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GO BACK
 

 

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三不義軒行錄
(삼불의헌행록)

[역문]公(공)의 諱(휘)는 (초)이요 本貫(본관)은 羅州(나주)다. 諱(휘)는 初(초)며 字(자)는 天玉(천옥)이오 三不義軒(삼불의헌)은 그의 號(호)다.

侍中(시중) 修文殿大學士(수문전대학사) 雪齋(설재) 文靖公(문정공) 諱(휘) 可臣(가신)의 曾孫(증손)이오 文科(문과)로 開城少尹(개성소윤)인 諱(휘) 佶(길)의 孫子(손자)며 考(고)는 知寶城郡守(지보성군수) 贈資憲大夫(증자헌대부) 吏曹判書(이조판서) 諱(휘) 文振(문진)이오 妣(비)는 金陵郡夫人(금능군부인) 道康金氏(도강김씨)로 判典客寺事(판전객사사) 容顯(용현)의 女(여)요 舍人(사인) 革成(혁성)의 孫女(손녀)다.

至正(지정) 五年(5년) 高麗(고려) 忠穆王(충목왕) 元年(원년 1345)에 公(공)이 羅州北(나주북) 金鞍洞(금안동) 水閣里(수각리) 自宅(자택)에서 出生(출생)하니 天姿潁異(천자영이)하여 超出等夷(초출등이)하니 어린 나이에 九龍齋(구룡재)에서 글을 읽었다(金鞍洞 南쪽 猪谷後嶝 錦城山 下麓이니 遺基가 지금도 있다)

나이 겨우 十一歲(11세)에 섣달 그믐날 밤에 公(공)이 혼자 齋(재)를 지키면서 책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밤중에 醒風(성풍)이 갑자기 일어나며 窓(창)문이 스스로 열리더니 이윽고 形體(형체)가 醜(추)하고 빛이 검으며 키가 十尺(십척)이오 體(체)가 다섯아람이나 되는 한 巨物(거물)이 儼然(엄연)히 大廳上(대청상)에 걸터 앉아 눈을 쏘아 바로 對(대)하면 醒風(성풍)이 대지른 곳에 燭火(촉화)가 스스로 꺼지되 公(공)이 조금도 싫어한 기색이 없이 촛불을 쓰니 또 바람을 보내 촛불을 끄기 세 번을 한지라 公(공)이 무릎을 거두어 端坐(단좌)하고 낯빛을 바로 하여 크게 꾸짖기를 네가 어떤 妖怪物(요괴물)이냐 네가 鬼神(귀신)이냐 妖狐(요호)냐 사람에게 오지 못함을 밝게 알 것이다.

邪不犯正(사불범정)이니 빨리빨리 없어져라 하니 문듯 보이지 않은지라 한참만에 一老人(일노인)이 다리를 절룩이며 지팡이를 끌고 오니 아름다운 수염에다 깨끗이 옷을 입고 門(문)으로 들어와 앉아 말하기를 나는 이곳 守土(수토)의 山神(산신)으로 너의 器量(기량)을 시험하려고 아까 變形(변형)하여 왔었다 촛불을 끄기를 세 번인데 네가 動心(동심)이 없어 촛불을 당김으로 度量(도량)을 헤아릴 수가 없어 정승이 되리라 占(점)쳤는데 마침내 나를 책망한 말에 반드시 厭懼(염구)의 마음이 있으니 정승에는 미치지 못하고 벼슬이 正卿(정경)에 이를 것이니 너의 前程(전정)을 이로써 알 것이다 하고 다 듣지 못했는데 문듯 보이지 않았다.

자람에 治隱吉先生再(치은길선생재)의 門下(문하)에 受業(수업)하니 先生(선생)이 자주 칭찬하여 許(허)하였다. 金江湖(김강호) 淑滋(숙자)와 道義交(도의교)가 되었고 大明洪武(대명홍무) 二十八年(28년1395)은 卽(즉) 我太祖大王(아태조대왕) 四年 乙亥(4년을해)로 翊衛司翊贊(익위사익찬) 司憲府(사헌부) 持平(지평)에 例薦(예천)되었고

