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先裕后 :조상을 계승하고 자손을 잘되게 함.先世記錄들을 奉讀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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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내역

무인정사
(戊寅靖社)

1398년
태조 7년

무인(戊寅)의 변 : 조선 태조 7년(1398),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들 간의 싸움으로 ‘방원(芳遠)의 난’, ‘방석(芳碩)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 혹은 ‘무인정사(戊寅靖社)’,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도 함. 즉 뒤에 태종이 된 방원이 사병(私兵)을 동원해 정도전ㆍ남은(南誾) 등을 죽이고 세자 방석을 폐위시켜 귀양보내는 도중에 죽임으로써 실권을 차지한 사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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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들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설립을 계기로 정도전을 주축으로 추진된 병권집중운동과 중앙집권화정책은 권력구조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개국공신 중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지만, 여타의 훈신(勳臣)과 왕실세력 및 무장세력은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398년 이후 이른바 진법훈련(陣法訓鍊)이 강화되자 왕자·종친, 기타 훈신 및 무장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私兵)에 대한 통수권이 해체될 단계에 이르러 양파의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가장 첨예하였다.

태조에게는 전 왕비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아들과 계비 강씨(康氏)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다. 방원은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개국에 가장 공이 크고 야심과 재질이 큰 인물이었던 만큼 유신(儒臣)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방원은 개국공신에도 책봉되지 못했다(태조 7년 12월에 추록됨). 또한 세자 책봉 경쟁에서도 탈락했다. 태조 즉위 초의 세자 책봉에서 태조는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芳蕃)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공신 배극렴(裵克廉)·조준(趙俊) 등은 그 위인(爲人)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다며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결국 여덟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이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지게 하였다. 이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방원과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방원은 권력구조의 핵심에서 차츰 밀려나고, 진법훈련이 강화되어 세력 기반의 마지막 보루인 사병마저 혁파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밀모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며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단번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트집을 잡아,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그는 이숙번(李叔蕃) 등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과 남은·심효생·박위(朴)·유만수(柳蔓殊)·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同腹兄) 방번도 함께 죽였다. 이렇게 방원의 정적은 거의 제거되었고, 정치 정세도 크게 바뀌었다.

왕자 종친과 조준 등 일부 개국공신 및 방원의 심복인 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 등이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 자신이 사양해 둘째 방과(芳果)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방원 일당이 장악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방원 일당은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서훈되었다. 방원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하면서 세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를 제거했지만 권력의 구심점이 자기에게 쏠리자, 이제는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은 국가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에서 빚어진 것이다. 방원은 다시 제2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어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통치질서를 확립하였다.

 

계해조약
(癸亥條約)

1443년
세종 25년

◈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이 일본의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

 1419년 쓰시마섬을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인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일본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후환을 염려하여 종전에 비하여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세종은 왜인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위세를 떨쳐 그들을 정벌한 다음, 다시 은정(恩情)을 베풀어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었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년
단종 1년

◈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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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단종 1), 즉 계유년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鄭) 등 3재상을 비롯한 정부의 핵심인물을 죽이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로 축출·사사(賜死)한 뒤 정권을 잡은 사건.  

이를 계기로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를 기반을 확보했다. 이 사건은 또한 당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 강화와 왕권의 약화현상에 대한 왕실 및 유신(儒臣)세력의 반격의 성격도 갖는다. 세종대에는 태종 이래의 6조 직계제가 폐지되고 의정부의 서사제가 부활되면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가 강화되었다. 세종을 이은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문종의 부탁을 받은 김종서·황보인 등 재상들이 정권을 장악해 의정부는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을 넘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는 유교적 비전제정치(非專制政治)를 내세워 재상 중심체제를 주장하던 정인지·최항·신숙주·성삼문·하위지 등 집현전 출신 유신도 비판적 입장이어서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동조 혹은 중립태도를 보이는 배경이 된다. 당시 왕권의 약화와는 달리 왕실의 세력은 막강했는데,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두드러져 문인·학자 계열은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모였고, 무인들과 지략있는 한명회 같은 문신의 일부는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모였다. 결국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하자, 55년 단종은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다.

 

경진북정
(庚辰北征)

1460년
세조 6년

◈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가 이끄는 조선군이 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략하던 두만강 유역에 본거지를 둔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 여진족을 정벌한 사건.

 결국 여진족은 조선에 복종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조선의 국경개념은 더욱 북상·확대되었다. 1461년 갑산군을 도호부로 승격하여 진을 두고 삼수(三水)에 다시 군(郡)을 두는 등 갑산·삼수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고, 조선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던 무산군(茂山郡) 지방을 조선의 영토로 끌어들여 이 지역에 하삼도(下三道)의 이주민이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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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진(會寧鎭)의 서쪽에 있던 울량합(兀良哈)의 추장 아비차(阿比車)가 아버지 낭패아한(浪兒罕)의 일족이 조선에 의해 살해당하자 이를 복수하려고 조선에 침입하였다. 이에 조선이 정벌에 나선 것이다.

1405년(태종 5) 울량합의 만호(萬戶)인 파아손(把兒遜) 등이 명나라의 유화 정책에 응하여 입조하자 명나라는 이곳에 모련위를 설치하였다. 이 모련위는 경원(慶源)의 북쪽인 두만강가의 두문(豆門)과 종성(鐘城) 북쪽인 벌시온(伐時溫)에 설치된 위(衛)이다.

그 당시 이들의 본거지는 목릉하(穆陵河)일대에 있었으며, 두만강 밖으로 이주한 동족과 함께 파아손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다. 그 뒤 모련위는 건주위(建州衛)의 거주자와 두만강 밖의 거주자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410년 2월 울량합이 조선을 침입하자 조선은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 등에게 명령을 내려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울량합의 본거지는 유린되어 모련위의 추장은 대부분 망하고 말았다.

명나라가 몽고를 정벌할 때 살아남은 추장들이 명군을 따라 정벌에 나서 공을 세우자 1411년 9월 모련위는 다시 설치되었다. 이 때 이들의 일부가 북으로 옮겨 휘발하상(輝發河上)의 건주위 부근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년
연산군 4년

◈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당한 사화 사건.

  1498년 《성종실록》이 편찬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었던 훈구파 이극돈이 사림파인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해,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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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개설

사대사화(四大士禍) 중 첫번째로 일어났던 사화이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발단되었기에 무오사화라고 한다.

역사적 배경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기성세력인 훈구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해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해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이고 고식적인 소인배로 멸시,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고고자존(孤高自尊: 자신들만이 고결하다고 스스로를 높임.)의 경조부박(輕浮薄: 언어 행동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함.)한 야심배라 지탄하며 배격하였다.

이로써 두 세력은 자연 각각의 주의와 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일마다 대립하였다. 그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진전되어 갔다.

신구 대립인 신진사류와 훈구파의 갈등을 종래에는 양파의 사상적·정치적인 이념의 차이나 감정적인 반목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사회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면모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학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세종대 이후 사전(私田)의 증가에 따르는 토지사유화 진행은 과전법의 모순을 노정시켰다.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은 일반 서민의 경제 생활을 압박하고, 나아가 신진사류의 경제 생활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성세력인 훈구파는 인척과 정실 등에 의해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농단해 신진사류의 진출을 음양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사회의 모든 모순에 직면해 그 부조리를 시정, 개혁하려는 사림파와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훈구파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의 신진사류 인사를 등용해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펴려 한 것도 표면적으로는 그의 호학숭문(好學崇文) 정신에서 결과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내용

이를 배경으로 한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秦나라 때 項羽가 楚의 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는 한편,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

앞서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리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그의 시가 현판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어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또,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 때는 김종직이 신임을 받고 있어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이 즉위해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극돈은 이 때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문제삼고자 그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같은 죄에 걸린 강겸(姜謙)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표연말(表沿沫)·홍한(洪瀚)·정여창·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 등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곤장 100대에 3,000리 밖으로 귀양을 갔다.

