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명

재 위
기 간

약                  사

23

고종(高宗, 1192~1259)

1213~1259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24

원종(元宗, 1219~1274)

1259~1274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삼별초의 난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25

충렬왕(忠烈, 1236~1308)

1274~1308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四世 설재문정공(雪齋文靖公) (1224~1298) 75

祖上의 德業 이었으니 責任이 무겁나이다

   꽃에 물주고 남은 물로 차 끓이던 옛날이 그리워 새들  잠든 사이에 집집마다 등불 깜박이던 金鞍洞에 잠시 다녀 왔는데 새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나 고향길에 흙내음 묻혀오니 내 집이 향기롭구나..........설재 할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워서..........   

 


[역문]雪齋文靖公行狀(설재문정공행장)

공(公)의 성(姓)은 정씨(鄭氏)요 관향(貫鄕)은 나주(羅州)다. 휘(諱) 가신(可臣)이니 初諱는 흥(興)이요

자(字)는 獻之며 號는 설재(雪齋) 또는 무온당(無慍堂)이라 하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부(父)의 諱는 松壽니 ①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文科)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

大夫 樞密院副使)며 조(祖)의 휘(諱)는 종산(宗産)이니 예빈경(禮賓卿)이며 증조(曾祖)의 휘(諱)는 해

(諧)니 군기감 판사(軍器監 判事)다.

비(妣)는 안의군부인(安義郡夫人) 정씨(鄭氏)로 ②내전숭반(內殿崇班) 선(瑄)의 딸이다. 송리종(宋理

宗) 고려(高麗) 고종(高宗) 십일(十一)년에 공(公)은 나주(羅州)의 남쪽 곡강면(曲江面) 시중동(侍中

洞)에서 출생(出生)하였다.-공(公)의 지위(地位)가 시중(侍中)이니 이로 인(因)하여 동명(洞名)이 됨-

후(後)에 금안동(金鞍洞)에서 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③영오(穎悟)하여 대인(大人)의 뜻이 있었으며 글 읽고 글을 지을 즈음에 자못 시배(時

輩)의 추중(推重)한바가 되었다. 일찍이 중(僧)인 천기(天琪)를 따라 서울에 왔으나 가난하여 의지

할 데가 없음으로 천기(天琪)에게 기식(寄食)하니 천기(天琪)가 어여삐 여겨 부자(富者)집 데릴사위

를 구(求)했으나 응(應)한 자(者)가 없더니 대부소경(大府少卿) 안홍우(安弘祐)가 허락(許諾)하고 약

속(約束)을 이미 정(定)한 후에 뉘우치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가난하나 사족(士族)으로 어찌 가히

향공진사(鄕貢進士)의 아들을 사위로 삼으리오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홍우(紅友)가 죽으니 집이 날로 가난하나 전에 허락(許諾)한지라 천기(天琪)가 선생

(先生)의 손을 잡고 도보(徒步)로 가니 일노구(一老嫗)가 문(門)에서 맞이하여 섶을 불살라 비치니

초옥수간(草屋數間)일 뿐이다. 천기(天琪)가 돌아와 슬퍼하면서 아! 정생(鄭生)이 이지경이 되었구

나 하였다.

 

고려고종(高麗高宗) 고종을미년(高宗己未年 1259)에 등제(等第)하여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충

렬왕(忠烈王) 3년정축(三年丁丑 1277)에 ④보문각(寶文閣) ⑤대제(待制)에 임명(任命)되니 그때 금성

산(錦城山) 신렬(神靈)이 당에게 나려 말하기를 진도(珍島)와 탐라(耽羅)의 정벌(征伐)에 내가 실(實)

로 힘썼는데 다만 장사(將士)들만 상(賞)을 내리고 내게는 록(祿)을 주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반

드시 나를 정녕공(定寧公)에 봉(封)하라 하니 공(公)이 그 말에 감동(感動)하여 王께 ⑥풍간(諷諫)하

여 정녕공(定寧公)에 봉(封)하고 또 그 고을 록祿(을) 거두어 쌀 오석(五石)을 해마다 그 사우(祠宇)

에 보냈다. 금성지(錦城誌에 나타남

 

충렬왕 4년무인(忠烈王 四年戊寅)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기게 되니 그때 이분희형제(李汾

禧兄弟)가 홍다구(洪茶丘)에게 아부하여 김방경(金方慶)의 죄(罪)를 ⑦온양(醞釀)하니 공(公)이 저정

(朝廷)에 같이 있기를 부끄럽게 여겨 돌아가 양모(養母)할 것을 빌기를 두서너 번에 이르니 王께서

⑧위유(慰諭)하여 보내니 여러 사람의 평판이 많았고 영운시(詠雲詩) 일절(一節)이 있다.

 

5년 을묘(乙卯 1279)에 다시 비서윤(秘書尹)으로 소환(召還)되고 필도적(必闍赤)이라 고쳤다.-곧 비

서성(秘書省)이다.- 이때 시관(試官)으로서 시부(詩賦)에서 백원항등(白元恒等) 삼십이인(三十二人)

명경(明鏡)에서 정시등(鄭時等) 삼십일인(三十一人) 국자시(國子試)에 2인(二人)을 뽑았다.

