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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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기유약조
(己酉約條)
1609년

광해군 1년

◈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일본이 끈기 있게 통교를 요청해 조선이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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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관지 / 기유약조1609년(광해군 1) 일본에 통교를 허용하기 위해 대마도주와 맺은 강화조약. ≪통문관지 通文館志≫에 실려 있다.

정의

1609년(광해군 1) 일본에 통교를 허용하기 위해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외교권을 행사한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강화조약.

개설

임진왜란으로 서로 적대시하고 있던 우리나라와 일본은 전쟁 뒤 10년 만에 그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이 조약이 성립되었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용

1598년(선조 31)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 측에 통교 허용을 간청하였다. 그들은 이에 앞서 우리나라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에게 외교권을 주어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요청해왔다.

이러한 끈질긴 요청에 우리 측도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국교를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 아래 허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선행조건으로서 ①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② 왜란중 왕릉을 발굴한 범릉적(犯陵賊)을 압송해올 것, ③ 피로인(被擄人)을 송환할 것 등 3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일본측이 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조약이 성립되었으며, 우리나라가 일본에 통교를 허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일본측에게 전쟁을 유발시킨 범죄행위를 스스로 시인케 한 외교문서가 되었다.

조약의 내용이 수록된 문헌으로는 『통문관지(通文館志)』·『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변례집요(邊例集要)』·『고사촬요(攷事撮要)』·『접대왜인사례』·『대마도문서(對馬島文書)』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약 체결에 대해 포괄적으로 평가하고 세견선(歲遣船)만 밝히고 있다.

조약의 명칭도 문헌에 따라 기유약조·기유개정약조(己酉改正約條)·약조·기유년신정약조·송사약조(送使約條)·만력기유년신정약조(萬曆己酉年新定約條) 등으로 달리 표기되어 있으며, 조약문의 내용과 조문수도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통문관지』에는 전문 13조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마도주에게 내린 세사미두(歲賜米豆)는 모두 100석으로 한다. ②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고 특송선은 3척으로 하되, 세견선에 포함시켜 계산한다. 그밖에 사송선(使送船:일본과 대마도의 사신을 수송하는 선박)을 파견할 경우라도 세견선에 붙여야 한다. 세견선의 비율은 대선 6척, 중선·소선은 각각 7척으로 한다.

③ 수직인(受職人: 외국인으로 우리나라 관직을 받은 사람)은 1년에 한 차례씩 내조(來朝)해야 하며, 다른 사람은 파견할 수 없다. 내조시에 반종인(伴從人)은 평시와 같이 1인으로 한다. 수도서견선인(受圖書遣船人)인 겐소(玄蘇)와 평경직(平景直) 두 사람은 일년에 한 차례씩 내조해야 한다.

④ 모든 입국왜선은 대마도주의 문인(文引: 여행이나 통행을 허가하는 증명서)을 소지해야 한다. ⑤ 대마도주에게는 전례에 따라 도서를 만들어준다. 그 모양은 종이에 찍어서 예조와 교서관, 부산포에 두고 서계(書契)가 올 때마다 그 진위와 격식 위배 및 증표의 일종인 부험(符驗) 유무를 선별(船別)로 점검해 위배한 자는 돌려보낸다.

⑥ 문인이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도박(到泊: 선박을 정박함)한 자는 적으로 논한다. ⑦ 왜관 체류시일은 대마도주 특송선은 110일, 세견선은 85일, 그밖에는 55일로 한다는 등이다.

이 약조는 앞서의 임신약조·계해약조보다 일본 측에 제한을 가한 것이었으며, 이후부터 우리나라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계축화옥
(癸丑禍獄)

1613년
광해군 5년

◈ 사색당파(四色黨派) 중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옥사(獄事).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小北派)의 우두머리이며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내었고,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내려 했는데, 때마침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고 대북파는 이들을 문초할 때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허위자백케 하여 김제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하였는데, 후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그를 소사(燒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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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광해군 5) 사색당파(四色黨派) 중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옥사(獄事).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小北派)의 우두머리이며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몰아낸 사건이다.

대북파에서는 계속하여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은 모두 조정 고관의 서얼들로서 출세의 길이 막힌 데 불평을 품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다가 그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파는 이들을 문초할 때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허위자백케 하여 김제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하였는데, 후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그를 소사(燒死)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계축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화옥이라고 한다.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
인조 5년

◈ 만주에 본거지를 둔 후금(後金: 뒤에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표방하자 중원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후금은 배후인 조선이 두려워 침략하게 된다. 강화로 피신한 인조는 강화조약을 맺고 조선과 후금이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었으나, 후에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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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27년(인조 5) 후금(後金 : 뒤의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역사적 배경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용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身彌島)로 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더욱이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강요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 배금의 길을 굳히게 되었다.

후금 역시 세폐와 중강(中江)의 개시(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결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
인조 14년

◈ 36년 12월∼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약을 맺었으나, 1632년 후금이 양국관계를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을 요구해 왔고,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쳐들어 왔다. 남산산성에서 치욕의 항복한 인조는 세자와 왕자, 삼학사(三學士) 등 많은 인질로 보내고 종속의 예를 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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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사적 제57호. 도성을 지키던 성으로 산세를 그대로 이용했으며,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군과 대치하여 격전을 벌인 곳이다.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개설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경과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가 이르러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인조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숭례문 누각에 앉아 사후 대책을 물으니, 전 철산부사 지여해(池如海)가 정병(精兵) 500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가 청군의 선봉 부대를 무찌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여러 신하들은 500의 군사로 적을 시험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具仁)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때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 여주목사 이필원(李必遠), 이천부사 조명욱(曺明?), 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朴煥)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고,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할 큰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의 군사는 험천(險川)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 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藍浦縣監) 이경(李慶) 등이 전사했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 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적장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뒤에 역습을 당해 수원으로 퇴각한 뒤 전군이 무너졌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가 토산(兎山)에서 패주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앞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도 국내 유적(流賊)으로 인해 원병을 보낼만한 처지가 못되었고,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진홍범(陳弘範)에 명해 수군을 동원하려 했으나 그것도 바람과 파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경기·호남·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경기도에서는 적병이 강화성을 공략할 때 다소의 전과를 거두었고, 호남에서는 전 참의 정홍명(鄭弘溟)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공주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진 뒤라 군사를 파했다.

경상도에서는 김식회(金湜會)의 의병이 여주에서 퇴주하는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군사와 함께 조령(鳥嶺)·죽령(竹嶺) 사이를 잠행하다가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또한, 의승군(義僧軍)도 봉기했으나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구원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성중은 안과 밖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차차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화파(主和派)는 주전파(主戰派)와의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蘊)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1637년 1월 3일 최명길·이식(李植)·장유(張維)로 하여금 회답하는 국서를 초(草)하도록 했는데, 최명길의 글이 공손하다 하여 그것을 채택하고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등을 청군 진영에 보내 화호(和好)를 청했다.

그러나 청태종의 답서는 조선 국왕이 친히 성안에서 나와 자기 군문(軍門)에 항복하고 척화주모자 2, 3인을 결박지어보내라는 내용이어서,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고 정론(政論)이 구구해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성안에 이르렀다.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은 대신이나 대군의 말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성안에 있는 피난민이나 섬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청군이 강화도만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다.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은 ‘검찰사의 지휘 명령을 받들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 배척하는 등 알력이 심해 강화 수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월 21일 밤 초경(初更)에 청군이 강화도를 침입하자 김경징은 그제야 놀라서 파수계책을 일르면서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주었다.

