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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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文靖公年譜
(문정공년보)

[역문]

송(宋)나라 리종(理宗) 가정중(嘉定中)에 출생하셨으며 고려 고종 기미년(己未年 46年 西紀1259)에 등제(等第)함. 南宋開慶

충렬왕 3년 丁丑(서기 1277)에 보문각 대제(寶文閣 待制)에 임명함. 宋元景炎二

충렬왕 4년 무인(戊寅 서기 1278)에 도원사 김방경(都元師 金方慶)을 따라 삼별초(三別抄)를 호남에서 정벌하고 군사(軍師)를 금성산에 주둔하였는데 산신이 현몽하여 향하는 곳에 명조(冥助)함이 많았다. 개선(凱旋)하여 보문각 대제(寶文閣 待制)에 임명되었다. 宋元衛王

금성산신이 무당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진도와 탐라의 정벌에 내가 실로 힘이 컸었는데 다만 장사들에게만 상을 주고 나에게는 록(祿)을 주지 아니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반드시 나를 정녕공(定寧公)에 봉하라 하니 공(公)이 왕에게 간하여 금성산신(錦城山神)을 정녕공(定寧公)에 봉하고 또 그 읍(邑)의 록미(祿米) 5석(五石)을 거두어 해마다 그 사(祠)에 들여보냈다.

이 해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때 이분희(李汾禧) 형제가 홍다구(洪茶邱)에게 미부(媚附)하여 김방경(金方慶)에게 죄를 꾸며대어 대청도(大靑島)에 유배시키니 공(公)이 동조(同朝)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돌아가 양모(養母)하기를 비니 재삼(再三)에 이르러 왕이 위유(慰諭)하여 보내니 물론(物論)이 많았다.

그가 구름을 보고 읊은 시에 이르기를 일편재이상생 동서남북기종횡 위위림우소군고 공엄중천일월명一片纔泥上生 東西南北己從橫 謂爲霖雨蘇群稿 空掩中天日月明(한 쪼각이 겨우 진흙위를 쪼차 생기어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마음대로 다니는구나 이르노니 림우(霖雨)되어 군고(群稿)를 살리거나 속절없이 중천(中天)에 일월 밝음을 가리네)하였다.

5년 기묘(己卯 서기 1279) 宋元景炎2

비서윤지공거(秘書尹知貢擧)로서 시부(試賦)에 백원항(白元恒) 등 31인과 명경(明經)에서 정시(鄭時)등 31인과 국자시(國子試)에서 2인을 취하였다.

6년 경진(庚辰 서기 1280) 宋元祥興

왕이 공(公)으로써 가히 인신(人臣)이 된다고 하여 이름을 가신(可臣)이라 내리고 승지감찰사(承旨監察司)에 임명하니 말하기를 제도(諸道)의 안염사별감(按廉使別監)은 직책이 관리의 치안을 살피고 백성의 괴로움을 묻는데 있거늘 지금 모두가 상공(上供)을 빙자하여 백성에게 명주 닥 가죽 비단 포(脯) 과(果) 명표지(名表紙)등 물건을 거두어 권세가(權勢家)에게 뇌물로 보내어 자신이 부정하니 어찌 능히 사람을 바르게 하리오 하고 모두 죄로 다스릴 것을 청하니

왕이 공(公)더러 말하기를 저는(楮) 땅에서 생기니 종이가 무슨 폐단이 있으리오 하니 공(公)이 대답하기를 신(臣)이 일찍 전주관기(全州管記)로써 조지(造紙)가 심히 괴로움을 아는데 지금 고관(高官)이 종이를 또한 많이 쓰니 부끄러움이 없지 아니 할 것이라 하니 왕이 다만 명표지(名表紙)등 물건만 제(除)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중찬 김방경(中贊 金方慶)이 글을 올려 퇴직(退職)하기를 비니 승지(承旨)로서 교유(敎諭)를 기초(起草)하였다.

7년 신사(辛巳 서기 1281) 宋元世祖

왕이 합포(合浦)에서 거동하니 우부승지(右副承旨)로 호종(扈從)하였다.

10년 갑신(甲申 서기 1284) 宋元至元4

밀직학사(密直學士)로서 하정사(賀正使)로 원(元)나라에 갔다.

