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GO BACK

 

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慶源公行狀
(경원공행장)

[역문]公(공)의 諱(휘)는 如麟(여린)이요 字(자)는 景厚(경후)니 景武公(경무공)의 五代孫(5대손)이요 滄洲公(창주공)의 第二子(제이자)로 明宗(명종) 十九年(19년) 甲子(갑자 1564) 二月(이월) 二十九日生(29일생)이니 어려서부터 穎悟夙成(영오숙성)하여 膽力(담력)이 있고 뜻이 巨人(거인)과 같으니 보는 이들이 奇昱(기욱)하게 여겼다. 旣長(기장)에 文學(문학)하는 家庭(가정)으로서 武事(무사)를 兼(겸)하였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을 當(당)하여 父命(부명)으로 忘憂堂(망우당) 郭公(곽공)의 幕下(막하)에 달려가 鼎津(정진)의 功(공)이 있었으며 이해 六月(6월)에 軍需物資(군수물자)를 싣고 閑山島(한산도) 李忠武(이충무)에게 달려가니 李公(이공)의 答書(답서)에 ①疾風勁草(질풍경초)란 말이 있었고 方略(방략)을 贊助(찬조)하여 여러번 싸워 勝利(승리)하였으며 骨浦(골포)의 싸움에 李公(이공)이 밤중에 일어나 夢事(몽사)를 이야기 하되 三人(삼인)을 水中(수중)에 委擲(위척)하니 이 무슨 증조인가 하니 公(공)이 對答(대답)하기를 委(위)는 倭人(왜인)이오 必勝(필승)의 증조라 하였는데 果然(과연) 다음날에 연달아 賊三人(적삼인)을 쏘아 죽이고 드디어 大捷(대첩)하였다.

宣祖(선조) 甲午(갑오 1594)年(년)에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였고 忠勇將(충용장) 金公(김공)이 蔚山(울산)에 布陣(포진)하고 있을 때 ②譖說殄行(참설진행)하여 머뭇거리며 進軍(진군)하지 아니하니 朝廷(조정)에서 公(공)에게 살피라고 命(명)하니 金將軍(김장군)이 公(공)의 風儀(풍의)가 魁偉(괴위)함을 보고 말하기를 盡忠輔國(진충보국)이러니 도리어 남의 참소 한바가 되었다 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慷慨(강개)하거늘 公(공)이 칼을 만지며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옛사람에 功(공)을 세워 贖罪(속죄)한 이가 있으니 이제 마땅히 大功(대공)을 세워 참소를 당한 원통함을 풀 것이니 만약 朝廷(조정)의 命令(명령)을 어기면 내가 將軍(장군)의 머리를 벨리라 하니 金公(김공)이 놀래고 두려워하여 엎드려 사과하고 인하여 方略(방략)을 묻고 敵(적)의 虛實(허실)을 살피라고 命令(명령)하였는데 숨었던 賊(적)이 뛰어나오니 말이 놀래어 구덩이에 떨어지니 賊(적)의 칼날이 어지러이 나려친지라 公(공)이 몸을 떨쳐 賊(적)의 酋長(추장)을 죽이고 賊(적)을 몰아 물리쳐 大破(대파)하였으며

丁酉年(정유년 1597) 再亂(재란)에 郭(곽) 紅衣將軍(홍의장군)이 昌寧(창녕)에 布陣(포진)하였는데 公(공)이 梧里李公(오리이공)과 花山權公(화산권공)과 西崖柳公(서애유공)을 隨行(수행)하여 火旺城(화왕성)을 지킬때에 淸正(청정)의 包圍(포위)한 바가 되어 성을 쌓여 불을 놓고 同死(동사)하기를 맹서하고 公(공)이 飛樓(비루)를 맺어 賊(적)을 살피던 중 流矢(유시)에 맞어 甲冑(갑주)를 뚫고 左肩(좌견)에 一寸(일촌)가량 길이 들어가니 醫員(의원)으로 하여금 뼈를 갉아 활촉을 빼내고 군사를 인솔하여 大破(대파)하였으며 唐津(당진)에 있을 때 賊船(적선) 백여雙(백여쌍)을 불사르니 원사(원사)가 勝報(승보)를 올린 글가운데 飛將軍(비장군)이 倭賊(왜적)을 ③直搗(직도)하였다는 말이 있으며 事實(사실)이 花旺(화왕) 同若錄(동태록)에 실려있다.

