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image(gif) 만듬:문정공24세손 병선

대종회장25대-27대
창주공15세손

광훈(光勳)


만든 후손
발전연구위원
간사. 25대∼
일헌공15세손

병선(昺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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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第四編 先世遺稿
行狀및 墓碣銘

 

 

滄洲公行狀

余嘗讀東史纂要高麗烈傳謹按文靖公雪齋鄭先生諱可臣道學文章允爲百世儒宗手撰金鏡錄一部尙確今古寔爲百王鑑成之則而爲萬世法程之首嘗侍世子入中國華人稱海東夫子今爲羅州氏之始而於滄洲公寔九代祖也公諱詳字㑖愼滄洲號也祖諱觀直長曾祖諱承賢司憲府監察高祖諱軾光廟中文科重試檢詳舍人兵曹判書贈諡景武五世以上簪組聯大史不絶書考諱念祖學行著世獎進後學爲已任累徵不就考妣喪廬于墓側時人各其廬曰思禮堂以學行除參奉妣慶州李氏己卯名賢茅山蟹女生三男公其季也以默軒爲伯以逸軒爲仲而咸以忠孝襲訓於庭立爲詩禮家學之程公家學之正可敬可尙矣公生於中宗癸巳自妙年篤志勤學煙燈達曉四壁煙 如漆鄕隣文老咸稱詡曰此兒之家學純篤觀於烟漆室可認矣性嚴毅謹簡威儀重若泰山其中不可鑽而得其輕重凡在觀志之人有善譽不自居之讓于伯仲苟有論評]處自居而不讓是喜聞過智仁勇之一事也及長學問精邃所交遊皆當時名碩與睡隱姜沆谿谷張維以爲道義交宣祖甲戌文壯表上之中陞戶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東學校授出知舒川磨崖頌德歷守南平昌平茂朱鐵原等邑大有聲續庚寅抗䟽辨己丑五賢之誣輒爲明比所沮遯跡江湖卜居于莎洞灘上築一亭設率眞會與當時諸賢講討經義獎進後學爲已任當時名流多出其門綾陽學士鄭화呈公書曰先生投棄軒冕有同弊屣又曰四方之士仰若山斗當時士林之高景猶如是爾遽當壬燹公年老矣憂憤不食曰吾家世受國恩當此板蕩社稷安危在於朝夕安敢坐視乎遂曳疾赴李忠武幕贊晝方略時敵衆此寡公謂忠武曰湖南國家之根本用兵之要害守此然後可以爲興復之計忠武善其言而防禦地策如地仍謝地自間山直向晉州與崔兵使慶會以爲嶺湖相援地計到于南原與梁大樸方圖發檄召募中途疾劇未果而歸卽召第二子如麟戒之曰汝當替父之行以効報君命送李公幕輸軍餉仍付以書畧曰一自謝退後衰病日甚不敢敵愾而更不奮身負國之罪其何可逭命此豚兒替赴麾下李公答書略曰優助軍餉且送胤子其於防禦之策如獲一肩湖南讀書之士非不爲多今敵王所慨者有幾未幾聞忠武戰死於露梁驚悼乃作文往哭之其文略曰天于鍾靈地爲孕粹風霆氣槩鬼神襟期又曰復黎庶父兄之讐雪宗社列聖之耻何圖星殞諸葛之營淚落岳穆之師云今讀誄文辭義激烈堂時籌策用之術雖不及於忠武之功忠憤激切之義不下於忠武又曰身雖逝兮名不朽是慰其忠武之靈而三千疆土人民莫不稱頌於千百世之下者也余故曰公之一言聽信之知公莫忠武若矣誄辭之激憤如是知忠武莫公若也

光海己酉六月初四日卒壽七十七葬于白龍山案山巳坐原睡隱谿谷咸以詩悼之正祖己未建祠于莎洞配淑夫人固城李氏習讀懿女監司節玄孫中宗辛卯生光海壬子卒壽八十二墓雙封有四男一女長如龍次如麟慶源都護府事壬亂甲子适亂丁卯胡亂有大功次如鳳次如龜從仕郞廷恩殷參奉女適坡州廉公達進士孫曾內外五十有餘嗚呼公生於明宣之際家學精邃亦可謂魚水盛會而位不稱德抑何哉朋比所沮遯跡于林樊築一亭子設率眞會而講計經義勸進後學不知老之將至發眞詮而警戒之雲林之樂勝似乎宦路之風波矣國步漸艱不幸龍蛇之變憤忠激義於敵慨之日學問上用功益著忠激中一部春秋矣可矜式於百世之下其遺風餘韻至于今猶豐於鄕土之口碑云今其後孫志浩袖其狀與遺集要余以誌辭不獲略刪潤以竣後日立言君子之財擇焉

