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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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昺璿)

 

 

檀春野詞

다천(茶泉) 정우익(鄭遇益) 저 Go Back

한국족보학연구소 편역

 

발 간 사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관찬사서(官撰史書)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동사강목(東史綱目),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의 사찬사서(私撰史書)로 대별된다.

관찬사서의 경우 막대한 공력이 소요되었던 관계로 별도의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사서편찬이 이루어졌으며 사찬사서의 경우는 관찬사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문집이나 향토지등에 서술된 역사적 사실을 추론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하여 주요 핵심사항과 논점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찬사서는 양적인 면에서는 관찬사서에 미치지 못하지만 사론(史論)등을 통해 연구자의 역사이해 관점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역(疆域),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 등에 있어서는 서술자에 따라 관점의 차이가 현저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육당 최남선과 단재 신채호의 사론(史論)은 한말 일제시대에 우리역사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조망하는 주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경우 관에 의한 역사서 발간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양식 있는 개별연구자에 의해 역사서술의 원칙과 방향이 모색되고 있었던 점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단재 신채호, 육당 최남선 등이 저술한 역사연구서에 대한 이해는 대학의 연구자들에 의해 비교적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반면 다천 정우익 선생과 같은 초야에 묻혀있는 학자들이 남긴 역사저술에 대한 평가는 전무한 편이다. 이는 이 분야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지방향토자료에 대한 학계의 이해부족과 편견이 주요 이유일 것이다.

본 연구팀은 다천 정우익 선생의 유집을 편역하는 과정에서 단춘야사(檀春野詞)라는 제하의 역사서가 집필되었던 사실을 발견하였다. 단춘야사는 유고집의 마지막 제6권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서술의 양식으로 보아 후학들의 교육용으로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구한말에 지금의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에서 출생하신 다천 정우익 선생은 단군조선에서 조선 고종까지 5천년에 이르는 한국사개강을 저술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단춘야사이다. 원래 이 글은 다창회고(茶牕懷古)라는 표제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옛 역사를 더듬어 본다.”는 의미이며, 이 글은 체제적 측면에서 편년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별도의 사론(史論)을 가미하여 기전체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강역과 시대 편년에 있어서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우리 역사의 연원을 단군, 기자 조선에까지 소급하고 있으며 단군 이전의 천지개벽과 역사시대 도래 이전의 창업과정을 총 23편의 4언시(四言詩)로 찬미하고 있다.

다천선생은 단춘야사의 사론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시대를 그 상한으로 하는 육당 최남선의 역사관에 대해 “이 시대 최남선은 유학을 공부하여 사학자로서 세상에서 유명한데 망령되게도 말하기를 고구려 이상은 정사(正史)가 있은 적이 없다고 하며 기자조선은 없었다는 황당한 설을 말하였다. 개탄을 금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평하면서 육당의 역사기술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론(史論)은 단춘야사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전개되고 있으며 특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독립운동과 같은 근세사의 역사인식에 있어서 그 비판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권말(卷末)에서는 우리 민족의 자주권 확보를 위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단순한 역사서의 범주를 벗어난 역사적 담론(談論)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최근 일본 교과서 파동으로 한일간의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은폐로 인해 양국간의 갈등의 조짐마저 일고 있는 지금 투철한 민족관과 냉철한 역사인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계도하셨던 다천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그러한 삶의 역정에 대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역과 터미널에서 일본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집회와 서명운동이 연일 계속되고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허공에 메아리만 감돌뿐 어찌할 수 없는 너무나 허망한 역사적 현실은 위정자나 학자의 타협과 굴종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본 연구팀이 다천 정우익 선생의 유집에서 역사서인 단춘야사를 분리하여 한권의 책을 펴내게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고에서는 원문과 함께 구두점을 찍어 중급 수준의 한자 실력만 있어도 그 어의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고 중고등 학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주석과 도록을 함께 실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천 선생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누가 된다면 이는 모두 본 연구자의 잘못일 것이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고단한 시기에 이 민족의 참된 스승으로 거룩한 삶의 발자취를 남기신 故 다천 정우익 선생의 영전에 삼가 이 글을 바칩니다.

2003年 2月 吉日

한국족보학연구소 부소장 양권승

축 사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 지금 우리의 주변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표현되는 지식정보화 시대는 20세기의 자본과 노동력에 의한 사회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옛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선현(先賢)의 유물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몫이며 사명입니다.

이번 정우익(鄭遇益) 선생(先生)께서 남기신 글의 발간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는 웃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계승시키고 후손을 위하여 여러 어르신들의 경륜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문명의 황폐화로 사회 도처에 상존하고 있는 병폐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진정 개개인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정보를 직접 전달해 주는 매체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만능 사상으로 인하여 물질의 풍요 속에 정신문화의 빈곤이라는 폐습이 거듭되고 있는 이때 실추된 도덕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미풍양속인 예절과 규범을 바로 잡아 건전한 사회풍토 조성에 일익을 담담하기 위하여 정우익 선생의 글은 우리에게 보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연구를 위해 열성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출간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광주향교 전교 오인균

축 사

옛 것이 점차 사라져 가고, 설 자리가 없어지는 오늘날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런 무관심(無關心)이 연구자(硏究者)에게 있어서는 무척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전통(傳統)들이 길이길이 전해지고 보존(保存)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팀과 한국족보학연구소에서 조선시대 한 유학자(儒學者)인 다천(茶泉) 정우익 선생이 쓰신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정리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천년의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 일제독재 하에서의 역사 자료 소멸과 빠른 경제 성장에 급급해 여러 옛 문헌(文獻)과 유물을 소홀히 취급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습니다.

이번 발간된 단춘야사(檀春野詞)는 단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의 역사서입니다. 그 속에는 한 유학자의 눈을 통해서 본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상이 고루 담겨져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한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 근간이 되는 철학(哲學)입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것을 교훈(敎訓)으로 삼아 미래로 정진할 수 있습니다.

또,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 기록이 아니라, 과거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석하여 재평가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그가 속한 시대적 제약을 받아 그 당시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즉, 역사를 보는 사람의 시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우익 선생의 단춘야사(檀春野詞)는 역사와 그 역사(歷史)를 해석하는 관점에 있어 기존의 역사가들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우익 선생과 같은 초야의 학자들의 역사서술에 대한 평가가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 분야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이때에 정우익 선생의 단춘야사(檀春野詞) 발간은 학계에서나 정우익 선생의 가문으로서나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단춘야사(檀春野詞)의 출간은 앞으로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더욱 적극적인 노력의 표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단춘야사(檀春野詞)의 출간(出刊)을 위해 힘쓰신 여러 연구진들과 후원자 분들께 진심으로 축사(祝辭)를 전합니다.

成均館大 翰林院長 金忠浩

축 사

무릇 선비에 대한 개념(槪念)은 학식(學識)에 있으나 벼슬하지 아니하고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의 6예(六藝)를 갖춘 학문(學問) 닦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혹 그릇된 표현(表現)일까요?

유학(儒學)! 유학자(儒學者)!

유학(儒學)의 자의(字意)는 “선비 유(儒)”, “배울 학(學)”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학(儒學)의 개념(槪念)은 도덕(道德)이 앞서는 학문(學問)으로서 소위 도덕(道德)이 앞장서고 그 다음이 문장(文章)인 선도덕(先道德)의 개념(槪念)이라 하겠습니다. 사전적(辭典的) 의미(意味)로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중심(中心)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경전(經典)으로 하여 정치(政治) 도덕(道德)의 실천(實踐)을 설파(說破)하는 학문(學問)입니다. 그렇다면 공자(公子)의 사상(思想)은 무엇이겠습니까? 천명(天命)을 근본(根本)으로 “인(仁)”에 의(依)해서 일관(一貫)된 인도를 축으로 하고, 도를 실행하는 덕을 존중하여 수기치인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도덕관에 입각한 학문이라 하겠습니다.

다천(茶泉) 정우익(鄭遇益) 선생(先生)!

선생(先生)은 출생(出生)부터가 엄격(嚴格)하고 독실(篤實)한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을 구(求)함에 해이(解弛)하지 않았습니다. 유학(儒學)에 전념(專念)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달(通達)하고 오직 수기치인(修己治人)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재가(修身齋家)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유학자(儒學者)이시다. 주유천하(周遊天下) 사물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두가 도덕(道德)이요, 시(詩)요, 문장(文章)이요 교훈(敎訓)이니 선생(先生)의 고매(高邁)한 학덕(學德)이 어찌 이웃 향당(鄕黨)의 칭송(稱頌)뿐이겠습니까! 사림(士林)의 범(範)이요, 후세(後世)의 귀감(龜鑑)되심은 세삼 필설(筆舌)로서의 표현(表現)을 불허(不許)하는 바인 것입니다.

선생(先生)이 평생(平生)에 글로 남긴 도덕관(道德觀)과 주옥(珠玉)같은 시문(詩文)들이 하나의 역사적(歷史的)인 유물(遺物)로서만 가장(家藏)되었던 것을 선생(先生)의 후손(後孫)들이 성심(誠心)과 문학가(文學家) 양권승선생(梁權承先生) 주동하(主動下)에 권위(權威)있게 번역(飜譯)되어 후학(後學)들이 쉽게 알아 살필 수 있는 번역본(飜譯本)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을 한(限)없이 다행(多幸)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끝으로 그 선생(先生)에 그 자손(子孫)이라 후손(後孫)이 반드시 번성(繁盛)하여 그들이 각자 활발(活潑)하게 사회(社會)에 진출(進出)하여 크게 기여(寄與)하고 있음을 마음깊이 축복(祝福)하고 치사(致謝)하면서 축사(祝辭)로 줄입니다.

西紀 2003年 癸未年 春節

韓日中書畵振興會長 羅福圭

감사의 글

세상의 변화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고, 개인주의(個人主義)가 팽배하는 이 시대에 가문의 역사(歷史)를 탐구하고 그 유물(遺物)을 살피는 것이 별 의미 없는 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에도 있듯이 가정이 사회와 국가의 근본(根本)이요, 그 화목의 기초(基礎)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뿌리가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립니다. 지금 이 사회에 난무(亂舞)하는 여러 문제들을 볼 때마다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며, 그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아버님의 유고집 발간(發刊)이 저희 가족에게는 가족화합과 단결을, 그리고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하나의 교훈(敎訓)이 되어 세세에 남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훌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감동과 여운은 오래 남아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그 교훈(敎訓)을 본받고 실천에 옮길 때 독서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한 권의 제대로 된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을 읽고도 그렇게 감동(感動)을 느낄 수 있는데 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글을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참 조상의 은덕(恩德)이요, 선현(先賢)의 깊은 뜻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그 어려운 시대를 거치시면서 겪으셨을 고초와 그 속에서의 깨달음을 알게 되고, 후손(後孫)에게 전하게 된 기쁨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유고집을 번역하고 선고께서 남기신 그 방대(尨大)한 양의 글을 대하게 되니 그 깊은 학식과 학자로서의 부지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제 훌쩍 팔순의 나이를 넘고 보니 불현듯 단아한 모습으로 서재에 앉아 책을 읽으시고 글을 쓰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도 언젠가는 제 아들에게 그리고 손자와 증손자에게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책으로 낼 수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팀과 한국족보학연구소의 여러 연구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불초 정덕면 근서

차 례

발간사 3

축 사7

감사의 글 12

다천 정우익선생에 대하여 18

단군조선기(檀君朝鮮紀)

梯天(제천)29

築壇(축단)34

敎令大領(교령대령) 37

浿之水(패지수)40

莊京(장경)42

塗山(도산)45

編髮蓋首(편발개수)47

기자조선기(箕子朝鮮紀)

箕子朝鮮(기자조선)-野逸流說(야일유설)57

삼한기(三韓紀)

馬韓(마한)-箕子四十一世孫箕準(기자의 41세손 기준)63

辰韓(진한)64

弁韓(변한)65

삼국기(三國紀)

百濟(백제)79

高句麗(고구려)111

新羅(신라)138

고려기(高麗紀)

高麗紀(고려기)183

太祖(태조)183

惠宗(혜종)188

定宗(정종)191

光宗(광종)193

景宗(경종)197

成宗(성종)199

穆宗(목종)205

顯宗(현종)210

德宗(덕종)222

靖宗(정종)226

文宗(문종)228

順宗(순종)237

宣宗(선종)240

獻宗(헌종)243

肅宗(숙종)246

睿宗(예종)250

仁宗(인종)255

毅宗(의종)261

明宗(명종)266

忠烈王(충렬왕)274

忠宣王(충선왕)281

忠肅王(충숙왕)283

忠惠王(충혜왕)287

忠肅王後紀(충숙왕후기)288

忠惠王後紀(충혜왕후기)290

忠穆王(충목왕)296

조선기(朝鮮紀)

太祖(태조)305

定宗(정종)315

太宗(태종)321

世宗(세종)328

文宗(문종)337

端宗(단종)341

德宗(덕종)363

睿宗(예종)363

成宗(성종)364

燕山君(연산군)370

中宗(중종)376

仁宗(인종)383

明宗(명종)387

宣祖(선조)394

光海君(광해군)423

元宗(원종)433

仁祖(인조)433

孝宗(효종)450

顯宗(현종)473

肅宗(숙종)488

景宗(경종)517

英祖(영조)527

正祖(정조)533

高宗(고종)534

 

다천 정우익 선생에 대하여

(1895~1965)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께서 금성산(錦城山)에서 도(道)를 강론하자 따르는 자가 한 고을을 기울게 할 정도였고 대부분 영준(英俊)한 선비들로 두터운 행실로 사우(師友)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 중 우리 다천(茶泉) 정공(鄭公)께서 그 첫 번째였다.

공의 휘(諱)는 우익(遇益), 자(字)는 일문(一文)이며 나주(羅州) 정씨(鄭氏)이다. 고려 말에 설재선생(雪齋先生)으로 칭송되신 휘 가신(可臣)에서부터 드러나, 조선에 와서 휘 식(軾)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인 시호가 경무에 이르러 설재사(雪齋祠)에서 배향이 되었다. 휘 상(詳), 호 창주(滄洲)는 덕(德)과 학문으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문정랑(文正郞)은 휘가 언복(彦復), 호는 치옹(痴翁)으로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져 사마(司馬)에 등제하였으니 공(公)과는 7세(世)가 차이난다. 휘 국추(國樞)이신 고조와 휘 양호(養浩)이신 증조부께선 모두 깊은 덕행이 있으셨고, 휘가 주(柱)이고 호가 성암(誠庵)이신 조부(祖父)는 유행(儒行)하여 이름이 나셨으며, 휘가 성회(星會)이신 아버지는 효로써 고조, 증조, 조부, 부의 4세(世)를 아름답게 하였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오씨(吳氏)였는데 진실로 훌륭하여 여자로서의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휘가 태회(台會)이시며 고성(固城) 이씨(李氏) 준석(俊奭)의 따님으로 이 두 분이 바로 공을 낳아주신 부모이다.

공께선 태어날 때부터 뛰어나고 총명하셨으며 배움에 나아가서는 문리(文理)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가문의 훌륭한 인재로 칭찬을 받았다. 장성하심에는 더욱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적에 힘을 쓰시어 그 명성과 인망(人望)이 멀리 떨치셨지만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여겨 겸산선생(謙山先生)께 배우면서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오묘한 이치에 힘쓰면서 언행(言行)과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절도에 맞아 묵묵히 깨달아서 체득하지 않음이 없어 겸산선생(謙山先生)께서 함께 도에 나아갈 것을 인정해주셨다.

선생께 물러나 살던 곳에서 가르침을 강론하였는데 좇아서 배우는 자들에게는 재목을 따라 가르침을 베푸심에 일찍이 소홀히 하지 않았다. 평상시의 말씀이 학문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귀하다 말씀하였으니 어찌 말하고 듣는 것에 바탕이 될 뿐이겠는가? 공께서 더욱 화이(華夷)를 막는데 엄히 경계하셨으며. 도이(島夷), 창씨개명(創氏改名)의 변을 당하였을 때도 감히 그 어버이 섬김에 궁핍함이 없게 하시고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와 좋은 음식으로 항상 편안하게 모셔 몸과 마음에까지 편안하게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묘소를 삼년간 살피셨고 제사하는 날이 와서 정성을 드리심에 살아 계실 때와 같이 하셨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시구를 읊으면 시(詩)가 지어져 거의 돌아오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그 선사(先師)를 위해 강사(講舍)를 세우고 유집(遺集)을 간행함에도 그 일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일을 마쳤다. 대개 그 온화하고 공경하며 겸허하심이 일찍이 말씀과 안색에 가득 차지 않아 사람들이 근후(謹厚)한 군자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오 11월 14일날 돌아가시니, 고종(高宗) 을미 11월 13일 태어나시고 향년 72세였다. 본양면(本良面) 월청동(月淸洞) 선산(先山)에 장사지냈다. 유집(遺集)이 세상에 행하여졌다. 부인은 경주 이씨의 종태(鍾泰)의 따님으로 계사년(癸巳年)에 태어나서 을묘년(乙卯年) 8월 초 삼일날 돌아가시니 영안촌(永安村) 뒷산에 따로 장사지냈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아들은 일면(日勉), 안면(安勉), 덕면(德勉), 준면(俊勉)이고, 딸은 하음(河陰) 봉필석(奉弼錫)과 함풍(咸豊) 이상범(李相範)에게 시집보냈다. 병주(炳周)는 장남이 낳은 자손이고, 병규(炳圭), 윤오(允五), 윤방(允邦)은 둘째아들 자손이고, 광훈(光勳), 윤곤(允坤), 윤중(允中), 윤대(允大)는 셋째아들 자손이며, 일성(一成)과 훈(勳)은 막내아들이 낳았다.

오호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능히 세상에 공로를 높이 세우지 못하거든 곧 그 성품을 지켜서 닦고 가지런히 하여 더럽힘이 없게 할 따름이라. 이제 공(公)의 학문은 자신부터 행해져서 나아가 집안 식구와 사람들에게 이르게 하니 또한 가히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을 자식 덕면(德勉)이 밝게 이어 가장을 갖추고 명(銘)을 청해옴에 사양할 수가 없어 드디어 서 하여 명을 지어 말하기를

학문은 스승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받들어

능히 세가(世家)를 이어

효도와 우애는 지극한 본성이었고

덕업(德業)은 매우 아름다웠네.

오랑캐들 물리치는데 혁명을 막아

세상을 근심하고 도(道)를 근심했네.

학문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마음으로 주재(主宰)를 삼았도다.

산천을 아름다이 노래한

유편(遺編)이 상자에 가득하네.

일맥(一脈)의 무슨 연유로

겸산(謙山)의 양덕(陽德)을 이었나?

광산(光山) 이민수(李玟秀)는 찬하노라.

光山 李玟秀 撰

茶泉鄭遇益行略

공이 생전에 이룬 호방(浩厖)한 문장(文章)과 정묘(精妙)한 학문(學問)을 필설(筆舌)로 어찌 다 묘사(描寫)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정밀하게 한다 하더라고 진수(眞膄), 미지(微旨)는 표현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그러므로 학문(學問), 사제(師弟)의 전심(傳心), 수의(守義),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배향사실(配享事實) 다섯 가지만 간추려 기록하는 바이다.

- 학문(學問)

공의 학문은 구이(口耳)의 학(學)이 아니라 궁행심득(躬行心得)하여 이(理)의 진원(眞源)과 도(道)의 대본(大本)을 독계묘오(獨契妙悟)하였다 하겠다.

‘정(情), 의(意)’의 해석(解釋)에 ‘출호성이온제심위지정 유호심이축제중위지의[出乎性而蘊諸心謂之情 由乎心而蓄諸中謂之意(性에서 나와 마음에 쌓인 것을 情이라 이르고, 마음에서 우러나 가운데 쌓인 것을 意라 한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모방함이 없이 독창적으로 한 말인데 또한 성현(聖賢)의 말씀에 부합된다. 모습(模襲)하지 아니한 증거로는 도호(道湖) 오동수(吳東洙)에게 준 서신(書信)에 ‘금기외설 사색불리 잡인무가거[今其猥舌 思索不理 雜引無可據(이제 그 외람되게 말하여 思索이 조리가 없고 잡인(雜引)함이 근거가 없다.)]’가 있다. 말의 겸손함이 또한 공경스럽다.

그러므로 유교(遺穚)가 구태(舊態)에서 탈피하여 생기가 솟구치고 창신력(創新力)이 발휘되어 구독(口讀)하면 감미로움이 그쳐지지 아니한다.

- 사제(師弟)의 전심(傳心)

공은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에게 종학(從學)하여 전인성명(全人性命)의 오(奧)와 무극태극(無極太極)의 묘(妙)를 묵회(黙會)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천리(踐履)가 더욱 독실하니 선생이 매양 칭찬하시기를 ‘가여적도(可與適道 : 가히 같이 도에 나아갈 만하다.)’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수수(授受)함에 선생의 진수(眞髓)가 공의(公) 폐부(肺腑)에 들어왔다 해도 일언(溢言)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생의 임종일기(臨終日記), 가장(家狀), 뇌문(誄文), 만사(輓辭), 유교(遺穚)의 통문(通文), 발(跋), 교정(校正), 그리고 송산정사(松山精舍) 영건(營建)의 통문(通文), 상량문(上樑文) 등을 作하되 혈성(血誠)에서 우러나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이 ‘당고윤읍광풍미 실난자제월안(堂高潤挹光風味 室暖滋霽月顔 : 堂이 높아 光風의 맛을 넉넉히 담고, 방이 따뜻하여 霽月의 模顔을 훈훈히 간직하도다.)’의 차운(次韻)은 수수(授受)의 진미(眞味)를 제대로 나타냈다고 하겠다.

- 수의(守義)

공의 수의준례(守義遵禮)하는 생애가 왜구의 간위(肝胃)를 거슬린데다가 상투는 그들 눈에 못이 되고, 창씨(創氏)를 강행하자 “차라리 피를 토하고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하겠느냐!”하며 거부함이 그들 살에 가시가 되어 협박이 심하므로 ‘생령무죄생어죄 생약불생삼십년[生靈無罪生於罪 生若不生三十年(生靈은 罪가 없고 사는 것이 罪로구나! 삶이 죽음만 같지 못함이 30년이로다.)]’의 시(詩)를 읊고 악양(岳陽)으로 피거(避居)하였다. 또한 협박이 멈추지 않기로 그 자서문(自誓文)에 ‘투생가괴 도동이도생칙동역기토 척서이생칙서역기천[偸生可愧 蹈東而圖生則東亦其土 陟西而生則西亦其天(구차히 살아감이 가히 부끄럽기만 하다. 노중연(魯仲連)이 그랬듯이 동해(東海)를 밟으려하나 또한 그 땅이고, 이제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본받아 서산(西山)에 들어가려 해도 또한 그 하늘일세!)]’라 하고, 또 ‘목석자의유승사 영언시사인호위[木石自依猶勝似 寧言矢死忍胡爲(木石의 자유로움이 오히려 나보다 낫구나. 차라리 죽기를 작정하나니 차마 어찌하려!)]’ 라는 시(詩)를 읊었다.

그리고 완용(完用) 책하기를 ‘구위충견칙교기타인지련이입어주인가야 교기주이궤어적구비충견이광견[苟爲忠犬則嚙其他人之臠而入於主人可也 嚙其主而饋於賊口非忠犬而狂犬(忠犬은 고기 덩어리를 주인에게 물어다 주거늘 그 주인을 물어 남에게 주니 이는 狂犬이다.)]’하고, 완적(完賊)이 ‘부상근역하론태 양지일가천하춘[扶桑槿域何論態 兩地一家天下春(두 나라가 하나가 되어 봄날을 이루세)]’의 시(詩)를 지은 데 의분(義憤)을 이기지 못하고 반박하기를 ‘매국영신구불인 춘추필월만강신 근구해도분이화 천지순음춘불춘[賣國榮身苟不人 春秋筆鉞滿腔新 槿區海島分夷華 天地純陰春不春(나라를 팔아 몸을 영화롭게 함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다. 춘추(春秋)의 필월(筆鉞)로 죽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네.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이 화이(華夷)가 분명하거늘 오늘날 천하가 純陰이 되어 봄이어도 봄 같지 않네.)]’라고 하였다.

-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공은 ‘단춘야사(檀春野詞)’ 7편 18장을 펴냈는데 그 ‘단시향영만춘무궁(檀是嚮榮萬春無窮)’의 구(句)는 단제(檀帝)의 성덕(盛德)을 찬양하며 내세(來世)를 빛내려는 미지(微旨)가 담겨있다. ‘야일류설(野逸流設)’은 단제(檀帝)로부터 한말(韓末)까지 4277년의 역사를 편저(編著)하면서 사이에 논평을 써 의리를 밝혀 새로운 사관을 세우고, 국치(國恥)를 당(當)하여 애통하기를 ‘여생말기 통탄궁려 하익어사직지존망호 단절서직지탄이이[余生末紀 痛歎窮廬 何益於社稷之存亡乎 但切黍稷之歎而已(내가 말기(末紀)에 태어나 궁려(窮廬)에서 통탄한들 사직의 존망에 무슨 도움이 되리요? ‘서직(黍稷)’의 탄(歎)만 가득할 따름이다.)]’ 하니 그 글을 읽음에 후생의 등뼈가 송연하나니 민족의 정기를 불러일으킨다.

- 배향(配享)의 사실(事實)

그 깊은 도(道)와 두터운 덕(德)과 넓은 문장(文章)에 사림(士林)의 존앙(尊仰)하는 열(熱)이 날로 성하여 누년 의론(議論)이 비등(沸騰)하다가 덕면(德勉), 광훈(光勳) 부자(父子)의 효성으로 겸산선생(謙山先生)의 조두소(俎豆所)인 송산사(松山祠)를 치연(侈然)하게 개조하여 경진년(庚辰年) 위패(位牌)를 奉安(봉안)하고 향사(享祀)하니 사제(師弟)가 대좌(對坐)하여 은연중에 더욱 후학을 覺悟시키는 기풍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河陰 奉奇鍾 撰

단군조선기(檀君朝鮮紀)

梯天(제천)

제1장

梯(제)天(천)崑(곤)崙(륜)하늘로 솟은 곤륜산의

祖(조)于(우)西(서)東(동)서쪽 동쪽에서 시조가 되니

唐(당)堯(요)立(입)極(극)당요의 입극수통(立極垂統)과

化(화)洽(흡)攸(유)同(동)교화의 미침이 서로 같았네.

2장

太(태)白(백)山(산)古(고)兮(혜)백산의 예스러움이여

檀(단)天(천)蒼(창)蒼(창)단목의 하늘 푸르고 푸르네.

鴨(압)綠(록)之(지)水(수)淸(청)兮(혜)압록강의 물 맑음이여

其(기)流(류)洋(양)洋(양)그 흐름 넘실대네.

天(천)降(강)神(신)聖(성)하늘이 신령한 성인을 내리시니

厥(궐)德(덕)堯(요)昌(창)그 덕이 드높고도 창성하네.

從(종)此(차)植(식)民(민)이로부터 백성을 기르시니

海(해)荒(황)不(불)荒(황)바닷가의 황무지가 황폐하지 않게 되었네.

➜태백산 천제단 : 단군에게 제를 올리는 천제단

(소도동 산80 및 혈동 산87-2 :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28호).

3장

檀(단)是(시)嚮(향)榮(영)단목이 이로부터 무성해지니

萬(만)春(춘)無(무)窮(궁)온 봄이 무궁하였네.

華(화)侔(모)中(중)華(화)번화함이 중화와 짝하여

小(소)大(대)一(일)通(통)크고 작음이 하나로 통하였네.

山(산)川(천)融(융)結(결)兮(혜)산과 내가 융합하여 연결되었음이여

彭(팽)吳(오)盡(진)衷(충)팽오가 정성을 다하였네.

民(민)乃(내)奠(전)居(거)백성이 곧 터전을 잡으니

始(시)食(식)農(농)功(공)비로소 농사의 수확을 먹게 되었네.

4장

天(천)保(보)定(정)國(국)하늘이 보호하여 나라를 정하니

咸(함)戴(대)匪(비)民(민)모두들 광주리 인 백성들이네.

干(간)戈(과)不(불)勞(로)전쟁에 힘쓰지 않으니

幾(기)于(우)堯(요)仁(인)거의 요임금의 인자함과 같았네.

高(고)下(하)位(위)焉(언)높고 낮은 지위가 서고

貴(귀)賤(천)俾(비)陳(진)귀하고 낮은 신분들이 갖추어졌네.

允(윤)矣(의)東(동)方(방)참으로 동방이여

百(백)物(물)是(시)均(균)온갖 생물이 모두 고르도다.

5장

有(유)子(자)四(사)人(인)아들 네 사람이 있어서

各(각)持(지)一(일)能(능)각자가 한 재능을 지녔으니

正(정)敎(교)有(유)何(하)바른 교화에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民(민)莫(막)不(불)稱(칭)백성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네.

注(주)贊(찬)神(신)誥(고)신에게 고하는 글월 찬술하니

治(치)化(화)丕(비)興(흥)정치의 교화가 크게 일어났네.

築壇(축단)

1장

築(축)壇(단)忡(충)忡(충)단을 쌓느라고 부지런하니

天(천)感(감)厥(궐)誠(성)하늘이 그 정성에 감동하시었네.

厥(궐)誡(계)有(유)何(하)그 정성에 무엇이 생겼던가.

黍(서)稷(직)梁(량)盛(성)기장 곡식들 풍성하였네.

爲(위)民(민)匪(비)躬(궁)백성 위한 일 몸소 하시니,

民(민)亦(역)天(천)生(생)백성 또한 하늘이 내신 것이네.

上(상)蒼(창)昭(소)格(격)푸른 하늘이 밝게 이르시나

無(무)臭(취)亦(역)無(무)聲(성)냄새도 없고 또한 소리도 없다네.

2장

神(신)之(지)格(격)矣(의)신이 강림하시어

詒(이)其(기)多(다)福(복)그 많은 복을 내리시니

神(신)之(지)戒(계)矣(의)신이 경계하시니

勿(물)其(기)爾(이)獨(독)너는 홀로 있지 말지니라.

如(여)其(기)爾(이)獨(독)네가 홀로 있게 되면

羣(군)黎(여)難(난)牧(목)여러 백성들을 거두기가 어려우리라.

牧(목)民(민)以(이)善(선)백성을 기름을 선으로 하니

天(천)祿(녹)斯(사)速(속)하늘의 복이 이처럼 신속하였네.

3장

天(천)猶(유)霑(점)露(로)하늘은 오히려 내리는 이슬과 같으니

檀(단)木(목)千(천)年(년)단목이 천 년 동안

蔚(울)彼(피)敷(부)陰(음)울창하게 저처럼 녹음을 드리웠네.

永(영)圖(도)萬(만)全(전)영원히 모든 백성 온전하기를 도모하니

邦(방)本(본)惟(유)民(민)나라의 근본은 오직 백성들이네.

民(민)本(본)惟(유)天(천)백성의 근본은 오직 하늘이네.

天(천)其(기)不(불)與(여)하늘이 그들을 주시지 않았다면

德(덕)無(무)所(소)宣(선)덕을 베풀 곳이 없으리라.

 

敎令大領(교령대령)

1장

敎(교)令(령)大(대)領(령)교령과 대령은

天(천)命(명)是(시)譯(역)천명을 곧 풀이한 것이네

民(민)之(지)赤(적)裏(리)백성들은 진심으로 간직해야 하네.

仁(인)義(의)攸(유)宅(택)인의는 곧 사는 집인데

曠(광)宅(택)不(불)居(거)집을 비워두고 거처하지 않으면

食(식)息(식)胡(호)獲(획)먹고 쉬는 것을 어디에서 얻겠는가?

2장

海(해)蒼(창)難(난)久(구)廢(폐)푸른 바닷가를 오래 동안 버려둘 수가

없어서

天(천)與(여)之(지)以(이)重(중)責(책)하늘이 이를 주어 중책을 맡기었네.

明(명)鑑(감)亦(역)其(기)遠(원)乎(호)밝은 감계 또한 먼 것인가?

與(여)心(심)相(상)去(거)不(불)盈(영)尺(척)마음과의 서로의 거리가 일척도 되지

않네.

3장

焉(언)容(용)間(간)隙(극)어찌 조금의 틈이라도 허용하겠는가?

勿(물)怠(태)勿(물)逆(역)태만하지도 말고 거슬리지 말라

而(이)民(민)不(불)容(용)그리하면 백성들이 용납하지 않을 터이니

吁(우)予(여)安(안)適(적)아아!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

4장

日(일)中(중)堯(요)天(천)요의 하늘에 해가 높으니

何(하)土(토)不(불)陽(양)어떤 땅인들 볕들지 않겠는가?

心(심)則(칙)同(동)天(천)마음은 하늘과 같으니

朕(짐)德(덕)荒(황)凉(량)짐의 덕은 황량하도다.

民(민)天(천)何(하)在(재)백성과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

海(해)隅(우)一(일)蒼(창)바다 모퉁이는 한결같이 푸른데

心(심)外(외)無(무)道(도)마음 밖에는 도가 없네.

周(주)道(도)以(이)行(행)欽(흠)哉(재)두루 도를 행하니 공경스럽네.

無(무)父(부)豈(기)有(유)天(천)부모가 없으면 어찌 하늘이 있으리오?

以(이)孝(효)事(사)親(친)是(시)吾(오)道(도)효로써 부모를 모시는 것이 우리의 도이네

無(무)君(군)豈(기)有(유)天(천)임금이 없으면 어찌 하늘이 있으리오?

事(사)君(군)盡(진)忠(충)是(시)吾(오)道(도)임금을 섬기는데 충성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도이네.

無(무)天(천)之(지)民(민)하늘 없는 백성은

必(필)也(야)出(출)不(불)由(유)扃(경)반드시 나가는데 있어서는 문으로 나서지

못하고

行(행)不(불)由(유)道(도)길가는 데 있어서는 길로 가지 못하니라.

 

浿之水(패지수)

1장

浿(패)之(지)水(수)패수의 강물은

北(북)而(이)流(류)西(서)북에서 흘러 서쪽으로 흘러가네.

平(평)壤(양)移(이)都(도)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니

如(여)市(시)群(군)黎(려)시장터처럼 여러 백성들이 넘치네.

天(천)雖(수)不(불)旱(한)하늘이 비록 감을 내리지 않았지만

望(망)之(지)雲(운)霓(예)갈망하기를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듯하네.

茅(모)茨(자)三(삼)級(급)초가집과 세 계단이

君(군)子(자)攸(유)躋(제)군자가 거처할 곳이네.

2장

浿(패)之(지)水(수)패수의 강물

其(기)流(류)汪(왕)汪(왕)흐름이 넘실대네.

君(군)子(자)萬(만)年(년)군자가 만 년 동안

福(복)祿(록)是(시)將(장)복록을 여기에서 지니리라.

攸(유)將(장)攸(유)承(승)아! 그것을 지니고서 받드니

邦(방)國(국)之(지)光(광)나라의 광영이구나.

3장

邦(방)畿(기)維(유)新(신)나라의 영토 새로우니

而(이)民(민)所(소)瞻(첨)그 백성들 우러르네.

堯(요)雖(수)病(병)博(박)요는 비록 널리 베풀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나

仁(인)露(로)遐(하)霑(점)인자한 은택 멀리까지 적시었네.

檀(단)天(천)垂(수)露(로)단목의 하늘에 은택의 이슬 내리니

小(소)華(화)之(지)漸(점)점차 소화의 문명이 섰네.

地(지)在(재)東(동)表(표)땅은 비록 동쪽으로 떨어져 있지만

天(천)德(덕)惟(유)嚴(엄)하늘의 덕은 더욱 근엄하였네.

 

莊京(장경)

1장

莊(장)京(경)之(지)遷(천)장경의 천도는

洪(홍)水(수)之(지)故(고)홍수 때문이었네.

滔(도)天(천)沈(침)陸(륙)하늘까지 넘실대어 나라가 망했으니

千(천)古(고)不(불)遇(우)천고의 불행이었네.

氾(범)濫(람)中(중)國(국)범람하여 중국을 뒤덮음은

其(기)然(연)天(천)數(수)그렇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였네.

民(민)幾(기)魚(어)矣(의)백성들이 물고기 밥이 된 것은

洪(홍)水(수)之(지)故(고)홍수 때문이었네.

民(민)幾(기)廢(폐)矣(의)백성이 피폐해진 것은

洪(홍)水(수)之(지)故(고)홍수 때문이었네.

2장

阿(아)斯(사)達(달)之(지)崇(숭)崇(숭)兮(혜)아사달의 높고 높음이여

幸(행)也(야)王(왕)子(자)相(상)宜(의)之(지)有(유)度(도)다행이구나. 왕자들이 서로 의가

좋음은 법도가 있네.

神(신)其(기)弔(조)矣(의)신이 그것을 위로하고

上(상)天(천)眷(권)顧(고)상천이 사랑하고 돌보아 주네.

民(민)控(공)訴(소)而(이)戒(계)懼(구)백성이 호소하면 경계하고 두려워

하니

百(백)物(물)不(불)勞(로)而(이)揆(규)務(무)모든 생물이 수고하지 않아도 헤아

려서 힘쓰네.

塗山(도산)

1장

塗(도)山(산)承(승)筐(광)도산에서 광주리를 받드니

玉(옥)帛(백)是(시)均(균)옥백이 풍부하였네.

玉(옥)帛(백)匪(비)寶(보)옥백은 보배는 아니나

吁(우)其(기)嘉(가)乃(내)愛(애)詢(순)아! 그들의 따름이 가상하고 사랑스럽도다.

2장

東(동)方(방)出(출)日(일)동방에서 해가 뜨니

暘(양)谷(곡)鮮(선)明(명)양곡이 선명하네.

萬(만)區(구)攸(유)同(동)만 구역이 다 같으니

帝(제)德(덕)惟(유)宏(굉)제덕이 오로지 큼이로다.

洪(홍)水(수)一(일)警(경)홍수에 한번 놀랐으나

四(사)海(해)昇(승)平(평)사해가 태평하네.

3장

昔(석)我(아)往(왕)矣(의)옛날 내가 갔을 때

地(지)平(평)天(천)成(성)땅 평평하고 하늘 이루어졌으니

今(금)我(아)來(래)思(사)지금 내가 와서 생각하니

黃(황)河(하)一(일)淸(청)황하가 한 차례 맑아짐이

如(여)日(일)之(지)恒(항)해처럼 영원하고

如(여)山(산)之(지)嵩(숭)산처럼 드높네.

孰(숙)知(지)檀(단)心(심)之(지)葵(규)傾(경)누가 알겠는가. 단심(檀心)의 규경(葵傾) 을.

 

編髮蓋首(편발개수)

1장

編(편)髮(발)蓋(개)首(수)편발과 개수는

中(중)華(화)之(지)風(풍)중화의 풍속이고

肅(숙)愼(신)之(지)弓(궁)숙신의 활과

矢(시)之(지)甚(심)工(공)화살은 몹시 훌륭하네.

天(천)眷(권)異(이)常(상)하늘의 보살핌 특별나서

降(강)祥(상)有(유)東(동)복을 내림이 동방에 있도다.

鳳(봉)凰(황)來(래)儀(의)봉황이 내려와 의례함이

便(편)同(동)舜(순)宮(궁)곧 순임금의 궁궐에서와 같았으니

從(종)知(지)晩(만)年(년)이로부터 그 만년을 알겠도다.

聖(성)德(덕)豊(풍)隆(융)성덕이 풍성하고 융성하리라.

2장

天(천)庚(경)地(지)子(자)천간 지간의 경자년에

臨(임)終(종)盡(진)命(명)임종하여 수명을 다하니

謳(구)歌(가)歸(귀)啓(계)노래 읊조리며 돌아가 아뢰었네.

天(천)不(불)再(재)聖(성)하늘은 다시 성인을 내리시지 않았네.

斗(두)建(건)在(재)寅(인)북두성이 인방(寅方)에 떠있으니

曆(력)順(순)夏(하)正(정)역(曆)은 하나라의 정삭을 따랐네.

3장

子(자)子(자)孫(손)孫(손)자자손손에게

福(복)祿(록)茹(여)連(연)복록이 이어짐이

四(사)十(십)有(유)七(칠)世(세)사십 칠 세대였고

歷(력)年(년)至(지)千(천)지내온 해는 천년에 이르렀네.

天(천)祿(록)之(지)永(영)終(종)천록이 영원히 다했으나

猶(유)多(다)於(어)禹(우)湯(탕)之(지)오히려 우왕과 탕왕이 이어

承(승)傳(전)받은 것보다도 많았네.

天地肇判, 萬物生焉. 萬物生焉, 而以天地爲藏物 府庫, 則天地徒費二氣而已. 是以, 朱夫子嘗曰, 天地之性以人爲貴. 竊恐人之所以見貴於天地者, 順其性也. 生之也, 頭圓象天, 足方履地, 體具衆理, 四肢象四時, 言行動作, 微合於天地之不言. 而人性之仁義禮智, 則天行之元亨利貞也. 然則東 邦與中國, 一天惟戴, 而聖人之作, 猶不如者, 天地之中氣, 不有私厚私薄而然也. 但地方偏小, 配天應氣, 不若大塊之應矣. 然檀君亦可謂東邦初頭之聖, 韶簫不作, 而鳳凰來儀, 亦不有司徒之職, 而五品遜五敎立. 衣服飮食, 宮室之制, 編髮蓋首之制, 始敎之而民化速郵, 其盛德猶如是夫. 嗚呼! 結繩不政而, 命神誌任書契, 則刑政治敎, 亞於中國宜矣. 而奈禮樂文物, 無所可稽 抑史不繁文也歟. 余恐堯典簡於舜典, 禹謨略於商書, 則堯舜之 典型簡於夏商之典型而然乎哉.

천지가 처음 갈라지니, 만물이 그곳에서 자라났다. 만물이 자라남은 천지를 만물을 간직하는 부고(府庫)로 삼은 것인데, 천지는 다만 두 기운(二氣)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주부자(朱夫子)는 일찍이 “천지의 성(性)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고 했다. 생각건대, 사람이 하늘에게 귀함을 받는 것은 하늘의 성(性)을 따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태어날 때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을 밟기 때문이고, 몸은 여러 이치를 구비하였고, 사지(四肢)는 사시(四時)를 본뜬 것이다. 언행과 동작은 천지의 말 없는 것과 은미하게 합치되고, 인성(人性)의 인의예지(仁義禮智)는 곧 천행(天行)의 원형리정(元亨利貞)인 것이다. 그런데 동방(東邦)과 중국은 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으면서 성인이 일어나심은 오히려 같지 않다. 천지 안의 기운이 사사로이 후하지 않고 사사로이 박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가? 다만, 지방(地方)이 한쪽에 치우치고 작아서 하늘에 짝하고 기운에 응하는 것이 대륙이 응하는 것만 못해서 인가? 그러나 단군(檀君) 역시 동방에서 맨 처음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소(韶簫)의 음악을 작곡하지 않았어도 봉황이 와서 의례하였고, 또한 사도(司徒)의 직책이 없었고, 오품(五品)은 오교(五敎)에 뒤지나, 의복․음식․궁실의 제도와 편발(編髮)․개수(蓋首)의 제도를 세워서, 처음으로 이를 가르치니 백성의 교화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 성덕(聖德)이 이와 같았다. 아아! 결승(結繩)으로 정치하지 않았고, 신(神)을 명명하고 임무를 기록함을 서계(書契)로 하였으니, 형정(刑政)․치교(治敎)가 중국과 버금감이 마땅하다. 그러나 어찌 예악․문물을 상고할 바가 없는가? 역사가가 상세하게 적지 않았음인가? 나는 요전(堯典)은 순전(舜典)보다 간략하고, 우모(禹謨)는 상서(尙書)보다 더 간략하다고 생각하는데, 요순의 전형(典刑)이 하(夏)나라․상(商)나라의 전형보다 간략해서 그런 것인가?

○ 庚子三月十五日. 檀君入阿斯達山, 化神御天. 阿斯達山卽文化九月山也. 國人立廟饗之, 稱三聖祠, 桓因․桓雄․桓儉是也. 桓儉爲檀君. 太白平壤俱在遼滿之間. 至于宗統王箕丕, 爲秦所侵畧而遼滿舊界失之於秦. 渡遼遷都, 引古都之名而都曰平壤. 江曰浿水. 遼西之平壤, 箕子古都也. 檀系四十七世. 爲王歷年一千四十八. 始於唐堯二十五年戊辰.

경자(庚子)년 3월 15일.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이 되어 하늘을 다스렸다. 아사달산은 곧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나라사람들이 사당을 세워서 제향을 드리는데 삼성사(三聖祠)라고 부른다. 환웅(桓雄)․환검(桓儉)이 그들이다. 환검이 단군이시다. 태백산과 평양(平壤)은 모두 요동(遼東)과 만주(滿洲)의 어름에 있다. 종통왕(宗統王) 기비(箕丕)에 이르러 진(秦)나라의 침략을 당하여 요동과 만주의 옛 경계를 진나라에게 잃었다. 요동을 건너 천도하여 옛 도성의 이름을 가져와서 도성을 평양이라 이름 짓고 강은 패수(浿水)라고 하였다. 요서(遼西)의 평양은 기자(箕子)의 옛 도성이다. 단군의 계보는 47세대가 왕을 하였고, 지내온 해는 1048년이었다. 그 처음은 당요(唐堯) 25년 무진(戊辰)년이었다.

기자조선기(箕子朝鮮紀)

○ 箕子率中國人五千, 避周東渡. 人民奉以爲君. 定都于平壤. 周武王訪問, 內洪範九籌.

기자(箕子)가 중국인 5천명을 데리고 주(周)나라를 피하여 동쪽으로 건너왔다. 인민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평양에다 도읍을 정하였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찾아와 물으니, 곧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진술하였다.

◎ 嗚呼! 殷之亡也, 傷宗國之歎, 黍離作歌, 社稷墟矣. 以罔僕之義, 東渡而之平壤. 詩書禮樂, 陰陽卜筮之流, 悅從之土民, 無遠邇來歸, 卽以成都. 是乃聖人也. 薰德之及, 如仁風吹噓, 人物繁盛, 繼檀紀之統, 開來萬千年之運. 故禮樂文物亞於中華, 小中華之稱, 仰賴箕聖文明之化及耳.

아아! 은(殷)나라가 망했을 때, 종국(宗國)을 슬퍼하며 서리(黍離)를 보며 탄식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곧 사직의 터에서였다. 망한 나라의 신하의 의리로써 동쪽으로 건너와 평양에 이른 것이다. 시서(詩書)․예악․음양․복서(卜筮) 등을 기쁘게 따르는 토착민들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와서 귀순하였다. 곧 도읍을 이루니, 이는 곧 성인이다. 훈훈한 덕이 미침이 마치 인풍(仁風)이 불어 사람과 생물들이 번성하는 듯하였다. 단군시대의 계통을 이어 만 천년의 운(運)을 열었다. 그러므로 예악․문물이 중화(中華)에 버금가서 소중화(小中華)라는 칭호로 우러름은 기성(箕聖)의 문명의 교화가 미쳤기 때문이다.

○ 戊午. 箕子薨. 世子松卽位, 以下四十世爲王. 四十一世孫箕準, 追尊箕子爲太祖文聖王.

무오(戊午)년. 기자가 서거하고, 세자 송(松)이 즉위했다. 이하 40세대가 왕을 지냈다. 41세손 기준(箕準)이 기자를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으로 추존했다.

○ 丁未哀王二十七年. 燕人衛萬襲擊王都. 哀王敗走南奔渡江.- 漢惠帝元年

정미(丁未)년 애왕(哀王) 27년.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왕도(王都)를 습격하자, 애왕은 패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 강을 건넜다.-한(漢)나라 혜왕(惠王) 원년의 일이다.

삼한기(三韓紀)

○ 哀王至韓地金馬郡-今益山. 遂定都, 改國號曰馬韓.

애왕이 한(韓)땅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익산(益山)에 이르렀다. 마침내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바꾸어 마한이라고 했다.

◎ 土民居于草屋土室, 門戶向上. 不重金銀․玉帛. 只貴瓔珠, 用以飾髮垂耳. 亦知蚕桑․農工. 散居山海間.

토착민들은 초가지붕의 흙집에서 사는데, 문들은 위로 향해 있었다. 금은․옥백(玉帛)을 중시하지 않고, 다만 영주(瓔珠)를 귀하게 여겨 머리장식과 귀걸이로 사용했다. 또한, 누에치기와 농사를 알았다. 산과 바닷가에 흩어져 살았다.

○ 避秦而來, 割東藩而界之. 不能自主, 以馬韓人爲主. 地宜桑麻, 五穀豊饒. 嫁娶以禮. 完有中華之風.

진(秦)나라를 피하여 와서 동쪽 땅을 갈라 가지고 경계로 삼았다.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어서 마한 사람을 주인으로 삼았다. 영토는 누에치기에 적당하고 오곡이 풍요로웠다. 결혼은 예의로써 행하여 온전히 중화의 풍습이 있었다.

不知始系, 後合爲新羅. 衛滿據壬儉城, 自稱後朝鮮. 侵奪隣郡千餘里爲王.

처음의 계통은 알 수 없다. 나중에 합쳐져 신라가 되었다. 위만이 임검성(壬儉城)을 차지하고 후조선(後朝鮮)이라고 자칭하며, 인근의 군(郡) 천 여리를 침탈하여 왕이 되었다.

○ 癸酉馬韓孝王五年 - 漢武帝時. 漢分其地爲四郡. 攻後朝鮮而滅之也. 四郡一曰樂浪-今平壤, 二曰臨屯-今江陵, 三曰玄菟-今咸興, 四曰眞蕃-今遼東. 至漢昭帝始元五年, 以四郡爲二都督府. 後七十二年, 亦爲高句麗高朱蒙所據. 凡後朝鮮, 自衛滿三世而亡. 嗚呼! 興亡遲速在於德不德. 而創始以侵奪爲本, 妄能長久乎?

계유(癸酉)년 마한 효왕(孝王) 5년-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이다.한(漢)나라가 그 땅을 나누어 사군(四郡)으로 삼고, 후에 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사군은 첫째는 낙랑(樂浪):지금의 평양),둘째는 임둔(臨屯):지금의 강릉),셋째는 현토(玄菟):지금의 함흥),넷째는 진번(眞藩):지금의 요동)이다.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이르러 사군 이도독부(二都督府)로 삼았다. 이후 72년 뒤에 고구려 주몽(朱蒙)에게 점거 당했다. 무릇 후 조선은 위만으로부터 3세대 만에 망했다. 아아! 흥망의 더디고 빠름은 덕(德)과 부덕(不德)에 달려있다. 창시(創始)를 침탈로 근본 삼으면서 망령되게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甲子元王元年 - 漢憲帝五年. 朴赫居世建國於辰韓之地, 國號徐羅伐. 先是, 朝鮮遺民居于東海濱. 至望揚山麓羅井林間, 聞馬嘶聲. 往見之, 有卵, 大如瓢形. 剖視之, 有瓔兒. 攜持而撫育. 氣骨魁傑. 年旣長, 國人立之爲王. 取其卵形如瓢而爲姓朴. 立閼英爲妃. 以裵祗沱爲相.

갑자(甲子)년 원왕(元王) 원년 - 한나라 헌제(憲帝) 5년이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의 땅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동해의 물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망양산(望揚山) 기슭의 나정(羅井)에 이르렀을 때 숲 사이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서 살펴보니, 박처럼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갈라 보았더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 있었다. 데리고 와서 양육하였는데, 기골이 괴걸(魁傑)하였다. 이미 성장하자, 나라사람들이 그를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 그가 나왔던 알의 모양이 박과 같았음을 취하여 박(朴)으로 성씨를 삼았다. 그리고 알영(閼英)을 왕비로 삼고, 배지타(裵祗沱)를 상(相)으로 삼았다.

○ 甲申元王二十一年-徐羅伐二十一年. 弁韓降于徐羅伐. 高朱蒙嗣卒本扶餘王. 改國號曰高句麗. 以高爲姓, 自稱高辛之後. 嗚呼! 日影所照, 卵化, 明矣. 以日高爲姓, 則可也. 而自稱高辛之後, 則以開日後冒襲之蔽矣.

갑신(甲申)년 원왕 21년-서라벌 21년. 변한이 서라벌에 항복하였다. 고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을 이어서 국호를 바꾸어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高)로써 성씨를 삼고, 자칭 고신(高辛)의 후예라고 한 것은 뒷날 모습(冒襲)하는 폐단을 열게 되었다.

◎ 初, 東扶餘王解夫婁, 老而無嗣. 祈于名山大川. 一日至鯤淵, 所御馬, 見大石垂淚. 夫婁怪之, 轉其石而見之. 石有一窺, 孩兒呱呱, 其形如金蛙. 夫婁喜曰, 天賜也. 抱而歸, 養之爲子, 名金蛙, 嗣之爲王. 於是, 金蛙得美女於太白山南優渤水-今寧邊府. 美女曰, 我是河伯之女. 蛙異之, 幽藏閨中. 因日影所照, 有胞脤, 生一卵. 裹置暖處, 化爲男子, 披殼而出. 骨表英秀. 甫七歲, 自作弓矢, 善射之. 扶餘之俗, 以善射爲朱蒙. 故因名之. 美女自稱河伯之女, 是宜荒誕. 然史無誣筆, 故證信焉耳. 女之自稱, 或可誣矣. 筆豈誣乎?

처음에 동부여(東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는 늙도록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명산대천에 기도를 하였는데, 하루는 곤연(鯤淵)에 이르렀을 때 타고 가던 말이 큰 바위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해부루가 그것을 이상히 여기고, 그 바위를 굴려서 살펴보았다. 바위에는 한 구멍이 있었는데, 그 속에 한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은 마치 금개구리와 같았다. 해부루가 기쁘게 말하길 “하늘이 주신 것이다.” 라고 했다. 아이를 품고 돌아와 양육하여 아들로 삼았다. 그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는데 해부루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이때에 금와는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지금의 寧邊府)에서 한 미녀를 얻었다. 그 미녀는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오.” 라고 말했다. 금와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녀를 규중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 그런데 햇살이 그녀를 비추자 곧 임신하여 한 알을 낳았다. 그것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부화하여 남자 아이가 되었다. 알의 껍질을 헤치고 나오니 골격과 모습이 몹시 수려했다. 나이가 7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는데, 활을 잘 쏘았다. 부여의 풍속에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이름을 삼았다. 미녀가 스스로 하백의 딸이라고 칭한 것은 마땅히 황탄한 말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거짓된 붓이 없기 때문에 증거로 믿을 뿐이다. 여자가 스스로 칭했던 말이 아마 거짓일 것이다. 어찌 사필(史筆)에 거짓이 있겠는가?

○ 己丑元王二十六年-徐羅伐二十六年 ․ 高句麗六年. 徐羅伐改國號曰新羅.

기축(己丑)년, 원왕 26년-서라벌 26년 ․ 고구려 6년 - 서라벌이 국호를 바꾸어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 甲午稽王五年-新羅三十一年 ․ 高句麗十年. 高句麗合倂四國. 移都于平壤. 一曰荇人國, 在寧邊. 一曰松讓國, 在沸流水上. 一曰北沃沮, 在不咸山下. 一曰已婁國. 在遼東.

갑오(甲午)년 계왕(稽王) 5년-신라 31년 ․ 고구려 10년-고구려가 네 나라를 합병하고,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그 네 나라는 곧 영변(寧邊)에 있던 행인국(荇人國) ․ 비류수(沸流水) 가에 있던 송양국(松讓國) ․ 불함산(不咸山) 아래에 있던 옥저(沃沮) ․ 요동(遼東)에 있던 이루국(已婁國)이다.

○ 癸卯十四年. 高溫祚建國於慰禮城, 號十濟-今稷山. 以十臣爲輔. 故曰十濟, 後爲百濟.

계묘(癸卯) 14년. 고온조(高溫祚)가 위례성(慰禮城)에 나라를 세우고 십제(十濟) - 지금의 직산(稷山) - 라고 불렀다. 열 신하로써 보필하게 했기 때문에 십제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백제(百濟)가 되었다.

◎ 初, 朱蒙有三子. 一類利, 二沸流, 三溫祚. 及類利立爲太子, 二人恐不見容, 南奔. 至漢水, 登負兒嶺, 望占可居地. 沸流居彌鄒忽-今仁川, 溫祚居慰禮城. 其先系同出高句麗.

처음에 주몽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유리(類利), 둘째는 비류(沸流), 셋째는 온조(溫祚)이다. 유리가 태자로 세워지자, 두 사람은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서 남쪽으로 달아났다. 한수(漢水)에 이르자 부아령(負兒嶺)에 올라가서 거주할 만한 땅을 살펴서 정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인천)에 터를 잡았고, 온조는 위례성에 터를 잡았다. 그들의 선조의 계통은 모두 함께 고구려에서 나왔다.

○ 甲辰稽王十五年-新羅四十一年 ․ 高句麗二十年. 至稽王爲百濟所亡. 凡箕子朝鮮四十一世, 馬韓八世, 歷年一千一百三十六年. 嗚呼! 東方與中國, 同時一天之下. 上古亦其無人, 有桓因 ․ 桓雄時代云. 桓因 ․ 桓雄與桓儉, 俱是兄弟. 而桓儉是檀君也. 稱神市氏. 上元甲子, 有神人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檀木下云. 檀古神字. 無文可考. 檀紀以前, 未詳其始也. 是以, 東方初無君長. 衆民散居, 如鳥啄獸囓, 而人獸莫辨. 始敎之以夫婦 ․ 父子 ․ 君臣之道, 飮食 ․ 編髮 ․ 蓋首之制, 創始吾東開治之運. 是可謂東方天地, 與之合其德者也. 後千有餘載, 檀紀刷盡, 敎化不振, 而箕聖東渡, 復敎之以禮義 ․ 廉恥 ․ 孝悌 ․ 忠信之道. 國民賴而厚生, 千有餘年, 歷四十世而亡. 凡國之興亡. 是固天命靡常, 然國風化民, 不下文武之聖治耳. 以若武王之聖, 一着戎衣, 開始八百年基業, 矧惟箕聖拱手而作千年基業. 雖曰國有大小, 聖德之及遠, 不下於周武矣. 周以秦亡, 箕以衛滿亡. 秦與衛滿, 不顧天命而迸取者也. 秦二世, 衛滿三世, 天命攸在, 則其然乎哉? 以檀記 ․ 箕紀明確. 故題詩一句, 檀貢堯天閒日月, 箕同周紀異江山.-時崔南善學儒學, 而以史學鳴世者. 妄謂之高句麗以上未嘗有正史, 以箕子朝鮮荒唐之說, 慨歎不已.

갑진(甲辰)년 계왕 15년 - 신라 41년 ․ 고구려 20년 - 계왕에 이르러 백제에게 망하였다. 무릇 기자조선 41세대, 마한 8세대, 지내 온 해가 1천 1백 36년이었다. 아아! 동방은 중국과 함께 한 하늘 아래 있었다. 상고에는 또한 사람들이 없었는데, 환인 ․ 환웅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환인 ․ 환웅 ․ 환검은 모두 형제인데, 환검이 곧 단군이며 신시씨(神市氏)라고 칭했다. 상원(上元) 갑자(甲子)에 어떤 신인(神人)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다. 단(檀)은 옛날의 신(神)이라는 글자로써 문자는 없지만 살펴볼 수 있다. 단기(檀紀) 이전에는 그 처음이 상세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君長)이 없었고, 많은 인민들은 흩어져 살고 있었다. 마치 새처럼 쪼아 먹고 짐승처럼 씹어 먹는 듯하여 사람과 짐승들을 구별할 수 없었다. 부부 ․ 부자 ․ 군신의 도리와 의복 ․ 음식 ․ 편발(編髮) ․ 개수(蓋首)의 제도를 처음으로 가르쳐서, 우리 동방을 열어 다스리는 운(運)을 창시하였다. 이는 동방의 천지가 모두 함께 그 덕에 합쳐진 것이라고 말할 만하다. 천여 년 뒤에 단기(檀紀)가 쇄진(刷盡)하여 교화를 떨치지 못하자, 성인(聖人)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건너와서 예의 ․ 염치 ․ 효제(孝悌) ․ 충신(忠信)의 도리를 다시 가르치니, 나라의 인민들이 이것에 기대어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다. 이것이 또한 천여 년인데, 40세대를 지내고 망하였다. 무릇 나라의 흥망은 진실로 천명을 따르는데 달려있다. 그러므로 나라의 풍속과 인민들의 교화가 주나라 문왕 ․ 무왕의 성스러운 다스림보다 아래가 아니다. 주나라 무왕 같은 성인도 한차례 갑옷을 입고서야 8백년의 나라를 세우는 공업을 열었다. 그런데 성인 기자는 공수(拱手)를 한 채 천년의 나라를 세우는 공업을 열었음에랴! 비록 나라에는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지만 성덕(聖德)이 멀리까지 미침은 주나라 무왕보다 아래가 아니다. 주나라는 진(秦)나라에게 망했고, 기자는 위만에게 망하였다. 진나라와 위만은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남의 나라를 취한 자들이다. 진나라는 2세대, 위만은 3세대 만에 망했으니 천명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인가? 단군의 세기와 기자의 세기는 명확하다. 그래서 시 한 구절을 적는다. “단군이 요임금 시대와 통하니 해와 달이 한가로웠고, 기자는 주나라와 같은 시대였는데 강산만이 달랐네.” 이 시대 최남선(崔南善)은 유학을 공부하여, 사학(史學)으로 세상에서 유명한데, 망령되게도 말하기를 “고구려 이상은 정사(正史)가 있은 적이 없다”고 하며 기자조선은 없었다는 황당한 설을 말하였다. 개탄을 금하지 못할 뿐이다.

삼국기(三國紀)

建國, 新羅先, 而高句麗次之, 百濟最後. 馬韓之統, 傳於百濟, 故系於馬韓之後.

건국은 신라가 첫째이고, 고구려가 그 다음이고, 백제가 가장 나중이다. 마한의 계통이 백제에 전해졌으므로 마한의 뒤에 잇는다.

◎ 初, 高溫祚建國於慰禮城, 號十濟, 以十臣爲輔, 故因爲國號. 求地於馬韓, 割東北界百里與之. 遣使馬韓告遷都, 別立國母禮氏廟.

처음에 고온조(高溫祚)가 위례성(慰禮城)에서 건국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열 신하로써 보좌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국호를 삼은 것이다. 마한(馬韓)에게 땅을 요구하자, 동북쪽의 경계 백여 리를 떼어주었다. 마한에 사자를 파견하여 천도(遷都)를 알리고, 특별히 국모(國母) 예씨(禮氏)의 사당을 세웠다.

○ 丙辰溫祚王十三年. 築南平壤城. 今北漢也. 王攻新羅腰車城拔之.

병진(丙辰)년 온조왕 33년. 남평양성(南平壤城)을 세웠으니 지금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왕은 신라의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甲辰古尒王五十年. 命賜孫順宅一區, 歲給禾五十石.

갑진(甲辰)년 고이왕(古尒王) 10년. 손순(孫順)에게 집 한 채와 매년 쌀 오십 석을 주도록 명령했다.

◎ 牟梁里人, 孫順家貧. 與其妻傭作以養偏母. 有小兒每奪食. 順謂其妻曰, 母不可久養, 夫婦俱存, 兒可再得. 歸于醉山, 掘地將埋, 忽有石鍾, 甚奇. 夫妻怪之, 試撞之, 聲亦異常. 妻曰, 是天與之, 而殆兒之福, 不可埋. 順然之. 妻負兒, 夫負鍾而還. 懸鍾於樑, 撞之聲, 聞數里. 王聞之, 卽令訪問, 詳審共實. 乃有是賜.

모량리(牟梁里) 사람 손순은 집이 가난했다. 그의 처와 함께 남의 집에서 일해 주면서 편모를 부양하였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있어서 매번 할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곤 하였다. 손순이 그의 처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오래 부양할 수 없는데, 우리 부부는 모두 살아 있으므로 아이를 다시 얻을 수 있소.” 그리고 취산(醉山)으로 가서 구덩이를 파고 장차 어린애를 묻으려고 하는데, 문득 구덩이 속에 석종(石鐘)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몹시 기이했다. 부부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시험삼아 종을 쳐보았다. 그러자 소리 또한 이상하였다. 처가 말했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오. 그리고 죽을 아이의 복이니, 어린애를 묻을 수가 없겠소.” 손순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처가 아이를 업고, 남편이 종을 지고 돌아와서, 대들보에 종을 매달아 놓고 쳐보았다. 그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리었다. 왕이 그 소리를 듣고, 찾아가서 연유를 묻도록 명령했다. 그 사실을 상세하게 알리자, 곧 왕이 손순에게 집과 곡식을 내린 것이다.

○ 戊午責稽王十二年. 王與貊兵戰, 敗沒. 世子汾西立.

무오(戊午)년 책계왕(責稽王) 12년. 왕은 맥(貊)의 군사와 싸우다가 패전하여 죽었다. 세자 분서(汾西)가 왕위에 올랐다.

○ 甲子汾西王六年. 樂浪太守, 遣刺客殺王. 國人立仇首王子比流爲王. 新羅人黃昌郞舞劒於市. 王召之, 命升堂舞劒. 因刺王.

갑자(甲子)년, 분서왕 6년.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자객을 보내어 왕을 살해했다. 나라사람들이 구수왕(仇首王)의 아들 비류(比流)를 왕으로 세웠다. 신라사람 황창랑(黃昌郞)이 저자에서 칼춤을 추자, 왕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 당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도록 하였는데 그 기회에 왕을 찔러 죽인 것이다.

○ 乙亥近肖古王二十八年. 王薨, 世子近仇首立.

을해(乙亥)년 근초고왕(近肖古王) 28년. 왕이 서거했다. 세자 근구수(近仇首)가 왕위에 올랐다.

◎ 先是, 高句麗來侵. 王遣近仇首拒之. 國人斯紀, 誤傷國馬蹄, 懼奔高句麗. 至是, 來告曰, 彼兵, 雖多. 若先破之, 其餘必自潰. 世子從之. 追擊大破之. 其地有廣巖罅, 若馬蹄者. 至今稱世子馬蹄也云.

이보다 앞서, 고구려가 침략하였는데, 왕은 근구수를 시켜 막도록 했다. 백성 중에 사기(斯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국마(國馬)의 발굽을 잘못하여 손상시키고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을 갔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찾아와서는 고하기를 “저쪽 병사들이 비록 많지만은 만약 먼저 격파한다면, 그 나머지는 반드시 스스로 궤멸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세자가 그의 말을 좆아서 적을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그곳 땅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말발굽 같은 틈이 있다. 지금도 그것을 세자의 말발굽 자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乙酉枕流王元年. 王薨. 立其弟辰斯爲王. 王勇敢聰睿, 多智略. 召募國民十五以上, 設關防.

을유(乙酉)년 침류왕(枕流王) 원년. 왕이 서거했다. 그 아우인 진사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 왕은 용감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나라의 백성 중 나이 15세 이상을 불러 모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했다.

○ 乙巳阿莘王三十三年. 王薨, 世子典支立. 初, 典支質倭未歸. 仲弟訓解攝國政, 以待世子. 季弟碟禮殺仲光, 自立. 倭以兵衛典支, 至國界, 留海島以察. 其國人大會, 討碟禮殺之. 迎世子立之.

을사(乙巳)년 아신왕(阿莘王) 13년. 왕이 서거하여 세자 전지(典支)를 왕으로 세웠다. 처음 전지는 왜(倭)에 인질로 가서 미처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아신왕의 중간 동생인 훈해(訓解)가 국정을 섭정하면서 세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신왕의 막내 동생인 설례(碟禮)가 중광(仲光)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왜는 전지를 군사들로 호위하여 백제로 보냈는데, 백제의 경계에 이르러 바다의 섬에 머물며 정세를 살폈다. 백성들이 크게 모여서 설례를 토벌하여 잡아 죽였다. 그리고 세자를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 丁卯久尒莘王七年. 王薨, 世子毗有立. 遣使新羅, 送良馬 ․ 白鷹而請和. 新羅以金珠報聘.

정묘(丁卯)년 구이신왕(久尒莘王) 7년. 왕이 서거하였다. 세자 비유(毗有)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양마(良馬)와 흰 수리를 보내면서 화해를 청했다. 신라도 금과 구슬로써 보답했다.

○ 乙卯盖鹵王二十年. 高句麗來圍王都. 王敗走, 被執縛送而殺之.

을묘(乙卯)년 개로왕(盖鹵王) 27년.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왕도를 포위했다. 왕은 패전하여 달아났으나, 붙잡혀서 포박되어 고구려로 보내졌다. 고구려에서 그를 죽였다.

◎ 初, 麗王使浮屠道琳, 僞得罪, 亡於百濟. 聞王好奕, 踵門告曰, 臣碁頗入妙. 王召與對局. 果善手. 遂信昵之, 一日, 從容言曰, 大王之國, 四面山河, 天設之險, 隣國莫敢覬覦, 王當以崇高之勢, 可以竦人之視聽, 而今城郭不葺, 宮室不修, 臣竊爲大王, 不畏也. 王曰諾. 盡其國力, 蒸土築城, 宮室樓臺, 極壯麗. 然倉穀竭乏, 民力殫窮. 於是, 見機逃之, 實告麗王, 王喜, 率兵三萬, 潛師來圍王都. 王以數十騎, 出城西走. 追及縛送於麗國, 殺之, 王子文周, 避亂南行, 乞兵新羅而比還, 麗兵已退. 遂卽位, 移都于熊津. 碁所以欺也, 碁術善則欺人之術善, 而敵手相對, 圖南意北, 不欺其術, 則勝負未決矣. 又況有國之君, 與敵國之人對局, 不知其欺術之包藏於中, 而聽信其言, 竟至滅身. 是自弑其君. 非見殺於敵國之君者也. 此所以後輟之所鑑者也歟.

처음 고구려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시켜 거짓으로 죄를 얻어서 백제로 망명하게 하였다. 도림은 백제의 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궁궐 문으로 가서 고하기를 “신은 바둑이 거의 입신의 경지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불러들여 함께 대국해 보니 과연 고수였다. 마침내 그를 믿고 가까이 하게 되었다. 하루는 도림이 조용히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의 산과 강물이 하늘이 설치한 험한 요새이오니, 이웃 나라가 감히 엿볼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드높은 형세를 지녔는데, 남이 보고 들음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성곽을 짓지 않고, 궁실도 수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대왕을 위하려고 하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 국력을 다하여 흙을 쌓고 성을 건축하고, 궁실과 누대를 지극히 장려하게 꾸미었다. 그러나 창고의 곡식은 모두 탕진되고, 백성들의 힘 또한 고갈되고 말았다. 이때에 도림은 기회를 엿보아 달아나서, 고구려왕에게 사실대로 알렸다. 고구려왕이 기뻐하며,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몰래 침입하여 왕도를 포위하도록 하였다. 왕은 불과 몇 십의 기병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추격대에 붙잡혀 결박되어 고구려로 보내졌다. 고구려에서 그를 죽였다. 왕자 문주(文周)는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가서, 신라에게 병사를 요청하여 거느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미 퇴각한 후였다. 마침내 문주는 왕위에 올라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바둑이란 속이는 것이다. 바둑 솜씨가 훌륭하면 남을 속이는 솜씨도 뛰어나다. 적수가 상대하면 남쪽을 도모하면서 뜻은 북쪽에 있으니, 그 솜씨를 속이지 않는다면 승부는 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물며 나라를 지닌 임금이 적국의 사람과 바둑을 두면서 그 가슴속에 숨겨놓은 속임수를 모르고서 그의 말을 듣고 믿어서, 마침내 몸을 망친 데까지 이르렀음이랴! 이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시해한 것이지, 적국의 임금에게 시해된 것이 아니다. 이는 뒷날의 사람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일이다.

○ 耽羅國來獻方物, 初有三人湧出. 是高乙那 ․ 夫乙那 ․ 梁乙那.

탐라국(耽羅國)에서 와서 방물(方物)를 바쳤다. 처음에 세 사람이 그곳에 솟아 나왔다. 그들은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 ․ 양을나(梁乙那)이다.

◎ 在南海中, 三人一日出獵, 得石函, 其中有三女, 率狗犢與穀種而來. 各娶一女, 養狗犢播五穀, 日就富庶.

탐라국은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다. 세 사람이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석함(石函)을 얻었다. 그 안에 세 여자가 있었다. 개와 송아지와 곡식 종자들을 가지고 왔는데, 각자 한 여자와 결혼하였다. 개와 송아지를 키우고 오곡을 파종하여 날이 갈수록 풍요해졌다.

◎ 嗚呼, 天而無日星, 地而無人物, 則天地, 只是虛殼而已. 天生萬民, 究其原始, 則皆如是也.

아아! 하늘에 해와 별이 없고, 땅에 사람과 생물이 없다면 천지는 다만 빈껍데기일 뿐이다. 하늘이 만민을 낳았는데, 그 시원을 찾자면 모두 이와 같을 뿐이다.

○ 丁巳文周王三年. 兵官左平解仇弑其君, 世子文周立, 討誅解仇.

