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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辛未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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逸軒公墓碣銘 國朝人物莫盛於 仁 明 宣之際而忠孝著於當時文章嗚於後世蔚然爲士林之標準者其惟逸軒鄭先生乎先生諱諶字仲實號逸軒又號谷口羅州人庚辰生自幼聰明便解文字 明廟壬子升上庠 宣廟戊辰擢文科歷拜戶曹佐郞以久曠定省棄官還鄕秋除吏曹正郞黽勉肅 思從親命也時大夫人年躋大耋而其弟滄洲公諱詳踵登科第先生曰二人在朝其於偏親何君則居官盡職吾則歸而奉老不亦可乎遂賦歸去來辭浩然南下築室於水石間顔以逸軒其贊曰錦隱逸翁志在雲鴻功不必建名不思隆悅親之蝦惟後學爲樂矣龍蛇之亂往見朴懷齋光玉倡擧義之論曰此正臣子效死之秋而但老物精神消兦不能効萬一之忱慷慨於悒義氣激人健齊金公千鎰擧義興師而馳書告公公勉以忠義兼勗霽峯高公敬命其略曰宗社灰沒先神無依生靈屠割寃血被原今日之事有進無退飢不暇念食足不及褁血投時急擊勿失機會云云送侄子慶源公如麟赴李忠武幕恊贊方略以圖討復及聞崔兵使殉節之報而爲文以吊之又聞沈惟敬和議之說而作鏖賦歌以警之 大駕西遷不得扈從爲恨與人書必稱偷生人三都陸沉仰屋長呼書國破山河在之句以洩忠憤之氣 宣廟壬寅考終于寢壽八十三墓在月淸洞枕艮原與夫人光山金氏雙塋 英廟乙亥士論齊發配享于雪齋祠考諱念祖主簿祖諱觀直長曾祖諱承賢監察高祖諱軾判書文靖公諱可臣其九世祖也擧二男一女長如海監正次如漢將仕郞女適鄭氏俊孫曾多不盡錄嗚呼今距先生之沒已三百有餘年矣其實行懿德固非後生之所可妥議而竊惟山岳靈淑之氣鍾以爲人蘊之爲道德措之爲事業發之爲文章兼而有之者千百年來指難屢屈而若先生豈非其人歟墓前舊有短碣而字晝漫漶實不可認後孫遇善謀所以改竪而命不佞繼洙俾記之固典重不敢辭而在外裔亦不敢辭謹爲之銘銘曰 錦岳鍾靈于天埈極降我先生克肖先德孝篤養親忠切夏國餘事文章爲世矜式若岱于東如斗于北配享先祠俎豆不忒銘于牲石用詔千億
금악종령우천준극강아선생극초선덕효독양친충절하국여사문장위세긍식약대우동여두우북배향선사조두불특명우생석용조천억
[역문]逸軒公墓碣銘(일헌공묘갈명)
先生(선생)의 諱(휘)는 諶(심)이요 字(자)는 仲實(중실)이며 號(호)는 일헌(逸軒)이요 또 號(호)를 谷口(곡구)라고 하니 羅州人(나주인)이다. 庚辰生(경진생)으로 어려서부터 聰明(총명)하여 문득 文字(문자)를 풀었으며 明宗 壬子年(명종 임자년 명종7년 서기1552)에 進士(진사)에 올랐으며 宣祖 戊辰年(선조 무진년 선조 1년 서기1568)에 文科(문돠)에 뽑혀 戶曹佐郞(호조좌랑)을 歷任(역임)하였는데 오래 父母(부모)의 昏定晨省(혼정신성)을 비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을에 吏曹正郞(이조정랑)에 任命(이명)되어 赴任(부임)하였으니 父親(부친)의 命令(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때 大夫人(대부인)이 나이가 八十(팔십)이 되었는데 그 동생 滄洲公(창주공) 諱(휘) 詳(상)이 뒤를 이어 科擧(과거)에 오르니 先生(선생)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朝廷(조정)에 있으면 偏親(편친)을 어찌할 것인가 그대는 官(관)에 있어 職責(직책)을 다하고 나는 돌아가 老人(노인)을 받드는 것이 또한 옳지 아니하랴 하고 드디어 歸去來辭(귀거래사)를 짓고 浩然(호연)히 南(남)으로 내려와 집을 水石(수석)사이에 짓고 逸軒(일헌)이라. 懸板(현판)을 걸고 그 贊(찬)에 이르기를 「錦隱逸翁 志在雲鴻 功不必建 名不思隆 悅親之暇 惟以獎進後學爲樂矣(금은일옹 지재운홍 공불필건 명불사융 열친지가 유이장진후학위낙의)」 [錦城(금성)에 숨은 逸翁(일옹)이 뜻은 구름속 기러기에 있네. 功(공)도 반드시 세우지 못하고 名聲(명성)도 드러내기 생각지 않네. 어버이를 기쁘게한 餘暇(여가)에 後學(후학)을 권장하여 진취시키는 것을 樂(락)으로 삼으리라)]라 하였다. 壬辰亂(임진난)에 朴懷齋(박회재) 先玉(선옥)을 가서보고 倡義(창의)할 것을 議論(의논)하면서 말하기를 이 바로 臣子(신자)가 죽음을 본받을 때로되 다만 老物(노물)이 精神(정신)이 녹아없어 능히 萬(만)에 하나의 정성도 본받지 못한다 하고 근심하며 慷慨(강개)하여 義氣(의기)가 사람을 격동하였다.