이종준(李宗準)·최보(崔潽)·이원(李?)·이주(李胄)·김굉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康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모두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어 봉수(烽燧)와 노간(爐干: 관청의 횃불을 관리하는 일)의 역을 지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이극돈·유순(柳珣)·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홍귀달(洪貴達)·조익정(趙益貞)·허침(許琛)·안침(安琛)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옥사로 많은 신진사류가 희생되고 주모자인 이극돈까지도 파면되었으나, 유자광만은 그 위세가 당당해 그 뜻을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특히, 신진사류는 많은 수가 직접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기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로도 큰 사화를 여러 차례 더 겪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해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선조대에는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
연산군 10년

◈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성종의 비였다가 폐출(廢黜)되어 사사(賜死: 1480년)된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士禍).

 윤씨 사사(賜死)에 관여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곧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가 침체되었고, 연산군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으로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일어나 이후 국문학 분야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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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이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

내용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 항(安陽君)과 봉안군 봉(鳳安君熢)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權達手)와 이행(李荇)이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갔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다. 그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 10여 인이 사형되었다.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홍귀달(洪貴達)·이심원(李深源)·이유녕(李幼寧)·변형량(卞亨良)·이수공(李守恭)·곽종번(郭宗藩)·박한주(朴漢柱)·강백진(康伯珍)·최부(崔溥)·성중엄(成重淹)·이원(李黿)·신징(申澄)·심순문(沈順門)·강형(姜?)·김천령(金千齡)·정인인(鄭麟仁)·조지서(趙之瑞)·정성근(鄭誠謹)·성경온(成景溫)·박은(朴誾)·조위(曺偉)·강겸(姜謙)·홍식(洪湜)·홍상(洪常)·김처 (金處善) 등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의 자녀·가족·동족에 이르기까지도 연좌되어 연루자의 범위가 넓었을 뿐만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 사화는 표면상, 생모 윤씨의 폐위, 사사 사건으로 인한 연산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복수심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그 내역을 살펴보면, 조정 신하간의 암투가 이 사건을 조장, 격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은 일찍이 학문을 싫어해 학자를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낭비 또한 극심,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이를 메우기 위해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나눠준 공신전(功臣田)과 노비까지도 몰수하려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신하들의 이해 관계와 상충되는 것이어서 평소 왕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신하들은 왕의 처사에 더욱 반발하였다.

동시에, 궁중의 경비 절약도 간청해 왕의 향락적이고 무궤도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연산군의 방종을 충동질하며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 한 신하들도 있었다.

이러한 대립 상황 속에서 신하들은 궁중과 부중(府中)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 배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때 임사홍이 궁중·부중 양파의 대립 관계와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무오사화 때의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자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愼守勤)과 손을 잡고 부중의 훈구 세력과 무오사화 때 남은 신진사류까지도 일소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사화의 결과, 궁중 세력이 승리해 정권을 잡고, 신진사류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무오사화가 기성 훈구 세력과 신진사류 세력의 정치 투쟁이었다고 하면, 갑자사화는 궁중 세력과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과의 정치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종 때 양성된 많은 사림이 수난을 당해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하고 학계가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또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은 성균관과 사원(寺院)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교습 및 사용을 금하는 한편,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문화의 정체와 인륜 질서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 사화를 계기로 더 심해진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 변동과 정치 문화를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오왜변
(庚午倭變)

1510년
중종 5년

◈ 3포{부산포·내이포·염포}에서 일어난 일본인 거류민의 폭동사건으로 삼포왜란(三浦倭亂), 삼포의 난이라고도 함.

 3포를 개항한 이후 무역과 거류가 확대되어 계해(癸亥)조약 때 맺은 내용을 어기기 시작한 일본은 중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더욱 교만해져 조선의 통제에 대한 반발로 일으킨 반란이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교통이 중단되었는데, 일본이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와 계해조약을 개정하여 새로 임신(壬申)조약을 체결, 내이포만을 개항(開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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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5년(1510)인 경오년에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사건. 삼포(三浦)에서 일어났으므로 흔히 삼포왜란이라고 함. 삼포란 조선 건국 이후 왜인들과의 무역거래가 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개항한 부산포(富山浦:東萊).내이포(乃而浦:熊川).염포(鹽鋪:蔚山)를 말하며, 이곳에서만 일본과의 무역이 허락되었음. 그런데 점차 일본인들의 증가로 커다란 사회.정치적 문제가 발생하면서 통제가 엄해졌고, 이들의 불만도 고조되었음. 이후 중종 5년에 대조마도(大趙馬道).노고수장(奴古守長) 등이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 종성홍(宗盛弘)을 대장으로 하여 부산.웅천.동래를 공격하면서 경오왜변이 발생함. 이후 왜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었고 왜인들과의 통교가 중단되었음.

용례

* 병조에서 아뢰기를, “≪동국병감≫은 우리 나라의 형세와 병가의 승패가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어 무사들이 마땅히 배워야 하는 책이니, 전대에 왜놈들이 침범하여 노략질한 것과 경오년 왜변의 상황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편찬하도록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 兵曹啓曰 東國兵鑑 我國形勢 兵家勝敗 無不載錄 武士等 所當學 前代倭奴寇掠 及庚午年倭變事跡 令弘文館撰集何如 傳曰可 [중종실록 권제15, 3장 앞쪽, 중종 7년 1월 5일(신해)]

 

임신조약
(壬申條約)

1512년
중종 7년

◈ 조선과 쓰시마도주[對馬島主]가 맺은 조약. 국가재정을 고려하고 대외정책의 운용면의 시정을 위해 단행했다.

 내이포(乃而浦:熊川), 부산포(富山浦:東萊), 염포(鹽浦:蔚山)의 3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진장(鎭將)과의 충돌로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3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역을 끊었는데, 주부식물(主副食物)의 공급을 대(對)조선 교역에 의존해오던 왜인들은 당장 생활에 곤란을 느껴 쓰시마도주는 조선과의 통교 재개를 위해 왜란의 주모자 참래(斬來), 피거인송환(被據人送還), 난야기(亂惹起)의 사죄 등 조선측의 요구조건을 이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왜와의 지리적 인접관계, 왜란 전까지의 일본관계, 교린정책이란 대의명분과 북서변 야인들의 소요 등을 감안, 9개 항목으로 된 임신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쓰시마도주의 간청을 들어주어 국교가 재개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이전보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왜인들을 제약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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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내용

1510년 삼포왜란이 있은 뒤 조선은 삼포를 폐쇄해 왜인과의 교통을 끊고 방비를 엄중히 하였다. 그 결과, 물자의 궁핍을 느낀 대마도주는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를 통해 조선에 통교를 간청하게 되었다. 일본은 국왕사(國王使) 호추(中)를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해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에서는 강화 반대론도 많았지만, 첫째 군사 방위 시설의 증가에 따른 국민의 부담 과중, 둘째 북방의 야인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또 다른 한편에 긴장 요인을 둘 수 없다는 점, 셋째 후추[胡椒]·단목(丹木) 등 약용품의 수입 필요성, 넷째 조선은 지리적으로 사실상 일본과 절교하기 힘들며, 특히 대마도는 생활 필수품인 식량 등이 궁핍하므로 필연적으로 왜구의 재발 가능이 증대될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실리적인 강화론에 따라 화해를 허용하게 되었다.