정사(丁巳)년 문주왕(文周王) 2년.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海仇)가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 세자 문주가 왕위에 올라 해구를 토벌하여 죽였다.

◎ 初, 解仇畜無君之心, 王不能制. 至是, 伺王出獵, 使盜弑之. 世子時年十三, 解仇與燕信叛, 王命德率 ․ 眞 老師精兵五百討誅. 解仇 ․ 燕信奔高句麗, 卽收其妻子, 斬於市.

처음에 해구는 임금을 없앨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왕은 제압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사냥을 가는 것을 엿보아 도둑을 시켜 왕을 시해하도록 한 것이다. 세자는 이때 나이가 13살이었다. 해구는 연신(燕信)과 함께 모반을 하였다. 왕이 덕솔(德率)과 진로(眞老)에게 정병 5백 명을 이끌고 가서 해구와 연신을 토벌하여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즉시 그들 처자를 잡아다가 저자에서 참수했다.

◎ 王者出獵, 古昔聖王, 未嘗不有之矣. 然歲一定期而出. 率羣臣, 護衛一身, 獵之以正, 則曷嘗有變生於咫尺間乎. 矧惟國君一國之所共戴也. 是一身宜非一人之所有. 乃一國之所共有. 而置身於盜犯殺之地地也歟. 如斯而爲君, 孰不爲君, 解仇之罪, 天討之, 所不逃, 萬世筆鉞之所當誅. 不煩提舌.

왕이 사냥을 가는 것은 옛날 성왕(聖王)들 역시 없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한 해의 일정한 기간에 나갔으며,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한 몸을 호위토록 하여 올바르게 사냥을 하였다. 그러므로 어찌 지척간에서 변고가 생길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나라의 임금은 한 나라가 함께 받드는 바이다. 그래서 그 한 몸은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마땅히 한 나라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몸을 도둑이 침범하여 살해하는 장소에 둘 수 있는가? 이같이 한다면 임금 노릇을 누가 못하겠는가? 해구의 죄는 하늘이 죽일 것이니 도망갈 데가 없다. 만세의 붓의 도끼가 또한 마땅히 죽일 것이니 번거롭게 혀를 놀리지 않겠다.

○ 辛未東城王十二年. 王不恤民飢, 起臨流閣, 設園養禽. 諫臣抗䟽, 不聽. 閉宮門. 恐有復諫者也.

신미(辛未)년 동성왕(東城王) 12년. 왕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돌보지 않고,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동원을 조성하여 새들을 길렀다. 간신(諫臣)이 강력히 상소하였으나 듣지 않고 궁궐문까지 막아버렸다. 다시 간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서였다.

○ 甲戌聖王三十一年, 王率兵伐新羅, 軍主金武力, 追擊大破之. 裨將都刀, 刺王殺之.

갑술(甲戌)년 성왕(聖王) 31년. 왕은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쳤다.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비장(裨將) 도도(都刀)가 왕을 찔러 죽였다.

◎ 王親征新羅管山城, 君主武力領新州兵, 赴戰, 斬左平四人. 士卒死傷, 二萬九千六百人. 匹馬不得還.

왕은 몸소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정벌했다. 신라의 군주 김무력이 신주(新州)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싸웠다. 좌평 네 사람을 죽이고, 사졸들의 사상자가 이만 구천 구십 명이었다.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

◎ 嗚呼, 先王之政, 保民如赤子. 今濟國之君, 親率兵三萬, 近而陷於殺傷之地. 假使不殺其身而得管山一城. 善政之國, 猶不肯爲. 矧其殺身而殺之股肱之臣, 又死傷三萬兵, 而無全歸者乎. 可惜濟王, 苟以好兵之心, 豫備保民之策, 則竟不見恥於隣國矣. 今爲敵國之孤魂, 將以何面目對先王於地下乎.

아아! 선왕의 정치는 백성들을 적자처럼 보호했다. 지금 나라를 구할 임금이 몸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살상하는 곳으로 인도하여 함몰시킨 것이다. 가령, 그 자신을 죽이지 않고 관산성 한 개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선정(善政)하는 나라에서는 기꺼이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고굉지신(股肱之臣)을 죽이고, 3만의 병사를 사상시켜 온전히 돌아온 사람이 없음에랴? 참으로 애석한 백제왕이다. 만일, 전쟁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보호할 계책을 미리 세웠다면 끝내 이웃나라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적국에서 외로운 혼이 되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선왕을 대할 것인가?

○ 戊午威德王十四年. 王薨, 立次子季明爲王. 下令禁殺生, 放家養鷹鷂, 廢漁獵之具,

무오(戊午)년 위덕왕(威德王) 14년. 왕이 서거했다. 차자 계명(季明)을 왕으로 세웠다. 왕은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집에서 기르던 매들을 풀어주도록 하고, 물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모두 폐기하도록 하였다.

○ 壬辰三十二年武王-隋文帝時. 王襲新羅獨山城, 爲羅兵所敗.

임진(壬辰)년 무왕(武王) 32년 - 수(隋)나라 문제(文帝) 때이다 - 왕은 신라의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했는데, 신라병에게 패했다.

◎ 時, 新羅宮, 玉門池, 蝦蟆羣聚, 王謂左右曰, 蝦蟆怒目, 宜兵像也. 適西南山谷以玉門名者, 對曰, 意者, 有隣國兵至乎. 於是, 命將軍閼川, 往搜之, 果百濟甲騎, 至玉門池, 閼川掩擊盡殺之.

이때에 신라의 궁궐에 있는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와 두꺼비들이 무리 지어 모였다. 왕이 좌우에게 말했다. “개구리와 두꺼비의 노한 눈은 마땅히 병사의 모습이다.” 마침 서남쪽의 산골짜기에 옥문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 있었다. 이에 대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웃나라의 병사들이 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에 장군 알천(閼川)에게 명하여 가서 수색하도록 하였다. 알천이 가서 수색해 보니 과연 백제의 갑옷 입은 기병들이 옥문지에 와 있었다. 알천은 몰래 기습하여 모두를 죽였다.

○ 是歲遣子弟入唐游學. 羅麗二國從之. 王取新羅獼猴等四十餘城, 以絶朝唐之路.

이 해에 자제들을 당(唐)나라에 들여보내 유학을 시켰는데, 신라와 고구려 두 나라도 이것을 따르고 있었다. 왕은 신라의 미후성(獼猴城) 등 4십여 성을 취하여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끊어버렸다.

○ 辛丑武王四十一年. 王親攻新羅大耶城, 城將陷, 都督金品釋, 幢下舍知竹竹死.

신축(辛丑)년 무왕 41년. 왕은 몸소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 때,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의 당하사지(幢下舍知)인 죽죽(竹竹)이 죽었다.

◎ 品釋先殺妻子, 而自刎, 竹竹自誓曰, 吾父名我以竹竹者, 使我將有歲寒不凋之節, 遂力戰死. 君子之愛竹, 非竹也. 其節操也. 大冬寒威, 百木盡脫, 而與凡木同歸, 則非其節也歟. 且夫兵宜非君子之所尙. 然敵國犯我疆土. 奪我疆界, 坐視而失於宋襄, 則是非君子之所尙耳. 厥父命名, 欲以其子, 不改淸操. 惟如竹之一以不變也. 爲人之子, 厥父之所命名, 臨死不忘而銘佩不已, 孝哉竹竹, 可謂忠孝雙全於一身者也.

김품석은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죽죽(竹竹)은 스스로 맹서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죽죽으로써 나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나에게 장차 한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개를 지키게 하려 한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군자가 대나무를 사랑하는 것은 대나무 자체가 아니라 그 절조(節操)이다. 한 겨울의 추위가 위세를 떨칠 때 모든 나무들은 모두 낙엽이 진다. 보통나무들과 함께 돌아간다면 그것은 절조가 아닐 것이다. 대저 전쟁은 군자가 마땅히 숭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국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여 우리의 강역을 빼앗는데도, 앉아서 구경만 한다면 송양(宋襄)과 같은 처지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군자가 숭상하는 바가 아니다. 그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 자식이 맑은 절조를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오직 대나무처럼 한결같이 변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의 자식으로서 그 아버지가 이름 지어 준 바를 죽음에 임해서도 잊지 않고 명심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효성스럽도다. 죽죽이여! 참으로 충과 효를 한 몸에 겸하였다고 하겠다.

○ 王薨, 世子義慈立王幼有孝友之行, 國人稱海東曾子.

왕이 서거하여 세자 의자(義慈)가 왕위에 올랐다. 의자왕은 어려서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고 불렀다.

○乙巳四年. 義慈王發兵攻新羅, 茂山將軍丕寧子力戰敗死.

을사(乙巳)년 4년. 의자왕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의 무산(茂山)을 공격했다. 신라의 장군 비녕자(丕寧子)가 힘껏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 新羅金庾信拒之. 逆擊破之, 將軍丕寧子力竭殺數人而死. 其子擧眞曰, 父死子生, 非義, 赴敵力戰而死. 其奴合節曰, 兩主咸沒, 義不可獨生, 亦篤戰被殺. 於是一軍感奮, 齊進力戰, 大破羅兵, 庾信收餘兵復大捷. 嗚呼, 用兵之術有二, 有創始之策, 亦有守成之策, 而有國者之不可無者, 兵也, 守成之用兵, 外寇防備而已, 而動兵出外, 則邦本大撓耳, 百濟之有國, 傳數十世, 撓其邦本, 發兵動國, 非一二, 那可以保民愈久乎. 蓋凡國君, 動兵而出於疆域之外, 則率其民而入於殺生之域, 今國君以孝稱海東曾子, 而曾子亦有是事乎.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백제군을 막아서 격파하였다. 장군 비녕자는 힘을 다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고서 죽었다. 그러자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말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아들이 사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그리고 적진으로 달려가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종인 합절(合節)이 말하기를 “두 주인이 모두 죽었는데, 의리상 홀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고 하고는, 또한 힘껏 싸우다가 피살되었다. 이에 모든 군사가 감분(感奮)하여 일제히 진격하여 힘을 다하여 싸워서 백제군을 대파하였다. 김유신은 나머지 병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아! 용병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창시(創始)하는 계책이 있고, 또한 수성(守成)하는 계책이 있다. 나라를 지닌 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병(兵)이란 수성하는 용병이다. 외부의 침략을 방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군대를 동원하여 밖으로 나가면, 나라의 근본이 어지러워진다. 백제는 나라를 지니고 수십 세대에 전하였다. 그런데 그 나라의 근본을 어지럽게 하면서 군대와 온 나라를 동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 어찌 백성의 보전이 더욱 오래되기를 바라리오? 대개 나라의 임금이 군대를 동원하여 강역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 백성을 이끌고 살생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나라의 임금은 효로써 해동의 증자라고 불리는데, 그러나 증자에게 또한 이 같은 일이 있었던가?

○ 戊申義慈王七年. 殺諫臣成忠.

무신(戊申)년 의자왕 7년. 간신(諫臣) 성충(成忠)을 살해했다.

◎ 先是, 作望海亭, 率宮人, 淫荒無度, 佐平成忠直諫, 王怒囚之, 忠絶食臨死, 上䟽曰, 觀察時變, 必有兵革, 使敵兵, 陸不過炭峴, 水不犯白江, 據險守要, 以禦之, 竟死獄中. 嗚呼, 百濟之未濟也. 其亡也, 宜矣. 殺其諫臣, 誰與之輔匡, 若用成忠之言, 則唐與羅兵首尾相應, 那可得以從其要害而犯之乎. 且夫白狐來坐, 宮鬼大呼, 不察禍亡之幾, 而逸於荒淫, 城下見羞, 後悔何及,

이에 앞서 왕은 망해정(望海亭)을 짓고, 궁인(宮人)들을 데리고 음황무도(淫荒無度)하였다. 좌평(佐平) 성충이 이를 직간하자, 왕은 노하여 옥에다 가두었다. 성충은 음식을 끊고 죽음에 임하여 상소하기를 “시변(時變)을 관찰해 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적병으로 하여금 육지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물길로는 백강(白江)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험한 요새를 점거하여 지키며 막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아아! 모든 것을 구제한다는 이름의 백제(百濟)는 어느 것도 구제하지 못한 미제(未濟)이다. 그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하다. 그 간신(諫臣)을 죽였으니, 누가 더불어 정치를 보필하여 바로 잡을 것인가? 만약, 성충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들이 앞뒤로 상응하며 어떻게 그 요해처를 따라 침범할 수 있었으리오? 게다가 흰 여우가 와서 앉고, 궁궐의 귀신이 크게 외쳤는데, 그 화가 미칠 기미를 살피지 못하고 황음에 빠졌으니, 성 아래에서 치욕을 당한 것을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다.

○ 庚申義慈王十九年. 白狐來坐佐平書案上, 鬼出宮中, 大呼百濟亡, 直入地中.

경신(庚申)년 의자왕(義慈王) 19년. 흰 여우가 좌평의 서안 위에 와서 앉았다. 귀신이 궁중에 나와서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서 곧장 땅 속으로 들어갔다.

◎ 是年, 王都井水如血, 泗沘河盡赤, 又黑烏樹萬, 翔集樹上, 王乃使人卽從入鬼而掘之, 只有一龜, 背上有文,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筮者解曰, 同月輪, 滿也. 如月新, 未滿也. 未滿者, 將盈之像也. 王殺之. 自是, 不敢言災異.

이 해에 왕도의 우물물이 핏빛이었고, 사비(泗沘)의 하천들이 모두 붉었다. 또한 검은 까마귀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날아와 모였다. 왕은 곧 사람을 시켜 귀신이 들어간 장소를 좇아서, 그곳을 파게 하였다. 그곳에는 다만 한 마리 거북이 있었는데, 그 등에 글자가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이었다. 점쟁이가 그 글을 해석하기를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이다. 초생달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가득 차지 않은 것은 장차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왕은 그를 죽여 버렸다. 이로부터 재이(災異)에 관하여 누구도 감히 말하지 않았다.

◎ 嗚呼, 國之將興, 天降祥, 國之將亡, 天降災異, 而祥與災, 不辨, 流逸忘返, 俯仰不畏, 竟覆先王三十世之宗廟, 永絶扶餘氏七百春之社稷, 竊恐一身自作百濟之罪人, 而不可逃也.

아아! 나라가 장차 흥하려 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면 하늘이 재이를 내리는데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안락에 빠져 반성할 줄 모르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선왕들의 30세대의 종묘를 엎어버리고, 부여씨의 7백년 세월의 사직을 영원히 끊어버렸다. 생각건대 그 한 몸이 스스로 백제의 죄인이 되었음을 피할 수가 없다.

○ 新羅與唐兵, 相通, 圍王城拔之, 王與太子, 率左右, 詣唐陳而降.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서로 서로 밀통하여 왕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과 태자는 좌우를 거느리고 당나라 진영에 와서 항복하였다.

◎ 唐將蘇定方與羅兵, 合攻, 濟將興首曰, 宜選勇士, 固守要害, 使唐兵不得犯白江, 羅兵不得據炭峴, 待其兵疲糧盡, 而逆擊, 則兩可破矣. 左右曰, 興首有怨國之心, 其謀不可用. 王竟不聽, 使將軍階伯鎭兵拒之, 階伯曰, 以一國當兩國, 首尾不相應, 其亡可待, 先殺妻子, 力戰之死, 唐羅兵圍王城, 拔之, 諸宮嬉走大王浦巖石上, 墮水而死, 後人謂之落花巖. 定方率君臣八十八人, 國民一萬二千八百餘人, 還國. 帝曰, 何不倂羅圖之. 對曰, 君臣輯睦, 不可輕視. 唐以百濟爲五都督府. 百濟起溫祚王癸卯, 止義慈王庚申. 凡三十世, 歷年六百七十八年.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병사들이 연합하여 공격해 왔다. 백제의 장군 흥수(興首)가 말했다. “마땅히 용사들을 선발하여 요해처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당나라 군대로 하여금 백강(白江)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炭峴)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 군사가 피로해지고 군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려서 역습하여 친다면 양쪽을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좌우에서 말했다. “흥수는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의 계책을 써서는 안 됩니다.” 왕은 마침내 흥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장군 계백(階伯)에게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게 하였다.

계백이 말했다. “한 나라로 두 나라를 당해냄은 앞뒤가 서로 호응하지 못하니, 그 망함을 기다리는 꼴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처자를 죽이고,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들은 왕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여러 궁녀들은 대왕포(大王浦)로 달아나서, 큰 바위 위에서 강으로 떨어져 자살하였다. 뒷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낙화암(落花巖)이라고 불렀다. 소정방은 백제의 군신(君臣)들 88명, 백제의 백성들 1만 2천 8백여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황제가 물었다. “어찌 신라를 병탄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답하기를 “신라는 군신들이 화목하여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오도독부(五都督府)로 삼았다. 백제는 온조왕 계묘년에 일어나서 의자왕 경신년에 끝났다. 무릇 30세대이며 지나온 해가 678년간이었다.

◎ 惜乎! 百濟之亡也, 以若義慈王之無知, 保其率土之民, 則孰不保民? 如是而不亡, 則通今古, 未或有亡國之主矣. 不聽成忠之言, 而致其獄死, 不用興首之謀, 而等閒要害之不守, 祇是荒淫, 不顧社稷之安危. 是固有國者之心乎. 白狐與黑烏, 毛類羽類之最凶惡之物也. 奸莫如狐. 而坐於書案. 是新羅陰謀之兆, 凶莫如烏, 而翔集京都, 是唐兵襲攻之兆也, 又井血河赤, 是兵刃血流之幾也. 矧又鬼出宮中, 大呼百濟之亡, 而竟不悟, 以誣天機之動變, 可勝歎惜乎哉. 閣起於臨流而荒淫, 宜天眷如落花流水而杳邈, 亭創於望海而流逸, 唐兵如海蒼之滔滔而水陳, 濟王不臨其流, 臨於何而閣起, 不望其海, 望於何而亭創歟. 亭與閣只是荒淫之具, 非宜保國安民之具也. 如是而保國, 則蒼生依於何而仰賴乎. 有國者之所鑑戒者也.

애석하다! 백제의 망함이여! 만약, 의자왕의 무지로써 그 영토의 백성들을 보전한다면, 누가 백성들을 보전하지 못할 것인가? 이와 같은 데도 망하지 않는다면, 고금을 통틀어 나라를 망친 임금이 아직껏 없었을 것이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어 죽게 하였고, 흥수의 계책을 쓰지 않고 등한하게 요해처를 지키지 않았다. 다만, 황음에 빠져서 사직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참으로 나라를 지닌 사람의 마음이었던가? 흰 여우와 검은 까마귀는 새와 짐승 가운데 가장 흉악한 것들이다. 간악하기로는 여우만한 것이 없는데, 책상 위에 올라앉은 것은 신라의 음모에 대한 조짐이었고, 흉악하기로는 까마귀만한 것이 없는데, 경도(京都)에 날아와 모인 것은 당나라 군대가 습격할 조짐이었다. 또한, 우물들이 핏빛이고 하천이 붉어진 것은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기미였다. 하물며 또한 “궁궐 안에 귀신이 나와서 백제가 망할 것이다.” 라고 크게 소리를 쳤음에랴? 그러나 끝내 깨닫지 못하고 천기(天機)의 변화를 무시하였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누각을 물 흐르는 곳에 세워서 황음에 빠졌으니, 마땅히 하늘의 보살핌이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멀어져 버렸다. 정자를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세워서 즐겼는데, 당나라 군대는 마치 푸른 바닷물이 넘실대듯 수진(水陣)을 쳤다. 백제의 왕은 그 물가에 임하지 못하고 어느 곳에 임하여 누각을 세웠으며, 그 바다를 바라보지 못하고 어느 곳에다 정자를 세웠던가? 정자와 누각은 다만 황음하는 도구일 뿐이다. 마땅히 보국안민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 같은 일을 하면서 나라를 보존한다면 백성들은 어디를 우러러 의지해야 할 것인가? 나라를 지닌 자가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바이다.

三國同時有國, 而三國之統, 一於新羅. 故系三國之後, 高麗之上.

삼국은 동시에 나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신라에게 삼국이 통일되었으므로, 삼국의 뒤, 그리고 고려의 앞에 있는다.

○ 甲申無恤王五年. 攻扶餘. 扶餘王, 出戰敗死.

갑신(甲申)년 무휼왕(無恤王) 5년. 부여를 공격하였다. 부여왕은 출전하였다가 패하여 전사했다.

◎ 麗王率兵, 路遇一人, 身長九尺, 目光射人. 請從軍, 問其名. 對曰, 臣是北溟人, 名怪由. 及出戰, 怪由斬扶餘王頭. 扶餘兵, 猶力戰, 圍麗兵數重. 忽大霧遍地. 麗王從間道出, 還國. 封怪由食邑千戶.

고구려왕이 병사를 이끌고 갈 때 길에서 어떤 한사람을 만난다. 신장이 9척이고 안광이 사람을 쏘았다. 그는 함께 종군하기를 요청했다. 이름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신은 북명(北溟) 사람인데, 이름은 괴유(怪由)입니다.” 라고 했다. 나가 싸우게 되었을 때 괴유가 부여왕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부여의 군사들은 힘껏 싸워 고구려 군대를 여려 겹으로 포위하였다. 그 때 갑자기 짙은 안개가 땅을 둘렀다. 고구려왕은 샛길로 빠져나와 고구려로 돌아왔다. 괴유를 식읍(食邑) 3천 호에 봉하였다.

○ 戊子無恤王九年. 東漢太守侵攻, 不克而還.

무자(戊子)년 무휼왕 9년. 동한태수(東漢太守)가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麗王會羣臣, 問戰守. 左輔乙豆智曰, 今漢兵遠鬪, 兵力不可當, 大王固守, 而待其糧乏. 逆擊之, 可也. 王從之. 固守不出, 漢將謂, 城內有水, 不可猝拔. 將還, 王追擊破之.

고구려왕은 여러 군신들을 모아 놓고 나가서 싸울 것인가 혹은 성을 지킬 것인가를 물었다.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智)가 아뢰었다. “지금 한나라 병사는 멀리 싸우러 왔으므로 그 병력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굳게 성을 지키면서, 그들의 군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려서 역습으로 친다면 옳을 것입니다.” 왕은 그의 말을 따라서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한나라 장수가 말했다 “성 안에 식수가 있으므로, 금방 함락시킬 수가 없다.” 그리고 장차 돌아가려 할 때, 왕은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 壬辰無恤王十三年. 襲樂浪國, 降之.

임진(壬辰)년 무휼왕 13년. 낙랑국(樂浪國)을 습격하여 항복시켰다.

◎ 先是, 好童游於沃沮, 樂浪主見而奇之. 遂同歸. 以女妻之. 國有鼓角, 敵兵入境, 則自鳴矣. 好童將還. 潛謂之曰, 若能入武庫, 割鼓面角口, 則以禮迎之. 女如其言, 報于好童. 好童還國, 勸于王, 襲樂浪. 果兵至入城, 鼓角不報. 樂浪始鼓角不鳴. 知其所割, 殺其女 而出降.

이에 앞서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놀고 있는데, 낙랑의 성주가 보고서 기특하게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 데리고 돌아와서 자신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나라에는 북과 피리가 있었는데, 적병이 경내로 들어오면 스스로 울렸다. 호동은 장차 돌아가려 하면서 몰래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에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의 가죽과 피리의 구멍을 부수어 버린다면 예의를 갖추어 그대를 맞이하겠소.” 여자는 그의 말대로 하고서는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오자 왕에게 낙랑을 습격할 것을 권유하였다. 과연 병사들이 성으로 쳐들어갔으나 북과 피리는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 낙랑에서는 처음엔 북과 피리가 소리내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가, 비로소 그것들이 파손되어 있음을 알았다. 낙랑태수는 그의 딸을 죽인 다음 성을 나와서 항복하였다.

◎ 異哉! 外敵入境. 鼓角自鳴, 神奇莫是若. 而割角口之女, 是內敵也. 內敵入武庫之門. 不自鳴而黙過. 見其割口而不報, 何也? 黙然被割, 坐待國亡. 又見女殺. 而變怪疊出. 是誰之咎? 入庫時, 被割猶未之前, 自鳴而報, 則必無是患矣, 女固被殺. 好童之故, 魔及好童, 好童之自就伏劒, 理固知是也夫.

기이하구나! 외적이 경내로 쳐들어오면 북과 피리가 스스로 울린다니, 신기함이 이것 같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과 피리를 파손한 여자는 바로 내부의 적이다. 내부의 적이 무기고의 문으로 들어오는데도 스스로 소리 내지 않고 묵과하여 손상을 당한 채,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리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묵묵히 손상을 당한 것은 앉아서 나라의 망함을 기다린 것이다. 또한 여자가 죽임을 당하고 변괴가 첩첩이 일어난 것은 누구의 죄인가? 무기고로 들어왔을 때 파괴당하기 전에 스스로 울려서 알렸더라면 틀림없이 이런 환란이 없었을 것이다. 그 여자는 피살된 것은 호동 때문이었다. 마(魔)가 호동에게 미치어, 호동은 스스로 칼날에 엎어져 죽었다.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 無恤王妃讒好童, 王子好童伏劒死.

무휼왕비(無恤王妃)가 호동(好童)을 참소하였다. 왕자 호동은 칼에 엎어져 자결했다.

◎ 好童後宮所生, 美而智略過人, 王愛之. 元妃恐奪嫡. 讒好童無禮於妾. 王疑之. 或勸自明之. 好童曰, 我若自明. 是顯母之惡, 貽父之憂. 伏劒而死,

호동은 후궁의 소생이다. 아름답고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왕이 그를 사랑하였다. 원비(元妃)가 적통(嫡統)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호동이 자신에게 무례를 저질렀다고 참소하였다. 왕은 호동을 의심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스스로 그것을 밝힐 것을 권유했다. 호동이 말했다. “내가 만약에 스스로 밝힌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악행을 드러내는 것이며, 아버지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다.” 그리고는 칼날에 엎어져 죽었다.

◎ 聽一國之政, 而不辨宮中之讒, 則那可以親賢遠奸乎?

한 나라의 정사를 들으면서 궁중의 참소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현인을 가까이 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 할 수 있겠는가?

○ 癸丑解邑朱王五年. 王淫虐無度. 權臣仁魯弑之, 立琉璃王孫宮爲王. 及卽位, 年七歲. 太后同聽政.

계축(癸丑)년 해읍주왕(海邑朱王) 5년. 왕은 음학무도(淫虐無度)하였다. 권신(權臣) 인노(仁魯)가 왕을 시해하고, 유리왕(琉璃王)의 후손 궁(宮)을 왕으로 세웠다. 왕은 즉위했을 때 나이가 7세였다. 태후가 함께 청정(聽政)을 하였다.

○ 庚辰宮王二十七年. 王以其第遂成, 統軍國事. 時穢貊, 附爲屬國. 合兵力, 襲漢玄菟, 陷華麗城.

경진(庚辰)년 궁왕 27년. 왕은 그의 아우 수성(遂成)에게 군대와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때 예맥(穢貊)이 귀부하여 속국이 되었다. 병력을 합쳐서 한(漢)나라 현도(玄菟)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를 함락했다.

○ 甲戌宮王八十一年. 右輔高福章, 累言遂成擅權. 王曰, 吾老矣. 將禪位于吾弟. 竟不聽.

갑술(甲戌)년 궁왕 81년.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이 수성이 권력을 천단하는 사실을 여러번 아뢰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늙었소. 장차 나의 아우에게 왕위를 선양할 작정이오.” 그리고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 丙戌宮王九十三年. 王禪位于其弟遂成爲王. 新王遂首殺高福章. 又殺太王元子藻.

병술(丙戌)년 궁왕 93년. 왕은 그의 아우 수성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신왕은 맨 먼저 고복장을 죽였다. 또 태왕(太王)의 원자(元子)인 조(藻)를 죽였다.

◎ 福章歎曰, 見幾不言, 不忠也. 與其生於無道之國, 寧不若死而潔身. 嗚呼, 遂成王之不仁也, 以一國之疆土, 充滿私慾, 則極其肥己之私矣. 又何私心增新, 殺福章, 而食人充腹耶? 福章之殺, 宜天討之, 不可逃. 又況絶其天倫, 而獲罪於天地綱常之中乎. 罪不容於千秋, 而無所禱者也.

고복장은 탄식하여 말했다. “일의 기미를 보고도 아뢰지 않은 것은 불충이다. 이 무도한 나라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낫다.” 아아! 수성왕의 인자하지 못함이여! 한 나라의 강토로써 사욕을 가득 채웠으니,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채운 것이다. 그런데 또 무슨 사심이 새롭게 생겨났는가? 고복장을 죽여, 어찌 사람고기를 먹고 배를 채웠는가? 마땅히 하늘이 죽일 것이니, 도망갈 데가 없다. 또, 하물며 그 천륜을 끊은 것은 천지의 강상(綱常) 안에 죄를 지은 것이다. 그 죄는 천추에 용납되지 않을 것이니, 용서를 빌 곳이 없다.

○ 乙巳遂成主十九年. 明臨答夫弑其主, 與羣臣, 迎王弟伯固爲王.

을사(乙巳)년 수성왕 19년. 명림답부(明臨答夫)가 그의 왕을 시해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의 아우 백고(伯固)를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 遂成性猜忌, 不保宗室. 伯固慮其禍及. 遯于山谷. 至是, 明臨答夫弑其主, 與羣臣, 迎伯固爲王. 國人大悅, 前王子鄒安. 逃亂在外. 王卽召, 封爲讓國君. 嗚呼! 明臨答夫, 雖不容於弑君之名. 然遂城之罪, 宗室之所不用, 一國之所不容者也. 王法當誅, 而王法未及. 答夫, 先於王法而討之. 答夫可謂正討者也. 苟以朱蒙之弓矢, 遺傳於宗廟, 則朱蒙之靈, 賜其弓矢, 直射遂成之心, 而快示於一國之人, 無疑矣. 可惜! 答夫, 與羣臣, 未嘗久廢其位. 數其罪而放出於外宮, 斬之則是正討也. 非其弑也.

수성은 성품이 시기심이 많아서 종실을 보호하지 않았다. 백고는 그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이때에 이르러, 명림답부가 그의 왕을 시해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백고를 맞이하여 왕으로 삼은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몹시 기뻐하였다. 전왕자인 추안(鄒安)은 난을 피하여 외국에 있었는데, 왕이 즉시 불러서 양국군(讓國君)으로 삼았다. 아아! 명림답부는 비록 임금을 시해했다는 이름을 용서받을 수는 없지만, 수성의 죄는 종실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고, 한 나라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왕법으로 당연히 죽였어야 하는데 왕법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답부는 왕법 보다 먼저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당한 토벌이었다고 할만하다. 진실로 주몽의 활과 화살이 종묘에 남겨져서 전한다면, 주몽의 영령이 그 활과 화살을 내려서 곧장 수성의 마음을 쏘아 통쾌하게 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것임을 의심할 바 없다. 가석하구나! 답부여! 여러 신하들과 함께 그 보위를 오랫동안 폐하지 않았구나. 그 죄를 추궁하여 외궁(外宮)으로 쫓아내어 죽인 것은 정당한 토벌이었고, 시해가 아니었다.

○ 己未伯固王十四年. 王薨, 立次子爲王, 名男武. 卽位之初, 立賑貸法, 令曰, 官非德進, 任以寵授故毒流百姓, 皆予之過, 左右各擧野賢, 以輔不逮, 以答夫爲相國.

을미(乙未)년 백고왕(伯固王) 14년. 왕이 서거하여 그 차자를 왕으로 세웠다. 이름은 남무(男武)이다. 즉위한 처음에 진대법(賑貸法)을 세우고, 명하기를 “관직을 덕으로써 주지 못하고, 멋대로 총애로써 주게 되니,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침은 모두 나의 허물이다. 여러분은 각각 재야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토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답부를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 凡一國之政, 聽命於朝廷, 而朝廷, 乃一國之朝廷, 非一人之朝廷. 賢人立朝, 則政出於善, 小人立朝, 則政出於亂, 立可待矣. 卽位之初. 政令出於善, 未嘗有輔匡, 而一國可以善治爾. 然一國之政, 不可以自私, 而與國共之. 故令擧野賢. 欲以爲輔, 賢乎哉! 南武王之爲也君.

무릇 한 나라의 정치는 조정에서 명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은 곧 한 나라의 조정이고, 한 사람의 조정이 아니다. 어진 사람이 조정에 서면 정치는 착함에서 나오고, 소인이 조정에 서면 정치는 어지러움에서 나옴을 즉시 알 수 있다. 지금 재야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보좌로 삼으려고 하니, 어질도다! 남무왕의 하는 일이 곧 임금답도다!

○ 漢玄菟太守耿臨, 數侵邊境. 國相答夫, 率兵逆擊. 大破之.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여러번 변경을 침략하였다. 국상 답보가 병사를 이끌고 맞아 싸워서 대파하였다.

◎ 今漢國率中華之大塊, 普天之下, 莫若是大矣. 昔堯舜之治, 猶有病博施. 矧惟政不如堯舜, 而益廣厥土. 至於海徧邦, 欲爲已有, 那可得乎? 余嘗聞地方百里, 可以王. 地方大小, 不關於善政與否爾.

지금 한(漢)나라는 중화의 큰 대륙을 차지하고, 넓은 하늘 아래에 있으니 이보다 큰 것은 없다. 옛날 요순의 다스림은 오히려 널리 베풀지 못함을 근심하였다. 하물며 정치는 요순보다 못하면서, 그 영토만 더욱 넓히고자 한다. 해외의 구석진 나라에까지 이르러서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나,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나는 일찍이 사방 백 리의 땅이면 왕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땅의 크고 작음은 선정(善政)의 여부와 관련이 없는 것이다.

○ 丁丑男武王十八年. 王薨, 王后矯遺命, 立弟延優爲王.

정축(丁丑)년 남무왕 18년. 왕이 서거했다. 왕후는 거짓 유명(遺命)으로 왕의 아우 연우(延優)를 왕으로 삼았다.

◎ 王后潛見王弟發岐曰, 王無嗣, 歷數在公. 發岐曰, 夜行非禮. 后訪延優, 延優迎之, 相飮酒. 后乃矯遺命. 立延優. 發岐怒, 將欲聲討. 恐或未濟. 奔于遼東. 請師於太守公孫度, 討之. 乃不克而自殺. 延優以前王妃于氏爲后.

왕후는 몰래 왕의 아우 발기(發岐)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왕께서 후사가 없는데 그 천운이 공에게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발기가 대답했다. “밤에 다니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왕후는 이번엔 왕의 아우 연우(延優)를 찾아갔다. 연우는 왕후를 맞이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왕후는 곧 왕의 유명을 고쳐서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발기는 노하여 장차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하여 요동으로 달아났다. 그곳 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군사를 빌려 토벌하려 왔으나 이루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연우는 전 왕후 우씨(于氏)를 왕비로 삼았다.

◎ 國風大變, 有如是乎, 以母后爲妃, 天理之大變常耳. 國政不必更論.

국가의 풍속이 크게 변하여 이 같은 일이 있는가? 모후(母后)를 왕비로 삼은 것은 천지의 법도가 크게 변한 것이다. 나라의 정치는 다시 논할 필요가 없다.

○ 己丑延優王十一年. 立子郊彘爲太子.

기축(己丑)년 연우왕 11년. 아들 교체(郊彘)를 태자로 삼았다.

◎ 先是, 郊豕逸, 追王, 至酒桶村. 有女年二十餘許. 容貌美而艶. 遇豕執之. 王異之. 微行而通其女. 于后欲殺之. 女男服而逃之. 兵追及之. 女曰, 今妾有脤. 若殺之, 其於王子, 何? 兵不敢害. 王復幸之. 問有娠. 是誰之子. 對曰, 平生不與兄弟同席. 安敢以近異姓男乎? 乃生男. 因郊豕而得. 命名曰郊彘;. 立爲太子.

이에 앞서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그것을 쫓아갔던 왕은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다. 어떤 여자가 나이는 2십여 세가량 되었는데 아름답고 요염했다. 그 여자가 우연히 돼지를 붙잡았다. 왕은 이상하게 여기고, 밤에 미행하여 그 여자와 상통하였다. 우후(于后)가 그것을 알고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하였다. 여자는 남자 복장을 하고 달아났다. 군사들이 추적하여 이르니, 그 여자가 말했다. “지금 나는 임신 중이다. 만약 나를 죽이면, 그것은 왕의 자식을 죽이는 것이다. 어쩔 것인가?” 병사들은 감히 그녀를 해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그녀를 가까이 했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물으면서, 이는 누구의 자식이냐고 물었다.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평생 동안 형제들과도 함께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이성의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했다. 이윽고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제사에 쓸 돼지 때문에 얻었으므로 이름을 교체라고 지었다. 그를 태자로 세웠다.

○ 甲子憂位居王十七年. 魏幽州刺史母丘儉, 功陷高句麗丸都. 王分軍急擊大破魏軍.

갑자(甲子)년 우위거왕(憂位居王) 17년.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母丘儉)이 침공하여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군사를 나누어 급히 공격하여 위나라 군을 대파하였다.

◎ 魏兵大至. 王將步騎二萬, 逆戰於費流水上. 再戰於梁貊谷. 大破之, 斬獲, 六千餘級. 王狃勝馳備. 魏兵方陣死戰. 麗軍大潰, 死傷一萬餘人. 王奔鴨綠原, 丘追甚迫, 勢不可脫. 東部密友, 獨力戰禦之. 王問道得脫. 東部紐由, 入魏陣, 詐降. 魏將賜坐甚款, 紐由取食器中藏刀, 刺之, 與俱死. 魏軍失伍, 王分軍急擊之. 魏軍大敗而還.

위나라 군대가 크게 몰려오자, 왕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에서 맞아 싸웠다. 그리고 양맥곡(梁貊谷)에서 재차 싸워서 위군을 대파하였다. 참획(斬獲)한 것이 6천여 급(級)이었다. 왕은 승리를 탐하여 적진으로 돌진했다. 위나라 군대는 방진(方陳)을 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고구려 군대가 크게 궤멸하여 사상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왕은 압록원(鴨綠原)으로 달아났다. 모구검의 추적이 몹시 다급하여 형세가 벗어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 동부(東部) 출신 밀우(密友)가 홀로 힘써 싸워서 모구검을 막았다. 왕은 길을 물어 탈출하였다. 동부 출신 유유(紐由)는 위나라 군진으로 들어가 거짓항복을 했다. 위나라 장수는 자리를 내려주며 몹시 관대하게 대했다. 유유는 식기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취하여 그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함께 죽었다. 위군이 대오를 잃자, 왕은 군사를 나누어 급히 그들을 쳤다. 위군은 대패하고 돌아갔다.

◎ 嗚呼, 先王之政, 善保民而治國, 謂之善政, 今戰國之策, 善用兵而益廣厥土. 謂之善策, 難矣哉. 兵死地也. 兵籍於民生之中, 而率土之民, 同是天民也. 雖有國界, 敵國之民, 非其天生之民乎. 皆兵法, 率兵而食土, 善射而食民者也. 以民食民, 民相食而有國, 則邦本何在. 魏率數萬大兵, 陷丸都. 兩國殺傷, 四萬餘. 竟以獨將渡江, 只以殺傷之策, 那可以保民乎.

아아! 선왕의 정치는 백성들을 잘 보호하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이것을 선정이라고 한다. 지금 전쟁하는 나라의 계책은 용병을 잘하여 그 영토를 더욱 넓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선책(善策)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전쟁이란 사지(死地)이다. 민생(民生) 가운데 병적(兵籍)이 있지만, 천하의 백성은 모두 함께 하늘의 백성들이다. 비록 나라의 경계가 있지만, 적국의 백성들도 하늘이 낸 백성들이 아니던가? 대개 병법은 군사를 이끌고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활을 잘 쏘아서 백성을 먹이는 것이다. 백성들을 백성들에게 먹이는 꼴이니, 백성들이 서로를 먹으면서도 나라가 있다면, 나라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위나라는 수만의 대병을 이끌고 와서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두 나라의 사상자는 4만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끝내 홀로 남은 장수만이 강을 건너 돌아갔다. 다만, 살상하는 계책으로써 어떻게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 戊辰憂位居王二十一年. 王薨. 太子然弗立. 大行之喪. 國人哀痛, 及葬至墓, 自死者, 甚衆.

임진(壬辰)년 우위거왕 21년. 왕이 서거하여 태자 연불(然弗)이 왕위에 올랐다. 큰 행렬의 국상에 나라 사람들은 애통해 하였다. 장례를 하려고 묘지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매우 많았다.

○ 壬子藥盧王二十二年. 王薨. 太子相夫立. 殺其叔父安國君達買.

임자(壬子)년 약로왕(藥盧王) 21년. 왕이 서거하여 태자 상부(相夫)가 왕위에 올랐다. 곧 그의 숙부 안국군(安國君) 달매(達買)를 죽었다.

◎ 先是, 達買有功, 國人倚重. 王忌而殺之. 國人悲悼. 摹其肖像而閣之. 歲一常祀. 嗚呼, 功過則猜之. 位高則危之. 凡猜危之地, 苟非名哲, 難保其身矣. 然以其猶子而殺其叔父. 以其子而弑其父. 天倫之大變耳. 天倫之親, 毫無間然. 而猜危之變, 出於親親之無間之地, 則此名哲之所難免也.

이에 앞서 달매는 매우 공이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몹시 의지했다. 왕은 시기하여 그를 죽인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애도하며 그의 초상을 그려서 전각에 모셔놓고 일년에 한차례 항상 제사를 올렸다. 아아! 공이 지나치면 이를 시기하게 된다. 지위가 높으면 그것을 위태롭게 여긴다. 무릇 시기를 받고 위험하게 여기는 처지는, 진실로 명철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몸을 보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조카이면서 그 숙부를 살해하고, 자식이면서 그 아버지를 시해하는 것은 천륜의 큰 변괴일 뿐이다. 천륜의 친함은 터럭만한 간격도 없다. 그런데 시기와 위험의 변괴가 너무나 가까워 틈이 없는 곳에서 나온다면, 이것은 명철한 사람이라도 면하기가 어렵다.

○ 燕慕容嵬, 侵伐. 王避往新城. 燕兵追至. 北部小兒高奴子, 以五百騎擊嵬逐之.

연(燕)나라 모용외(慕容嵬)가 침략하였다. 왕은 신성(新城)으로 피했다. 연나라 군사가 추적해 오자 북부 출신 젊은이인 고노자(高奴子)가 5백기를 거느리고 모용외를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 燕兵, 欲發西川王塚, 役夫暴死, 壙內有樂韻出外. 恐有神明, 不掘卽退.

연나라 군사는 서천왕(西川王)의 무덤을 발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묘를 파던 역부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무덤의 구덩이 속에서 어떤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신명(神明)이 있음을 두려워하여 발굴하지 못하고 곧 물러났다.

◎ 甚矣, 慕容嵬之發兵. 爲其掘塚而發兵也歟. 軍卒之侵掠民間, 强奪財帛. 是軍法之當所禁. 矧其發塚而取其財帛乎. 壙中神明, 畏而不掘, 在天神鑑. 未嘗所畏, 而動兵出外, 殺傷甚衆, 可慨也耳.

심하구나! 모용외의 군사동원은 무덤을 파기 위하여 군사를 동원했던 것인가? 군졸들이 민간을 침략하고, 재물을 강탈함은 군법으로 마땅히 금해야 한다. 하물며 무덤을 파서 그 재물을 취할 수가 있겠는가? 무덤의 구덩이 속의 신명이 두려워서 파지 못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항상 두려워 해야 한다. 그런데도 병사들을 외국으로 출동시켜 사상자가 몹시 많았으니, 개탄할 뿐이다.

○ 戊午元王八年. 發兵侵遼西, 隋帝命漢王諒等, 將水陸三十萬兵, 來伐臨渝關. 値潦斷餉, 水軍亦遭風漂沒. 死傷過半. 麗王謝罪, 隋掇兵還.

무오(戊午)년 원왕 8년.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요서(遼西)를 침공하였다. 수나라 황제가 한왕(漢王) 양등(諒等)에게 명하여 수군과 육군 3십만을 이끌고 가서 임유관(臨渝關)을 치게 하였다. 그런데 장마를 만나서 군량의 공급이 끊어지고, 수군 또한 풍랑을 만나 빠져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고구려왕이 사죄하자 수나라는 병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 癸酉元王二十三年. 隋復伐高句麗. 元王四月, 渡遼東, 命諸將, 聽以便宜從事. 隋兵四進. 麗應變拒之. 相持數旬. 主客死者, 甚衆. 麗亦困幣. 自懼乞降. 會, 楊玄感, 反隋引兵還.

계유(癸酉)년 원왕 23년.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쳤다. 원왕 4월, 수나라 군대가 요동을 건너 몰려오니, 왕은 여러 장군들에게 편의대로 종사하라고 명했다. 수군은 사방에서 몰려왔다. 고구려는 사태의 변화에 맞추어 저항을 했다. 서로 대치한 지 여러 날이 지나자, 주객 모두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고구려 역시 피폐해져서 스스로 두려워 항복을 구하려고 하였다. 때마침 양현감(楊玄感)이 수나라를 배신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 辛丑建武王二十四年. 唐職方卽中陣大德, 奉使來. 歷觀殆遍, 悉得山川之險夷.

신축(辛丑)년 건무왕(建武王) 24년. 당(唐)나라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이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의 여러 지역을 두루 구경하고,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까지 다 살펴보았다.

○ 壬寅臧王元年. 泉蓋蘇文, 弑其君, 建武立王姪臧爲王.

임인(壬寅)년 장왕(臧王) 원년. 천개소문(泉蓋蘇文)이 그의 임금 건무를 시해하고 왕의 조카 장(臧)을 왕으로 삼았다.

◎ 蓋蘇文, 性, 鷙悍凶殘, 王密議欲誅, 事泄, 蓋蘇文集部兵, 入宮弑王.

개소문은 성품이 횡포하고 흉악하여 왕이 몰래 그를 죽이기로 논의하였는데 누설되어 개소문이 병사를 모아 궁궐에 들어가 왕을 시해하였다.

◎ 麗國僻在海隅, 北胡强悍之風, 慣習於耳目, 王化不及而然歟. 弑父弑君之變, 鱗累疊出, 接踵而起. 是天命不常, 降之以災變也. 是以, 唐帝爲其正名, 親征討之, 稽將及於麗之社稷爾.

고려국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고 북쪽 오랑캐의 강하고 사나운 습속이 눈과 귀에 익숙한데다 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그러한가?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하는 변란이 물고기의 비늘이 겹쳐지듯 나오고 바로 뒤를 이어 일어나니 이는 하늘의 명이 일정치 않아 재앙과 변고를 내린 것이다. 이 때문에 당나라 황제가 명분을 바로잡고자 친히 정벌하니 재앙이 장차 고려 사직에 미친 것이다.

○ 蓋蘇文貢白金於唐, 褚遂良曰, 蓋蘇文, 九夷之所不容, 今將討之, 納其金, 是郜鼎之類, 不可受, 帝却之.

개소문이 백금(白金)을 당나라에 공물로 바치자 저수량(褚遂良)이 말하였다. “개소문은 구이(九夷)도 용납지 않는 바입니다. 지금 장차 정벌하려는데 그 금을 받아들이면 이는 고(郜)나라의 솥과 같은 경우입니다.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황제가 물리쳤다.

○ 乙巳藏王四年. 唐帝親征安市城-今鳳凰城也-不克而還.

을사(乙巳)년 보장왕(寶藏王) 4년. 당나라 황제가 친히 안시성(安市城) - 지금의 봉황성(鳳凰城)이다. - 을 정벌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다.

◎ 交戰凡六旬, 麗兵大潰, 適山頹壓城, 城崩, 唐將傳伏愛, 私離所部, 麗軍從城缺出戰, 奪據土山受之, 帝怒, 斬伏愛, 命諸將, 三日攻之. 竟以不克, 帝以遼左, 甚寒, 草枯水凍, 士馬難可久留, 且兵糧將乏, 勅班師而還. 時, 太宗中箭傷目, 李穡詩曰, 謂是囊中一物耳, 那知白羽落玄花.

교전한 지 60일이 되어 고려 군대가 크게 궤멸되었다. 마침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자 성이 무너졌다. 당나라 장군 부복애(傅伏愛)가 사사로이 수비하고 있던 지역을 떠나니 고려 군대가 성이 무너진 곳에서 나와 싸워 토산(土山)을 빼앗아 주둔하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처형하고 여러 장군에게 명하여 삼일동안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황제는 요동이 매우 추워 초목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 수 없는데다가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때 태종(太宗)이 화살을 눈에 맞았는데 이색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謂是囊中一物耳,

那知白羽落玄花.

주머니 속의 한 물건일 뿐이거늘

어찌 알았으리 화살에 현화(玄花) 떨어질 줄을

○ 戊辰藏王二十七年. 唐以李勣 ․ 薛仁貴爲將, 合新羅兵, 共攻月餘, 王出降.

무진(戊辰)년 보장왕 27년. 당나라는 이적(李勣) ․ 설인귀(薛仁貴)를 장군으로 삼아 신라 군대와 연합하여 함께 공격한 지 한 달 만에 왕이 나와 항복하였다.

◎ 王以軍事, 委浮屠信誠, 信誠反爲內應, 開門納勣兵, 城旣陷矣. 麗王臧出降. 勣以王臧及二子, 大臣等, 百姓二十餘萬, 還京師, 帝命以王臧等行獻俘禮于昭陵, 具軍容奏凱歌于太廟, 分高句麗一百七十六城, 六十九萬戶, 爲九都督府,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薛仁貴鎭撫之, 高句麗自東明王甲申, 至寶臧王戊辰, 傳二十八世, 歷年七百五年.

왕이 군대의 일을 승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도리어 내응하여 문을 열고 이적의 군대를 맞아들여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 고구려왕 보장이 나와 항복하자 이적은 보장왕과 그의 두 아들 ․ 대신들과 백성 이십여 만 명을 서울로 돌려보냈다. 황제가 보장왕에게 소릉(昭陵)에서 헌부례(獻俘禮 : 전쟁에 이기고 돌아와 포로를 바쳐 조상의 영묘에 성공을 고함)를 행하게 하고, 태묘(太廟)에서는 군대에게 개선가를 연주케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176성과 69만 호를 9개의 도독부로 나누고 안동도독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 설치하여 설인귀에게 감독케 하였다. 고구려는 동명왕 갑신년부터 보장왕 무진년까지 28대에 전해졌고 역년은 705년이다.

◎ 麗之信誠, 宜不信之信誠, 唐之李勣, 宜當敵之勣, 以不信之信誠, 委諸軍事, 開門納賊, 稽迫一瞬, 竟至亡國, 寶藏王之用人, 可謂肄笑於千秋矣. 李勣 ․ 薛仁貴, 出將入相, 名諸中國而寔中國之間架, 以中國之大, 率中國之大兵, 彌月攻擊, 則勢若累卵矣. 急境戰策, 委於不信之信誠, 是以卵投石也. 禮行獻俘於昭陵, 宜矣, 二國之亡也. 新羅間之未知其所以也. 海隅偏方, 三國同時建國, 有國以來, 隣保相鬪, 勢若蚌鷸, 漁父得利, 同不入於魚網之設, 幸耳.

고려의 신성이라는 자는 믿지 못할 신성이오, 당나라의 이적은 적을 감당할 만한 이적이다. 믿지 못할 신성에게 군대의 일을 맡겨 문을 열어 적을 맞아들여 일순간에 화가 미쳐 마침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보장왕의 사람 씀은 천 년 후에도 웃음거리로 남겠다할 것이다. 이적 ․ 설인귀는 문무를 겸비하여 장상(將相)의 벼슬을 맡아 중국에 이름났으니 이들은 중국의 대들보라 할 것이고, 중국의 큼으로 중국의 대군을 거느리고 한달 여를 공격하였으니 그 형세가 알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운 형세였던 것이다. 위급한 지경에서 전쟁의 계책을 믿지 못할 신성에게 맡겼으니 이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다. 소릉에서 헌부례를 행하였으니 두 나라가 망함이 마땅하도다. 신라가 이간하였으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바닷가 치우친 곳에 세 나라가 동시에 건국하여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이웃해 서로 다투니 형세가 마치 조개와 황새의 다툼에 어부가 이익을 얻은 것과 같으니 함께 어부의 그물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傳統于高麗, 故未于高麗之上.

고려로 계통이 이어지므로 고려의 위에 놓았다.

○ 甲子馬韓元王元年. 朴赫居世, 建國於辰韓之地. 國號徐羅伐, 至于己丑二十五年, 開國號曰, 新羅.

갑자(甲子)년 마한(馬韓) 원왕(元王) 원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辰韓)의 땅에 건국하여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기축 25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쳤다.

○ 癸卯四十年. 東沃沮, 遣使, 獻良馬二十匹. 賀曰, 聞南韓, 有聖人出, 故遣使云-漢武時, 以其地爲玄菟郡. 今咸鏡道.

계묘(癸卯)년 40년. 동옥저(東沃沮)에서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필을 바쳐 치하하여, “듣자하니 남한(南韓)에는 성인이 나온다하여 사신을 보냅니다.” 라고 하였다. 한무제(漢武帝)때 그 땅을 현도군(玄菟郡)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함경도이다. 

○ 丁巳儒理往三十三年. 王薨, 以遺命, 立昔脫解, 爲王.

정사(丁巳)년 유리왕(儒理王) 33년. 왕이 서거함에 유언을 남겨 석탈해(昔脫解)를 왕으로 삼았다.

◎ 權近曰, 有國傳子, 自夏始, 所以重宗社, 不惟夏後世, 爭奪之亂也. 傳異姓, 則祖廟不血食, 是革命也. 儒理從父亂命, 卒傳之脫解, 其不識輕重, 甚矣. 若曰, 雖傳異姓, 廟固自在, 然, 神不享非類矣. 堯舜, 以天下爲公, 爲天下得人也. 南解之傳子婿, 以國家爲私物而已.

권근(權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를 자식에게 전함은 하(夏)나라에서 시작하였는데 종묘 ․ 사직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오, 후세에 쟁탈하는 난리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이성(異姓)에게 나라를 전하게 되면 선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니 이는 혁명인 것이다. 유리왕은 아버지가 숨질 때 정신없이 한 말을 따라 마침내 나라를 석탈해에게 전하였으니 그가 경중을 알지 못함이 심하다. 만약 ‘비록 이성에게 전해졌으나 종묘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하더라도 조상신이 이성의 제사에 흠향하지 않을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천하를 공적인 것으로 여겨 천하를 위해 인재를 얻었던 것인데, 남해왕(南解王)은 사위에게 나라를 전했으니 국가를 사유물로 생각한 것이다.

○ 己丑脫解王八年. 王養金櫝兒, 爲子. 名閼智, 姓金氏.

기축(己丑)년 탈해왕 8년(65년). 왕이 금독아(金櫝兒)를 얻어 자식으로 삼았다.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 王夜聞金城始林間, 有鷄聲, 遣匏公視之, 有小金櫝掛樹. 白鷄鳴于下, 開櫝有兒, 養爲子, 稱鷄林.-始林稱雞林.

왕이 밤에 금성(金城)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포공(匏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작은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궤를 열어보니 아이가 있어 데려다 자식으로 삼고 그곳을 계림(鷄林)이라 불렀다. - 시림을 계림이라 부름.

○ 庚辰脫解王二十三年. 王薨. 立儒理王二子朴婆娑, 爲王.

경진(庚辰)년 탈해왕 23년. 왕이 서거하시어 유리왕의 둘째 아들 박파사(朴婆娑)를 왕으로 삼았다.

○ 甲子婆娑王三十年. 王薨, 立脫解王孫昔伐休, 爲王.

갑자(甲子)년 파사왕 30년. 왕이 서거하시다. 탈해왕의 손자 석벌휴(昔伐休)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 王占風雲, 豫知水旱. 又能知人邪正, 國人謂之聖王. 巡州郡觀風俗, 下令無作土木之役, 以奪農時.

왕은 바람과 구름을 점쳐 미리 수해와 가뭄을 알았으며, 또한 사람의 사악하고 바름을 알았기에 나라 사람들이 성왕(聖王)이라 불렀다. 지방의 여러 주와 군을 순시함에 풍속을 살피고 명령을 내려 토목 공사를 일으켜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말게 하였다.

○ 己丑奈解王十二年. 百濟攻腰車城, 拔之.

기축(己丑)년 내해왕(奈解王) 12년. 백제가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 王子利音, 將六郡精兵六千, 襲破沙峴城, 以報腰車之恥, 以利音, 兼知內外兵馬事.

왕자 이음(利音)이 여섯개 군의 정병 6천을 거느리고 사현성(沙峴城)을 습격해 깨뜨려 요차성의 수치를 갚았다. 이음에게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하게 하였다.

○ 庚戌奈解王三十四年. 王薨, 妾壻助賁, 爲王. 以伊飡昔于老, 爲大將軍, 破甘文國, 以其地, 爲郡縣.

경술(庚戌)년 내해왕 34년. 왕이 서거하시어 사위 조분(助賁)을 왕으로 삼았다. 이찬(伊飡) 석우노(昔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격파하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 丁卯助賁王十七年. 王薨, 立其弟沾解爲王. 始尊生父骨正爲王, 諡神葛文王.

정묘(丁卯)년 조분왕 17년. 왕이 서거하시어 그 동생 첨해(沾解)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생부 골정(骨正)을 추존하여 왕으로 삼고 시호를 신갈문왕(神葛文王)이라 하였다.

◎ 金富軾曰, 漢宣帝卽位, 有司奏, 爲人後者, 爲人後故, 降其所生父母, 所以尊祖之義也. 帝所生父, 追諡曰, 悼考, 母曰, 悼妣. 比諸候王, 此合經義, 爲萬世法. 今新羅追王, 其私親, 繼統之君, 無不追王其所生父, 皆無於禮之禮也.

김부식(金富軾)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선제(漢宣帝)가 즉위함에 유사가 아뢰길 ‘자식된 사람은 자식이기에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은 조상을 높이려는 뜻이다. 황제가 생부에게 시호를 추존하여 도고(悼考)라 하고, 생모는 도비(悼妣)라 하였습니다. 제후와 왕에게 비교해 보아도 이는 경서의 뜻에 합당하고 만세의 법이 됩니다. 지금 신라에서 자신의 친부를 추존하여 왕으로 삼아 왕의 계통을 잇는 임금들이 자신의 생부를 추존해 왕으로 삼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모두 예법에 없는 예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 新羅之初, 禮不盡備, 徑情直行, 禮出情外. 故無於禮而行之者, 爲禮矣.

신라는 처음에 예법이 완전하게 갖춰지지 않아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하고 예법이 뜻밖에 나와 예법에 없이 행하는 것이 예법이 되었다.

○ 辛巳沾解王十四年. 王薨, 立金味鄒爲王. 乃追封其父仇道, 爲葛文王.

신사(辛巳)년 첨해왕 14년. 왕이 서거하시어 김미추(金味鄒)를 세워 왕으로 삼고 바로 그 아버지 구도(仇道)를 추존하여 갈문왕(葛文王)에 봉하였다.

◎ 味鄒, 閼智七世孫, 助賁王妻姒. 至是王薨, 無嗣, 國人共立爲王.

김미추는 김알지의 7대손으로 조분왕이 누이를 처로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왕이 서거함에 후사가 없어 나라 사람들이 함께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 戊午儒禮王十四年. 王薨, 立助賁王孫基臨爲王. 賜印觀 ․ 暑調二人爵.

무오(戊午)년 유례왕(儒禮王) 14년. 왕이 서거하자 조분왕의 손자 기림(基臨)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인관(印觀) ․ 서조(暑調) 두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

◎ 印觀, 賣絲於市. 暑調, 以穀買之, 忽有鳶蹴絲, 墮人觀家, 觀歸市, 謂調曰, 還汝絲. 調曰, 鳶蹴輿汝, 天賜也. 吾何敢受. 觀曰, 然則還汝穀. 二人相讓, 幷棄於市而歸. 王賜爵褒之.

인관은 시장에서 실을 팔았는데 서조가 곡식으로 그것을 샀다. 갑자기 소리개가 실을 채가더니 인관의 집에 떨어뜨렸다. 인관이 시장으로 돌아가 서조에게 “네 실을 돌려주마.” 하니, 서조는 “소리개가 가져가 네게 주었으니 이는 하늘이 준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인관이 “그렇다면 네 곡식을 돌려주마”하며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다 모두 시장에 버리고 돌아갔다. 왕이 벼슬을 내려 포상하였다.

○ 乙巳實聖王三年. 倭置營於對馬島, 鍊兵峙糧. 王設關防, 備倭患.

을사(乙巳)년 실성왕(實聖王) 3년. 왜구가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여 군대를 조련하고 군량을 쌓아 왕이 변경을 방비하여 왜구의 난리에 대비하였다.

○ 丁巳實聖王十五年. 訥祗弑其君實聖王, 自立, 號麻立干. 歃良州干朴堤上, 死於倭.

정사(丁巳)년 실성왕 15년. 눌지(訥祗)가 임금 실성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마립간(麻立干)이라 하였다. 삽량주간(歃良州干) 박제상(朴堤上)이 왜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王聞堤上勇而多智, 問曰, 二弟久質麗, 倭那可有相見之道耶. 對曰, 臣請行之. 遂至麗, 說王曰, 交隣在誠信, 質子五覇之事, 願大王行古之道. 王許而還之. 堤上曰, 倭不可以口舌諭, 臣當詐降, 臣去後, 囚家屬, 有若得罪而逃者, 乃入倭, 請降, 倭詗知其家屬被囚, 以爲實. 直以堤上, 未斯欣爲鄕導, 出師海島, 堤上勸未斯欣潛逃. 未斯欣曰, 置公於死地, 我忍逃去乎. 堤上曰, 若能救公之,命慰王之情, 則足矣. 吾安敢惜其死. 未斯欣泣辭逃還. 倭主怒責堤上曰, 汝暗遣未斯欣, 何耶. 堤上曰, 臣是雞林之臣, 欲遂吾君之志而然也. 王怒曰, 今汝已爲我臣, 猶稱鷄林之臣, 罪當死. 若稱倭臣, 償以重祿. 堤上曰, 寧爲雞林之犬豚, 不爲倭臣, 寧受雞林之箠&楚, 不受倭爵. 倭主益大怒, 剝堤上脚, 使趨刈蒹之上. 累問而終不屈, 乃燒殺木島中. 王聞之驚悼, 贈大阿飡, 世祿其家, 使未斯欣娶其第二女. 堤上妻率三女, 上雞述嶺, 望倭國, 痛哭理事, 因稱雞述神母, 土民歲饗之.

왕은 박제상이 용맹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듣고 “두 동생이 오랫동안 고구려와 왜구에 볼모로 잡혀있는데 어찌하면 만나 볼 수 있을까?” 하고 묻자, “제가 가기를 청하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드디어 고구려에 이르러 왕에게 유세하여 “이웃나라와 사귐에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볼모를 잡는 것은 오패(五覇)나 하는 일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옛 도를 행하소서.” 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여 돌려보냈다. 박제상이 말하였다. “왜구는 언변으로 회유할 수 없습니다. 제가 거짓으로 항복할 것이니 제가 떠난 뒤에 가족을 잡아 가둬 마치 죄를 얻어 도망한 것처럼 하시옵소서.” 이에 왜구에게 들어가 항복하길 청하자, 왜구는 그의 가족이 갇힌 것을 정탐해 알고는 사실이라 여겼다. 바로 박제상과 미사흔(未斯欣)을 향도(鄕導)로 삼아 바다의 섬에 출병케 하였다. 박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도망하라고 권하니 미사흔은 “그대를 죽을 땅에 두고 내가 차마 도망가겠는가?” 라고 하자, 박제상이 “만약 그대의 목숨을 살려 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족하다. 내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까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울면서 이별하고 도망해 돌아갔다. 왜의 군주가 노하여 박제상을 꾸짖기를 “너는 몰래 미사흔을 놓아 보냈으니 어째서인가?” 하자, 박제상은 “나는 신라의 신하이니 나의 임금의 뜻을 이루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지금 네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고서 오히려 신라의 신하라고 하니 죄가 죽어 마땅하다. 만약 왜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많은 녹봉으로 상을 주리라.”고 하니,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 ․ 돼지가 될지언정 왜구의 신하가 되지는 않으리라. 차라리 신라에서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구의 벼슬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왜의 군주가 더욱 노하여 박제상의 발을 벗겨 날카로운 억새 위로 달리게 하고는 다시 물었으나 끝내 굽히지 않자 목도(木島)에 보내 불태워 죽였다. 왕이 이를 듣고는 놀라고 안타까워 대아찬(大阿飡)의 벼슬을 주고 대대로 그 집안에 녹봉을 받게 하였다. 미사흔에게 그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박제상의 처는 세 딸을 데리고 계술령(雞述嶺)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다. 이 때문에 계술신모(雞述神母)라 불렸고 그곳 백성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었다.

○ 甲申訥祗王二十七年. 敎民牛車之法. 倭寇圍金城十日, 糧盡而還.

갑신(甲申)년 눌지왕 27년. 백성들에게 소와 수레를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왜구가 금성(金城)을 십일 동안 포위하였다가 군량미가 다하자 돌아갔다.

○ 己未慈悲王二十一年. 王薨, 立文周王姪東城爲王. 期年薨, 世子炤智立, 遣異斯夫, 取小伽倻爲郡.

기미(己未)년 자비왕(慈悲王) 21년. 왕이 서거하여 문주왕(文周王)의 조카 동성(東城)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한해만에 서거하여 세자 소지(炤智)를 세우다. 이사부(異斯夫)를 보내 소가야(小伽倻)를 빼앗아 군으로 삼았다.

○ 辛酉炤智王二年. 焚修僧伏誅.

신유(辛酉)년 소지왕 2년. 분수승(焚修僧)을 죽이다.

◎ 春正月十五日, 王幸天泉宮, 有烏啣書來鳴. 得其書, 外面云, 開岍二人死, 不開一人死. 日官奏云, 一人者, 王也. 王開視之. 書曰, 射琴匣. 入宮射之, 中有人, 被傷, 血出匣外, 捕杳之, 乃焚修僧, 與王妃, 私通, 潛謀不軌矣. 皆伏誅. 自是, 國人以糯飯祭烏.

봄 정월 15일에 왕이 천천궁(天泉宮)에 행차하였는데, 까마귀가 편지를 물고 와 울었다. 그 편지를 보니 겉면에는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고 되어 있었다. 일관(日官)이 “한사람이라는 것은 왕을 말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왕이 열어 보니 편지에는 ‘거문고 상자를 쏘아라.’ 고 씌어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상자를 쏘았는데 그 안에 있던 사람이 상처를 입어 피가 상자 밖으로 흘러 나왔다. 그들을 잡아 조사하니 바로 분수승이 왕비와 사통하고는 몰래 반역을 꾀하였던 것이다. 모두 형벌하여 죽였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찹쌀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지내었다.

○ 庚辰炤智王二十一年, 王薨, 立再從弟智大路, 爲往. 始行喪服法. 禁殉葬, 令州郡勸農作業, 始用牛耕.

경진(庚辰)년 소지왕 21년. 왕이 서거하여 재종제(再從弟) 지대로(智大路)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상복법을 시행하고 순장을 금하였다. 주군에 명령하여 농사를 장려하여 일하게 하였으며 비로소 소로 밭가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

○ 己卯平成王十九年. 命異斯夫, 滅大伽倻. 斯多含, 年十六, 領其徒千餘人, 請從軍, 共滅其國. 師還策功, 王償良田及所虜三百口. 多含分其田, 配給戰士, 所虜三百口, 放爲良人, 國人傳頌其德.

기묘(己卯)년 평성왕(平成王) 19년. 이사부에게 명하여 대가야(大伽倻)를 멸하게 하였다. 사다함(斯多含)은 나이 16으로 자신의 무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종군하기 청하여 함께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대가 돌아와 공훈을 가려 왕이 양전과 포로 300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그 땅을 나눠 전사들에게 주고 포로 300명은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전하여 기렸다.

○ 辛未伯淨王三十二年. 遣使如隋, 請討高句麗, 帝出師親征.

신미(辛未)년 백정왕(伯淨王) 32년. 사신을 수(隋)나라에 보내 고구려 정벌을 청하니 황제가 군대를 내어 친히 정벌하였다.

◎ 隋之大業初, 徵天下兵, 總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當今親率, 亦如之. 其饋輸, 又倍之, 旌旗輜重, 亘九百六十里, 出師之盛, 古今未之有也. 至遼, 麗將乙支文德, 阻水拒守. 隋兵, 造浮橋, 急渡而戰于東岸, 麗兵大敗, 死者萬計. 隋圍遼城, 麗亦嬰城固守. 隋之動止, 皆奏聞待報, 無得專擅, 城幾陷, 城中, 輒言請降, 諸將馳奏, 比報至, 城中守禦盡力, 復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責諸將曰, 公等, 苟或如前不力, 當斬, 麗堅守, 終不下. 隋大將軍來護我水軍, 先登進擊, 大破之. 乘勝直進, 麗伏兵於郭內, 出戰僞敗, 護兒勇遂入城, 伏發見敗, 僅以身免, 其生還者, 不過數千人. 文德遺隋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隋將宇文述, 見兵疲食盡, 又城險難拔, 退兵至滻水, 半濟, 麗擊其後, 隋軍大潰. 士卒奔亡, 一日一夜, 至鴨綠, 器械失亡而生還者, 赤身而已. 當日戰守, 是皆文德之神策也.

수나라 대업(大業) 초년에 천하의 병사를 징발하니 모두 113만 3천 8백 명으로 친히 거느리고 함께 갔다. 그 수송함을 두 배로 늘리니 깃발과 짐수레가 960리에 뻗쳐 출병의 성대함이 고금에 없던 것이었다. 요수에 이르니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강을 막아 대항해 지키자 수나라 군대는 부교(浮橋)를 만들어 급히 강을 건너 동쪽 언덕에서 싸웠다. 고구려 군대가 크게 패하여 전사자가 만여 명이 되었다. 수나라가 요동성(遼東城)을 에워싸니 고구려도 영성(嬰城)을 굳게 지켰다. 수나라 군대의 진퇴는 모두 황제에게 아뢰고 대답을 기다려 움직였으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면 성안에는 번번이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여러 장군들이 달려와 아뢰었는데 황제의 대답이 이르면 성안에서는 방어에 힘을 다해 다시 대항해 싸웠다. 이러하기를 두세 번이나 하였으나 황제는 끝내 깨닫지 못하고 여러 장군을 꾸짖어 “그대들이 진실로 앞으로 나아가 힘을 다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목을 벨 것이다”고 하였으나 고구려가 굳게 지켜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수나라 대장군 내호아(來護我)의 수군이 먼저 올라가 진격하여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바로 나아갔다. 고구려는 성곽 안에 병사를 숨기고 나와 싸우다 거짓으로 패하자 내호아는 용맹스럽게 쫓아 성으로 들어갔으나 복병이 나와 패하자 겨우 몸만 달아났다. 생환한 자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군에게 시를 보내었다.

神策究天文, 신묘한 책략은 천문을 다하였고

妙算窮地理, 묘한 계책은 지리를 다하였구나.

戰勝功旣高, 전쟁에 승리한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오.

수나라 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병사들이 피로하고 식량이 다하였고 성이 험해 함락시키기 어려움을 알고 병사를 퇴각시켜 살수(滻水)에 이르러 반쯤 건넜는데 고구려가 그 뒤에서 공격하니 수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었다. 사졸들이 뛰어 도망하여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강에 이르렀다. 병기는 잃어버리고 생환자는 맨몸일 뿐이었다. 당일 전쟁에서 지켜냄은 바로 을지문덕의 신묘한 계책이었다.

○ 己丑伯淨王五十年, 遣中幢主金庾信, 伐高句麗娘臂城, 拔之.

기축(己丑)년 백정왕 50년. 중당주(中幢主)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정벌해 함락시켰다.

○ 壬辰五十二年, 王薨, 國人立王長女德曼, 爲王. 於是, 唐賜牧丹花圖, 倂花子. 王笑曰, 此花夭艶絶世, 而盡無蜂蝶, 其無香可知. 帝之所遺, 豈其偶然乎哉.

임진(壬辰)년 52년. 왕이 서거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의 장녀 덕만(德曼)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에 당나라에서 모란꽃 그림을 꽃씨와 함께 보내었다. 왕이 웃으며 “이 꽃은 견줄 데 없이 곱지만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음을 알겠다. 황제가 보낸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 辛丑女主九年. 百濟侵攻大耶城, 都督金品釋, 幢下舍知, 竹竹死之.

신축(辛丑)년 여왕 9년. 백제가 대야성(大耶城)을 침공하여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 당하(幢下) 사지(舍知), 죽죽(竹竹)이 전사하였다.

◎ 城將陷, 品釋先殺妻子, 而自刎. 竹竹, 遂力戰死之, 厥父命名竹竹者, 使有歲寒不凋之節.

성이 장차 함락됨에 김품석은 먼저 처자를 죽이고 자결하였다. 죽죽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 그 아버지가 죽죽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한겨울의 추위에도 마르지 않는 절개를 지니라고 한 것이었다.

