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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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二編 屢經大同譜

 

 

 

舊譜序(癸酉譜 1873年)(구보서 계유보 1873年)

舊譜書(癸酉譜)

譜史體也周官小史掌邦國之志尊繁世辨昭穆漢有功臣世家年表在太史氏唐初命撰二百九十三姓一千六百五十一家氏族志藏內府譜之興昉于是我東重氏閥凡大家世族之爵謚勳號名節事業之表表可述者載在國乘傳永久而垂不朽雖不譜亦可顧世代遠生齒滋或中玘而微或析而散處一家史于以尊祖而敬宗于以敦親而厚倫于以合親疏遠近外內戚屬而一之俾知萬殊而本於一寔厚俗也羅州之鄭南中望族也在勝國忠烈王時有諱可臣官中贊諡文靖德業文章蔚爲儒宗學者稱雪齋先生嗣是而三不義軒永慕亭思禮堂之儁望高行默軒逸軒滄洲慶源公之淸名偉績具載於邑志家狀及龍蛇日錄皆可徵也舊有譜成於肅廟乙酉世德派系凡例體裁本孫珪氏若進士彦復氏道啓氏序若跋盡之矣今距乙酉百六十餘年而再刊篤工旣竣鄭氏諸宗以佐模爲雪齋外裔俾康赫振活甫走七百里徵弁卷之文盖我先祖巖軒公寔委禽於 雪齋之門而我文忠公其宅相也嘗閱巖軒行狀曰所居金鞍洞有古槐樹乃雪齋先生講學之所雪齋從世子如元及還帝

賜金鞍白馬洞之名以是也巖軒贅居于是今其遺址尙在文忠公遺集有寄贈鄭監司兄幾首輓鄭判書兄二首監司判書皆指景武公而於文忠公爲中表兄弟也想當時姻親戚好之誼便同一室而今於幾百年之後佐以外裔託名於是譜豈偶然也哉遂不辭書以歸之佐因是而竊有一言仰復者鄭氏近雖衰替甚無冠冕之立於朝者而聞諸鄭之見居若羅若和若靈若咸若務者其麗甚繁于皆敦行孝悌業文攻儒恂恂然多君子人安知不雪齋之碩德弘祚流耀于後人裒然爲湖南八家之首乎異日掌學政而登賢能者書曰雪齋之後孫某則爲外裔者亦豈不與有光榮矣乎佐方引領而俟之

外裔嘉善大夫前行吏曹參判兼同知 經筵春秋館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揔管 靈川 申佐模 謹序

[역문]족보는 史記體(사기체)다.

周官(주관)에 小史(소사)벼슬이 國家(국가)의 記錄(기록)을 맡아 世系(세계)를 整理(정리)하고 昭穆(소목)을 分別(분별)하니, 漢(한)나라에 功臣世家(공신세가)의 年表(년표)가 史記(사기)에 실려 있고 唐初(당초)에 二百九十三姓一六五一家(293성 165일가)의 氏族(씨족)을 뽑아 기록하여 內府(내부)에 소장하라고 命(명)하니 족보가 있게 된 것이 이때에 비롯되었다.

우리나라도 氏閥(씨벌)을 重(중)히 여겨 무릇 大家世族(대가세족)의 爵諡(작시)며 勳號(훈호)며 名節(명절)이며 事業(사업)이 특히 나타나 가히 기록할만한 것을 國史(국사)에 실어 永久(영구)히 傳(전)하여 남겨 不朽(불후)케 하니 비록 족보가 아니더라도 또한 가히 돌아보나 世代(세대)가 멀어지고 子孫(자손)들이 불어나 혹 중간에 무너져 미약해지고 혹 쪼개여 흩어져 살면 一姓(일성)의 親함이로되 갑자기 만나면 路人(로인)과 같은지라 이점으로 족보를 가히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姓(성)마다 各各(각각)족보가 있어 만들어 家史(가사)를 삼으니 이에 祖上(조상)을 높이고 宗家(종가)를 공경하며 이에 親(친)한 이를 두텁게 하고 倫常(윤상)을 두텁게 하며 이에 親疏(친소)와 遠近(원근)과 內外戚(내외척)의 부치를 合(합)하여 하나로 하여 하여금 萬(만)가지나 다르되 하나에 근본함을 알게 하니 진실로 風俗(풍속)을 두텁게 한 것이다.