부마(駙馬) 윤신지(尹新之)로 대청포(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유정량(柳廷亮)은 불원(佛院)을, 유성증(兪省曾)은 장령(長零)을, 이경(李坰)은 가리산(加里山)을 각각 지키게 하는 한편, 김경징 자신은 진해루(鎭海樓) 아래로 나가서 갑곶(甲串)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군사가 적은데다 새로 모집하는 군사들도 흩어져서 결국 강화도성을 지키기로 했다.

한흥일(韓興一)과 정백형(鄭百亨)을 시켜 성안에 피난온 사람을 이끌고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燕尾) 서쪽을 풍덕군수 이성연(李聖淵)이,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한인(韓仁)이, 갑곶 아래는 첨지(僉知) 유성증이, 선원(仙源) 이하는 유정량이, 광성 이하는 윤신지가 각각 지켰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해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탄이 물을 넘어 육지 몇 리밖에 떨어졌다. 이를 본 김경징과 이민구는 놀라 부성(府城)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사대장 장신은 해전을 벌리려다 도중에 퇴각해 싸움을 회피하니 강화도의 위급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청군은 복병을 의심해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1척을 먼저 보내 7명을 상륙시켰다. 이것을 본 관군이 조총(鳥銃)을 쏘았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되었다.

적병 7명은 해안을 둘러봐도 사방에 복병이 없자 흰 깃발을 흔들어 부르니 일시에 적의 대군이 밀어닥쳤다. 성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과 이민구는 말을 버리고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전선에 올라타고 함께 도망하니, 남은 것은 부성 안에 있는 빈궁(嬪宮)과 왕자 및 대신들로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대신들이 명해 부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빈궁이 일의 급박함을 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가 바다를 건너가려 했으나 비국(備局)이 문을 굳게 지키고 열지 않았다.

이에 내관 김인(金仁) 등을 불러 원손을 보호하고 피신할 것을 부탁해 그들은 원손을 모시고 교동(喬桐)에 이르렀다가 주문도(注文島)로 옮겨 그대로 당진(唐津)으로 향했다.

부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으로는 원임대신 김상용 등의 관원과 어린이, 부녀자들도 많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화(和)·전(戰) 양론이 팽팽이 맞서다가 주화론이 우세해 인조의 출성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이 화의를 반대 자결을 꾀하려다 실패했다.

이 때 청군은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대군의 수서(手書)와 재신(宰臣)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를 보이면서 독촉했다.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드디어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또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마부태 등의 사신이 우리 성안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끝에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島, 皮島라는 설도 있음.)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이상 11조문은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며 고통이었다. 드디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부로(浮虜)를 일부 송환한 다음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제도의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비록, 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청군은 철수하는 도중 4월에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는데 이때 청태종은 패륵 악탁과 명나라의 항장(降將) 공유덕(孔有德) 등에 명해 용산(龍山)에서 병선을 만들게 했다.

조선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얻어 그 준비를 갖추었는데, 항복 조건에 따라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수장(首將),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金礪器)를 몰래 보내 명 제독 심세괴(沈世魁)에게 피하도록 알렸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1만의 군사와 함께 역전하던 끝에 전사해 동강진은 17년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과

일단 전쟁이 끝을 맺자 전후 처리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의 실함이 인조의 남한산성 출성(出城)을 재촉케 했으니 우선 강화도 방수에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舟司大將)으로 해상의 방어를 맡았던 장신은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왕명에 의해 스스로 자살하도록 했다.

검찰사로서 강화 수비의 총책을 맡았던 김경징이 사사되었으며, 강화 수비의 부책임자였던 이민구는 영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은 사력을 다해 바다를 지켰으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한편, 강화부성이 함락될 때 전현직 관료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많은 선비들이 순절했고, 부녀자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메어 절개를 지켰는데 난이 끝나자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단(壇)을 설치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또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자에게까지 휼전(恤典)을 베풀고 시상했다.

난이 끝난 뒤 조선과 청 두나라는 종번관계(宗藩關係)로 굳어져 가면서 청의 위협과 조선의 복종이 강요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종속시키기 위한 화의 교섭을 통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조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군신 관계가 재확인됐다. 이로부터 조선은 속국이 확인된 셈이다.

청은 또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비의 건립을 조선에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었다.

인조가 남한 출성에 앞서 합의한 강화 조약의 기본 원칙에는 연호 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명의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버리고 청의 ‘숭덕(崇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개월 동안은 제대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청은 청나라의 연호만 쓸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결국 인조는 청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공사 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을 사용할 것을 내외에 명했다. 그러나 개인 문서나 제향(祭享)의 축사(祝詞)에는 의례히 명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청에 대한 배척 의식이 고조되어가는 과정에서 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왔다. 그것은 청태종이 명의 금주(錦州)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파병 반대 여론이 강했으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청군과 함께 참전한 조선군의 상장 임경업은 청군들이 모르게 40여척의 병선을 중도에서 빼돌리고 남은 80여 척의 배만 이끌고 대릉하(大凌河)·소릉하(小凌河) 하구를 거쳐 개주(蓋州)에 도착한 다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명·청 양군의 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청태종은 임경업에게 조선 전함 3척을 명과의 경계선인 등주(登州) 앞바다에 척후로 보내어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임경업의 조선 수군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척후선으로 명군과 은밀히 내통해 청군의 동태를 명의 진영에 보고하고 조선의 파병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임경업의 반청 행위가 탄로되자 청태종은 임경업의 군대를 조선에 돌려보내 강화 조약의 불이행을 엄중히 항의했다. 1641년 청태종은 또 조선에 대해 원군의 파견을 요청해 조선은 2,000명에 달화는 포수·기병·마부 등을 동원하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삼아 출동하게 했다.

조선군은 심양에 도착해 청태종의 열병을 받고 5월에 청군과 함께 금주 싸움에 참가했다. 그러나 명·청 양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는데도 조선군의 주장 유림은 병을 이유로 싸움에 나가지 않고 은밀히 군중에 명해 공포를 쏘아 명군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했다.

조선군이 대명전에서 싸움을 기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청은 조선군의 주장을 교체시킬 것과 포수 500명을 증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을 유림의 후임으로 삼아 포수 500명을 이끌고 금주로 향하도록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선 원군의 파병은 청의 일방적인 강압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조선군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협력을 얻어 명을 치자는 청의 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조선의 반감만 증폭시켜 청에 대한 적개심만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에 처리해야 될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 납치된 수만(다른 기록에는 50만)인의 속환 문제였다. 특히,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비싼 것은 1,500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경신환국
(庚申換局)

1680년
숙종 6년

◈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한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하다가,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3형제가 남인인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 발각된 '삼복의 변[三福之變]’을 계기로 남인이 대거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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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내용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왕실 사용의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柳赫然)에서 서인계의 김만기(金萬基)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申汝哲),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즉, 허적의 서자 견(堅)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도체찰사부는 효종 때까지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현종 때부터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쪽의 정성공(鄭成功)·오삼계(吳三桂)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윤휴(尹)·허적 등의 주장이 제기되어, 1676년 정월에 다시 설치되었다.

