고 따뜻하면 갈옷을 입어 이미 발(發)한 것을 인심(人心)이라 이른다.

그렇다면 오직 은미(隱微)하다〔惟微〕는 것은 태허(太虛)  가운데 지극히 현묘(玄妙)하여 혼연히 한 가지 이치여서 드러나지 않는 상(像)이다. 그러므로 쉽게 기품(氣稟)에 구애(拘碍)되고, 오직 위태롭다는 것은 모든 일에 대응할 무렵에 날마다 하는 일이나 행위가 쉽게 남의 사사로움에 굴복하게 됨을 말한다.

학자들은 마땅히 내 마음으로 발하지 않았을 때와 이미 발했을 때에 경계하고 삼간다면 미미한 것은 정밀(精密)해지고 위태로운 것은 편안해질 것이다.

 

17. 情意

出乎性而蘊諸心 謂之情 由乎心而蓄諸中 謂之意.

17. 정의

성(性)에서 나와 심(心)에 감싸인 것을 정(情)이라 하고, 심(心)에 연유하여 중(中)에 쌓인 것을 의(意)라 한다.

 

18. 理氣

陰陽合 變中渾然 有爲者氣也. 其所以然者 理也. 妙用一源元無貳岐而先儒氏 嘗有氣乘理乘之辨 固非末學之所窺則者爾. 但後之學者 聽鈴而妄謂之可不可 譬猶有一傘雨日見之者曰雨傘 陽日見之者曰陽傘云爾 盖理無無氣之理而理氣太極地實也. 不可須臾離 苟須臾離萬化不得其正 天地便是虛殼子而已. 是故天地萬物 是莫不理氣所具而其所乘 宜難言者也. 苟曰相乘則便同陰陽相乘矣. 陽之乘陰可也. 陰之乘陽恐未有是理而其發之也. 亦猶是爾. 嗚呼 分理氣而言 則理以成像天 卽理也. 氣以成形地 卽氣也. 氣北乘理天地不易之正經 然氣未有無理之氣理 未有無氣之理 則祗以所乘之義 恐有後世理氣 兩端之說.

18. 이기

음양(陰陽)이 합치되어 변화하는 가운데 혼연(渾然)히 작위(作爲)하는 것은 기(氣)이고, 그 소이연(所以然: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은 이(理)이다. 묘한 작용은 한 가지 근원이어서 두 가지 갈래가 없으니 선유(先儒)들이 일찍이 기가 타고 이가 탄다〔氣乘理乘〕는 논변(論辨)이 있었지만, 말학(末學:자신을 겸칭한 말)이 엿보고 헤아릴 바가 아니다.

다만 뒷날의 학자가 방울 소리를 듣고 함부로 가(可)․불가(不可)라 함은 하나의 우산을 두고 비 오는 날 보면 우산(雨傘)이라 하고, 해가 돋은 날 보면 양산(陽傘)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개 이(理)에는 기(氣)가 없는 이(理)가 없으니 이기(理氣)는 태극(太極)의 실체(實體)이다.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만일 잠시라도 떠날 수 있다면 모든 조화는 그 바름을 얻을 수 없어서 천지가 문득 텅 빈 껍질일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천지와 만물은 이기(理氣)가 구비되지 않음이 없는데, 그 타는 바라는 것은 마땅히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서로 탄다고 한다면 문득 음양이 서로 타는 것과 같다. 양이 음을 타는 것은 가(可)하지만 음이 양을 타는 것은 아마 이런 이치는 없으니, 그 발하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아,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말하면, 이(理)로 상(像)을 이루니 하늘은 곧 이(理)이고, 기(氣)로 형(形)을 이루니 땅은 곧 기(氣)이다. 기가 이를 타지 못함은 천지간에 바꿀 수 없는 바른 법도이다. 그러나 기는 이가 없는 기(氣)가 없고, 이는 기가 없는 이(理)가 없으니, 다만 탄다는 뜻 때문에 후세에 이기(理氣)가 양단(兩端)이라는 설(說)이 있었던 것 같다.

 

19. 大易

大哉 易乎. 蘊包天地而萬物生生之妙盡載此書. 竊念其所以廣於天地 其所以大 大於天地者也歟. 然則宜不容於天地而能容者其能大能小之妙 難可以蠡測爾. 其爲書也. 廣大悉備原於河洛之至神 而妙在卦畵中 卦畵者域之關楗也. 天地本無言 故聖人則之文以著之 是天地之譯也. 學易者 當玩味於至微之理 則天地之自然 可玩詳矣. 卦一變而天地之萬變出焉. 爻一動而天地之萬化見矣. 陰陽動靜之中 寒暑之而四時代序日月之而晝夜運行雨露焉. 萬物化生 是宜卦爻神用之妙也. 天地之於大易 神化之妙 亦其有一髮之間然乎哉.

19. 대역(大易:周易)

크도다! 역(易)이여. 천지를 감싸 만물을 낳으니, 낳고 낳는 묘함이 모두 이 책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가만히 그 넓이를 생각해보면 천지보다 더 넓고 그 크기를 짐작해보면 천지보다 큰 듯하다. 그렇다면 마땅히 천지에 포용되지 않는데도 포용하는 것은 크게 하고 작게 하는 묘함이니, 헤아릴 수가 없을 뿐이다.

그 책은 넓고 커서 모두 갖추었는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지극히 신령함에 근원하여 묘함은 괘(卦)를 그은 가운데 있다. 괘를 그은 것은 역(易)의 관건(關鍵)이다.

천지는 본래 말이 없는 까닭으로 성인(聖人)이 이를 법(法)삼아 드러내었으니, 이는 천지를 풀이한 것이라 하겠다. 역(易)을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지극히 은미한 이치를 완미(玩味)한다면 천지의 자연을 자세히 완상(玩賞)할 수 있을 것이다.

괘(卦)가 한 번 변하여 천지의 만물이 나오고 효(爻)가 한 번 동(動)하여 천지의 모든 화육(化育)이 드러난다. 음양이 동정(動靜:움직이고 고요함)하는 가운데 한서(寒暑:춥고 더움)가 생겨 사시(四時)가 교대(交代)하여 절서(節序)가 바뀌고, 일월(日月:해와 달)이 운행(運行)하여 주야(晝夜:낮과 밤)가 바꾸며, 우로(雨露:비와 이슬)가 내려 만물이 화생한다. 이는 마땅히 괘효(卦爻)의 신령한 작용의 묘함이다. 천지가 대역(大易)의 신령한 화육의 묘함에 한 터럭의 간섭이 있을 수 있겠는가?

 

20. 文爲道器

天地設位道 立乎其中 故道存則天地存 道變則天地變. 道也. 者終天地而不變文以貫之文者 心之著也. 萬世載道之器 苟不載道而徒文 只空器不過了. 聖人始製文字 體物而像其宜 天一大之義 地土也之義 左丿 右乀曰人 盖取諸眞正之義 而是迺三極之道乎. 天之文像也 日月有度 星辰有纏次 地之文形也 山川載峙載流 聖人之文道也 上律天時 下襲水土 以安百姓 故五行相摩化生萬物天地之道也. 含蓄天地之至化 而錯綜其數 通其變化者 聖人之道也. 子思子曰文王之所以爲文也 純亦不已. 純 不雜之謂也 不已 不息之謂也. 不雜則一而不貳 不息則可久 存焉. 嗚呼 今日何日敎名立而數敎之方 異敎法備而數敎之文 不同小學之與古人進退之節 相反大學之道與古人誠正之學相背道與文幾乎息矣. 那可以挽廻世敎乎.

20. 문위도기

천지가 자리를 설정하니 도(道)는 그 가운데 정립되었다. 그러므로 도가 보존되면 천지가 보존되고 도가 변하면 천지도 변한다. 도(道)는 천지가 끝나도 변하지 않는다.

글로 꿰뚫으니 글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만세(萬世)토록 도를 싣는 그릇이니, 도를 싣지 않고 한갓 글만 지었다면 이는 빈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성인(聖人)이 처음 문자(文字)를 만들 때, 물건의 모양을 바탕하여 그 마땅함을 본뜬 것이니, ‘하늘 天(천)’은 一大(일대)의 뜻이고, ‘땅 地(지)’는 土也(토야)란 뜻이며, 왼편으로 삐침〔撇〕 오른 편으로 파임〔磔〕이 합한 것을 ‘사람 人(인)’이라 하였다. 대개 진정한 뜻을 취하였으니 이는 바로 삼극(三極:天地人)의 도일 것이다.

하늘의 문(文:글이 아니라 문채라는 뜻)은 상(像)이니 일월(日月)이 운행하는 도수(度數)가 있고 성신(星辰)은 전차(躔次)가 있으며, 땅의 문(文)은 형(形)이니 산천(山川)에 고개가 있고 강이 흐르고 있으며, 성인(聖人)의 문(文)은 도(道)이니 위로는 천시(天時)를 법(法)삼고 아래로는 수토(水土)를 계승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오행(五行)이 서로 갈마들어 만물을 화생(化生)함이 천지의 도이다. 천지의 지극한 조화를 함축(含蓄)하여 그 수리(數理)를 착종(錯綜)하여 변화를 통(通)하게 하는 것은 성인의 도이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의 시호(諡號)에 ‘文(문)’자를 붙인 까닭은 순수하이 또한 그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하니, ‘純(순)’은 섞이지 않았음을 이른 것이고 ‘不已(불이)’는 쉬지 않음을 이른다. 섞이지 않으면 한결같고 갈라지지 않고 쉬지 않으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

아, 오늘은 어떤 날인가? ‘교명(敎名)’은 정립(定立)되어 있지만 교화(敎化)를 펴는 방법은 다르고, ‘교법(敎法)’은 구비(具備)되어 있지만 교화를 펴는 문장은 같지 않다. 그래서 소학(小學)의 방법은 고인(古人)이 진퇴(進退:나아가고 물러남)하던 절도(節度)와 상반(相反)되고, 대학(大學)의 도는 고인이 뜻을 성실하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로 잡는 공부와 서로 위배(違背)된다. 그리하여 도(道)와 문(文)이 거의 사라졌으니, 어떻게 하면 세교(世敎)를 만회(挽回)할 수 있겠는가?

 

21. 經旨

經 卽載道之器 旨 猶器中之味. 人皆知食物在於器中 但等視而不口則難以救飢 口而不咀嚼則亦不知 那味之攸在 此學者之所當深戒者也.

21. 경지(經旨:경전의 취지)

경전(經傳)은 곧 도(道)를 싣는 그릇이고, 뜻은 그릇 가운데 음식이다. 사람이 모두 음식이 그릇 가운데 있는 것을 알지만 등한(等閒)히 여겨 입으로 먹지 않는다면 배고픔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뜻을 곰씹어 음미(吟味)하지 않으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학자가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22. 大學之道在明明德

有得乎天而本體光明 具衆理而妙然明 謂之明德 應萬事而自然明 亦謂之明德 心誌全體之明明之而益明其明謂之明明德 譬猶鑑之空明乃鑑之本體而有本體之明 故明存於中 有本體之德 故德 應於外 是乃鑑之明明德也. 道不離乎心 故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之道 在乎明德之明.

22. 대학지도재명명덕

천성(天性)으로 얻어 본체(本體)가 빛나고 밝아 온갖 이치를 갖추어 신묘(神妙)하게 밝은 것을 명덕(明德)이라 하고, 모든 일에 응하여 자연히 밝은 것을 또한 명덕이라 한다.

마음의 전체(全體)의 밝음을 밝혀서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을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고 한다.

예를 들면, 거울이 텅 비어 밝은 것은 거울의 본체이다. 본체의 밝음을 지니고 있으므로 밝음이 마음속에 보존되고, 본체의 덕(德)을 가지고 있으므로 덕이 밖에 대응(對應)하니, 이는 거울의 밝은 덕을 밝히는 것과 같다.

도(道)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까닭으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도가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다.

 

23. 新民

心卽人所均有 宜非所以自得而自私者也. 旣其有得於天而自明其明德 則推以及之咸與惟新 此之謂新民也.

23. 신민

마음은 사람이 균등(均等)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마땅히 스스로 얻어 사사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늘에서 얻어서 그 밝은 덕을 밝혔다면 이를 미루어 뻗어나가 모두 새롭게 해야 하니, 이것을 ‘신민(新民)’이라 한다.

 

24. 止於至善

日用事物 當行之路 是至善 極盡天理而無一毫人欲之留滯而止於止處 謂之止於至善.

24. 지어지선  

날로 쓰는 사물(事物)의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지선(至善)’이고, 천리(天理)를 다하여 한 털끝만큼의 인욕(人欲)이라도 남겨둠이 없도록 하여 그칠 곳에 그치는 것을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 한다.

 

25. 總結三節

理與氣 化萬物生焉 天下未有無心之物 但明德人物之分 卽可判焉 苟曰人而不明其明德 其於新民止至善何有哉.

25. 총결삼절

이(理)와 기(氣)가 변화하여 만물을 생육(生育)한다. 천하에 마음이 없는 물건이 없으나 명덕(明德)만은 사람과 물건을 구분하여 판단(判斷)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그 밝은 덕을 밝히지 않는다면, 신민(新民)과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26. 知止而後有定

止者 卽當止於至善而不遷 固非半途而止之止也. 至善所在惟事理之當然則終身行之而不止 故知其那處可立 那地可止而後 可謂知止. 苟之東之西之此之 彼則是不知止者也. 是以子曾子曰 爲人子止於孝 爲人臣止於忠 是固職分上 當行底道理而行之不已 亦可謂知止也.

26. 지지이후유정

그친다는 것은 마땅히 지극한 선에 그쳐서 옮기지 않는 것이니, 길을 반쯤 가다가 그만둔다〔半途而止〕고 할 때의 ‘止(지:정지)’가 아니다.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은 오직 사리(事理)의 당연(當然)함이니, 죽을 때까지 행하여 그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저 곳이 설만한 지, 이 곳이 멈출 곳인지를 안 뒤에야 그침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동으로 갔다가 서로 가고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간다면, 이는 그칠 곳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자식이 된 자는 효(孝)에 그치고, 신하가 된 자는 충(忠)에 그친다.” 하였다. 이는 직분상(職分上)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이니, 행하여 그치지 않는 것도 그침을 안다고 할 수 있다.

 

27. 定而後能靜

定與靜本乎一心知其所當止則心定而自然有靜 所以靜者安之幾也.

27. 정이후능정

정(定)과 정(靜)은 일심(一心)에 근본(根本)하니, 마땅한 그칠 바를 알아 그치면 마음이 안정되어 자연히 고요함이 있다. 그러므로 정(靜)은 편안해 지려는 기미〔幾〕이다.

 

28. 靜而後能安

自靜而之安 不甚相遠 但體驗功效之淺深 自有分別底道理也.

28. 정이후능안

고요함에서 편안함으로 가는 것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 다만 체험(體驗)과 공효(功效)가 얕고 깊은 데에서 저절로 분별(分別)하는 도리가 있다.

 

29. 安而後能慮

安所以安其處 慮所以窮極事物之理而盡其妙也. 能安則事物未來 具衆理而安天 盖天理渾然之際 無一毫人欲之私者也. 能慮則事物方來 須當硏幾審樞 祗以一理統萬事者爾.

29. 안이후능려

안(安)은 거처(居處)를 편안히 여기는 것이고, 여(慮)는 사물의 이치를 궁극(窮極)하여 그 묘함을 다하는 것이다. 편안하면 사물이 다가오지 않고 온갖 이치가 구비되어 천리(天理)에 안주(安住)할 수 있으니, 대개 천리가 혼연(渾然)한 즈음에 한 털끝만큼의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사물이 막 닥쳐올 때 모름지기 마땅히 기미(幾微)를 궁구(窮究)하고 추기(樞機)를 살펴야 하니, 다만 하나의 이치로써 만 가지 일을 거느릴 수 있다.

 

30. 慮而後能得

慮之能故能得之 其所得何物. 處事精詳會通萬理而苟無一髮之失 則不失其所得於心者也.