○ 丁未十五年. 女主歿, 立眞平母弟, 國飯之女勝曼, 爲王. 大臣毗雲等, 擧兵叛, 金庾信討誅之.

정미(丁未)년 15년. 여왕이 죽자 진평왕(眞平王)의 동복 아우인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을 왕으로 삼았다. 대신(大臣) 비운(毗雲) 등이 병사를 일으켜 반란하자 김유신이 토벌해 죽였다.

◎ 時, 火星落於月城, 女主憂之. 庾信曰, 吉凶無常, 由人所召. 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殷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今德勝妖則星變, 不足畏.

당시 화성(火星)이 월성(月城)에 떨어졌다. 여왕이 근심하자 김유신이 말하였다. “길흉은 일정한 것이 아니어서 사람으로 인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주왕(紂王)은 붉은 참새로 망하였고, 노(魯)나라는 기린을 잡아 쇠하였으며, 은종(殷宗)은 꿩으로 흥하였고, 정공(鄭公)은 용이 다투는 것으로 창성하였습니다. 지금 덕이 요사함을 이긴다면 별의 변괴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 戊申女主勝曼九年. 伊飡金春秋, 與其子文汪如唐, 帝厚待之. 由是, 百官冠衣, 悉縱唐制.

무신(戊申)년 여왕 승만 9년. 이찬 김춘추(金春秋)가 아들 문왕(文汪)과 당에 갔는데 황제가 후하게 대우하였다. 이로부터 백관의 의관은 모두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 甲寅七年, 女主歿, 羣臣奉金春秋爲王.

갑인(甲寅)년 7년. 여왕이 죽었다. 군신들이 김춘추를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 壬申文武王十日年, 柰麻德福入唐, 學曆法而還. 由是, 用華曆.

임신(壬申)년 문무왕(文武王) 11년. 대내마(大柰麻) 덕복전(德福傳)이 당에 들어가 역법을 배워 돌아왔다. 이로부터 중국의 역법을 사용하였다.

◎ 嗚呼! 箕聖東渡, 對武王之訪問, 而及陳洪範九疇, 則七政, 齊乎其中矣. 苟或七政不齊, 則國難爲國, 而洪範九疇, 陳于武王, 不施於東方乎哉. 祗公曆法, 至於三韓而替微爾.

오호라! 기자 성인이 동으로 건너와 무왕이 방문함에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아뢰니 칠정(七政)이 나라 안에 갖추어졌다. 만약, 칠정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홍범구주를 무왕에게 아뢰었어도 우리나라에 시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역법이 삼한(三韓)에 전해졌으나 사용되지 않았다.

○ 壬午神文王元年, 擢薛聰高秩. 始立國學, 東海中, 有小山, 生笛竹. 晝分爲二, 夜合爲一. 王取之作笛, 吹之, 則風波息, 故號萬波息笛.

임오(壬午)년 신문왕(神文王) 원년. 설총(薛聰)을 높은 지위에 발탁하였다. 처음으로 국학(國學)을 세웠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어 적죽(笛竹)이 자랐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어졌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지곤 하였다. 왕이 가져다 피리를 만들었다. 피리를 불면 바람과 파도가 그쳤기 때문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불렀다.

○ 壬申聖德王三十年. 大監守忠, 自唐還, 上文宣王及十哲七十二弟子眞像. 於是, 命尊奉于太學.

임신(壬申)년 성덕왕(聖德王) 30년. 대감(大監)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과 십철(十哲) ․ 72제자의 화상을 바쳤다. 이에 태학에 높이어 받들게 하였다.

◎ 天地所覆, 聖人之道, 與之同覆. 地之所載, 聖人之道, 與之同載, 而日出之, 則無幽, 不燭而同其明, 月出之, 則無昏不退而同其照矣. 民生之仰賴而生, 未有盛於孔子而生之於其道, 學之於其道, 行之不已於夫子之道, 中然後, 國可以爲國, 民可以爲民也. 大哉! 聖人之道乎!

하늘이 덮는바 성인의 도를 더불어 함께 덮고, 땅이 싣는바 성인의 도를 더불어 함께 싣는다. 해가 뜨면 깊은 곳에도 비취지 않음이 없어 그 밝음을 함께 하고, 달이 뜨면 어둠이 물러나지 않음이 없어 그 비췸을 함께 한다. 백성이 우러러 의지해 태어남에 공자보다 성대함이 없으니 그 도에 태어나 그 도를 배우고 공자의 도를 그치지 않고 행한 연후라야 국가는 국가답게 될 수 있고 백성이 백성답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하도다. 성인의 도여!

○ 癸未景德王元年. 命旌孝子向德門, 名其洞曰, 孝家里, 賜田宅及祖, 褒之. 京都有一牛, 産五犢.

계미(癸未)년 경덕왕(景德王) 원년. 효자 향덕(向德)의 문에 정려문을 세우게 하고, 그 동네를 효가리(孝家里)라 명하였으며 전택과 세금을 내려 주어 표창하였다. 서울에 어떤 소가 송아지 5마리를 낳았다.

○ 丁酉景德王十五年. 遣使如唐, 至成都, 帝以手札御詩賜王. 詩曰, 四維分經緯, 萬像含中樞云云-明皇親制.

정유(丁酉)년 경덕왕 1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황제가 손수 시를 지어 주었다.

四維分經緯, 사방은 경위로 나뉘어 있고,

萬像含中樞. 만물은 중심을 지니고 있네.

-황제가 직접 지은 것이다-

○ 己亥十七年. 大雷電, 震佛寺十六. 時, 鑄皇龍寺鍾, 長一丈三寸, 厚九寸, 重四十九萬七千六百斤.

기해(己亥)년 17년. 우뢰와 번개가 심하게 치고 불사 16곳이 훼손되었다. 당시 황룡사종(皇龍寺鍾)을 주조하였는데 길이가 1장 3촌이오, 두께 9촌이며 무게는 49만 7천 6백 근이었다.

◎ 盖自生民以來, 有夫婦然後, 有父子, 有父子然後, 有君臣, 有君臣然後, 可以有國家, 而所謂僧徒之道, 無夫婦, 乾坤悖理, 無父子, 天地易位, 天地易位, 而自有其身, 脫於四大五常之線, 立於三綱五倫之外, 是宜人外之人也. 余恐有國之君, 不可認許佛寺之創, 使一國之民, 未嘗同歸於無父無君之域, 亦豈非國家之萬幸也哉. 今夫佛之學, 念眞及佛, 則可也可耳. 然不爾, 則虛無寂蔑而已. 惜乎! 假使一國之名山大川, 創始如佛寺之創, 而創其儒學館舍, 則儒學明明德之妙術, 那可以佛徒之不如乎!

대개 백성이 태어난 이래로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가 있게 되고, 부자가 있게 된 뒤에 군신이 있게 된다. 군신 관계가 생긴 뒤에야 국가가 있을 수 있으니, 이른바 불가의 도는 부부가 없으니 건곤(乾坤)의 이치가 어그러지고, 부자가 없으니 천지의 자리가 바뀌게 된다. 천지가 자리를 바꾸었는데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녀 사대(四大 ; 땅 ․ 물 ․ 불 ․ 바람)와 오계(五戒)의 선을 벗어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밖에 서니 이는 사람 밖의 사람일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나라를 지닌 임금은 불사의 창건을 허락하지 말아 일국의 백성이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이 어찌 국가의 만 가지 복이 아니겠는가? 지금 불가의 학문이 참됨과 부처만을 생각함이 가하다면 가하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허무적멸(虛無寂蔑)에 돌아갈 따름이다. 안타깝도다! 가령 일국의 명산대천에 불사의 창건을 시작하듯이 유학의 관사를 창건한다면 유학의 밝은 덕을 밝히는 묘한 술법이 어찌 불가만 못할 수 있겠는가?

○ 己未惠恭王十四年. 遣金巖, 聘日本, 始定讀書出身.

기미(己未)년 혜공왕(惠恭王) 14년. 김암(金巖)을 보내 일본을 방문하였다.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정하였다.

○ 戊辰元聖王三年. 徵隱士金生, 不就. 金生能書, 不攻他藝, 好佛不娶, 年踰八旬, 猶操筆不休, 筆皆入神.

무진(戊辰)년 원성왕(元聖王) 3년. 은사(隱士) 김생(金生)을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김생은 글을 잘하였는데 다른 기예에는 노력하지 않았고, 불가를 좋아하여 장가들지 않았다.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았으며 필법이 신의 경지에 올랐다.

○ 己丑哀莊王九年. 上大等彦昇, 弑王自立, 創伽倻山海印寺.

기축(己丑)년 애장왕(哀莊王) 9년. 상대등(上大等) 언승(彦昇)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가야산(伽倻山)에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였다.

○ 己亥憲德王十年. 命將軍金雄元, 率甲士三萬, 助唐討李師道, 築浿江長城.

기해(己亥)년 헌덕왕(憲德王) 10년. 장군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해 무장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당을 도와 이사도(李師道)를 토벌케 하고, 패강(浿江)에 장성(長城)을 세웠다.

◎ 嗚呼! 憲德王之不仁也. 目下簒弑之罪, 宜不容於天地之間, 而捨置於天地之外, 助唐而討李師道耶? 今又創佛舍於伽倻之名山, 將欲檮其不容之罪於佛前, 亦可貽笑於千秋者, 是耳. 旣自獲罪於天, 則所檮無處, 俯仰不畏, 濫坐乎一國之上, 任意容身, 其形可惜也. 曩者, 神烏啣書, 妖僧亂宮, 焚修休誅, 上天震怒, 雷震佛寺十六, 而所謂有國之君, 無所鑑戒. 益創寺刹, 抑亦何心. 吾東自檀箕有史以來, 慰安后土, 保安社稷, 刑政敎化, 施於國民, 民腹其化, 而悅從者, 仰賴堯舜孔孟心法之由出也. 非所以釋家愛慈之過度也. 宜非國君之所尙, 而奈之何渴殫國庫之財, 空費於無君之域乎?

오호라! 헌덕왕의 어질지 못함이여. 눈앞의 찬역하는 죄를 마땅히 천지간에 용납지 말고 천지의 밖에 버려두어야 할 것인데, 당나라를 도와 이사도를 토벌하였구나. 지금 또 가야의 명산에 불사를 창건하여 장차 그 용납 받지 못할 죄를 부처 앞에 기도하니 또한 천추의 웃음을 받을 것이 이것이다. 이미 스스로 하늘에 죄를 얻었으니 기도할 곳이 없고, 아래로나 위로나 두려움이 없이 함부로 일국의 윗자리에 앉아 마음대로 행동하니 그 형상이 안타깝구나. 옛날에 신오(神烏)가 편지를 물어 와 요승이 궁궐을 어지럽힘에 분수를 죽일 수 있었고, 하늘이 진노하여 16개 불사에 우레가 쳤으니 이른바 나라를 가진 임금이 거울삼지 않고 더욱 사찰을 창건했으니 그렇다면 이는 어떤 마음인가? 우리나라는 단군 ․ 기자로부터 유사 이래 토지의 신을 위안하고 사직을 보존하며 형정(刑政)과 교화가 국민에게 베풀어지고 백성은 그 교화에 복종해 기쁘게 따르는 것은 우러러 요 ․ 순 ․ 공자 ․ 맹자의 마음 쓰는 법을 따라 나온 것이오, 불가의 자비로운 마음이 과도해서가 아니다. 마땅히 나라의 임금이 숭상할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국고의 재물을 탕진하고 임금 없는 곳에 헛되이 쓰는가?

○ 庚戌興德王十年. 王薨無嗣, 立從弟悌隆, 爲王.-宗室均貞, 爭立金陽, 與均貞之子祐徵, 奉均貞爲王. 侍中金明, 阿飡利弘, 圍王宮, 殺均貞, 立悌隆爲王.

경술(庚戌)년 흥덕왕(興德王) 10년. 왕이 서거함에 후사가 없자 종제 제륭(悌隆)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종실 균정(均貞)이 왕위를 다퉈 김양(金陽)이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시중(侍中) 김명(金明)과 아찬(阿飡) 이홍(利弘)이 왕궁을 에워싸 균정을 죽이고 제륭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 大廉自唐得茶子來, 先植于知異山.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종자를 얻어와 먼저 지리산에 심었다.

○ 戊午僖康王二年. 上大等金明, 弑其王自立. 金陽與禮徵, 至肅淸宮禁, 迎祐徵, 入卽位. 誅金明 ․ 利弘.

무오(戊午)년 희강왕(僖康王) 2년. 상대등 김명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김양이 예징(禮徵)과 궁궐을 숙청하고 우징을 맞아 들여 즉위시키고, 김명 ․ 이홍을 죽였다.

○ 丁丑文聖王十八年. 侍中金陽卒. 佛經佛牙至自唐. 王迎于郊, 憲康王五年, 崔致遠出自唐.-號孤雲, 討黃巢檄有曰, 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之語云. 由是, 名振天下.

정축(丁丑)년 문성왕(文聖王) 18년. 시중 김양이 죽었다. 불경과 부처의 치아가 당나라에서 와서 왕이 교외에서 맞아들였다. 헌강왕(憲康王) 5년에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갔다. - 호 고운(孤雲). 「토황소격(討黃巢檄)」에 “모두들 드러내 죽일 것을 생각하고, 또한 땅 속 귀신들도 이미 몰래 죽이자는 말로 의논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이 천하에 떨쳤다.

○ 己酉眞聖女主二年. 囚大野隱者王巨仁旋釋之.

기유(己酉)년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 대야주(大野州)에 사는 은자 왕거인(王巨仁)을 가두었다가 곧 풀어주었다.

◎ 主潛引美男子私之, 亦以要任, 授官. 時, 有揭榜於路, 疑其文士所爲, 巨仁誣被見囚, 不勝寃憤, 有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卽日夜, 天大雷震, 主懼遂釋之.

여왕이 몰래 미남자를 데려다가 사통하고, 또 긴요한 직책으로 벼슬을 주었다. 그때 길가에 방이 붙었는데 문사가 지은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에 왕거인이 무고를 받아 갇히게 되었다. 그는 원망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옥의 벽에 글을 썼다.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예와 같건만,

하늘은 말없이 푸르기만 한가.

그날 밤 하늘에서 우레와 천둥이 심하게 치자 여왕이 두려워 드디어 풀어 주었다.

◎ 以女主, 居于一國之寶位, 私自淫昵, 猶如是, 則天雷之, 不及於宮中, 幸爾.

여왕으로 일국의 임금의 자리에 처해 사사로이 음탕한 일을 행함이 이와 같은데도 하늘의 우레가 궁중에 미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할 따름이다.

○ 壬子女主五年. 弓裔叛于北原.-弓裔, 憲安王庶子. 生時, 屋上有光, 如虹連天. 日者奏曰, 兒以重午日生, 將不利國家. 王命勿擧, 投之, 乳媼窃捧之.- 甄萱叛據完山, 自稱後百濟. 萱尙州人, 姓李, 父阿慮介, 以農自活. 萱生, 厥父耕田, 母饁之, 置萱林間, 虎來乳之.

임자(壬子)년 여왕 5년. 궁예(弓裔)가 북원(北原)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 궁예는 헌안왕(憲安王)의 서자로 태어날 때 집 위에 광채가 마치 무지개처럼 뻗쳐 하늘에 이어졌다. 일관이 아뢰었다. “아이가 단오 날 태어나면 장차 국가에 불리할 것입니다” 왕이 명하여 키우지 말라 하고 버렸는데 유모가 몰래 데려다 키웠다. -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완산(完山)에 웅거하고는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라고 불렀다. 견훤은 상주(尙州) 사람으로 성은 이씨이다. 아버지 아려개(阿慮介)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다. 견훤이 태어나 아버지는 밭을 갈고 어머니는 들밥을 내갔다가 견훤을 숲에 놓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甲戌神德王二年. 弓裔以王建累著軍功, 階爲波珍餐兼侍中, 未幾, 又命王建出鎭錦城.

갑술(甲戌)년 신덕왕(神德王) 2년. 궁예는 왕건이 자주 전쟁에서 공을 드러내자 품계를 올려 파진찬(波珍餐) 겸 시중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왕건에게 명하여 외지로 나가 금성(錦城)을 지키게 하였다.

○ 戊寅景明王元年. 泰封諸將, 推戴王建爲王. 國號高麗.

무인(戊寅)년 경명왕(景明王) 원년. 태봉(泰封)의 여러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 新羅自朴赫居世, 歷昔 ․ 金二姓, 而至于朴景明王而亡.

신라는 박혁거세로부터 석 ․ 김 두 성씨를 지나 박경명왕에 이르러 망하였다.

◎ 三國同時倂立, 曆數則新羅最長, 雄桀間世而作, 匡輔國柄, 然何其弑君之多, 亦其女主之多也. 今以君主之治, 踰於堯舜, 傳授心法而傳傳受受, 則不過乎私自與受爾. 祗是開門於簒弑之路, 而傳授于此, 則彼窺之, 傳受于彼, 則此欲之弑君之變, 出於蕭墻之間矣. 不惟是已, 只以一國之疆土, 甘作弄蹴之空球, 故譬猶十五未笄之女兒, 與十五猶未之童子, 列立於一場, 共戱游球, 投於前, 則前者引之, 投於後, 則後者得之, 左右皆如之而無小間斷落地之時, 然宗廟社稷, 那可以饗其匪類乎? 盖一國之疆土, 乃一國之所共有, 宜非私有之物爾. 得於民而傳受, 則可也. 不爾則天地之陰譴, 在於暝暝之中矣. 天命安能久在於此乎?

삼국이 동시에 병립하여 역수로는 신라가 가장 오래도록 길었으며, 영웅호걸이 자주 나와 정권을 바로 잡아 고쳤다. 그러나 어찌 임금을 시해함이 많았으며, 또 어찌 그리도 여왕이 많았는가? 지금 군주의 다스림이 요임금과 순임금이 전수한 마음 쓰는 법도를 넘어서 전하고 받는다면 사사로이 주고받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대저 찬역의 길을 열어 이에 전수한다면 저 사람도 넘볼 것이고, 저 사람에게 전수한다면 이 사람도 욕심을 내어 임금을 시해하는 변란이 소장(蕭墻)의 사이에서 나올 것이다. 다만,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국의 강토를 차고 노는 공처럼 만드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15세의 비녀도 하지 않은 여자 아이와 15세의 관례도 하지 않은 동자를 마당에 세워 놓고 함께 공을 차며 놀아 앞에 던지면 앞에 있는 놈이 가져가고 뒤에 던지면 뒤에 있는 놈이 얻는 것과 같아 좌우에서 모두 이같이 하여 조금도 끊임없이 땅에 떨어질 때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묘와 사직이 어찌 그 제대로 되지 않은 제사에 흠향하겠는가? 대개 일국의 강토는 바로 일국이 공유하는 것이오, 마땅히 사유할 물건이 아닌 것이다. 백성에게서 얻어 전수함이 옳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천지가 몰래 꾸짖어 아득한 곳에 있게 될 것이다. 천명이 어찌 오래 이곳에 있을 수 있으리오!

고려기(高麗紀)

因山高水麗而紀國號.

산이 높고 물이 아름다워 국호로 정하였다.

姓王, 諱建, 金城太守隆子. 後梁貞明四年, 戊寅, 開國, 在位二十六年, 壽六十七, 顯陵開城東.

성은 왕이오, 휘는 건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후양(後梁) 정명(貞明) 4년 무인에 개국하여 재위 26년이며 향년 67세이다. 현릉(顯陵)이 개성 동쪽에 있다.

○ 丙申十九年. 後百濟亡.-萱憂懣發疽死, 王入都, 存問將士, 量才任用, 拜朴英規爲佐丞.

병신(丙申)년 19년. 후백제가 망하였다. - 견훤은 근심이 마음에 가득 차 등창이 나 죽었다. 왕이 도성에 들어와 장사를 찾아 재주를 헤아려 등용함에 박영규(朴英規)를 좌승(佐丞)으로 삼았다.

◎ 王親製政誡九篇, 頒中外, 定都開城, 政丞金溥, 獻玉帶.-大十圍, 六十二銙. 新羅眞平王所帶- 定功勞分田.

왕이 친히 정계(政誡) 9편을 제정하여 안팎에 반포하고 개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정승 김부(金溥)가 옥대를 바쳤다. - 옥대의 길이가 10발이었고, 장식품이 62개나 되었다. 신라 진평왕이 매던 것이다. 공로를 정해 땅을 나눠주었다.

○ 戊戌二十一年. 西域天竺僧三藏弘梵來. - 王備法駕近之- 耽羅國遣子末老, 來朝, 賜星主王子爵.

무술(戊戌)년 21년. 서역 천축 승려 홍범대사(弘梵大師)가 왔다. - 왕이 수레를 마련해 맞이하였다. - 탐라국에서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와 조회하여 성주(星主)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 庚子二十三年. 親製訓要十條, 以訓後嗣.

경자(庚子)년 23년. 친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제정하여 후손들에게 훈계하였다.

○ 癸卯二十六年. 大匡庾黔弼卒. 五月王薨. 世子卽位.-以遺詔, 喪葬園陵儀節, 依漢文故事.

계묘(癸卯)년 26년. 대광(大匡) 유금필(庾黔弼)이 죽었다. 왕이 서거하시어 세자가 즉위하였다. - 유훈을 남겨 초상과 장례, 왕릉의 제도를 한문제(漢文帝)의 법도를 따르게 하였다.

◎ 太祖開始四百年餘, 守成之大業, 親製訓要, 宜皆傳守之要道. 然十條中, 第一條以創立寺院爲首, 第二條道詵占定外, 禁其創造佛寺, 至於六條, 燃燈事佛, 是宜崇佛之遺訓也. 未嘗一辭之及於崇儒之條, 後日妖僧亂宮之變, 微畜其意於太祖之訓辭中也. 可惜太祖以事佛之訓辭, 移於崇儒之心, 而訓及, 則那可有以佛亡國之變乎?

태조가 개국한지 400여 년에 조상의 일을 이어 지키고 친히 훈요를 제정하였으니 의당 모두 전하여 지킬 긴요한 법도이다. 그러나 10조 가운데 제1조로 사원을 짓는 것으로 머리를 삼고, 제2조는 도선(道詵)이 선정한 것 외에는 불사를 창건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제6조에 이르러는 연등(燃燈)으로 부처를 섬기라고 하였으니 이는 의당 부처를 숭상하는 유훈이다. 일찍이 한마디도 유교를 숭상하라는 조목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뒷날 요승이 궁궐을 어지럽히는 변고가 있었음은 그 뜻이 태조의 훈계하는 말에 은밀하게 들어있었던 것이다. 안타깝도다! 태조가 부처를 섬기는 훈계의 말을 유가를 숭상하는 마음으로 옮겨 훈계가 미쳤다면 어찌 불가가 나라를 망치는 변란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諱武, 太祖之子. 後晉開運元年甲辰卽位, 二年薨, 壽三十四.

휘 무(武)로 태조의 아들이다. 후진(後晉) 개운(開運) 원년 갑진에 즉위하여 2년 만에 서거하니 향년 3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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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辰元年. 翰林崔彦撝卒. 年十八, 入唐登第, 還國, 任爲東宮師傅.

갑진(甲辰)년 원년. 한림(翰林) 최언위(崔彦撝)가 죽었다. 나이 18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올라 돌아와 그를 동궁사부(東宮師傅)에 임명하였다.

○ 乙巳二年. 以太祖女長公主, 嫁于弟昭. 公主從母姓, 凡娶同姓, 必稱外氏姓.

을사(乙巳)년 2년. 태조의 따님 장공주(長公主)를 아우 소(昭)에게 시집보내었다. 공주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무릇 같은 성씨와 결혼하였는데 반드시 외씨성이라고 하였다.

◎ 大匡王規, 陰謀推戴王弟, 事覺不問. 一日, 規夜遣刺客於闕內, 王卽驚起, 一擧打殺, 又有穿壁入者, 王預知避禍, 知規所爲, 亦不問. 九月王薨, 立弟堯爲王.

대광 왕규(王規)가 왕의 아우를 추대하려 음모를 꾸몄는데 일이 발각되었으나 죄를 묻지 않았다. 하루는 왕규가 밤에 자객을 궁궐 안에 보냈으나 왕이 바로 놀라 일어나 단번에 때려 죽였다. 또 벽을 뚫고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왕이 미리 알고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왕규의 소행을 알고도 죄를 묻지 않았다. 9월에 왕이 서거하시어 아우 요(堯)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 王規之陰謀覺而不問, 凡在國君之地, 難處者, 是已問之, 則禍及天倫之正而難免. 不問, 則恐有後患及於一國之寶位. 余恐割食邑而封之, 似乎可耳. 同己之難, 何以處之.

왕규의 음모가 발각되었는데도 죄를 묻지 않았던 것은 무릇 국왕의 지위에 있어 난처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를 물었다면 화가 장차 천륜의 바름에 미쳐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죄를 묻지 않았기에 후환이 일국의 보위에까지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식읍(食邑)을 나눠주어 봉하였다면 옳지 않았을까 한다. 한 형제의 어려움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諱堯, 太祖第二子. 後晉開運二年乙巳立, 在位四年, 壽二十七.

휘 요(堯)이며,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후진 개운 2년 을사에 즉위하였다. 재위 4년에 향년 27세이다.

○ 丙午元年. 崔彦撝子光胤, 被虜入契丹. 密報虜情, 於是置光軍司, 以備不虞. 卽位初, 誅王規及諸黨.

병오(丙午)년 원년. 최언위의 아들 광윤(光胤)이 포로가 되어 거란에 들어갔다가 몰래 오랑캐의 사정을 알려 주었다. 이에 광군사(光軍司)를 두어 불의의 난리에 대비하였다. 즉위 초년에 왕규와 같은 무리들을 죽였다.

○ 己酉四年. 王薨, 立同母弟昭爲王. 時, 信其圖讖, 將移都西京, 督丁夫, 營宮闕, 怨讟胥興, 及其薨除役.

기유(己酉)년 4년. 왕이 서거하시어 동복아우 소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때 도참(圖讖)을 믿어 장차 서경으로 천도하려고 장정을 독려하여 궁궐을 세우니 원성이 계속 일어났다. 왕이 서거하자 일을 그만두었다.

◎ 上天使定宗, 假以幾年之壽, 則麗兆庶或可以有望, 宜矣. 厥初, 信其圖讖, 將移都, 覺其不信之信, 而乃止其止也, 亦善矣. 將以是心, 維支麗兆, 則曷嘗有崇奉緇流, 以爲國師王師乎?

하늘이 정종에게 몇 년의 목숨을 빌려주었다면 고려의 복을 거의 바랄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처음에 도참을 믿어 장차 천도할 때에 믿지 못할 믿음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쳤을 것이니 그침이 또한 선한 일인 것이다. 장차 이러한 마음으로 고려의 복을 뒷받침하였다면 어찌 일찍이 불도를 숭상하고 받들어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삼았겠는가?

諱昭, 太祖第三子. 後漢乾祐二年己酉立, 二十六年薨, 壽五十一.

휘는 소(昭)이고 태조의 셋째 아들이다. 후한(後漢) 건우(乾祐) 2년 기유에 즉위하여 26년에 서거하니 향년 51세이다.

○ 庚辰元年. 春正月大風, 拔木. 王問禳災, 司天奏曰, 莫若修德, 自是, 讀習貞觀政要, 與侍臣講論.

경진(庚辰)년 원년. 춘정월에 큰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왕이 재앙을 물리치는 방법을 물으니 천문관이 “덕을 닦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로부터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고 신하들과 강론하였다.

○ 戊午九年. 始設科, 擇文士, 百官公服, 悉從華制. 於是, 文風稍興.

무오(戊午)년 9년. 비로소 과거를 실시하여 문사를 뽑았다. 관리의 복식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니 이로부터 문풍이 점점 흥기하였다.

◎ 司徒朴守卿卒. 事太祖, 從征四方, 功最多矣. 可以爲社稷之臣耳.

사도(司徒) 박수경(朴守卿)이 죽었다. 태조를 섬겨 사방으로 정벌에 참여하니 공이 가장 많았다. 사직의 신하라 할 만하다.

◎ 以僧徒惠居爲國師, 坦文爲王師, 篤信佛敎, 廣創弘化 ․ 游巖 ․ 三歸等寺.

승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坦文)을 왕사로 삼았다. 독실히 불교를 믿고 널리 홍화(弘化) ․ 유암(游巖) ․ 삼귀(三歸) 등의 불사를 지었다.

○ 乙亥二十六年. 王薨, 世子立. 於是, 行大赦, 還流竄, 放囚繫, 毁濫獄, 焚讒書.

을해(乙亥)년 26년. 왕이 서거하여 세자를 세웠다. 이에 대사면을 행하고, 유배를 풀어주었으며, 수감자를 풀어주고, 감옥을 허물었으며 참서(讒書)를 불태웠다.

◎ 景宗在位二十餘年, 信其書史權信之讒, 貶其大相俊弘等, 繼而無辜被戮, 鱗疊無數. 讒侫得志, 朝廷猜忌日甚. 是宜佛流之爲王師, 病國之蔽, 捷於影響. 凡佛流, 念佛而已. 眞念在珠, 珠外物也, 以外物, 灌心而念不及他, 則收放心而止, 安能符合於治平之道乎? 今夫治平之道, 盖自誠意正心, 率性由眞而眞念在於明明德矣. 明其明德而明德明於一國, 則一國可治矣. 明於天下, 則天下可平矣. 有國之君曷嘗以沒頭於佛頭無君之域乎?

경종 재위 20여 년에 벼슬아치들의 참소를 믿어 대상(大相) 준홍(俊弘) 등을 물리쳤다. 계속하여 무고한 이들이 죽임을 당하여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 헤아릴 수 없었고, 참소하고 아부하는 이들이 뜻을 얻으니 조정에는 시기함이 날로 심하여졌다. 이는 분명 불도가 왕사가 되어 나라를 병들게 한 폐단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무릇 불도는 염불을 할 따름인데, 참으로 생각하는 것은 염주에 있다. 염주는 외물인데 외물로써 환심을 사서 다른 이에게 미치지 못하여 놓았던 마음을 추스림에 그친다면 어찌 다스림의 도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다스림의 도는 대개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바로 잡고, 참됨에서 말미암아 본성을 따라 밝은 덕을 밝히는데 전념하는 것이다. 밝은 덕을 밝혀 밝은 덕이 나라에 밝혀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에 밝혀지면 천하가 평안해진다. 나라를 둔 임금이 어찌 불가의 임금도 없이 하는 지경에 몰두한단 말인가?

諱伷, 光宗子. 宋太宗太平興國元年乙亥立, 在位七年, 壽二十六.

휘는 유(伷)요 광종의 아들이다. 송(宋)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원년 을해에 즉위하여 재위 7년이오, 향년 26세이다.

○ 丙子元年. 命金行成入宋國學, 放王詵于外, 禁擅殺復讐. 詵執政, 託以復讐矯殺太祖子天安府院君. 王怒放之. 金溥在丞相位而卒, 贈諡敬順王.

병자(丙子)년 원년. 김행성(金行成)에게 명하여 송나라 국자감에 들어가게 하였다. 왕선(王詵)을 외지로 추방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 복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왕선이 집권하여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마음대로 살해하여 왕이 노하여 추방한 것이다. 김부(金溥)가 승상의 지위에 있다 죽었다. 추증하여 시호를 경순왕(敬順王)이라 하였다.

○ 辛巳六年. 王不豫禪位于從弟開寧君治. 尋薨, 追尊本生父爲王. - 諱旭. 廟號戴宗.

신사(辛巳)년 6년. 왕의 몸이 편치 않아 종제 개녕군(開寧君) 치(治)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거하자 생부를 추존하여 왕으로 삼고-휘 욱(旭)-묘호를 대종(戴宗)이라 하였다.

◎ 金溥大臣也. 贈諡以王, 戴宗本生父而追尊爲王, 是皆新羅無禮之國禮而襲之者也. 命送金行成入宋國學而學禮, 則前轍之蔽習, 亦何嘗遵行之乎?

김부는 대신이다. 시호를 추증하여 왕이라 하고 생부는 대종이라 하였다. 추존하여 왕이라 한 것은 모두 신라에서 예법에 없는 국가의 예법을 따른 것이다. 김행성에게 명하여 송나라 국학에 들어가게 하여 예법을 배우게 하였다면 이전의 잘못된 나쁜 버릇을 어찌 좇아 행하였을까?

諱治, 本生父諱旭. 承景宗而立, 宋太宗太平興國六年辛巳卽位, 在位十六年.

휘 치요, 생부의 휘는 욱이다. 경종을 이어 즉위하였다. 송(宋)나라 태종(太宗) 태평흥국 6년 신사에 즉위하니 재위 16년이다.

○ 壬午元年. 春之春分日, 王躬執耕田, 祀神農, 配以后禝. 夏令京官五品以上, 各上封事, 論時政得失. 時, 上柱國崔承老上疏, 陳二十條數千言, 無非切中時宜, 王嘉納之.

임오(壬午)년 원년. 봄 춘분에 왕이 몸소 밭을 갈고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 지내었으며, 후직(后禝)의 신위를 함께 모셨다. 여름 서울의 5품 이상 관원들에게 각각 글을 올려 시정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때 상주국(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상소하여 20조 수 천 마디 말로 아뢰었는데, 시의에 적절하게 맞지 않는 것이 없어 왕이 칭찬하고 받아들였다.

○ 乙酉四年. 定五服式. - 斬 ․ 齊 ․ 衰百日, 朞三十日, 大功二十日, 小功十五日, 緦七日. 三年喪過百日出仕, 但不與公會宴樂. 收郡縣兵甲, 鑄農器.

을유(乙酉)년 4년. 다섯 가지의 복식을 정하였다. - 참(斬) ․ 제(齊) ․ 쇠(衰) 100일, 기(朞) 30일, 대공(大功) 20일, 소공(小功) 15일, 시(緦) 7일. 삼년상에 백일이 지나면 벼슬에 나가되 다만 공회와 연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군현의 병기를 거두어 농기를 주조하였다.

○ 丙戌五年. 命停罷雜務, 專事勸農, 置義倉, 以慶州爲東京, 置留守鎭之.

병술(丙戌)년 5년. 잡무를 그만두라고 명하고 오로지 권농에 힘쓰게 하였다.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삼아 유수(留守)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 丁亥六年. 命留守 ․ 王琳入宋學. 置十二牧, 經學 ․ 醫學博士, 賜姜邯等及第.

정해(丁亥)년 6년. 유수(留守) ․ 왕림(王琳)에게 명하여 송나라 국학에 들어가게 하였다. 12목(牧)을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를 파견하였다. 강감(姜邯) 등을 급제시켰다.

○ 己丑八年. 頒春令, 命太學助敎宋承演, 超授國子博士. 羅州經學博士全輔仁, 賜公服一襲, 米五十石. 命各道, 廣求孝子順孫, 及節婦, 敎京官, 各擧文武德行者, 始立社稷, 立國子監, 劃付田土. 韓彦恭獻大藏經-自宋還-置常平倉于兩京十二牧.

기축(己丑)년 8년. 봄에 교서를 반포하여 태학조교(太學助敎) 송승연(宋承演)에게 등급을 넘어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제수하고, 나주의 경학박사 전보인(全輔仁)에게 공복(公服) 한 벌과 쌀 50섬을 하사하였다. 각 도에 명하여 효자와 조부모를 잘 받드는 손자와 절부(節婦)를 찾게 하고, 경관(京官)들에게는 각각 문무를 겸비하고 덕행이 있는 자를 천거케 하였다. 처음으로 사직을 세우고, 국자감을 세웠으며, 전토를 나누어 주었다.

○ 丁酉十六年. 侍中崔承老卒, 王不豫, 傳位于姪子開寧君誦, 尋薨.

정유(丁酉)년 16년. 시중 최승로가 죽었다. 왕의 몸이 편치 않아 조카 개녕군(開寧君) 송(誦)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거하였다.

◎ 成王可謂賢哲之君也. 使官府息其雜務, 專務勸農, 夫農國家之大本也. 本固, 則邦寧可期也. 而收郡縣甲兵, 鑄爲農器, 是宜深藏武器於農務之中, 使一國之民, 勤力於稼穡, 只要人人得而食足矣. 生民食足, 則國庫實, 而孰不爲富國, 國庫實, 則孰不爲强兵. 不惟是已, 民無飢色, 而暖衣飽食, 則孝悌忠信之心油然自發, 民生於風化之中, 而政敎善矣. 通古及今, 兵莫强於善治也. 民無血刃, 而遠夷來服, 兵孰加於是, 以今觀之, 西鄙侵略, 而兵不强加, 西鄙請和, 雖有徐熙之功, 其實, 善治之效, 微照矣.

성왕은 현명하고 명석한 임금이라 할 만하다. 관청에서 잡무를 그만두고 오로지 권농에 힘쓰게 하였다. 농사는 국가의 큰 근본이니 근본이 굳으면 나라의 평안함을 기약할 수 있다. 그리고 군현의 병기를 거두어 농기구를 주조하였다. 이는 의당 무기를 농사에 깊이 감추어 일국의 백성이 농사에 부지런히 힘쓰게 한 것이니, 단지 사람마다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한 것만이 아니다. 백성의 먹을 것이 풍족하면 나라의 창고가 가득 차니 누가 다스린들 나라가 부유하게 되지 않겠는가? 나라의 창고가 가득 차면 누가 다스린들 군사가 강하게 되지 않겠는가? 단지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굶는 기색이 없고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부르게 먹게 되면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마음이 절로 생겨 백성들이 풍습을 교화하는 가운데 정교가 선하게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강병함에는 잘 다리는 것보다 강한 것이 없다. 백성들이 전쟁이 없이 되면 먼 곳의 오랑캐들도 와서 복종하게 되니 강병함이 누가 이보다 나을 것이겠는가? 지금을 살펴보면, 서구 오랑캐들이 침략함에 군대를 쓰지 않으면 서구 오랑캐들이 화의를 청할 것이다. 비록 서희(徐熙)와 같은 공이 있더라도 그 실제는 잘 다스림에서 나온 효과인 것이니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諱誦, 景宗子. 宋眞宗至道三年丁酉立, 在位十二年, 壽三十.

휘 송(誦)이오, 경종의 아들이다. 송나라 진종(眞宗) 지도(至道) 3년 정유에 즉위하였다. 재위 12년, 향년 30세이다.

○ 戊戌元年. 以西京爲鎬京, 有山湧出于耽羅海中, 山之始出也. 雲霧晦冥, 地動如雷, 經七晝夜始霽, 山高百餘丈, 周圍四十餘里, 煙氣?羃其上, 望之如石硫黃謂之瑞山.

무술(戊戌)년 원년. 서경(西京)을 호경(鎬京)으로 개칭하였다. 탐라국 바다 가운데서 산이 솟아 나왔다. 산이 처음 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가 어둡고 땅이 우레가 치듯 울리기를 7일 밤낮을 하다가 비로소 걷혔다. 산의 높이는 100여 길이나 되고, 주위는 40여 리이며, 연기가 정상을 가려 멀리서 보면 유황과 같아 서산(瑞山)이라고 불렀다.

○ 癸卯六年. 大良君詢, 遯于三角山神穴寺. 太后皇甫氏通其外族金致陽, 生子謀, 廢立忌詢, 逼之出外.

계묘(癸卯)년 6년. 대량군(大良君) 순(詢)이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피하였다. 태후 황보씨(皇甫氏)가 외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사통하여 아들을 낳아 왕을 폐위시킬 계획을 하고, 순을 꺼려 핍박해 외지로 나가게 한 것이다.

○ 己酉十二年. 康兆入衛弑王, 立大良君詢爲王.-王寢疾不聽政, 召中樞府使蔡忠順秘示封書. 一則劉忠正上言金致陽凶謀, 一則大良君上言奸黨謀害己也. 又曰, 卿與崔沆, 素懷忠義, 盡心社稷, 勿異屬姓, 太祖之孫, 惟大良君在, 亟召之, 遂泣下, 忠順亦泣, 出語. 沆與忠正等, 定議, 迎大良君于三角山, 西北巡檢使康兆至京, 謀廢立, 大良君適至, 遂廢王, 放于積城而弑之, 立大良君. 遷太后于忠州, 誅金致陽等, 初大良君, 有詩曰, 一條流出白雲峯, 萬里滄溟去路通, 莫道潺湲巖下在, 不多時自到龍宮. 太后累欲被害, 老僧窟地匿之.

기유(己酉)년 12년. 강조(康兆)가 궁궐에 들어와 왕을 시해하고 대량군 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 왕의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중추부사(中樞府使)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몰래 봉서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유충정(劉忠正)이 김치양의 흉모에 관해 글을 올린 것이고, 하나는 대량군이 간당(奸黨)이 자신을 해치려고 모의한 것에 대해 글을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와 최항(崔沆)은 평소의 회포가 충의롭고 사직에 마음을 다하니 친척이나 다름이 없다. 태조의 자손으로는 오직 대량군이 있을 뿐이니 빨리 불러들이라”고 하더니 마침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채충순도 역시 울면서 말하였다. 최항과 유충정 등이 의논을 정해 대량군을 삼각산에서 맞이하였다. 서북순검사(西北巡檢使) 강조가 서울에 이르러 폐위하기로 모의하였는데 마침 대량군이 오자 마침내 왕을 폐위하여 적성(積城)으로 쫓아내어 시해하고는 대량군을 세우고 태후를 충주로 옮겼으며 김치량 등을 죽였다. 처음에 대량군이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一條流出白雲峯,

萬里滄溟去路通,

莫道潺湲巖下在,

不多時自到龍宮.

백운봉에서 흘러내리는 물 한줄기

만리의 큰 바다로 통하네.

바위 아래 물길 잔잔하다 말하지 마오,

용궁에 이를 날 그리 멀지 않았구료.

태후가 여러 번 그를 해치려 하였는데 노승(老僧)이 땅을 파서 숨겨주었다.

惜乎! 穆宗之見廢, 而被弑也, 新羅無倫之傳統, 慣習而入於簒逆之心. 故皇甫氏淫昵生子, 而金致陽陰謀廢立, 欲纂高麗之大統者也. 康兆以何俯仰不畏, 而自作弑君之罪也耶? 契丹之亂, 被執於丹主, 而穆宗儼若在於其後, 叱之曰, 天罰, 詎可逃耶? 詎自覺悟, 死罪死罪云云. 然, 天罰至嚴, 那可得追歟?

안타깝도다! 목종의 폐위되어 시해 당함이여. 신라의 질서 없는 전통이 관습이 되어 찬역하는 마음에 들어가 황보씨가 음탕하게도 사통하여 자식을 낳고 김치양은 몰래 폐위할 것을 계획하였으니 고려의 대통을 빼앗으려던 것이었다. 강조는 무엇 때문에 천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을 시해하는 죄를 지었는가? 거란의 난리에 거란의 군주에게 잡혀 목종의 위엄이 마치 뒤에 있는 듯이 꾸짖어 “천벌을 어찌 도망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더니, 스스로 깨닫고는 “사죄하옵니다. 사죄하옵니다.” 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천벌이 지엄하니 어찌 감히 면할 수 있겠는가?

諱詢, 太祖之孫, 宋眞宗太中祥符二年己酉立, 在位二十二年, 壽四十.

휘는 순(詢)이오 태조의 손자이다. 송나라 진종 태중상부(太中祥符) 2년 기유에 즉위하였다. 재위 22년, 향년 40세이다.

○ 庚戌元年. 放宮女一百人, 罷敎坊, 毁閬苑亭, 禽獸龜語放之山澤, 追尊本生父爲王, 廟號安宗-諱郁. 復設燃燈會, 國俗, 正月望, 明燭達曉-是宜佛法. 遷太后于忠州, 誅金致陽.

경술(庚戌)년 원년. 궁녀 100명을 추방하고 교방(敎坊)을 없앴다. 낭원정(閬苑亭)을 허물고 금수와 자라, 어류를 산천에 풀어 주었다. 생부를 추존하여 왕으로 삼고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 휘 욱 - 다시 연등회를 열었다. 국속에 정월 보름에 촛불을 밝히고 새벽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 불법에 맞춘 것이다. - 태후를 충주로 옮기고 김치양을 죽였다.

◎ 以康兆爲行營都統使, 李鉉雲爲副統使, 領兵三十萬, 出鎭通州.-今宣州, 備契丹- 於是, 契丹主, 自將四十萬騎, 至通州, 執康兆誅之. 先是, 兆出通州, 隔水而陣, 以劍車, 排三陣, 丹兵至兆, 合三陣攻之, 無不催靡, 遂有輕敵之心, 與人彈碁, 丹兵先鋒擊破三水砦. 兆聞報, 急起恍惚, 若穆宗立于後, 叱之曰, 天罰, 詎可逃耶? 兆卽脫鍪, 拜跪曰, 死罪死罪. 言未訖, 丹兵已縛兆去, 諸將倂被執, 丹兵乘勝, 斬首三萬餘級, 長驅而攻西京. 智蔡文侍衛南幸, 夜與后妃, 及侍郞蔡忠順等, 率禁軍五十餘, 出京都, 至積城丹棗驛, 武卒堅英, 率驛人, 犯于行宮. 蔡文馳射之, 賊徒奔潰, 至昌化縣, 有吏屬欲以搆亂, 侍臣及宦官嬪御, 皆亡匿. 惟二王后, 二侍女承旨良叶 ․ 忠弼等, 或出或入, 蔡文隨機應變, 賊不敢近. 及曉, 蔡文請二后, 先出北門而去, 手控御馬, 間行入道峯寺, 賊不知之道, 遇河拱辰, 柳宗以領卒二十餘, 圍昌化縣, 搜得賊馬十五匹, 赴行在. 次廣州, 失二王后, 蔡文適至, 乃得奉還, 柳宗等請遣二王后, 蔡文大哭曰, 今君臣, 失道, 橫罹殃禍, 播遷如此, 今棄后求生, 那可忍乎? 次公州, 節度使金殷傅, 備儀郊迎, 仍獻衣帶, 至巴山驛, 吏屬皆遁, 御廚闕膳, 旣而, 聞丹兵已退, 回駕留公州. 金殷傅使其女, 制進御衣, 王幸之. 是爲元成后. 還駕京師, 拜蔡文以爲右僕射.

강조로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현운(李鉉雲)을 부통사(副統使)로 삼아 군대 30만을 이끌고 통주(通州)로 나가 주둔케 하였다. - 지금의 선주(宣州)로 거란에 대비한 것이다. - 이에 거란의 군주가 직접 40만 기병을 이끌고 통주에 이르러 강조를 잡아 죽였다. 이보다 앞서 강조가 통주에 나가 강을 마주하여 진을 치고 칼이 달린 수레로 세 가지 진법으로 늘어놓았다. 거란 군대가 이르자 강조는 세 가지 진법을 합하여 공격해 모두 꺾어버리고 드디어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거란 군대의 선봉이 삼수채(三水砦)를 격파하였다. 강조가 보고를 듣고 급히 일어나 황급하여 마치 목종이 뒤에 서 있는 듯이 “천벌을 어찌 도망할 수 있겠느냐?”라고 꾸짖었다. 강조는 바로 투구를 벗어 절하며 무릎 꿇더니 “사죄하옵니다. 사죄하옵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 군대가 이미 강조를 묶어 가고 여러 장군들로 함께 잡혀갔다. 거란 군대는 승세를 타고 3만여 명의 목을 참수하고, 먼 곳까지 쫓아가 서경을 공격하였다. 지채문(智蔡文)이 임금을 호위하여 남으로 행차하였다. 밤에 태후와 시랑 채충순 등과 궁궐을 지키는 군사 50여명과 도성을 나와 적성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렀다.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을 이끌고 행궁에 침범하였는데 지채문이 말달려 그들을 쏘니 적도가 달아났다.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렀는데 아전들이 난리를 일으키려하자 근신들과 환관, 임금의 첩들은 모두 도망쳐 숨고 오직 두 왕후와 두 시녀, 승지 양협(良叶) ․ 충필(忠弼) 등만이 드나들었다. 지채문이 임기응변을 잘하여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새벽에 지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손으로 말을 잡고 도봉사(道峯寺)의 적들이 알지 못하는 사잇길로 들어갔다. 하공진(河拱辰) ․ 유종(柳宗)을 만나 병졸 20여명으로 창화현을 지키게 하고 적의 말 15필을 찾아내어 행재소로 갔다. 광주에 이르러 두 왕후를 잃어버렸는데 마침 지채문이 이르러 모시고 돌아왔다. 유종 등이 두 왕후를 보내고자 하니 지채문이 크게 울면서 “지금 군신이 법도를 잃고 앙화를 만나 이처럼 파천하고 있는데, 지금 왕후를 버리고 목숨을 구하자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주(公州)에 이르니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격식을 갖추고 교외에서 맞이하며 의대를 바쳤다. 파산역(巴山驛)에 이르니 아전들이 모두 도망하여 임금의 음식을 마련치 못하였는데, 얼마 지나 거란 군대가 이미 퇴각함을 듣고 어가를 돌려 공주에 머물렀다. 김은부가 딸에게 어의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왕이 그녀를 사랑하였으니 바로 원성후(元成后)이다. 어가가 도성에 돌아와 지채문을 우복야(右僕射)로 삼았다.

◎ 凡國君明其賞罰然後, 一國可以治安矣. 一國之賞罰, 不明其義, 惟利是從, 則曷不畏天, 金致陽陰謀不軌, 而害於己. 故罰及於不軌, 而誅之. 康兆弑其君, 而利於己. 故不罰其罰, 而任之以備禦之都統. 天鑑攸照, 罪浮於康兆, 那可以天罰之不及乎? 宜契丹之亂, 是皆顯宗之自招也.

무릇 나라의 임금은 상벌을 분명하게 한 연후에 일국이 다스려져 편안케 된다. 일국의 상벌에 있어 그 의리를 밝히지 않아 오직 이익만을 쫓으면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겠는가? 김치양이 몰래 반역을 꾀하다가 자신에게 해가 미쳤기에 벌이 반역죄에 미쳐 죽임을 당하였고, 강조는 임금을 시해하여 자신에 이롭게 하였기에 죄를 벌주지 않고 도통사(都統使)에 임명하였다. 하늘이 살펴 비추는 바 강조에게 죄가 적용되지 않았으나 어찌 천벌이 미치지 않은 것이겠는가? 마땅하도다. 거란의 난리는 이 모두 현종이 스스로 부른 것이다.

○ 辛亥二年. 春正月, 丹兵入京焚燒廟宮. 王遣河拱辰, 請奉正朔, 丹兵乃退. 修祀紺岳神祠,-丹兵至長湍, 風雪暴作, 神祠若有㫌旗. 丹兵疑有伏兵, 自相失伍, 死傷不計其數. 監察御史安鴻漸奏曰, 昔, 秦符堅望見八公山草木以爲晉兵, 神明所贊, 今古何殊, 請令有司修祠設祭.

신해(辛亥)년 2년. 춘정월 거란 군대가 서울에 들어와 대묘와 궁궐을 불태웠다. 왕은 하공진을 보내 받들기를 청하자 거란 군대가 이에 물러났다. 감악신사(紺岳神祠)에 제사를 지냈다. - 거란 군대가 장단(長湍)에 이르러 바람과 눈이 심하게 일어났다. 신사에 마치 깃발이 있는 듯 하여 거란 군대가 복병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대오가 어지러워 졌고, 사상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감찰어사(監察御史) 안홍점(安鴻漸)이 “옛적에 진(秦)나라의 부견(符堅)이 팔공산(八公山)의 초목을 멀리서 보고 진(晉)나라 군대로 알았다고 했는데, 이는 신명이 도운 것이 고금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청컨대 유사에게 명하여 신사를 고치고 제사를 지내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 龜州別將金叔興追擊契丹, 大破之. 中樞使姜邯贊請修社稷壇.

귀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이 거란을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중추사(中樞使) 강감찬(姜邯贊)이 사직단(社稷壇) 짓기를 청하였다.

◎ 契丹大發兵, 來取六城 - 興化 ․ 通州 ․ 龍州 ․ 鐵州 ․ 郭州 ․ 龜州. 將軍鄭神勇周演, 逆擊大破之.

거란이 크게 군대를 이끌고 와서 6개의 성을 빼앗았다. - 흥화(興化) ․ 통주(通州) ․ 용주(龍州) ․ 철주(鐵州) ․ 곽주(郭州) ․ 귀주(龜州) -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주연(周演)이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 己未十年. 契丹蕭遜寧領兵十萬, 來侵. 上元帥姜邯贊 ․ 副元帥姜民瞻, 拒戰大破之.

기미(己未)년 10년.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군대 10만을 거느리고 내침하자 상원수(上元帥) 강감찬과 부원수(副元帥) 강민첨(姜民瞻)이 대항해 싸워 대파하였다.

○ 甲子十五年. 春旱, 王齊祝引咎, 言未已, 大雨千里. 六月有大石, 自行于高州.

갑자(甲子)년 15년. 봄에 가뭄이 들어 왕이 제계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축원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비가 천리(千里)에 내렸다. 6월 고주(高州)에서 큰 바위가 스스로 움직였다.

◎ 契丹殺高麗使臣河拱辰. 初, 拱辰奉使契丹, 被留久, 市駿馬, 以爲歸計. 丹主鞠問其潛歸, 拱辰曰, 爲故主死, 固爲榮, 寄異國生, 亦傷義. 丹主諭以改圖, 拱辰終不屈, 遂被殺. 王祿其子孫, 㫌表其門.

거란이 고려 사신 하공진을 죽였다. 처음에 하공진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오랫동안 잡혀 있다가 준마를 사서 몰래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거란 군주가 그가 몰래 돌아가려는 것을 국문하니 하공진은 “옛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은 진실로 영광된 것이다. 다른 나라에 머물러 사는 것도 의를 져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거란 군주가 마음을 고쳐먹도록 회유하였으나 하공진은 끝내 굽히지 않아 드디어 살해되었다. 왕이 그 자손에게 봉록을 주고 문에 정려문을 세웠다.

◎ 遣使如宋, 帝詔京東淮南, 築高麗亭館, 以待之. 蘇軾見其壯麗, 有詩歎之.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니 황제가 서울 동쪽의 회남(淮南)으로 불러 고려정관(高麗亭館)을 지어 대접하였다. 소식(蘇軾)이 그 장엄하고 아름다움을 보고 시를 지어 경탄하였다.

○ 丙寅十七年. 命太學奉安文宣王眞像. 先是, 聖德王時, 大監守忠, 自唐還, 摹本而來.

병인(丙寅)년 17년. 태학에 명해 문선왕(文宣王)의 화상을 봉안케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성덕왕 때에 대감 수충이 당에서 돌아옴에 모본을 가져 왔었다.

◎ 新羅翰林薛聰贈弘儒侯, 侍郞崔致遠贈文昌侯, 從祀先聖廟.

신라 한림 설총에게 홍유후(弘儒侯)를 추증하고, 시랑 최치원에게 문창후(文昌侯)를 추증하여 선성묘(先聖廟) 종사하였다.

◎ 史氏曰, 致遠多放跡於仙釋之間, 衛聖道之功未之聞也. 今以靑松鵠嶺黃葉鷄林讖緯之說, 爲有功於祖業, 得配文廟, 非公論也.

사씨는 말한다. “최치원은 선가와 불가 사이에 많은 자취를 남겼으나 성인의 도를 지켰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지금 청송(靑松) 곡령(鵠嶺)의 누른 잎사귀에 계림(鷄林)이라는 글이 쓰여졌다는 참위의 말로 조상의 가업에 공이 있다고 여겨 문묘에 배향하였으니 공론이 아니다.

○ 辛未二十二年. 王薨, 世子立. 靈光郡獻珊瑚樹-高八尺, 枝八十一. 檢校太師天水郡侯姜邯贊卒.

신미(辛未)년 22년. 왕이 서거하여 세자를 세웠다. 영광군(靈光郡)에서 산호수(珊瑚樹)를 바쳤다. - 높이는 8척이고, 81개의 가지가 있다. - 검교태사천수군후(檢校太師天水郡侯) 강감찬이 죽었다.

◎ 邯贊衿川人, 臨大事, 決大策, 屹如山岳, 宋使見之, 不覺下拜曰, 不見文曲星久矣. 今在此耶! 樂道郊居集, 求善集, 皆所著也. 年八十四卒.

강감찬은 금천(衿川) 사람으로 대사에 임해 대책을 결정하니 우뚝함이 산악과 같았다.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내려가 절하며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 향년 84세로 죽었다.

◎ 顯宗反正之初, 不失於賞罰之不明, 則未嘗有契丹之亂, 而和戎結好, 駿良立朝, 外內底寧, 亦可謂中興之美也.

현종이 반정한 처음에 상벌을 분명하게 밝히자 거란과의 난리가 없이 오랑캐와 화친하여 좋은 관계를 맺었고, 인재들이 조정에 올라 내외가 편안하였으니 중흥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겠다.

諱欽, 顯宗子, 宋仁宗明道元 年辛未立, 在位三年, 壽二十四.

휘는 흠(欽)이오, 현종의 아들이다. 송나라 인종(仁宗) 명도(明道) 원년 신미에 즉위하였다. 재위 3년 향년 24세이다.

○ 壬申元年. 契丹使至, 而不納, 遂與絶.

임신(壬申)년 원년. 거란의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드디어 절교하게 되었다.

◎ 命平章事柳韶, 創置北界關城, 跨十四城, 延袤千里, 石城高厚, 各二十五尺.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해 북쪽 국경에 성을 쌓게 하였다. 14개성에 걸쳐 천리에 뻗쳤으며 석성(石城)이 높고 두터워 각각 25척이나 되었다.

○ 甲戌三年. 納金氏爲后, 例稱外族姓.

갑술(甲戌)년 3년. 김씨를 맞이해 왕후로 삼고 예에 따라 외족성이라 하였다.

◎ 兪棨曰, 人之所以異禽獸者, 以其有五倫也. 人倫之本, 始於男女. 故聖人重之, 娶妻必以男女之異姓, 所以附遠厚別也. 故骨肉之親, 雖百世不敢娶, 況至親乎? 麗氏襲羅之謬, 嫁娶姉妹, 不以爲非, 人道天理俱滅矣. 固戎狄之所深恥, 麗風淫辟, 皆在上者之所啓也.

유계(兪棨)가 말하였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이유는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 인륜의 근본은 남녀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에 성인이 중시하였다. 아내를 얻음에 반드시 남녀의 성을 달리 하는 것은 소원한 이를 친히 하고 분별을 두터이 하려는 때문이다. 고로 가까운 친척들 사이에는 비록 100세대나 멀더라도 감히 혼인하지 않는다. 하물며 지극히 가까운 친척임에랴! 고려는 신라의 잘못을 인습하여 자매에게서 아내를 삼고도 잘못이라 여기지 않으니 인도와 천리를 모두 멸하는 것이고, 진실로 오랑캐도 매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고려의 풍속이 음란하고 치우침은 모두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시작한 것이다.

◎ 東方僻在海隅, 謨襲中華之遺風. 故有小中華之稱, 而盖自羅代, 命國子, 入于唐而學唐國之學, 入于宋, 學宋之國學而來, 何有於東國之風敎乎? 一國之政敎, 自國君始, 而羅與麗之同母生, 相潏非一二也. 惟人幸而爲萬物之最靈, 同母而生, 則男稱男, 女稱姉妹, 未嘗有夫婦之稱矣. 苟以相潏, 則未可謂宮合之樂, 是可謂孳尾之交, 孳尾相交, 則爲雄爲雌, 而禽飛獸走無異耳. 其於國政, 更不可道也.

동방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중국의 유풍을 모방한다. 때문에 소중화(小中華)라 불리는데, 대개 신라로부터 국자감의 학생들을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국학에서 배우게 하고, 송나라에 들어가서는 송나라의 국학에서 배우고 오게 하였지만 어찌 우리나라 풍속을 교화함에 이익이 있었겠는가? 일국의 정교는 나라의 임금에게서 시작하는데 신라와 고려는 한 어머니에게서 낳았어도 서로 혼인을 함이 한 둘이 아니다. 오직 사람만이 다행스럽게도 만물의 영장이 되는데 한 어머니에게서 낳으면 남자는 형제라 하고 여자는 자매라고는 하였어도 일찍이 부부라는 칭호는 있지 않았다. 진실로 서로 혼인을 한다면 궁합의 즐거움이라 할 수 없고, 이는 교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미를 한다고 하면 암컷과 수컷이 되어 날짐승과 들짐승이 뛰고 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국정에는 다시 말할 것도 없다.

◎ 王薨, 立弟平壤君亨爲王.

왕이 서거하시어 아우 평양군(平壤君) 형(亨)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諱亨, 顯宗二子, 宋仁宗景祐元年甲戌立, 在位十二年, 壽三十三.

휘는 형이오, 현종의 둘째 아들이다. 송나라 인종 경우(景祐) 원년 갑술에 즉위하였다. 재위는 12년이고, 향년 33세이다.

○ 乙亥元年. 制以立夏, 進氷, 祔德宗於太廟.-禮官奏曰, 若以德宗爲昭, 則三昭二穆非古制也. 與太祖爲六廟. 徐訥曰, 魯有諸侯昭穆之外, 有文武世室依此制.

을해(乙亥)년 원년. 입하(立夏)에 얼음을 바치다. 덕종을 태묘(太廟)에 합사하였다. - 예관(禮官)이 아뢰었다. “만약 덕종을 소(昭)로 삼으면 삼소이목(三昭二穆)이 되니 옛 제도에 맞지 않습니다. 태조와 육묘(六廟) 로 삼으소서.” 서눌(徐訥)이 말하였다. “노나라의 제후들은 소목 외에 문무세실(文武世室)을 두었습니다. 이 제도를 따르소서.”

○ 丙戌十二年. 遣使如契丹. - 修舊好也 - 王薨, 立弟樂浪君徽爲王.

병술(丙戌)년 12년. 사신을 거란에 보냈다. - 옛날의 좋은 관계를 닦음 - 왕이 서거하시어 아우 낙랑군(樂浪君) 휘(徽)를 왕으로 삼았다.

諱徽, 顯宗子, 宋仁宗慶曆六年丙戌立, 在位三十七年, 壽六十五.

휘는 휘요, 현종의 아들이다. 송나라 인종 경력(慶曆) 6년 병술에 즉위하였다. 재위는 37년, 향년 65세이다.

○ 戊戌十二年. 奪昌慶院田柴, 移屬興王寺, - 門下省奏曰, 宮院先王所以優賜田宅, 貽子孫, 傳於萬世者也. 今宗支繁行, 若欲各賜宮院, 猶恐不足, 況今屬于佛寺乎? - 令民有三子, 許一子削髮爲僧, 又以鹽海等州鐵貢, 歸之興王寺.

무술(戊戌)년 12년. 창경원(昌慶院)의 전시(田柴)를 흥왕사(興王寺)에 이속시켰다. - 문하성(門下省)에서 아뢰었다. “궁원에는 선왕께서 전택을 넉넉히 주어 자손에게 물려주고 만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이 번성하여 각 궁원에 주려해도 부족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지금 불사에 이속시켜서야 되겠습니까?” - 백성들에게 자식 셋 중에서 하나는 삭발하여 승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또 염해(鹽海) 등의 고을에서 철을 바쳤는데 흥왕사에 귀속시켰다.

◎ 賞孝子釋珠, 早孤爲僧, 刻木爲父母形, 定省供奉, 如生不懈, 命厚賜.

효자 석주(釋珠)에게 상을 주었다. 어려서 고아로 승이 되어 나무를 깎아 부모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문안드리며 봉양하기를 살아있는 듯이 게으름부리지 않았다. 후하게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 乙巳十九年. 王謂諸子曰, 孰能爲僧, 煦對曰, 臣有出世志. 王乃使剃髮爲僧, 造戈船, 禦東北海賊.

을사(乙巳)년 19년. 왕이 여러 자식들에게 “누가 승이 될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후(煦)가 “제가 불가에 귀의할 뜻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이에 머리를 깎고 승이 되게 하였다. 밑면에 창을 붙인 배를 만들어 동북지방의 해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 丁未二十一年. 春正月上元, 幸興王寺, 設燃燈會, 寺新成, 凡二千八百間, 營十二年, 而告功, 凡五晝夜落之. 自闕庭至寺門, 結綵繃, 連亘相屬, 燈山燭樹, 光明如晝. 王率百官, 行香施納財, 儭佛事之盛, 曠古未有, 又造金塔, 銀四百二十七斤爲心, 金一百四十四斤爲形也. 是歲, 運龍門倉米于西北州鎭.

정미(丁未)년 21년. 춘정월 보름에 흥왕사에 행차하여 연등회를 베풀었다. 불사가 새로 이루어지니 규모가 2천 800칸에 12년 동안 지어 공을 아뢰었다. 무릇 오일 밤낮으로 낙성식을 하는데, 대궐 뜰에서 불사의 문까지 오색 비단 장막을 만들어 서로 이어 뻗치게 하고, 연등이 산을 이루고 촛불이 나무마다 걸려 밝기가 낮과 같았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향불을 피우고 재물을 시주하니 불교 행사의 성대함이 예로부터 없던 것이었다. 또한 금탑을 만들었는데 은 427근으로 뼈대를 만들고 금 144근으로 겉을 입혔다. 이 해에 용문창(龍門倉)의 쌀을 서북 방면의 주와 진으로 옮겼다.

○ 戊申二十二年. 太師崔冲卒-海州人, 歷事五朝, 時望甚重, 人皆師尊之, 稱海東孔子. 其子孫, 以文行致位者, 數十人. 侍郞金悌還自宋.

무신(戊申)년 22년. 태사(太師) 최충(崔冲)이 죽었다. - 해주(海州) 사람으로 다섯 임금을 내리 섬겨 명망이 매우 무거웠고 사람들은 그를 스승으로 높여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였다. 그 자손들은 학문으로 벼슬한 이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랑(侍郞) 김제(金悌)가 송나라에서 돌아왔다.

○ 癸丑二十七年. 侍中崔惟善卒. - 繼世儒宗, 嘗爲中書令, 弟惟吉攝尙書令. 父冲參國老宴, 惟善惟吉, 扶以入, 翰林金行瓊作詩賀曰, 尙書令侍中書令, 乙壯元扶甲壯元, 四世五相, 皆以德望著.-

계축(癸丑)년 27년. 시중(侍中) 최유선(崔惟善)이 죽었다. - 대를 이은 유학의 큰 학자로서 일찍이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아우 최유길(崔惟吉)은 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아버지 최충이 국로연(國老宴)에 참가하게 되어 최유선 ․ 최유길이 부축하고 들어갔다. 한림 김행경(金行瓊)이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상서령이 중서령을 모시고, 차장원이 장원을 부축하네.” 4대에 다섯 재상이 나왔고 모두 덕망이 드러났다. -

○ 乙卯二十九年. 遣使如契丹, 審定鴨綠江疆界.

을묘(乙卯)년 29년. 사신을 거란에 보내 압록강 경계를 정하였다.

◎ 時, 契丹改國號曰遼, 欲過鴨綠爲界, 置城設橋, 屢請毁之不聽. 至是, 朴亮撰表, 有曰, 普天之下, 旣莫非王土, 王臣尺地之餘, 何必曰我疆我理, 遼主覽之, 寢其事.

그때 거란이 국호를 요(遼)라고 고치고 압록강을 넘어와 경계를 삼고자하여 성을 쌓고 다리를 놓아 그때마다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박량(朴亮)이 표문(表文)을 지었는데, “넓은 하늘 아래 이미 왕의 땅 아님이 없거늘 왕신의 조그마한 자투리땅을 어찌 반드시 ‘나의 땅이오, 내가 관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요나라 군주가 이것을 보고 그 일을 그만두었다.

○ 戊午三十二年. 宋使來, 時與宋絶久矣. 及其使至, 擧國欣慶, 宋使呂端之淸名, 互爲傳誦, 久不見中華使命爲恨, 及諫議大夫安燾, 起居舍人陳睦之來, 望之若仙侶同舟, 其例贈衣帶鞍馬, 外所贐, 金銀綵帛, 舟不勝載, 見之者, 莫不失望, 薩摩州人遣使, 來獻土品,-日本別部- 洪原民掘金銀以獻, 命還之.

무오(戊午)년 32년. 송나라 사신이 왔다. 그때 송나라와는 절교한지 오래였다. 사신이 오게 되자 온 나라가 기뻐하였고, 송나라 사신 여단(呂端)의 맑은 이름을 서로 전하며 오랫동안 중국의 사신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고 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안도(安燾)와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이 옴에 바라보니 마치 신선 여동빈(呂洞賓)의 배와 같았는데, 전례에 따라 의대와 말안장 외에 준 금은과 비단을 배에 이루다 싣지 못할 정도여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실망하였다. 살마주(薩摩州) 사람이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바쳤다. - 일본의 별부 - 홍원현(洪原縣)의 백성이 금과 은을 바쳤으나 명하여 돌려주었다.

○ 癸亥三十七年. 秋七月, 王薨, 世子立.

계해(癸亥)년 37년. 가을 7월 왕이 서거하시어 세자를 세웠다.

◎ 李齊賢曰, 文宗躬僅節儉, 進庸賢材, 愛民恤刑, 崇學敬老, 名器不假於匪材, 權威不移於近昵. 雖戚里之親, 無功不賞, 左右之愛, 有罪必罰, 宦官給使, 不過數十輩, 冗官省而事簡, 費用節而國富, 家給人足. 時號太平, 東倭獻琛 ․ 北貊 ․ 受廛, 可謂盛矣. 而獨有徙畿縣, 作梵宇, 黃金爲塔, 殆擬蕭梁, 惜乎!

이제현(李齊賢)이 말하였다. “문종은 몸소 근면하고 검소하며,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형벌을 너그럽게 하였으며,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에게 공경하였다. 중요한 자리에 재주 없는 사람을 등용치 않고 권력을 가까운 사람에게 주지 않았다.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도 공이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으며, 좌우의 아끼는 사람이라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다. 환관과 급사(給使)도 수가 10여명을 넘지 않았다. 쓸데없는 관원을 줄이고 일을 간편하게 하고, 비용을 줄여 나라를 부강케 하였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넉넉하고 풍족케 하니 당시에 태평하다고들 말하였다. 동쪽의 왜구가 보배를 바치고, 북쪽의 종족도 땅을 받았으니 성대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경기지방의 현을 옮겨 불사를 짓고 황금으로 탑을 만들어 거의 소량(蕭梁)에 가깝게 하였으니 안타깝도다.

◎ 嗚呼! 太師崔冲, 可謂麗代名臣. 東邦儒學設校, 自此始, 而世爲儒宗德望, 莫若是至重矣. 厥後四世五相, 惟善惟吉, 繼而名諸當時, 宜是喬木世家, 竊惟文宗, 亦非昏主, 忠諫不拒, 而興王寺之創也, 宏設二千八百間, 而經之十二年, 厥功告訖, 特設燃燈大會, 連五晝夜而落之, 自闕門至佛寺, 綵繃連結, 燈燭相懸, 明光如晝, 王率百官, 行香施納財, 想必太師亦在王之左, 百官之右, 拜佛祈福. 故世爲國祿之臣矣, 所以國君, 今爲親佛之主, 而朝無極諫之臣, 如是, 而有名臣之稱, 竊恐孰不爲名臣乎? 是宜天也, 天運正如此, 那可以人力拒佛也哉?

오호라! 태사 최충은 고려의 명신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유학의 학교를 세움이 여기서 시작되어 대대로 유학의 큰 학자로 추앙되니 덕망이 이처럼 무거운 사람이 없었다. 그 뒤 4대 동안 5명의 재상이 나고, 최유선 ․ 최유길이 이어 당시에 이름났으니 교목세가(喬木世家)라 함이 마땅하다. 가만히 생각건대 문종 또한 우매한 군주는 아니었으니 충성된 간언을 물리치지 않았으나 흥왕사를 창건하여 2천 8백 칸이나 크게 베풀어 12년간을 경영하고, 그 일이 끝남을 알림에 특별히 연등대회를 베풀어 5일 낮밤을 이어 낙성하여 궐문에서 불사까지 오색 비단 장막을 연결하고 등불을 이어 달아 낮처럼 밝혔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향불을 피우고 재물을 시주하였다. 생각건대 반드시 태사 또한 왕과 백관의 좌우에서 부처에게 절하고 복을 빌어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나라의 임금이 지금 부처를 가까이하는 군주가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끝까지 간언하는 신하가 없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명신이라 불린다면 생각건대 누군들 명신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분명 하늘의 뜻이리니 천운이 진정 이와 같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부처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諱勳, 文宗子, 宋神宗元豊六年癸亥立, 在位四月, 壽三十七.

휘는 훈(勳)이오, 문종의 아들이다.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豊) 6년 계해에 즉위하였다. 재위는 넉 달이고 향년 37세이다.

○ 癸亥元年. 冬十月, 王卽位四朔薨, 以遺命, 立母弟國原公運爲王.

계해(癸亥)년 원년. 겨울 10월 왕이 즉위한지 넉 달 만에 서거하였다. 유훈을 남겨 동복(同腹) 아우 국원공(國原公) 운(運)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 王少有疾, 居廬哀毁, 本疾益篤, 命母弟運, 權總國事. 薨于喪次, 李齊賢曰, 顔色之戚, 哭泣之哀, 令弔者大悅, 聞滕文公, 善於執喪, 而今順宗之哀毁, 執喪成疾, 雖過於聖人之制, 然其愛親之誠, 人無間言矣.