13년 정해(丁亥 서기 1287) 宋元至元8

경상도안염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으며 12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옮겼다.

14년 무자(戊子 서기 1288) 宋元至元9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6년 경인(庚寅 서기 1290) 宋元至元11

왕이 원(元)나라에 있는데 대장군 원경(大將軍 元卿)이 원나라에 가서 일본이 변방을 침범한다고 아뢰니 공(公)에게 병부(兵部)에서 조병(調兵)하라 명하고 왕이 윤수길(尹秀吉)의 말을 신용하여 장차 유신(儒臣)에게 종군(從軍)케 하려고 하니 공(公)이 말하되 선생께서 사람을 씀에 각각 그 재주를 따르니 몸에 비유한다면 좌우의 손과 같은지라 원(元)나라 법에도 유호(儒戶)는 군사에 관여하지 아니하니 이제 유생(儒生)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칼을 잡고 싸움에 원종(遠從)코자 한다면 성덕(盛德)이 이그러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王이 그 말을 옳게 여기어 파하(罷)기를 명하였다. 그때 천변(天變)이 있었는데 오윤부(伍允孚)가 소재도장(消灾道場 재앙을 소멸하는 도장(道場))을 설치하자고 청하니 공(公)이 염승익(廉承益)에게 말하기를 천변(天變)을 어찌 불법(佛法)으로 능히 물리치리오 어찌 덕(德)닦기를 청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해에 정당문학지공거(政堂文學知貢擧)로서 진사 최함일(進士 崔咸一) 등 31인에게 급제를 내리였다. 11월에 세자가 원(元)나라에 가니 공(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예빈윤 민지(禮賓尹 閔漬)와 같이 종행(從行)하니 집현전 태학사 노재허형(集賢殿 太學士 魯齋許衡)이 공(公)께서 정주(程朱)의 심학(心學)을 얻었다는 소리를 듣고 드디어 가서 질문하고 형이(衡) 창졸간에 칭장(稱獎)을 더하고 다리고가 벗을 삼아 전(傳)의 성경(誠敬)의 깊은 뜻을 다 읽었다.

17년 신묘(辛卯 서기 1291) 宋元至元12

9월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와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18年 임진(壬辰 서기 1292) 宋元至元13

세자가 원제(元帝)를 紫檀殿에서 뵈이니 원제(元帝)가 책상을 기대고 누워서 네가 무슨 글을 읽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유 정가신(師儒 鄭可臣)과 민지(閔漬)등이 이곳에 있는데 숙위(宿衛)의 틈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질문한다고 하니 원제(元帝)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시험해 볼 것이니 가신(可臣)을 불러오라 함으로 세자가 데리고 같이 들어가니 원제(元帝)가 벌떡 일어나 관(冠)을 하고 말하기를 너는 비록 세자이나 나의 외손자요 저는 비록 배신(陪臣)이나 유학자(儒學者)다 어찌 나로 하여금 관(冠)을 쓰지 않고 보게 하는가 하고 인하여 자리를 내주고 본국(本國) 풍속과 세대상전(世代相傳)과 리란(理亂)의 자취를 물으니 진시(辰時)로 부터 미시(未時)에(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사이임)이르도록 듣기를 게을리 아니하였다.

그 때 제하(濟河)를 개통(開通)했는데 승상이하(承相以下) 모두 가래와 삽을 잡고 세자는 종신(從臣)을 거느리고 일을 도우는데 元帝가 공(公)에게 직금단(織金段)을 하사하였고 후에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교지국(交趾國)의 정벌을 의논케 하고 조서하기를 고려의 세자사(世子師) 2인과 같이 의논하라 하니 공(公)이 대답하기를 교지(交趾)는 먼 곳 오랑캐니 군사를 수고로이 하여 토벌(討伐)한 것 보다는 사신을 보내어 초래(招來)함 만 같지 못하니 만일 그가 고집하여 불복하면 죄를 물어 칠 것이니 가히 일거에 만전(萬全)이라고 대답하여 임금의 뜻을 맞추니 이에 공(公)에게 한림학사 가의대부 자금어대(翰林學士 嘉義大夫 紫金魚袋)를 수여(授與)하니 시인(時人)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로부터 임금의 총애가 달로 융숭하여 자주 珍膳(맛있는 음식)을 거두어 하사하니 어떤 때는 추운날씨에 초구(貂裘 돈피로 만든 옷)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20年 甲午(西紀 1294) 宋元至元15

