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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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昺璿)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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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城의 솔바람소리

香村 許 演

 

달 밝은 밤이면

금성에 솔바람이 분다.

다보사 솔짝에 솔바람이 분다.

일천팔백 구십삼년 동지 섣달

민종렬공이 도임하자

분묘 앞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렸것다.

예를 드리고

고을 어른들을 초빙

금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했거니

“호남의 웅부요

도학과 충절이 우뚝 솟았고

문장과 명신을 많아 냈기에

의당 그 유풍이 향기롭다“고

그 위에 향약을 밝히여

덕업을 권하고 과실을 규제

환난을 만나면

서로 구제키로 했으니

어찌 선과 악을

구별치 않았으랴.

그 무렵

도처에서 관의 적폐로 시달려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다.

나라 안의 정치는 문란해지고

수탈 방법도 갖가진데도

화적들이 횡행하는 하면

전라도 지방은

대한발이 거듭되매

동학은 농민층을 파고 들어

교세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천팔백 구십사년

고부(古阜)군수 조병갑의 횡포

절정에 달하여

민초들의 원한은

하늘에 닿아

민란의 봇물이 터졌다.

군중의 울분은

마치 마른 섶에

불을 붙인듯 파급되어

고을마다

풍전등화처럼 위태울 때

그들은 나주를 점거하여

본거지로 삼으려 했으나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함평 쪽으로 몰려가며

성주에게 보낸 서찰이 오만하기로

그 후면에

열여섯자의 답서를 보내어

그들을 멀리 물리쳤다.

명분이 없는 거사

법으로 참해야 하며

도리에 어긋난 말 듣기도 싫다“고

장성을 휩쓴 이들은

파죽지세로 내달아

전주성을 무찔러 점령하고

남쪽 오십 고을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오직 금성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철석같은 수비군은

한 치의 방심도 하지 않고

서문의 승리에 이어

사창 싸움에서 이기고

용진산 전투에서 그들을 위압

고막원에서도 섬멸전을 펼쳤으며

뒤이어 야습을 감행해온 그들을

무난히 몰아내었다.

성안에서는

어린애와 부녀자까지

돌을 주워 모아

방어에 힘썼으니

천혜의 지리롸

한결같은 인화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를 이루었다.

유림들도 의를 내세워

붓을 들고 베기를 결의했으며

무부들은 모두 일어섰으니

어찌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지 않았겠는가.

일곱 번을 싸워서

일곱 번을 이기고

경군이 내려와

끝내 난을 평정했으니

아! 장하다. 장한 금성이여.

의를 위해

남녀노소가 하나 되어

강성한 울타리처럼

남도를 지켜냈도다.

금산의 신령께

묵묵히 은근한 사랑을 주십사 빌었고

끝까지 성을 지켜냈음을

신께서 도와주심이라 감사했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이 걷히고

서성루(西城樓)에서 베푼 지희연(志喜宴)은

거탄스런 한마당을 이루어

그 즐거움은

금성별곡(錦城別曲)이 되어

퍼져갔는데...

나주가 관찰부로 변경되어

채규상이 부사로

안종수가

참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왜놈들의 민중전 시해로

궁중 안팎이 흉흉해가는데

일본은 내정개혁을 밀어붙이며

단발령을 내리게 했으나

이는 마치 불에 기름을 끼엊은 듯-

항거의 소리가 거세지자

다시 철회되었지만

군주가 별관으로 파천하는

이 비운을 맞았으니

그야말로 누란의 위기가 아니랴.

일천팔백 구십오년

장성의 기우만(奇宇萬)이

난적을 토벌키 위해

의병을 모집하자는 통문을 보내오매

나주에서는 곧

같은 마음으로 원수를 치는데

뒤따르겠다는 답을 보낸 뒤에

바로 창의소를 설치하자

장성의 의병들도 이에 합류했다.

수성군은

건제선생의 옛사당 자리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셍세를 굳게 다졌으며

송사(松沙)는 의를 함께 한 이들과

금성당에 모여

국운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종횡으로 헤쳐나가게 해주십사

간절하게 빌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측의 음모는 끊이지 않고

이 고장에서는

안종수(당시는 군수) 무리의

음해와 책동이 극에 달햇던가.

그도 정의의 철퇴를 맞은건 당연커늘-

금성을

끝까지 지켜낸

도통장 정석진은

해남군수로 부임했으나

누명을 뒤집어쓴 채

체포되어 살해 당하고

위기에 처하여 굽히지 않고

금성의 명예를 지켰던 성주

민종렬공은

담양부사로 도임했으나

또한 잡힌 몸이 되어

북쪽으로 끌려 갔다니...

시세에 빌붙어 생을 도모하려는

소인배들은

이 충절들에게

이렇듯 비벙한 올가미를 씌웠다.