허적은 훈련도감·어영청 등 서울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귀일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김석주측의 반대로 다음해 6월에 일시 혁파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국왕 및 궁성 호위부대로 발족한 중앙군영들은 예외적인 존재로 그것에 통속되지 않았다. 이 때 총융사와 수어사는 중앙군영의 하나였으나, 경기도 군사력으로 간주되어 도체찰사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남인측이 나머지 두 중앙군영의 군권마저 이에 귀일시키려 하자, 김석주 등의 반발을 받은 것이다.

도체찰사부는 1678년 12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나,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실상 중앙군영들은 대부분 서인측에 의하여 창설, 발전되어 온 것이어서, 이에 관한 서인의 관심이 높았다. 이 사건 벽두에 중앙군영의 군권이 서인계에 전격적으로 넘겨진 것이나, 김석주가 서인과 제휴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역 혐의의 주된 내용이 도체찰사부 군사의 동원문제로 귀착됨에 따라, 이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계된 자 모두가 연루되게 마련이어서 허견과 삼복(三福)뿐 아니라 허적·윤휴·유혁연·이원정(李元楨)·오정위(吳挺緯) 등 남인계의 중진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고변자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의 연루자들에 대해서는 “장사꾼들에게 뇌물을 받고 시장을 옮겼다.”거나, “각 사 공물(貢物)을 많이 시장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통용하게 하여 그 값을 나누어 먹었다.”는 등 상인 및 상업과의 관계를 지적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정파의 어느 쪽이건 간에 당시의 정치가 경제의 새로운 변동에 영향을 받게 되는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시된다.

이 시기 이후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변모이다. 이 사건으로 도체찰사부가 혁파됨에 따라 대흥산성의 재물은 김석주가 관리청을 따로 세워 관리사로서 관장하였다.

 

기사환국
(己巳換局)

1689년
숙종 15년

◈ 숙종 초기인 1680년(숙종 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정비(正妃)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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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숙종 15) 남인(南人)이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언제 : 1689년(숙종 15)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민씨가 왕후로 간택되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으며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을 낳게 되자 일약 정치적 격변을 몰고오게 되었다. 왕자 윤의 출생으로 파급된 여파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불렀다.

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政局)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金壽興) ·김수항(金壽恒)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 이 환국(換局)의 여파로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

 

갑술환국
(甲戌換局)

1694년
숙종 20년

폐비된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권한 남인(南人)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왕비 책봉까지 승승장구 하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민암 등이 사사하고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집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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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언제 : 1694년 숙종 20년

어디서 : 조선왕궁

누가 : 숙종

무엇을 : 폐비민씨복위문제를 계기로 남인 실권, 소론과 노론 재집권

어떻게 : 희빈장씨 및 남인 처벌, 소론과 노론 요직에 등용

왜 : 폐비민씨복위

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힘겹게 집권했는데, 기사환국은 남인이 스스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서인에 대한 숙종의 염증과 혐오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 특히 궁녀였던 소의장씨를 두고 서인과 숙종의 갈등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남인이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남인은 자신들의 실권을 항상 불안하게 여겼으며 언제든 또다시 실각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당시 노론이었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함이완이 이런 사실을 남인 민암에게 고변하였고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서인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이때 남인들은 민씨 폐출(廢黜)의 원인이 된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 소생의 원자(元子) 정호(定號)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만일 민씨가 복위하여 다시 왕비가 되면 남인은 또 실권하게 되므로 폐비민씨를 지지하는 김춘택 등 서인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의 심경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禧嬪:희빈장씨)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으나,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씨보다는 무수리 출신의 후궁 최씨(최씨는 후일 영조의 생모가 된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게다가 궁중 내에서는 최씨의 독살설이 퍼지면서 남인들은 다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마침내 숙종은 남인이었던 민암의 처사를 문제삼았고 김춘택 등의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민암을 사사(賜死)하고 남인 세력인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유배하였으며, 동시에 민씨를 지지했던 소론의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한편,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고 그때 민씨를 지지하여 2번이나 상소를 올렸다가 사사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김수항(金壽恒) 등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사건을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하며 이후 남인은 정치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집권하지 못했다.

 

기묘과옥
(己卯科獄)

1699년
숙종 25년

◈ 숙종대에 과거시험의 부정으로 일어난 옥사(獄事).

 단종(端宗)의 폐출과 시해 후 200년이 지난 숙종 때 단종을 왕으로 추존시키고, 이를 경축하기 위하여 증광과(增廣科)를 실시하여 임시로 과시를 시행했으나 이 과거에 상소로 '시험지 바꿔치기[符同易書]', '고군(雇軍) 바꿔세우기' 등의 부정이 있었음이 탄로가 나서, 시험은 파방(罷榜)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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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건

시대 : 조선

발생·시작 일시 : 1699년(숙종 25)

관련인물·단체 : 이탄

정의

조선 후기 과거 시험에 대한 부정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

내용

1699년(숙종 25) 단종 추존을 위한 왕위 복위를 경축하기 위해 증광문과를 설행, 한세량(韓世良) 등 34인이 합격을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언(正言) 이탄(李坦)의 상소로 이 과거 시험에 부정이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즉, 복시(覆試)에 등록관(謄錄官)·봉미관(封彌官)·서리 및 하인들이 청탁을 받고 입격시권(入格試券)에 다른 응시자의 피봉(皮封)을 붙여서 합격시킨 사례가 13건, 역서(易書 : 답안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베끼는 것) 때 고쳐 써준 사례가 1건, 응시자가 소제(所製)의 문두(文頭)만 써서 시관에게 전해 합격한 사례가 1건, 응시자가 자호를 시관에게 알려 합격한 부정 사건 등이 계속 드러났다.

이 시험은 시험 자체가 무효로 되는 파방(罷榜)이 되는 등 당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당시 상시관(上試官)이었던 예조판서 오도일(吳道一) 등 수 십 명이 절도(絶島)에 유배되었으며, 부동역서(符同易書)를 한 이제(李濟)·윤귀설(尹貴說) 등은 3년 동안 병역 복무[充軍]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장을 지키는 고군(雇軍)들에게는 제주도에서 3년 동안 강제로 병역에 복무하게 하는 등의 조처가 취해졌다.

이와 같은 과거 시험에 대한 부정은 관련자들이 금력에 눈이 어두워 각자의 소임을 공정하게 수행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돈만 있으면 어사화도 얻을 수 있다(御賜花耶 金銀花耶).”라는 속언은 이러한 실정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신임사화
(辛壬士禍)

1721년-22년
경종 1- 2년

◈ 1721년(경종 1: 辛丑年)-22년(경종 2: 壬寅年)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2년에 걸친 소론(小論)이 노론(老論)을 숙청한 사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는데,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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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경종 1)~1722년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

언제 : 1721년(경종 1)~1722년

누가 : 소론

무엇을 : 노론

어떻게 : 숙청

왜 : 왕통문제

이미 숙종대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여 사문(斯文)시비를 벌였으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논지가 바뀌었다. 신임사화라는 용어는 당대부터 쓰였으나, 화를 입은 노론측의 입장이 반영된 용어이다. 노소론 사이의 대립에 왕통문제가 개입된 것은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인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뒤에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을 하다가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延?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노론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태도 변화를 보임으로써 소론측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辛丑獄事).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 즉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대의 문제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정미환국
(丁未換局)
1727년
영조 3년

