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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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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齋文靖公 行狀 公之姓鄭系出羅州諱可臣初諱興字獻之號雪齋又無慍堂諡文靖父諱松壽鄕貢進士文科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祖諱宗産禮賓卿曾祖諱該軍器監判事妣安義郡夫人鄭氏內殿崇班瑄女宋理宗高麗高宗十一年時生公于羅州南曲江面侍中洞公位侍中由是洞名後居于金鞍洞幼以穎悟有大人之志讀書作文頗爲時軰所推嘗隨僧天琪來京貧窮無依寄食天琪天琪憐之求贅富家無應者大府少卿安弘祐許之約旣定後悔曰吾雖貧士族豈可納鄕貢子未幾弘祐卒家日貧乃許天琪執先生手徒步而一老嫗迎門燃薪照之草屋數間而已天琪歸且哭曰噫鄭生至於此耶麗高宗己未登第屢歷華要忠烈王三年丁丑除寶文閣待制時錦城山神降于巫言珍島耽羅之征我實有力只賞將士而不我祿何也必封我定寧公公感其言諷于王封定寧公且輟其邑祿米五石歲歸其祠見錦城誌四年戊寅遷左司議大夫時李汾禧兄弟媚附洪茶邱醞釀金方慶之罪公耻與同朝乞歸養母至再三王慰諭以遺物論多之有詠雲詩一絶五年己卯尋召還以秘書尹改爲必闍赤卽秘書省也知貢擧取詩賦白元恒等三十人明經鄭時等三十一人國子試二人六年庚辰召拜承旨監察司言諸道按廉使別監職在察史治問民苦而今皆籍上供歛民紬楮皮弊脯果名表紙等物賂遺權貴己自不正烏熊正人請皆理罪王謂公曰楮生於地紙有何弊公對曰臣嘗管記全州知 紙甚苦令官高用紙亦多不能無愧王只許除名表等物王以公可爲人臣而賜名可臣十六年庚寅王在元大將軍元卿如元奏日本犯邊命公調兵于兵部王用尹秀吉言將令儒臣從軍公言先王用人各隨其才比之於身如左右手上國之法儒戶不與軍事令欲令儒生被堅執銳遠從征役恐虧盛德王然之乃命罷之時有天變伍允孚日官也請設消災道場以禳之公謂廉承益曰天變豈浮屠法所能禳盍請修德時佛道甚盛經筵每請涅槃經矣公輒入侍王曰鄭文學來急撤講是歲公以政堂文學憂道學之寢衰剏立箕子廟于西京修其墳塋開正學之淵源見史畧七卷政堂文學知貢擧取進士賜崔咸一等三十一人及第十一月世子如元公以政堂文學與禮賓尹閔漬從行聞集賢殿太學士魯齋許衡得程朱心學遂往質焉衡函加稱獎引爲伴讀盡傳誠敬奧旨十七年辛卯以政堂文學如元賀聖節九月爲僉議贊成事世子貳師十八年壬辰世子忠宣謁帝于紫壇殿帝隱几而臥問爾讀何書對曰有師儒鄭可臣閔漬等在此宿衛之暇質問孝經論孟帝大悅曰試與可臣來世子引與俱入帝遽起而冠責曰爾雖世子吾甥也彼雖陪臣儒者也何得令我不冠而見仍賜坐問本國風俗世代相傳理亂之迹自辰至未聽之不倦後命公卿議征交趾詔與高麗世子師二人同議公對曰交趾遠夷勞師致討不若遣使招來如其執迷不服聲罪征之可一擧萬全也對稱旨帝大悅授公翰林學士淸直學士嘉義大夫元世祖職也時人榮之自是眷遇日隆數掇珍膳賜之或天寒賜以貂裘時元開通濟河承相以下皆執畚鍤世子率從臣助力帝賜公織金緞尋拜僉議贊成師賜紫金魚袋二十年甲午帝使翰林學士撤刺蠻問先生本國歸附年月公對曰太祖皇帝宋開禧二年稱帝廟號太祖也肈興朔方時有大勢國助征金國之功自稱大遼奪掠中都子女玉帛東走江東城拒守朝廷遣哈眞札刺追討時方雪深道險糧餉不繼我國聞之高宗時也遣趙沖金就礪濟兵犒師殲其醜虜因奉表請爲東藩太祖遣使慶都虎優詔答之仍論汝國人不能寒暑來聘苦難其貢獻方物朕當使人取之此事在戊寅至今甲午凡七十有七年帝又召見世子于紫檀殿公從之御案前有物大圓小銳色潔而貞高可尺有五寸內可受酒數斗云乃摩訶鉢國所獻駱駝鳥卵也帝命世子觀之仍賜世子及宗臣酒命公賦詩公卽獻詩云有卵大如瓮中藏不老春願將千歲壽 