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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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昺璿)

                                                                                                                                                         

茶泉遺稿(文) 上

茶泉 鄭遇益 先生에 대하여                Go Back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께서 금성산(錦城山)에서 도(道)를 강론하자 따르는 자가 한 고을을 기울게 할 정도였고 대부분 영준(英俊)한 선비들로 높은 지식과 두터운 행실로 사우(師友)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 중 우리 다천(茶泉) 정공(鄭公)께서 그 첫 번째였다.

공의 휘(諱)는 우익(遇益), 자(字)는 일문(一文). 나주 정씨이다. 고려 말의 설재선생(4대조)은 휘는 가신(可臣)이며, 조선에 들어서 휘가 식(軾)이고 9대조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시니 시호가 경무에 이르는 조상들과 설재사에서 나란히 유식하였다. 휘는 상(詳), 호는 창주(滄洲)이신 13대조께선 덕학이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셨으며 문정랑이라 하였다. 휘는 언복(彦復), 호는 치옹(痴翁)이신 18대조께선 문장이 세상에 알려져 사마(司馬)와 같다하였으니 그 명성이 공의 7대까지 이르렀다. 휘 국추(國樞)이신 고조와 휘 양호(養浩)이신 증조부께선 모두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덕행이 있으셨고 휘 주(柱), 호 성암(誠庵)이신 할아버지께선 유학을 행하여 이름이 나셨으며 휘 성회(星會)이신 아버지는 효로써 고, 증, 조, 부(돌아가신 아버지) 사세(四世)께 제수를 올리셨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오씨(吳氏)이며 미쁘고 착한 여자이시며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휘는 태회(台會)이시며 고성(固城) 이씨(李氏) 준석의 딸이시니 본처의 소생이셨다.

공께선 태어날 때부터 뛰어나고 총명하셨으며 배움에 나가갈 때는 문리(文理)가 날로 앞으로 나아가셨으므로 문중에 장로들께서 훌륭한 인재로 여기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장성하심에는 더욱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적을 깨달음에 힘을 쓰시어 그 명성과 인망(人望)이 멀리 떨치셨지만 스스로 겸산선생님께 배우기를 멈추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신을 위한 학문과 하늘의 정한 운명과 사람의 본성의 오묘한 이치와 말하고 침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에 힘써서 묵묵히 깨달아서 체득하심에 겸산선생께서 도를 물려주시다. 물러나서 선생께 들은 가르침을 강하시고 배우는 자의 재목을 따라 가르침을 베푸심에 일찍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바른 말을 배우고 귀중한 지식을 행함에 어찌 말하고 듣는 것에 머무르겠는가? 하시고 공께서 더욱 화이(華夷)의 방해를 경계하셨으며. 도이(島夷), 창씨의 변을 당하심에도 감히 그 어버이 섬김에 궁핍함이 없게 하시고 혼정신성과 좋은 음식으로 항상 편안하게 하시니 몸과 마음에 정성을 다하셨다. 어려움에 당도하여도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묘소를 삼년간 살피셨고 제사하는 날이 와서 정성을 드리심에 살아 계실 때와 같이 하셨다. 동지와 더불어 명승지에서 시구를 읊으심에는 수레에 나무를 괴어 움직이지 못한 것과 같이 거의 돌아가기를 잊으셨다. 그 선사(先師)를 위해 강사(講舍)를 세우고 유집(遺集)을 간행함에도 그 일에 한결 같이 정성을 다하셨다.

대개 그 온화하고 공경하며 겸허하심이 일찍이 말씀과 안색에 가득 차지 않음이 없으심에 사람들이 근후(謹厚)한 군자라 칭하지 않음도 없었다.