30. 여이후능득

능히 생각할 수 있는 까닭으로 얻을 수 있으니, 얻는 바가 어떤 물건인가? 일을 처리함이 정미(精微)롭고 자세하여 만 가지 이치를 잘 이해하여 진실로 한 털끝만큼이라도 실수가 없으면, 마음에 터득한 바를 잃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31. 格物

天覆地載 無一物不得其理 物理之表 理物之裏 是以天下 未有理外之物 確乎心上一理而推極於事物 則物理皆然矣. 理雖在物 格在吾心 其所以格之者 亦理也. 擴之而至於天下 約之而存乎一心 無不統乎萬物而格之在心 故惟自家心上 有天地天地之物 卽吾心之物自家心上 有事物事物之理 卽吾心之理也. 亦其卽物窮理則實天地者物也而物爲天地之實 故理與氣合萬物殊形萬事異 機凡應事接物 莫不因其理而極其妙則物之表裏 精粗或無不格.

31. 격물

하늘은 덮고 땅은 실어 한 가지 물건도 그 이치를 얻지 못함이 없다. 물(物)은 이(理)의 표(表)이고, 이(理)는 물(物)의 속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이치 밖의 물건은 있지 않다. 마음 위의 한 가지 이치에 확실하여 미루어 사물(事物)을 미루어 궁극(窮極)하면 물리(物理)는 모두 그러하다.

이(理)가 비록 물(物)에 있으나 격(格)함은 내 마음에 있으니, 이른다는 것은 또한 이(理)이다. 이를 확장(擴張)하면 천하에 이르고 요약(要約)하면 내 한 마음에 두어 만물을 거느리지 않음이 없다. 격(格)함은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 위에 천지가 있으니 천지의 물(物)은 곧 내 마음의 물(物)이오, 자기 마음 위의 사물을 가지고 있으니 사물의 이(理)는 곧 내 마음의 이(理)이다.

또한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면 천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물(物)이오, 물(物)이 천지를 가득 채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理)와 기(氣)가 합하여 만물이 형태는 다르고 만사(萬事)가 기미(機微)는 다르지만 모든 사위(事爲 : 일)와 물질(物質)에 응접(應接)하는 것은 그 이치로 인하여 그 신묘(神妙)함을 궁구(窮究)하지 않음이 없으니, 물(物)의 표리(表裏)와 정추(精粗)를 혹 격(格)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32. 致知

知心之到妙也 擴其心之妙 到而充之謂之致知 盖心之靈莫不有知而其於事物之 或有未盡 故致其精妙 以極其知. 是以鄒夫子嘗曰 知皆擴而充之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卽此之謂也. 盖學問用工 至精至妙 妙中有妙 精中有精 自明德至於致知 其閫奧 亦不知幾許重 然一於心而已.

32. 치지

‘知(지)’는 마음이 묘하게 이른 것이니, 그 마음이 묘하게 이른 것을 확충(擴充)하는 것을 ‘치지(致知)’라 한다. 대개 마음의 신령함은 앎을 가지지 않음이 없지만 사물에 혹 미진(未盡)함이 있다. 그러므로 그 정묘(精妙)함을 다하여 그 앎을 극진히 한다. 그래서 추부자(鄒夫子:孟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지식은 모두 확충해 가는 것이니, 불이 처음 타고 샘물이 처음으로 솟아 나오는 것과 같다.” 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대개 학문(學問)에 공(工)을 씀은 지극히 정묘(精妙)하니, 묘(妙)한 가운데 묘(妙)가 있고 정(精)한 가운데 정(精)이 있다. 명덕(明德)으로부터 치지(致知)에 이르는 그 깊은 뜻은 몇 겹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한결같이 할 뿐이다.

 

33. 誠意

心之所由 謂之意 實其心之所由 謂之誠 誠能無自欺 是誠意底 最初工夫大哉. 誠之用也. 格諸天地而無違致諸鬼神而無疑天地鬼神 猶如是 矧其家而國而天下乎. 意誠則心正 心正則身修 譬猶崑玉藏處. 山容增彩驪 珠藏處水色增光爾. 掩不得而微著亦猶是夫.

33. 성의

마음이 가는 것을 의(意)라 하고, 마음이 가는 것을 참되게 하는 것을 성(誠)이라 한다. 성(誠)은 스스로 속임이 없는 것이니 이는 성의(誠意)하는 최초의 공부이다. 크도다! 성(誠)의 작용이여. 천지에 이르러 어김이 없고 귀신에 이르러 의심이 없으니, 천지 귀신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집〔家〕․나라〔國〕․천하(天下)에 있어서 어떻겠는가. 뜻이 정성스러워지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마음이 바로잡히면 몸이 닦이니, 비유하자면 곤륜산(崑崙山)의 옥(玉)이 감추어진 곳에는산의 모습이 더욱 광채(光彩)를 내고, 여룡(驪龍)의 구슬이 감추어진 곳에는 물빛이 더욱 빛나는 것과 같다. 가릴 수 없어서 은미(隱微)하게 드러남이 이와 같은 것이다.

 

34. 正心

心一身之主宰 明德所存也. 其本體之明 無不正 然應物之際 或有正與不正 苟血氣私之則本體之明 不得其正. 喜怒哀樂與好惡 不得其所以正 盖無爲之時先正其本體之明 是正心底工夫.

34. 정심

마음은 한 몸을 주재(主宰)하는 것으로 명덕(明德)이 보존된 곳이다. 그 본체(本體)의 밝음은 바르지 않음이 없으나 사물에 응접(應接)할 즈음에 혹 바르고 바르지 않음이 있다. 만약 혈기(血氣)가 사사롭게 하면 본체의 밝음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니,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좋아하고 싫어함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대개 아무 작위(作爲)함이 없을 때 먼저 그 본체의 밝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는 공부이다.

 

35. 修身

身人各有之 覆載間有生之準的也. 有生之的莫大乎一身而五氣之精蘊諸中而爲仁義禮智信 故新爲五常之器 苟不修五常蔑矣可不愼乎.

35. 수신(修身:몸을 닦음)

몸은 사람이 각각 가지고 있으니, 하늘이 덮고 땅이 싣는 사이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준칙(準則)이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법칙 가운데 자신의 한 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다섯 가지 기운의 정기(精氣)가 마음속에 쌓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되므로 몸은 오상(五常)의 그릇이 된다. 만일 닦지 않으면 오상이 사라질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36. 齊家

家親 親之攸宅 父而子 兄而弟 夫而有婦夫倫之正經 由乎正經 是爲齊家之道 苟不由其道而行苟曰 有粟安得以食諸 此所以孝悌慈正心之用 誠能正其心而無徧私之溺則一家之內 上行下效 捷於影響.

36. 제가(齊家:집을 가지런히 함)

가친(家親)은 친족(親族)의 유택(幽宅)이니, 부자(父子)․형제(兄弟)․부부(夫婦)는 천륜(天倫)의 정경(正經)이니, 정경으로 말미암는 것이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도이다. 만약 그 도를 따르지 않고 행한다면, 곡식(穀食)이 있다한들 어찌 이를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효도와 공경, 자애(慈愛)는 마음을 바로잡는 용(用)이니, 참으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치우치거나 사사로운데 빠짐이 없도록 한다면, 일가(一家)의 안에 윗사람이 행하고 아랫사람이 본받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를 것이다.

 

37. 治國平天下

定區界而治謂之治國 統四海而平謂之平天下 治平之雖宇大小之分 治平之道一也. 盖聖人之治天下也 豈奇戶誘爲哉. 天肅之所化匪物物刻而畵之也. 陽舒之際萬物 倂育王道之仁也. 嚴之時羣物攸藏王道之智也. 終古及今堯舜之治 無以加諸惟舜也. 恭己而已則恭己盛德之著也. 不待强爲而四海之內咸戴其德盛矣. 夫其至治之化及於天下萬世而爲治平之準矩者 堯舜湯武其揆一也. 大學 只書堯舜 率天下以仁而民徒之 不書湯武之南征北怨而民望之仰何哉. 堯舜湯武 道同而時異也. 成湯幸生於禹之時 則禹之傳湯之受明矣. 盖堯舜禹之授受天時代序春復春之像也. 湯武之征伐冬而春建陽前鬪剝之像也. 雲興雨施鼓之以雷霆 惠以潤澤其非湯武之征也歟. 以仁伐不仁 堯舜湯武易地 皆然矣.

37. 치국평천하

구역(區域)과 경계(境界)를 정하여 다스리는 것을 ‘치국(治國)’이라 하고, 사해(四海)를 통솔(統率)하여 평화롭게 하는 것을 ‘평천하(平天下)’라 한다. 다스리고 화평(和平)하게 하는 것이 비록 대소(大小)의 분별이 있으나, 다스리고 화평하게 하는 도는 한 가지이다.

대개 성인(聖人)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깨닫게 하겠는가? 그런데도 천하가 교화(敎化)된 것은 모든 물건에 새겨서 그린 것이 아니다. 드러내어 펴는 즈음(봄과 여름)에 만물이 함께 생육(生育)하는 것은 왕도(王道)의 인(仁)이오, 숙살(肅殺)하는 삼엄(森嚴)한 때(가을과 겨울)에 온갖 사물이 감추어지는 것은 왕도의 지(智)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요순(堯舜)의 정치에 보탤 것이 없다. 순(舜)임금은 자기를 공손히 했을 뿐이니, 자기를 공손히 하는 것은 성대(盛大)한 덕이 드러난 것이지, 강요(强要)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사해(四海)의 안이 다 그 덕의 성함을 추대(推戴)했으니, 그 덕이 성대했던 것이다.

대체로 지극한 다스림의 교화(敎化)가 천하 만세에 미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법도가 된 것은 요(堯)․순(舜)․탕(湯)․무(武) 모두가 그 법도는 한 가지이다. 대학(大學)에서 다만 “요순(堯舜)이 천하를 인(仁)으로 거느리니 백성들이 따랐다.”고 한 것만 쓰고, “탕무(湯武)가 남쪽을 정벌하니 북쪽이 원망하여 백성들이 바라보았다.”고 한 것은 쓰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요․순․탕․무가 도는 같지만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성탕(成湯)이 다행히 우(禹)임금 시대에 태어났으니, 우(禹)임금은 전하고 탕(湯)임금이 받은 것은 분명하다. 요․순․우가 천명을 주고받음은 천시(天時)가 절서(節序)를 교대(交代)하여 봄이 다시 봄이 되는 형상이고, 탕․무가 정벌한 것은 봄에서 겨울이 된 것이니, 양(陽)을 세워 싸우고 박탈(剝奪)하는 형상이다.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며 뇌성벽력(雷聲霹靂)을 쳐서 북을 치듯 울리고, 만물을 윤택(潤澤)하게 한 것은 탕․무의 정벌(征伐)이 아니겠는가? 인(仁)으로써 불인(不仁)을 정벌함은 요․순이나 탕․무가 입장(入丈)을 바꾸어도 모두 그럴 것이다.

 

38. 絜矩

絜 度也 矩所以爲方也. 卽恕者之事 盖人 雖有貴賤之殊 心之本體 人所同然矣. 我之所好人 亦好之我之所惡人 亦惡之 故因其吾心之所好惡推度之而以施諸人 是絜矩之道也. 矩之義 恐或有方正之義也歟. 卽以吾之所好施諸人而人 苟不服不可不正之以道 宜亦絜矩之義耳.

38. 혈구

‘혈(絜)’은 헤아리는 것이고, ‘구(矩)’는 직각을 만드는 것이니, 곧 남을 용서(容恕)하는 사람의 일이다. 대개 사람은 비록 귀천(貴賤)의 차이가 있으나 마음의 본체(本體)는 모든 사람이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로 인하여 미루고 헤아려 남에게 베푸는 것이 혈구(絜矩)의 도이다. ‘구(矩)’라는 뜻에는 혹 방정(方正)하다는 뜻이 있을 것이다. 곧 내가 좋아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었는데 만일 그 사람이 심복(心腹)하지 않으면, 도(道)로써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혈구의 뜻이다.

 

39. 中庸

余於中庸一部書讀得虛殼了祗今積年之力而更加潛玩該其前日所未洽心之所得雖多然祗因註釋之要 遂段摘句而忘究已意 至若全編要領 不敢忘加理會也. 今其讀了 自天命率性 至于上天之載 無聲無臭 體統相因 脉絡貫通 聖人之道 彷彿乎天地之大 日月之明而仰之若彌高然高而不高爾 孔門傳受心法 盡載此書 今其一貫而萬殊 萬合而爲一 以發明天人一理之理而一於中者也. 天地之道 亦不過乎中庸 春暖冬寒 各適其時 乃天地之中庸也. 夏葛 各裘飢食湯飮 以時制宜 乃聖人之中庸也. 苟有一髮之差 非吾中庸.

39. 중용

내가 중용(中庸) 한 부의 책을 껍질만 읽고 지금도 여러 해 동안 힘을 들이고 다시 완색(玩索)하여, 전날 미흡(未洽)했던 부분을 탐구(探究)하여 마음에 터득한 아주 바가 많았다. 그러나 주석(註釋)하는 요령으로 인하여 단락에 따라 구절을 뽑아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다하였지만, 전편(全篇)의 요령 같은 것은 감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지금 천명(天命)과 솔성(率性)으로부터 읽어 상천지재 무성무취(上天之載 無聲無臭)에 이르기까지 체통(體統)이 서로 인하고 맥락(脈絡)이 관통하니 성인(聖人)의 도는 천지의 도와 일월(日月)의 밝음과 비슷하여 우러러보면 더욱 높은 듯하지만 높아도 그다지 높지는 않다.

공문(孔門:공자의 문하)에서 심법(心法)을 전수(傳受)하는 내용이 이 책에 다 실려 있다. 지금 하나로 꿰 뚫면서도 만 가지로 다르고 만 가지를 합하여 하나로 하여 하늘과 사람이 한 가지 이치이니, 중도(中道)에 한결같이 함을 밝힌 것이다. 천지의 도는 또한 중용(中庸)에 불과하니, 천인(天人)의 봄은 따뜻하고 겨울은 추워 각기 그 때에 적합한 것이 바로 천지의 중용이다. 여름에는 갈옷을 입고 겨에는 갖옷을 입으며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며 때에 따라 마땅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성인의 중용이다. 만일 한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나의 중용이 아니다.

 

40. 天命之謂性

命 卽天所賦也. 性 卽人之所受也. 一理流行 陰陽五行循旋不已 化生萬物生之者 理也. 生者 氣也 氣不外乎理而氣以成形天之所命 卽理也. 伊川先生曰 天所 賦爲命 物所受 爲性 盖理之於人爲性 者明矣.

40. 천명지위성

‘명(命)’은 곧 하늘이 부여(賦與)한 것이고, ‘성(性)’은 곧 사람이 받은 것이다.

한 가지 이치가 유행(流行)하여 음양(陰陽) 오행(五行)이 순환하여 그치지 않아 만물을 화생(化生)하니, 낳게 하는 것은 이(理)이고 낳는 것은 기(氣)다. 기는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기로써 모양을 이룬다. 하늘이 명한 것이 곧 이(理)이다. 이천(伊川) 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이 부여하는 것은 명(命)이고, 물(物)이 받는 것이 성(性)이다.” 하였으니, 대개 이(理)는 사람에게 성(性)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41. 朱夫子釋氣以成形理亦賦焉

此章之釋 所以解天命之性 故曰理 亦賦焉理. 卽物受之爲性者也.

41. 기이성형리역부언

이 장(章)의 해석은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라는 뜻을 풀이한 까닭으로 이(理) 또한 부여(賦與)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곧 물(物)이 받아서 성(性)으로 삼은 것이다.

 

42. 率性之謂道

易繫曰 乾道變化 各正性命. 盖人未成以前理在乎天 及其生也. 因各得其正而爲性 性所以具一理而道之由出也. 因率在我之正而行乎當行之路 是爲道 非所以捨在我而率在彼者也.

42. 솔성지위도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이르기를, “건의 도가 변화함에 각기 성정(性情)을 바로 잡는다” 하니, 대개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理)는 하늘에 있다가, 나고 나서 각기 그 바름으로 인하여 성(性)으로 삼았으니, 성이 한 가지 이치를 갖추어 도가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다. 거느리는 것은 나의 바름에 있으니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을 간다면, 이것이 도이다. 나에게 있는 것을 버리고 저기에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43. 修道之謂敎

敎所以因其在我之性而導之者爾 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君君臣臣 人道之所當然 故敎之以是而欲其人人 得知之人而苟無敎於禽獸何異乎.