왕이 어려서부터 병이 있었는데 시묘살이를 하면서 몹시 슬퍼하여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동복아우 운에게 국사를 담당하게끔 하였다. 상중에 서거하였다. 이제현이 말하였다. “수척한 얼굴과 통곡의 슬픔은 조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쁘게 하였다는 것은 등문공(滕文公)이 상례를 잘 치뤘다는 일로만 들었었다. 지금 순종이 슬퍼하며 상례를 치르다 병을 얻었으니 비록 성인의 제도보다 지나치기는 하지만 부모를 사랑하는 정성은 사람들이 끼어들어 말할 수 없다.

◎ 凡爲王子, 君薨以後, 立承大統, 則顧一身, 宜非一人之所獨也. 乃一國之所共尊也, 至尊莫若是, 而居于一國仰賴之地, 喪次一節, 委諸同母弟國原公, 日與賢良方正之臣, 講論治民之政策, 民生於善治之中, 國家安寧, 是國君之善策也. 曷嘗以哀毁逾制, 至於傷孝之域乎? 且夫國哀所以國民之所同哀也. 不但爲孤哀之痛, 而痛深疾篤也歟? 今王年之喪, 無貴賤之通喪也. 奈之何痛號絶己, 喪四朔而止乎?

무릇 왕자가 되어 임금이 서거하신 이후에 대통을 이으면 자신은 마땅히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다. 바로 온 나라에서 함께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극히 존귀함이 이같은 것이 없다. 온 나라가 우러르고 의지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상례의 한갓 절차에 동복아우 국원공에게 나라를 맡겼구나. 날마다 어질고 품행이 바른 신하들과 백성을 다스리는 정책을 강론하여 백성들이 잘 다스려지는 가운데 살게 되어 국가가 안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임금이 잘 다스리는 것이다. 어찌 슬퍼함에 법도를 넘어서 효를 상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또한 국상은 국민들이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단지 홀로 슬피 통곡하다 애통함이 깊어져 병이 위독해지는 지경에 이른 것만은 아니다. 지금 삼년상이 귀천에 상관없이 행해지는 상례가 되었으니 어찌하여 애통함에 자신을 상하여 상이 난지 넉달만에 그치고 말았는가?

諱運, 文宗次子, 宋神宗元豊七年甲子立, 在位十一年, 壽四十六.

휘는 운이오, 문종의 둘째 아들이다. 송나라 신종 원풍 7년 갑자에 즉위하였다. 재위는 11년이오, 향년 40세이다.

○ 甲子元年. 定三年一試法,-進士三年一試- 初立僧科, 依進士例.

갑자(甲子)년 원년. 삼 년에 한번 과거를 치르는 법을 정하였다. - 진사(進士)는 삼 년에 한번 시험을 본다. - 처음으로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는데 진사과의 예를 따랐다.

○ 丙寅三年. 下令求言, 群臣封事, 多言俗尙侈靡之弊. 乃令有司, 凡衣服車馬定恒式.

병인(丙寅)년 3년. 명령을 내려 간언을 구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다. 대부분 풍속에서 사치함을 숭상하는 폐단이 많다고 하여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든 의복 ․ 거마의 일정한 제도를 정하게 하였다.

◎ 王弟釋煦, 還自宋, 宋帝引見, 待以客禮, 使之遊覽吳中諸寺, 命賜內府秘藏古今書籍數千卷.

왕의 아우 석후(釋煦)가 송나라에서 돌아왔다. 송나라의 황제가 데려다 보고는 객례로 대우하고 오(吳) 땅의 여러 절을 유람케 하였고, 내부에 보관했던 고금의 서적 수 천 권을 주었다.

○ 庚午七年. 普濟寺水陸堂失火. 初崔士謙入宋, 求水陸儀文, 請作是堂, 工未畢而火.

경오(庚午)년 7년. 보제사(普濟寺) 수륙당(水陸堂)에 불이났다. 처음에 최사겸(崔士謙)이 송나라에 들어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구하여 이 당을 짓고자 청하였는데,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불이 났다.

○ 甲戌十一年. 王薨, 世子立. 圖孔門七十二賢像於國子壁上.

갑술(甲戌)년 11년. 왕이 서거하시어 세자를 세웠다. 공자 문하 72현자의 화상을 국자감 벽에 그렸다.

◎ 善乎! 王卽位之初, 下敎求言, 求言所以求忠諫直言也. 然而群臣封事, 止於俗尙侈靡之弊, 未嘗以明德新民之道, 及於保國安民之術, 朝無賢臣, 從可認也. 以是, 要其求保安之術, 於佛敎中也歟? 初立僧科, 抑以是也. 然以開妖僧立朝之路, 明矣.

좋도다! 왕의 즉위 초에 하교하여 간언을 구한 것은 충언과 직언을 구하려 함이다. 그러나 여러 신하의 상소문은 풍속이 사치함을 숭상한다는 폐단에만 그치고 일찍이 밝은 덕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로써 보국안민(保國安民)하는 방법에는 미치지 않았었다. 조정에 어진 신하가 없음을 이로써 알 수가 있다. 이 때문에 보국안민의 방법을 불교에서 구하려 한 것인가? 처음으로 승과를 설치함은 아마도 이 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요승이 조정에 서는 길을 열었음이 분명하다.

諱昱, 宣宗子, 宋哲宗昭聖元年甲戌立, 在位一年禪位, 壽十四.

휘(諱)는 욱(昱)이니 선종의 아들이다. 송(宋) 철종(哲宗) 소성(昭聖) 원년인 갑술년(1094)에 즉위했다. 1년간 재위하고 왕위를 선양하였다. 수(壽)는 14세이다.

○ 己亥元年. 王遜位于叔父鷄林公熙.

기해(己亥)년 원년(1095) 왕이 숙부인 계림공(鷄林公) 희(熙)에게 왕위를 선양하였다.

◎ 時鷄林公, 以中書令, 總內外兵馬, 削平內亂, 威望日隆. 金德均等, 奉大寶, 迎鷄林公于宗邸, 卽位.

당시 계림공은 중서령(中書令)으로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총괄하고 있으면서 내란을 평정하여 위엄과 덕망이 날로 융성하였다. 김덕균(金德均) 등이 대보(大寶)를 받들고 계림공을 그의 저택에서 맞아들여 즉위한 것이다.

◎ 史氏曰, 獻肅授受之際, 只載其雍容揖遜之美, 略不及凌逼脅制之狀. 然以愚所見, 多有可疑. 盖獻雖幼冲, 亦年過齠齕, 旣是當立之位, 名號已定. 安有一朝, 將大寶, 輕以與人? 肅宗, 地逼望尊, 旣除李資義立昀之亂, 使一國威權, 盡歸於己, 則獻宗雖不欲禪, 勢固不可得也. 然則非纂奪而何? 明年, 獻宗卽薨, 此尤可疑也. 不然, 恭殤之諡, 獻廟之號, 豈待睿宗之時乎?

사씨(史氏)는 말한다. “헌종과 숙종이 왕위를 주고받을 즈음에 단지 온화하게 절하며 선양한 아름다운 기록만이 역사서에 실려 있고 대략 능멸, 핍박하며 강제로 협박한 상황에 대해선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의 소견으로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이 있다. 대개 헌종이 비록 어렸었지만 나이가 이미 10여세가 지났으며 이미 즉위하여 왕위에 올라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졌다. 어찌 하루아침에 대보를 가벼이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단 말인가? 숙종은 지체가 지존(至尊)을 바라보기에 가까우며 이미 이자의(李資義)가 균(昀)을 세우고자 일으킨 난을 진압하여 일국의 권세가 모두 자기에게 귀속되었던 바, 헌종이 비록 선양하지 않고자 하여도 형세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즉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듬해에 헌종이 곧바로 훙(薨)하였으니 이 또한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상(恭殤)’이라는 시호와 ‘헌묘(獻廟)’라는 능호가 어찌 예종(睿宗) 때를 기다려야 했을 것인가?”

◎ 愚恐惟以詩歎惜之. 昔周盛時政敎明, 成王有叔動仁聲. 天倫至正順天理, 那可滅倫違道行.

나는 이러한 점을 의심하여 시를 지어 탄식한다.

昔周盛時政敎明,

成王有叔動仁聲.

天倫至正順天理,

那可滅倫違道行.

옛날 주나라가 번성하였을 때 정교(政敎)가 분명하여

성왕(成王)에게 숙부가 있어 어진 명망이 일 세를 울렸네.

천륜은 지극히 엄정하여 하늘의 이치를 따라야 할진대

어찌 인륜을 멸하고 천도를 어겨 행할 수 있으리오?

諱熙, 改顒, 文宗第三子. 宋哲宗絡聖二年乙亥立, 在位十年, 壽五十二.

휘(諱)는 희(熙)인데 옹(顒)으로 개명하였으며, 문종(文宗)의 셋째 아들이다. 송나라 철종(哲宗) 낙성(絡聖) 2년 을해년(1095)에 즉위하였다. 재위 연수는 10년이고, 수는 52세이다.

○ 丙子元年. 夏四月, 降霜.

병자(丙子)년 원년.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 丁丑二年, 閏二月, 前王薨.

정축(丁丑)년 2년. 윤 2월에 전왕이 훙하였다.

◎ 前年霜變, 是宜凶徒謀亂, 前王含寃, 化爲災殄者, 明矣. 天討之不及, 而曷嘗天之所戒, 猶如是乎!

전년 여름에 서리가 내린 변고는 의당 흉악한 무리들이 난을 꾀하자 전왕이 원한을 품었는데 이것이 화하여 재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하늘의 토벌은 미치지 못하였지만 하늘이 경계하는 바를 보여준 것은 오히려 이와 같은 것이었다.

○ 令以近親婚嫁者, 不通仕路, 文廟左右廟, 盡從祀先賢.

근친으로 혼인을 맺은 자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영(令)을 내렸다. 문묘(文廟)의 좌우묘에 모두 선현을 종사(從祀)하도록 했다.

○ 己卯四年, 王幸楊州, 相畿都之地, 議建南京.

기묘(己卯)년 4년. 왕이 양주(楊州)에 행차하였다가 기도(畿都)의 땅을 보고 의논하여 남경(南京)으로 삼도록 했다.

○ 癸未八年, 立箕子祠, 封墳塋, 置守廬. 於是, 歷代未遑之祀典, 一朝盡備.

계미(癸未)년 8년. 기자(箕子)의 사당을 세우고 분묘를 조성하였으며 여막(廬幕)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이에 역대 임금 중 미처 사전(祀典)에 오르지 못한 분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갖추어 지게 되었다.

○ 乙酉十年, 地境見於西京龍德部, 其像, 如冰如影. 王幸西京, 而薨于道 - 玩地境而還, 未入宮. 上蒼如載豈無天? 鉗民萬口防如川. 前王含寃靈惟在, 放出西京神目懸. 神目地境.

을유(乙酉)년 10년. 지경(地境)이 서경(西京) 용덕부(龍德部)에 나타났는데 그 형상은 얼음과도 같고 그림자 같기도 하였다. 왕이 서경에 행차하였다가 도중에서 훙하였다. - 지경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미처 궁에 들어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上蒼如載豈無天?

鉗民萬口防如川.

前王含寃靈惟在,

放出西京神目懸.

머리 위에 있는 푸른 하늘 어찌 천령(天靈)이 없을 손가?

백성의 입에 재갈을 물림은 강을 막는 것과 같은 법.

전왕께서 원한을 품어 영괴(靈怪)가 있게 되니

서경으로 내치고 신목(神目)을 걸어놓았네.

諱俁, 肅宗子. 宋徽宗崇寧四年乙酉立. 在位十八年, 壽四十五.

휘는 우(俁)이고 숙종의 아들이다.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4년 을유년에 즉위하였다. 재위 연수는 18년이고, 수는 45세이다.

○ 丙戌元年. 始上前王廟號, 曰獻宗.

병술(丙戌)년 원년. 처음으로 전왕의 묘호(廟號)를 제정하여 올렸는데, ‘헌종(獻宗)’이라고 하였다.

○ 甲午九年, 八月, 王釋奠于國學. 將事畢, 御講堂, 命翰林學士朴昇中, 講商書說命.

갑오(甲午)년 9년. 8월 왕이 국학(國學)에서 석전제를 행하였다. 의례가 끝날 때에 강당(講堂)에 나아가 한림학사(翰林學士) 박승중(朴昇中)에게 명하여 상서(商書), 열명(說命) 편을 강하도록 하였다.

○ 丙申十一年, 作淸讌閣, 置學士, 直宿禁中, 以爲朝夕講學之任.

병신(丙申)년 11년. 청연각(淸讌閣)을 완성하고 학사(學士)를 두어 대궐 안에서 숙직하면서 조석으로 강학(講學)하는 일을 맡아 하도록 하였다.

○ 王親祼太廟, 始用大成樂, 以備郊廟之樂, 是宋帝之所賜也. 又以手詔褒之.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술을 올리면서 처음으로 대성악(大晟樂)을 사용하여 종묘에 사용하는 음악을 갖추었는데 이는 송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었다. 왕은 직접 조서를 써서 이 사실을 기리었다.

○ 迎佛骨, 置禁中-自宋至.

부처의 사리를 맞이하여 대궐 안에 안치했다. - 송나라에서 온 것이다.

○ 壬寅十七年, 夏四月, 王疾病, 憑几, 顧命于宰輔, 以大寶授世子而薨.

임인(壬寅)년 17년. 여름 4월 왕이 병에 걸려 안석에 기댄 채 재상에게 유명을 전하여 세자에게 대보를 물려주고 훙하였다.

◎ 善政之務本, 有五. 其一, 上前王廟號, 以正麗繼之大統. 其二, 置國學七齋, 擇英才而分處之, 日與講論. 易之麗澤, 書之待騁, 詩之經德, 周禮之求仁, 戴禮之服膺, 春秋之養正, 武學之講藝, 各具一齋. 其三, 親釋奠于國學, 將事畢, 御講堂, 令學士講商書說命. 其四, 立養賢庫, 以儲國學養士之需. 其五, 徵東山處士郭輿, 日與講習政治之學. 是五者, 只要善治而力求者也. 苟或繼世而作, 以睿宗之心爲心, 則麗代之文明, 庶其有輔於吾東矣. 然聽信李資謙, 以釀後日之患, 亦可謂面白之一黑疵也.

예종은 선정(善政)의 근본에 힘쓴 것이 다섯 가지 있다. 첫째, 전왕의 묘호(廟號)를 올려 고려 왕조 계승의 대통을 바로잡은 것이다. 둘째, 국학에 칠재(七齋)를 설치하고 영재를 가려 뽑아 나누어 거처하도록 하며 날마다 함께 강론토록 한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학문과 덕을 쌓는 것을 배우고, 서경(書經)에서 손님 접대함을 배우고, 시경(詩經)에서 떳떳한 덕을 배우고, 주례(周禮)에서 인을 추구함을 배우고, 대대례(大戴禮)에서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예를 배우고, 춘추(春秋)에서 올바름을 기르는 것을 배우고, 무학(武學)을 통해 무예를 익히는데, 각기 하나의 재실(齋室)을 갖춘 것이다. 셋째, 왕이 친히 국학(國學)에서 석전제를 행하고, 의례가 끝날 즈음에 강당(講堂)에 나아가 학사(學士)로 하여금 상서(商書) 열명(說命)편을 강하도록 한 것이다. 넷째, 양현고(養賢庫)를 세워 국학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수요에 대비한 것이다. 다섯째, 동산(東山) 처사 곽여(郭輿)를 불러들여 날마다 정사에 필요한 학문을 강습토록 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정사를 잘 하는데 요구되는 사항 중 힘써 추구한 것으로 참으로 대대로 이를 계승하여 예종(睿宗)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다면 고려 왕조의 문명은 우리 동방에 많은 보탬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이자겸(李資謙)의 말을 좇아 훗날의 환란을 양성(釀成)한 것은 또한 ‘하얀 바탕의 한 점 얼룩’이라고 할 것이다.

諱楷, 睿宗子. 宋徽宗宣和四年壬寅立. 在位二十四年, 壽三十八.

휘는 해(楷)이고 예종의 아들이다. 송 휘종(徽宗) 선화(宣和) 4년 임인년(1122)에 즉위하였다. 재위 연수는 24년이고, 수는 38세이다.

○ 癸卯元年. 增築西鄙長城, 移封李資謙, 爲朝鮮公.

계묘(癸卯)년 원년. 서비장성(西鄙長城)을 증축하고, 이자겸(李資謙)을 다시 조선공(朝鮮公)으로 봉하였다.

○ 丙午四年. 知樞密智祿延等, 謀誅李資謙拓俊京, 而不克. 於是, 資謙等, 擧兵犯闕, 劫王遷南宮, 左僕射洪灌, 死之. 智祿延安甫鱗等, 俱被害. 自是, 李資謙, 畜跋扈之志, 劫王移御其第, 以拓俊京爲門下侍郞判兵部事. 內醫崔思全, 奉密勅, 諭俊京曰, 效力王室, 以斥資謙, 俊京去資謙. 未幾, 拓俊京執李資謙, 囚之, 資謙惑於十八字爲王之讖, 陰謀不軌, 取軍器甲兵, 私藏其家, 送毒藥於王妃, 令進之. 妃奉椀, 陽蹶覆之, 妃, 資謙第四女. 尙書金珦見俊京, 泣勉忠義, 俊京擐甲入宮, 奉王以出, 流資謙及其妻子支黨遠地, 廢二妃李氏.-皆資謙女也- 資謙死於貶所.

병오(丙午)년 4년. 지추밀(知樞密) 지록연(智祿延) 등이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이에 이자겸 등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하고 왕을 겁박하여 남궁(南宮)으로 옮겨가도록 했으니, 좌복야(左僕射) 홍관(洪灌)이 죽었으며 지록연과 압보린(安甫鱗)등도 해를 입었다. 이때부터 이자겸은 제멋대로 날뛰려는 마음을 먹고 왕을 협박하여 자신의 집으로 옮겨 거하도록 했으며, 척준경을 문하시랑판병부사(門下侍郞判兵部事)로 삼았다. 내의 최사전(崔思全)이 왕의 밀지를 받들어 척준경을 효유하였는데 “왕실에 힘을 다하여 이자겸을 물리치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거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척준경은 이자겸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이자겸은 ‘십팔(十八)의 글자를 쓰는 이가 왕이 된다.’는 참언에 혹하여 은밀히 반역을 꾀하여 군기(軍器)를 사들이고 병사를 무장하여 그 집에 사병을 감추어 두었다. 왕비에게 독약을 보내어 왕에게 바치도록 하니 왕비가 약사발을 받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약사발을 쏟았는데, 왕비는 이자겸의 넷째 딸이다. 상서(尙書) 김향(金珦)이 척준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충의(忠義)에 힘쓸 것을 하소연하니 척준경이 갑옷을 몸에 걸치고 궁궐로 들어가 왕을 모시고 빠져나온 것이다. 이자겸 및 그의 처자와 주변의 무리들을 변방으로 유배 보내고, 두 왕비 이씨 -모두 이자겸의 딸이다-를 폐위하였다. 이자겸은 귀양지에서 죽었다.

○ 戊申六年. 宋遣使諭假道, 奉還二帝. 徽欽二帝播御之地, 接我北界, 帝使刑部尙書楊應誠, 來諭之, 廷臣, 皆以金國强暴爲患, 議未決. 應誠乃還.

무신(戊申)년 6년. 송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모시고 돌아오고자 하였다. 희종과 흠종 두 황제가 붙잡혀 있는 지역이 우리나라 북쪽 경계와 접해 있기에 황제가 형부상서(刑部尙書) 양응성(楊應誠)을 보내 선유하도록 한 것이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금나라의 국세가 강하고 포악함을 근심하여 논의가 결정이 나지 않자 양응성은 돌아갔다.

○ 壬子十年. 王幸西京, 惑於妖僧妙淸之邪術也. 妙淸曰, 王脉已衰, 王氣微浮於西京. 王以移都之策, 幸至金巖驛, 風雨暴作, 白晝晦冥, 故未決而還御. 翌年, 妙淸與柳旵趙匡等, 據西京叛. 置僞官, 國號大爲建元天開. 王以金富軾爲元帥, 討之. 富軾進屯安北府. 西京人, 斬妙淸等, 請降.

임자(壬子)년 10년.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요승 묘청(妙淸)의 사술(邪術)에 현혹되었다. 묘청이 말하길 “왕가의 기운이 이미 쇠하였는데 서경에 얼마간 기운이 떠있다”고 하자, 왕은 도읍을 옮길 계책을 하고 행차하여 금암역(金巖驛)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고 백주 대낮이 캄캄한 밤처럼 변하였다. 이 때문에 결정하지 못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이듬해 묘청은 유참(柳旵), 조광(趙匡) 등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멋대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세워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왕이 김부식(金富軾)을 원수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김부식은 안북부(安北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경 사람들이 묘청 등의 목을 베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 復李資謙爵, 以其妻爲卞韓國夫人.

이자겸의 관작을 복구하고 그 아내를 변한국부인(弁韓國夫人)으로 삼았다.

○ 丙辰十四年. 金富軾, 拔西京而凱還.

병진(丙辰)년 14년. 김부식이 서경을 공략하고 개선하였다.

○ 丙寅二十四年. 二月, 王傳位於世子, 尋薨.

병인(丙寅)년 24년. 2월 왕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얼마 있다가 훙하였다.

◎ 凡爲國君而不能察權臣之情僞, 委諸國戚, 屈於情私, 則社稷之安危, 係於奸臣弄錘之如何耳. 一 錙銖之差, 寶位不全, 黎民塗炭, 遽有天命不常之極, 而上不能斥邪近賢, 下不能爲國盡忠, 陰謀不軌, 變怪疊生, 是亡國之幾也歟. 見誣於妙淸, 而貽其西京之變, 信任於資謙, 而資謙陰畜跋扈, 劫王移御, 又有置毒之變. 而專私蔑公, 復其爵於地下瞑目之中, 仁宗可謂釀成後世亂臣賊子之君主也.

무릇 한 나라의 임금된 자로서 권신의 거짓된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외척에게 국사를 위임하며 사사로운 정에 이끌린다면 사직의 안위가 간신이 제멋대로 저울질하는데 달려 있게 될 뿐이다. 터럭같이 작은 착오에도 왕위가 보전되지 못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이다. 천명은 일정치 않은 것인데도 임금이 사악한 이를 물리치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지 못하면 아래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게 되어 법도에서 벗어난 음모가 횡행하고 변괴가 끊임없이 발생하니, 이는 바로 나라가 망할 조짐인 것이다. 묘청에게 속임을 당하자 서경의 변란이 일어났으며, 이자겸을 신임하자 이자겸이 은밀히 발호할 뜻을 길러 왕을 겁박하여 거처를 옮기게 하고 또 독약까지 먹이려는 변괴를 일으켰다. 그런데도 사사로운 은정만을 내세우고 공의(公義)는 없이 하여 지하에 잠들어 있는 이의 관작을 복구하였다. 이러하니 인종은 난신적자(亂臣賊子)를 기르는 군주라고 할 것이다.

諱晛, 仁宗子. 宋高宗 紹興十六年丙寅立. 在位二十四年, 壽四十七.

휘는 현(晛)이고 인종(仁宗)의 아들이다. 송 고종(高宗) 소흥(紹興) 16년 병인년(1146)에 즉위하였다. 재위 연수는 24년이고 수는 47세이다.

○ 丁卯元年. 鎖北門, 禁群小出入. 王善擊球, 開壽昌宮. 臺臣力諫而鎖之, 校尉仲夫等, 擅開宮門, 不能禁.

정묘(丁卯)년 원년. 북문(北門)을 봉쇄함으로써 군소배들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왕이 격구(擊毬)를 좋아하여 수창궁(壽昌宮)을 열도록 하니 대신(臺臣)들이 극력 간하여 이를 봉쇄한 것이다. 교위(校尉) 정중부(鄭仲夫) 등은 제 마음대로 궁문을 열고 출입하였으나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 辛未五年. 開國伯金富軾卒. 在朝宋使路允迪, 見而壯之, 載富軾家世, 又寫眞而歸, 奏于帝.

신미(辛未)년 5년. 개국백(開國伯) 김부식이 졸하였다. 조정에 있던 송나라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이를 보고는 장하게 여겨 김부식의 가계와 그 초상을 그려 싣고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주달했다.

○ 癸未十七年. 王幸觀瀾寺, 金碧相輝, 文石爲階, 名花珍果. 尤爲絶勝. 景搆亭重美亭淸靈齋, 引遠水爲池, 鳧鴈荷葦, 宛有江湖之狀. 與文士賦詩酣歌, 全無君臣之分. 但侍衛將卒, 經夜飢困, 怨憤日甚.

계미(癸未)년 17년. 왕이 관란사(觀瀾寺)에 갔다. 단청이 찬란하고 무늬 있는 돌을 섬돌로 삼았으며 이름 있는 꽃과 진귀한 열매가 가득하였다. 그중 더욱 뛰어난 경치는 경구정(景搆亭), 중미정(重美亭), 청령재(淸靈齋) 등이었는데, 강물을 끌어들여 연못으로 만들어 오리와 기러기, 연꽃과 갈대가 아름다워 완연히 강호(江湖)의 정취가 있었다. 문사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는데 전연 군신간의 구별이 없었다. 단지 시위하는 장졸(將卒)들만 밤새도록 굶주림에 시달렸으니 무인들의 분노가 날로 더해갔다.

○ 遷太后任氏於普濟寺. 太后愛小子大寧候璟, 王怨之, 欲流之, 恐後救之. 乃先遷也. 繼而竄璟于天安府.

태후(太后) 임씨(任氏)의 거처를 보제사(普濟寺)로 옮겼다. 태후는 작은아들 대녕후(大寧候) 경(璟)을 사랑하였으므로 왕이 이에 노하여 그를 유배 보내고자 하였는데 태후가 이를 구원해줄 것을 염려하여 먼저 거처를 옮긴 것이다. 이어서 경을 천안부(天安府)로 유배 보냈다.

○ 田中, 有生金, 如龜形. 詞臣撰頌而謂之天瑞. 是歲, 狼星, 見于南極.

밭에서 금 덩어리가 나왔는데 모양이 거북이처럼 생긴 것이었다. 글에 능한 신하가 송(頌)을 지으면서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상서로움’이라고 했다. 이 해에 낭성(狼星)이 남극에 나타났다.

○ 庚寅二十四年. 王幸普賢院. 武臣鄭仲夫等, 逼王逐宮, 大殺朝臣. 仲夫亦以匹馬, 載王及世子, 放于海島, 殺其幼孫.

경인(庚寅)년 24년.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였는데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핍박하여 궁궐에서 내쫓고 조정의 신하들을 대부분 살해하였다. 정중부는 또한 말 한 필에 왕 및 세자를 실어 해도(海島)로 쫓아 보내고 어린 손자들을 살해하였다.

◎ 在上而無禮, 在下者而好犯上, 猶濁流於上, 流下益溷也. 蓋凡國君之有臣, 尊卑定位, 上下有分, 天定之秩序也. 造次不離, 而與文士賦詩, 全無君臣之分, 國之不亡, 猶云幸耳. 然則朝廷之變, 乃朝廷也, 非仲夫也, 放出之患, 今王之自招也, 非仲夫之自擅也. 亡國之漸, 與夫履霜, 何異? 其漸乎哉!

윗자리에 있으면서 예의를 차리지 못하면 아래에 있는 자가 윗사람을 범하기 좋아하게 되니 이는 마치 상류에 있는 탁류가 하류로 흐르면서 더욱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무릇 나라의 임금에게 신하가 있으면 존비(尊卑)에 따라 그 자리가 정해짐은 하늘에서 정해준 질서라 할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이를 어겨서는 안 될 것인데 문사들과 더불어 시를 지으면서 전혀 임금과 신하간의 구분이 없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즉 조정의 변고는 곧 조정 때문이지 정중부 때문이 아닌 것이고, 임금 자리에서 내쫓겨난 환란은 바로 왕이 자초한 것이지 정중부가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점차 망해감이 저 서리를 밟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들어가는 것이로다.

諱皓, 仁宗子. 宋孝宗乾道六年立. 于庚寅, 在位二十七年, 壽七十二.

휘는 호(皓)이고 인종(仁宗)의 아들이다. 송 효종(孝宗) 건도(乾道) 6년인 경인년에 즉위했다. 재위 연수는 27년이고, 수는 72세이다.

○ 辛卯元年. 武臣會朝堂, 有欲盡殺文官, 仲夫止之. 文克謙, 旣爲文臣, 然武臣亦多倚之, 咨問故事. 且以女嫁于義方之弟, 故僅得免兵禍. 於是, 以文克謙, 爲右丞宣.

신묘(辛卯)년 원년. 무신들이 조당(朝堂)에 모여 문관을 모두 죽이려고 하니 정중부가 이를 제지하였다. 문극겸(文克謙)은 문신이었지만 무신들 또한 그에게 많이 의지하면서 고사(故事)에 대해 자문하였다. 또 그의 딸이 이의방(李義方)의 아우에게 시집갔기도 해서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문극겸을 우승선(右丞宣)으로 삼았다.

○ 庾應圭還自金, 以國命, 奉表如金. 金主曰, 廢君簒位, 宜行天討. 應圭曰, 前王有疾, 禪位于弟, 金主終不回詔. 應圭曰, 使於隣國, 不辱君命, 臣之職也. 因不食凡七日, 氣息將絶, 金主嘉其忠義, 乃答表. 金使繼以至, 王迎金使, 明言前王病中傳禪之意.

유응규(庾應圭)가 금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유응규는 국명(國命)으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금나라에 갔는데, 금나라 군주가 말하길 “임금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의당 토벌을 행할 것이다”고 하자, 유응규가 대답하길 “전왕께서 질병이 있어 아우에게 선양한 것입니다”하였다. 금나라 군주가 끝내 회답 조서를 내리지 않자 유응규가 말했다.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군왕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음이 신하의 직분입니다”. 인하여 음식을 먹지 않은 지가 7일이 되었으니 장차 숨이 끊어지려 하였다. 금나라 군주가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이에 회답하는 표문을 내려주었다. 이어서 금나라 사신이 이름에 왕이 금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전왕이 병중에 선양하였다는 뜻을 명백히 말하였다.

○ 癸巳三年. 諫議大夫金甫當, 起兵討鄭仲夫等, 奉前王, 出居慶州. 旣而, 在朝文臣, 擧爲仲夫所殺, 亦以李義旼弑前王于慶州, 合兩釜, 投之淵中, 忽大風, 飛沙揚塵, 釜自出水.

계사(癸巳)년 3년.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鄭仲夫) 등을 토벌하고자 하여 전왕을 모셔다가 경주에 있게 하였다. 얼마 안돼 조정에 있는 문신들이 모두 정중부에 의해 살육 당하였다. 또 이의민(李義旼)이 전왕을 경주에서 시해하고는 그 신을 큰 솥 두 개를 합한 것에 담아 연못에 던지자 홀연히 바람이 크게 불어 모래 먼지를 날리더니 솥이 저절로 물 밖으로 떠올랐다.

○ 乙未五年. 五月, 始發前王喪, 位罷, 發檄聲討, 弑君不葬之罪. 朝廷始擧哀.

을미(乙未)년 5년. 5월 비로소 전왕의 초상을 치루었다. 역사가 끝나자 격문을 돌려 군주를 시해하고 장례조차 치르지 않은 죄를 성토하니 조정에서 비로소 애통함을 표시하였다.

○ 丁巳二十七年. 熒惑入大微. 九月, 崔忠獻廢王, 幽之昌樂宮, , 放世子于江華, 立王弟平凉公旼.

정사(丁巳)년 27년. 형혹성(熒惑星)이 대미성(大微星)의 자리를 침범하였다. 9월 최충헌(崔忠憲)이 왕을 폐위하여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하고 세자를 강화도로 쫓아냈으며, 전왕의 아우인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왕으로 내세웠다.

◎ 國之爲國, 上下有天, 天是一國之本. 上有君而保民如赤子, 君是民父母而如天之無所不覆, 下有民而事君如父母, 民是實土而惟是邦本, 故所謂國君, 以民爲天矣. 是以, 君是民天, 民是君天, 而上下一致也. 苟或天有變常, 則邦本大擾耳. 那可得以保黎民乎? 今麗之中紀, 王之命, 懸於權奸之手, 廢立弑纂, 在於朝夕不憂之間, 然而不亡者, 未之有也.

한 나라의 나라 됨은 상하 간에 모두 하늘이 있는 법인데 하늘은 한 나라의 근본이다. 위로는 임금이 있어 백성들을 어린아이처럼 보호하니 임금은 백성의 부모가 됨은 마치 하늘이 덮고 있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아래에는 백성이 있어 임금을 부모와 같이 섬기는데, 백성은 실로 땅으로 나라의 근본이 된다. 이런 까닭에 이른바 “나라의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여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금은 백성의 하늘이 되고 백성은 또한 임금의 하늘이 되는바, 이에 상하 간에 일치되는 것이다. 진실로 하늘에 비상의 변괴가 있게 되면 나라의 근본이 크게 흔들리게 되니, 어떻게 어린 백성들을 보전 할 수 있겠는가? 지금 고려 왕조의 중엽에 군왕의 목숨이 권간(權奸)의 손아귀에 달려있어 왕위를 폐하고 시해 찬탈함이 조석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이에 있나니 이러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음은 일찍이 있지 않은 일이로다.

○ 自神宗, 歷熙宗康宗高宗, 至于元宗, 殺戮甚衆, 廢立自擅, 政出於權奸之策. 故韓惟漢, 退遯于智異山, 趙冲, 開獨樂園於東皐. 余嘗聞, 賢人退藏, 則國脉永絶矣. 果是崔冲獻 ․ 崔瑀 ․ 崔竩 ․ 林衍等, 及崔沆執權亂政, 麗兆已矣. 然惟金方慶, 流于大靑島, 幸復見用, 亦有晦軒安珦在爾. 僅支王春一脈於陽剝中微線矣.

신종(神宗)으로부터 희종(熙宗), 숙종(肅宗), 강종(康宗), 고종(高宗)을 거쳐 원종(元宗)에 이르기까지 살육함이 매우 많았고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독단하여 정령이 권간의 책략에서 나왔다. 이런 까닭에 한유한(韓惟漢)은 지리산에 물러나 은거하였고, 조충(趙冲)은 동고(東庫)에 독락원(獨樂園)을 열었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현인이 물러나 숨으면 국가의 맥이 영구히 끊어진다고 하였다. 과연 최충헌, 최우(崔瑀), 최의(崔竩), 임연(林衍) 및 최항(崔沆) 등이 정권을 잡아 정사를 어지럽힘에 이르러 고려 왕조의 징조는 이미 다한 것이다. 그렇지만 김방경(金方慶)이 대청도(大靑島)에 유배가 있다가 다행히 다시 등용되었고, 또 회헌(晦軒) 안향(安珦)이 있어 고려 왕조의 맥락이 끊어져 나가는 이 시기에 한 줄기 가는 선이 되었다.

○ 元宗辛未十二年, 金方慶討珍島, 大破之. 蒙古改國號, 曰大元, 約宋滅金, 至忽必烈, 簒奪宋祚.

원종(元宗) 신미(辛未) 12년에 김방경이 진도를 토벌하여 대파하였다. 몽고는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바꾸고 송나라에 금나라를 멸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홀필열(忽必烈)에 이르러 송왕조를 찬탈하였다.

○ 王降前妣王氏, 爲貞和公主, 親逆元公主于肅州, 胡服還京. 國人見其辮髮, 有泣下者.

왕이 전비(前妣) 왕씨(王氏)의 지위를 강등하여 정화공주(貞和公主)로 삼고 친히 숙주(肅州)로 가서 원나라의 공주를 맞이하였다. 호복(胡服)을 입고 개성으로 돌아왔는데 나라 사람들 중 왕이 변발 한 것을 보고는 우는 사람도 있었다.

○ 世子諶, 入燕京, 尙元長公主, 卽元帝女也. 王薨, 百官, 遙尊世子諶, 爲王.

세자 심(諶)이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원나라의 맏공주와 혼인하였는데, 공주는 곧 원제(元帝)의 딸이다. 왕이 훙하자 백관들은 멀리서 세자 심(諶)을 높여 왕으로 여기었다.

諱諶, 元宗子. 元世祖 至元十一年甲戌立. 在位三十四年, 壽七十三.

휘는 심(諶)이고 원종(元宗)의 아들이다. 원 세조(世祖) 지원(至元) 34년 갑술년에 즉위했다. 재위 연수는 34년이고 수는 73세이다.

○ 丙子二年. 置通文官, 選年少文臣聰慧者, 講習漢蒙語.

병자(丙子)년 2년.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했다. 나이 어린 문신 중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한어와 몽고어를 강습시켰다.

○ 遣中贊金方慶, 如元. 時亡宋幼主, 至于元, 命坐皇太子下, 金方慶坐于群臣上.

중서성찬성사(中書省贊成事) 김방경을 원나라에 보냈다. 이 때 송나라의 어린 군주가 원나라에 이르렀는데 황태자의 아래 자리에 앉으라고 명하였으며, 김방경은 여러 신하의 윗자리에 앉았다.

○ 元帥金方慶, 與元忻都 ․ 洪茶丘等, 征日本, 値飇風, 大敗還. 元兵免溺不死者, 皆被殺, 不得還.

원수 김방경이 원흔도(元忻都), 홍다구(洪茶丘) 등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였는데 돌풍을 만나 대패하고 귀환했다. 원나라 군사 중 바다에 빠지지 않아 죽기를 면한 자는 모두 피살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 庚寅十六年. 命雪齋鄭可臣及閔漬, 陪世子如元. 元主問世子曰, 爾讀何書? 對曰, 有師儒鄭可臣閔漬, 在左右, 質疑孝經論孟. 元主大悅曰, 試喚可臣等來. 與之俱入, 元主起而冠, 仍賜坐, 問本國風化世代理亂之跡, 對之如流, 自辰至未, 聽之不倦, 待遇益隆崇. 後命公卿, 議征交趾, 令可臣參其議, 對稱旨. 於是, 增資嘉議大夫, 撰進金鏡錄一部. 自後, 華人稱海東夫子.

경인(庚寅)년 16년.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 및 민지(閔漬)에게 명하여 세자를 모시고 원나라에 가도록 했다. 원나라 군주가 세자에게 묻기를 “너는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하자 세자가 대답하기를 “저에게는 사유(師儒) 정가신, 민지가 곁에 있어 효경(孝經), 논어, 맹자 등에서 모르는 것을 질문합니다.”라고 하니 원나라 군주가 크게 기뻐하면서 그러면 시험 삼아 정가신 등을 한번 불러오라고 하였다. 세자가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원나라 군주는 일어나서 관면(冠冕)을 쓰고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풍속과 역대 정치의 치란(治亂) 자취에 대하여 물어보니 대답이 청산유수와 같았다. 진시(辰時 - 오전 7시~9시)부터 시작하여 미시(未時 - 오후 1~3시)까지 계속 들었지마는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대우가 더욱 융숭하고 후에 공경(公卿) 대신들에게 명령하여 교지(交趾 - 월남의 남부 지방)를 정벌할 것인가를 의논하는데 정가신을 그 회의에 참석시켜 함께 상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가의대부(嘉議大夫)의 관작을 더해 주었으며 금경록(金鏡錄) 한 부를 찬진하도록 하였다. 이후로 중국 사람들이 정가신을 보고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칭하였다.

○ 元運米十萬石, 來賑饑民, 連歲救賑, 二十餘萬石.

원나라에서 쌀 십만 석을 보내와 굶주린 백성의 진휼미로 사용했다. 여러 해 동안 진휼미로 사용된 쌀이 이십여만 석이었다.

○ 戊戌二十四年. 元遣使對王, 爲逸壽王, 傳位於世子謜, 世子卽位, 率百官奉箋, 上尊號太上王.

무술(戊戌)년 24년.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면대하고 일수왕(逸壽王)으로 삼았으며, 세자 원(謜)에게 왕위를 선양하였다. 세자가 즉위함에 백관을 거느리고 표전(表箋)을 받들고 태상왕(太上王)의 존호를 바치었다.

○ 洪子藩 ․ 元冲甲等, 以兵圍王宮, 執吳析, 押送于元. 先是, 吳析等, 選中外官妓, 日夜褻慢, 無復君臣之禮. 子藩等極諫, 不聽, 子藩謂冲甲曰, 不以兵諫, 無以除群奸, 發兵圍宮, 執之以押送.

홍자번(洪子藩)과 원충갑(元冲甲) 등이 병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둘러싸고 오석(吾析) 등을 붙잡아 원나라로 압송하였다. 오석 등은 중외의 관기를 뽑아 들여 밤낮으로 외설스러운 행동을 하여 임금과 신하의 예가 전혀 없었다. 홍자번 등이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홍자번이 원충갑에게 이르기를 “병사로써 간하지 않으면 뭇 간신배들을 제거할 수 없다”고 하고,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에워싸고 붙잡아 압송한 것이다.

○ 甲辰三十年. 贊成事安珦建議, 置國學, 以贍養士之財. 王亦出養士之財於內庫, 以助之.

갑진(甲辰)년 30년. 찬성사(贊成事) 안향(安珦)이 건의에 따라 국학을 설치하고 선비를 기르는 보고로 삼았다. 왕 또한 내고(內庫)에서 선비를 기르는 재원을 출연하여 경비에 보탰다.

○ 元囚王惟紹 ․ 宋邦英, 治離間王室之罪. 時奸侫之讒搆, 益姿, 洪子藩詣中書省, 極言其罪.

원나라에서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을 붙잡아 가두어 왕실을 이간하는 죄를 다스렸다. 이때 권간들의 참소가 행해지면서 갈수록 방자해졌는데 홍자번이 중서성(中書省)에 이르러 그 죄를 극력 성토하였다.

○ 戌申三十四年. 秋七月, 王薨于神孝寺. 遺敎, 凡機務待瀋陽王處分, 自元奔喪至, 卽位.

무신(戊申)년 34년. 가을 7월 왕이 신효사(神孝寺)에서 훙하였다. 유교에서 무릇 국가의 중요한 사항은 심양왕(瀋陽王)을 기다려 처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심양왕은 원나라로부터 분상하여 이르고 왕위에 올랐다.

諱瑋, 初諱謜, 忠烈王子. 元武宗至大元年戊申立. 在位五年, 壽五十一.

휘는 위(瑋)인데, 처음 이름은 원(謜)이었으며 충렬왕의 아들이다.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인 무신년에 즉위하였다. 재위 연수는 5년이고 수는 51세이다.

○ 己酉元年. 封宦者李大順等, 十六人爲君. 舊制, 幼時陽物, 爲狗所啗, 故本系皆賤流.

기유(己酉)년 원년. 관료들 중 이대순(李大順) 등 16인을 봉하여 군(君)으로 삼았다. 구제(舊制)에 어렸을 때 양물(陽物)이 개에게 물린 까닭에 본계(本系)는 모두 천인 출신이다.

○ 庚戌二年. 王殺世子鑑, 世子卽蒙妃出. 先是, 欲傳位於世子, 至是, 爲其從臣讒沮殺之.

경술(庚戌)년 2년. 왕이 세자 감(鑑)을 죽였는데, 세자는 몽고 왕비의 소생이었다. 이에 앞서 세자에게 왕위를 선양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근신의 참언에 따라 죽였다.

○ 癸丑五年. 王傳位于次子江陵大君燾, 自號瀋陽上王.

계축(癸丑)년 5년. 왕이 둘째 아들 강릉대군 도(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호를 심양상왕(瀋陽上王)이라 하였다.

諱燾, 忠宣王子. 元武宗至大六年癸丑立. 庚午傳位于世子, 壬申復王位. 前在位十七年, 後在位八年, 共二十五年. 壽四十六.

휘는 도(燾)이고 충선왕의 아들이다.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6년 계축년에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임신년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앞의 재위 기간은 17년이고, 뒤의 재위 기간은 8년으로 모두 25년이다. 수는 46세이다.

○ 甲寅元年. 遣使于元, 購書一萬八百卷而還. 元主又賜五千卷, 皆宋秘閣所藏.

갑인(甲寅)년 원년. 원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서적 1만 8백 권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원나라 군주가 또 5천권을 하사하였는데 모두 송나라 비각(秘閣)에서 소장하던 것이었다.

○ 甲子十一年. 元復歸王, 還國寶. 僉議政丞崔有渰, 如元時, 元復欲立省, 罷世祿奴婢之法. 有渰, 力請止之, 及還, 國人加額曰, 存我三韓, 惟崔侍中也. 持平金開物, 謝病歸, 被讒流島, 至是, 拜持平.

갑자(甲子)년 11년. 원나라에서 왕을 복귀시키고자 하여 국보(國寶)를 환수하였다. 첨의정승(僉議政丞) 최유엄(崔有渰)이 원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에서 다시 성(省)을 설치하고 세록(世祿)과 노비에 관한 법을 혁파하고자 하므로 최유엄이 극력 간청하여 저지하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자 나라 사람들이 절하며 말하기를 “우리 삼한이 보존된 건 오직 최시중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지평(持平) 김개물(金開物)이 병을 핑계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참소를 입어 섬으로 귀양 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평(持平)을 제수하였다.

○ 戊辰十五年. 元使平章事買驪, 審査王之病情. 先是, 柳淸臣 ․ 吳析等, 讒王于元, 中書省, 以爲王盲聾喑啞, 乃使買驪宣詔詰問, 王對辯有序, 禮容甚嚴肅. 買驪曰, 王無恙, 前訴誣也. 取瀋王暠世子印, 奪淸臣 ․ 析等百餘人田宅.

무신(戊辰)년 15년. 원나라에서 평장사(平章事) 매려(買驪)로 하여금 왕의 질병의 실정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유청신(柳淸臣)과 오석(吳析) 등이 원나라에 왕을 참소하여 중서성(中書省)에서는 왕이 눈이 멀고 귀머거리인 불구자로 생각하였다. 이에 매려를 보내어 조서를 선포하며 힐문하는데 왕이 대답하는 것이 조리가 있고 의용이 매우 엄숙하니 매려가 말하길 “왕은 아무런 병이 없다. 전에 심왕(瀋王) 호(暠) 세자의 인장을 취하여 유청신과 오석 등 백여인의 전택을 강탈하였다고 참소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하였다.

○ 庚午十七年. 元遣使收國王寶位, 冊世子禎爲王. 檢校政丞金台鉉卒.

경오(庚午)년 17년.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국왕의 보위(寶位)를 환수하고 세자 정(楨)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검교정승(檢校政丞) 김태현(金台鉉)이 졸하였다.

◎ 高麗, 自忠宣以前, 武臣亂政, 文不得以治政. 自忠宣以後, 元是敎令, 麗不得以治政. 余恐麗之末紀, 人是高麗, 國是高麗, 至於記事, 半是元主之事也. 國之不國, 從可知也.

고려는 충선왕 이전에는 무신들이 정권을 어지럽혀 문신들이 정사를 다스릴 수가 없었으며, 충선왕 이후로는 원나라의 교령(敎令)으로 인해 고려에서 정사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고려 말엽에 이르면 사람도 고려인이고 국호도 고려이건만 역사 기록은 절반이 원나라 군주에 관한 일이다. 나라가 나라의 체모를 유지하지 못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諱楨, 忠肅王子. 元文帝至順元年庚午立. 二年壬申, 元主收寶位, 己卯復位. 癸未廢位. 前後在位七年, 壽三十六.

휘는 정(楨)이고 충숙왕의 아들이다. 원 문제(帝至) 지순(至順) 원년 경오년에 즉위하였다. 2년 임신년에 원나라 군주가 보위(寶位)를 환수하였는데, 기묘년에 복위하였다. 계미년에 폐위되었다. 전후로 재위 연수가 7년이고, 수는 36세이다.

○ 辛未元年. 罷畿內世祿給田, 以充祿科. 又置五道鹽場, 尋罷之.

신미(辛未)년 원년. 기내(畿內)에 대대로 녹봉으로 주던 급전(給田)을 폐지하고 녹과(祿科)에 충당케 하였다. 또 오도(五道)에 염장(鹽場)을 설치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폐지하였다.

○ 忠肅王後紀壬申元年. 元徵前王入朝, 收璽綬, 封府庫, 命上王復位. 遣郞中蔣伯祥, 撮政東省事.

충숙왕후기(忠肅王後紀) 임신(壬申)년 원년. 원나라에서 전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다. 임금의 인을 환수하고 부고(府庫)를 봉하였으며 상왕(上王)에게 명하여 복위하도록 하였다. 낭중(郎中) 장백상(蔣伯祥)을 파견하여 정동성(政東省)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 丙子五年. 元遣前王入本國. 元丞相伯顔, 奏於元主曰, 麗王楨, 素無度, 宜送乃父所, 使敎義方也云.

병자(丙子)년 5년. 원나라에서 전왕을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원나라 승상 백안(伯顔)이 원나라 군주에게 아뢰기를 “고려 왕 정(楨)이 본래 무도하니 의당 그 아비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의리를 가르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 己卯八年. 三月, 王薨. 前王立中贊曹頔, 陰作瀋陽王地, 令前軍千餘, 剪紅綃, 貼衣爲幟, 夜襲王宮, 射王中肩, 已而頔兵敗見殺. 王欲嚴治之, 金倫曰, 此輩脅從, 不必深責, 乃弛其刑, 諸囚感悅.

기묘(己卯)년 8년. 3월 왕이 훙하였다. 전왕은 중찬(中贊) 조적(曹頔)을 내세워 은밀히 심양왕(瀋陽王)의 무리를 조성하였다. 전군(前軍) 천여 명에 영을 내려 붉은 생초를 옷에 부착하여 표지로 삼고 왕궁을 야습하여 왕의 어깨에 화살을 명중시켰는데 얼마 뒤에 조적의 군대가 패하고 조적은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이를 엄히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김륜(金倫)이 말하길 “이들 무리는 협박에 따른 것이니 굳이 심하게 질책할 것이 없다” 하여 그 형벌을 완화하니 모든 죄수들이 감동하며 기뻐하였다.

○ 十一月. 元遣斷事官頸麟等, 執王及宰臣洪彬以歸.

11월. 원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경린(頸麟)을 보내 왕 및 재신(宰臣) 홍빈(洪彬)을 붙잡아 갔다.

○ 後紀庚辰元年. 元下王于刑部, 問之頔黨, 多利口, 只恐事將危殆, 故金倫輒對, 辭理簡直, 部官改容目之曰, 白髮宰相, 焉能知機? 洪彬曰, 頔王之家奴也. 奴戕其主, 王法之所不赦. 元主釋王, 復王位.

후기(後紀) 경진(庚辰)년 원년. 원나라에서 왕을 형부(刑部)에 가두고 조적의 무리에 대해 심문하였는데 날카로운 질문이 많아 일이 장차 위태한 지경에 이를까 걱정되었다. 이에 김륜이 먼저 즉시 대답하였는데 사리가 간략하면서 분명하였다. 형부의 관리가 안색을 고치고 그를 지목하여 말하길 “백발의 재상이 어찌 국가의 기밀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홍빈이 말하길 “조적은 왕가의 노비이다. 노비가 그 주인을 해친 경우 왕법(王法)에는 용서함이 있지 않다.”고 하였다. 원나라 군주가 왕을 석방하고 왕위에 다시 오르게 했다.

○ 星山君李兆年, 見王之淫縱日甚, 驟諫不聽, 今日致仕, 明日卽匹馬還鄕, 不復言時事.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은 왕의 음란함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 자주 이에 대해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에 당장 벼슬을 그만두고 다음날 필마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시속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 元授李穀翰林國史院檢閱官.

원나라에서 이곡(李穀)에게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의 벼슬을 제수했다.

○ 癸未四年. 元遣使執王, 駄于馬而馳去. 乃以檻車, 流于揭陽, 去燕京, 二萬一千餘里.

계미(癸未)년 4년.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붙잡아 말에 태우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내 함거(檻車)에 태워 게양(揭陽)으로 유배 보냈는데, 게양은 연경에서 2만 1천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 甲申五年. 春正月, 王乘傳車疾馳, 艱楚萬狀, 未至揭陽而薨. 侍臣不得從, 未知有何所害.

갑신(甲申)년 5년. 춘정월 왕이 전거(傳車)를 타고 급히 달려가면 시신들도 따라가지 못하여 어느 곳에서 해를 입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二月. 冊立元子昕爲王, 元德寧公主子, 八歲. 元主問學父乎? 學母乎? 願學母, 是以得立.

2월. 원나라에서 원자 흔(昕)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원나라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아들이다. 원나라 군주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아버지를 배울 것이냐? 아니면 어머니를 배울 것이냐?”라고 하니, 어머니를 배우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 以蔡河中 ․ 韓宗愈 ․ 李齊賢爲政丞, 金倫 ․ 權謙 ․ 朴忠佐爲贊成, 是乃極選時望, 而元主用之爾.

채하중(蔡河中), 한종유(韓宗愈), 이제현(李齊賢)으로 정승을 삼고, 김륜(金倫), 권겸(權謙), 박충좌(朴忠佐)로 찬성을 삼았는데, 이는 당시의 여망을 따른 최고의 선발이었다. 그렇지만 실은 원나라 군주가 발탁한 것이었다.

○ 置書筵, 改定科擧法, 韓宗愈曰, 抽黃對白, 無益於治國, 請取經術.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과거법(科擧法)을 개정하였다. 한종유가 말하길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못되니 경술(經術)로써 인재를 선발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亡國之機, 見於君主之受辱, 而所謂儒臣, 不能正其本, 能齊其末, 則惡乎可得乎? 國君, 所以本也, 國政, 所以末也. 爲其儒臣, 而國君荒淫受辱, 未嘗有一辭諫止. 且其當日君主之辱, 在於元主, 元主, 是高麗君臣之所同讐也. 不讐其讐, 匿怨而受恩, 只恐君子之所不爲也. 天命不于常, 由乎德, 不德而荒淫, 是不德之甚者, 天不眷顧, 久矣. 而以經術, 挽廻上天之眷顧乎! 大廈一傾, 雖有棟梁之材, 難可以復支, 風浪一飜, 雖有再楫之利, 難可以利濟. 奈之何, 前王荒淫之日, 金口過廷, 今而後, 欲以復蘇將絶之國脉 雖有醫國之良方, 亦難矣哉! 麗之國兆, 以今觀之, 猶夕陽掛山, 返照東明, 而不覺薄暮一瞬然, 天不言日出而朝東, 天不言日落而暮西, 則國之將亡, 上天豈其言乎哉! 天不言而知其日落, 則麗之將亡, 亦可推知爾. 古語云, 責賢甚備, 自顧忘僭, 祗恐近於甚備也. 假使當日職務, 正午前, 未就而薄暮之時, 放置則尤不可也.

망국의 조짐은 군주가 모욕을 당하는 데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유신(儒臣)으로서 그 근본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 말단만을 다스리고자 하니 어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국군(國君)은 근본이 되는 바이고, 국정(國政)은 말단이 되는 것이다. 유신이 되어 나라의 군주가 음란함에 빠져 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일찍이 간하여 그만두게 하는 한마디의 언사도 없었다. 또 당시 군주가 모욕을 당함은 원나라 군주에 의한 것이고 원나라 군주는 고려 왕조의 군신에게 모두 원수가 된다. 그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원한을 감추고 은의(恩義)를 받았으니, 생각건대 이는 군자가 행할 바가 못 되는 일이다. 천명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덕에 말미암은 것인데 부덕(不德)한데다 음란함에 빠져있으니 이는 부덕이 심한 것이라 하늘이 돌아보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경술(經術)로써 상천(上天)의 돌아봄을 이끌어 들일 수 있겠는가? 큰집이 한 번 기울어지면 비록 국가의 동량지재(棟梁之材)가 있다 하더라도 다시 지탱하기가 어려운 법이고, 풍랑이 한번 몰아치면 비록 노를 두 배로 젓는 이로움이 있을지라도 물을 건너기가 어려운 법이다. 어찌 하여 전왕(前王)이 음란함에 빠져있을 때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조정에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 장차 끊어지려 하는 국맥(國脈)을 소생시킬 수 있으리오? 비록 나라를 치료할 좋은 방책이 있더라도 또한 어려운 일인 것이다! 고려 왕조의 운명이 지금 살펴보건대 마치 석양이 산마루에 걸려있는 것과 같아서 석양빛이 동쪽을 비추어 밝히지만 옅은 햇살이 한순간인 것과 같다. 하늘이 말해주지 않아도 해가 떠오름에 아침은 동쪽에 있는 것이고, 하늘이 말해주지 않아도 해가 저물어감에 저녁은 서쪽에 있는 것이다. 국가가 장차 멸망하리라는 것을 상천이 어찌 말해주겠는가? 하늘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 해가 지는 것임을 알겠거니 고려가 장차 망하리란 것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을 뿐이다. 고어(古語)에 말하길 “현인을 질책할 적에는 너무 이치를 따져 스스로 참람된 것임을 잊는다.”고 했는데, 스스로 생각하건대 너무 이치를 따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가령 당시의 힘써야 할 일이 정오 전이라면 행하지 않겠지만 햇살이 저물어 가는 때라고 해서 내버려둔다면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諱昕, 忠惠王子. 元順帝至正四年甲申立. 在位四年, 壽十二.

휘는 흔(昕)이고 충혜왕의 아들이다. 원 순제(順帝) 지정(至正) 4년 갑신년(1344)에 즉위하였다. 수는 12세이다.

○ 丙戌二年. 整治都監, 杖殺奇三萬, 卽元皇后從弟, 囚田祿生 ․ 徐浩等于行省獄.

병술(丙戌)년 2년. 정치도감(整治都監) 기삼만(奇三萬)을 장살(杖殺)하였는데, 그는 곧 원 황후의 조카이다. 원나라에서 이 일로 전록생(田祿生)과 서호(徐浩) 등을 행성(行省)에 가두었다.

○ 元放高龍普於金剛山.

원나라에서 고용보(高龍普)를 금강산으로 추방하였다.

◎ 嗚呼! 高麗之政, 自後, 筆則祗恐穢靑, 不筆則諱實, 而大畏千秋之口實也. 自恭愍, 至于禑昌, 麗之王脉旣絶, 而所以絶之者, 恭愍也. 是以, 見弑於洪倫, 只欲滅口, 而還被其弑也. 假使陰爲瀆亂宮中, 復續高麗之正統, 其於天鑑上臨, 地祗下察, 那可掩其上下神明而邪自天命之改造乎? 以妖僧遍照爲師傅, 遍照卽辛旽也. 宮中變亂, 自遍照出, 而高麗之命, 已忒矣. 宮中之淫忒, 固非儒臣之所能及知. 然益齋李齊賢, 今猶在朝, 冶隱 ․ 牧隱 ․ 圃隱三賢立朝. 冶隱棄官歸鄕, 益齋未幾而卒. 然恭愍之時, 俱爲治政, 而亂其麗祚者, 恭愍也. 不能察朝廷之失德, 又不察王氏之正脉攸在, 祗欲爲天命之强顧, 難矣哉! 余恐竊爲在朝賢臣, 敢以一言頌之. 行藏由天, 行之天也, 止之天也. 天命未可以人力復廻, 國脉難可以人力復續. 竊以伊尹之心爲心, 則可免於禑昌之際, 立朝之譏耳. 矧惟恭讓王, 立承麗統, 爲政於四年者乎? 然惟以璿苗, 接續於雜木之上, 安能久全乎哉! 上天之命, 歸于德, 以德濟民, 則莫能禦矣. 以朝鮮之太祖, 謂之逆取者, 不知天命也. 湯武不屈於春秋, 而萬古爲聖, 則後世雖有聖人復起, 以太祖, 不敢謂之逆取矣. 竊爲慙德者, 有一, 圃隱之見殺, 亦近矣. 余嘗聞, 殺一不辜, 則天下之人, 皆以殺之者爲非, 無或以被殺者爲非, 恐惟先生之見殺, 宜爲先生而殺之也. 何者? 仁所以吾夫子之罕言, 而先生亦可謂殺身而成仁乎! 不爾則但是儒賢而止, 不得以成仁, 而至於成仁, 是宜節高於松嶽之高, 苟非後人之所能梯陟. 義淸於臨津之淸, 亦非後人之所能沿游也. 太祖之爲先生, 其義深且遠爾.然恐有害於太祖五百餘年開始昇平之運, 圃隱之後身, 爲端宗, 太祖之後神, 爲世祖, 更以貽笑於千秋也, 後千秋創業主之所當鑑戒者也. 高麗之亡, 天也 孰敢謂之逆取? 高麗立, 梁末貞明四年戊寅, 歷三十二王, 歷年, 凡四百七十五年.

아! 고려 왕조의 정사가 이후로는 쓰자니 푸른 붓이 더럽혀질까 염려되고 쓰지 않자니 역사의 실상을 회피하여 천추에 구실이 될까 두렵다.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우왕(禑王), 창왕(昌王)에 이르기까지 고려 왕실의 계통은 이미 끊어졌는데 이를 끊어지게 한 것은 공민왕이다. 이 때문에 홍륜(洪倫)에게 시해를 당하는바 그 입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시해를 당한 것이다. 설사 은밀히 궁중을 더럽히고 어지럽혀 다시 고려 왕실의 정통을 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천령(天靈)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땅 귀신이 아래에서 살피고 있는데 어찌 위아래의 신명(神明)을 속이고 사악하게 천명을 개조할 수 있었으리오? 요승 편조(遍照)를 사부로 삼았는데 편조는 곧 신돈(辛旽)이다.

궁중의 변란이 편조로부터 나오면서부터 고려 왕조의 운명은 이미 어그러졌는데, 궁중의 음란한 비행에 대해서는 참으로 유신이 능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이때까지 아직 조정에 있었고, 야은(冶隱), 목은(牧隱), 포은(圃隱) 세 분 선현 또한 조정에 있었다. 그 후 야은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익재 선생은 얼마 안 있다 졸하였다. 그러하니 공민왕 대에는 모두 정사에 힘썼는데 고려 왕조의 운명을 어지럽힌 자는 공민왕이니, 조정에서 실덕(失德)하는 것을 살피지 못하였으며 왕가의 정맥(正脉)이 소재하는바 또한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만 천명이 억지로 돌아보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 아니 어려운 일이리오! 내가 이에 삼가 당시 조정에 있던 현신(賢臣)을 위하여 감히 한마디 송가를 짓는다.

行藏由天,

行之天也, 止之天也.

天命未可以人力復廻,

國脉難可以人力復續.

행하고 숨음 천명에 말미암나니

나아가 행함도 천명이오, 물러나 숨음도 천명이라.

천명은 사람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으며

국맥은 사람의 힘으로 다시 잇기가 어려운 법이네.

생각건대 이윤(伊尹)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았다면 우왕과 창왕 같은 때에 입조(立朝)하였다는 기록을 면할 수 있었을진대, 하물며 공양왕(恭讓王)이 고려의 적통을 계승하여 정사를 행한 4년 동안에 있어서랴? 그렇지만 왕가의 싹이 잡목 위에 이어졌는데 어찌 오래 보전될 수 있으리오? 상천(上天)의 명은 덕에 귀의하는지라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이를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조 을 건국한 태조(太祖)를 두고 반역으로 취한 것이라고 이른다면 이는 천명을 모르는 것이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춘추의 의리에 굴하지 않고 만고의 성인이 되었으니, 후세에 비록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태조를 두고 감히 반역으로 취하였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덕에 부끄러운 것이 꼭 하나 있다면 포은(圃隱)이 죽임을 당한 것이 이에 가까울 것이다. 내 일찍이 듣건대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이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죽인 자를 비난하지 혹시라도 죽임을 당한 자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한다. 생각건대 선생이 죽임을 당한 것은 마땅히 선생 자신이 죽인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인(仁)은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 드물게 말한 것인데 선생은 또한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룬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만 현명한 유자에 그칠 뿐이지 인을 이루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을 이루는 데에 이르렀나니 그 절개는 의당 높은 송악산(松嶽山)보다 더 높은 것으로 진실로 후세 사람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의리는 임진강(臨津江)의 푸르름보다 더 맑은 것으로 또한 후세 사람들이 거슬러 노닐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태조가 선생에게 행한 것은 그 의리가 깊고도 원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태조 오백여년이 열어놓은 승평(昇平)의 운세에 해가 되었던 것은 포은의 후신이 단종(端宗)이 되고, 태조의 후신이 세조(世祖)가 되어 천추에 웃음거리를 남긴 것이다. 이는 저 천추에 창업을 할 군주가 의당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고려가 망한 것은 천명이니, 그 누가 이를 반역으로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오? 고려가 건국한 것은 양(梁)나라 말엽 정명(貞明) 4년 무인년(918)으로 32왕을 겪고 햇수로는 무릇 475년이다.

조선기(朝鮮紀)

姓李氏, 諱旦, 初諱成桂, 字仲潔, 號松軒, 桓祖子. 麗恭讓王四年壬申, 卽位. 七年戊寅, 傳位于定宗, 尊爲太上王. 在位七年, 太上王位十年, 壽七十四. 建元陵, 在楊州儉巖山.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단(旦)이며 처음의 휘는 성계(成桂)였다. 자(字)는 중결(仲潔)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며 환조(桓祖)의 아들이다. 고려 공양왕 4년 임신년(1392)에 즉위하였으며, 7년 무인년(1398)에 정종(定宗)에게 양위하고 태상왕(太上王)의 지위에 거하였다. 재위 연수는 7년이며, 태상왕으로 있은 연수는 10년이고, 수는 74세이다. 묘호(廟號)는 건원릉(建元陵)으로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에 있다.

○ 壬申元年. 定國號朝鮮, 追尊四世爲王, 定都于漢陽. 高麗禮儀判書金澍, 使中國不還.

임신(壬申)년 원년.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하였다. 사대조를 추존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한양(漢陽)을 도읍지로 정하였다. 고려 왕조의 예의판서(禮儀判書) 김주(金澍)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 高麗侍中李穡, 以當立前王子昌之論, 流于韓州. 至是, 上以手札召至, 待以故舊, 穡長揖不拜, 昻然笑曰, 老夫無可坐處, 卽升御榻而踞之. 仍請歸故山, 命中使護送, 至驪江淸心樓宣醞, 談笑自若, 忽暴死如中毒.

고려 왕조의 시중(侍中) 이색(李穡)이 의당 전 왕자 창(昌)을 옹립해야 한다는 논의를 하여 한주(韓州)로 유배 보냈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직접 편지를 써서 불러 이르렀는데 옛 친구로 대우하였다. 이색은 길게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으며 허공을 올려다보며 웃으며 말하길 “이 늙은이가 앉을 곳이 없구나.”라고 하더니 곧장 어탑(御榻)으로 올라가 걸터 앉았다. 이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갔는데 여강(驪江) 청심루(淸心樓)에서 왕이 내려준 술을 마시며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죽었으니, 마치 독약이라도 마신 듯하였다.

○ 錄開國功臣三十九人, 趙浚 ․ 南在 ․ 鄭道傳 ․ 南智 ․ 裵克廉 ․ 南誾 ․ 李濟 ․ 金云寶 ․ 朴義龍 ․ 陳忠貴.

개국공신(開國功臣) 39인에게 녹봉을 내렸으니, 조준(趙浚), 남재(南在), 정도전(鄭道傳), 남지(南智), 배극겸(裵克廉), 남은(南誾), 이제(李濟), 김운보(金云寶), 박의룡(朴義龍), 진충귀(陳忠貴) 등이었다.

○ 大司憲閔開, 疏陳八條, 上嘉納.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상소를 하여 8조를 아뢰었는데 왕이 가납(加納)하였다.

○ 召高麗按廉使金士廉 ․ 參知政事南乙珍 ․ 趙狷 ․ 德寧府尹張安世, 皆不至.

고려 왕조의 안렴사(按廉使) 김사겸(金士廉), 참지정사(參知政事) 남을진(南乙珍), 조견(趙狷), 덕녕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를 불렀으나 모두 이르지 않았다.

○ 流高麗左常侍金震陽. 先是, 震陽劾鄭道傳疏, 有曰施刑於不可刑之地, 求罪於無罪之人, 若殺道傳, 麗祚其不促矣. 盖不可刑者, 前王父子也, 無罪之人, 李穡父子也. 至是, 以鄭夢周黨, 杖流而尋卒. 大司憲南在, 請鞠李扶 ․ 許晙, 上不允. 高麗掌令徐甄, 退隱衿陽, 屢徵不起, 臺臣請罪之, 上曰, 夷齊之流, 勿問. 凡杜門洞守節不屈者, 七十二賢.

고려 왕조의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을 유배 보냈다. 이전에 김진양이 정도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속에 “형벌을 줄 수 없는 경우에 형벌을 가하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찾으니, 만약 정도전을 죽인다면 고려의 운세가 단명하지는 않을 것이다”는 구절이 있었다. 대개 형벌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전왕(前王) 부자이고, 죄가 없는 사람이란 이색 부자를 가리킨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정몽주의 여당이라 하여 장형을 가하고 유배 보냈는데 얼마 있다가 죽었다. 대사헌(大司憲) 남재가 이부(李扶)와 허준(許晙)을 추국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고려 왕조의 장령(掌令) 서견(徐甄)이 금양(衿陽)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대신(臺臣)들이 죄 주기를 청하자 왕이 말하길 “백이(伯夷) ․ 숙제(叔齊)의 무리로 따질 것이 없다”고 하였다. 대개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절개를 굽히지 않은 분이 72명이었다.

○ 甲戌三年. 漢陽宮闕成, 初相地宜於公州鷄龍山, 經始大創而夢有神告, 故乃止, 更卜漢陽.

갑술(甲戌)년 3년. 한양의 궁궐이 완공되었다. 처음에 도읍지를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이 마땅한 것으로 정하고 크게 터를 닦았는데 꿈에 어떤 신이 나타나 이에 대해 고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이내 중지하고 다시 한양으로 정한 것이다.

○ 命大司成劉敬 ․ 舍人柳觀, 講大學衍義, 散騎常侍曹庶, 演洪範義, 以進. 鄭道傳, 撰進經國大典.

대사성(大司成) 유경(劉敬)과 사인(舍人) 유관(柳觀)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할 것을 명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 조서(曹庶)에게는 홍범(洪範)의 뜻을 풀이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정도전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여 올렸다.

○ 丙子五年. 權臣鄭道傳, 忌諸王子强盛, 陰謀欲除之, 靖安君芳遠知之, 率兵入衛, 捕斬道傳.

병자(丙子) 5년. 권신 정도전이 왕자들의 세력이 강성한 것을 꺼려하여 은밀히 이들을 제거할 것을 꾀하였는데,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이 이 사실을 알고는 병사를 거느리고 숙위하러 들어가 정도전을 붙잡아 참하였다.

○ 上命放世子芳碩 ․ 撫安大君芳蕃于通津, 皆在途遇害.

왕이 세자인 방석(芳碩)과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을 통진(通津)으로 방출하였는데 둘 다 도중에서 해를 입었다.

○ 戊寅七年. 冊永安君芳果, 爲王世子, 九月, 禪位于王世子.

무인(戊寅)년 7년. 영안군(永安君) 방과(芳果)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고, 9월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 王家創業之初, 骨肉殘酷, 有如是乎? 又有臣子, 奉命於咸興, 未見差使之生還, 差使亦何辜? 是宜骨肉之禍及而遷怒於差使者, 明矣. 定宗環柱而不中, 以全天倫之恩, 然竊念後必有甚焉者, 推以可想矣. 五百年間, 骨肉刑斃, 幾度有之!

왕조가 창업할 처음에는 골육간의 다툼이 잔혹하기가 이와 같은 것인가? 또 신하된 자로 함흥(咸興)에 명을 받들고 간 차사(差使)는 살아 돌아온 경우가 없었으니 차사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는 의당 골육간 싸움의 재앙이 차사에까지 옮기어 미친 것임이 명백하다. 정종은 기둥을 부여잡고 화살을 맞지 않아 부자지간의 은의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건대 후에 반드시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백년간 골육간의 싸움으로 서로 죽인 것이 몇 차례나 되었던가!

諱曔, 初諱芳果, 太祖次子. 太祖七年戊寅受禪, 庚辰二年傳位.

휘는 경(曔)이고, 처음 이름은 방과(芳果)로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태조 7년 무인년에 왕위를 물려받고, 경진 2년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 己卯元年. 京畿觀察使崔有慶, 進無逸圖, 平壤府尹成石璘, 進欹器圖. 改都評議使府, 置左右議政, 後增置領議政. 更置集賢殿, 令文臣, 更日入直, 論經義.

기묘(己卯)년 원년. 경기관찰사 최유경이 무일도(無逸圖)를 바쳤으며, 평양부윤 성석린(成石璘)이 의기도(欹器圖)를 바쳤다. 도평의사부(都評議使府)를 개정하여 좌우 의정(議政)을 두었으며, 뒤에 영의정을 두었다. 또 집현전을 설치하여 문신으로 하여금 날마다 번갈아 입직(入直)하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도록 했다.