무술년(무술년1598)에 倭將(왜장) 行長(행장) 등이 中國將帥(중국장수) 楊鎬(양호)에게 敗(패)하여 順天(순천)으로 南下(남하)하니 平安兵使(평안병사) 李慶全(이경전)과 諸義兵(제의병)이 힘을 合(합)쳐 進擊(진격)하였고 十一月(십일월) 二十三日(이십삼일)에 泗川(사천)의 倭(왜)와 南海倭(남해왜)가 露梁(노량)에서 合戰(합전)할 때 統制使(통제사) 李公(이공)이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이때 軍情(군정)이 危懼(위구)하니 公(공)이 悲憤(비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땅을 그으며 左右(좌우)에게 말하기를 내 마땅히 挺身出戰(정신출전)하여 國恥(국치)를 씻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어찌 李公(이공)을 地下(지하)에서 뵈이리오 하였다.

公(공)이 慶尙水使(경상수사) 李雲龍(이운룡) 等(등) 十餘將師(십여장사)로 水陸竝進(수륙병진)하여 倭冠(왜관)을 大破(대파)하고 勝戰報(승전보)를 행재소(행재소)에 올리니 上(상)께서 御使(어사) 尹義立(윤의립)를 보내어 ④犒軍勞功(호군로공)하고 姓名(성명)을 圖書(도서)하여 不朽(불후)의 業蹟(업적)을 表(표)하고 銀冑(은주)와 金甲(금갑)과 馬上刀(마상도)를 特賜(특사)하니 事實(사실)이 釜山浦(부산포) 舟師犒軍圖(주사호군도)에 실려 있다.

漢陰李公(한음이공)이 入侍(입시)할 때 上(상)께서 가히 쓸 만한 사람을 물으니 對答(대답)하기를 湖南(호남)의 鄭如麟(정여린)입니다 하니 上(상)께서 어느 고을 사람이며 지금 무슨 벼슬에 있으며 나이는 또한 몇 살인가 하시니 對答(대답)하기를 羅州人(나주인)으로 나이는 지금 四十歲(사십세)며 여러곳의 守宰鎭將(수재진장)을 지냈으나 그러나 그 재주 여기에 그치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漢陰李公(한음이공)이 또 詩(시)를 지어 公(공)에게 주기를 『그대를 임금께 천거하니 防禦(방어)를 그대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라는 句節(구절)이 있으며 백사이공(백사이공)이 또한 詩(시)를 지어 公(공)에게 주기를 『人材(인재)얻은 元師(원사)를 축하하니 早晩間(조만간)에 큰 공을 세우리라』는 句節(구절)이 있다. 公(공)이 入侍(입시)할 때 수염을 거두어 옷깃속에 감추니 上(상)께서 그 까닭을 물으니 對答(대답)하기를 至尊(지존)의 앞에서 감히 散垂(산수)하오리까 하니 上(상)께서 命(명)하시되 흩어서 드리우라 하니 길이가 한자 남짓 된지라 上(상)께서 美鬚公(미수공)이라고 칭찬하였다.