조선은 강화의 조건으로, 첫째 삼포왜란의 수괴자를 참수해 헌납할 것, 둘째 우리측 포로를 송환할 것, 셋째 모리치카(盛親)가 직접 와서 사죄할 것 등을 강화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이들 조건 중 포로 송환은 임신약조 후에 실행되었으나, 모리치카의 친래진사(親來陳謝 : 친히 와서 죄에 대해서 진술하고 용서를 바람)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괴자의 목을 베어 헌납하는 일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443년(세종 25)에 맺은 계해약조를 폐기하고 보다 엄격한 제한을 가해 임신약조를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왜인의 3포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3포 중 제포(薺浦)만 개항한다. 둘째, 도주(島主)의 세견선(歲遣船)을 종전의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한다. 셋째, 종전의 세사미두(歲賜米豆) 200석을 반감해 100석으로 한다. 넷째, 특송선제(特送船制)를 폐지한다. 다섯째, 도주의 아들 및 대관(代官)의 수직인(受職人)·수도서인(受圖書人)들의 세사미와 세견선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섯째, 도주가 보낸 선박 이외의 배가 가덕도(加德島) 부근에 와서 정박하면 적선(賊船)으로 간주한다. 일곱째, 대마도에서 제포에 이르는 직선 항로 외의 항해자는 적왜(敵倭)로 규정한다. 여덟째, 상경 왜인(上京倭人)은 국왕 사신 외에는 도검(刀劍) 소지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삼포왜란의 주요한 동기였던 일본인에 대한 엄격한 규제는 그들이 바라던 대로 완화되기는커녕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 뒤 1544년(중종 39) 제포는 형세가 불리해 왜관을 부산포(富山浦)로 옮겼다. 이와 같은 조처로 일본의 소호족이나 상왜(商倭)들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으나, 일본 막부의 사선(使船) 내왕은 16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고, 대호족들의 통교도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년
중종 14년

◈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사건.

 중종반정으로 중앙에 진출하게 된 사림파는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여,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쳐 결국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走·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기에, 남곤·심정(沈貞)·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신진 사류의 급진적·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내어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되고, 김정(金淨)·기준·한충·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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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역사적 배경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조광조는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그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 학자였다.

조광조는 1515년 성균관유생 200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반정 초기에는 이과(李顆)의 옥과 같은 파란도 있었으나,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은·주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과거제 폐단을 혁신하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해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해 미신 타파에 힘쓰고, 향약(鄕約)을 실시해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 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二倫行實)』과 『언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 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그의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는 구현 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많아 도리어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게다가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마저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해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 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렴 결백과 원리 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 세력을 소인시해 훈구 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 불만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즉 이 사건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가 삭퇴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한 조처였다.

경과

이러한 조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 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勳籍: 공훈을 기록한 명부)에서 삭제 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이들은 희빈 홍씨를 이용해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왕에게 밤낮으로 말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또,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字)’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 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주·김전(金銓)·남곤·고형산(高荊山)·심정 등은 밀의를 거듭한 끝에, 1519년 11월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며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하는 계를 올렸다.

이 때는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 조광조 일파가 투옥되자 홍경주·남곤·심정 등은 이들을 당장에 처벌하게 하려 했으나, 이장곤(李長坤)·안당(安瑭)·정광필 등이 반대하였다. 또, 성균관 유생 1,000여 인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치죄 후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 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홍언필(洪彦弼)·이자(李耔)·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가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 이 옥사 이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朴維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일명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왕비 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알력을 배경으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에 의해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시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 등이 삭훈사건을 계기로 폭발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했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 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조광조의 왕도정치가 실패한 원인을 정치 이념의 진보성과 실현 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으나, 당시의 정치 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신사무옥
(辛巳誣獄)

1521년
중종 16년

◈ 신사년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일당의 옥사.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는데, 송사련(宋祀連)은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해 안처겸,안당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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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21년(중종 16)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등의 옥사.

1519년(중종 14)에 일어났던 기묘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사림 세력을 제거한 심정(沈貞)ㆍ남곤(南袞) 등이 조정을 장악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두둔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된 좌의정 안당(安?)의 아들 안처겸은 이정숙(李正叔)ㆍ권전(權) 등과 더불어 심정ㆍ남곤 등이 사림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하여 그들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여기에 참석하였던 송사련(宋祀連)은 정상(鄭鏛)과 짜고 안처겸 모친상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근거로, 안처겸 일당이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것이 무옥사건이다.

이 결과 안당ㆍ안처겸ㆍ안처근(安處謹) 3부자를 비롯하여 권전ㆍ이정숙ㆍ이충건(李忠楗)ㆍ조광좌(趙光佐)ㆍ이약수(李若水)ㆍ김필(金珌) 등 많은 사림들이 연루되어 처형되고 송사련은 고변의 공으로 30여년간 세력을 누렸다.

다른 사화처럼 훈구 대신과 신진 사류 사이의 반목과 질시 속에서 발단된 사건이다. 그러나 투쟁 방법이 기묘사화 때의 그것과 같이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 이념에서가 아니고 순전히 정적(政敵)을 타도하기 위해 무고하는 정치적 음모를 동원하였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뒤 사림의 정치력이 커짐에 따라 1566년(명종 21) 안당은 손자 윤(玧)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고 직첩을 돌려받았으며, 1575년(선조 8)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을사사화
(乙巳士禍)

1545년
명종 즉위년

◈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士林)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종종 말기에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외척간의 권력 싸움에서 시작되어 다음 인종(仁宗)대 장경왕후계의 대윤(大尹) 득세했다가 8개월 후의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소윤(小尹)이 정권을 잡고 대윤을 대거 몰아낸 사건이다.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간의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가 마지막이 되었지만, 사림세력은 중앙에 대거 진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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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

역사적 배경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辛卯三奸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沈貞·李沆·金克을 말함.)과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중 정신(廷臣)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중인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제2계비 윤씨)를 폐출하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윤안임(尹安任 : 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귀양간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항·채무택도 처형되었는데, 이들을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한다.

김안로가 실각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외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종비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 : 윤여필의 딸)는 세자 호(岵 : 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의 일대 논란이 벌어졌으나, 1517년(중종 12)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립되어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명종)을 출산하였다.

이에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꾀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 : 장경왕후의 아우)과 본격적인 대립·알력이 시작되었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형제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는데, 이로써 조신·사림은 서로 갈리게 되고 외척을 중심으로 궁·정 내부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정계가 양분되었다. 그러던 중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인종은 유관(柳灌)·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자파의 사림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 결과 사림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사림들은 소윤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인종은 원래 중종의 반목·갈등 속에서 성장한 유약한 군주로 문정왕후의 뜻을 얻지 못함을 항상 상심하던 중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소윤파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내용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를 탄핵해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 대윤파의 반격이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윤원형은 윤임 및 그 일파인 영의정 유관·유인숙 등과 그 배경을 이루는 사림을 배제하기 위해 평소 이들에게 원한을 가진 정순붕(鄭順朋)·이기(李)·임백령(林百齡)·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삼아 계책을 꾸미는 한편, 자신의 첩 난정(蘭貞)으로 하여금 문정대비에게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윤 일파는 역모죄로 몰려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비롯해 계림군(桂林君) 김명윤(金明胤)과 이덕응(李德應)·이휘(李輝)·나숙(羅淑)·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곽순(郭珣)·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이 처형 및 유배되어 하루아침에 몰락하였다. 이 무고사건으로 빚어진 옥사를 을사사화라 한다.

을사사화의 여파는 더욱 확대되어 윤원로는 동생 윤원형에 의해 처형되고, 또 대윤의 잔당으로서 지목된 봉성군(鳳城君) 송인수(宋麟壽)와 이약빙(李若氷) 등이 죽고, 권벌(權)·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 등 20여명이 유배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옥사를 정미사화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문정대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1547)을 계기로 일어난 것으로서 소윤파의 반대파에 대한 악랄한 제거방법으로 이용된 사건이다.

