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GO BACK

 

1991 辛未譜
第三編 先世遺蹟
忠義祠

 

 

 

六.忠義祠
충의사
吾宗出身十七位(오종출신17위)의 奉安文(봉안문) 및 常享祝文(상향축문)

忠義祠 所在地;光州直轄市 北區 金谷洞 山七二
(충의사 소재지;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산72)

壬辰亂(임진란)을 爲始(위시)하여 甲子(갑자), 丁卯(정묘), 丙子諸亂(병자제란)으로 國家(국가)의 運命(운명)이 百尺竿頭(백척간두)에선 危機(위기)를 自進勇躍蹶起(자진용약궐기)하여 渾身(혼신)을 다 하시다 殺身成仁(살신성인)하신 全南出身(전남출신) 忠義士(충의사) 千五百餘位(천오백여위)의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한 곳으로 五宗出身 十七位(오종출신17위)의 奉安文(봉안문)및 常享祝文(상향축문)

逸軒公奉安文

赫赫鄭氏甲于東維允矣文靖黼黻皇猷展也景武羽王朝公生于家負荷不忒移孝爲忠憂民憂國

[역문]일헌공봉안문

혁혁한 정씨여 동방의 갑족 이로다. 거룩한 설재공은 황조를 도왔고 더 훌륭한 경무공은 국가의 보필이시다. 공이 나시어 여러 선조 본을 받어 모든 일을 하심이 법도에 틀림이 없었고 어버이께 효도하며 임금님께 충성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나라를 걱정했다.

常享祝文

憂國傷時憤發忘食張姜信筆百世不


[역문]상향축문
임진왜란에 창의 모병하고 피를 마셔 군중과 맹세하며 침식을 잊어가며 나라위해 걱정을
장게곡과 강수은 문집에 자세히 기록되었으니 백대라도 필적이 있으리라.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2卷 701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중조(中祖)

 파계(派系)

  21世

고조(高祖)

景武公永慕亭諱軾

증조(曾祖)

諱承賢

조(祖)

直長公諱觀

고(考)

思禮堂公諱念祖

  

13世 諱諶 初諱諶

仲實

 

逸軒 일헌

 

 

中宗15庚辰 1520

宣祖1壬寅 1602年4月24日

 

滄洲公奉安文

於維滄翁河岳精靈文靖有室景武丹靑公乃踵武法家拂士奮袍龍門蜚英聖代容儀瑞雅天顔有喜治民以德化溢州府


[역문]창주공봉안문

장하도다. 창주공이여 산수 정기를 타고 나셨다. 설재선생 후예요, 무공의 현손이다. 공은 선조들의 업적이어 법도 있는 집 큰 선비라, 문과에 급제하여 성대 조정명신이요, 용모가 단정하니 임금님이 사랑하셨다. 여러 골 관장을 지내니 덕화가 골마다 넘치도다.

常享祝文

忠孝世襲詩禮家學累典州郡過化治德

[역문]상향축문
충효 세가요. 시례가 문이다. 여러 골 수령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청덕 치민 풍화되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2卷 717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중조(中祖)

 파계(派系)

  21世

고조(高祖)

景武公永慕亭諱軾

증조(曾祖)

諱承賢

조(祖)

直長公諱觀

고(考)

思禮堂公諱念祖

  

13世 諱詳

仲愼

 

滄洲 창주

 

 

中宗28癸巳 1533

宣祖己酉 1609年6月4日

海隱公奉安文

伏以先生 其字禹相厥號海隱貫于羅州鄭氏名翰考啣宗益祖諱之哀毁廬完服拜縣仁賓棄官控壽山入月川舍築屋後設壇 仁廟爲忠孝兼全可矜後儀玆顯忠義神饗于斯

 

常享祝文

一門國忠尤著於公哀毁毁孝廬百代之風


[역문]해은공봉안문
公(공)의 字(자)는 禹相(우상)이요. 그의 號(호) 는 海隱(해은)이시니 羅州鄭氏(나주정씨)로 父(부)의 諱(휘)는 益宗(익종)이요. 祖(조)의 諱(휘)는 之雅(지아)시로다. 雪齋公諱可臣(설재공휘가신)의 後孫(후손)으로 忠孝(충효)를 傳家(전가)해온 집안이시니 中宗丁卯(중종정묘)에 箕城(咸平 - 기성함평)에서 낳으셔서 일찍이 武科(무과)에 오르시사 訓鍊院僉正(훈련원첨정)을 지내시고 外鄭喪(외정상)을 當(당)하시어 退仕(퇴사)하시사 슬픔으로 滅性(멸성)까지 하시고 侍墓(시묘)를 살으신 後(후) 服(복)을 벗으시고 縣監(현감)을 拜受(배수)하셨으나

仁祖(인조)께서 昇遐(승하)하시니 벼슬을 버리시고 故鄕(고향)으로 오시사 控壽山(공수산)으로 들어가셔서 丹川精舍(단천정사)를지으시고 琴書(금서)로 自娛(자오)하시고 집 뒤에 壇(단)을 쌓아 每歲(매세) 仁祖大王(인조대왕)의 忌日(기일)에는 四拜痛哭(사배통곡)하셨으니忠孝(충효)가 兼全(겸전)한 可謂(가위) 後代(후대)에 矜式(긍식)이 되셨도다. 이 忠義祠(충의사)에 顯彰(현창)하여 祭需(제수)를 갖추었으니 神(신)께서는 이곳에서 흠향하옵소서.


