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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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昺璿)

檀春野詞

◯단춘야사(檀春野詞)

다천(茶泉) 정우익(鄭遇益 1895 - 1965) 선생에 대하여  Go Back

4代派:소윤공諱佶파, 중조:창주공諱詳, 派系:從仕郞公諱如龜派, 21世 國樞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께서 금성산(錦城山)에서 도(道)를 강론하자따르는 자가 한 고을을 기울게 할 정도였고 대부분 영준1)(英俊)한 선비들로 두터운 행실로 사우(師友)2)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 중 우리 다천(茶泉) 정공(鄭公)께서 그 첫 번째였다.

공의 휘(諱)는 우익遇益), 자(字)는 일문(一文)이며 나주(羅州) 정씨(鄭氏)이다. 고려 말에 설재선생(雪齋先生)으로 칭송되신 휘 가신(可臣)에서부터 드러나, 조선에 와서 휘 식(軾)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3)인 시호4)가 경무에 이르러 설재사(雪齋祠)에서 배향이 되었다. 휘 상(詳), 호 창주(滄洲)는 (德)과 학문으로 유림(儒林)5)의 종장(宗匠)6)이 되었다. 문정랑(文正郞)은 휘가 언복(彦復), 호는 치옹(痴翁)으로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져 사마(司馬)에 등제하였으니 공(公)과는 7세(世)가 차이난다.

1) 영준(英俊) : 영민하고 준수함.

2) 사우(師友) :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

3) 병조판서(兵曹判書) : 조선시대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우두머리 관직.1392년 새 관제가 반포되면서 6조(六曹)의 구성과 더불어 병조가 설치되었다. 6조의 서열은 1418년까지는 이-병-호-예-공조의 순이어서, 병조가 이조 다음인 제2서열이었는데, 세종 즉위 이후 다시 이-호-예-병-형-공조로 조정되어 예조 아래인 제4서열 순위가 되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6조제도의 폐지와 함께 없어졌다.

4) 시호(諡號) : 현신(賢臣)이나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임금이 추증(追贈)하던 이름.

5) 유림(儒林) : 유도(儒道)를 닦는 학자들, 또는 그들의 사회. 사림(士林).

6) 종장(宗匠) : 경학(經學)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사람.

휘 국(國樞)이신 고조와 휘 양호(養浩)이신 증조부께선 모두 깊은 덕행이 있으셨고, 휘가 주(柱)이고 호가 성암(誠庵)이신 조부(祖父)는 유행(儒行)7)하여 이름이 나셨으며, 휘가 성회(星會)이신 아버지는 효로써 고조, 증조, 조부, 부의 4세(世)를 아름답게 하였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오씨(吳氏)였는데 진실로 훌륭하여 여자로서의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휘가 태회(台會)이시며 고성(固城) 이씨(李氏) 준석(俊奭)의 따님으로 이 두 분이 바로 공을 낳아주신 부모이다.

공께선 태어날 때부터 뛰어나고 총명하셨으며 배움에 나아가서는 문리(文理)8)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가문의 훌륭한 인재로 칭찬을 받았다. 장성하심에는 더욱 삼황오제(三皇五帝)9)의 전적에 힘을 쓰시어 그 명성과 인망(人望)10)이 멀리 떨치셨지만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여겨 겸산선생(謙山先生)께 배우면서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11)과 천인성명(天人性命)12)의 오묘한 이치에 힘쓰면서 언행(言行)과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절도에 맞아 묵묵히 깨달아서 체득하지 않음이 없어 겸산 생(謙山先生)께서 함께 도에 나아갈 것을 인정해 주셨다.

7) 유행(儒行) : 유학에 기반을 둔 행위.

8) 문리(文理) : 글의 뜻을 까달아 아는 힘. 사물 현상을 깨달아 아는 힘.

9) 삼황오제(三皇五帝) : 삼황(三皇)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세 임금인 복희씨(伏羲

氏),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 또는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

氏)를 말함. 오제(五帝)는 중국 태고 시대의 다섯 성군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며, 복

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을 말함. 복희, 신농, 황제 대신 소

호(少昊), 전욱(頊), 제곡(帝)을 들기도 함.

10) 인망(人望) : 세상 사람이 우러르고 따르는 덕망.

11) 위기지학(爲己之學) : 다른 사람 때문에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수

양을 위해서 하는 공부를 말한다. 자신만을 위한 공부가 아니다.