윤원형은 이러한 음모수법으로 사림과 그의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비명에 죽은 명사만도 을사사화 이래 5, 6년간 1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윤원형의 세도와 수렴정치의 폐단은 심화되어갔으며, 1553년(명종 8) 친정 이후도 그 폐단은 가시지 아니하였다.

이때 명종은 이제까지의 악정을 시정하기 위해 이량(李樑 :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강의 처남)을 이조판서로, 그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전랑(吏曹銓)으로 등용했으나, 명종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만들어 세도를 부렸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 사림출신의 윤근수(尹根壽)·이문형(李文馨)·박소립(朴素立)·윤두수(尹斗壽) 등을 외직으로 추방하고 심지어는 반대사림들을 숙청하기 위해 사화를 일으킬 흉계를 꾸미기도 하였다.

이 흉계는 심의겸(沈義謙)의 밀고로 이량은 유배 후 사사되고, 그 일당의 세력은 제거되었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윤원형은 그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 1565년 문정대비가 죽자 몰락하고, 신진사류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귀양갔던 노수신·김난상(金鸞祥)·유희춘·백인걸 등이 돌아와 요직을 차지하고 재야의 신진사류가 많이 등용되어 정계는 사림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유교정치가 재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들 중심의 대의명분론적 유교정치는 선조대로 이어져 권력지향적인 붕당의 싹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전기의 사화들은 그것이 훈구세력에 의해서든 궁중 또는 외척에 의해서든 간에 화를 당한 쪽이 거의 신진사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정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세의 당쟁과 연결된다. 다만, 사화에서는 학통과 정치이념상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당쟁은 순전히 정권을 잡기 위한 정치투쟁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당파성이 강하였다.

또 사화의 영향으로 사림들이 고향에 은둔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은둔한 사림들에 의해 서원(書院)이 일어나 사림의 학문적 도장으로, 정론(政論)의 광장으로 후세 당론의 진원지가 되어 붕당세력의 온상이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발달과 성격은 조선왕조의 정치문화적 특성과 정치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미약조
(丁未約條)
1547년
명종 2년

◈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1544)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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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량진 왜변 이후 중단된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면서 1547년 부산포 왕래만을 허용한 조약.

체결 경위

1544년(중종 39)에 발생한 사량진 왜변을 계기로 임신약조(壬申約條)를 파기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일본 정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와 규슈[九州]의 유력 호족 쇼니씨[少二氏]가 대마도 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간절히 요청해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국왕사(國王使)의 통교만을 허용하고, 대마도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후 일본의 간청과 국왕사 내왕에 따른 일본인들의 조선 출입을 인정하여 1547년 정미약조(丁未約條)를 체결함으로써 일본인의 부산포 왕래만을 허락하였다.

조약/회담 내용

제1조: 세견선(歲遣船) 25척은 대선 9척, 중선·소선 각 8척으로 하고 각 선의 인원수를 초과하면 유포량(留浦糧)을 반감한다. 수도서인(受圖書人)[외국인으로 국내 출입을 허용하는 증서를 받은 자]과 수직인(受職人)[외국인으로서 관직 사령증을 받은 자]의 선척도 이에 준한다. 

제2조: 선상집물(船上什物)은 일절 지급하지 않는다. 

제3조: 가덕도 서쪽에 도착하는 자는 적왜(賊倭)로 규정한다. 

제4조: 50년 이전의 수도서인과 수직인은 접대하지 않는다. 

제5조: 밤에 여염(閭閻)[백성들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횡행하거나 삼소선(三所船)을 타고 여러 섬을 몰래 다니는 자, 칡을 캔다고 산에 올라 돌아다니는 자도 영구히 접대하지 않는다.

제6조: 모든 약속은 진장(鎭將)의 명령에 따를 것이며, 위반 사실이 크면 3년, 가벼우면 2년간 접대하지 않는다.

결과

정미약조에는 약조의 내용을 위반했을 때에는 그 정도에 따라 2년에서 3년 간 접대하지 않는다는 벌칙 조항을 두었다. 정미약조의 체결로 일본과의 통교는 재개되었으나 이전처럼 평화로운 통교 무역 관계의 유지는 어려웠다. 그것은 일본 국내의 정국 혼란으로 인해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왜구의 침입은 근절하지 못한 채 선조 때까지 계속되다가 일본의 국내 통일과 더불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의의와 평가

정미약조에서 세견선의 선형(船型), 벌칙까지 규정한 것은 1443년(세종 25)에 체결했던 계해약조(癸亥約條), 1512년(중종 7)에 체결했던 임신약조 등 종전의 규정에서 볼 수 없는 조항으로서, 이전까지의 왜인의 동향을 참고해 종합적으로 이를 규제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미사화
(丁未士禍)
1547년
명종 2년

◈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士禍)로 "벽서(壁書)의 옥(獄)"이라고도 한다.

 괴벽서사건(怪壁書事件)으로 다시 많은 사림(士林)이 화옥(禍獄)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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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명종 때의 정치적 옥사(獄事).

내용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중종 말년부터 경원대군(慶源大君)의 외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 일파와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일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 세력은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윤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정적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 인물들을 도태시키려고 일으킨 것이다.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윤원형·윤인경(尹仁鏡)·이기·정순명(鄭順明)·허자(許磁)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만상(金彎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이 중에는 사림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鳳城君)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이 많았다.

1565년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신원과 포장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으로 쓰여진 것을 문제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을묘왜변
(乙卯倭變)

1555년
명종 10년

◈ 왜구가 전남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

 삼포왜란(三浦倭亂:1510)·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1544) 등으로 세견선(歲遣船) 출입이 금지된 것에 반발해 왜구(倭寇)가 배 70여 척으로 전남 연안지방을 침입해 만행을 저지르다 영암에서 격퇴되었는데, 이후 세견선 5척의 출입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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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

역사적 배경

을묘왜변의 배경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점과 일본 국내 사정의 혼란에서 일어났다.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중종 39) 왜인들의 약탈로 야기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조선에서는 그들의 내왕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를 맺고 왜인들의 내왕 통교를 허용하였다. 정미약조는 결과적으로 왜인들의 위반 정도에 따라 통제가 강화된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전까지 너그럽게 취급해 주던 조선측의 방침은 강화되었으며, 왜인들의 내왕무역에 대해서도 통제 규정이 강화되어 여러 가지 규제가 뒤따랐다. 따라서, 종전처럼 왜인들은 무역의 실리만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측의 사정으로 보아도 16세기에는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세력다툼을 하면서 싸우던 전국시대로서 국내 혼란이 더욱 심해지던 때였다. 이에 일본 국내 통치를 해오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또는 足利幕府)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약 1세기간의 혼란기에 접어든 때였다.

내용

이로써 일본의 서부 지방에 사는 연해민들이 이웃인 우리 나라와 명나라에까지 침입해 노략질하면서 국제 관계가 순탄치 못하였다. 이와 같은 혼란은 도요토미(?臣秀吉)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을묘왜변은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왜구의 약탈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 사건은 1555년 5월에 왜구가 선박 70여척으로 일시에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면서 일어났다. 그들은 이어 달량포(達梁浦)로 계속 침입해 성을 포위하였다. 또한 어란도(於蘭島)·장흥·영암·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이 때 왜구를 토벌하다가 절도사 원적(元積),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 왜구를 토벌하고 영암에서도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렇게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주에게는 무역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강경책을 썼다. 그러자 그 해 10월에 대마도주 소(宗義調)는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해 그들이 내왕무역을 할 수 있도록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일본내의 혼란은 더욱 심해 왜구의 침입은 여전했으며, 도요토미가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왜구의 침탈은 대규모적인 임진왜란으로 이어져 조일 양국간의 통교는 파탄되었다.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년
선조 22년

◈ 정여립(鄭汝立)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해 모반을 꾀하다가 실패한 후 이를 계기로 일어난 옥사(獄事).