[역문]상향축문

一門(일문)에서 나라에 忠誠(충성)하심이 公(공)으로 因(인)하여 더욱 나타나시고 孝廬(효려)에서 衷毁(충훼)하심이 百代(백대)토록 風網(풍망)이 되셨도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5卷 300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海隱公諱以夏派

  21世

고조(高祖)

諱轅

증조(曾祖)

棄齋公諱薰

조(祖)

逸菴諱之雅

고(考)

默窩公諱益宗

  

13世 諱以夏 이하

禹相

 

海隱 해은

 

 

中宗丁卯2月5日 1507

庚戌 1550

 

慶源公奉安文

國家變亂最莫壬辰都城失守鑾輿蒙塵星夜扈駕曰有鄭公武貌矯矯矯彈竭丹爰助忠武殺倭如羊婦蕩殘賊國家輯寧郭公同心䟽救永昌甲子适亂臨應進退上幸公州直詣行在大駕還宮賞賜寵極仁廟褒功雨注旱酷稟性亢直臨賊無恐不謟權貴不欲大用遇賊風生治民春和去思立碑以頌以歌豐功毅烈百世傳加

국가변란최막임진도성실수란여몽진성야호가왈유정공무모교교교탄갈단원조충무
살왜여양부탕잔적국가집녕곽공동심소구영창갑자괄란임응진퇴상행공주직예행재대
가환궁상사총극인묘포공우주한혹품성항직임적무공불도권귀불욕대용우적풍생치
민춘화거사입비이송이가풍공의열백세전가

[역문]경원공봉안문

국가 변란이 임진왜란보다 더 치열할 때 없었다. 도성을 잃게 되니 임금님께서 의주로 가셨다. 밤새는 줄 모르고 임금님 모시고 간 분이 곧 정공이다. 용감한 그 태도 정성껏 다했도다.

충무공 보좌하여 왜적 섬멸하길 염소 죽이기 같이 했도다. 그리고 남은 적을 소탕하니 나라가 편안했고 곽 장군과 협심하여 소문 올려 영창대군을 구원했다. 갑자괄난에 임기응변으로 진격퇴적하고 임금님이 공주로 가시니 직시 공주에 가 배알했다.

그후 환궁하여 상을 나리시고 퍽 사랑하셨는데 후세인 묘께서 포공하니 큰 가믐에 기쁜 비오는 것 같았다. 성질이 강직하여 적을 무섭게 여기지 않고 권리에 아첨하지 않고 크게 쓰임도 원치 아니하며 적을 만나면 위엄 풍체가 있으나 치민하는데는 춘풍화기 같으니 체임 후에 거사비를 세우고 송덕 했다. 그 미적 백대에 더 전하리라.

 

常享祝文
及文及武忠孝全備壬亂适變聖愛壯志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문과 무로 충과 효를 겸비하였고 임진란과 이괄란에 임금님이 그 장한 충지를 사랑하셨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2卷 707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중조(中祖)

滄洲公諱詳

 파계(派系)

慶源府使公諱如麟派

  21世

고조(高祖)

諱承賢

증조(曾祖)

直長公諱觀

조(祖)

思禮堂公諱念祖

고(考)

滄洲公諱詳

  

14世 諱如麟 여린

景厚

 

山亭

 

 

明宗甲子 1564

仁祖庚辰 1640年4月1日

 

月灘公奉安文

羅州鄭門湖南甲族忠孝著蔚文德紋煌仁叟月灘字號行於生于綿城
明廟哌㢳祖雅海隱考諱砥柱世蹟簪纓代襲祿候公有奇偉勇略智敭從遊
牛下交義睡狂龍巳倭變檄邀孝夫遂旅女百馳赴忠武母敎督志力戰多殲
軍待賞職超敍訓僉癸巳參晉水陸幷劃健日與高累戰多獲斬賊投江獨泅
岸攻唐浦有沒閑山深傷丁酉再制碧蘭捷爭梨津權管加增僉正李公將卒
露梁力戰指揮完希飛丸命穿宣武錄勳旣祠月川義錄詳載誌略奕蟬今以
顯彰芬苾敬恪庶幾來寧歆我洞酌

上享祝文
忠義烈烈士林之崇孝行節節敎後之豐

 

月灘公奉安文
(월탄공봉안문)

[역문]羅州鄭氏(나주정씨)는 湖南(호남)에서 甲族(갑족)이시니 忠孝(충효)가 著蔚(저울)하시고 文德(문덕)이 빛났도다. 仁叟(인수)와 月灘(월탄)이 公(공)의 字(자)와 號(호)니 明廟己未(명묘기미)에 綿城(면성)에서 生(생)하셨도다. 海隱公(해은공)의 孫(손)이요. 考(고)의 諱(휘)는 砥柱(지주)로서 世代(세대)마다 벼슬을 한 집안으로 國祿(국록)을 代襲(대습)하여 받으셨도다. 公(공)은 奇偉(기위)하시고 智勇(지용)이 뛰어나셨으며 牛溪門下(우계문하)에서 從遊(종유)하시고 姜睡隱(강수은) 宋海狂(송해광) 諸公(제공)과 交遊(교유)하셨으며 壬辰亂(임진란)에는 李忠武公(이충무공)의 부름을 받으시고 五百餘義兵(오백여의병)을 募兵(모병)하시사 忠武公幕下(충무공막하)로 달려가 어머님의 가르치심을 명념하시고 督志力戰(독지력전)하시어 倭賊(왜적)을 많이 베이시니 軍陣(군진)에서 訓鍊院僉正(훈련원첨정)을 招(초서)하셨도다.

癸巳(계사)에는 江華(강화)로부터 晉州(진주)까지 賊(적)을 쫓아 進軍(진군)하시고 水陸兩面戰法(수륙양면전법)을 幷劃(병획)하시어 健齋公(건재공) 日休堂公(일휴당공) 霽峯公(제봉공)과 더불어 賊(적)을 많이 베었으며 南江(남강)에 投身(투신) 殉節(순절)코자 하셨다가 홀로 헤엄쳐 江(강)가로 올라 唐浦(당포)와 閑山(한산)섬 싸움에 參戰(참전)하시어 力戰(력전)하시사 賊(적)으로 부터 깊은 傷處(상처)를 當(당)하시고 丁酉(정유)재란에 碧波亭(벽파정)과 蘭島(난도)싸움에서 크게 이기시고 梨津權管(이진권관)에서 다시 僉正(첨정)에 이르시고 李忠武公(이충무공)이 장차 卒(졸)하니 李莞(이완)과 宋希立(송희립)을 左右翼(좌우익)으로 삼고 몸 받쳐 싸우시다 날아오는 賊殫(적탄)에 가슴을 맞아 戰死(전사)하시니 宣武勳(선무훈)에 榮錄(영록)하시고 丹川祠(단천사)에 모셨으며 節義錄(절의록)과 湖南誌(호남지)에 기록하고 이제서 현창하여 분필코자 하오니 神道(신도)께서는 편안히 來臨(래임)하시와 우리가 받드는 술을 흠향하옵소서.