육년경진(六年庚辰 1280)에 승지감찰사(承旨監察司)에 소배(召拜)하니 말하기를 제도(諸道)의 ⑨안

염사(按廉使)나 별감직(別監職)은 관리(官吏)의 치적(治蹟)을 살피고 백성의 괴로움을 묻는데 있거

늘 지금은 모두가 상공(上供)을 빙자하여 백성에게 명주며 닥이며 가죽이며 비단이며 포육이며 과

실이며 명표지(名表紙)같은 물건을 거두어 권세가(權勢家)나 귀족(貴族)에게 뇌물로 보내어 자신

(自身)들이 부정(不正)을 하니 어찌 사람을 바르게 하리오 하고 모두 죄(罪)로 다스리기를 청(請)하

니 왕(王)이 공(公)에게 이르기를 닥은 땅에서 나오니 종이에 무슨 폐단(弊端)이 있으리오 하니 공

(公)이 대답(對答)하기를 신(臣)이 일찍이 전주서기(全州書記)때에 조지(造紙)가 심히 괴로운지를 아

는데 지금 벼슬이 높음에 종이를 많이 쓰니 부끄럽지 않으리오 하니

 

왕(王)께서 다만 명표지(名表紙) 같은 물건(物件)만 제(除)하라고 허락(許諾)하시었다. 왕(王)이 공

(公)에게 가(可)히 인신(人臣)이 될 만하다 하시고 가신(可臣)이란 이름을 하사(下賜)하셨다.

십육년(十六年) 경인(庚寅 1290)에 왕(王)이 원(元)나라에 있는데 대장군(大將軍) 원경(元卿)이 원(元)

나라에 가서 일본(日本)이 변방(邊方)을 범(犯)한다고 아뢰니 공(公)에게 병부(兵部)에서 조병(調兵)

하라 명(命)하고 왕(王)이 윤수길(尹秀吉)을 등용하여 말하길 장차 유신(儒臣)들을 종군(從軍)케 하

라하니 공(公)이 말하길 선왕(先王)께서 사람을 등용하되 각각 그 재능(才能)에 따르니 한 몸에 비

유한다면 좌우수(左右手)와 같은지라 상국(上國)의 법(法)에도 유호(儒戶)에는 군사(軍事)에 참여(參

與)치 않거늘 이제 유생(儒生)들에게 갑(甲)옷을 입히고 날카로운 병기(兵器)를 잡아 멀리 정역(征

役)에 종(從)케 하고자 하시니 성덕(盛德)이 덜릴까 두렵습니다 하니 王이 그렇다 하시고 이에 명령

(命令)을 파(罷))하시었다.

그 때 천변(天變)이 있어 오윤부(伍允孚)[일관(日官)임]가 소재도장(消災道場)을 설치(設置)하고 기

도하기를 청(請)하거늘 공(公)이 염승익(廉承益)에게 말하기를 물리치시오 수덕(修德)하기를 청(請)

하였다. 그때 불도(佛道)가 심성(甚盛)하여 경정(經筳)에서 항상 열반경(涅槃經)을 講한지라 공(公)

이 입시(入侍)하니 왕(王)께서 말씀하시기를 정문학(鄭文學)이 오니 빨리 열반경(涅槃經) 강의(講義)

를 거두라 하였다. 이해에 공(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도학(道學)이 침쇠(寢衰)됨을 근심하

여 기자묘(箕子廟)를 서경(西京)에 창립(刱立)하고 그 분영(墳塋)을 수치(修治)하고 정학(正學)의 연

원(淵源)을 열었다. [사략칠권(史畧七卷)에 나타남] 이때 시관(試官)으로 진사시(進士試)에서 최함

일(崔咸一)等 三十一人의 급제자(及第者)를 뽑았다.

十一月에 세자(世子)가 元에 가니 公이 政堂文學으로서 禮賓尹 閔漬와 같이 從行하여 集賢殿 태학

사(太學士)인 노재허형(魯齋許衡)이 ⑩程朱의 心學을 얻었다고 듣고 드디어 찾아가 질정하였다. 십

칠년신묘(十七年辛卯 129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탄절(聖誕節) 축하사(祝賀使)로 원(元)에

갔으며 九月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었다.

십팔년임진(十八年壬辰 1292)에 世子(忠宣)가 임금을 자단전(紫檀殿)에서 뵈옵는데 임금이 책상을

의지하여 누워서 묻기를 무슨 글을 읽었는고 하니 대답(對答)하기를 사덕(師德)인 정가신(鄭可臣)

민지(閔漬)등이 이곳에 있어 숙위(宿衛)의 겨를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질문(質問)

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대열(大悅)하여 말하기를 시험할 것이니 가신(可臣)과 같이 오라 함으로 세

자(世子)가 이끌고 같이 들어가니 임금이 벌떡 일어나 관(冠)을 쓰면서 꾸짖기를 네가 비록 세자(世

子)나 나의 외손자며 저이가 비록 배신(陪臣)이나 유자(儒者)다.