◈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정국(政局)의 인사를 개편한 일.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하게 시행함으로써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당쟁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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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영조 3)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소론이 정계에 복귀하도록 정국(政局)의 인사를 개편한 일.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당쟁의 폐해를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노론(老論) ·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당파성이 강한 사람은 제거시키고자 하였다. 때마침 노론의 이의연(李義淵)이 상소하여 당쟁을 부추기는 물의를 일으키자 영조는 그를 유배시켰으며, 아울러 소론 중에서 당파성이 농후한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도 국문 결과 상소를 허위 날조한 사실이 밝혀져 처형하고 같은 파의 이광좌(李光佐) 등도 유배시켰다. 한편 노론의 정호(鄭浩) ·민진원(閔鎭遠) 등을 기용하고 ‘신임(辛壬)의 옥(獄)’에 희생된 김창집(金昌集) 등의 관작을 추복, 원혼을 위로해 주었다. 이리하여 노론이 주요한 직책을 차지한 결과가 되었으나 영조의 뜻은 본래 노 ·소 양파의 당쟁을 조정하는 데 있었으므로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趙泰億) 등도 기용하였다. 또한 노론의 온건파인 홍치중을 기용하여 탕평책을 실효성을 높이고 노론과 소론을 막론하고 고르게 등용하였다. 하지만 노론의 영수 정호와 민진원은 소론에 대한 압박을 오히려 강화했고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도록 홍치중을 압박하여 사직토록 했다. 이에 다시 정국이 당쟁의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영조는 더이상 노론을 설득하지 않고 과감하게 그들을 삭탈관직 시키고 소론을 대거 기용하였다. 유배형을 받은 소론들이 해배되어 정계에 복귀하였고 을사처분으로 신원이 회복되어 4충신으로 불렸던 4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命)이 다시 4역적으로 번복되었다. 이에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을해옥사
(乙亥獄事)

1755년
영조 31년

◈ 소론(少論)의 윤지(尹志) 등이 일으킨 모역(謀逆) 사건으로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라고도 한다.

  윤지는 1722년(경종 2) 임인무옥(壬寅誣獄)에 연좌되어 나주로 귀양갔다가 노론(老論)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나주 객사에 민심동요 괘서를 붙였는데, 발각되어 거사(擧事)하기 전에 붙잡혀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 등과 같이 사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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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성격 : 역모, 당쟁

유형 : 사건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별칭 : 을해옥사, 윤지(尹志)의 난

관련 인물/단체 : 소론, 노론, 윤지

요약1755년(영조 31) 소론(少論)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

[개설]

‘을해옥사’ 또는 ‘윤지(尹志)의 난’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숙종 말년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의 세자책봉 주장이 관철되었다. 이로써 연잉군 금(延?君昑 : 뒤의 영조)이 세제(世弟)로 봉해졌다.

이에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등 소론 4대신은 이를 시기상조라고 따지고 공격하였다. 경종 말년 세제 연잉군의 정무대리(政務代理)까지 강행되었다. 그러자, 소론에서는 승지인 김일경(金一鏡)·이진유(李眞儒)·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의 역모를 무고(誣告), 4대신 및 수 백인의 노론 일파가 참살, 실각당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노론이 등장하면서 김일경의 옥사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소론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 때 김일경 부자의 참살은 물론, 윤지의 아버지인 훈련대장 취상(就商)도 고문으로 죽었다.

또한 뒷날 을해옥사의 주역인 윤지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제주도로 유배당하고, 뒤에 나주로 옮겨져 20여년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영조 즉위 얼마 뒤 실세한 소론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1727년(영조 3) 노론 일부가 실각하자,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일으켰다.

영조의 왕위 정통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密君坦)을 왕으로 옹립한 반란이었다. 한 때 청주를 중심으로 형세가 매우 커졌으나 곧 진압되어 주모자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론은 또 크게 타격을 받았다.

[경과 및 결과]

윤지는 아들 광철(光哲)과 함께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및 이효식(李孝植), 박찬신(朴纘新) 등 서울과 지방 각지의 소론을 모으고,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불평분자들을 끌어들여 점차 기반을 구축해갔다.

윤지는 거사 전에 우선 인심을 동요시키고자 1755년 1월에 나주 객사(客舍)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였고, 푸닥거리로 민심을 현혹시키며 동지 규합에 힘을 썼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괘서가 발각되었다. 이로써 윤지는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에게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았으며, 그해 2월에 처형당하였다.

이 때, 박찬신 및 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 등 많은 소론파 인물들이 함께 사형되었고,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원찬(遠竄)되었다. 3월에는 조태구·김일경 등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였다.

5월에는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에서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과 관련, 윤지의 일파인 심정연(沈鼎衍)이 붙잡혀 사형되었다. 이어 춘천에서 윤혜(尹惠)·김도성(金道成)·신치운(申致雲) 등이 주모한 역모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 모두 사형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남아 있는 소론파 인물들도 대부분 연루, 실세되어 재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소론의 역모 주동자를 모두 제거한 영조는 《천의소감 闡義昭鑑》이라는 책을 편찬하게 하여 이 사건들의 시말을 자세하게 밝히게 하였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당쟁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계에서 차지하였다.

반면, 실세한 소론들은 거의 신원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원망이 누적되어 당화(黨禍)는 잠재된 채 윤지의 난으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이 여의치 못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다.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 윤지가 적소(謫所)인 나주에서 나라와 노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은밀히 세력을 규합해 모의를 계획하고 있었다.

 

신해박해
(辛亥迫害)

1791년
정조 15년

 정조대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신해사옥,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선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낸 것에서 문제가 야기되어 조정에서는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해 가톨릭교가 전래된 이래 최초의 순교자를 내었다. 이 문제로 남인은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 신봉을 묵인)와 공서파(攻西派:가톨릭교 탄압)로 대립하게 되어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신서파가 타격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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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신해사옥,  진산사건,  신해진산사건

유형 : 사건

시대 : 조선

성격 : 천주교박해, 종교탄압

발생·시작 일시

정의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내용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이라고도 함.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천주교는 경기와 내포(內浦)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尹持忠) 집안에서 폐제분주(廢祭焚主)의 문제가 일어났다.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1742년, 교의적(敎義的)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紀律的)인 잠정적 변법(暫定的辨法)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 바 있었다(이 조치는 1939년에 교의적 결정에 의하여 조상제사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천주교회가 인정하게 됨으로써 실효되었다).

당시의 이 기율적 변법에 터전하여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은 그의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았고, 제사를 드리지 않고 천주교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렀다.

이 때문에 윤지충은 강상(綱常)을 범한 죄인으로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 때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權尙然:윤지충의 인척)이 그를 옹호하고 나서 문제는 더욱 소란해졌다.

진산에서의 사건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공서파(攻西派:천주교를 공격하는 세력)는 신서파(信西派:천주교를 신봉 또는 묵인하는 세력)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서서 이 일을 정치문제로 확대시켰다.

공서파는 폐제분주는 전통적 유교사회의 제례질서를 파괴하는 패륜(悖倫)이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불효·불충이라고 잇따라 상소를 올려 신서파를 공격하며 정조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도 사태를 심각하게 느끼게 되어 마침내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으로 하여금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문초하게 하였다.

윤지충은 조상제사는 허례이며 진정한 조상추효(祖上追孝)의 방법이 아님을 항변하였으나, 결국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를 신봉하고 이를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되었다. 사건은 그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진산사건은 한국천주교 내외에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사건인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천주교회는 밖으로부터 전도의 사명을 띠고 한반도에 들어와 전교활동을 펴는 선교사의 활동 없이 쇄국 조선의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에 의하여 창립된 교회였다. 즉, 서학(西學)이라는 학문활동으로 천주신앙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창설된 교회였다.

