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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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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差官逸巖公事實 [역문]公(공)의 諱(휘)는 之雅(지아)요 字(자)는 德向(덕향)이며 逸巖(일암)은 號(호)다. 永樂辛丑(영락신축) 世宗(세종) 三年(3년 1421)에 文科(문과)로 官(관)이 啓功郞(계공랑) 敦寧府直長(돈녕부직장) 湖南灾傷敬差官(호남재상경차관)으로 吏曹正郞(이조정랑)에 이르렀고 乙亥年(을해년 1455)에 魯山君(노산군) 遜位(손위)를 듣고 벼슬을 버리고 歸鄕(귀향)하였고 丁丑年(정축년 1457)에 父(부) 棄齋公(기재공)의 上王謀復事(상왕모복사)의 禍(화)로 南海(남해)에 귀양가니 公(공)이 配所(배소)까지 隨往(수왕)하여 親心(친심)을 너그럽게 깨우쳐 드리고 供養(공양)을 다하였다. 그 후 十年(십년)만에 풀려나와 果川(과천) 冠岳山中(관악산중)에 숨었으며 壬辰(임진)에 父親喪(부친상)을 당하여 哀毁(애훼)가 踰制(유제)하였고 服(복)을 벗고는 家眷(가권)을 이끌고 咸平(함평)으로 南下(남하)하여 한 고을을 周覽(주람)하고 可接(가접)할 땅을 찾았으니 이곳이 葛洞坊陽地(갈동방양지)며 또한 貫鄕(관향)의 接境(접경)이다. 인하여 菟裘(토구)의 場所(장소)로 삼고 石花山(석화산)의 南洞(남동)에 숨어 首陽(수양)의 節操(절조)를 固守(고수)하며 매양 採眉歌(채미가)를 외우며 또 杜宇詩(두우시)를 지으니 이르시기를 『杜宇(두우)의 우름 杜宇(두우)의 우름이여 花山(화산)의 明月(명월) 東風(동풍)의 밤이로다. 哀訴(애소) 소리 구슬프며 새벽달은 기우는데 孤臣(고신)이 이곳 와서 잠잘 수 없네』하였다. 매양 巖上(암상)에 올라 寧越(영월)을 望哭(망곡)하며 임금 생각한 마음을 부치니 後人(후인)이 그 洞(동)을 崇忠洞(숭충동)이라 하고 그 바위를 望越巖(망월암)이라 하였다. 公(공)이 臨終時(임종시)에 遺戎(유융)하기를 禍家餘生(화가여생)이 性命(성명)을 得保(득보)하였으니 足(족)하다. 妄靈(망령)된 생각으로 世路(세로)에 隨谷(수곡)하여 俯仰(부앙)한것은 不當(부당)하다고 하였다 한다. 弘治(홍치) 甲寅年(1494)에 卒(졸)하니 壽(수)는 七十四歲(74세)다. 事實(사실)이 東鶴誌(동학지) 咸平郡誌(함평군지)및 斷種忠義錄(단종충의록)에 나타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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