어찌 내가 관(冠)하지 않고 보리오 하고 자리에 앉으라 하고 본국풍속(本國風俗)과 대대(代代)로 전

(傳)해온 치란(治亂)의 자취를 묻되 진시(辰時)로부터 미시(未時)까지 이르되 듣기를 게을리 안했으

며 뒤에 공경(公卿)에게 명(命)하여 교지국(交趾國) 정벌(征伐)을 의논(議論)케 하되 조서(詔書)하기

를 고려세자(高麗世子)의 스승 이인(二人)과 같이 의논(議論)하라 하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교지(交趾)는 원이(遠夷)라 군사를 수고롭게 하여 토벌(討伐)함이 사신(使臣)을 보내여 招來한건만

같지 못하니 만일 그들이 고집하고 미혹하여 불복(不服)한다면 죄(罪)를 정벌(征伐)하여도 可할 것

이니 일거(一擧)에 만전(萬全)함 입니다 하고 임금의 뜻을 맞추니 임금이 대열(大悅)하여 공(公)에게

한림학사(翰林學士) 청직학사(淸直學士)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除授)하니[원(元)나라 세조(世

祖)때 직책이다] 그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로부터 ⑫권우(眷遇)가 날로 높아 자주 맛있는

음식을 下賜하고 혹은 추울 때는 ⑪초구(貂裘)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때 원(元)에서 제하(濟河)를

개통(開通)함에 승상이하(承相以下)가 모두 삼태기와 삽을 잡으니 세자(世子)가 종신(從臣)을 인솔

하고 조력(助力)함에 임금이 공(公)에게 직금단(織金緞)을 하사(下賜)하고 조금 있다 첨의찬성사(僉

議贊成事)로 임명(任命)하고 (21)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하였다.

 

二十年 갑오(甲午 1294)에 임금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살자만(撒刺蠻)을 시켜 선생(先生)에게 본국

(本國)에 귀부(歸附)한 년월(年月)을 물으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太祖皇帝[송개희이년(宋開禧

二年)에 비로소 칭제(稱帝)하니 묘호(廟號)는 태조(太祖)다]께서 삭방(朔方)에 조흥(肇興)할 때 대세

국(大勢國)이 있어[全國을 도와 정벌(征伐)한 공(功)] 자칭(自稱) 대료(大遼)라 하고 중도(中都)의 자

녀(子女)와 옥백(玉帛)을 약탈(掠奪)하여 강동성(江東城)으로 동주(東走)하여 항거수비(抗拒守備)하

니 조정(朝廷)이 합진찰자(哈眞札刺)을 보내 추토(追討)할 때 바야흐로 눈이 쌓이고 도로(道路)가 험

난(險難)하여 군량(軍糧)을 잇지 못하니 우리나라에서 듣고(高宗때임)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

를 보내여 병사(兵士)를 구제(救濟)하고 군사(軍師)를 호궤(犒饋)하여 그 추로(醜虜)를 섬멸하여 표

문(表文)을 올리고 동번(東藩)되기를 청(請)하니 태조(太祖)께서 경도처우(慶都處優)를 보내어 詔答

하고 인하여 論하기를 너의 나라 사람이 한서(寒暑)에 능치 못한데 진실로 어려운 때 使臣을 보내

와 方物을 貢獻하니 朕이 마땅이 사람을 시켜 취(取)하였다 하니

이일이 무인년(戊寅年 1218)에 있었으니 지금(至今)이 갑오년(甲午年 1294)으로 무릇 77年이나 되었

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세자(世子)를 자단전(紫檀殿)에서 소견(召見)하여 공(公)이 따르니 임금의

안전(案前)에 물건이 있는데 대원소예(大圓小銳)하여 삭갈하고 깨끗하고 굳어 높이가 일척오촌(一

尺五寸) 가량으로 안에는 술 두어 말을 담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마가발국(藦訶鉢國)에서 바친 낙타

조(駱駝鳥)의 알이다. 임금이 세자(世子)에게 명(命) 하여 보라하고 인(因)하여 세자(世子) 및 종신

(從臣)에게 술을 하사(下賜)하고 공(公)에게 명(命)하여 시(詩)를 지으라 하니

 

공(公)이 바로 시(詩)를 지어 바치기를

 

「알 크기가 도가지와 같으니 가운데 불로춘(不老春)을 감추었네 원(願)컨데

천세수(千歲壽)를 잡아 훈훈한 기운이 해동인(海東人)에 미치리라」

 

하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어갱(御羹)을 내리니 황성(皇城)의 선비들이 교유(交遊)하기를 원(願)한

자(者)가 심히 많았고 세자(世子)가 더욱 경중(敬重)하여 무릇 입견(入見)할 때는 반드시 공(公)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였다. 임금께서 일찍 료동(遼東)의 수정도(水程圖)를 보고 水驛을 설치(設置)코자

공(公)에게 말하기를 치국(治國)에서 생산(生産)되는 것이 오직 쌀과 포(布)니 육로(陸路)로 실어온

다면 길이 멀고 물량이 무거워 실어온 것이 소비(消費)에 도움이 못되니 이제 강남행성(江南行省)

을 설치(設置)하여 좌수사(左水使)로 해운(海運)을 주관(主管)케 하여 해마다 략간(畧干)의 곡식(穀

食)과 포필(布匹)을 가져오게 한다면 어찌 국용(國用)에 보태고 동인(東人)들이 여기에 사는데 보탬

이 넉넉지 않으리오 하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고려(高麗)는 산천(山川)과 임수(林藪)가 십분

(十分)의 칠(七)을 차지하여 경직(耕織)의 노력(勞力)으로 겨우 구체(口體)의 봉양(奉養)을 지탱하니

하물며 그 사람들이 해로(海路)에 익숙치 못하니 신(臣)의 좁은 소견(所見)으로는 혹 불편(不便)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께서 그러겠다고 하시었다. 21年乙未(1295)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

事)에 임명(任命)되었다. 사향시(思鄕詩)가 있으니

 

「 海東의 南쪽에 금성산(錦城山)이 있는데 내집이 山아래 草屋 두어 칸이네 巷柳와

園桃를 모두 손수 심었으니 봄이 오면 응당 主人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일세」

