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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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逸齋司正公狀錄 [역문]公(공)의 諱(휘)는 以殷(이은)이오 字(자)는 輔仁(보인)이며 號(호)는 逸齋(일재)니 文靖公(문정공) 雪齋(설재) 諱(휘) 可臣(가신)의 九世孫(9세손)이요 監察棄齋公(감찰기재공) 諱(휘) 勳(훈)의 曾孫(증손)이며 監察公(감찰공) 諱(휘) 益宗(익종)의 第三子(제3자)다. 公(공)은 雅性(아성)이 忠廉(충렴)하고 文章(문장)이 卓異(탁이)하되 兼(겸)하여 鄕試(향시) 武藝(무예)에 合格(합격)하여 世上(세상)의 瞻仰(첨앙)한바가 되었다. 나이 겨우 弱冠(약관)에 벼슬길에 뜻을 두고 서울로 가니 한필 靑驢上(청려상)에 훤출한 風采(풍채)는 가히 ①攬轡澄淸(람비징청)의 抱負(포부)를 볼 수 있으니 一世(일세) 名利軰(명리배)의 능히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런데 한 결 같이 어찌 命道(명도)의 막힘이 많아 文塲(문장)과 武試(무시)에 연달아 落榜(낙방)하여 몇 년을 허비할 뿐이더니 놀랍게도 彰信校尉(창신교위) 忠佐衛司正(충좌위사정)등에 손쉽게 任命(임명)되니 ②蔭職(음직)을 받은 思惠(사혜)가 어찌 그 本來(본래)의 抱負(포부)였으리오 밤에 旅窓(여창)에 들어 등불을 켜놓고 잠 못 이루어 雪齋公(설재공) 思鄕韻(사향운)을 追憶(추억)하여 본떠 歸去來辭(귀거래사)를 짓고 幡然(번연)히 悔悟(회오)하고 行裝(행장)을 수습하여 돌아오니 이는 참으로 急流中(급류중)에서 勇退(용퇴)하여 神仙(신선)되어 가기 멀지않은 날이었다. 이로부터 靜庵趙先生(정암조선생) 先祖(선조)를 좇아 놀면서 禮說(예설)을 講論(강론)하고 古今(고금)을 商確(상확)하되 한결같이 이름을 깬것 같으니 先生(선생)이 撰(찬)하기를 우리 道(도)가 南來(남래)하였는데 그대 보기를 어찌 하였는고 하고 道義(도의)의 交遊(교유)를 허락하였다. 己卯年(기묘년)에 靜庵先生(정암선생)이 禍(화)를 입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彷徨失色(방황실색)하여 음식을 물리치고 病(병)이 되어 자리에 누은지 몇 달이었다. 곧 밤이면 病飮(병음)하여 就枕(취침)함에 精神(정신)이 觀梅卦(관매괘) 遇天山(우천산)에 달리고 自號(자호)를 逸齋(일재)라 하고 인하여 浪吟(랑음)하기를 濁(탁)한 滄浪(창랑)에 가히 내가 발을 씻는 날이오 맑은 이 潁水(영수)에 誰(수)가 洗耳(세이)의 자취를 이을련고 水石(수석)이 더욱 즐거움이여 琴酒(금주)로서 自娛(자오)하리라 하고 이에 數椽精舍(수연정사)를 花山(화산) 솔술가에 營築(영축)하고 棲息(서식)의 장소를 삼아 날마다 後蒙(후몽)에게 孝經(효경)과 論語(논어)와 孟子(맹자)의 學問(학문)을 啓授(계수)하여 心工(심공)을 삼아 스스로 名敎中(명교중)이 樂地(악지)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가슴속에 재주를 품고 물을 마시니 크게 쓰일수 있는 世上(세상)을 만나지 못함을 한탄하고 지나간 어진이를 이어 알날을 여러 鄒(추)나라 魯(노)나라의 風俗(풍속)을 본받기를 願(원)하니 참으로 終老(종노)의 課題(과제)를 헤아렸다고 할것이니 이것이 公(공)의 實蹟(실적)이다. 輿地勝覽(여지승람)에 이르기를 拱(공)의 性品(성품)이 蟲廉慷慨(충렴강개)하여 세상의 瞻仰(첨앙)한바 라고 하였다. 嘉靖乙未二月九日卒享年四十有一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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