承政院左承旨經筵參贊官兼春秋館修撰 豐山 洪命周 謹撰

창주공행장

여상독동사찬요고려열전근안문정공설재정선생휘가신도학문장윤위백세유종수찬금경록일부상확금고식위백왕감성지칙이위만세법정지수상시세자입중국화인칭해동부자금위나주씨지시이어창주공식구대조야공휘상자중신창주호야조휘관직장증조휘승현사헌부감찰고조휘식광묘중문과중시검상사인병조판서증시경무오세이상잠조연대사불절서고휘염조학행저세장진후학위이임누징불취고비상려우묘측시인각기려왈사례당이학행제참봉비경주이씨기묘명현모산해여생삼남공기계야이묵헌위백이일헌위중이함이충효습훈어정립위시례가학지정공가학지정가경가상의공생어중종계사자묘년독지근학연등달효사벽연쉬여칠향린문노함칭후왈차아지가학순독관어연칠실가인의성엄의근간위의중약태산기중불가찬이득기경중범재관지지인 선예불자거지양우백중구유논평처자거이불양시희문과지인용지일사야급장학문정수소교유개당시명석여수은강항계곡장유이위도의교선조갑술문장표상지중승호조정랑겸춘추관기주관동학교수출지서천마애송덕역수남평창평무주철원등읍대유성속경인항소변기축오현지무첩위명비소저둔적강호복거우사동탄상축일정설솔진회여당시제현강토경의장진후학위이임당시명유다출기문능양학사정수정공서왈선생투기헌면유동폐사우왈사방지사앙약산두당시사림지고경유여시이거당임선공년노의우분불식왈오가세수국은당차판탕사직안위재어조석안감좌시호수예질부이충무막찬주방략시적중차과공위충무왈호남국가지근본용병지요해수차연후가이위흥복지계충무 기언이방어지책여지잉사지자간산직향진주여최병사경회이위령호상원지계도우남원여량대박방도발격소모중도질극미과이귀즉소제이자여린계지왈여당체부지행이효보군명송이공막수군향잉부이서략왈일자사퇴후쇠병일심불감적개이경불분신부국지죄기하가환명차돈아체부휘하이공답서략왈우조군향차송윤자기어방어지책여획일견호남독서지사비불위다금적왕소개자유기미기문충무전사어로량경도내작문왕곡지기문략왈천우종령지위잉수풍정기개귀신금기우왈복여서부형지수설종사열성지치하도성운제갈지영루락악목지사운금독뢰문사의격열당시주책용지술수불급어충무지공충분격절지의불하어충무우왈신수서혜명불후시위기충무지령이삼천강토인민막불칭송어천백세지하자야여고왈공지일언청신지지공막충무약의뢰사지격분여시지충무막공약야

광해기유육월초사일졸수칠십칠장우백룡산안산사좌원수은계곡함이시도지정조기미건사우사동배숙부인고성이씨습독의여감사절현손중종신묘생광해임자졸수팔십이묘쌍봉유사남일여장여룡차여린경원도호부사임란갑자괄란정묘호란유대공차여봉차여구종사랑정은은참봉여적파주염공달진사손증내외오십유여오호공생어명선지제가학정수역가위어수성회이위불칭덕억하재붕비소저둔적우림번축일정자설솔진회이강계경의권진후학불지노지장지발진전이경계지운림지락승사호환로지풍파의국보점간불행용사지변분충격의어적개지일학문상용공익저충격중일부춘추의가긍식어백세지하기 풍여운지우금유풍어향토지구비운금기후손지호수기장여유집요여이지사불획략산윤이준후일립언군자지재택언

승정원좌승지경연참찬관겸춘추관수찬 풍산 홍명주 근찬


[역문]滄洲公行狀(창주공행장)


내가 일찍 ①東史簒要(동사찬요)와 高麗烈傳(고려열전)을 읽었다.