12) 천인성명(天人性命) :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질.

선생께 물러나 살던 곳에서 가르침을 강론하였는데 좇아서 배우는 자들에게는 재목을 따라 가르침을 베푸심에 일찍이 소홀히 하지 않았다. 평상시의 말씀이 학문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귀하다 말씀하였으니 어찌 말하고 듣는 것에 바탕이 될 뿐이겠는가?

공께서 더욱 화이(華夷)13)를 막는데 엄히 경계하셨으며 도이(島夷)14), 창씨개명(創氏改名)의 변을 당하였을 때도 감히 그 어버이 섬김에 궁핍함이 없게 하시고 혼정신성(昏定晨省)15)의 예와좋은 음식으로 항상 편안하게 모셔 몸과 마음에까지 편안하게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묘소를 삼년간 살피셨고 제사하는 날이 와서 정성을 드리심에 살아 계실 때와 같이 하셨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시구를 읊으면 시(詩)가 지어져 거의 돌아오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그 선사(先師)를 위해 강사(講舍)를 세우고 유집(遺集)을 간행함에도 그 일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일을 마쳤다.

대개 그 온화하고 공경하며 겸허하심이 일찍이 말씀과 안색에 가득 차지 않아 사람들이 근후(謹厚)16)한 군자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3) 화이(華夷) :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

14) 도이(島夷) : 섬나라의 오랑캐. 여기에서는 일본을 말한다.

15) 혼정신성(昏定晨省) :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서을 다함을 이름.

16) 근후(謹厚)하다 : 신중하고 온후하다.

병오 11월 14일날 돌아가시니, 고종(高宗) 을미 11월 13일 태어나시고 향년 72세였다. 본양면(本良面) 월청동(月淸洞) 선산(先山)에 장사지냈다. 유집(遺集)이 세상에 행하여졌다. 부인은 경주 이씨의 종태(鍾泰)의 따님으로 계사년(癸巳年)에 태어나서 을묘년(乙卯年) 8월 초 삼일날 돌아가시니 영안촌(永安村) 뒷산에 따로 장사지냈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아들은 일면(日勉), 안면(安勉), 덕면(德勉), 준면(俊勉)이고, 딸은 하음(河陰) 봉필석(奉弼錫)과 함풍(咸豊) 이상범(李相範)에게 시집보냈다. 병주(炳周)는 장남이 낳은 자손이고, 병규(炳圭), 윤오(允五), 윤방(允邦)은 둘째아들 자손이고, 광훈(光勳), 윤곤(允坤), 윤중(允中), 윤대(允大)는 셋째아들 자손이며, 일성一成)과 훈(勳)은 막내아들이 낳았다.

오호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능히 세상에 공로를 높이 세우지 못하거든 곧 그 성품을 지켜서 닦고 가지런히 하여 더럽힘이 없게 할 따름이라. 이제 공(公)의 학문은 자신부터 행해져서 나아가 집안 식구와 사람들에게 이르게 하니 또한 가히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을 자식 덕면(德勉)이 밝게 이어 가장을 갖추고 명(銘)을 청해옴에 사양할 수가 없어 드디어 서술하여 명을 지어 말하기를

학문은 스승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받들어

능히 세가(世家)를 이어

효.도.와. 우.애.는. 지.극.한. 본.성.이.었.고.

덕.업.(德業)은 매우 아름다웠네.

오랑캐들 물리치는데 혁명을 막아

세상을 근심하고 도(道)를 근심했네

학문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마음으로 주재(主宰)를 삼았도다.

산천을 아름다이 노래한

유편(遺編)이 상자에 가득하네.

일맥(一脈)의 무슨 연유로

겸산(謙山)의 양덕(陽德)을 이었나?

광산(光山) 이민수(李玟秀)는 찬하노라

                                                                                                                   光山 李玟秀

○ 茶泉鄭遇益行略

공이 생전에 이룬 호방(浩厖)한 문장(文章)과 정묘(精妙)한학문(學問)을필설(筆舌)로 어찌 다 묘사(描寫)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정밀하게 한다 하더라고 진수(眞膄), 미지(微旨)는 표현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그러므로 학문(學問), 사제(師弟)의 전심(傳心), 수의(守義),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배향사실(配享事實) 다섯 가지만 간추려 기록하는 바이다.

