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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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景武公行錄
(경무공행록)

[역문]
(공)의 諱(휘)(식)이요 字는 憑甫(빙보)며 又字(우자)는 敬瞻(경첨)이고 號(호)는 永慕亭(영모정)이니 高麗(고려) 文靖公雪齋先生(문정공설재선생) 諱可臣(휘가신)의 五代孫(5대손)이다.

(조)의 諱(휘)는 有(유)니 通政大夫 知成川事(통정대부 지성천사)로 永川等邑(영천등읍)의 守令(수령)을 歷任(역임)하였고 嘉靖大夫 兵曹參判(가정대부 병조참판)에 贈職(증직)되었으며 考(고)의 諱(휘)는 自新(자신)이니 保功將軍 雄武侍衛司 大護軍(보공장군 웅무시위사 대호군)으로 綾城等邑(능서등읍)의 守令(수령)을 歷任(역임)하였는데 모두 治績(치적)이 있어 資憲大夫 吏曹判書(자헌대부 이조판서)에 贈職(증직)되었다.

(비)는 貞夫人 全州崔氏(정부인 전주최씨)로 漢城判尹 士威(한성판윤 사위)의 딸이다. 永樂丁亥太宗七年(영락정해태종7년 1407)에 出生(출생)하니 性稟(성품)이 嚴淸簡直(엄청간직)하여 비록 華麗(화려)하게 자랐으나 항상 寒素(한소)로 自處(자처)하고 文章(문장)을 위하여 兵車(병차)를 가벼이 보지 않았다.

經史(경사)를 ①博涉(박섭)하고 義理(의리)를 ②尋賾(심색)하여 自身(자신)이 行(행)하되 반드시 古人(고인)을 思慕(사모)하고 世俗(세속)을 따르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父母(부모)에게 孝道(효도)를 다하여 곁에서 奉養(봉양)하며 낯을 부드럽게 하고 뜻을 받드니 二親(이친)께서 항상 기뻐하였으니 巖軒申先生(암헌신선생)이 칭찬하기를 鄭軾(정식)은 가히 뜻을 기른 孝道(효도)라 하였다.

宣德壬子(선덕임자) 世宗十四年(세종14년1432) 四月十四日(4월14일)에 文科 丙科(문과 병과)에 合格(합격)하고 다음 해에 宣務郞試東部令(선무랑시동부령)에 補職(보직)되었으나 달리 兄弟(형제)가 없고 父母(부모)가 年老(연노)하니 出仕(출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溫淸(온정)의 틈에 사람들과 經史(경사)를 討論(토론)하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아니하니 그 居處(거처)가 淡淡(담담)하여 한낱 寒士(한사)였다.

朝廷(조정)에서 연달아 恩詔(은소)로 불렀으나 모두 赴任(부임)하지 안했으며 世宗二十二年(세종22년) 庚申(경신)에 吏判公(이판공)의 喪(상)을 당하여 哀毁(애훼)함이 喪禮(상례)를 넘었으며 葬事(장사)와 卒哭(졸곡)을 마치고 廬(려)를 墓西(묘서)편 雙柿樹(쌍시수) 아래 쌓고 더우잡고 의지해서 哀慕(애모)하고 三年喪(3년상)을 마치니 그 나무를 永慕亭(영모정)이라 부르니 世人(세인)들이 感歎(감탄)치 않는 이가 없었으며 고을의 어진분인 羅先生結(나선생결)이 詩(시)로써 칭찬하였으며 脫服(탈복)함에 大夫人命(대부인명)으로 承訓郞 禮佐田品擲奸使(승훈랑 예좌전품정간사) 다시 禮曹佐郞咸吉道敬差官(예조좌랑함길도경차관)에 出仕(출사)하고 돌아 와서 守吏曹正郞(수이조정랑)으로 大夫人(대부인)을 받들어 京第(경제)로 모셔 昏定晨省(혼정신성)을 편하게 하였으며 議政府(의정부) ⑨檢詳條例司(검상조례사)로 옮겨 平安咸吉道 都體察 從事官(평안함길도도체사종사관)으로 나가게 되어 咸吉道(함길도)에 있을 때 大夫人(대부인)께서 疾(질)이 들어 임금이 손수 書敎(서교)하기를 너의 母(모)가 得病(득병)하니 올라와 上見(상견)하라는 연고로 알리니 卽(즉) 正統九年(정통9년1444) 三月十九日(3월9일)이다.