43. 수도지위교

교(敎)는 나에게 있는 성(性)으로 인하여 인도하는 것일 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며,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다우며,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우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움은 인도(人道)의 마땅한 바이다. 그러므로 이로써 가르쳐서 사람마다 이를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고 만일 가르침이 없다면 금수(禽獸)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44. 可離非道

人生覆載 頭戴于天 足履于地 雖一息之頃 不可得而離乎天地可離非人也. 矧惟道常常在我 宜無一髮之間 然則曷嘗有我我相離之理乎. 苟有物私間之則道與我之相離 不啻爲千百里之遠 亦爲仁道之所棄見棄於道則人乎哉.

44. 가리비도

사람은 위에서 덮어주는 하늘과 아래서 실어주는 땅 사이에 사니 머리는 하늘을 이고 발은 땅을 밟는다. 비록 한 번 숨을 쉬는 잠깐 사이라도 하늘과 땅을 떠날 수는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오직 도가 항상 나에게 있어서 마땅히 한 털끝의 간격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서로 떠날 이치가 있겠는가?

만일 외물(外物)의 사사로움이 사이에 끼인다면 도와 내가 서로 이탈(離脫)됨은 천리 멀 뿐만 아니라, 인도(人道)에도 버림을 받을 것이니 도에 버림을 당한다면 사람이라 하겠는가?

 

45. 戒愼乎其所不睹

不睹不聞 事物未來之時也. 必先密察微幾 常持戒愼焉 則雖之楚之越 我之所當行之路 嘗坦坦平平 此戒愼之致也. 苟不戒愼眼前 無非荊棘 必自不賭不聞中出來 可不戒愼乎.

45. 계신호기소불도

보지 않고 듣지 않음은 사물이 아직 나에게 오지 않았을 때이다. 반드시 먼저 은미(隱微)한 기틀을 세밀하게 살펴 항상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비록 초(楚)나라에 가거나 월(越)나라에 간다 하더라도, 내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은 평탄(平坦)하고 평탄할 것이니, 이는 경계하고 삼간 소치(所致)이다.

만일 경계하고 삼가지 않는다면 눈앞에 가시밭이 아님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가운데 나오므로 경계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46. 莫見乎隱

隱微之際 天理人欲 消長之幾 必欲掩之而不可得者也. 汎日用事爲之際 神明在右天聽在上 宜明鑑乎 不言之中不可欺者天也. 天不可欺 則其心自欺而隱其隱微乎.

46. 막견호은

은미한 즈음에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소장(消長)하는 기틀은 반드시 가리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하물며 모든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이나 행위를 처리할 무렵에 신명(神明)이 오른편에 있고 하늘이 듣는 것이 위에 있으니, 마땅히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말하지 않는 가운데 속일 수 없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을 속일 수 없다면, 그 마음을 스스로 속이고 그 은미(隱微)함을 더욱 은미하게 하겠는가?

 

47. 君子愼其獨

君子之道 誠實無僞而已. 是以 必不自欺而益加謹愼於人欲未萌 之前以全渾然之幾 於人所不睹 此之謂愼獨也. 盖天理人欲之分 在於己 所獨知之處獨者 不但獨處之時也. 吾心中善念萌 不善萌 雖廣坐中人所不知而獨. 知者爾此學之者 所當尤庸審愼者也.

47. 군자신기독

군자(君子)의 도는 성실(誠實)하여 속임이 없을 따름이다. 이런 까닭으로 반드시 자기를 속이지 않고 인욕(人欲)이 싹트기 이전에 더욱 삼가는 마음을 더하여 사람이 보지 못하는 혼연(渾然)한 기틀을 온전히 하니, 이를 ‘신독(愼獨)’이라 한다.

대개 천리와 인욕이 나뉨은 자기 홀자만이 아는 곳에 있다. ‘독(獨)’이란 다만 혼자 있을 때만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서 착한 마음이 싹트고 착하지 않는 마음이 싹틈을 비록 넓은 자리 가운데 있어도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 혼자만이 알 뿐이다. 이는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더욱더 살펴서 삼가야 하는 것이다.

 

48.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

喜怒哀樂 在物不在我 而亦恐在我而不在物者 有之凡在常人所喜而我則不喜 凡在常人所不怒而我則怒 之常人所不哀而我則哀 之常人所樂而我則不樂 所以感發之正與不正而然也. 妄敢謂之在我 不在物乎 所以感發之前性之靜也. 道具於理 故其體正而無偏倚之私 此謂之未發之中 感於物而動性之和也. 由乎道 故其用中而無乖戾之蔽. 鄒夫子所謂性善又曰 情可以爲善者是也. 盖四者 情也 雖聖人 亦不能無者 然其所感 有正有邪 其所發有中有偏 是固善惡之分 靜而正而未發之中 性之體而情之未其然也. 感而動而發 皆中節性之用而情之其然也. 然當其可喜而喜而喜極 則性之德亂矣. 當其可怒而怒而怒過則性之德壈矣. 當其可哀而哀而哀極則性之德喪矣. 當其可樂而樂而樂極則性之德逸矣. 其於所可 亦有深戒者 此學者之所當用功於一中字爾.

 

48.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발이개중절위지화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은 외물(外物)에 있고 나에게 있지 않으며, 또한 나에게 있고 외물에 있지 않는 것도 있다. 다른 사람은 기뻐하지만 나는 기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성내지 않는데 나는 노하며, 다른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데 나는 슬퍼하며, 다른 사람은 즐거워하는데 나는 즐거워하지 않으니, 감발(感發)함이 바른가, 바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함부로 나에게 있고 외물에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감발하기 이전은 성(性)의 고요함이다. 도는 이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 체(體)가 정직하여 기우는 사사로움이 없으면, 이는 발하지 않은 중(中)이 외물에 감응하여 움직인 것이니, 성(性)의 화(和)이다.

도(道)로 말미암은 까닭으로 중을 써서 어그러지는 폐단이 없다. 추부자(鄒夫子:孟子)가 이른바 “성(性)이 선(善)하다” 하고, 또 “정(情)을 선하게 할 수 있다.” 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대개 이 네 가지는 정(情)이다. 비록 성인도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감응함에 정(正)과 사(邪)의 구분이 있고, 그 발하는 바에 중(中)과 편(偏)이 있다. 이는 진실로 선악(善惡)의 구분인데, 고요하고 정직하여 발하지 않은 중(中)은 성(性)의 체(體)이니 정(情)의 기연(其然)이 아니고, 감응하고 움직여 발함이 모두 절도에 맞음은 성(性)의 용(用)이니, 정의 기연(其然)이다.

그러나 기뻐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 기쁨이 극도에 달하면 성(性)의 덕이 어지러워지고, 노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 노함이 지나치면 성의 덕이 무너지며, 슬퍼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 슬픔이 극도에 달하면 성(性)의 덕을 잃게 되고, 즐거워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 즐거움이 극도에 달하면 성(性)의 덕이 잃게 된다.

가능한 곳에도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이것은 학자가 마땅히 ‘중(中)’이라는 한 글자에 공(功)을 들여야 할 뿐이다.

 

49. 中也者天下之大本也和也者天下之達道也

中所以體其心之本然 和所以感其物之旣然也. 中有未發之中已發之中而統言之以天下之大本者 有本體之明明於中者存焉. 故其發之也 亦得其中此所以體用一於中者爾. 恐是大本者 天下人之本然之道也. 達道者 天下人之所當行之路也.

49. 중야자천하지대본야화야자천하지달도야

중(中)은 마음의 본연을 체득하는 것이오, 화(和)는 사물의 개연함을 느낀 것이다. 중(中)에는 드러나기 전의 중(中)이 있고, 이미 드러난 중(中)이 있다. 천하의 큰 근본으로 통합하여 말해본다면 본체(本體)의 밝음이 있고 중(中)에 밝음이 있는 까닭에 그 드러나는 것 또한 그 중(中)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체(體)와 용(用)으로 중(中)에 한결같이 하는 것이다. 큰 근본은 천하 사람들의 본연한 도(道)이고, 달도(達道)는 천하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하는 길이다.

 

50. 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

致中和所以極其中庸之德 以致之者也. 盖人極其中庸之德 則天理渾然於中而天地萬物 本吾一體爾. 吾心上有天地 宜與天地同位焉. 吾心上有萬物與萬物同育焉. 今夫喜怒哀樂 未可謂之性情之全德 然全德中出來故言致中和如天地之陰焉. 陽焉 動焉 靜焉而天地位萬物育焉.

50. 치중화천지위언만물육언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한다는 것은 중용의 덕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중용의 덕을 지극히 한다면 천리가 중(中)에 혼연(渾然)하니, 천지 만물은 본래 나와 한 몸이다. 내 마음 위에 천지가 있으니 마땅히 천지와 같이 자리해 있고, 내 마음 위에 만물이 있으니 만물과 같이 양육(養育)한다.

지금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을 성정(性情)의 온전한 덕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온전한 덕 가운데서 나온 까닭으로 ‘치중화(致中和)’라 했으니, 천지가 음(陰)이고 양(陽)이며, 동(動)하고 정(靜)하니 천지가 제자리하고 만물이 생육하는 것과 같다.

51. 君子中庸小人反中庸

君子以全其天而循在我之性 故謂之中庸 小人不知天理之攸在而反其天 故謂之反中庸.

51. 군자중용소인반중용

군자는 천성을 온전히 하여 나에게 있는 본성을 따르는 까닭으로 ‘중용’이라 하고, 소인은 천리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천성과 반대로 하는 까닭으로 반중용(反中庸)이라 한다.

 

52. 君子之中庸也君子而時中

中庸 日用事爲間不可須臾離 可離非君子之道也. 是以君子 雖造次時其時而一於中 盖中無定體者是耳. 春冬之寒暖不同而天之時中一矣. 冬夏之葛裘不同而君子之時中一矣. 天時有萬化 人事有萬殊 不可執一而言爾. 譬猶鑑之照物 物雖異形鑑之照 不差毫釐而中之也.

52. 군자지중용야군자이시중

중용은 일상의 사건이나 행위 사이에 잠시라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군자의 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가 비록 경황(驚遑)이 없을 때에도 그 때에 맞추어 한결같이 중(中)을 지키니, 대개 중은 일정한 체(體)가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봄과 겨울은 춥고 더움이 같지 않으나 천시(天時)에 맞음은 마찬가지이다. 겨울이나 여름에 갈옷이나 갖옷을 입는 것은 다르지만 군자가 때에 맞게 함은 똑 같다.

천시의 시중(時中)은 마찬가지이다. 천시(天時)는 만 가지 화육이 있고 인사(人事)는 만 가지 다름이 있으니, 한 가지만을 잡아서 말할 수는 없다. 비유컨대, 거울이 물건을 비춤에 물건의 모양은 비록 다르지만 거울이 비추는 것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아 중(中)을 유지한다.

 

53. 中庸其至矣乎民鮮能久矣

至 極也 極則無表無外而中之極也. 凡天下之至理 不過乎中庸 天下之至道 亦不過乎中庸 而中庸人人所同有者爾. 人各以所同 有盡其在我則 宜無鮮能之患矣.

53. 중용기지의호민선능구의

지(至)는 다한다는 뜻이다. 다하면 겉과 밖이 없어서 중(中)이 지극할 것이다. 천하의 지극한 이치는 중용에 지나지 않고, 천하의 지극한 도는 또한 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용은 사람이 모두 같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각기 같이 지니고 있는 바로써 나에게 있는 것을 다한다면, 마땅히 능한 이가 적은 근심은 없어질 것이다.

54. 知者過之愚者不及

天地儲精 稟五氣之秀而爲人其爲道也 中庸而已. 誠能由乎道而行之 則或無過不及之差而所謂知者 馳於高遠而不中 愚者樂其固累而不及此. 所以知愚之所同患也.

54. 지자과지우자불급

천지가 정기(精氣)를 쌓았는데 오행(五行)의 빼어남을 받아 사람이 되었으니 그 도는 중용일 따름이다. 진실로 도로 말미암아 행한다면, 혹시라도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은 고원(高遠)한 곳으로 달려 중에 맞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완고(頑固)하고 누(累)가 됨을 즐기니, 이것이 지혜롭고 어리석은 사람이 함께 근심할 바이다.

 

55. 人莫不飮食也鮮能知味也

飮食所以人人得以寄生者也. 一日不再食則飢 故救飢爲先而不能咀嚼唅下爲主 鮮能知其味矣. 此所以人莫不由道而行鮮能知其道之所以行也. 盖飮食離人則人不可得以生 然不知其所以生而求飽道可離人則人不可得以行 然鮮能知其由道而行. 矣是以道之不行也.

◎叶韻 食養氣精窮之線 道由天性率眞時.

55. 인막불음식야선능지미

음식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니, 하루에 두 번 먹지 않으면 굶주리게 된다. 그러므로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이 우선이니 씹어 삼키는 것을 위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맛을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도로 말미암아 행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도를 행해야 하는 까닭을 아는 이는 적다.

대개 음식이 사람에게 멀어지면 사람들은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살려서 굶주림을 구제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도를 사람이 떠날 수 있다면 사람이 걸어갈 수 없다. 그래서 능히 그 도로 말미암아 가야 함을 아는 이가 적다. 이런 까닭으로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 협운(叶韻) 음식은 정기(精氣)가 궁핍(窮乏)한 선(線)을 기르고 도는 천성이 참을 따를 때를 말미암는다.

 

56. 君子之道費而隱

費 所以道之用廣矣大矣. 隱所以道之體包乎天地之理而彌綸於其中者也. 是以 費隱不外于中庸而用之 則曲盡天地之道 故昭著可見矣. 隱於道體之中而不用則微若不見 然體具廣大隱於中庸而不見者也.

◎費其天地和融裏 隱是乾坤眇邈中

56. 군자지도비이은  

비(費)는 도(道)의 용(用)이 넓고 크다는 뜻이고, 은(隱)은 도의 체(體)가 천지의 이치를 포함하여 그 가운데 두루 경륜(經綸)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비은(費隱)이 중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쓰는 것은 천지의 도를 곡진(曲盡)하게 하는 까닭으로 환히 드러나 볼 수 있다. 도체(道體)의 가운데 숨어 쓰지 않는다면 은미하여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체(體)가 광대함을 갖추어 중용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비(費)는 천지가 융화(融化)한 속이고, 은(隱)은 건곤(乾坤)이 아득한 가운데이다.

 

57. 君子語大天下莫能載焉

君子之道 大而莫能載焉 則費之用可知矣. 君子之道 小而莫能破焉 則隱之德可知矣. 道不離人 故雖以夫婦之愚不學 夫唱婦隨而與知焉 夫婦之不肖 不學養子而能行焉 及其至也道大 如天通天之外 雖聖人亦有所不知焉 亦有所不能焉 至若天地之大人 猶所憾風雨不均是也.

◎道同天地宜無外 至大沖融費隱間

57. 군자어대천하막능재언

군자의 도가 커서 실을 수 없다면 비(費)의 용(用)을 알만하고, 군자의 도가 작아서 부술 수가 없다면 은(隱)의 덕을 알만하다. 도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 까닭으로 비록 어리석은 부부(夫婦)가 배우지 않아도 남편이 부르면 아내가 따라하여 참여하여 알 수 있고, 부부가 불초(不肖)하여 아이 기르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잘 해낸다.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도가 커져서 마치 하늘에 통한 듯하니 하늘 이외에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고,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이다. 천지의 큼에도 사람이 오히려 유감(遺憾)으로 여기는 바가 있으니 비바람이 고르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

◎도는 천지가 같아 마땅히 밖이 없으니 비은(費隱) 사이에 지극히 크고도 텅 비었네.

 

58. 引詩之鳶飛戾天魚躍于淵言其上下察也

羽飛鱗躍 游於天機之中者 非特鳶魚 而特擧之言其上下察非其鳶魚 具是天機之物 飛也躍也 動是天機而天理之自然 昭著於其中最是易見爾. 至淸而在上者 莫有如天而高飛戾天 至淸而在下者 莫有如水而游躍於下矣.且夫上下有天水 在其中魚躍游天 鳶飛戾水 水與天而雙淸 魚是天歟 鳶是水歟 別樣 天機 若在乎天機之外 而飛之躍之 卽天機之自然也. 盖費隱之妙化 亦猶是學者 詳察其上下而上下之中 又有上下也. 聖人引物振興之妙類 多如此 若其河馬洛龜之圖書 太極陰陽 兩儀相生之理 備在於其中 聖人演譯之故 後之學者 獲聞其微奧 及其鳶魚之飛躍 放過則只是等閒物 熟讀之然後 可庶幾耳.