常享祝文(상향축문)
[역문]忠義(충의)가 烈烈(열열)하시니 士林(사림)이 崇仰(숭앙)하고 孝行(효행)이 節節(절절)하시니 後生(후생)의 敎化(교화)가 豐富(풍부)하도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5卷 300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海隱公諱以夏

  21世

고조(高祖)

逸巖公諱之雅

증조(曾祖)

默窩公諱益宗

조(祖)

海隱公諱以夏

고(考)

雲松公諱砥柱

  

15世 諱麒壽 기수

仁叟

 

月灘 월탄

 

 

明宗己未 1559年 8月17日

宣祖戊戌 1598年11月18日

 

愛竹軒公奉安文

簪纓世族羅州華系忠司肖胤文靖苗裔姿貌俊邁勇出智奧德揚愛竹其
字其號壬燹之變 大駕西狩鴻縉弟姪億陣赴右多獲唐梁斬級安骨復佐
忠武露梁戰歿褒啓卽降 贈秩階償歷 朝增資其烈光光妥有鰲山士林 尊今以顯彰精 靈君存

常享祝文
露梁殉忠其功垂帛歷 朝增秩其光蟬爀

愛竹軒公奉安文
(애죽헌공봉안문)

[역문]羅州鄭氏(나주정씨)는 代代(대대)로 벼슬을 한 華麗(화려)한 門閥(문벌)로 빛나게 이어져 내려왔으니 文靖公諱鄭可臣(문정공휘정가신)의 名裔(명예)로 忠佐衛司正諱元柱(충좌위사정휘원주)의 어지신 아들이로다. 公(공)의 字(자)는 德揚(덕양)이요 愛竹軒(애죽헌)은 公(공)의 號(호)시니 姿貌(자모)가 俊傑(준걸)하시고 勇力(용력) 또한 過人(과인)하셨으며 智謀(지모) 또한 깊으셨도다.

壬辰(임진)의 變(변)에 大駕(대가)가 播遷(파천)하시니 아우 鴻(홍) 조카 縉(진)과 함께 水使李德祺幕下(수사이덕기막하)로 달려가 右翼(우익)을 담당하시고 唐浦(당포)와 見乃梁(견내량) 싸움에서 多獲賊斬(다획적참) 큰 功(공)을 세우셨으며 또한 安骨浦(안골포) 싸움에서 賊船(적선)을 불사르고 賊(적)을 또한 多斬(다참)하시고 다시 李忠武公幕下(이충무공막하)로 들어가셔서 力戰奮鬪(역전분투)하시다가 露梁(노량)에서 戰歿(전몰)하시니 奏上(주상)한 褒賞(포상)의 題音(제음)이 卽時(즉시) 내려져 벼슬을 贈(증)하시고 品階(품계)를 높이시고 歷代(역대) 朝廷(조정)에서 그 벼슬을 더하시니 그 忠烈(충렬)이 더욱 빛났도다. 이미 鰲山祠(오산사)를 세워 士林(사림)들이 尊仰(존앙)하였으며 이제 忠義祠(충의사)에 顯彰(현창)하오니 新道(신도)께서는 來臨(래임)하시옵소서.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露梁(노량)에서 殉忠(순충)하시니 그 功(공)이 歷史(역사)에 드리우고 歷朝(역조)에서 벼슬을 더 높이 蟬爀(선혁)하시도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5卷 296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敬菴公諱以周派

  21世

고조(高祖)

逸巖公諱之雅

증조(曾祖)

默窩公諱益宗

조(祖)

敬菴公諱以周

고(考)

諱元周

  

15世 諱鷹

德揚

 

愛竹軒 애죽헌

 

 

明宗17 1562 壬戌

宣祖19 1586年戊戌11月19日

 

月峯公奉安文

羅州古族名門鄭氏雪齋後孫參議子兒字曰靈叟號曰月峰孝友文章爲

世推重辛卯號登壬辰糾集崔公遊將戰轉列邑癸巳守臨掩殺土賊丁酉出

鎭西生大捷除忠防使事 聞累陞與討李侃安興大勝伯號殉國公則討賊

忠肝義膽一門隻績今以建祠式陳粢盛靈其安侑惠我永明

 

常享祝文
志義高節百代之光忠孝兼全萬世之作

 

月峯公奉安文
(월봉공봉안문)

[역문]나주정씨 名門(명문)으로 文靖公雪齋諱鄭可臣(문정공설재휘정가신)의 後孫(후손)이요. 贈泰議諱砥柱(증태의휘지주)의 아들이구나. 字(자)는 領水(영수)요. 호는 月峰(월봉)이니 孝友(효우)와 文章(문장)이 當代(당대)에서 推重(추중)을 받으셨도다. 辛卯(신묘)에 武科(무과)에 오르시고 壬辰(임진)에 倡起(창기)하시니 日休堂崔慶會公(일휴당최경회공)이 遊擊將(유격장)을 삼으셨도다.

列邑(열읍)을 전전 많은 功(공)을 세우셨으며 癸巳(계사)때 臨淄(임치)에서 土賊(토적)을 滅(멸)하시고 丁酉再亂(정유재란)에 出鎭(출진)하셔서는 西生浦(서생포)에서 큰 功(공)을 세우시니 나라에서 들으시고 忠淸(충청)방어사를 제수하셨도다. 또한 水使(수사) 李侃(이간)과 함께 安興(안흥)에서 二十餘隻(이십여척)의 賊船(적선)을 쳐부수는 큰 功(공)을 세우셨도다. 伯氏(백씨)는 殉節(순절)하시고 公(공)은 賊(적)을 치셨으니 忠義之士(충의지사)가 一門(일문)에서 雙烈(쌍열)로 나셨도다. 이제 祠宇(사우)를 세우고 法式(법식)에 맞추어 祭需(제수)를 陳設(진설)하오니 尊靈(존령)께서는 편안히 흠향하시고 우리들 後生(후생)을 깊이 밝게 도와주소서.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志義(지의)와 높은 절개는 百代(백대)에 빛날것이요. 忠(충)과 孝(효)를 兼(겸)하셨으니 萬世(만세)토록 우러르리라.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6卷 57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海隱公諱以夏派

  21世

고조(高祖)

逸巖公諱之雅

증조(曾祖)

默窩公諱益宗

조(祖)

海隱公諱以夏

고(考)

雲松公諱砥柱

  

15世 諱凰壽 황수

領水

 