世祖皇帝(세조황제)가 崩(붕-임금의 죽음)함에 王(왕)이 공주와 같이 殯殿(빈전)에 祭(제)를 올리는데 그 祭文(제문)에 이르기를 『朝鮮(조선)이 멀지 않어 宮庭(궁정)에 서서 바랬더니 죽었다는 소식이 갑자기 돌아오니 어찌 鼎湖宮(정호궁)의 哀慕(애모)함을 다하리오, 꿈인지 생시인지 엎어지며 넘어져서 애오라지 菲薄(비박)한 儀禮(의례)를 닦으노니 歆饗(흠향)의 은혜 내리기를 바랍니다.』 장차 公(공)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는데 여러 大臣(대신)이 정지시키고 말하기를 어찌 마땅히 제후(諸侯)의 예로(禮)써 천자(天子)를 제(祭)지내리오 하였다.

성종황제(成宗皇帝)가 즉위하여 학사 살자만(學士 撒刺巒)을 시켜 본국에 귀부(歸附)한 년월을 물으니 왕이 公(공)을 시켜 글을 올려 대답하니 원제(元帝)가 세자를 편전으로 불러보게 하니 공(公)이 배종(陪從)하였다.

임금의 안전에 물건이 있는데 크게 둥글고 조금 뾰족하며 색깔이 깨끗하여 높이가 한자 다섯치 가량인데 속에는 술 두어 말을 담을 만하니 이는 마가발국(藦訶鉢國)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다. 세자에게 명하여 보게 하고 인하여 세자와 종신(從臣)에게 술을 내리고 공(公)에게 시를 지으라 명하니 바로 소리를 응(應)하여 대답하기를 유란대여옹 중장불노춘 원장천세수 훈급해동인『有卵大如甕中藏不老春 願將千歲壽 醺及海東人(달걀 크기가 항아리만 하는데 속에는 불노춘(不老春)을 감추었네. 원하건데 천세수(千歲壽)를 누리시어 훈훈한 덕화(德化)가 해동인(海東人)에게 까지 미치게 하소서)하니 원제(元帝)가 가상히 여겨 임금의 음식을 거두어 내리니 성안의 선비들이 그 이름을 듣고 사귀기를 원하는 자가 많으니 세자가 더욱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었다.

그 뒤로부터는 세자가 들어가 임금을 볼 때는 반드시 공(公)을 따르게 하였다. 원제(元帝)가 일찍 요동수정도(遼東水程圖)를 보고 수역(水驛)을 설치코자 하여 공(公)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쌀과 배(布)니 육지로 실어 나른다면 길이 멀고 물건이 무거우니 실어온 것이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니 이제 너를 하남행성 좌승사(河南行省 左承使)로 임명하여 해운을 주관케 하고자 하니 한해에 약간의 곡필(斛匹)만 가져온다면 어찌 국용(國用)에 보탤 뿐 이리요 가히 해동(海東)에서 와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주어 쓰게 하리라 하니 대답하기를 고려의 산천과 임수(林藪)가 전체면적(全體面積)의 십분의 칠을 차지하여 농사짓고 길삼하는 수고로 겨우 먹고 살아감을 지탱하고 하물며 그 사람들이 바닷길에 익숙치 못하니 신(臣)에게 관리케 함으로서 혹시 불편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원제(元帝)가 그러겠다고 하였다.

21년 을미(乙未 서기1295) 宋元成宗

첨의시랑 찬성사(僉議侍郞 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사향시(思鄕詩)가 있으니 해동남유금성산 산하오려초수간 항유원도친수종 춘풍응대주인환海東南有錦城山 山下吾廬草數間 巷柳園桃親手種 春風應待主人還(해동(海東)의 남쪽에 금성산(錦城山)이 있으니, 산아래 우리 집 두어 칸 초가집이 있네. 마을에 버드나무 동산에 복숭아를 친히 손수 심었으니 봄바람도 당연히 주인오길 기다리겠지라 하였다. 元帝가 말하기를 고향을 생각한 마음이 있다하고 금안(金鞍)과 금대(金帶)를 하사하여 보내니 10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중찬지공거(中贊知貢擧)에 임명되어 진사 강훤등(進士 姜暄等) 27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리고 등용하였다.