병오 11월 14일 그 생을 놓으시니 고종 을미 11월 13일 향년 72세로 생을 마치셨다. 본양면 월청동 선록에 장사지내 이 세상을 떠나심에 편하게 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세상 대대로 행하여졌다. 부인은 경주 이씨의 총애받는 큰 딸이시니 개사년에 태어나서 을묘년 8월 초 삼일날 돌아가시니 영안촌 후록에서 따로 장사지내고 저승에 편히 가게 하였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장남 일면(日勉), 안면(安勉), 덕면(德勉), 준면(俊勉)이 그 뒤를 이었고 딸은 하음(河陰) 봉필석(奉弼錫)과 함풍(咸豊) 이상범(李相範)에게 시집보냈다. 병주(昺周)는 장남네에서 낳았고 병규(昺圭), 윤오(允五), 윤방(允邦)은 2째네, 광훈(光勳), 윤곤(允坤), 윤중(允中), 윤대(允大)는 3째네에서, 일성(一成)과 훈(勳)은 막내네에서 낳았다.

오호라 선비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능히 세상에 공로를 높이 세우지 못하거든 곧 그 성품을 지켜서 닦고 가지런히 하여 더럽힘이 없게 할 따름이라. 이제에 공(公)의 학문은 자신부터 행하고 나아가 집과 사람들에게 이르게 하니 또한 가히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을 자식 덕면(德勉)이 밝게 이어 가장을 갖추고 명사를 청해옴에 부득이하게 그 뜻을 따라 글을 펴서 명에 말하길, 학이란 스승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받들어 세가에 효우(孝友)를 잇게 하고 매우 착한 성질과 덕을 베푸는 일을 심히 아름답게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화이(華夷)를 막으며 세상의 어지러움을 근심하고 또 무너짐을 근심하며 전전긍긍으로 그 배우는 마음의 주제를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수목이 울창한 산중을 깎고 다듬어서 유편(遺編)이 상자에 가득하게 하니 그 맥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오?

겸산선생의 양덕이로다.

光山 李玟秀 撰

4代派:소윤공諱佶파, 중조:창주공諱詳, 派系:從仕郞公諱如龜派, 21世 國樞

 

 

 

 

羅州鄭德勉甫齎茶泉公諱遇益遺集五, 伴族之彦芝會 . 海勉 .泰勉三君子踰嶺訪余于瀛洲山下, 徵以弁卷之文. 余嘗從士友間聞公之邃學篤行巋然, 爲吾林之靈光者久矣. 顧余僑寓多艱, 未遂識荊之願,徒切尋常之歎矣. 今讀其遺編, 得其七八兮之影嚮,益不禁曠世之興感, 安可以文拙靳一言也哉. 窃謂吾儒之學, 只以口腾天下之理,目涉天下之書, 謂善學則未也. 必其學也就正于有道行也.自本乎事親是爲學之貴, 而其所謂文詞之燁然者末也, 浮華耳, 其於道何有哉. 公温恭謙虛孜孜爲學. 定兮于謙山李先生之門, 獲聞天人性命之同異, 古今史流之邪正, 心悅而誠服以謂得終身依歸之所. 凡事親從兄出處語黙之節是效是則其正心循理之功, 以至居敬切己之要皆拜禀書質. 而析其精微, 驗其眞切, 推以及於鄕之子弟,無愧爲先生弟子也. 余讀之懷古編檀春野史,未嘗不再三嘆賞也. 嘗觀吾東編史之例,至檀聖之蹟,擧歸荒誕無稽太略而止. 今公則亟稱檀聖之盛德而有述,足以供編史之資,此非超類之識見耶. 如或以文祠之工不工議是集,則是非知德者也云爾.