그들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은 17세기 초부터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부연사행원(赴燕使行員)들에 의하여 도입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의 접촉과 연구를 통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 이해에 터전하여 천주신앙을 얻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천주교의 도리가 유교의 그것과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현세당위론적인 선(善)의 추구를 전지전능의 천주와 연결지어 이해하였고, 내세(來世)와의 연관에서 파악하고 천주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이제 신해진산사건으로 그들이 믿고 있던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라는 처지에 한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조상제사 문제에서 지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교의 전통적 가치체계로 후퇴하거나, 그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적 가치체계를 숭봉하느냐를 택하여 하나의 결정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어려운 결정의 시기에 탈락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새로운 결심에서 신앙생활의 새 경지로 매진하는 교인도 많았다. 이 시련을 통하여 한국천주교회는 보유론적 천주이해라는 초기신앙 형태의 문화주의적 종교신앙에서 순수한 천주신앙으로 접어들게 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제2의 장이 열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공서파는 천주교회에 대한 공격을 더욱 날카롭게 하게 되고,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구실을 조상제사의 거부라는 데서 명목을 찾게 되었다. 이 논리는 이후 100여 년을 두고 천주교 박해의 이유로 십분 활용되었다.

 

갑인통공
(甲寅通共)

1794년
정조 18년

◈ 조선 정부가 육의전(六矣廛) 이외의 다른 시전(市廛)이 가졌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특권을 폐지하고 자유상인과 수공업자들도 도성 안에서 자유로이 상(商)행위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한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

  정조가 실학자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를 받아들여, 육의전를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을 실시해 상업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과정은 1787(정조 11)의 정미통공(丁未通共)과 1791년의 신해통공(辛亥通共)에 이어 1794년 갑인년(甲寅年)에 완성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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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1794년(정조 18) 갑인년에 이루어진 통공 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

내용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시전(市廛)의 특권을 모두 폐지하고, 자유 상인과 수공업자들도 도성 안에서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한 일종의 상공 유통정책이다.

일찍부터 육의전을 비롯한 서울의 시전상인들은 그들의 조합으로 도중(都中)을 결성하고, 조정으로부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얻어내 도성 안의 상권을 독점, 사상(私商)들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인구가 급증하고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상들은 시전상인들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종루(鐘樓)나 이들의 금난전권이 행사되지 않는 서울 종로 4가 부근에 있었던 이현(梨峴), 지금 서소문 부근에 있었던 칠패(七牌) 등지에서 상행위를 하여 번창해갔다.

또한, 시전상인들이 금난전권을 과도하게 사용해 물가가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사상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금난전권을 점차 완화시키다가 1787년에 정미통공, 1791년 신해통공에 이어 갑인통공령을 발표하였다. 이 같은 통공정책은 정부의 재정궁핍을 보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기도 하지만, 점차 확장하는 서울의 상공업 발전 추세에 따른 불가피한 상공 정책이었다.

이로써 도고(都賈)·문벌세가와 그 하속배·외방부상·강상(江商) 등 자유 상인과 자유 수공업자들은 새로이 전(廛)을 설치하고 육의전에서 취급하는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을 자유로이 판매하였다. 또 지방 도시와 연결, 상권(商圈)을 확대시켜 도성 안의 상품 시장은 종전에 비해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반면, 상권을 침해당한 시전상인들은 상업 경영상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때문에 상품 매매권을 둘러싼 갖가지 쟁의와 분규가 일어나게 되고 종전에 조정에 대해 졌던 세부담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초엽에는 시전상인들이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되자, 통공정책을 폐지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을묘박해
(乙卯迫害)

1795년
정조 19년

◈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체포 실패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天主敎) 박해(迫害) 사건.

 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이 유배되었고 후에 경신박해(1800년)·신유박해(1801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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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을묘사옥

유형 : 사건

시대 : 조선

성격 : 천주교박해, 종교탄압

발생·시작 일시 : 1795년(정조 19)

관련인물·단체 : 주문모

정의

1795년(정조 19) 을묘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전개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

내용

1784년에 창설된 조선천주교회는 성직자 없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의 자학(自學)을 통하여, 천주신앙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무목자교회(無牧者敎會)였다.

이들은 신앙생활의 실천과 교회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성직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1791년경부터 북경(北京)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성직자영입운동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794년 말에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6개월 뒤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 신부의 입국 사실과 그의 거처가 관가에 알려졌다. 1795년 6월 27일 포졸들이 주 신부의 거처인 최인길(崔仁吉)의 집을 덮쳤으나, 주 신부는 이 사실을 사전에 통고받고는 피신하고 없었다.

포졸들은 최인길을 주 신부로 오인하여 대신 체포하였다. 뒤늦게 주 신부가 아님을 안 관가에서는 주 신부를 중국으로부터 인도해 온 지황(池璜)과 윤유일(尹有一)을 체포하여 그들에게 모진 고문으로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다.

하지만 이들이 끝까지 함구하여 실토하지 않으므로 체포 다음날 타살(打殺)하였다.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이 사실을 알고, 세 사람을 일찍 죽게 해서 주 신부 체포의 기회를 놓쳤다는 상소를 올려 문제를 재연시켰다.

그리고 부사과 박장설(朴長卨)이 주문모 체포 실패의 책임을 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에게 전가하는 장서(長書)를 올린 뒤로부터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으므로 마침내 이들을 심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시켰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각각 좌천시켰다.

이로써 주 신부로 인한 을묘박해는 서울에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도리어 박해가 더욱 심해져 1800년의 경신박해를 유발하였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발전하였다.

 

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년
순조 1년

◈ 순조 즉위 후 정순대비 주도로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으로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1801년 정월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려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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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배론 성지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조선 후기의 천주교도 황사영이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제천 배론의 산중의 토굴 속에서 <황사영 백서>를 썼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기해박해
(己亥迫害)

1839년
헌종 5년

◈ 헌종대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함.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으로 세도 정치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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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주교 앵베르는 교인이 고초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과 샤스탕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경신박해
(庚申迫害)

1860년
철종 11년

◈ 경신년(庚申年)에 일어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1859년 12월 마지막 주에 시작되어 이듬해 9월까지 약 9개월 간 지속되었던 천주교도 탄압 사건.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 좌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켰는데, 포도대장의 탐욕과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 포졸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방편 등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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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철종 11) 경신년(庚申年)에 일어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언제 : 1860년

무엇을 :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왜 : 임태영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킴

1859년 12월 마지막 주에 시작되어 이듬해 9월까지 약 9개월 간 지속되었던 천주교도 탄압 사건이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 좌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켰는데, 포도대장의 탐욕과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 포졸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방편 등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박해가 일어날 무렵 조선의 정치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시파(時派)인 안동김씨가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천주교회는 순조로운 교세확장을 도모해 나갈 수 있어서 한 해에 약 1,200명 이상의 예비신자들을 모아들일 수 있었고 전국의 신자수는 약 16,700명에 달하였다.