◎非宜這箇等閒物 微動天機理自然 飛躍也將心上得胸中活潑有天淵

 

58. 인시지연비려천어약우연언기상하찰야

 날개를 지닌 새들은 날고 비늘이 있는 물고기가 뛰는 것은 천기(天機) 가운데 노니는 것이니, 다만 솔개나 물고기뿐만이 아니지만 특별히 이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그 위아래에 드러난다는 것은 솔개나 물고기가 모두 천기의 물건이 아니라, 날고뛰는 움직임이 천기여서 천리의 자연이 그 가운데 환히 드러나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또한 대저 아래위로 하늘이 있고 물이 있으며 그 속에서 물고기가 뛰어 하늘에서 놀고 솔개가 날아서 물에 이른다. 물과 하늘은 둘 다 맑으니 물고기는 하늘이오, 솔개는 물인 것이다. 다른 것은 하늘의 기틀이 만약 하늘의 기틀 밖에 있으니 날고 뛰는 것이 바로 하늘 기틀의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개 비은(費隱)의 오묘한 조화에도 오히려 학자들은 자세히 아래위를 살피고 아래위의 가운데에 또한 아래위가 있다. 성인(聖人)께서 사물을 끌어서 흥기시키는 오묘함은 대부분 이와 같다. 만약 하도(河圖)․낙수(洛數)의 그림과 책에는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양의(兩儀)가 상생(相生)하는 이치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데 성인께서 이를 연역(演繹)하였다. 때문에 후학(後學)들은 오묘한 뜻과 연비어약(鳶飛魚躍)의 뜻을 얻어들어야지 그냥 지나친다면 단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에 불과 할 것이니 익숙히 읽은 뒤에야 그의 그렇게 되기에 가까울 것이다.   

◎ 지극히 맑아서 위에 있는 것은 하늘과 같음이 없는데 높이 날아 맑은 하늘에 이르고, 지극히 맑아 아래 있는 것은 물과 같은 것이 없는데 아래서 놀며 뛴다.

 

59. 道不遠人人之爲道而遠人不可以爲道

率性由而行是爲道 苟曰爲道而遠人性與人 相間而不可以爲人 亦不可以爲道 天下未嘗有無性之物 矧惟人而性與相違乎. 心是虛以受物而已. 性爲心之所包而靈 且不昧 故心爲一身之主宰也與. 性相離 則心是虛宅聽命於性而應萬事 故率眞無僞而應之 則是爲道爾. 盖道者也 率性而無他別箇 這道理是以人之爲道 行人之所不行而行之 則遠於人而不可以爲道 是所以人皆性善而然也. 中庸一編之義 不外乎率性之爲道也. 人率人之性而爲道 則道無不在 亦不墮在人矣. 朱夫子嘗曰卽以其人之道 還治其人 盖是意也.

◎求他這道非要 吾道只在人人日用間.

 

59. 도불원인인지위도이원인불가이위도

성(性)을 따르는 것은 참됨으로 말미암아 행함이 도가 되니 만일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 한다면 성(性)과 사람이 서로 간격이 생겨 사람이라 할 수가 없고, 또한 도라 할 수 없다. 천하에 성(性)이 없는 물건이 없으니 하물며 사람이 성(性)과 서로 어긋난다면 마음을 비워 외물(外物)을 받아들일 따름이다. 성(性)은 마음이 포함하는 바이고 또 신령하여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가 된다. 마음이 성(性)과 서로 떠난다면 마음은 빈 집이 된다. 성(性)이 하는 명(命)을 듣고 만사에 응하는 까닭으로 참을 따라 거짓이 없다. 이렇게 대응하면 이것이 바로 도이다. 대개 도(道)라는 것은 성(性)을 따라 다른 곳을 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는 바로 사람이 도를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행한다면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도가 될 수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사람들 모두가 성선(性善)하여 그러한 것이다. 중용(中庸) 한 편의 뜻이 솔성지위지도(率性之爲道)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의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가 되어 도(道)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또한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의 도(道)로 다시 사람을 다스린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뜻이다.

◎다른 곳에서 도를 구할 것이 아니라 吾道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사이에 있는 것이다.

 

60. 忠恕違道不遠

違卽相去不遠而以此之此之謂也 忠恕所以爲道之始 故眞實 這做去而着眞 則違不可終違而立脚其地矣. 只以忠恕 終是違道而不遠 則雖不遠 亦不中是欲以學者 十分做去而得十分境界 入於中庸之道者也. 是以 道在率性如何耳.

◎人皆有路通天濶 一線由行不遠違

60. 충서위도불원

위(違)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이것, 이것이라 하는 것이다. 충서는 도의 시작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지어서 참되게 하면 마침내 어기지 못하고 그 곳에 입각(立脚)하게 될 것이다. 다만 충서가 마침내 도를 어김이 멀지 않다면 비록 멀지 않아도 중(中)은 아니다. 이는 학자가 충분히 지어서 충분한 경계(境界)를 얻어 중용의 도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도는 어떻게 성(性)을 따르는 가에 있다.

◎사람은 모두 하늘로 통하는 넓은 길을 가지고 있으니 한 가지 노선으로 말미암아 가면 멀리 어긋나지 않으리.

 

61. 君子之道四丘未能一焉

謙而受益 乃君子之道也. 夫子曰 丘未能一焉則君子 謙受益之道 充滿於其中矣. 以其所求者 自修而行之 亦其未能之乎. 欲以學者 反求諸己 益勉勵而自修也. 下文曰 庸德之行庸言之 謹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則是皆勉進之義也. 聖人那可曰君子之道四 吾不有一未能者 人其力行而能之也云爾. 於此可見聖人勸進之辭 謙謙自修而及於人也.

◎應萬具衆先覺在 未能宜謙是良能.

61. 군자지도사구미능일언

겸손하여 이익을 받음은 군자의 도이다. 부자(夫子)가 말하기를,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 하였다면, 군자가 겸손하여 이익을 받는 도는 그 가운데 충만한 것이다. 그 구하는 바로 스스로 닦아서 행하니 또한 어찌 능하지 못하겠는가? 학자들에게 자기 자신에 돌이켜 구하여 더욱 권면(勸勉)하여 스스로 닦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래 문장에서 “떳떳한 덕을 행하며 떳떳한 말을 삼가며, 행함에 부족한 바가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으며, 말함에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않아, 말은 행실을 돌아보고 행실을 말을 돌아보아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篤實)하지 않겠는가.” 했으니, 이는 모두 권면하여 나아가게 하려는 뜻이다.

성인이 어떻게 “군자의 도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했겠는가? 사람은 힘써 행하면 능하게 됨을 이른 것이다. 여기서 성인이 권면하여 나아가게 하는 말이 겸손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닦아 남에게 미쳐 감을 볼 수 있다.

◎모든 일에 대응하고 여러 이치를 구비한다고 말한 선각(先覺 : 선각자)이 계시지만, 능하지 못하다고 한 것은 마땅히 겸사(謙辭)이나 양능(良能)이다.

 

62.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上不怨天下不尤人

人之自修 盖正己難求人易而不求於人 亦難矣. 以其所難 竟至不難之地而能之 則君子慥慥之功效也. 何怨之有順天而行之 則無怨天之義 不陵下而處己則無尤人之端 於此可見君子修己處人之方 無小礙滯於一隅也. 一言片辭 可以爲萬歲師表矣.

◎要須正己宜無欲 無欲那將求取人.

62. 정기이불구어인칙무원상불원천하불우인

사람이 스스로를 닦음은 대개 자기를 바로 잡기는 어렵고 남에게 구하기는 쉬운데, 남에게 구하지 않는 것도 어렵다. 어려운 바로 마침내 어렵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능해지면 군자의 독실한 공효이니, 어찌 원망함이 있겠는가? 하늘에 순종하여 행한다면 하늘을 원망하는 뜻이 없을 것이고, 아랫사람을 능멸(凌蔑)하지 않고 자신을 처신한다면 사람을 탓하는 단서(端緖)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군자가 몸을 닦고 사람에 처하는 방도가 한 가지 모퉁이에 조금도 막힘이 없고, 한 마디 조각 글이라도 만세의 사표(師表)사가 됨을 볼 수 있다.

◎자기를 바로잡으려면 마땅히 욕심이 없어야 하니 욕심이 없이 어떻게 사람을 취함을 구하겠나.

 

63. 子曰射有似乎君子失諸正鵠反求諸其身

射之而中與不中 在我 不在彼 在心而亦不在我矣. 先正其身而射之 則心與鵠 相符合而中之 然欲正其身先正其心之工夫在焉. 故心有一毫之不正其身 雖正不中其的矣. 反求諸己而求諸心 然後可得其中也.

◎射無詐獲身先正 萬事非他在我心.

63. 자왈사유사호군자실제정곡반구제기신

활을 쏘아 맞추는가, 맞추지 못하는가는 나에게 있는 것이지 저기에 있지 않으며, 마음에 있는 것이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 몸을 바로잡아 쏜다면 마음과 정곡(正鵠)이 서로 부합(符合)하여 적중(的中)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몸을 바로 잡으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로 잡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한 털끝만큼이라도 바르지 못함이 있으면 그 몸이 비록 바르더라도 적중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몸에 돌이켜 구하고 마음에 구한 뒤에야 적중함을 구할 수 있다.

◎활쏘기는 속임이 없으니 몸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하니 모든 일은 다름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네.

 

64.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辟如登高必自卑

君子之道 自愛親至於事君 自修身至於治國平天下 宜皆有序苟曰 在家不知事親之道 爲君盡忠 則是獵等也. 辟如舍近取遠 故行千里之路 必自出門由扁登泰山之高 必自平原而登 省凡君子之道皆當如此.

◎做工這裏宜如是事事無違甚不難

64. 군자지도벽여행원필자이벽여등고필자비

군자의 도는 어버이를 사랑함으로부터 임금을 섬김에 이르고, 몸을 닦음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이르니, 마땅히 모두가 차례가 있다. 만일 “집안에 있을 때,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모르면서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다고 한다면 이는 등급을 뛰어 넘은 것이다. 비유컨대,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취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리 길을 가려면 반드시 문을 나서 빗장으로 말미암아야 하고, 높은 태산(泰山)을 올라가려면 반드시 평원(平原)부터 올라야 한다. 모든 군자의 도는 마땅히 이와 같다.

◎이곳에 공부를 함이 마땅히 이와 같으니 모든 일마다 어김이 없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으리.

65. 子曰鬼神之爲德其盛矣乎

天地之功用亦莫非鬼神造化之迹而鬼神造化之迹 亦皆由出於天地間二氣合變之中矣. 是以夫子贊其德盛如是而其實贊美天地之功用而非一物擧而言之也. 萬物生成之妙 在於二氣流行之妙 二氣卽鬼神合化之中 著見於天地間者也. 是以視之而不見其迹然物生之妙是也. 聽之而不聞其聲然 四時代序 日月代明是也. 其他萬化充滿天地 天之所以爲天 地之所以爲地 亦莫非陰陽二氣鬼神造化之迹也. 鬼神之爲德如是其盛矣乎.

◎物生由德春光好 二氣流行孰使爲 日月用光天地大 陰陽所載妙難知

65. 자왈귀신지위덕기성의호

천지의 공용(功用)은 귀신의 조화의 자취가 아님이 없으니,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고 또한 모두 천지 사이의 두 기운이 합하여 변하는 가운데 나온다. 이런 까닭으로 부자(夫子)가 그 덕이 성대함을 이같이 찬탄하였으니, 실은 천지의 공용(功用)을 찬미(讚美)한 것이지 한 가지 물건을 들어서 말한 것은 아니다.

만물을 생성하는 묘함은 음양 두 기운이 유행하는 묘함에 있으니, 곧 귀신이 합하여 변화하는 가운데 천지 사이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보아도 그 자취를 보지 못하는 것 같으니, 만물을 생육하는 묘함이 바로 이것이고, 들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으니, 사시(四時)의 절서(節序)가 교대(交代)하고 일월(日月)이 교대하여 밝음이 바로 이것이다.

기타 모든 화육(化育)이 천지에 충만하니 하늘이 하늘이 되는 소이(所以)와 땅이 땅이 되는 소이는 또한 음양 두 기운이 귀신의 조화의 자취가 아님이 없다. 귀신의 덕은 이처럼 성대한 것이라 하겠다.

◎물(物)이 생기는 것은 덕(德)으로 말미암아 봄빛이 좋은데, 두 기(氣)가 유행(流行)함은 누가 그렇게 하는가? 해와 달이 빛나고 천지는 큰데 음양이 실은 바는 묘하여 알기 어렵네.

66. 夫微之顯誠之不可揜如此夫

誠實也. 天地之理 不外乎誠 故鬼神之爲德誠實無妄 人之有性 亦不外乎誠 故率性由眞是謂道. 凡天地之理 鬼神之德 人之有性一於誠而無妄者也. 是以天地鬼神與人性之體物不遺者 是皆誠之不可揜也. 大哉 誠之爲義也. 在於天地鬼神 微之顯也. 在於人 亦至微之顯誠之所格無一物不感激矣. 中庸一書中費隱之義 亦無非一誠字之功效也. 宜學者之所孰察焉爾.

◎天長地厚誠微透 二氣昭然通日明

66. 부미지현성지불가엄여차부

성(誠)은 진실(眞實)함이다. 천지의 이치는 성실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귀신의 덕은 성실하여 망령됨이 없다. 사람이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도 정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품을 따름이 참됨으로 말미암으니 이를 도(道)라 한다.

천지의 이치와 귀신의 덕, 사람이 지닌 성품은 한결같이 성실하여 망령됨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천지와 귀신, 인성(人性)은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 이는 모두 성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성(誠)의 뜻은 천지 귀신에 있어서는 은미함이 드러나는 것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지극히 미세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성이 이르는 곳은 한 가지 사물도 감격하지 않음이 없다. 중용 한 책 가운데 비은(費隱)이란 뜻은 또한 성(誠) 한 글자의 공효(功效)가 아님이 없다. 학자들은 마땅히 익숙하게 살펴야 할 따름이다.

◎하늘은 길고 땅은 두터워 성(誠)이 은미하게 통하니, 두 기운이 환하여 해처럼 밝게 통하네.

67. 大德者 必受命

命所以天命也. 是以天覆地載大德之盛 未有如堯舜而堯舜之大德 未嘗以復作於天地之間. 故受命於天未有如堯舜者也. 如孔子之大聖 猶不下於堯舜 然天地之應氣不如堯舜之時爾. 受命與受福於當世 雖不若堯舜之大德 後人之不忘其德於千百世 猶不下於堯舜之大德矣. 苟曰不受天命 則烏能至此乎. 假使不要富貴之大聖 願爲孔夫子之受命 不願爲堯舜之受命矣. 然天之所命有數 不可得以苟造天命也. 嗚呼 堯舜孔子之大聖 不更作於千百載之間 異流橫說盡奪正路而路多岐貳 堯舜孔子一線修整通天之闊路 放於何而尋線嗚呼痛矣.

◎舜之大德通天合 天命拾斯何所歸

67. 대덕자필수명

명(命)은 천명(天命)이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 큰 덕이 성대하여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과 같음이 없으니, 요임금과 순임금의 큰 덕은 천지의 사이에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에 명을 받은 사람은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같은 사람이 없다.

공자(孔子)와 같은 대성인은 오히려 요임금이나 순임금보다 아래가 아니다. 그러나 천지가 상응(相應)한 기운이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와 같지 않을 따름이다. 그래서 명(命)을 받은 것과 복(福)을 받은 것이 당시 세상에 비록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큰 덕과 같지는 않았으나 뒷사람이 그 덕을 잊지 못하여 천백세가 지난 뒤에도 오히려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큰 덕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천명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데에 이를 수 있겠는가? 가령 부귀를 바라지 않는 대성인이라면 공자의 명을 받기를 원하고,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명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명한 것이 운수가 있어서 구차하게 천명을 조작(造作)할 수가 없다. 아, 요임금이나 순임금, 공자와 같은 대성인이 천백세의 사이에 다시 나오지 않아 이단(異端)의 엉퉁한 말이 바를 길을 모두 빼앗아 길은 더욱 갈래가 많아졌다. 요임금이나 순임금, 공자의 한 노선은 하늘로 통하는 넓은 길을 수정(修整)하여 어디로 놓아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아, 애통하도다!