삼가 살펴보건데 文靖公(문정공) 雪齋鄭先生(설재정선생)의 諱(휘)는 可臣(가신)이니 道學文章(도학문장)이 진실로 百世儒宗(백세유종)이라 할 것이다. 손수 金鏡錄(금경록) 一部(일부)를 著述(저술)하여 今古(금고)를 尙確(상확)하니 진실로 百王(백왕)②鑑戒(감계)의 法(법)이 되며 萬世(만세) 法程(법정)의 의뜸이 될 것이다.

일찍이 世子(세자)를 모시고 中國(중국)에 들어감에 華人(화인)이 海東夫子(해동부자)라 稱(칭)하니

지금 羅州鄭氏(나주정씨)의 中始祖(중시조)가 되며 滄洲公(창주공)에게는 九代祖(9대조)다. 公(공)의 諱(휘)는 詳(상)이요 字(자)는 仲愼(중신)이며 滄洲(창주)는 號(호)다.

祖(조)의 諱(휘)는 觀(관)이 直長(직장)이오 曾祖(증조)의 諱(휘)는 承賢(승현)이니 司憲府(사헌부) 監察(감찰)이오 高祖(고조)의 諱(휘)는 軾(식)이니 光海朝(광해조)때 文科(문과)와 重試(중시)에 合格(합격)하여 檢詳舍人(검상사인) 兵曹判書(병조판서)로 景武(경무)라 贈諡(증시)하니

五世以上(5세이상)으로 高官大爵(고관대작)이 代代(대대)로 이어져 史記(사기)에 글이 끊어지지 않았다.

考(고)의 諱(휘)는 念祖(염조)니 學行(학행)이 著世(저세)하여 後學(후학)을 獎進(장진)시킴을 나의 責任(책임)으로 삼고 朝廷(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就任(취임)하지 않고 父母喪(부모상)에 墓側(묘측)에 廬幕(여막)을 지으니 時人(시인)이 그 廬幕(여막)을 思禮堂(사례당)이라 하였으며 學行(학행)으로 參奉(참봉)에 任命(임명)되었고

妣(비)는 慶州李氏(경주이씨)니 己卯名賢(기묘명현)이 茅山(모산) 蟹(해)의 딸이다.

三男(3남)을 出生(출생)하니 公(공)은 그 季男(계남)이다. 默軒(묵헌)은 伯氏(백씨)가 되고

逸軒(일헌)은 仲氏(중씨)가 되니 모두 忠孝(충효)로서 家庭敎育(가정교육)을 이어받아 詩禮(시례)로 家學(가학)의 길을 세우니

公(공)은 家學(가학)의 正統(정통)으로 可敬(가경)하고 可尙(가상)하다.

公(공)이 中宗癸巳(1533)에 出生(출생)하니 妙年(묘년)때부터 篤志勤學(독지근학)하여 불을 켜고 밤을 새우니 四壁(사백)이 불똥에 그을려 漆(칠)과 같으니 鄕隣(향인) 文老(문로)들이 칭찬하기를 이 아해의 家學(가학)이 純篤(순독)하니 烟漆(연칠)한 방을 보면 確認(확인)될 것이다 하였다.

性稟(성품)이 嚴毅謹簡(엄의근간)하여 威儀(위의)가 무거움이 泰山(태산)과 같아 그 가운데를 가히 뚫지 못하매 그 輕(경)하고 重(중)한 것을 얻음에 무릇 뜻만 보고 있을 때 남이 착각하는 칭찬이 있으면 自己(자기)가 차지하지 않고 伯氏(백씨)나 仲氏(중씨)에게 사양하며 진실로 자상이 論(논)할 곳이 있으면 自身(자신)이 차지하고 사양하지 않으니 이는 허물 듣기를 기뻐하는 智(지)와 仁(인)과 勇(용)의 一事(일사)다.

어른이 됨에 學問(학문)이 ④精邃(정수)하고 交遊(교유)한바가 모두 當時(당시)의 名碩(명석)이니 睡隱姜沆(수은강항)과 谿谷(계곡) 張維(장유)와는 道義交(도의교)가 되었다.

宣祖(선조) 甲戌年(갑술년1574)에 文科(문과) 壯元(장원)에 上(상)의 中(중)으로 表示(표시)되었다.