- 학문(學問)

공의 학문은 구이(口耳)의 학(學)이 아니라 궁행심득(躬行心得)하여 이(理)의 진원(眞源)과 도(道)의 대본(大本)을 독계묘오(獨契妙悟)하였다하겠다.

‘정(情), 의意)’의 해석(解釋)에 ‘출호성이온제심위지정 유호심이축제중위지의(出乎性而蘊諸心謂之情 由乎心而蓄諸中謂之意)性에서 나와 마음에 쌓인 것을 情이라 이르고, 마음에서 우러나 가운데 쌓인 것을 意라한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모방함이 없이 독창적으로 한 말인데또한 성현(聖賢)의 말씀에 부합된다. 모습(模襲)하지 아니한 증거로는 도호(道湖) 오동수(吳東洙)에게 준 서신(書信)에 ‘금기외설 사색불리 잡인무가거[今其猥舌思索不理 雜引無可據(이제그외람되게말하여思索이조리가없고잡인(雜引)함이근거가없다)]’가 있다. 말의 겸손함이 또한 공경스럽다.

그러므로 유교(遺穚)가 구태(舊態)에서 탈피하여 생기가 솟구치고 창신력(創新力)이 발휘되어 구독(口讀)하면 감미로움이 그쳐지지 아니한다.

- 사제(師弟)의전심(傳心)

공은 겸산(謙山) 이선생(李先生)에게 종학(從學)하여 전인성명(全人性命)의 오(奧)와 무극태극(無極太極)의 묘(妙)를 묵회(黙會)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천리(踐履)가 더욱 독실하니 선생이 매양 칭찬하시기를 ‘가여적도(可與適道:가히 같이 도에 나아갈 만하다.)’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수수(授受)함에 선생의 진수(眞髓)가 공의(公) 폐(肺腑)에 들어왔다 해도 일언(一言)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생의 임종일기(臨終日記), 가장(家狀), 뇌문(誄文), 만사(輓辭), 유교(遺穚)의 통문(通文), 발(跋), 교정(校正), 그리고 송산정사(松山精舍) 영건(營建)의 통문(通文), 상량문(上樑文) 등을 作하되 혈성(血誠)에서 우러나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이‘당고윤읍광풍미 실난자제월안(堂高潤挹光風味 室暖滋霽月顔) : 堂이 높아 光風의 맛을 넉넉히 담고, 방이 따뜻하여 霽月의 模顔을 훈훈히 간직하도다.)’의 차운(次韻)은 수수(授受)의 진미(眞味)를 제대로 나타냈다고 하겠다.

- 수의(守義)

공의 수의준례(守義遵禮)하는 생애가 왜구의 간위(肝胃)를 거린데다가 상투는 그들 눈에 못이 되고, 창씨(創氏)를 강행하자 “차라리 피를 토하고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하겠느냐!”하며거 부함이 그들 살에 가시가 되어 협박이 심하므로 ‘생령무죄생어죄 생약생삼십년[生靈無罪生於罪 生若不生三十年(生靈은 罪가 없고 사는 것이 罪로구나! 삶이 죽음만 같지 못함이 30년이로다.)]’의 시(詩)를 읊고 악양(岳陽)으로 피거(避居)하였다. 또한 협박이 멈추지 않기로 그 자서문(自誓文)에 ‘투생가괴 도동이도생칙동역기토 척서이생칙서역기천[偸生可愧 蹈東而圖生則東亦其土 陟西而生則西亦其天(구차히 살아감이 가히 부끄럽기만 하다. 노중연(魯仲連)이 그랬듯이 동해(東海)를 밟으려하나 또한 그 땅이고, 이제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본받아서 산(西山)에 들어가려 해도 또한 그 하늘일세!)]’라 하고, 또 ‘목석자의유승사영언시사인호위[木石自依猶勝似 寧言矢死忍胡爲(木石의 자유로움이 오히려 나보다 낫구나. 차라리죽기를 작정하나니 차마 어찌하려!)]’ 라는 시(詩)를 읊었다.