 

하였다. 임금이 말하길 卿이 사향(思鄕)의 마음이 있다하고 특별히 사랑하여 金帶와 金鞍과 白馬를

下賜하여 보냈다.(公이 사는 동호(洞號)가 이로써 傳함) 東還後 十月에 僉議中贊에 任命되고 試官

으로 進士試에서 姜暄등 27人의 及第子를 뽑았다. 22年丙申 겨울에 副知密職 崔沖紹가 世子의 命

令으로 장차 公主의 穹廬를 設置코자 수창궁(壽昌宮)에 나아가 축장료원(築墻繚垣)하여 크게 工役

을 일으키니 때가 바야흐로 얼어 흙을 취(取)함에 한구덩이도 팔곳이 없어 사람을 이 쟁분(爭奔)하

여 압사자(壓死者)가 많았고 또 沿路의 墻屋을 모두 개와를 덮으라하여 沖紹와 이지씨(李之氏) 崔

有渰 박의(朴義)등의 독역(督役)이 심급(甚急)하니 백성이 모두 괴로워 함으로 공(公)이 세자(世子)

에게 청(請)하여 역사(役事)를 중지(中止)케 하였다. 22년 정유(丁酉 1297)에 첨의중찬(僉議中贊) 세

자사(世子師)가 되었으며 24年戊戌(1298) 3月에 글을 올려 퇴사(退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지 않고

五日에 한번씩 조회(朝會)하기를 명(命)하였다. 五月에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水

司公 우복사(水司公 右僕射) 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참지광정원사(參知

光政院事)를 더하였으며 六月 병진삭(丙辰朔) 초사일(初四日) 기미일(己未日)에 졸卒(하)니 국인(國

人)이 경도(驚悼)하고 문정(文靖)이라 사시(賜諡)하였다.

 

공(公)의 성품(性品)이 정직(正直)하고 단엄(端嚴)하며 처사(處事)에 정밀(情密)하고 정방(政房)에 있

을 때는 전고(典故)에 ⑬암련(諳鍊)하였으며 ⑭제품(題品)과 ⑮전주(銓注)에 모두 물의(物議)에 따랐

으며 ⑳속문(屬文)을 잘하여 한 때 ⑯사명(辭命)이 그분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일찍이 한번 감시

(監試)를 관장(管掌)하였고 다시 ⑰지공거(知貢擧)때에 득인(得人)하였다고 일컬었다.

지위(地位)가 정승에 이르렀으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서생(書生)과 같이 하니 조야(朝野)가 태평

(太平)을 상망(想望)하였다. 居處한 편액(扁額)을 무온당(無慍堂)이라 하고 뜻을 흥학(興學)에 두고

날마다 어진 사대부(士大夫)들과 경전(經傳)을 강습(講習)하며 첫째로 효제(孝悌)의 도리(道理)와 성

학(聖學)의 연원(淵源)을 밝히니 원근(遠近)이 ⑱흡연(翕然)하였으며 또 당시(當時)의 명유(名儒) 김

문숙공주정(金文肅公周鼎)과 윤문현공보(尹文顯公珤)로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여 주야(晝夜)로

같이하였으며 퇴궐(退闕)한 틈에는 성경현전(聖經賢傳)을 강론(講論)하니 당시(當時) 사람들이 그

당堂(을) 이름 하되 삼현당(三賢堂)이라 하였다.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과 세계도(世系圖)를 찬撰(하)여 바치니 뒤에 충렬왕(忠烈王)이 민지(閔漬)

에게 명(命)하여 수찬(修撰)케 하였다. 국가(國家)에 일이 많아 겨를을 얻지 못했으나 뒤에 권부(權

府)와 찬성(撰成)을 동교(同校)하여 이름을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 하고 호경대왕(虎景大王)

으로부터 원왕(元王)에 이르니 나누어 칠권(七卷)을 만들었다. 민지전(閔漬傳)에 나타남

 

충숙왕(忠肅王) 17年(1330)에 문정공(文靖公)과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을 충선왕묘(忠宣王

廟)에 배향(配享)하였으며 경기도(京畿道) 마전현(麻田縣)의 충선실(忠宣室) 공(公)을 배향(配享)함

이조(李朝) 숙종(肅宗) 무진년(戊辰年)(1688)에 사림(士林)들이 금안동(金鞍洞)에다 사우(祠宇)를 건

립(建立)하였다. 계묘(癸卯) 춘(春)에 경향각지유론(京鄕各地儒論)으로 서원(書院)을 영안촌(永安村)

으로 이건(移建)하였음)

이조(李朝) 순조(純祖) 9年 기사(己巳)(1809)에 사림(士林)들이 함평오수산하(咸平鰲首山下) 외장동

(外藏洞)에다 오산사(鰲山祠)를 지었다. 지대기유년(至大己酉年)(1309)에 충렬왕(忠烈王)이 ⑲훙薨

(하)고 충선왕(忠宣王)이 즉위(卽位)하여 하교(下敎)하되 그전 지원신묘년(至元辛卯年)(1291)에 내가

정가신(鄭可臣)과 유청신(柳淸臣)과 박연(朴演)들로 자단전(紫檀殿)을 배알(拜謁)하고 친(親)히 성지

(聖旨)를 받드니 이르되 동성(同姓)끼리 통혼(通婚)치 못함은 천하(天下)의 도의(道義)다. 하물며 너

의 나라가 문자(文字)를 알고 천자(天子)의 도(道)를 행(行)하니 응당 동성(同姓)을 구(求)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 때 이수구(李守丘)의 전설(傳說)과 유청신(柳淸臣)의 전역(傳譯)과 정가신(鄭可

臣)의 거행(擧行)이 있었는데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고쳤으니 지금부터 후로는 문무양반가(文武兩

班家)에서 동성(同姓)과 외가사촌(外家四寸)은 장가들지 못하며 구혼(求婚)을 듣지 않을 것이오. 국

내명족(國內名族) 십오대가(十五大家)는 왕실(王室)과 세세(世世)로 통혼(通婚)을 허여(許與)한다 하

였다.

