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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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伸辨五臣寃疏

伏以公論者萬古之棟樑而棟摧則是非不得其正而天理滅矣至寃者天下之冤痛而冤痛極則政令必失其和而民彛斁矣是故爲士者明公論是非之分危其言而不顧蹈禍機而無悔惟公論是扶爲君子察至危痛之情執其辭而辨惑處其地而垂恕至寃是釋然後物議定而人心順人心順而治道立矣嗚呼己丑逆賊之禍發於經侍之間則此天地古今之變推鞫之難非尋常嘯聚之徒黨結豹狼之比也李潑李浩俱以妙年登科名聲隆赫揚歷淸斑論思肅肅之筵天威咫尺浸涵穆 穆之光龍門之榮神仙之望置身於淸霄之幾何層而乃有求媚於逆首之門負 聖明九遷之思哉萬萬無是理也自朝家分朋之後各據東西一隅彼此相攻以賊有麤猛之才利於瓜牙之徒用結意氣之交而父爲全尹路出其門相逢則把孟遠離則飛書其方寸中胸謀秘計非凡見淺識所可臆探也老母穉子幷爲鯨鯢基妄交之罪咸謂曰可而其參逆 之律不已寃乎伏願殿下三思而留神焉柳夢井門蔭之末官名登薦流譽朝端累參言局頗觸時忌豈無傍人吹毛索瘢期欲一陷者手以賊欺世盜名加以博學之才蹄輸奔波惟恐或後其能毅然不屈而潔我高操耶寒暄數幅書只傳不遺之意包畜逆謀旣不得知之則安有同參之理也曺大中新進之下士年未强仕亞使南來應接之禮多失基宜沙汰之講暫有人言見忤於章甫之徒久矣適因討賊之疏構 無根之說爲賊流涕云者顚末無理矣撰疏梁萬頃挾撼欺罔之罪何可盡達於冕旒之下乎拷掠胼下肝膽崩摧臨刑將死精神爽越抱寃之懷著於詩句者實出於呼天至情寧有寃尤於君父之前乎國人皆以一死爲寃則與逆同謀云者寃中之寃而伏願殿下三思留神焉噫分而言之則雖有四臣之別合而言之則四臣同一寃也四臣罪名昭昭於地上四臣之冥魂耿耿於泉下至寃之積人心不和天道失寧十年間兵火之災妖怪之作安知不由於公論之壅蔽也當其時也上有放勳重華之欽恤下無臯陶呂侯之審克錙銖不辨玉石俱焚尺寸失度薰蕕混施外交內同之間差謬起於毫末形疑實非之際順逆雜而不分至今輿憤未嘗不痛恨於安獄之失其中也臣等俱以無狀瞻聆所及箇箇詳知而不得抗爭於三省之廳者特以 天怒未霽伏蒲無益趦趄數年之外連章疊讀愈久而愈激或承聖批當與大臣議處而終無議處之敎或承倒下而竟絶愈咈之命實由臣等誠不能格聽辭不足感心虛明 丙枕之下無以留想於 聖慮 而 然 也 雖 然一夫不獲其所若巳推而納諸溝中者古聖賢莅民之道也殿下以己丑之獄皆合於王法而無所憾於 聖慮耶死者不可復生臧獲田廬沒入於公家孤兒釐婦號哭於中野惟望伸寃事祝禱於天地日月者幾何也一年二年三年四年至十百年之久而 天聽未回則一疏二疏三疏四疏至百千疏之煩而臣誠不息上下相達君臣堅執是豈 聖朝之事耶伏望 殿下三思而留神焉疏辭將窮又有餘蘊鄭介淸汚踈一寒儒以分析奧義訓誨愚蒙爲已責而於東漢節義中拈出流弊之端著說一篇欲矯時人尙志高談之病措辭旣拙語意未瑩一人嘆評之場反爲謗毁之資嫁禍者至此於楊雄美新論援驅於黨逆之罪惜乎人之巧也 聖批有曰初非逆賊以輷之則非逆之情聖鑑旣洞照之臣等何敢贅一辭更煩於 天聽乎所恨者以分析訓誨之本心不得自明榜示其書於院驛壁上使行人過客不究其意而指曰逆賊之書則傷身杖不竄死遐荒者誠不足恤也與前四臣事異寃同休望 殿下函收榜示之文快雪遇譖之寃臣之望也臣前日疏因方伯達 王 恐不得格天裂裳千里遠赴闕下者庶幾呼籟聲澈九重不勝隕越屛營之至謹昧死以聞