아! 진정 정의로움은 어디 있는가.

아! 진정 정도는 어지 있는가.

그날의 금성산은

웅얼임을 삼킨 채

말 한마디 없어도

강물은 흐른다.

역사의 강물은

솔바람 소리와 더불어 흐른다.

나주인의

불요불굴의 의기는

불멸의 넋이 되어

맥맥히

천추토록 흘러갈 것이다.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은 나주의 유림이던 겸산 이병수(1855~1941)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관군편에서 적은 기록과 1895년 을미년의 의병 등에 관한 기록을 필사한 것이며,

목활자본으로, 2006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나주 유생 이병수(李炳壽, 1855∼1941)가 남긴 《겸산유고(謙山遺稿)》 제19·20권에 수록된 것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래 3년간의 사적을 갑·을·병 편으로 구성하였다.

갑편은 갑오년(1894), 을편은 을미년(1895), 병편은 병신년(1896)에 각각 해당한다.

저자는 동학농민군의 궐기를 맞이하여 나주의 수성(守城)을 위해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에게 도약소(都約所) 직월(直月)의 직임을 가지고 적극 협조하였고, 그 후 기우만(奇宇萬)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창의하였을 때에도 교임(校任)으로서 이에 호응하여 나주 지방의 유생창의에서 활약하였다. 1918년 함평으로 이거하여 후진을 양성하다가 다시 31년에 나주로 돌아와 송산정사(松山精舍)를 짓고 한학을 전수, 많은 제자를 길렀다.

한말 유생으로서의 이병수의 생애를 볼 때 이 책은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과 근왕주의(勤王主義)를 기저로 하는 철저한 반외세(反外勢) ·반개화(反開化) ·반부패(反腐敗)의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고, 동시에 반농민(反農民)의 보수적인 구법(舊法)수호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갑오년간의 동학농민군의 궐기에 반대하고 배척하는 관(官)과 유생의 수성군(守城軍), 민병활동과 반일(反日) ·반개화(反開化) 의병활동이 같은 맥락에서 취급되었다.

갑편은 나주지방의 동학대접주 오권선(吳權善)은 나주에서 나성군(羅城君)으로 4대에 걸쳐 책봉되어 세거(世居)한 세가(勢家) 출신이라는 사실을 비롯하여, 나주 수성군의 편성과 아울러 향약성책(鄕約成冊)을 경수(更修)하고 각 면의 약장(約長)에게는 <민호성책(民戶成冊)>을 수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나주에 진격할 때 전봉준과 민종렬 간에 일차적인 대좌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퇴각과 함께 수성군의 활동 반경이 확대되는데, 광주 용진산(聳珍山)과 나주 금안동(金安洞), 초동(草洞) 호장산(虎壯山) 전투가 있었다는 것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농민군과 반농민군 간의 지방차원의 대결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을편은 <초토사보군공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 <본주인사하군공상(本州人士賀軍功狀)>과 기우만이 쓴 <토평후기증정장군서(討平後寄贈鄭將軍書)> 이외에도 지방제도 개편으로 동헌이 행정청으로, 진영(鎭營)이 경무관청(警務官廳)으로 변화된 사실, 개화파 계열의 지방관에 의한 단발령이 그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욕선교유(欲先校儒)하고자 하였던 데에 대해 유생들이 피신을 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병편은 기우만의 창의통문(倡義通文)과 그에 대한 나주 유생의 응답통문(應答通文), 그리고 단발령을 추진한 나주관찰부 참서관 안종수에 대한 10죄(罪) 성토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유생의 창의에 앞서 나주 성내의 읍리와 군교가 민요를 일으켜 안종수를 처단하고, 유생의병의 창의소가 그에 이어 구성되었다는 것, 기우만의 호남창의소 의려진(義旅陣)이 나주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나주의 아전과 군교가 반대하여 기우만이 회진(回陣)을 하려 하자 나주 유생이 군교 등을 설득하여 합세한 것, 그리고 유생 의병진은 자신들과 정치적인 입장이 같은 지방관과는 의병활동에 대한 협의 공존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의병의 해산 이후 유생 의병진과 협력한 해남 ·담양의 지방관이 투옥, 살해되었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한말의 격변기에 대응하는 척사유생(斥邪儒生)의 의식 수준을 비롯하여 지방 차원에서의 활동과 그 대응뿐만이 아니라 동학농민군과 이서집단의 존재형태의 일단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4代派:소윤공諱佶파, 중조:창주공諱詳, 派系:從仕郞公諱如龜派, 21世 國樞

 

 

- 謙山先生 家狀은  錦城正義錄 p.150-p.168 에 내용을 담고 있어 머잖아 워드화 할 예정임 -

 

 

                                                                                                                                    html  by aro   June 5,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