辛酉仲春節 光山 李玟秀 書

나주 정덕면(鄭德勉)이 다천공(茶泉公) 우익(遇益)선생의 유집 다섯 권을 가지고 일가친척 선비인 지회, 해면, 태면 세 분과 함께 재를 넘어 영주산(瀛洲山)아래 있는 나의 처소를 방문하여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일찍이 사우(士友)들에게서 공의 심오한 학문과 독행(篤行)의 우뚝함은 우리 사림의 신령한 빛임을 들은 지 오래 되었다. 객지를 떠돌며 다난했던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선비들을 사귀고자 한 바램을 이루지 못함에 늘 한탄만 했었다. 오늘 유고를 읽어보니 유고의 대부분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매우 커, 세상에 드문 흥감을 어찌 나의 서툰 글로 다할 수 있겠는가. 살펴 보건데 단지 입으로 천하의 이치를 논하며 눈으로 천하의 책들을 섭렵하는 것을 선학(善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학문이 아닌 것이다. 학문이란 자고로 도행이 바른 사람을 따라 자신을 바로 잡는 것이다. 부모를 섬김을 학문의 우선으로 삼아야 하며 문사의 화려함이란 쓸모없는 것이다. 도에 있어 문사의 부화(浮華)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은 온순하고 공손하며 겸허하셨으며 학문을 연구함에 부단히 노력하셨다. 겸산 이병수선생의 문하에서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역사에 대해 수하하시며 기뻐 하셨고 진심으로 선생을 따르며 내 평생을 몸담을 곳이라고 여기셨다.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셨으며 처세에 있어 정도를 지키심을 법칙으로 삼으셨고 바른 마음으로 순리를 따르심이 결실을 얻어 자신을 바른 마음과 품행으로 다스리셨으며 겸산 선생께 질정을 부탁하시기도 하셨다. 학문에 대해 세세하게 밝혀내고 분석하며 진실에 대해 증험함은 그 영향이 향리에 있는 자제들에게까지 미쳤으며 겸산 선생의 제자되심에 손색이 없으셨다. 오늘 단춘야사(檀春野史)의 회고편(懷古編)을 읽어보니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일찍이 역사서에서 단군왕검의 행적에 관해 읽은 적이 있으나 황당무계하고 간략할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공이 단군을 칭송하고 저술하신 것은 역사에 편사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되니 이것이 바로 남보다 뛰어난 식견이 아니겠는가. 만일 혹 문사(文詞)의 기교에 대해 논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지덕한 자가 아닐 것이다.

신유년(1981) 중춘(음력 2월)에 광산 이민수 씀.

茶泉鄭遇益行略

공이 생전에 이룬 호방(浩厖)한 문장(文章)과 정묘(精妙)한 학문(學問)을 필설(筆舌)로 어찌 다 묘사(描寫)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정밀하게 한다 하더라고 진수(眞膄), 미지(微旨)는 표현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그러므로 학문(學問), 사제(師弟)의 전심(傳心), 수의(守義),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배향사실(配享事實) 다섯 가지만 간추려 기록하는 바이다.

- 학문(學問)

공의 학문은 口耳의 學이 아니라 궁행심득(躬行心得)하여 이(理)의 진원(眞源)과 도(道)의 대본(大本)을 독계묘오(獨契妙悟)하였다 하겠다.

‘情, 意’의 해석(解釋)에 ‘出乎性而蘊諸心謂之情 由乎心而蓄諸中謂之意 (性에서 나와 마음에 쌓인 것을 情이라 이르고, 마음에서 우러나 가운데 쌓인 것을 意라 한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모방함이 없이 독창적으로 한 말인데 또한 성현(聖賢)의 말씀에 부합된다. 모습(模襲)하지 아니한 증거로는 도호(道湖) 오동수(吳東洙)에게 준 서신(書信)에 ‘今其猥舌 思索不理 雜引無可據(이제 그 외람되게 말하여 思索이 조리가 없고 雜引함이 근거가 없다.)’가 있다. 말의 겸손함이 또한 공경스럽다.

그러므로 유교(遺穚)가 구태(舊態)에서 탈피하여 생기가 솟구치고 창신력(創新力)이 발휘되어 구독(口讀)하면 감미로움이 그쳐지지 아니한다.