 

십오대가(十五大家)는 즉(卽) 경주박씨(慶州朴氏), 경주김씨(慶州金氏), 나주정씨(羅州鄭氏), 청주정

씨(淸州鄭氏), 평강채씨(平康蔡氏), 당성홍씨(唐城洪氏), 황려민씨(黃驪閔氏), 고흥유씨(高興柳氏),

풍천임씨(豊川任氏), 철원최씨(鐵原崔氏), 해주최씨(海州崔氏), 공암허씨(孔巖許氏), 횡천조씨(橫川

趙氏)가 아울러 누세(累世) 훈재(勳宰)의 가문(家門)이므로 이같이 하교(下敎)하였다.

 

공(公)의 덕행(德行)과 유범(儒範)이 당세(當世)에 휘영(輝暎)하여 본국(本國)과 원(元)나라에 소중히

여김을 보여 모두 고려지(高麗志)와 고려사(高麗史)며 열전(烈傳)과 명신록(名臣錄)에 실려 모두 신

사(信史)가 되니 다시 기록(記錄)치 않으며 동문선(東文選)에 백복사원항(白僕射元恒)이 공(公)에게

보낸 시(詩)가 있으니 이르기를「자리는 초선(貂蟬)에 달하였고 德은 더욱 빛나니 나라를 경영한

묘책(妙策) 삼장(三章)보다 났구나. 요(要)컨데 말속(末俗)으로 하여금 우리 도(道)를 알게 하니 조정

(朝廷)에서 물러나 길이 만권당(萬卷堂)을 열었네」하였으니 대개 공(公)의 실록(實錄)이다. 장단부

강동면 기곡촌 안산 묘좌(長湍府 江東面 基谷村 案山 卯坐)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아직도 정대구(鄭岱坵) 정능동(鄭陵洞)이라 전(傳)하여 후인(後人)들이 일컫는다.)

 

배(配)는 삼한국(三韓國) 대부인(大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 대부소경홍우(大府少卿弘祐)의 딸로

태어 묘(墓)는 공영(公塋)에 종장(從葬)하였다. 오남(五男)이니 탁(倬)은 재신(宰臣)이요 전佺(은) 대

호군(大護軍)이요 길(佶)은 문과(文科)로 개성소윤(開城少尹)이며 이판(吏判)에 추증(追贈)되었고 억

(億)은 지유장(指諭將)이며 엄(儼)은 이부상서(吏部尙書)요 삼여(三女)는 박원굉(朴元宏) 만호(萬戶)

와 임저(林貯) 중랑장(中郞將)과 도대(都大) 승상(承相)에게 출가(出嫁)하였으며 손증이하(孫曾以下)

는 번창(蕃昌)하여 다 기록(記錄)치 않는다.

 

 

 

[역문] 文靖公年譜(麗史抄)

▫ 송(宋)나라 리종(理宗) 가정중(嘉定中)에 출생(出生)하셨으며 고려(高麗) 고종(高宗) 기미년(己未

年) (46年 서기(西紀 1259)에 등제(等第)함.

 

▫ 충렬왕(忠烈王) 3年 정축(丁丑) 서기(西紀 1277)에 보문각(寶文閣) 대제(待制)에 임명(任命)함.

▫ 충렬왕(忠烈王) 4年 무인(戊寅) (서기(西紀 1287)에 도원사(都元師)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삼별초

(三別抄)를 호남(湖南)에서 정벌(征伐)하고 군사(軍師)를 금성산(錦城山)에 주둔(住屯)하였는데 산신

(山神)이 현몽(現夢)하여 향하는 곳에 명조(冥助)함이 많았다. 개선(凱旋)하여 보문각(寶文閣) 대제

(待制)에 임명(任命)되었다. 금성산신(錦城山神)이 무당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진도(珍島)와 탐라(耽

羅)의 정벌(征伐)에 내가 실로 힘이 컸었는데 다만 장사(將士)들에게만 상(賞)을 주고 나에게는 록

(祿)을 주지 아니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반드시 나를 정녕공(定寧公)에 봉(封)하라 하니 공(公)이 왕

(王)에게 간하여 금성산신(錦城山神)을 정녕공(定寧公)에 봉(封)하고 또 그 읍(邑)의 록미(祿米) 오석

(五石)을 거두어 해마다 그 사우(祠宇)에 들여보냈다. 이 해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자리를 옮

기게 되었다. 그 때 이분희(李汾禧) 형제(兄弟)가 홍다구(洪茶邱)에게 미부(媚附)하여 김방경(金方

慶)에게 죄(罪)를 꾸며대어 대청도(大靑島)에 유배(流配)시키니 공(公)이 동조(同朝)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돌아가 양모(養母)하기를 비니 재삼(再三)에 이르러 왕(王)이 위유(慰諭)하여 보내니 물론(物

論)이 많았다. 그가 구름을 보고 읊은 詩에 이르기를

 

「일편재이상생(一片纔泥上生) 동서남북기종횡(東西南北己從橫)

위위림우소군고(謂爲霖雨蘇群稿) 공엄중천일월명(空掩中天日月明)」

(한 쪼각이 겨우 진흙 위를 쪼차 생기어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마음대로 다니는구나

이르노니 림우(霖雨)되어 군고(群稿)를 살리거나 속절없이 중천(中天)에

일월(日月) 밝음을 가리네)하였다.