戶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호조정랑겸춘추관기주관) 東學校授(동학교수)에 陞進(승진)되었으며 舒川(서천) 원님으로 나갔을 때는 석벽에 새겨 덕을 칭송했으며 南平(남평) 昌平(창평) 茂朱(무주) 鐵原(철원)등 郡守(군수)를 歷任(역임)하여 크게 聲績(성적)이 있었으며

庚寅年(경인년)에 己丑五賢(기축5현)의 誣(무)에 ⑥抗疏辯(항소변)하다가 明黨(명당)이 저지한 바로 江湖(강호)에 遯跡(둔적)하여 莎洞灘(사동탄)위에 卜居(복거)하여 한 亭子(정자)를 建築(건축)하여 率眞會(솔진회)를 設立(설립)하여 當時(당시) 諸賢(제현)들과 經義(경의)를 講討(강토)하고 後學(후학)을 獎進(장진)함을 나의 責任(책임)으로 삼으니 當時(당시) 名流(명류)가 그 門下(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綾陽學士(능양학사) 鄭沫(정말)가 公(공)에게 글을 보내기를 벼슬을 던져버리기를 떨어진 신짝 버리듯 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四方(사방)의 선비가 우러러 몸을 泰山(태산)과 北斗(북두)같이 하니 當時(당시) 士林(사림)의 高景(고경)이 이 같았다 하였다.

문듯 壬辰兵火(임진병화)를 當(당)하여 公(공)이 年老(년로)한지라 憂憤(우분)으로 먹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집이 代代(대대)로 國恩(국은)을 받으니 이⑧板蕩(판탕)한 때를 當(당)하여 社稷(사직)의 安危(안위)가 朝夕(조석)에 있는데 어찌 감히 앉아서만 볼 것인가 하고 드디어 病(병)든 몸을 이끌고 李忠武公(이충무공) 陣營(진영)에 달려가 方略(방략)을 贊畫(찬화)하니

이때 敵衆(적중)하고 이곳은 적은지라 公(공)이 忠武公(충무공)에게 이르기를 湖南(호남)을 國家(국가)의 根本(근본)이며 적을 막기에 편리한 곳이니 이곳을 지킨 후에라야 가히 興復(흥복)의 計策(계책)이 될 것이라 하니 忠武(충무)가 그 말을 옳다하고 防禦(방어)의 計策(계책)을 맡기니 사양하고 閒山(한산)으로부터 바로 晉州(진주)를 向(향)하여 崔兵使(최병사) 慶會(경회)로 더불어 嶺湖南(영호남) 相援(상원)의 計策(계책)을 세우고 南原(남원)에 이르러 梁大撲(양대박)과 같이 바야흐로 檄文(격문)을 發(발)하여 召募(소모)를 圖謀(도모)했는데

中途(중도)에 病(병)이 甚(심)하여 達成(달성)치 못하고 돌아와 第二者(제이자) 如麟(여린)을 불러 경계하기를 너는 마땅히 애비의 行爲(행위)를 代身(대신)하여 報君(보군)할 것을 본받으라 하고 李公(이공) 幕中(막중)에 軍糧(군량)을 싣고 가라 命(명)하고 인하여 글을 써서 부치니 대략 이르기를 한번 謝退(사퇴)한 후로 衰病(쇠병)이 날로 심하여 감히 敵慨(적개)하지 못하고 다시 몸을 떨치지 못해 나라에 罪(죄)를 졌으니 그 어찌 도망하리오. 이 豚兒(돈아)를 命(명)하여 代身(대신) 麾下(휘하)에게 달려가게 하노라 하였다.

李公(이공)이 答書(답서)하되 대략 이르기를 軍糧(군량)을 넉넉히 보태주고 또 胤子(윤자)를 보내니 그 防禦(방어)의 計策(계책)에 한팔을 얻은 것 같으며 湖南(호남)에 글 읽은 선비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이제 王(왕)의 敵(적)에 慷慨(강개)한 者(자) 몇이나 있는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忠武(충무)가 露梁(노량)에서 戰死(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래고 슬퍼 이에 글을 지어 徃哭(왕곡)하니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하늘에선 神靈(신령)이 눈물 흘리고 땅은 순수함을 잉태했으니 벼락이 울리는 氣槩(기개)요 鬼神(귀신)도 옷섭을 모았도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백성들의 父兄(부형)의 원수를 갚고 宗社(종사) 列聖(열성)의 수치를 씻을 것인데 별은 諸葛(제갈)의 軍營(군영)에 떨어지고 눈물은 ⑬岳穆(악목)의 군사에게 떨어지고 어떻게 圖謀(도모)할 것인가 하였다.