그리고 완용(完用) 책하기를 ‘구위충견칙교기타인지련이입어주인가야 교기주이궤어적구비충견이광견[苟爲忠犬則嚙_其他人之臠而入於主人可也 嚙其主而饋於賊口非忠犬而狂犬(忠犬은 고기 덩어리를 주인에게 물어다 주거늘 그 주인을 물어 남에게 주니 이는 狂犬이다.)]’하고, 완적(完賊)이 ‘부상근역하론태 양지일가천하춘扶[桑槿域何論態 兩地一家天下春(두 나라가 하나가 되어 봄날을 이루세]’의 시(詩)를 지은데 의분(義憤)을 이기지 못하고 반박하기를 ‘매국영신구불인 춘추필월만강신 근구해도분이화 천지순음춘불춘[賣國榮身苟不人 春秋筆鉞滿腔新 槿區海島分夷華 天地純陰春不春(나라를 팔아 몸을 영화롭게 함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다. 춘추(春秋)의 필월(筆鉞)로 죽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네.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이 화이(華夷)가 분명하거늘 오늘날 천하가(純陰)이 되어 봄이어도 봄 같지않네.)]’라고 하였다.

-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

공은 ‘단춘야사(檀春野詞)’ 7편 18장을 펴냈는데 그 ‘단시향영만춘무궁(檀是嚮榮萬春無窮)’의 구(句)는 단제(檀帝)의 성덕(盛德)을 찬양하며 내세(來世)를 빛내려는 미지(微旨)가 담겨있다. ‘야일류설(野逸流設)’은단제(檀帝)로부터 한말(韓末)까지 4277년의 역사를 편저(編著)하면서 사이에 논평을 써 의리를 밝혀 새로운 사관을 세우고, 국치(國恥)를 당(當)하여 애통하기를 ‘여생말기 통탄궁려 하익어사직지존망호단절서직지탄이이[余生末紀痛歎窮廬 何益於社稷之存亡乎但切黍稷之歎而已(내가 말기(末紀)에 태어나 궁려(窮廬)에서 통탄한들 사직의 존망에 무슨도움이 되리요? ‘서직(黍稷)’의 탄(歎)만 가득할 따름이다.)]’ 하니 그 글을 읽음에 후생의 등뼈가 송연하나니 민족의 정기를 불러일으킨다.

- 배향(配享)의 사실(事實)

그 깊은 도(道)와 두터운 덕(德)과 넓은 문장(文章)에 사림(士林)의 존앙(尊仰)하는 열(熱)이 날로 성하여 누년 의론(議論)이 비등(沸騰)하다가 덕면(德勉), 광훈(光勳) 부자(父子)의 효성으로 겸산선생(謙山先生)의 조두소(俎豆所)인 송산사(松山祠)를 치연(侈然)하게 개조하여 경진년(庚辰年) 위패(位牌)를 奉安(봉안)하고 향사(享祀)하니 사제(師弟)가 대좌(對坐)하여 은연중에 더욱 후학을 覺悟시키는 기풍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河陰奉奇鍾 撰

檀春野詞

발간사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와 선왕조실록 등의 관찬사서(官撰史書)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동사강목(東史綱目),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의 사찬사서(私撰史書)로 대별된다.

관찬사서의 경우 막대한 공력이 소요되었던 관계로 별도의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사서편찬이 이루어졌으며 사찬사서의 경우는 관찬사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문집이나 향토지등에 서술된 역사적 사실을 추론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하여 주요 핵심사항과 논점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찬사서는 양적인 면에서는 관찬사서에 미치지 못하지만 사론(史論)등을 통해 연구자의 역사이해 관점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역(疆域),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 등에 있어서는 서술자에 따라 관점의 차이가 현저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육당 최남선과 단재 신채호의 사론(史論)은 한말 일제시대에 우리역사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조망하는 주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경우 관에 의한 역사서 발간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양식 있는 개별연구자에 의해 역사서술의 원칙과 방향이 모색되고 있었던 점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단재 신채호, 육당 최남선 등이 저술한 역사연구서에 대한 이해는 대학의 연구자들에 의해 비교적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반면 다천 정우익 선생과 같은 초야에 묻혀있는 학자들이 남긴 역사저술에 대한 평가는 전무한 편이다. 이는 이 분야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지방향토자료에 대한 학계의 이해부족과 편견이 주요 이유일 것이다.