醺及海東人帝嘉之輟賜御羹皇都搢紳願交者甚衆世子益敬重之凡入見必令公從之帝嘗觀遼東水程圖欲置水驛語公曰汝國所産惟米與布若陸輸道遠物重所輸不賞所費今欲置江南行省左承使主海運歲可致畧干穀匹豈惟補國用可給東人寓都之資公對曰高麗山川林藪居十之七耕織之勞僅支口體之奉况其人不習海路以臣管見恐或不便帝然之二十一年乙未拜僉議侍郞贊成事思鄕有詩曰海東南有錦城山山下吾廬草數間巷柳園桃親手種春來應待主人還帝曰卿有思鄕之心寵賜金帶金鞍白馬送之公所居洞號以是而傳十月東還拜僉議中贊知貢擧取進士賜姜暄等二十七人及第二十二年丙申是歲冬副知密直崔紹以世子命將設公主穹廬就壽昌宮築墻繚垣大興工役時方凍取土無所掘一穴人輒爭奔壓死者甚衆又沿路墻屋令皆覆瓦冲紹與李之氐崔有渰朴義等督役甚急民皆苦之公請世子乃停役二十三年丁酉爲僉議中贊世子師二十四年戊戌三月上章乞退不允命五日一朝五月加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參知光政院事 六月丙辰朔初四日己未卒國人驚悼賜諡文靖 公性正直端嚴處事精密在政房諳鍊典故題品銓注皆當物議善屬文一時辭命多出其手嘗一掌監試再知貢擧時號得人位至冢宰行止如書生朝野想望太平扁所居曰無慍堂志存興學日與賢士大夫講習經傳首明孝悌之道及聖學之淵源遠近翕然且與當時名儒金文肅公周鼎尹文顯共珤爲道義交日夜同處朝退之暇講論聖賢時人名其堂曰三賢堂嘗撰千秋金鏡錄並世系圖以進後忠烈王命閔漬修撰矣國家多故未暇及焉後與權溥同校撰成名曰世代編年節要上自處景大王迄于元王分爲七卷見閔漬傳 忠肅王十七年庚午以文靖公及忠正公洪子藩配享于忠宣王廟京畿麻田以公縣忠宣室配之我肅廟戊辰士林建祠于金鞍洞癸卯春以京鄕儒論移建書院于永安村 純祖九年己巳士林建祠于咸平東鰲首山下外藏洞鰲山祠 至大己酉忠烈王薨忠宣王卽位下敎曰先於至元辛卯予與鄭可臣柳淸臣朴演等諧紫檀殿親奉聖旨云同姓不得通婚天下之道義况爾國識會文字行夫子之道不應要同姓時有李守丘傳說柳淸臣傳譯鄭可臣擧行未遂遽革耳自今以後文武兩班家不得娶同姓外家四寸不聽求婚國內名族十五大家許與王室世世通婚十五大家卽慶州朴氏慶州金氏羅州鄭氏淸州鄭氏平康蔡氏唐城洪氏黃驪閔氏高興柳氏豊川任氏鐵原崔氏海氏孔巖許氏橫州趙氏並累世勳宰之家故如是下敎 公之德行儒範輝暎當世見重於本國上國者皆載於麗志麗史與列傳及名臣錄俱爲信史㪅不復載而東文選有白僕射元恒呈公詩曰位極貂蟬德愈光經邦妙策勝三章要令末俗知吾道朝退長開萬卷堂盖公之實錄也禮葬于長湍府江東面基谷村案山枕卯原尙傳鄭坵岱鄭陵洞後人之稱也配三韓國大夫人竹山安氏大府少卿弘祐女墓從葬公塋五男倬宰臣佺大護軍佶文科開城少尹贈吏判億指諭將儼吏部尙書三女朴元宏萬戶林貯中郞將都大丞相孫曾以下藩不盡錄
雪齋文靖公行狀 [역문]공(公)의 성(姓)은 정씨(鄭氏)요 관향(貫鄕)은 나주(羅州)다. 휘(諱) 가신(可臣)이니 초휘(初諱)는 흥(興)이요 자(字)는 헌지(獻之)며 호(號)는 설재(雪齋) 또는 무온당(無慍堂)이라 하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부(父)의 휘(諱)는 송수(松壽)니 ①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文科)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며 조(祖)의 휘(諱)는 종산(宗産)이니 예빈경(禮賓卿)이며 증조(曾祖)의 휘(諱)는 해(諧)니 군기감 판사(軍器監 判事)다.