- 사제(師弟)의 전심(傳心)

공은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에게 종학(從學)하여 전인성명(全人性命)의 오(奧)와 무극태극(無極太極)의 묘(妙)를 묵회(黙會)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천리(踐履)가 더욱 독실하니 선생이 매양 칭찬하시기를 ‘可與適道(가히 같이 도에 나아갈 만 하다.)’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수수(授受)함에 선생의 진수(眞髓)가 公의 폐부(肺腑)에 들어왔다 해도 일언(溢言)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생의 임종일기(臨終日記), 가장(家狀), 뇌문(誄文), 만사(輓辭), 유교(遺穚)의 통문(通文), 발(跋), 교정(校正), 그리고 송산정사(松山精舍) 영건(營建)의 통문(通文), 상량문(上樑文) 등을 作하되 혈성(血誠)에서 우러나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이 堂高潤挹光風味 室暖滋霽月顔 (堂이 높아 光風의 맛을 넉넉히 담고, 방이 따뜻하여 霽月의 模顔을 훈훈히 간직하도다.)의 차운(次韻)은 수수(授受)의 진미(眞味)를 제대로 나타냈다고 하겠다.

- 수의(守義)

공의 수의준례(守義遵禮)하는 생애가 왜구의 간위(肝胃)를 거슬린데다가 상투는 그들 눈에 못이 되고, 창씨(創氏)를 강행하자 “차라리 피를 토하고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하겠느냐!”하며 거부함이 그들 살에 가시가 되어 협박이 심하므로 ‘生靈無罪生於罪 生若不生三十年( 生靈은 罪가 없고 사는 것이 罪로구나! 삶이 죽음만 같지 못함이 30년이로다.)’의 시(詩)를 읊고 악양(岳陽)으로 피거(避居)하였다. 또한 협박이 멈추지 않기로 그 자서문(自誓文)에 ‘偸生可愧 蹈東而圖生則東亦其土 陟西而生則西亦其天(구차히 살아감이 가히 부끄럽기만 하다. 魯仲連이 그랬듯이 東海를 밟으려하나 또한 그 땅이고, 이제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본받아 서산(西山)에 들어가려 해도 또한 그 하늘일세!)’라 하고, 또 ‘木石自依猶勝似 寧言矢死忍胡爲 (木石의 자유로움이 오히려 나보다 낫구나. 차라리 죽기를 작정하나니 차마 어찌하려!)’ 라는 시(詩)를 읊었다.

그리고 완용(完用) 책하기를 ‘苟爲忠犬則嚙其他人之臠而入於主人可也 嚙其主而饋於賊口非忠犬而狂犬 (忠犬은 고기 덩어리를 주인에게 물어다 주거늘 그 주인을 물어 남에게 주니 이는 狂犬이다.)’하고, 완적(完賊)이 ‘扶桑槿域何論態 兩地一家天下春(두 나라가 하나가 되어 봄날을 이루세)’의 詩를 지은 데 義憤을 이기지 못하고 반박하기를 ‘賣國榮身苟不人 春秋筆鉞滿腔新 槿區海島分夷華 天地純陰春不春(나라를 팔아 몸을 영화롭게 함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다. 春秋의 筆鉞로 죽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네. 朝鮮과 日本이 華夷가 분명하거늘 오늘날 천하가 純陰이 되어 봄이어도 봄 같지 않네.)라고 하였다.

-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공은 ‘단춘야사(檀春野詞)’ 7편 18장을 펴냈는데 그 ‘檀是嚮榮萬春無窮’의 句는 단제(檀帝)의 성덕(盛德)을 찬양하며 내세(來世)를 빛내려는 미지(微旨)가 담겨있다. ‘野逸流設’은 단제(檀帝)로부터 한말(韓末)까지 4277년의 역사를 편저(編著)하면서 사이에 논평을 써 의리를 밝혀 새로운 사관을 세우고, 국치(國恥)를 當하여 애통하기를 ‘余生末紀 痛歎窮廬 何益於社稷之存亡乎 但切黍稷之歎而已 (내가 末紀에 태어나 窮廬에서 통탄한들 사직의 존망에 무슨 도움이 되리요? ‘黍稷’의 歎만 가득할 따름이다.)’ 하니 그 글을 읽음에 후생의 등뼈가 송연하나니 민족의 정기를 불러 일으킨다.