癸丑年(계축년1613) 光海朝(광해조)때 廢母(폐모)의 議論(의론)이 일어났는데 永昌大君(영창대군)이 群臣(군신)들의 請誅(청주)하는 가운데 있었는데 公(공)이 兵使(병사) 郭再祐(곽재우)와 相議(상의)하여 上疏(상소)하니 그때 爾瞻(이첨)이 글로서 公(공)을 부르니 公(공)이 손으로 그 종이를 찢어버리고 칼을 만지면서 嘆息(탄식)하기를 어찌 丁好寬(정호관) 鄭造(정조)의 고기를 먹으랴 하였다. 己未年(기미년1619)에 深河(심하)싸움의 敗報(패보)가 이름에 都體察(도체찰) 張公(장공)이 關西(관서)에 出鎭(출진)함에 軍騎(군기)로 달려가 邊上(변상)에 이르니 그때 國兵(국병)이 新敗(신패)하여 軍情(군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昌城(창성)을 守禦(수어)할세 宋希立(송희립)과 鄭如麟(정여린)으로 管餉使(관향사)가 되어 힘을 합쳐 ⑤敵慨(적개)하니 邊情(변정)이 조금 안정되었다. 仁祖(인조) 甲子年(갑자년1624)에 賊臣(적신) 李适(이괄)이 關西(관서)에서 反(반)하니 張公(장공) 晩(만) 軍(군)을 平壤(평양)에 設陣(설진)하니 陳下所屬(진하소곡)이 數千(수천)에 不過(불과)한지라 南北(남북)의 監司(감사)와 兵使(병사)와 列邑守令(열읍수령)에게 傳令(전령)하고 또 글을 前府使(전부사) 鄭如麟(정여린)에게 보내니 公(공)이 글을 보고 바로 城(성)에 들어가 州倅李廷臣(주졸이정신)을 보고 明日(명일)로 發軍(발군)하여 赴亂(부란)하였다.

二月(이월) 初九日(초구일)에 右副承旨(우부승지)가 綸音(윤음)을 奉敎(봉교)하여 卽見(즉견) 羅州牧使(나주목사) 廷臣(정신)의 狀啓(장계)를 보니 이미 鄕(향)으로 將軍(장군)을 定(정)하여 鄕表(향표)와 같이 派送(파송)하니 表(표)에 일컫기를 李希建(이희건) 등으로 協力嚴守(협력엄수)한즉 賊鋒(적봉)이 어찌 능히 任意(임의)로 衝突(충돌)하리오 卿(경)은 그 賊路(적로)를 막아 서로 기미를 보아 進退(진퇴)하고 萬分嚴守(만분엄수)하라는 일로 奉敎(봉교)하니 그때 适(괄)이 關西(관서)로부터 바로 서울을 犯(범)하니 上(상)께서 公州(공주)로 行幸(행행)하고 公(공)이 군사 二千(이천)을 점고하여 바로 行在所(행재소)에 拜謁(배알)하니 上(상)께서 손을 쥐고 大奇(대기)하시며 이르기를 湖南(호남) 五十州(오십주)에 홀로 鄭如麟(정여린) 하나뿐이냐 하시고 江漢(강한)을 지켜 備禦(비어)할 對策(대책)을 두라 命(명)하시였다.

大駕(대가)가 還宮(환궁)하여 鳩杖(구장)과 金帶(금대)를 賞賜(상사)하시고 인하여 贈秩(증질)하되 鍾城(종성) 都護府使(도호부사)에 特命(특명)하였다.

乙丑年(을축년) 여름에 邊臣(변신)이 글을 올리되 毛文龍(모문룡)이 우리의 使臣(사신)을 죽이고 인하여 군사로 우리나라를 습격한다는 말이 전해지자 온 조정이 두려워하였다. 이 때 漢陰李公(한음이공)이 公(공)을 보내며 허실을 알아 보라하였다. 公(공)이 말을 달려 毛文龍(모문룡)에게 가니 毛文龍(모문룡)은 그 軍官(군관) 張得功(장득공) 黃大淸(황대청) 등 十餘人(십여인)으로 하여금 글로써 보이기를 우리 皇朝(황조)의 大都督軍(대도독군)이 적고 먹을 것이 다해서 섬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나가 싸우지를 못하고 날로 너희나라의 후원을 바라고 있는데 끝내 개미새끼 하나도 이르지 않고 앉아서 바라만보고 있으니 어인 일이요? 또 듣건데 너희 나라가 遙東(요동)의 적과 사사로이 通(통)하여 皇朝(황조)의 옛 은혜를 잊고 있으니 어찌 참으리오 하였다. 이에 公(공)이 答書(답서)로서 성난 毛文龍(모문룡)을 물리쳤다.

仁祖(인조) 五年(오년) 丁卯(정묘)에 姜弘立(강홍립)의 變(변)을 公(공)이 兵士(병사)를 거느리고 물리치니 仁祖(인조)께서 褒諭(포유)하기를 公(공)이 늙었으나 여러난리에 勝戰(승전)한 功(공)은 오랜 가뭄에 단비와 같다 하시고 特命(특명)을 다시 慶源都護府使(경원도호부사)에 任命(임명)하였다.