◎순(舜)임금의 크신 덕은 하늘에 통하여 합하니, 천명(天命)을 버리면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68. 君子不可以不修身思修身不可以不事親

凡爲政治人以身 不可以不先正其身 故思其身修則不可以不事親 亦知其賢不肖而親其賢遠其不肖盡其親仁之道 是知人也. 盖人與我有彼此之別 故當知其賢愚而分別之天理在我而無分別底道理 故知天以後 更無他箇底道理也. 苟或不知其在我之天則人之賢愚 難可以分矣.

◎事親善養誠爲大 孝是天花萬口香

68. 군자불가이불수신사수신불가이불사친

정치를 하는 모든 사람은 몸을 먼저 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몸을 닦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어질고 불초(不肖)함을 알아 어진 이를 친하고 불초한 이를 멀리함은 인(仁)한 이를 가까이 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을 아는 것이다.

대개 남과 내가 피차의 구별이 있는 까닭으로 마땅히 그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알아 분별해야 한다. 천리(天理)는 나에게 있는데 분별하는 도리가 없는 까닭으로 하늘을 안 뒤에 다시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있는 하늘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은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고 잘 봉양함은 성(誠)이 큰 일이니, 위대한 효도는 하늘의 꽃향기가 모든 입에 향기로움과 같네.

 

69. 知仁勇三者天下之達德也所以行之者一也

盖誠者 一也. 誠外無物 故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 誠也. 天下之達德 三所以行之者 誠也. 是以天下祉達道人人心上各自有之而天下人之所同路 故謂之達道 然苟不一於誠 不能行之 天下之達德 人之秉彛攸同 人人所固有然及其行也. 不外乎誠一之中矣大哉. 誠之無忘也.

◎棄諸懶散宜爲勇 五嶽一攀斯可登

69. 지인용삼자천하지달덕야소이행지자일야

대개 성(誠)은 한결같은 것이다. 정성 이외에 다른 사물이 없는 까닭으로 천하에 공통된 도가 다섯 가지인데, 이를 행하는 것은 성(誠)이고, 천하에 공통되는 덕이 셋인데 이를 행하는 것은 성(誠)이다. 이런 까닭으로 천하에 공통된 도는 사람 사람의 마음 위에 각기 지니고 있는데, 천하의 사람이 같이 가는 길이다. 그래서 공통된 도라 한다. 그러나 만일 성(誠)에 한결같지 않으면 행하지 못한다. 천하의 공통된 덕은 사람이 잡은 인륜이 같은 바이니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함에 미쳐서 성(誠)으로 한결같이 하는 가운데서 벗어나지 않는다. 크도다, 성(誠)은 망령됨이 없도다.

◎게으르고 산만함을 버림도 용기이니 오악(五嶽)도 한 번 잡으면 오를 수 있다네.

 

70. 及其成功一也

所以住知者 天然有知也. 安行者 不以勉强而安行爲知之勇也. 學知 所以勇於爲學而利行 爲仁之勇也. 困知所以强勉爲知而勉行爲勇之勇也. 此可以見氣稟之不一而可見其天命之所同矣. 是以生知學知困知 及其知也一矣. 然非其勇於爲勇 則安行利行勉行 宜爲徒能知而已.

◎行之不已宜爲勇 勇底何嘗道不行

70. 급기성공일야

태어나서 아는 것은 천연(天然)으로 앎이 있는 것이고, 편안히 행하는 것은 억지로 힘쓰지 않고 편안히 행하는 것이니, 지(知)의 용(勇)이 된다. 배워서 아는 것은 배우는 것에 용감하여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니 인(仁)의 용(勇)이 된다. 애를 써서 아는 것은 억지로 힘써 행함이 지(知)가 되어 힘써 행함은 용(勇)의 용이 된다.

여기서 기품이 한결같지 않음을 볼 수 있고, 하늘이 명한 것이 같음을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태어나서 알고, 배워서 알고, 애를 써서 아는데, 앎에 미쳐서는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용(勇)을 하는 데에 용기가 없다면 편안히 행하고, 이롭게 여겨 행하고, 억지로 힘써 행하는 것이 다만 지(知)가 될 따름이다.

◎행하여 그치지 않으면 마땅히 용(勇)이 되니, 용감해야 할 것이니 어떻게 도를 행하지 않으리오.

 

71. 凡爲天下國家有九經

治天下國家以一身 爲本 故修身爲九經之目 經所以道之常也. 行之有序 施之不紊其序 故以一至九未嘗有 孰先孰後之義而序次確明 自修身至於懷 諸候九經之目 不可易一而亂其序也. 讀者詳察焉.

◎若以九經溷一道 始終相錯者相違

71. 범위천하국가유구경

나라와 국가를 다스림은 자기 몸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 것은 구경(九經)의 조목(條目)이다. 경(經)은 도(道)의 떳떳함이다. 행함에 차례가 있고 베풂에 그 순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까닭으로 하나로써 아홉에 이르니,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라는 뜻이 없이 차례가 밝아진다. 몸을 닦는 것에서부터 제후(諸侯)를 은혜롭게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구경의 조목을 하나라도 바꾸어 그 순서를 문란(紊亂)하게 해서는 안 되니, 독자들은 상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만일 구경(九經)으로 하나의 도를 어지럽히면, 시작과 마침이 서로 바뀌어 어긋날 것이네.

 

72. 凡事豫則立不豫則廢

預前定乎心也. 凡事 指達道達德九經之屬 然下文言前定者 四句則所做百事 皆如是 然後一於誠而未有窘艱之歎耳. 是以家語云 一年之計 在於春 一日之計 在於寅 此是前定之於心者也. 不惟是已 幼而學之將欲行之於丈年也. 事預前定 豈惟是一朝一夕之事乎. 至若天理之妙 亦猶是春和方暢一陽前期而雷復於窮冬 甘雨惠化風雲前期而作興於東南矣. 天工之預化人事之前定 這箇微妙相應而目前理會者 有似乎一時之電作 瞬息之乍起 此學者之所當立乎誠而黙會處也.

◎事豫由心心必定 達德九經一路通

72. 범사예칙립불예칙폐

예(豫)는 마음에 정한다는 뜻이다. 범사(凡事)는 공통된 도와 공통된 덕, 구경(九經) 따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래 구절에서 말한 “미리 정한다〔前定〕”는 네 구절은 짓는 모든 일이 모두 그러한 뒤에 이와 같은 뒤에 성(誠)에 한결같이 하여 궁색하다는 탄식이 있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까닭으로 가어(家語)에 이르기를,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미리 마음에 정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는 어려서 배울 뿐만 아니라 장차 장성하여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미리 정한다는 것은 어찌 하루 아침이나 하루 저녁의 일이겠는가?

천리(天理)의 묘함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봄에 화창하여 일양(一陽)이 기간 이전에 생겨나 우레 가 겨울에 치고, 단비와 은혜로운 바람이 기간 이전에 동남쪽에서 분다. 이는 천공(天工)이 미리 화육(化育)하고 인사(人事)가 미리 정하여 이곳에서 미묘하게 서로 대응(對應)하여 눈앞에서 이해하는 것이 한 때 번개가 일어나고,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나니, 이는 학자가 마땅히 정성을 세워 묵묵히 알아야 할 곳이다.

◎일은 마음으로 미리하여 마음을 정해야 하니, 공통된 도와 구경(九經)이 한 길로 통하리.

73. 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

善者 天命率性之謂也. 明乎善則大學止於至善之工夫已熟而着於胸中 自明其善而達道 達德九經 亦可貫之而無不通矣. 大學言誠意 此言誠身意 所以一身所載也. 誠其身 則能察天命之本然 知其明善攸在而推察性之源頭出來 無有不善矣. 意其發於心而誠之所發 亦皆明其明善也. 故曰不明乎善不誠乎身矣. 學者當知夫明善之明則 亦知其大學明德之明矣.

◎人是物靈誠最貴 上通日月合其明

73. 성신유도불명호선불성호신의

선(善)은 하늘이 명하고 성(性)을 따름을 이른다. 선에 밝다면 대학의 지극히 착한 곳에 머무르는 공부가 이미 익숙하여 가슴 가운데 붙어서 스스로 그 선을 밝혀 공통된 도(道)와 공통된 덕(德), 구경(九經)을 하나로 꿰뚫어 통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대학에서 “성의(誠意)”라 하고, 여기서는 “성신(誠身)”고 했으니, 의(意)는 한 몸에 실려 있는 바이다. 그 몸을 성실하게 하면 하늘이 명한 본연을 잘 살펴 밝은 선이 있는 곳을 알아 성(性)의 원두(源頭)가 나오는 것이 착하지 않음이 없음을 미루어 살필 수 있다.

의(意)는 마음에서 발하고 성(誠)이 발하는 바 또한 모두 그 밝은 선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몸을 성실히 하지 못한다” 하였다. 학자들은 마땅히 선을 밝히는 밝음을 안다면 또한 대학의 덕을 밝힌다는 명(明)을 알 것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성(誠)이 가장 귀하니, 위로는 해와 달과 통하여 그 밝음과 합치되네.

74. 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

以動靜言則天之道自然動 自靜然 是本然之誠也. 人之道思其動而後動 思其靜而後靜 是勉旃之誠也. 然及其眞實無忘之域 與自然之誠 未有一毫之間然矣. 盖人得於天而以天之所命 爲本然之誠 則誠之所存 卽其性也. 性之所發 亦其誠也. 其所發也 不思而爲之 則失其當然之事理 故誠之者 是人事之當然而與本然之誠符合爲人之道也. 嗚呼 天道自然而春 自然而秋 歷萬八歲而妙化行於其中 未嘗有一息之誠 故日往月來無一時之錯 晝夜代明 亦無瞬息之違 是皆自然之誠也. 以人事言之 則行於近思之中 孝於親 友於兄弟 至於隆師親友欲爲之爲也. 然天理流行人受之而爲性故其本然之誠一也.

◎流行微妙乾乾理 萬化元非誠外春 天賦已然皆有性 順天不悖是爲人

 

74. 성자천지도야성지자인지도야

동정(動靜)으로 말하면 하늘의 도는 저절로 움직이고 저절로 고요하니, 이는 본연(本然)의 성(誠)이다. 사람의 도는 그 움직임을 생각한 뒤에 움직이고, 그 고요함을 생각한 뒤에 고요하니, 이는 힘쓰는 정성이다. 그러나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는 지역에 이르러 자연스러운 정성과 한 털끝의 간격이 있어서는 안 된다.

대개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서 하늘이 명한 바를 본연의 성(誠)이라 여기니, 성(誠)이 보존된 바는 곧 그 성(性)이고, 성(性)이 발하는 바는 또한 그 성(誠)이다. 그 발하는 바는 생각하지 않고 한다면 그 당연(當然)한 사리(事理)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실히 하려는 것은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본연의 성과 부합하여 사람의 도가 된다.

아, 천도는 자연스러워 봄이 되고, 자연스러워 가을이 되며, 1만 8천세를 지나 묘한 화육이 그 가운데 행해져 한 순간도 성(誠)이 없을 때가 없다. 그러므로 해가 지면 달이 떠서 한 때의 착오가 없고, 낮과 밤이 교대로 밝아 또한 한 순간도 어김이 없으니, 이는 모두 자연의 성(誠)이다.

사람의 일로 말한다면 가까이 생각하는 가운데 행하여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友愛)하여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하는 것은 욕망(慾望)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리(天理)가 유행하여 사람이 그것을 받아 성품으로 삼은 까닭으로 그 본연의 성은 한 가지이다.

◎유행(流行)이 미묘하여 조심하고 조심하는 이치는 모든 조화가 원래 성(誠) 밖에 봄이라네. 하늘이 부여한 것이 이미 그러하여 모두 성품을 지니니, 하늘에 순종하여 패(敗)하지 않음이 사람이라네.

75. 博學之審問之愼思之明辨之篤行之

此五者 爲學之大節目也. 誠之之義 微在其中矣. 夫博學之爲學之大料 然非其審問之誠不能也. 審問之誠爲要然 非其愼思之誠 不能也. 愼思之誠爲要然 明辨之而不擇乎善 不能也. 擇乎善而不能固執以誠 則其於篤行何有哉. 是以篤行之爲四節目之大要矣.

◎儘能朴學爲君子 只要心誠這裏行

75. 박학지심문지신사지명변지독행지

이 다섯 가지는 학문을 하는 큰 절목(節目)이니, 성실하게 한다는 뜻이 은미하게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널리 배우는 것은 학문을 하는 큰 요점이다. 그러나 자세하게 묻는 정성이 없으면 능하지 못하다.

자세하게 묻는 정성이 중요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하는 정성이 없다면 능하지 못하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정성이 중요하지만 밝게 분변(分辨)하여 선(善)을 가리지 않는다면 능하지 못하다. 선(善)을 택했지만 정성으로 굳게 잡지 못하면 독실히 행함에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해야 독실히 행함은 네 가지 절목(節目)의 큰 요점이 된다.

◎참으로 널리 배우면 군자가 되리니, 다만 마음을 성실히 함도 이 가운데 행하리.

 

76. 人一能之己百之人十能之己千之

此中人已上之資也. 天賦攸同所受一矣. 然氣質之稟 有不同 故其所學有不同而人一之資 是中人以下 己百之資 是中人以上 是以君子之學爲之 則必要其成而期於變化氣質 坐在儒學地頭則希賢 坐在賢人地位則希聖 此困知勉行之學也. 是以五有不措而五非不能也. 此所以誠之於勇而必要其成 故常用功於百倍行之而無不篤也.

◎歲月天然誠不息 於人百倍惜寸陰

76. 인일능지기백지인십능지기천지

이는 중인(中人) 이상의 자질을 두고 한 말이다. 하늘이 부여한 바가 같으니 받은 것도 한가지이다. 기질을 품부(稟賦)받은 것이 같지 않음이 있는 까닭으로 그 배운 바도 같지 않음이 있다. 남이 한 번에 잘한다 함은 중인 이하이고, 자기는 백 번한다는 자질은 중인 이상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가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성취하는 것을 요구하여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기약(期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유학(儒學)의 지역에 앉아 있다면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고, 현인의 지위에 앉아 있다면 성인의 경지를 바라야 할 것이니, 이것이 애를 써서 알고 힘써 행하는 사람의 학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다섯 가지 놓지 않음〔弗措〕이 있는 것이니, 다섯 가지 능하지 못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용맹(勇猛)을 경계하여 반드시 이룰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항상 백 배나 공을 들이고 행하여 돈독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세월은 천연스러워 정성은 쉬지 않으니, 남보다 백 배 더 하여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야 하리.

77. 果能此道矣雖愚必明雖柔必强

誠於學而能變氣質則愚者 可以明矣. 篤於行而固執其善則柔者 必强矣. 苟不學則不能變化而雖有中品之質 益其愚而不能明止於柔而不立於强矣. 是以君子以學爲貴而博學之 則能於此道矣. 果能此道則秉其愚而必明云其柔而必强矣. 人孰不爲君子乎.

◎不私天賦人同受 氣化渾如魚變龍

77. 과능차도의수우필명수유필강

성실하게 학문하여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면 어리석은 사람이 명석(明晳)해질 것이고, 행실에 돈독(敦篤)하여 그 선(善)을 굳게 잡으면 부드러운 사람이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만일 배우지 않으면 변화시킬 수 없으니 비록 중간 정도 품성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 어리석음을 더하여 밝히지 못하여 부드러운 데에 그쳐서 강한 데에 서지 못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학문을 귀하게 여겨 넓게 배우면 이런 도에 능할 것이다. 과연 이 도에 능하다면 그 어리석음을 버리고 반드시 밝아지고, 그 부드러움을 버리고 반드시 강해질 것이니, 군자가 되지 않겠는가?

◎하늘이 부여한 성품은 사사롭지 않아 사람마다 같이 받았으니, 기질을 변화하여 혼연(渾然)해지면 물고기가 용이 될 것이네.

78. 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敎

此章之義 與首章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同其微奧矣. 盖天命之性 由誠而明之則明無不照而無幽不燭 是乃聖人之誠也. 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所以天命之誠也. 自明其明誠而學之由敎則是乃聖人以下之學也 指其學之以誠者言也.