뒤에 또 吏曹正郞(이조정랑)이 되고 昭憲王后(소헌왕후)의 喪(상)에 國葬都監判官(국장도감판관)이 되어 陵室制度(능실제도)를 관장하여 다스렀으며 이듬해 世宗二十九年(세종29년1447)에 ⑱重試(중시)에 合格(합격)하고 議政府舍人寶文閣知制敎(의정부사인보문각지제교)에서 다시 義州築城官(의주축성관)이 되었다가 두 번째로 平安咸吉道 都體察使 從事官(평안함길도 도체찰사 종사관)으로 나갔을 때 大夫人(대부인) 病(병)이 있었는데 上(상)께서 또 손수 書敎(서교)하기를 平安咸吉道 都體察使 從事官(평안함길도 도체찰사 종사관) 鄭軾(정식)은 너의 母(모) 가 得病(득병)하였으니 이에 速(속)히 올라와 相見(상견)하라는 연고로 알려 왔으니 이때가 景泰元年世宗三十二年(경태원년세종32년1450) 九月 三日(9월3일)이었다.

다음에 寶文閣(보문각)으로 承召(승소)되었으나 이 달에 大夫人喪(대부인상)을 당하여 守喪(수상)하기를 한결같이 前喪(전상)과 같이하여 哀毁(애훼)한 三年(3년)에 거의 精神(정신)을 잃는데 이르렀다.

公(공)이 이미 두 분 초상을 마치고 다시 榮遠(영원)의 뜻을 두지 아니하고 朝廷(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아니하니 마침내 아끼어 命(명)을 바꾸니 부득이 知承文院(지승문원) 司諫院事(사간원사)로 出仕(출사)하였다가 中訓大夫(중훈대부)로서 寶城郡守(보성군수)로 나가고 여기에서 原從功臣三等(원종공신3등)으로 策勳(책훈)되고 通訓大夫(통훈대부)로 昇格(승객)되었다. 이곳은 濱海(빈해)의 땅인고로 사람들이 學問(학문)을 좋아하지 않음으로 公(공)이 郡內(군내)의 子弟(자제)를 선발하여 每月一日(매월1일)에 庠舍(상사)에 모여 講(강)하고 嚴(엄)하게 課業(과업)을 勸(권)하니 四年(4년)만에 儒敎(유교)가興菀(흥완)하고 또 小民(소민)을 愛恤(애휼)하고 故老(고노)들에게 물어 ⑰弊瘼(폐막)을 盡除(진제)하였으며 白己(자기)의 俸祿(봉록)을 덜어 궁하고 주린 사람을 먹이니 勤儉(근검)의 정사가 遠近(원근)에 들리어 方伯(방백)이 연달아 褒賞(포상)할 것을 朝廷(조정)에 알리니 ③卓茂(탁무)와 ④文翁(문옹)의 敎化(교화)에 견주었다.

郡(군)에 있은지 四年(4년)만에 옮겨 다시 承政院同副承旨 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經筳參贊官 寶文閣直提學 修文殿學士(승정원동부승지 통정대부승정원우승지경연참찬관 보문각직제학 수문전학사)에서 다시 刑曹參判(형조참판)에서 嘉善大夫咸吉道觀察使(가선대부함길도관찰사)가 되니 이해가 天順三年己卯世祖五年(천순3년 기묘 세조5년1459)이며 이때 公(공)의 나이 五十三歲(53세)이었다.

