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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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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馬節度使錦州公墓碣銘幷書 [역문]公(공)의 諱(휘)는 孝祖(효조)요 字(자)는 達之(달지)며 號(호)는 錦洲(금주)니 羅州鄭氏(나주정씨)다. 軍器監(군기감) 諱(휘) 諧(해)가 始祖(시조)가 되고 三傳(삼전)하여 諱(휘)는 可臣(가신)이오 號(호)는 雪齋(설재)니 修文殿 太學士(수문전태학사)로 諡號(시호)는 文靖(문정)이니 文肅公(문숙공) 金周鼎(김주정)과 文顯公(문현공) 尹珤(윤보)로 世稱(세칭) 三賢(삼현)이라 한다. 三傳(삼전)하여 諱(휘)는 有(유)니 成事(성사)로 兵曹參判(병조참판)에 贈職(증직)되니 公(공)의 五世祖(오세조)다. 高祖(고조)의 諱(휘)는 自新(자신)이니 吏曹判書(이조판서)요 曾祖(증조)의 諱(휘)는 軾(식)이니 兵曹判書(병조판서)로 諡號(시호)는 景武(경무)요 祖(조)의 諱(휘)는 承賢(승현)이니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이요 考(고)의 諱(휘)는 觀(관)이니 司瞻寺直長(사첨시직장)이다. 妣(비)安人(안인)은 咸陽朴氏(함양박씨)로 敎授(교수) 玄蒙(여몽)의 女(여)다. 公(공)이 成宗(성종) 壬寅年(임인년 1482)二月十日(이월십일)에 出生(출생)하여 中宗(중종) 庚子年(경자년 1540)八月十七日(8월17일)에 卒(졸)하니 墓(묘)는 錦城南(금성남) 雲谷洞(운곡동) 石橋村後(석교촌후) 乾原(건원)이다. 配(배)는 貞夫人(정부인) 咸陽盧氏(함양노씨)로 兵馬使(병마사) 程南(정남)의 女(여)니 壬寅年(임인년)九月七日生(9월7일생)으로 丁丑年(정축년)十月十一日(10월11일)에 卒(졸)하니 公(공)과 雙封(쌍봉)이며 繼配(계배)는 貞夫人(정부인) 陽城李氏(양성이씨)로 同知(동지) 義章(의장)의 女(여)니 辛酉年(신유년)十二月二十六日生(12월26일생)으로 壬戌年(임술년)二月二日(2월2일)에 卒(졸)하니 墓(묘)는 石橋村(석교촌) 西(서)쪽 高山洞(고산동) 版圖公(판도공) 墓下(묘하) 坤原(곤원)이다. 姪(질)인 參奉(참봉) 訥(눌)로 아들을 삼고 四婿(사서)니 善山(선산) 柳進士(유진사) 沖(충)과 洪州宋縣監(홍주송현감) 紳(신)과 羅州(나주) 吳進士(오진사) 訍(차)과 長澤(장택) 高主簿(고주부) 億齡(억령)이오 孫男(손남)은 處士(처사) 如崑(여곤)과 將仕郞(장사랑) 如岡(여강)과 如山(여산)이며 處士(처사) 如陵(여능)이오 孫婿(손서)는 南原(남원) 梁思瑩(양사영)이다. 아! 公(공)의 性稟(성품)이 聰穎(총영)하고 剛直(강직)하여 어려서부터 父母(부모)를 잘 섬기고 兄弟(형제)간에 友愛(우애)를 極盡(극진)히 했으며 壯年(장년)이 되어서는 그 동생 思禮堂(사례당) 念祖(염조)와 思義堂(사의당) 諺祖(언조)로 當時(당시) 碩學(석학)의 門下(문하)에 出遊(출유)하여 文章(문장)에 能(능)하고 氣義(기의)를 숭상하여 聲望(성망)이 鄕省(향성)에 俱高(구고)하였다. 燕山(연산) 甲子年(갑자년 1504)에 司馬(사마)요 中宗(중종) 丙寅年(병인년 1506)에 武科(무과)에 謁聖壯元(알성장원)했으며 推誠報杜佑世靖難二等功臣(추성보두우세정난이등공신) 嘉義大夫(가의대부) 咸鏡道北兵馬水軍節度使(함경도북병마수군절도사)로 일찍 京邸(경구)에 들어가 趙靜菴先生(조정암선생)을 뵈옵고 물러나 칭찬하기를 鳳(봉)이 朝陽(조양)에서 울고 鶴(학)이 雲霄(운소)에 날은다 하였다. 先生(선생)의 賜死(사사)에미처 挽詞(만사)하여 슬퍼하기를 『誰使浮雲能蔽日(수사부운능폐일) 可哀白壁竟沉淵』[가애백벽경침연)(누가 浮雲(부운)으로 해를 가리는고 가히 슬프구나 흰구슬이 못에 못에 잠겼으니]이란 글귀가 있다. 遺稿(유고)가 있었는데 兵亂(병난)으로 불타버렸으니 가히 慨嘆(개탄)할 일이다. 이미 歿(몰)한 후에 資憲大夫(자헌대부) 漢城判尹(한성판윤)에 贈職(증직)되었고 또 正憲大夫 同知中樞府事 兼五衛都總府都總管(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에 贈職(증직)되었다. 後孫(후손)인 哲洙(철수) 淳榮(순영) 健柱(건주)가 行狀(행장)을 가지고 와서 再三(재삼) 碑文(비문)을 求(구)함으로 行狀(행장)에 依據(의거)하여 만드노라 銘(명)하노니 賈氏(가씨)의 三虎(삼호)에 비기니 名聲(명성)이 一世(일세)에 가지런 했네. 어찌 外藩(외번)에서만 서성거렸는고 그 大志(대지)를 펴지 못했도다. 사마(司馬)의 氷鑑(빙감)이 있음이여 한번 서로보고 어짐을 알았도다. 金鼎(김정)의 맛을 고기 한점으로 알아내어 한입으로 挽歌(만가)지어 口傳(구전)되었네. 이에 石碑(석비)세워 글을 刻(각)하여 陵谷(능곡)에 萬年(만년)토록 갖추었네.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四年辛未驁蟄節 坡平 尹丁鍑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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