丙子亂(병자란)에는 公(공)이 年老(년로)하여 長子(장자) 濈(즙)과 潑(발)을 命(명)하여 쌀 四十八石(사십팔석)을 실어 軍糧(군량)을 돕게 하고 羅海鳳(나해봉) 等(등)으로 白馬津(백마진)을 지키게 하니 畸翁(기옹) 鄭弘溟(정홍명)이 그 忠義(충의)를 보고 稱歎(칭탄)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南漢講和(남한강화)의 소식을 듣고 北向痛哭(북향통곡)하였다.

公(공)의 性稟(성품)이 抗直(항직)하여 權貴(권귀)에 아첨하지 아니하여 쿠게 쓰이질 못했으나 壬辰年(임진년)으로 부터 甲子丁卯(갑자정묘)에 이르기까지 여러번 國亂(국란)에 부따라 賊(적)을 만나면 바람이 일어나고 백성 보기를 春和(춘화)같이 하여 그 몸을 잊고 임금을 救(구)한 忠誠(충성)이 하늘에서 타고났고 交遊(교유)한 분들을 當世(당세)의 賢豪(현호)들이니 事實(사실)이 忠勳府(충훈부) 勝戰碑(승전비)에 실려있다.

庚辰年(경진년) 四月(사월) 初一日(초일일)에 집에서 考終(고종)하니 享年(향년)이 七十七歲(칠십칠세)로 州(주) 西(서)쪽 白龍山(백룡산) 寅坐(인좌)에 葬(장)하였다.

純祖(순조) 四年(4년) 甲子(갑자 1804)에 忠武祠(충무사)에 配享(배향)하였고 癸巳(계사1953)에 士論(사론)이 齊起(제기)하여 雪齋書院(설재서원)에 配享(배향)되었다. 自沙李公恒福(자사이공항복)의 詩(시)가 있으니 이르기를 눈으로 처음에 公(공) 몸에 堂堂(당당)한 大丈夫(대장부)의 風彩(풍채)로다 뿔 같은 수염은 關雲將(관운장)과 같고 범 같은 머리는 司馬(삼)의와 똑 같네 뜻이 있어 하늘이 반드시 내려주니 근심 없이 나라가 장차 융성하리. 人材(인재)얻은 元師(원사)를 嘉禮(가례)하니 早晩間(조만간)에 大功(대공)을 이루리라하였고

漢陰李德馨詩(한음이덕형시)에 이르기를 그대를 임금에게 천거하니 防禦(방어)를 그대 아니면 누가 하리 烽火(봉화)는 北闕(북궐)에 연다르고 腥塵(성진)은 西(서)쪽에 드리워서 어둡네 임금에게 忠誠(충성)함에 自身(자신)을 잊고 社稷(사직)을 護衛(호위)함에 모로미 때에 미치네 나의 所望(소망)을 저버리지 마오 平生(평생)에 一片丹心(일편단심)을 알리라하였으며

觀察使(관찰사) 李時昉(이시방)의 詩(시)에 이르기를 塞外(새외)에 腥塵(성진)이 가득한데 城(성)모퉁이에서 손을 다시 나눈구나 빛나는 편지는 雁尺(안척)에 기대고 비단 같은 글은 龍門(용문)에서 나오네. ⑥玉樹(옥수)는 옷깃을 해쳐 對(대)하고 金聲(금성)은 땅에 던져 틀리네 戌樓(술루) 밝은 달밤에 서로 생각하며 부질없이 魂(혼)만을 읊는구나하였으며