신변오신원소
복이공론자만고지동량이동최칙시비부득기정이천리멸의지원자천하지원통이원통극칙정령필실기화이민이두의시고위사자명공론시비지분위기언이불고도화기이무회유공론시부위군자찰지위통지정집기사이변혹처기지이수서지원시석연후물의정이인심순인심순이치도입의오호기축역적지화발어경시지간칙차천지고금지변추국지난비심상소취지도당결표랑지비야이발이호구이묘년등과명성융혁양력청반론사숙숙지연천위지척침함목 목지광룡문지영신선지망치신어청소지기하층이내유구미어역수지문부 성명구천지사재만만무시리야자조가분붕지후각거동서일우피차상공이적유추맹지재리어과아지도용결의기지교이부위전윤로출기문상봉칙파맹원이칙비서기방촌중흉모비계비범견천식소가억탐야노모치자병위경예기망교지죄함위왈가이기참역 지율불이원호복원전하삼사이류신언유몽정문음지말관명등천류예조단누참언국파촉시기기무방인취모삭반기욕일함자수이적기세도명가이박학지재제수분파유공혹후기능의연불굴이결아고조야한훤수폭서지전불유지의포축역모기부득지지칙안유동참지리야조대중신진지하사년미강사아사남래응접지례다실기의사태지강잠 인언견오어장보지도구의적인토적지소구조무근지설위적류체운자전말무리의찬소량만경협감기망지죄하가진달어면류지하호고략변하간담붕최임형장사정신상월포원지회저어시구자실출어호천지정녕유원우어군부지전호국인개이일사위원칙여역동모운자원중지원이복원전하삼사류신언희분이언지칙수유사신지별합이언지칙사신동일원야사신죄명소소어지상사신지명혼경경어천하지원지적인심불화천도실녕십년간병화지재요괴지작안지불유어공론지옹폐야당기시야상유방훈중화지흠휼하무고도려후지심극치수불변옥석구분척촌실도훈유혼시외교내동지간차류기어호말형의실비지제순역잡이불분지금여분미상불통한어안옥지실기중야신등구이무장첨령소급개개상지이불득항쟁어삼성지청자특이 천노미제복포무익저수년지외연장첩독유구이유격혹승성비당여대신의처이종무의처지교혹승도하이경절유불지명실유신등성불능격청사부족감심허명 병침지하무이류상어 성려 이 연 야 수 연일부불획기소약사추이납제구중자고성현리민지도야전하이기축지옥개합어왕법이무소감어 성려야사자불가복생장획전려몰입어공가고아리부호곡어중야유망신원사축도어천지일월자기하야일년이년삼년사년지십백년지구이 천청미회칙일소이소삼소사소지백천소지번이신성불식상하상달군신견집시기 성조지사야복망 전하삼사이류신언소사장궁우유여온정개청오소일한유이분석오의훈회우몽위이책이어동한절의중념출류폐지단저설일편욕교시인상지고담지병조사기졸어의미형일인탄평지장반위방훼지자가화자지차어양웅미신론원구어당역지죄석호인지교성비유왈초비역적이횡지칙비역지정성감기동조지신등하감췌일사갱번어 천청호소한자이분석훈회지본심불득자명방시기서어원역벽상사행인과객불구기의이지왈역적지서칙상신장불찬사하황자성부족휼야여전사신사이원동휴망 전하함수방시지문쾌설우참지원신지망야신전일소인방백달 왕 공불득격천열상천리원부궐하자서기호뢰성철구중불승운월병영지지근매사이문

伸辨五臣寃䟽
(신변오신원소)

[역문]本(본) 上疏文(상소문)은 鄭汝立(정여립) 謀反事件(모반사건)에 連累(연루)된 五臣(오신)의 怨恨(원한)을 풀어주기 位(위)해서 滄洲公(창주공)이 지은 글임)