비(妣)는 안의군부인(安義郡夫人) 정씨(鄭氏)로 ②내전숭반(內殿崇班) 선(瑄)의 딸이다. 송리종고려고종(宋理宗高麗高宗) 십일(十一)년에 공(公)은 나주(羅州)의 남쪽 곡강면(曲江面) 시중동(侍中洞)에서 출생(出生)하였다. 공(公)의 지위(地位)가 시중(侍中)이니 이로 인(因)하여 동명(洞名)이 됨. 후(後)에 금안동(金鞍洞)에서 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③영오(穎悟)하여 대인(大人)의 뜻이 있었으며 글 읽고 글을 지을 즈음에 자못 시배(時輩)의 추중(推重)한바가 되었다. 일찍이 중(僧)인 천기(天琪)를 따라 서울에 왔으나 가난하여 의지 할데가 없음으로 천기(天琪)에게 기식(寄食)하니 천기(天琪)가 어여삐 여겨 부자(富者)집 데릴사위를 구(求)했으나 응(應)한 자(者)가 없더니 대부소경(大府少卿) 안홍우(安弘祐)가 허락(許諾)하고 약속(約束)을 이미 정(定)한 후에 뉘우치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가난하나 사족(士族)으로 어찌 가히 향공진사(鄕貢進士)의 아들을 사위로 삼으리오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홍우(紅友)가 죽으니 집이 날로 가난하나 전에 허락(許諾)한지라 천기(天琪)가 선생(先生)의 손을 잡고 도보(徒步)로 가니 일노구(一老嫗)가 문(門)에서 맞이하여 섶을 불살라 비치니 초옥수간(草屋數間)일 뿐이다. 천기(天琪)가 돌아와 슬퍼하면서 아! 정생(鄭生)이 이지경이 되었구나 하였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기미년(己未年 1259)에 등제(登第)하여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충렬왕(忠烈王) 3년정축(三年丁丑 1277)에 ④보문각(寶文閣) ⑤대제(待制)에 임명(任命)되니 그때 금성산(錦城山) 신령(神靈)이 무당에게 나려 말하기를 진도(珍島)와 탐라(耽羅)의 정벌(征伐)에 내가 실(實)로 힘썼는데 다만 장사(將士)들만 상(賞)을 내리고 내게는 록(祿)을 주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반드시 나를 정녕공(定寧公)에 봉(封)하라하니 공(公)이 그 말에 감동(感動)하여 왕(王)께 ⑥풍간(諷諫)하여 정녕공(定寧公)에 봉(封)하고 또 그 고을 록(祿)을 거두어 쌀 오석(五石)을 해마다 그 사우(祠宇)에 보냈다. 금성지(錦城誌에 나타남)
충렬왕 4년무인(忠烈王 四年戊寅)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기게 되니 그때 이분희 형제(李汾禧 兄弟)가 홍다구(洪茶丘)에게 아부하여 김방경(金方慶)의 죄(罪)를 ⑦온양(醞釀)하니 공(公)이 조정(朝廷)에 같이 있기를 부끄럽게 여겨 돌아가 양모(養母)할 것을 빌기를 두서너번에 이르니 왕(王)께서 ⑧위유(慰諭)하여 보내니 여러 사람의 평판이 많았고 영운시(詠雲詩) 일절(一節)이 있다.
5년 을묘(乙卯 1279)에 다시 비서윤(秘書尹)으로 소환(召還)되고 필도적(必闍赤)이라 고쳤다. 곧 비서성(秘書省)이다. 이때 시관(試官)으로서 시부(詩賦)에서 백원항등(白元恒等) 삼십이인(三十二人) 명경(明鏡)에서 정시등(鄭時等) 삼십일인(三十一人) 국자시(國子試)에 2인(二人)을 뽑았다.
육년경진(六年庚辰 1280)에 승지감찰사(承旨監察司)에 소배(召拜)하니 말하기를 제도(諸道)의 ⑨안염사(按廉使)나 별감직(別監職)은 관리(官吏)의 치적(治蹟)을 살피고 백성의 괴로움을 묻는데 있거늘 지금은 모두가 상공(上供)을 빙자하여 백성에게 명주며 닥이며 가죽이며 비단이며 포육이며 과실이며 명표지(名表紙)같은 물건을 거두어 권세가(權勢家)나 귀족(貴族)에게 뇌물로 보내어 자신(自身)들이 부정(不正)을 하니 어찌 사람을 바르게 하리오 하고 모두 죄(罪)로 다스리기를 청(請)하니 왕(王)이 공(公)에게 이르기를 닥은 땅에서 나오니 종이에 무슨 폐단(弊端)이 있으리오 하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신(臣)이 일찍이 전주서기(全州書記)때에 조지(造紙)가 심히 괴로운지를 아는데 지금 벼슬이 높음에 종이를 많이 쓰니 부끄럽지 않으리오 하니
왕(王)께서 다만 명표지(名表紙) 같은 물건(物件)만 제(除)하라고 허락(許諾)하시었다. 왕(王)이 공(公)에게 가(可)히 인신(人臣)이 될 만하다 하시고 가신(可臣)이란 이름을 하사(下賜)하셨다.
십육년(十六年) 경인(庚寅 1290)에 왕(王)이 원(元)나라에 있는데 대장군(大將軍) 원경(元卿)이 원(元)나라에 가서 일본(日本)이 변방(邊方)을 범(犯)한다고 아뢰니 공(公)에게 병부(兵部)에서 조병(調兵)하라 명(命)하고 왕(王)이 윤수길(尹秀吉)을 등용하여 말하길 장차 유신(儒臣)들을 종군(從軍)케 하라 하니 공(公)이 말하길 선왕(先王)께서 사람을 등용하되 각각 그 재능(才能)에 따르니 한몸에 비유한다면 좌우수(左右手)와 같은지라 상국(上國)의 법(法)에도 유호(儒戶)에는 군사(軍事)에 참여(參與)치 않거늘 이제 유생(儒生)들에게 갑(甲)옷을 입히고 날카로운 병기(兵器)를 잡아 멀리 정역(征役)에 종(從)케 하고자 하시니 성덕(盛德)이 덜릴까 두렵습니다 하니 왕(王)이 그렇다 하시고 이에 명령(命令)을 파(罷))하시었다.