月峰 월봉

 

 

明宗17 1562年 壬戌2月24日

仁祖6 1628年 戊辰11月17日

 

書圃公奉安文

  錦城華閥文靖後裔姿稟魁傑世襲詩禮忠效李郭學究靜退種學治圃恒

言忠孝逮當壬亂大駕西狩憤慨滿腔唾掌釋經遂聚宗族故舊壯丁霽峯合

勢直赴錦山衝突斬賊矢蕩彎竟死敵丸馬草襄還猗歟壯魂忠節大閑

 

常享祝文
言必忠孝習又韜略忠義顯彰景仰無斁

 

書圃公奉安文
(서포공봉안문)
[역문]나주정씨 훌륭한 집안으로 문정공의 후손이다. 성품이 괴결하고 대대로 시와 예를 배워 온 가정이다. 이충무공과 충의를 사모하고 조정암과 이퇴계의 학문을 연구했었다. 학문을 일삼고 농사도 하며 충과 효를 항언으로 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임금님이 의주로 가시니 분한 마음 가슴이 터질 듯 손바닥에 침을 바르고 외치며 글 책을 던져버리고 친척과 친구간의 장정을 모아 의거하기로 결심하고 고제봉과 합세하여 바로 금산으로 가서 좌우충돌 대적하다 마침내 적의 탄환에 충혼이 되니 말 가죽에 싸왔다. 장엄한 혼백이여 충절의 큰 표본이 되리로다.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말씀마다 충효이고 병서도 연구했다. 충의를 현창하니 경앙한 마음 언제라도 있으리라.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2卷 25   계보보기

4대파

大護軍公諱佺派

將仕郞

중조(中祖)

氷軒公諱菊

 파계(派系)

大護軍公諱佺派

  21世

고조(高祖)

諱燮

증조(曾祖)

諱兢

조(祖)

諱勳

고(考)

諱瓊

  

15世 諱仁世 인세

安卿

 

書圃 서포

 

 

宣祖11癸酉 1633

 

 

竹友堂公奉安文
(죽우당공봉안문)

截彼錦城鄭公之鄕中葉一表竹友挺生秋水精神春風和氣職本孝友浮雲富貴講道林樊啓來裔遊畸翁門爲道義契聞南漢報竿旗揭義

常享祝文
松江高足畸翕義交虜亂猖獗義檄同胞

竹友堂公奉安文
(죽우당공봉안문)

[역문]
우람한 금성골이여 죽우당 정공의 향리로다. 중세 표출하신 죽우당이 나셨도다. 가을 물같은 맑은 정신이요. 봄바람 같은 화한 기상이로다. 효우로 직분을 삼고 부귀는 부운같이 여겼도다. 정기옹과 서로 도와 지교를 삼고 병자호란에 남한성의 위급함을 듣고 의기를 들고 모병하여 진출하였다.

常享祝文(상향축문)
[역문]
정송강문에 수학하여 높은 문인이 되고 정기옹으로 부터 도의지교 친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남에 여러 골 의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갔었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2卷 704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중조(中祖)

逸軒公諱諶

 파계(派系)

將仕郞公諱如漢

  21世

고조(高祖)

直長公諱觀

증조(曾祖)

思禮堂公諱念祖

조(祖)

逸軒公諱諶

고(考)

將仕郞公諱如漢

  

15世 諱瀾

 

 

竹友堂 죽우당

 

 

宣祖癸未1583

孝宗丙申1656

 

愛松軒公奉安文

    羅州華閥簪纓苗裔有祖名賢雪齋之系生于箕城乙丑命職 宣廟戊虎

伯仲榜特超拜宣傳早謝歸田島夷之變與兄倡旃赴義齊幕錦山敗歸昆季

復謀金帥從旂公爲右翼聯合忠武唐梁骨戰大功捷鼓褒聞除主露梁出沒

縱橫奮戰中丸勇欲竟終力盡兄弟同死褒之命在昔之禩爱彰忠義瑞北建

祠芬泌有禮乃尊祀儀

 

常享祝文
烈烈忠膽百世之作節節志氣萬代之皇

 

愛松軒公奉安文
(애송헌공봉안문)

[역문]
나주정씨의 빛난 門閥(문벌)이며 벼슬하신 어른의 後裔(후예)로 名賢(명현)의 할아버지가 계시니 雪齋公諱可臣(설재공휘가신)의 系列(계열)이시로다. 明廟乙丑(명묘을축)에 咸平(함평)에서 낳으시고 宣祖戊子(선조무자)에 兄弟(형제)가 武科(무과)에 同榜(동방)하시사 特別(특별)히 宣傳(선전)을 拜受(배수)하셨으나 일찍이 사임하시고 田原(전원)으로 돌아오셨도다.

壬辰年(임진년) 섬오랑캐의 變亂(변란)에 兄(형)과 함께 倡義(창의)하시어 霽峰幕下(제봉막하)에 들어가 錦山(금산)싸움에서 敗(패)하시고 兄弟(형제)가 다시 圖謀(도모)하여 都元師金命元幕下(도원사김명원막하)에 들어가 公(공)이 右翼(우익)이 되시사 忠武公李舜臣(충무공이순신)과 聯合戰線(연합전선)을 형성 唐項浦(당항포) 見乃梁(견내량) 安骨浦(안골포) 싸움에 크게 勝利(승리)한 북을 울리시니 上(상)께서 들으시고 主簿(주부)를 除授(제수) 포상하셨도다. 또한 싸움에 나가 종횡무진 혈전하시다 賊(적)의 탄환에 맞아 勇猛(용맹)을 다하셨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시니 兄弟(형제)가 함께 戰死(전사)하셨도다.