○ 別建殿宇於麻田仰巖寺, 祀高麗太祖及惠宗 ․ 成宗 ․ 顯宗 ․ 文宗 ․ 忠烈 ․ 恭愍七王.

마전(麻田) 앙암사(仰巖寺)에 전우(殿宇)를 별도로 건립하여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충렬(忠烈), 공민(恭愍)의 일곱 왕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 庚辰二年. 各司每衙日, 入對奏事. 設文科重試, 一登科, 則等棄不講習, 故悉令重試.

경진(庚辰)년 2년. 각사(各司)에서 매번 아일(衙日)마다 궁궐에 들어와 왕에게 사안을 아뢰도록 하였다. 문과의 중시(重試)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한 번 과거에 오르면 모두 버려두고 익히지 않는 까닭에 모두 중시를 치르도록 한 것이다.

○ 命宗室期大功之親, 皆封君, 與駙馬, 倂勿任以事, 罷家兵. 二月, 冊靖安君爲王世子.

종실과 대공친(大功親)에게 군호(君號)를 봉할 것을 명하고 부마와 함께 모두 시사(時事)를 맡아볼 수 없도록 하였으며 가병(家兵)을 혁파하였다. 2월 정안군(靖安君)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 上王東遊楓嶽, 因北狩至咸興, 御潛邸本宮, 近宮而有一橋, 命名永濟, 以示不復還之意. 朝廷遣使問安, 輒見誅, 故人皆厭之. 承樞朴淳, 自恃龍潛舊契, 獨不謝, 策牝鬣而行. 馬子隨後, 至永濟橋, 縶其駒, 馳馬進宮, 繫馬于宮前, 子母相呼. 上王怪問之, 淳對曰, 馬之子母, 相離而然也. 上王與之談笑從容, 適有社鼠, 方乳其子, 抱頭舐尾. 雖微物, 相愛若有倫, 淳俯伏流涕, 上王亦有感, 微示回鑾之意. 淳乃拜退, 良久, 上王度其行遠, 授使者劒曰, 追斬之. 若已渡興龍江, 勿窮追, 果淳之所騎, 款段疲不能渡江, 追斬之. 上王之車駕, 還至聖居山下, 上將郊迎, 領相河崙曰, 上王意尙未釋, 事有不可測者, 祗迎所遮日, 特高柱, 倂以木之滿抱者, 編竹排立, 可矣. 及上進見時, 上王挽弓射之, 上環柱而免. 上王笑曰, 天也, 解所御玉帶, 賜之.

상왕이 동으로 가서 금강산을 유람하고 인하여 북쪽 지방으로 사냥을 가 함흥(咸興)에 이르러 잠저(潛邸)의 본궁으로 갔다. 본궁 근방에 다리 하나가 있어 영제교(永濟橋)라 명명하였으니,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문안을 드리도록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였다. 승추(承樞) 박순(朴淳)이 임금이 즉위하기 전의 옛 정분을 믿고 자신만은 활을 쏘지 않으리라 여겨 암말의 갈기를 채찍질하며 가고 새끼 말이 뒤따르도록 하였다. 영제교에 도착하여 그 망아지를 묶어 매고 말을 달려 궁궐로 가 궁궐 앞에 어미 말을 묶어두니 새끼와 어미가 서로를 찾으며 부르짖었다. 상왕이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박순이 대답하기를 “말의 새끼와 어미가 서로 떨어져서 그러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왕이 그와 더불어 조용히 담소를 나누었는데 마침 사당의 쥐 한 마리가 바야흐로 그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새끼의 머리를 감싸 안고 꼬리를 핥아주고 있었다. 비록 미물일지라도 서로 아끼는 것이 천륜이 있는 듯하였다. 박순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려가며 간하니 상왕 또한 감격하여 돌아가겠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쳐서 박순이 이에 절하고 물러나왔다. 한참 있다가 상왕은 그가 멀리 갔으리라 여기고 사자에게 칼을 주면서 말하길 “쫓아가서 머리를 벨 것이로되 만약 이미 흥룡강(興龍江)을 건넜으면 끝까지 뒤쫓지는 말거라”라고 하였다. 이 때 박순이 탄 말은 지쳐서 느린 걸음으로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하였는지라 사자가 쫓아와서 박순을 참하였다. 상왕의 거가(車駕)가 돌아와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이르렀는데 왕이 장차 교외로 가서 영접하려고 하니, 영상 하륜(河崙)이 말하였다. “상왕의 뜻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것이 있기에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삼가 영접하는 곳에 차일을 세울 때 특별히 높은 기둥을 세우고 아울러 둘레가 한 아름쯤 되는 나무를 대나무로 엮어서 늘어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이 친견할 때가 되어 상왕이 활을 당겨 그를 쏘니 왕이 기둥 뒤로 물러나 죽음을 면하였다. 상왕이 웃으며 말하길 “천명이로구나.”라고 하고, 차고 있던 옥대(玉帶)를 풀러 왕에게 하사하였다.

◎ 自生民以來, 父子之恩, 天倫之正也. 無貴賤之殊, 故人不勸父慈而慈其子. 况今五百餘年基業創始之初, 殺其二子而無絶倫痛惜之悔? 亦其還駕當日, 挽弓而欲射其子, 凡一國之寶位, 重於天倫之正脉乎? 定宗之苟免, 是天孝也, 若不苟免, 益其上王之過, 顧何如哉!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부모와 자식 간의 은애(恩愛)는 천륜의 정단한 것으로 귀천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그 아버지에게 자애로울 것을 권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애를 베푸는 것이다. 항차 지금 오백년 왕업이 창시될 처음에 그 두 아들을 죽였음에 천륜을 저버린 뼈저린 후회가 없겠는가? 이에 상왕이 돌아온 그 날에 또한 활을 당겨 그 아들을 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무릇 한 나라의 보위(寶位)는 천륜의 정맥보다 더 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종이 구차하게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이 돌보아 준 효성이라 할 것이다. 참으로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면 상왕의 허물을 더하는 것이 되었을 지니, 그렇다면 이를 어찌 하였으리오!

諱芳遠, 太祖第五子. 定宗二年庚辰受禪, 十八年戊戌傳位于世宗.

휘는 방원(芳遠)이고,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정종(定宗) 2년 경진년에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18년 무술년에 세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 辛巳元年. 召高麗注書吉再, 授奉常博士, 不受而乞其歸養. 上嘉其義, 優禮以遣.

신사(辛巳)년 원년. 고려 왕조의 주서(注書) 길재(吉再)를 불러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제수하였는데, 길재가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두터운 예로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 壬午二年. 贈諡高麗侍中鄭夢周文忠, 宰臣金若恒, 錄用其子孫.

임오(壬午)년 2년. 고려 왕조의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재신(宰臣) 김약항(金若恒)이 그 자손에게 벼슬을 내리고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 戊子八年. 五月, 太上王昇遐. 上哀毁踰禮, 視朝着白衣冠以縗絰, 從三年.

무자(戊子)년 8년. 5월 태상왕이 승하하였다. 왕은 예에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상하였으며 백의관(白衣冠)을 쓰고 흰 상복에 질대(絰帶)를 하고 정사를 보며 삼년상의 예를 마쳤다.

○ 平壤伯趙大臨 - 上之婿, 驕奢橫恣, 大司憲孟士誠 ․ 持平林安, 不啓而漆其門. 上怒, 卽下獄, 將欲棄市, 左相成石璘, 極諫止之, 遂杖流, 未幾還放. 盖有犯法者, 漆其門, 以表其罪.

평양백(平壤伯) 조대림(趙大臨) - 왕의 사위이다. - 이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자스러운 행동을 하여 대사헌(大司憲) 맹사성(孟士誠)과 지평(持平) 임안(林安)이 임금에게 아뢰지도 않고 그 문에 옷칠을 하였다. 왕이 노하여 즉시 하옥시키고 장차 기시(棄市)의 형에 처하고자 하였는데,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이 극력 간하여 중지시키고 장형을 가하고 유배 보내었다. 얼마 안 돼 방환되었다. 대개 범법자가 있으면 그 집 대문에 옷칠을 하여 그 죄를 표시하였다.

○ 令再嫁子孫, 勿厠仕版, 以開經筵, 上曰, 幼主在縗絰, 三年不讀書, 豈小故哉? 有是命.

재가하여 낳은 자손은 사판(仕版)에 올릴 수 없도록 하는 영을 내렸다.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왕이 말하길 “어린 상주는 상복을 입고 삼년 동안 독서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하고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 丹山府院君李茂, 以罪繫獄, 獄官倂鞫其子公柔, 受杖至九十, 終不服. 上聞之曰, 是問之者, 過也. 子爲父隱, 寧至於死, 安敢證成父罪乎? 卽命釋之. 上又聞滯獄死者, 謂黃喜曰, 可殺則殺之, 豈可使滯獄而死乎? 發勿滯令.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 이무(李茂)가 죄를 지어 옥에 갇혔는데 옥관(獄官)이 그 아들 이공유(李公柔)를 함께 잡아다 국문하여 장형을 가하기를 90도에 이르렀는데도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길 “이는 묻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아들은 부모를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기는 것이니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어찌 감히 아비의 죄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풀어주도록 하였다. 왕은 또 옥사가 지연되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는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죽일만한 자는 죽일망정 어찌 옥사가 지체되어 죽게 하는가?”라고 하며 옥사를 지체하지 말라는 영을 내렸다.

○ 戊戌十八年. 廢世子禔. 以忠寧大君祹爲世子. 忠寧素有聖德, 百姓歸之, 世子心知之, 與弟孝寧, 佯狂自誤, 上不得已廢之, 封爲讓寧大君. 人比之泰伯 ․ 仲雍. 八月, 上禪位于世子.

무술(戊戌)년 18년. 세자 제(禔)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도(祹)를 세자로 삼았다. 충녕대군은 본래 성덕이 있어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니 세자가 이를 알고는 아우 효녕대군과 더불어 짐짓 미친 체 하며 자오(自娛)하였다. 왕은 부득이하여 그를 폐하고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니, 사람들이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에 견주었다. 8월에 왕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 至于太宗, 宛有王家善政之風. 余嘗聞, 一家仁, 一國興仁, 竊念一家孝, 一國興於孝悌矣. 一國之人, 以孝悌爲心, 則宜可刑措而化洽善政耳. 見其訟獄勿滯之令, 民風歸化, 可仰想矣.

태종대에 이르러서는 완연히 왕가(王家)에서 선정(善政)하는 기풍이 있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한 집안이 어질면 온 나라에 인의 기풍이 선다고 하였는바, 생각건대 한 집안이 효성스러우면 온 나라에 효도하고 공경하는 기풍이 일어나는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형벌을 가하지 않아도 선정의 교화가 두루 미칠 것이다. 옥송(獄訟)의 처리를 지체하지 말라는 영을 내리는 것에서 백성들의 풍속이 교화되었음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諱祹 太宗第三子. 太宗十八年戊戌受禪.

휘는 도(祹)이고 태종(太宗)의 셋째 아들이다. 태종 18년 무술년(1418)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 己亥元年. 上以袞冕謁文廟. 禮曹, 以絳紗袍拜謁, 可也, 上曰, 此臨群臣之服也, 非拜師之禮.

기해(己亥)년 원년. 왕이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문묘(文廟)에 배알(拜謁)하였다. 예조에서는 강사포(絳紗袍)로 배알하는 것이 예에 맞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왕이 말하길 “이는 군신 앞에 임하는 복장으로 선사(先師)에게 배알하는 예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命參贊卞季良, 撰箕子廟庭碑, 樹之.

참찬 변계량에게 명하여 기자묘정비(箕子廟庭碑)를 찬술하도록 하여 세웠다.

○ 辛丑三年. 時世子年八歲, 命以儒服, 入殿獻酌, 行束脩禮于博士, 受小學.

신축(辛丑)년 3년. 당시 세자의 나이가 8세이었는데 명하여 유자의 복장을 하고 전(殿)에 들어가 술을 올리도록 하였다. 성균관 박사에게 속수례(束脩禮)를 행하고 『소학(小學)』을 배우도록 하였다.

○ 壬寅四年. 五月, 太上王昇遐. 上命曰, 今於大行喪禮, 悉除佛法, 一遵古禮. 自是, 民俗從以化之.

임인(壬寅)년 4년. 5월 태상왕이 승하하였다. 왕이 명하길 “이번에 상례를 크게 행함에 있어 불교의 법식을 모두 없애고 일체 고례(古禮)를 좇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백성들의 풍속이 이를 좇아 교화되었다.

○ 癸卯五年. 命柳觀 ․ 尹淮 ․ 卞季良, 改修高麗史. 上曰, 但當據事直書, 無諱其實.

계묘(癸卯)년 5년. 유관(柳觀) ․ 윤회(尹淮) ․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왕이 말하길 “다만 사실에 의거해 직서하고 그 실상을 숨기지 말 것이다”고 하였다.

○ 丙午八年. 命京外官吏, 無得笞人背. 自是, 十五歲以下, 七十以上, 除殺人强盜外, 不許禁身.

병오(丙午)년 5년. 서울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태배(笞背)의 형(刑)을 행하지 말도록 했다. 이때부터 15세 이하 70세 이상된 백성에게는 살인죄와 강도죄를 제외하고는 신체를 구금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選文士, 賜暇湖堂讀書. 卞季良作豳風圖, 以進, 上嘉之, 垂戒後嗣王.

문사를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다. 변계량이 빈풍도(豳風圖)를 만들어 올리니 상이 가납하고 후대 왕의 경계로 삼았다.

○ 癸丑十五年. 朝祭始用雅樂, 定婚姻之禮, 以重正始之本, 更定守令久任之法.

계축(癸丑)년 15년. 조제(朝祭)에서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으며 혼인의 의례를 정비하였으니, 시작을 바르게 하는 근본을 중시한 것이다. 또 수령과 구임(久任)에 관한 법령을 다시 정하였다.

○ 甲寅十六年. 命儒臣, 編輯三綱行實, 頒于中外, 擇民之有儒學者, 使之訓誨.

갑인(甲寅)년 16년. 유신에게 명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집하여 중외에 반포하도록 했다. 백성 중 유학(儒學)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가르치도록 했다.

○ 戊午二十年. 命制渾天儀等諸儀象, 其規模制度, 皆出睿裁. 又於千秋殿西庭, 建閣一間, 糊紙爲山, 高七尺許, 置閣中, 內設玉漏機輪, 以水激之. 又造四神, 十二神, 鼓人鐘人, 司辰玉女, 凡百機關, 不由人力, 自擊自行, 若神使然. 天日之度, 晷漏之刻, 與天行, 不差毫釐. 御製訓民正音, 是爲國文, 字放古篆.

무오(戊午)년 20년. 혼천의(渾天儀) 등 여러 의기(儀器)를 제작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 규모와 제도는 모두 임금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 한 칸 자리 누각을 건립하도록 하고 풀 먹인 종이[糊紙]를 산처럼 쌓아 놓았는데 높이가 7척쯤 되는 것을 누각 안에 두었다. 그 속에 옥루(玉漏)와 수레바퀴를 설치하고 물을 흘려 그것을 치도록 하고, 또 사신(四神)과 십이신(十二神) 및 고인(鼓人)과 종인(鐘人), 사신옥녀(司辰玉女) 등을 만들었다. 이 모든 기계 장치들이 사람의 힘이 필요치 않고 저절로 치면서 움직이게 하였으니, 마치 신이 있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해의 운행에 따라 그림자가 움직여 표시하는 시각과 하늘의 운행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도록 한 것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니, 이것이 국문으로 글자의 모습은 옛 전서를 본뜬 것이다.

○ 甲子二十六年. 增選文士三十人, 日直集賢殿.

갑자(甲子)년 26년. 문사 30인을 더 선발하여 날마다 집현전(集賢殿)에서 숙직하도록 했다.

○ 丙寅二十八年. 襃獎館儒, 驅逐巫禱者. 上有疾, 宮人率巫, 祈禳於成均館後麓, 儒生等, 有此擧. 中宮以聞, 上扶而起曰, 士氣有如此, 予疾幾乎愈矣. 命權踶 ․ 鄭麟趾, 撰龍飛御天歌, 述穆祖以後 肇基之跡, 爲樂詞.

병인(丙寅)년 28년. 성균관 유생 중 무당의 푸닥거리를 쫓아낸 자들을 포장(襃獎)하였다. 당시 왕에게 병이 있어 궁인들이 무당을 거느리고 성균관 뒤편 언덕에서 푸닥거리를 행하여 유생들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중궁(中宮)이 이 사실을 전하니 왕은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선비의 기운이 이와 같으니 나의 병이 아마 나을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권제(權踶)와 정인지(鄭麟趾)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편찬하도록 했으니, 목조(穆組) 이후 창업의 기틀을 연 사적을 기술하여 악장으로 지은 것이다.

○ 庚午三十三年. 二月, 上昇遐. 上雅尙儒術, 治政以文, 任賢使能, 百姓安堵, 未嘗有一夫不得, 世稱東方堯舜.

경오(庚午)년 33년. 2월 왕이 승하하였다. 왕은 유학에 밝았으며 이를 숭상하여 문화(文化)로써 정사를 다스리고 현자를 관직에 등용하고 유능한 이를 부리었기에 백성들이 편안하여 한 사람도 제 자리를 얻지 못한 이가 없었다. 세상에서 ‘동방의 요순(堯舜)’으로 일컬었다.

◎ 嗚呼! 痛矣. 自太上王, 聖君繼世而作, 天運庶其回泰, 以啓五百年文明之運, 而遽然昇遐, 竊爲三千疆土之民, 長痛哭者也. 命造樂詞, 以龍飛御天名, 亦豈非昇遐之漸乎? 長太息仰天而已.

아! 애통하도다. 태상왕으로부터 성군이 뒤를 이어 나옴에 천운(天運)이 거의 태평성세로 돌아와 오백년 문명 교화의 운세가 열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승하하시었다. 생각하건대, 삼천리강토의 백성들이 길이 통곡할 일인 것이다. 악장을 지으라고 하며 ‘용이 날아올라 하늘로 간다[龍飛御天]’는 것으로 하였던 바, 이 또한 어찌 승하하실 기미를 미리 안 것이 아니리오?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바라볼 뿐이로다.

諱珦, 世宗長子. 世宗庚午卽位, 二年壬申昇遐. 在位二年, 壽三十九, 顯陵.

휘는 향(珦)이고 세종의 장자이다. 세종 경오년(1450)에 즉위하였고, 이년 임신년(1452)에 승하하였다. 재위 연수는 2년이며 수는 39세이다. 묘호는 현릉(顯陵)이다.

○ 辛未元年. 命集賢學士, 更日入直. 上沈潛學問, 月明夜靜, 亦至集賢殿, 與之問難. 以是, 成三問等, 夜不解帶. 一日夜半, 意御駕不至, 解帶臥之, 忽聞戶外, 有呼謹甫之玉聲, 乃三問字也. 驚惶出拜, 使小宦擎金橘一盤, 宣賜而橘盡盤空, 有題詩於其中, 乃睿製也. 有曰, 沈檀便宜鼻, 脂膏便宜口. 最愛洞庭橘, 香鼻又甛口. 詩與筆, 皆絶世之寶, 爭欲模寫, 扶盤不忍釋之.

신미(辛未)년 원년. 집현전 학사에게 명하여 날마다 번갈아 입직(入直)하도록 했다. 왕은 학문에 침잠하여 달이 밝고 고요한 밤에는 집현전에 이르러 학사들과 더불어 의심나는 점을 묻곤 하였다. 이 때문에 성삼문(成三問) 등은 밤에도 관대를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밤이 깊어 임금이 이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관대를 풀고 누워 있었는데 홀연히 지게문 밖에서 근보(謹甫)하고 부르는 임금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이다. 성삼문이 몹시 놀라고 당황하여 나아가 절을 하니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귤 한 쟁반을 받들어 하사하는 것이었다. 귤이 다해 쟁반이 비자 그 속에 시가 한 수 적혀있었으니 곧 임금이 지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沈檀便宜鼻

脂膏便宜口

最愛洞庭橘

香鼻又甛口

침단(沈檀)의 향기는 코에 좋고

지고(脂膏)는 입에 좋다네.

가장 사랑스러운건 동정(洞庭)에서 나는 귤이거니

그 향기 코를 스치고 입을 달게 한다네.

시와 글씨가 모두 세상에 드문 보배라 다투어 모사하고자 하여 쟁반을 붙잡고 차마 돌려주지를 못하였다.

○ 壬申二年. 五月, 上昇遐.

임신(壬申)년 2년. 5월에 왕이 승하하였다.

◎ 上不喜聲色戱玩, 潛心性理之學, 發爲文章, 操筆立書, 未嘗凝思. 書法入神, 得寸簡尺牘者, 如重千金. 善觀天文, 精於候氣, 豫言風雨雷電, 起於何方. 世子幼沖, 召世臣, 重以宗社之託遺命, 恩義正正於辭氣之中, 爲臣子者, 孰不敢受命佩恩銘義於胸肚之裏乎?

왕은 노래와 여색이나 놀이 등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마음을 기울여 가슴 속의 회포를 문장으로 짓거나 붓을 잡고 글씨를 씀에 있어서 일찍이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졌다. 서법은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자그마한 편지 조각의 글씨라도 천금을 얻은 것처럼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 천문(天文)을 잘 살피고 기상(氣象)을 점치는 데에도 뛰어나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거나,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이 어느 곳에서 시작될 지를 예언하곤 하였다. 세자의 나이가 어린지라 세신(世臣)을 불러 종사를 의탁하는 것을 간절한 유명(遺命)으로 남겼는데 은의(恩義)가 글 안에 분명히 드러나 있었으니, 신하된 자 치고 누가 감히 그 명을 받고 은의를 가슴 속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諱弘暉, 文宗子. 壬申卽位, 乙亥三年首陽大君纂位, 莊陵.

휘는 홍휘(弘暉)이고 문종의 아들이다. 임신년에 즉위하였는데 을해 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였다. 묘호는 장릉(莊陵)이다.

○ 癸酉元年. 擢朴彭年, 爲副提學. 至是, 諸學士, 與政府, 受前王之託, 同心輔導, 誓盡誠忠.

계유(癸酉)년 원년. 박팽년(朴彭年)을 발탁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의정 대신들과 더불어 전왕의 당부를 받고 한 마음으로 왕을 보도(輔導)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하였다.

○ 前執義河緯地, 在善山鄕第, 疏陳時務, 略曰, 宜開張聖聰, 恢弘志士之氣, 嚴防未萌之欲.

전 집의(執義) 하위지(河緯地)가 선산(善山)의 시골집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임금의 총명을 열고 펼 것이며 지사(志士)의 기운을 널리 넓히어 아직 싹트지 않은 욕심을 엄히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 冬十月, 流安平大君瑢于江華, 旣而賜死. 大臣皇甫仁 ․ 金宗瑞, 皆被殺. 上今沖年, 首陽大君, 專擅國政.

겨울 10월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을 강화(江華)에 유배 보내고 조금 있다가 사사하였으며, 대신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이 모두 피살되었다. 왕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수양대군이 국정을 천단(擅斷)하였다.

○ 韓明澮, 陰結武臣洪允成等, 干首陽而直入金宗瑞家, 椎殺之. 其子承珪, 驚扶其父, 楊汀亦斬之. 首陽大君, 直入誣告于上曰, 宗瑞, 連結咸吉節度使李澄玉, 欲將推戴安平大君, 謀危宗社, 不待命, 先除逆魁餘黨. 上驚起曰, 惟叔父活我, 首陽曰, 臣當處置, 殿下勿慮. 於是, 排作三軍, 召群臣入殿, 使權擥 ․ 韓明澮, 坐門內, 曰在死簿者, 皆椎殺之. 皇甫仁 ․ 趙克寬 ․ 李穰 ․ 尹處恭 ․ 閔伸 ․ 李明敏 ․ ;鄭苯 ․ 許詡, 同被禍. 是宜首陽, 陰謀圖成之日, 大畏安平大君之忠義也. 安平大君, 性好學, 尤長於詩, 其筆法奇絶, 冠當世, 圖畵音律, 無不精通.

한명회(韓明澮)가 무신 홍윤성(洪允成) 등과 은밀히 결탁하여 수양대군에 가담하고 곧장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쇠망치로 쳐 죽였다. 그 아들 승규(承珪)가 놀라며 아버지를 부축하였는데 양정(楊汀)이 이 또한 목을 베었다. 수양대군은 곧장 임금에게로 가 무고하기를 “김종서가 함길절도사(咸吉道度使) 이징옥(李澄玉)과 연락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하여 종사가 위태로운지라 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역적의 괴수와 그 무리를 제거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길 “오직 숙부만이 나를 살릴 것입니다”라고 하자, 수양대군이 말하길 “신이 마땅히 조처할 터이니 전하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삼군을 늘어 세워놓고 군신들을 소환하였는데, 권람(權擥)과 한명회로 하여금 궁문 안에 있으면서 사명부(死名簿)에 이름이 오른 자는 모두 망치로 쳐 죽이도록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윤처공(尹處恭), 민신(閔伸), 이명민(李明敏), 정분(鄭苯), 허우(許詡) 등이 모두 화를 입었다. 이는 수양대군이 음모를 품고 이를 실행하고자 하는데 안평대군의 충의심(忠義心)을 매우 두려워하여 한 일이다. 안평대군은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고 시에 더욱 뛰어났으며 그 필법은 기절(奇絶)하여 당세에 제일이었다. 도화와 음률에도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集賢殿提學元昊, 謝病歸鄕. 上策靖難勳曰, 叔父兼周公之大勳, 寡躬有成王之年幼, 又値成王之多難, 寡躬, 以成王之責周公者, 責叔父. 叔父, 以周公之輔成王者, 輔寡躬. 乃以首陽爲領議政, 總治軍國重事. 謹寧君襛, 獨不書盟券, 幽之佛舍, 絶糧而死. 收錦城大君瑜, 禁身, 可歎首陽之權威日重, 陰結日長.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 원호(元昊)가 병을 핑계 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왕이 정난(靖難)의 공훈에 대해 상을 주면서 말하길 “숙부는 주공(周公)과 같은 커다란 공훈을 겸하였고 어린 나는 성왕(成王)처럼 나이가 어린데, 또한 성왕처럼 다난(多難)함을 만났습니다. 어린 나는 성왕이 주공에게 바란 것처럼 숙부에게 바라겠으니 숙부는 주공이 성왕을 도운 것처럼 어린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軍國)의 막중한 사안을 총괄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근녕군(謹寧君) 농(襛)은 홀로 맹서의 문권(文券)에 서명하지 않아 불사(佛舍)에 유폐하고 양식을 주지 않고 굶겨 죽였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를 잡아다 가두었으니, 수양대군의 위세가 날로 더해가며 음모가 나날이 자라남이 탄식할 일이다.

○ 乙亥三年. 上命修紫薇堂, 曰此世宗所御也. 若世宗在世, 吾之見愛, 豈小乎? 泫然泣下, 左右皆感泣.

을해(乙亥)년 3년. 왕이 자미당(紫薇堂)을 보수하도록 명하면서 말하길 “이 곳은 세종께서 계시던 곳이다. 만약 세종 임금이 살아 계시다면 내가 사랑받음이 어찌 작겠는가?”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 있는 신하가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다.

○ 首陽大君簒立爲王十三年, 不顧前王之命, 而陰結凶謀者, 顯榮於當時, 不忘前王之恩義, 而謀復者, 倂被形戮. 集賢學士, 謀復上王位, 翌年六月日, 事覺, 天也. 天地變常, 福淫禍善, 天理固然, 而人孰能禦? 然忠義莫能禦也.學士朴彭年 ․ 成三問 ․ 河緯池 ․ 李塏 ․ 柳誠源, 與宰臣兪應孚 ․ 成勝 ․ 權自愼, 同義被殺.

수양대군이 왕권을 빼앗은 지 13년이 되었는데 전왕의 유명을 돌아보지 않고 은밀히 흉모(凶謀)와 결탁한 자는 당시보다 현달하였으며, 전왕의 은의를 잊지 않고 단종의 복위를 꾀한 자는 모두 형을 받아 살육 당하였다. 집현전의 학사가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이듬해 6월에 일이 발각된 것은 천명이다. 천지의 이치가 일정한 도리가 없어 사악한 자에게 복을 주고 선한 자에게 화를 내리었나니, 진실로 천리가 그러하다면 어느 누가 이를 막을 수 있으리오! 그렇지만 충의의 마음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학사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池),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과 재신(宰臣) 유응부(兪應孚), 성승(成勝), 권자신(權自愼)이 의리를 같이 하여 피살되었다.

○ 明使賚誥命來, 首陽將親饗, 應孚以寶劒侍立榻前, 竊以謂天借其便矣. 是日, 忽有寶劒侍衛勿入之命, 應孚卽欲入刺之, 彭年等止之曰, 不如乘機更圖. 金礩知其事不成, 以實告之. 大君令武士, 並拿入, 以礩之言, 詰三問, 三問笑曰, 皆是也. 大君曰, 何爲反我? 三問曰, 進賜, 盜竊神器, 不忍見吾王被廢矣. 問其黨, 抗聲曰, 朴彭年, 及吾父耳. 又問曰, 吾父尙不諱, 況他人乎? 進賜恒言, 稱周公, 周公亦有是否? 大君怒令灼鐵, 穿其脚, 三問冷笑曰, 刑其慘矣, 復亂施烙刑, 終不屈. 令載車而出, 車內呼詩曰,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傳舍, 今夜宿誰家? 見穉女呼泣隨之, 揮去曰, 汝幸爲女, 必免死矣. 有奴而泣進一盃酒, 飮輒復吟曰, 食人之食衣人衣, 所性平生莫有違. 一死固知忠義在, 顯陵松柏夢依依. 遂轘之. 朴彭年, 大君愛其才, 令人密通曰, 苟諱謀而歸化, 則可得生路. 彭年笑而不答. 及入庭, 小無隱諱, 亦稱進賜, 抗之以義舌, 大君曰, 汝其稱臣於我, 食祿於我, 敢有二心乎? 曰臣字, 以巨字細書之, 祿則封緘如故, 皆有標, 識年月日者, 視之果若矣. 羅將以杖擋其口, 對曰我乃上王臣, 屈於進賜乎? 又命轘之. 李塏, 被刑, 無異辭. 但曰, 此非傑紂之刑乎? 其氣質甚瘦弱, 然顔色小不變, 又轘之. 河緯地曰, 旣加逆名, 當誅而復何問? 又轘如之. 柳誠源, 卽還家, 與其妻, 酌酒訣, 入祠堂, 自刎而死, 亦出尸轘之. 兪應孚顧三問曰, 止吾劍而致有今日. 大君曰, 汝欲何爲? 曰我劒, 不饒進賜, 進賜大怒, 令灼鐵刺腹, 油火並燻, 應孚自若曰, 此鐵冷, 更煮來. 大君曰, 凶漢, 亟轘之. 六臣之父與弟及同義者三十一人, 或死或流, 又籍沒家産, 妻妾爲婢.

명나라 사신이 조서를 반포하러 오니 수양대군이 장차 친히 연향(燕饗)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유응부가 보검을 가지고 탑전에 시립하게 되어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기회로 여기었는데, 이날 갑자기 보검을 지니고 시위하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명이 내리었다. 유응부가 즉시 들어가 찔러 죽이고자 하니, 박팽년 등이 이를 말리면서 말하길 “기회를 봐서 다시 도모함이 낫다”고 하였다. 김질(金礩)은 일이 성사되지 못하리라 여기고 실상을 고해바치었다. 수양대군은 무사를 시켜 붙잡아 오게 하여 김질의 말로 성삼문에게 힐문하니 성삼문은 웃으며 말하길 “모두 맞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이 “어째서 나를 배반하였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진사(進賜)가 임금의 자리를 훔쳤는바 우리 임금이 폐위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함께 도모한 무리에 대해 묻자 성삼문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길 “박팽년과 나의 아버지이다”고 하고, 재차 묻자 “나의 아버지도 숨기지 않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을 숨기겠는가? 진사가 늘 주공이라 자칭하더니 주공도 이러한 행동을 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수양대군이 노하여 쇠를 달구어 오도록 하여 그 다리를 지지니 성삼문은 냉소하며 말하길 “형벌이 참혹하기도 하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다시 낙형(烙刑)을 가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함거(檻車)에 실어 밖으로 나가니 함거 안에서 시를 읊었다.

擊鼓催人命, 목숨을 재촉하는 북소리 둥둥 울려

回頭日欲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가 떨어지려 하는구나.

黃泉無傳舍, 황천길엔 전사(傳舍)가 없을 것인데

今夜宿誰家? 오늘밤엔 뉘 집에서 자겠는가?

어린 딸이 울면서 부르짖으며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손을 내저으며 쫓아내며 “너는 다행이 계집아이라 죽음은 면할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노복이 울면서 술 한 잔을 바치자 마시고서는 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食人之食衣人衣,

所性平生莫有違.

一死固知忠義在,

顯陵松柏夢依依.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고 남이 짠 옷을 입었지만

타고난 본성을 평생토록 어긴 바는 없었네.

한 번 죽음에 충의가 있음을 알겠거니

현릉(顯陵-문종의 묘)의 송백(松柏)이 꿈속에도 아련하구나.

마침내 능지처참하여 죽었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그 재주를 아끼어 사람을 보내 은밀히 통보하기를 “진정으로 도모한 것을 숨기고 우리에게 귀의한다면 살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박팽년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아니 하였다. 대궐 마당에 들어가자 조금도 꺼리거나 숨기는 것이 없고 또한 수양대군을 진사로 부르며 의리에 맞는 언사로 항거하였다. 수양대군이 말하길 “네가 이미 나에게 신하라 칭했으며, 내가 주는 녹을 먹었는데 감히 두 마음을 먹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신이란 글자는 ‘거(巨)’자로 작게 썼으며, 녹봉은 받은 그대로 봉하여 모두 날자를 표시해 두었다”고 하였다. 이에 이를 조사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나장(羅將)이 몽둥이로 그 입을 틀어막으니 말하길 “나는 상왕의 신하인데 진사에게 굴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명하여 능지처참하였다. 이개(李塏)는 형을 받으면서 특이한 말은 하지 않고, 다만 “이는 걸주(傑紂)와 같은 포악한 임금이 행하던 형벌이 아닌가?”라고 하였을 뿐이었다. 그는 체질이 몹시 허약했는데도 안색을 조금도 변치 않았다. 또한 능지처참하였다. 하위지(河緯地)는 말하길 “이미 역적의 이름에 올려놓았으니 마땅히 죽일 것이지 또 뭘 물으시오?”라고 하여 또한 능지처참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소식을 듣고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그 아내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영결하고 사당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는데 그 시신을 끌어내어 능지처참하였다. 유응부(兪應孚)는 성삼문을 돌아보며 말하길 “나의 검을 못 쓰게 하여 오늘의 일을 불러 들였구려.”라고 하니, 수양대군이 “네가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답하기를 “나의 검이 진사에게는 너그럽지 않다네.”라고 하자 진사가 대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를 지지도록 하니 기름불이 피어올랐다. 유응부는 태연자약하며 말하길 “이 쇠꼬챙이는 식었다. 다시 달구어 오도록 해라”고 하자, 수양대군이 말하길 “흉악한 놈이니 빨리 능지처참하여라.”고 하였다. 사육신의 아비와 아우 및 그들과 의리를 같이 한 31인은 죽기도 하고, 유배를 가기도 했으며 가산은 몰수되고 처첩(妻妾)은 노비가 되었다.

○ 翌年, 庶人金正洙, 告礪良府院君宋玹壽 ․ 判官權完等, 謀其上王復位, 並拿殺之.

이듬해에 서인(庶人) 김정수(金正洙)가 여양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와 판관(判官) 권완(權完) 등이 상왕의 복위를 꾀한다고 고변하여 둘 다 잡아다 죽이었다.

○ 六月, 降封上王, 爲魯山君, 遜于寧越郡. 大妃殿宋氏, 爲魯山夫人, 處之東門外. 上王御客舍, 月夜登梅竹樓, 聽笛有詩曰, 月白夜蜀魂啾, 含愁情倚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又吟子規曰, 一自竄禽出帝宮, 孤形隻影碧山中. 暇眠夜夜眠無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 聞者莫不流涕, 上王每於淸晨, 正衣冠坐堂, 過者皆叉手而趨, 或値大旱, 輒焚香禱天, 甘霈如注.

6월 상왕의 봉호를 강등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고 영월군(寧越郡)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비전 송씨(宋氏)는 노산군의 부인으로 삼고 동문(東門) 밖에 거처하도록 했다. 상왕이 객사(客舍)에 있으면서 밤에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젓대 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月白夜蜀魂啾,

含愁情倚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달빛 하얗게 빛나는 밤, 촉제(蜀帝)의 넋이 우는데

시름의 정 머금고 누각 머리에 기대었네.

너의 구슬픈 울음 소리내 듣기 괴롭나니

네 울음소리 없다면 나의 시름도 없으리라.

이 세상의 괴로움에 지친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행여 춘삼월 소쩍새 우는 누각에는 오르지 마소.

一自竄禽出帝宮,

孤形隻影碧山中.

暇眠夜夜眠無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

한 번 제궁(帝宮)에서 쫓겨나 새가 된 뒤로

외롭고 쓸쓸한 신세로 푸른 산중에 거한다네.

잠깐 잠들었다 온밤 내내 잠잘 틈이 없고

끝없는 한은 해마다 다함이 없구나.

울음소리 끊어지는 새벽 산봉우리에 저무는 달이 하얗고

핏빛으로 흘러가는 계곡 골짜기 물엔 낙화가 붉다.

하늘은 귀멀어 아직껏 애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잠긴 사람의 귀만 유독 밝은가?

소쩍새를 읊은 또 다른 시는 다음과 같다.

이 시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상왕은 매양 새벽녘에 의관을 정제하고 당에 앉아 있었는데 지나는 이들은 모두 손을 깍지 끼고 종종걸음을 칠뿐이었다. 혹 큰 가뭄이 뜰 때면 문득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는데 그러면 단비가 크게 쏟아졌다.

○ 錦城大君瑜, 與順興府使李甫欽, 迎上王爲謀, 謀洩, 皆自殺.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을 맞아들이려 도모하다가 계략이 누설되자 모두 자살하였다.

○ 冬十月, 政府請置上王于法, 以除亂根, 首陽從之. 使禁府都事王邦衍, 奉藥至寧越, 踧踖不敢入, 羅將以時刻遲延, 促之. 邦衍入伏, 流涕而已. 上王問來由, 邦衍哽咽不能言, 羅將遂持弓弦, 直入少頃, 烏號之弓, 已莫攀矣. 行不踰閾, 九竅血流而斃. 於是, 宮女近侍等, 爭投水而死. 是日雷雨大作, 烈風拔木, 黑霧彌空, 經夜不晴. 本郡戶長嚴興道, 聞變哭踊, 以其爲親壽具, 急斂結, 暗瘞于郡北. 其家族危之, 興道曰, 爲君被禍, 吾所甘當. 自是, 有終身自廢者, 是爲生六臣. 而梅月堂金時習, 卽其一也. 聞首陽之簒位, 閉戶大哭, 仍盡焚其書, 托跡緇流, 放浪山水, 世以狂僧目之. 與鄭相苯, 于縣監之産, 潛服上王喪三年, 詠採薇歌. 直學元昊, 入寧越, 服喪三年, 寢處土宇, 終三年乃還. 判樞奇虔, 托睛盲, 長往不返. 首陽持針擬刺, 終不目逃, 以此免禍. 申叔舟弟末舟, 隱淳昌不起. 提學安止, 托病不仕, 許慥自刎死. 漢南君王於 ․ 永豊君瑔, 並安置. 崔沔 ․ 李方禎 ․ 朴閏外並自斃者, 二十七人.

겨울 10월 의정부에서 상왕을 법에 따라 처리하여 화란의 근원을 제거할 것을 청하자 수양대군이 이를 따랐다. 의금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안으로 들어가질 못하자 나장이 시각이 지체된다고 재촉하였다. 왕방연이 안으로 들어가 엎드리고 눈물만 떨구고 있자 상왕이 온 연유를 물었다. 왕방연이 목이 메어 말하지 못하자 나장은 드디어 활줄을 들고 곧장 들어간 뒤 조금 지나자 오호궁(烏號弓)을 이미 부여잡을 수 없게 되었다. 왕은 도망쳐 나오다가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온 채로 쓰러져 죽어 있었다. 이에 궁녀와 시종들은 다투어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날 뇌성이 치면서 큰비가 내리고 거센 바람이 나무를 부러뜨렸으며 검은 운무가 허공에 가득하더니 밤이 새도록 걷지 않았다. 본군의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변고를 듣고 통곡하며 발버둥 치더니 그 어머니의 수의로 준비해 둔 것을 가지고 급히 염을 하여 몰래 군의 북쪽 지경에 묻었다. 그 집안사람들이 이를 위험한 일이라고 하자 엄흥도는 “임금 때문에 화를 당한다면 내 달게 받을 것이다”고 하였다. 단종이 죽은 뒤로 평생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자로는 생육신이 있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소문을 듣고는 방문을 닫고 크게 통곡하더니 그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여 산수간을 방랑하니, 세상에서는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정상분(鄭相苯)과 더불어 남몰래 상왕의 삼년상을 행하며 채미가(採薇歌)를 읊조렸다. 직학(直學) 원호(元昊)는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행하였는데 토굴 속에 침식하면서 삼년의 기한을 마친 뒤에야 돌아왔다. 판관(判樞) 기건(奇虔)은 소경인 이유로 멀리 떠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수양대군이 바늘을 가지고 찌르려고 할 때 끝내 눈을 피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화를 면한 것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는 순창(淳昌)에 은거하면서 나오지 않았다. 제학(提學) 안지(安止)는 병을 핑계대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허조(許조)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남군(漢南君) 왕어(王於)와 영풍군(永豊君) 전(瑔)은 모두 위리안치 되었다. 최면(崔沔), 이방정(李方禎), 박윤(朴閏) 이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모두 27인이었다.

◎ 嗚呼! 端宗之於首陽, 未嘗有弑君父之變而僣竊之, 是可謂纂逆, 矧惟弑其君爲王者乎? 端宗之於首陽, 天倫之統已絶, 而非仇則讐, 非賊則逆. 處地猶如是, 立承系統, 而同配於宗廟之昭穆, 則神其饗乎? 竊恐首陽之纂立, 天討雖曰未及, 宜不容於千秋筆義, 則那可以同昭穆於端宗之次乎哉! 苟曰同昭穆, 則恐惟首陽, 或不容於端宗神罰之下矣. 先王之靈, 亦其捨諸? 余以是, 不書世祖廟號.

아아! 단종에 대해서 수양대군은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변을 한 적이 없었으나 참람 되게 왕위를 훔치었는바, 이는 가히 ‘찬역(簒逆)’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그 군주를 시해하고 왕이 된 자에 있어서랴? 단종에 대해서 수양대군은 천륜을 같이하는 같은 핏줄이었지만 이미 구(仇)가 아니면 수(讐)라 할 것이오, 적(賊)이 아니면 역(逆)이라 할 것이다. 처지가 이미 이와 같은 즉, 혈통을 같이하여 종묘에서 소목(昭穆)의 차례에 나누어 배향한다면 신이 그것을 흠향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건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것은 하늘의 벌은 비록 미치지 못했다고 하겠지만 천추 필법의 의리에는 의당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소목을 같이하여 단종 다음에 신위를 둘 수 있겠는가! 참으로 ‘소목을 같이 해야 한다’고 한다면 아마도 수양대군이 단종 신령의 벌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니, 선왕의 영령이 또한 이를 내버려 두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세조(世祖)라는 묘호(廟號)를 적지 않는다.

○ 十三年九月, 首陽不豫, 傳位于睿宗.

13년 9월 수양대군의 몸이 편찮아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諱暲, 首陽長子, 至成宗追尊.

휘는 장(暲)이고 수양대군의 장자이다. 성종대에 이르러 추존되었다.

諱晄, 德宗弟, 在位一年, 壽二十. 昌陵.

휘는 황(晄)이고 덕종의 아우이다. 재위 연수는 1년이고 수는 20세이다. 묘호는 창릉이다.

○ 己丑元年. 命國恤中, 禁民間作樂, 禱神之弊. 十一月, 上昇遐.

기축(己丑)년 원년. 국상 중에는 민간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신에게 기도하는 폐단을 금하였다. 11월 왕이 승하하였다.

諱娎, 德宗第二子. 在位二十五年, 壽三十八. 宣陵.

휘는 혈(娎)이고 덕종의 둘째 아들이다. 재위 연수는 25년이고, 수는 38세이다. 묘호는 선릉(宣陵)이다.

○ 庚寅元年. 立桓因 ․ 桓雄 ․ 檀君三聖廟于文化九月山, 依平壤檀君廟例, 歲送香祝.

경인(庚寅)년 원년.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모신 삼성묘(三聖廟)를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에 세웠다. 평양에 있는 단군 사당의 전례에 준하였으며, 해마다 향축(香祝)을 보내었다.

○ 建尊經閣, 設養賢庫, 命賜四書五經于西北兩道, 使道臣勸課儒生.

존경각(尊經閣)을 건립하고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였다.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황해도와 함경도 양도에 내려주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유생에게 시험보일 것을 권하도록 하였다.

○ 乙未六年. 親享文廟, 御明倫堂, 策士, 畫附田四百結, 以贍養士之需. 幼學南孝溫, 疏請復昭陵.

을미(乙未)년 6년. 친히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 명륜당(明倫堂)에 행차하여 선비들에게 책문(策文)을 시험보이고 부속 토지로 전(田) 4백 결(結)을 획정하여 선비를 기르는 비용에 충당하도록 했다.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이 소를 올려 소릉(昭陵 :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복구할 것을 청하였다.

○ 甲辰十五年. 春正月, 始親耕籍田. 前一日, 上親享農壇, 翌日, 耕籍田. 上五推, 大臣 ․ 宗臣七推, 六卿兩司九推.

갑진(甲辰)년 15년. 춘 정월에 왕이 처음으로 친히 적전(籍田 :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내던 제전(祭田))을 경작하였다. 이에 하루 앞서 왕이 직접 선농단(先農壇)에 제사지내고 다음날 적전을 경작한 것이다. 왕은 다섯 번 갈았고, 대신과 종신(宗臣)은 일곱 번 갈았으며, 육경과 양사(兩司)는 아홉 번을 갈았다.

○ 三月, 王妃始行親蠶禮, 服鞠衣, 乘輿而出, 命婦隨行, 女官前導, 至採桑壇, 降輿採桑.

3월 왕비가 처음으로 직접 행차하여 잠례(蠶禮)를 행하였다. 왕비는 국의(鞠衣)를 입고 가마를 타고 행차했는데 내명부(內命婦)에서 수행하고 여관(女官)들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채상단(採桑壇)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려 뽕잎을 땄다.

○ 己酉二十年. 五月賜廢妃尹氏死. 廢處私邸, 日夜號泣, 繼之以血, 上遣內竪, 廉訪, 反以艶粧盛飾, 怨毒日甚, 誣告, 以是故, 有是命. 尹氏, 以拭淚斑血痕, 付其母申氏曰, 吾兒幸保全, 以是示之, 知我寃. 因嘔藥死.

기유(己酉)년 20년. 5월 폐비 윤씨(尹氏)를 사사하였다. 폐비는 사저(私邸)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하여 왕이 내시를 보내 살펴보도록 하였더니 도리어 화장을 짙게 한 채 성복(盛服)을 차려입고 원망하는 마음이 날로 심해져 왕을 무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윤씨는 눈물을 훔치고 핏자국을 닦더니 그 어미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말하길 “우리 아이가 행여 몸을 보전하거든 이것을 보여주어 나의 원통함을 알게 하소서”라고 하고 나서 약을 토하고 죽었다.

○ 甲寅二十五年. 以鄭汝昌爲昭格署參奉, 辭不赴. 毁撤城內尼舍二十三所.

갑인(甲寅)년 25년. 정여창(鄭汝昌)을 소격서(昭格署)의 참봉(參奉)에 임명하였는데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성내의 니사(尼舍) 23개소를 훼철하였다.

○ 十二月, 上疾篤, 具冠服, 引見大臣, 屬以後事, 昇遐.

2월 왕이 병환이 심해지자 관복을 갖추어 입고 대신들을 인견하여 후사를 당부하고 승하하였다.

◎ 嗚呼! 寶齡僅三十有餘, 國之善政, 猶如是乎! 親饗文廟, 以啓儒運迴泰之天, 撤去城內尼舍, 以斥緇流惑世之誣, 嘉乃儒生焚佛之士曰, 可賞不可罪. 觀此數件事, 竊恐千秋士氣, 可以振興於一時善政之中矣. 政敎之善, 孰愈於此? 始又親耕籍田, 使一國之民, 勤耕力穡, 未嘗有一夫不得其所, 則邦本益固矣. 然胡天不弔, 聖壽不壽, 竊爲吾東之民而長歎息者也. 假以數年, 則並於世宗聖明之治無疑耳.

아아! 보령(寶齡)이 겨우 30여 세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나라에 선정을 베푼 것이 오히려 이와 같구나. 직접 문묘에 향사하여 유학의 운세가 융성하게 돌아올 시절을 열었으며, 성내의 니사를 철거하여 중들이 혹세무민하는 폐단을 혁파하였고, 유생으로 부처를 태운 선비를 가상히 여겨 “상을 줄 것이지 죄줄 일이 아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을 살펴보건대 천추의 사기(士氣)가 한 때의 선정으로 진흥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나니, 정교의 선함으로 무엇이 이보다 낫겠는가? 또한 처음으로 직접 적전을 경작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일에 힘쓰도록 하여 한 사람의 농부도 마땅히 있을 곳을 잃지 않도록 하였으니, 나라의 근본이 더욱 공고해 졌다. 그런데 어찌해서 하늘은 이를 어여삐 여기지 않고 성수(聖壽)를 장수하지 않도록 하였는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의 백성으로 길이 탄식할 바이니, 몇 년만 수명을 더해 주었다면 세종의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다스림과 나란하였을 것임이 의심되지 않는다.

名㦕, 成宗子. 成宗甲寅立, 丙寅廢爲燕山君.

이름은 융(㦕)이고 성종의 아들이다. 성종 갑인년(1494)에 즉위하였으며, 병인년(1506)에 폐위되어 연산군으로 강등되었다.

○ 乙卯. 復廢妃尹氏位. 初議復位, 金諶 ․ 金達秀, 廷爭不可, 君曰, 人皆有母子, 卿獨不知乎? 對曰, 世人但知有母, 不知有父也. 君竟復位. 厥後, 宮人進廢妃血衫, 君見之大哭. 自此, 漸有心疾.

을묘(乙卯)년. 폐비 윤씨를 복위(復位)하였다. 애초에 복위에 대해 논의할 때 김심(金諶)과 김달수(金達秀)가 조정에서 간쟁(諫爭)하며 그 불가함을 논하였다. 연산군이 말하길 “사람들은 모두 어미가 있는데 경들만 이를 알지 못하는가?”하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세인들은 단지 어미가 있음을 알뿐이고 아비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연산군이 끝내 복위시킨 것이다. 그 후로 궁인이 폐비의 피 묻은 적삼을 바치니 군이 이를 보고 크게 통곡하였으며, 이때부터 점점 정신병이 있게 되었다.

○ 戊午. 追施故判書金宗直罪, 禍及泉壤. 號佔畢齋, 道學文章, 允爲士林領袖, 門人及從遊, 被誣打盡. 自是, 士林喪氣, 久不聞讀書聲, 甚矣! 子光之誣搆也. 以其遺集中, 弔義帝文, 指世祖而作也. 金馹孫之史筆, 是皆金宗直之指揮云, 故士皆被禍.

무오(戊午)년. 고 판서 김종직(金宗直)의 죄에 대해 형벌을 가하여 화가 무덤에까지 미치었다. 김종직은 호가 점필재(佔畢齋)로 도학과 문장이 진실로 사림의 영수이었으니 그 문인과 종유한 이들이 무고를 입어 모조리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사림의 기운이 꺾이어서 오래도록 책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니, 심하도다! 유자광(柳子光)이 모함함이여. 김종직의 유집(遺集) 중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를 가리켜 쓴 것이다.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기초하면서 쓴 것이 모두 김종직의 지시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기에 사림들이 화를 당한 것이다.

○ 殺其弟安陽君㤚 ․ 鳳安君逢, 及先朝後宮嚴氏 ․ 鄭氏. 時仁粹大妃, 方寢疾, 聞宮中殺戮之聲, 歎曰, 後宮, 亦先朝之所愛, 忍至慘酷, 如是乎? 君聞之, 以頭觸大妃, 大妃驚曰, 凶惡哉!

그 아우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봉안군(鳳安君) 봉(逢) 및 선조(先朝)의 후궁인 엄씨(嚴氏)와 정씨(鄭氏)를 살해하였다. 이 때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바야흐로 병중에 있으면서 궁중에서 살육 당하는 아우성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길 “후궁 또한 선조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인데 차마 이다지도 참혹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연산군이 이 말을 듣고 대비의 머리를 들이받으니 대비가 깜짝 놀라며 “흉악하도다!”라고 하였다.

○ 甲子. 夏四月, 仁粹大妃韓氏昇遐. 君行易月之制, 令臣民並二十七日而闋服. 勒取時政日記, 見其廢妃時獻議者, 復位時忤旨者, 並殺之. 寃號之聲載路, 或碎骨飄風, 或有投尸江中者, 一百有餘.

갑자(甲子)년. 여름 4월 인수대비 한씨(韓氏)가 승하하였다. 연산군은 달을 넘기는 예제(禮制)를 시행하여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27일 동안 상복을 입어 상을 마치도록 하였다. 시정일기(時政日記)를 억지로 빼앗아 폐비에 대해 찬성한 자와 복위할 때 자신의 뜻을 거스른 자들을 아울러 살해하였다.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으며, 부서진 뼈가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강물 속에 던져진 시체가 백여 명이 되었다.

○ 乙丑. 大設禍網, 橫被刑戮. 是皆一國之善人, 禍及泉壤, 極被刑戮, 一國幾至空虛. 天地只是形殼而已, 孰與之以爲政?

을축(乙丑)년. 화(禍)의 법망이 펼쳐져 형을 받고 살육 당한 자가 모두 온 나라의 착한 사람들이었다. 화는 무덤에까지 뻗치어서 형벌이 지극히 잔인하였으며 온 나라가 거의 텅 비다시피 하였다. 천지간에 다만 껍데기들만 남아있을 뿐이니 뉘와 더불어 정사를 할 수 있겠는가?

○ 有以國文之正音, 悉陳君之淫虐, 揭于南門. 君以爲士流之所爲, 盡逮捕, 拷掠慘酷, 人不堪其刑, 此所謂池魚不覺城火之及, 而沒入於火炎之中矣. 士禍之酷, 如是慘極乎! 自是, 撤去訓民正音廳.

국문인 정음(正音)으로 연산군의 음란과 학정에 대해 낱낱이 적은 글이 남문(南門)에 붙었다. 연산군은 사류(士流)들의 소행으로 생각하여 이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하고 참혹하게 고문하니 사람들이 그 형벌을 견뎌내지 못하였다. 이는 이른바 “연못의 물고기가 성의 불길이 미치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화염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사화(士禍)의 참혹함이 이처럼 참혹할 수 있단 말인가! 이때부터 훈민정음청(訓民正音廳)이 폐지되었다.

○ 丙寅. 九月, 前吏曹參判成希顔等, 奉貞顯大妃命, 廢王爲燕山君, 安置于喬洞. 迎晉城大君懌, 立爲王.

병인(丙寅)년. 9월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 등이 정현대비(貞顯大妃)의 명을 받들어 연산군을 왕위에서 내쫓고 교동(喬洞)에 안치하였다. 진성대군(晉城大君) 역(懌)을 맞이하고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 命冊封府夫人愼氏, 立爲王妃, 百官進賀.

부대인(府夫人) 신씨(愼氏)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으니 백관들이 하례하였다.

諱懌, 成宗第二子. 在位三十九年, 壽五十七. 靖陵.

휘는 역(懌)이고 성종의 둘째 아들이다. 재위 연수는 39년이고, 수는 57세이다. 묘호는 정릉(靖陵)이다.

○ 丙寅元年. 重修文廟, 還奉位版, 復置博士以下官. 先是, 燕山撤移文廟, 至是復舊.

병인(丙寅)년 원년. 문묘(文廟)를 중수하고 위판(位版)을 다시 모셨으며 박사(博士) 이하의 관원을 다시 두었다. 앞서 연산군이 문묘를 훼손하고 옮기었는데 이 때 이르러 복구한 것이다.

○ 命中外人士, 父母三年喪, 一遵聖人之制.

중외의 사인(士人)들에게 명하여 부모의 삼년상은 일체 성인의 제도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 戊辰三年. 命高麗侍中鄭夢周, 從祀文廟, 修墓立碑. 命復金宗直 ․ 金馹孫等官, 還給家産.

무진(戊辰)년 3년. 고려 시중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從祀)하도록 명하며 묘를 조성하고 비를 건립하도록 했다. 김종직과 김일손의 관작을 복구하고 가산을 되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 追奪李克墩爵, 收尹弼商 ․ 盧思愼 ․ 韓致亨 ․ 柳子光等賞賜田宅.

이극돈(李克墩)의 관작을 추탈하고,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한치형(韓致亨),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상으로 내려준 전택(田宅)을 환수하도록 했다.

○ 戊寅十三年. 副提學趙光祖, 進講大學. 嗚呼! 一自南沈之禍, 小學 ․ 近思錄, 爲世大禁, 讀此書, 則指爲己卯之黨.

무인(戊寅)년 13년. 부제학 조광조(趙光祖)가 대학(大學)을 진강하였다. 아! 한 번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재앙을 일으키자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은 세상에서 크게 금지되어 이 책을 읽으면 곧 기묘사화의 무리로 지목되었다.

○ 丁酉三十二年. 賜金安老死. 放還羅世纘等, 擢置淸顯, 在謫, 大書忠信二字, 付于座右.

정유(丁酉)년 32년. 김안로(金安老)를 사사하였다. 나세찬(羅世纘) 등을 방환하고 발탁하여 청현직에 임명하였다. 나세찬은 귀양지에 있으면서 ‘충신(忠信)’의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자리 오른편에 두었다고 한다.

○ 以周世鵬爲豊基郡守. 豊基, 卽高麗大儒安裕之鄕也. 世鵬就其舊居, 建白雲洞書院.

주세붕(周世鵬)을 풍기(豊基) 군수에 임명하였다. 풍기는 고려의 대유학자 안유(安裕)의 고향인데 주세붕이 그 옛집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 以徐敬德, 除厚陵參奉, 不就. 本松都人, 結廬花潭之上, 聚徒講學, 硏窮自得.

서경덕(徐敬德)을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본래 송도(松都) 사람으로 화담(花潭) 곁에 오두막집을 엮고 무리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탐구하며 자득하였다.

○ 右參贊李彦迪, 請歸養其親. 初彦迪, 上疏有一綱十目, 上曰, 皆是格言, 何異眞西山哉? 使兼世子賓客. 往來覲其親, 可也, 命擧隱逸之士. 於是, 皆極薦一時之善士, 命銓曹, 量才授職.

좌참찬(右參贊) 이언적(李彦迪)이 고향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 이언적은 ‘일강십목(一綱十目)’의 상소를 올렸는데 왕은 말하길 “모두가 격언이니 서산(西山:陳德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며,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하도록 했다. 왕이 왕래하면서 어버이를 뵈어도 될 것이라고 하고 숨어 사는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라고 했다. 이에 당시의 착한 선비는 빠짐없이 천거하니 전조(銓曹)에 명하여 재주에 따라 관직을 주라고 하였다.

○ 甲辰三十九年. 十一月, 上昇遐, 世子卽位, 命蠲京畿兩西今年田租.

갑진(甲辰)년 39년. 11월 왕이 승하하여 세자가 즉위하였다. 경기도와 서도(西道)의 양도 전조(田租)를 감면할 것을 명하였다.

◎ 明主之治政也, 親賢斥奸, 明察朝臣之心, 是宜善政之大節目也. 苟不辨賢奸之用事, 而使之同立, 則不惟是薰蕕之同器, 奸臣媢賢之口, 烏可與蕕類亂黨之臭等乎哉? 凡國君惑信一辭之誣搆, 慘酷之禍, 及於善類則, 一國之政, 亦將以爲奸臣所有矣. 今中宗, 立於燕山之虐政餘, 襲其廢主之虐政, 踵生己卯之士禍, 南沈之陰結凶謀, 猶歇后, 竊恐非是昏主, 而惑信走肖爲王陰奸無根之說, 打盡一國之善類乎? 假使宮苑花葉, 皆有走肖爲王之痕, 上有明察之鑑, 則禍及一國之善類, 猶如是慘酷乎? 竊恐舊國前王之失政, 諱之不可, 筆之亦難矣. 然商周之筆, 不諱桀紂幽厲之虐政, 是千秋筆義攸在也, 亦何以哉?

현명한 군주가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현신을 가까이 하고 간신을 배척하며 조신(朝臣)의 마음을 환히 살피는 것이 의당 선정을 행함에 있어 중요한 절목(節目)이다. 만약, 현신과 간신의 행위를 분변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함께 있도록 한다면 이는 향기와 악취를 같은 그릇에 있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닐 것이다. 간신들이 현신을 질투하여 말을 내뱉는 것이 어찌 악취 나는 부류가 무리를 어지럽히는 것과 같겠는가? 무릇 한 나라의 임금이 한마디라도 거짓된 모략에 미혹되고 이를 믿어 참혹한 화가 착한 부류에게 미친다면 온 나라의 정사가 장차 간신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바이다. 지금 중종은 연산군의 학정(虐政)을 이어 왕위에 올랐기에 폐주(廢主)의 학정을 이어받아 기묘사화의 화가 있게 하였다. 남곤과 심정이 은밀히 흉악한 계책을 세운 것은 오히려 치밀하지 못한 편이었다. 생각건대 혼주(昏主)가 아니면서도 어째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간사하고 근거 없는 말에 미혹되어 온 나라의 착한 선비를 모조리 잡아들였단 말인가? 설령 궁궐 후원의 나뭇잎에 모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흔적이 있다 할지라도 왕이 밝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화가 온 나라의 착한 선비에게 미침이 이처럼 참혹할 수 있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옛날 전왕의 실정을 숨기는 것은 불가한 것이지만 기록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상(商)나라나 주(周)나라의 역사 기록에서 걸주(桀紂)나 유려(幽厲)와 같은 폭군의 학정을 숨기지 않았으니, 천추 역사서의 의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니 또한 어찌 하겠는가?

諱山告, 中宗長子. 甲辰卽位, 乙卯昇遐. 在位八月, 壽三十一. 孝陵.

휘는 호(山告)이고 중종의 장자이다. 갑신년에 즉위하여 을사년에 승하하였다. 재위 기간은 8개월이고, 수는 31세이다. 묘호는 효릉(孝陵)이다.

○ 乙卯元年. 太學生朴謹等, 疏訟趙光祖諸賢誣被之寃, 請復其官.

을사(乙巳)년 원년. 태학생 박근(朴謹)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를 비롯한 제현(諸賢)의 무고 당한 원통함을 자세히 밝히고 관작을 복구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 命以金麟厚爲修撰, 特賜墨竹畵, 以示意, 欲久留補化, 而竟以親病歸.

김인후(金麟厚)를 수찬(修撰)에 임명하였는데, 특별히 묵죽도(墨竹畵)를 하사하였으니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왕화(王化)에 도움을 주라는 뜻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김인후는 결국 어버이의 병환으로 귀향하였다.

○ 上聞贊成李彦迪, 以疾辭歸, 令內醫院, 賚藥治之. 命大臣, 薦拔遺逸之士.

왕이 찬성(贊成) 이언적이 병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내의원(內醫院)에 명하여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대신에게 명하여 초야에 묻혀있는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 秋七月, 上昇遐, 以遺命, 立弟慶原大君峘爲王. 國恤頒布之日, 雖在深山窮谷, 莫不號哭, 如喪父母.

가을 7월 왕이 승하하였다. 유명으로 아우 경원대군(慶原大君) 환(峘)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국상이 반포되는 날 심산궁곡에 있는 백성들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 以遺旨, 盡滌己卯諸賢之罪名, 復薦擧科.

유지를 남겨 기묘사화에 희생된 선현의 죄명을 없애고 그 후손은 다시 천거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했다.

◎ 卽位之初, 擧善而能用, 任賢無疑, 政出於善人之手, 東土之民, 至於愚夫孺婦, 政敎浹洽骨髓, 莫不曰, 非吾君, 吾何以食之? 非吾王, 吾何以衣之? 亦在深山窮巷, 康衢之謠, 童子唱之矣. 奈之何, 天不弔東, 在位猶未一期, 遽八朔而昇遐? 國恤頒布之日, 哭聲痛號, 如喪考妣, 一日一夜, 達于四境, 嗚呼! 痛矣. 國哀卽日, 咸以痛號聲, 傳達于四境, 竊恐古惟未聞, 而今亦希覯爾. 以是, 河西金先生, 閉門自靖, 痛迫不出. 然明宗亦是明君也, 黼黻立朝, 以明德之明, 及於作新民之域, 恐惟賢於不出耳.

즉위한 처음에 선인을 천거함에 이를 기용할 줄 알았으며 현사에게 정사를 맡김에 의심을 두지 않았다. 선인의 손에서 정사가 나옴에 이 땅의 백성들로 어리석은 일반 민중이나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교화가 골수에 이르도록 두루 미치었다. 이에 백성들이 말하길 “우리 임금이 아니라면 내 어찌 밥을 먹을 수 있으며, 우리 임금이 아니라면 내 어찌 옷을 입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면서 심산궁곡에 이르기까지 태평성대를 칭송하는 노래를 어린 아이들도 불렀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이 이 땅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 왕위에 오른 지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여덟 달만에 갑자기 승하하였단 말인가? 국상이 반포되는 날 애달픈 통곡소리가 하루 온종일 사방에 가득하였다. 아아! 애통한지고. 국상 당일에는 모두들 통곡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이어졌으니, 생각건대 이는 옛날에도 있었단 말을 듣지 못했으며 지금 또한 보기 드문 것이다. 이에 하서(河西) 선생은 두문불출하고 고요히 계셨나니 애통한 심정이 가득하여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명종 또한 명군으로 보불(黼黻)을 입으시고 조정에 올랐으니 밝은 덕의 밝음으로 백성들을 새롭게 교화하는 경지를 이룩함에 있어 오직 현자가 출사하지 않은 것을 염려하였다.

諱峘, 中宗第二子. 乙巳卽位, 丁卯昇遐, 在位二十二年. 壽三十四, 康陵.

휘는 환(峘)이고 중종의 둘째 아들이다. 을사년에 즉위하여 정묘년에 승하하였다. 재위 연수는 22년이고, 수는 34세이며 묘호는 강릉(康陵)이다.

○ 丙午元年. 左贊成李彦迪, 撰進戒辭十條. 一慈殿體文母孟母, 善導聖賁也.

병오(丙午)년 원년. 좌찬성 이언적이 십조로 된 경계의 말을 찬하여 올리었는데, 그 중 하나는 자전(慈殿)이 문왕(文王)과 맹자(孟子)의 어머니처럼 덕을 체득하여 임금을 크게 계도하라는 것이었다.

○ 戊申三年. 召見潛邸時師, 傳愼希復, 命史官勿入, 又命各道薦遺逸之士.

무신(戊申)년 3년.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스승인 신희복(愼希復)을 불러 보았는데 사관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 각도에서 초야에 묻혀있는 현사를 천거하도록 했다.

○ 庚戌五年. 賜鳳城君岏 ․ 宋麟壽死. 時副學鄭彦慤, 送其女, 至良才驛, 壁上有書曰, 女主聽政, 奸戚弄權, 國亡可待云. 彦慤恐被知情不告之罪, 乃騰書入啓, 大臣李芑 ․ 鄭順朋等, 列書應罪人入啓. 安命世, 以檢閱, 書芑惡於史草, 芑續撰寶鑑時, 見而啣之. 以命世黨, 倂尹潔置之死. 李彦迪 ․ 盧守愼 ․ 林亨秀 ․ 柳希春等, 凡三十人, 皆安置. 嗚呼! 河西之閉門, 以是也.

경술(庚戌)년 5년. 봉성군(鳳城君) 완(岏)과 송인수(宋麟壽)를 사사하였다. 당시 부학(副學) 정언각(鄭彦慤)이 딸을 전송하러 양재역(良才驛)에 갔다가 벽 위에 글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주(女主)가 국정을 천단하고 간사한 외척이 정사를 농단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정언각은 실상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명을 입을까 두려워 이에 그 내용을 베껴 써서 조정에 들어가 계달하였다. 대신 이기(李芑)와 정순붕(鄭順朋) 등은 죄에 해당할 만한 사람의 명단을 써서 왕께 들어가 아뢰었다. 안명세(安命世)는 검열(檢閱)로 있으면서 이기를 사초(史草)에 나쁘게 기록하였는데 이기가 보감(寶鑑)을 속찬할 때에 이를 보고 마음에 담고 있었다. 안명세의 무리란 이유로 윤결(尹潔) 또한 사사 당하였다.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임형수(林亨秀), 유희춘(柳希春) 등 무릇 30인이 위리 안치되었다. 아! 하서 선생이 은거한 것은 이 때문인가 보다.

○ 癸亥十八年. 大明續纂會典, 故命金澍, 改正本國先系以來, 遂告廟頒赦. 澍未還本國而道卒, 贈爵諡.

계해(癸亥)년 18년. 명나라에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속찬하게 되었기에 김주(金澍)에게 명하여 우리나라 종계(宗系)의 잘못된 기록을 개정하여 와서 종묘에 고하고 반포하도록 하였다. 김주는 본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도중에서 졸하였는데, 그에게 관작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 乙丑二十年. 命李滉爲大提學, 以李浚慶爲領議政. 流妖僧普雨于濟州, 命放逐尹元衡.

을축(乙丑)년 20년. 이황(李滉)을 대제학(大提學)에 임명하고, 이준경(李浚慶)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요승 보우(普雨)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으며 윤원형(尹元衡)을 방출하도록 명하였다.

○ 召校理金麟厚, 不至, 命畵工, 模寫陶山形勝以進. 正言李珥, 疏論時務, 上嘉納之.

교리(校理) 김인후를 불렀으나 이르지 않았다. 화공에게 명하여 도산(陶山)의 형승을 모사하여 바치도록 했다. 정언(正言)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무(時務)를 논하니 왕이 가납하였다.

○ 六月. 上昇遐, 以遺命, 立德興君第三子, 河城君鈞爲王, 王大妃殿, 垂簾同聽政.

6월. 왕이 승하하였다. 유명으로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 균(鈞)을 왕으로 삼았으니, 대비전에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 中宗之政, 可謂善政, 而失之於南沈之誣惑, 明宗之政, 亦可謂善治, 而失之於芑與順鵬之欺罔. 盛朝治政之全美盡善, 顧亦難矣. 苟能親其賢而任之, 遠其奸而斥之, 則群奸那可得而欺誣天聽乎哉? 嗚呼! 荊棘開花, 爛熳得春意, 則松栢之貞操, 舍晩翠而歇後, 涇水之濁, 漲溢滔天, 則渭河之淸流, 待其潦霽而源淸矣. 上天渺邈無朕, 則苟能何以哉? 政聽之善不善, 在於天聽也已, 在上而絶其惑信傾聽之端, 則南沈鄭李之奸, 烏得以間之? 鄒夫子嘗曰, 堯舜, 率天下以仁, 而民從之, 矧惟在朝之臣乎!

중종의 정사는 가위 선정이라고 하겠으나 남곤과 심정의 무고에 혹하여 실정을 하였으며, 명종의 정사 또한 선정이라고 할 것이나 이기와 정순붕의 무고에 속아서 실정을 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성조(盛朝)에서의 정사가 선함과 아름다움을 다함은 어려운 것인가 보다. 참으로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기고 간신을 멀리하여 배척한다면 저 뭇 간교배들이 어찌 왕의 귀를 속일 수 있으리오? 아! 가시나무에 꽃이 피어 난만하게 봄이 무르익으면 송백(松柏)의 곧은 지조가 늦게까지 푸르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경수(涇水)의 탁한 물이 하늘에 닿을 듯 일렁거리면 위수(渭水)의 맑은 물은 더러운 물이 개이고 근원이 깨끗해짐을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하늘은 아득히 있으면서 조짐을 보이지 않나니 그렇다면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하리오? 정사에 있어 선(善)과 불선(不善)은 왕의 귀에 달려있을 뿐인데, 윗자리에 있으면서 잘못 듣게 되는 미혹됨을 끊어버린다면 남곤, 심정, 정순붕, 이기 같은 간신의 말이 어찌 왕의 귀에 들릴 수 있겠는가? 추부자(鄒夫子 : 孟子)께서 일찍이 말하길 “요순(堯舜)이 천하 사람들에게 솔선하여 어진 행동을 하자 백성들이 이를 따랐다.”고 하였으니, 하물며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 있어서랴!