 정여립은 비기참어(秘記讖語), 즉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이라 하여 '이씨는 망하고 정씨(鄭氏)가 일어난다'는 설을 이용하여 이씨왕조(李氏王朝)는 망하고 자기[정여립]가 임금이 된다는 등의 말을 퍼뜨려 인심을 현혹하여 큰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의 밀계(密啓)로 음모가 탄로나,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여립은 자살하고 옥남은 잡혀 왔다. 당시 서인(西人)이었던 정철(鄭澈)이 옥사를 주도해 수많은 동인(東人)이 화를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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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일어난 동인과 서인간의 정쟁.

개설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東人系)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내용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말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자결하였다.

그리고 옥남은 잡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해서사람 김세겸(金世謙)·박연령(朴延齡)·이기(李箕)·이광수(李光秀)·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하였다.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장살 당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서인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이발(李潑)·이길(李)·김우옹(金宇)·백유양(白惟讓)·정언신(鄭彦信)·홍종록(洪宗祿)·정언지(鄭彦智)·정창연(鄭昌衍) 등 당시 동인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연루되어 처형 또는 유배당하였다.

그 가운데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다시 불려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인의 상소로 이산해(李山海)·나사침(羅士?)·나덕명(羅德明)·나덕준(羅德峻)·정인홍(鄭仁弘)·한효순(韓孝純)·정개청(鄭介淸)·유종지(柳宗智)·김우굉(金宇宏)·윤의중(尹毅中)·김응남(金應男)·유성룡(柳成龍)·유몽정(柳夢井)·조대중(曺大中)·우성전(禹性傳)·남언경(南彦經) 등 30여인이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혹은 유배되었다.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류간 반목과 대립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되었다.

또,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은 모주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하였는데,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이어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약 3년여 동안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인에 이르는 대옥사로 발전하였다. 뿐 아니라 이 문제는 그뒤 당쟁의 전개 과정에서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진다. ① 노비 출신인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② 당시 위관(委官:죄인을 치죄할 때 의정대신 가운데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던 재판장)으로 있던 정철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 ③ 이이(李珥)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라는 설.

④ 일부 조작된 바도 있으나, 당시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계승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어느 정도는 인정된다고 보는 설 등으로, 아직 정설은 없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
선조 25년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97년의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전란으로 야기된 국제적 정세의 변화로 중국은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德川]의 막부(幕府)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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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개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家臣)인 다치바나(橘康廣)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釜山浦)에 보내어 통호(通好)를 청하였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馳報)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簒奪弑逆)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廷臣)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廷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報書)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趙憲)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中樞府)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워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國王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傳敎)에 따라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사카이[堺] 포구(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전쟁의 발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護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

이밖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부대의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 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의 제8번대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

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변보(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장계(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즉,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방수하게 했으며,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하여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홀로 떠나야 했으며,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에 따라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

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는 왜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열읍(列邑)에 공문을 발하여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전한 지역에 모여 주둔하게 하고 경장(京將)이 이르기를 대기하였다.

문경 이하의 수령들 또한 각기 소속 군사를 영솔하고 대구 천변에 나가 순변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세가 점차 가까워오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비도 많이 내려 우장이 젖은 데다가 군량 보급마저 끊기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

수령들은 할수없이 홀로 말을 달려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창곡(倉穀)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 군사를 먹이고 함창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는 산속에 숨어버리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邑)을 지키고 있었다.

중로의 방어 책임을 짊어지고 내려간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으며 참수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빌며 자신이 나가 군병을 불러모으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백명을 불러모았으나, 그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수백명에 이르자 이일은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는 상주에서 모은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중 800∼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북천변(北川邊)에서 습진(習陣)을 시키면서 산을 의지, 둔진하여 전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제1번대 고니시군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대패하자 관군은 전의를 잃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상주에서의 패상(敗狀)을 치계(馳啓)하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도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잠시 후 왜군이 단월역(丹月驛)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형세가 풍우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총성이 진동하여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달려 두어 차례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자 달천강(達川江: 속칭 달래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일만은 동쪽 계곡을 따라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했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용인으로 빠져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또한, 구로다·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으며, 지례·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의지하고 따른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의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먼저 가서 백성들을 무유(撫諭)하도록 하였다.

선조가 이렇게 서행(西行)의 채비를 갖추자 대간(臺諫)·종실(宗室)들은 사직(社稷)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고, 유생들 또한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날 대신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저군(儲君)을 세워 인심을 계속(繫屬)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도 이 청을 받아들여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고 백관들은 권정례(權停例)로써 진하(陳賀)하였다. 백관에 명하여 융복(戎服: 전복)을 입도록 한 것도 이날이었다.

4월 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의 서행에 대한 시비를 따질 겨를도 없이 그날 밤으로 이를 결정하였다. 대신들도 “사세(事勢)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평양으로 이어(移御)하시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라고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령 권협(權) 등이 청대(請對)하여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자 유성룡은 “협의 말은 진실로 충성이나, 다만 사세가 부득불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이어 왕자를 제도(諸道)에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御駕)를 따라갈 것을 청하니 왕도 그것에 응하였다.

이에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에게 명하여 함경도로 가게 했으며 김귀영(金貴榮)·윤탁연(尹卓然) 등을 따르게 하였다. 셋째 아들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가게 하고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혁(赫)을 비롯, 이기(李)가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강원도에 이르러 신병을 들어 따라가지 않았다. 순화군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북으로 향하여 임해군과 동행했으며, 김귀영·황정욱에게 명하여 협동해서 호행하도록 하였다.

국왕 일행이 서행에 오르기에 앞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수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비가 허술하여 대적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밤이 깊어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는데 “왜적이 금명간에 반드시 도성에 다다를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계가 들어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왕은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版)을 받들고 먼저 가게 하고 왕은 융복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 나섰다.

세자 광해군이 왕의 뒤를 따랐고, 왕세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가 광해군의 뒤를 따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나와 도성을 떠났다. 왕비는 교(轎)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서자 시녀 수십명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달이 없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더욱 어두워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의하면, 왕이 서울을 떠나자 난민(亂民)이 그의 문적(文籍: 노비문서)을 맡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때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고니시가 이끄는 1번대를 따라온 종군 승려의 일지인『서정일기(西征日記)』에 의하면 5월 7일 경복궁이 전소되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불탔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왕의 일행이 개성까지 도착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출성(出城) 당시 100여 명이던 호종 인원이 그 사이에 상당히 줄어있었다. 그리하여 개성까지 따라온 인원만으로 관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어 관직의 변동도 많았다.