포상하는 命令(명령)은 옛 歲上(세상)일이요 이에 忠義祠(충의사)에 현창하고자 무등산 북녘에 사우를 세워 祭香(제향)을 받들도록 禮(예)를 갖추어 이제 祭祀(제사)의 儀式(의식)을 드리나이다. 흠향하옵소서.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
烈烈(열열)한 忠(충)과 誠(성)은 百世(백세)토록 우러르고 節節(절절)한 뜻과 氣(기)는 萬世(만세)토록 빛나리라.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辛未譜 5卷298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宣祖戊子에 登科하여 宣傳하고 龍蛇之變에 與兄鷹과 再從姪 縉과 함께 同謨義旅하여 殉節露梁戰하다 皐葬于崇忠洞先兆下艮坐  事載狀錄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敬菴公諱以周派

  21世

고조(高祖)

諱之雅

증조(曾祖)

諱益宗

조(祖)

諱以周

고(考)

諱元柱

  

15世 諱鴻

 

 

愛松軒 애송헌

 

 

明宗丙寅 1566

 

縣監公奉安文

    洋與美哉公諱德挺生故家詩禮篤學武科及第早通韜略知縣長水淸
簡治績丙子虜亂伯父從軍又 與再從發義檄文媾和輒報痛憤自分一門三
忠京鄕相聞

常享祝文
智謀絶倫力掃千軍從軍發檄聲望振薰

縣監公奉安文
(현감공봉안문)

[역문]
공의 諱(휘)는 洋(양)이요, 字(자)는 美哉(미재)라. 선비의 집에서 태어나서 시문과 예문을 독실히 배우고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으며 병서를 통달하였다.장수현감으로 있을 때 치민치정을 잘한 공적이 많았으며 병자호란에 그 백부 경원부사를 따라 종군하였고 또 제종 죽우당으로 부터 창의 모병할 격서문을 발기했다. 남한성에 호란이 구화 됨을 듣고 통곡 분개함을 마지 못하다. 한 집안에 삼 충신이 있다 함을 경향 간에서 서로 듣고 안다.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지략이 보통에 뛰어나고 힘은 천군을 소탕할 수 있으며 종군하고 격문 발기한 성망 널리 퍼졌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2卷 712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丙寅에 別試하여
武科로 禦侮將軍行龍衛副司果行長水縣監하다
丙子亂에 從伯父募義하여 與再從瀾으로
發檄赴難이라 事載漲義錄하다

중조(中祖)

滄洲公諱詳

 파계(派系)

通德郞公諱如鳳派

  21世

고조(高祖)

直長公諱觀

증조(曾祖)

思禮堂公諱念祖

조(祖)

滄洲公諱詳

고(考)

諱如鳳

  

15世 諱洋

美哉

 

 

 

 

宣祖35 壬寅 1602

正月二十日

 

高亭公奉安文

  詩禮古家羅州鄭后文靖之裔護軍之冑志氣倜儻忠國座銘表德子儀雅
號高亭壬丁兵燹鷹鴻倡征赴霽梁柳㰱血同盟馳檄會旅爰得救合錦山晉城或慘或捷閑溫唐戰斬獲賊團碧露血戰死于賊丸忠武褒薦道臣狀聞建祠鰲山士林景蘊芬苾有所乃顯彰揖今玆瑞下忠義祠立躋蹌叔姪同堂一奕洋洋精靈庶幾歆檄

常享祝文
貞忠報國自誓自節殺身成人惟義惟烈

高亭公奉安文
(고정공봉안문)

[역문]
詩(시)와 禮(예)를 崇尙(숭상)하는 옛 집안으로 나주정씨의 後孫(후손)이시니 文靖公諱可臣(문정공휘가신)의 名裔(명예)요. 護軍諱士賢(호군휘사현)의 아드님으로서 뜻과 氣質(기질)이 얽매이시지 않으시사. 貞忠報國(정충보국)을 自誓(자서)하시고 座右銘(좌우명)으로 삼으셨도다.

公(공)의 字(자)는 子儀(자의)요 雅號(아호)는 高亭(고정)이시니 壬辰丁酉兵亂(임진정유병란)에 증병참공 鷹(응)字(자) 鴻(홍)字(자) 兄弟(형제)와 함께 倡起(창기)하셔서 柳彭老(유팽로) 梁大樸(양대박)과 高霽峰幕下(고제봉막하)에 赴(부) 하시기로 피를 마시고 同盟(동맹)하시고 列邑(열읍)에 檄文(격문)을 날려 數(수) 많은 壯丁(장정)으로 義兵(의병)을 편성하시니 錦山(금산)과 晉州城(진주성) 싸움에서 或(혹) 이기셨도다. 또한 丁酉年(정유년)에는 李億祺幕下(이억기막하)에 들어가 閑山島(한산도) 溫羅島(온나도) 唐項浦(당항포) 싸움에서 數(수) 많은 賊(적) 을 斬獲(참획)하고 賊船(적선)을 불살랐으며 碧波津(벽파진) 싸움에서 大勝(대승)하시고 露梁(노량)싸움에서 敵丸(적환)에 殉國(순국)하시니 忠武公李舜臣(충무공이순신)이 褒啓(포계)하시고 道臣(도신)이 狀啓(장계)를 올렸도다.

일찍이 鰲山祠(오산사)를 세우고 士林(사림)이 景仰(경앙)하여 祭享(제향)하는 祠宇(사우)에 이에 현장하고 橫(횡) 하였으며 이제 瑞石山下(서석산하)에 忠義祠(충의사)를 세워 叔姪(숙질)을 一室(일실)에 모시고 함께 빛내오니 精靈(정령)께서는 洋洋(양양)하시와 祭需(제수)를 歆格(흠격)하옵소서

常享祝文(상향축문)
[역문]
貞忠報國(정충보국)을 스스로 맹세하고 介節(개절)하시고 殺身(살신)하심으로서 成仁(성인)하시고 오직 義(의)를 烈(열)하셨도다.