엎드려 삼가 아룁니다. 公論(공론)이란 萬古(만고)의 대들보요 이 대들보가 꺽인 즉 是非(시비)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天理(천리)가 없어질 것이며 至極(지극)히 寃痛(원통)함이 極端(극단)에 이르면 國家(국가)의 法令(법령)이 和(화)함을 잃어 百姓(백성)이 지켜야할 人倫(인륜)의 道(도)가 문란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비된 者(자) 是非(시비)를 區分(구분)하여 公論(공론)을 밝히나니 危險(위험)이 다가오고 禍(화)를 입게 되어도 後悔(후회)함이 없이 오직 公論(공론)만을 돕게되는 것이며 人君(인군)은 至極(지극)히 怨痛(원통)한 情(정)을 살피어 의혹을 변별하여 깨우치고 그 사람의 處地(처지)가 되어 容恕(용서)하사 物議(물의)가 바르게 定(정)해지고 人心(인심)이 順(순)해지며 人心(인심)이 順(순)해져야 政治(정치)의 道(도)가 바르게 서게되는 것입니다. 오 己丑逆謀事件(기축역모사건)은 殿下(전하)의 側近(측근)에서 일어났으니 이는 天地古今(천지고금)에 드문 變(변)이요 罪人(죄인)을 심문하기가 甚(심)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李潑(이발)과 李浩(이호)는 모두 二十前後(이십전후)에 登科(등과)하여 名聲(명성)이 널리 떨치었으며 經筵(경연)에서 講論(강론)이 整然(정연)하고 엄숙하여 聖恩(성은)이 限(한)없이 두터웠으니 龍門之榮(용문지영)과 神仙之望(신선지망)으로 모든 榮華(영화)를 不足(부족)함이 없이 누리었는데 어찌 逆賊(역적)과 謀議(모의)하여 聖恩(성은)을 저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絶對(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朝廷(조정)에 朋黨(붕당)이 생긴 後(후)로 편편히 갈라져 서로 相對方(상대방)을 攻擊(공격)하다가 賊(적)이 뛰어난 재주가 있으니까 다투어 自己(자기)편으로 삼으려고 사귀면서 만나면 술잔을 나누고 멀리 떨어지면 片紙(편지)를 보내었으나 賊(적)이 가슴속에 품은 꾀를 어찌 겉만 보고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이들의 老母(노모)와 어린애들까지도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들이 망녕되게 사귄 것이 罪(죄)가 될지언정 參逆(참역)의 律(율)을 당함은 어찌 寃痛(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데 殿下(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注意(주의)를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柳夢井(유몽정)은 蔭官末職(음관말직)에서 몸이 貴(귀)히 되어 名譽(명예)를 입었으나 여러 차례의 言局(언국)에 參與(참여)하여 남의 시기와 미움도 많이 받았을 것이니 그 사람을 謀陷(모함)할려는 者(자)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賊(적)이 世上(세상)을 속이고 虛名(허명)을 들쳐냈으며 博學(박학)의 재주까지 檢(검)하였으니 그를 벗 삼아 每事(매사)에 그에 뒤질까봐 두려워하였으니 어찌 能(능)히 毅然不屈(의연불굴)하고 나만이 高潔(고결)한체 하였겠습니까. 往來(왕래)한 數幅(수폭)의 글은 다만 버리지 않음을 傳(전)하는 뜻이었고 그가 逆謀(역모)할 뜻이 있음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어찌 逆謀(역모)에 加擔(가담)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曺大中(조대중)은 젊은 선비로서 四十(사십)이 못 되어 亞使(아사)로 부임하여 應接(응접)에 禮(예)를 잃었으며 善惡(선악)을 區別(구별)하는 講論(강론)으로 儒生(유생)들의 미움을 산지가 오래이더니 梁萬頃(양만경)이 上疏(상소)에 事實(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 賊(적)을 위해 눈물 지었다하였으니 이것은 全(전)혀 事實無根(사실무근)한 것입니다.

實(실)로 梁萬頃(양만경)은 殿下(전하)를 속인 罪(죄)를 免(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모진 拷問(고문)에 못이겨 죽게 되면서 품은 怨恨(원한)을 詩(시)로서 읊었으니 이것이 바로 殿下(전하)에게 呼訴(호소)하는 그의 哀情(애정)이었습니다. 國人(국인) 모두가 이 죽음을 원망스럽게 생각하니 逆謀(역모)를 같이했다 함은 너무나도 원통한 일입니다. 殿下(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留念(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 區分(구분)하자면 四臣(사신)이니 원한은 同一(동일)합니다. 四臣(사신)의 罪名(죄명)이 地上(지상)에 뚜렷하며 四臣(사신)의 魂(혼)이 地下(지하)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으니 원한이 쌓이면 人心(인심)이 不和(불화)하고 天道(천도)가 편안함을 잃을 것이니 十年兵火(십년병호)에 요사하고 괴상한 일이 일어난 것도 어찌 公論(공론)이 잘 받아드려 지지 않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를 當(당)하여 위로는 堯舜(요순)과 같은 恩典(은전)이 있었을 것이다. 아래로 臯陶(비도)와 呂后(여후)같은 臣下(신하)가 없어 玉石(옥석)이 함께 타고 善惡(선악)의 區分(구분)이 흐려지니 順(순)인지 逆(역)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臣等(신등)이 四臣(사신)들의 억울한 事情(사정)을 낱낱이 알면서도 上疏(상소)치 못한 것은 殿下(전하)의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虛事(허사)일 것 같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또 或是(혹시)나 하고 下回(하회)를 기다렸으나 끝내 批答(비답)이 없으심은 臣等(신등)의 말씀에 추호의 感心(감심)도 되시지 않는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聖賢(성현)들도 百姓(백성)들의 억울한 事情(사정)을 容納(용납)해 주시는 莅民(이민)의 道(도)로 삼았습니다. 殿下(전하)께서는 이 己丑地獄(기축지옥)에 모두 똑같은 王法(왕법)으로만 다스리고도 後悔(후회)가 없으신지요. 죽은 者(자)는 다시 살아올 수 없거니와 집과 재산을 公家(공가)에 몰수당하고 고아와 과부가 들 가운데서 목 놓아 울면서 원한을 풀어 줄것을 天地日月(천지일월)께 비는 사람이 몇몇사람이나 될까요.