- 배향(配享)의 사실(事實)

그 깊은 도(道)와 두터운 덕(德)과 넓은 문장(文章)에 사림(士林)의 존앙(尊仰)하는 열(熱)이 날로 성하여 누년 의론(議論)이 비등(沸騰)하다가 덕면(德勉), 광훈(光勳) 부자(父子)의 효성으로 겸산선생(謙山先生)의 조두소(俎豆所)인 송산사(松山祠)를 치연(侈然)하게 개조하여 경진년(庚辰年) 위패(位牌)를 奉安(봉안)하고 향사(享祀)하니 사제(師弟)가 대좌(對坐)하여 은연중에 더욱 후학을 覺悟시키는 기풍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河陰 奉奇鍾 撰

 

 

발간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世界化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류의 문화가 거기에 편승되어 가면서 나날이 傳統文化가 사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문화가 사라지면 그 민족도 사라지게 됩니다. 미국의 인디언이나 카리브 해 주변 섬들의 원주민들은 그 문화를 잃어버리면서 점점 그 민족의 生存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世界化를 부르짖는 것은 오히려 시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됩니다. 그래서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역사학자와 인문학자들의 傳統文化에 대한 관심이 반갑고 고맙습니다.

이번에 발간되는 檀春野詞는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한 한 노력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정리한 역사서입니다.

역사란 지나간 세월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일의 가닥을 따라 지나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실상을 따져 세밀히 분석하지 않고는 인류가 살아 온 삶의 내용이나 여러 일들의 가닥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에 인류가 살아 온 실태를 살펴, 잘한 일들은 거울로 삼아 人類의 삶을 복되게 만들고, 잘못된 일들은 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학의 목적이기 때문에 史學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양쪽 모두를 인류의 삶에 접합시켜 큰 이익을 얻게 하는 덕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투철한 민족관과 歷史意識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역사서를 남기신 정우익 선생의 학문적 업적이 바르게 평가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이 연구를 통하여 정우익 선생의 業績과 그 價値가 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고, 저로서도 보람과 영광을 느낄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

                                                                                                     韓國族譜學硏究所所長 鄭煥常

 

 

축 사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 지금 우리의 주변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표현되는 지식정보화 시대는 20세기의 자본과 노동력에 의한 사회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옛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선현의 유물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몫이며 사명입니다.

이번 정우익 선생께서 남기신 글의 발간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는 웃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계승시키고 후손을 위하여 여러 어르신들의 경륜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문명의 황폐화로 사회 도처에 상존하고 있는 병폐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진정 개개인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정보를 직접 전달해 주는 매체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게 현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만능 사상으로 인하여 물질의 풍요 속에 정신문화의 빈곤이라는 폐습이 거듭되고 있는 이때 실추된 도덕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미풍양속인 예절과 규범을 바로 잡아 건전한 사회풍토 조성에 일익을 담당하기 위하여 정우익 선생의 글은 우리에게 보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연구를 위해 열성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출간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성균관장 최창규

 

 

축 사

옛 것이 점차 사라져 가고, 설 자리가 없어지는 오늘날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런 無關心이 硏究者에게 있어서는 무척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傳統들이 길이길이 전해지고 保存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팀과 한국족보학연구소에서 조선시대 한 儒學者인 茶泉 정우익 선생이 쓰신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정리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천년의 歷史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 일제독재 하에서의 역사 자료 소멸과 빠른 경제 성장에 급급해 여러 옛 文獻과 유물을 소홀히 취급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간된 檀春野詞는 단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의 역사서입니다. 그 속에는 한 유학자의 눈을 통해서 본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상이 고루 담겨져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한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 근간이 되는 哲學입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것을 敎訓으로 삼아 미래로 정진할 수 있습니다.