아래와 같이 계보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系  譜 :5卷723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容儀秀邁하고 勇力이 絶倫하였다 一齋李恒先生의 門人이요 健齋金千鎰과 從遊하였다 宣祖戊子에 登武丙科하고 累遷至朝奉大夫司宰監僉正하다 大駕西巡報로 奮憤而起하여 與再從叔主簿鷹과 鴻兄弟와 함께 赴霽峯高敬命陣하여 指畵方略하다 錦山之敗로 還鄕하다 癸巳에 與兵使宣居怡와 攻陷晉陽賊하고 丁酉再亂에 擧兵하여 至水使李億祺幕하니 李公이 委以戰船十雙하다 閑山溫羅島와 唐項安骨二浦之戰에 大有捷功하니 朝廷에서 除訓鍊院副正하고 王이 命賜貞忠輔國四字玉牌하고 戊戌에 挈兵入露梁하야 與忠武公李舜臣으로 合勢하여 挺身督戰하다 與從叔二公과 同時中丸하야 裏瘡力戰하다 赴水而死하니 時는宣祖戊戌十一月十九日이다 奴忠男等이 招魂而歸하다 墓皐葬于咸平郡月也面陽亭里陰地村右石花山北麓曾祖司正公塋下丙坐三合兆有碑碣誌라 甲辰에 錄宣武勳하다 仁祖癸亥에 褒贈通政大夫兵曹參議라 族孫進士世胤述狀하고 左承旨沈相學이 撰狀하고 參奉奇宇萬이 撰碣銘하다 高宗乙巳에 建忠義堂于內細洞北하고 參判崔益鉉이 撰堂記하고 錦城吳繼洙撰上樑文하다 己巳에 以士論으로 配享鰲山祠하다 事載咸平誌湖南節義錄海東三綱錄文獻錄朝鮮史略及李忠武同義錄하다 配淑夫人光山金氏無育卒年未詳 配淑夫人玉川薛氏父進士應龍祖左通禮弘允曾祖牧使順옷1川君勳玄孫이다 丁酉再亂에 挈家族하여 避兵于本面竹寺洞하다 遇賊殉烈하였다 立碑忠義堂下하니 堂今遺墟라 五代孫亨蓍述狀하고 光山鄭義林이 作傳하고 錦城吳駿善이 撰碑銘하였다 事見邑誌三綱錄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逸齋公諱以殷派

  21世

고조(高祖)

默窩諱益宗

증조(曾祖)

逸齋諱以殷

조(祖)

潁隱公諱國柱

고(考)

諱士賢

  

16世 諱縉

子儀

 

古亭 고정

 

 

明宗6  1551年 辛亥3月3日

宣祖19  1586年 戊戌十一月十九日

 

松溪公奉安文

    羅州古門世祿組圭其顯文靖厥會侍衛生于 明廟器局超彦可後松溪

字號世傳淵源家學忠衛蔭候壬燹斯熾欲勤從秀募褥五百同赴店隨署爲

褊將淸州戰奇移陣錦山七百同兦錄功宣勳 贈使佐郞旣設俎豆鰲山崢

嶸今以彰祠式陳醴牲

常享祝文
臨難倡義世祿之忠有志報國傳家之風

[역문]
羅州(나주)땅 옛 名閥(명벌)의 世祿(세록)벼슬 집안이시니 그의 顯祖(현조)는 文靖公(문정공)이시오. 그의 曾祖(증조)는 忠衛公諱以商(충위공휘이상)이시다. 明宗甲子(명종갑자)에 綿城(면성)에서 生(생)하시니 器局(기국)이 超彦(초언)하셨으며 可後(가후)와 松溪(송계)를 字(자)와 號(호)로 世傳(세전)하셨도다. 家廟嚴訓(가묘엄훈)을 淵源(연원)으로 代襲(대습)하시와 蔭階(음계)로 忠義衛(충의위)에 이르셨으며 壬亂(임란)에는 이 나라가 판탕됨에 三道民秀公(삼도민수공)을 쫓아 勤王(근왕)하고자 의병 五百(오백)을 거느리고 함께 重峯趙憲幕下(중봉조헌막하)에 赴(부)하여 褊將(편장)으로서 淸州(청주)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錦山(금산)으로 陣(진)을 옮겨 싸우시다 七百義士(칠백의사)와 함께 殉死(순사)하시니 宣武勳(선무훈)에 錄功(록공)하고 佐郞(좌랑)을 贈(증)하셨도다. 이미 鰲山(오산)의 높고 높은 祠堂(사당)에서 俎豆(조두)를 받들었으며 이제 顯彰會(현창회)에서 忠義祠(충의사)에 모시고 法度(법도)에 따라 술과 牲(생)을 陳設(진설)하나이다.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
어려움에 임하셔서는 倡義(창의)하시니 世祿(세록)을 받으신 忠誠(충성)이며 나라에 보답할 뜻이 있으시니 집안에 傳(전)해오는 遺風(유풍)이로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5卷607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慕軒公諱以商派

  21世

고조(高祖)

默窩公諱益宗

증조(曾祖)

慕軒公諱以商

조(祖)

諱謹忠

고(考)

諱鶴齡

  

16世 諱繪

可後

 

松溪 송계

 

 

明宗19 1564年 甲子

 

 

月菴公奉安文

   宣廟壬燹一有傑男字曰子俊號日月菴其貫羅鄭詩禮名垂厥祖顯碩敬

菴雪齋生于己巳兩庭孝奉與宋交遊文章推重重峰一見需世稱深時服纔闋竟乃倭侵倡與從繪募旅五百赴援趙幕淸州大斥移馳權幕俱繪殉節崇

忠洞阡義魄烈烈 贈褒寺正躋蹌鰲祇今以揚彰玆建義祠士林駿楫斯薦

于祀陟降精 靈是憑安矣

常享祝文
在家誠孝生養備儀出國盡忠錦山恨悲

 

月菴公奉安文
(월암공봉안문)

[역문]
宣祖壬辰亂(선조임진란)때 한 男子(남자)의 豪傑(호걸)이 있으셨으니 字(자)는 子俊(지준)이요 號(호)는 月菴(월암)이며 羅州鄭氏(나주정씨)로 詩(시)와 禮(예)를 崇尙(숭상)하는 名望(명망)있는 집안으로서 그 顯祖(현조)에 碩德(석덕)이 있으셨으니 敬庵公(경암공)과 雪齋公(설재공)이로다. 生于己巳(생우기사)하시사 生養兩庭(생양양정)을 孝誠(효성)으로 받으셨으며 海狂宋濟民(해광송제민)과 더불어 從遊(종유)하셨으니 文章(문장)이 世上(세상)에서 推重(추중)하셨도다. 重峰先生(중봉선생)이 한번 보시고 나라에 重材(중재)가 되실 것이라 깊이 칭찬하셨도다.

때마침 喪(상)을 마칠 무렵 倭寇(왜구)가 侵彊(침강)하여 나라안이 판탕되니 三從兄繪(삼종형회)와 함께 倡起(창기)하시고 募旅五百(모여오백)하시다.重峰先生幕下(중봉선생막하)로 들어가 淸州(청주)에서 크게 한판 싸움으로 功(공)을 세우고 重峰公(중봉공)의 軍陣(군진)이 敗(패)하시자 다시 權公慄陳(권공율진)으로 옮겨 들어가 繪(회)와 함께 錦山(금산)싸움에서 戰歿(전몰)하시니 崇忠洞(숭충동)으로 가는 墓道(묘도)에 義(의)로요 魄(백)이 烈烈(열열)하시도다.