적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이었다. 이때 한강을 수비하던 김명원은 적이 쏜 탄환이 지휘본부 제천정(濟川亭: 현 普光洞 소재)에 떨어지자 한강 수비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유도대장 이양원도 도성 수비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를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어 김명원의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5월 초에 왜군은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바로 북침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양주 해령(蟹嶺: 속칭 게너미고개)에서 부원수 신각(申恪) 군의 기습을 받고 패했으나 북침을 중단할만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 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하는 관군이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전술에 말려들어 실패하였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삼도(下三道)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 도중 용인·수원 사이에서 소수의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적군은 3군으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로 삼았다.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함경도감사 유영립(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민에게 피살되었다. 또한 함경도로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에 인도되는 등 도 전체가 적중에 들어갔다. 황해도로 들어간 구로다의 군은 해주를 본거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始敏)은 군관민과 합세하여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의병의 활동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생령(生靈)이 죄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文班出身)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지로는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였다. 나아가 이를 확대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불러 모았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학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보인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그것은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관군이 차차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李廷)·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朴春茂)·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곽재우는 현풍(玄風)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통칭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삼가·합천·창녕·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鼎巖津: 속칭 솥바위나루)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김면은 조종도·곽준 등과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관군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시켰고,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경상좌도에서 기병(起兵)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또 학연·예천·문경 등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적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김해는 9월 예안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적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호남에서는 고경명과 김천일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먼저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회맹(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내고 근왕병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적이 금산에 들어오자, 임진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정면대결하였다.

그러나 대패하여 아들 인후(因厚)와 유팽로·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었으며, 한강변의 여러 적진지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은 차령(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시켰다.

또 온양·정산·홍주·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의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칠백의사(七百義士)만이 남아 생사를 함께 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적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채 진영을 정돈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끝내는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적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 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홍계남은 아버지 언수(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서 양성·안성을 활동 무대로 용맹을 떨쳤다.

적정을 보아 동서로 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군이 감히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경기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여러 읍도 안전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연안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다. 당시 황해도에는 구로다의 군이 열읍을 정벌하고 온갖 약탈을 자행했으며 반민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직 연안성만은 침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정암이 의병을 영솔하고 이 성을 지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침입해왔다.

성중에 있는 의병들은 성을 빠져나가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자 했으나 이정암은 이를 듣지 않고 굳은 결의로써 수성을 결심하였다.

이에 15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4주야를 싸워 끝내 구로다의 5,000병력을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연해 열읍도 회복되었고, 양호(兩湖)의 해상 교통도 강화도와 연안을 통하여 의주의 행재소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현직 관원으로서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같은해 9월에 경성을 수복하고 길주·쌍포 등에서도 가토의 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수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가토가 북쪽 깊숙이 들어와 주둔할 수 없도록 수시로 위협을 가하였다.

의병 중에서도 의승군은 특수 집단으로 활약이 컸다. 묘향산(妙香山)의 노승 휴정(休靜: 西山大師)은 수천의 문도(門徒)로 승군을 일으키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영규 이외에도 호남의 처영(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松雲大師), 해서의 의엄(義嚴) 등 휴정의 문도들이 승군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이밖에 전국 사찰에서 일어난 의승군의 수도 많았고 그들의 전과 또한 컸다.

수군의 활약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板屋船: 戰艦)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그러나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했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분파(焚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있었다.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다. 이때도 아군의 피해는 전사 11명, 전상 26명으로 적에 비하여 경미하였다.

이 2차 출동에서는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가세하여 원균의 3척을 합하여 연합 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龜船]이 사용되어 그 효능이 증명되었고, 적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것은 그 뒤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3차 출동은 제2차 출동 후 약 1개월이 지난 7월 6일부터 13일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각종 총통(銃筒)을 쏘아 먼저 2, 3척을 부수니 적이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우리 함대가 일시에 달려들어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고 나포하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는 쾌속선으로 겨우 탈주하고 적선 10여 척이 간신히 도망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이다.

이순신 함대는 이날 견내량에 임시로 정박하고 9일 다시 적선을 찾아 떠났다.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안골포(安骨浦)에 정박중인 적선을 포격과 엄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뒤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상으로 도망친 적을 소탕하게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한 적군은 구키가 지휘한 수군이었다.

이 3차 출동에서는 적선 약 100여 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고 적 250급(級)을 참획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제4차 출동은 다음 8월 24일부터 9월 2일에 걸쳐서 있었다.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적선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향하여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부산 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 척을 파괴하였다.

이어 이순신은 왜선 470여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함대를 돌진시켜 적선을 분파하였다. 그러나 적장은 군사를 하선시키고 육지에서 총포를 난사, 종일 교전한 끝에 적선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고 2일 여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거지를 기습당한 적은 그 뒤 해전을 기피하고 육병(陸兵)으로 변화하는 이변을 가져왔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전사를 비롯,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와 같이 수군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지휘 능력의 탁월함과 밝은 전략 전술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전선이 일본 전선에 비하여 견고하며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의 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국(戰局)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조·명군의 반격과 휴전 성립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차례의 강화(講和)를 청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1차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도 조승훈의 군이 패하자 화의에 응할 기세를 보이던 중 석성의 건의로 심유경(沈惟敬)이 화의 교섭을 맡게 되었다.

심유경은 8월 29일 평양에 와서 고니시를 만나 쌍방의 강화 조건을 논의하여, 50일 이내로 본국에 돌아가 구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말 것과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와 작전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심유경은 약속대로 11월 14일에 돌아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임의로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다.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의 의논끝에 파병으로 기울어져,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여송은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의 제2차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조선에서는 임진년 10월 재정비된 관군과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11월에는 의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진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화의차 적진에 있으니 그가 귀환하는 것을 기다려 관군과 합세하여 진병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으로 때를 잃고 말았다.

그 뒤 이여송의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다음해인 1593년 1월에 평양 근방에 이르렀다. 이에 순변사 이일과 별장 김응서가 관군을 이끌고 합세했고, 휴정 휘하의 의승군 수 천여 명도 이에 합세하여 28일 평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명 연합군이 칠성(七星)·보통(普通)·함구(含毬)의 세 문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니 고니시 등은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내성(內城)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의 얼음을 밟고 패주하였다. 이때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도 모란봉 격전에서 많은 적을 참획하여 평양 수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니시는 주야로 속행하여 10일 배천에 당도하였다. 황해도 해주를 근거로 했던 구로다는 고니시를 먼저 후퇴하게 하고 자신도 군사를 거두어 개성으로 철수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은 황해도방어사 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를 시켜 관군을 이끌고 고니시군의 퇴로를 끊어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도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해왔다. 그러자 여기를 지키고 있던 고바야가와는 함께 머무르던 구로다와 같이 서울로 퇴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대결하지도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일본 진영에서는 고바야가와 등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속칭 숫돌고개)에다 정예병을 매복하게 하고 명나라 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하였다.

이곳에서 대패한 이여송은 기세가 꺾여 더이상 진격을 못하고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조선측에서 재차 공격을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함경도에 있는 가토의 군이 양덕·맹산을 넘어 평양을 기습한다는 유언(流言)이 있자, 이여송은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무르게 하고, 조선 제장(諸將)에게도 임진강 이북에 포진하도록 명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퇴진하였다.

한편, 함경도 방면에 침입한 가토는 명군의 내원으로 평양성이 수복되고 고니시 등이 서울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래서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즉시 철군을 서둘러 서울로 퇴진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나 여석령 전투(일명 벽제관싸움)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었다. 이때 마침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월 12일 도성에 머무르던 일본 대군이 일시에 공격을 해왔다.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은 휘하군을 지휘하여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그동안 명군은 다시 심유경을 서울의 일본 진영에 보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다. 일본군도 각지의 의병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따라 4월 18일 도성에서 철수하여 강원·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켰다. 그리고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熊川)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은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어 성안에 있던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한편,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붙들려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이에 1596년 명나라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였다.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입을 꾀하였다.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던 화의마저 끝내 결렬되었다.