22년 병신(丙申 서기 1296) 宋元元貞

하성절(賀聖節)로 원나라에 갔다. 그때 부지밀직 최충소(副知密職 崔沖紹)가 세자의 명령으로 공주의 큰집을 수창궁(壽昌宮)터에다 지으려고 크게 공사를 일으키니 땅이 바야흐로 얼어서 흙을 취할 곳이 없어 한 구덩이를 파면 사람들이 다투어 몰려와서 눌려 죽은 자가 많았으며 또 연로(沿路)의 담장이나 집을 모두 개와를 덮으라고 령을 내리고 이지씨(李之氏) 최유흡(崔有潝)등이 일 감독을 너무 급하게 하니 백성이 모두 괴로워한지라 공(公)이 그 일을 중지할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23년 정유년(丁酉 서기 1297)에 첨의중찬 판전이사사 세자사(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가 되었다. 宋元大德

24년 무술(戊戌 서기 1298) 宋元大德2

삼월에 글을 올려 물러갈 것을 비니 허락하지 않고 5일에 한 번씩 조회에 참석하라 명하고 금자광록대부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사공우복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참지광정원사(金紫光祿大夫 壁上三韓 三重大匡 守司空右僕射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參知光政院事)를 더하였다. 6月 丙辰年朔 4일己未에 졸(卒)하니 문정(文靖)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공(公)의 성품이 정직단엄(正直端嚴)하고 처사정밀(處事精密)하여 정방(政房)에 있을 때 가만히 전고(典故)를 익혀 제품(題品)과 전주(銓注)를 거기에 알맞게 처리하니 한때 사령(辭令)이 그 손에서 많이 나왔다.

공(公)이 거처한 곳에 편액(扁額)하기를 무온당(無慍堂)이라 하고 날마다 어진 사대부(士大夫)들과 고금(古今)을 의논(議論)하였으며 비록 대관(大官)에 이르렀으나 행동거지(行動擧止)는 서생(書生)과 같았고 총재(冢宰)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태평을 상망(想望)하였으며 조정에서 물러나 한가함에 윤문현공보(尹文顯公珤)와 김문숙공주정(金文肅公周鼎)으로 솥발처럼 앉아 강론하니 세상에서 삼현당(三賢堂)이라고 하였다.

일찍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지었고 왕이 민지(閔漬)와 권부(權溥)에게 명하여 같이 교정(校正)하여 찬성(撰成)하니 편년절요(編年絶要)라고 이름 하였다.

복사(僕射)인 원항(元恒)이 공(公)에게 보낸 시에 이르기를 위극초선덕유광 경방묘책승삼장 요령말속지오도 조퇴장개만권당『位極貂蟬德愈光 經邦妙策勝三章 要令末俗知吾道 朝退長開萬卷堂(벼슬은 초선관(貂蟬冠)에 이르렀고 덕은 더욱 빛나네 나라를 경영한 묘책삼장(妙策三章)보다 승하(勝)구나 백성들에게 우리 도(道)를 알게 함을 필요로 하여 조정에서 물러나 오래도록 만권당(萬卷堂)을 열었네)하였으니 대개의 실록(實錄)이다. 장단 강동면 기곡 정능동 묘좌원(長湍 江東面 基谷 鄭陵洞 卯坐原)에 예장(禮葬)하였다.

 

아래와 같이 계보파악 및 南宋年號 첨부함

系   譜 : 1卷 7   계보보기

 

上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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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諱 諧(해)

조(祖)

諱 宗産(종산)

고(考)

諱 松壽(송수)

  

4世諱 可臣初諱興
4세 휘 가신 초휘 흥

獻之
 

雪齋又曰無慍堂

諡號

文靖

高麗高宗11年甲申 1224年

忠烈王24年戊戌 1298年6月4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