持平公事實(지평공사실)  

[역문]

公(공)의 諱(휘)는 諺祖(언조)요 字(자)는 厚之(후지)며 號(호)는 思義堂(사의당)이다. 文靖公(문정공) 雪齋(설재)諱(휘) 可臣(가신)의 八世孫(8세손)이요

景武公(경무공) 諱(휘) 軾(식)의 曾孫(증손)이요

監察公(감찰공) 諱(휘) 承賢(승현)의 孫子(손자)요

直長公(직장공) 諱(휘) 觀(관)의 아들이다.

弘治(홍치---明孝宗年號) 辛酉生(신유생 1501)으로 羅州郡 老安面 金鞍洞(나주군 노안면 금안동)에서 출생하였다.

兩親(양친)을 잃고 항상 悲痛(비통)함을 품었다.

嘉靖(가정 明世宗年號) 癸未年(계미년) 中宗18 서기 1523)에 文景公(문경공) 二樂堂(이락당) 申用漑(신용개)가 薦擧(천거)하여 처음에 副司勇(부사용)에 任命(임명)되었으며 丙戌年(병술년)에 軍資監奉事(군자감봉사)가 되었고 庚寅年(경인년)에 奉常寺直長(봉상시직장)에 任命(임명)되 ①肅謝(숙사)하였다.

資稟(자품)이 純剛(순강)하고 經濟(경제)가 有餘(유여)하였으며 學行(학행)이 方重(방중)하고 兼(겸)하여 行才(행재)가 있었다.

中宗(중종) 壬辰年(임진년 1532)에 비로소 京畿道 利川 高節里(경기도 이천 고절리)에 살게 되니 子孫(자손)들이 그대로 살았다. 따로 小堂(소당)을 家園(가원)에 지어 醉翁亭(취옹정)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嘯咏(소영)으로 일을 삼으며 때로 儒林(유림)의 宗匠(종장)인 文敬公(문경공) 慕齋金安國(모재김안국)과 世上(세상)에서 七道伯(칠도백)이라 일컫는 兩堂李澤(양당이택)으로 더불어 親交(친교)를 맺어 來往(래왕)하였다.

慕齋先生(모재선생)이 醉翁亭(취옹정)에 와서 술 마시면서 贈詩(증시)하기를 『부드러운 녹색이 새롭게 여름으로 바뀌니 교목나무에 옮긴 꾀꼬리 벗 부른 소리로다. 薰薰(훈훈)한 바람 낯을 스치고 비낀 해는 술잔에 비쳐 밝구나 들풀은 하늘 끝까지 連(연)해있고 마을 연기 나무를 둘러 일어나네 멀리 山(산)이 그러진 곳을 보니 彷佛(방불)하여 蓬瀛(봉영)이 가깝구나 』하였다.

李澤堂集(이택당집)에 또 ②贈和(증화)한 詩(시)가 있다.

公(공)의 曾孫(증손) 暎溪堂公(영계당공)이 黃海道新溪郡 美水面白岩里(황해도 신계군  미수면 백암리)로 移居(이거)함으로 後孫(후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萬曆(만력)(명신종년호) 乙酉年(을유년 宣祖18西紀1585)三月三日에 卒(졸)하니 享年(향년)이 八十五歲(85세)였고

墓(묘)는 京畿道利川郡夫鉢面高白里(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고백리) 後麓(후록) 粉土谷(분토곡) 艮坐(간좌)다.

配(배)는 淑人(숙인) 南陽洪氏(남양홍씨)로 父(부)는 得仁(득인)이니 弘治(홍치) 壬戌生(임술생 1502)이오 忌(기)는 八月(팔월) 십삼일이며 雙墳(쌍분)으로 墓碣(묘갈)이 있다.

景宗朝(경종조)때 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에 進贈(진증)되었다.

<註>

①肅謝(숙사):임금께 任地(임지)로 떠난다고 人事(인사)를 드림

②증화(증화):지은 詩(시)를 받으면 그 詩(시)의 韻(운)을 따라 詩(시)를 지어 보냄

弘治(홍치)(中國) 명(明)나라 효종(孝宗) 때의 연호(年號). 서기(西紀) 1488년부터 1505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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