그때 천변(天變)이 있어 오윤부(伍允孚)[일관(日官)임]가 소재도장(消災道場)을 설치(設置)하고 기도하기를 청(請)하거늘 공(公)이 염승익(廉承益)에게 말하기를 물리치시오 수덕(修德)하기를 청(請)하였다. 그때 불도(佛道)가 심성(甚盛)하여 경정(經筳)에서 항상 열반경(涅槃經)을 강(講)한지라 공(公)이 입시(入侍)하니 왕(王)께서 말씀하시기를 정문학(鄭文學)이 오니 빨리 열반경(涅槃經) 강의(講義)를 거두라 하였다. 이해에 공(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도학(道學)이 침쇠(寢衰)됨을 근심하여 기자묘(箕子廟)를 서경(西京)에 창립(刱立)하고 그 분영(墳塋)을 수치(修治)하고 정학(正學)의 연원(淵源)을 열었다. [사략칠권(史畧七卷)에 나타남] 이때 시관(試官)으로 진사시(進士試)에서 최함일 등 삼십일인(崔咸一等 三十一人)의 급제자(及第者)를 뽑았다.
십일월(十一月)에 세자(世子)가 원(元)에 가니 공(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예빈윤 민지(禮賓尹 閔漬)와 같이 종행(從行)하여 집현전(集賢殿) 태학사(太學士)인 노재허형(魯齋許衡)이 ⑩정수(程朱)의 심학(心學)을 얻었다고 듣고 드디어 찾아가 질정하였다.
십칠년신묘(十七年辛卯 129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탄절(聖誕節) 축하사(祝賀使)로 원(元)에 갔으며 구월(九月)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었다.
십팔년임진(十八年壬辰 1292)에 世子(충선-忠宣)가 임금을 자단전(紫檀殿)에서 뵈옵는데 임금이 책상을 의지하여 누워서 묻기를 무슨 글을 읽었는고 하니 대답(對答)하기를 사덕(師德)인 정가신(鄭可臣) 민지(閔漬)등이 이곳에 있어 숙위(宿衛)의 겨를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질문(質問)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열(大悅)하여 말하기를 시험할 것이니 가신(可臣)과 같이 오라 함으로 세자(世子)가 이끌고 같이 들어가니 임금이 벌떡 일어나 관(冠)을 쓰면서 꾸짖기를 네가 비록 세자(世子)나 나의 외손자며 저이가 비록 배신(陪臣)이나 유자(儒者)다 어찌 내가 관(冠)하지 않고 보리오 하고 자리에 앉으라 하고 본국풍속(本國風俗)과 대대(代代)로 전(傳)해온 치란(治亂)의 자취를 묻되 진시(辰時)로 부터 미시(未時)까지 이르되 듣기를 게을리 안했으며 뒤에 공경(公卿)에게 명(命)하여 교지국(交趾國) 정벌(征伐)을 의논(議論)케 하되 조서(詔書)하기를 고려세자(高麗世子)의 스승 이인(二人)과 같이 의논(議論)하라 하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교지(交趾)는 원이(遠夷)라 군사를 수고롭게 하여 토벌(討伐)함이 사신(使臣)을 보내여 초래(招來)한건만 같지 못하니 만일 그들이 고집하고 미혹하여 불복(不服)한다면 죄(罪)를 정벌(征伐)하여도 가(可)할 것이니 일거(一擧)에 만전(萬全)함입니다 하고 임금의 뜻을 맞추니 임금이 대열(大悅)하여 공(公)에게 한림학사(翰林學士) 청직학사(淸直學士)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除授)하니[원(元)나라 세조(世祖)때 직책이다] 그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로부터 ⑫권우(眷遇)가 날로 높아 자주 맛있는 음식을 하사(下賜)하고 혹은 추울 때는 ⑪초구(貂裘)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때 원(元)에서 제하(濟河)를 개통(開通)함에 승상이하(承相以下)가 모두 삼태기와 삽을 잡으니 세자(世子)가 종신(從臣)을 인솔하고 조력(助力)함에 임금이 공(公)에게 직금단(織金緞)을 하사(下賜)하고 조금 있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임명(任命)하고 (21)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하였다.