박해는 서울에서 시작되어 지방으로 번져, 특히 전라도 쪽의 교우촌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주로 가장(家長)들, 재산이 있는 유력한 신자들이 체포되어 서울의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탐욕이라는 경제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박해였기 때문에 포졸들의 방화 ·약탈 ·부녀자 겁탈의 사례가 너무 많아서 자연 천주교도들에 대한 주민들의 동정심이 일어났고,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 ·다블뤼 주교 등 서양인 선교사들을 검거하지 못하자 박해의 명분이 약화되면서 마침내 정국의 주도세력인 안동김씨로부터도 천주교도들의 재산약탈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하여 비난을 받게 되었다.

안동김씨 세도가의 대표적인 인물 김병기(金炳冀)는 어전회의에서 양민을 피폐하게 하는 약탈행위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국왕에게는 과거에 몇 차례 있었던 천주교도 박해사건 때마다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불행한 죽음을 가져오는 등 왕실에 상서롭지 못한 선례를 남겼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철종은 음력 8월 옥에 갇힌 천주교도를 모두 석방하게 함으로써 박해는 종식되었다.

철종의 조부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처 송씨(宋氏)와 며느리 신씨(申氏)가 천주교에 입교한 관계로 사사된 은언군(恩彦君) 인()이었기 때문에 조부의 신원(伸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천주교도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매우 꺼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분히 사적인 이유로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들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박해가 시작된 지 약 6개월 만인 5월에 관련 포도대장인 임태영을 문책 사퇴하게 하고 좌포도대장에 허계(許棨), 우포도대장에 신관호(申觀浩)를 임명함으로써 이미 박해는 한풀 꺾여 종식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이 박해로 인해 한때 천주교에 입교하려는 사람들이 격감하였고 중요한 교우촌들이 황폐화되어 신자들은 생계수단을 잃고 유랑하는 자가 많아져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박해 당시 유일한 한국인 성직자였던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경상도 죽림공소에서 포졸들에게 포위되어 한동안 갇혀 지내면서, 이번 박해로 박해 이전의 천주교의 인기가 몰락하고 정부에서 서양배를 멸시하고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천주교가 좋은 종교라고 선전하면서도 공공연히 전파를 막는 것에 대해 백성들이 의혹을 품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임술민란
(壬戌民亂)

1862년

철종 13년

◈ 삼남 약 71개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중세 조선 사회 해체기에 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다. 임술민란에서 농민들은 중세적인 조세제도를 철폐 또는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수령·관속에 대한 공격과 읍권 장악을 통해 무너져가는 중세적인 통치질서를 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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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건

시대 : 조선

성격 : 민란

발생·시작 일시 : 1862년(철종 13)

정의

1862년(철종 13)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전쟁.

내용

1862년 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70여 개 고을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일어난 곳은 2월 4일 진주 바로 위쪽에 있는 작은 고을인 단성이었다.

단성으로부터 시작된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4월에는 전라도로, 5월에는 충청도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조세문제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자 항쟁이 수그러졌다가 정부가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자 다시 터져 나왔다.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및 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농민항쟁이 발생한 주요한 원인은 삼정문란(三政紊亂)을 비롯한 봉건정부와 관리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또 항쟁 과정에서 고리대나 고을의 소작료를 통해 지역 내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토호양반·지주 부호가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농민층 분해에 따른 계급대립이 농민항쟁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농민항쟁 발생의 핵심 원인이었던 삼정문란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으로 조성된 봉건해체기의 사회모순이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조세는 삼정이라 하여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에 의해 부과되었고, 이외에 잡세·잡역세(雜役稅)가 부과되었다.

전정은 오랫동안 양전이 실시되지 못해 애초에 정확한 조세부과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해마다 풍흉에 따라 조세부담을 가감하고 조세 부담자를 모아 조세 납부조직을 만들기[作夫] 때문에 이 과정을 장악한 이서배(吏胥輩)의 농간이 심각하였다.

더구나 전결세에 각종 부가세가 붙어서 조세액이 크게 늘어났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도결(都結)을 실시해 전결세를 받고 바치는 과정의 중간 이익을 수령이나 향임(鄕任), 서리 등이 손쉽게 차지하였다. 군정은 군현별로 군역부담액은 고정되었는데 군역을 부담하는 양민(良民)은 계속 줄어들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환정은 애초 진대(賑貸)를 위한 환곡이 그 이자를 재정 확보에 이용하면서 환곡 액수가 크게 늘어나 관청 고리대로 전락하였다. 또한 환곡을 나눠주고 거두어들이는 과정에서 많은 폐단이 일어났고, 관리들이 중간에서 빼돌린 원곡을 민에게 추가로 부담시키는 일도 빈번하였다. 삼정 이외에도 농민들은 잡세와 잡역세를 부담하였다.

잡세는 포구세(浦口稅)·시장세(市場稅)·어장세(漁場稅)·실점수세 등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주로 농업 이외 부문의 생산과 유통에 주로 부과된 조세였다. 잡세는 균역법에 의해 부분적으로 국가제도에 의해 수립되었으나 대부분 중앙관청, 궁방, 지방관청의 자의적인 수취에 맡겨져 있었다.

잡역세는 지방 재정분으로 충당하기 위한 조세인데 중앙정부의 통제 없이 마구 증대해 주요한 조세문제의 하나로 대두하였다. 결국 당시의 조세문제는 개별민의 조세부담능력에 따른 정확한 조세부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신분에 따른 조세부담의 차별이 존재했다는 점, 군현 내의 수령·향임·이서배·양반들이 결탁해 조세수취를 이용해 민(民)을 수탈했다는 점, 남의 조세부담·포흠(逋欠)까지도 공동 부담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조세문제는 관리들의 부정에 의해서도 발생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구조적인 요인이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은 조세부담자의 사회적인 처지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현저해 진주의 경우 당시 토지대장을 분석해 보면 6%의 지주가 44%의 농지를 소유했고, 63%의 농민이 겨우 18%의 농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자연히 농민들간에 담세 능력의 차이를 가져왔고, 담세 능력에 따른 정확한 조세부과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신분제의 변동양상은 울산지방의 경우 19세기 후반에 절반이상이 양반 신분으로 호적에 올라 있다. 이는 남아 있는 양민층에게 군역부담이 집중되는 것을 의미하며, 신분에 따라 부담에 차이가 나는 조세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더욱이 조세 수취방식이 일반조세의 경우는 군현 단위로 제정되면 민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거두는 과정은 상당 부분 군현에 위임되었다. 이전에는 군현 내에서 지방의 사족층이 수령과 이서배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방지배력이 쇠퇴하면서 수령과 이서배를 중심으로 한 민의 수탈을 견제할 세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이제 민이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정치구조의 변화가 절실히 요청되었다. 사회모순이 심화되고, 새로운 변화가 절실히 요청되는 이 시점에 민들은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을 통해 민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독점한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판소리나 탈춤 등에는 관리와 양반의 지배를 벗어나 좀더 자유스럽게 살기를 원하는 민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농민항쟁은 농민들이 고을의 조세문제를 논의하면서 모의되기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대개 고을민들이 마을이나 고을단위로 조세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논의구조가 있었다. 고을단위의 논의는 주로 향회(鄕會)라는 고을 지배세력들이 모이는 기구에서 이루어졌지만 유사시에는 참가층이 확대되었다.