지금 輓章(만장)을 읽으면 辭義(사의)가 激烈(격열)하여 當時(당시)⑫籌策(주책)과 用兵(용병)의 技術(기술)은 비록 忠武(충무)의 功力(공력)에 미치지 못하나 忠憤激切(충분격절)의 義(의)는 忠武(충무)에게 내리지 않았으며 또 말하길 몸은 비록 갔으나 이름은 썩지 않아 이 忠武(충무)의 靈(령)을 慰勞(위로)하되 三千里(삼처리) 疆土人民(강토인민)이 千百世(천백세)가 되도록 칭송치 않은 이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내 진즉 말하되 公(공)의 一言(일언)을 듣고 믿으니 公(공)을 아는 이는 忠武(충무)같음이 없고 輓詞(만사)의 激烈(격열)함이 이 같으니 忠武(충무)를 아는이는 公(공)만 같은 이가 없다고 할 것이다.

光海(광해) 己酉年(기유년1609) 六月初四日(6월4일)에 卒(졸)하니 壽(수)는 七十七歲(77세)다.

白龍山(백룡산) 案山(안산) 巳坐原(사좌원)에 葬(장)하니 睡隱(수은)과 谿谷(계곡)이 모두 詩(시)로써 哀悼(애도)하였으며 正祖己未年(정조기미년1799)에 莎洞(사동)에다 祠宇(사우)를 세웠다.

配(배)는 淑夫人(숙부인) 固城李氏(고성이씨)로 習讀(습독) 懿(의)의 딸이며 監司(감사) 節(절)의 玄孫女(현손여)다.

中宗(중종) 辛卯年(신묘년1531)에 出生(출생)하여 光海(광해) 壬子年(임자년1612)에 卒(졸)하니 壽(수)는 八十二歲(82세)요 墓(묘)는 雙封(쌍봉)이다.

四男一女(사남일녀)를 두었으니 長男(장남)은 如龍(여룡)이요 次男(차남)은 如麟(여린)이니 慶源都護府事(경원도호부사)로 壬辰亂(임진난) 甲子适亂(갑자괄난) 丁卯胡亂(정묘호란)에 大功(대공)이 있었고 三男(3남)은 如鳳(여봉)이요 四男(4남)은 如龜(여구)니 從仕郞(종사랑)으로 廷恩殿參奉(정은전참봉)이며 딸은 坡州廉公達(파주염공달)에게 出稼(출가)하니 進士(진사)다.

孫曾(손증) 內外孫(내외손)은 五十餘名(오십여명)이다.

아! 公(공)이 明宗(명종)과 宣祖(선조)사이에 태어나 家學(가학)이 ④精邃(정수)하고 또한 가히 魚水盛會(어수성회)라 이를 것이로되 벼슬이 德(덕)을 맞추지 못했음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朋黨(붕당)의 막은 바로 林樊(임번)에 遯跡(둔적)하여 한 亭子(정자)를 지어 率直會(솔직회)를 設立(설립)하여 經義(경의)를 講討(강토)하고 後學(후학)을 勸進(권진)하여 늙음이 장차 알지 못하고 ⑯眞詮(진전)을 發(발)하여 警戒(경계)하며 雲林(운림)의 즐거움이 宦路(환로)의 風波(풍파)보다 나은것 같기 때문이었으리라.

⑮國步(국보)가 점점 어려워서 不幸(불행)히도 龍蛇(용사)의 燮(섭)으로 憤忠激義(분충격의)가 敵慨(적개)한 날에 學問上(학문상) 用功(용공)이 더욱 나타나니 忠激中(충격중)의 一部春秋(일부춘추)다.

가히 百世下(백세하)에 矜式(긍식)할 것이오 그 遺風(유풍)과 餘韻(여운)이 지금까지도 오히려 鄕土(향토)의 ⑰口碑(구비)에 豐富(풍부)하다고 한다.

이제 그 後孫(후손)인 志浩(지호)가 그 行狀(행장)과 遺集(유집)을 가지고 와서 내게 써줄 것을 要求(요구)하여 사양했으나 얻지 못하고 대략 ⑱刪潤(산윤)하여 後日(후일) 立言君子(입언군자)의 財擇(재택)을 기다린다.