이십년(二十年) 갑오(甲午 1294)에 임금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살자만(撒刺蠻)을 시켜 선생(先生)에게 본국(本國)에 귀부(歸附)한 년월(年月)을 물으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태조황제(太祖皇帝)[송개희 이년(宋開禧二年)에 비로소 칭제(稱帝)하니 묘호(廟號)는 태조(太祖)다]께서 삭방(朔方)에 조흥(肇興)할 때 대세국(大勢國)이 있어[전국(全國)을 도와 정벌(征伐)한 공(功)] 자칭(自稱) 대료(大遼)라 하고 중도(中都)의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을 약탈(掠奪)하여 강동성(江東城)으로 동주(東走)하여 항거수비(抗拒守備)하니 조정(朝廷)이 합진찰자(哈眞札刺)을 보내 추토(追討)할 때 바야흐로 눈이 쌓이고 도로(道路)가 험난(險難)하여 군량(軍糧)을 잇지 못하니 우리나라에서 듣고(高宗때임)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를 보내여 병사(兵士)를 구제(救濟)하고 군사(軍師)를 호궤(犒饋)하여 그 추로(醜虜)를 섬멸하여 표문(表文)을 올리고 동번(東藩)되기를 청(請)하니 태조(太祖)께서 경도처우(慶都處優)를 보내어 조답(詔答)하고 인하여 논(論)하기를 너의 나라 사람이 한서(寒暑)에 능치 못한데 진실로 어려운때 사신(使臣)을 보내와 방물(方物)을 공헌(貢獻)하니 짐(朕)이 마땅이 사람을 시켜 취(取)하였다 하니
이일이 무인년(戊寅年 1218)에 있었으니 지금(至今)이 갑오년(甲午年 1294)으로 무릇 칠십칠년(77年)이나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세자(世子)를 자단전(紫檀殿)에서 소견(召見)하여 공(公)이 따르니 임금의 안전(案前)에 물건이 있는데 대원소예(大圓小銳)하여 삭갈하고 깨끗하고 굳어 높이가 일척오촌(一尺五寸) 가량으로 안에는 술 두어 말을 담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마가발국(藦訶鉢國)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다. 임금이 세자(世子)에게 명(命) 하여 보라하고 인(因)하여 세자(世子) 및 종신(從臣)에게 술을 하사(下賜)하고 공(公)에게 명(命)하여 시(詩)를 지으라 하니
공(公)이 바로 시(詩)를 지어 바치기를
「알 크기가 도가지와 같으니 가운데 불로춘(不老春)을 감추었네 원(願)컨데 천세수(千歲壽)를 잡아 훈훈한 기운이 해동인(海東人)에 미치리라」하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어갱(御羹)을 내리니 황성(皇城)의 선비들이 교유(交遊)하기를 원(願)한 자(者)가 심히 많았고 세자(世子)가 더욱 경중(敬重)하여 무릇 입견(入見)할 때는 반드시 공(公)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였다. 임금께서 일찍 료동(遼東)의 수정도(水程圖)를 보고 수역(水驛)을 설치(設置)코자 공(公)에게 말하기를 치국(治國)에서 생산(生産)되는 것이 오직 쌀과 포(布)니 육로(陸路)로 실어온다면 길이 멀고 물량이 무거워 실어온 것이 소비(消費)에 도움이 못되니 이제 강남행성(江南行省)을 설치(設置)하여 좌수사(左水使)로 해운(海運)을 주관(主管)케 하여 해마다 략간(畧干)의 곡식(穀食)과 포필(布匹)을 가져오게 한다면 어찌 국용(國用)에 보태고 동인(東人)들이 여기에 사는데 보탬이 넉넉지 않으리오 하니 공(公)이 대답(對答)하기를 고려(高麗)는 산천(山川)과 임수(林藪)가 십분(十分)의 칠(七)을 차지하여 경직(耕織)의 노력(勞力)으로 겨우 구체(口體)의 봉양(奉養)을 지탱하니 하물며 그 사람들이 해로(海路)에 익숙치 못하니 신(臣)의 좁은 소견(所見)으로는 혹 불편(不便)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께서 그러겠다고 하시었다.
이십일년 기미(21年乙未 1295)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에 임명(任命)되었다. 사향시(思鄕詩)가 있으니 「 海東의 南쪽에 금성산(錦城山)이 있는데 내 집이 山아래 草屋 두어 칸이네 巷柳와 園桃를 모두 손수 심었으니 봄이 오면 응당 主人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일세」하였다. 임금이 말하길 경(卿)이 사향(思鄕)의 마음이 있다 하고 특별히 사랑하여 금대(金帶)와 금안(金鞍)과 백마(白馬)를 하사(下賜)하여 보냈다. [공(公)이 사는 동호(洞號)가 이로써 傳함] 동환후(東還後) 시월(十月)에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任命)되고 시관(試官)으로 진사시(進士試)에서 강훤(姜暄)등 이십칠인(27人)의 급제자(及第子)를 뽑았다.
이십이년 병진(22年 丙申 1296) 겨울에 부지밀직(副知密職) 최충소(崔沖紹)가 세자(世子)의 명령(命令)으로 장차 공주(公主)의 궁려(穹廬)를 설치(設置)코자 수창궁(壽昌宮)에 나아가 축장료원(築墻繚垣)하여 크게 공역(工役)을 일으키니 때가 바야흐로 얼어 흙을 취(取)함에 한 구덩이도 팔곳이 없어 사람들이 쟁분(爭奔)하여 압사자(壓死者)가 많았고 또 연로(沿路)의 장옥(墻屋)을 모두 개와를 덮으라하여 충소(沖紹)와 이지씨(李之氏) 최유엄(崔有渰) 박의(朴義)등의 독역(督役)이 심급(甚急)하니 백성이 모두 괴로워 함으로 공(公)이 세자(世子)에게 청(請)하여 역사(役事)를 중지(中止)케 하였다.
