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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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三編 先世遺蹟
雪齋書院

 

 

 

雪齋書院廟庭碑
(설재서원묘정비)

[역문]雪齋書院(설재서원)은 卽(즉) 雪齋鄭先生(설재정선생) 妥靈(타령)의 場所(장소)로 三不義軒鄭公(삼불의헌정공)과 巖軒申公(암헌신공)과 永慕亭鄭公(영모정정공)과 黙齋鄭公(묵재정공)과 逸軒鄭公(일헌정공)과 滄洲鄭公(창주정공)과 慶源府使鄭公(경원부사정공)과 竹友堂鄭公(죽우당정공) 八賢(팔현)이 配享(배향)되었다.

생각 건대 雪齋先生(설재선생)의 諱(휘)는 可臣(가신)이니 羅州人(나주인)이다.

高麗 忠烈王 丁丑年(고려 충렬왕 정축년 1277)에 寶文閣待制(보문각대제)에 任命(임명)되었고 錦城山神(금성산신)이 巫堂(무당)에게 나타남에 先生(선생)이 上奏(상주)하여 定寧公(정녕공)을 錦城山神(금성산신)에 封(봉)하였고 諸道別監(제도별감)이 모두 上供(상공)을 憑藉(빙자)하여 百姓(백성)에게 楮皮幣脯果夕表紙(저피폐포과석표지) 같은 物件(물건)을 거두어 先生(선생)께서 모두 罪(죄)로 다스릴 것을 請(청)하였고

庚寅年(경인년 1290)에 日本(일본)이 侵犯(침범)하니 王(왕)이 討伐(토벌)을 命(명)하고 儒士(유사)를 從軍(종군)케 하니 先生(선생)께서 上國(상국)의 法(법)을 들어 罷(파)하게 하였고 당시 天變(천변)이 있어 道塲(도장)을 設置(설치)하여 빌기를 請(청)한 者(자)가 있었는데 先生(선생)께서 非理(비리)를 極言(극언)하여 그치게 하였으며 經筳(경연)에 매양 涅槃經(열반경)을 請(청)하다가 先生(선생)이 들어오면 王(왕)이 거두게 하였으며 先生(선생)께서 箕子廟(기자묘)를 西京(서경)에 建立(건립)하여 正學(정학)의 淵源(연원)을 열게 하였으며

甲申年(갑신년 1284)에 世子(세자)가 元(원) 나라에 감에 先生(선생)이 世子(세자)의 스승으로 從行(종행)하여 元帝(원제)를 보게 되자 先生(선생)의 辯論(변론)이 極(극)히 明暢(명창)하니 元帝(원제)가 火悅(화열)하여 翰林學士(한림학사)를 除授(제수)하였고 元帝摩訶本國(원제마가본국)에서 바친 駱駝鳥(낙타조)의 알을 보고 先生(선생)께 賦詩(부시)하기를 命(명)하니

詩(시)에 이르기를 알 크기가 큰 독 같은데 가운데 不老春(불로춘)을 감추었네. 願(원)컨데 千歲壽(천세주)를 잡아 醺醺(훈훈)함에 海東人(해동인)에 미치소서 하였으니 元帝(원제)가 歎賞(탄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元帝(원제)가 일찍이 遼東(요동)이 水程圖(수정도)를 보고 水驛(수역)을 두자고 함에 先生(선생)께서 그 不便(불편)을 말하니 元帝(원제)가 그렇다고 하였다. 先生(선생)의 思鄕詩(사향시)가 있으니 이르기를 「海東(해동) 南(남)쪽에 錦城山(금성산)이 있으니 山下(산하)에 나의 집 草家數間(초가수간)이네. 巷柳(항유)와 園桃(원도)를 친히 손수 심었는데 봄이 오면 응당 主人(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르리」하였으니

元帝(원제)가 그 뜻을 알고 金鞍(금안)과 白馬(백마)와 金帶(금대)를 下賜(하사)하여 보냈으며 돌아와서는 崔伸紹(최신소)가 世子(세자)의 命令(명령)으로 公主(공주)의 큰 집을 지음에 때가 바야흐로 크게 추운데 일을 독촉함이 몹시 急(급)하여 백성이 많이 괴로워한지라 先生(선생)께서 世子(세자)에게 말하여 머물게 하였다.