본 연구팀은 다천 정우익 선생의 유집을 편역하는 과정에서 단춘야사(檀春野詞)라는 제하의 역사서가 집필되었던 사실을 발견하였다. 단춘야사는 유고집의 마지막 제6권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서술의 양식으로 보아 후학들의 교육용으로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구한말에 지금의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에서 출생하신 다천 정우익 선생은 단군조선에서 조선 고종까지 5천년에 이르는 한국사개강을 저술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단춘야사이다. 원래 이 글은 다창회고(茶牕懷古)라는 표제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옛 역사를 더듬어 본다.”는 의미이며, 이 글은 체제적 측면에서 편년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별도의 사론(史論)을 가미하여 기전체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강역과 시대 편년에 있어서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우리 역사의 연원을 단군, 기자 조선에까지 소급하고 있으며 단군 이전의 천지개벽과 역사시대 도래 이전의 창업과정을 총 23편의 4언시(四言詩)로 찬미하고 있다.

다천선생은 단춘야사의 사론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시대를 그 상한으로 하는 육당 최남선의 역사관에 대해 “이 시대 최남선은 유학을 공부하여 사학자로서 세상에서 유명한데 망령되게도 말하기를 고구려 이상은 정사(正史)가 있은 적이 없다고 하며 기자조선은 없었다는 황당한 설을 말하였다. 개탄을 금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평하면서 육당의 역사기술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론(史論)은 단춘야사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전개되고 있으며 특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독립운동과 같은 근세사의 역사인식에 있어서 그 비판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권말(卷末)에서는 우리 민족의 자주권 확보를 위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단순한 역사서의 범주를 벗어난 역사적 담론(談論)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최근 일본 교과서 파동으로 한일간의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은폐로 인해 양국간의 갈등의 조짐마저 일고 있는 지금 투철한 민족관과 냉철한 역사인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계도하셨던 다천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그러한 삶의 역정에 대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역과 터미널에서 일본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집회와 서명운동이 연일 계속되고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허공에 메아리만 감돌뿐 어찌할 수 없는 너무나 허망한 역사적 현실은 위정자나 학자의 타협과 굴종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본 연구팀이 다천 정우익 선생의 유집에서 역사서인 단춘야사를 분리하여 한권의 책을 펴내게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고에서는 원문과 함께 구두점을 찍어 중급 수준의 한자 실력만 있어도 그 어의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고 중고등 학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주석과 도록을 함께 실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천 선생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누가 된다면 이는 모두 본 연구자의 잘못일 것이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고단한 시기에 이 민족의 참된 스승으로 거룩한 삶의 발자취를 남기신 故 다천 정우익 선생의 영전에 삼가 이 글을 바칩니다.

                                                                   2003年 2月 吉日

                                                                        한국족보학연구소 부소장 양권승

 

 

축 사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 지금 우리의 주변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표현되는 지식정보화 시대는 20세기의 자본과 노동력에 의한 사회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옛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선현(先賢)의 유물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몫이며 사명입니다.

이번 정우익(鄭遇益) 선생(先生)께서 남기신 글의 발간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는 웃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계승시키고 후손을 위하여 여러 어르신들의 경륜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문명의 황폐화로 사회 도처에 상존하고 있는 병폐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진정 개개인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정보를 직접 전달해 주는 매체를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만능 사상으로 인하여 물질의 풍요 속에 정신문화의 빈곤이라는 폐습이 거듭되고 있는 이때 실추된 도덕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미풍양속인 예절과 규범을 바로 잡아 건전한 사회풍토 조성에 일익을 담담하기 위하여 정우익 선생의 글은 우리에게 보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연구를 위해 열성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출간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광주향교 전교 오인균

 

 

축 사

옛 것이 점차 사라져 가고, 설 자리가 없어지는 오늘날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런 무관심(無關心)이 연구자(硏究者)에게 있어서는 무척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전통(傳統)들이 길이길이 전해지고 보존(保存)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팀과 한국족보학연구소에서 조선시대 한 유학자(儒學者)인 다천(茶泉) 정우익 선생이 쓰신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정리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천년의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 일제독재 하에서의 역사 자료 소멸과 빠른 경제 성장에 급급해 여러 옛 문헌(文獻)과 유물을 소홀히 취급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습니다.

이번 발간된 단춘야사(檀春野詞)는 단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의 역사서입니다. 그 속에는 한 유학자의 눈을 통해서 본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상이 고루 담겨져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한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 근간이 되는 철학(哲學)입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것을 교훈(敎訓)으로 삼아 미래로 정진할 수 있습니다.