健齋 金公千鎰(건재 김공천일)이 正義(정의)를 내세워 군사를 일으키니 글을 보내 金公(김공)에게 告(고)하기를 公(공)은 忠義(충의)로써 힘쓰라 하고 兼(겸)하여 霽峯高公敬命(제봉 고공경명)에게 힘쓰게 하니 그 대략 말하기를 宗社(종사)가 재가 되고 先祖(선조)의 神靈(신령)이 의지할 곳이 없으며 백성이 도륙되어 원통한 죄 들을 물들이니 오늘의 일은 進擊(진격)만 있고 後退(후퇴)는 없을 것이오 주려도 밥먹기를 생각할 틈이 없고 다리는 피를 싸맬 여유도 없으니 때에 따라 급히 쳐부수어 機會(기회)를 잃지 말라 하였다. 조카인 慶源公(경원공) 如麟(여린)을 李忠武公(이충무공) 幕下(막하)로 보내어 方畧(방략)을 協贊(협찬)하여 쳐서 회복하기를 도모하라 하였고 崔兵使(최병사) 殉節(순절)의 소식을 듣고 글을 만들어 弔慰(조위)하였고 또 沈惟敬(심유경)이 和議(화의)한다는 말을 듣고 鏖賦歌(오부가)를 지어 警告(경고)하였으며 임금이 西(서)로 옮김에 扈從(호종-뫼시고 띠라감) 하지 못함이 恨(한)이 되어 사람에게 주는 글에는 반드시 偸生人(투생인-삶을 도적질한 사람)이라고 일컬었고 三都(삼도)가 함락됨에 지붕을 쳐다보고 길에 부르면서 나라는 망했으되 山河(산하)는 그대로 있다는 글귀를 써서 忠憤(충분)의 氣慨(기개)를 들어냈다. 宣祖壬寅年(선조임인년 선조 35년 서기1602)에 자리에서 세상을 마치니 壽(수)는 八十三歲(팔십삼세)요 墓(묘)는 月淸洞(월청동) 艮坐原(간좌원)에 있으니
夫人(부인) 光山金氏(광산김씨)와 雙塋(쌍영)이다. 英祖乙亥年(영조 을해년-영조31년 서기1755)에 士論(사론)이 齊發(제발)하여 雪齋祠宇(설재사우)에 配享(배향)하였다. 考(고)의 諱(휘)는 念祖(염조)니 主簿(주부)는 조(祖)의 휘(諱)는 관(觀)이니 직장(直長)이오 증조(曾祖)의 휘(諱)는 승현(承賢)이니 감찰(監察)이오 고조(高祖)의 휘(諱)는 식(軾)이니 판서(判書)로 문정공(文靖公) 휘(諱) 가신(可臣)이 구세조(九世祖)가 된다. 이남일녀(二男一女)를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여해(如海)니 감정(監正)이요 차남(次男)은 여한(如漢)이니 장사랑(將仕郞)이며 딸은 정씨(鄭氏) 준(俊)에게 출가(出嫁)하였고 손자(孫子)와 증손(曾孫)은 많음으로 다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아 ! 지금으로부터 先生(선생)이 돌아가신지 이미 三百餘年(삼백여년)이다. 그 實行懿德(실행의덕)을 진실로 後生(후생)의 가히 議論(의론)할바가 아니로되 가만히 생각해 보니 山岳(산악)의 靈淑(령숙)한 기운이 모아서 사람이 되고 쌓여서 道德(도덕)이 되고 높여서 事業(사업)이 되고 發(발)하여 文章(문장)이 되니 兼(겸)해 있는 者(자) 千百年來(천백년래)에 손가락으로 자주 꼽기 어려운데 先生(선생)같은 분이 어찌 그런 사람이 아니리오. 墓前(묘전)에 옛날에 短碣(단갈)이 있었는데 字畵(자화)이 문드러져 실로 알아보지 못하니 後孫(후손) 遇善(우선)이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나 繼洙(계수)에게 명(命)하여 記錄(기록)케 하니 진실로 典重(전중)하여 감히 사양치 못할 것이로되 外裔(외예)가 되어 또한 감히 사양치 못하고 삼가 銘(명)을 만드노니 銘)명)에 이르기를 錦城山(금성산)의 靈氣(영기)모여 하늘까지 다달았네. 우리 先祖(선조)를 내리시어 능히 先德(선덕)을 본받았네. 孝道(효도)는 득실하게 父母(부모)를 奉養(봉양)했고 중심으로 나라를 근심했네. 남은일은 文章(문장)이다. 세상이 공경했네. 東(동)쪽의 岱山(대산) 같고 北(북)쪽의 北斗(북두)같네. 先祖(선조) 祠宇(사우)에 配享(배향)하니 祭祀(제사)를 어기지 않네. 碑石(비석)에 새기니 千億年(천억년)까지 말하리라. 崇禎五癸丑三月上澣 外裔 錦城 吳繼洙 謹撰 숭정5 계축3월 상한 외예 금성 오계수 근찬
<사진:일헌공15세손 병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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