22년 정유(丁酉 1297)에 첨의중찬(僉議中贊) 세자사(世子師)가 되었으며
24年무술(戊戌 一二九八) 삼월(三月)에 글을 올려 퇴사(退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지 않고 오일(五日)에 한번씩 조회(朝會)하기를 명(命)하였다.
오월(五月)에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수사공 우복사(水司公 右僕射) 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를 더하였으며 육월(六月) 병진삭(丙辰朔) 초사일(初四日) 기미일(己未日)에 졸(卒)하니 국인(國人)이 경도(驚悼)하고 문정(文靖)이라 사시(賜諡)하였다.
공(公)의 성품(性品)이 정직(正直)하고 단엄(端嚴)하며 처사(處事)에 정밀(情密)하고 정방(政房)에 있을 때는 전고(典故)에 ⑬암련(諳鍊)하였으며 ⑭제품(題品)과 ⑮전주(銓注)에 모두 물의(物議)에 따랐으며 ⑳속문(屬文)을 잘하여 한 때 ⑯사명(辭命)이 그분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일찍이 한번 감시(監試)를 관장(管掌)하였고 다시 ⑰지공거(知貢擧)때에 득인(得人)하였다고 일컬었다.
지위(地位)가 정승에 이르렀으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서생(書生)과 같이 하니 조야(朝野)가 태평(太平)을 상망(想望)하였다. 거처(居處)한 편액(扁額)을 무온당(無慍堂)이라 하고 뜻을 흥학(興學)에 두고 날마다 어진 사대부(士大夫)들과 경전(經傳)을 강습(講習)하며 첫째로 효제(孝悌)의 도리(道理)와 성학(聖學)의 연원(淵源)을 밝히니 원근(遠近)이 ⑱흡연(翕然)하였으며 또 당시(當時)의 명유(名儒) 김문숙공주정(金文肅公周鼎)과 윤문현공보(尹文顯公珤)로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여 주야(晝夜)로 같이 하였으며 퇴궐(退闕)한 틈에는 성경현전(聖經賢傳)을 강론(講論)하니 당시(當時) 사람들이 그 당堂(을) 이름 하되 삼현당(三賢堂)이라 하였다.
일찍이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과 세계도(世系圖)를 찬(撰)하여 바치니 뒤에 충렬왕(忠烈王)이 민지(閔漬)에게 명(命)하여 수찬(修撰)케 하였다. 국가(國家)에 일이 많아 겨를을 얻지 못했으나 뒤에 권부(權府)와 찬성(撰成)을 동교(同校)하여 이름을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 하고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원왕(元王)에 이르니 나누어 칠권(七卷)을 만들었다. (민지전(閔漬傳)에 나타남)
충숙왕 십칠년(忠肅王 17年 1330)에 문정공(文靖公)과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을 충선왕묘(忠宣王廟)에 배향(配享)하였으며(경기도(京畿道) 마전현(麻田縣)의 충선실(忠宣室) 공(公)을 배향(配享)함)
이조(李朝) 숙종(肅宗) 무진년(戊辰年 1688)에 사림(士林)들이 금안동(金鞍洞)에다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였다. [계묘(癸卯) 춘(春)에 경향각지유론(京鄕各地儒論)으로 서원(書院)을 영안촌(永安村)으로 이건(移建)하였음]
이조 순조9년 기사(李朝純祖 9年己巳 1809)에 사림(士林)들이 함평오수산하(咸平鰲首山下) 외장동(外藏洞)에다 오산사(鰲山祠)를 지었다. 지대기유년(至大己酉年 1309)에 충렬왕(忠烈王)이 ⑲훙(薨)하고 충선왕(忠宣王)이 즉위(卽位)하여 하교(下敎)하되 그전 지원신묘년(至元辛卯年 1291)에 내가 정가신(鄭可臣)과 유청신(柳淸臣)과 박연(朴演)들로 자단전(紫檀殿)을 배알(拜謁)하고 친(親)히 성지(聖旨)를 받드니 이르되 동성(同姓)끼리통혼(通婚)치 못함은 천하(天下)의 도의(道義)다. 하물며 너의 나라가 문자(文字)를 알고 천자(天子)의 도(道)를 행(行)하니 응당 동성(同姓)을 구(求)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 때 이수구(李守丘)의 전설(傳說)과 유청신(柳淸臣)의 전역(傳譯)과 정가신(鄭可臣)의 거행(擧行)이 있었는데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고쳤으니 지금부터 후로는 문무양반가(文武兩班家)에서 동성(同姓)과 외가사촌(外家四寸)은 장가들지 못하며 구혼(求婚)을 듣지 않을 것이오. 국내명족(國內名族) [십오대가(十五大家)는 왕실(王室)과 세세(世世)로 통혼(通婚)을 허여(許與)한다 하였다. 십오대가(十五大家)는 즉(卽) 경주박씨(慶州朴氏), 경주김씨(慶州金氏), 나주정씨(羅州鄭氏), 청주정씨(淸州鄭氏), 평강채씨(平康蔡氏), 당성홍씨(唐城洪氏), 황려민씨(黃驪閔氏), 고흥유씨(高興柳氏), 풍천임씨(豊川任氏), 철원최씨(鐵原崔氏), 해주최씨(海州崔氏), 공암허씨(孔巖許氏), 횡천조씨(橫川趙氏)가 아울러 누세(累世) 훈재(勳宰)의 가문(家門)이므로 이같이 하교(下敎)하였다.]