정유재란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때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統制營)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제장들로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장을 나누어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였다. 또 명군의 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해 4월 일본 수군은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이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제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겨우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그 뒤 통제사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도 전사하니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거제 해전의 소식을 듣고, 울산 죽도성에서 부장(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석권할 것과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1대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그리고 2,000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한편, 전주로 향하던 모리의 군은 8월 안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안음현감 곽준(郭) 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산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신 가운데는 왕의 피란을 주장하는 건의까지 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퇴각한 명군이 한강에서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가운데 모리·가토군은 전주·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우백영(牛白英) 등을 남쪽으로 나가게 했는데, 마침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충돌하여 크게 싸워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또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하여 일본군의 서진(西進)도 봉쇄하였다.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이 때 명군은 남원 함락 이후 적극 전세를 펴서 수륙 원병이 다수 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또한 지난해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각지로 왕복하던 중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투를 하면서, 장기 작전으로 병영을 세우고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개월만에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게 되어 한산도 당시를 능가하였다.

이 해 7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의 수군 5,000이 고금도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명군은 한때 그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사단(事端)을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온으로 잘 대처하여 명군의 군기를 감독하는 권한을 얻고, 조명 수군의 총지휘권도 실질상으로 양보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양호가 파직되고 그의 자리에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군은 일대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로(路)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를 이끌고 동로(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강원·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동일원(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중로(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황해·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유정(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서로(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상(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9월 중순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하여 귀환한다는 보고를 받고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고, 이순신과 진린은 수상에서 봉쇄하여,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 협공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린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려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거두었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야조(夜潮)를 타고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왔다.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사경(四更)에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였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완(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고 고니시는 격전중에 묘도(猫島)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적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은 끝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과 황신(黃愼) 등은 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9년에 명군도 철수하였다. 1월에 유정·진린·마귀·동일원 등이 진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경리 만세덕,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승훈(李承勳), 산동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 두잠(杜潛) 등이 군사 2만 4000으로 서울에 잠시 주둔하다가 다음해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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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의 대소전투

임진왜란

월일\구분

전 투 지

장 수

전 투 결 과

조선(명)

1592. 4.14.

부산

鄭撥

少西行長

부산 함락, 정발 전사

1592. 4.15.

동래

宋象賢

少西行長

동래 함락, 송상현 전사

1592. 4.18.∼19.

밀양

朴晉

少西行長

밀양성 함락

1592. 4.19.

김해

徐禮元

黑田長政

김해성 함락

1592. 4.21.

경주

朴毅長

加藤淸正

경주성 함락

1592. 4.24.

상주

李鎰

少西行長

이일 패주

1592. 4.26.

문경

申吉元

少西行長

신길원 패주

1592. 4.26.

탄금대

申砬

少西行長

신립 전사

1592. 4.23.∼28.

거창 신창 추풍령

趙儆

黑田長政

왜군 다수 사살

1592. 5. 2.

한강

金命元

加藤淸正

한강방어 실패

1592. 5. 7.

옥포

李舜臣

藤堂高虎

왜선 30척 격파

1592. 5. 7.

합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5척 격파 왜군 패주

1592. 5. 8.

적진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11척 격파

1592. 5.18.

양주

申恪

?

조선국 육전 첫승리

1592. 5.18.

임진강

金命元

加藤淸正

임진강방어 실패

1592. 5.22.

여강

元豪

毛利吉成

왜군 50명 사살

1592. 5.29.

사천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12척 격파

1592. 6. 2.

당포

李舜臣

?

왜선 20척 격파

1592. 6. 5.

당항포

李舜臣

?

왜선 26척 격파

1592. 6. 5.

용인

李洸

脇坂安治

삼도의 근왕병이 패전

1592. 6. 5.

회양

金鍊光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6. 6.

무계

金沔

村上景親

왜군 다수 살상

1592. 6. 7.

율포

李舜臣

來島通久

왜선 1척 격파

1592. 6.12.

철령

李渾

毛利吉成

조선군 퇴각

1592. 6.15.

예천부근

禹伏龍

吉川廣家

왜군 격퇴

1592. 6.18.

평양

尹斗壽

少西行長

평양 함락

1592. 6.19.

금화

元豪

島津忠豊

원호 전사

1592. 6.25.

운암

梁大樸

?

왜군 격파

1592. 6월말경

마진

孫仁甲

毛利輝元

왜군격파, 손인갑 전사

1592. 7. 8.

웅치

李福男

小早川隆景部長

조선군 패전

1592. 7. 8.

이치

權慄

小早川隆景部長

왜군 격퇴

1592. 7. 8.

한산도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73척 격파

1592. 7. 9.

금산

高敬命

小早川隆景部長

고경명 전사

1592. 7.10.

안골포

李舜臣

九鬼嘉隆

왜선 40척 격파

1592. 7. 1.일경

우척현

金沔

小早川隆景部長

왜군 격파

1592. 7.17.

평양

(祖承訓)

少西行長

조승훈 패주

1592. 7.18.

해정창

翰克誠

加藤淸正

조선군 패전

1592. 7.27.

영천

權應銖

福島正則

영천 수복

1592. 7월말경

의령

郭再祐

小早川隆景部長

정암진에서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현풍

郭再祐

羽柴秀勝휘하부대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영산

郭再祐

羽柴秀勝휘하부대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안성

洪季男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2. 8. 1.

평양

金命元

少西行長

조선군 패전

1592. 8. 1.

청주

趙善 靈圭

蜂須賀家政의 일부병력

청주 수복

1592. 8. 2.

경주노곡

金虎

石田康勝部兵

왜군 격파

1592. 8. 3.

거창부근

金沔

小早川隆景部將

왜군 격추

1592. 8.18.

금산

趙憲 靈圭

小早川隆景部長

조헌 전사

1592. 8.20.

경주

朴晉

多川內記

조선군 패전

임진왜란

1592. 8.21.

성주

金沔

桂元綱

조선군 퇴각

1592. 8.22.

봉화

柳宗介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8.25.

영원산

金悌甲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8.28.∼9. 2.

연안성

李延

黑田長政

연안성 대첩

1592. 9. 1.

부산

李舜臣

?

왜병의 해상활동제지

1592. 9.11.

성주

金沔

桂元綱

왜군 격파

1592. 9.16.

경성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추

1592. 9.20.∼30.

인동부근

張士珍

禾下重賢

왜군 격퇴

1592. 9.27.

노현 창원

柳崇仁

木村重玆

조선군 패퇴

1592.10. 6.

진주

金時敏

加藤光泰

진주대첩

1592.10.18.

삭녕

沈岱

伊東祐兵

조선군 패전

1592.10.30.

길주 장평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2.10. 9.∼11.10.

함흥 부근

成允文

鍋島直茂

왜군 격파

1592.11.12.

이원

李聖任

?

조선군 패전

1592.11. ?.

상주용화동

鄭起龍

?

왜군 격파

1592.12. ?.

중화

林仲樑

少西行長部將

조선군 패전

1592.12.10.

길주쌍포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2.12. 7.∼14.

성주

金沔

?

왜군 격파

1592.12월말경

수원독산성

權慄

宇喜多家部長

조선군 승리

1592. ?. ?.

함창

鄭起龍

?

왜군 격파

1593. 1. 8.

평양

(李如松) 金命元

少西行長

평양 탈환

1593. 1.19.

길주성 남문외

元忠恕

加藤淸正의 부장

왜군에게 피해를 줌.

1593. 1.23.

단천

具滉

加藤與左

왜군 격파

1593. 1.27.

벽제관 부근

(李如松)

宇喜多秀家

조명군 패전

1593. 1.28.

백탑교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3. 1.30.

죽산

邊以中

福島正則

왜군에게 피해를 줌.

1593. 2.12.

행주

權慄

宇喜多秀家

행주대첩

1593. 2.30.

상주

黃進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3. 3.25.∼27.

노원평 우관동

李時彦

宇喜多秀家 휘하군

왜군 격파

1593. 8. 6.

경주

(王必迪) 高彦伯

加藤淸正 毛利吉成

왜군 격파

1593. 8.29.