또,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 기록이 아니라, 과거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석하여 재평가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그가 속한 시대적 제약을 받아 그 당시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즉, 역사를 보는 사람의 시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우익 선생의 檀春野詞는 역사와 그 歷史를 해석하는 관점에 있어 기존의 역사가들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우익 선생과 같은 초야의 학자들의 역사 서술에 대한 평가가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 분야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이때에 정우익 선생의 檀春野詞 발간은 학계에서나 정우익 선생의 가문으로서나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檀春野詞의 출간은 앞으로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더욱 적극적인 노력의 표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檀春野詞의 出刊을 위해 힘쓰신 여러 연구진들과 후원자 분들께 진심으로 祝辭를 전합니다.

                                                                                     成均館大 翰林院長 金忠浩

 

 

감사의 글

세상의 변화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고, 個人主義가 팽배하는 이 시대에 가문의 歷史를 탐구하고 그 遺物을 살피는 것이 별 의미 없는 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에도 있듯이 가정이 사회와 국가의 根本이요, 그 화목의 基礎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뿌리가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립니다. 지금 이 사회에 난무하는 여러 문제들을 볼 때마다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며, 그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할아버님의 유고집 發刊이 저희 가족에게는 가족화합과 단결을, 그리고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하나의 敎訓이 되어 세세에 남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훌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감동과 여운은 오래 남아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그 敎訓을 본받고 실천에 옮길 때 독서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한 권의 제대로 된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을 읽고도 그렇게 感動을 느낄 수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글을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조상의 恩德이요, 先賢의 깊은 뜻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그 어려운 시대를 거치시면서 겪으셨을 고초와 그 속에서의 깨달음을 알게 되고, 後孫에게 전하게 된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유고집을 번역하고 할아버님께서 남기신 그 尨大한 양의 글을 대하게 되니 그 깊은 학식과 학자로서의 부지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지금 아버님께서 서재에 앉아계신 모습으로 할아버지께서도 단아하게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으시고 글을 쓰셨겠지요. 저희도 언젠가는 저희 아들에게 그리고 그 손자에게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책으로 낼 수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팀과 여러 교수님들께 깊은 感謝를 드립니다.

                                                                                                  不肖孫 鄭炳圭

                                                                                                光勳 允坤 允五 允中 允邦 一成 允大

 

 