◎秖自明誠宜謂學 聖人然後自誠明

78. 자성명위지성자명성위지교

이 장(章:21장)의 뜻은 수장(首章)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는 구절과 은미하고 심오한 뜻이 같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른다”는 것은 성(性)으로 말미암아 밝게 하면 밝음이 비추지 않음이 없어서 끊이지 않고 비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성(誠)이다. 천지와 그 덕을 배합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니 그러므로 하늘이 명한 성(性)이다.

스스로 그 밝음을 밝히는 것은 성실하여 배움이니 교(敎)로 말미암으면 이는 바로 성인 이하의 학문이니, 정성으로 배우는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다만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하면 마땅히 학문이라 하고, 성인(聖人)이 된 뒤에야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네.

79. 唯天下至誠爲能盡其性

天下至誠 盖與天同德而天下人之所不及者也. 盡其性 率眞無僞而盡其天者也. 今夫天命之本然 在我者 未嘗有一毫人欲之私 故盡之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是乃聖人自誠明之事也與. 得其宜而成之 故曰成物 成己 所以仁也. 成物 所以知也. 知周乎萬物而徹始徹終 故成己之仁發而爲知而成物所以存諸己者 爲仁 發於外者爲知也. 此固仁與知本無二致而有存諸己 發於外之分而已. 是以誠之實理 誠之於性之德曰仁誠之實理 誠之於性德之發曰知然則旣自成己出必成物 豈徒自成而已. 出必成物存諸中則成己 亦豈自成而已哉.

◎知有攸由仁有宅 蘊中發外也通天

79. 유천하지성위능진기성

천하의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대개 하늘과 같은 덕을 지녔으니 천하의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그 성(性)을 다하여 진솔하여 거짓이 없이 천연(天然)스러움을 다하는 것이다. 지금 저 하늘이 명한 본연(本然)이 나에게 있는 것은 한 털끝의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없는 까닭으로 이를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참여할 수 있으니, 이는 바로 성인이 성(誠)으로부터 밝아지는 일이다.

그 마땅함을 얻어서 이루는 까닭으로 남을 이루어 준다고 하였다. 자기를 이룸은 인(仁)이고 남을 이루어 줌은 지(智)이다. 지혜가 만물에 두루 하여 시작과 마침을 밝히는 까닭으로 자기를 이루는 인(仁)이 발하여 지(智)가 되어 남을 이루어 주니, 자기에게 보존된 것이 인이 되고 밖으로 드러난 것이 지(智)가 된다.

이는 진실로 인(仁)과 지(智)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없는데 마음에 보존함이 있어서 외부로 발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誠)의 실제 이치를 성의 덕에 성실하게 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성(誠)의 실제 이치를 성덕(性德)이 발하는 데에 성실하게 하는 것을 지(智)라 한다. 그렇다면 이미 스스로를 이루고 나가서 반드시 남을 이루어 주니, 어찌 한갓 스스로를 이룰 뿐이겠는가? 나가서 반드시 남을 이루어 주니 가운데 보존하면 자기를 이루니 또한 스스로를 이룰 따름이다.

◎지(智)는 말미암는 바가 있고 인(仁)은 집이 있어서 가운데 쌓였다가 밖으로 발함에 하늘과 통한다네.

80. 故至誠無息

誠 所以實理也. 在天循環不息 在人發用不息 小無一息之間斷 春爲四時之元 故元氣流行於四時 未嘗有無春之日 春所以生物之仁也. 四時固無一物不生之日矣. 是以良稼之苗種於立夏之時 菁蕪之苗立於立秋之節 大麥之芽生於立冬節 此所以實理不息之驗也. 仁亦猶是仁爲四常之首而義與禮 知之所發也. 仁無不在爾. 實理之不息類 皆如此 苟有間斷之息天地人 那可以倂立乎.

◎實理淵淵無小息 至誠充滿浩然中

80. 고지성무식

성(誠)은 실(實)다운 이치이다. 하늘에 있어서는 순환(循環)하여 쉬지 않고, 사람에 있어서는 발하고 써서 쉬지 않아 한 숨의 간단(間斷) 조차도 조금도 없다.

봄은 사시(四時)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원기(元氣)가 사시에 유행하여 봄의 양(陽) 기운이 없는 날은 없다. 그래서 사물을 생육하는 인(仁)이라 한다. 사시는 진실로 한 물건도 낳지 않는 날은 없다. 이런 까닭으로 훌륭한 농부의 묘판(苗板)은 입하(立夏)가 될 시기에 파종하니 청무(菁蕪)의 싹이 입추(立秋)의 절기(節氣)에 서고, 대맥(大麥)의 싹이 입동(立冬)의 절기에 나온다. 이는 실(實)다운 이치가 쉼이 없는 징험이기 때문이다. 인(仁) 또한 이와 같아 인(仁)이 사상(四常)의 으뜸인데, 의(義)와 예(禮)․지(智)가 발하는 바이니, 인(仁)은 있지 않는 곳이 없을 따름이다. 실다운 이치가 쉬지 않음이 대개 모두 이와 같으니, 만일 간단(間斷)하여 쉼이 있다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어떻게 함께 서겠는가?

◎실(實)다운 이치가 깊고 깊어 조금도 쉼이 없으니, 지극한 성은 호연(浩然)한 가운데 충만(充滿)하네.

81. 不息則久久則徵

久所以以天地言則無窮不息之久亦以人道言則不隊在人與天地倂立之久久則徵目見至誠之流行不息物生於年復年而無小間斷之息是也又以人之眞積力久之實誠言之則率眞無僞盡其所性而功效照於天下萬世之久是可徵也誠之不息不可以有終而言也

◎這看流水然然去達海誠心不豈然久亦可徵與天地無窮

81. 불식즉구구즉징

구(久)는 천지로 말하면 다함이 없어 쉬지 않는 구(久)이고, 또한 인도(人道)로 말하면 떨어지지 않고 사람에 있어서 천지와 함께 정립되는 구(久)이다.

오래되면 징험이 나타나니 눈으로 지성이 유행(流行)하여 쉬지 않고 사물이 그 해에 생기고 다시 생겨나 조금 간단(間斷)이 일어나 쉼이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사람이 참된 힘을 오래 쌓아 성실해지면 진솔하여 거짓이 없어서 그 성(性)으로 삼은 바를 다하여 공효(功效)가 천하 만세의 유구함을 비출 것이니, 이를 징험할 수 있다. 성(誠)이 쉬지 않음은 마침이 있다는 것으로 말 할 수 없다.

◎흐르는 물이 그렇게 그렇게 바다에 도달하는 성심(誠心)을 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오래함도 징험할 수 있으니 천지와 무궁하리.

82. 徵則悠遠悠遠則博厚博厚則高明

此言其聖人之盛德 發見於外可久愈徵而與天地 合其德 日月合其明者也. 是皆至誠實德 盡其所性之功效也歟. 盛德之所著 與天地無窮 故遠益博厚而高明矣. 盖自有天有地以來盛德之化民 莫有如堯舜大道之及人 亦莫有如周公孔子而至于今頌其德 至于今服其道 博厚之盛 德高明之大道 孰有加於此 此所以悠遠博厚之徵也. 天降道德于下民 非其聖人 無所賦與之處故 實其道德於聖人之心 與之倂立者也. 然則聖人之身 乃道德之府庫也. 府庫實故厥後數千百載 更不有府庫之增割者 明矣. 後堯舜而無堯舜之盛德 後周公孔子而無周公孔子之大聖 其惟一之盛德大道 益長於天地之博厚也.

◎德立融和同地厚 誠深明著與天高

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悠久所以成物也

<原文 缺>

天地不能倂立則惡能至此乎

◎天下莫加能盖性 與天同德是三才

82. 징즉유원유원즉박후박후즉고명

이는 성인(聖人)의 성대한 덕이 밖으로 발현(發現)되어 오래 될수록 더욱 징험이 드러나 천지와 그 덕이 배합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는 것을 말했다. 이는 모두 지성의 실한 덕이니 그 성(性)의 공효(功效)를 다한 것이다. 성대한 덕이 드러나는 바가 천지와 같이 다함이 없는 까닭으로 멀어지면 더욱 밟고 두터워 고대(高大)하고 밝아진다.

대개 천지가 있은 뒤로부터 성대한 덕이 백성을 교화한 것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같음이 없다. 대도(大道)가 사람에 미침도 또한 주공(周公)이나 공자(孔子) 같음이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지금도 그 도에 심복(心服)하니, 넓고 두터운 성덕(盛德)과 높고 밝은 대도(大道)가 누가 여기에 더 하리오. 이것이 여유있고 오래가서 넓고 두터운 징후(徵候)이다.

하늘이 백성에게 도덕을 내려 줄 무렵에, 성인(聖人)이 아니면 부여(賦與)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성인의 마음에 도덕을 채워 함께 정립(定立)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의 몸은 바로 도덕의 부고(府庫)이다. 부고가 꽉 찬 까닭으로 그 뒤 수 천년 간에 더욱 부고를 더 만든 것이 분명하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뒤에 요임금과 순임금 같은 성대한 덕이 없었고,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뒤에 주공과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인이 없었으니, 그 오직 한결같이 한 성덕(盛德)과 대도(大道)는 천지의 넓고 두터움을 더욱 길어나게 할 것이다.

◎덕을 세워 융화(融和)함은 땅이 후함과 같고, 성(誠)이 깊어 밝게 드러남은 하늘처럼 높네.

博厚 所以載物也 高明 所以覆物也 悠久 所以成物也

넓고 두터움은 물건을 실어주는 것이요, 고대하고 광명함은 물건을 덮어주는 것이요, 여유 있고 오래함은 물건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 천지가 함께 서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런 데에 이를 수 있겠는가?

◎천하가 성(性)을 다함은 더할 수 없으니, 하늘과 같은 덕이 삼재(三才)라네.

 

83.其次致曲曲能有誠誠則形形則著著則明明則動 動則變變則化唯天下至誠爲能化

曲 所以曲盡一偏之善而一一推之以致其極也. 曲無不實則誠無不形 形者所以曲致之實也. 形則著 著者所以夫輝發見也. 著則明 明者所以致曲處無所不明也. 明則動 動者所以明之所到無所不動也. 動則變 變者所以變其本質之不善而嚮於善也. 變則化 化是聖人之能事 意者變化氣質之化 是學知之能事也.

◎唯天下至誠爲能化 子思子勸進後學之意也. 其次致曲之化 焉能至天下至聖之化乎

◎亞聖化難天縱聖 至誠致曲學能之

 

83.기차치곡곡능유성성즉형형즉저저즉명명즉동즉변변즉유천하지성위능화

곡(曲)은 한쪽의 선(善)을 곡진(曲盡)하게 함이니, 하나하나 미루어 그 지극함을 다하는 것이다. 곡진하여 실(實)하지 못함이 없으면 성(誠)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형(形:드러난다)은 곡진하게 다한 실(實)이다. 드러나면 더욱 드러나니, 저(著:더욱 드러난다)는 광휘(光輝)가 드러남이다. 드러나면 밝으니 명(明:밟아진다)은 곡진함을 다한 곳에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밝아지면 감동시키니, 동(動:감동시킨다)은 밝아짐이 이르러 감동시키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감동시키면 변하니, 변(變:변한다)은 그 본질(本質)이 선(善)하지 않음을 변하게 하여 선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변하면 화(化)하니, 화(化:화한다)는 성인의 능사(能事)이다.

생각건대, 기질(氣質)을 변화(變化)시킨다는 화(化)는 배워서 아는 사람들의 능사(能事)이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화(化)할 수 있다는 말은 자사(子思)가 후학을 권면(勸勉)하여 나아가게 하는 뜻이다. 그 다음은 한 쪽으로 지극히 하는 화이니 능히 천하에 지극히 성(聖)스러운 화(化)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아성(亞聖)은 화(化)하기 어려워 하늘이 성인을 놓으시니, 지성으로 한쪽을 지극히 함은 학자들이 능한 바이네.

 

84. 至誠如神

至誠之誠 乃聖人之誠也. 未嘗有一毫人欲之私 介於其間 故察幾如神與天鑑無小間然爾. 不煩蓍而筮之者 至誠之誠也. 不待龜而卜之者 至誠之誠也. 與天地鬼神 合其神明而同其妙化者 其惟至誠之誠乎. 天降禎祥國家將興之兆 然人不及知而乃至誠所知也. 天降妖孽國家將亡之兆 然人不及知而惟至誠所知也. 是以至誠之寶鑑 人不及知之神鑑也. 天下執加焉.

◎所性彌綸天地理 至誠所化妙如神

84. 지성여신

지성(至誠)의 성(誠)은 바로 성인(聖人)의 성(誠)이니, 한 털끝만큼도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그 사이에 개입함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미를 살핌이 신(神)같아 하늘의 거울과 조금도 차이가 없을 뿐이다. 시초(蓍草)를 번거롭게 하여 점을 치지 않는 것은 지성의 성이고, 귀판(龜板)을 기다려 점을 치지 않는 것도 지성의 성이다. 천지 귀신과 그 신명(神明)이 합치되어 그 묘한 조화를 함께 하는 것은 오직 지성의 성일 것이다.

하늘이 상서로운 조짐(兆朕)을 내리니 국가(國家)가 장차 흥하려는 징조이다. 그러나 사람은 미쳐 알지 못하니 바로 지성이 아는 바이다. 하늘이 요괴(妖怪)스러운 일을 내리니 국가가 장차 망하려는 징조이다. 그러나 사람은 미쳐 알지 못하니 오직 지성이 아는 바이다. 이런 까닭으로 지성의 보감(寶鑑)은 사람이 미쳐 알지 못하는 귀신의 거울이니, 천하에 누가 더 하겠는가?

◎성(性)으로 삼은 바가 천하의 이치를 경륜(經綸)하고 지성이 화한 바는 묘(妙)함이 신(神)과 같다네.

85. 誠者自成也而道自道也

誠 卽天命之而存諸心上者也. 符合於天命之性而自然成 就不假人做底道 故謂之自成. 也然下文言 誠者 物之終始則次指物之 所以自成於功用之誠而言也. 而道自行也則以人之所當行之道 自行者也. 然則誠者人與物存諸心體也. 道者 惟人行之用也. 凡天下之物 未嘗有無心之物 故誠存於心而微包不息之意 及其生長也. 不見其長然日有所成 就須臾不息而漸長 是宜物之自成之誠也. 是以萬物 各具其誠而以爲天地之實大哉. 誠之爲實也. 天地鬼神之功用 及夫萬物之生長是 皆自成也人參三才而實其誠所以見貴於天地者 非其誠乎若是則誠實其心爲本以道自行爲用者明矣.

◎道不離人爲自道 誠存實理實諸心

 

85. 성자자성야이도자도야

성(誠)은 곧 하늘이 명한 것으로 마음 위에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명한 성(性)에 부합(符合)되어 자연히 성취되니 사람이 짓는 것을 빌리지 않는 도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룬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래 문장에서 성(誠)은 사물의 마침과 시작이라 하니, 사물이 공용(功用)의 성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바를 널리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

도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라면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도는 저절로 행해지는 도이다. 사람과 사물이 마음을 보존함은 체(體)이다. 도는 오직 사람만이 행함은 용(用)이다.

모든 천하의 사물이 마음이 없는 사물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誠)은 마음에 보존되어 은미(隱微)하게 쉬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생장(生長)함에 미쳐서 그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나, 날마다 성취(成就)하여 잠깐 사이라도 쉬지 않아 점점 자라니, 이는 사물이 스스로 이루는 성(誠)이다. 이런 까닭으로 만물이 각기 그 성을 갖추어 천지를 실(實)하게 하니, 크도다! 성(誠)이 실함이여.

천지 귀신의 공용(功用) 및 만물의 생장(生長)은 모두 스스로 이루는 것이다. 사람이 삼재(三才)에 참여하여 그 성(誠)을 실답게 한다. 그러므로 천지에 귀함을 드러내는 것은 성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다면 그 마음을 성실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도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을 용(用)으로 삼음이 분명하다.

◎도는 사람에서 떠나지 않아 스스로 도이니, 성(誠)이 보존된 실다운 이치는 마음을 실답게 하네.

 

86. 誠者物之終始不誠無物是故君子誠之爲貴

 

凡天下之物 宜皆天地鬼神功用中出來故 必有是誠然後 有是物 物各所存之誠 旣實則物始生而化成 所存之誠 旣盡則所得之理 旣衰而物各有終矣. 苟誠之不在物 亦無之然誠非爲物而存焉. 物無不誠之物 故君子誠之爲貴. 程夫子嘗曰 萬物各具一太極 盖太極之理 具焉則誠之實理 未嘗不存而有物也. 此言其物之始而及其終也. 太極爲兩儀 敷葉之以背陰負陽 花開之以仁爲心 春盡而花落 秋盡而葉枯 盖實理之爲物而物之終始 可見於此矣.