 

▫ 5年 기묘(己卯) 서기(西紀 1279)

비서윤지공거(秘書尹知貢擧)로서 시부(試賦)에 백원항(白元恒)等 31人과 명경(明經)에서 정시(鄭時)

等 31人과 국자시(國子試)에서 2人을 취(取)하였다.

 

▫ 6年 경진(庚辰) (西紀 1280)

왕(王)이 공(公)으로써 가히 인신(人臣)이 된다고 하여 이름을 가신(可臣)이라 내리고 승지감찰사(承

旨監察司)에 임명(任命)하니 말하기를 제도(諸道)의 안염사별감(按廉使別監)은 직책(職責)이 관리

(官吏)의 치안(治安)을 살피고 백성의 괴로움을 묻는데 있거늘 지금 모두가 상공(上供)을 빙자하여

백성에게 명주 닥 가죽 비단 포(脯) 과(果) 명표지(名表紙)등 물건을 거두어 권세가(權勢家)에게 뇌

물로 보내어 자신(自身)이 부정(不正)하니 어찌 능히 사람을 바르게 하리오 하고 모두 죄(罪)로 다

스릴 것을 청(請)하니 왕(王)이 공(公)더러 말하기를 저楮(는) 땅에서 생기니 종이가 무슨 폐단이 있

으리오 하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신(臣)이 일찍 전주관기(全州管記)로써 조지(造紙)가 심히

괴로움을 아는데 지금 고관(高官)이 종이를 또한 많이 쓰니 부끄러움이 없지 아니 할 것이라 하니

王이 다만 명표지(名表紙)등 물건만 제(除)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글

을 올려 퇴직(退職)하기를 비니 승지(承旨)로서 교유(敎諭)를 기초(起草)하였다.

 

▫ 7年 신사(辛巳) 서기(西紀 1281)

왕(王)이 합포(合浦)에서 거동하니 우부승지(右副承旨)로 호종(扈從)하였다.

 

▫ 10年 갑신(甲申) 서기(西紀 1284)

밀직학사(密直學士)로서 하정사(賀正使)로 원(元)나라에 갔다.

 

▫ 13年 정해(丁亥) 서기(西紀 1287)

경상도안염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으며 12月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감찰대부(監察大夫)

로 옮겼다.

 

▫ 14年 무자(戊子) 서기(西紀 1288)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 16年 경인(庚寅) 서기(西紀 1290)

왕(王)이 원(元)나라에 있는데 대장군(大將軍) 원경(元卿)이 元나라에 가서 일본(日本)이 변방(邊方)

을 침범(侵犯)한다고 아뢰니 공(公)에게 병부(兵部)에서 조병(調兵)하라 명(命)하고 왕(王)이 윤수길

(尹秀吉)의 말을 신용(信用)하여 장차 유신(儒臣)에게 종군(從軍)케 하려고 하니 공(公)이 말하되 선

생(先生)께서 사람을 씀에 각각 그 재주를 따르니 몸에 비유한다면 좌우(左右)의 손과 같은지라 원

(元)나라 법(法)에도 유호(儒戶)는 군사(軍事)에 관여하지 아니하니 이제 유생(儒生)으로 하여금 갑

옷을 입고 칼을 잡고 싸움에 원종(遠從)코자 한다면 성덕(盛德)이 이그러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王

이 그 말을 옳게 여기어 파罷(하)기를 명(命)하였다. 그때 천변(千變)이 있었는데 오윤부(伍允孚)가

소재도장(消灾道場)(재앙을 소멸하는 도장(道場))을 설치(設置)하자고 청(請)하니 공(公)이 염승익

(廉承益)에게 말하기를 천변(天變)을 어찌 불법(佛法)으로 능히 물리치리오 어찌 덕(德)닦기를 청

(請)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해에 정당문학지공거(政堂文學知貢擧)로서 진사(進士) 최함일(崔咸一)

等 31人에게 급제(及第)를 내리였다. 11月에 세자(世子)가 원(元)나라에 가니 공(公)이 정당문학(政

堂文學)으로서 예빈윤 민지(禮賓尹 閔漬)와 같이 종행(從行)하니 집현전(集賢殿) 태학사(太學士) 노

재허형(魯齋許衡)이 공(公)께서 정주(程朱)의 심학(心學)을 얻었다는 소리를 듣고 드디어 가서 질문

하고 형衡(이) 창졸간에 칭장(稱獎)을 더하고 다리고가 벗을 삼아 전傳(의) 성경(誠敬)의 깊은 뜻을

다 읽었다.

 

▫ 17年 신묘(辛卯) 서기(西紀 1291)

9月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와 세자(世子)의 스승이 되었다.