兵使(병사) 金俊龍(김준룡)의 詩(시)에 이르기를萬百姓(만백성)이 모두 구렁을 메우니 이때가 어느땐고 임금의 뜻 저버릴까 싫어 사사로운 일 볼틈이 없네』하였고 牧使(목사) 구봉서(구봉서) 詩(시)에 이르기를『老將(노장)의 門前(문전)에 太守(태수)가 오니 巷柳(항유)와 園香(원향)이 누굴 위해 열렸는고 十年(십년)의 仙夢(선몽) 서로 얼굴만 생각 하였는데 한자리 華堂(화당)에 길이 술잔을 좋아하네 禮(예)를 갖춤에 도리어 城主(성주)란 말이 부끄럽고 情(정)을 論(론)함에 가히 故人(고인)이 온듯 풀어지네 巍勳(외훈)과 盛熱(성열)을 어디에서 물을건가 腥血(성혈)이 처음으로 마르니 寶劒(보검)을 빰에다 대네하였으며

逸軒公(일헌공) 詩(시)에 이르기를 너를 보내 轅門(원문)으로 가니 오늘 아침 風日(풍일)이 悲痛(비통)구나 머금은 근심은 絶城(절성)을 생각하고 참은 눈물은 天山(천산)을 바라보네 期會(기회) 응당 놀랍고 급하니 奔馳(분치)에 감히 물러나 한가하니 장수의 몸 이미 나라에 바쳤으며 위태로운 날이 너로 인해 편안하리라하였으며

松磵(송간) 洪千璟(홍천경)이 輓詩(만시0에 이르기를 公(공)이 계실때는 鞍洞村(안동촌)이 무겁더니 公(공)께서 돌아가니 錦城(금성)이 가볍구나 死生(사생)에 몸에 진빚 다갚으니 나라가 이제 太平(태평)하네하였으며

孤山(고산) 尹善道(윤선도)가 輓詩(만시)에 이르기를 손이 있되 權貴(권귀)의 글에 答(답)하지 아니했고 머리가 있으나 귀인의 집을 향하여 두드리지 아니했네 七十七歲(칠십칠세) 特立(특립)했는데 나라위한 柱石(주석) 棺(관)덮으니 끝났구나 公(공)께서 칼 이끌고 明主(명주)를 받드니 楚氣(초기)이 平定(평정)되어 天表(천표)를 求(구)했네 公(공)이 朝廷(조정)에서 간하여 殿陛(전폐)에 섰으니 ⑦四目(사목)은 수레의 휘장을 걷어 밝음을 기다리지 않았네 아! 한조각 죽지못한 마음 몸은 墓地(묘지)에 묻이어도 따르지를 않으리하였으며

李相國(이상국) 安訥(안눌)이 大旺山城(대왕산성)에다 쓰기를 화왕산(화왕산) 머리를 보지 않으련가 누가 東南(동남)을 방어한 功(공)을 알리오란 글귀가 있다. 公(공)의 實蹟(실적)이 日記(일기)에 昭在(소재)한고로 능히 다 뽑지 아니한다.

<註>

①疾風勁草(질풍경초):어려운 일에 부닥쳤을때 비로소 그 지조의 굳음을 알음

②譖說殄行(참설진행):거짓말을 꾸며서 참소하여 善人(선인)의 일을 傷絶(상절)함

③直搗(직도):바로 두드림 즉 바로 쳐부수고 추격하여 들어감

④犒軍勞功(호군로공):군사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功(공)을 위로함

⑤敵慨(적개):敵(적)과 싸우려고 하는 의기

⑥玉樹(옥수):훌륭하고 高潔(고결)하여 風采(풍채)있는 사람

⑦四目(사목):네개의 눈 널리 四方(사방)의 事物(사물)을 見聞(견문)하는것

⑧穎悟(영오):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함

⑨魁偉(괴위):체격이 크고 훌륭함

⑩飛樓(비루):적의 城中(성중)을 살피기 위하여 만든 높은 수레

嘉慶 己未 十月 縉紳右議政 金熹 謹撰 
定山縣監 李顯民
前司諫 高廷憲
가경 기미 십월  진신우의정 금희 근찬
정산현감 이현민
전사간 고정헌

 

아래와 같이 계보를 파악함

系  譜 : 2卷 707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중조(中祖)

諱 詳

 파계(派系)

慶源府使公諱如麟派

  21世

고조(高祖)

諱承賢

증조(曾祖)

諱觀

조(祖)

諱念祖

고(考)

諱詳

  

14世 諱如麟

景厚

 

山亭

 

 

明宗19甲子 1564

仁祖18庚辰 1640年 4月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