또,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 기록이 아니라, 과거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석하여 재평가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그가 속한 시대적 제약을 받아 그 당시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즉, 역사를 보는 사람의 시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정우익 선생의 단춘야사(檀春野詞)는 역사와 그 역사(歷史)를 해석하는 관점에 있어 기존의 역사가들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우익 선생과 같은 초야의 학자들의 역사서술에 대한 평가가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 분야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이때에 정우익 선생의 단춘야사(檀春野詞) 발간은 학계에서나 정우익 선생의 가문으로서나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단춘야사(檀春野詞)의 출간은 앞으로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더욱 적극적인 노력의 표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상기하며 그동안 단춘야사(檀春野詞)의 출간(出刊)을 위해 힘쓰신 여러 연구진들과 후원자 분들께 진심으로 축사(祝辭)를 전합니다.

                                                                      成均館大 翰林院長 金忠浩

 

 

축 사

무릇 선비에 대한 개념(槪念)은 학식(學識)에 있으나 벼슬하지 아니하고 예(禮) . 악(樂)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의 6예(六藝)를 갖춘 학문(學問) 닦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혹 그릇된 표현(表現)일까요?

유학(儒學)! 유학자(儒學者)!

유학(儒學)의 자의(字意)는 “선비 유(儒)”, “배울 학(學)”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학(儒學)의 개념(槪念)은 도덕(道德)이 앞서는 학문(學問)으로서 소위 도덕(道德)이 앞장서고 그 다음이 문장(文章)인 선도덕(先道德)의 개념(槪念)이라 하겠습니다. 사전적(辭典的) 의미(意味)로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중심(中心)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경전(經典)으로 하여 정치(政治) 도덕(道德)의 실천(實踐)을 설파(說破)하는 학문(學問)입니다. 그렇다면 공자(公子)의 사상(思想)은 무엇이겠습니까? 천명(天命)을 근본(根本)으로 “인(仁)”에 의(依)해서 일관(一貫)된 인도를 축으로 하고, 도를 실행하는 덕을 존중하여 수기치인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도덕관에 입각한 학문이라 하겠습니다.

다천(茶泉) 정우익(鄭遇益) 선생(先生)!

선생(先生)은 출생(出生)부터가 엄격(嚴格)하고 독실(篤實)한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을 구(求)함에 해이(解弛)하지 않았습니다. 유학(儒學)에 전념(專念)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달(通達)하고 오직 수기치인(修己治人)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재가(修身齋家)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유학자(儒學者)이시다. 주유천하(周遊天下) 사물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두가 도덕(道德)이요, 시(詩)요, 문장(文章)이요 교훈(敎訓)이니 선생(先生)의 고매(高邁)한 학덕(學德)이 어찌 이웃 향당(鄕黨)의 칭송(稱頌)뿐이겠습니까! 사림(士林)의 범(範)이요, 후세(後世)의 귀감(龜鑑)되심은 세삼 필설(筆舌)로서의 표현(表現)을 불허(不許)하는 바인 것입니다.

선생(先生)이 평생(平生)에 글로 남긴 도덕관(道德觀)과 주옥(珠玉)같은 시문(詩文)들이 하나의 역사적(歷史的)인 유물(遺物)로서만 가장(家藏)되었던 것을 선생(先生)의 후손(後孫)들이 성심(誠心)과 문학가(文學家) 양권승선생(梁權承先生) 주동하(主動下)에 권위(權威)있게 번역(飜譯)되어 후학(後學)들이 쉽게 알아 살필 수 있는 번역본(飜譯本)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을 한(限)없이 다행(多幸)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끝으로 그 선생(先生)에 그 자손(子孫)이라 후손(後孫)이 반드시 번성(繁盛)하여 그들이 각자 활발(活潑)하게 사회(社會)에 진출(進出)하여 크게 기여(寄與)하고 있음을 마음깊이 축복(祝福)하고 치사(致謝)하면서 축사(祝辭)로 줄입니다.