諱昖, 初諱鈞, 德興大院君第三子. 丁卯卽位, 戊申昇遐, 在位四十六年, 壽五十七, 穆陵.

휘는 연(昖)이다. 초휘는 균(鈞)으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정묘(丁卯)에 즉위하여 무신(戊申)에 승하하였다. 재위는 46년이고 나이는 57세이며, 목릉(穆陵)이다.

○ 戊辰元年. 擢李滉爲左贊成, 上亦不聖學十圖, 命屛作十帖, 朝夕觀省. 以名呼之, 疎陳六條, 繼以陳.

무진(戊辰)년 원년. 이황(李滉)을 발탁하여 좌찬성(左贊成)을 삼았는데, 임금이 또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상소하여 6조목을 진술하였고, 이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진술하니, 명하여 10첩 병풍을 만들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보고 살폈다.

◎ 請以褒贈趙光祖 ․ 金淨 ․ 金湜, 又追罪南袞 ․ 沈貞等, 上嘉從之. 於是, 宋麟壽 ․ 盧守愼 ․ 柳希春 ․ 金鸞祥, 皆復官.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을 포증(褒贈 : 포상하여 관작을 추증함)하고, 또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추죄(追罪 : 추가로 죄를 줌)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가상히 여겨 따랐다. 이 때 송인수(宋麟壽),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김난상(金鸞祥)은 모두 관직을 회복하였다.

○ 庚午三年. 大司憲白仁傑, 疎請伸雪乙巳 ․ 己酉之寃, 倂伸雪柳灌 ․ 柳仁淑之寃, 倂追奪李芑 ․ 鄭順鵬爵.

경오(庚午)년 3년. 대사헌(大司憲)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을사기유의 죄를 신설(伸寃雪恥 : 원한을 풀고 치욕을 씻어냄)하고 아울러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의 죄에 신설하고 아울러 이기(李芑), 정순붕(鄭順鵬)의 관작을 追奪(죽은 뒤에 그 사람의 관직을 삭탈함)할 것을 청하였다.

○ 乙亥八年. 王大妃沈氏昇遐. 上卒哭後, 以白笠 ․ 白帶 ․ 白靴爲親事腹, 羣臣一遵爲式.

을해(乙亥)년 8년. 왕대비 심씨가 승하하였다. 임금이 졸곡(卒哭 : 삼우(三虞)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서 지냄) 후에 백립(白笠), 백대(白帶), 백화(白靴)를 시사복(視事服 : 임금이 집무할 때 입는 복장)으로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따라 의식으로 하였다.

◎ 特贈故處士右議政, 乃徐敬德也, 自號花潭. 命沈義謙 ․ 金孝元, 補外. 義謙往尹元衡家, 見書齋, 有寢具, 自謂金孝元宿處, 心鄙之. 及孝元登第, 有時望, 擬銓郎. 義謙沮之曰, 太學生附于權門, 其餘不足觀. 孝元又斥之, 是爲分朋之始, 沈居昭義門在西, 金居馳駱峯在東, 從西者謂之西人, 從東者謂之東人. 互爲譏詆, 政出媢嫉姪之中, 寔亡國之禍胎也.

죽은 처사를 특별히 영의정으로 추증하였으니, 바로 서경덕(徐敬德)으로 자호는 화담(花潭)이다. 심의겸(沈義謙) ․ 김효원(金孝元)을 명하여 보외(補外 : 높은 지위에 있는 관원이 잘못이 있을 때 지방의 수령으로 좌천시켜 징계하는 일)하였다. 심의겸이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가서 서재를 보았는데 침구가 있어 스스로 김효원이 잠자는 곳이라 여겨 마음으로 비루하게 여겼다. 김효원이 등제함에 이르러 당시의 인망이 있어 전랑(銓郞 : 이조정랑)에 거론되었는데, 심의겸이 저지하며 “태학생이 권문에 달라붙었으니,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하였다. 김효원 또한 그를 배척하였다. 이것이 붕당을 나누는 시초가 되었다. 심의겸이 소의문(昭義門)에 거처하여 서쪽에 있었고, 김효원이 타락봉(馳駱峯)에 거처하여 동쪽에 있었다. 서쪽을 따르는 자를 서인(西人)이라 하고 동쪽을 따르는 자를 동인(東人)이라 하여, 서로 헐뜯고 비방하였다. 정사는 시기하고 미워하는 가운데서 나왔으니 진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재앙의 빌미가 되었다.

○ 癸未十六年. 命金誠一爲掌令. 兵曹判書李珥疎陳時宜, 翌年卒.

계미(癸未)년 16년. 김성일(金誠一)을 명하여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병조판서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의(時宜)를 진술하였는데, 다음해 죽었다.

○ 庚寅二十三年. 黃海監司韓準, 上變告前修撰鄭汝立, 謀逆. 命王府合手鞠, 汝立自殺.-以儒行名於世而謀逆, 古未聞也. 恐或黨錮然也歟. 被禍皆東人名儒.

경인(庚寅)년 23년. 황해감사(黃海監司) 한준(韓準)이 전 수찬(修撰)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고변(告變)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사로잡아 국문하려고 하였는데, 여립이 자살하였다. - 유가의 행실로 세상에 유명한데 반역을 모의했다니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생각하건대 혹여 당인이라 금고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화를 당한 것은 모두 동인의 명유(名儒)였다.

○ 辛卯二十四年. 通信使黃允吉 ․ 金誠一回自日本, 命修築湖嶺城邑, 以爲拱隘之備.

신묘(辛卯)년 24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김성일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명하여 호남과 영남의 성읍을 고쳐 짓게 하여 요해처를 막는 방비로 삼았다.

○ 壬辰二十五年. 命申砬 ․ 李鎰, 巡視諸道兵備, 以井邑縣監李舜臣, 超拜全羅左水使. 夏四月, 日兵來侵, 陷釜山鎭, 僉使鄭撥死. 陷東萊, 府使宋象賢死. 賊兵至忠州, 都巡邊使申砬戰死. 朝廷聞敗報, 上西幸. 五月, 賊將驅入據京城, 焚宗廟, 守禦使申硈, 渡臨津, 擊日兵, 遇伏敗死. 全羅左水使李舜臣, 赴援慶尙道, 大破日兵於巨濟之前洋.

임진(壬辰)년 25년. 신립(申砬), 이일(李鎰)을 명하여 여러 도의 군사시설을 순시하게 하고, 정읍현감(井邑縣監) 이순신(李舜臣)을 불러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제수하였다. 여름 4월, 왜병이 침입하여 부산진(釜山鎭)을 함락하여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죽었으며, 동래(東萊)를 함락하여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죽었다. 적병이 충주(忠州)에 이르러,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이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신립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 5월, 적이 오랫동안 말을 달려 경성에 들어와 점령하고 종묘를 불태웠다. 수어사(守禦使) 신할(申硈)이 임진강을 건너 왜병을 공격했으나 복병을 만나 패하여 죽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도를 가서 구원하여 거제 앞 바다에서 왜병을 대파하였다.

○ 慶尙右水使元均, 知其賊勢不敵, 悉沈戰艦戰具, 將欲從陸避賊, 散水軍萬餘人. 玉浦萬戶李雲龍抗言曰, 使君受重托, 義當死於封內, 況此地兩湖咽喉, 失此則兩湖危矣. 遣栗浦萬戶李英男, 詣全羅左水營, 告急, 諸將曰, 我守我疆, 且不足, 何暇及於他道乎. 惟鹿島萬戶鄭運, 官軍宋希立, 慷慨涕泣曰, 討賊無彼此, 先挫賊鋒, 則此疆亦可保. 舜臣大喜, 遂會均於巨濟前洋, 與日兵大戰. 卽破五十餘船, 其餘十三隻, 皆被燒. 舜臣造龜船其制如龜. 上有十字細路, 通行餘皆列揷錐刀, 前作龍頸, 口爲銃砲出, 後爲龜尾. 尾下有口左右各有六口, 伏兵其裏, 四面發砲, 橫行賊船中, 我無所傷.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적의 형세에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전함과 무기를 모두 바다에 빠뜨리고 장차 육지를 따라 적을 피하려고 수군 만여 명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 때 옥포(玉浦) 만호(萬戶) 이운룡(李雲龍)이 대항하여 “사또! 중요한 임무를 받았으니, 의리로는 마땅히 봉내(封內)에서 죽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곳은 호남과 호서의 요충지로 여기를 잃는다면 호남과 호서는 위태롭게 됩니다.” 하였다. 율포(栗浦) 만호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이르러 위급함을 아뢰니, 여러 장수들은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는데도 부족하거늘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미치겠는가?” 하였다. 오직 녹도(鹿島) 만호 정운(鄭運) 관군 송희립(宋希立)이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적을 토벌하는 데는 피차가 없습니다. 먼저 적의 선봉을 꺾는다면 이 지역도 또한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순신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왜병과 크게 싸워 50여 선을 파괴하고 나머지 30척도 모두 불태웠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거북과 같았고 위에는 ‘十’자로 작은 길이 있어 통행할 수 있으며 나머지는 송곳과 칼을 나란히 꽂았다.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구에는 총포가 나왔고, 뒤는 거북의 꼬리로 꼬리 아래에는 입구 있었으며, 좌우에도 6개의 입구가 있었다. 그 속에 병사를 숨기고 사방으로 화포를 쏘며 적의 배 가운데를 횡행하여도 우리는 손상이 없었다.

○ 日兵陷平壤, 車駕自寧邊, 幸義州. 內殿先發, 向北闕, 門賊兵踰鐵嶺, 急命回駕, 至嘉山. 李恒福與朴東亮扈駕, 造次不離. 賊帥淸正陷咸興, 元豪復驪州, 李德馨請援于大明.

왜병이 평양을 함락하자, 임금의 수레는 영변(寧邊)에서 의주(義州)로 옮겼다. 내전(內殿)은 먼저 출발하여 북궐(北闕)을 향하였는데, 적병이 철령(鐵嶺)을 넘는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명하여 수레를 돌려 가산(嘉山)에 이르렀다. 이항복(李恒福)과 박동량(朴東亮)은 임금의 수레를 호종하였는데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적장 청정(淸正)이 함흥(咸興)을 함락하고 원호(元豪)가 여주(驪州)를 되찾자, 이덕형(李德馨)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 三南義兵起. 郭再祐擧義討賊, 常着紅衣, 馳騁如飛, 丸矢不中, 稱紅衣將軍.

삼남지방의 의병이 일어났다. 곽재우(郭再祐)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했는데,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나는 듯이 말을 달려 탄환과 화살에 맞지 않아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 義兵將金千鎰, 領兵來據水原禿城, 特授判決事兼倡義使.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은 병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 독성(禿城)을 점령하여, 특별히 판결사(判決事) 겸 창의사(倡義使)에 제수하였다.

○ 全羅節制使權慄, 大破賊兵於梨峙, 金堤郡守鄭諶死之, 義兵將金俊民 ․ 郭再祐連敗賊兵.

전라절제사(全羅節制使) 권율(權慄)은 이치(梨峙)에서 적병을 대파하였다. 김제군수(金堤郡守) 정심(鄭諶)은 죽었고, 의병장 김준민(金俊民), 곽재우는 연이어 적병에게 패하였다.

○ 賊兵大發再師, 向湖南. 舜臣與李億稘 ․ 沈光憲進戰洋北, 舜臣回船急擊, 大破之.

적병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호남을 향하였다. 이순신은 이억기(李億稘), 심광헌(沈光憲)과 함께 나아가 바다 북쪽에서 싸웠는데, 이순신이 배를 돌려 급히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 募僧徒爲兵隊, 杳香山僧休靜, 以弟子義巖 ․ 唯政 ․ 處英, 各募其道僧, 合爲四千餘人. 唯政使于賊陣, 賊咸信服.

승도를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었다. 묘향산(杳香山) 승(僧) 휴정(休靜)은 제자 의암(義巖), 유정(唯政), 처영(處英)에게 각각 도승을 모집하게 하여 합이 4천여 명이었다. 유정은 적진에 사신으로 갔는데, 적이 모두 굴복하였다.

○ 賊淸正陷關北, 臨海 ․ 順和兩王子, 及諸宰臣被執. 高敬命討錦山賊, 兵敗死之.

적장 청정(淸正)이 관북을 함락하여 임해(臨海), 순화(順和) 두 왕자와 여러 관리들은 사로 잡혔다. 고경명(高敬命)은 금산(錦山)에서 적병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 倡義使金千鎰, 遣儒生郭玄 ․ 梁山璹, 奏事行朝, 上下諭書二通, 布告諸道.

창의사 김천일은 유생 곽현(郭玄), 양산숙(梁山璹)를 보내 행재소에 일을 아뢰었다. 상하 유서 두 통이 여러 도에 널리 알려졌다.

○ 咸鏡北道評事鄭文孚, 起兵復鏡城. 時, 賊兵數萬, 圍晉陽, 晉州牧使金時敏, 力戰大破之.

함경북도평사 정문부(鄭文孚)는 병사를 일으켜 경성을 회복하였다. 당시 적병 수만은 진양(晉陽)을 포위하였는데, 진주 목사 김시민이 힘을 다해 싸워 대파하였다.

○ 慶基殿參奉洪汝栗, 奉太祖晬容, 由海路達義州, 命移安于妙香山寺, 常授六品職.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 홍여율(洪汝栗)이 태조의 그림을 받들고 해로를 따라 의주에 당도하였다. 명하여 묘향산 절에 옮겨 안치하게 하고 상으로 6품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 鄭文孚大破賊兵, 復關北諸城. 前司成禹性傅, 擧義連破賊兵. 前參贊成渾, 赴行在, 陞拜右參贊.

정문부가 적병을 대파하여 관북의 여러 성을 되찾았다. 전 사성(司成) 성부(禹性傅)가 의병을 일으켜 적병을 연파하였고, 전 참찬 성혼(成渾)은 행재소에 와서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었다.

○ 癸巳二十六年. 春正月, 明提督李如松, 大破賊兵, 復平壤.

계사(癸巳)년 26년. 봄 정월에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적병을 대파하여 평양(平壤)을 되찾았다.

○ 全羅道巡察使權慄, 大破賊兵于幸州, 京畿監司成泳, 啓聞英陵之變. 上사腹望哭, 哀動左右.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행주(幸州)에서 적병을 대파하였다. 경기감사 성영(成泳)이 계를 올려 영릉(英陵)의 변고를 아뢰었다. 임금이 상복을 입고 망곡(望哭 : 먼 곳에서 어버이의 상사를 당하였으나 달려갈 수는 없고, 그곳을 보고 슬피 우는 일)을 하니 슬픔이 좌우 진동하였다.

○ 李舜臣爲三道水軍統制使, 鄭文孚平定關北. 淸正聞京城駐兵, 亦引兵南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고, 정문부는 관북을 평정하였다. 청정은 경성에 주둔한 병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또한 병사를 이끌고 남으로 돌아갔다.

○ 李如松, 遣淅人沈唯敬, 與賊陣議和, 累諭淸正, 還二王子及宰臣.

이여송은 절강 사람 심유경(沈唯敬)을 보내 적진과 강화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누차 청정에게 두 왕자와 관리들을 돌려 보내라고 타일렀다.

○ 賊晉州陷城, 倡義使金千鎰 ․ 兵使崔慶會 ․ 黃進 ․ 府使李宗仁等, 大小百戰餘, 不克而死. 賊饗士設宴, 與妓對舞, 擁其倭酋腰而墮樓, 同死於碧流之下, 妓名論介.

진주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하였다. 창의사 김천일 병사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크고 작게 백여 차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적은 군사에게 음식을 주고 잔치를 벌이고 기생들과 춤을 추었다. 기생 중에 적장의 허리를 안고 누각에서 떨어져 푸른 물결 아래에서 함께 죽었는데, 기생의 이름은 논개(論介)이다.

○ 慶尙道巡察使金誠一, 前使日本, 誤奏賊情. 當是時, 誓死討賊, 用兵非其所長, 至誠諭衆, 保全一隅, 旣而, 寢病而卒.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성일은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적의 실정을 잘못 아뢰었다. 이때를 당해 죽기를 맹서하고 적을 토벌하였는데, 병법은 그의 장점이 아니라 지성으로 백성을 타일러 한 모퉁이를 보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 明提李如松, 撤兵還, 因沈惟敬, 與敵議和, 只留劉綎 ․ 吳惟忠 ․ 駱尙志等, 環四面駐屯.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따라서 심유경은 적과 강화를 의논하였고, 단지 유정(劉綎), 오유충(吳惟忠), 낙상지(駱尙志) 등이 남아서 사방을 둘러 주둔하였다.

○ 冬十月, 車駕還京師. 光州儒生金德齡, 起義兵, 命爲忠勇將.

겨울 10월, 임금의 수레가 서울로 돌아왔다. 광주 유생 김덕령(金德齡)이 의병을 일으켜, 명하여 충용장(忠勇將)으로 삼았다.

○ 丙申二十九年. 明使楊邦亨 ․ 沈惟敬, 我使黃愼, 至日本, 和議未成而還.

병신(丙申)년 29년.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 ․ 심유경과 우리니라 사신 황신(黃愼)이 일본에 갔는데 강화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 丁酉三十年. 縣監郭䞭, 以黃石山城爲嶺湖咽喉, 合三邑兵, 守之. 賊大兵遽至, 晝夜督戰, 城竟陷. 䞭與二子履常 ․ 履厚, 皆罵賊不屈死. 賊將行長 ․ 義智等, 進陷南原, 伴接使鄭期遠 ․ 兵使李福男等皆死.

정유(丁酉)년 30년. 현감 곽준(郭䞭)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이 영남과 호남의 요충지이라 여기고 3읍의 병사를 합세하여 지켰다. 적의 대병이 갑자기 이르러 주야로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성은 끝내 함락되었다. 곽준은 두 아들 이상(履常), 이후(履厚)와 함께 적을 꾸짖으며 굴하지 않고 죽었다. 적장 행장(行長), 의지(義智) 등이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함락하여, 반접사(伴接使) 정기원(鄭期遠) 병사 이복남(李福男) 등이 모두 죽었다.

○ 明經理楊鎬, 使摠兵解生等, 大破日兵于稷山.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총병(摠兵) 해생(解生) 등을 보내 익산(稷山)에서 적병을 대파하였다.

○ 初朝廷不知日本行長反間之說, 命舜臣襲擊淸正. 舜臣終不受命, 命罷職, 拿來鞠問, 以元均代之, 戰守未幾, 敗死.

전에 조정에서는 일본 행장의 반간책(反間策)을 믿지 않고, 이순신에게 명하여 청정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순신이 끝내 명을 받지 않자 명하여 파직하여 잡아와 국문하였다. 원균으로 대신했는데 싸움이 얼마 되지 않아 패하여 죽었다.

◎ 敵兵渡海犯境之初, 元均自知其勢不敵, 溺其戰艦戰具, 散水軍萬餘, 將欲陞陸避賊, 玉浦萬戶李雲龍大言抗拒, 而止之. 矧惟今日, 以若忠武之智勇大畧, 觀其勢而逼遛不戰矣. 均殊不自量, 輕遽待之, 竟致此敗, 是戰死非忠, 寔爲賊兵凱歌而戰死者也.

적병이 바다를 건너 국경을 침범한 초기에 원균은 스스로 형세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전함과 무기를 빠뜨리고 수군 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장차 육지로 올라 적을 피하려고 하였는데, 옥포 만호 이운룡이 큰 소리로 항거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하물며 오직 금일에 충무공 같은 지혜와 용기, 큰 지략을 지니고도 그 형세를 보고 머뭇거리며 싸우지 않는다. 원균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히 대신하여 끝내 이런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전사해도 충이 아니요 진실로 적병의 개선가를 위해 전사한 것이다.

○ 戊戌三十一年.金命元 ․ 柳成龍 ․ 李恒福力言于上, 釋舜臣, 復拜統制使, 使之星夜馳往, 將受任於敗軍之餘, 糧仗蕩然無遺, 只有龜船十三隻, 賊又大至, 周繞海面, 賊船凡三四百艘, 拒戰良久, 烟霧四塞, 避亂男女十餘萬, 各登海岸, 莫知其勝敗. 自卯至申, 鼓聲小歇, 烟埃漸消, 破穡折楫, 亂流而下, 積屍隨而出沒, 但龜船十三, 風帆無恙, 凱歌喧天, 水師提督陳璘, 來賀曰, 古之兵仙, 無以加此也. 追至順天海隘, 大破日兵, 卽日, 中丸死. 臨死, 左右扶入帳中, 舜臣曰, 愼勿言我死, 言訖而絶.

무술(戊戌)년 31년. 김명원(金命元),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이 임금에게 힘써 말하여 이순신을 풀어주었다. 다시 통제사에 제수하고 밤으로 말을 달려 내려가게 하여 장차 패배한 군대의 나머지를 맡겼다. 군량과 무기는 휩쓸린 듯 남은 것이 없었고 다만 거북선 13척만이 있었다. 적은 또한 크게 이르러 두루 바다를 감쌌는데 적선은 무릇 3, 4백 척으로 오랫동안 맞서 싸웠다. 연기와 안개로 사방이 막혀 피난 가는 사람 수십만 명이 저마다 해안에 올라 보았으나 승패를 알 수 없었다. 묘시(卯時)부터 신시(申時)까지 북소리가 조금 느려지고 연기와 먼지가 점차 사라지자 깨진 돛대와 부러진 노가 어지럽게 흘러 떠내려갔고, 쌓인 시체가 파도에 출몰하였다. 다만, 거북선 13척은 돛대도 손상이 안된 채 개선가가 하늘에 떠들썩했다. 수사제독 진린(陳璘)이 와서 축하하며 “옛날의 병선(兵仙)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추격하여 순천의 좁은 바다에 이르러 왜병을 대파하였는데, 그 날 탄환에 맞아 죽었다. 임종할 적에 좌우에서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이순신은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란 말을 마치고 숨이 끊어졌다.

◎ 嗚呼! 昨日夜, 將星流落南天, 左右曰, 伏願設壇禱天, 忠武曰, 命之窮矣, 無所禱也. 竊恐惟忠武可謂知天矣. 天命可禱而假得其壽, 則無天宜矣. 以若諸葛武侯臨天地之神妙, 憂其漢祚而將欲延壽, 上天猶不眷顧, 伏惟孔明, 曷嘗以不知天命乎哉. 欲報其昭烈三顧之誠, 而然爾. 然, 忠武豫知天命而不禱, 恐惟忠武之正大, 似有賢於孔明矣. 且其陳璘所乘船, 爲賊所圍, 見統制使旗號, 皆望風潰去, 所以以死走生, 猶不下於諸葛耳. 余故曰, 東方亦有諸葛也云. 東無諸葛, 壬丁之倭賊, 孰能禦之.

호라, 지난 밤 장군성이 남쪽 하늘로 떨어졌다. 좌우에서 “엎드려 바라옵건대 제단을 설치고 하늘에 기도하십시오.”하자, 충무공은 “명이 다하였으니 기도할 것이 없다.” 대답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오직 충무공은 천명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다. 천명은 기도하여 그 목숨을 빌릴 수 있다면 하늘이 없다고 해도 마땅할 것이다. 제갈무후(諸葛武侯 : 제갈량)처럼 천지의 신을 마음대로 하여 한나라 조정을 걱정하여 장차 그 수를 늘리려 했으나, 하늘은 돌보아 주지 않았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공명이 어찌 일찍이 천명을 알지 못했겠는가? 소열(昭烈 : 유비)의 세 번 찾아온 정성[三顧草廬]에 보답하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은 미리 천명을 알고 기도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하건대 충무공의 정정당당함은 공명보다 뛰어난 것 같다. 또한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통제사의 깃발과 호칭만 보고 모두 위풍을 바라보고 무너져 달아났다. 그러므로 사지에서 생지로 달아남은 오히려 제갈보다 밑돌지 않는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또한 제갈이 있었다.”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제갈이 없었다면 임진정유의 왜적을 누가 능히 막았겠는가?

○ 蔚山 ․ 泗川 ․ 順天三路之賊, 皆撤還. 時, 平秀吉死, 家康用事, 召諸將, 收兵還. 明提督陳璘, 建關王廟於京城南門外.

울산(蔚山), 사천(泗川), 순천(順天) 세 갈래의 적은 철수하여 돌아갔다. 당시 평수길(平秀吉)이 죽고, 가강(家康)이 정사를 다스려 여러 장수를 불러 병사를 거두어 돌아간 것이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경성 남문 밖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였다.

○ 己亥三十二年. 明提督麻貴 ․ 陳璘 ․ 邢玠等, 皆引軍還. 大明前後出兵十餘萬, 糧至數十萬石.

기해(己亥)년 32년.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 진린, 형개(邢玠) 등이 모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명나라는 전후에 걸쳐 출병하니 십여만 명에 군량은 수십만석에 이르렀다.

○ 辛丑三十四年. 錄扈聖 ․ 宣武 ․ 靖難, 功臣分三等, 圖形璘閣. 扈聖, 李恒福 ․ 鄭崑壽, 宣武, 李舜臣 ․ 權慄, 靖難, 洪可臣, 是皆元勳. 命追錄功臣, 郭再祐 ․ 朴晉 ․ 鄭文孚 ․ 黃進 ․ 李福男 ․ 申點 ․ 鄭運外十一人.

신축(辛丑)년 34년. 호성(扈聖), 선무(宣武), 정난(靖難) 공신을 3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인각(璘閣)에 그림을 그렸다. 호성에는 이항복, 정곤수(鄭崑壽), 선무에는 이순신, 권율, 정난에는 홍가신(洪可臣), 이들은 모두 원훈(元勳)이다. 명하여 공신에 곽재우, 박진(朴晉), 정문부, 황진, 이복남, 신점(申點), 정운(鄭運) 등 11인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 乙巳三十八年. 日本關伯家康, 縛送犯陵賊二名, 修書通好. 朝廷命僧惟政往還, 及其還, 被擄人李重禧 ․ 姜沆 ․ 姜煥 ․ 姜濬 ․ 鄭舜卿等三千餘人, 同時還國. 淸正,行長, 皆爲家康所殺, 而修好於我國.

을사(乙巳)년 38년. 일본 관백(關伯) 덕천가강이 능을 침범한 적 2명을 포박하여 보내와 문서를 작성하여 통호하였다. 조정에서는 승 유정에게 명하여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가 돌아올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 이중희(李重禧), 강항(姜沆), 강환(姜煥), 강준(姜濬), 정순경(鄭舜卿) 등 삼천여 명이 동시에 환국하였다. 가등청정, 소서행장은 모두 덕천가강에게 살해되어 우리나라에 수호한 것이었다.

○ 戊申四十一年. 日本請開市, 許之. 二月, 上有疾, 猝然危篤, 昇遐, 世子卽位.

무신(戊申)년 41년. 일본이 시장을 열 것을 요청하여 허락하였다. 2월, 임금이 병환이 있었는데 갑자기 위독해져 승하하여 세자가 즉위하였다.

◎ 大王在位四十餘年, 儒賢滿朝, 有如良平之材而運籌, 鰲城 ․ 漢陰是也. 有如諸葛之正大而用兵, 忠武 ․ 宣武之功是也. 自壬辰至于丁酉, 五六年間, 倭寇之亂, 大駕見辱於干戈之中, 然苟非扈聖之元勳, 行在之宮, 危矣. 而未嘗有一毫亂賊之犯, 亦非宣武之元勳, 三千大塊, 幾爲倭寇所有而完成復舊. 竊恐上天, 降警于吾東, 益勉勵修德, 大開萬歲無疆之運也. 至若女妓下賤之中, 亦有忠妓一二, 論介與桂香月. 僧徒之中, 亦有善戰之神術, 累有武功, 妙香山僧惟政, 號四明堂. 苟非仁化之浹洽人心, 烏能至此乎!

대왕은 재위 40여 년에 유현이 조정에 가득하였다.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같은 재주를 지니고 계책을 짜냈으니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이 이들이다. 제갈과 같은 정정당당함을 지니고 군대를 운용하니 충무공과 선무공의 공이 이것이다. 임진부터 정유에까지 5, 6년간 왜구의 난리에 크게 옮겨 전쟁 중에 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임금을 호종하는 원훈이 아니었다면 행재소에서도 위태했을 것이나 추호도 난적의 침범이 없었다. 또한 선무의 원훈이 아니었다면 삼천리강토를 거의 왜구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나 공적을 이루어 되찾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우리나라를 경계하여 더욱 덕을 닦는데 힘써 만세도록 무강한 운수를 크게 열어준 것이다. 심지어 기생과 천민 중에도 또한 충의로운 기녀(妓女)가 한 둘 있으니 논개와 계향월(桂香月)이 이들이다. 승도 중에도 또한 잘 싸우는 시비한 술수를 지녀 누차 무공을 세웠는데 묘향산 승 유정은 호가 사명당(四明堂)이다. 진실로 어진 교화가 인심에 두루 퍼진 것이 아니라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名琿, 宣祖第二子, 戊申卽位, 癸亥廢爲光海君.

휘는 혼(琿)이고,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무신에 즉위하여, 계해에 폐위되어 광해군이 되었다.

○ 己酉. 竄臨海君珒于喬桐, 高彦伯 ․ 梁諿, 以文通臨海, 死. 追尊所生母恭嬪金氏, 爲王后. 臺諫,累爭不聽. 以文正公趙光祖 ․ 文獻公鄭汝昌 ․ 文敬公金宏弼 ․ 文純公李滉 ․ 文元公李彦迪, 從祀文廟.

기유(己酉)년.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교동에 적치시켰다. 고언백(高彦伯), 양집(梁諿)이 임해군과 글로 내통하다가 죽었다. 생모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추존하여 왕후로 삼았다. 대간에서 여러 차례 간쟁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을 문묘에 배향하였다.

○ 癸丑. 殺延興府院君金悌男, 安置永昌大君于江華. 權臣李爾瞻, 阿旨, 謀殺永昌, 密諭朴應犀. 應犀, 一依其言, 多誣引. 爾瞻矯命, 密託鞠官, 旋極刑. 安置永昌大君, 錮大妃殿. 以是, 韓希吉 ․ 朴應犀, 皆錄勳.

계축(癸丑)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江華)에 안치하였다.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의 뜻에 아부하고자 영창대군을 죽일 것을 도모하여 박응서(朴應犀)에게 넌지시 말을 하였다. 박응서가 한결같이 그의 말만 믿어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서 강제로 잡아온 사람이 많았다. 이이첨이 왕명이라 속이고 몰래 국문하는 관리에게 부탁하여 갑자기 김제남을 극형에 처하였다. 영창대군을 안치시키고 대비전을 폐쇄하였는데, 이로 인해 한희길(韓希吉)과 박응서가 모두 녹훈(錄勳)되었다.

○ 掌令鄭造 ․ 尹認等, 啓請誅永昌大君, 以除宗社之患, 廢大妃殿. 領議政李德馨, 憂忿不食, 死.

장령(掌令) 정조(鄭造)와 윤인(尹認) 등이 계를 올려 영창대군을 죽여 종묘사직의 환란을 제거하고, 대비전을 폐위하라고 청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덕형이 근심과 울분으로 먹지 못하다가 죽었다.

○ 永昌大君住所, 有火, 大君被燒死. 時, 永昌, 年八歲. 方被出, 執大妃裙帶, 號泣不出, 使宮人, 按大妃奪去. 大妃, 跣足, 追之不及, 仆地昏絶. 宮中遑遑, 人無人色. 至是, 府使鄭沆, 放火. 沆, 可謂罪浮於爾瞻者也. 命鄭蘊, 遠竄, 設分司, 防守大妃宮,

영창대군의 거처에 불이 나서 대군이 불에 타 죽었다. 당시 영창대군은 나이가 8세였다. 궁궐에서 쫓겨날 때 대비의 치마와 허리띠를 부여잡고 울면서 나오려 하지 않으니, 궁인들을 시켜서 대비로부터 억지로 떼어냈다. 대비가 맨발로 따라갔으나 미치지 못하자 땅에 엎어져 혼절하였다. 궁중은 어수선하여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 부사(府使) 정항(鄭沆)이 불을 질렀다. 항은 그 죄가 이이첨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명하여 정온(鄭蘊)을 멀리 유배 보내고 분사(分司)를 설치하여 대비궁을 지키게 하였다.

○ 趙謖, 疏陳今之數慈殿者, 母子之道, 已絶. 大妃, 與鬼爲隣, 先王之以大妃, 託殿下者, 恐不如是云. 君, 怒鞠之, 金吾卒, 相戒曰, “若加一杖於趙公膝, 則是爲無母之人.” 由是, 得免死, 栫棘于南海. 又殺權鞸, 竄李元翼等.

조속(趙謖)이 상소하여, 지금 대비(大妃)를 폐위하려는 것은 어머니와 아들의 도가 이미 끊어졌으며, 대비는 이미 귀신과 이웃이 되었습니다. 선왕께서 대비를 전하에게 부탁하신 것이 생각하건대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광해군이 노하여 그를 국문하도록 하였는데, 의금부의 나졸들이 서로 경계하며 “만약 조공의 무릎에 곤장을 한대라도 친다면, 이는 곧 어미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로 인해 조속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남해로 귀양 가게 되었다. 또 권필(權鞸)을 죽였고, 이원익(李元翼) 등을 귀양 보냈다.

○ 戊午. 鄭仁弘, 疏請廢大妃. 韓孝純, 率百官庭請, 答曰去大妃號, 只稱西宮. 廢母庭請不參人, 倂罪之.

무오(戊午)년.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대비를 폐위할 것을 청하였다. 한효순(韓孝純)이 백관들을 이끌고 궁궐에 나아가 하교(下敎)가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비답에 “대비란 호칭을 폐하고 다만 서궁(西宮)이라 칭하라.’ 하였다. 대비의 폐위에 관련된 모임이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죄를 주었다.

○ 竄領中樞李恒福于北靑. 因廢大妃議, 曰春秋, 子無讐母之義, 願體舜之德, 回怒爲慈, 臣之望也.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 이항복을 북청(北靑)에 귀양 보냈다. 대비의 폐위를 논의할 때 “춘추(春秋)에는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삼는 의리는 없습니다. 원컨대 순(舜)의 덕을 체득하시어, 노여움을 돌려 사랑으로 삼는 것이 신의 바람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 己未. 都元帥姜弘立, 副元帥金景瑞, 率兵入援大明. 至深河, 不戰而投降淸陣, 左營將金應河, 獨戰死.

기미(己未)년. 도원수(都元帥) 강홍립과 부원수(副元帥) 김경서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명나라를 구원하러 떠났다. 심하(深河)에 이르러 싸우지도 않고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는데, 좌영장(左營將) 김응하는 홀로 싸우다가 죽었다.

○ 癸亥. 三月, 綾陽君倧, 擧兵靖難. 奉大妃殿命, 卽位, 廢王爲光海君.

계해(癸亥)년. 3월에 능양군(綾陽君) 종(倧)이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평정하였다. 대비전의 명을 받들어 즉위하고 왕을 폐위시켜 광해군으로 삼았다.

○ 追復永昌大君㼁 ․ 臨海君珒 ․ 綾昌君佺 ․ 延興府院君金悌男官爵, 追承旨, 迎延興府夫人盧氏于濟州謫所. 誅鄭仁弘 ․ 柳希奮 ․ 李爾瞻. 自韓纘男, 至錦溪君朴東亮等, 二百三十三人, 竄削有差, 前後凶疏儒生二百餘人, 倂安置. 殺前參判柳夢寅. 夢寅, 自中北, 反正後, 退去楊州西山, 有誣告謀逆者, 及拿至. 委官曰, “亡命何謀?” 答曰, “非亡命, 乃居西山耳.” 委官曰, “使武王, 立箕子則夷齊, 猶居西山乎?” 不能答, 但誦所著孀婦詞 - 愚意則武王之於箕子, 同是商湯之後則分封箕子爲王, 可也. 第當易姓之日, 假使分封爲王, 箕子宜不受矣. 夢寅之居西山, 不亦妄矣乎.-以李元翼, 爲領議政. 上爲本生祀典封號, 命禮曹議啓, 禮曹, 以無於古之禮, 啓之.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 ․ 임해군 진(珒) ․ 능창군(綾昌君) 전(佺) ․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의 관직을 추복(追復)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연흥부부인(延興府夫人) 노씨(盧氏)를 제주(濟州)의 유배지에서 맞아오게 하였다. 정인홍(鄭仁弘), 유희분(柳希奮) 이이첨(李爾瞻)을 처형하고, 한찬남(韓纘男)으로부터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등에 이르기까지 233명은 차별을 두어 귀양을 보내거나 관직을 삭탈하였다. 흉악한 상소문을 올린 유생들 이백 여명은 모두 안치하였다. 전 참판(參判) 유몽인(柳夢寅)을 처형하였다. 유몽인은 북인 계열로 반정이 일어난 뒤 양주(楊州)의 서산(西山)에 물러나 있었는데, 역모를 꾀하였다고 무고한 사람이 있어 붙잡아 왔다. 위관(委官 : 죄인을 추국(推鞫)할 때 의정(議政) 대신(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장)이 “도망간 것은 무슨 계획인가?” 묻자, “도망간 것이 아니라, 서산에 살았을 뿐이다.” 대답하였다. 위관이 말하기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왕으로 세웠다면 백이 ․ 숙제(伯夷 ․ 叔齊)가 오히려 서산(西山)에서 살았겠는가?”하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가 지은 상부사(孀婦詞)만을 읊조렸다. - 내가 생각하건대 무왕은 기자에 대해 모두 상(商)나라 탕(湯)임금의 후손이니 기자에게 봉지를 나누어주어 왕으로 삼는 것이 가하다. 왕조를 새로이 여는 날(易姓之日)에 이르러 분봉하여 왕으로 삼는 것처럼 꾸몄으니, 기자가 당연히 받지 않은 것이다. 유몽인이 서산에 거처하였으니 이 또한 망녕되지 아니한가! -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임금이 자기 친아버지의 사전(祀典)과 봉호(封號)를 행하려고 예조에 명하여 의논하여 계를 올리라고 하였는데, 예조에서는 ‘고법에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아뢰었다.

◎ 嗚呼, 以淫虐之政, 名於天下後世者, 莫有如桀紂而鄒夫子, 嘗曰, 桀紂, 率天下以暴, 而民從之, 未聞率天下以廢母, 而民從之. 今光海, 率朝臣以廢母, 而臣從之, 是可謂貽笑於天下萬世者也.

오호라, 음란하고 포악한 정치로 천하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 중에 걸(桀) 주(紂)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맹자께서 일찍이 “걸 ․ 주는 포악함으로써 천하를 이끌었는데도 백성들이 따랐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폐위하는 것으로 천하를 이끌었는데도 백성들이 따랐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지금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위하는 것으로 조정의 신하들을 이끌었는데 신하들이 따랐으니, 이는 만세토록 천하에 비웃음을 살만한 것이라 말할 만하다.

諱琈, 宣祖第五子, 仁祖壬申, 進尊爲王.

희는 부(琈)이고, 선(宣祖)의 다섯번째 아들이다. 인조 임신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諱倧, 元宗長子, 癸亥卽位, 己丑昇遐, 在位二十七年, 壽五十五, 長陵.

휘는 종(倧)이고, 원종(元宗)의 장자이다. 계해에 즉위하여 기축(己丑)에 승하하였다. 재위는 27년이고 나이는 55세이며, 장릉(長陵)이다.

○ 癸亥元年. 策靖社功臣, 金瑬等五十三人, 命張顯光 ․ 金集 ․ 朴知誡, 倂授六品職. 又命廢朝直言儒生趙慶起 ․ 洪茂績 ․ 金堉 ․ 趙絅 ․ 姜學年 ․ 朴知讓等二十三人,除職. 寃死誣獄士人權鞸 ․ 趙守倫 ․ 崔沂 ․ 黃赫四人, 倂贈職致祭.

계해(癸亥)년 원년. 김류(金瑬) 등 53명을 정사(靖社) 공신에 책봉하고, 명하여 장현광(張顯光), 김집(金集), 박지계(朴知誡)는 6품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또한 명하여 광해군 때 직언을 한 유생 조경기(趙慶起), 홍무적(洪茂績), 김육(金堉), 조경(趙絅), 강학년(姜學年), 박지양(朴知讓) 등 23명은 관직을 제수하였다. 원통하게 죽거나 무고를 옥에 갇혔던 권필(權鞸), 조수윤(趙守倫), 최기(崔沂), 황혁(黃赫) 4인은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甲子二年. 兵使李适, 與韓明璉, 擧兵叛. 上奉大妃, 幸公州. 賊兵, 入據京城, 推戴宗室興安君瑅, 僭號爲王. 都元帥張晩, 前部大將鄭忠信, 追擊賊兵於京師, 大破之. 瑅 ․ 适 ․ 明璉, 皆伏誅.

갑자(甲子)년 2년. 병사(兵使) 이괄(李适)이 한명연(韓明璉)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임금은 대비를 모시고 공주(公州)로 옮기셨다. 적병이 경성에 들어와 점령하고 종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추대하여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과 전 부대장(部大將) 정충신(鄭忠信)이 경성에서 적병을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제(瑅) ․ 이괄 ․ 한명연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 姜弘立叔父晉昌君梱, 與通信使, 李弘望, 講定和議, 以厚昌君義臣, 代王子爲質. 歃血爲誓, 淸兵撤還.

강홍립(姜弘立)의 숙부(叔父) 진창군(晉昌君) 곤(梱)이 통신사(通信使) 이홍망(李弘望)과 함께 강화(講和)를 체결하였는데, 후창군(厚昌君) 의신(義臣)이 왕자를 대신해서 볼모로 갔다. 서로 피를 마시는 맹서를 하고 청나라 군사들이 물러갔다.

○ 我國人, 有以金應河傳來示者, 卷中, 畵應河獨立血戰, 弘立 ․ 景瑞, 屈勝拜伏. 弘立見之, 轉成心疾而死.

우리나라 사람 중에 김응하(金應河)의 전기를 가져와 보여준 사람이 있었는데, 책 안에 김응하가 홀로 서서 혈전을 벌이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항복하여 절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강홍립이 이것을 보고서 마음의 병이 되어서 죽었다.

○ 乙亥十三年. 淸, 稱帝改元, 遣使責不修賀禮. 掌令洪翼漢, 上疏斥和, 泮儒尹宣擧等, 上疏請斬虜使. 淸使懼而走.

을해(乙亥)년 13년. 청나라가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바꾸었는데, 사신을 보내어 축하인사를 올리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장령(掌令) 홍익한(洪翼漢)이 상소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성균관의 유생 윤선거(尹宣擧) 등은 상소하여 오랑캐의 사신을 죽이라고 청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두려워 도망쳤다.

○ 丙子十四年. 十二月, 淸主率兵十四萬騎, 直犯京師. 平安監司洪命耈, 率兵入援, 從間道至金化, 戰敗死之.

병자(丙子)년 14년. 12월에 청나라 임금이 14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경성으로 쳐들어왔다. 평안감사(平安監司) 홍명구(洪命耈)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사잇길을 따라 금화(金化)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여 죽었다.

○ 車駕, 入南漢山城. 宗廟都提調尹昉, 奉廟主, 原任大臣金尙容, 陪世子及嬪宮元孫及兩大君, 入江都.

임금의 수레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종묘도제조(宗廟都提調) 윤방(尹昉)이 종묘의 신위를 받들었고, 원임대신(原任大臣) 김상용(金尙容)은 세자와 빈궁(嬪宮), 원손(元孫) 및 두 대군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 丁丑十五年. 春正月, 南陽府使尹棨, 發民兵勤王, 戰敗死, 棨, 被執, 淸酋, 迫之跪, 棨罵曰 吾頸可斷, 此膝不可屈. 於是, 亂刃交下, 身無完膚. 初, 上向江都, 未及出城, 淸兵到弘濟院, 一枝兵, 遏楊花渡, 已絶江華之路, 崔鳴吉曰 勢不可爲鬪, 臣請以單騎, 往前陳, 責以動兵之無條, 彼若殺臣則臣, 當爲馬革裹屍, 幸而接語, 少駐其前鋒, 其間, 可以得入南漢. 上許之, 撤禁軍數十騎, 命從之. 中路散走, 惟李景稷 ․ 羅茂松 ․ 崔結三人, 追至沙峴, 遂駐馬, 詰其渝盟, 遲延時刻. 淸將, 終不加害. 由是, 至山城.

정축(丁丑)년 15년. 봄 정월에 남양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가 민병(民兵)을 선발하여 왕을 호위하고자 하였으나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 윤계가 사로잡혔을 때 청의 장수가 무릎을 꿇으라고 핍박하니, 윤계가 꾸짖으며 “내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무릎은 굽힐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무수히 찔러 죽이니 몸에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당초에 임금이 강화도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을 미쳐 빠져나가기도 전에 이미 청나라 병사들이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렀고, 한 무리의 군사들이 양화도(楊花渡)를 가로 막으니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 최명길(崔鳴吉)이 말하기를, “형세가 도저히 싸울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제가 단신으로 적진에 가서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을 꾸짖겠습니다. 적이 만약 신을 죽인다면 신은 마땅히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게 될 것이고, 다행히 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그 선봉을 잠시 지체시킬 수 있을 것이니, 그 틈에 남한산성에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주상이 허락하였다. 호위하는 기병 중에서 군사 수십 명을 선발하여 최명길을 따르도록 하였으나, 도중에 모두 흩어져 도망가고 오직 이경직(李景稷), 나무송(羅茂松), 최결(崔結) 3인만이 따라와 사현(沙峴)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말을 멈추고 맹세를 어긴 것에 대해 꾸짖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청나라 장수가 끝내 최명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公州營將崔震立, 從監司鄭世規, 勤王至龍仁, 力戰死之.慶尙左右兵使許完 ․ 閔栐 ․ 營將宣若海 ․ 義兵將李暾, 戰敗俱死.

공주영장(公州營將) 최진립(崔震立)이 감사(監司)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임금을 호위하고자 용인에 이르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경상좌우병사(慶尙左右兵使) 허완(許完), 민영(閔栐), 영장(營將) 선약해(宣若海), 의병장(義兵將) 이돈(李暾)이 전투에서 패하여 모두 죽었다.

○ 忠淸兵使李義培 ․ 察訪李尙載 ․ 金弘翼, 戰敗皆死. 宛伯李時昉 ․ 全羅兵使金俊龍, 出城皆惡戰死, 其勢莫能當.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의배(李義培), 찰방(察訪) 이상재(李尙載), 김홍익(金弘翼)이 싸움에 패하여 모두 죽었다. 완백(宛伯) 이시방(李時昉),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용(金俊龍)이 성에서 나왔다가 싸움에 패하여 죽었으니, 그 형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 陷江華, 嬪宮及兩大君, 被執. 戰輒乃死已, 判府事金尙容 ․ 佐郞權順長 ․ 進士金益兼, 自焚死.

강화도가 함락되어 빈궁과 두 대군이 사로잡혔다. 싸우기만 하면 죽었으니, 판부사(判府事) 김상용(金尙容), 좌랑(佐郞) 권순장(權順長), 진사(進士) 김익겸(金益兼)이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 於是, 崔鳴吉撰進國書, 金尙憲裂其書. 崔鳴吉曰 公雖裂之, 吾當拾之. 小無慍色, 車駕因下城, 淸主云 只行三拜好矣.

이때 최명길(崔鳴吉)이 국서를 써서 올렸는데, 김상헌(金尙憲)이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최명길은 “공이 비록 찢더라도 나는 마땅히 수습해야만 합니다.” 하고는 조금도 화내는 기색이 없었다. 임금이 항복을 하였는데, 청나라 왕이 “단지 세 번만 절하면 된다.” 하였다.

○ 上還宮. 淸主, 撤兵歸, 世子同嬪宮, 鳳林大君, 同夫人, 爲質, 隨入瀋陽. 命金慶徵 ․ 張紳, 賜死, 又島配金自點 ․ 沈器遠, 遠竄李敏求. 斥和人吳達濟 ․ 尹集 ․ 洪翼漢, 被狗至瀋陽, 不屈死.

임금이 환궁하였다. 청나라 왕도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는데, 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그 부인이 인질이 되어 청군을 따라 심양(瀋陽)으로 들어갔다. 명하여 김경징(金慶徵),장신(張紳)을 처형하고, 또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이민구(李敏求)를 멀리 귀양 보냈다. 척화(斥和)를 주장하던 오달제, 윤집, 홍익한은 사로잡혀 심양에 이르렀는데,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다.

○ 星州義士李士龍, 死於錦州, 淸人大書於旗曰, 朝鮮義士李士龍. 前參判鄭蘊, 棄官歸.

성주(星州) 의사(義士) 이사용(李士龍)이 금주(錦州)에서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깃발에 크게 쓰기를 ‘조선 의사 이사룡(朝鮮 義士 李士龍)’이라고 썼다. 전 참판(參判) 정온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 戊寅十六年. 殺義州府尹黃一浩 ․ 義士崔孝逸等七人, 是淸之所指也.

무인(戊寅)년 16년. 의주부윤(義州府尹) 황일호(黃一浩)의사 최효일(崔孝逸) 등 7인을 죽였는데, 이는 청나라에서 요구했기 때문이다.

○淸殺朝鮮弼善鄭雷卿, 執斥和人金尙憲 ․ 曹漢英 ․ 蔡以恒, 囚瀋陽, 淸主前, 言必稱爾汝而不屈.

청이 조선의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을 죽이고, 척화(斥和)를 고집하던 김상헌(金尙憲), 조한영(曹漢英), 채이항(蔡以恒)을 사로잡아 심양에 가두었는데, 청나라 임금 앞에 나아가서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당신’ 이라고 일컬으며 굴복하지 않았다.

○ 庚辰十八年. 殺林慶業. 自丁丑後, 棄官入明朝, 有通信擧義之策. 爲淸兵所執, 誘降不屈, 義而歸之, 金自點構罪殺之, 國人憐之. 世子贖還, 李敬輿 ․ 申翼聖 ․ 李明漢 ․ 崔鳴吉, 是皆宣川府使李炷, 所誣而被囚於瀋陽.

경진(庚辰)년 18년. 임경업을 죽였다. 정축 이후 관직을 버리고 명나라에 들어가 서로 연락하며 거사를 도모하려고 하였다. 청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을 때 항복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의리상 우리에게 보내었는데, 김자점(金自點)이 죄를 엮어 죽여 버리니 나라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세자가 풀려나 돌아왔는데,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翼聖), 이명한(李明漢), 최명길(崔鳴吉)은 모두 선천부사(宣川府使) 이주(李炷)의 모함을 받아서 심양에 갇히게 되었다.

○ 乙酉二十三年. 三月, 王世子, 與鳳林大君, 還國. 闖賊李自成陷燕京, 大明崇禎皇帝, 殉于社稷. 王世子薨, 冊鳳林大君淏爲王世子.

을유(乙酉)년 23년. 3월에 왕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돌아왔다. 도적 이자성(李自成)이 연경(燕京)을 함락시키자,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가 사직(社稷)에서 순국하였다. 왕세자가 죽어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를 왕세자로 삼았다.

○ 己丑二十七年. 五月, 上昇遐, 王世子卽位. 大司憲金集, 請廣開聽言之路.

기축(己丑)년 27년. 5월에 임금이 승하하여 왕세자가 즉위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집(金集)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길을 널리 열어 놓을 것을 청하였다.

◎ 嗚呼, 仁廟之下城, 義乎? 如崇禎之殉于社稷, 義乎? 殉于社稷, 執迫不得已而殞身於綱常大義之中. 下城講和, 亦是迫不得已而屈一時之義, 以安宗廟社稷, 保其子孫黎民於數百年之久, 則一時之屈, 爲其宗廟社稷, 亦爲子孫黎民也, 義孰加焉. 淸主之入我彊, 不滿數朔, 出城拒戰則未嘗不有無一城之完守, 力戰敗死, 勢如投卵撞石, 防禦無策. 崔公之權謀, 得中, 外無他義耳. 金公之裂書, 惟一不貳而一路適行之大義. 然, 當此急遽之時, 隨時通變, 恐爲得中之大義也. 後孝顯之際, 尤菴夫子以儒賢, 允爲西人領袖, 名諸東邦, 倡言北伐之議. 以是後之學者, 推爲夫子之生平大義. 然, 竊恐伏惟, 以小事大, 勢也. 勢莫能過而勢不有夷夏之分. 今北胡, 萬乘之國, 東邦, 千乘之國, 以千乘之國, 伐萬乘之國則是, 負薪而入於火口之中矣. 自招其禍而後悔何及, 不惟是已, 俾君父再招城下之羞, 宗廟社稷, 絶祀不享, 子孫黎民, 不能保全則是, 宜裹三千疆土於兵戈之中, 投入北胡之口也. 是故, 昔, 文王, 事勳鬻, 文王, 未嘗見笑於天下後世矣. 且夫武王太公, 不伐勳鬻, 而失義於天下也, 末之有爾.

오호라, 인조가 항복을 하신 것이 의로운 것인가? 숭정황제처럼 사직에서 순국을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인가? 사직에서 순국을 한 것은 형세가 급박하여 부득이 나라의 강상(綱常)과 대의(大義)에 몸을 버린 것이다. 항복을 하고 강화를 맺은 것 또한 급박하여 부득이하게 한때의 의(義)를 굽힘으로써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 그 자손들과 백성들을 수백년 오랫동안 보전하기 위함이니, 한 때 굽힘으로써 종묘사직을 위하고 또한 자손들과 백성들을 위한 것이니, 또 어떠한 의(義)를 여기에 더할 수 있으리오. 청나라 임금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채 몇 개월 지나지 않았다. 성을 나서서 막아 싸우다가 완전하게 지킨 성이 하나도 없어 힘껏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형세가 마치 계란을 던져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막고 제어할 계책이 없어 최공(최명길)이 권도(權道)를 도모한 것만이 중용(中庸)의 도를 얻은 이외에는 다른 의(義)도 없었을 뿐이다. 김공(김상헌)이 국서(國書)를 찢은 것은 오직 한 가지만 알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대의(大義)를 따라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급박하고 다급한 때를 당하여서는, 시세(時勢)에 따라 변통(變通)을 하여야 중도(中道)에 맞는 대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뒷날 효종 ․ 현종 때에는 우암(尤菴) 선생이 유현으로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우리나라에 이름을 드러내었는데, 북벌(北伐)의 의논을 처음으로 하시었다. 이로 인해 후학들은 우암 선생의 평생대의를 추숭(追崇)하였다. 그러나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은 형세(形勢)이다. 세력이 더 이상 강할 수가 없으며, 세(勢)에는 오랑캐와 중화의 구분이 없다. 지금 북쪽 오랑캐는 만승지국(萬乘之國 : 천자(天子)의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천승지국(千乘之國 : 제후의 나라)인데, 천승의 나라로 만승의 나라를 토벌하려 하니 이는 땔감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니, 뒤따르는 후회를 어찌할 것인가? 이러할 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임금은 다시금 성 아래에서의 수모를 당하게 될 것이며, 종묘사직(宗廟社稷)은 제사가 끊어져 흠향(歆饗)하지 못할 것이요, 자손들과 백성들은 보전될 수도 없을 것이니, 이는 삼천리강토를 싸서 전쟁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며, 북쪽 오랑캐의 입에 던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옛날에 문왕(文王)은 훈륙(勳鬻)을 섬겼는데, 문왕이 천하 후세에 비웃음을 당하지 않았다. 또 무왕(武王)과 태공(太公)은 훈육(勳鬻)을 정벌하지 않음으로써 천하에 의를 잃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은 있지 않았다.

◎ 其於爲政, 亦何以哉? 竊惟我東文敎之治, 未有盛於三角山漢陽之政而政黨之分, 亦如之. 以儒敎, 終成黨錮之禍綱, 結綱於儒學習與成性之中. 年甫八歲, 入於小學則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 灑掃應對之方, 置於茶飯恒飮之課敎之. 以政黨分裂之時, 孰爲東人領袖而稱東宗, 孰爲西人領袖而稱西宗, 相視若仇讐. 登仕立朝之日, 政出於嫉妬之性而互爲刺棘, 甚至於弑父弑君, 廢母廢妃之變常, 是皆儒敎中, 分朋之禍孼也. 不惟是已, 五百餘年宗社禍亡之機, 莫顯乎是儒賢分朋盛治之日也. 盖自分黨以來, 朝無正論, 史無正筆, 政策時議圭角相左, 未嘗爲後世之所鑑戒者, 可勝痛歎乎哉! 焚香跪讀東史一編, 東西南北是是非非竊恐伏以敢言其萬一也哉! 鄒夫子, 所謂 “盡信書, 不如無書” 亦恐穢佛而止此.

정사를 하는데 또한 무엇으로써 하리오?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문교의 정사는 삼각산(三角山) 한양(漢陽)의 정치보다 성대함이 없는데, 붕당이 나뉜 것 또한 그와 같았다. 유교를 가지고 끝내 당고(黨錮 : 당인을 종신토록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의 화를 이루는 그물로 만드니, 유학의 습관이 성품이 되는 중에 이루어진다. 나이가 겨우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면 부모님 을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하게 지내는 도(道), 쓸고 닦고 손님을 대접하는 방법, 차와 밥을 두는 것과 술을 마시는 법 등으로 가르친다. 정당이 나뉘어 분열된 때에 누가 동인(東人)의 영수가 되면 동종(東宗)이라 칭하고, 누가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면 서종(西宗)이라고 일컬어 서로 보기를 원수같이 한다. 벼슬에 올라 조정에 서는 날이면 정사는 질투하는 성품에서 나와 서로를 자극하며, 심지어는 아버지를 죽이고 임금을 시해하며, 어머니를 폐위하고 왕비를 폐위하는 변고가 있게 되니, 이는 모두 유교 가운데 붕당의 재앙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오백년 종사를 망치는 조짐이 이렇게 유현들이 붕당으로 나뉘어 성하게 다스리던 때보다 더 드러난 적이 없다. 무릇 붕당이 나뉜 이래로 조정에는 바른 의론이 없고, 역사를 기록함에 바르게 쓰질 않으며 정책과 시의(時議)에 서로 대립하여 깎아내림으로써, 후세에 본받을 만한 것이 되질 못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으랴! 삼가 향을 사르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우리나라의 역사 한 편을 읽어보면, 동인, 서인, 남인, 북인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내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라도 말할 수 있으리오! 맹자께서 말씀하신 “책을 다 믿는 것은 책이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 역시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그러한 지경에 그치고 만 것이다.

○ 孝宗 肅宗癸亥定世室

효종 숙종 계해년에 세실(世室)로 정하였다.

○ 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諱 淏 字 靜淵 潛邸時號竹梧. 仁朝次子. 仁烈王后以萬曆四十年己未 光海十一年 五月二十二日甲辰. 誕于慶幸坊本宮. 仁祖潛邸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명의 정덕대왕(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은, 휘는(淏)이며, 자는 (靜淵)이다. 잠저에 있을 때의 호는 죽오(竹梧)이며,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만력(萬歷) 47년 기미(해광년) 5월 22일 갑진에 경행방본궁(慶幸坊本宮 - 인조의 잠저)에서 낳았다.

○ 天啓丙寅. 初封鳳林大君. 崇禎乙酉. 冊封世子. 己丑五月卽位. 己亥五月四日甲子. 昇遐于昌德宮大造殿. 在位十年. 壽四十日. 英宗庚申. 加 上諡號明義正德. 寧陵.

천계(天啓) 병인년에 처음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하고, 숭정(崇禎) 을유년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기축년 5월에 즉위하고, 기해년 5월 4일 갑자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10년이고, 나이는 41세였다. 영종(英宗) 경신년에 시호를 명의정덕(明義正德)이라고 올렸다. 능은 영릉(寧陵)이다.

○ 妃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張氏. 籍德水. 右議政新豊府院君贈領議政文忠公維女. 萬曆戊午十二月二十五日庚辰. 誕于安山村舍. 崇禎辛未. 行嘉禮于梨峴別宮. 初封豊安府夫人. 乙酉冊封世子嬪. 己丑進封王妃. 顯宗二年辛丑.上尊號孝肅.十五年甲寅二月二十四日戊年. 昇遐于慶德宮之會祥殿. 壽五十七. 寧陵與大王陵同原. 甲寅六月四日葬.

왕비 효숙 경열 명헌 인선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 장씨는, 본관은 덕수(德水)이요,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증 영의정(贈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유(維)의 딸이다. 만력 무오년 12월 25일 경진에 안산(安山)의 시골집에서 났고, 숭정 신미년에 이현별궁(梨峴別宮)에서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처음에 풍안부부인(豐安府夫人)으로 봉하였다가 을유년에 세자빈으로 책봉하였고, 기축년에 왕비로 봉하였다. 현종 2년 신축에 존호를 효숙(孝肅)이라 올렸다. 현종 15년 갑인 2월 24일 무오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는데, 나이 57세였다. 능은 영릉(寧陵)이다. 대왕의능과 같은 언덕이다. 갑인년 6월 4일에 장사하였다.

○ 一男七女

嗣 顯宗大王

一女淑愼公主 早卒

二女淑安公主 益平尉洪得箕

三女淑明公主 靑平尉沈益顯

四女淑徽公主 寅平尉鄭齊賢

五女淑靜公主 東平尉鄭載崙

六女淑敬公主 興平尉元夢

一女淑寧翁主 安嬪李氏出錦平尉朴弼成

아들 하나와 딸 일곱을 두었다.

사(嗣) 현종대왕(顯宗大王)

첫째 딸 숙신공주(淑愼公主) : 일찍 죽었다

둘째 딸 숙안공주(淑安公主) :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아내이다.

셋째 딸 숙명공주(淑明公主) :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의 아내이다.

넷째 딸 숙휘공주(淑徽公主) :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의 아내이다.

다섯째 딸 숙정공주(淑靜公主)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아내이다.

여섯째 딸 숙경공주(淑敬公主) : 흥평위(興平尉) 원몽(元夢)의 아내이다.

첫째 딸 숙녕옹주(淑寧翁主) : 안빈(安嬪) 이씨가 낳았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아내이다.

◎ 老璫金彦謙年迫九十. 特一未冷之屍. 而 上常置內府. 日給御膳. 盖彦謙曾侍昭顯在瀋之日. 昭顯有過. 則泣諫 終日不食. 明日又諫. 上嘗見其如此. 故常加厚恤也.

늙은 내시 김언겸(金彦謙)은 나이 90에 가까워 한낱 식지 않은 시체에 불과하나 임금이 항상 내부(內府)에 두고 날마다 어선(御膳)을 내렸다. 그것은 언겸이 일찍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에 있을 때에 소현에게 잘못이 있으면 울면서 간하여 종일 먹지 않고 이튿날에 또 간하였는데, 임금이 일찍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항상 두터이 대접하였다.

◎ 丙申 上爲莊烈趙大妃. 搆萬壽殿. 都提調鄭太和. 提調元斗杓. 鄭維城. 許積. 入審殿基. 路由後苑. 上要敔所經別堂以待之. 諸公以史官之不入. 辭. 上立促之. 旣對. 上親擧觴而侑之. 論國家大事. 上自之岡陵限迫. 語多悽楚. 諸公不覺墮淚. 上曰. 予方留意戎備. 措置事多. 而治兵繕甲. 宜在於國有長君之時. 非奉幼主者所可爲. 逮甲寅後. 諸臣之以兵事遭禍者甚多. 上敎果驗.

병신년에 임금이 장렬(莊烈) 조대비(趙大妃)를 위하여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도제조(都提調) 정태화와 제조 원두표 ․ 정유성(鄭維城) ․ 허적 등 이 전(殿)의 터를 살펴보러 들어가는데, 길이 후원(後苑)을 거치는 지라 임금이 지날목의 별당으로 오라하고 기다렸다. 제공(諸公)이 사관(史官)과 같이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하여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서서 재촉하여 들어가 뵈오니, 임금이 손수 술잔을 들어 권하며 국가 대사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수한(壽限)이 촉박한 것을 알고 슬픈 말씀이 많은지라 제공은 눈물이 절로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지금 군비(軍備)에 유의하여 조치하는 일이 많으나,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제작하는 것은 나라에 나이 든 임금이 있을 때에 할 일이고, 나이 어린 임금을 받든 이들은 할 일이 못된다.” 고 하였다. 갑인년 이후 여러 신하 중 병사(兵事)로 화를 당한 이가 대단히 많았으니 임금의 말씀이 과연 맞았다.

◎ 乙未夏. 慈懿大妃所處狹隘. 上親自視址. 以營別殿. 曰萬壽曰春暉.

을미년 여름에 자의대비(慈懿大妃)에 거처가 협착하다 하여 임금이 몸소 터를 보아 별전을 짓고 만수전 ․ 춘휘전(春暉殿)이라 하였다.

◎ 是曰. 上語及臣僚不能斷酒之獘. 仍曰. 予在潜邸嗜酒. 無日不醉. 及陞儲位. 斷而不飮. 今年春. 慈殿以羊肉及酒一盃賜之. 予不敢不飮. 而味甚惡. 無異苦藥.

이날 임금의 말씀이 신하들이 술을 끊지 못하는 폐단에 미치자 이르기를, “내가 잠저에 있을 때, 술을 즐겨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세자위에 오른 뒤에는 끊고 마시지 않았다. 금년 봄에 대비께서 염소 고기와 술 한 잔을 주시기에 내가 마시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맛이 몹시 나빠 쓴 약과 다름이 없더라.” 하였다.

◎ 遣戒國恤進香. 勿用綵花. 詳國喪典故

유언(遺言)에, “국상〔國恤〕에서 진향(進香)할 때에 채색 꽃은 쓰지 말라.”고 하였다. (국상전고(國喪典故)에 자세하다.)

◎ 上嘗敎 顯廟曰. 予與伯氏昭顯世子. 同質瀋陽時. 臣民誤認予有賢德而歸心. 予見諸臣中. 或有心存嫌疑. 自疎於予者. 或有致款於予. 冀邀後福者. 予時雖不能斥其阿好. 及登大位. 每見其時持正者之擬職. 則輒嘉而落點. 若使今日宗室. 有得令望如予者. 向者媚予者. 又必以向日陰厚於予者. 待之斯人. 其可信乎. 以正持己者某某也. 媚悅納交者某某也. 汝須知予用舍之意也.

임금이 일찍이 현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형님인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신민(臣民)이 나에게 어진 덕이 있다고 잘못 알고 마음으로 따르는데, 내가 본 즉 여러 신하 가운데에는 혹 마음속으로 혐의롭게 생각하여 스스로 나에게 성기〔疎〕게 하는 자도 있고, 혹은 나에게 간곡히 하여 뒷날의 복을 기대하는 자도 있었다. 내가 그 때는 비록 아부하는 것들을 물리치지 못하였으나, 임금 자리에 오른 뒤로는 늘 그 때 <아부하지 않고> 바르게 몸을 가지던 자들이 관직에 추천되는 것을 볼 때에, 문득 가상히 여겨 낙점(落點)을 찍었다. 만일 오늘날 종실(宗室) 중에 인망 얻기를 나와 같이 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전일에 나에게 아첨하던 자가 또 반드시 전일 나에게 남 몰래 후하게 하던 그 행동을 그 사람에게 할 것이니,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전일에 바르게 몸을 갖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고, 아첨으로 나의 환심을 사려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니, 너는 모름지기 내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뜻을 알아두라.” 하였다.

◎ 上在潜邸. 聞有陞儲之命. 送言于平日所客習文官某曰. 自此更無從容相見之期. 願一見之. 文官以微服乘昏進謁. 上晩年. 以語 顯廟曰. 予之邀致. 雖不及深思. 而爲人臣者. 何敢潜來於世子之家乎. 予後乃覺得. 已疑其心. 近觀其所爲. 他日決不能以正導汝者. 汝須知之.

임금이 잠저에 있을 때, 동궁으로 책봉하라는 명이 있음을 듣고 평일에 잘 알던 문관 아무개에게 말을 전하기를, “이제부터는 다시 조용히 서로 만나볼 기회가 없을 것이니, 한 번 보고 싶다.” 고 하였더니 그 문관이 미복(微服)으로 어둠을 타서 가 뵈었다. 임금이 만년(晩年)에 현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를 청한 것은 미처 깊이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남의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세자의 집에 남몰래 찾아올 수 있겠는가. 내가 뒷날에 스스로 깨닫고 그 마음씨를 의심하여 요사이 그가 하는 짓을 보니, 다른 날 결코 바른 도리로써 너를 인도할 자가 못되리라. 모름지기 너는 알아 두라.” 하였다.

◎ 上以聰明睿智之性. 有傾否濟屯之志. 臨御十年. 克念克勤. 未嘗一日或怠. 海隅含生. 方且企踵延頸. 以望功成治定之日. 乃以禮陟. 鳴呼天乎. 眞所謂創業未半中道崩殂者. 鳴呼天乎. 自三代以下. 治不本於學. 故道術爲天下裂. 惟 遜志來修. 以御家邦. 故駸駸乎王道之純. 三代以下. 惟攻利是尙. 故多愧於天里民彛. 惟 上正誼明道. 無所計較. 故聖志克定. 卓然如靑天白日. 常有日暮途遠之歎. 又歎曰. 古語一二臣同. 不爲無助. 今則小大敷同. 惟目前是圖. 誰與我共此者. 故時有荊南握對之賜. 其沈機妙籌. 有非人人所可窺測者. 尤好宋儒書. 有以心學說進者. 卽授 筵臣訂正曰. 得無有悖於程朱否. 盖其秉天理明聖學正王法伸大義. 以繼春秋大一統之業. 以承 聖考道心之傳. 以不負皇天生成之意者. 豈非建天地而不悖. 質鬼神而無疑者乎. 世無知德者. 固不能象成歌詩. 疎越薦聲. 使人愀然如復見盛德之容. 然以經傳所載. 摸象而蠡管之. 其乃武乃文. 祖乎堯. 孝悌盡道. 宗乎舜. 儉勤惡旨酒. 法乎禹. 不邇聲色改過不吝. 慕乎湯. 視民如傷. 卑服康功. 師乎文王. 發揚蹈厲. 恐不逮事. 象乎武王. 自漢以下. 則恢廓大度. 高祖如之. 重厚直柔. 光武同之. 信義彰著. 昭烈近之. 弧失鐵桂. 窹寐豪英. 而齎志不伸. 惜乎宋孝宗似之. 此則時勢然也. 上在燕. 忽見五彩凝室. 而神龜出見. 昔禹抑洪水. 使天乃以是錫之. 使 上志業成就. 則將不在禹下矣. 奈何天示之兆. 而不畀之壽. 使天下萬世. 卒不得受其賜歟.

지문에, 『임금은 총명 ․ 예지(睿智)한 성품으로서 위태로운 국운을 구제할 뜻이 있어 왕위에 있은 지 10년 동안에 하루도 게으르게 지내지 않았다. 이 나라 백성들이 바야흐로 발을 괴어 딛고 목을 펴는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는 날을 바랐으나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아, 슬프다, <이것도> 천운인가. 참으로 그야말로 「왕업을 창시하여 절반도 못 이루고 중도에서 돌아가다」 <創業末崩 半中途殂>는 옛말과도 같다. 슬프다 하늘이여, 삼대(三代 - 하(夏) ․ 은(殷) ․ 주(周)) 이후로는 정치가 학문에 근원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도술(道術)이 분열(分裂)되었으나, 오직 임금께서는 학문과 덕을 닦아서 인륜을 밝혀 나라를 다스린 까닭에 점점 왕도가 순수(純粹)하게 되었다. 삼대 이후로는 오직 공리(功利)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천리(天理)와 인륜에 부끄러운 일이 많았으나, 오직 임금께서는 도의를 위주로 하고 공리를 계교치 않은 까닭에 거룩한 뜻이 굳게 정하여져서 높기가 청천백일과 같았다. 임금께서 항상,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고 한탄하시었다. 또 탄식하시기를, “옛말에, 「한 두 신하만 〈임금의 의사와〉같아도 도움이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데 ․ 소신이 모두 오직 눈앞의 일만 생각하니, 누가 나와 더불어 이 (북벌하는 일)일을 함께 할 것인가?” 하였다. 그리하여 때때로 신하를 홀로 불러 의논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깊은 계획과 묘한 방책은 모든 사람이 헤아리고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특히 송유(宋儒)의 글을 좋아하셨다. 심학설(心學說)을 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곧 경연관(經筵官)들에게 내어 주어 정정(訂正)하라고 명하며, “정자 ․ 주자의 말과 어긋난 것이나 없는가?” 하셨으니, 대개 천리(天理)를 잡고, 성학(聖學)을 밝히고, 왕법(王法)을 엄하게 하고, 대의(大義)를 나타내어 춘추(春秋)의 대일통(大一統)의 사업을 계승하고, 선왕(효종)의 도심(道心)을 물려받아서 하늘이 낳아 주신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 어찌 <옛글에 이른 바>「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덕을 아는 자가 없으니, 그 덕을 형용하여 악장(樂章)을 만들어 음악에 올려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거룩한 덕을 보는 듯하도록 하지는 못하나마, 경전에 실리어 있는 글로써 <임금의 덕을> 형용한다면 무(武)하고 문(文)한 것은 요(堯)를 조(祖)로 하였고, 효도와 공순과 도리를 다한 것은 순(舜)을 본받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말을 좋아하고> 술을 미워하는 것은 우(禹)를 본받았고,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아니함은 탕(湯)을 본받았고, 백성 보기를 상(傷)한 것 보듯 함은 문왕(文王)을 스승하였고, 날치고 분발하여 할 일을 미처 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은 무왕(武王)을 본받았으니, 한(漢) 나라 이후의 제왕(帝王)에게 비교한다면, 넓고 큰 도량은 한고조(漢高祖)와 같고, 중후(重厚)하고 곧고 부드러움은 광무(光武)와 같고, 신의가 드러난 것은 소열(昭烈)과 가깝고, 화살과 쇠기둥을 놀리면서 영웅호걸을 자나깨나 생각하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간 것은 애석하나 송 효종(宋孝宗)과 같으니, 이것은 시세가 그러한 것이었다. 임금이 심양에 있을 때, 문득 오색이 방안에 어리더니 거북이 나타났다. 옛날 우(禹)나라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하늘이 이것(거북)을 주었는데, 임금께서 지업(志業)을 이루셨다면 장차 우(禹) 나라 임금이 아래에 있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찌 하늘이 그 징조만 보이고 수(壽)를 주지 아니해서 천하 만세(萬世)로 하여금 그 해택을 받지 못하게 하였는고』하였다.