공(公)의 덕행(德行)과 유범(儒範)이 당세(當世)에 휘영(輝暎)하여 본국(本國)과 원(元)나라에 소중히 여김을 보여 모두 고려지(高麗志)와 고려사(高麗史)며 열전(烈傳)과 명신록(名臣錄)에 실려 모두 신사(信史)가 되니 다시 기록(記錄)치 않으며 동문선(東文選)에 백복사원항(白僕射元恒)이 공(公)에게 보낸 시(詩)가 있으니 이르기를「자리는 초선(貂蟬)에 달하였고 덕(德)은 더욱 빛나니 나라를 경영한 묘책(妙策) 삼장(三章)보다 났구나. 요(要)컨데 말속(末俗)으로 하여금 우리 도(道)를 알게하니 조정(朝廷)에서 물러나 길이 만권당(萬卷堂)을 열었네」하였으니 대개 공(公)의 실록(實錄)이다. 장단부 강동면 기곡촌 안산 묘좌(長湍府 江東面 基谷村 案山 卯坐)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아직도 정대구(鄭岱坵) 정능동(鄭陵洞)이라 전(傳)하여 후인(後人)들이 일컫는다.] 배(配)는 삼한국(三韓國) 대부인(大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 대부소경홍우(大府少卿弘祐)의 딸로 묘(墓)는 공영(公塋)에 종장(從葬)하였다. 오남(五男)이니 탁(倬)은 재신(宰臣)이요 전(佺)은 대호군(大護軍)이요 길(佶)은 문과(文科)로 개성소윤(開城少尹)이며 이판(吏判)에 추증(追贈)되었고 억(億)은 지유장(指諭將)이며 엄(儼)은 이부상서(吏部尙書)요 삼여(三女)는 박원굉(朴元宏) 만호(萬戶)와 임저(林貯) 중랑장(中郞將)과 도대(都大) 승상(承相)에게 출가(出嫁)하였으며 손증이하(孫曾以下)는 번창(蕃昌)하여 다 기록(記錄)치 않는다.
<註> ①響貢進士(향공진사):唐代 선비를 取할 때 學校에서 選拔한것을 生徒라하며 州郡의 長이 選拔해서 京師에 보내는 것을 鄕貢 또는 鄕貢進士라 한다. ②內殿崇班(내전숭반):內殿:깊숙한 곳의 宮殿. 王妃의 尊稱. 崇班:높은 지위. 宮闕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③穎悟(영오):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함 ④寶文閣(보문각):高麗때 宮中에서 朝夕으로 經書를 講論하던 곳. ⑤待制(대제):歷代王의 御製 御筆 顧命 世譜 寶鑑등을 奉安하던 일을 擔當하는 宮廳 ⑥諷諫(풍간):슬며시 돌려 간함 또는 비유하여 간함. ⑦醞釀(온양):점차로 培養하여 이룸. ⑧위유:위로하고 타이름. ⑨按廉使(안렴사):王命으로 官吏들의 政事를 살피고 百姓들의 因苦를 묻는일을 함. ⑩程朱(정주):程은 程顥 程頣 朱는 朱熹 모두 宋代의 學者로서 儒學의 哲學歸 體系를 세운 性理學者 ⑪貂裘(초구):돈피로 만든 갖옷 ⑫眷遇(권우):특별히 留意함 鄭重하게 대접함. ⑬諳鍊(암련):모든 事物에 精通한 것. ⑭題品(제품):어느 事物을 藝術的 表現으로 그 가치를 評價하는 것 또는 題目. ⑮銓注(전주):人物을 전형하여 適材 適所에 配置하는 것. ⑯辭命(사명):말(言語)한 나라의 使者로서 하는 말. ⑰知貢擧(지공거):人材의 選拔을 管掌한 總裁 ⑱翕然(흡연):모여드는 모양. 一致合同하는 모양. ⑲薨(훙):王公 貴人의 죽음의 尊稱 ⑳屬文(속문):文章을 읽어서 지음 (21)紫金魚袋(자금어대):唐代의 五品以上의 官吏가 魚符(玉金銅으로 만듬)를 넣어 차는 주머니. 發兵, 徵發, 主府長官交替 등의 信表.