<註>

①東史簒要(동사찬요):國史敎材. 李朝宣祖때 吳澐지음. 新羅와 高麗의 歷史를 東國通監 三國史記 高麗史等에 依하여 學習에 便利하게 要約한것

②鑑戒(감계):지나간 일을 잘 생각하여 스스로 경계함

③稱詡(칭허):자랑하고 칭찬함

④精邃(정수):밝고 깊숙함

⑤磨崖頌德(마애송덕):석벽에 글자를 새기고 德을 칭송함

⑥抗疏辯(항소변):임금에게 表文을 올려 잘잘못을 분별함

⑦軒冕(헌면):貴人이 타는 수레와 쓰는 冠, 높은 벼슬

⑧板蕩(판탕):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림

⑨要害(요해):地形이 적을 막기에 편리한 곳

⑩鍾靈(종령):신령이 눈물 흘리고

⑪風霆(풍정):벼락이 울리다

⑫籌策(주책):이해관계를 헤아려 생각한 꾀

⑬岳穆(악목):岳武穆=岳飛:南宋의 湯陰

⑭獎進(장진):①사람을 권해서 官界에 나가게 함 ②사람을 이끌어 세움

⑮國步(국보):한나라의 운명, 國運

⑯眞詮(진전):참된 깨달음

⑰口碑(구비):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말. 비석에 새긴것처럼 오래도록 전하여 온 말이라는 뜻. 傳說

⑱刪潤(산윤):문장이나 어귀를 간추려 修飾함

                                      

아래와 같이 계보파악 및 참고자료 붙임

系  譜 : 2卷 707     계보보기

4대파

少尹公諱佶派

滄洲公諱詳

중조(中祖)

 파계(派系)

  21世

고조(高祖)

諱軾

증조(曾祖)

諱承賢

조(祖)

直長公諱觀

고(考)

思禮堂公諱念祖

  

13世諱詳

仲愼
 

滄洲

 

 

中宗28癸巳 1533

宣祖己酉 1609年六月四日

 

 

 

  
詳 字仲愼 號滄洲
中宗癸巳生

宣祖甲戌에別科壯表上之中하여通訓大夫戶曹正郞과弘文典籍兼春秋館記注官東學敎授로除丹城縣監하되辭不  赴하고後守舒川磨崖에頌德이라歷守南平昌平茂朱鐵原에大有聲蹟이라丁未에抗疎辯己丑諸賢之誣라가朋比所  沮하여落拓還鄕하고無意仕進하여遯跡江湖에以奬進後學으로爲己任이라當時名碩이多出其門이라龍蛇之變에  公年方老라憂憤不食曰吾本世受國恩之家로當此板蕩하여豈敢坐視乎아遂扶疾하고赴李忠武幕하여與鹿戶鄭運  과慶尙右水使元均과金甲萬戶宋希立으로警以同死하다贊晝方略하여遂大破陳하고斬首數十級이라李忠武曰今  日之捷는實鄭公之力也라時에彼兵이大熾于湖南하니公이謂忠武曰湖南은國家之根本이요用兵之要塞處라守此  然後에可爲興復之計라하고仍謝하나李公이自閒山으로直向晉州하여與兵使崔慶會로以爲嶺湖相援之計하고到  于南原하여與梁大樸으로方圖發檄召幕하다가中道에疾劇하여未果而歸하고卽召第二子如麟하여戒之曰汝當替  父之行하여以報君之誠하라命送李公幕하여輸軍餉하고仍付以書하曰一身이辭退니略於壇席에衰病日甚하니  今敵慨之日에更不能奮身於牙纛之下라負國之罪를其何可가命此豚兒하여替赴麾下라李公이答曰疾風草非令公  之謂耶아事載三綱錄하다及聞李公이死於露梁하고驚悼不巳하여仍作文往哭之라
宣祖己酉六月四日卒壽七十七睡隱姜沆과谿谷張維咸以詩悼之하다
正宗己未에建祠于莎洞寶山하다庚申에道儒以公之兄弟와及子如麟忠節로上言請褒라
配淑夫人固城李氏習讀懿女監司節玄孫
中宗辛未生
光海壬子十一月十日卒壽八十二墓多侍面白龍山案山巳坐雙兆有碣

資料作成:文靖公24世孫昺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