先生(선생)이 政堂(정당)에 있으면서 가만이 典故(전고)를 읽혀 千秋金鏡錄(천추금경록)을 撰述(찬술)하였다. 先生(선생)이 金文肅公 周鼎(김문숙공 주정)과 우리 先祖(선조) 文顯公珤(문현공보)로 더불어 一代(일대)의 三賢(삼현)이 되어 한 堂(당)에 모여 道義(도의)를 講(강)하니 時人(시인)이 三賢堂(삼현당)이라 일컬었다.

戊戌年(무술년 1298)에 壁上三韓三重大匡(벽상삼한삼중대광) 修文殿太學士(수문전태학사) 監修國史(감수국사) 參知光政院事(참지광정원사)에 陞進(승진)되었으며 文靖(문정)이다. 贈諡(증시)하였고 忠宣廟(충선묘)에 配享(배향)되었고

三不義軒公(삼불의헌공)은 諱(휘)가 初(초)니 雪齋先生(설재선생) 曾孫(증손)이니 원님이 되었을 때 山神(산신)이 밤에 와서 公(공)의 器量(기량)의 큼을 試驗(시험)하였으며 특별히 薦擧(천학)되어 濟州牧使(제주목사)가 되니 큰 들을 墾拓(간척)하였으며 大泉(대천)을 빌어 얻으니 이른바 鄭坪(정평)과 鄭泉(정천)이 이것이다. 戶曹判書(호조판서)에 陞進(승진)되었고 얼마 안 되어 田廬(전려)에 물러나 義理(의리)를 講論(강론)하고 後學(후학)을 獎進(장진)하였으며

巖軒公(암헌공)의 諱(휘)는 檣(장)이니 高靈人(고령인)이다. 文章(문장)에 能(능)하고 筆法(필법)이 善(선)하여 淸要(청요)로 널리 알려졌으며 오래도록 文衡(문형)을 맡았으며 世宗(세종)께서 公(공)에게 箕子碑文(기자비문)을 쓰라 命(명)하였고 임금이 卞季良(변계량)에게 묻기를 卿(경)이 이어 文衡(문형)을 맡을 者(자) 누군 고하니 季良(계량)이 公(공)이라고 對答(대답)하였다. 公(공)이 工曹參判(공조참판)으로 王命(왕명)에 依(의)하여 南山曲(남산곡)을 지어 바쳤고 또 文武樂章(문무악장)을 지어 太祖(태조)의 功德(공덕)을 歌詠(가영)하였다.

永慕亭公(영모정공)의 諱(휘)는 軾(식)이니 雪齋先生(설재선생)의 五世孫(5세손)이다. 經史(경사)를 博涉(박섭)하여 義理(의리)를 深頣(심신)하였으며 二親(이친)에게 極孝(극효)하였고 喪(상)을 만나 墓(묘)에 廬墓(려묘)를 쳤으며 寶城郡守(보성군수) 四年(4년)에 儒風(유풍)이 大作(대작)하였고 또 大司憲 判漢城尹兵曹判書(대사헌 판한성윤병조판서)로서 條法(조법)을 嚴守(엄수)하여 宿弊(숙폐)를 革去(혁거)하니 朝廷(조정)에서 長德偉人(장덕위인)으로 稱(칭)하였으며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溫泉(온천)에 갔을 때 行宮(행궁)에 불이나니 公(공이)이 임금을 업고 나옴에 수염이 다 타버렸는데 임금이 畵工(화공)에게 命(명)하여 불을 무릅쓴 肖像(초상)을 그리게 하여 永世不朽(영세불후)의 功蹟(공적)을 表(표)하였고 景武(경무)라고 贈諡(증시)하였다.

黙齋公(묵재공)의 諱(휘)는 訥(눌)이니 永慕亭公(영모정공)의 玄孫(현손)이다. 孝悌篤實(효제독실)하고 學文(학문)이 淹博(엄박)하여 오랫동안 羅州訓長(나주훈장)을 하여 많은 英才(영재)를 育成(육성)하였고 그 父親(부친)이 孝道(효도)로 世上(세상)을 울리고 公(공)이 이어 받으니 이 애비의 이 아들이 있다고 稱(칭)하였으며 또한 그 두 동생과 같이 世上(세상)에 이름을 가지런히 하니 難兄難弟(난형난제)의 名譽(명예)가 있다.