 

▫ 18年 임진(壬辰) 서기(西紀 1292)

세자(世子)가 원제(元帝)를 자단전(紫檀殿)에서 뵈이니 원제(元帝)가 책상을 기대고 누워서 네가 무

슨 글을 읽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유 정가신(師儒 鄭可臣)과 민지(閔漬)등이 이곳에 있는데

숙위(宿衛)의 틈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질문한다고 하니 원제(元帝)가 크게 기

뻐하여 말하기를 시험해 볼 것이니 가신(可臣)을 불러오라 함으로 세자(世子)가 데리고 같이 들어

가니 원제(元帝)가 벌떡 일어나 관(冠)을 하고 말하기를 너는 비록 세자(世子)이나 나의 외손자(外

孫子)요 저는 비록 배신(陪臣)이나 유학자(儒學者)다 어찌 나로 하여금 관(冠)을 쓰지 않고 보게 하

는가 하고 인하여 자리를 내주고 본국풍속(本國風俗)과 세대상전(世代相傳)과 리란(理亂)의 자취를

물으니 진시(辰時)로부터 미시(未時)에 (오전(午前) 9時부터 오후(午後) 3時 사이임)이르도록 듣기를

게을리 아니하였다. 그 때 제하(濟河)를 개통(開通)했는데 승상이하(承相以下) 모두 가래와 삽을 잡

고 세자(世子)는 종신(從臣)을 거느리고 일을 도우는데 원제(元帝)가 공(公)에게 직금단(織金段)을

하사(下賜)하였고 후에 공경(公卿)에게 명(命)하여 교지국(交趾國)의 정벌(征伐)을 의논(議論)케 하

고 조서하기를 고려(高麗)의 세자사(世子師) 2人과 같이 의논하라 하니 공(公)이 대답하기를 교지

(交趾)는 먼 곳 오랑캐니 군사를 수고로이 하여 토벌(討伐)한 것 보다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초래

(招來)함 만 같지 못하니 만일 그가 고집하여 불복(不服)하면 죄(罪)를 물어 칠 것이니 가히 일거(一

擧)에 만전(萬全)이라고 대답하여 임금의 뜻을 맞추니 이에 공(公)에게 한림학사(翰林學士) 가의대

부(嘉義大夫)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수여(授與)하니 시인(時人)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로부터 임금

의 총애가 달로 융숭하여 자주 진선(珍膳)(맛있는 음식)을 거두어 하사하니 어떤 때는 추운날씨에

초구(貂裘)(돈피로 만든 옷)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 20年 갑오(甲午) 서기(西紀 1294)

세조황제(世祖皇帝)가 붕(崩)(임금의 죽음)함에 왕(王)이 공주(公主)와 같이 빈전(殯殿)에 제(祭)를

올리는데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조선(朝鮮)이 멀지 않어 궁정(宮庭)에 서서 바랬더니 죽었다

는 소식이 갑자기 돌아오니 어찌 정호궁(鼎湖宮)의 애모(哀慕)함을 다하리오, 꿈인지 생시인지 엎

어지며 넘어져서 애오라지 비박(菲薄)한 의례(儀禮)를 닦으노니 흠향(歆饗)의 은혜 내리기를 바랍

니다.』 장차 공(公)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는데 여러 대신(大臣)이 정지시키고 말하기를 어찌 마땅

히 제후(諸侯)의 예禮(로)써 천자(天子)를 제(祭)지내리오 하였다. 성종황제(成宗皇帝)가 즉위(卽位)

하여 학사(學士) 살자만(撒刺巒)을 시켜 본국(本國)에 귀부(歸附)한 년월(年月)을 물으니 왕(王)이 공

(公)을 시켜 글을 올려 대답(對答)하니 원제(元帝)가 세자(世子)를 편전(偏殿)으로 불러보게 하니 공

(公)이 배종(陪從)하였다. 임금의 안전(案前)에 물건이 있는데 크게 둥글고 조금 뾰족하며 색깔이

깨끗하여 높이가 한자 다섯치 가량인데 속에는 술 두어 말을 담을 만하니 이는 마가발국(藦訶鉢國)

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다. 세자(世子)에게 명(命)하여 보게 하고 인하여 세자(世子)와 종

신(從臣)에게 술을 내리고 공(公)에게 시(詩)를 지으라 명(命)하니 바로 소리를 응(應)하여 대답(對

答)하기를

 

『유란대여옹(有卵大如甕) 중장불노춘(中藏不老春)

원장천세수(願將千歲壽) 훈급해동인(醺及海東人)』

 

(달걀 크기가 항아리만 하는데 속에는 불노춘(不老春)을 감추었네. 원(願)하건데 천세수(千歲壽)를

누리시어 훈훈한 덕화(德化)가 해동인(海東人)에게 까지 미치게 하소서)하니 원제(元帝)가 가상히

여겨 임금의 음식을 거두어 내리니 성(城)안의 선비들이 그 이름을 듣고 사귀기를 원(願)하는 자가

많으니 세자(世子)가 더욱 공경하고 중(重)하게 여기었다. 그 뒤로부터는 세자(世子)가 들어가 임금

을 볼 때는 반드시 공(公)을 따르게 하였다. 원제(元帝)가 일찍 요동수정도(遼東水程圖)를 보고 수

역(水驛)을 설치(設置)코자 하여 공(公)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에서 생산(生産)되는 것이 쌀과 배

(布)니 육지(陸地)로 실어 나른다면 길이 멀고 물건이 무거우니 실어온 것이 소비(消費)를 감당하지

못하니 이제 너를 하남행성(河南行省) 좌승사(左承使)로 임명(任命)하여 해운(海運)을 주관(主管)케

하고자 하니 한해에 약간의 곡필(斛匹)만 가져온다면 어찌 국용(國用)에 보탤 뿐 이리요 가히 해동

(海東)에서 와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주어 쓰게 하리라 하니 대답(對答)하기를 고려(高麗)의 산천(山

川)과 임수(林藪)가 전체면적(全體面積)의 십분(十分)의 칠(七)을 차지하여 농사짓고 길삼하는 수고

로 겨우 먹고 살아감을 지탱하고 하물며 그 사람들이 바닷길에 익숙치 못하니 신(臣)에게 관리(管

理)케 함으로서 혹시 불편(不便)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원제(元帝)가 그러겠다고 하였다.

