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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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棄齋公事實
(기재공사실)

[역문]公(공)의 諱(휘)는 (훈)이요 字(자)는 子馨(자형)이며 初諱(초휘)는 承聖(승성)이오 字(자)는 希天(희천)이며 號(호)는 棄齋(기재)다. 本貫(본관)은 羅州(나주)니 바로 雪齋先生 諱 可臣(설재선생 휘 가신)의 六世孫(6세손)이요 指諭公 諱 億(지유공 휘 억)의 五世孫(5세손)이며 萬戶公 諱 轅(만호공 휘 원)의 子(자)다.

建文辛巳年(건문 신사년1401)에 公(공)이 漢城 南山下 笠店洞(한성 남산하 입점동)에서 出生(출생)하니 어려서부터 事親至孝(사친지효)하며 사람됨이 沖澹灑落(충담쇄락)하고 倜儻不羈(척당불기)하며 志節(지절)의 慷慨(강개)가 있어 항상 諸葛武侯(제갈무후) 出師表(출사표)와 胡澹庵(호담암) 封事(봉사)를 읽을 때 반듯이 奮臂流涕(분비유체)하였다.

正統 丙寅年(정통 병인년1448)에 文科(문과)에 올라 처음으로 敦寧主簿(돈영주부) 桃源道察訪(도원도찰방)에 任命(임명)되었고 景泰 壬申年(경태 임신년1452)에 司憲府 監察(사헌부 감찰)로 옮겼고 乙亥年(을해년1455)에 端宗(단종)이 遜位(손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丙子年(병자년1456)에 錦城大君 瑜(금성대군 유)를 順興謫所(순흥적소)에서 뵈옵고 上王(상왕)을 謀復(모복)코자 自請檄文(자청격문)을 湖南(호남)에 傳達(전달)하여 義士(의사)를 招募(초모)할 計劃(계획)을 이미 定(정)하였다.

丁丑年(정축년1457)에 갑자기 父親喪(부친상)을 만나 枕塊齎恨(침괴재한)하더니 이윽고 禍(화)가 일어나 罪(죄)에 걸려 南海(남해)로 귀양가서 設位(설위)하여 朝夕(조석)으로 號擗(호벽)하였으며 항상 寧越(영월)을 바라보고 呑聲掩涕(탄성엄체)하더니 十月(시월)에 賓賤(빈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五日(5일)을 慟哭(통곡)하고 三年(3년)을 服喪(복상)하였으며 귀양이 풀림에 冠岳山中(관악산중)에 숨어 棄齋(기재)라고 扁額(편액)하고 元霧巷(원무항) 昊(호)로 志趣(지취)가 같아 贈詩(증시)하니 『같은 上王臣(상왕신)으로 참아 乙丙辰(을병진)을 사네. 書燈(서등)의 두주먹 눈물을 錦江(금강)의 물가를 向(향)해 뿌리네』하였고

또 金東峯(김동봉) 時習(시습)과 山水(산수)를 放浪(방랑)하며 매양 端宗(단종) 諱辰(휘진)을 당하면 錦江亭(금강정)에서 慟哭(통곡)하다 돌아오니 그때 公(공)의 族叔(족숙) 縣監公 諱 輅(현감공 휘 로)께서 公(공)에게 贈詩(증시)하기를 『우리집은 곧 世臣(세신)인데 참아 內禪(내선)의 臣下(신하)를 보내 社宇(사우)는 밤을 새워 목메는데 외로운 정자 錦水(금수)의 물갓이네』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公(공)의 實行(실행)한 大畧(대략)이다.

成宗 壬辰年(성종 임진년1472) 正月二日(1월2일)에 卒(졸)하니 壽(수)는 七十二歲(72세)였다. 羅州(나주) 北(북)쪽 道林面(도림면) 熊谷村後(웅곡촌후) 負艮(부간)의 언덕에 歸葬(귀장)하니 雙窆(쌍폄)이다.

配(배)는 宜人 寶城盧氏(의인 보성노씨)로 縣監(현감) 石崑(석곤)의 女(여)니 庚寅年 十月十二日(경인년 시월12일)에 卒(졸)하였다.

一男(일남)을 두었으니 諱(휘)는 之雅(지아)로 文科敬差官(문과경차관)이며 丁丑禍後(정축화후)로 咸平(함평)으로 南下(남하)하니 後孫(후손)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事實(사실)이 端宗忠義錄(단종충위록) 東鶴誌(동학지) 海東忠義錄(해동충의록) 三綱錄(삼강록) 國史纂要 朝鮮史略(국사편요조선사략)과 咸平誌(함평지)에 실려 있다.

公(공)의 熊谷墓所(웅곡묘소)를 이미 兵火(병화)에 잃어버렸다.

多幸(다행)히 都事公 諱 珒(도사공 휘 진)께서 山下(산하)에 사는 사람의 證言(증언)으로 墓所(묘소)를 찾았는데 兵火(병화)후에 碣誌(갈지)를 잃어버려 또 澄高(징고)가 없어 上下(상하)를 分別(분별)치 못함으로 設壇合祭(설단합제)한지 여러해더니 癸亥春(계해춘)에 여러 宗議(종의)가 齊發(제발)하여 비로소 墓壇碑(묘단비)를 새우고 甲戌年三月(갑술년 3월)에 士論(사론)으로 咸平 鰲山祠(함평 오산사)에 配享(배향)하였다.

                                                               光山 金 勳撰
                                                                                  (광산  김훈 찬)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1卷 10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파계(派系)

  21世

고조(高祖)

諱再振

증조(曾祖)

조(祖)

諱維新

고(考)

萬戶公諱轅

  

10世諱薰初諱承聖

子馨 자형

 

棄齋 기재

諡號

 

太宗辛巳

成宗壬辰1月2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