아래와 같이 계보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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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臣初諱興 字獻之號雪齋又曰無慍堂•高麗高宗十一年甲申에羅州治南洞江面에侍中洞에서誕生하였으며幼而潁悟하여讀書作文에頗爲時輩所推라高宗朝에文科에及第하여累歷華要하고官至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하고•忠烈王二十四年戊戌三月에上章乞退코자하니不允하고命五日一朝하라하며加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하고參知光政院事하다性正直端嚴하고處事精審하여在政房에諳鍊典故하고題品銓注가皆當物議라一時辭命多出其手하였다嘗撰千秋金鏡錄하고扁所居曰雪齋又無慍堂이라하다日與賢士大夫로商確古今하며雖至大官이라行止如書生이及爲冢宰에人이想望太平하다朝退之暇常與金文肅公周鼎과尹文顯公珤와鼎坐共議國事하고講論經史하니世稱三賢堂이라하다陪世子하고入中國하야嘉議大夫翰林學士를授하고陞金紫光祿大夫하다及還에賜金鞍金帶白馬龍硯하니以是洞名이金鞍洞이라•忠烈王二十四年戊戌六月四日에卒하니國人이驚悼하다諡號는文靖이다事見麗史列傳及朝鮮史畧墓禮葬于京畿道長湍郡江東面(現漣川郡旺澄面)基谷里鄭陵洞卯坐原有碑床石•配陰平郡夫人安氏大府少卿弘祐女이며兵部郞中世亮의孫이다忌十月六日墓從莊公瑩有遺集行狀•忠肅王十七年庚午六月에忠宣廟에配享•肅宗十四年戊辰에建院于羅州金鞍洞雪齋書院에配享•純祖十四年己巳에建祠于咸平郡月也面鰲山祠에配享
巖軒申檣傳記 p.286 引用 -.-.貫鄕/配位에서 漢字誤記 바로잡아 表記함-.-. 壬子(1432년)秋七月旣望에 高靈后人申檣謹撰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 공은 암헌공의 처고조부가 된다. 암헌공의 배위인 금성정씨(錦城鄭氏)는 설재공의 현손녀로 아버지는 지성천사(고령신씨 족보에는 지 성주사로 되어 있음)를 지낸 정유(鄭有)이고, 조부는 개성소윤을 지낸 정길(鄭佶)이다. 암헌공은 장문의 설재선생 행장(雪齋先生行狀)을 썼는데 나주정씨 대종히는 나주시 대호동 함박산에 조성된 나주 성향 공원에 나주정씨 성향비(羅州鄭氏姓鄕碑)를 세우면서 암헌공이 쓴 이 행장을 비문(碑文)으로 새겨 건립했다. 나주정씨는 예전부터 일부 종친들이 금성정씨(錦城鄭氏)로 부르기도 해 왔다. 「고령신씨세보」에도 암헌공 배위를 ‘錦城鄭氏’로 썼다. 이것은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錦城)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주정씨 대종회는 관향을 나주(羅州)로 통일하고 있다. 설재선생 행장 원문은 다음과 같다.(나주정씨 종중에서 현토함) 如其執迷不服이면 聲罪征之홈이 可一擧萬全也니라. 封稱旨하다. 帝大悅하야 授先生翰林學士淸直學士嘉義大夫金紫光祿大夫하니 自是로 督遇日降이라. 數撤珍膳하야 賜之하고 或天寒이어든 賜以貂裘하다. 帝使翰林學士撤刺蠻으를 問先生이 本國歸附年月한데 先生이 封曰 太祖皇帝肇興朔方時에 有大勢國이 恃功而驕하야 不用帝命하고 有遼孽金山王于者(契丹遺種) 奪掠中都子女玉帛하야 東走江東城하야 拒守하니 朝廷이 命哈眞札刺하야 追討時에 方雪深道險하야 饋糧이 不繼라 我國이 遺趙沖과 金就礪하야 濟兵犒師하야 殲其醜虜하야 因奉表하고 請爲東藩한대 太祖遺使하야 優詔答之하고 仍論汝國人이 不能寒暑하야 來聘이 固難하니 其貢獻方物을 朕當使人取之하리라. 此事在戊寅하니 至今甲午七十有六年이라 한대 帝又召見世子于紫檀殿할새 先生이 從 之御案前하니 有物大圓小銃하야 色潔而貞하니 高可尺有五寸이라 內可酒數斗니 摩訶鉢國所獻駱駝鳥卵也라 帝親賜酒하고 命先生賦詩하라 한 대 詩 曰有卵大如甕하니 中藏不老春이라 願將千歲壽하야 醺及海東人하노이다. 帝嘆賞不己하고 輟賜御羹하니 皇都縉紳이 願交者甚衆이라 世子益敬重之하다. 帝嘗觀遼東水程圖하고 欲置水驛할새 語先生曰 汝國所産이 惟米與布라 若陸輸면 道遠物重이라 所輸不償所費하니 今欲授江南行省左承使하야 主海運이면 歲可致略于穀匹하리니 豈有補國用이리오 可給東人寓都之資라 한 대 先生이 對日 高麗山川이 林藪居十之七하니 耕織之勞僅支口軆之奉이어든 況其人이 不習海路하니 以臣管見으로 恐或不便이라 한 대 帝然之하다. 先生이 嘗有詩曰 海東南有錦城山하니 山下吾廬草數間이라 巷柳園桃親手種하니 春來應待主人還이라. 及還에 帝寵賜今鞍白馬金賞龍硯하다. 壬子(1432년)秋七月旣望에 高靈后人申檣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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