항쟁의 초기 논의과정은 향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민이 참여하는 경우와 민들이 논의를 제기해 각 마을에 통문을 돌리고 새로운 논의기구를 만들어내는 경우로 나뉘었다. 논의는 처음에는 고을 수령과 감영에 청원하는 등장(等狀)을 내자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시위를 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자는 쪽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양반들도 함께 모였지만 이들 대부분은 농민들이 논의를 주도하면서 과격한 방향으로 나가자 중간에 빠져 나오게 된다. 등장을 제기하고 시위하기 위해 읍내로 들어온 농민들은 수령을 고을 경계 밖으로 쫓아내고 관아를 부수고 이서배들의 집을 불태우거나 죽이는 활동을 벌였다.

농민들은 시위하고 돌아가는 과정에 그 동안 괴롭혔던 토호양반가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의 주된 공격대상은 이서배·향임층·양반가·부호가 등이었다. 초기에 일어난 항쟁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진주지역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주는 경상우도에서 제일 큰 고을이다. 지리산 기슭으로 토지도 매우 비옥한 편이었다. 반면 진주목과 경상도 우병영이 자리잡고 있어서 농민들의 부담이 많았다. 진주목과 경상도 우병영은 관원, 이서배의 포흠으로 없어진 환곡을 토지와 가호에 일률적으로 부담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유계춘(柳繼春)·이계열(李啓烈)·이명윤(李命允) 등의 주도아래 진주목과 병영의 부당한 조세부과에 대응하려는 모임이 1월부터 2월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첫 모의는 서쪽 축곡면에서 가졌다. 여러 차례의 모임 끝에 고을 전체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중집회를 가지기로 하였다.

2월 6일 수곡장터에서 열린 대중집회에는 여러 마을의 대표자들이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여기서 읍내를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마침내 2월 14일 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 수곡 장시와 진주 서북쪽 덕산 장시를 장악한 농민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였다. 세력을 모은 봉기민들은 덕천 강변을 따라 읍내로 진출하였다.

18일 읍내 외곽에 봉기민들이 진출하자 진주목사는 조세문제를 시정하겠다는 약속문서를 내주었다. 19일에 농민들은 객사 앞 장터에서 집회를 가진 다음 병영을 공격하였다. 농민은 20일까지 읍내에 머물면서 진주목과 병영의 이서배·양반가를 공격하고 조세문서를 불태웠다.

농민들은 읍에서 물러날 때 몇 대열로 나누어 외곽으로 나가면서 평소 자신들을 수탈하고 부리던 토호들이나 대상인, 지주·관청기구를 공격하였다. 20일에서 23일까지 22개 면을 지나면서 수십 채의 집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농민항쟁은 기본적으로 고을마다 개별항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봄철에 집중적으로 봉기하였다. 봄철은 바로 지난 가을에 매겨진 조세를 완납해야 하는 때로서 관아에서 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해 농민들을 들볶고 형벌까지도 서슴지 않는 시기였다.

그리고 어느 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던 다른 고을 농민들도 ‘어느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일어나 문제를 해결했다더라. 우리도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봉기하였다.

또 정부에서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어사 등을 파견하자 농민들이 이들의 고을 조사를 기회로 삼아 항쟁을 일으켜 이들의 순행지역에서 연속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항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지역별로 일어나는 시기나 항쟁의 유형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나타났다.

경상도 지역은 처음에 지리산 기슭인 단성·진주·함양·거창 등의 진주권에서 2∼3월 사이에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다음은 경상도 서북인 상주권에서는 상주·선산·개령·인동·성주·비안·군위 등에서 3∼4월 사이에 일어났으며, 두세 차례 일어난 읍도 여러 곳 있었다.

셋째로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울산·창녕·밀양·신녕·연일·현풍 등 경주권에서 일어났다. 이 가운데 경주·신녕·연일·창녕은 정부의 조세개혁 방안인 삼정이정절목(三政釐正節目)이 반포된 이후인 10월 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경상도 지역은 경주·창원·상주·진주·성주 등 읍세가 큰 지역에서 주로 일어났으며, 안동권에 속한 고을 중 비안에서만 항쟁이 발생한 점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경상도에서는 단성·진주·개령·인동 등에서 사족들이 항쟁 초기에 참여하는 모습도 보여, 일부 세력 있는 양반들도 세도정권이나 지방관의 수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전라도 지역은 3월27일 익산지역을 시작으로 4월과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함평·고산·부안·금구·장흥·순천·강진 등 전라도 54개 군현 가운데 38여 곳에서 항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된다. 전라도는 삼남 가운데서도 가장 항쟁이 많이 일어난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서 첨예한 계급대립과 국가 수탈이 보다 격심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함평의 경우 농민들은 14개 면의 민들이 훈장, 면리임과 연계해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한달간이나 모임을 지속하는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충청도는 농민항쟁이 크게 위세를 떨친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점과 감영이 있는 공주와 병영이 있는 청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에서 대부분 일어났다는 점이 특징이다.

곧 공주와 그 관할에 속한 임천·은진·회덕·진잠·연산과 청주와 그 관할인 문의·회인·청안·진천 등의 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읍의 규모로 볼 때는 공주·청주·임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행정적으로 소읍인 현에서 일어났다. 서쪽의 내포지역에서는 한 곳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4월에 신창·온양 등지에서 명화적이 나타나서 병영이나 진영에서 명화적(明火賊) 체포를 위해 군대가 동원되는 등 통제를 심하게 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도 지역은 대부분 초군(樵軍)이라는 땔나무꾼, 일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항쟁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은 공격 대상이 관아와 이서배에 집중된 데 비해 충청도는 오히려 토호양반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지역 양반들과 초군, 농민들간의 갈등이 그만큼 심했음을 말해준다. 삼남 이외의 기타 지역은 주로 가을에 들어서 일어났다.

당시 전라도에 속한 제주도는 9월부터 여러 차례 일어났고,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는 10월에 일어났다. 이들 지역의 항쟁은 제주도는 제주·대정·정의 세 고을만이 힘을 합쳐 이듬해 1월까지 끈질기게 항쟁을 벌인 점, 그리고 광주는 서울에 가까운 지역으로서 서울까지 와서 시위를 벌인 점 때문에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농민항쟁을 통해 농민들이 제기한 주요한 요구는 무엇인가. 농민들은 조세문제의 해결을 비롯해 봉건적인 억압과 수탈 제거를 직접 요구하고 또 행동을 통해 나타내었다. 항쟁과정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조목을 만들어 제시한 곳도 여러 곳 있었다.

경상도 내륙에 위치한 인동 역시 환곡의 포흠이 큰 문제였다. 관에서는 환곡 포흠을 농민에게 부과시키기로 하고 도결(都結)로 토지에다 배정하려 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항쟁을 일으키고 12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자료상 알려진 것이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① 이서(吏胥)의 포흠(逋欠)을 농민에게 징수하지 말라.

② 결가(結價)는 매결당 7냥 5전씩 하라.

③ 그간 도망했거나 죽은 군정(軍丁) 천여명을 장부에서 제외하라.

④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보(軍保)를 1인당 2냥씩 하라.

①은 전주(田主)와 마찬가지로 이서가 착복한 환곡을 농민에게 징수하지 말라는 것이고, ②는 토지 1결당 부담량이 자꾸 높아지자 국가가 정한 1결 23두의 부담을 돈으로 환산한 액수인 7냥 5전 이상은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③과 ④는 군역의 문제이다. ③은 평민들이 지는 군역 부담 총량을 줄여달라는 요구이다.