 

◎物始生心仁敷誠 也將衰盡便終成

86. 성자물지종시불성무물시고군자성지위귀

모든 천하의 사물은 모두 천지 귀신의 공용(功用) 가운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정성이 있은 뒤에 이 사물이 있으니, 사물이 각기 보존하고 있는 바의 정성이 이미 진실하면 사물이 비로소 생겨나 화하여 이루어지고, 보존하고 있는 바의 정성이 이미 다하고 얻은 바의 이치도 이미 쇠하면 사물도 각기 끝나게 된다.

만일 정성이 없으면 사물도 없어진다. 그러나 성(誠)은 사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물은 성실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실함을 귀하게 여긴다. 정부자(程夫子:程頤)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물이 각기 하나의 태극(太極)을 갖추고 있으니, 대개 태극의 이치를 갖추고 있다면 성(誠)의 실제 이치가 보존되어 사물이 있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이는 그 사물의 시작을 말하여 마침에 미친 것이다.

태극이 양의(兩儀:陰陽)가 되니 펼친 잎에는 음(陰)을 등지고 양(陽)을 안고 있으며, 꽃이 피는 것은 인(仁)을 마음으로 삼는다. 봄이 다 가면 꽃이 떨어지고 가을이 다 가면 잎이 마르는 것은 대개 실제 이치가 사물이 되어 사물의 마침과 시작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시작은 마음이 생겨 인(仁)이 성(誠)을 펴니, 장차 쇠진(衰盡)하면 문득 마침이 이루어지네.

 

87.誠者非自成己而已也所以成物也成己 仁也成物知也

 

誠者 實理之所存也. 存諸心而實其性之德故 曰自成不徒成己而已. 至於成物 所以性之德 爲仁而及於物 物乃.

<原文 缺>

87. 성자비자성기이이야소이성물야성기인야성물지야

성(誠)은 실제 이치가 있는 곳이다. 마음에 보존하여 그 성(性)의 덕(德)을 실(實)답게 하는 까닭으로 자기를 이룬다고 하였다. 남을 이루어 줌에 이르러서는 성(性)의 덕이 인(仁)이 되어 사물에 미치니, 사물이 바로 <이루지 지는 것이다.>

 

圖(도)

1. 本宗五服圖

 

 

2. 妾服圖

 

3. 爲人後者爲本宗降服圖

4. 妻爲夫黨服之圖

 

5. 外黨妻黨服圖

6. 出嫁女爲本宗降服圖

 

狀(장)

家狀 (德勉 撰)

府君 諱遇益 一諱遇錫 字一文 曰茶泉 曰正齋 其號也. 羅州鄭氏高麗末文靖公 諱家臣 爲元祖 道學文章 爲百世儒宗 世稱雪齋先生 入李朝 有諱 軾兵曹判書 諡景武 侑食雪齋祠四傳諱詳 號滄洲 文正郞 德業文望 爲士林宗仰 至諱彦復 號痴翁 中司馬 以文章名世 寔府君七世也. 高祖 諱國樞 曾祖 諱養浩 俱有隱德 祖諱柱 號誠庵 以儒行著聞于世 考諱星會 號錦天 有孝友之行 妣 羅州吳氏 允善女 有女士風曰諱台會 曰固城李氏諱俊奭女 本生考妣也. 府君 以高宗乙未十一月十三日生 天資溫恭慧敏 門老甚器之 稍長 常近於長者 凝重自持 與儕輩處 口絶惟談 始上學 不煩提督而能孜孜不殆 未幾文理驟進 從學于謙山李先生門 遂專心四子書 窮理盖靜 踐履益篤 先生每加稱賞焉. 朝暮質疑 殆無虛日 退居講學 學者 坌集塾舍 不能容 敎人 必以法度 恒言 幼而學之將 以行其道學而不行奚貴 於學 至於心性理氣同異之設 戒學者 勿遽定其是非 先將聖賢本意 精察而黙識 不得不措則取捨有自得之妙矣. 府君 慨世憂國素所炳然 及島夷之令 創氏改名也. 終始不應 乃避異省而得免焉. 與數三同志 玩賞山水間 洩其鬱憤 槪觀於楓嶽之遊 咏矣. 其爲詩文也 不事彫琢而條達疏暢 然 亦不喜爲人撰述而曰世多飾虛文 褒先美 其不幾於傳人而誣 其先乎其爲先 師營講舍 刊先師遺集也. 彈其事一之誠焉. 府君 內行 純備 事親志物備 至定省 無關奉養 以誠 事無大小必稟而行 及丁憂哀禮備至 自歛葬 至祥禫 少無違禮 終喪 不飮酒食因 不廢省掃 哀 如担括而齊戒 如禮事之生 庭 亦如之 九時物之新生者 必薦廟而後 食 奉先 靡不殫誠 其樹表闡幽也. 敦役以成之 平居 對人談論 溫和有津津之趣而其義 利邪正之辨 辭嚴氣肅 有不可犯者 持身淸和 未嘗枉已 以循人 無老少貴賤一於恭謹 尤不輕雌黃 人物雖詞章筆札之末 苟出於先輩古人 則未嘗率意評斷焉 由是 宗戚信其行 鄕黨服其義焉. 以享年七十二之 丙午十一月十四日卒 葬于本良面月淸洞先麓 坐 遠近來哭者 皆曰斯文喪衣. 嗚呼痛哉. 府君 娶 慶州李氏鍾泰女 癸巳生 乙卯八月初三日卒 別葬于永安村 後麓坐 生四男二女 長日勉 次安勉 次德勉 次俊勉 女 適河陰奉弼錫 咸豊李相範 長房孫 昺圭 仲房孫 允五允邦 三房孫光勳允坤允中允大 季房孫一成 勳 餘幼. 嗚呼痛哉. 府君以端雅剛直之姿 早從有道之門德高學邃而一見世道板湯 隱處林樊 以導迪後學爲己任而沒世. 嗚呼痛哉. 府君之棄世 今已十一載而尙未刊遺集 且闕隧道之顯刻 不肖不孝之罪 焉可逃也. 今將刊集樹碣 謹敍平日見聞之萬一 以竢夫立言君子之採擇焉.

辛酉春正月 不肖男德勉泣血謹識

●가장 (덕면 찬)

부군(府君)의 휘(諱)는 우익(遇益)이며 일설에는 우석(遇錫)이라 했다. 자(字)는 일문(一文)이며 다천(茶泉)이라 하고 정재(正齊)라 부르는 것은 그의 호이다. 나주 정씨로 고려 말 문정공  휘 가신(雪齋:4세)은 먼 조상이 되시고 도학문장이 오래토록 유학의 종사가 되시니 세인들은 설재(雪齋)선생이라고 불렀다. 이조(李朝)에 들어서 휘 식(軾:9세), 병조판서이며 시호(諡號)는 경무이니 설재사(雪齋祠)에서 사대의 조상들과 더불어 유식(侑食)하게 되었다. 휘는 상(詳:13세), 호는 창주(滄洲), 문정랑이니 덕을 베푸는 일과 학문의 명망이 유교를 닦는 선비들 종앙(宗仰)이 되셨다. 휘 언복(彦復:18세), 호 치옹(痴翁) 때에는 사마에 버금가는 문장으로써 명세(名世)가 실로 부군의 칠세에 달했다. 고조부의 휘는 국추(國樞)이며 증조부의 휘는 양호(養浩)이니 모두 은덕이 있으셨다. 할아버지 휘는 주(柱), 호는 성암(誠庵)이니 유학과 덕행이 세상에 유명한 이야기이었다. 아버지 휘는 성회(誠庵), 호는 금천(錦天)으로 효우(孝友)의 행실이 남다르셨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오씨(吳氏)이니 미쁘고 착한 여자이며 또 여사(女士)이기도 했다. 세인들이 말한 휘는 태회(台會)이셨다. 고성(固城) 이씨(李氏), 휘는 준석(俊奭)이라. 그 분의 딸이시니 본 부모에서 태생하셨다. 부군께서는 고종 을미 11월13일 태어나시니 본 자질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지혜롭고 민첩하시어 문중의 장로들께서 심히 훌륭히 여겨 아끼셨다. 점점 장성하여 항상 어른을 가까이 모실 때는 침착하고 드레지게 스스로를 잡으셨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곳에서도 입으로 잡답을 하지 않으셨다. 처음 학교에 가서는 책임자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 않으심에 얼마 되지 않아 문장의 도리가 아주 빨리 나아가서 겸산 이선생님의 문하생의 학문을 좇았다. 마침내는 오로지 사서(四書)에 열중하시어 이치를 연구하심에 더욱 정밀히 하시고 실천하심에 더욱 돈독히 하시었으므로 선생님께서 매번 칭찬과 상을 더 하시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의심난 것을 물으심에 자못 세월을 헛되이 보내심이 없었고 물러나서는 배운 것을 익히셨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숙사에서도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가르치심에는 반드시 법도로 하셨다. 항상 말씀은 어린이가 배움에 나아갈 때와 같이 조심하시었고 그 도학을 행하심에는 어찌 학문에 귀한 것을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었다. 또한 심성과 이기, 동이지설에 이르러서는 학자를 경계하시어 갑작스런 판단으로 그 시비를 정하지 말고 먼저 성현의 본의로 자세히 살피다 보면, 묵묵히 얻지 못하고 마음에 두지 못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니 그러면 곧 취하고 버리는 것에 스스로 깨달아 얻는 오묘함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부군께서는 세상이 어지럽게 되고 나라에 우환이 닥침을 슬피 여기셨다. 왜적들이 침범했을 때 창씨개명을 하여 난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으시고 다른 고을에서 난을 피하셨다.

서너 동지와 더불어 산수의 사이를 즐겨 구경하시며 그 나라를 뺏긴 울분을 덜어내시고 개연히 금강산을 보며 읊으신 시문이 억지로 일을 꾸민 것이 아니로되 뭇 사람들에게 멀리 알려져 명성이 드높았다. 그러나 선생께선 사람들에 찬술됨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길, “세상에서 많이 나의 보잘 것 없는 글이 선조의 미덕을 기렸다하나 어찌 아는 것 없는 내가 선조를 더럽힐 수 있으리오” 하시고 그 선사를 위해 강사(講舍)를 경영하고 선사의 유집(遺集)들을 모아서 간행함에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셨다.

부군의 집에 있을 때의 행동을 봄에도 순수하심을 갖추시고 어버이 섬김에 물을 갖추시고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펴고 새벽에는 그 안부를 살피시고 봉양함에 술과 고기를 빠뜨림이 없이 정성을 다하셨으며 일에 대소가 없이 반드시 부모님께 묻고 행하셨다. 부모의 상을 당하니 애례를 갖추심이 지극하시어 염장(殮葬)으로부터 상담(祥禫)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예에 어긋남이 없으셨으며 상을 완전히 마치시고도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드시지 않으셨으며 성묘를 폐하지 않으셨다. 또한 슬퍼하심에 처음 관을 묶을 때와 같이 하시고 재계(齋戒)하심에 처음 생긴 날과 같이 하시고 가정 또한 그러하셨다. 뭇 제때 나는 음식의 처음 나온 것은 반드시 사당에 올린 후에 드시고 선조를 받드심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치를 밝혀 표를 세우심에 역사를 두터이 하시었다. 평소 거하실 때에 사람과 더불어 말씀하심에 온화하시고 활기 넘치고 재미있는 뜻이 있으셨으며 의로써 간사함과 올바름을 판단하실 때는 엄숙한 말씀과 변하지 않은 기운으로 사람들이 감히 범할 수 없었다. 스스로 몸가짐을 맑고 화하게 하시어 일찍이 몸을 굽히시지 않으셨으며 또한 따르는 사람이 노소귀천(老少貴賤)이 없이 한결같이 공근(恭謹)하였으며 더욱이 자황(雌黃)을 가벼이 하지 않으시는 것이 인물의 사장(詞章)필찰(筆札)의 끝부분이라도 진실로 선배 고인에게서 나온 것이면 일찍이 자신의 뜻으로 평론하거나 끊어 내지 아니하시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친지들께서 그 행실을 믿으시고 향당의 사람들이 그 의로움에 복종하였다. 향년(享年) 72. 병오 11월 14일에 졸하시니 본양면 월청동 선록에 장사지내고 안치(安置)하니 원근에서 와서 곡하는 사람이 다 말하길 이 문성께서 돌아가시니 오호라 슬프다. 이제 어찌할꼬… 하였다. 부군의 아내는 경주(慶州) 이씨(李氏) 종태(鍾泰)의 따님이다. 개사년에 태어나셔서 을묘년 8월 초삼일에 졸하시니 영안촌 후록에 별장하고 안치하였다. 생전에 4남 2녀을 두셨으니 장남은 일면(日勉), 2째는 안면(安勉), 3째는 덕면(德勉), 4째는 준면(俊勉)이라 하고, 딸은 하음(河陰) 봉필석(奉弼錫)과, 함풍(咸豊) 이상범(李相範)에게 시집보내었다.

큰아들 내에서 병주(昺周)를 낳았고 2째 내에서 병규(昺圭), 윤오(允五), 윤방(允邦)을 낳았으며 3째 내에서 광훈(光勳)과 윤곤(允坤), 윤중(允中), 윤대(允大)를 낳았고 막내 내에서 일성(一成)과 훈(勳)을 낳아 자손이 번창하니 오호라! 슬프도다. 부군의 단아하고 강직한 자태가 일찍이 도 있는 문을 따르셨으니 덕이 높으시고 학문이 이루어지셨으나 세상의 판탕(板蕩)을 당하시고 숲에 은처하시여 후학(後學)을 이끄는 것으로 당신의 책임을 삼으시고 세상을 떠나시니 오호라! 슬프도다. 부군의 세상을 버리심이 이제에 이미 16년이 지났으되 오히려 유집을 간행하지 못하고 또한 말씀을 기록하고도 빠뜨렸으니 불초 불효한 죄 어찌 가히 도망갈 수 있겠는가? 이제 장차 집을 간행하고 비를 세우며 삼가 평일의 선생님께 들은 말의 만분의 일을 겨우 펴서 입언(立言)군자의 채택을 기다리노라.

신유 춘 정월에, 불초남(不肖男) 덕면(德勉)은 피눈물로 삼가

銘(명)

 

墓碣銘 (李玟秀 撰)

謙山李先生 講道錦城山中 從學者傾一省 多英俊之士而以高識篤行 見推於師友者 若茶泉鄭公 居其一也 公諱遇益 字一文 羅州氏 著於麗末 雪齋先生 諱可臣 至諱軾兵曹判書 諡景武 配侑于雪齋祠 有諱詳 號滄洲 以德學 爲儒林宗匠 文正郞 至諱彦復 號痴翁 以文章 著世 登司馬 於公間七世也. 諱國樞諱養浩 俱有潛德 諱柱 號誠庵 以儒行聞 諱星會 以孝有麗 高曾祖禰四世 妣 羅州吳氏允善女有婦德 諱台會 固城李氏 俊奭 女 本生考妣也. 公生而穎悟 及就學文理日就 有門長器重之譽 及長 益肆力墳典 聲望遠振 自贅 學謙翁 專用力於爲己之學 天人性命之奧 語黙進退之節 莫不黙會而體得 謙翁許與適道 退講所居聞風 從學者 因材施敎 未嘗少倦 雅言學貴知行 奚止於口耳之資哉. 公尤嚴革夷之防 當島夷創氏之變 不敢抄逼事其親也. 定省甘旨 凡便適志體者 莫不殫誠 及艱情禮俱臻省掃三年 及夫日致誠 如在有時乎. 與同志作名勝之遊 吟哦成 幾至忘返 其於先師講舍之建 遺集之刊 殫其事一之誠 盖其溫恭謙虛 未嘗不溢於辭色 人莫不稱謹厚君子 卒于丙午十一月十四日 距其生. 高宗乙未十一月十三日 享年七十二 葬于本良面月淸洞先麓原. 有遺集行于世齊 慶州李氏鍾泰女 癸巳生 乙卯八月初三日卒 別葬于永安村後麓原. 生四男二女 男日勉 安勉 德勉 俊勉 女 適河陰奉弼錫咸豊李相範 昺圭長房出 允五允邦二房出 光勳 允坤 允中 允大 三房出 一成勳 季房出. 嗚呼 士生斯世 旣不能卓立事功於世則守其性兮 脩齊 無忝而已. 今公之學 行自身而家而及於人 亦不可不謂之事功也. 其哲嗣德勉 具狀 請銘 辭 不得 遂敍之而爲之銘曰

學由師承 克紹世家孝友至性 德業孔嘉 斥夷衛革 憂世憂道 戰兢其學心爲主宰鏟彩林泉遺編盈箱 一脉由何 謙山之陽

光山李玟秀撰

●묘갈명 (이민수 찬)

겸산 이선생님께 도(道)를 금성산중에서 익히시니 선생님을 따르는 자가 한 고을의 사람보다 많을 정도였고 그 중에는 영준(英俊)한 선비도 많았으되 높은 지식과 두터운 행실로 사우(師友)를 미루어 봄에도 우리 다천 정공께선 그 첫 번째이셨다.