公(공)은 여기에서 힘써 安集(안집)의 方途(방도)를 다하였고 괴할한 놈들을 묶으고 탐욕스런 놈을 규탄하여 한 地方(지방)이 業(업)을 즐기어 칭찬하는 소리가 자심하니 上(상)께서 가상이 여겨 內官李存(내관이존)을 보내어 잔치를 베풀고 옷 한 벌을 下賜(하사)하였으며 毛憐衛波猪江野人賊李滿住(모련위파저강야인적이만주)를 征伐(정벌)하여 大功(대공)을 세우니 上(상)께서 가상이 여겨 특히 資憲大夫(자헌대부)를 더하시고 錦城(금성) 北(북)쪽 三十里(삼십리)땅을 下賜(하사)하고 또 沿路(연로)의 州郡(주군)및 奉常寺(봉상사) 奴婢(노비)등을 賜給(사급)하며 以後(이후)에 出生(출생)한자를 아울러 永世(영세)토록 傳(전)케하였으니 이 事實(사실)은 天順五年(천순5년1461)四月 日(4월 일)이다.

다시 司憲府大司憲判漢城尹(사헌부대사헌판한성윤)에 任命(임명)되니 條法(조법)을 嚴守(엄수)하여 豪貴(호귀)의 橫暴(횡포)를 막고 小民(소민)을 得職(득직)케 하니 ⑤京師(경사)가 肅淸(숙청)되었다. 知中樞院(지중추원) 事慶尙左道都節制使(사경상좌도도절제사)가 되어 ⑥關節(관절)이 이르지 않고 宿弊(숙폐)를 革去(혁거)하니 朝廷(조정)에서 ⑭長德偉人(장덕위인)이라 칭하였다.

上(상)께서 의지하고 신뢰함이 자못 융숭하였으며 일직 溫泉(온천)에 扈駕(호가)하였는데 行宮(행궁)에 불이 나서 百官(백관)이 驚惶(경황)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할 때 公(공)이 홀로 戎服(융복)으로 불을 끄고 火災(화염)를 무릅쓰고 등에 임금을 업고 나오니 鬚髮(수발)이 모두 타고 재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으며 신 끝이 또한 문드러졌으니 이는 가히 죽음을 무릅쓰고 避(피)하지 않았으며 다만 임금만을 알고 自身(자신)은 돌보지 안했으니 竭誠盡瘁(갈성진췌)한 大節(대절)이라 할 것이다. 上(상)께서 특별히 嘉尙(가상)이 여기시고 곧 畵工(화공)을 앞에 불러 冒以(모이)한 肖像畵(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寵賜(총사)하되 永世不(영세불)의 蹟(적)이라 表(표)하였다.

뒤에 正憲大夫(정헌대부) 兵曹判書(병조판서) 中樞府同知事(중추부동지사) 兼五衛都摠府都摠管(겸오위도총부도총관)에 陞進(승진)되었으니 成化二年(성화2년1466) 丙戌十月六日(병술10월6일)이다. 公(공)이 나이 周甲(주갑)이 되도록 오래 兵曹(병조)에 있어 盛滿(성만)함을 길이 두려워 하여 매양 引退(인퇴)코자 하였으나 上(상)의 春遇(춘우)가 날로 융숭하여 그가 가는 것을 許諾(허락)치 아니하였다.

丁亥年 三月十日(정해년3월10일)에 집에서 考終(고종)하니 上(상)이 들으시고 놀래고 슬퍼하여 朝會(조회)를 罷(파)하시고 禮官(예관)을 보내어 祭物(제물)을 下賜(하사)하고 그 庇事(비사)를 監督(감독)케 하고 羅州(나주) 西(서)쪽 白龍山(백룡산)에 禮葬(예장)하고 景武(경무)라 贈諡(증시)하였다.(諡法(시법)에 義(의)로 연욱하여 濟(제)함을 景(경)이라 하고 性品(성품)이 剛直(강직)하고 진실하게 다스리는 것을 武(무)라 한다)

肅宗(숙종) 癸酉年(계유년1693)에 士林(사림)이 雪齋書院(설재서원)에 配享(배향)하였다.