                                                                西紀 2003年 癸未年 春節

                                                                                 韓日中書畵振興會長 羅福圭

 

 

감사의 글

세상의 변화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고, 인주의(個人主義)가 팽배하는 이 시대에 가문의 역사(歷史)를 탐구하고 그 유물(遺物)을 살피는 것이 별 의미 없는 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에도 있듯이 가정이 사회와 국가의 근본(根本)이요, 그 화목의 기초(基礎)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뿌리가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립니다. 지금 이 사회에 난무(亂舞)하는 여러 문제들을 볼 때마다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며, 그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아버님의 유고집 발간(發刊)이 저희 가족에게는 가족화합과 단결을, 그리고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하나의 교훈(敎訓)이 되어 세세에 남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훌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감동과 여운은 오래 남아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그 교훈(敎訓)을 본받고 실천에 옮길 때 독서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한 권의 제대로 된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을 읽고도 그렇게 감동(感動)을 느낄 수 있는데 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글을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참 조상의 은덕(恩德)이요, 선현(先賢)의 깊은 뜻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그 어려운 시대를 거치시면서 겪으셨을 고초와 그 속에서의 깨달음을 알게 되고, 후손(後孫)에게 전하게 된 기쁨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유고집을 번역하고 선고께서 남기신 그 방대(尨大)한 양의 글을 대하게 되니 그 깊은 학식과 학자로서의 부지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제 훌쩍 팔순의 나이를 넘고 보니 불현듯 단아한 모습으로 서재에 앉아 책을 읽으시고 글을 쓰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도 언젠가는 제 아들에게 그리고 손자와 증손자에게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책으로 낼 수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팀과 한국족보학연구소의 여러 연구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불초 정덕면 근서

 

 

檀春野詞

차 례

발간사 ·································································  3

축사 ································································· 7

감사의 글 ································································· 12

다천 정우익선생에 대하여 ·································································  18

단군조선기(檀君朝鮮紀)

梯天(제천) ································································· 29

築壇(축단) ································································· 34

敎令大領(교령대령) ·································································  37

浿之水(패지수) ································································· 40

莊京(장경) ································································· 42

塗山(도산) ································································· 45

編髮蓋首(편발개수) ································································· 47

기자조선기(箕子朝鮮紀)

箕子朝鮮(기자조선)-野逸流說(야일유설) ······················································ 57

삼한기(三韓紀)

馬韓(마한)-箕子四十一世孫箕準(기자의 41세손 기준) ············································· 63

辰韓(진한) ································································· 64

弁韓(변한) ································································· 65

삼국기(三國紀)

百濟(백제) ································································· 79

高句麗(고구려) ································································· 111

新羅(신라) ································································· 138

고려기(高麗紀)

高麗紀(고려기) ································································· 183

太祖(태조) ································································· 183

惠宗(혜종) ································································· 188

定宗(정종) ································································· 191

光宗(광종) ································································· 193

景宗(경종) ································································· 197

成宗(성종) ································································· 199

穆宗(목종) ································································· 205

顯宗(현종) ································································· 210

德宗(덕종) ································································· 222

靖宗(정종) ································································· 226

文宗(문종) ································································· 228

順宗(순종) ································································· 237

宣宗(선종) ································································· 240

獻宗(헌종) ································································· 243

肅宗(숙종) ································································· 246

睿宗(예종) ································································· 250

仁宗(인종) ································································· 255

毅宗(의종) ································································· 261

明宗(명종) ································································· 266

忠烈王(충렬왕) ································································· 274

忠宣王(충선왕) ································································· 281

忠肅王(충숙왕) ································································· 283

忠惠王(충혜왕) ································································· 287

忠肅王後紀(충숙왕후기) ································································· 288

忠惠王後紀(충혜왕후기) ································································· 290

忠穆王(충목왕) ································································· 296

조선기(朝鮮紀)

太祖(태조) ································································· 305

定宗(정종) ································································· 315

太宗(태종) ································································· 321

世宗(세종) ································································· 328

文宗(문종) ································································· 337

端宗(단종) ································································· 341

德宗(덕종) ································································· 363

睿宗(예종) ································································· 363

成宗(성종) ································································· 364

燕山君(연산군) ································································· 370

中宗(중종) ································································· 376

仁宗(인종) ································································· 383

明宗(명종) ································································· 387

宣祖(선조) ································································· 394

光海君(광해군) ································································· 423

元宗(원종) ································································· 433

仁祖(인조) ································································· 433

孝宗(효종) ································································· 450

顯宗(현종) ································································· 473

肅宗(숙종) ································································· 488

景宗(경종) ································································· 517

英祖(영조) ································································· 527

正祖(정조) ································································· 533

高宗(고종) ································································· 534

 

                                                                                                       html by aro    June 5,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