◎ 後宮李氏. 慶州人. 生淑寧翁主而終. 上之世. 爵止淑媛. 供出該司. 此外無一毫所加. 顯廟在春宮. 請以內府剩餘. 助其不足. 累白而累不許曰. 留爲汝他日之恩可也. 盖 上意欲令其畏威於當朝. 而含恩於後嗣. 其懲前慮後之意至矣. 肅宗廟. 封至安嬪.

후궁 이씨는 본관이 경주(慶州)인데, 숙녕옹주(淑寧翁主)를 낳았으나 임금의 생전에는 <이씨의> 직위(職位)가 숙원(淑媛)에 그치었고, 생활비의 공급은 호조(戶曹)에서 나오는 것 이외에는 조금도 특별히 더 준 것이 없었다. 현종이 동궁에 있을 때 궁중의 남는 물자로 그 (이씨)의 생활비의 부족을 보태어 줄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내가 다른 날에 은혜를 배풀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임금이 그로 하여금 당대(當代)에는 위엄을 두려워하게하고 후사(後嗣)에게는 은혜를 받도록 한 것일 것이니, 앞의 일을 염려하고 뒷일을 생각함이 이렇듯 깊었다. 숙종 때에 안빈(安嬪)으로 봉하였다.

◎ 東平尉嘗侍食午飯. 以水潦飯. 不能盡喫而止. 上責之曰. 量而後潦. 使無所餘可也. 潦水餘飯. 或飼禽獸. 則猶爲有用之物. 而無知下賤. 全昧貴穀之道. 多棄穢地. 未免爲暴殄天物之歸. 使之然者. 皆由於喫飯者. 甚非惜福之意也.

동평위(東平尉)가 일찍이 모시고 점심을 먹는데 밥을 물에 말았으나 다 먹지 못하니, 임금이 책하기를, “먼저 <다 먹을 수 있는 양을> 헤아려 보고 물에 말아서 남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물에 말아 남긴 밥은 혹 새나 짐승에게 먹이면 아주 버리는 것은 아니지마는, 무지한 천인들이 곡식을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전연 모르게 되고, 흔히 땅에 버리면 하늘이 주신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 됨을 면치 못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두 밥을 먹는 사람의 잘못이니 복을 아끼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 淑徽公主嘗請得一繞裳. 上曰. 吾方君臨一國. 欲以儉示先. 豈可令汝着繡裳乎. 吾千秋萬歲後. 汝慈爲大妃. 則汝雖着此. 人不深咎. 姑待他日可也. 終不許.

숙휘(淑徽) 공주가 일찍이 수(繡)치마 한 벌을 해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검소함을 솔선(率先)하고자 하는데, 어찌 너로 하여금 수치마를 입게 하겠느냐. 내가 천추만세(千秋萬歲) 후 너의 모친이 대비가 된 뒤에는 네가 그것을 입더라도 사람들이 심히 허물하지 않을 것이니, 참고 다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刑曹過三覆. 罪人等將按律處斷. 上謂諸臣曰. 㬉氣如春. 淫雨不止. 沈霧四塞. 予心悚慄. 十餘死囚. 皆將伏誅於今日. 三覆議讞. 猶慮其未盡. 復欲問諸卿等. 遂更讞. 特減二囚死.

형조에서 삼복(三覆)을 거쳐 확정된 죄인들을 법에 의하여 처단하려고 할 때,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겨울인데> 따뜻한 일기가 봄날과 같고, 장마비가 그치지 않으며, 짙은 안개가 사방을 막았으니 내 마음이 송구(悚懼)하고 놀랍도다. 10여 명의 사형수를 모두 집행하려고 하는데, 삼복을 거쳤으나 아직도 미진(未盡)할까 염려되어 다시 여러 경들에게 묻는다.” 하고, 다시 판결하여 특별히 2명의 사형수는 감하였다.

◎ 上嗣服初. 前叅議金集. 前持平宋浚吉. 宋時烈. 前叅議權諰. 李惟泰. 前縣監崔蘊等. 首被召命而來. 念其旅食之艱. 賜以米肉. 聞時烈惟泰之母. 老且有疾. 令道臣餽米饌及藥物. 其徵辟之勤. 則命乘駕轎. 掌令趙克善之病. 賜毛衣覆之. 其沒也. 命戶曹郞泣喪. 日遣中使監護. 凡有儒名者. 靡不搜訪而用之. 崇儒之盛. 終始如一.

임금이 즉위할 때, 전 참의 김집(金集) ․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 ․ 송시열 ․ 전 참의 권시(權諰) ․ 이유태(李惟泰) ․ 전 현감 최온(崔蘊) 등이 맨 먼저 부름을 받고 왔는데, 그들의 여식(旅食)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주었으며, 시열과 유태의 어머니가 늙고 병이 있음을 듣고 감사를 시켜 쌀과 반찬과 약을 주게 하고, 그들을 불러올릴 적에 가마를 타고 오게 하였다. 장령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때에는 털옷을 주어 덮게 하였고, 그가 죽자 호조 낭관에게 명하여 그 상(喪)을 보살피게 하고 날마다 내시를 보내어 상을 감독하였다. 무릇 이름이 있는 선비는 찾아서 등용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선비를 지극히 높임이 시종(始終) 한결같았다.

◎ 上入燕. 一日困臥. 忽有五色之氣. 凝滿寢室. 壁間有龜出頭而體甚巨. 上疑夢諦視之. 非太也.

임금이 심양에 들어가서 하루는 피곤하여 누웠는데, 감자기 오색의 기운이 침실에 가득히 어리더니 벽 사이에서 거북의 머리가 나왔는데, 그 몸이 대단히 컸다. 임금이 꿈인가 의심하여 정신을 차리어 자세히 보았으나 꿈이 아니었다.

◎ 上臨筵歎曰. 人有恒言. 我國之人. 例多恇㤼. 以丁丑事見之. 則非軍卒之不精也. 實緣無良將也. 嘗聞李廣軍中. 不擊刁斗. 遠斥候以探賊情. 丙子之亂. 爲將者專昧於此. 申景瑗則旣不能戰. 又不能走. 我國將帥輩. 良可愧於鄰國矣. 且文官則莫如尙文. 武官則莫如尙武. 國家所取. 不出乎此. 而今則不然. 文 官之如武弁者. 固已輕. 武臣之如書生者. 方能見容. 若使武弁而好馳馬. 則人必以狂悖目之. 習尙可愧. 羊祜杜預之輕裘緩帶者. 旣不可復見. 則今世武弁之如書生者. 安能得力戰陣間也.

임금이 경연에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대체로 겁이 많다고 말한다. 정축년의 일을 볼 것 같으면, <패인(敗因)은> 군사가 정(精)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로 훌륭한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옛날> 이광(李廣)은 군중(軍中)에서는 조두(刁斗 - 시간을 알리는 꽹과리)를 치지 않고 척후병(斥候兵)을 멀리 보내어 적의 정세를 정탐하였다 하는데, 병자년의 난리에 장수된 자가 이것을 전연 알지 못하여 신경원(申景瑗)은 싸우지도 못하고, 또한 달아나지도 못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장수로서 이웃 나라 사람에게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문관은 문(文)을 숭상하여야 하고, 무관은 무(武)를 숭상하여야 국가가 취하는 바가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오늘날 그렇지 못하여 문관이 무관처럼 생긴 사람은 의례히 경멸함을 받고, 무관은 서생(書生)처럼 되어야 세상에 용남을 받게 되었다. 만일 무관이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광패(狂悖)하다고 지목하니, 이와 같은 습관은 참으로 부끄럽다. 옛날 양호(羊祜)와 두예(杜預)같은 사람처럼 가벼운 갖옷과 늦은 띠를 다시 볼 수 없고, 지금의 무관은 선비와 같으니 어지 싸움터에서 힘을 얻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 壬辰冬十月書講. 上曰. 古人所云. 亡國非一道者. 此言誠有理矣. 以大明之亡觀之. 崇禎皇帝. 外無遊畋之娛. 內無苑囿之樂. 凡可以亡國之事. 一無有之. 而終至於覆亡. 盖由於明察二字之不能盡其道也. 以此論之. 誠可懼也. 他國興亡. 姑不足論. 而至於今日. 國事如此. 未知末終如何. 予心如燬也.

임진년 겨울 10월 주강(晝講)에서 임금이 이르기를, “옛 사람의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 가지 길이 아니다」는 말은 참말로 이치가 있다. 명나라가 망한 것을 볼 것 같으면, 숭정황제(崇禎皇帝)가 밖으로는 사냥하고 놀러 다니는 오락이 없고, 안으로는 정원(庭園) ․ 화초(花草) ․ 동물(動物) 등의 즐김도 없어,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할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은 대개 명찰(明察) 두 글자의 방법을 옳게 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다른 나라의 흥망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 오늘날에 와서 나라 일이 이와 같아서 끝내는 어찌 될지 알지 못하겠으니, 내 마음이 타는 것 같도다.” 하였다.

◎ 甲午春. 夕講大學衍義. 至盧杞殺顔眞卿黜李揆之事. 上曰. 小人 甚巧. 必量度人主而逞其術焉. 杞之視德宗如嬰兒. 而不能覺. 其昏暗可知. 且讀史者將以監戒也. 今日君臣勉旃. 母使後人視此時. 如此時之視德終也.

갑오년 봄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석강(夕講)할 때에, 노기(蘆杞)가 안진경(顔眞卿)을 죽이고, 이규(李揆)를 내쫓는 일에 이르러서, 임금이 이르기를, “소인은 대단히 간교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 술책을 쓰는데, 노기가 덕종(德宗)을 어린 아이 같이 놀렸으나 <덕종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그 어두움을 가히 알 것이로다. 역사를 읽는 자는 장차 이것을 보고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군신(君臣)은 힘써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의 우리 보기를 오늘날에 우리가 덕종을 보는 것처럼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乙未春書講. 言及大明事. 上曰. 崇禎之亡也. 朝臣無一人死節. 從死者. 只一內官. 良羞也. 予觀大明之制. 使人執兵而侍. 群臣進事不合於意. 則伏殺之. 且設東西廠. 以䆠官主之. 天下事皆由此出. 跡其所爲. 亡國已晩矣.

을미년 봄 주강에서 명나라의 일에 말이 미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숭정황제가 망할 적에 조신(朝臣)중에 하나도 사절(死節)한 자가 없었고, 따라 죽은 자는 단만 한 내관(內官)뿐이었으니, 진실로 부끄럽도다. 내가 명나라의 제도를 보건대, 사람들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모시게 하고 여러 신하가 일을 아뢸 때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아니하면 쳐 죽였고, 또 동서창(東西廠)을 설치하고 환관(䆠官)들을 시켜 다스리게 하여 천하의 일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으니, 그 한 짓을 본다면 나라 망하기가 늦었다.” 하였다.

◎ 丁酉. 上曰. 昔行燕瀋之路. 諦觀稼穡之事. 灌澱之功. 莫如水車. 而我國全昧此制. 其制度. 今下于廟堂. 審其便否. 傳布外方. 以爲 勸農之一助. 盖漢人之制也. 時公州牧使申洬. 編得農書. 鋟板印進. 上嘉奬之. 命該曹多印廣布. 務除民弊.

정유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심양으로 가는 길에 농사일을 자세히 보니, 관개(灌漑)하는 일은 수차(水車)만한 것이 없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를 전연 알지 못하니, 빨리 정부에 이것을 의논하게 하여 그 편리하고 편리치 못한 것을 살펴서 지방에 선전하여 농사를 권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라.” 하였다. <이것은> 한인(漢人)의 제도이다. 그 때 공주(公州) 목사 신속(申洬)이 농서(農書)를 편찬 인쇄하여 올리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칭찬하고 예조(禮曹)에 명하여 많이 인쇄하여 널리 펴고 민폐를 널게 하였다.

◎ 上嘗以士大夫崇酒遊談爲憂. 李厚源對曰. 趙光祖當國. 人莫不飭勵改行. 李珥成渾之時亦然. 人圭崇儒之效如是矣. 今若宿德崇儒 缺 賢在廟. 豈敢扶醉道路. 談戱廢事如此乎.

임금이 일찍이 사대부들이 술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우려하니,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조광조가 나라를 담당할 때에는 사람들이 몸을 닦고 행실을 고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때에도 그러하였으니, 임금이 유(儒)를 숭상하는 효과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만약 덕망 있는 높은 선비를 조정에 부르면 어찌 길에서 술에 취하여 붙들고 다니며 희롱하는 말이나 하고 일을 폐하는 폐습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戊戌. 濟州貢馬中. 有身白而鬣黑. 體大而步健者. 見者以爲龍種. 時益平尉於諸駙馬中最長. 而東平尉新爲儀賓. 蒙異渥. 人謂此馬不歸益平. 則必歸東平. 及經御覽. 特賜崇善君. 鄭太和聞而喜之曰. 不賜愛婿而賜庶弟. 眞盛德事也.

무술년에 제주에서 바친 말(馬) 가운데 몸이 희고 갈기는 검으며 몸이 크고 걷기를 잘하는 것이 있었으니, 보는 사람들이 용종(龍種)이라고 하였다. 이 때 여러 부마(駙馬) 가운데서 익평위(益平尉)가 가장 어른이고, 동평위(東平尉)는 새로 부마가 되어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말이 익평위에게 돌아가지 아니하면 반드시 동평위에게 돌아 갈 것이라.” 고 하였는데, 임금이 본 뒤에 숭선군(崇善君)에게 특사하니, 정태화가 이를 듣고 기뻐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사위에게 주지 아니하고 서제(庶弟)에게 주었으니 참으로 지극히 거룩한 일이다.” 하였다.

○ 顯宗 辛卯行冠禮壬辰入學

현종(顯宗) 신묘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임진년에 입학하다.

○ 顯宗昭休衍慶敦德緌成. 英宗壬辰定世室尊號 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諱 棩 子景直. 孝宗元子. 仁宣王后辛已 仁祖十九年 二月四日己酉. 誕于瀋舘. 甲申東還. 己丑冊封王世孫. 辛卯 孝宗二年 進封世子. 己丑五月. 卽位于昌德宮. 甲寅八月八日己酉. 昇遐于昌德宮之齊殿養心閣. 在位十五年. 壽三十四. 崇陵. 在楊州健元陵西南別崗三日葬酉坐卯向甲寅十二月十有表石

현종, 소휴연경 돈덕 유성(昭休衍慶敦德緌成 - 영종 임진년에 세실(世室)을 정할 때의 존호(尊號)). 순문 숙무 경인 창효대왕(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은, 휘는 연(棩)이며 자는 경직(景直)이다. 효종의 맏아들로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신사년(인조19년) 2월 4일 기유에 심관(瀋舘)에서 낳았다. 갑신년에 귀국하여 기축년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고 신묘년 효종 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기해년 5월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즉위하고 갑인년 8월 18일 기유에 창덕궁 재전(齋殿) 양심각(養心閣)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고, 나이는 34세이었다. 능은 숭릉(崇陵)이다.

○ 妃顯烈禧仁 壬辰追上 貞獻文德明聖王后金氏. 籍淸風.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贈領議政忠翼公佑明女. 壬午 仁祖二十年 五月十七日. 誕于長通坊私第. 辛卯冊封 缺 世子嬪. 行嘉禮于於義洞本宮. 已丑進封王妃. 肅宗二年丙辰. 上尊號顯烈. 癸亥 肅宗九年 十二月五日壬寅. 昇遐于昌慶宮之儲承殿. 壽四十二. 崇陵.

왕비 현렬 희인(임자년에 추후로 올린 존호다.) 정헌 문덕 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김씨는,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증 영의정(贈領議政) 충익공(忠翼公) 우명(佑明)의 딸이다. 임오년(인조 12년) 5월 17일에 장통방(長通坊) 사제(私第)에서 낳았고, 신묘년에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행하였으며, 기해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2년 병진에 존호를 현렬(顯烈)이라 올리고 계해년(숙종 9년) 12월 5일 임진에 창경궁(昌慶宮)의 저승전(儲承殿)에서 승하하니 나이는 42세였고, 능은 숭릉(崇陵)이다. <현종>대왕의 능과 같은 산등이며 갑자년 4월에 장사지냈다.

○ 一男三女

嗣 肅宗大王

一女明善公主 早卒

二女明惠公主 早卒

三女明安公主 海昌尉吳泰周

1남 3녀를 두었다.

사(嗣) 숙종대왕(肅宗大王)

1녀 명선공주(明善公主) : 일찍 죽다.

2녀 명혜공주(明惠公主) : 일찍 죽다.

3녀 명안공주(明安公主) : <남편은> 해창위 오태주(吳泰周)이다.

◎ 上在春宮. 有某性內侍. 造進浦禽獸器械. 百般求媚. 上極愛之. 他官莫敢望焉. 及卽位. 乃以巧侫被斥. 終不復近龍床.

현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어떤 내시가 새와 짐승 잡는 틀을 만들어 드리는 등 온갖 짓으로 잘 보이려 하니, 현종이 <그를> 극히 사랑하여 다른 관속들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즉위하자, 그는 간사하고 아첨함으로 하여 물리침을 당하고 끝내 다시 용상(龍床)에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 曹姓尙宮. 光海後宮許氏之侍婢. 癸亥召置內籍. 而常有不平意. 曁上誕降. 受保母之任. 上五六歲時. 把火爲戱. 曹獨在傍言曰. 乃祖以火得國. 乃欲效之耶. 上默識之. 而未甞有幾微辭色. 及嗣. 未及召. 曹伏庭下. 曰. 汝記某歲事乎. 伊時非不知白于 上. 而以汝有阿保功. 不忍其受重戮. 忍至今日. 逐命奪女官告身. 黜置私家. 旣黜. 上猶念其勞. 廩給終其身. 許氏卽留守潜之孫女. 光海遜位後. 居外第. 曹不忘舊誼. 時節送衣服飮食. 至死不替云.

조성(曹姓) 상궁(尙宮)은, 광해군의 후궁(後宮) 허씨(許氏)의 시비(侍婢)였다. 계해년에 인조(仁祖)가 불러다 궁중에 두었는데 항상 마음에 불평을 품었다. 현종이 탄생하자 보모(保母)의 소임을 맡았다. <현종>이 5, 9세 때에, 불을 가지고 희롱하니 그가 홀로 곁에 있다가, “저의 조부가 불로서 나라를 얻었으니 저도 배우려 하는 것인가” 하였다. 현종이 아무 말도 없이 기억해 두고, 일찍 그런 낌새를 말이나 안색에 보이지 않고 있다가 왕위에 오른 다음, 조를 불러 뜰아래 엎드리게 하고, “네가 아무 해이 일을 기억하느냐. 그 때에 내가 위에 사뢸 줄을 모른 것이 아니지만, 네가 <나를> 보호 양육한 공이 있기 때문에 차마 중한 형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고 드디어 여관(女官)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사가(私家)에 내쫓았다. 내쫓고 나서 임금은 오히려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죽을 때까지 먹을 것을 내려 주었다. 허씨는 곧 유수(留守) 잠(潛)의 손녀이다. 허씨는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 궁중에서 나가 사가에 있었는데, 조가 옛 정의를 잊지 아니하고 때에 따라서 의복과 음식을 보내어,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 上嘗送淸使于西郊. 出立階上. 淸人旣發. 軍卒傳語者疾走. 未及察視. 觸冐聖體. 幾不免顚仆. 左右失色. 請付有司處之. 上笑曰. 無情也. 奚可治. 命本兵決棍五六度以放送.

임금이 일찍이 청나라 사신을 서교(西郊)에서 전송하면서 섬돌 위에 나섰는데, 청인(淸人)들이 떠난 뒤에 말을 전갈하는 군졸이 빨리 걷다가 미처 살펴보지 못하고 임금의 몸에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 이에 좌우가 질겁하여 법관에 넘겨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웃으며 이르기를,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법으로> 다스리리오.” 하고, 소속된 병영(兵營)을 시켜 곤장 5, 6대를 치고 놓아 보내게 하였다.

◎ 庚子 上有眼患. 不能卞物. 諸臣奏事不用文書. 只抄大事面廩. 中外遑遑. 未一年而服常. 上同.

경자년에 임금이 눈병이 나서 잘 보지 못하여, 신하들이 일을 아뢰려면 문서를 사용하지 않고, 중요한 일만을 면대하여 품의하게 되니, 조정과 외간에서 걱정하였는데 1년이 못가서 평상시대로 회복되었다.

◎ 孝廟朝. 有進稚態者. 養之經年. 而受制於人. 漸不如初. 內侍言. 久必爲患. 請殺之. 孝廟將從之. 上在東宮進曰. 態雖害人之物. 而姑無受其害者. 今若慮其未然之事. 而先殺之. 則恐非仁人之心. 宜放諸深山也. 孝廟聞而大喜曰. 爾之臨御. 必無以猜疑見殺者. 爲爾臣子者. 可爲有福.

효종조에 새끼 곰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 기른지 1년이 넘자, 사람에게 제어(制御)받는 것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않으니 내시가 아뢰기를, “오래되면 반드시 우환이 되겠습니다.” 하고 죽이기를 청하니, 효종이 장차 허락하려 하였다. 현종이 세자로서 나아가 아뢰기를, “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장차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인(仁)한 마음이 아닐 줄 아옵니다. 마땅히 깊은 산에 놓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효종이 듣고서 크게 기뻐하며, “네가 임금이 된 때에는, 시기와 의심으로 하여 죽음을 당할 사람이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였다.

◎ 庚子秋. 海西人有上變者. 上一問知其誣. 只誅其人. 放其被逮者七十餘人. 卽日賜糧資歸之. 家財之見攘於吏卒者. 悉推還給. 冬. 當復死囚. 大臣以都中痘疫方熾. 有妨引接外臣. 請停.

경자년 가을에 황해도 사람으로 고변(告變)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한 번 물어보고서,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알고 <고변한 자를> 베고, <무고당하여> 잡혀 온 사람 70여 명을 놓아, 그 날로 양곡과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내었다. <그들의> 집안 재물을 관리나 군졸들에게 빼앗겼던 것은 모두 찾아서 돌려주었다.

◎ 上下札曰. 鳴呼天性人. 皆有之. 而不復其初. 以至爲惡. 不卽處斷. 又從而嚴囚之. 罪雖當誅. 其情則戚矣. 言念及此. 不覺慘然. 今歲以此不行. 明年又以不行. 則被罪人. 皆爲囹圄之魂而後已. 玆非爲國之道也. 不許.

임금이 글로 적어 보내어 이르기를, 『아아, 타고난 착한 성품은 사람마다 가진 것이지마는 <물욕 때문에> 처음 성품을 회복하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하게까지 된 것이다. 지금 곧 처벌하지 못하고 또 엄하게 가두었으니, 죄는 죽여 마땅하지마는 그 정상은 측은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저절로 난다. 금년에, 이 때문에 중지하고, 명년에도 그대로 둔다면 죄진 사람이 모두 옥중의 귀신이 될 것이니,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 甲申. 孝廟以大君. 將由瀋入燕. 遣 上東還. 孝廟之未返國. 上每見日初出. 輒祝曰. 願令父母遄返. 令我得見, 時 上甫四歲.

갑신년에 효종이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에서 연경(燕京)으로 들어가면서 현종을 귀국하게 하였는데, 효종이 환국하기 전에 현종은, 해가 떠오를 때마다 축원하기를, “부모님이 빨리 돌아오셔서 내가 뵈올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이 때 현종은 나이 겨우 네 살이었다.

◎ 爲元孫時. 常出㝢閭閻. 鄰有高聲者. 侍者呵噤. 上止之曰. 人在其家. 安得無聲. 宜使之安. 不可使苦也. 又有進貢豹皮者品下. 仁祖將却之. 時 上在傍曰. 一豹之捕. 傷人必多. 仁祖嘉其意. 命勿却.

원손(元孫)이 되었을 때에 항상 여염집에 나가 있었는데, 이웃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자가 있어 시종하는 자가 쉬쉬하면서 금지시키면 현종이 말리며 말하기를, “사람이 제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안 낼 수 있느냐. 자유로 하게하고 괴롭히지 말라”고 하였다. 한 번은, 표범의 가죽을 바친 사람이 있었는데 품질이 좋지 못하여 인조가 물리치려 하였다. 이 때 현종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을 잡느라고 많은 사람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인조가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면서 <표범 가죽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였다.

◎ 幼時偶出閤門. 見一卒形羸墨. 問內竪. 對曰此病凍餒者也. 上爲惻然. 輒命賜之衣. 且續食.

어렸을 때에 합문(閤門) 밖으로 나갔다가, 한 군졸의 모양이 여위고 검은 것을 보고 내시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아뢰기를, “병들고 춥고 주린 사람입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가엾게 여겨서 옷을 주고 또 밥도 주게 하였다.

◎ 罰金之辱臺臣八竄

청국에 벌금을 바친 욕된 일과 대신(臺臣) 8명이 귀양간 일.

◎ 丁未春. 朝廷有罰金之辱. 時以義州逃窩事罰銀五千兩 臺議謂大臣委君父. 合啓請譴. 上震怒. 臺臣李䎘. 趙聖輔. 缺 李垕等八人. 幷遠竄.

정미년 봄에 조정에서〈청국에〉벌금을 바친 욕된 일이 있었는데, 사헌부의 의논이〈이 일에 있어서〉대신들이 그 죄를 임금에게 미루었다고 합계(合啓)하여〈대신들을〉견책(譴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사헌부의 이숙(李䎘) ․ 조성보(趙聖輔) ․ □ ․ 이후(李垕) 등 8명을 모두 멀리 귀양 보냈다.

◎ 丙午. 虜遣査使. 有所話責. 先是有安秋元者. 爲俘於淸國. 逃回數年. 還入彼中. 淸人以違失約條. 遣勅行査. 上欲自當曰. 不過罰金而已. 左相洪命夏曰. 主辱義當臣留. 何敢推諉於. 上身乎. 領相鄭太和. 與僚相共引過. 應之曰. 誤許其留. 未卽縛送. 罪在俺等. 虜使曰. 然則國王不之耶. 命夏答曰. 臣而證君. 猶子而證父. 禽獸所不爲. 虜使爲之色沮. 然竟論以極罪. 左右震慄. 而命夏略無怖色. 虜使相顧吐舌曰. 可謂難矣. 上反覆彌縫. 事以得已. 丁未. 虜中竟以罰金勘送. 盖從 上身之自當也. 鄭陽坡諡狀洪沂川墓碑合錄.

병오년에 청국에서 사핵사(査覈使)를 보내어 힐책한 일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안추원(安秋元)이란 자가 청국으로 포로가 되어 들어갔다가 도망해 돌아와서 수년 만에 다시 그 곳으로 들어가니, 청인들이〈그것이 두 나라 사이의〉약조(約條)를 어긴 일이라고 하면서 칙사를 보내어 사핵하였다. 임금이 〈그 책임을〉자기가 지려고 하면서, “벌금을 바치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하니, 좌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의리상 죽어야 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 일을 전하의 몸에 미루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동료 정승들과 함께 책임을 지고, 청국 사신에게 말하기를, “잘못하여 죄인을 받아 두고 곧 묶어 보내지 못하였으니 죄가 우리들에게 있소” 하였다. 청국 사신이, “그러면 국왕(國王)은 모르는가?”고 하였다. 명하가 답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증언(證言)하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증언하는 것이나 같은 것인데, 금수(禽獸)도 하지 않는 일이요” 하니, 청국 사신은 기가 질렸다. 그러나 마침내 극형(極刑)을 받을 죄라고 선언하니, 여러 사람들이 떨고 무서워하였으나 명하는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청국 사신이 서로 돌아보고 혀를 내 두르면서,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렇게 저렇게 얽어 맞추어서 무사하게 되었는데, 정미년에 청국에서 마침내 벌금으로 결정하여 보내니, 임금이 스스로 책임을 지어 이렇게 된 것이다.

◎ 時北使以邊民採蔘. 歸罪灣尹. 事將不測. 且責大臣使待罪舘所. 右相許積獨請對. 密勸 上自當. 於是 上指舘所. 北向叩頭. 終以罰金論. 聞者莫不駭憤. 於是兩司合辭擧劾. 而以獨論積. 爲有黨目之嫌.逐幷及三公. 上命竄諸諫臣. 李慶億以爲. 泛論則身爲大臣. 使 君父親當僇辱. 領左相亦不得逃其責. 第其兩相. 方待罪舘門外. 靡暇入對. 又不知密勸事. 獨右相可劾. 今乃幷論三公. 欲掩黨目之嫌者. 豈論事允當之體乎. 及是慶億以憲長. 連啓而去領左相只論積. 仍請還收諸諫臣疏. 竄去. 李相國慶億行狀

이 때 청국 사신이 와서 서북 지방의 백성들이〈만주(滿洲) 땅에 들어가서〉산 삼(蔘)을 캔 사실을 들어, 그 죄책을 의주부윤(義州府尹)에게 돌리니 사태가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었다. 또 대신들을 책하여 청국 사관(使舘)에 와서 대죄(待罪)하라고 하니, 우정승허적(許積)이 홀로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여 비밀히 임금 자신이 담당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임금이 사관으로 나가서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사죄하여〉마침내 벌금을 바치기로 되니,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이르러 사헌부 ․ 사간원에서는 의견을 보아 탄핵하였는데,〈임금을 권고한〉허 적만을 논하는 것은 당파싸움으로 지목받을 혐의가 있다 하여 3정승을 함께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간관(諫官)들을 귀양 보냈다. 이경억(李慶億)이 말하기를, “그 몸이 대신으로서 임금을 시켜 이러한 부끄럽고 욕됨을 당하게 하였으니, 영의정이나 좌의정도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정승은 지금 사관문 밖에서 대죄하고 있는 중이어서 임금께 들어가 뵈올 겨를이 없었으며 또 남몰래 가만히 권한 사실을 모르니, 우의정만을 탄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3정승을 같이 들어 말하여 당쟁지목의 혐의를 가리 우려 하니, 이것이 어찌〈대간으로서〉일을 논하는 정당한 체모라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이때에 경억이 대사헌으로서 연달아 아뢰었는데, 영의정 ․ 좌의정은 빼놓고 다만 허적만을 논하고 곧 여러 간신(諫臣)들의 상소에 대하여 귀양 보내라는 명을 회수하기를 청하였다.〔李相國慶億行狀〕

◎ 領府事李景奭. 再箚請還收略曰. 自 上雷威初震於李䎘等諸人. 再震於李垕者. 非出於私忿也. 盖出於爲三公也. 一紙而攻三公太激. 不亦過乎. 然而年少臺臣. 自以職在言地. 敢言無忌. 慷慨之極. 不顧目前之國事. 其腸則無他. 而竄逐之擧. 大非平日臣民. 方期於. 殿下者. 其他喉舌之臣. 造次之間. 惶惑不能善對. 初非出於欺罔. 拿鞫罷推之命. 非所以赦小過也.

영부사(領府事) 이경석이 다시 차자를 올려서〈여러 간신들을 귀양보내라는 명을〉회수하기를 청하였는데 대략,『전하의 벼락같은 위엄이, 처음에는 이숙에게 내리고, 두 번째는 이 후에게 내렸는데 사사분심〔私忿〕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대개 3정승을 위한 것이었습니다.〈그 사람들이〉한 장의 종이로 3정승을 공격한 것이 너무 격렬하였으니 역시 지나치셨습니다마는 나이 젊은 대신들이 자기의 직책이 언론을 하는 지위에 있다 하여 감히 거리낌 이 말하고, 강개(慷慨)함이 극도에 달하여 눈앞의 나라 일을 생각지 못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귀양 보내어 추방하는 것은 평일에 신민(臣民)들이 전하께 기대하던 바가 아닙니다. 그 밖에 승정원의 신하들도 갑자기 당한 일에 당황하여 잘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부터 속이려는 것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오니 잡아다 국문하고 파직 추고(推考)하라는 명을 내리심은, 작은 허물은 용서하라는 공자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 時臺議益激. 三公待罪. 上命景奭. 代察備局事務. 景奭箚辭曰. 今日廊廟空虛. 自 上正宜求安其心. 而召還之. 其道匪他 只在特還八竄之臣. 以止臺啓之紛紜. 孝耄如臣. 忽然代斲. 決知不可. 後又請對. 復陳諸竄事. 辭甚縷縷. 閏四月. 因旱陳箚. 請大加欽恤. 仍曰.古者一孤臣痛哭. 五月飛霜今官以諫臣爲名. 而竄謫者幾人. 泣血追愆. 雖不敢怨天. 如有老親者. 則其愁菀之情如何云云.

이 때 대사관들의 논란이 더욱 격렬하고 3정승이 대죄(待罪)하므로, 임금이 이경석에 명하여 비국(備局)의 사무를 대신 살피게 하였더니, 경석이 차자를 올려 사양하기를,『지금 의정부(議政府)가 비어 있으니 전하께서 마땅히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불러 들여야 할 것이온데, 그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8명의 귀양 간 사람들을 특명으로 돌아오게 하여 대계(臺啓)의 시끄러운 것을 그치게 하는 일입니다. 신(臣)같이 늙어서 노망한 것이 갑자기 대신〔代〕일을 본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인 줄로 아옵니다.』하였다. 후에 또 뵙기를 청하여 다시 여러 귀양 간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 여러 번 말하였다. 윤 4월에는 한재(旱災)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서 특별히 죄인들을 구제하여 주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옛날에 한 의로운 신하가 통곡하여도 5월에 서릿발이 날렸다고 합니다. 지금 간신(諫臣)으로서 귀양 가있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그들은〉피눈물로 과실을 회개하면서 감히 하늘〔임금〕을 원망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일 집에 늙은 부모가 있다면 그 근심스럽고 답답한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 甲寅乙卯時事 禮訟爲大黜陟之本.

갑인년과 을묘년 사이의 시사(時事) 예송(禮訟)이 대출척(大黜陟)의 장본이 되다.

○ 甲寅顯廟初喪. 院相達曰. 領中樞府事宋時烈. 旣已上來. 在前國恤. 原任大臣中有德望者. 同爲院相. 旣有前例. 今亦依此爲之. 遺史官傳諭. 時烈以爲. 負犯至重. 仙寢未冷. 何忍遽以無罪處云云. 成服後卽出廣州. 轉向水原. 上又命撰進誌文. 時烈上疏略曰. 臣負罔赦之罪. 待命於 先朝. 冀與諸臣. 同被謫罰矣. 今日月幾何. 而遽自異於疇昔. 則是謂 先王已爲無能也.

갑인년 현종(顯宗) 초상(初喪)에 원상(院相)이 아뢰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이 올라와 있습니다. 전부터 국상(國喪)에는 원임대신(原任大臣)중에 덕망 있는 사람이 함께 원상이 되는 것이 전례이니 지금도 이에 따라 하소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송시열에게>전유(傳諭)하였다. 이때에 시열은, “죄를 지은 것이 지극히 무거운데, 승하하신 옥체(玉體)가 미처 식기도 전에 어찌 차마 갑자기 죄가 없는 것처럼 자처하오리까.”하고, 성복(成服) 후에 곧 그는 광주(廣州)에 갔다가 수원(水原)으로 가버렸다. 숙종이 또 묘지문(墓誌文)을 지으라고 명하니, 시열이 상소를 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臣)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으므로 선조(先朝)의 처분을 기다려 〈복제설(服制說)>로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같이 벌받기를 바랐을 뿐이었는데, 지금 세월이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전일과 다르게 처신한다면 이것은 선왕이 벌써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무능(無能)은 예경(禮經)에 나오는 말인데, 부모가 돌아가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뜻이다.

○ 臣雖無狀. 何忍爲此. 曩日諸臣之得罪. 其原皆出於臣. 故 先王之罪諸臣. 臣之罪狀. 累出於傳敎. 特不擧姓名而已. 今諸臣竄謫之外. 在囚未勘者尙多. 彼諸臣者. 是罪之枝葉. 臣是罪之根本也. 今臣謂 先王不復根治. 而便自謂無罪. 是亦不負. 先王而無忌憚者乎.

신이 비록 대중이 없으나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오리까. 전일에 여러 신하들이 죄를 얻은 것은 그 근원이 모두 신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현종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죄를 줄때에 바로 신의 죄상이 여러 번 전교에 나왔었는데, 다만 성명(姓名)을 들지 아니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귀양간 이외에 아직까지 미결수(未決囚)로 있는 이가 많은데, 그들은 실상 죄의 지엽(枝葉)이요, 신은 죄의 근본이나. 지금 신이 선왕께서 다시는 죄의 근원을 다스리지 않으리라고 해서 곧 죄가 없다고 자처하면 이것은 기탄(忌憚)없이 선왕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 乙卯正月, 合啓略曰. 自古遺逸之士. 進不隱賢. 退期靜專而已. 舍此二箇道理. 假借山林之名. 把握朝廷之權. 前史之所未有也. 宋時烈與古判書宋浚吉. 前叅判李惟泰. 專務樹黨. 布置卵育. 汲引同色. 不遺奸壬. 排擯異己. 若擊私讎. 銓衡進退. 皆禀命令. 臺閣彈論. 盡出指揮. 去年啓隧時. 石物之缺欠. 退壙之水患. 時烈目覩. 而遷陵之擧. 夫豈. 先王之得已而不己哉. 而當初賛用此地者. 乃其所自爲. 故移陵之後. 敢以碎骨等語. 肆然譏嘲. 盛言不爲改封築之失. 安厝. 先王體魄. 是何等大事. 而故爲務勝. 略不顧忌. 人臣分義. 果如是乎. 淸州人池應三父子之變. 世所未聞. 儒生施罰. 胡大罪也. 而憤其立異. 頤指道臣. 酷刑諸儒. 平生負犯. 固難殫擧. 而悖常亂倫. 至於敎閔愼廢父而極矣. 鳴呼已亥之事. 尙忍言哉云云. 浚吉惟泰獻議. 依樣宋時烈之葫蘆. 雄唱雌和. 間有忠國之論. 目之以兇邪. 尹善道言雖峻激. 若其宗嫡統之論. 可質百世. 而受宋之旨者. 遽請殺之. 其子仁美. 抱才登第. 而父子終於廢錮而死. 嶺南多士呌閽卞禮. 則又請重法繩之云云. 請宋時烈極邊遠竄. 宋浚吉追削官職. 李惟泰削奪門黜. 答曰. 宋時烈當初雖有乖亂之罪. 今已釐正之後. 則削黜之罪. 亦足懲矣. 況宋浚吉李惟泰. 不過隨叅於其間而已. 有何追削之理乎.

을묘년 정월에 양사에서 합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옛날부터 유일(遺逸)의 선비가 나와서 벼슬할 때는 그의 능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물러가면 조용히 수양할 것을 생각할 뿐인데, 이 두 개의 도리를 버리고 산림학자(山林學者)의 이름을 가장하여 조정의 권세를 장악하는 것은 전사(前史)에 없는 일입니다. 송시열이 전에 판서 송준길과 전 참판 이유태(李惟泰)와 같이 오로지 당(黨)을 수립하는데 힘쓰고, 이것을 배치하고 길러 내어 급급히 동색(同色)만을 끌어들이면서 간사한 소인을 빠뜨리지 않았고, 자기와 당파가 다른 사람을 원수와 같이 배척하고, 이조(吏曹)에서 인물을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이 모두 그의 명령을 받아야 하였으며, 대각의 탄핵도 모두 그의 지휘에서 나왔습니다. 거년에 능(陵)을 이장하려고 파보니 석물(石物)의 결흠(缺欠)과 퇴광(退壙)(파낸 묘혈(墓穴)) 안의 수환(水患)은 시열도 목도(目睹)하였으니, 능(陵)을 옮기는 일은 선왕이 마지못하여 한 것입니다. 당초에 시열이 이 땅을 좋다고 찬양하였으므로 능을 옮긴 뒤에 그는, “해골을 부수었다”는 등의 말로 함부로 기롱하고, 또 새로 봉축(封築)을 고쳐 하지 않았다는 실수를 들어 떠들고 있으니, 선왕의 체백(體魄)을 안장(安葬)하는 것이 이 이상 더 큰일이 없는데도 시열은 공연히 남에게 이길려고 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었으니, 신하 된 자의 분의(分義)가 과연 이렇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청주(淸州) 사람 지응삼(池應三) 부자(父子)의 변(變)은 세상에서 듣지 못한 일인데, 유생들이 응삼에게 벌을 준 것이 무슨 큰 죄이기에 시열이 자기와 의논이 다르다고 분하게 여겨 감사를 시켜 모든 유생에게 혹형(酷刑)을 주었습니다. 그의 평생에 죄를 범한 것은 다 들어서 말하기 어려우나 그 중에서도 강상(綱常)에 어긋난 것은, 민신(閔愼)으로 하여금 폐부(癈父)하도록 한 것이 가장 심한 일입니다. 아아, 기해년 일은 차마 다 말 못하겠습니다. 송준길ㆍ이유태가 獻議한 것은 송시열을 그대로 본떠서 수컷을 부르고 암컷은 화답하여, 간혹 나라에 충성하는 의논이 있으면 흉사(凶邪)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윤선도(尹善道)의 말이 비록 과격하였으나, 그 종통(宗統)ㆍ적통(嫡統)의 의논은 가히 백세(百世) 뒤에 물어도 옳다 할 것인데, 송시열의 뜻을 받은 이는 그(윤선도)를 죽이기를 청하고, <선도의> 아들 인미(仁美)는 재주가 있어 급제한 사람인데 부자(父子)가 다 폐고되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소를 올려 예설(禮設)를 논란하니 또 중한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하였습니다. 청컨대, 송시열은 극변(極邊)에 멀리, 유배시키고, 송준길은 관직을 추삭(追削)하고, 이유태는 관직을 삭탈하여 성문 밖으로 내치소서.』하니, 답하기를, “송시열이 당초에 비록 예를 그르친 죄가 있었으나 지금 이미 바르게 한 뒤이니, 삭탈ㆍ관직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하는 것이 역시 징계로서 족한 것이다. 하물며 송준길ㆍ이 태는 그 틈에 끼어 참가한 것에 불과할 뿐이니 무슨 추삭(追削)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 懷德生員. 庶孽 宋尙敏疏略曰. 不擧禮論. 不可以訟寃. 不白師寃. 不可以爲人. 草疏一通. 具事本末. 屢欲寫進. 而同門之士. 恐觸駭機. 掣肘之言. 四至. 近聞殿下使論思之臣. 解釋尹善道禮說. 論思之臣. 讓于文衡. 豈 殿下深信善道搆陷之語. 而欲得其詳也耶. 善道禮說. 無非搆陷. 而其中太甚者. 有立孫之語. 實出於告變. 今日廷臣. 皆善道之黨. 若又因是搆陷. 則 殿下之惑必益深. 時烈之禍將不救. 卞破善道之說. 莫詳於臣疏. 以草本繕寫成冊者. 隨疏投進. 此盖朱子故事. 而已成近歲前例也. 去年朴晦章上疏. 喉司不爲捧入. 而撰出虛言. 激惱. 聖聰. 終使 殿下. 不知所言何事. 而晦章空被投北之罪. 安知今日賤臣. 不如去年晦章哉. 冊中禮說略在朝野記聞.

회덕(懷德) 생원(서얼 : 庶孼) 송상민(宋尙敏)이 올린 소의 대략에, 『예론(禮論)을 밝히지 아니하면 원통한 것을 하소연 할 수 없고, 스승 <송시열>의 원통함을 밝히지 아니하면 사람이라 할 수 없으므로 소 한 통을 초(草)하여 사건의 본말(本末)을 모두 진술해 놓고, 여러 번 올릴 생각을 가졌었는데, 동문(同門) 선비들이 무서운 화단(禍端)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것을 올리지 못하게 만류하는 말들이 사방에서 들어오기에 올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전하가 옥당(玉堂)의 신하들을 시켜 윤선도가 지은 예설(禮設)을 해석하게 하여 옥당의 신하들이 대제학(大提學)에게 이 일을 사양하였다고 하니, 혹시 전하께서는 윤선도가 <송시열>을 모함하는 말을 깊이 믿어서 그 상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신 것입니까. 윤선도의 예설은 모함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것은 <송시열이> 손자<소현세자의 아들>를 <임금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말은 실로 고변(告變)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는 모두 선도의 무리들인데, 만약에 이것으로 인하여 또 모함하게 되면 전하의 의혹은 반드시 더욱 심해질 것이요, 시열의 화는 앞으로 구(救)할 길이 없습니다. 윤선도의 예설을 파헤쳐 놓은 것은 신의 소(疏)만치 상세한 것이 없으므로 초본(草本)을 베껴서 책자를 만든 것을 가지고 소와 함께 올리오니, 이것은 대개 주자(朱子)가 하던 일이며, 이미 근세에 전례도 있습니다. 지난해에 박회장(朴晦章)이 소를 올렸는데, 승정원에서 이것을 받아 올리지 아니하고 헛말을 지어 내어 전하를 격동시켜 화내게 하여 결국 전하로 하여금 소에서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박회장만 귀향 가는 죄를 입었으니, 오늘날 천신(賤臣)이 어찌 지난해에 박회장과·· 같이 되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하였다. 책자 중에 예설은 대략 조야기문(朝野記聞)에 있다.

○ 傳曰. 噫自夫典禮已定. 大憝迸黜之後. 時烈血黨. 攘臂忿恚. 益肆其怨毒. 無一毫悛改之心. 徒知有時烈. 不知有君父之義. 而造言興謗. 日加月增. 靡所不至. 予嘗痛惡矣. 今者么麽尙敏. 奸回之輩. 投進疏冊. 下以語及. 先王. 下以誣陷朝廷. 語意極其凶險. 其他悖倫之說. 雖不可一一卞破. 其中禮止於朞. 而服之以三年. 則不亦違於禮乎. 又曰 孝廟非長子. 而服之以長子. 則不亦不誠信乎爲言. 此豈人臣之所敢言. 而其無君無父之徒. 唱和於前後. 予之痛惋. 曷有其極. 疏中所謂孤立於上. 無與昭奸. 彼輩充滿於下. 惟知誣善等語. 亦必有指嗾者. 如此負國死黨之罪. 不可不嚴加痛斥. 以正國法. 卽爲鞫問. 不可不嚴加痛斥七字删之. 當以逆律論斷事改下.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아, 전례(典禮)가 이미 정해지고 큰 악인을 물리친 뒤에도 시열의 혈당(血黨)은 팔을 휘두르고 분노하여 더욱 더 원독(怨毒)을 뿜고 일호(一毫)도 개전(改悛)할 마음이 없다. 이들은 다만 시열이 있는 줄만 알지 임금에 대한 분의(分義)가 있는 줄을 모르고, 말을 조작하고 비방을 일삼아 날마다 보태고 달마다 보태어 이르지 아니하는 데가 없으니 내가 몹시 미워한다. 지금 조그마한 상민(尙敏)같은 간사한 무리가 소와 책을 올려서 위로는 말이 선왕에게 미치고 아래로는 조정을 무함하여 말뜻이 극히 흉험하니, 이 이외 패륜(悖倫)한 말은 비록 일일이 모두 변파(辨破)할 수는 없으나 그 중에, 「예(禮)가 기년복에 그칠 것인데, 3년 복을 입으면 또한 예에 어긋나지 아니하는가」하였고, 또 「효종이 장자(長子)가 아닌데 장자의 복을 입게 되면 또한 성신(誠信)하지 못한 것이 아니가」고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남의 신하로서 감히 할 말인가.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무리들이 앞뒤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고 하니, 나의 통분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소 가운데, 「<임금이> 외로이 위에 서서 누구와 더불어 간악한 것을 밝힐 자가 없고 저 무리들이 아래에 가득차서 오직 착한 이를 무함할 줄만 안다」고 하는 등의 말은 또한 반드시 사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를 저버리고 제 당에 목숨을 바치는 자의 죄는 불가불 엄하게 다스려서 국법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곧 국문하라”고 하였다.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란 구절을 빼고 다시 「마땅히 역률(逆律)로 논하여 처단하라」는 말로서 고쳐 내리었다.

○ 奏請卞 仁祖之誣.

인조(仁祖)에 대한 변무(卞誣)를 주청(奏請)하다.

○ 丙辰正月. 福善君柟所啓. 仁祖反正. 明史中記事爽實. 至有臣子不忍見不忍言者. 故臣等於. 先朝. 陳疏以達. 先王至有心驚骨寒之敎. 故仍命二品以上. 會議卞誣事. 而其後不幸連遭國恤. 至今遷延云云. 上命賓廳會議. 禮判閔熙. 戶判吳挺緯. 大憲閔點. 大司成洪宇遠. 護軍申汝哲. 禮叅鄭晳以爲. 談者或以事異往昔. 不必卞明爲言. 此恐不深思也. 元朝所成之宋史. 後人不廢看. 則今目燕京所修明史. 安保其不傳信於後代. 而任其訛誤. 不汲汲於卞白乎. 工判柳赫然. 副學李夏鎭. 執義柳命賢. 獻納李壽慶. 正言李華鎭議. 卞誣之擧. 斷不可已. 校理柳夏 缺 柳命天. 金德遠. 姜碩賓議. 臣等伏見兩朝從信錄. 通紀請書. 其指斥. 聖祖. 勒加不忍聞之說. 誠爲臣子腐心痛骨者也. 彼旣修史. 宜布中外. 則他日修史者. 亦安知不爲取信於此乎云云. 右叅贊張善徵議. 第念當初因表可立題本體兵兩部奉旨計議. 委遣登撫遊擊李惟棟. 毛鎭. 中軍陳繼盛等. 來我査訪文武陪臣. 李光庭. 李守一等合七百二十餘員呈文. 先陳光海斁滅人倫. 見絶于天. 次陳 仁祖扶植民彛. 迓續天命等節. 明白痛陳. 惟棟等取回具奏. 則閣部詳覆內. 臣民推戴. 已經一歲. 迄無異言. 人心所在. 卽天命收歸云云. 厥後表可立奏本. 廢君自絶于天. 昭敬王孫. 聰明仁孝. 宜爲嗣君云. 前日謾見. 直已較然矣. 玆以甲子請完封典奏文有曰. 前後事實. 悉經閣部詳覈. 因蒙皇上鑑納. 流言屛息. 封勅誕頒云爾. 則被誣之卞. 不可謂不爲. 未知國史所載之如何. 而莫重莫大之擧. 遽以一時野史詿謬之傳. 認爲不刊之書. 而有所陳卞. 愚臣淺見. 恐非得宜. 刑叅閔蓍重. 副護軍李弘淵議. 前頭使行. 求得明史之出於史局. 明知其傳後之國乘. 然後熟講處之. 似合事宜. 戶叅金壽弘議. 廢其昏虐. 首出母因囚. 斬伐奸黨. 宗社再安. 中間誣妄. 何用卞爲.

병진년 정월에 복선군(福善君) 남(柟)이 아뢴 말에, “명나라 역사 가운데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기사(記事)가 사실과 틀려서 신자(臣子)로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역적이란 것)까지 있기 때문에 신들이 선조(先朝) 때에 글을 올려 아뢰니, 선왕(先王)께서, ‘마음이 놀라고 몸이 떨린다.’는 전교까지 있어서 이 때문에 이품(二品) 이상에게 변무(卞誣)할 일로 회의하기를 명하였었는데, 그 뒤에 불행히 연달아 국상(國喪)을 만나서 지금까지 지연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빈청에서 회의하기를 명하니, 예조판서 민희 ․ 호조판서 오정위 ․ 대사헌 민점 ․ 대사성 홍우원 ․ 호군 신여철 ․ 예조참판 정석 등이 아뢰기를, “<어떤> 자는 일이 옛날과 다르니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하나, 이것은 아마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원(元)나라에서 편찬하는 송사(宋史)를 후세 사람들이 안보지 않으니, 오늘날 북경(北京)에서 편찬하는 명사(明史)가 어찌 후세에 전신(傳信)되지 않을 것을 보증하고, 그 그릇된 것을 내버려 두고 번명해 밝히기를 서둘지 않겠습니까.”하고, 공판서 유혁연 ․ 부제학 이하진 ․ 집의 유명헌 ․ 헌납 이수경 ․ 정언 이화진 등의 논의는, “변무하는 일은 단정코 그만 둘 수 없습니다.”하고, 교리 유하□(柳夏□) ․ 유명천 ․ 김덕원(金德遠) ․ 강석빈(姜碩賓) 등의 논의는, “신 등이「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과「통기(通紀)」등 여러 책을 보니, 거기에는 성조(聖朝 - 인조)를 지척(指斥)하고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덮어 씌웠으니 신자로서 마음이 상하고 뼈가 아픈 일입니다. 저들이 역사를 편찬해서 중외에 선포하면 다른 날 역사 편찬하는 이도 어찌 취신하지 않을는지 알 수 있습니까.”하였고, 우참찬 장선징(張善徵)의 논의는, “생각건대 당초에〈명나라〉표가립(表可立)의 제본(題本)으로 인하여 예부(禮部)와 병부(兵部)에서 황제(皇帝)의 명을 받아 의논하고 등무유격(登撫遊擊) 이유동(李惟桐) ․ 모문룡의 중군(中軍) 진계성(陳繼盛) 등을 파견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문무배신(文武陪臣)에게 조사해 물으므로 이광정(李光庭) ․ 이수일(李守一) 등 도합 7백2십여 명이 정문(呈文)하여 먼저「광해(光海)가 인륜(人倫)을 무너뜨려 하늘에게 버림을 당한 것」을 진술하고, 다음에는 인조께서 인륜을 붙들어 세워〈끊어졌던〉천명(天命)을 다시 이은 사실을 명백하게 진술하였더니, 유동(維棟) 등이 받아가지고 돌아가서 가주어 아뢰어 각부(閣部)에서〈황제에게〉상복(詳覆)한 내용에,「신민(臣民)이 추대(推戴)하여 벌써 한 해가 지나도록 지금까지 다른 말썽이 없었으니 인심이 따르는 곳에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바입니다」하였고, 그 뒤에 표가립의 주본(奏本)에,「폐군(廢君)이 스스로 하늘에 버림을 당하였고, 소경왕(昭敬王 - 선조)의 손자(인조)는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하니 임금의 위를 이음이 마땅하다」하였으니, 전일의 그릇된 것이 그 때에 이미 바르게 해명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갑자(甲子)년에〈국왕(國王)으로〉책봉하는 예전(禮典)을 완성(完成)하여 달라고 청한 주문(奏文)에,「전후 사실을 모두 각부의 자세한 심사를 거쳐서 황제께서 밝게 살피시어 유언(流言)이 그쳐지고 봉칙(封勅)을 반포(頒布)한다」고 한 구절이 있으니, 변무(辨誣)을 아니 하였다고 할 수 없는데, 국사(國史)에 어떻게 기재된 것을 알지 못하고 막중막대(莫重莫大)한 일을 갑자기 한 때의 야사(野史)에 그릇되게 전(傳)한 것을 가지고 영원히 변치 못할 글이라 인정하고 변무를 한다는 것은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하고, 형조참판 민시중(閔蓍重) ․ 부호군(副護軍) ․ 이홍연(李弘淵) 등의 논의는, “앞으로 사신 갈 때에 사국(史局)에서 나온 명사(明史)를 구(求)해서 보고, 그것이 후세에 전할 국사인가를 밝게 안 뒤에 자세히 강구하여 처리하는 것이 일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호조참판 김수홍(金壽弘)의 논의는, “어둡고 포학한 임금을 폐하고, 맨 먼저 같히었던 모후(母后)를 내어놓고 간당(奸黨)을 베어서 종사가 다시 편하였으니, 중간에 망녕된 무함(誣陷)은 변명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하였다.

○ 領相許積啓. 仁祖明彛倫於旣晦. 扶國祚於將終. 盛德偉烈. 可以侔天地並日月. 所謂質之鬼神而無疑者也. 毛文龍搆誣之言. 無所不至. 致令傳瀋中朝. 竟刊於史策. 令之言者. 或以事異曩時. 不必卞明. 或以爲明史. 不必無國史. 亦不必陳卞. 臣之愚意. 則有不然者. 元脫脫所之宋史. 旣爲傳後之信史. 則亦安知今日所脩之明史. 獨不得留傳於天下後世. 況皇明通紀從信錄等書. 亦不可謂非國史也. 臣於向日. 與吏判尹鑴. 備陳不可不汲汲卞誣之意於前席. 今無容別議. 領中樞鄭致和. 右議政許穆之箚. 雖有詳畧之不同. 其大意與臣無異云云.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인조께서 이미 어두워졌던 인물을 다시 밝혔고, 장차 끊어지려는 국운(國運)을 다시 붙들었으니 거룩한 덕과 크신 공은 가히 천지와 짝이 되고 일월과 같으니〈옛글에 이른 바〉귀신에게 대질하여도 의심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모문룡이 날조하여 무함한 말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어서 중국 조정에 전파되어 마침내 사책(史策)에 간행(刊行)하게 되었는데 지금 말하는 이가 혹은,「일이 전과 다르니 반드시 변명할 필요가 없다」하고, 혹은 말하기를,「〈청나라에서 지은〉명사(明史)는 반드시 후세에 전할 국사(國史)가 되지 않을 것이니 꼭 변명할 것은 없다」하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나라 탈탈(脫脫)이 편찬한 송사(宋史)가 이미 후세에 전하는 신사(信使)로 되었으니, 오늘날〈청나라에서〉편찬하는「명사」만이 천하와 후세에 전하지 못한다고 어찌 알겠습니까. 하물며,「황명통기(皇明通記)」․「종신록(從信錄)」 등의 책도 국사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전일에 이조판서 윤휴와 같이 급하게 변무(卞誣)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어전에서 갖추어 아뢰었는데, 이제 또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중추부사 정치화와 우의정 허목의 차자에도 비록 자세하고 간략한 것은 다르나 그 대의(大意)는 신과 다름이 없습니다.”.....하였다.

○ 傳曰. 今觀收議. 請臣皆以卞誣爲可. 而左叅贊張善徵. 以休戚之臣. 乃曰一時野史之詿誤. 至有陳卞之擧. 甚非得宜. 鳴呼我 聖祖功烈. 卽大聖人大德盛擧. 而予觀皇明紀略. 以不忍聞不忍見之說. 勒加書於史冊. 予之至痛在心. 尙未消雪. 張善徵乃敢以卞誣爲未安. 此豈人臣敢發口者乎. 事極痛惋. 左叅贊張善徵. 姑先從重推考. 今番謝恩之行. 兼陳奏卞誣使. 極力質正. 少雪罔極之痛.

전교하기를, “이제 수의(收議)를 보니, 제신(諸臣) 등은 모두 변무(辨誣)함이 가하다 하는데, 좌참찬 장선징은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 하는 신하로서 이에 말하기를, ‘한 때 야사의 그릇 전한 것을 가지고 변명하기에 힘쓰는 일은 매우 마땅하지 아니하다’하니, 아아, 우리 성조(聖祖 - 인조)의 공렬(功烈)은 곧 대성인(大聖人)의 큰 덕이요, 장한 거조(擧措)인데 내가 「황명기략(皇明紀略)을 보니,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써 덮어씌워서 사책(史冊)에다 썼으니 나의 마음속에 지극히 원통함이 있어도 아직 씻지 못하였는데, 장선징은 이에「변무(卞誣)」가 옳지 못하다 하니, 이것이 어찌 감히 인신(人臣)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일이 극히 통분하다. 좌참찬 장선징을 먼저 중하게 추고(推考)하고, 금번 사은(謝恩)하는 사신을 보내는 길에 진주변무사(陳奏卞誣使)를 겸하여 보내어 힘을 다해서 바로 잡아 망극(罔極)한 원통을 조금 씻게 하라” 하였다.

○ 進賀兼謝恩使花昌君沇. 陳奏兼卞誣使福善君柟. 副使鄭晳. 書狀李瑞雨.

진하사(進賀使) 겸 사은사(謝恩使)에는 화창군(花昌君) 윤 ․ 진주사(陳奏使) 겸 변무사(卞誣使)에는 복선군(福善君) 남(柟) ․ 부사(副使)에는 정석(鄭晳) ․ 서장관(書狀官)에는 이서우(李瑞雨)였었다.

○ 戊午三月. 工判尹鑴疏略. 窃聞卞誣使行日將迫. 臣不勝憂懣之私. 國家之事. 必度於名義而叅於利害. 臣不識此擧. 出於何名而益於何事也. 今天厭穢德. 海內擾攘. 彼實有朝夕岌岌之勢. 爲我之道. 正當明我政刑. 修我民事. 以期除凶去穢. 振未攄之憤. 酒 祖宗之恥. 今乃區區乞憐於垂亡之醜虜. 以爲卞誣除恥之圖. 臣窃爲今之用事者恥. 夷狄一禽獸耳. 得其善言不足喜. 惡言不足怒. 當其修史之日. 不可不一言以明其事實. 以告天下之視聽耳. 今旣言之. 而彼不肯從. 亦可已矣. 烏可再也. 假令彼快從我言. 許我改正. 則臣實恐天下後世. 謂我交結戎虜. 納賂行貨. 變亂事實. 以成其私也. 臣前疏所謂濯錦以油. 畵蛇着足者. 亦慮是也旣知其無益. 而又復勞我使价. 辱我辭命. 浚民膏血. 竭國皮幣. 以投餓虎之喙. 臣不知此廟筭也.

무오년 3월에 공조판서 윤휴가 상소한 대략에, 『듣자오니 변무사 가는 날에 임박하였으니, 신은 근심하고 민망한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국가의 일은 반드시 명분과 의리〔名義〕를 생각하고 이해(利害)를 참작해야 할 것인데, 이 일은 무슨 명분에서 나왔으며 어떤 일에 유익하겠습니까. 하늘이〈오랑캐의〉더러움을 싫어해서(청나라가 망할 것이란 말) 국내가 소란하여 저들이 실로 금시에 위태한 형세에 있으니 우리의 할 도리는 마땅히 우리의 정형(政刑)을 밝히고 우리 민생(民生)의 일에 힘써서 흉하고 더러운〈오랑캐를〉없애버리고 풀지 못한 분함을 떨쳐서 조종(祖宗)의 수치를 씻어 버리기를 도모하여야 할 것 이온데, 이제 구구하게 망하여 가는 추한 오랑캐에게 애걸하여 변무하려 하니, 신은 오늘날의 당국자(當國者)를 위하여 부끄러워합니다. 오랑캐는 금수(禽獸)와 같으니 그 좋은 말을 들어도 그렇게 기쁠 것이 없고 나쁜 말이라도 그렇게 성낼 것이 못됩니다. 그들이 역사를 편찬하는 날이라면 한 말로써 그 사실을 밝히고 천하의 보고 듣는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으나, 지금 이미 말했듯이 저들이 즐겨 듣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도 좋은데 어찌 두 번이나 할 짓입니까. 가령 저들이 우리의 말에 쾌하게 응종해서 바르게 고치기를 허락한다 할지라도 천하 후세에서 우리를,「오랑캐와 결탁해서 뇌물을 써서 사실을 변조(變造)하였다」고 할 것을 신은 두려워합니다. 신의 전번 상소에 아뢴 바,「비단을 기름으로 빨고 뱀 그림에 발을 붙인다」한 것도 역시 이를 염려한 것입니다. 이미 그 무익(無益)함을 알면서 또 다시 우리 사신을 수고롭게 하고 우리의 말을 욕되게 하여 백성의 피를 짜고 나라의 재물을 말리어서 주린 범의 입에 넣어 주려고 하니, 신은 이것이 무슨 묘당(廟堂)이 계책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 己未三月. 冬至兼卞誣使福平君㮒. 閔黯. 金海一. 別單略. 禮部書吏吳姓人言曰. 史記雖用萬金. 固不可得. 回咨文字. 明白卞破. 與頒示史記. 實無異同云云. 行中持來戶曹丁銀一萬兩. 所用七千六百兩. 而所幹之事. 不盡如意云云.

기미년 3월에 동지사 겸 변무사 복평군(福平君) 연 ․ 민암 ․ 김해일 등의 별단(別單 - 별도로 올린 글)의 대략에,『〈청나라〉예부서리(禮部書吏) 오(吳)라는 사람이 말하기를,「사기(史記)는 비록 만금(萬金)을 써도 얻어낼 수 없고, 회자(回咨 - 예부(禮部)의 회답) 문자에 명백하게 변파(辨破)되면 사기를 반포한 것과 다름이 없다」하였습니다. 가져간 호조 정은(戶曹丁銀) 1만 냥은, 그 쓴 것이 7천 6백 냥이고, 용무는 모두 뜻대로 되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 尤菴宋夫子 ․ 眉叟許夫子, 東方儒賢也, 竊有禮訟一節, 余恐伏惟, 禮, 天地之節文, 人事之規矩也. 一絲加之而未得, 一毫減之而亦未得, 而自然備具於天理之中, 亦自然備具於人事之中. 故天不言而日月星宿, 不失其道, 地不言而山海河嶽, 流峙不紊, 是宜天地之節文也. 乃聖人, 則之制禮於人事規矩之中矣. 是以, 禮之得失, 恐未可以訟辨矣. 吾夫子, 嘗曰聽訟, 吾猶人, 必也 事無訟乎, 凡他民情得失, 治政者, 必也無訟, 可也而矧惟喪禮乎. 至若吾夫子, 乃以天縱之將聖, 問禮於老子, 卽其不及於老子而問之乎? 禮有正禮, 變禮故或有可疑之禮, 疑可以問, 不必區區爲訟也. 亦在乎一國大賢之地, 以禮訟之則其爲政之得失, 從可認也. 今夫禮, 以哀爲本, 苟失其本則禮雖得中, 禮居虛位, 如非分黨好勝之氣, 間於天性粹然之中, 烏能如是乎? 吾夫子, 嘗曰三年之喪, 自天子遠於庶人, 亦無貴賤之殊, 竊恐自天子, 達於庶人, 不幸有宗子宗孫之喪則服三年, 是宜一定不辨之禮也. 旣服宗子而宗子無嗣, 衆孫中, 亦有立承宗祀, 不幸而死則服三年, 其他衆孫, 雖有十喪, 不服三年, 亦可無疑耳. 竊恐生於數百載之下, 學未及古人, 未有地而先儒氏之所疑禮, 安敢質疑乎. 後之君子, 學儒學而超出於東西南北之外, 不拘偏比, 立言於至公之地則雖在身後, 吾亦悅服矣.

우암(尤菴) 송선생과 미수(眉叟) 허선생은 우리나라의 유현(儒賢)이시다. 예송(禮訟)에 관한 것이 있는데, 나는 감히 생각한다. 예(禮)라는 것은 천지의 절문(節文)이고 인사(人事)의 잣대이다. 실오라기 하나 만큼을 더한다 해도 옳지 못하고 터럭 하나 만큼을 뺀다 해도 또한 옳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천리에 갖추어진 것이며 도한 자연스럽게 인사에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말을 하지 않지만 해와 달과 별자리들이 그 법도를 잃지 않으며, 땅은 말을 하지 않지만 산과 바다와 강과 언덕들의 흐르고 솟음이 어지럽지 않으니, 이것이 천지의 절문(節文)이다. 이에 성인께서 그것을 본받아 인사의 잣대로 예를 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의 득실은 논쟁으로 분별을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우리 공부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소송을 듣는 것은 나도 남과 같으나 반드시 하고자 하는 것은 소송이 없도록 하는 것일진저.”하셨다. 그 이외 민정(民情)의 득실도 정치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소송이 없게 사는 것이 가하거늘 하물며 상례(喪禮)에 있어서이겠는가? 우리 공부자께서는 바로 하늘이 내신 성인이면서도 노자(老子)에게 예(禮)에 대해 물어보신 경우가 있는데, 어찌 노자에게 미치지 못하여 물어보신 것이겠는가! 예(禮)에는 정례(正禮)가 있고 변례(變禮)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혹 의심스러울만한 예(禮)가 있으니 의심이 나면 물어보는 것이요, 반드시 구구하게 소송을 할 필요는 없다. 또한 한 나라의 대현(大賢)의 지위에 있으면서 예(禮)로서 소송을 한다면 그 정치의 득실을 이로 인해 알 수 있다. 이제 무릇 예(禮)라는 것은 슬픔을 근본으로 삼는데, 진실로 그 근본을 잃게 된다면 예(禮)가 비록 중도에 맞는다 해도 헛된 지위에 있게 된다. 붕당을 나누어 이기고자 하는 기운이 순수한 천성(天性)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삼년상은 천자로부터 서민들에 이르며, 또한 귀하고 천한 구별이 없다.”고 하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천자로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불행히 적통을 이은 맏아들이나 종가의 혈통이 상을 당하면 삼년동안 상복을 입으니, 이는 고정불변의 예법이다. 이미 맏아들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면 여러 후손 중에서 세워 종사(宗祀)를 잇게 하고, (그마저도) 불행히 죽게 되면 삼년동안 상복을 입는다. 그 외의 여러 후손들은 비록 열 번 상을 당한다해도 삼년동안 상복을 입지 않으니, 또한 의심스러운 점이 없을 것이다. 수백 년 뒤에 태어나 학문이 옛 것에 미치지 못하고 사람들도 그 땅에 있지 않은데, 선유들이 의심한 예법을 어찌 감히 의심스럽다고 물을 수 있겠는가! 후대의 군자로 유학을 배워 동서남북의 무리들보다 빼어나며 한쪽으로 치우치는데 구속되지 않으며, 지극히 공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나보다 나이가 어려도 내 기꺼이 그에게 복종하리라.

◎ 朋比之論, 益高, 苟以經義吐釋, 陷於斯文亂賊而未得伸. 余恐伏以未及知其義也. 甫弱冠, 旣讀大易而大易, 畵中之天地, 經旨, 未可搜獲其萬一. 然, 程夫子之所註釋, 曰程傳, 朱夫子之所註釋, 曰本義. 卽以程傳之次, 繼以本義. 本義, 釋其卦義與爻義, 所以占辭之動, 何以則吉, 何以則凶而順天時中, 一也. 程傳, 所以釋其卦爻之中, 蘊包天地之理, 陰陽動靜得其宜, 四時運行得其中, 未嘗有一物不包而萬化生生爾. 人事之吉凶, 在於天理之順逆, 陰陽之通變, 係於卦畵之動靜而天理人事, 惟一不貳矣. 程傳與本義, 吐釋之不同義, 十居一二, 後之學者, 奉讀程傳則以程傳, 窺其義, 讀其本義則以本義究其義, 而夫子之吐釋, 倂行不悖爾, 不惟是已, 子思子, 憂道學之失其傳而作中庸, 發其曾子之所不發而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與夫大學之明明德, 其義, 大同小異耳. 是皆前聖之繼往聖開來學之功也. 且夫經義之註釋, 陳氏, 鄭氏, 蔡氏, 及諸家註釋, 至其微奧處, 或有不一而晦菴夫子搜拾之, 盡載於經釋之中矣. 矧惟蘇東坡, 分黨異論, 氷炭相持, 而蘇氏之註釋, 與夫晦菴註釋, 不同其旨者, 苟有三. 然, 盡載於釋義前註. 此其非大賢惡而知其善之義諦乎. 恐惟尤菴夫子 亦在乎東方大賢地位, 有失於盛度包荒, 恕人容物之不足也. 顧後生末學, 不揆人地, 濫踰至此, 大畏不見容於後君子爾.