永樂三年(영락삼년) 太宗大王(태종대왕) 五年乙酉(5년을유)에 文科(문과)에 올라 集賢殿(집현전) 校理(교리) 藝文館(예문관) 應敎(응교)를 歷任(역임)하니 그때 濟州(제주)가 凶年(흉년)이 들어 特別(특별)히 濟州牧使兼按撫使(제주목사겸안무사)에 薦擧(천거)되니 羅州州司(나주주사) 戶長日記(호장일기)에濟州牧使(제주목사) 兼按撫使(겸안무사) 鄭初(정초) 入州時(입주시)가 永樂(영락) 七年(칠년) 今上(금상) 九年(9년) 己丑(기축) 三月(삼월) 十九日(19일)이라 하였으니 卽(즉) 太宗朝(태종조)다.

濟州(제주) 在職時(재직시)에 神明(신명)한 治蹟(치적)이 많이 있으니 道內(도내)를 巡視(순시)하다 大靜縣(대정현)을 지내니 數十里(수십리) 平平(평평)한 陸地(육지)가 있는데 開墾(개간)한 곳이 없어 公(공)이 居民(거민)에게 물으니 民(민)이 對答(대답)하되 灌漑(관개)가 없어 廢野(폐야)가 되었다고 하니 公(공)이 沐浴齋戒(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드려 몸소 漢挐山(한나산)에서 七晝夜(칠주야)를 비니 땅이 갈라져 샘물이 솟아 큰들 數十里(수십리)에 限(한)없이 灌漑(관개)하여 해안을 開墾(개간)하니

「山(산)에는 鄭泉(정천)이 솟고 들에는 鄭坪(정평)이 있네」라고 居民(거민)이 碑(비)를 세워 새기니 鄭坪(정평)은 지금까지 誦德(송덕)하여 寓慕(우모)의 資料(자료)가 되었다.

뒤에 漢城判尹(한성판윤)으로 들어왔고 甲午年(갑오년1414)에 戶曹判書 兼五衛都摠府(호조판서겸오위도총부) 都摠管(도총관) 同義禁府事(동의금부사)에 陞進(승진)되니 매양 盛滿(성만)을 경계하였으며 이로부터 職責(직책)을 사례하고 田閭(전려)에 退隱(퇴은)하였다.

性稟(성품)이 兼淸簡直(겸청간직)하고 講論義理(강론의리)하며 後學(후학)을 獎進(장진)하고 꽃씨를 뿌리고 대(竹)를 심어 終老(종노)키로 하니 富貴(부귀)에 介意(개의)함이 없고 羞辱(수욕)으로 몸을 더럽힘이 없이 性品(성품)을 길러 道(도)의 지경에 나아가니 號軒(호헌)의 뜻이 自著(자저)하였다.

스스로 主客(주객)이 되어 自釣(자조)하면서 問答(문답)하기를 公(공)이 한가하게 사니 무슨뜻이 있는가 應(응)하되 뜰앞에 冬栢(동백)이 盛開(성개)하니 幽居(유거)의 趣味(취미)를 꾸미는데 足(족)하고 山鳥(산조)가 떼지어 날아와 花卉(화훼)를 쪼으면 활을 당겨 쏘아 그꽃을 保護(보호)하니 이는 이에 愛物(애물)하는 義(의)요 마구에 白鳥(백조)가 있으니 때때로 끄집어 내어 紅梅(홍매)의 아래 매어두고 꽃이 등에 점점이 떨어져 紅白(홍백)이 무늬를 이루니 또한 興(흥)을 부치는 資料(자료)가 되니 이는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義(의)요 厨婢(주비)가 반찬이 없다고 하면 바로 竹林(죽림)에 들어가 신발로 竹筍(죽순)을 차서 꺽어 飣餖(정두)의 必要(필요)함을 도울 것이니 이는 安貧(안빈)의 義(의)다 내가 물러나 삶에 三義(삼의)가 따르니 다시 富貴(부귀)를 求(구)하랴 이러므로 내가 추녀에다 三義(삼의)라고 쓴 것이다.