 

▫ 21年 을미(乙未) 서기(西紀 1295)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에 임명(任命)되었다.

사향시(思鄕詩)가 있으니

 

『해동남유금성산(海東南有錦城山) 산하오려초수간(山下吾廬草數間) 항

유원도친수종(巷柳園桃親手種) 춘풍응대주인환(春風應待主人還)』-해동(海東)의 남쪽에 금성산(錦

城山)이 있으니, 산(山) 아래 우리 집 두어 칸 초가(草家)집이 있네. 마을에 버드나무 동산에 복숭아

를 친히 손수 심었으니 봄바람도 당연히 주인(主人)오길 기다리겠지

 

라 하였다. 원제(元帝)가 말하

기를 고향을 생각한 마음이 있다하고 금안(金鞍)과 금대(金帶)를 하사(下賜)하여 보내니 十月에 우

리나라로 돌아왔다. 중찬지공거(中贊知貢擧)에 임명(任命)되어 진사(進士) 강훤등(姜暄等) 27人에

게 급제(及第)를 내리고 등용하였다.

 

▫ 22年 병신(丙申) 서기(西紀 1296)

하성절(賀聖節)로 원(原)나라에 갔다. 그때 부지밀직(副知密職) 최충소(崔沖紹)가 세자(世子)의 명령

(命令)으로 공주(公主)의 큰집을 수창궁(壽昌宮)터에다 지으려고 크게 공사(工事)를 일으키니 땅이

바야흐로 얼어서 흙을 취(取)할 곳이 없어 한 구덩이를 파면 사람들이 다투어 몰려와서눌려 죽은

자가 많았으며 또 연로(沿路)의 담장이나 집을 모두 개와를 덮으라고 令을 내리고 이지씨(李之氏)

최유흡(崔有潝)등이 일 감독을 너무 급(急)하게 하니 백성이 모두 괴로워한지라 공(公)이 그 일을

중지(中止)할 것을 왕(王)에게 아뢰었다.

 

▫ 23年 정유년(丁酉年)에 첨의중찬(僉議中贊) 판전이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 24年 무술(戊戌) 서기(西紀 1298)

삼월(三月)에 글을 올려 물러갈 것을 비니 허락하지 않고 五日에 한 번씩 조회에 참석하라 명(命)하

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수사공우복사(守司空右僕

射) 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를 더하였다. 6월

병진년삭(丙辰年朔) 사일기미(四日己未)에 졸(卒)하니 문정(文靖)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공

(公)의 성품(性品)이 정직단엄(正直端嚴)하고 처사정밀(處事精密)하여 정방(政房)에 있을 때 가만히

전고(典故)를 익혀 제품(題品)과 전주(銓注)를 거기에 알맞게 처리(處理)하니 한때 사령(辭令)이 그

손에서 많이 나왔다. 공(公)이 거처(居處)한 곳에 편액(扁額)하기를 무온당(無慍堂)이라 하고 날마

다 어진 사대부(士大夫)들과 고금(古今)을 의논(議論)하였으며 비록 대관(大官)에 이르렀으나 행동

거지(行動擧止)는 서생(書生)과 같았고 총재(冢宰)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태평(太平)을 상망(想望)하

였으며 조정(朝廷)에서 물러나 한가함에 윤문현공보(尹文顯公珤)와 김문숙공주정(金文肅公周鼎)으

로 솥발처럼 앉아 강론(講論)하니 세상에서 삼현당(三賢堂)이라고 하였다. 일찍 천추금경록(千秋金

鏡錄)을 지었고 왕(王)이 민지(閔漬)와 권부(權溥)에게 명)命)하여 같이 교정(校正)하여 찬성(撰成)하

니 편년절요(編年絶要라)고 이름 하였다. 복사(僕射)인 원항(元恒)이 공(公)에게 보낸 시(詩)에 이르

기를 위극초선덕유광(位極貂蟬德愈光) 경방묘책승삼장(經邦妙策勝三章) 요령말속지오도(要令末俗

知吾道) 조퇴장개만권당(朝退長開萬卷堂)『位極貂蟬德愈光 經邦妙策勝三章 要令末俗知吾道 朝退

長開萬卷堂』-벼슬은 초선관(貂蟬冠)에 이르렀고 德은 더욱 빛나네 나라를 경영한 묘책삼장(妙策

三章)보다 승(勝)하구나 백성들에게 우리 도(道)를 알게 함을 필요로 하여 조정(朝廷)에서 물러나

오래도록 만권당(萬卷堂)을 열었네 하였으니 대개의 실록(實錄)이다. 장단(長湍) 강동면(江東面) 기

곡(基谷) 정능동(鄭陵洞) 묘좌원(卯坐原)에 예장(禮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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