逸軒公(일헌공)의 諱(휘)는 諶(심)이니 黙齋公(묵재공)의 동생이다. 文科(문과)로 戶曹吏曹兩曹正郞(호조이조양조정랑)에 任命(임명)되었고 錦江上(금강상)에 一亭(일정)을 얽어 날마다 經義(경의)를 講(강)하여 後進(후진)을 獎勵(장려)하였으며 壬辰亂(임진난)에 朴懷齋(박회재) 倡義檄文(창의격문)을 보고 근심하고 담담함에 慷慨(강개)하여 곧 金文烈公幕下(김문열막하)로 달려가 피를 마시고 하늘에 맹서하였으며

滄洲公(창주공)의 諱(휘)는 詳(상)이니 逸軒公(일헌공)의 동생이다. 文科(문과)로 戶曹正郞(호조정랑)과 여러 고을 縣監(현감)을 歷任(역임)하여 治積(치적)이 있었으며 庚寅年(경인년)에 抗訴(항소)하여 五賢(오현)의 거짓을 辨(변) 하였으며 드디어 江湖(강호)에 자취를 감추어 後學(후학)을 獎勵(장려)하는 것을 나의 任務(임무)로 삼았으며 壬辰亂(임진난)에 병을 이끌고 李忠武(이충무) 崔兵便(최병편) 幕下(막하)에 周旋(주선)하여 方略(방략)을 贊畵(찬화)하였고 또 梁大撲(양대박)과 檄文(격문) 發(발)할 것을 圖謀(도모)하였으나 병이 심하여 아들 如麟(여린)을 命(명)하여 忠武(충무)의 幕下(막하)에 달려가게 하였다.

慶源府使公(경원부사공)의 諱(휘)는 如麟(여린)이니 滄洲公(창주공)의 아들이라 壬辰倭亂(임진왜란)에 父親(부친)의 命令(명령)으로 郭再祐紅衣將軍(곽재우홍의장군)을 따라 鼎津(정진)에서 功(공)을 세웠고 李忠武(이충무)를 따라 閑山(한산) 싸움에 得捷(득첩)하였고 丁酉在亂(정유재란)에 火旺城(화왕성)을 지키면서 섶을 쌓아 불을 놓고 죽음으로 여러 사람과 맹서하였으며 戊戌年(무술년)에 體察使(체찰사) 張晩(장면)과 같이 釜山(부산)의 功(공)을 이루었으며 昏朝奸臣(혼조간신)인 大君(대군)을 請誅(청주)함에 公(공)이 上疏(상소)하여 大義(대의)를 붙들었으며 甲子年(갑자년)의 李适亂(이괄난)에 임금의 命(명)을 받들어 漢江(한강)을 지켰으며 乙丑(을축)의 變(변)에 글을 보내 毛文龍(모문룡)을 承出(승출)하였으며 丁卯(정묘)의 亂(난)에 군사를 거느리고 擊破(격파)하였으며 丙子年(병자년)에는 年老(년노)하여 아들 濈(즙)과 潑(발)을 命(명)하여 家儲(가저)를 기울려 軍糧(군량)을 도왔고

竹友堂公(죽우당공)의 諱(휘)는 瀾(란)이니 逸軒公(일헌공)의 孫子(손자)다. 鄭松江(정송강)에게 배워 性理學(성리학)에 밝았으며 丙子年(병자년)에 南漢山城(남한산성)이 抱園(포원)되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눈물을 뿌리고 일어나니 從叔府使公(종숙부사공)이 忠義(충의)로서 힘쓰게 하고 甲冑(갑주)를 주니 그 날로 軍士 數百名(군사수백명)을 引率(인솔)하고 淸州(청주)에 行到(행도)하니 和議(화의)가 成立(성립)함을 듣고 痛哭(통곡)하여 돌아왔다. 이는 모두 先生(선생)과 八賢(팔현)의 行蹟(행적)이니 글이 國史(국사)와 家乘(가승)에 실려 있다.