나라에서는 포계하시사 司僕寺(사복시)의 止(지)를 贈(증)하시고 鄕中(향중)에서는 鰲山祠(오산사)에 모셔 恭敬(공경)하였으나 이해 忠義祠(충의사)에 顯彰(현창)하여 모시고 士林(사림)들이 달려와 恭揖(공읍)하고 薦揚(천양)하여 祭祀(제사)를 받드오니 神道(신도)께서는 내려 臨(임)하시사 이에 편안히 의지하시고 흠향하옵소서.

常享祝文(상향축문)
[역문]
집안에 계셔서는 誠孝(성효)로서 生養(생양)에 道(도)를 다하시고 나라가 위태로움에 出戰(출전)하셔서는 충성을 다하시다 錦山(금산)에서 痛恨(통한)이 있으시도다.

아래와 같이 계보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系  譜 : 5卷 327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敬菴公諱以周派

  21世

고조(高祖)

諱李宗

증조(曾祖)

敬菴公諱以周

조(祖)

諱元柱

고(考)

圖南公諱

  

16世 諱民秀 민수

子俊

 

月菴 월암

 

 

宣祖己巳 1569年

1592年8月18日?

 

1차금산전투,2차금산전투

배경

당시 충청도 금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1592년 음력 623일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정암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고 각지의 의병들이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1차 금산전투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으로 막내 아들 고인후와 지금까지 모은 의병 7000명을 이끌고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음력 71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연락해 금산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이곳을 지키는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권율과의 이치 전투를 한창 벌이고 있었는데 고경명의 의병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중지하고 금산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고경명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도 합류해 금산성을 공격했고 왜군은 조총으로 대항했다.

고경명은 주위에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와 30명의 특공조까지 편성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저녁이 되어 첫 전투가 끝나고 곽영이 철수를 하자고 했으나 고경명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해 다음 날 다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곽영의 관군이 싸울 뜻이 없는 것을 안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곽영의 진을 공격해 곽영이 후퇴하고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까지 무너졌고 고경명의 부하 유팽로와 안영이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고경명도 결국 전사했고 아버지의 목이 일본군의 창 끝에 걸린 것을 본 막내 아들 고인후가 나섰으나 그도 역시 전사해 창 끝에 목이 걸렸다.

전투가 종결되고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아버지와 동생의 목 없는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1차 금산전투

날짜

1592년 음력 79~음력 710

장소

충청도 금산

결과

일본의 승리

나라

조선

일본

장수

고경명 의병장곽영 전라도 방어사유팽로안영고인후강희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사

7천여명

15700여명

피해

전멸

피해막심하진 않음

 

2차 금산전투

고경명이 전사한 뒤에도 수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금산을 탈환하려 했었는데 왜군은 금산을 탈환하려 북진하려던

보성과 남평의 군대를 공격해 남평 현감 한순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꺾지 않았다.

이에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던 의병장 조헌이 나서 1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군사만 축낼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전라도관찰사 권율과 경상도의 의병장 곽재우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권율은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 거절하고 곽재우도 금산 외에도 중요한 요지가 더 많다고 하여 거절했다.

결국 조헌은 혼자 출발했고 충청도관찰사 허욱이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 가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나 이마저도 무시했다.

그리고 관군의 방해로 1000명의 의병이 700명으로 줄었으나 전 청주 전투에서 함께 싸웠고 영규 대사가 와 승병 600명과 합류해 총 1300명의 군사가 되었다.

그리고 금산성 평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화살이 떨어지고 왜군과 육박전을 벌여야 할 상황이 오자 주변 사람들이 조헌에게 피신하라고 말했으나 조헌은 이를 거절하고 직접 북을 치며 군사에게 독전하다가 결국 전사했고 승병을 이끌던 영규 대사도 전사했다.

의병과 승병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피해도 막대해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으며 이후 700명의 시체들을 모아 '칠백의총' 이란 무덤을 만들었다.

2차 금산전투

날짜

1592년 음력 818

장소

충청도 금산

결과

일본의 승리

나라

조선

일본

장수

조헌 의병장영규 승병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사

조헌 의병 700명영규 승병 600명총 군사력 1300

1만 명

피해

전멸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막대한 피해.

 

결과와 영향

금산에 주둔하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 제6군단은 결국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 이어

고경명의 의병과 조헌과 영규의 연합군과의 전투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음력 97일 무주의 군사를 불러들이고 음력 916일 옥천으로 철수했다.

참고자료 : 일헌공15세손 병선 記

 

松溪公奉安文

   松翁訓導文武兼持風儀魁傑言語愼之忠孝爲心孝移忠推憂國如家怒

人無私南漢圍急憤發鞍騎倡發擧義捐出家貲義士爭集州倅志馳府使從

祖才力先知今奉祀事百世永期

常享祝文
維公高躅忠義弓箕憂國誠心執不仰其

 

松溪公奉安文
(송계공봉안문)

[역문]
호는 송계요. 벼슬은 훈도이신데 공이 문무를 겸비했다. 풍체도 괴걸하고 언어를 조심하였고 평생 충효를 직분으로 알고 효의 마음을 충에 미루고자 하여 나라일 걱정하기를 자기 집일 같이 하고 남을 용서하는데 사심이 없으며 남한산성을 호란 급침 함에 통분한 마음으로 병마를 주선하여 의거할 것을 창발 할 때 자기 집 재산을 모두 끌어내서 하니 사방의사들이 다퉈 모이고 본 고을 목사가 군력을 보강해 주었다. 그리고 경원공 종조가 그 재주와 힘을 아는지라 권장하며 보조해 주었다. 이제 삼가히 제사를 모시 오니 백대에 길이 계시소서.