붕당을 나누는 논의가 더욱 높아져 경전에 현토와 주석을 다는 것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몰려서 펼쳐지지 못하니, 내가 삼가 생각건대 그 뜻을 미처 깨우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약관에 이미 주역을 읽었는데 주역에서 그려놓은 중의 천지(天地)와 경서의 뜻은 만에 하나도 찾아내어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자(程子)께서 주석을 단 것을 정전(程傳)이라 하고, 주자(朱子)께서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본의(本義)라고 부르니, 정전(程傳)의 다음에 본의(本義)로 이었다. 본의(本義)는 그 괘(卦)의 뜻과 효(爻)의 뜻을 점사(占辭)의 움직임으로 풀은 까닭에, 어떻게 하면 길하고 어떻게 하면 흉하다고 하는데, 하늘을 따르고 시세(時勢)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다. 정전(程傳)은 괘효의 안에 포함된 천지의 이치와 음양이 움직이고 가만있는 것으로 해석한 까닭에 그 마땅함을 얻었다. 사계절이 운행하여 그 중(中)에 맞으니 일찍이 하나의 사물도 포함되지 않음이 없고 온갖 변화가 끝없이 생겨난다. 사람의 일이 길하고 흉한 것은 하늘의 도리를 순히 따르느냐 거역하느냐에 있으며, 음양(陰陽)이 통하고 변하는 것은 괘획(卦畵)이 움직이고 가만있는 것에 매어있으니,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이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다.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에서 주석이 같지 않은 것은 열중에 하나나 둘이 있으니 후대의 학자가 정전(程傳)을 받들어 읽으면 정전(程傳)으로 그 뜻을 살피고 본의(本義)를 읽으면 본의(本義)로써 그 뜻을 연구하는데, 두 선생의 해석은 아울러 행해지니 어긋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사(子思)께서는 도학(道學)이 전해짐을 잃을까 염려되어 중용(中庸)을 지어, 증자(曾子)가 드러내지 않은 “천명(天命)을 일러 성(性)이라고 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 :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이라는 것을 밝혔으니, 대학(大學)의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이는 모두 성인이 그 앞의 성인을 이어서 후대의 학자들을 열어준 공이다. 또 무릇 경전의 뜻에 대한 주석으로 진씨, 정씨, 채씨 그리고 여러 학자의 주석이 있는데, 그 미묘하고 심오한 부분에 이르면 때로 한결같지 않은 점이 있었는데 회암(晦菴)선생께서 그것들을 수습하여 모두 경을 푸는 가운데에 실어놓았다. 하물며 소동파(蘇東坡)는 붕당이 나뉘고 다른 의론이 있어 얼음과 재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듯하였고, 소동파의 주석이 회암(晦菴)선생의 주석과 그 뜻이 같지 않은 것이 셋이 있었지만, 그러나 석의(釋義)의 주석들을 모두 실어놓았다. 이것이 어찌 대현(大賢)들은 사람을 미워하더라도 그 선한 뜻을 알면 살펴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가 생각해보건대 우암선생 역시 우리나라에서 대현(大賢)의 지위에 있었는데 남들의 잘못을 포용해주는 것을 못하여, 남을 용서하고 사물에 관용이 부족한 듯하다. 돌아보면 후생말학(後生末學)으로써 남을 헤아리지 못하고 분수에 넘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세의 군자들에게 용납 받지 못할까 크게 두렵다.

◎ 吾道在天乎? 在人乎? 天人一理, 而道同天人. 故所以一國之君, 爲政, 順天之所命而行政, 順天時之中度而爲敎爾. 是以, 而民從之, 生於四大五常之中, 事親以孝, 事君以忠, 友于兄弟, 睦于宗黨, 一國之民, 不離于四科之中, 至于隆師親友敬長之道, 是可謂政敎之大節目也, 那可以分朋爲政而偏比相攻乎? 天道, 所以至公無私. 苟或逆其天命, 而任意輒行, 則是宜偏比之政敎也. 所謂儒敎之政, 順天命, 以安社稷, 承天時, 以安百姓也. 政不過媢嫉相妬, 烏可以學吾道而爲政云乎? 不惟是亡國之禍機, 宜是吾道亡而西敎大熾之漸也. 爲之痛歎不已.

우리 도는 하늘에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가?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치이니 도는 하늘과 삶이 동일하다 때문에 일국의 군주는 정사를 하는데 하늘이 명한 바를 따라 정사를 행하고, 천시에 맞는 것을 따라 교화를 펼칠 뿐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쫓아서 사대오상(四大五常)의 가운데서 생활하여, 효로서 부모를 섬기고 충으로 군주를 섬기며, 형제간에 우애 있고 친척간에 화목하니, 일국의 백성은 4과목을 떠날 수 없으며 심지어 스승을 받들고 친구를 친히 하며 어른을 공경한다. 이는 정교의 큰 절목이라 말할 수 있으니, 어찌 붕당을 나누어 정사를 행하여 붕당지어 서로 공격하겠는가? 하늘의 도는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다. 진실로 혹여 천명을 거역하여 마음대로 행하면 이는 의당 붕당의 정교이다. 이른바 유교의 정사는 천명을 따라 사직을 편안케 하고, 천시를 쫓아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다. 정사는 시기하고 미워하여 서로 질투하는데 불과하니 어찌 우리 도를 배워 정사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망국의 화기일 뿐 아니라 의당 우리 도가 망하고 서교(西敎)가 크게 번성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 景英之際, 所謂儒敎, 益降, 朋比之論, 盛熾. 辛壬禍機, 是宜一國之所恥. 當時政權與國柄, 在於東西南北朋比之中, 而孰强孰弱, 禍機之孼, 作於强者之手矣. 邪欲以滅口掩目之術, 掩其天下後世之耳目, 那可以得乎? 景宗卽位元年, 雖有違豫, 然, 八月, 冊建儲, 似或太早, 亦其上候, 違豫則司直柳鳳輝, 疏, 畧曰 ‘登對力請, 殆近摧督, 可謂無人臣禮, 是恐權臣强迫之義, 在乎其中矣.’ 又曰 ‘今展下, 寶齡鼎盛, 中宮年纔逾笄, 日後螽斯之慶, 臣民所顒望, 而卽祚之元, 遽有此擧, 其故何哉.’ 是宜其故何哉四者之中, 上之不豫, 仰可證信矣. 又‘日後螽斯之慶, 臣民所顒望’, 是亦可證信矣. 前承旨金一鏡等六臣, 應旨上疏, 建儲諸權臣, 倂竄逐, 則應旨, 是應景宗之旨也. 建儲時, 權臣之强迫力請, 不其磪;明乎. 權臣等, 雖欲滅口而陷柳司直. 然天眼, 奈何, 至于今含寃而未伸, 東方儒學, 拘於黨派而無正論可知也.

경종(景宗) 영조(英祖)때에 이른바 유교(儒敎)가 날로 떨어지고 붕당을 가르는 논의가 더욱 성해졌다. 신임(辛壬)해에 있었던 재앙은 한 나라에서 부끄럽게 여김이 당연하다. 당시의 정권(政權)과 국가의 권한이 동서남북 붕당에 있어서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하든, 재앙의 꾸밈이 강한자의 손아귀에서 만들어졌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입을 막고 눈을 가리는 술책을 써서 천하후세의 이목을 가리고자 하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경종(景宗)께서 즉위한 원년에 비록 병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8월에 왕세제를 책봉한 것은 너무 이른 듯하다. 역시 임금의 건강 때문이었으나,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가 상소문을 올린 것에서 대략 말하기를 “조정에 나아가 폐하를 뵙고 애써 청하는 것이 거의 뜻을 꺾고 재촉하는데 가까우니 가히 신하된 예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권신들이 억지로 핍박하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하의 보령(寶齡 - 나이)이 이제 한창이시며 중궁(中宮)의 나이도 겨우 15세를 넘었으니, 이다음에 종사(螽斯 - 후손을 낳음)의 경사가 있는 것은 진실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그런데 즉위하신 첫 해에 갑자기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하였으니, 여기에서 ‘其故何哉(그 까닭이 무엇입니까?)’라는 네 글자를 통해서 경종(景宗)이 병이 없었음을 가히 증명하여 믿을 수 있다. 또, ‘일후종사지경, 신민소옹망(日後螽斯之慶, 臣民所顒望 : 이후에 자손들이 탄생할 경사로움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우러러 바라는 바)’라는 것도 또한 증거로 삼아 가히 믿을 수 있다. 승지(承旨)를 지냈던 김일경(金一鏡) 등 여섯 신하들이 뜻에 응하여 상소문을 올려 세자를 책봉하도록 하였던 여러 권신들이 모두 유배를 당해 쫓겨났으니, 뜻에 응하였다는 것은 경종(景宗)의 뜻이다. 세자를 책봉할 때에 권신들이 억지로 핍박하고 극력 간청한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으리오! 권신들이 비록 입을 막고자 유 사직을 모함하였지만, 천안(天眼)은 어찌하여 지금까지도 원망을 품은 한을 씻어내지 아니하니, 우리나라의 유학(儒學)이 당파에 구속되어 바른 의론이 없음을 알만하다.

◎ 景宗之聽政, 諫臣言, 東海渴則批答之以東海渴, 臺諫言, 西海溢則批答之以西海溢, 此所以權奸朋比之不得專權, 故一夜間遇害而釀成壬寅之禍也. 卽位之初, 輕聽權臣力爭强請之言, 冊建儲於朋黨, 爭權之中, 天聽, 岐貳, 可知也. 黑白不分而權臣, 以黑謂之白則允之以白, 以白謂之黑則允之以黑. 國柄, 在於權黨之手故, 司直柳公之疏, 敎曰此何人斯, 不可置之, 卿等, 論以啓, 於是, 大臣三司, 啓請鞠問, 上, 可之, 尋命遠竄矣, 然則秘命前承旨金一鏡等應秘旨上疏, 何哉, 是以, 建儲諸權黨, 倂竄逐. 此一邊, 소拜兵銓臺閣之任, 黜陟自專矣. 陰謀東宮之廢而說書宋寅明, 告急于慈殿, 卽命兩宦二婢, 出付司敗, 嚴取覈招, 爲敎. 當日設鞫, 覈問宦官朴尙儉, 文有道, 宮人弼貞, 石烈, 故陰謀, 未遂矣.

경종(景宗)이 정치를 하시는데 간언하는 신하가 ‘동해가 말랐습니다.’ 하면 동해가 말랐다는 것으로 비답(批答)을 내리고, 대간(臺諫)에서 말하기를 ‘서해가 넘쳤습니다.’하면 서해가 넘쳤다는 것으로 비답(批答)을 내리니, 이것이 권신(權臣)과 간신(奸臣) 붕당(朋黨)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하룻밤 사이에 해를 당하여 임인(壬寅)의 화를 양성하게 된 것이다. 즉위한 처음에는 권신들이 극력 간쟁(諫爭)하고 억지로 청하는 말을 경청(輕聽)하여 붕당의 와중에서 왕세제를 책봉하였는데, 권력을 다투는 중에 왕의 생각이 둘로 갈라졌음을 가히 알 수 있다. 흑백(黑白)이 구분되지 않아서 권신들이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면 흰 것으로서 윤허하고, 흰 것을 일러 검다고 하면 검다고 윤허를 하였으니 국병(國柄)이 권신과 당파의 손아귀에 있었다. 때문에 사직(司直) 유봉휘의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시기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그냥 둘 수 없으니, 경(卿) 등이 의논하여 계달(啓達)하라.” 하셨다. 이에 대신들과 삼사(三司)가 보여 국문(鞠問)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허락하셨다가, 이윽고 멀리 유배를 보내도록 하셨다. 그렇다면 비밀스럽게 전임 승지(承旨) 김일경 등에게 명하여 비밀스러운 뜻에 응하여 상소를 한 것은 어찌된 것인가? 이로 인해 후사를 세우도록 했던 권신과 붕당들이 모두 유배를 당해 쫓겨나게 되었으니, 이는 한편 병전(兵銓)과 대각(臺閣)의 임무를 불러 맡겨서 벼슬을 올리고 깎는 것을 마음대로 한 것이다. 동궁을 폐위하고자 은밀히 도모하였으나 설서(設書) 송인명(宋寅明)이 급박함을 중전께 알리니 곧 두 명의 환관과 두 명의 계집종을 법관에게 맡겨 엄하게 문초할 것을 명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당일에 형장을 설치하고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 문유도(文有道)와 궁인(宮人) 필정(弼貞), 석열(石烈)을 문초하였다. 때문에 음모가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

○ 冬十月, 執義趙聖復, 疏請世弟侍傍參聽, 明習庶務, 上允之. 右相趙泰耇, 力奏而還寢. 上果有奇疾, 則趙相公, 以何力奏之? 凡在東宮, 就師傅, 學其明明德新民之道, 究其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道. 當其卽阼之日, 可以善政則善政, 可以善治則善治矣. 未嫁閨女, 那可以學養子以後嫁之乎?

겨울 10월에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 세제가 곁에 참석하여 듣고 서무를 밝게 익히기를 요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우상 조태구(趙泰耈)가 힘써 아뢰어 명령을 취소하였다. 임금이 과연 병환이 있었으니 조상공이 어찌하여 힘써 아뢰었는가? 무릇 동궁에 있을 때 사부에게 나아가 ‘명명덕신민(明明德新民 :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의 도를 배우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의 도를 궁구하였다. 왕위에 오르는 날에 이르러 선정을 할 수 있으면 선정을 하고 선치를 할 수 있으면 선치를 하였다. 시집 안 간 규방의 처녀가 어찌 자식 기르는 것을 배운 연후에 시집을 갈 수 있겠는가?

○ 壬寅二年. 是時, 四大臣 ․ 三宰臣 ․ 三學士 ․ 三將臣 ․ 五閫帥, 疑其殿下之信彼疑此, 故連坐於權黨之三手獄矣. 三手, 一則藥, 一則釰, 一則乘喪矯旨也. 是皆陰謀凶變, 而洩機未遂. 然所謂備忘記曰 睦虎龍, 告變上書, 設鞫酌處, 大行誅竄. 不爾則何用告變二字, 不爾則何用誅字乎? 誅之字義, 無或有變常之罪, 則不敢濫筆, 是恐史法也.

임인(壬寅)년 2년. 이때에 사대신(四大臣), 삼재신(三宰臣), 삼학사(三學士), 삼장신(三將臣), 오곤수(五閫帥)는 전하가 저들을 믿고 이들을 의심하여 권세 있는 붕당의 삼수옥에 연이을까 두려워하였다. 삼수 중에 하나는 약이요, 하나는 칼이요, 하나는 상사를 틈타 교지를 고치는 것이다. 이는 모두 흉변을 음모하다가 기밀이 발설되어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비망기(備忘記)에 “목호룡(睦虎龍)이 고변상서를 올려 국문을 설치하고 죄를 처단하여 크게 처형하고 귀양을 보냈다.” 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고변(告變)’ 두 자를 썼으며, 그렇지 않다면 어찌 ‘誅’자를 썼겠는가? ‘주’(誅)의 자의는 반역의 죄가 있지 않으면 감히 함부로 쓸 수 없으니, 이는 생각하건대 사법인 것이다.

○ 越二年戊辰八月, 上昇遐, 世弟卽位. 內醫院都提調李光佐, 不設侍藥廳, 用獨蔘湯, 只以茶飮封進, 故中外不知云. 時, 宦妾尙多, 尙儉, 弼貞, 發其禁廷蹀血之凶言, 故命誅尙儉等, 餘皆自斃. 是皆只要滅口之跡, 那可得乎?

2년 지나 무진(戊辰)년 8월에 임금이 승하하여 세제가 즉위하였다. 내의원 도제조 이광좌(李光佐)는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고 삼탕만을 사용하며 다만 차를 마시고 밀봉하여 올렸기 때문에 조정과 민간에서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당시 환관과 궁녀가 오히려 많았는데, 상검과 필정이 궁궐의 살인에 대한 흉언을 발설하였기 때문에 명하여 상검 등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결하였다. 이는 모두 다만 증언할 사람을 없애려고 한 것이었으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 世弟, 親問蹀血懷刃於金一鏡. 一鏡, 對多遁辭, 虎龍, 起獄情節, 綻露無餘, 並致極刑孥籍.

세제가 친히 김일경(金一鏡)에게 피를 밟고 칼을 품은 것(세제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대해 국문하였다. 일경은 대답에 회피하는 말이 많았고, 호룡이 옥사를 일으킨 사정을 폭로하여 남김없이 하였는데, 아울러 극형을 당하고 노비가 되었다.

○ 大提學李宜顯, 撰進敎文, 略曰 逆鏡, 驅率大賊, 倡上凶疏, 妖儉, 以鏡羽翼, 陰幹密機云, 可驚可駭.

대제학 이의현(李宜顯)이 교문을 찬진하였는데, 대략 “반역자 일경은 큰 적을 몰고 거느려 흉소를 올릴 것을 창도하였고, 요망한 상검은 일경의 우익으로 몰래 비밀스런 일을 주도하였다.” 하였으니, 놀랍고도 놀랍도다.

◎ 嗚呼, 分朋以來, 廢母廢妃, 幾度有之? 弑父弑君, 亦幾有之? 所謂儒學分朋之禍孼, 至此甚乎.

오호라, 붕당이 나눈 이래 어미를 폐위하고 왕비를 폐위한 것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아비를 시해하고 군주를 시해한 것이 또한 몇 번이나 있었는가? 이른바 유학이 붕당을 나눈 화근은 여기에 이르러 심해졌다.

◎ 鄒夫子, 嘗曰 盡信書, 不如無書. 正道今日語也. 當日史筆之隱諱, 非一非二. 余恐用力三朔, 搜得隱諱中實情, 更無可疑處也. 世弟卽位之後, 壬申之變, 親問而致極刑, 李宜顯之撰進敎文, 擧一鏡, 虎龍, 尙儉, 尤可證信於後世者也. 此其非洗烟炭而益其黑者乎? 下民可欺也, 上蒼不可欺, 當日之目, 可掩也, 後日之目不可掩也.

맹자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책을 모두 믿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참으로 금일을 두고 한 말이다. 당일 사필(史筆)이 숨기고 꺼린 것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3개월간 힘써 숨기고 꺼린 가운데서 실정을 찾아냈으나 의심할 만한 곳이 없었다. 세제가 즉위한 이후 임신의 변고를 친히 국문하여 극형을 당하였고, 이의현이 찬진한 교문은 일경, 호룡, 상검을 거론하였는데 더욱 후세에 증험하여 믿을 만한 것이다. 이는 연탄을 씻어내도 더욱 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아래로 백성은 속일 수 있으나 위로 하늘은 속일 수 없고, 당일의 눈은 가릴 수 있으나 후일의 눈은 가릴 수 없다.

◎ 盖鳳凰之羽, 世人之所稀覩, 故人皆貴之. 然羽不着地矣. 竊恐先儒氏之正筆, 如鳳凰之羽, 而未嘗有一言之及此乎? 不言中正論自在, 而余不得聞也歟? 痛歎不已. 鸚鵡之言, 人不聽信, 而天機自發, 故人莫禁之矣. 余妄敢如鸚鵡舌, 而筆之以橫豎之亂方. 竊恐獲罪於舊國先王之統紀, 大畏後君子立言必正而易吾言矣. 然東方千秋, 儒敎角立之耻, 那可得以獲免乎? 余以是爲長歎息者也.

대개 봉황의 날개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 드문 것이어서 사람들이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날개는 땅에 닿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유의 바른 필법은 봉황의 날개와 같아서 한마디 말도 여기에 이른 것이 없는 것인가? 말하지 않은 가운데 바른 논의가 절로 있는데 내가 듣지 못한 것인가? 통탄을 그칠 수 없다. 앵무새의 말은 사람들이 듣고도 믿지 않으나 천기가 절로 발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금할 수는 없다. 내가 망령되이 감히 앵무새의 혀로 횡설수설 쓴다. 조선 선왕의 법에 죄를 얻을까 염려되고, 후에 군자가 입언(立言)을 필시 바르게 하여 내 말을 바꿀까 크게 두렵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천추에 유교가 각립한 부끄러움은 어찌 모면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길게 탄식하는 것이다.

◎ 自孝顯, 至于肅景英, 明哲之君, 不惟一二作, 而儒賢輩出, 儒敎休明莫有若此盛矣. 立朝儒賢, 學吾孔孟之學, 道吾程朱之道, 文敎休明, 不下於宋朝之隆盛也. 奈之何, 沈南爭權趨利之論, 浸入於儒賢朋比相左之中, 東西圭角, 而西又分裂, 遂成三角, 後必有甚焉. 釀成儒賢刑戮之禍, 三百年間朝著一空, 鱗疊相繼, 勿論朝野, 以儒賢名者未嘗誣被黨禍者, 不見其一也. 是將責其誰, 乃三角中, 尊崇益高之名賢也. 第當此時, 學儒者之所尊慕, 益高則媢嫉分朋之心, 高人千百層而以是心配置於萬千人心腹之中, 苟一人妬忌相爭則萬千人聞其聲而同出其聲, 一號出聲, 聲勢益壯, 竟致打盡之禍綱, 善打其善類者, 爲其黨首矣. 是以朋比之論, 益熾, 三分而爲六, 六分而爲十二, 爭權弄錘, 策政出謨, 竟入於弄錘之善手, 則失錘之黨, 將欲奪權, 厥謀之陰結, 出於不義之中, 宜是不公不平而邪欲掩其不公, 謂之自是, 邪欲掩其不平, 謂其自善, 厥黨衆則掩之而歸於自是, 厥黨寡則掩不得而歸於不善. 嗚呼, 痛哉! 學儒學而“比而不周”則其所學也, 恐非吾夫子之學也.

효종 ․ 현종으로부터 숙종, 경종 영종에 이르기까지 밝고 현명한 임금들이 한두 분 즉위한 것이 아니었고 유현(儒賢)이 배출되었으니, 유교의 훌륭함이 이때만큼 성대한 적이 없었다. 조정이 등용된 유현들은 우리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학문을 배우고, 우리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도를 말하니, 문교의 훌륭함이 송(宋)나라 때의 융성함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심(沈) 남(南)이 권력을 다투고 이익을 좇는 논의가 유현들이 붕당을 지어 서로 돕는 가운데에 스며들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대립하였고, 또 서인은 다시 분열되어 드디어 삼각(三角)을 이루게 되어 뒤로 갈수록 더욱 심하게 되었다. 유현들이 형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양성하여 삼백년간의 조정이 하루아침에 텅 비게 되고 물고기의 비늘처럼 서로 연이어지니, 조정과 재야를 막론하고 유현이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 중에 당파와 관련되어 무고를 받아서 재앙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볼 수가 없다. 이는 장차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리오? 세 당파 중에 더욱 많이 존숭(尊崇)되던 현명한 사람이리라. 후배들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유자들이 높이고 사모하던 바를 배우는데, 높이 배우면 높이 배울수록 시기하고 질투하며 붕당을 나누는 것은 남보다 천백 층이나 더 높아지니, 이러한 마음을 천명, 만명의 사람들 마음속에 나누어 준다. 구차하게 한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여 서로 다투면 바로 천명, 만명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함께 그 소리를 내니, 한번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갈수록 커져서 끝내는 재앙이 그물처럼 쓸어버리게 되니, 선한 사람들을 잘 치는 자가 그 당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므로 붕당을 가르는 논의가 더욱 성하여 세 개가 나뉘어 6개가 되고 여섯 개가 나뉘어 12개가 되며 권력을 다투고 농단하며 정권을 꾀하여 음모를 드러내니, 끝내 농단을 잘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권력을 잃은 당파에서는 장차 권력을 빼앗으려 하여 그 꾀하는 것이 은밀하고 의롭지 못한 것에서 나오게 되니 마땅히 공정하지도 못하고 공평하지도 못하여, 사욕이 공정하지 못함을 가리는데 그것을 일러 스스로 옳다고 말하고, 사욕이 그 공평하지 못함을 가리는데 그것을 스스로 선하다고 말한다. 그 당파가 많으면 곧 가려서 스스로 옳다는데 돌리고, 그 당이 적으면 가리려 해도 그럴 수가 없어서 선하지 못함으로 돌아간다. 아아, 슬프도다. 유학에서 ‘두루 친하지만 무리 짓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을 것이니, 그들이 배운 것은 아마도 우리 공자의 학문이 아닌가보다.

○ 壬午三十八年. 閏五月, 上盛陳兵衛, 密造木櫃, 强押世子, 使之幽閉自盡. 嗚呼痛矣. 天倫之罔測之禍, 如是慘酷乎? 自冊世子後, 政令施措, 多不愜上意, 且和緩翁主, 與文淑儀, 浸潤進譖, 東宮憂懼, 乃潛作遠遊. 至是, 權黨誣搆世子, 素有北伐之志, 將以貽大患於社稷, 釀成國家骨肉之大變. 朋黨之爲禍, 甚於洪水猛獸之爲禍也, 奈何?

임오(壬午)년 38년. 윤 5월에 임금이 성대하게 호위병을 세우고 몰래 나무궤짝을 만들어 세자를 강제로 잡아다 유폐시키고 스스로 죽게 하였다. 오호라, 애통하다. 천륜으로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이 이처럼 참혹한가? 세자에 책봉한 이후로 정령을 시행하는 것이 대부분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다. 또한 화완옹주와 문숙의는 차츰차츰 참소를 하니 동궁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이에 몰래 멀리 놀러 다녔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권세 있는 당파가 세자를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평소 북별의 뜻이 있으니 장차 사직에 큰 환란이 될 것이고 국가의 골육지친의 큰 변고를 양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붕당의 화는 홍수나 맹수의 화보다 심하니, 무엇 때문인가?

○ 且夫世子北伐之志, 竟以貽大患於社稷, 則尤菴夫子北伐之論, 可以爲千秋大義, 竊恐不爲後學之所疑訝也歟?

또한 저 세자의 북벌의 뜻이 끝내 사직에 큰 환란이 되는데, 우암 선생의 북벌론은 천추대의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건대 후학들이 의아해 하지 않겠는가?

◎ 嗚呼, 壬甲之爲禍也. 麟佐之於光佐, 宜有骨肉親屬, 而擧兵叛, 是亦何義哉? 北淸會典曰 朝鮮國王李某-昑-, 弑其兄自立, 李麟佐 ․ 鄭希良等, 擧兵討之, 不克而死之云. 竊爲吾東而長痛哭者, 是也. 是何言也?

오호라, 임(壬)․ 갑(甲)연간의 재앙이여. 이인좌는 이광좌에 대해 의당 골육친속인데 병사를 일으켜 반역하였으니, 이 또한 무슨 의리인가? 북청회전(北淸會典)에 이르기를 “조선국왕 이모(李某) - 금(昑) - 이 그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이인좌, 정희량(鄭希良) 등이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를 위해 길게 통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무슨 말인가?

◎ 今夫大義之中節, 無或是非之所到也. 儒敎之分朋, 及於朝廷, 朝廷之禍孼, 至於社稷之危亡, 而無所休息. 但偏比之論, 止於曰可曰否矣. 不拘其國破君亡, 各主其自是, 視彼如仇讐, 視此如親屬, 可以爲儒化云乎哉?

지금 저 대의가 절의에 맞는 다는 것은 혹여 시비가 이르는 바가 아니다. 유교의 붕당은 조정에 미치어, 조정의 화근은 사직의 위태로워 망하는데 이르렀는데도 멈추지 않고, 다만 붕당의 논의는 왈가왈부하는데 그칠 뿐이다. 나라가 깨지고 임금이 망하는 것도 구애받지 않고 각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저들을 보기를 원수처럼 하고 이들을 보기를 친속처럼 하였으니, 유학에 의해 교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吾之所學, 未嘗以是爲學矣. 周而不比, 則心悅誠服, 學聖人之道而已. 然不辰之歎, 切於中爾. 吾將何之?

내가 배운 것은 일찍이 이것을 배움이라 여기지 않았다. 두루하여 치우치지 않는 것은 마음에 기뻐하여 진심으로 복종하던 것이니 성인의 도를 배웠을 뿐이다. 그러나 떨치지 못한 탄식은 마음에 절실하다. 나는 장차 어디로 가리오?

◎ 大東先師, 有退陶先生, 亞於子程子明道先生矣. 吾將遠宗之, 至老崇慕.

우리나라 선생 중에 퇴계선생이 있으니 정자 명도선생에 버금할 만하다. 내 장차 멀리 존숭하여 늙도록 숭상하고 흠모하리라.

◎ 自正祖純祖,至于憲宗哲宗, 明哲之君, 不惟一二作, 而正祖之善政, 不讓於五百年列聖祖之善治矣. 雖然, 朋黨間之, 儒學不及於先賢之學, 作人不及於先儒氏之地, 而政黨之論, 世降而益熾, 偏比之心, 敎弛而愈盛, 國權都在於權黨弄錘之手, 所謂政敎憑公, 而領其偏比, 明日, 做一政事, 則夜會于權門之屋下, 私議畢, 而厥明, 會于議政府政事堂, 偏比盡情, 而政策決矣. 是以, 蠹國病民, 莫若甚焉, 竟致亡國之和矣.

정조, 순조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밝고 현명한 임금이 한두 명 즉위했을 뿐만은 아니지만 정조의 선정(善政)은 오백년 열성조의 선치(善治)에도 손색이 없다. 비록 그렇지만 붕당이 끼어들어 유학은 선현의 학문에 미치지 못하고 사람은 선유의 지경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정당의 논의는 세대가 내려올수록 거세고 붕당하려는 마음은 교화가 느슨할수록 더욱 번성하여, 국권은 모두 권세 있는 당파의 농단하는 손아귀에 달려있게 되었다. 이른바 정교는 공론에 의지하여 붕당을 거느린다. 다음날 한 정사를 결정하려면 밤에 권문의 집에 모여 사사로운 논의를 마치고 다음날 의정부 정사당에 모여 붕당이 정성을 다해 정책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으며, 끝내 망국의 화가 되었다.

諱熙, 興宣大院君嫡己子.

휘는 희요, 흥선대원군의 아들이다.

○ 乙丑二年. 命重修景福宮. 此是國初創建之宮, 而壬辰兵亂, 燒蕩爲燼. 至是, 大院君, 銳意重建, 國庫錢竭, 鑄當百錢.

을축(乙丑)년 2년. 경복궁을 중수하라고 명하였다. 경복궁은 국초에 창건한 궁궐인데 임진병란에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원군이 열심히 중건하였는데 국고의 돈이 고갈되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였다.

○ 丙寅三年. 冊閔氏, 爲王妃.

병인(丙寅)년 3년. 민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다.

○ 五月佛蘭西巡洋艦, 入平壤大同江, 潮退再膠, 觀察使朴珪壽, 縱火焚之.

5월에 프랑스 순양함이 평양의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조수가 빠지자 재차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게 되자, 관찰사 박규수(朴珪壽)가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 命捕西學宣敎師九人, 誅之, 嚴禁西敎.

서학 선교사 9명을 체포하여 처형케 하고 서교를 엄금하였다.

○ 命毁八路書院疊設之享.

명하여 팔도의 서원에서 거듭 설치하여 배향하는 것을 없애버렸다.

○ 九月佛蘭西兵艦七隻, 陷江華, 留守李寅夔, 棄城走. 命李景夏, 爲巡撫使, 拒之.

9월에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유수 이인기(李寅夔)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경하(李景夏)를 명하여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 前判書李是遠, 與其弟前郡守止遠, 飮藥死.

전 판서 이시원(李是遠)이 그의 동생 전 군수 이지원(李止遠)과 약을 마시고 죽었다.

○ 時賊兵欲據山城, 先烽吳憲洙, 潛師渡津, 襲破賊兵, 捕斬四十餘級. 韓聖根, 又破文殊山城, 據之. 賊兵, 知其備禦, 遂棄城走.

당시 적병은 산성을 점령하고자 하였는데, 선봉인 오헌수(吳憲洙)가 군사를 헤엄쳐 나루를 건너, 적병을 습격하여 사로잡고 참수한 것이 40여급이었다. 한성근(韓聖根)은 또한 문수산성(文殊山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적병은 방비할 줄 알아 마침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 丁卯四年. 前掌令崔益鉉, 疏陳時弊, 招拜敦寧都正.

정묘(丁卯)년 4년. 전 장령 최익현(崔益鉉)이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진언하니, 그를 불러 돈령도정(敦寧都正)에 제수하였다.

○ 辛未八年. 法國巡洋艦, 陷江華廣城津, 守將魚在淵, 戰敗死之, 洋艦, 亦退.

신미(辛未)년 8년. 프랑스 순양함이 강화의 광성진(廣城津)을 함락하였는데, 수장 어재연(魚在淵)은 싸움에서 패배하여 죽었고 순양함도 또한 물러갔다.

○ 壬申九年. 上幸開城, 祭齊厚兩陵, 遣承旨, 致祭于崧陽書院.

임신(壬申)년 9년. 임금이 개성에 행차하여 제릉(齊陵) ․ 후릉(厚陵)에 제사를 지내고, 승지를 보내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甲戌十一年. 二月, 元良誕降, 定名曰垢.

갑술(甲戌)년 11년. 2월에 태자가 태어나 이름을 ‘구(垢)’라고 하였다.

○ 乙亥十二年. 春正月, 冊封元世子, 爲王世子.

을해(乙亥)년 12년. 봄 정월에 원세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 丙子十三年. 春正月, 日本大使黑田淸隆, 至江華, 復修舊好, 妥定條約.

병자(丙子)년 13년. 봄 정월에 일본대사 흑전청융(黑田淸隆)이 강화에 이르러 다시 예전의 우호를 맺자고 하여 조약을 순순히 결정하였다.

○ 庚辰十七年. 命金弘集, 爲修信使, 赴日本, 隨員池錫永, 學種痘法而歸.

경진(庚辰)년 17년. 김홍집(金弘集)을 명하여 수신사(修信使)로 삼아 일본에 보냈는데, 수원 지석영(池錫永)은 종두법(種痘法)을 배워서 돌아왔다.

○ 辛巳十八年. 命金允植, 駐箚淸國天津, 交涉通商事務, 未英露法德公使, 相繼來駐京城.

신사(辛巳)년 18년. 김윤식(金允植)을 명하여 청국 천진(天津)에 머물러 있게 하고 통상사무를 교섭하게 하였는데, 미국 ․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공사가 연이어 경성에 와서 머물렀다.

○ 壬午十九年, 六月, 亂兵犯闕, 中宮殿, 避御于族親閔泳緯, 忠州私邸, 前領相李最應 ․ 前京畿監司金輔鉉 ․ 宣惠廳提調閔謙鎬, 皆遇害.

임오(壬午) 19년 6월, 난병들이 대궐을 침범하여 중궁전은 족친 민영위(閔泳緯)의 충주 사저로 피신했고, 전 영상 이최응(李最應) ․ 전 경기감사 김보현(金輔鉉) ․ 선혜청제조 민겸호(閔謙鎬)는 모두 화를 당하였다.

○ 西大門外年少輩, 放火于淸水舘, 日使花房義質, 出避于仁川港. 未幾日, 軍艦來泊, 引兵下陸, 分據要害, 砲鼓相聞. 上慮起兵釁, 命兵曹判書趙寧夏, 往慰辦理. 寧夏聞命卽發, 悉去兵衛, 只率舌官一人. 行至梧柳洞, 距港四十餘里, 路伏日兵, 耀武戒嚴, 寧夏勇往卽前, 談笑麾之. 至花島舘, 與日使, 論事切實, 悉中機宜. 罪之首倡, 和好如舊. 及復命, 上曰 淸國援兵, 已至南陽, 不可無大官迎慰, 卿其往焉. 寧夏又往馬山浦, 以君命, 敬勞將軍, 因伴接上路, 不知有軍, 是役也. 臨難不避, 單騎馳騁於劒戰之間, 徒以言語, 釋兵於盃酒, 措國於磬泰, 苟非鞠盡瘁(鞠躬盡瘁)佩安危者, 能如是乎?

서대문 밖 연소배들이 청수관(淸水舘)에 불을 질러 일본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은 인천항(仁川港)으로 가서 피난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군함이 와서 정박하고 병사를 이끌어 육지에 내리고 요해처를 나누어 점령하여 대포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들렸다. 임금이 병사를 일으킨 잘못을 염려하여 병조판서 조영하(趙寧夏)에게 명하여 가서 위로하고 사리를 분별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영하는 명을 받고 즉시 출발하였는데 병사의 호위도 모두 물리치고 단지 역관 1명만을 거느렸다. 오류동(梧柳洞)에 당도하니 인천항까지의 거리는 40여리쯤 되었다. 길에 매복한 일본병사가 무기를 번득이며 경계를 엄중히 하였으나 영하는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담소를 나누며 지휘하였다. 화도관(花島舘)에 이르러서는 일본공사와 사태를 논한 것이 절실하였고 모두 시기와 형편에 적중하였다. 수창자를 죄주고 이전처럼 사이좋게 되었다. 임금께 아뢰자, 임금께서 “청국의 원병이 이미 남양(南陽)에 이르렀으니 대관이 영접하여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이 가보아라.” 하셨다. 영하는 또 마산포(馬山浦)로 가서 임금의 명으로 청국의 장군을 위로하고 아울러 돌아오는 길에 대접하면서도 군대가 있는 줄은 알지 못했으니 이것도 영하가 지시한 것이다. 난리를 당해 피하지 않고 한필의 말을 타고 칼날이 부딪히는 사이를 내달리며 다만 언어로서 술자리에서 군대를 풀게 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바로잡았으니 진실로 심신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여 안위를 갖춘 자가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 淸國提督吳長慶, 領三營兵, 入京城, 扈衛王宮, 捕亂魁三十餘名, 誅之. 時, 駐天津, 領選使金允植 ․ 問議官魚允中, 聞本國有變, 往見北洋大臣李鴻章, 請出兵除亂. 鴻章, 奏派吳長慶而除亂.

청국제독 오장경(吳長慶)이 삼영병을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와 왕궁을 호위하고 난을 일으킨 괴수 30여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당시 천진에 머물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과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은 본국에 변고가 있다는 것을 듣고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출병하여 난리를 평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홍장은 오경장을 파견하여 난리를 평정할 것을 주청했던 것이다.

○ 大院君, 入淸國天津. 時, 吳長慶等, 先訪雲峴宮. 翌日, 大院君, 回謝于屯芝峴淸津. 長慶, 迎接茶罷, 問曰 未及知王妃存沒, 而遽定喪禮, 大違事體也. 不可不躬赴皇城, 辨明事實, 可也. 因衛送于天津.

대원군이 청국의 천진에 들어갔다. 당시 오장경 등이 먼저 운현궁(雲峴宮)을 방문하였고, 다음날 대원군이 둔지현(屯芝峴) 청진(淸津)으로 답방하였다. 장경이 영접하여 차를 마시자마자 묻기를 “왕비의 존몰도 알지 못하는데 갑자기 상례를 정하는 것은 크게 일의 대체에 어긋납니다. 몸소 황성에 가셔서 사실의 시비를 밝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대원군을 천진으로 호송하였다.

○ 命趙寧夏, 問候大院君于天津. 寧夏, 以陳奏使, 赴淸廷, 請大院君歸國.

조영하에게 명하여 천진에 있는 대원군의 안부를 여쭙게 하였다. 영하는 진주사로 청국의 조정에 가서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 八月, 奉迎中宮殿于忠州, 備儀衛還宮. 命忠淸兵使具完植, 領兵扈駕. 中宮殿, 潛御忠州, 田愚, 謁中宮殿于閔泳緯私邸, 問輒利對. 自是, 寵愛益隆, 扈駕于完植之後. 及還宮, 上問 扈駕後爲誰? 中宮對曰 儒生田愚, 本是林下士, 以儒學有聞, 故招待之. 上亦寵愛之甚重. 由是, 名聞于京鄕.

8월에 중궁전을 충주에서 맞이하여 호위병을 갖추고 환궁하였다. 충청병사 구완식(具完植)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수레를 호종하게 하였다. 중궁전이 충주에 계실 때 전우(田愚)가 민영위의 사저로 중궁전을 알현하였는데 질문마다 잘 답변하였다. 이로부터 총애가 더욱 융숭해져 완식의 뒤에서 수레를 수행하였다. 중궁전이 환궁하자 임금께서 “수레를 수행하는데 뒤에서 누가 따랐는가?” 묻자, 중궁이 “유생 전우입니다. 본래 산림의 선비인데 유학으로 이름이 있다고 하여 초대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도 매우 두텁게 총애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이 경향간에 알려졌다.

○ 甲申二十一年. 冬十月十七日, 權臣朴泳孝等, 陰懷不軌, 與日使相通, 入告曰 淸兵, 久蓄異志, 使刺客, 將欲先殺右營使閔泳翊. 只今絶而復甦, 夜必犯闕, 無疑矣. 上乃恐動不已, 奉各殿宮, 移御, 環衛戒嚴, 皆日兵也. 矯旨召惠堂閔台鎬 ․ 海防總官閔泳穆 ․ 營使韓圭稷 ․ 宂除輔國趙寧夏. 寧夏闔門養威重, 見忌遇害. 是日, 上移御景祐宮, 明日還宮. 日兵猶不退, 居中用事, 皆新進凶逆輩也.

갑신(甲申)년 21년. 겨울 10월 17일에 권신 박영효(朴泳孝) 등이 몰래 반역의 뜻을 품고 일본공사와 내통하여, 들어가 아뢰기를 “청국의 병사들은 오랫동안 다른 뜻을 품어 자객으로 하여금 먼저 우영사(右營使) 민영익(閔泳翊)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끊어버려도 다시 생겨나거늘 밤에 필기 대궐을 침범할 것임은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두려워서 동요함을 그치지 못하고 각 전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궁궐을 호위하게 하고 경계를 엄중히 하였으니 모두 일본병사였다. 교지를 속여 혜당(惠堂) 민태호(閔台鎬) ․ 해방총관(海防總官) 민영목(閔泳穆) ․ 영사(營使) 한규직 ․ 용제보국(宂除輔國) 조영하를 불러 들였다. 영하는 문을 닫고 위엄을 부리다가 미움을 받고 화를 당하였다. 오늘은 임금이 경우궁으로 옮겼으면 다음날은 환궁하였다. 일본병사들은 오히려 물러나지 않고 그 안에 있으면서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으니, 모두 신진 흉역배들의 소행이었다.

○ 十九日, 上避御于下都監. 時, 內外隔絶, 群情疑懼, 聖躬安危, 在於凶逆之手矣. 右領營官申泰休, 選精銳, 與淸帥吳兆有, 從宣仁門入衛, 袁世凱, 自敦化門, 耀武先入, 排闥直楎, 劒光射殿, 日兵小退. 宮中大亂, 朴泳孝 ․ 金玉均 ․ 徐光範 ․ 徐載弼, 坐於殿下之左右前後, 劫王而欲奪寶位, 輒心懼於袁世凱之劒光而出走亡命. 於是, 泰休趨北廟, 扈駕於下都監. 都承旨朴泳敎, 閣臣洪英植, 皆爲亂兵所殺.

19일에 임금이 하도감(下都監)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내외가 막히고 여러 사람들이 의심을 품었으니, 임금의 안위는 흉역한 무리들의 손안에 있었다. 우영영관 신태휴(申泰休)가 정예병을 선발하고 청국 장수 오조유(吳兆有)와 선인문(宣仁門)으로부터 들어가 궁궐을 호위하고 원세개(袁世凱)는 돈화문(敦化門)으로부터 무력을 자랑하며 먼저 들어가 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가 검광이 전각을 맞추니 일본병사들은 잠깐 물러났다. 궁중의 큰 난리에 박영호 ․ 김옥균(金玉均) ․ 서광범(徐光範) ․ 서재필(徐載弼)은 전하의 좌우전후에 앉아서 임금을 겁주어 보위를 빼앗고자 하였으나, 문득 마음에 원세개의 검광을 두려워하여 도망 나와 망명하였다. 이에 태휴는 북묘로 달려가 하도감으로 임금의 수레를 수행하였다. 도승지 박영교(朴泳敎) ․ 각신 홍영식(洪英植)은 모두 난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二二十一日, 上還宮. 申泰休領先後廂, 扈駕還宮, 軍容整肅. 市肆如故, 士女雲集, 見羽旄之美, 往往有泣下者.

21일에 임금이 환궁하였다. 신태휴는 임금의 수레를 앞뒤에서 호위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임금의 수레를 수행하여 환궁하였는데 군대의 위용이 정숙하였다. 거리는 예전처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아름다운 임금의 거둥을 보고 왕왕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 乙酉二十二年. 大院君, 自淸國保定府, 滯留四年而還國.

을유(乙酉)년 22년. 대원군이 청국보정부로부터 4년간 체류하고 환국하였다.

○ 癸巳三十年. 宣撫使魚允中, 諭散東學之徒. 初, 慶州崔福述, 倡東學而聚黨, 朝聚暮散, 至于今釀成外患.

계사(癸巳)년 30년. 선무사(宣撫使) 어윤중이 동학의 무리들을 타일러 해산시켰다. 이전에 경주에 사는 최복술(崔福述)이 동학을 창도하여 동학당을 이루어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졌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외환을 초래하였다.

○ 甲午三十一年. 夏四月, 東匪陷全州, 命招討使洪啓薰, 大破之, 復全州.

갑오(甲午)년 31년. 여름 4월에 동학군이 전주(全州)를 함락하여,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에게 명하여 대파하고 전주를 되찾았다.

○ 淸國援兵, 來駐牙山, 日本亦派兵, 直入京城據之. 初, 淸使袁世凱, 以朝鮮援護之意, 密報北洋衙門, 遣聶士成 ․ 葉志招, 領兵六千, 來駐牙山. 日本, 亦有互相派兵之約, 率精兵八千, 直入京城, 分據要害. 是皆爭奪之意.

청국 원병이 와서 아산(牙山)에 머물렀고, 일본도 파병하여 곧장 경성에 들어와 점령하였다. 이전에 청국공사 원세개는 조선을 구원하여 보호하려는 뜻으로 몰래 북양아문에게 보고하였고, 청국에서는 섭사성(聶士成)과 섭지초(葉志招)를 파견하여 병사 육천을 거느리고 와서 아산에 머물렀다. 일본 역시 상호 파병한다는 조약이 있어 정병 팔천을 거느리고 곧장 경성에 들어와 나누어 요해처를 점령하였다. 이는 모두 두 나라가 조선을 쟁탈하려는 뜻이었다.

○ 日淸兵, 大戰于牙山, 淸兵敗走. 日使大鳥圭介, 要外部公文, 與淸戰而淸兵走之.

일본과 청국병사들이 아산에서 크게 전쟁을 하였는데 청국병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일본공사 대조규개(大鳥圭介)는 외부에 공문을 요구하여 청국과 전쟁하여 청국병사가 달아났다고 하였다.

○ 左右先鋒李圭泰 ․ 李斗璜, 與日本大尉森尾雅一, 討平東匪. 時, 李勝宇, 守洪州, 閔鐘烈, 以招討使, 守羅州, 與鄭錫珍, 抄募義兵, 畫出方略, 獨羅州不下. 以是, 錫珍蒙批飛將軍之號, 且其保完全城之功. 雲峰前注書朴鳳陽, 傾家財備軍糧, 戮力守之, 以爲諸城之最.

좌우 선봉 이규태(李圭泰)와 이두황(李斗璜)은 일본 대위 삼미아일(森尾雅一)과 함께 동학군을 토벌하였다. 당시 이승우(李勝宇)는 홍주(洪州)를 지켰고, 민종열(閔鐘烈)은 초토사로 나주(羅州)를 지켰는데 정석진(鄭錫珍)과 의병을 선발하고 방략을 내어 나주만이 함락당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석진은 비장군이란 호칭을 얻었고 또한 전주성을 보호하고 완전하게 한 공이 있다. 전 주서 운봉(雲峰) 박봉양(朴鳳陽)은 가산을 기울여 군량을 마련하여 힘을 다해 지켰으니, 여러 성 가운데 으뜸이었다.

○ 特赦甲申謀逆罪人, 以朴泳孝, 爲內部大臣, 徐光範, 爲法部大臣, 徐載弼, 爲顧問官. 嗚呼, 天討之不暇, 王法之未誅, 復之以爵賞, 是雖日魁之所爲, 然只今, 以金以徐稱先生, 亦其非世變乎哉.

갑신년 역모를 꾀한 죄인을 특별히 사면하여 박영효를 내부대신으로 삼고 서광범을 법부대신으로 삼고 서재필을 고문관으로 삼았다. 오호라, 하늘이 토벌하는데 겨를이 없고 임금이 처벌하는데 처형하지 않고 관작과 상으로 회복해 주었으니, 이는 비록 일본의 괴수들의 소행이라고 해도 지금 김옥균과 서재필을 선생으로 칭하니 또한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겠는가.

○ 乙未三十二年. 日兵乘勝至山東省, 燕京大震, 派遣北洋大臣李鴻章, 與伊藤博文, 會于馬關春帆樓, 講定條約, 確認朝鮮自主. 嗚呼, 甲申宮變, 賴共淸援而以全其寶位, 故結成是約. 今觀賊勢, 爲倭非爲朝也. 奈之何天不佑東. 賴其牛頭而寧爲牛後, 勢不能獨保雞羽, 那可以爲雞口乎.

을미(乙未)년 33년. 일본병사들은 승기를 타고 산동성에 이르니 연경이 크게 혼란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을 파견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과 함께 마관(馬關)의 춘범루(春帆樓)에서 만나 조약을 협정하여 조선의 자주를 확인하였다. 오호라, 갑신년의 궁변은 청국 원병에 힘입어 보위를 온전히 할 수 있었으므로 이 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지금 적의 정세를 보니 왜를 위한 것이지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니로구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음을 어찌 하리오? 소머리에 힘입어 어찌 소의 꼬리가 되겠는가? 형세는 닭의 날개도 홀로 보전할 수 없으니 어찌 닭의 부리가 되겠는가?

○ 尊上爲大朝鮮大君主, 建元建陽, 始行陽曆, 分八道爲十三道.

임금을 높여 대조선대군주라 하고 연호를 건양이라 하고 비로소 양력을 행했으며 8도를 나누어 13도로 하였다.

○ 八月, 大隊長禹範善 ․ 李斗璜, 率訓練隊兵, 從光化門而入, 聯隊長洪啓薰, 隻手拒之曰 深夜犯闕, 將欲何爲, 不言其所以, 則不可以入. 言未終, 中丸而死. 範善, 斬乾淸宮後門, 揮兵至坤寧閤, 拔釰歷階而直上. 宮大李畊稙, 拒門叱之, 範善, 立斬之, 仍排闥直犯. 王壺樓, 虛熖滔天, 中宮殿冒炎, 而火及玉體. 於是, 左右隊, 合勢, 齋丸露刃, 蝟集殿階, 迫脅至尊, 齊請廢妃, 聲動宮闕, 上遽下廢妃之命. 凶徒, 乃撤圍而退. 倭大使井上馨, 罷範善, 斗璜, 及李珍鎬, 李範來職, 使之越海走于日本.

8월에 대대장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이 훈련대 병사를 거느리고 광화문을 따라 들어오니, 연대장 홍계훈이 한손으로 막으며 “깊은 밤에 궁궐을 침범하여 장차 무슨 일을 하려는가? 그 까닭을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탄환에 맞아 죽었다. 범선은 건청궁(乾淸宮) 후문을 폐쇄하고 병사를 이끌고 곤령합(坤寧閤)에 이르러 칼을 뽑고 계단을 올라 곧장 올랐다. 궁대(宮大) 이경직(李畊稙)이 문을 막고 꾸짖자 범선은 그 자리에서 목을 베고서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옥호루(王壺樓)는 빈 불꽃이 하늘에 넘쳐 중궁전은 불에 타고 불이 옥체에까지 미쳤다. 이때 좌우부대가 합세하여 탄환을 장전하고 칼날을 드러내며 전각의 계단에 모여 지존을 협박하여 일제히 폐비를 청하였는데 그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임금이 갑자기 폐비의 명을 내렸다. 흉도들은 이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일본대사 정상형(井上馨)은 범선과 두황, 이진호(李珍鎬) ․ 이범래(李範來)의 관직을 파직하고 그들에게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달아나게 하였다.

○ 復王妃位, 頒布國恤節次. 嗚呼, 衣君食君而反爲讐寇之獵狗乎. 苟爲獵狗, 則嚙其他人之物而入於主人, 可也, 嚙其主而饋于賊口, 非其所以家畜之獵狗也. 必是野狂之狗, 化爲禹也李也.

왕비를 복위시키고 국상의 절차를 반포하였다. 오호라, 군주를 포위하고 물어 도리어 원수의 사냥개가 되었도다. 진실로 사냥개가 되려면 타인의 물건을 물어다 주인에게 주는 것이 옳거늘 주인을 물어 적의 입에 갖다 주니, 집에서 사냥개를 기르는 까닭은 아니다. 필시 들판의 미친개가 변하여 우범선과 이두황이 되었을 것이다.

○ 前大司成金福漢等, 與前承旨李偰, 爲國母報讎, 擧義馳檄, 被囚于警務廳.

전 대사성 김복한(金福漢) 등이 전 승지 이설(李偰)과 함께 국모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날렸다가 경무청(警務廳)에 갇혔다.

○ 十二月, 上移御于露國公館. 時, 李範晉, 隱處于露舘, 要公使韋貝, 矯旨請援于露政府, 使人密告于上, 致有此幸也. 於是, 朝臣被讒刑戮, 出於範晉之專擅. 上之此幸, 竊恐意外也.

12월에 임금이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이범진이 러시아공관에 숨어 지내다가 공사 위패(韋貝)에게 요청하여 교지를 속여 러시아정부에 구원을 요청하고 사람을 보내 임금께 고하여 이번의 행차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정의 신하들이 참소를 받아 죽임을 당했는데 범진의 전횡에서 나온 것이다. 임금의 이번 행차는 내 생각에는 뜻밖이었다.

○ 丁酉三年. 冬十月, 上詣園丘壇, 告祀天地, 卽皇帝位, 定國號曰大韓, 建元光武, 受群臣賀.

정유(丁酉)년 3년. 겨울 10월에 임금이 원구단(園丘壇)에 이르러 천지에 고하여 제사를 올리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여 여러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 癸卯七年. 前兵使高永根, 斬于範善于日本廣島縣, 就囚于東京. 永根, 平生, 以忠孝自勵, 及乙未之變, 逆魁範善, 脫線在讐邦, 與同志魯允明, 誓爲國母報讎, 渡海搜索, 至廣島吳市秘舘, 直入刺之.

계묘(癸卯)년 7년. 전 병사 고영근(高永根)이 일본 광도현(廣島縣)에서 살해하여 동경에 갇히게 되었다. 영근은 평생 충효로서 스스로 힘썼는데, 을미사변 반역의 괴수 범선이 원수의 나라에 숨어 있자 동지 노윤명(魯允明)과 국모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 맹세하고 바다를 건너 수색하여 광도 오시의 비밀관사에 이르러 곧장 들어가 살해하였다.

○ 乙巳九年. 十一月, 與伊藤締結五條約. 前判敦寧閔泳煥, 疏爭不能得, 抽刀自殺. 血衣所貯, 代生翠竹數莖, 凜有不可犯之像. 翌日, 前議政趙秉世, 上遺疏, 仍飮藥死.

을사(乙巳)년 9년. 11월에 이등과 5조약을 체결하였다. 전 판돈녕 민영환(閔泳煥)은 상소하여 간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자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 피 묻은 옷을 묻은 곳에 대신 푸른 대나무 몇 줄기가 자랐는데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형상이었다. 다음날 전 의정 조병세(趙秉世)는 올릴 상소를 남기고 약을 먹고 죽었다.

○ 勉菴崔益鉉, 斥倭上疏, 押至于東京, 强迫不屈而死.

면암 최익현이 일본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경으로 압송되어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죽었다.

○ 丁未十一年. 六月, 上傳位于皇太子, 太子卽位, 尊上爲太皇帝, 建元隆熙.

정미(丁未)년 11년. 6월에 임금이 황태자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태자가 즉위하였고 임금을 높혀 태황제가 되었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고 하였다.

○ 冊英親王垠, 爲皇太子, 質于倭, 是皆伊藤之專權也. 國脈, 幾絶不絶, 而懸於讐魁之手也.

영친왕(英親王) 은(垠)을 책봉하여 황태자로 삼았는데 일본에 인질로 갔으니, 이 모두 이등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결과이다. 나라의 명맥은 거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으나 원수의 수괴의 손에 달려있었다.

○ 戊申二年. 春正月, 湖南義士金泰源, 擧義致檄, 召募民兵.

무신(戊申)년 2년. 봄 정월에 호남의사 김태원(金泰源)이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날려 민병을 모집하였다.

○ 自是擧義之士, 處處蜂起, 與倭兵相接, 勢不能敵, 襲擊則斬獲甚衆, 不爾則見敗.

이로부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왜병과 접전을 하였으나 형세가 대적할 수 없었다. 습격하면 목을 베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나 그렇지 않으면 패배를 당하였다.

○ 金泰源開戰于無等山麓, 大敗倭兵, 砲殺賊魁. 以是, 倭寇畏縮.

김태원은 무등산(無等山) 기슭에서 싸움을 시작하여 왜병을 대패시키고 화포로 적의 괴수를 살해하였다. 이 때문에 왜구는 두려워하며 위축되었다.

○ 翌日戰于魚登山, 遽爲倭兵所圍, 中丸而死. 是日, 大霧, 連四十餘里, 不辨尺地, 彼我不分, 而軍伍相失, 是乃天亡之也, 奈何? 其他擧義之兵, 不立奇功而立於無功之地, 故兵不聽簫而自敗.

다음날 어등산(魚登山)에서 싸움하였는데 갑자기 왜병에게 포위되어 탄환을 맞고 죽었다. 이날 큰 안개가 40여리를 연이어 지척의 땅도 구분할 수 없고 피아도 분별할 수 없어 군대의 행렬도 서로 잃어버렸으니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하리오? 기타 의병들은 큰 공을 세우지 못했고 공이 없는 지역에 서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피리를 듣지 못해 스스로 패하였다.

○ 己酉三年. 春正月朔朝, 靑與紅白三色虹, 圍之三匝而串日. 國民畏之, 咸謂之將亡之兆.

기유(己酉)년 3년. 춘 정월 초하루 아침에 청 ․ 홍 ․ 백 3색의 무지개가 3겹으로 둘러 해를 꿰었다. 국민들은 두려워하며 모두들 장차 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 秋七月, 倭寇掠殺義兵之歸農散處者, 派遣于方谷之間, 梳櫛之無了遺.

가을 7월에 왜구들이 의병 중에 농사를 지으려고 각지로 흩어진 자들을 노략질하거나 살해하고 작은 지역에도 파견하니, 빗질하여 조금도 남기지 않을 듯하였다.

○ 庚戌四年. 秋七月, 伊藤, 要其媚賊輩完用等, 以其三千疆土, 締結十年讓與之條約, 强迫上王之手, 捺璽印于條約之末. 自太祖壬申, 至于隆熙庚戌, 歷年, 凡五百十九年.

경술(庚戌)년 4년. 가을 칠월에 이등이 적에게 아첨하는 무리배 이완용(李完用) 등을 강요하여 삼천리 강토로서 10년 나라를 넘겨준다는 조약을 체결하고 상왕의 손을 위협하여 조약의 말미에 옥새를 날인하도록 하였다. 태조 임신부터 융희 경술까지 지나온 햇수가 무릇 519년이었다.

◎ 嗚呼痛矣, 國之興亡, 何代無之? 以善則興, 以惡則亡, 天理之常也. 然則高宗之爲政, 遽不可以爲善政? 亦不可以惡政? 保民如赤子, 或無暴虐之治, 亦無淫逸之樂矣. 如是而未免爲亡國之君, 何也? 朝有賢臣, 而不能親, 奸黨滿朝, 不能遠斥, 是所以奸黨之亡國也. 爲政四十餘年, 如洋羯諸國, 侵掠之. 甲申, 有宮中蕭墻之逆變. 壬申, 有內殿之變亂. 甲午, 有東匪之亂. 乙未, 亦有內殿之變喪, 而讐魁, 符同在朝廷逆臣. 絶其國脈於乙巳, 締結五條約, 是乃國祚已盡矣. 國之寶位已虛, 而坐于虛位, 以虛位, 稱大君主, 亦稱皇帝, 位旣虛, 而名益高爾. 凡無實之名, 高是爲病, 而病在國脈之中, 未嘗有胗瘳之上醫. 然而不亡者, 未或有之矣. 竊恐余生末紀, 痛歎窮廬, 何益於社稷之存亡乎? 祗切黍稷之歎而已.

오호라 애통하다. 나라의 흥망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으리오? 선정을 행하면 나라가 흥하고 악정을 행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천리의 상도이다. 그렇다면 고종의 정사는 선정을 할 수 없었는가? 또한 악정을 할 수 없었는가? 백성을 갓난아기처럼 보살피면서도 혹여 포학한 정치가 없었고, 또한 방종한 향락도 없었다. 이와 같으면서도 망국의 군주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조정에 어진 신하가 있었으나 친히 하지 못했으며 간악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나 멀리 내치지 못했으니, 이는 간악한 무리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 이유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40여년에 서양오랑캐 여러 나라가 침략하였다. 갑신에는 궁중에 내란의 역변이 있었고, 임신에는 내전의 변란이 있었고, 갑오에는 동학란이 있었고, 을미에는 내전의 변상(명성황후의 시해)이 있었으니, 원수의 괴수가 조정의 반역하는 신하들과 부화뇌동한 것이다. 나라의 명맥이 을사에 끊어져 5조약을 체결하니 이는 나라의 복이 이미 다한 것이다. 나라의 보위가 이미 비었는데 빈자리에 앉아 빈자리로서 대군주라 칭하고 또한 황제라 칭하니, 자리가 이미 비었는데도 이름은 더욱 높을 뿐이다.

무릇 실질이 없는 이름은 높으면 병이 되며, 병이 나라의 명맥 가운데 있으나 병을 낫게 하는 좋은 의원이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망하지 않는 것은 혹 있지도 않다. 내 생각에는 생애의 말기에 궁벽한 초가집에서 통탄한들 사직의 존망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다만 나라 잃은 슬픔에 간절히 탄식할 뿐이다.

◎ 在朝, 亦其無賢臣? 如鄭元容, 七十餘年立朝, 歷典內外, 聲績茂著. 自憲哲之廟, 至于高宗癸酉, 以治民之重, 自任矣. 凡醫藥, 在於病前, 則見效最速, 故上醫醫國之善術, 不外乎此矣, 不惟是已. 丙寅洋擾, 非一二而法, 德與佛侵之, 則是病國之初症也. 那可以不治病根, 而外治其政乎? 自後, 淸與倭露窺之, 而竟致方病大瘇矣. 嗚呼, 是亦天也, 今將孰尤?

조정에 또한 어진 신하가 없었겠는가? 정원용의 경우는 70여년 조정에 서서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명성이 훌륭하고 공적이 드러났다. 헌종과 철종부터 고종 계유년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다스리는 중책으로 자임하였다. 무릇 의원과 약이 병 앞에 있으면 효험은 가장 신속하다. 그러므로 훌륭한 의원이 나라를 고치는 좋은 의술은 이를 벗어나지 않으며 여기에 그치지도 않는다. 병인양요와 같은 난리를 한 두번 다스린 것도 아니지만, 독일이 프랑스와 침략하였으니, 이는 병든 나라의 초기 증상이었다. 어찌 병의 뿌리를 다스리지 않고 밖으로 정사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후 청국이 일본 ․ 러시아와 함께 엿보았으니, 마침내 큰 병을 앓게 되었다. 오호라, 이는 또한 하늘이 한 것이니 지금 장차 누구를 원망 하리오?

◎ 立朝賢臣, 不惟一二止. 如金炳德, 申應朝, 可以爲聖朝之名臣, 而炳德, 泣諫而被黜, 應朝, 拜相而不出, 是皆殿下用賢不親之致也. 復用甲申之逆黨而不能遠斥, 如完用輩, 滿朝弄權, 與讐賊相通, 懷忒心而不能察, 竟爲讐寇共逆酋之欺罔所奪. 亡國之名, 不歸於國君, 而孰能負之?

벼슬하는 어진 신하는 하나둘에 그치지 않는다. 김병덕(金炳德)과 신응조(申應朝) 같은 경우는 성조의 명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김병덕은 울면서 간하여 내쫓김을 당하였고 신응조는 상국의 벼슬을 제수했는데도 출사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전하가 어진 신하를 등않았고, 이완용 같은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 차서 권력을 농단하며 원수와 서로 내통하여 다른 마음을 품었으나 살피지 못하여, 마침내 원수들과 반역한 무리들의 기망에 의해 빼앗기게 되었다. 망국의 이름이 나라의 군주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누가 짊어지겠는가?

◎ 所謂在於山林之儒賢, 不揆國家之存亡, 但腦結朋比之習, 論非正論, 而以吾攻吾, 筆非正筆, 而以此誅彼, 可慨也已. 東西南北之外, 有人, 出於其中, 可以立言而證信於千秋者, 爲誰? 國亡之禍孼, 惟非一朝一夕, 辛壬甲黨比之異論, 釀成今日之禍, 而至於國亡之日, 尤有甚焉. 竊恐我東儒賢口傳熟習也. 嗚呼, 首陽大君, 與延礽君, 或無愧于讓寧大君乎? 首陽大君, 與周公攝政之治, 而輔幼主, 延礽君, 與周公之事文王, 而以正其天倫, 則東方千秋, 宜有如周公之大聖也. 是恐爲東方之不幸也. 苟或如周公之大聖, 出於我東五百年璿系之中, 則那可以三千疆土私有之物, 換之乎?

소위 산림의 유현에 있어서는 국가의 존망을 헤아리지 않고 다만 붕당을 짓는 습관을 고뇌하며 논의가 정론이 아닌데도 이것으로 저것을 공격하고 필법이 정필이 아닌데도 이것으로 저것을 죽이니 개탄 할만하다. 동서남북의 밖에서 어떤 사람이 그 가운데서 나와 천추에 말을 남기고 믿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나라가 망하는 화근은 다만 일조일석이 아니며 신임 당파의 이론으로부터 금일의 화를 양성하여 나라가 망하는 날에 이르렀으니 더욱 심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유현이 구전하여 익숙히 익힌 것이다. 오호라,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연잉군(延礽君)은 혹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수양대군은 주공이 섭정하고 어린 군주를 보좌한 것을 따르고, 연잉군은 주공이 문왕을 섬기고 천륜을 바르게 한 것을 따랐다면 우리나라의 천추에 마땅히 주공과 같은 큰 성인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의 불행이다. 진실로 혹여 주공 같은 큰 성인이 우리나라 500년 선계 중에서 나왔다면 어찌 삼천리강토를 사유물처럼 줄 수 있겠는가?

◎ 可笑李範晋之所欺誣也. 國亡之日, 迫頭, 念不及此, 只以擅權用事, 便作保身之妙策, 及其時宜之不容, 欺誣上聽, 大起禍獄, 是何國變也? 今夫金弘集, 魚允中, 立於奸黨之外, 祗要安社稷保黎民於危急之時, 而遇此不虞之變, 是可謂天聽之不明也. 余嘗聞蜂衛于花園, 好鳥, 不迎桃李之春, 鰍舞於大澤, 潛龍, 常思雲雨之化. 是以, 奸臣立朝, 忠賢退居, 小人滿朝, 君子隱處. 由是觀之, 弘集與允中, 可謂不察時宜, 而亦不能於行可止可也. 然禍不及其身, 幸矣.

가소롭다, 이범진의 속임수여. 나라가 망하는 날이 박두했는데도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다만 권력을 휘두르고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몸을 보전할 묘책을 만들었다. 급기야 시의가 용납하지 않자 임금의 귀를 속이고 크게 옥사를 일으켰으니, 이 무슨 나라의 변고인가? 지금 저 김홍집과 어윤중은 간악한 무리 밖에 서서 다만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백성을 보전하는 것을 요청하였는데도 이런 뜻밖의 변고를 만났으니, 이는 하늘의 들으심도 밝지 못하다 이를 만하다. 이 때문에 간신들은 조정에 서고 충현은 물러나며, 소인은 조정에 가득하고 군자는 은거한다. 이로서 보건대 김홍집과 어윤중은 시의를 살피지 못하고 또한 행하는 것이 좋을지 그치는 것이 좋을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이를만하다. 그러나 화가 그 몸에는 미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國亡之日, 亦其無忠臣烈士乎? 大東義士安重根, 年甫弱冠, 忠義忿激于五內, 卽以爲君報仇四字, 結於忠肝之中, 積一月而繡工, 追至伊藤於露國界蛤爾濱, 强作狙身之伏, 砲殺讐魁, 三射而一未有誤中之錯, 快雪社稷之羞. 嗚呼, 重根, 可以東方民族二千萬同胞, 結合爲一者也.

나라가 망하는 날에 또한 충신과 열사가 없었겠는가? 우리나라의 의사 안중근(安重根)은 나이 겨우 약관에 충의가 오장에 분격하여 ‘위군보구(爲君報仇 : 임금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 4자를 충성스런 마음속에 품고 한 달간 기술을 연마하여, 이등을 러시아국경 하얼빈(蛤爾濱)까지 추격하여 억지로 원숭이처럼 잠복하고 총으로 원수의 괴수를 살해하였다. 3발을 쐈는데 1발은 제대로 적중하여 사직의 수치를 씻어내었다. 오호라, 안중근은 우리나라 민족 이천만 동포를 하나로 결합시킨 자이다.

◎ 東方烈士李儁, 以高宗之秘命, 至于列國會議所巴里. 凡其大韓國之無參席券, 累累言辯, 倭寇辨明大韓旣爲讓與於日本, 未可得以參於列國公會席上. 列國人, 咸認其言, 乃控訴無處. 抽其佩刀, 直以割腹, 投是肝血一塊於會議席上, 滿座驚惶, 議無頭緖. 忠血直瀉, 如大雨暴下, 而冒濕倭寇之全體. 面目, 是半犬半羊而左黑右赤, 體髮, 是如狐如烏而內黑外赤, 犬羊未分, 狐烏難辨, 而是可人乎哉? 義肝忠血之妙化及人, 猶如是爾.

우리나라의 열사 이준(李儁)은 고종의 밀명으로 파리의 열국회의소에 이르렀다. 무릇 우리나라는 참석권도 없어, 수많은 언변으로 왜구는 우리나라가 이미 일본에게 나라를 내주었다고 변명하였으나 이준은 열국공회 석상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열국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인정하여 끝내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이준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바로 배를 갈라 간담과 피 한 덩이를 회의석상에 던지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 회의는 두서도 없었다. 충성스런 피는 곧장 쏟아져 큰비가 사납게 내리는 듯 하여 왜구의 온몸을 적셨다. 얼굴은 반은 개요 반은 양으로 왼쪽은 검고 오른쪽은 붉었으며, 모습은 여우인양 까마귀인양 속은 검고 겉은 붉었다. 개인지 양인지 구분할 수 없었고 여우인지 까마귀인지 분별할 수도 없었으니 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의로운 간담과 충성스런 피가 오묘하게 변하여 사람에게 미침이 오히려 이와 같았다.

林下隱士, 亦有儒學之忠賢, 巴里列國公會之日, 遣門人而傳達長書, 悉陳大韓國之欺奪情狀, 辭義之表裏曲盡, 最尤面陳. 列國人, 稱歎其義, 可有輔於李儁血陳之一助也. 於是, 列國人, 知其日本之欺奪, 以飛汽, 周覽韓國, 雖在窮巷僻村, 風掣日國旗. 以是, 列國人, 爰莫助之, 而血陳與書陳, 返不若彼之奸猾之計矣. 彼預知其韓國人, 有是擧, 令一國人, 建日旗於戶外, 預備凶計者也. 痛歎不已. 厥後, 俛宇郭鋾, 押囚于大邱, 被其太多困辱, 而至死不屈, 老衰形骸, 便是生鬼. 有儒學異論之士, 被其强削, 爲譏. 前者, 一次登對, 悉陳大學治平之道, 而以再徵不起, 稱其反命之小人, 余不知其所以也. 是宜黨比之所論爾, 不可以徵信者, 明矣. 檀紀四千二百卄七年野史抄.

재야의 은사 중에 또한 유학의 충현이 있으니, 파리 열국공회가 있던 날 문인을 파견하고 장서를 전달하여 일본이 우리나라를 속이고 침탈한 정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니, 말과 뜻이 표리를 이루어 곡진하였고 더욱 대면하고 이야기하는 듯하였다. 열국 사람들이 의로움을 칭찬하고 탄식하여 이준이 피로서 진술하는데 일조를 보좌할 수 있었다. 이에 열국 사람들은 일본이 속이고 침탈하고 기차로 한국을 두루 살펴 비록 궁벽한 거리와 마을이라도 일본 국기를 바람에 휘날리게 하였음을 알았다. 이 때문에 열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도울 수는 없었고, 피로서 진술하고 글로서 진술함도 도리어 저들의 간악하고 교활한 계략만은 못하였다. 저들은 한국 사람이 이러한 행동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일본인 한 사람을 시켜 문 밖에 일장기를 게양하게 하였으니 미리 흉악한 계획을 준비한 것이다. 통탄함을 그칠 수 없다. 그 후 면우(俛宇) 곽도(郭鋾)는 대구로 압송되어 갇혀 대단한 곤욕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굴하지 않았으니, 노쇠한 몰골은 곧 살아있는 귀신이었다. 유학의 논의를 달리하는 선비 중에 그에게 비난을 받은 자들은 기롱하기도 하였다. 전에 한번 임금과 독대를 하여 대학의 치국평천하의 도를 모두 진술하였다. 그런데 재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는 것을 칭하여 어명을 거역한 소인이라 하는데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이는 의당 붕당이 논한 것이니, 징험하여 믿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단기 4227년 야사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