世宗(세종)께서 손수 쓰신 獎孝手札(장효수찰)과 世祖(세조)가 褒忠(포충)한 畵像(화상)을 賢宇(현우)에 奉安(봉안)하였으며 戊辰年(무진년)에 湖西(호서)의 士論(사론)이 鼓發(고발)하여 職名(직명)으로 一齊(일제)이 兩湖儒林(양호유림)및 禮曹(예조)에 호소하고 兩湖官署(양호관서)에서는 禮曹(예조)에 題表(제표)를 質問(질문)하고 列邑校齋(열읍교재)에 傳文(전문)하여 ⑦公擧(공거)의 글이 ⑧斑斑(반반)하니 景堂(경당)을 魯城(노성) 禾谷里(화곡리)에 重建(중건)하였다.

[註]
①博涉(박섭)...널리 책을 읽음 또는 널리 事物(사물)을 見聞(견문)함
②尋賾(심색)...길이 事物(사물)을 探究(탐구)함 즉 探賾(탐적)과 같음
③卓茂(탁무)...後漢(후한)때 長安(장안)에서 博士江生(박사강생)에게 事師(사사)하여 法禮(법례)와 曆算(역산)을 익히고 儒術(유술)로써 侍郞(시랑)에 천거되었으며 官(관)은 給事黃門(급사황문)이다.
④文翁(문옹)...漢(한)의 舒(서)땅 사람, 젊어서 學問(학문)을 좋아했으며 春秋(춘추)에 通(통)하였다. 景帝末(경제말)에 獨郡守(독군수)를 지냈으며 크게 敎化(교화)를 일으켰다. 武帝(무제)때 郡國(군국)이 모두 學校(학교)를 세운 것은 文翁(문옹)이 시작하였음
⑤京師(경사)...임금이 사는 서울
⑥關節(관절)...要路(요로)에 있는 사람에게 賂物(뇌물)을 보내고 부탁하는 일
⑦公擧(공거)...共同(공동)으로 추천하여 천거함
⑧斑斑(반반)...명하고 뚜렸함
⑨檢詳條例司()...이조때 法律(법률)의 製定(제정)을 맡아 보던 관청
⑩公車(공거)...兵車(병거)

⑪不屑(불설)...가벼히 보지 않음. 좋아서 한다.
⑫褒啓(포계)...各 道(각도)의 관찰사 또는 御使(어사)가 고을 원의 善政(선정)을 표창하자고 올리는 글
⑬判漢城府事(판한성부사)...지금의 서울 특별시장
⑭長德偉人(장덕위인)...덕이 많은 위인
⑮倚毗(의비)...의지하고 신뢰함
⑯稱職(칭직)...재능이 직무에 알맞음
⑰弊瘼(폐막)...없애버리기 어려운 폐단. 못된 병통
⑱重試(중시)...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한 사람을 계속해서 격려하는 뜻으로 실시한 特別試驗(특별시험) 10年(년)에 한번씩 이루어지며 堂下官(당하관)에서 應試(응시)한다.

아래와 같이 계보파악 및 影幀.墓所붙임  

景武公 諱軾 影幀 (御書閣內奉安) / 나주시 노안면 영안길 60 설재서원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白龍山 (齋閣 건너편)

系   譜 : 1卷 7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雪齋書院配享

중조(中祖)

  

 파계(派系)

  

  

  

고조(高祖)

諱佶

증조(曾祖)

諱文振

조(祖)

諱有

고(考)

諱自新

  

9世諱軾

憑甫又字敬瞻
 

永慕亭

諡號

景武

太宗7 1407年丁亥

世祖12 1467年丁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