신분제의 변동으로 평민이 줄면서 군역 부담자가 자꾸 줄어드는데도 고을에서 내야 할 군역 총 부담량은 줄여주지 않아 남아있는 평민들의 군역 부담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④는 평민만이 군역을 지는 것은 부당하니 양반도 군역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내걸고 항쟁을 벌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요구사항이다.

한편 충청도 공주농민들은 네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봉기하였다. 그 가운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세미(稅米)는 항상 7냥 5전을 정해 거두라.

② 각종 군포(軍布)를 소민(小民)들에게만 편중되게 부담시키지 말고 각 호마다 균등하게 부담시키라.

③ 환곡의 폐단을 없애라.

④ 군액의 부족분을 보충하거나 환곡의 부족분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결렴(結斂)하는 제도를 폐지하라

①은 인동과 마찬가지로 전결세의 정액금납화를 요구한 것이고, ②는 신분에 따른 군역부담의 불균형을 해소하라는 것이다. ③은 환곡폐단의 시정요구이고, ④는 여러 가지 명목을 붙여서 전결세를 자꾸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1862년 농민항쟁에서 제기된 요구를 종합해 보면 전결세에 대해서는 무한정 높아지는 조세에 대해 1결당 조세부담을 고정할(정액금납화 요구) 것, 군역세에 대해서는 인징·족징, 신분차별을 폐지할 것, 환곡제에 대해서는 이서배의 포흠을 농민에게 부담시키지 말 것과 원곡 분급을 정지하고 순수하게 조세화 할 것 등이다.

농민들의 요구는 신분에 따른 조세 차별의 혁파, 규정에 없는 조세증대 금지, 중간수탈의 금지, 조세 부담능력에 따른 조세부과 등으로 요약된다. 농민들은 이처럼 직접 요구조건을 만들어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고을 조세운영을 담당해온 수령·향임·이서배·양반층을 공격하고,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읍의 권력을 장악해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조세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조세문제와 같이 분명하게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중세사회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요구도 다양한 부면에 걸쳐 제기되었다.

농민항쟁의 주요한 참여층인 초군들은 사대부가의 산림광점을 금하라는 요구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요구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농민항쟁의 참여자 가운데는 억울한 재판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태신(笞訊)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재판과 형벌이 수령이나 지배층의 농민수탈의 무기가 이용되는 데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 토호양반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많이 나타나 양반들의 억압과 수탈을 벗어나기를 원하는 농민들의 바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농민들의 조세개혁의 요구는 물론이고 농민들의 다양한 불만과 개혁 요구는 조선 정부로서는 세제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한 쉽게 들어주기가 어려운 내용이었다. 먼저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였다.

먼저 봉기지역에 중앙관리를 파견해 사태를 조사하고 수습하도록 하였다. 진주에 박규수(朴珪壽)를 안핵사로 파견한 뒤 농민항쟁이 각지로 번져나가자 도별로 안핵사·선무사·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경상도에는 선무사 이삼현(李參鉉), 안핵사 윤태징(尹台徵),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박이서(朴彛敍)·임승준(任承準)을, 전라도에는 안핵사 이정현(李鼎顯), 선무사 조구하(趙龜夏), 암행어사 조병식(趙秉式)·이필선(李弼先)·조성교(趙性敎)·김원성(金遠聲)을, 충청도에는 암행어사 김익현(金翼鉉)·정기회(鄭基會)를, 그리고 제주도에는 안핵사 이건필(李健弼), 함흥에는 안핵사 이삼현을 파견하였다.

정부는 처음에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고 항쟁 주모자의 처벌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5월 들어 봉기가 삼남지역으로 확산되자 크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봉기주모자를 먼저 참수하고 보고하도록 하는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세문제가 수령 한 개인의 탐학, 어떤 한 고을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고 제도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결과

4∼5월 안핵사·선무사·암행어사들의 보고, 접견을 통해서 삼정의 문란상황, 농민항쟁의 요인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5월 25일부터 조세개혁을 위한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책문을 내려 널리 조세폐단에 대한 개혁안을 구하는 등 삼정이정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이 삼정이정책을 지어 바쳤다.

이는 이정청에 보내져 이정청의 이정절목 마련에 참고가 되었다. 그 내용은 삼정 운영상의 폐단을 개선하자는 것으로부터 동포제(洞布制)를 실시하거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자고 하는 등 부분적인 제도개혁을 제안하거나, 한 걸음 나가 농민들의 담세 능력 자체를 제고하기 위해 지주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기한 부류도 있었다.

정부는 윤8월 19일에 삼정이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정책의 내용은 전결세와 군역세 문제는 운영과정의 폐단을 제거하는 정도였고 가장 중요한 개혁은 환곡제도를 혁파한다는 것이었다. 군정의 경우는 이전의 군역제를 그대로 시행하거나 마을민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제도(동포제) 중 지역민이 원하는 대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동포세의 경우도 마을에서 부담해야할 군역부담을 마을민이 원하는대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특히 동포세는 마을의 군역부담을 마을민이 공동으로 부담해야 되므로 군역세의 신분적 차별을 완화시키는 내용이었다. 전정은 양전 해야한다는 원칙론만 제기하고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환정에 대해서는 환곡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그 동안 환곡세로 담당하던 재정부분을 전결에 옮겨 받도록 결정하였다. 결국 정부가 마련한 삼정이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농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던 환곡을 없애고 환곡이 담당하던 재정분은 전결세에 덧붙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절목이 반포된 뒤 환곡에 재정을 의지하던 아문에서 반대를 하고, 농민들도 정부가 환곡제도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이전에 이서배가 중간에서 가로챈 환곡 원곡을 농민들에게서 회수하려고 하자 반발하였다. 결국 정부는 10월 29일 삼정이정책의 실시를 포기하고 “옛날의 규례로 돌아간다.”는 명령을 내렸다.

정부안에서도 좌의정 조두순(趙斗淳)만 삼정이정책의 실시에 적극적이었을 뿐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나 안동 김씨의 실권자 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左根) 등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자신들이 마련한 조세개혁마저도 실현하지 못하고 옛 제도로 환원시키고 말았다.

대신 정부는 원성이 가장 높은 환곡제 운영에서 허류(虛留) 환곡을 대대적으로 탕감하는 조처만을 취하였다. 이후 조선정부의 긴급한 재정적인 필요에 따라 원곡을 끌어다 쓰는 일이 생기는 등의 사태로 인해 소멸되어 갔다. 기본적으로 농민들의 요구나 삼정이정책에서 제시된 환곡제 폐지의 방향이 관철되어 나간 것이다.

하지만 1862년 농민항쟁에서 나타난 농민들의 조세문제에 대한 불만과 개혁의 요구는 조세제도 개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몇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이후 대원군 정권, 민씨 정권 하에서도 농민항쟁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의의와 평가

1862년 농민항쟁은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처럼 군사적 행동으로 정권이나 국가를 타도하려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평안도 농민전쟁에 비해 훨씬 많은 지역에서 일어났고, 농민이 좀더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시켜나갔다는 점에서 평안도 농민전쟁 보다 발전된 형태이다.

1862년 농민항쟁은 주로 고을단위로 고을의 조세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수령에게 청원하거나 시위하는 형태 등으로 전개되었다. 항쟁의 초기단계부터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모의하고 주도한 경우가 많았으며, 요구도 훨씬 구체적이었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처지에서 당시의 조세 수취제도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던 점은 정치적 주체로서 농민들이 스스로 각성하고 단련해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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