一年(일년) 二年(이년) 三年(삼년) 四年(사년) 아니 十年(십년) 百年(백년)이 될지라도 殿下(전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면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니 百(백)번 千(천)번이라도 번거롭게 上疏(상소)를 올려 쉬지않겠나이다. 上下(상하)가 서로 어긋나고 君臣(군신)이 굳게 틀리면 어찌 성스러운 朝廷(조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데 殿下(전하)께서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留念(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아뢸 말씀은 鄭介淸(정개청)인데 이는 寒儒(한유)이나 어리석고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 爲(위)하여 東漢節義中(동한절의중)에서 가려내어 한편의 책을 著述(저술)하여 바르게 가르치려고 했으니 높은 뜻과 고상한 이야기도 病(병)이런가. 여기에 뜻이 曖昧(애매)한 곳이 있는 것을 奇貨(기화)로 逆謀事件(역모사건)에 關聯(관련)을 지으니 哀惜(애석)하기 限(한)이 없으며 못믿을 건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殿下(전하)께서도 鞫問(국문)하시고 나서 이는 逆賊(역적)이 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다시 天聽(천청)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데 殿下(전하)께서는 榜示(방시)하신 글을 거두시고 寃恨(원한)을 풀어주시는 것이 臣(신)의 所望(소망)입니다. 臣(신)이 前日(전일)에 올린 上疏文(상소문)이 觀察使(관찰사)를 通(통)하여 王(왕)에게 전달되었겠으나 或(혹) 殿下(전하)께서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 千里(천리)길에 옷이 다 헤어진체 闕下(궐하)에 엎드려 죽음을 무릅쓰고 懇切(간절)히 呼訴(호소)하오니 드리살펴 주시옵기 千萬(천만)바라옵나이다.

 

아래와 같이 자료파악 및 사진첨부

 

生歿

備考

柳夢井

 

 

淸溪

   

曺大中

 

 

鼎谷

明宗4(1549)-22(1589宣祖)

 

李潑

光山

景涵

東庵

中宗39(1544)-1589.12.12 정철의 날조와 모함

李洁

 

 

南溪

1547-1589  

鄭介淸

 

 

困齋

中宗23(1529)-宣祖23(1590)  
 

 

     

정개청의 묘소. 목포시 무안군 몽탄면 명산리에 있다

참고 : 역모자로 몰린 정여립

정여립[ 鄭汝立 ]

자 인백(仁伯)

출생 - 사망 : 1546(명종 1) ~ 1589(선조 22) / 조선 전기의 사상가

성격 : 사상가

출신지 : 전주(全州)

본관 : 동래(東萊)

관련사건 : 기축옥사

대표관직(경력) : 예조좌랑, 수찬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전주(全州) 출신. 극량(克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완(世玩)이고, 아버지는 첨정 희증(希曾)이다. 어머니는 박찬(朴纘)의 딸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5세 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때 아전들이 군수보다도 더 어려워했다 한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다.

 

1567(명종 22) 진사가 되었고, 1570(선조 2) 식년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편에 반부(反附)하여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朴淳성혼을 비판하였다. 이에,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이와의 문제로 서인의 미움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선조의 눈밖에 나서 동인의 역천(力薦)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인 사이에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

 

특히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그는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했을 때는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에 응하여 대동계를 동원,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모사(謀士)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고변이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다.

 

한편, 그는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사건을 조사,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인사는 거의 제거되었으니, 비명에 숙청된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런데 그의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뉘어져 있다. 조작설의 이유로는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째,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 桐巢漫錄≫ 같은 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기축옥사는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동인 사이에 구전되어오는 설을 직서했다고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김장생(金長生)이 엮은 송강행록 松江行錄>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 그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첫째, 그가 남긴 문자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고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王蠾)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인의 통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가 성지화자(聖之和者)라고 칭찬한 유하혜(柳下惠)의 말을 인용한 하사비군이라는 말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신채호(申采浩)가 일찍이 지적한대로,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그는 전부터 있었던 목자()는 망하고 전읍()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하여 전읍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낭설을 퍼뜨리고 그것을 믿게 했다 한다. 왕조의 운수가 다해 천명이 타성에게 내려 새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임을 믿는 것이 도참신앙이고, 이것을 고의로 조작했다는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성은 있으나, 역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