肅宗癸酉年(숙종 계유년 1693)에 書院(서원)을 金鞍洞(금안동)에 建立(건립)하고 雪齋先生(설재선생)을 主享(주향)으로 하고 永慕亭公(영모정공)을 配享(배향)하여 校理沈錫英(교리심석영)이 祠宇碑銘(사우비명)을 贊(찬)한바 있으며 그 후에 書院(서원)을 永安村(영안촌)에 移建(이건)하였고 또 차례로 七賢(7현)을 追配(추배)하였으니 碑(비) 또한 글을 고침이 마땅하다.

바야흐로 廟庭碑(묘정비)를 꾀하는데 滄洲公(창주공) 後孫(후손) 遇焱(우염)이 巨金(거금)을 獨擔(독담)하고 또한 不佞(불녕)에게 徵文(징문)케 하니 義理上(의리상) 辭讓(사양)하기 어려움이 있어 참랑함을 잊고 이 글을 쓰며 이어서 銘(명)하노니 猗(의)하도다. 先生(선생)이여 麗朝(려조)의 賢哲(현철)로 氣像(기상)이 壁立(벽립)하며 精神(정신)이 玉潔(옥결)하고 文辭(문사)가 浩瀚(호한)하고 學識(학식)이 淹博(엄박)이라 일찍이 政丞(정승)에 올라 임금의 총애 극진했네. 忠誠(충성)을 다하고 知慧(지혜)를 다해 黼(보)가 되며 黻(불)이 되었네. 世子(세자)를 侍從(시종)하여 元國(원국)에 어느 날에 들어 갔든고 辯論(변론)을 물 흐르듯 하니 元帝(원제)가 크게 기뻐했네. 德澤(덕택)을 東方(동방)에 입혔고 名聲(명성)은 中國(중국)에 넘쳤네. 누가 사모하지 않으리오. 羅州(나주)사람 더욱 독실했네.

一院(일원)이 重建(중건)되니 溪山(계산)이 빛을 더했네. 先生(선생)은 主享(주향)이요 八賢(팔현)은 곁에 나란히 했네. 여기에 章甫가 오고 黍稷(서직)이 향기롭네. 千百年(천백년)이 되도록 風韻(풍운)을 가히 움켜쥐리라.

                                                                              後學坡平 尹丁鍑謹撰
                                                                                                       (경연시독관 침영석 찬)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1卷1∼7   계보보기

 

 

 

高靈申氏

 

고조(高祖)

松壽

諱佶

諱軾

諱軾

諱軾

諱承賢

諱觀

증조(曾祖)

始祖諱諧

諱可臣

思敬

諱文振

諱承賢

諱承賢

諱承賢

諱觀

念祖

조(祖)

諱宗産

諱佶

典儀判書諱德隣

諱有

諱觀

諱觀

諱觀

念祖

諱諶

고(考)

諱松壽

文振

工曹參議諱包翅

諱自新

諱孝祖

諱念祖

諱念祖

諱詳

諱如漢

  

4世諱可臣

7世諱初

申檣

9世諱軾

13世諱訥

13世諱諶

13世諱詳

14世諱如麟

15世諱瀾

獻之

 

濟夫

憑甫又字敬瞻

敬汝

仲實

仲愼

景厚

揚彦

雪齋又曰無慍堂

三不義軒

巖軒

永慕亭

默齋

逸軒

滄洲

山亭

竹友堂

諡號

文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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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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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高宗11
1224年甲申

忠穆2 乙酉
1345

禑王8
1382

太宗7丁亥
1407

燕山10甲子
1504年7月9日

中宗庚辰生1520

中宗28癸巳
1533

明宗19甲子
1564

宣祖16癸未
1582

忠烈王24戊戌
1298年6月4日

世宗5癸卯
1423

世宗15
1433

世祖12丁亥
1467

明宗3戊申
1548年3月13日

宣祖壬寅
1602年4月24日

宣祖己酉
1609年6月4日

仁祖庚辰
1640年4月1日

孝宗丙申
1656年6月6日

<記>黼黻(보불):(역사)임금이 예복으로 입던 하의(下衣)인 곤상(袞裳)에 놓은, 도끼와 '亞'자 모양의 수   ... 문정공24세손 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