茶泉遺稿(文) 上

차 례

발간사   .........................................................   3

축 사   .........................................................   5

축 사   .........................................................   7

감사의 글   .........................................................   9

차 례   .........................................................   11

茶泉鄭遇益先生에 대하여   .........................................................   17

序   .........................................................   21

茶泉鄭遇益行略(다천정우익행략)24

文(문)   .........................................................   29

문 1. 戒子 / 31

통문2. 松山精舍營建時 通文 / 38

축문3. 景武公影幀奉安祝文 / 41

발문4. 扶風契發文(一名綱一契) / 42

문 5. 誡子文(甲戌) / 45

6. 倭政强制創氏自警文 / 46

7. 登臨祠奉安祝文三位 / 48

祭文(제문)   .........................................................   51

제문1. 祭先先生(人日修契時) / 53

2. 祭習齋羅公(聖則氏) / 56

3. 弔安平君 / 59

4. 祭心史辛公(東旭氏) / 63

5. 祭先伯省齋公文 / 67

碑(비)   .........................................................   71

비문1. 雪齋先生遺墟立碑通文 / 73

2. 烈婦旌閭事實碑 / 76

3. 烈婦河東鄭氏紀蹟碑文(子兪洪植) / 80

銘(명)   .........................................................   85

묘갈명1. 通政大夫鄭公墓碣銘 / 87

2. 居士李公墓碣銘 / 92

3. 麟庭金公墓碣銘 / 97

비명4. 咸平李公墓碣銘 / 111

5. 紫山書院遺墟壇享碑銘 (倂序) / 128

명6. 茶泉鄭公景慕碑銘(幷序) / 140

7. 遠宗退陶先生銘 / 146

8. 奉審崧陽書院 (善竹銘) / 148

9. 心戒銘 / 150

10. 胸佩銘 / 151

11. 筆銘 (倂小序) / 152

12. 墨銘 / 155

13. 生壙銘 / 156

14. 齒髮塘銘 (辛丑九月二十八日)/ 158

上樑文(상량문)   .........................................................   161

상량문1. 茅山祠上樑文 / 163

2. 景武公影堂上樑文 / 170

3. 天君靈臺重修上樑文 / 179

4. 咸平李氏永受齋上樑文 / 186

5. 錦川影堂上樑文 / 194

6. 朴氏三忠祠上樑文 / 200

7. 河南書堂上樑文 / 206

8. 登臨祠上樑文 / 212

序(서)   .........................................................   221

서문 1. 琴下遺稿序 / 223

2. 隆親契序 / 227

3. 錦川世稿序 / 230

4. 羅州鄭氏世譜序 (壬寅) / 234

5. 羅州鄭氏誌狀錄序 / 238

6. 琴下翁晬宴序 / 242

7. 鶴亭晬辰韻帖序 / 246

8. 錦涯翁晬宴序 / 250

9. 贈鶴圃隱居別業序 / 252

10. 陽川許氏家乘譜序 / 254

11. 餞敏菴兄敍 (慶南固城九萬面華林里崔弘洛)/ 259

12. 追敍 (餞敏菴) / 264

13. 孝烈夫人(吳氏柳氏)贊頌契序 / 267

14. 滄洲公位土保存契序 (庚子) / 273

15. 羅州鄭氏庚子花樹會序 / 276

16. 麟庭遺稿序 / 281

17. 講益契序 / 284

18. 興感止齋遺稿敍 / 287

19. 同庚契序 / 290

20. 乙酉譜序 / 293

21. 乙未世譜序 / 298

22. 贈別李雅士國信序 / 303

23. 以正齋自敍 / 306

24. 王子還國感傷懷古而自敍 / 310

25. 永陽契序 / 315

跋(발)   .........................................................   319

발1. 竹軒公遺稿跋 / 321

2. 滄洲集跋 / 324

후(발)3. 敍心堂鄭軍遺稿後 / 327

발4. 跋文 / 332

辨(변)   .........................................................   337

변문1. 鄭義齋生節義辨 / 339

記(기)   .........................................................   343

기문1. 先先生謙山遺稿印刊實記 (倂後敍) / 345

2. 守愚齋記 / 350

3. 洞庭湖記 / 355

4. 白石灘記 / 359

5. 德山瀑布記 / 361

6. 仁田洞記 / 363

7. 自安洞記 / 366

8. 沁石記 / 369

9. 晩悔堂記 / 373

10. 錦沙記 / 377

11. 松圃記 / 382

12. 蠢庵記 / 385

13. 聽琴齋記 / 389

14. 聖德齋記 / 394

15. 晦亭記 / 398

16. 晩隱記 / 401

17. 琴下記 / 405

18. 南崗記 / 408

19. 小松記 / 412

20. 羅孝子廬墓實記 / 415

21. 雙溪亭重修記 代舍伯 / 418

22. 芝庭記 / 422

23. 錦涯記 / 425

24. 樵山記 / 429

25. 永陽精舍記 / 432

26. 竹軒公家狀草記 / 435

27. 誠庵公墓碣陰記 / 443

28. 錦天公墓碣陰記 / 448

29. 竹軒公墓碣陰記 / 452

30. 十世祖庶尹公墓碣陰記 / 457

31. 愚齋公墓碣陰記 / 460

32. 歸來亭記 / 464

33. 滄洲亭記(一)/ 467

34. 滄洲亭記(二)/ 470

35. 錦北堂記(壬寅)/ 474

36. 晩悟齋記 (鄭南會齋號) / 478

37. 永陽精舍移建實記 / 482

38. 著存齋記 / 485

39. 松山精舍記 / 487

40. 先生臨終日記 / 490

41. 後松記 / 500

論(논)   .........................................................   503

논문1. 物種有仁論 / 505

2. 天地萬物槩論 / 508

3. 妄以勸善懲惡論戒諸益 (永慕齋) / 511

4. 禮有體用論 / 515

 

                                                                                                                                          html by aro   June 5,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