常享祝文(상향축문)
[역문]
오직 공의 높은 자취는 충과 의로 기술한다. 나라 위한 충의심을 누가 높이 존중 아니 하리요.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3卷311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중조(中祖)

逸軒公諱諶

 파계(派系)

將仕郞公諱如漢派

  21世

고조(高祖)

思禮堂公諱念祖

증조(曾祖)

逸軒公諱諶

조(祖)

將仕郞公諱如漢

고(考)

德泉公諱渼

  

16世 諱鱗瑞 인서

點額

 

松溪 송계

 

 

宣祖40 1607年丁未

肅宗6 1680年 9月28日   73歲

 

南郭隱公奉安文

  南郭隱士羅州鄭賢生于綿城學于童土講論性理交遊京宇丙子金侵南

漢扈  轝丁丑和成揮淚上書節節忠肝烈烈義膽遭內外艱侍廬各三築室

竹林題扁南隱不書淸號子孫遺文遺祠瑞北今以顯薦神其感應來依酒膳

常享祝文
伯元二圖忠義之烈兩堂六廬孝誠之節

南郭隱公奉安文
(남곽은공봉안문)

[역문]
南郭隱士(남곽은사)는 나주정씨의 賢士(현사)로다. 綿城(면성)에서 生(생)하시사 童土尹先生(동토윤선생)에게서 受業(수업)하시어 性理學(성리학)을 論(논)하시고 京師(경사)에 交遊(교유)하셨으며 丙子胡亂(병자호란)에는 金(김)이라 稱(칭)하고 侵犯(침범)해오니 南漢山城(남한산성)에서 大賀(대하)를 扈從(호종)하시고 丁丑(정축)에 和議(화의)가 成立(성립)되니 눈물을 뿌리고 朝廷(조정)에 上書(상서)하셨으되 마디마디 忠肝(충간)이요. 烈烈(열열)한 義膽(의첨)이었도다.

父母喪(부모상)을 當(당)하시사 各三年(각3년)을 侍墓(시묘)하시고 竹林(죽림)사이에 導堂(도당)을 지어 郭隱齋(곽은재)라 扁(편)하시고 起居(기거)하시며 淸(청)의 號(호)를 쓰시지 아니하시고 子與孫(자여손)에게도 쓰지 말도록 遺訓(유훈)하셨도다. 이제 瑞石山(서석산) 北(북)녘에 祠宇(사우)를 세워 顯彰(현창)천양하오니 神道(신도)께서는 강림하시와 술과 祭需(제수)를 흠향하옵소서.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
伯夷(백이)의 採薇(채미)와 元亮(원량)의 粲菊(찬국)을 두 그림으로 忠烈(충열)을 나타내시고 兩堂(양당)의 侍墓(시묘)를 六年(6년)을 지내시사 孝誠(효성)의 大節(대절)을 傳(전) 하셨도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6卷 57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海隱公諱以夏派

  21世

고조(高祖)

諱以夏

증조(曾祖)

諱砥柱

조(祖)

諱凰壽

고(考)

諱紀

  

17世 諱時矯 시교

熙叔

 

南郭隱 남곽은

 

 

光海君 乙卯年 10月17日 1615

乙亥 9月24日 壽81 1695

 

南坡公奉安文

    諱曰鳳徵字曰鳴瑞號曰南坡姓曰鄭字貫于羅州巨閥簪纓 肅廟壬戌

生於綿城文靖月峯顯高著祖資品大潁素性勸重從學滄溪夙有文就  景

宗辛丑司馬中富從遊明霞敬庵友傳事親克孝斷指侍墓戊申逆變泮中倡

槐死守   聖廟竟斬賊魁除職錄勳固辭退區築壇呼嵩琴酒自娛所著文蔚

聖學禮仗行世于重敎後以仰今以建祠躋蹌津韸庶幾鑑格歆享無窮

常享祝文
孝根天性字得正脉芹宮扶節有光縫掖

南坡公奉安文
(남파공봉안문)

[역문]
諱(휘)는 鳳徵(봉징)이요. 字(자)는 鳴瑞(명서)며 號(호)는 南坡(남파)요. 姓(성)은 鄭氏(정씨)니 貫鄕(관향)은 羅州(나주)로 벼슬이 끊이지 않은 巨閥(거벌)집안이시다. 肅宗壬戌(숙종임술)에 綿城(면성)에서 生(생)하시니 顯祖(현조)는 文靖公(문정공)이요. 月峯公(월봉공)이 나타난 할아버지다. 資品(자품)이 大熲(대경)하시고 素性(소성)이 勤重(근중)하시어 滄溪林先生(창계임선생)에게서 受業(수업)하시고 일찍이 文(문)을 大成(대성)하여 景宗辛丑(경종신축)에 司馬(사마)에 合格(합격)하시고 明齋公(명재공)과 霞谷公(하곡공)을 쫓았으며 敬庵公尹先生(경암공윤선생)과 벗과 스승으로 交遊(교유)하셨으며 事親(사친)에 克孝(극효)하시다. 斷指(단지)하시고 侍墓(시묘)를 하셨도다.

戊申逆變(무신역변)에 成均館(성균관)에서 倡義(창의)하시고 聖廟(성묘)를 死守(사수)하셨으며 마침내 賊槐(적괴)를 배이고 錄勳(록훈)되시고 除職(제직)하셨으나 固辭(고사)하시고 歸鄕(귀향)하시어 感恩(감은)의 詩(시) 한수를 지어 壇(단)을 쌓고 높이 읊으셨으되 거문고와 술로 스스로를 즐기고 지내면서도 文蹟(문적)을 저술하시어 禮學(예학)이 行干世(행우세)하여 敎後(후학)에 欽仰(흠앙)을 받으셨도다. 이제 祠堂(사당)을 지어 躋蹌律韸(제창율봉)하오니 神道(신도)께서는 降臨(강림)하시사 法度(법도)를 보시고 무궁토록 흠향하옵소서.

常享祝文
(상향축문)
[역문]
孝道(효도)를 根本(근본)으로 하시고 배우시기를 正通(정통)으로 하셨으며 成均館(성균관)을 지키시는데 큰 功(공)이 있으셨도다.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6卷 59    계보보기

4대파

指諭公諱億派

 

중조(中祖)

棄齋公諱薰

 파계(派系)

海隱公諱以夏派

  21世

고조(高祖)

諱凰壽(황수)

증조(曾祖)

諱紀(기)

조(祖)

諱時矯(시교)

고(考)

諱世周(세주)

  

19世 諱鳳徵( 봉징)

鳴瑞

 

南坡 남파

 

 

肅宗壬戌生 1682

癸丑正月六日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