함안 웅천

安民寧 宣居怡

鍋島直茂

왜군 격파

1593.6.22.∼6.29.

진주

徐禮元

少西行長

쌍방 피해

1593.12. 2.

안강

高彦伯

加藤淸正

왜군 격파

1594. 3. 4.

당항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군 격파

1594. 9.29.

장문포

李舜臣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4.10. 1.

영등포

李舜臣

島津義弘

왜군 격파

1594.10. 4.

장문포

李舜臣

福島正則

쌍방간에 전과 없음.

1597. 7.15.

칠천량

元均

島津忠豊

조선군 패전

1597. 8.15.∼16.

고령

鄭起龍

小早川秀秋

왜군 격파

1597. 8.16.

남원

(楊元)

宇喜多秀家

남원 함락

1597. 8.17.

황석산성


加藤淸正

황석산성 함락

1597. 9. 7.

소사

(解生)

黑田長政 毛利秀元

왜군 격파

1597. 9.14.

금구

元愼

宇喜多秀家

왜군 격파

1597. 9.16.

명량

李舜臣

藤堂高虎

왜선 30척 격파

1597. 9.20.

보은

鄭起龍

加藤淸正

왜군 격파

1593.12.18.

광양

李光岳

少西行長

왜군 격파

1598. 1. ?.

도산성

(麻貴)

加藤淸正

마귀 패주

1598. 4. 8.

무주

李光岳 (李寧)

島津義弘

왜군 격파

난중의 사회상

왜란 중에 조선 군민의 가장 큰 괴로움은 식량난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조선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량난이나 군량미 부족 보다도 왜군과 맞서 싸울 전투 병력이 더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들어온 뒤에는 훈련된 병력의 부족 보다도 군량미의 부족이 더 무겁고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내원할 때는 병력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무기 등 군수 물자와 군량미도 함께 보내왔다. 그런데 군량미는 명군에 의해 그들의 진영까지 운반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명군의 급식을 위한 조선측의 군량미 조달은 적기에 공급되기가 어려웠다.

군량미의 수송은 육로와 해로 두 길을 택하였다. 명군이 내원한 이래 1594년(선조 27) 8월 일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은 주로 육로로 수송하였다.

이를 위해 싸움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나 부녀자 및 각처의 의병이나 의승군을 동원하였다. 또 수복 지역의 소나 말은 물론, 왕의 호위병과 동궁의 행차를 따르는 군인 중 말을 소유한 자도 차출하여 군량미 운송에 나서게 하였다.

해로는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두번째 내원하면서부터 많이 이용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하여 각처에 산재한 선척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궁가(宮家)나 내수사(內需司)의 배를 빙자하여 거절하는 예가 많아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민력이 다하여 전선을 만들 수 없는 형편에서 운량선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의주에 쌓아둔 명나라 군량미를 육로나 해로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운송 도중에 많은 양이 소모되었고, 인력이 부족하고 수송 수단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보낸 양곡으로 명군을 급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량을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정부는 국내 양곡을 조선 관군 보다는 명군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하였다. 그러나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 데는 애로가 컸으며, 민간인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군량을 충당할 수 있는 길은 전세와 곡물작미·노비신공작미·모속(募粟)·무속(貿粟)·둔전소출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정부의 필요 경비를 제한 나머지는 모두 군량으로 충당되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전세는 경작할 종자가 없는데다가 전쟁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경지 면적의 감축으로 격감되었다. 납속 사목(納粟事目)에 의한 모곡(募穀)은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기는 했으나 모속 관료의 비행으로 관(官)으로 납부되는 양은 많지 않았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의 끔찍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왜란 전에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된 것도 노동력의 감소에 큰 원인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1594년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 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이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수신(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임진란 초기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가닥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 납속 사목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 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이산겸(李山謙)과 김덕령(金德齡)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 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산겸과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 활동을 하여 중망이 높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 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결과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新書)』를 얻어서 절강 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전적(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丁酉再亂)

1597년

(선조 30)

◈ 일본이 임진년 1차 침입이후 1597년(선조 30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한 2차 전쟁.

++++

정의

1597년 임진왜란 중 화의 교섭 결렬로 왜군이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을 다시 침입한 전쟁.

개설

임진왜란 중 조선의 강력한 저항과 명(明)의 원군으로 인해 전쟁이 장기화되자 왜군은 화의가 진행되고 있는 틈을 타서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면서 정유재란이 발생하였다. 전라도 지역은 이전과 달리 왜군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고, 화순 지역에서는 왜군의 침입과 약탈에 맞서 곳곳에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왜군은 1596년(선조 29) 9월 화의 교섭이 깨어지자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 다음 해인 1597년 3월 중순 무렵부터 차례로 15만에 이르는 대군이 건너왔다.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산성(金烏山城)·공산산성(公山山城)·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명의 원군 5만 5000명 역시 양호(楊鎬)를 경리(經理)로 삼고,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 출정하였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이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하여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경상도·충청도·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왜군은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사천(泗川)·고성(固城)·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순천(順天)·김해(金海)·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군은 밀양(密陽)·초계(草溪)·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는 왜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경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잔학상에 대하여 강항(姜沆)[1567~1618]은 『수은집(睡隱集)』에서 “정유재란에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여러 왜장들에게 명하여 코를 베는 것으로 수급을 대신하였으므로 왜졸들은 아국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빈번히 죽이고, 그 코를 베어 이것을 소금에 담아서 보냈다”라고 기록하였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도 『징비록(懲毖錄)』에 “이때 적이 삼도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분소하고 백성을 살육하였으며, 무릇 아국 사람을 보기만 하면 모조리 코를 베어서 공으로 삼고 겸하여 시멸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전라도 백성들이 모두 피난을 떠나야 했고 산하가 온통 불탔다. 전라도 지역은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의 침범을 피할 수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화순현 역시 정유재란의 참화를 입고 현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한때 능성현에 소속되기를 민원으로 청할 만큼 큰 고통을 겪었다. 

화순 지역에 왜군이 침입한 것은 1597년 7월 말부터이며 순천과 보성 방면에서 침입해 왔다. 왜군이 모후산의 산록을 거쳐 동복 지역으로 진출하자, 박광전(朴光前)[1526~1597]이 송홍렬(宋弘烈)·박사길(朴士吉) 등과 함께 적벽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박광전 의병 부대의 승전으로 왜군은 일시 순천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왜군은 다시 동복현으로 내습하여 유린한 후 화순현을 침입하였다. 왜군의 약탈과 참화를 피해 최경운(崔慶雲)이 격문을 띄우고 향민과 가솔 노비 등 500여 명과 함께 오성산성에 올라 항전을 벌였으나 오성산성이 함락되면서 200여 명의 향민이 산화하였다. 

한편 보성 방면에서 침입한 왜군은 능성현 외곽에 위치한 예성산성에 육박하였다. 이에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의 막하에서 싸웠던 김대인(金大仁)[?~?]이 거사(居士) 김명철(金命哲) 및 향민과 함께 식량과 군비를 갖추고 완강히 대항하였다. 왜군은 장기간 산성을 포위하고 있으면 식량과 식수의 고갈로 스스로 항복할 것으로 여겨 장기전을 펼쳤으나, 김대인의 기습과 완강한 항전이 계속되자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의의와 평가

정유재란은 화순 지역에 혹심한 피해를 주었으나, 왜군의 공격과 수탈에 직면하여 굴하지 않고 양반 유생과 향민들이 자발적으로 의병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를 반영하듯이 『화순 읍지』·『능주 읍지』·『동복 읍지』 등에는 정유재란과 관련된 열녀·효자 등의 기사가 많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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