羅州鄭氏(나주정씨)는 南中(남중)의 望族(망족)이다. 高麗(고려) 忠烈王(충렬왕) 時(시)에 諱(휘) 可臣(가신)이 있으니 官(관)은 中贊(중찬)이오 諡號(시호)는 文靖(문정)이니 德業(덕업)과 文章(문장)이 蔚然(울연)하여 儒宗(유종)이 되니 學者(학자)들이 雪齋先生(설재선생)이라 일컬었고 이를 이어 三不義軒(삼불의헌)과 永慕亭(영모정)과 思禮堂(사례당)의 寯望高行(준망고행)과 黙軒(묵헌)과 逸軒(일헌)과 滄洲(창주)와 淸名偉蹟(청명위적)이 邑志(읍지)와 家狀(가장)이며 龍蛇日錄(용사일록)에 다같이 실려있다.

모두 고증이 된다.

舊譜(구보)를 肅宗乙酉年(숙종 을유년 31年 西紀1705)에 作成(작성)하니 世德(세덕)과 派系(파계)와 凡例(범례)는 本孫(본손) 珪(규 )氏(씨)가 만들었고 進士(진사) 彦復(언복) 氏(씨)와 道啓(도계) 氏(씨)같은 분은 序文(서문)과 跋文(발문)을 쓰셨다.

지금으로부터 乙酉年(을유년)까지는 百六十餘年(백육십여년)이로되 再刊(재간)하여 完成(완성)되니 鄭氏(정씨)의 諸宗(제종)이 佐模(좌모)가 雪齋(설재)의 外孫(외손)이라 하여 康赫(강혁)과 振浩(진호)氏(씨)로 하여금 七百里(칠백리) 길을 달려와 序文(서문)을 請(청)하니 대개 우리 先祖(선조) 巖軒公(암헌공)이 雪齋(설재)의 家門(가문)에 장가 드니 우리 文忠公(문충공)은 그의 甥姪(생질)이다.

일찍 巖軒公(암헌공) 行狀(행장)을 閱覽(열람)하니 이르기를 살고 있는 金鞍洞(금안동)에 오래된 괴목 나무가 있으니 이는 雪齋先生(설재선생)이 講學(강학)한 곳이다 하고 雪齋(설재)가 世子(세자)를 陪行(배행)하여 元(원)에 갔다가 돌아옴에 元帝(원제)가 金鞍(금안)과 白馬(백마)를 下賜(하사)하니 洞(동)의 이름이 이 때문이다.

巖軒(암헌)이 데릴사위로 이곳에서 살았으니 지금도 그 遺址(유지)가 아직도 있고 文忠公遺集(문충공유집) 에 鄭監司(정감사) 兄(형)에게 寄贈(기증)한다는 몇 首(수)와 鄭判書(정판서) 兄(형)을 輓(만)한다는 二首(2수)와 詩(시)가 있으니 監司(감사)와 判書(판서)는 모두 景武公(경무공)을 지적한 것이니 文忠公(문충공)에게는 內從兄弟(내종형제)가 된다.

當時(당시)에 상상해 볼 때 姻親戚好(인친척호)의 정의가 문득 한방과 같았고 지금 몇 百年(백년) 뒤에 佐模(좌모)가 外裔(외예)로써 이 족보에 이름을 남기니 어찌 우연 이리오. 드디어 사양치 않고 써서 돌여보내고 佐模(좌모) 이로 因(인)하여 가만히 한 말씀 우러러 아뢸 것이 있으니 鄭氏(정씨)가 近世(근세)에 비록 衰替(쇠체)하여 벼슬로 朝廷(조정)에 계신 분이 없으나 듣건데 여러 鄭氏(정씨)가 和順(화순)이며 咸平(함평)이며 務安(무안)같은데 산 것을 보니 그 수효가 심히 번창하였고 또 모두 孝悌(효제)를 敦行(돈행)하여 儒業(유업)을 닦으니 抱抱然(포포연)하여 君子人(군자인)이 많으니 어찌 雪齋(설재)의 碩德(석덕)과 後孫(후손)에게 流耀(유요)하여 裒然(부연)히 湖南八家(호남팔가)의 으뜸이 아님을 알리오.

다른 날 學政(학정)을 맡아 賢能(현능)에 오른자 쓰기를 雪齋(설재)의 後孫(후손) 아무게라고 한즉 外裔(외예)된자 어찌 더불어 光榮(광영)함이 있지 않으리오. 佐模(좌모) 바야흐로 옷길을 여미고 기다리노라.

                                           外裔吏曹參判 申佐模謹序
                                                                         외예이조참판 신좌모 근서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譜 :   卷  

 

 

 

  파계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고(考)

 

 世 諱 申佐模

本貫 德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