客(객)이 말하기를 새가 꽃을 쪼는 것은 또한 스스로 꽃을 사랑한 것이니 쏜 것은 도리어 物(물)을 容恕(용서)한 것이 아니니 한가지 不義(불의)요 꽃은 본래 쉽게 쇠한 것인데 말을 매놓고 떨어지기를 도운 것은 養物(양물)하는 도가 아니니 두 가지 不義(불의)요 대는 君子(군자)의 절개가 있는데 그 바야흐로 자라난 것을 꺾으니 愛物(애물)하는 仁(인)이 아니니 세가지 不義(불의)니 公(공)이 어찌 三不義(삼불의)에 安住(안주)하면서 도리어 義(의)롭다고 하는가 드디어 웃고 말하지 않으면서 三不義(삼불의)로써 그 軒(헌)을 이름하니 先生(선생)은 君子人(군자인)이시다

그 身修家齊(신수가제)와 事君治民(사군치민)의 方途(방도)에 일찍 한가지도 不義(불의)한 道理(도리)가 있지 아니 하니 그 號軒(호헌)의 뜻을 본즉 設辭(설사) 問答(문답)에 처음에는 三義(삼의)로써 하고 다시 三不義(삼불의)로써 한 것은 참으로 不義(불의)의 허물이 있어서가 아니다 是非(시비)를 反復(반복)하여 옳은 것을 버리고 그른 것을 取(취)함은 卽(즉) 허물을 듣고 기뻐하여 고치기를 꺼리지 아니한 뜻이다 그 進德(진덕)하고 修道(수도)하는 긴요함이 位高(위고)하고 衰齡(쇠령)해도 조금도 게을리 아니하고 더욱 勉勵(면려)를 加(가)하니 어지 偉大(위대)하지 아니하랴

대개 先生(선생)의 學問(학문)이 治隱(치은)에 근원하며 江湖(강호)와 吹(취)하니 그 高明(고명)하고 篤實(독실)한 心工(심공)이 더욱 扁號(편호)의 뜻에 나타난다.

世宗五年(세종5년) 癸卯(계묘1424)에 집에서 考終(고종)하니 享年(향년)이 七十九歲(칠십구세)로 金鞍洞永安村案山酉坐(금안동영안촌안산유좌)의 原(원)에 禮葬(예장)하였다. 配(배)는 貞夫人(정부인) 茂松庾氏(무송유씨)로 議政府(의정부) 左贊成(좌찬성) 璫(당)의 딸로 溫順貞一(온순정일)하여 宛然(완연)히 婦德(부덕)이 있으니 내가 先生(선생)에게는 曾外裔(증외예)가 된다.

鄕井(향정)을 같이하되 비록 親炙(친자)는 받들지 못했으나 그 遺風餘韻(유풍여운)을 仰聞(앙문)할 수 있고 또 著述(저술)한 編集(편집)을 상고해 보니 先生(선생)의 需世經倫(수세경륜)과 衛道學業(위도학업)과 出處行義(출처행의)를 가히 想像(상상)하니 自然(자연)히 閱世(열세)의 아래 起敬(기경)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孤陋(고루)함을 잊고 實行(실행)을 대강 뽑아 삼가 右(우)와 같이 撰(찬)하여 後世(후세)의 立言君子(입언군자)를 기다린다.

<註>

①起坐(기좌):두발을 앞으로 쭉뻗고 앉음

②偃蹇(언건):교만함

③大拜(대배):議政벼슬을 받음

④正卿(정경):李朝때 正三品 이싱의 벼슬인 議政府參贊 六曹의 判書 漢城府判尹 弘文館 大提學등을 이르는 말

⑤親炙(친자):친히 그 사람을 가까이하며 감화를 받음

⑥需世(수세):세상에 등용됨

⑦衛道(위도):도를 지킴

⑧閱世(열세):時代 社會를 몸소 경험함

⑨戶長(호장):고을 아전의 맨 우두머리

⑩人蹤(인종):사람의 자취

外裔吏助板書礪山 宋千喜謹狀

 

 

아래와 같이 계보파악 및 七世諱初墓所둘레석 설치 사진 

2016.04.05 사진촬영 일헌공15세손 병선

 

系譜 : 1券 5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고조(高祖)

諱松壽

증조(曾祖)

文靖公雪齋諱可臣

조(祖)

諱 佶(길)

고(考)

諱 文振(문진)

  

7世諱  初(초)

 
 

三不義軒(삼불의헌)

忠穆  1345年乙酉

世宗5  1423年癸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