공의 휘(諱)는 우익(遇益), 자(字)는 일문(一文). 나주 정씨이다. 고려 말의 설재선생(4대조)은 휘는 가신(可臣)이며, 조선에 들어서 휘가 식(軾)이고 9대조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시니 시호가 경무에 이르는 조상들과 설재사에서 나란히 유식하였다. 휘는 상(詳), 호는 창주(滄洲)이신 13대조께선 덕학이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셨으며 문정랑이라 하였다. 휘는 언복(彦復), 호는 치옹(痴翁)이신 18대조께선 문장이 세상에 알려져 사마(司馬)와 같다하였으니 그 명성이 공의 7대까지 이르렀다. 휘 국추(國樞)이신 고조와 휘 양호(養浩)이신 증조부께선 모두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덕행이 있으셨고 휘 주(柱), 호 성암(誠庵)이신 할아버지께선 유학을 행하여 이름이 나셨으며 휘 성회(星會)이신 아버지는 효로써 고, 증, 조, 네(돌아가신 아버지) 사세(四世)께 제수를 올리셨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오씨(吳氏)이며 미쁘고 착한 여자이시며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휘는 태회(台會)이시며 고성(固城) 이씨(李氏) 준석의 딸이시니 본처의 소생이셨다.

공께선 태어날 때부터 뛰어나고 총명하셨으며 배움에 나가갈 때는 문리(文理)가 날로 앞으로 나아가셨으므로 문중에 장로들께서 훌륭한 인재로 여기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장성하심에는 더욱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적을 깨달음에 힘을 쓰시어 그 명성과 인망(人望)이 멀리 떨치셨지만 스스로 겸산선생님께 배우기를 멈추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신을 위한 학문과 하늘의 정한 운명과 사람의 본성의 오묘한 이치와 말하고 침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에 힘써서 묵묵히 깨달아서 체득하심에 겸산선생께서 도를 물려주시다. 물러나서 선생께 들은 가르침을 강하시고 배우는 자의 재목을 따라 가르침을 베푸심에 일찍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바른 말을 배우고 귀중한 지식을 행함에 어찌 말하고 듣는 것에 머무르겠는가? 하시고 공께서 더욱 화이(華夷)의 방해를 경계하셨으며. 도이(島夷), 창씨의 변을 당하심에도 감히 그 어버이 섬김에 궁핍함이 없게 하시고 혼정신성과 좋은 음식으로 항상 편안하게 하시니 몸과 마음에 정성을 다하셨다. 어려움에 당도하여도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묘소를 삼년간 살피셨고 제사하는 날이 와서 정성을 드리심에 살아 계실 때와 같이 하셨다. 동지와 더불어 명승지에서 시구를 읊으심에는 수레에 나무를 괴어 움직이지 못한 것과 같이 거의 돌아가기를 잊으셨다. 그 선사(先師)를 위해 강사(講舍)를 세우고 유집(遺集)을 간행함에도 그 일에 한결 같이 정성을 다하셨다.

대개 그 온화하고 공경하며 겸허하심이 일찍이 말씀과 안색에 가득 차지 않음이 없으심에 사람들이 근후(謹厚)한 군자라 칭하지 않음도 없었다.

병오 11월 14일 그 생을 놓으시니 고종 을미 11월 13일 향년 72세로 생을 마치셨다. 본양면 월청동 선록에 장사지내 이 세상을 떠나심에 편하게 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세상 대대로 행하여졌다. 부인은 경주 이씨의 총애받는 큰 딸이시니 개사년에 태어나서 을묘년 8월 초 삼일날 돌아가시니 영안촌 후록에서 따로 장사지내고 저승에 편히 가게 하였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장남 일면(日勉), 안면(安勉), 덕면(德勉), 준면(俊勉)이 그 뒤를 이었고 딸은 하음(河陰) 봉필석(奉弼錫)과 함풍(咸豊) 이상범(李相範)에게 시집보냈다. 병주(昺周)는 장남네에서 낳았고 병규(昺圭), 윤오(允五), 윤방(允邦)은 2째네, 광훈(光勳), 윤곤(允坤), 윤중(允中), 윤대(允大)는 3째네에서, 일성(一成)과 훈(勳)은 막내네에서 낳았다.

오호라 선비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능히 세상에 공로를 높이 세우지 못하거든 곧 그 성품을 지켜서 닦고 가지런히 하여 더럽힘이 없게 할 따름이라. 이제에 공(公)의 학문은 자신부터 행하고 나아가 집과 사람들에게 이르게 하니 또한 가히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을 자식 덕면(德勉)이 밝게 이어 가장을 갖추고 명사를 청해옴에 부득이하게 그 뜻을 따라 글을 펴서 명에 말하길, 학이란 스승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받들어 세가에 효우(孝友)를 잇게 하고 매우 착한 성질과 덕을 베푸는 일을 심히 아름답게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화이(華夷)를 막으며 세상의 어지러움을 근심하고 또 무너짐을 근심하며 전전긍긍으로 그 배우는 마음의 주제를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수목이 울창한 산중을 깎고 다듬어서 유편(遺編)이 상자에 가득하게 하니 그 맥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오? 겸산선생의 양덕이로다.

광산(光山) 이민수(李玟秀)는 찬 하노라.

跋(발)

 

跋 (海勉 識)

右 族叔 茶泉先生遺集也. 嗚呼 先生當韓末諱學之日 畢生力學爲謙山李先生之高足 其沒 爲十一年之久而遺集尙未刊行 爲後人之齎恨者久矣. 今其嗣德勉 將付影印 要余編尾語 余豈敢言哉. 窃謂先生之學潛究而不尙於辭 精察而必體之躬 不忘乎世而堅東岡之志 不傲于物而勵歲寒之操 惟敬惟義兢兢然 不離于日用彛倫之中而平居謹禮 雖冠笄 節必以古爲準此其著於外者也. 若其學之淺涂高下 非后生庸下者所可揣度也. 此集之編有異於他 集者 不彡類編纂 隨其述先後 付于影印 有倣于前人隨記也. 編以茶牕 隨錄 演錄 小話懷古 金剛行吟 等次 則覽者隨其素意而考焉則可也.

辛酉二月二十七日 族姪海勉謹識

●발 (해면 식)

오른쪽은 우리 삼촌이신 다천선생의 유집이라. 오호라, 선생께서 한말(韓末)에 당하여 배우기를 꺼려하는 시기에도 학문에 힘쓰심에 그 생을 다하시니 겸산 이선생님의 높으신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돌아가신지 11년의 오랜 시간에도 선생님의 유집을 오히려 간행하지 못하니 후손으로 한스러움이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자식 덕면이 선생의 뜻을 이어 장차 영인(影印)하고 간단히 나는 책의 끝에 말을 붙이지만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선생님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말에 헤아리지 못함이 있으면 자세히 살펴서 반드시 몸에 체험하여 동강의 굳은 뜻과 같이 대대로 잊지 아니하였고 송백(松柏)처럼 꿋꿋하게 물에 흔들리지 않으려 힘썼으며, 오직 공경함과 의로움으로 항상 조심하여 날마다 쓰는 떳떳한 윤리에 떠나지 않게 하고 평상시 거함에는 예절을 삼가여 비록 관계(冠笄)의 작은 절차에도 옛 법도를 따라서 이를 밖으로 드러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학문의 얕고 깊으며 높고 낮은 것에 관하여서는 후생의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가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집을 편찬함은 다른 문집과 다름이 있으니 분리하여서 편찬하지 아니하고 그 선후를 따라서 저술하여 영인에 붙였음으로 전인의 수기와 비슷함이 있을 것이다. 책은 다창수록, 연록, 소화회고, 금강행령 등의 차례로 되어 있으니 곧 보는 사람이 그 본뜻을 따라서 생각함이 가할 것이라.

신유 2월 27일  조카 해면(海勉)은 삼가 적노라.

 

跋 (泰勉 識)

嗚呼 道之將衰也 必生鴻儒碩人 以維持扶植使世有賴此 在易爲剝之碩果而天意不偶爾窃惟茶泉先生 以聰慧絶倫之姿 專心經籍 內行純篤孝義 孚于鄕黨 慨然有劬道之志 不屑爲咠之學所養者 眞心也 所求者 實理而割析於豪釐之間 省察於言動之際 體之于身 驗之于事 乃贅謁謙山李先生門 考德就正 遂爲先生高弟而杜門受徒 敎誨不卷 終世林樊 嗚呼 悲夫 雖然 遺編盈箱其爲嘉惠後學 豈非幸歟 其子德勉 收拾巾衍 將付剞劂也. 徵泰勉以書編尾白顧識淺 不敢當此而仍念余自幼時 承拜之日言必稱孝悌忠信之道 勉勵不已 其於觀感之爲如何哉 不肖爲經紀先生之後事 設契拮据已有年而賢勞者 從弟正勉也 其吉尙因幷及之.

辛酉春 從姪泰勉謹識

●발 (태면 지)

오호라 도의 장차 쇠함에는 반드시 큰 선비와 큰 사람을 내어써서 근본을 잡고 기반을 세워서 이것에 힘쓰게 하신 것이니 주역(周易)의 산지박괘(山地剝卦)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이 이것이로되 좋은 임금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 가만히 다천선생을 생각해 보건대 총명하시고 지혜로우심이 남보다 월등히 뛰어나신 자태로 오로지 경적(經籍)을 생각하시고 내행이 순수하고 돈독하셨으며 효도와 의로움으로 향당(鄕黨) 사람들의 신의가 있으셨다. 개연히 도에 힘쓰는 뜻 가진 것을 주위에서 쑥덕거림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다. 학문의 기르는 바는 마음을 참되게 하는 것이요, 구하는 바는 실한 이치이니, 조그마한 차이라도 시비를 결정하며 말하고 움직이는 사이에도 자세히 살펴서 몸에 체험하고 일에 증험(證驗)하여 이에 흔들림없이 겸산선생의 문하에서 덕을 헤아려 바른 것에 나아감을 아뢰심에 마침내 선생의 높은 제자가 되시고 문을 나가지 않으시고 학도를 모아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다가 임번에서 그 생을 다하셨다. 오호라, 슬프도다. 비록 그렇지만 선생의 유편(遺編)이 상자에 가득하니 그 아름다우신 은혜가 후학을 위하니 어찌 다행스럽지 아니한가?

그의 아들 덕면(德勉)이 겹치고 불어난 글을 모아서 장차 판각을 하였고, 태면(泰勉)을 불러 책의 뒤쪽에 글을 쓰도록 하였다. 나의 지식이 얕음을 돌아본다면 감당할 수 없지만, 내가 어려서 가르침을 받을 때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를 말씀하시고 힘씀을 그치지 않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 다시 생각나니 그 보고 느끼는 것이 어찌 다른 사람과 같으리오. 불초(不肖)가 선생의 후사를 기록함에 있어 설계하고 힘써 일함이 해가 있었으니 수고가 많은 사람은 사촌동생인 정면(正勉)이라 그 길함이 가히 함께 이르길 바라노라.

신유 봄. 사촌조카 태면(泰勉)은 삼가 기록하노라.

 

跋文(발문)

跋文 (鄭芝會 謹書)

近古謙山李先生之門 多行義志節之士 如茶泉鄭公亦其一也. 余與公同居一閈 受誨懇懇 朝暮承接 其彝倫持行之常 篤學問爽之索奧詳悉 莫吾若而學文則余之師表也. 族世則卄年上姪也 豈可以荒辭拙言畵葫阿私於其間乎. 公以挺特之姿俊英之材 早歲求道好學 如飢渴於飮食之欲 雖世道搶攘 島夷侵陵九有懷襄之時 不少撓奪其志 探頣於經子之奧 諭掖於後進之歸依 以蓄其德於混和自然之中 謹於操餙 嚴於邪正泊如也 則勢利樂如也 則聖訓也. 每侍燕臯比之席 謙翁常稱詡 以文學之贍博 詞章之爽朗而文名大振 蔚然爲省內碩儒. 公性不喜逑文字而但發諸口者 頓無奇巧隱僻而無華不流 率多傷時憂道之辭. 間著者往往有風泉思切而見於檀誌之沿革也. 嗚呼公之德之學之謦咳遺論 固宜廣于世而但因緣時騷 未遑滾滾 因循于玆二十年來矣. 今其肖㣧德勉甫忘其財艱 裒收於兵燹餘 將登繡榟以圖. 公世何其偉哉. 實爲斯文之盛事 亦不尠世敎之裨補也. 若余膚淺 安敢論鴻匠之高下 摩挲遺編 只切感慕之湥而少道如右.

歲辛酉春三月族從芝會謹書

●발문 (정지회 근서)

근고 이겸산(李謙山) 선생의 문하에 의리를 실행하고 지조를 지킨 선비들이 많았는데, 정다천(鄭茶泉) 공도 그중의 한분이다. 내가 공과 같이 한 마을에 살았으므로 자상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조석(朝夕)으로 접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공의 윤리에 따라 실행한 독실함과 학문에 정진한 심오함을 나처럼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공은 학문으로 보면 나의 스승이었고 일가붙이로 치면 20년 연상인 족질(族姪)이다. 어떻게 졸렬(拙劣)한 말로 부풀려 아부할 수 있겠는가.

공은 뛰어난 인품과 영민한 재질로 일찍부터 도(道)를 찾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마치 기갈(饑渴)에 허덕인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였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섬 오랑캐가 침략하여 온 천하가 뒤숭숭할 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심오한 뜻을 탐색하고 후배를 가르쳐 귀의(歸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혼합(混合)의 자연 속에서 덕을 축적하였다.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사정(邪正)의 분간에 엄격하였으며 세력과 이 뜻은 담담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즐거워하였다. 강석(講席)에 나갈 때마다 겸산선생이 공에 대해 문학이 풍부하고 문장이 명쾌하다고 칭찬하였는데,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어 도내(道內)의 큰 선비가 되었다.

공의 성품이 저술(著述)을 좋아하지 않았고 입에서 토출된 바도 기교스러운 것이나 괴벽(怪癖)한 것이 전혀 없어 화려하지도 않고 유동하지도 않았으며 대부분 시사(時事)를 상심하고 세도(世道)를 우려하는 말씀이었다. 가끔 저술한 것에 왕왕 부모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는데, 이는 단지(檀誌)의 연혁(沿革)에 나타나 있다.

아! 공의 덕행과 학문에서 발로된 언론을 마땅히 세상에 널리 반포해야 할 터인데 시대가 혼란한 바람에 그러할 겨를이 없어 그럭저럭 20년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지금 공의 아들 정덕면(鄭德勉) 씨가 어려운 형편을 잊고 전란(戰亂) 속에서 유고(遺稿)를 거두어 출간하여 세상에 반포하려고 하니, 그 얼마나 위대한가. 실로 우리 유학(儒學)의 성대한 일이고 또한 세상의 교화에도 보탬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이 얕은 학식으로 어떻게 감히 거장(巨匠)의 높낮이를 평론할 수 있겠는가. 공의 유고(遺稿)를 읽고 나니, 사모의 마음만 매우 간절할 뿐이므로 위에처럼 조금 소회를 쓴 바이다.

신유년(辛酉年) 3월에 족종(族從) 정지회(鄭芝會)는 삼가 쓴다.      

               ---     html 작업 일헌공15세손 병선  June 5,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